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삽목을 한 지 2주 차에 접어 들었다. 아직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있는 시기라 첫 주 동안 외부에 두었던 것을 실내로 옮긴 지는 1주 차다. 흙이 마르지 않도록 2~3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있다. 현재 흙은 화분 1개는 피트모스 100%이고, 다른 화분은 피트모스 80% 정도에 펄라이트, 코코피트 등이 섞여 있다.



지난 한 주 간 변화된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밖으로는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흙 안쪽으로는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또는 이미 뿌리 한 줄기라도 내렸을지도 모른다. 이번 주 줄기에서 움이 트지 않는다면 몇 개 시험삼아 뽑아서 뿌리가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다. 


똑같아 보여도 똑같지 않는다는 것. 삶은 무상(無常)하기에 꾸준히 돌보아야 한다. 다른 생명체는 물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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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넷플릭스 시리즈 <단 한 번의 시선>/ 폴란드 / 6부작 / 청불 / 25년 3월 5일/ 미국 스릴러 소설의 대가 할런 코벤 원작. 2004년 출간 된 소설로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1,2권으로 나왔다가 2017년 한 권으로 묶여 출간됨. 할런 코벤은 미국의 에드거상, 셰이머스상, 앤서니상을 모두 수상한 작가로 스릴러의 제왕이라 불린다. 잊혀졌던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감추어졌던 비밀이 드러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인물들 간의 관계들 속에서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나타난다. 그물망 속 벼리를 찾는 쾌감. 하지만 이 반전이 전혀 뜻밖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강하게 후려칠 정도는 아니다. ★★★☆ 7점/10점


2. 15년 전 콘서트장 화재로 많은 젊은이들의 죽었지만, 그레타는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하지만 사건 전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 이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고 키우면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평소 자주 찾던 필름 현상소에서 사진을 찾던 중 전혀 모르는 사진 한 장이 끼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진에는 네 명의 젊은이가 보이는데, 한 여자의 얼굴엔 X표가 그어져 있다. 이 사진을 받은 이후 갑작스레 남편 야체크가 행방불명이 된다. 도대체 이 사진은 무엇이고, 남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3. 시리즈 <단 한번의 시선>은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는 과정에서 이 사진과 얽혀 있음을 발견하고, 사진에 대한 비밀도 파헤치게 된다. 남편과 사진 속 인물들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숨겨졌던 사실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된다. 시리즈의 재미는 이렇게 조금씩 밝혀지던 사실들이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해 폭발하는 부분에 있다. 


4. <단 한 번의 시선>속에서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족도 도외시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결정이 되는 것일까. 시리즈가 끝나면 살짝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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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어서야 움직인다. 2월의 늦은 한파를 핑계로 꼼지락댔다. 지난 가을부터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블루베리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겨울동안 나고 자란 새 가지를 정리하는 가지치기와 함께.



뒤엉킨 마른 풀을 뽑아내고 블루베리 주위를 치운다. 머지않아 퇴비와 유기질 비료를 주기 위해서다. 수없이 뻗친 가지들도 툭툭 잘라낸다. 이렇게 자르는 과정은 꼭 명상을 닮았다. 자르는 행위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가지를 자를 수 있고, 간혹 손을 다치기도 한다. 금방 끝날 듯 하지만 끝나지 않는다. 나무 1그루 당 20분은 족히 걸린다. 




새로 자란 가지를 잘라낸 것은 제법 굵은 것을 골라서 삽목으로 쓴다. 흙에 묻힐 부분은 경사지게 자르고, 눈이 나오는 곳이 4~5개 정도 되는 부분을 잘라낸다. 


아직 아침 기온이 제법 쌀쌀해서 하우스나 터널 같은 보온 시설을 해주어야만 하는 날씨임에도 곧 날이 풀릴 것이라며 그냥 외부에 놓아 두었다.


3월 1일 삽목 첫날


3월 2일 둘째날


3월 3일- 밤새 내린 눈으로 쌓였다. 이런 날씨에도 그냥 밖에 두는 것은 당최 실험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3월 4일 -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눈이 여전히 녹지 않고 쌓여 있다.


3월 5일


3월 6일 - 아침이면 흙이 꽁꽁 얼어 있다.


3월 7일 - 일주일이 지났지만 변화가 보이질 않는다.


3월 8일


삽목한 가지가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는데는 필요한 조건이 있다. 특히 신경써야 하는 부분은 온도와 습도다. 지난 1주일 간 온도 조건을 전혀 맞추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키워내는 것들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움을 틔우지 못한다. 


자신의 온 생명을 발산할 수 있도록 조건을 갖추어 주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도 모두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환경이 갖춰졌으면 좋겠다. 어디가 가혹한 환경에 처해 있는지 살펴보고, 그 환경을 변화시켜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정치이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삽목한 가지를 흔들어대서야 되겠나?


풀릴 줄 알았던 날씨는 되려 다음 주에도 여전히 새벽에 영하로 떨어진다고 예보되었다. 삽목한 가지들을 실내 베란다로 옮겼다. 당분간은 실내에서 관리해야겠다. 


