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희망보고서 유한킴벌리
KBS일요스페셜 팀 취재, 정혜원 글 / 거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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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있다. 평생직업이라는 말이 그 사라진 곳을 채우고 있다. 그나마 자신의 직업을 꾸준히 계속해 나가는 것도 행복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는게 현실이다. 이직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떠밀려 선택되어지게 마련이다. 즉 직장이 자아실현의 장소로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돈을 벌기위한 생산공장 그 이상의 것이 아니게 되 버린 것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그런 모양새로 다가오기 시작할때 과연 나는 얼마나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야망을 지니고 있지 않은 대다수의 소시민들에게 그곳은 그저 어떻게든 하루를 버텨내고 훌훌 털어내버리고 싶은, 그래서 결코 오랜 시간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 감옥보다 못한 어떤 곳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그 속에서 내 모습도 찾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회사는 얼마만큼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까? 회사가 사람을 자산의 중심에 놓지 않고, 그저 비용의 일단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회사도 사람도 모두 성장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 그런 세상의 변모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희망을 말하는 회사가 있다. 바로 유한킴벌리. 4일 일하고, 4일을 휴식하며, 수많은 시간을 교육에 투자하는 회사. 평생고용을 보장하고, 사람들 또한 평생직장으로 삼고싶어하는 곳. 자아실현이라는 이상이 실현되어지고 있으며, 회사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곳. 그저 부럽다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한 정말 부러운 곳이 대한민국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런 회사는 저절로 생겨났을까?

회사는 경영진만으로 또는 회사원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하는 갈등의 노사관계. 노사는 회사를 구성하는 중요요소이면서도 항상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었다. 태생이 그렇다고 할수도 없을텐데 왜... 유한킴벌리의 노사관계는 정말 모범적이다. 노조원들이 노조 집행부를 믿기보다는 경영진을 더 믿을수 있을정도로 신뢰관계가 돈독하다. 이런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유한킴벌리 또한 다른 회사들처럼 극한의 노사관계 대립을 거쳐왔다. 우리가 지금은 부러워하는 4일 교대를 위한 4개조 2교대의 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도 큰 어려움이 따랐다. 맨처음 이것을 도입하고자 했을 때는 노사가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사이였기에, 조 개편으로 인한 남은 인력에 대한 처우, 그리고 인적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오히려 기회가 찾아왔다. 타회사들이 사람을 자르기 시작할 때 유한킴벌리는 일이 없어서 놀아야 하는 절반의 인력에 대한 고민에 처하게 됐고, 노조는 할 수 없이 구조조정의 회오리를 피하기 위해 4교대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경영진은 여타 다른 경영진처럼 뒤에 칼날을 숨기는 비열한 형태를 보이지 않고 정직하게 노조와 상의해 인력을 재편한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정착되어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회사를 전적으로 믿게 되고, 그런 믿음 속에서 생산력은 극도로 올라가게 된다. 흔히 생각하듯 인력으로 인한 비용의 증가가 회사의 경영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의 극대화를 통해 오히려 이익을 더욱 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경영진은 매달  회사의 재무구조를 노조집행부에 설명하고, 평노조원들은 2,3개월에 한번씩 사내 랜을 통해 언제든지 자유롭게 회사의 경영실적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노사갈등의 큰 원인중의 하나인 임금 문제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투명경영과 도덕경영을 통한 노사의 신뢰가 바탕이 됐을때 지긋지긋한 봉급쟁이가 아닌, 일하고 즐길줄 아는 빵과 장미를 모두 지닐 수 있는 참자아를 만들어가고, 그 참자아를 통해 회사 또한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유한킴벌리는 바로 우리 노동자들의 마음을 푸르게 푸르게 만들어주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다. 이 씨앗이 어서 빨리 자라 대한민국 모든 회사들 속으로 뿌리를 내려 행복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희망이 나 혼자 마음을 먹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낄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중심부에 서 있기에는 노동자 개개인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  경영진과 정부가 깨우치지 않는한 아무리 노동자가 목소리를 드높이더라도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일지도 모른다. 유한킴벌리 또한 그 첫발은 경영진이 내디뎠다. 물론 희망을 이루어낸 것은 노사가 함께였지만 말이다. 다른 회사들이 그런 희망을 실현하려면 실제로 그 첫발이 필요하다는 것에서 현실의 비극 또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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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
다니엘 코엔 지음, 주명철 옮김 / 시유시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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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5월 30일) 프랑스에서는 유로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부결됐다. 프랑스 국민들은 유로헌법이 통과함으로써 유럽이 하나가 되면, 값싼 노동력의 동구권 노동자가 대거 유입됨으로써 그나 저나 높은 실업률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 같다. 즉 세계화로 인한 직격탄이 노동자들에게 쏟아짐으로써 선혈이 낭자할듯 하니 국민이 하나되어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세계화라는 용어의 정의가 다소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저자가 말하는 세계화와 현재 논의되고 있는 세계화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듯하다.)

