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러니까 난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고 돌렸더랬다. 근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세탁기가 어느 순간 정지 상태로 공회전하는 것 같더니만, 결국 에러 메시지를 남긴 채 장렬히 서버렸고 난 이 급작스러운 사태에 허둥지둥 매뉴얼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이 메시지는 '급배수가 막힘' 이란 뜻이라니 물을 빼고 필터를 청소하고 다시 돌렸다. 아. 같은 시점에 다시 에러 메시지와 함께 장렬히 서고. 이렇게 매뉴얼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몇 번 시도하고 나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으나.. 세탁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둘러 AS 센터에 전화했으나 토요일은 1시까지만 접수를 받는다는 기계음이 들리고. 좌절.

 

결국 그 탓인지, 기진맥진하여 어제 하루는 소위 말해 공쳤고... 꿈자리도 사나왔다. 애시당초 꿈을 잘 꾸지 않는 나인데 어제는 길게 꿈을 꾸었다. 우리집에 사람들이 놀러와 마구 어지럽히며 노는데 나는 뭔가 자꾸 어지럽고 잠만 오고 무기력하여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보니 아침이었고 (꿈에서 ㅜㅜ) 그런데도 우리집에 사람들이 여전히 가득한 거다. 그러니까 다 여기서 잤다는! 놀래서 이 방 저 방 다 기웃거리는데 그들의 잔해가 어지러이 놓여 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몸만 빠져 나가고.. 나는 이걸 언제 다 치우지 라는 고뇌를 안은 채 속상해하다가... 깼다.. 머리가 너무 아팠고 심장은 벌렁거렸고... 그렇게 뜨거운 물에 들어간 깨구락지 마냥 (이런 표현...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나면 써서는 안되는 표현인데..쩝) 침대 위에 망연자실, 벌러덩 누워 있다가 10시 쯤 겨우 일어나 없는 입맛을 되살려 토스트를 굽고 사과를 깎고 커피를 내리고.. 겨우 아침을 해치웠다.

 

내일 AS 센터에 전화걸어 해결해달라고 하면 되지 뭐. 라고 생각하면서 어쨌든 평안을 되찾고 싶었으나.. 이 생각이 머리 한 구석에 껌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 거다. 에휴. 그래서 일요일도 계속 찜찜한 상태로 계속 버티고(!) 있다. 생활인은 힘들어. 전자제품 고장나니 세상만사가 힘들어보이는 것은... 문명의 폐해인가.

 

 

 

 

 

 

 

 

 

 

 

 

 

 

 

 

게다가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냉장고에 들어찬 고기가 싫어져서 지금 끼니를 때우는 것이 어려운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기에 의존해 살았는가를 여실히 느끼고 있다. 그냥 밥때가 되면 가장 쉬운 게 고기를 꺼내 살살 구워서 먹는 거였구나.. 이걸 못 먹겠다 싶으니 도대체 뭘 먹어야 하지 하다가 그래도 먹을까 하다가.. 아 근데 방금 읽은 부분이 걸려 뭐 이런 생존적 고뇌를 안고 요 며칠을 살고 있다. 냉장고도 고장났는데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지경. 오호. 통재라.

 

이 책도 서문이 무지하게 길다. 길다기보다는 여러개다. 처음에 내고 10년 뒤에 또 내고 또 10년 뒤에 낼 때마다 서문을 썼으니. 처음 책을 낼 때 태어난 둘째가 20년 뒤엔 채식 레스토랑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육식의 성정치'란 무엇일까?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성애화하고 여성화하는 태도이자 행동이다. (p17)

 

명확하다. 이 책은 아마도 이 정의를 구체화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명확하다. 책제목을 보고 이건 뭐지? 라고 생각했던 또 하나의 고뇌가 이 한 구절로 그냥 없어져버렸다.

