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

 

 

    【기억 재생기】 -  다시 보고 싶은 20세기 

      1996년경, 봄과 여름 사이 

 

 

     마음 잡고 공부 좀 하겠다고, 친구와 공부방에서 공부를 한 후 늦은 밤, 글쎄 11시가 넘었을까.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당연히 평일 밤 그 시간, 버스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 어느새 나는 버스를 전세낸 것처럼 혼자 타고 있었다.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까지는 아직도 많이 남았고, 평소 안 하던 공부를 하니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전지 없는 인형처럼 나는 앞.뒤로 고개를 움직이고 때로는 창문에 머리를
     쾅쾅 부딪히며 졸음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귀소본능은 저 옛날 김유신 장군의 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나 역시 졸면서도 가끔씩
     눈을 번쩍 떠서 '여기가 어디쯤인가'하고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수마의
     힘에 이끌려 현실과 꿈을 신나게 왔다갔다 할 때쯤, 멀리서 메아리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학생~" 

     나는 비몽사몽으로 눈을 뜨고 둘러보았다. 버스에는 나 혼자 뿐인데, 누가 부르는 거냐.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학생~ 집이 어디야? 어디서 내려~?" 

     아...버스기사 아저씨.
     내가 심하게 졸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집을 지나쳤나 걱정이 되었나 보다.
     나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순간 허걱거리고 말았다. 진짜 지나쳤나?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집이 어디야?" 

    "아....음....(이제 정신차리고) 다음다음 정거장이요.." 

    나는 그 때 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다. 아저씨는 자기 자식 같아서 혹시나 얘가 집에 못 갈까봐
    걱정되서 물어본 거 같은데, 아마도 지나쳤어도 집에 데려다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 마음이 느껴지자, 울트라 초강력 까칠한 성격이 최고조에 달했던 10대의 어린 나는 내릴 때
    '감사합니다' 라든가 '수고하세요'라는 등의 인사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고 무심코 생각했던 것이다.
    아,그런데 버스 아저씨한테 생전 그런 인사를 해본 적이 없던 나로써는 그게 너무 떨리는 거다.
    내릴 때는 다가오고, 문은 열렸는데, 아 이런 제길...ㅜ_ㅡ
    결국 나는 용기가 없어서 인사도 못 하고 얼른 내려버렸다. 

    아, 이런 빌어먹게 작은 새가슴이여~ 

 

 

    그 이후, 친절한 아저씨를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씩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여전히 가슴이 콩닥콩닥 거린다.
    '내가 탈 때, 아저씨가 인사하던데, 나도 같이 인사할걸' 
    '내일 때 만이라도 인사하고 가야지'
    그러나 여전히 나는 가슴만 벌렁벌렁한 채 그냥 내리고 만다....OTL (털썩) 

 

    누군가한테 도움을 주는 것도, 감사함을 표하는 것도 때로는 용기가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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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7-1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6년...저는 96년 대학교 새내기였는데..엘신님은 버스에서 교복입고 졸고 계셨군요^^ 상상만 해도 귀엽습니다. 친절한 아저씨 만나면 인사해 주세요! 꼬옥^^

L.SHIN 2010-07-17 23:02   좋아요 0 | URL
헙...블랑카님은 저랑 나이차가 별로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계산하니 굉장히 차이나
보이는 것은..ㅋㅋㅋ 하지만 저 때가 18살쯤이었으니까, 결국 계산해보면 우리 별로 차이나지
않는군요.(웃음)

마노아 2010-07-17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릴 때 곧잘 인사하곤 했어요. 보통은 손님이 인사하면 기사님도 같이 인사해 주시는데, 어느 땐가 기사님이 인사 안 해서 삐졌어요. 그날 손님 나밖에 없었는데 말이에요. (ㅡㅡ;;)

L.SHIN 2010-07-18 01:05   좋아요 0 | URL
아마, 그 아저씨는 나와 같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인사하는 손님은 처음 보는데 당황해서 답인사 해줄 타이밍을 놓친...ㅎㅎㅎ
아니면 인사를 받을 수 없을 만큼 화장실이 무진장 급했다던가..ㅎㅎ

Seong 2010-07-18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스 타면 항상 창문을 닫는 버릇이... 예전에 버스에서 내리는데, 아저씨가 호통을 치셨어요. "야! 창문 닫어! 그냥 내리면 그거 누가 닫어!" 소심한 저는 그 이후론 항상 창문을 잘 닫는 착한 어린이가... 이번에도 댓글이 산으로 갔군요... ㅠㅠ

L.SHIN 2010-07-18 16:19   좋아요 0 | URL
아아, 에어컨을 켜고 있었나 보군요. 그런데 학생이라고 막 반말 하는 아저씨는 싫어요.
저도 버스를 타면 제가 열었던 창문은 다시 닫습니다만,가끔은 남이 열어둔 창문도 닫고 마는..;-_-

stella.K 2010-07-1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그런 적 많지요.
어떤 땐 인사를 하고 내린다는 게 말 보다 몸이 앞서
먼저 내려놓고 말은 입에서 뱅뱅 돌았던 적도 있어요.
습관이란 게 참 무서워요. 울나라 버스는 탈 때도 빨리 타고,
내릴 때도 빨리 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L.SHIN 2010-07-18 16:2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승객이 앉기도 전에 출발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죠.
한국인들의 균형감각을 키운 건 버스 아저씨? ㅡ.,ㅡ
아, 스테님의 같은 댓글이 2개라서 하나는 삭제합니다.^^

비로그인 2010-07-1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은 때를 놓치면 안되는 말.

L.SHIN 2010-07-18 16:22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뭐랄까, 그런 인사하지 않아도 서로 통한다는 것도 신기해요.
때로는 말이죠.

순오기 2010-07-2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엘님이 새가슴이었군요.
하지만 지금은 인사 잘하는 씩씩한 외계인이 되신 거죠?^^

L.SHIN 2010-07-21 20:53   좋아요 0 | URL
아니요..아직 그것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