저자는 이 책이 쓰여질 당시인 10여년 전부터 이런 생각은 세계화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주장해 왔다. 개인적으로 나 또한 세계화를 거부하는 입장에서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당혹감을 안겨준다. 저자의 주장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이해되어지고, 설득력을 지녔다면, 아마도 이 투표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대중이라는 것이 과연 정보를 획득하고, 분석하며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성적 판단을 하는 것인지는 논외로 하고, 앞으로 계속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국민투표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사뭇 궁금하다. 

아무튼 저자가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주장과는 정반대로 세상이 향해가고 있긴 하지만, 일단 저자의 주장을 한 번 들어볼만한 값어치는 있을듯하여 계속 읽어나가 보기로 하겠다.

책의 제목 <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은 마치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세계화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화가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이 세계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가, 실제로는 결과가 원인이고, 원인이 결과인 경우가 있음을 지적하며, 불평등 또한 인과관계의 잘못된 추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예로는 신석기 인류가 정착을 하게 된 것이 식량부족으로 인한 농경사회로의 진입때문이 아니라, 정착후 종교정신과 맞물려 농경사회로 진입했다는 학설을 내놓고 있다. 정착촌과 곡식의 흔적중 어는 것이 더 오래되었는가 하는 과학적 증거물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먼저 전 세계에서 가난한 국가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아프리카를 예로 들며, 그곳은 여성에 대한 착취, 농촌에 대한 착취, 엘리트 집단의 부정부패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아시아 4용이 성장한 배경에는 절약의 정신, 투자와 노동을 통한 무역 수출정책이 빛을 발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세계가 아닌 한 국가를 바라보았을 때 10,20년 전 보다 계층간 수입차가 훨씬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른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 세계화와 3차산업의 발달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고, 값싼 노동력이 들어오게 됨으러써 선진국의 경우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진국, 여기에서는 프랑스가, 후진국들과의 무역이 전체 무역량의 3%를 겨우 차지할뿐이며, 노동력의 유입또한 그 수준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의 유입이 일자리를 줄어들게 만들다거나, 빈부격차를 크게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전체 일자리수도 없어지는것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기 때문에(물론 조금 못 미치기는 하지만) 실업률이 높아질수밖에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빈부격차와 일자리 부족은 <선별적 짝짓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선별적 짝짓기란 예를 들자면, 조용필이 공연을 할 때 최고의 세션과, 최고의 음향, 최고의 무대팀을 이용해 최고의 공연을 만들어내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최고는 최고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일을 만들어가고, 나머지는 나머지대로 짝을 지어 일을 해 나간다는 것이다. 최고의 짝들은 나머지 그룹이 자신들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며, 점차 그 수익의 차이를 벌려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전처럼 하나의 큰 조직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쪼개진 것들이 하나로 모여 일을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생산조건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근거로는 마이클 크레머의 오-링 이론을 들고 있다. 원과 같은 연결고리들로 이루어져서 하나의 커다란 생산품을 만드는, 따라서 포드주의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화석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선별적 짝짓기는 단순히 국가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로 향하며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불평등이 공고화 되고, 이것이 세계로 확대되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선 대중들이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지도자들 또한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견해를 가진 대중들이 정치적 행동을 행하지 않는한, 언젠가는 이런 불평등의 확대가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듯 싶다.

저자의 생각들과 근거가 기존의 관념들을 깨뜨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띠워준다는 점에서 책을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성장률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이 실제적인 생산증대로 인한 부의 창출이 아니라, 세계적 투기 집단의 투기를 통한 단순한 화폐의 창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또한 불평등의 완화라는 생각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인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체계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없어 보인다. 인간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없이 일단 커져가는 불평등과 불신의 추세만을 늦춰보자는 미봉책이 아닐까 염려스럽다. 물론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미봉책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적 삶을 향한 단계적 실천행위로서, 초입에서 이루어져야 할 행동양식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자의 주장을 무리없이 받아들을수도 있을듯하다.

