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블리치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블리치 2기가 끝났다. 블리치 2기는 소울 서사이어티와 현세에서 사신의 역할을 맡았던 이치고를 중심으로 바운트라는 인간도 신도 아닌 종족의 탄생과 복수를 다루고 있다.

재패니메이션의 일반적인 특징인 대결구도를 통한 성장의 모습은 이치고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개인을 넘어선 끈끈한 동료애 또는 가족애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덤이자 주제가 된다. 이런 전형적인 구도에도 불구하고 109편에 달하는 블리치를 지켜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바운트는 인간으로부터 악마라 불리며 소외를 받는다. 이들은 소울 서사이어티의 실패한 과학실험 때문에 비극적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소수자로서의 핍박받는 삶을 계속 영위해야만 하는 숙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또는 소울 서사이어티와 인간에 대해 복수를 꾀할 것인지...

이치고는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치고 또한 일반 인간과 다른 소수자다. 그래서 그는 바운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길은 다르다. 어떻게든 화해하고 함께 가려 한다.

블리치2의 전체적인 구도는 소수자의 길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은 이치고의 성장에 있다. 아이가 기어가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걷는 것을 보는 것의 기쁨, 말을 배우는 것의 신기함. 성장은 이런 기쁨과 환희를 가져다 준다. 그래서 대부분 성장을 말하는 작품은 흥미진진하다. 이치고는 영혼을 내걸고 성장한다. 또 목숨을 내걸고 성장한다. 성장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성장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다. 보다 똑똑해지고, 보다 강해지고, 보다 지혜롭고... 그러나 그 성장의 과정은 생략해버리고 싶다. 그러나 블리치2는 성장이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치고를 응원하고 그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꿈틀대는 그 무엇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무엇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희생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만화는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장이라는 것이 결코 달콤한 열매만을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 성장을 통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늘어나는 것이지만, 결코 성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피터팬의 욕망과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 그 가운데서 우리는 흔들린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치고가 사랑스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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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면 새가 날아와 노래를 부른다.

아침 단잠을 깨우는 새의 노래는 경쾌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안테나.

그 속엔 사람을 유혹하는 수많은 영상과 음악, 소리가 섞여 있다.

그리고 리모컨 하나로 우리들 앞에서 거침없이 토해낸다.

그러나 그 안테나 위에서 새는 오직 하나의 음성만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 소리는 노래가 되어 달콤한 소리로 다가온다.

비록 아침의 단잠을 깨우지만

정보의 홍수와 쓰레기 사이에서 흘러넘치는 전파의 분출보다 달콤하다.

....................

새처럼

그렇게 수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 위에서도

오직 달콤하게 노래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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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디자이너 최윤희씨는 "행복은 자신의 가슴 속에 있다"고 하네요.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다보니 행복해지더라는 것과 일맥상통하겠지요.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하지 말고 마음가짐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진리.

그런데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일면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고개를 젓게 됩니다.

먼저 이렇게 비갠 뒤 상큼한 하늘을 보면서도 마음은 왔다갔다 합니다. 즐겁게 바라보면 파란 하늘이지만 괴로운 심정으로 바라보면 멍든 하늘이 될테죠.

맞아요. 정말 그래요. 내 마음에 따라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지금, 난 현실을 바꿀 필요가 없겠지요.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비롯해 카스트 계급으로 인해 피해를 또는 어려움을 겪는 계층들이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현실적 차별을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고통과 인내를 감수하는 일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행복과 변화 사이의 수많은 층들을 만납니다. 누군가는 변화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금상첨화의 길을 걸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불행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생활할지도 모릅니다.

행복과 변화 사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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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선 친구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시간이 지나면, 즉 오래되면서 찰떡같이 붙어있던 것들도 느슨하게 멀어지곤 한다.

둘 사이를 꽉 맺어주던 접착(제)의 힘이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또 오래되면 녹이 슬고, 끊어지고, 쇠퇴하고...

그렇게 스러져간다.

가까우면서 또 오래 사귀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세월이 더께처럼 정을 쌓아주면 다행이겠지만

세월은 그렇게 자꾸만 멀어지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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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8-06-0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에 서글픈 적은 없었나요?
 


상공 300m

기구에서 뛰어내린다. 심장은 쿵쾅쿵쾅.

군인들의 훈련이라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은 낙하산이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 덕분.

 

나의 낙하산은...

그리고 너에게 내가 낙하산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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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5-2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 점, 점 더 커지는 믿음의 정체는 사랑의 확신인가요?
마지막 사진의 금색 낙하산이 꼭 풍경(절집의 처마에 달려있는 종)처럼 보입니다.
땡그렁~ 사랑의 신호가 납신다.ㅎㅎ

하루살이 2008-05-27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이 불어야 풍경도 울리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