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단 1
플로르쩌 즈비흐트만 지음, 지명숙 옮김 / 동녘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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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루마니아 시골 소년들의 이야기를 허구의 축으로 두고, 여기에 15세기 왈라키아(현 루마니아) 공국의 제후, 블라드 체페슈(드라큘라로 알려짐) 에 대한 해석을 더해 완성한 역사 판타지 문학.
소설은 인간의 권력욕과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인간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에 대한 내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책장을 덮으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불페는 강도단인 늑대단에 들어간다. 따분한 농촌의 삶이 지겨워서다. 그 늑대단은 불페의 형인 루푸가 두목으로 있다. 늑대단은 허물어져가는 사원에서 15세기의 보물을 훔친다. 그 중 드라큘라로 알려졌던 블라드 체페슈의 검에 서로 눈독을 들인다. 이 검은 권력을 상징한다. 불페는 형의 자리를 탐낸다. 형제간의 목숨 건 싸움이 진행된다.
이들의 싸움을 부채질하며 인간의 본성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다. 바로 드라큘라와 그의 동생. 이 둘은 15세기 루마니아라는 나라의 왕자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략 속에서 국가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내고,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꿈꾼다. 하지만 두 왕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국가를 다스린다. 엄격한 제도와 법률로 다스리며 국가의 독립을 지키려하거나  제후들과 협조를 통한 조약을 통해 다스리는  방식의 차이는 단순한 정치술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성의 차이로도 드러난다.
 
소설이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나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동경했다. 인간성을 초월한 육신을 갈망했다. 나는 동물처럼 살고 사냥하고, 그리고 죽이고 싶었다. 나는 더는 우리가 하는 짓이 좋은지 나쁜지, 혹은 내가 악한 인간인지에 대해서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기를 바랐다. 간단히 말해 나는 이제는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 싶었다.(2권 11쪽)
더는 인간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으며, 인간의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흥분을 고조시켰다. 살인이 모든 법칙과 계율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주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행위였다.
손에 든 단도나 활이 권력을 부여했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권력.(2권 62쪽)
인간의 조작으로 천국이 땅에 내려올 수는 없어. 그리고 평화는 피로 얻어지는 게 아니야.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운명을 조절할 수 없어.,. 그렇게 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되레 더 실망하게 마련이야.(2권 148쪽)
우리가 소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의 싹이 이미 그 녀석들의 내부에 존재해 있었다는 뜻이야. 최소한의 노력으로 벼락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루푸, 자기 형을 시기, 질투하는 불페, 장난삼아 남에게 고통을 가하는 걸 즐기는 벨디에, 그런 벨디에를 솔선수범 돕는 비타.(174쪽)
인간은 무릇 다 사기꾼이야. 서로가 서로를 속이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딱한 것은 자기기만이야. 극도로 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범죄자 왈 [전 결백합니다.] 심지어는 하느님 앞에서까지도 그걸 유겨대는 형편이거든. (175쪽)
세상일이란 어쩔 땐 걷잡을 수없는 방향으로 나가기도 하지. 인간의 선량함에만 의지하다 보면 속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201쪽)
전쟁이 단지 고통, 공포, 비참함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전투의 진미를 모르고 있지. 그건 환희, 명예, 부귀영화, 무아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물론 자신이 승리 편에 섰을 때.(228쪽)
내 말을 듣도록 해야했다.(280쪽)
 
뭔가 거창하고 복잡해 보이는 문구들이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마지막 인용구 "내 말을 듣도록 해야했다"로 집약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서든, 또는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든 이것은 인간사의 왠만한 것들을 다 설명해주고도 남는다고 생각된다. 내 말을 듣도록 만들어주는 위치에 서고자하는 욕구가 바로 권력욕이 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가장 크게 만들어주는 것이 폭력이다. 전쟁은 폭력이 국가간으로 확대된 경우이다. 하지만 그 근간에는 말을 듣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어린왕자의 길들이기와 사뭇 다르다. 소설은 길들이기와 다른 폭력과 결부된 권력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현실과 역사 속에서 관찰되어지는 것들이다.
과연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조차 인간은 싸워야만 한다. 자신과. 그리고 그 권력욕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과. 그 부조리가 역사를 만들어왔는지 모르겠다.
현실의 FTA 진행과정도 이 그림 속에 집어넣어질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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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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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가?