(세계화나 경제 체제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 현실에 대한 구체적 돋보기도 들이대지 않은채 오직 꿈만 거창한 망상가의 지껄임이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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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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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비판적 지식인, 특히 자국인 미국에 대한 끊임없는 비평으로도 필명을 날리고 있다. 단순히 글로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시대가 원하는 진정한 교양인이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개인적으론 촘스키의 이런 겉모습만 알고 있을뿐 아직까지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이 책 또한 그의 세상에 대한 심층분석이라기 보다는 인터뷰를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그의 주된 생각의 요약본 정도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나와 같이 아직 그의 견해에 대해서 알고싶지만 섣불리 읽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입문서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짧은 시간의 인터뷰로 인해 그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논거를 들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의 주된 생각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않다.

이 책의 저자가 쓴 프롤로그에서는 촘스키가 전해준 교훈 한가지를 전해주고 있다.

기존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말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절대 믿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확실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지 말라는 것이다. 확인하고 심사숙고하라는 것이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기지의 사실에서 해방되라는 것이다. (중략) 자기만의 생각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도전의식을 키우면서 스스로 알아내려 한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내 목적을 어느 정도 성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12쪽)

이것은 세상에 당연시여기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해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런 의심은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줄 것임을 믿는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들과 기존의 가치관들, 그리고 의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해 한번이라도 의심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때론 삶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는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진짜 인간답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놓치고, 꼭두각시 마냥, 또는 줄로 조정당하는 마리오네트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마리오네트임을 잊고 운명의 주인처럼 줄을 잡아당기고 있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또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운을 자신은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지도.

개인의 이익을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가치로 찬양하는 이데올로기, 특권층과 권력층을 위한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감정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12쪽)

즉 감정의 상실 대신에 소유로 대체되는 현재의 사회에서, 소유만을 확대해 나가려는 삶의 태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마리오네트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진다.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젼 등을 운영하는 거대기업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로 대중은 서로 소외되어 갈 뿐입니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들은 아주 실리적으로 접근합니다. 대중을 삶의 표피적인것, 즉 소비에 몰두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29쪽)

물론 촘스키의 이런 말이 과장되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행복감을 어디서 느끼는지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아챌 것이다. 무엇인가를 품에 안는 것, 그것을 위해 무엇을 지불하든 자신의 손에 쥐어질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로 변해가지 않았는가?

교육제도가 선별 작업을 합니다. 교육제도가 순종과 복종을 조장합니다. 이런 제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제됩니다.(71쪽)

사회에서 원하는 생산력의 일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그 댓가로 돈을 쥐면서, 그것을 다시 소비할 때 행복감에 젖어든다는 것. 그 것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감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문제이지 않을까? 우리가 그 행복이 전부라고 배워오지 않았는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수많은 언론매체들을 통해 공고해져 간다.

지난 20여년 동안 국가 정책은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면서까지 다국적 기업의 권한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입니다.(59쪽)

우리가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소비의 과정 속에서는 수많은 소외가 발생합니다. 특히 다국적 기업의 제 3세계에 대한 횡포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채 그들의 선전된 이미지들만을 우리는 접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기업체들의 문화에 대한 원조나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위한 구원의 손길에 감명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를 위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손길이 실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훔쳐낸 것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신문에서 시장경제의 기적과 기업정신을 극찬하는 기사를 읽습니다.(80쪽)

더더군다나 최근의 자본주의는 오직 금융자본주의로 치닫아, 소위 말하는 돈을 가진 자가 돈을 벌 수 있는 제도로 굳혀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매일 약 20억 달러가 컴퓨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이 새로운 자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주인이 바뀔 뿐이빈다. 이런 자본의 압도적 다수가 투기성을 띱니다.(중략)외국에 투자되는 자본은 대부분이 경영 지배권의 확보를 위한 돈입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기업이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일 뿐입니다.(109쪽)

최근 이런 경향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론스타라거나 브리즈 증권 등등 뉴스 속에 등장하는 외국계 자본들이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촘스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신자유주의의 허울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그 변화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것일까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앞장서서 기존 질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할 것입니다. (중략)요켠대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169쪽)

즉 내가 앞장선다면 분명 난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을 것임을 다들 알고 있다는 것이죠. 앞장 선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른뒤에서야 비로소 그 열매를 사람들은 따먹을 수 있다는 것을. 따라서 이런 횡포를 막겠다는 실천적 의지만으론 좀체로 변화의 흐름을 꺾을 순 없을 겁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조직화입니다.

