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차학살에 대한 NL들의 입장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격해지면서, 러시아군에 의한 학살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물론 나는 언론들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겠다. 부차 학살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나는 전쟁의 책임을 러시아 보다 미국에게 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일방적 침략이 합리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NL들을 보면, 일방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다. 난 이부분이 아니꼽다.

러시아가 제국주의라는 주장에 나는 결코 반대하지만, 이번 부차 학살에 대한 NL들의 보도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고 본다. 물론 서방의 악의적인 보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도 힘들다.

따라서 부차 학살에 대한 반박 기사는 그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워낙 양측 증언이 엇갈리는 상황에 단순히 러시아발 관영 매체만의 보도만을 인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본다.

나는 부차 학살의 진상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단순히 서방측 보도만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러시아의 선전 매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일부 인사들의 주장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보며, 적어도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본다.

관련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0228074071699780&id=13142115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국이 외국에 무기를 쏟아붓고 있는 것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심각한 군사적 충돌이 아이들이 보는 만화책에서처럼 착한 놈들과 나쁜 놈들이 싸우는 것으로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전쟁이 히틀러와 같은 사악한 괴물과, 뛰어난 용맹과 지혜를 갖고 있는 매력적이고 선한 코미디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지금까지 모든 전쟁에 대해 거짓말을 해왔던 바로 그 서구 언론 기관들이 이제 이 전쟁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유례없는 검열들이 유럽 연합, 실리콘 밸리의 대기업 및 TV 업체가 모든 사람을 ˝가짜뉴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국이 좋아하지 않는 정부가 다른 이유 없이, 그 지도자가 사악하고 자유를 싫어하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행동한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우크라이나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권력 구조(강대국)의 지시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엉망진창인 작은 약자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인 권력 구조가 전쟁을 주도한 핵심 주체가 아니고 단지 바라보고만 있는 목격자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 제국이 꾸미고 있는 대로 미 제국을 무고한 작은 꽃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대중에게 거짓말을 할 모든 동기를 갖고 있는 정부들이 단순히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자국민들이 빈곤과 질병으로 죽어가는데도 무관심하고 냉담했던 정치인들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곤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살인적인 정부가 우크라이나인을 보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파괴의 목표로 삼아왔던 나라의 경제 붕괴를 획책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외국에 무기를 퍼붓고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냉전과 벼랑끝전술을 지지하면서 군비축소, 외교, 긴장완화를 규탄하는 것이 ‘반전‘(反戰)의 입장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이 전쟁에 대해 TV가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그것은 ˝러시아 선전˝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이 전쟁에 대해 TV가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푸틴을 옹호하거나 푸틴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을 이상하고 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기아(飢餓) 제재가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해치기 위해 고안된 전쟁 행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이야기의 한쪽 면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극도로 강한 권력자들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조작하는 데 기득권이 있고 지속적으로 다양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서방 세계의 가장 강력한 정부와 언론 기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밀어붙이는 설(說, narrative)들을 깊이 의심하지 않고 보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여전히 자국 정부가 진실하고 공정한 정의의 편에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보이는 것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

위 글은 캐이틀린 존스톤(Caitlin Johnstone)의
˝어른이 우크라이나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It‘s Not Okay For Grown Adults To Think This Way About Ukraine)의 전재입니다.

캐이틀린 존스톤은 호주의 저널리스트입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존스톤은 미디어에서 전하는 사항들이 진실과 다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금기 사항 없이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 클라우드 펀딩만으로 저널리스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존스톤은 ˝내러티브(說)를 통제하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면서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들은 통치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 선전 메카니즘을 공격하고 대중이 대중 매체에 대해 갖고 있는 부당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데 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밝혔습니다.

