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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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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변화시켜 온 중요한 일부분임은 사실이다.  특히 산업혁명과 같은 대변혁은 증기기관의 발명이라는 하나의 기술적 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농사기술의 발전과 그 도구들의 발명으로 노동력이 대체됨으로써 1차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2차산업으로 이동하게 된다. 물론 이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2차산업이라는 분야는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이런 거대한 물결은 또다시 2차 산업의 3차 산업으로의 이동을 촉진했고 이제 21세기를 맞이해서 다시 한번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즉 서비스 분야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노동력이 대체되고 또한 1,2 차 산업에서 계속되는 기술의 발전은 점차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그럼으로 인하여 실업자들이 대폭 증가하게 되고 3차 산업의 기술화로 인해 정보산업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의 수입격차가 벌어져 빈부격차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는 순간 4차산업이라는 분야가 이러한 노동력을 흡수해야 하겠지만 아직 이런 분야의 태동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되어진 노동은 어떻게 될까?

일단은 노동시간을 단축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나누어 갖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리프킨은 이부분에서 대량의 실업자와 빈부격차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깊어져 혁명과 같은 분노로 표현되어지거나, 많은 사람들이 나머지 노동시간을 나눠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레저시간 또는 여유시간의 확대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두 방면으로의 길을 내비친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후자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며, 그 방법으로서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라는 새로운 분야를 제시한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은 지금의 시민단체나 자원봉사와 같은 자발적 집단의 생성과 이들의 경제적 활동을 이야기하며,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기존의 노동자들이 이분야에서 일을 했을때 세금 감면등이 주어지고, 정부나 기업체에서 이런 분야를 만들어 새로운 노동력을 흡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만들기 위한 재원은 부가가치세를 통해서 많은 부를 창출한 사람들로부터 거둔 세금을 실업자들에게 주는 방법과 기업체에 주어졌던 세금감면 정책을 철회하고 이 분야로 돌리는 등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이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비록 4차산업이 되지는 못하지만 분명 새로운 분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리프킨이 제시한대로만 이 세계가 움직여준다면 분명 미래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직시해보더라도 실업자의 증가와 빈부의 격차라는 현상은 분명 들어맞고 있으며 시민단체나 자원봉사집단 또한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시간을 나눠갖는다거나 빈부격차의 해소에 대한 방법은 도대체가 희망이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듯이 노동시간을 실업자와 나눠갖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다운쉬프트 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노동시간의 단축은 환영할지 모르나 수입이 주는 것은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필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그것에 맞는 생활방식의 변화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유행하고 있는 웰빙과 다운쉬프트에 대한 참다운 뜻을 알고 그것에 맞는 삶으로의 이동도 한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변화마저도 소비패턴속으로 흡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혜자는 몇명의 소수에게로 돌아가 그들만이 풍족한 삶을 영위한다. 진정 우리가 필요한 것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가 이익을 얻기위해 취한 행동이 결국 모두를 공멸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적게 벌고 적게 일하고 많이 놀 수 있는 세상, 소비의 유혹을 떨쳤을때 가능하다. 모든 것을 자본의 속성으로 몰고가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유토피아의 꿈을 이룰 수 있을것인가?

 

진짜로 놀 줄 아는 인간이 되자. 시간에 잠식되지 말고 돈에 잠식되지 말고 진짜로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참다운 놀이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이 되자. 논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 기계가 대체해버린 노동을 맘껏 유용하자. 그러기 위해선 남을 위해 사는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경제로의 진입. 그것을 통한 대동제. 유토피아는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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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0-0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만만치 않은 책으로 보이는군요... 사실...저도 읽을려고 사놓았답니다만...
곧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불끈!!

icaru 2004-10-0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제가...이이의 소유의 종말을 읽고, 썼던 리뷰의 제목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란 단어를 넣어 붙였었는데...님도 그러네요..헐...!! 이런 일치는...음...ㅋㅋ

하루살이 2004-10-0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다음 책으로 소유의 종말을 읽으려고 준비중인데. 정말 ... 음...
 
book+ing 책과 만나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지음 / 그린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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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읽는다면 그 속엔 항상 정답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를 내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책읽기는 그래서 중압감을 가져온다. 정답을 찾아 읽는 책은 그렇기에 따분하며 읽는 것도 어렵다. 특히 사상서나 철학서는 계통 등을 따져가며 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다. 문학이 아닌 이런 책들은 한치의 오독도 허용할듯 싶지 않다. 그래서 때론 마치 참고서 마냥 누군가가 원전을 읽고나서 가볍게 해석해주는 책들을 읽어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책과 만나다> 라는 이 책은 마치 그런 참고서의 모양을 띠고 있다. 그러나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들은 결코 정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책을 읽고 나서 자신들 나름대로 소화해낸 것들을 여과없이 토해내고 있다. 독자가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이야 큰 문제는 아닐것 같다. 무엇보다도 책에서 어떤 모습을 발췌해냈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에 관심이 있는지, 관심이 있다면 그 책을 한번 읽어보고 저자와는 다른 색깔의 소화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지가 중요할 듯 싶다.

또한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한번 추스려보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여진다. 우리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것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쳤을 때 어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 책 속에선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눅눅히 스며들어 있다. 운명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법들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아마도 그런 경향의 사람들이 모여 연구실에 모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운명을 거부하고 최선의 방법을 주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 하던가. 하지만 이런 최선과 차선에 대한 제시는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능해진다. 어찌할 수 없을때 우리는 왜 어찌할 수 없는지 처음부터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듯 싶다.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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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7-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깃~!