이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전보다 이런 파괴공작 때문에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171쪽)

촘스키의 이 말을 듣다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언론에서 다루는 노조에 대한 보도가운데 노조 입장을 보여준 적이 얼마나 될까요? 교통 혼잡을 가져온다거나, 한국에 대한 인상을 나쁘게 한다거나, 생산력 손실이 몇백억이라던가, 아니면 노조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는 보도들로 가득합니다. 도대체 왜 파업을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들춰보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노조가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노조라는 조직도 그것이 조직의 양태를 띠는 한 어떤 부조리가 개입할 여지가 곳곳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조의 잘못된 한가지를 마치 노조자체의 문제로 몰아가는 마녀사냥식 보도로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들을 곧이곧대로 흡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잃고 살아가는지, 진정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하며, 세상이 어떻게 나를 현혹시키려 하는지 간파할 수 있도록 철저히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꿈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서도 안됩니다. 즉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의지와 마주잡은 손이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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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5-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님의 리뷰를 읽으니... 전에 이 책을 읽을 때... 정수리로 뭔가 차가운 게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살아나네요~
요호...참 기네요... 하지만...구구절절...옳습니다... 촘스키... 그리고 님의 리뷰가말이지요...

하루살이 2005-05-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모르면 잔소리가 많은 법이죠. 제대로 안다면 한마디로 딱 . 마치 요술지팡이처럼. 언제쯤 그런 지팡이 하나 가질수 있으려나...
 
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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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선진국과 같은 주주 중심의 기업, 출자총액 제한의 도입으로 대기업은 배당액을 늘리고, 자신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투자를 줄인다. 투자가 줄어듬과 동시에 실업률은 증가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설비나 기술에 대한 투자가 줄어듦으로써 미래의 경쟁력 또한 떨어질 것이다. 서구 특히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원하는데 실상 미국 또한 기술개발비에 정부가 엄청난 원조를 하고 있으며 유럽의 선진국, 특히 핀란드나 노르웨이 등은 토지의 국유화, 복지를 위한 세금 등 정부는 전혀 그 사이즈를 줄이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의 경우는 재교육이나 복지 측면에서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비정규직을 늘려왔지만 서구의 경우엔 오히려 노조의 활성화나 탄탄한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는게 사실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기업 확장에 대한 비난이 크지만 이렇게 다양한 사업확장은 위험을 분담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사업을 개발 확대시킬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분명 현 정부가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 내용이 정말 진보적인 것이냐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현 정부는 진보라는 이미지를 갖고 태어났기에 그 이미지에 걸맞는 개혁인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없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현 정부는 연착륙을 시도하지 않고 과거와의 절연을 통한 급격한 개혁을 시도한 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진보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분명 보수적인 제도이며 현 개혁이라는 것이 빈부의 격차를 더  벌임으로써 노동자를 위한다기 보다는 자본가, 경영자를 위한 것으로 밖에는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는 오만과 편견으로 똘똘 뭉쳐 지금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에 일견 설득당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내세우고 있는 다양한 자료 덕택이다. 특히 유럽의 노르웨이 핀란드 스위스와  영국과 미국의 실태,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그의 논리를 탄탄하게 만든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보들이 언론에서 취사선택되어지거나 정부의 일방적 발표에만 얻을 수 있는것들이라는 점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적으로 용납되어지지 않는 재벌에 대한 인정 또한 여러가지 자료를 통한 실증적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진보적이라 믿었던 정부의 제도들이 실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분노케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선진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복지제도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유연성만을 강조하는 작태에 대해선 그 피해자들이 주위에 속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에겐 아직도 작은 정부 보다는 건실한 정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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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기 박치기 2007-09-05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분명 보수적인 제도"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념이 제도의 형성이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순 있겠지만 그 자체로 제도일 리도 없거니와 보수적이지도 않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보수의 대항은 진보, 진보의 대항은 보수라는 이분법에 매몰돼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법이 지닌 문젯점은 -주의만 붙여 보면 금세 드러납니다. 보수주의.. 물론 성립하죠. 그럼, 진보주의는? 보수주의란 것이 꽤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지고 적용되어온 이념이므로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나마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진보주의란 대체 뭐냐는 거지요?

