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의 과학
도서관에서 영어책 읽다가 너무 졸려서 일어나 서가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책이다. 다 읽지 않고 챕터 4, <보살피는 뇌>를 읽었다.
어떤 형태이든지 섹스는, 그리고 섹스에 대한 관심 결여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 측면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용되는 사회적 규범과 외부의 압박이 생물학적으로 깊숙하게 새겨져 있는 욕망과 경쟁할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정교하게 분리하는 것이 현재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자기 고유의 개인 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측면 중에는 보편적으로 타고난 성적 지상명령sexual imperative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사랑에 빠질 때 경험하는 육체적 간절함,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고 보호하려는 맹렬한 욕구, 심지어는 사랑을 위협하는 사람을 향한 질투심 어린 적대감 등 이 모든 필수적인 감정 상태는 섹스와 육아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도록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한 격렬한 신경화학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142쪽)
성적 지상명령이라. 유전자의 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그 원대한 힘, 그 멈추지 않는 힘이 섹스를 중심으로, 그러니깐 섹스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러니까, 『여성성의 신화』가 개정되기 전, 『여성의 신비』로 읽히던 시절, 한글책 구하기가 원서 구하기 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에 베티 프리단의 책을 처음 읽고, 나는 하염없이 흥분했다고 한다.
'프로이트'에 정면으로 맞선 것에 더해 '말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위대한 여성의 통찰은 가히 충격적이어서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야만 했는데. 여성주의 주장의 한 면이 본질주의일 수도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에는 이건 또 뭔가요?의 혼란이 어김없이 찾아왔으니. 남녀가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으며, 성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의 다른 면은 여성주의의 이론의 최전선(정희진쌤 표현)인 도나 해러웨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그냥 두고 나선다. 다만, 과학, 특히 근자의 뇌과학이 여남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2. 아주 작은 습관의 힘
8월이 다 지나고, 곧 9월이라니. 얼마 남지 않은 2005년에 작은 성과를 만들려면 어찌해야 하는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변화나 성과, 혹은 성장과 성공이 정말 가능할까의 의문을 가진 채로. 일석이조를 예상하며 처음에는 영어로 읽었는데, 마음은 급하고 진도는 나가지 않아서, 결국 마무리는 한글책으로 했다.
실제 삶의 행로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여정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굳이 하나의 시나리오에만 자신의 길을 맞출 이유는 없다. (47쪽)
를 모르지는 않는데, 이걸 제대로 인지하는가는 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결국 내가 제일 궁금해하고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은 그것은 '성공'이란 무엇인가가 될 테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바라는, 내가 추구하는, 내가 꿈꾸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정돈되어야만 이 '아주 작은 습관'을 통해 현재의 나를 갱신하고, 변화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는,
분명하게 만들어라. 매력적으로 만들어라. 하기 쉽게 만들어라. 만족스럽게 만들어라.
를 적용해야 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혹은 나는 무엇을 이뤄내고 싶은가. 아주 작은 습관을 통해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3. 쓰기의 미래
서문의 '쓰기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인가?'가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질문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해답은 '아니다'가 명확해 보인다. 이 책은 AI의 시작과 발달 과정, AI의 확산과 활용의 기술적 역사를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2004년 대학 작문 및 커뮤니케이션 회의 CCC는 다음과 같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모든 글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인간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 기계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쓰기의 기본적인 사회적 속성을 위반한다. 우리는 사회적 목적을 띠고 타인을 위한 글을 쓴다.
그런 정서는 조금도 낯설지 않다. 후일 찬사를 한몸에 받는 작문 교사가 될 에드 화이트는 1969년 이런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어떻게 쓸 수가 있겠는가?
(..) 어떤 이에게도 쓰지 않은 글은 도무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141쪽)
밑줄 긋고 싶었던 에드 화이트의 이야기는 오히려 '이상적으로' 들린다. 이미 오래전부터 AI는 신문 기사를 썼고,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했으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에세이를 쓰고, 급기야 소설을 쓰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겨지던 '창의성'은 이제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쓰는가. 왜 쓰려고 하는가.
<해제>에서 엄기호는 '셋이 추는 춤'을 제안한다. AI와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가 함께 삶이 담긴 자기표현으로서의 쓰기를 지향하자는 것(550쪽)인데,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가르치는 자는 진즉에 외면당할 것 같고, 배우는 자 역시 쉽게 쫓겨날 것 같다. 남는 건 AI, 승자는 AI 다.
인공 지능의 가늠하기 어려운 발전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실체가 없는 이런 지적 능력이 '몸'을 갖게 된다면, 그에 더해 공감 능력이 배가된다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실리콘에 새겨진 의식의 반란. 계산, 수리 능력에서 이미 인간을 압도하는 AI가 정보를 바탕으로 이 세계의 특정 사안에 대해 '판단'하겠다고 하면, 인간이 이를 제어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에 가까울 것이다. 'AI가 우리 종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진화 경로를 바꾸는 데까지(『넥서스』) 도달할 때, '쓰기'는 오히려 사소한 문제가 아닐까. 출현 이후로 한결같이 지구를 파괴하고, 이 행성의 주인 행세를 했던 무도한 인류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4. 금붕어의 철학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적 핵심으로서 반본 질주의
원본 없는 재현; 재현 이전의 현전은 없다
이성에 대한 불신; 기호의 유희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을 읽어가려고 했다. 각 이론의 핵심 주장을 찾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요약하면서 읽기. 데리다의 이론을 정리한 김상환 님의 주장에 근거한 저자 배세진의 설명을 차근히 따라가며 이 책을 읽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쓰기의 미래』에 의하면, 책에 대한 정보를 가공하고, 지식을 정렬시키는 요약, 발췌는 모두 무의미하다고 한다. 이는 AI가 인간보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인데,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맡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내용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보다는 텍스트를 끌어가는 저자의 '서술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더 주효한 읽기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단다.
<버틀러의 섹스-젠더 이분법 해체>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버틀러는 데리다의 기호의 해방론을 젠더 문제에 적용해 확장하면서, 섹스와 젠더, 남성과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 간 이분법의 해체를 강조했다. '젠더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설득되고 동의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 여자라는 '몸', 여성이라는 영토 속에 살면서 내가 느꼈던 한계와 절망의 기억 때문이다.
정리의 필요를 가볍게 떨치고 분홍 형광펜을 그어가며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은데, 저자가 완전 신나서 설명하는 게 단어와 문장 너머로 완연히 느껴진다. 그래서 나도 재미있게 읽으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