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났다. 세상에ㅠㅠ 이럴 수가. 휴가도 못 갔고, 많이 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책도 맘껏 못 읽은 거 같은데. 방학이 끝났다. 월요일 개학 기념으로 방학 중 최고의 이벤트였던 '스피박 실물 영접 후기'를 써보자.




강연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게 되면 앞에 앉는 편이다. 앞쪽에 앉을 때, 가운데 앉는다. 스피박 강연 때도 그랬는데, 앞쪽 두 줄이 초대석이었다. 나도 신청하고 간 건데, 맨 앞줄의 저 초대석은 신청 안 하고 '초대된' 사람들이 온 걸까 궁금해하면서 앞에서 4번째 줄, 초대석 더해서 6번째 줄에 앉았다. 더 앞쪽으로 갈까도 싶었는데, 가운데 쪽이 좋아 그 자리에 앉았다.

무사히(?)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앞쪽, 즉 초대석에 앉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가 큰 남자, 말 그대로 서백남이었다.

강연도 자주 가지 않거니와, 강연에 참석한 경우에라도 질문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강연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강연을 마친 후에 질문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조금 서운하지 않을까 싶어, 용기 내어 손을 들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비슷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첫 번째 질문자는 그 대학의 교수였다. 질문을 시작했는데, 아... 질문의 배경에 대한 설명 혹은 언급이 끝나지 않는 거다.

그때 갑자기, 스피박님께서 손을 내저으시고는 청중을 향해 물으셨다. "질문이 상당히 긴데.... 여러분, 이 질문 다 이해하고 있는 거죠? 지금, 잘 따라오고 있는 거죠?" 청중은 긍정의 의미로 제각각 웃었다. 행사 진행과 부총장의 축사, 스피박님의 강연이 전부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까지의 과정을 함께한 청중들이라면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스피박님의 의도는 명확했다. 질문을 하시오. 기다리고, 기다려도 질문은 등장하지 않았고, 결국 돌아오는 선생님의 역공. Go to the question.

그다음 질문 역시 초대석의 서백남이었고, 역시나 교수였다. 이 교수는 앞 교수의 교훈을 오늘에 되살려 최대한 짧게 질문하려 했으나, 역시나 돌아온 스피박 선생님의 역질문. What is your question?


그 이후의 질문 시간도 마찬가지였는데, 인도에서 공부하기 위해 한국에 온 젊은 여성이 유일하게 스피박님에게 좋은 질문을 했다며 칭찬을 들었다. 서발턴은 아이덴티티로서가 아니라 포지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그에 대한 그람시의 해석 등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질문 그 자체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사람들의 모습,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의도에 대해서라면 알 수 없다. 외모로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스피박님의 강연을 들으러 온 그 소중한 자리에서 열심히 질문하는 모습과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그 질문들이 얼마나 어이없는가에 대해, 혹은 필요 없이(정확히는 쓸데없이) 장황했는가에 대해 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 세계적인 석학인 스피박님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이 강연을 들었던 자신의 학생들에게 강렬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확언할 수 없고,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쓸 수 있는 이유는 이 일이 남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고,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생일 즈음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그 노력이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할 수 없는데,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했다. 나쁜 쪽으로 혹은 안 좋은 쪽으로. 이불킥과 머리 쿵쿵의 시간이 얼마큼 지나고, 말복이 지나도 찬바람이 불지는 않았지만, 나는 조금씩 제정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순간에 김건희의 말이 떠오른 건 또 무슨 일일까. 무수한 학력 위조와 의도적 조작이 드러났을 때, 김건희는 말했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랬습니다. 아, 그 마음을 알겠는 내 마음. 이내마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픈 마음. 스피박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 강연자들에게 은근한 찬탄을 받고 싶은 마음. 학력을 위조해서라도 돋보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 이내마음.









