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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광 -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도쿄 일기 & 읽기
김정운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 오사카의 어느 지하상가 구석, 공중전화에서 나는 전화를 걸기 위해 서 있었다.
핸드폰 필수인 시대에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는 것은 묘한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주었다.
교토에 놀러가고 싶다는 나의 고집 때문에 N은 그 먼 도쿄에서 비싼 기차를 타고 날아오는 중.
먼저 오사카에 도착한 나는 심심하기도 하고, 지리도 몰라 길 잃어버릴까봐 역 주변만 돌면서
놀다가 지루해졌기 때문이다. 동전 투입구에 돈을 넣기 전에 손바닥에 펼쳐본 일본의 동전들을
쳐다보았다. 낯설다. 원래 그렇다. 매일 쓰는 화폐가 아니면 낯설다.
그러다가 와르르 바닥에 동전들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런, 제길.
나는 허겁지겁 동전들을 줍기 시작했다. 500엔짜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하리라.
그렇게 혼자 바둥대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지나가면서 쳐다보았다. 나를 지나쳐 몇 걸음 가던
그 아저씨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줏은 100엔을 내 손에 주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과 기분으로,
"..... 아리가토-고자이마스....."
아저씨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나는 두 가지의 충격을 동시에 받았다. '아리가토-고자이마스' 에 대한 대답으로 '천만에'라는 그
어떤 제스처나 대답이 아저씨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과, 일본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의 무뚝
뚝한 표정이었다. 일본은...길을 걸어가던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살짝 미소 띈 표정을 보여
주는데(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다), 자신이 먼저 선행을 하면서 뚱한 표정은 뭐람.
내 반응이 먼저 문제였을까? 보통은 활짝 웃으며 정말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니까? 솔직히 말하면, 난 아저씨가 가던 길을 되돌아 오면서까지 동전을 주워주은 것에 놀라던
중이라 그런 표정관리는 못 했었다,라는 핑계와 평소 나는 원래 표정이 잘 없다.(긁적)
이런 것이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일본인의 친절과 과한 웃음 띈 얼굴은 이미 전세계에 알려진
당연한 '문화'다. 간사이 공항의 경찰 제복을 입은 아저씨도, 오사카역의 안내원 아저씨도 항상
부드러운 표정으로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준다. 호텔 데스크 직원이나 지역정보안내소 직원들에게
내가 심술굳게 일부러 영어로 말해도 그들은 (삐질땀을 흘리면서까지)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한 번은, 도톤보리에서 오사카의 명물 '타코야끼'를 사서 먹은 적이 있다.
원래 뜨거운 것을 못 먹는 내가 그걸 그냥 한 입에 삼켰다가는 당장 구급차에 실려갈지도 모를 일.
그래서 타코야끼 전부를 반으로 쪼개 뜨거운 김이 공중으로 흩날려가 식혀 먹으려고 N과 함께 실외
휴게실로 향했다. 그 때, 출입구에서 마주오던 젊은 사람들과 부딪힐 뻔했는데 그들은 당연스레,
"스미마센-"
라고 말했다. 나는 당연히.....한국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같이 '스미마센'이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아마도 그 젊은 남자는 속으로 나를 욕했을지도 모른다. 예의 없다고. ㅡ.,ㅡ...
하지만 한국에서는...서로 사과 안 한다. 부딪혔어도 부딪힌 사람만 하지...쩝.
한 번은, 일본의 사업가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토종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제 집 드나들 듯 해서 그런지 한국에서의 습관을 오히려
일본에서 자랑스럽게(?)하는, 자기 자신이 '한국인과 더 가깝다'라고 말하는 이상한 친구였다.
버스에서 핸드폰으로 전화통화를 하는 그 친구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아, 그 민망함이란. 거기다 전화내용이 나 때문에 취소를 하는 내용. 쪼잔한 자식, 일부러 나 들으라고..
일본의 어떤 교육이, 어떤 문화적 정서가 그들로 하여금 (가식적일지라도, 아니 그래서 더 슬픈) 타인을
향해 그런 맹목적인 웃음과 친절을 베풀게 하는가? 그 궁금증은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직.간접의 경험으로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 구체적으로 머리 속에 정리되어
가기는 처음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한 문화심리학자의 피부에 와 닿는 경험
에 의한 '일본 문화 해부하기'는 왜 그들이 안쓰러울 정도로 타인에게 친절하는가를, 왜 고이즈미 총리가
부시 대통령 부부 앞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춤을 추며 같은 동양인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는지를, 어째서
일본 남성들은 보일듯 말듯한 애니나 만화속 여주인공의 하얀 빤스에 열광하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물론, 저자 주관적인 견해와 시각, 관심분야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
마조히스트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혹은 타인의 힘을 빌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 즐기는 자를 우리는 흔히 그렇게 부른다.
그 반대로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사람을 '새디스트'라고 한다. 농담삼아 '넌 마조끼가 있어~' 라거나
'너 새디스트 아냐?'라고 쉽게 입에 담는 그 말들이 사실은 그렇게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마조히즘, 그것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편하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자식들을 괴롭히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인류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기존의 틀과 문화, 아버지 세대의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반항하며 죽여나갔다. 그 '상징적 살해'의 업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은 근대문화(서구문화)를 비교적 큰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물론, 일본도 처음에는 무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바닷물이 밀려오듯 들어오는 서구문화를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근대문화를 앞장서서
일본에 뿌리 내리려고 안간힘을 쓴 것은 노랑머리 백인들이 아니라 바로 일본인, 자국민이었다.