3월 10일


3월 11일


3월 12일 - 삽목을 더 늘리고 실내 베란다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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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사피엔스 - 움직이기 싫어하도록 진화한 몸을 어떻게 운동하게 할 것인가
대니얼 리버먼 지음, 왕수민 옮김 / 프시케의숲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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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올해는 운동 좀 해야지' 하며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 계획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운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지가 필요한 일이며, 의지란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그러다보니 건강을 위해 운동이 필요한 것은 알겠지만, 기꺼이 운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되지 못한다. 


그때 드는 생각 하나. 운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는 어긋난 일이라는 것인데, 왜 우리 본성과 어긋나는 것이 건강에는 좋은 것일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운동하는 사피엔스>라는 책은 진화와 인류학적 관점에서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수렵 채집과 사냥으로 먹을 것을 구하던 우리 인류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현재 우리 인류가 접하고 있는 환경에 부적응함으로써 발생되는 것이 바로 '운동이 싫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운동이 싫어'는 우리 조상들도 갖고 있었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도 틈만 나면 쉬려 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 틈이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고, 틈이 나지 않은 시간에는 부단히 움직였다는 것이 현대인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인들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 꾸준히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누워 있는 경우가 많다. 꿈틀꿈틀 이리저리 움직이기 보다는 한 자리에 앉아서, 또는 서서 일하는 것이 태반이다.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누워서 뒹굴뒹굴 하기도 한다. 애초에 쉬는 시간엔 움직이기 싫어한 본성은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문제는 일하는 시간에도 꼼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건강을 위해서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 좋다. 일할 때 틈틈이 자세를 변화시키고 이리저리 움직이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워낙 움직임이 없는 생활이기에 따로 '운동'이라는 것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어느 정도로 운동하는 것이 좋을까.


이에 대한 정해진 답은 없다. 각자의 형편에 맞추어, 또 자신의 몸에 맞추어 해 나가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략 지금까지의 의학적 연구를 종합해보면 유산소 운동을 중심으로 간간히 웨이트를 섞어, 1주일에 중강도로 150분 이상의 운동을 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운동하는 사피엔스>를 읽다 보면 인류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리고 그 진화된 몸과 현대의 환경이 얼마나 부적응 상태인지를 깨닫는 재미가 묻어 난다. 오늘도 꼼지락꼼지락거리며 움직이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또는 반대로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이들에게, <운동하는 사피엔스>는 건강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드는 훌륭한 자극제가 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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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기가 어렵다 보니 지갑을 쉽게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문을 닫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숫자도 늘어나 코로나19 시절만큼 자영업자의 수가 줄었다고도 한다. 


이렇게 소비자가 지갑을 닫는 행위를 미국에서는 노바이(No Buy) 현상으로 말하고, 우리는 요노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노는 You Only Need One 이라는 영문 단어의 첫 글자를 따 온 말이다. 즉 꼭 필요한 것만 사고, 필요치 않는 것은 구매하지 않는 행동을 일컫는다. 노바이 또한 어떤 물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며 새로운 것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소비자의 지갑이 닫히면서 소비가 침체되어지면, 당연히 경기도 침체된다. 자본주의란 소비가 지탱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소비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우리가 '발전'이라고 칭하는 일이 벌어진다. 소비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산 또한 많아지고, 이렇게 생산된 것은 또 새로운 소비를 욕망하게 만들어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경제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경제발전이 진짜 우리 인류에게 필요한 발전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때 국경은 폐쇄되고 사람들 간의 교류가 끊어지면서 경제 행위도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공장 굴뚝에서 나오던 연기도, 자동차의 배기가스도 줄어들면서 지구의 공기가 깨끗해졌다. 평상시 보이지도 않던 먼 곳의 설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서 발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이번 소비침체를 통해 인류가 꼭 소비 지향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면 좋겠다. 욕망을 끝없이 자극해 소비하지 않는 삶을 꿈꾸는 것조차 힘들었던 자본의 세상 속에서, 편의를 찾되 절제할 수 있는 삶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지구에서의 인류의 삶이 지속가능할 것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것. 이런 삶의 방식이 침체가 아니라 발전으로 인식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더 많이 갖고 소비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갖고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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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2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러니하게도 저도 코로나 기간 자연이 살아나는 현상을 바라보며 경제발전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소비지향은 많은 측면중 경제학적인 측면에만 해당된다는 거죠. 삶의 많은 다양한 시선중 유독 경제적 측면에만 귀속되는 삶을 하나의 정답으로 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 같습니다. 조금만 비껴서면 다른 많은 삶이 보일 것 같습니다.

하루살이 2025-03-12 09:48   좋아요 0 | URL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원이 무한할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이 과연 지속가능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시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노와 같은 삶의 방식이 꽤나 긍정적으로 느껴져요. ^^;; 쓰지도 않는 여분을 갖가지 미사여구로 비축해 놓고 사는 것은 아닌지 둘러보게 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