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를 굳이 끊어서 독서를 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정초라 그리고 이 페이퍼가 2021년의 첫 페이퍼라 이렇게 쓰고 시작해본다. 고요하지만 지속적으로 (혼자) 바쁜 정초에, 문득, 아 정말 이러면 안되겠어, 라는 마음으로 며칠 확 쉬어버렸다. 흠. 그랬더니 지금 일 목록이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오게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잘 쉬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지. 끄덕.
새해 들어 첫 책은, <물의 살인>. 1월부터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나란 인간. 그러나, 마르탱 세르바즈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쉬면서 살살 읽었다. 여전히 재미는 있는데 역시나 주인공 괴롭히기 신공에 들어간 것이지. 도대체 작가들은 왜 스릴러물을 쓰면서 갈수록 주인공을 힘들게 하는 것인지. 악취미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써클>이 되겠지만 앞 편의 제목을 <눈의 살인>으로 잡고 시작해서 연속선상으로 <물의 살인>이라고 붙인 듯. 하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이눔의 써클이 뭔 의미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 눈길 끄는 데는 <물의 살인>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권 스트레이트로 다 읽고는, 아직 몇 권 남은 스릴러/경찰물을 약간 뒤로 하고 든 책은, <노멀 피플>.
워낙 호평이라 어찌어찌 고민하다 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젊은 남녀 사랑 이야기에는 이제 하등 관심이 사라져버린 상태라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책을 들었다, 가 맞는 말이다. 젊은 아일랜드 작가라. 요즘 젊은이들의 문체일까 뭐 그런 정도의 호기심. 근데 이 책, 꽤 재미나다. 인정.
그러니까 내용은 심히 진부한 토대를 가진다 이거다. 부모가 변호사인 '좋은' 집안의 메리앤과 그 집에 엄마가 청소 도우미로 일하러 가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코넬이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이야기다. 메리앤은 친구가 없고 아웃사이더인 반면 코넬은 누구나 좋아하는 주변에 늘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둘이 사귀게 되었는데, 메리앤은 전혀 눈치라는 걸 보지 않고 코넬과 사귀는 것에 자유로운데, 코넬은 늘 주위 눈치를 살핀다. 둘만 있을 땐 더없이 좋은데 말이다. 아웃사이더인 메리앤과 사귀는 걸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집안이 차이가 나니 메리앤 집에서 알게 되면 싫어하지 않을까, 이런 등등의 이유로 눈치를 본다.
그러면 우리 둘 다 더블린에 있게 되는데, 그가 말한다. 장담하는데,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면 너는 나를 모르는 척할걸.
메리앤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긴장하며,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그를 모르는 척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그는 메리앤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의 미래, 그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겁에 질려 망연해진다.
그 순간 그녀가 입을 연다. 나는 절대로 너를 모르는 척하지 않을거야. (p40)
코넬은 그러나, 메리앤을 모른척 한다. 졸업파티에 (코넬을 좋아하던) 다른 여자애에게 함께 갈 것을 청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메리앤은 학교를 그만둔다. 코넬은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사랑한다고 했었는데, 사람들 눈치보느라 그녀를 배신한 거다.
코넬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한다. 나는 절대로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알았지? 절대로. 그녀응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너 때문에 정말 행복해.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덧붙인다. 사랑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진심이야. 그녀는 다시 눈물이 가득 차올라 두 눈을 감는다. 그녀는 심지어 훗날 기억 속에서도 이 순간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고, 이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든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처음으로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열렸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그게 내 삶의 시작이었어. (p60-61)
이 대목에서 정말 간만에 마음에 파도가 일렁였다. 삶이 시작되던 순간.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새롭게 하던 순간. 아연하게 돌아보며 이 대목을 세 번 정도 다시 읽었다. 이 작가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는 걸까. 경험하지 않고 이 느낌을 알 수 있을까... 헤어졌던 메리앤과 코넬이 트리니티 대학에서 다시 만나 다시 시작하는 생활을 읽고 있다. 이들의 앞날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사랑이야기임에도 왠지 기꺼운 마음으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대사를 따옴표에 넣지 않은 게 좋다. 마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처럼, 문장 속에 대화체가 녹아난 듯한 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보고 있는 일드의 내용에서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눈치를 보는 사람. 나기. 나기의 휴식(凪のお休).
주인공인 나기는 28살 생일을 앞둔 싱글 직장인이다. 다른 사람 눈치와 분위기를 살피느라 맨날 손해보는 타입. 동료가 일을 막 떠맡겨도 네네 하고 웃으며 받고 동료가 잘못한 것도 자기가 한 것마냥 다 짊어지고 남들이 나 빼고 다른 데 모여 자기 이야기할까봐 SNS를 집착적으로 찾는다. 덕분에 매번 야근이고 매번 갈팡질팡이다. 애인은 같은 회사 영업사원 신지.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는 사람인데 나기와 사귀는 것을 비밀로 하고 연애를 한다. 나기는 신지와 결혼해서 이 모든 상황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에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한다. 혹시 날 버리면 어쩌지,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늘 내키지 않아도 하자는 대로. 식욕이 채워졌으니 성욕을 채워야겠다며 신지는 설겆이 하는 나기의 등에 대고 말한다. "해줘.". 뭘 해줘.. 미친. 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나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간다. 젠장.
그런 나기가 신지가 회사 동료에게 자기 애인 얘길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걸 듣게 되고 그 순간 과호흡으로 쓰러진다. 쓰러지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동료도 애인도 연락한번 없었다는 걸 알게 된 나기는 SNS도 다 지우고 연락처도 다 지우고 짐도 다 버리고 이불과 자전거 하나만 든 채 멀리 이사를 가서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주위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던 자신의 모습을 고쳐나가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내용이다. 신지는 정말은 나기를 사랑한다며 어떻게 해서 나기를 찾아내서는 와서 너는 못 변해, 너는 그대로일거야 이런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고. 그러나 나기는 힘들지만 그 상황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신지가 더 주변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비겁한 인간상인 게지. 나기와 사귀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이 뭐라 할까, 그런 생각에 겉으론 쿨한 척 하면서도 자기 마음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바보. 짜증.
쿠로키 하루가 뽀글머리로 나와서 (사실 원래 심한 뽀글머리인데 놀림을 너무 받은 나머지 매일 아침 일어나 한시간씩 머리를 폈었다. 쉬는 동안 그냥 뽀글머리 그대로 지내기로 한다) 역시나 그녀만의 자연스러우면서도 투명한 연기를 잘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조금 한적한 곳에서 나름의 개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그 속에서 자기를 찾아나가는 나기를 보면서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든다. 물론 가스라이팅하는 신지는.. 발로 걷어차고 싶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 특히나 사랑을 하면서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한다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다. 컴플렉스 때문일 수도 있고 내 처지 때문일 수도 있고 뭐 기타 등등 이유는 많겠지만 결국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인 사랑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속인다면 어디가서 떳떳하게 행동할 자신감 따윈 가질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공기는 읽어서 눈치보라고 있는 게 아니라 마시고 뱉는 거라고 말하는 나기가 인상적이었다.
空気は読むものじゃなくて、
吸って吐くものです。
공기는 읽는 것이 아니라 마시고 뱉는 거에요.
이제 이 책도 손에 들어야 할 때. 오늘 아침에도 불고기 그득 구워먹었는데.. 이제 그런 것도 슬슬 포기하게 될까. 괜한 두려움(?)에 들기 어려운 책이지만. 함께 읽기로 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