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어공주>를 검색했다. 내가 찾는 건 '인어공주'를 각색한 책 아니고, 안데르센판 '인어공주'. 제일 판매가 많이 된 책이 있어 책 소개를 따라 내려가는데, 헐. 여기에서 만나는 <시크릿가든>.












재벌 총각과 가난한 집(혹은 평범한 집) 처자의 만남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용이 일반적이었던 때에, 김은숙 작가는 인어공주 서사를 가지고 온다. 백화점 재벌(현빈)은 가난한 스턴트우먼(하지원)에게 네가 마음에 든다고, 사귀자고 말한다. 그렇게 신나게(?) 사귀고 난 뒤에는 인어공주가 그랬듯 거품처럼 사라져 달라는 조건을 앞세우면서 말이다. 하지원이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자, 현빈은 그럼 자기가 인어공주가 되겠다고 말한다. 네 곁에 머물다가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겠다고, 인어공주처럼.

갑자기 인어공주를 찾아보게 된 건, 그 밤에 보았던 발레 <인어공주>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인어공주는 다른 세계로 넘어온다. 물이 아닌 땅의 세계, 물고기가 아닌 인간의 세계, 지느러미가 아닌 다리의 세계. 걸을 때마다 칼로 베이는 듯한 고통을 겪게 되지만, 인간 세상에 동화되기 위해 그들 중 일부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어색함은 어린아이의 행동으로 이해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그 모든 것은 왕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인데, 왕자 역시 인어공주를 그런 식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언어 없이' 표정, 몸짓 그리고 음악으로 전달되는 인어공주의 애달픔. 왕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처절한 노력. 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 그를 구해준 사람이라 짐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

인어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된다. 인어로 돌아가기 위해 왕자를 죽이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기로 선택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생명의 은인인 인어공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썰미 없는 왕자를 원망하거나, 왕자를 구하지 않았음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웃나라 공주를 원망하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미움이 강고해질 때, 이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발현될 수 있다. 반대로 그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왕자를 구해 주었던 그 순간에 자리를 비웠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거나, 바닷속 마녀와 잘못된 계약을 맺은 자기 자신을 원망할 수도 있다. 내부로 향하는 원망과 후회는 우울로 수렴될 수 있다.

희생 말고 다른 답은 없을까. 자기희생 말고 다른 방식은 없을까. 나 자신을 다 불태우지 않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내가 없어지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내 사랑을 완성할 수는 없을까. 무위의 삶 이면에 사랑을 품고 있을 수는 없을까.


우리 동네, 우리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가 난리라는 <KPop Demon Hunters>(케데헌)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진우는 루미에게 '미안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서, 마지막의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은 뭐라 말할까. 그 말은 '사랑해'가 아니라, '미안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은 '사랑해' 혹은 '고마워'가 아니라 '미안해'일 거라고.

루미를 보호하기 위해 귀마의 공격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고, 자신의 영혼을 희생해 루미의 꿈을 완성한 진우의 최후는 희생일 수밖에 없는가. 완벽한 소멸 이외에 이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정말, 없단 말인가.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8-17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어 공주도 슬픈데 단발머리님 글도 슬퍼요. 저는 죽을 때 제가 먼저 죽는다면 남편한테 미안해 말고 고마워 하고 죽을래요.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남편이 저한테 잘하게 채찍질을 야물딱지게 막 해야겠어요
ㅎㅎ

단발머리 2025-08-19 20:3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고마워~~ 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더 오래사는 거 어떠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님, 우리 오래오래 살아요! 천세만세 만만세!!!