 

 

모든 동물 가공 식품을 먹지 않는 완전 채식주의Veganism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상상하는 채식주의는 우유와 달걀조차 먹지 않는 식사다. <육식의 성정치>는 동물 암컷이 재생산 과정에서 당하는 착취를 표현하는 특수 개념인 '여성화된 단백질feminized protein'을 사용한다(이를테면 우유와 달걀은 암컷의 몸에서만 생산된다). 대부분의 식용 동물은 다 자란 암컷이거나 어린 동물이다. 동물 암컷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때에 이중으로 착취당한다. 글자 그대로 고깃덩어리다. 동물 암컷은 자기의 여성성 때문에 억압당하고 대리 유모가 된다. (p40)

 

 

몰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글자로 박혀 있으니 동물의 암컷과 사람의 여성이 다를 바가 없다는 전제가 생기고 그렇다면 나는 우유와 달걀도 먹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냉장고 안에 있는 15구짜리 달걀과 그제인가 주문한 우유가 생각난다. 난 이것들로 프렌치 토스트를 해먹고자 했다. 식빵에 달걀과 우유를 듬뿍 묻혀 구워낸 토스트 그것. 그러니까 내 뇌에서 음식이란 걸 생각하면 이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인데, 나는 이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있는 것이다.

 

 

동물권과 페미니즘은 모두 먼 미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붙박이 불침번을 필요로 한다. 만약 두 경우에서 모두 억압과 근원과 목적지가 지배라면, 견실한 행동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무정형 착취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작가 카슨 매컬러스Carson McCulers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만진 모든 것은 다른 존재들이 겪은 고통의 결과다...(중략)... 캐럴 애덤스는 제도화된 폭력을 받아들이는 우리 삶의 핵심에 다다른다. 동물 학대를 지탱하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먹여 살리는 논리적 근거 말이다. (p61)

 

 

자꾸만 공감이 가게 되고... 지금 1부 4장을 읽고 있는데.. 이 책 읽는 동안엔 적어도 고기 먹긴 글렀다 싶다. 일단 1부 다 읽고 다시 페이퍼 올리기로 하고.. 이제 다시 세탁기 고장과 육식 못먹는 상태의 점심에 대한 존재론적 고뇌로 되돌아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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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1-10 15: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탁기 반쯤 고장난 1인으로서 공감이 많이 가는 페이퍼입니다. 저도 육식의 성정치를 읽으면 고기를 더욱 덜 먹게 될거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 그 다음 순번에 있는 책인데.. 순번이 오긴 오겠죠?;;;
다 잘 됩니다~ 마음을 쓰나 안 쓰나 결과는 다 잘되니 마음 푹 놓고 남은 주말을 즐겨 보아요:)

비연 2021-01-10 15:17   좋아요 2 | URL
붕붕툐툐님.. 위안이 많이 되는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 세탁기라는 문명의 이기가 절 이렇게 고뇌스럽게 할 줄 몰랐는데 참으로... 고쳐지겠죠. 그렇게 믿고 잘 지내보기로 ㅎㅎ <육식의 성정치>는 잘 쓴 책임은 틀림없는 것이,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깃들게 된다는... 그러나 읽어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어쨌든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는 내용인 듯. 육식을 멀리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지라도ㅜ 좋은 일요일 보내세요, 붕붕툐툐님!

수이 2021-01-10 15: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막 다 읽었는데 책을 버리고 고기를 선택했어요. 훌륭한 책인데 읽는 내내 뇌는 다 알겠는데 강하게 거부 반응이 일어나더라구요. 그래서 읽고 고기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이 구절들이 제게 와닿지 않아서 죄책감 없이 고기를 먹어버렸다는. 동물과 고기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마땅히 알면서도 이게 행동까지 나아가진 않더라구요. 아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싶어서 좀 좌절하다가 일단 좀 더 공부하자 싶은 마음에 한쪽으로 치워두었어요.

비연 2021-01-10 16:10   좋아요 1 | URL
헉.. 이미 다 읽으신!!! 저도 어쨌든 먹기는 하는데 마음 한켠 이전엔 없던 죄책감이 생긴다고나 할까..ㅜㅜ 좀더 읽어봐야 할 듯요~ 워낙 고기를 좋아해서 확 취향을 바꾸긴 힘들 것 같고.. 좀 생각하며 먹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붕붕툐툐 2021-01-10 20:01   좋아요 1 | URL
잘하셨어용~~ 수연님이 그러셨다니 위로가 되네용~~ 저는 억지로 더 안 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요요 오더라구요~ 서서히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받아 들여지면 그 때하면 되죠~!! 이번 생애 안되면 다음 생으로..ㅋㅋㅋㅋㅋ

비연 2021-01-10 20:35   좋아요 1 | URL
븅븅토토님... 흠.. 다음 생에 해도 되겠....죠....?? ^^;;;;;;

붕붕툐툐 2021-01-10 20:39   좋아요 1 | URL
아.. 비연님, 당근입니다!! 나에게 너그러운게 최고예요~ 그 후에야 다른 존재들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으니까요!!^^

고양이라디오 2021-01-14 10:42   좋아요 1 | URL
저도 채식주의를 지지하고 채식주의자를 존경합니다만... 저도 이번 생에 채식주의는 힘들 거 같다는...