원출처 : https://caitlinjohnstone.substack.com/p/its-not-okay-for-grown-adults-to?s=r

페이스북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4894727837231544&id=1000008312839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리스 공산당이 벌인 집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됐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했고, 이들은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치, 경제, 군사, 과학기술 및 사회문화에 있어서 경쟁했다. 미국이나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냉전의 책임을 일반적으로 동유럽에 세력을 확장했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냉전 초기의 양상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무력과 폭력 그리고 내정간섭을 일삼았던 것은 소련의 스탈린이 아닌,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 소련의 스탈린보다 훨씬 더 내정간섭을 했고, 군사적 무력을 사용했다는 그 증거는 무엇일까? 물론 증거야 20세기 세계 혁명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차고 넘치지만, 이 글에선 냉전 초기 미국의 대표적인 개입 사례인 그리스 내전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46년 3월 미국 풀턴 미주리주에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이른바 철의장막(Iron Curtain) 연설이 퍼지면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 대한 적대심을 드러냈다. 처칠이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에는 소련에 대한 반공주의 강화라는 측면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나 이탈리아 그리고 핀란드 등 각국의 총선에서 공산당이 최소 2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배경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선거로 집권할 조짐이 보이자, 무솔리니 시절의 파시스트들을 이용하여 노조를 파괴하고 물자지원을 끊었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오늘 얘기해보고자 하는 그리스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놀랍게도 당시 미국이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그리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41년 초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그리스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나치 독일에 맞서 저항했고, 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주체는 그리스 공산당 휘하의 군대인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이였다. ELAS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알바니아의 호자 그리고 나치 독일 점령하의 소련 영토에 있던 빨치산 세력들처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침략자 나치에 맞서 싸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던 1944년 나치 독일은 그리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이 그리스에서 물러나자, 영국군이 그리스에 상륙했다. 영국은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을 이용했다. 당시 영국이 지원했던 세력이 바로 그리스 왕당파 세력이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좌파민족해방전선(그리스 공산당이 주도함)을 전복시켰고, 우파 독재정권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1946년 그리스 좌파 세력들은 왕당파에 맞서 다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내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정적으로 힘들던 영국의 처칠 정부는 미국에게 그리스 반군을 진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스 내전은 1947년에 접어들면서 격렬해졌다. 1947년 3월 미국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했고, 그리스 내전에 개입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대포와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4,000톤의 군사 장비를 지원했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이끄는 250명의 군사고문단을 투입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영국과 맺은 협정에 따라 그리스 공산군에 대한 지원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소련의 물자가 불가리아 국경을 통해서 들어가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지원이었다고 하기는 다소 힘들었다. 어쨌든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되자, 소련은 분노했다. 소련의 <프라우다>지는 “미국이 자선을 빙자해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고 있으며, 먼로 독트린을 유럽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군사고문단은 1947년 6월에 그리스 교전 지역에 배치됐다. 밴플리트가 이끄는 고문단은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 세력을 도우며 그리스를 전술 시험 장소로 활용했다. 당연하게도 노조파괴, 고문, 민간인 마을에 대한 네이팜 폭탄 투하, 주민 대량 소개 후 재판 또는 기소 없이 강제수용소에 구금, 위험인물의 아내와 자녀에 대한 대량 투옥, 군사재판에 의한 대량 처형, 언론 검열 같은 전술들을 활용했다. 이는 1948년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활용했던 전술이기도 하다. 그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왕당파 세력은 1948년에 이르러 작전지역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티카까지 확대했으며, 1949년 내전에서 승리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는 군주정지지 세력과 부유한 실업가들 수중에 들어갔으며, 당연하게도 이들 대다수는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반면, 이들에게 학살당한 희생자는 주로 나치와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따라서 이점만 보더라도 미국은 철저히 반민중적인 인사들 편이었다.

3년간 전개된 그리스 내전으로 최소 10만 이상의 그리스인이 사망했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그리스 내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기에, 25년 동안 우익 독재정부가 그리스에서 활동했다. 결국 1974년 민주화를 이룩할 때까지, 그리스는 암울한 친미 독재정권 시기에 놓이게 됐다. 그리스 내전은 미국이 타국의 주권을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침범한 대표적이 예시이며, 소련보다 미국이 더 개입주의적임을 입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은 마이클 매클리어의 책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당시 미국은 이른바 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군들을 바탕으로 특수부대를 만들었으며이들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으며많은 공로를 세웠다이 특수조직이 바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이 OSS에는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의 출신인 아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라는 인물도 활동했었다아키메데스 패티는 1913년 뉴욕에서 태어나 1941년 미군에 입대한 인물이었다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입대한 패티는 특수임무반 장교 신분이었고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살레르노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었다.