조정래의 소설을 읽다보면, 삶이란 운명이라는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물론 그 허우적대는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의지하고 있는 것(항공모함을 탄 사람이 있을수도, 튜브를 탄 사람이 있을수도, 산산조각난 나무를 의자하는 사람도 있겠다)이 다르다는 것에서 개인적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

이번 소설은 일제시대때 강제징용된 소작농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일본군으로 끌려가서 몽고와 소련 연합군과 싸우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살아남기 위해 다시 소련군으로 복무하며 독일군과 맞선다.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이번엔 독일군이 되어 미군과 대결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포로가 되어 옮겨졌으나, 다시 미국과 소련의 협약에 의해 소련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생존만을 위한 삶이란 처절하다. 포로수용소에서, 전쟁터에서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단순히 전쟁 무기이며, 숫자일뿐이다. 배고픔을 견디고, 추위를 견디고, 쏟아지는 총알을 피해 도망친 것은 고향에 있는 가족때문이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돌아갈 곳이 없다 하더라도 생명은 쉽게 저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도 계속 선택의 상황에 놓인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로운듯 보이지만 그 실상을 보면 한도라는 것이 주어져 있다. 시대적 상황이 부여하는 선택인 것이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그리고 저렇게 살 바에야 라고조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연민을 자아내는 비참함에 몸서리 쳐진다. 그래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희망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상황이 현재 어떻게 주어져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분명 그들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풍요하고, 더 자유로운듯 하지만 여전히 우린 운명이라는 울타리안에서만 선택이 가능하다.

IMF가 그렇고 FTA가 그렇다. 상황이 우리를 선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선택이 삶을 결정짓고 있다. IMF의 터널을 지난 지금 FTA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자유경쟁이라는 허울좋은 시장에서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 사람들은, 이제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옆에 두고 약육강식이 삶의 법칙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는가?

소설 속에선 이들이 소작농이었기에 더욱 억울한 운명의 파고를 겪는다. 세월은 흘렀지만 운명이라는 파도의 성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의 넋을 놓게 만드는 사나운 파도는 그것을 견딜만한 사람들에겐 닥치지 않는다. 아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다르기에 그 존재감도 다를 것이다. 항공모함에게 그깟 파도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 하지만 나무판자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에겐 크나큰 생명의 위협이다.

운명이라는 바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영을 할 줄 아는 능력보다도 오히려 날개가 필요하다. 살아가는 기본 바탕 자체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바다에서 하늘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있는 곳이 바다임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자각 속에서 '오 하느님'을 외치고 날개를 달기 위해 팔을 허우적댈 것이니 말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오! 하느님, 불쌍한 어린 양들을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오늘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곳은 운명의 기류에서 어디쯤인지 돌아보고 싶다.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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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산이라는 영화를 본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서극 감독이 스타워즈를 만들었던 할리우드의 특수효과팀을 불러 거대한 예산을 들여 만들었던 블록버스터다. 지금보면 스타워즈보다 더 엉성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무협이라는 소재를 영상으로 자유롭게 표현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고 보인다. 이 영화는 1983년에 만들어졌다.

그후로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2001년 서극은 <촉산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보다 진보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현란한 화면을 자랑한다. 물론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변하면 영화도 변하기 마련이다. 2002년 개봉당시 영화를 보았을때만해도 당시 정이건이 주연했던 영화류의 CG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2007년 케이블 TV로 다시 본 <촉산전>은 새로운 감흥을 가져다 주었다.

<촉산전>은 무협이라는 겉모습 속에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무협물 또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마초에 가까운 영웅들이 등장하고 이 영웅을 둘러싼 여러 명의 여인들은 당연히 따라온다. 영웅호색. 무협의 바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남자를 둘러싼 여러 명의 여자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타협을 하고 남자 곁에서 사랑을 나누어(?) 받는다. 또는 남들이 쫓아올 수 없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슬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사랑과 슬픈 운명은 또다른 무협의 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촉산전>은 어떤가? <촉산전>은 중국 오호시대를 배경으로 아미파의 장문 백미가 수제자 단진자(고천락)와 곤륜파의 현천종을 이끌고 마귀의 무리들과 일전을 벌인다는 내용의 무협 판타지물 중국의 고전 <촉산검협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선과 악의 대결, 정의는 승리한다는 큰 줄거리 뒤에는 사랑과 운명이라는 이야기가 함께 숨쉬고 있다.

곤륜파의 장문 고월은 제자 현천종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때 사파의 장문인 마황 유천이 곤륜산을 공격하러오자 고월은 곤륜의 최대병기인 월금륜을 현천종에게 주며 일부러 피신시킨다. 그리고 그녀는 유천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2백년 후. 다시 마황 유천이 세력을 펼치자 각 문파가 하나로 뭉쳐 대척한다. 이때 현천종은 삼위일체의 깨달음을 얻어 마황과 대적할 힘을 얻어야 한다. 그를 도와주는 아미파의 제자 영기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월의 혼 한조각으로 형성된 인물이다. 그래서 자꾸 그녀를 보면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고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깨달음을 위해선 과거를 모두 잊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잊어도 끝내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의 얼굴.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화염에 쌓인다. 그러나 아미파 백미의 도움으로 다시 부활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마침내 마황을 격퇴하지만 그와 함께 영기도 산산히 부서진다. 200년 전처럼. 영기는 이로써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말한다. 그때 현천종의 얼굴은 무척 슬프다. 깨달음도 사랑과 운명의 아픔을 초월하진 못한다.