하루살이 2004-07-0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권이 넘는 책에 대한 이야기. 읽다보면 꼭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 몇권 생기게 됍니다. 행복해지는거죠.^^ 저같은 경우 가비오따스,미덕의 불운,인간의 양,한서이불과 논어병풍,마르탱게르의 귀향을 꼭 읽고 싶어지더군요.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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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문체에 대하여, 그리고 그 글에 대하여 칭찬하는 글을 여기저기서 본다. 난 개인적으로 문체에 대한 감이, 또는 인식이 전혀 없어 아직 누가 어떤 문체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분별을 잘 못한다. 영화라면 또는 음악이라면 어느 정도 감독과 작곡가에 따라 어떤 색깔을 찾아내곤 하지만 영 글은 잼병이다. 그래도 문체는 잘 모르지만 "어 이거 굉장히 잘 썼는데" 따위의 어설픈 평을 감히 내뱉곤한다. 최근 읽었던 책중에선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이라는 글이 기억 속에 남는다. 그리고 마침내 접하게 된 김훈의 이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정말 청산유수라는 느낌이다.

감정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그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작가의 생각대로 또는 마음대로 나의 생각과 마음이 같이 흘러간다. 정말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 강까지 이르는 마냥 기분도 생각도 푹 젖어버린다. 그러나 잠시 물에서 발을 떼 흙으로 나오는 순간 그 시냇물의 근원에 대해 의심을 가져보게 된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신산스러움, 대학 졸업식장의 아수라장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정말 공감이 간다. 하지만 왜 밥법이가 고단해야지만 하는지, 졸업식장 행사에 졸업생은 없는지를 잠깐만 생각해보면 그의 논지를 따라가는 것이 불편해진다. 즉 그의 청산유수같은 말은 저 산꼭대기로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중류에서 섞이는 다른 시냇물과 같은 것이다. 즉 그가 바라보는 생각의 근원과 내가 바라보는 생각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정말로 밥벌이는 고단해서는 안되지만 현재의  밥벌이가 고단하지 않는 자는 실은 고단한 밥벌이를 하는 사람에게서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며, 졸업식장에 졸업생이 없는 것은 학교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줬는지 학생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하며, 스승이라고 느낄 수 있는 애정어린 교수를 또한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터이다.  즉 그의 감정과 논리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흘러가지만 난 현실이 현실이게 된 과정을 못내 인정할 수 없기에 그 물줄기의 근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이 정말 잘 쓰여진 것 만큼 위험의 수위도 커짐을 느낀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이 오히려 그 희생자들에게 가 있을 수도 있음을 상상하면 못내 그의 글의 날섬이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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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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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의 <간판스타>가 희생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는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처럼 줌인과 줌아웃, 패닝으로 짜여진 만화의 한컷 한컷은 글보다도 훨씬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  몽타쥬 기법과 같은 장면의 충돌없이도 서서히 감정을 격앙시키는 컷의 구성은 탁월하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사회적 제도, 역사의 흐름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참을 수 없는 분노, 그러나 그것은 누구를 향해 폭발되어지는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판 어머니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원시인처럼 거친 근육으로 표현되어진 경쟁사회속의 타인들, 끌려가는 아버지때문에 또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때문에 토악질을 해대야 하는 주인공,  가난하기에 왕따 당하는 딸을 위해 손을 꼭 쥐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어머니 등등. 주먹을 뻗어 닿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분노를 터뜨릴 대상이 되어 버린다. 가족과 동료를 향한 거침없는 분노. 실은 세상을 향한 분노여야 옳다. 그렇기에 한 컷 만화 속의 뒤틀어져버린 관계들은 더욱 서글프게 다가온다. 

누가 우리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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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스타 - 이희재 단편집
이희재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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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가난한 사람들의 지난한 삶들이 녹아 있는 만화책이다.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아가씨, 쓰레기 리어카를 끄는 청소부 아저씨, 운수도 무지하게 나쁜 택시운전사, 일약 등단과 돈을 한꺼번에 쥐고자 했던 룸펜, 딸로 태어난 설움을 간직한 막내딸 끝지 등등.

흔히 밑바닥 인생을 읽어가다 보면 그들을 그 자리에 서게 만드는, 그리고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늪과 같은 사회에 대한 분노를 먼저 느끼게 마련인데, 간판스타는 오히려 눈물을 머금게 만든다. 그 굵직한 필체의 그림 속에서 이렇게도 연약한 마음의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에 경외감을 느끼게 만들 정도다.  경숙이, 황씨, 끝지가 보여주는 희생적인 삶, 자신을 버림으로써 가족을 살리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에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목중엔 희생도 분명 포함되어 있을터이다. 아마 그래서 우리 주위엔 바른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눈물을 머금는 것도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내 주위엔 정말로 희생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꿈만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실재한다면 희생이란 단어는 사전에서 사라져버리지 않겠는가? 희생은 사회가 강요하는 것이다. 못난 사회를 아름답게 가려보기 위해 수많은 미담을 만들어낸다. 사회 자체가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라질지 모른다. 난 더 이상 황씨나 경숙이와 같은 사람들이 사회에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마음은 영원히 간직하되 그것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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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4-2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덕의 강요.악덕보다 더 싫은 것입니다.왜 약자에게만 예절과 미덕을 강요하는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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