다락방 2025-08-17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제가 아직 보지 않았다는 소식 전해드립니다. 그런데 끝장면이 저렇다고요? 반드시 봐야겠어요! 그러나 싱가폴에서 저의 넷플릭스가 재생되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 저거 보러 한국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때로 어떤 선택은 딱 두 가지에서 주어지잖아요.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인어공주의 선택도 그래요. 왕자를 죽거나 내가 죽이거나. 꼭 그 방법 밖에 없는 걸까요? 왕자도 안죽이고 나도 살아가는 그런 방법은 없는걸까요? 저는 왕자를 죽이기도 싫지만 저도 죽기 싫거든요.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걸까요? 그걸 좀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찾아보면, 열심히 찾아보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단발머리 2025-08-19 20:57   좋아요 0 | URL
저도 일부러 찾아봤어요. 외국에서 하도 난리라고 해서요. 저는 재미있게 잘 보기는 했는데 외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지점에서 ㅋㅋㅋㅋㅋㅋㅋ 이 현상이 참 신기하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저도 왕자도 안 죽이고 저도 안 죽고 싶기는 한데... 만약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어공주가 왕자를 안 사랑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왕자를 구해줬다 해도 안 사랑했으면 되는데..... 그를 만나기 위해 인간 세계로 오지 않았으면 되잖아요. 바닷속 마녀와 다리와 목소리 교환하는 비합리적 계약을 맺을 필요도 없구요. 그러니깐 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은 사랑인 것입니다.

아...... 사랑.... 러브...

망고 2025-08-17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우는 오백살 넘게 살았으니 호상. 루미는 잘생긴 또래 만나서 다시 예쁜 사랑하길...ㅋㅋㅋㅋㅋ
죄송해요 이 아름다운 글에서 이런 몹쓸 댓글만 달아서요🤣

단발머리 2025-08-19 20: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님의 귀한 말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럼요. 갈 사람은 가야하죠. 진우씨 잘 가~~ 인사하고, 루미는 새로운 인생 시작하는 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5-08-18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최근에 초등학생들이 캐더헌에 나오는 노래를 떼창하는 장면(그것도 영어로) 을 보고 허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에 페이퍼로 적을 예정입니다.
시크릿 가든, 내용은 좀 그랬지만 재미는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에 절대 미안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미안한 일이 없어요 ㅎㅎ
아마 고마워라고 할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5-08-19 20:59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동영상 본 거 같아요. 시카고 버스 동영상 보셨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주 난리입니다. 흡사 분위기가 엘사 열풍과 비슷해요. 4세에서 8세까지의 모든 여자 아이들이 엘사였던 때가 있었잖아요.

미안한 일이 없어서 고마워~~ 라고 하실거라니 페넬로페님 너무 근사합니다. 저도 더 노력(?)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마워 파로 가보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25-08-18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케데헌 봤었는데 ‘미안해‘라고 말 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ㅋㅋ
안데르센 동화집 저 책 가지고 있는데 시크릿 가든에 저렇게 인용됐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구요. 고백 대사를 읽으니 기억 날 듯, 말 듯 하긴 합니다만…ㅋㅋㅋ
헌데 단발 님 마지막 두 문단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기억은 정확히 떠오릅니다.
마지막 말 ‘미안해‘ 말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부모님 두 분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직접 듣진 못했지만 엄마가 아빠한테 그동안 섭섭하게 했던 일들 있었다면 다 잊어달라고 미안했다고…그리고 고맙다고 말을 남기셨다고 아빠한테 전해들었어요.
아빠는 저한테 고맙다고 한 번씩 말씀을 하셨어서 그게 마지막 말이라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도 사랑해라는 말은 떠나보내는 사람이 하게 되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떠올려 보건대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말은 고맙다, 미안하다 그 말이 맞아요. 단발 님의 통찰에 존경심이 이네요.^^

단발머리 2025-08-19 21:17   좋아요 1 | URL
예전에 제가 어디선가(출처가 기억이 안 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 들었던 말인데요. 식물에게 좋은 말, 나쁜 말 하는 실험을 했는데 ‘사랑해‘라는 말보다 ‘고마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식물의 긍정적인 반응이 더 확연하게 나타났다...... 라고 그랬던 거 같아요.
사랑해‘보다는 ‘고마워‘가 나은 것 같고요. ‘미안해‘ 보다는 ‘사랑해‘가 나을 것 같습니다. 미안해 / 사랑해 / 고마워

책나무님, 미안해요. 책나무님, 사랑해요. 책나무님~~~~~~ 고마워요!!!

책읽는나무 2025-08-19 22:18   좋아요 0 | URL
미툽니다.^^🤭😍

단발머리 2025-08-19 22:22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