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실패가 한 이상주의자의 실패를 넘어서 실낱 같던 희망의 절멸로 느껴진다, 고 누군가 쓴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 저금통을 보낼 때도, 그가 (대통령도 아니고)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도 나는 그게 '이상'인 줄을 몰랐다. 되어가고 있었고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 편이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이제 맡겨두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통령까지 만들어줬는데 왜 이상한 결정들을 하고 있는지, 왜 자꾸 책 잡힐 말실수를 하는지, 왜 프로답지 못한지, 참다 참다 이제 나도 돌아선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게 다 '이상'의 일부인 걸 몰랐던 것이다. 한번도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뼈를 산산조각내는 죽음으로 실패를 증명하고서야 우리가 오랫동안 꿈을 꾸었던 것임을, 그 모든 것들이 이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의 나약함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연민이 생겼다. 그 다음 그런 내가 환멸스러웠다. 공허했다. 그리고 천천히 슬퍼지다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내 슬픔의 이유를 몰라 그 슬픔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다 나를 무너뜨린 말이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울기 시작했다.우린 실패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를 뽑지도 않았을 텐데. 이루지 못한 꿈으로 아껴두고 좋아하고 안타까워하고 가끔 한계를 지적하면서, 계속 꿈만 꾸면서, 계속 공모만 하면서, 계속 한탄만 하면서, 꿈만은 그냥 둘 걸 그랬어. 우리 꿈은 죽어버린 거야. 우리가 졌어. 우리가 망쳤어. 가장 행복했던 때를 가장 지워버리고 싶을 때의 고통. '그의 한계가 우리의 한계였다'는 누군가의 문장에는 눈이 있었다. 그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나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며칠간 슬픔에 익숙해지고 이제 이성이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제, 시청 앞으로 갔다. 어쩌면 나의 슬픔은 어떤 상징에 대한 것. 덤덤하게 일단락을 짓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또 알았다. 대한문 앞에서 누군가 나눠준 근조 리본, 그걸 받아 들고 덜덜 떠는 내 손은 상징이 아니었다. 그때 탄핵 반대를 외칠 때, 나는 근조 리본 따위를 달기 위해 같은 장소에 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어이 한 번 더 울고 나서야 그 리본을 달았다. 전경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근조 리본을 다는 모욕을 견디면서,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의 거대하고 복잡하고 잡스러운 슬픔에 대해서 생각했다.
슬픔은 의견이 아니라 감정이다. 감정은 이성적이지 않다. 눈물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언제쯤 어떤 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금방 툭툭 털고는 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다만 내일은 회사 동료들과 연차를 내고 영결식에 가기로 했다. 모이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휴가를 냈을 것이다. 뙤약볕 아래 제 신체를 고통스럽게 하면서 일말의 책무감을 덜어내려는 얄팍한 자기 위안일지 모른다. 후회일지도, 후회하는 척일지도 모른다. 순수한 안쓰러움일지 모른다. 일생일대의 작별일지도, 분위기를 탄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우린 각자 다른 이유로 울 것이다. 옆 동료는 고사하고, 자기가 우는 이유도 모르면서 울게 되겠지. 그렇게 어리석게 울기 위해서 우리는 죽은 이를 추모하러 간다. 이렇게 여럿이 함께 어리석은 것은 참 위험한 일. 위험하게 울기 위해 우리는 추모를 하러 간다. 이성적이지도 일관되지도 못한 어리석은 이들끼리 모여 그저 울기 위해서. 뜨겁게 울기 위해서.
*슬프거나 담담하거나, 아프거나 씁쓸하거나, 어색하거나 몹시 불편하거나, 모두 다른 마음인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감정과 이성을 현명하게 구별할 수 있을 테고, 누군가는 감정의 과잉을 통제하지 못해 몸부림을 치겠지요. 며칠만이라도 그런 마음을 우리 서로 내버려두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