몸을 예로 들어보자. 외부에서 들어오는 병에는 강력히 반발하고 대항하며 그것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몸 안에서 발생되는 암세포는 왠만해선 막을 길이 없다.
일본이 그렇다. 그들이 그렇게 빨리 서구문화를 흡수하고 더 나아가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그에 앞장선 것이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프랑스 대혁명의 시민들처럼 루이 16세의 잘린 목에서 나오는 피로
몸을 씻으며 '살부의 죄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문화 발전과 마조히즘과의 관계란 뭐란 말인가?
지나칠 정도의 친절과 사과를 함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오히려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그 교활함을 탓하기 전에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마조히즘에 젖어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나를 생각해서 잡았던 일정을 나 때문에 취소하게 된 저 일본 사업가 친구는 일본식으로 나에게
죄의식이나 미안함을 유발한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한국식으로 끄집어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선 확실히 그는 한국인답다. 한국인은 마조히즘적이 아니라 새디즘에 가까운 형태로 상대의 잘못
을 돌려서 질책하니까. 나처럼 직선적인 녀석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미움받기 딱 좋지만.
어릴 때, 즐겨보았던 애니가 있었다. 여전사들이 우주에서 악당들과 싸워서 늘 통쾌한 승리를 내는데, 그녀들.
그래, 그녀들은 비키니 수영복에 가까운 복장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남자와 여자의 신체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인 나이에 보았다. 그래서 아무 거부감이나 이상한 상상(?)없이 볼 수 있었고 그녀들을 (전투사로써)
동경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 수 많은 만화에서 여주인공들은 늘 과한 글래머이거나 하얀 빤스를 살짝
보여주는 청순한 여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나 성격은 너무 청순한데 가슴은 대빵 크다. 그리고
성격과는 달리 늘 빤스가 보이는 짧디 짧은 스커트를 입고, 마릴린 먼로도 아니건만 그들 주위는 항상 바람이
불어제껴 빤스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확인까지 시켜준다. 그럼 남자주인공들이 항상 그 멋진 여주인공과
잘 되는가? 아니다. 남자주인공은 비참할 정도로 짝사랑만 하거나 무시받기 일쑤다. 여기서도 일본인들이 좋아
하는(?) 마조히즘이 들어간다.
이 나이 때 또 좋아했던 것이, 로봇영화 중 남주인공을 무지하게 괴롭히는 애니가 있었다.
남주인공은 우주에서 악당과 싸우기 전에 로봇으로 변하는데, 꼭 그 과정은 고문 같았다. 역시나 빤스만 입은
남주인공이 어떤 캡슐에 들어가면 가시가 왕창 박힌 채찍같은 덩쿨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온 몸을 휘감아
그로부터 하여금 늘 비명을 지르게 했다. 아니,왜? 대체 왜? 좀 편하게 로봇으로 바뀌면 안 되나?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면서까지 변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그 빨간 빤스를 입은 남주인공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어떤 성적 흥분이라도 느끼길 원했는가? '유방'이란 단어도 '남근'이란 단어도 몰랐던 그 어린애한테?
기억력도 좋지 않은 내가 23,4년 전 봤던 애니의 그 가학 혹은 자학 묘사가 왜 그랬는지를 억지로 끄집어내자면
이랬던 것 같다. '대의를 위해서는 너의 작은 희생이 필요하다' 뭐 이런. 그러니까 그 남자주인공은 매번 지구를
지키려면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는 이야기. 그 장면이 어린애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이나 하고 만들었는지,원.
일본은 곳곳에 은근슬쩍 마조히즘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게 한다. 어릴 때 부터.
물론, 이 책이 주구장창 빤스와 마조히즘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문화 속에 자리잡은 정서의 뿌리를 쫒아간다. 저자의 유머러스한 필체, 쉬운 서술은 단번에 한 권을
먹어치우는데 가속도를 붙인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칼라 사진들도 수두룩하다.
내가 왜 굳이 빤스와 마조히즘만 가지고 이야기하냐면, 이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 덕분에.
몇 년 전, 일본 친구의 지나치게 한국인다운 언행들은 숨막히도록 지긋지긋한 일본문화로부터 일시적이라도 벗어
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과, 어릴 때 내가 보았던 애니에서 얻은 충격으로 나는 비키니 입은 여성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거나 빤스만 입은 남자들은 어딘가 약해 보이는 착각을 하게 된다거나 등의 부작용 말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을 보면 무릎꿇고 찬양하며 기관총을 꼭 선물해야 할 것 같고,
빤스만 입은 남자들을 보면 이불로 싸서 구해주어야만 할 것 같다. 어디로? 그건 모른다.
때로는 내 환경과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접함으로 인해 무의식속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었던 나를 만나게 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면 해답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문제를 알면 안개는 걷히고 만다.
사실, 일본과의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까 싶어 사서 본 책이, 예상치도 못한 만족을 주어 읽는내내 즐거웠다.
어떤 나라의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 나라 문화를 알아야 하고, 그 나라를 알고 싶으면 그 나라 사람을 알아야 한다.
책 표지에 써 있는 이 문구만큼 일본을 적절히 표현한 것을 발견한 적이 없다.
일본은 모든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