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릴러2016.12.07.136분한국12세 관람가

감독 박정우

 

판도라는 재난영화다. 하지만 다른 재난영화와는 달리 그 목적이 뚜렷하다. 바로 원전에 대한 반대이다. 일반적인 재난영화들은 재난의 원인보다는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재난을 대처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비추거나 반대로 거룩한? 인간성을 이야기함으로써 감동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터널>의 경우,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유로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전달한다. <부산행>은 좀비라는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전통적인 주제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해운대>도 어찌보면 비슷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판도라도 희생정신이라는 감동의 포인트를 갖고 있다. 국가에게 헌신짝 취급받는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눈물샘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 영화의 주된 목적이 아니다. 영화는 재난의 원인에 집중한다. 바로 원전 그 자체이다. 영화 속 곳곳에서 원전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백문이 불여일견. 원전에 대한 반대를 귀로만 듣던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효과를 키우고 싶어하는 목적이 보여진다.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미성숙한 모습을 비판하는 것조차도 곁가지에 불과하다.

<판도라>가 영화이기에 원전을 찬성하는 쪽의 근거나 주장은 드러나있지 않고, 또 정밀하게 과학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허구와 감동이라는 치장을 하고 원전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원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추천, 그리고 원전을 찬성하는 사람들에겐 경각심을 일으키는 차원에서 추천한다.

ps.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친환경 에너지보다 원전을 미래의 주 에너지로 정책을 삼은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주까리 밤콩

 

"100원만 더 쳐줘유~"

"선별도 안됐지, 종자도 섞였지. 아무리 좋게 쳐줘도 안됩니다."

"에이, 그러지 말구 100원만 더 쳐줘유~"

붉은밤콩, 아주까리밤콩 등 토종콩을 수매하는 곳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밥맛좋은 콩이지만 개량된 콩들에 밀려 찾아보기 힘든 콩들이다. 그래도 그 맛이 좋아 근근이 버텨오고 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다보니 많이 팔리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 콩을 재배하고 수확한 농부들에겐 판로가 중요하다. 어떻게든 팔아야 한다. 직거래 능력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토종을 취급하는 유통회사에 팔아야 한 해 농사가 끝나는 것이다.

수매가는 등급에 의해 정해진다. 1~3등급. 1등급은 선별도 잘 되고 종자도 단일해야 한다. 토종콩이다 보니 종자의 보존 차원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2등급은 종자가 단일하면서 선별이 100%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균등한 품질을 지니고 있으면 가능하다. 3등급은 종자도 섞이고 선별도 되지 않은 수확물에 매겨진다. 그 정도가 지나치다면 등급을 매기지도 못하고 수매가 거부당할 수 있다. 농부들의 농사짓는 실력이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등급에 따라 수매 가격이 달라지니 농부들도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그깟 100원이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수확량이 몇백kg이 되다보면 총 금액에 있어 몇 십만원의 차이가 생긴다.

이러다보니 수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갈등은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1~3등급의 차이가 명확하다 보면 이내 수긍하고 만다. 실제 토종콩은 친환경 인증에 상관없이 팔고 있다. 그러니 친환경인증을 받았다고 더 가격을 쳐주지 않는게 옳다. 그럼에도 토종을 보급하고 친환경을 확대하고자 하는 수매 회사의 정책 상 수매 가격을 더 쳐준다. 친환경은 흙과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에 이익에만 매달릴 수 없는 것이다. 농부들이 친환경에 더 관심을 갖는다면 좋겠다.

수매가 다 끝나면서 비로소 한해 농사도 끝을 맺는다. 으레 그렇듯이 끝남은 또다른 시작이다. 이번 수매가 잘 되고 판매까지 잘 이루어진다면 이들 농부는 토종콩을 더욱 많이 심고, 정성을 기울여 등급을 올리려 노력할 것이다. 그 밑바탕엔 소비자들의 선호와 맞물린다. 결국 소비자도 농사는 짓는 셈이다. 소비자의 구매는 농사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토종이어서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맛도 좋고 훌륭한 종자여서 지켜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토종은 소비자가 밑거름을 뿌리고 농부가 재배함으로써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부디 그 열매가 풍성해지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까지 배움이란 암기에 가까웠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이 많이 배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나름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배움은 가치가 없어질 듯하다. 삶에도 물론 큰 도움을 주지 못할성싶다.

