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식이 별로 없어서인지, 번역이 미흡해서인지, 아뭏든 이 책은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다. 뭔 말인지 모르고 읽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론에서 보았던 그 중요한 주제의식들에는 경의를 표하는데 그 이후엔 정말 가시밭길이다. 정치학이나 사회계약론이나 등에 대한 내 지식의 얕음이 전적인 이유라고 하기에는, 글이 매끄럽지가 않다. 어쨌든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하루에 한 장 읽으면 꽥.. 이다. 어느새 눈이 무거워지고 속에서 다른 걸 읽어야겠다는 열망이 생긴다. 이 중에 4장 여자와 동의 부분은 그래도 번역도 괜찮은 편이고 내가 이해(?)가는 부분도 많았다. '동의'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부분. 이 장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이런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은 기분. 



여자가 남자와 맺는 가장 내밀한 관계들은 동의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자들은 결혼에 동의하며, 여자의 동의 없는 성교는 강간이라는 형사 범죄를 구성한다. 여자와 동의의 쓰이지 않은 역사를 검토하기 시작하면 동의 이론의 억제된 문제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여자들은 동의 이론가들이 동의 능력이 없다고 공언했던 개인들을 예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여자들은 언제나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었으며, 여자들의 비동의는 무관한 것으로 취급되거나 '동의'로 재해석되었다. (p 121)


여자들의 영향은, 심지어 좋은 여자라도, 언제나 남자들을 타락시킨다. 왜냐하면 '자연적으로' 여자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지위 혹은 시민의 지위에 도달할 수 없으며, 동의를 제공하는 데 요구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관계에서 여자들의 '동의'는 막중하다. 더구나 여자들의 동의는 언제나 주어진 것으로 가정될 수 있다 - 겉보기에 분명 동의를 거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소에 따르면, 남자들은 '자연적인' 성적 공격자들'이다. 여자들은 '저항하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다. 루소는 '공격과 방어의 질서가 변한다면 인류는 어떻게 되겠는가' 리고 묻는다. 정숙과 순결은 탁월한 여성적 덕목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또한 열정의 피조물이기에, 정숙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중성과 위장이라는 그들의 자연적 기술을 이용해야만 한다. 특히 여자들은 '응'이라고 말하기를 욕망할 때조차도 언제나 '아니'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루소는 여자와 동의의 문제의 심장부를 드러낸다. 동의에 대한 겉보기의 거부는 여자의 경우 액면가로 취해질 수가 결코 없다. (p 128)



그러니까 이런 거다. 여자의 동의란, 동의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라서 할 수 없는 것인데,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성적으로 공격을 하면 '저항은 해야 한다'는 것이고, 심지어 열정 그자체인 여자들은 동의를 겉으로는 아니라고 표시함으로써 위장을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본다는 거다. 참 놀랍다. 따라서 여자는 늘 '동의'가 default인 거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싫다고 안 했잖아, 싫으면 반항을 했어야지, 따라왔으니 동의한 거 아니야, 결혼했는데 성관계에 동의가 무슨 필요가 있어, 네가 동의 안 했으면 나도 안 했을 거야... 아하. 그 근간의 생각이 이런 것이로구나. 



강간법은 최근에 '정의의 패러디'라고 묘사되었다. 이에 대한 많은 이유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피해자의 '동의'가 해석되는-또는 무시되는-방식이다. 이 문제에서 여론과 법원은 홉스적이다. 그들은 강요된 복종을 포함해서 복종을 동의와 동일시한다. 기소된 강간범들은 거의 언제나 여자가 실제로 동의했다는, 혹은 자신들의 여자가 동의한다고 믿었다는 변론을 제시한다.. (중략) ... 동의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단순한 삽입 증거를 넘어서 신체적 상해를 보여주는 것이 거의 법적 기준의 지위를 갖는다.' (p 133)


정의의 패러디라는 말의 각주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강간은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히는 범죄다. 강간 피해자는 빈번히 '그것을 자초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심리학자들은 실제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믿음을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 정확한 지적이다. 



대중만이 아니라 탁월한 법률가들조차도 '자연적으로' 성적으로 공격적인 남성은 여자의 거절을 진짜 욕망을 숨기는 대수롭지 않은 제스처로서 무시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강간 피해자들은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로 나뉜다. 명백히 폭력이 사용된 곳에서조차도 피해자가 '의심스러운 평판'을 가졌다거나 '형편없는' 성도덕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에는 '동의'가 제공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p 135) 


이전에 읽은 <페이드 포>가 생각났다. 말하자면 성매매 여성들은 위의 기준으로 볼 때 '나쁜' 여자일 것이고 따라서 이 사람들은 '더' 막 대하고 폭력을 행사해도 되고 심지어 돈을 주었으니 '당연히' 성적인 모든 행동이 용납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위의 기준으로 볼 때 말이다. 



1994년 여름 리머릭에서의 그날, 내가 돈을 받았기 때문에 성폭행당하지 않았디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똑떨어지고 복잡하지 않은 언어로 성폭행이 설명되거나 기술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만약 그렇다면 사회적 정의가 그릇된 것이라고 믿는다. 성매매에 내재된 성학대와 성매매 영역 밖에서 일어난 성학대 간의 유사성은 너무도 극명해서 무시해버릴 수 없다. (p 181)


이런 것을 레이첼 모랜은 '돈이 지불된 강간'이라고 했다. 이 표현이 적확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회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 그러니까 나쁜 여성, 그러니까 형편없는 성도덕을 가진 여성은 이런 짓을 당해도 된다, 이런 건 당연한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다면, 세상은 그릇된 거다. 정확히 그렇다. 







동의는 언제나 어떤 것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양성 관계에서 남자들에게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어제나 여자들이다. '자연적으로' 우월하고 능동적이고 성적으로 공격적인 남성이 주도권을 행사하거나 계약을 제안하며 '자연적으로'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여자는 이에 '동의한다'. 평등주의적인 성적 관계는 이러한 기초에 의지할 수 없다. 그것은 '동의'에 근거 지어질 수 없다. 어쩌면, 여자와 동의의 문제에서 가장 현저한 측면은 다음과 같다. 즉, 두 동등자들이 함께 지속적인 연합을 창조하기로 자유롭게 동의하는 개인적 삶의 형태를 구성함에 있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언어가 없다. (p 146)


'동의'를 했냐 안 했냐가 화두가 되는 것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그것을 여성이 마치 자율적인 선택권이 있는 것마냥 받아들일까 말까를 결정하는 것처럼 만들어서 여성에게 귀책사유를 돌리려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동의'라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 '동의'라는 것의 범주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지를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양성평등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은 남자가 방어는 여자가, 그런데 공격은 남자의 본성이니 방어를 잘 하라는 식의 논조를, 정치적으로든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유지하는 한, 남녀 관계에서의 가부장적인 구조를 깨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이 책이 번역만 좀더 매끄러웠더라면, (어쩌면 내가 기본적인 지식이 좀만 더 있었더라면) 정말 크게 와닿을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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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9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22598 2021-02-15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의라는 범쥐를 따져봐야하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강요된 동의인지, 자율적인 동의인지도 중요할 것 같고. 공격자들을 과연 동의, 거부라는 것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인가? ...여러가지 생각이 드네요.

비연 2021-02-15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한 단어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하나의 단어를 보더라도 참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고들이 나올 수 있는 것 같구요. 번역이 좀 힘들긴 해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