비연 2021-01-15 01:57   좋아요 0 | URL
고양이라디오님... 저도 사실은.. 이 책만 벗어나면 다시 육식의 세계에 머무르게 될 듯한.. 넘 스스로를 강박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ㅠㅠ

scott 2021-01-10 15: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강추위에 비연님 세탁기 까지 . 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부디 as 센터에서 고쳐주시길 바래요

비연 2021-01-10 16:09   좋아요 2 | URL
으흐흑. 고쳐주시겠죠? 그냥 믿고 편히 쉬려 해요 ㅠㅠ

유부만두 2021-01-10 16: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세탁기도 (아마 급수관과 배수관이) 얼었어요. 빨래는 쌓여가고 내 맘은 에헤라 ... 에요. 이럴땐 게으른 성격이라 견딜만합니다;;;

비연 2021-01-10 16:42   좋아요 1 | URL
아 요즘 세탁기가 말썽 부리는 시즌인거군요 ㅠㅠ 그러려니 하고 견뎌야하겠다는... 쩝쩝;;;;;

붕붕툐툐 2021-01-10 20:02   좋아요 0 | URL
게으른 성격 소유자 여기도 한 명 추가요!!ㅎㅎ

고양이라디오 2021-01-14 10:40   좋아요 1 | URL
저희 세탁기도 같은 증상이었는데 아마 얼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ㅎ

비연 2021-01-15 01:58   좋아요 0 | URL
다행히 AS를 부르지 않고도 해결이 되었어요! 아주 살짝 얼었었나 봅니다 :)

레삭매냐 2021-01-10 1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곳곳에서 빨래 전쟁이 벌어졌는데
비연님네 댁에서는 아예 세탁기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시츄라니...

얼마나 스트레스에 시달리셨으면
꿈에까정!

모쪼록 책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
보시길 조심스레 권해 봅니다.

비연 2021-01-10 20:32   좋아요 1 | URL
책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했는데 <육식의 성정치>를 읽으면서 더 심란해진 ㅋㅋㅋㅋㅋㅋ
아 다른 책을 읽어야겠어요 ㅎㅎ

공쟝쟝 2021-01-10 1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앍 달았던 댓글이 사라졌어영 ㅠㅠ
비연님의 와인과 스테이크 사랑을 알기에 저는 눈물이 납니다 ㅠㅠ

붕붕툐툐 2021-01-10 20:0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와인과 스테이크의 조화가 갑자기 확 와닿습니다...

비연 2021-01-10 20:32   좋아요 1 | URL
눈물...ㅜㅜ 와인 안주로 이제 뭘 먹어야 할까요. 치즈도 안되고..
견과류와 과일로만? 흐미...ㅜㅜ

다락방 2021-01-10 2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앗 비연님은 열심히 읽는 중이시고 수연님은 다 읽으시고.. 저는 주말 내내 조카들하고 노느라 독서랑 세이 굿바이 였어요.
세탁기 빨리 고쳐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조카들 돌아간 저녁, 와인과 김치찜(?) 먹고 있어요.. 육식의 성정치는 좀 더 있다가..

비연 2021-01-10 20:33   좋아요 1 | URL
와인과 김치찜... 뭔가 부조화스럽지만 또 조화로운.. 어쨌든 부러운.
<육식의 성정치>는 좀 이따 읽는 게 좋을 것 같은... 육식을 멀리 하게 되니 먹을 게 없어지는.

syo 2021-01-15 0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비연님 무의식에 영향을 크게 끼치긴 끼쳤나봐요.
고장 난 건 세탁긴데,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냉장고‘야....

비연 2021-01-15 01:49   좋아요 1 | URL
헉.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 이런. 요즘 <육식의 성정치> 때문에 냉장고 안의 고기를 자꾸 생각해서인가....ㅠ 내일 pc 들어가 고치리라. 아 나의 무의식..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