보수주의의 대항은 진보주의도 아니고 그것으로 일원화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따위로 말이죠. 진보 vs 보수로의 구분은 사회문화 현상을 이해함에 있어 전보다 훨씬 더 제한적으로나마 사용될 수 있을 뿐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확실히 보수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혁적입니다. 개혁에 대한 타성적 규정을 벗어버린다면 말입니다. 리뷰 제목으로 다셨듯이 개혁이 곧 진보가 아닙니다. 개혁은 그저 현재의 구성원리나 구조, 제도 따위를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개혁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냐는 점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생뚱맞게 여기는 것과는 달리 보수주의 개혁노선이니 자유주의 개혁노선 따위의 표현이 현실에서 얼마든지 성립될 수 있는 거죠.

가령, 대처나 레이건은 개혁가였습니다. 단지 당시의 현실을 바꾼 그 개혁의 이념적 기반이 (이전과는 다른 보다 새로윤 유형의) 보수주의였을 뿐인 거죠. 그런 면에서 볼 때 노무현 정부는 확실히 개혁을 꿈꾸고 시도해 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개혁의 내용과 방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남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보수적이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한국사회를 여러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속성이 진정 보수적이라면 한국 안팎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 사회가 지닌 속성이나 기존의 제도, 발전전략 따위를 존중하고 그 토대 위에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죠.
 
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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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대신 접속이 중심이 되는 시대, 이성 대신 감성이, 역사 대신 찰나로 삶의 축이 이동된다는 저자의 말엔 동감이다. 특히 이렇게 사이버 공간에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지켜볼땐 정말로 접속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최근의 자동차 광고나 정수기 광고에서 보듯 상품을 사는 것보다는 리스로 변화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소유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상품의 소유보다는 체험을, 즉 깨끗한 물에 대한 체험이 중요하기에 정수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정수기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요, 그 과정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과 받는 쪽은 체험을 상품화시켜 관계를 지속한다는 그의 전망은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적 흐름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하더라고 저자가 책에서 직접 말하듯 인구의 20%만이 이 경험을 만끽할 뿐 나머지 80%는 생계유지를 위해 아직도 접속보다는 소유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접속권의 유무가 미래의 문제가 될 것이라는 측면도 실은 접속을 할 수 있는 경제적 힘, 즉 화폐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더라도 그와 유사한 숫자의 힘을 가지고 있는냐, 즉 소유하고 있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즉 세상이 접속을 중시하는 시대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밑바탕은 여전히 소유의 문제가 남아있을수밖에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작가가 우려하고 있는 것과 같이 문화의 상품화로 인한 다양성의 상실 등은 접속의 시대든 소유의 시대든 상관없이 목격되어지고 있고 예견되어질 수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작가의 말처럼 소유가 아닌 체험의 상품화가 이런 문화의 상품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문화를 향유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지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시간적 생태적  문화적 환경 모두가 각기 다를진데 시간과 공간이 무너진 접속의 시대에선 이것이 모두 무시되어지고 오직 한가지 유형만이 살아남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누군가는 세상 어디를 가도 맥도날드와 콜라라는 먹거리를 먹을 수 있어 안심하고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난 이 생각에 아연실색했다. 인도를 가서 카레를 먹고, 프랑스에 가서 달팽이 요리를 먹고, 한국에 와서는 김치를 먹고, 일본에서는 스시를 먹고... 이래야 여행을 갖다 온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지역적 먹거리는 분명 위험을 다분히 내포한다. 중국의 향료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여행내내 쫄쫄 굶었다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맥도날드가 좋은 음식일수도 있겠다. 또한 자신과 맞지 않는 음식에 몸이 아파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먹거리라는 모험마저도 포기한채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건물들을 구경한다면 도대체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접속의 시대가 시공간을 초월하고 사람들간의 차별을 없애주는 장점이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을 접속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누가 지니고 있으며, 누가 접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권리 또한 누구에게 주어지는 가도 큰 문제다. 광장과 같은 공공의 장소가 사라진 자리를 대형 상점의 거리가 대신하면서 발생하는 개인의 소유권과 공공권의 문제 등은 접속의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분명 접속이 대세이며 문화가 상품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충족감을 줄 수 있게 만드려면 사람간의 직접적인 접속이 필요하며 상품자체로 고갈되어지지 않는 문화 또한 계속 양산되어져야 할 토대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겐 메마른 감성과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기 위해 다양한 오프라인의 동호회와 지역사회의 잔치가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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