자기 증명과 인정 투쟁의 그 지긋지긋한 정글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를 고민하면서 악셀 호네트의 책 두 권을 대출해 왔다.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목차로 살펴보기에 내가 궁금해하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보다는 '인정투쟁을 정체성 인정을 넘어 물질적 재분배까지도 획득해 내는 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악셀 호네트의 시도'(알라딘 책소개)가 펼쳐진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승자는 에밀리 디킨스와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로는 주커먼. 과거의 내가 필립 로스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나는 만찬회 같은 데도 참석하지 않고 영화 구경도 가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휴대전화나 VCR나 DVD 플레이어나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계속 타자기의 시대를 살고 있고, 월드와이드웹이 뭔지도 모른다. 선거 같은 것도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대개 밤늦게까지 글을 쓰며 보낸다. 독서도 하는데, 주로 학생 때 처음 접했던 책들을 읽는다. (『유령 퇴장』,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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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8-28 1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저는 강연 잘 다니지는 않지만 가끔 가면 꼭 질문 시간에 남자들은 대부분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가장해서 자기 지식자랑을 하더라고요. 그것도 한 줌의 알량한 ㅋㅋㅋㅋ
그건 한남이나 서백남이나 똑같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절레절레*

단발머리 2025-08-28 10:47   좋아요 1 | URL
서백남 질문하는 거 자주 못 봐서~~ 우아, 말이 많더라구요. 저는 질문을 가장해서 자기 지식자랑하는 남자들도, 그런 여자들도 자주 보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요약하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가 보기엔 뭐뭐뭐가 중요한 거였대요.
그 중요한 거를 강의한 사람 앞에서 ㅋㅋㅋㅋㅋㅋㅋㅋ 우앗 웃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열정적인 강의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직접 뵙고 이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아까 설명해주신 ‘Re-thinking Globality‘에 대해 조금만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08-28 1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질문하는 시간이 돌아오면 참 난감하죠. 저도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누구라도 질문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왜 그리 좌불안석인지…누구라도 손을 들어주는 것에 휴..안도하게 되는데 질문의 의도나 수준이 떨어질 땐 또 내가 질문한 것마냥 또 부끄러워지는…질문 시간은 늘 난감한 것 같아요.

강연을 경청하는 저 사진을 보니 스피박 님도 멋있고 대단해 보이시지만 제 눈엔 강연을 들으시는 분들도 참 멋져 보입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집중력이 떨어져 강연을 오랫동안 듣는 것이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좀 피하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저런 자리에 앉아서 듣는 중년들의 집중력을 경탄하게 되었어요. 저 자리 6번째 줄 그것도 가운데 자리에서 집중력 발사하신 단발머리 님!
스피박 님이 칭찬 많이 하셨을 거에요.ㅋㅋㅋ

단발머리 2025-08-28 17:25   좋아요 1 | URL
저는 진짜 질문하는 사람들한테 고맙거든요. 그 질문이 어떻든간에 그 행동 자체는 질문한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요. 그러나 스피박님은 그 핵심을 짚어주셨죠. 질문이란 무엇인가.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어디 가나요, 질문을 말하세요 ㅋㅋㅋㅋㅋ

저도 간만에 참석한 강연인데 큰애가 알려줘서 굳이 ㅋㅋㅋㅋ굳이 다녀왔습니다. 물론 중간 시간에 졸리기도 했구요. 저도 집중력 부족한 중년으로서 😉 아시죠? ㅋㅋㅋㅋㅋㅋ

망고 2025-08-28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엥 왜 통역이 없어요 무서운 강의네요😤 스피박 잘 모르지만 어렵다고 들었는데, 영어로 강의도 들으시고 넘 멋진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5-08-28 22:15   좋아요 1 | URL
제가 이 강연 소식 듣고 나서 들려온~~ 소식에.... 이 강연이 통역 없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비난 + 비판이 많이 있었던 듯 합니다. 처음에는 스피박님을 감히ㅋㅋㅋㅋㅋㅋ 통역하겠다는 교수가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요.
가서 보니깐 영문학과의 한 파트(비교문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행사라 그런지.... 돈이 없는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기본 중의 기본인 물이랑 필기구 정도도 제공되지 않은 행사여서요.

영어로 들었지만, 사실 들은 건 아닙니다. 들렸습니다만 들은 건 아니구요. 부끄럽네요 ㅎㅎ

다락방 2025-08-28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무려 스피박 강연에 통역이 없다고요? 무섭...

그리고 그 질문자들 빡치네요. 그런데 니 질문이 뭐냐고 되물어주시는 스피박 님, 역시 스피박 님이십니다. 괜히 단발머리 님과 한글자 같은게 아니네요. (응?)

음, 잘 보이고 싶은거 그거 누구한테나 있는 욕망이잖아요. 그러나 모든 욕망이 그렇듯이 그게 지나치면 오히려 화를 불러 일으키고요. 강연에서 서백남들의 그 질문들처럼 말이죠. 단발머리 님이 이불킥할 만한 행동을 하실 분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그건 제 생각이고요. 당사자에겐 당사자의 기쁨과 후회와 자책 같은게 있으니까요.