한편 마황의 동굴을 지키고 있던 단진자는 사부의 명을 어기고 동굴앞의 요정을 살려둔다. 사랑과 동정이라는 복잡한 감정때문이다. 하지만 이 요정은 마황과 쌍각을 이루고 있는 마귀. 그녀에게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사랑은 때론 영혼을, 그리고 생명을 요구한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친구인 현천종에게 자신과 함께 마귀를 죽여달라고 하는 모습 속에선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다소 행복한 표정도 엿보인다.

한편의 영화이지만 정말 영화는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우연히 다시 보게된 <촉산전>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슬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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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야 놀자
강풀 지음 / 문학세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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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한편이지만 그것에 대한 글은 과장일련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만 100편,  일반인들의 평까지 가세한다면 몇만편은 될 것이다. 이처럼 영화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영화를 보게 만드는 매력일 것이다.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고전음악이나, 발레와 같은 무용, 명화 등에 대해서는 왠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했다가는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을 보고 나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어렸을 적 우리가 한번도 또는 쉽게 그것들을 접하지 못했다는 것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다. 아무튼 문화에 대한 편향적 소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각설하고, 이 책 <영화야 놀자>를 말해보겠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듯, 이 책은 영화비평서가 아니다. 영화와 놀고 있는 이야기다. 영화로부터 추억을 끄집어내고,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보았을때 영화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나온다. 영화에 대한 별점이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별을 보고 추억이 떠오르듯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기에 더욱 친근한 이야기가 된다. 극장을 나오며 친구와 이야기를 하듯. 영화를 보게 된 사연도 너무도 솔직하다. 염정아의 가슴이 보고싶어 테러리스트를 보러갔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튼 7080세대의 추억으로 인해 문화상품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 것처럼, 이 책 <영화야 놀자>는 소위 X세대라 불렸던 할리우드 키드들의 추억을 끄집어낸다.

무엇보다도 강풀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는 부분은 폼으로 보면 어떠냐는 거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이쑤시개를 꼬나문 모습, 천녀유혼에서 왕조현이 날아다니는 모습, 와호장룡에서의 대나무 신 등등. 나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이 한 장면 때문에 영화비가 전혀 아깝게 생각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그런 영화들이 많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하면 이야기가 통하는 것이고, 남들이 시큰둥해도 뭐 어쩔 수 없지만. 나에게 있어 그런 폼나는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옥상 위에서 꺼져가는 생명으로 고개를 푹 숙인 로봇 위로 하얀 비둘기가 빗속을 뚫고 날아가는 모습, <쥬라기 공원>에서 처음으로 공룡들을 만나는 모습 등등.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래서 영화는 수만가지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그 이야기 중 하나인 강풀의 <영화야 놀자>는 말 그대로 영화와는 한바탕 놀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신나게 놀아야 이야기도 신날게 아닌가? 이 책 속에 나오는 강풀의 부모님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영화를 사랑할 수 있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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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보통사람들이야 법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다. 살아가면서 법이라는 문제와 부딪힐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종종 매스컴을 통해, 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말 간혹 자신에게 법이라는 것의 도움을 또는 법이라는 것으로부터 서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법에 대해선 정말 가끔 생각하게 된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흔히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질 않던가. 정작 법 없이 살았다가는 큰일 날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이다.
데스노트는 이런 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구를 끌어올 필요도 없다. 법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꾸준히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져 왔다는, 그래서 그 와중에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도덕적- 법적, 이성적 접근이 아니라- 당위성을 확보하게 됐다. 물

론 서두에 말한 것처럼 여전히 법에 대한 불신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이 법에 대해 무력감을 갖게된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거나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때 자신에게 주어진 데스노트. 이름만 적으면 그 사람이 죽게 되는 살명부다. 전지전능한 힘을 얻게 된 주인공은 키라라고 불리게 되고, 거의 종교적 신에 가깝게 된다. 키라는 데스노트를 이용해 세상의 모든 범죄자를 없애고 이상향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 반대쪽에 아버지와 L 이 있다.
키라의 등장으로 실제 세계의 범죄율을 70%이상 감소한다. 억울한 사람들이 법으로 호소하지만 해결할 수 없었을 때 노트에 끄적이는 것만으로 그 억울함을 해결한다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 한계선을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어디까지의 범죄가 죽어야 할 정도의 악질인가. 그리고 그것은 또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뭐, 이런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키라는 자신의 이상향을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가 영화에서 어느 쪽을 편들게 만드느냐를 결정하게 만든다.
문제는 라스트네임이라는 속편에서 희생대상이 정도를 넘어선다는 점에 있다. 과연 키라가 이길 것인가, L이 이길 것인가의 두뇌게임에 몰입하다보니, 그리고 반전만을 생각하다보니 중요한 한가지를 놓쳐버린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 모두가 키라의 패배를 바랄수밖에 없고, 또 패배를 예측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끝까지 키라를 지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면, 그리고 키라의 고뇌를 바로 나 자신의 고뇌로 생각하도록 했다면 영화는 보다 흥미진진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 키라는 이상향을 향한 집착에 빠져 도를 넘어섰는지, 속편에서의 그의 캐릭터는 너무 과장되어져 상식을 벗어나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키라가 끝까지 매력적 캐릭터로 남아 있을 순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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