 

패티의 주된 임무는 반파시스트 비밀 단체와 연락한 다음 협력하는 것이었으며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 목적이었다패티는 주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외에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활동했었다. 1944년 초 연합군이 이른바 안치오(Anzio) 상륙작전을 준비할 당시 패티의 근무지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변경됐다그로부터 5개월 뒤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했고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전투가 치열해졌다그 시기 소령이었던 패티는 한밤의 추위를 느끼며 군 수송기에 올랐고, OSS 총책임자인 윌리엄 도노번(William J. Donovan)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탈리아 해안기지에 도착했다참고로 윌리엄 도노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의 사진)

 

OSS 총책임자였던 도노번 장군은 유럽에서 반파시스트 단체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듯이아시아에서도 추축국 일본에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당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에 맞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고마오쩌둥의 공산당 또한 마찬가지였다도노번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주목했고버마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했듯이 이 지역에서도 반일단체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따라서 도노번은 당시 항불항일을 내세우며 이에 저항하고 있던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과 연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 OSS는 인도차이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따라서 도노번은 인도차이나 지역 같은 곳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패티 소령을 인도차이나에 보낸 것이다물론 패티 또한 인도차이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패티가 아는 것은 그냥 그 지역이 아시아의 어느 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를 해방시키고난 이후 패티는 인도차이나로 향했다패티 소령의 파견 목적은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효과적인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패티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사전 정보 수집을 위해 수개월 동안 백악관과 국무부 전문가들에게 상세한 브리핑을 받았으며인도차이나가 중국 본토와 남태평양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전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전략적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노이에 모인 베트민과 OSS)

 

1945년 4월 초 패티는 중국 남부에 있는 도시인 쿤밍에 도착했다당시 패티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는데그것은 바로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을 만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이들의 만남은 1945년 4월 30일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는 날에 이루어졌다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외진 시골의 허름한 찻집에 들어섰을 때패티는 한 노인을 만났다그 노인은 완벽한 영어로 어서 오시오친구!”라고 첫인사를 건냈으며그는 패티에게 자신이 호치민이라고 소개했다이들은 이렇게 만남을 가졌고서로가 다양한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호치민을 만나기 전 패티는 베트남의 역사가 중국에 대항해서 대략 2,000년간 맞서 싸운 역사인 것과 자신이 만나게 될 호치민이 전설적인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심지어 OSS의 기록에서도 호치민을 베트남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얘기했을 정도였다.

(OSS 사슴팀 대원들과 호치민, 반바지를 입고 있는 이가 호치민이고 양복을 입은 이가 보 응우옌 잡이다.)

 

패티는 베트남 인민들이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항해서 격렬하고 끊임없이 항거해 온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미국의 전시 동맹국인 프랑스에 대항해 싸우는 호치민의 독특한 투쟁 방식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패티는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 체류할 당시 공산주의 학습을 받았고그가 창설한 베트민은 공산당의 한 지류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베트민은 정보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베트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패티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쓴 저서 <왜 베트남인가?(Why Vietnam?)>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호치민과 역사적인 만남 이후 실질적인 면에서 호치민과 베트민은 내가 인도차이나에 정보망을 구축하는 데 구체적인 해답이 되었다그는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했다. ‘진부한 강령이나 외치는 망상적인 혁명주의자나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과격분자로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나의 이런 열망은 미국과 어떠한 충돌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당시 호치민은 미국의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구식민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패티와 호치민이 공유하고 있던 공통적인 입장이었다호치민과의 만남을 통해 입장을 확인한 패티는 워싱턴에 호치민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전달했다그는 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중경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공식 보고했다패티가 보낸 보고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호치민은 무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며베트남 독립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삼고 싸우는 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미국의 OSS와 베트민은 1945년 초부터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방향이었다특히나 1944년 베트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를 호치민이 구출해주면서 미국 OSS는 호치민과의 협력하고자 했다. 1945년 5월이 되자 호치민의 베트민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6월에는 호치민이 패티에게 미국이 필요하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언제든지 약 1,000명의 베트민 게릴라 부대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까지 했었다실제로 패티는 인도차이나에서 최초의 미군 군사작전을 계획했었다패티는 이른바 사슴팀(Dear Team)을 만들어 베트민을 미국 무기로 무장시키고 군사훈련까지 제공했다. 7월 16일에는 패티 소령의 후배 장교인 앨리슨 토마스(Allison Thomas) 소령이 이끄는 OSS 게릴라 부대가 하노이 인근 산악 지대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으며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미국의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온 패티)


(패티의 저서 <왜 베트님인가?> 베트남어로도 번역됐다.)