저도요, 단발머리 님. 돋보이고 싶어서 했던 말과 행동들이 잇고, 그래서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그냥 솔직한게 제일 좋다, 서로에게. 라는걸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지나친 어떤 욕망이 잘못 새어나오려고 합니다. 인간은 계속계속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깨달아가는 존재인가 봅니다.

단발머리 2025-08-28 22:15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무서운 강연이었습니다. 왜 불을 끄나요?ㅋㅋㅋㅋㅋㅋㅋ전 아직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불을 끄더라구요. 밑에 노트가 안 보이는 ㅠㅠㅠㅠㅠ

사실 이 페이퍼의 핵심은ㅋㅋㅋㅋ 제 마음의 핵심은 다락방님이 적어주신 바로 그 부분이에요.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요. 쓸데없는 질문을 길게 길게 하면서 잘난척 하고 싶은 그 마음이요.
인간은 계속계속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깨닫는 존재라고 적어주신 그 부분이 그래서 딱 마음에 와닿구요. 제 의문은ㅋㅋㅋㅋ 왜 계속 그러느냐는 거예요. 왜 그럴까.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 양껏 혹은 맘껏. 저는 이게 생존의 욕구 그 자체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잘 모르겠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고, 설명하고, 포장하지 않으면, 내 생존의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까요. 아무튼 신기하고 놀랍고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은 밤이요^^

icaru 2025-08-28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단발머리님 진짜!! 찐으로다가 멋지심 ㅎㅎ) 알라딘서재에 백만년만에 (빌게이츠가 어제 유퀴즈에 나왔는데, 추천한 책 검색해 보려고 말이죠) 들어왔다가 댓글 보고 다다다 달려왔습니다!

단발머리 2025-08-28 17:06   좋아요 0 | URL
도대체 어디 계세요? icaru님!!! 🥹🤩😍

icaru 2025-08-28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모르지만 인정투쟁과 유령퇴장에 반색을~~~ ㅎㅎㅎ 유령퇴장은 단발머리님의 선한 영향력으로 5~6년전에 읽었고, 인정투쟁은 예전에 사놓기만 한 책이 있어라우~~

단발머리 2025-08-28 17:05   좋아요 0 | URL
icaru님의 다정하고 용기 팍팍 댓글 있어야 제가 신나서 훌라춤을 추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쓸 수 있단 말입니다!
제발 플리즈 자주 좀 오소서!!!!!!!!!!!

젤소민아 2025-08-29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강연이네요. 부럽습니다!

단발머리 2025-08-29 09:17   좋아요 0 | URL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막 방송국에서 카메라 들이밀고 그런 강의는 아니었지만...
네, 멋진 강연이었고,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젤소민아님^^

거리의화가 2025-08-29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경험하고 오셨네요. 강연을 듣거나 하면 별별 사람이 다 있더라구요ㅎㅎ 주로 질문하는 사람만 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가봅니다^^; 덕분에 저도 스피박을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이야기도 듣네요.

단발머리 2025-08-29 09:24   좋아요 0 | URL
네네. 어디가나 똑같고, 동서고금 남녀노소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소~~ 젊은 사람 혹은 아이들의 질문이 오히려 발랄하고 진지하고 진솔하고 그런 거 같아요.

사실 스피박님 후기라서 스피박님 이야기 많이 써야하는데 말이지욬ㅋㅋㅋ 제가 딱 한 번 먼발치로 뵌거라 단정해서 말하는게 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분인데도, 뭐랄까요~~ 그 웃음소리가 딱 동네에서 들어봤을법한 그런 웃음소리였어요.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과하지 않고요. 강의안을 읽다가 설명이 필요할 때는 안경을 벗으셨는데요. 특정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실 때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약간 분위기가..... 진짜 대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하는 듯한, 강연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에게 개념이나 예시를 설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튼, 뭔가, 오늘 이거 하나는 꼭 배워가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구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좋은 시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헤헤!

그레이스 2025-09-09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참,,,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먹고,,, 많이 공부해도,,, 인간은 여전히 어떤 부분에서는 치기 가득하고, 서툴러요^^

단발머리 2025-09-13 09:17   좋아요 1 | URL
헤헤헤.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그런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부족하고, 치기 가득하고요. 티가 안 나면 좋을텐데요 ㅋㅋㅋㅋㅋㅋ 어떻게든 티가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