암기에 가까운 지식은 인터넷 속에서 넘쳐난다. 필요한 것은 검색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어떤 것이 참된 지식인지를  추려내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즉 지식을 찾아내고 걸러내는 방법론적인 것이 배움의 첫 단계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방법론을 넘어서 이 시대에 맞는 참된 배움이란 무엇일까.

그런 바로 물음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하는 능력,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통하고 협력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미래의 배움일 터이다. 문제는 바로 올바르게 묻는 법이다. 모든게 문제 투성이이니 아무거나 물어도 되는 세상일까. 세상을 더 살만하게 만들어가는 문제제기. 즉 물음에는 가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묻는 능력만이 아니라 무엇을 물을 것인지 그 가치를 따져볼 줄 아는 능력도 함께 배워야 하는 것이다.

지식 속에서 해답찾기라는 과거의 배움에서 가치있는 물음이라는 미래의 배움으로 넘어가는 시기,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끊임업이 우리는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배움은 그 끝이 없는 법이다.

지금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도 잠들기 전에 묻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쎄, 잘 모르겠네요. 일단 독감검사라도 받아볼래요?"

딸내미가 체한 듯 구토를 하고 난 다음날, 열이 떨어지지않고 계속됐다. 단순히 체한 거라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도 열이 가라앉질 않아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문진 후 열의 원인을 당최 알 수 없다는듯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이 아무래도 독감이나 뇌수막염일 수도 있다는 것. 정밀 검사를 해야할지도 모르겠단다. 의사는 아니지만 딸내미의 현상은 급체로밖에 보이질 않았는데... 조금 더 지켜보는 건 어떻겠냐는 질문에 의사가 화를 낸다. "열이 38도가 넘었는데 지켜보자니 말이 되냐. 정 그렇다면 그냥 독감 약이라도 지어가라." 아니, 이건 무슨 말인가. 독감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독감 약을 지어가라고? 의사가 다시 권유한다. "방금 전 환자도 비슷한 증상이었는데 독감 조사를 해보니 독감이었다. 독감 검사 받아볼래요?" 아, 이런. 울며 겨자먹기로 독감 검사를 받았다. 독감은 아니었다. 일단 해열제 중심의 약 처방을 내렸다. 일단 약을 조제하고 집으로 데려가 딷듯한 방에 뉘었다. 그리고 추이를 지켜봤다. 약은 먹이지 않았다. 점차 열이 사그라들었다. 다행이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일단 그냥 가세요."

자동차가 말썽이다. 정차하고 있으면 가볍게 덜컹거린다. 가속 중에도 덜컹거림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게 계속적인 게 아니라 나타났다 잠잠했다 그런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점화플러그 한두개가 고장 난듯한 현상으로 보여진다. 시간을 내어 정비소로 갔다. 정비사는 자동진단기로 자동차를 점검하고 나서 아무 이상없다고 말한다. 증상은 있지만 이상은 없다? 점화플러그 이상은 아닌가 물어보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 불안하다면 다 뜯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말에 일단 후퇴. 증상이 심해지면 다시 오기로 했다.

 

프로라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전문가라 함은 기술적으로도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하지만 고객을 대하는 자세도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연이틀 시간과 돈을 들여 방문한 병원과 정비소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고객에게 못미더움을 준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 또한 돈을 버는 사람이니 내가 하는 일에 프로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즘 TV프로그램 중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은 EBS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이다. 말썽을 일으키는 문제 반려견들의 원인을 찾아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문제해결에는 반려견 전문가가 등장하는데 이 전문가의 말 하나하나에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문제의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에 있다 라거나 '무조건 퍼주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등등 사람과 반려견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까지 확장해도 될 격언이 매 회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 말썽을 일으키는 반려견들의 문제는 함께 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이 그릇된 것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소위 길들이기를 잘못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길들여진다 또는 길들이다라는 개념은 순치(順治)라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해 약간 부정적 입장이다. 즉 길들여진 말보다는 야생마가 좋다는 관점이다. 길들여짐이란 순치와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여우와 어린왕자간의 대화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다는 뜻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그래서 길들여진 여우가 진짜 행복할까? 자신만의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자유와 행복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일까 등등의 생각으로 확장됐다. 

그런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보면서 길들여진다는 것이 꼭 순치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길들여지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며, 그것이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퍼주는 사랑보다는 때론 절제도 하며 인내하는 자세를 통해 행복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갈등을 최대한 피하려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 모든 걸 내주는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길들여짐이란 밀고 당기는 소위 밀당의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조건 내어주거나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에도 균형은 필요하다. 길들여짐은 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세상에 나쁜 사랑도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