 

패티는 베트민과의 공동작전 수행을 위해 그들을 훈련시키는 한편베트민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패티는 이들에게 기관총과 자동소총 그리고 수류탄 등을 낙하산을 통해 제공했다미군 무기로 무장한 잡 장군의 게릴라 부대는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OSS 사슴팀은 베트민과 공동작전을 펼쳤다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와중에 미국 OSS와 베트민이 치렀던 대일전이었다이러한 공동협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끝나면서 종결됐다분명한 건미국과 베트민이 협력했고당시 그 누구도 불과 20년 만에 미국과 베트남이 참혹한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패티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OSS 사슴팀 교관과 수류탄 투척 훈련을 받고 있는 베트민 대원)

 

패티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둘(패티와 호치민)이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4월 30일이었습니다그리고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을 떠난 날짜가 30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이었고요그 동안에 나를 따라서 280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는데그 중에서 약 5만 7,000명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이 조용한 나라에서 벌어진 의문투성이의 전쟁에서 200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도 희생되었습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당시 호치민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하는 호치민) 


돌이켜보면, OSS는 불과 1개월 동안 약 200여 명을 선발하여 미래의 베트민 지도자로 양성한 셈이었다얼마 후 베트민군 사령관이 된 잡은 사슴팀이 자신들을 도와 점령한 마을을 탄짜오라고 명명했다그 뒤 호치민이 이 마을에 임시정부를 설립함에 따라 탄짜오는 베트남의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다. OSS는 이후에도 계속 호치민의 군대를 훈련무장시킨 다음 함께 전투를 펼쳤다이와 같은 일은 훗날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를 살펴볼 때아리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출처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다큐멘터리 이미지)


드디어 넷플릭스에서 만든 중동분쟁 시리즈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마지막화를 봤다. 9.11테러부터 시작했던 다큐가 작년에 종결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중반부와 막바지를 다루게 되니, 다큐멘터리가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큐멘터리의 초반부는 4화에서 보여줬던 명분없는 전쟁의 모습을 역설한 뒤, 2011년 오바마 행정부가 주도한 오사마 빈라덴 암살작전 즉 '넵튠 스피어 작전'을 다룬다. 이 사건은 당시 10대였던 나도 인상깊게 들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어느날 뉴스에서 빈라덴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과 성조기를 들며 이를 열렬히 환영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비추어졌던 것이 기억난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2011년 당시 오바마는 철군을 약속했지만, 아프가니스탄 문제는 결국 트럼프 행정부로 이어졌다.

 

쿠바 근처에 있는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여전히 인권 유린 및 국제법 위반이 자행됐다. 2000년대 당시 미국 CIA에 의해 고문받았던 이들 중에는 이후 탈레반의 핵심 지도층이 된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한다고 하지만,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던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오사마 빈라덴 암살 작전의 목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파키스탄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일이었다. 넵튠 스피어 작전 이후 파키스탄에서 반미정서가 급증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이를 의도적으로 얘기치 않는다. 아프가니스탄 문제도 다큐멘터리의 허점이 존재한다. 2020년 도하합의 이후 미국은 철군의 길을 걸었고, 2021년에 철군을 완료했으며 20년 전 미국이 무너뜨렸던 탈레반이 다시 집권했다. 미국의 힘으로 유지됐던 친미정부가 무너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탈레반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물론 탈레반의 폭력성과 비인간성 그리고 전근대적인 여성관은 매우 심각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선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의 합리화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불편했다.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 시절, 여성 인권이 발전했고 민주주의적 기회가 주어졌다는 다큐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미국 점령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미국 정부 인사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에 관점과 대다수 페미니즘 진영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에 대한 관점이 "미국 점령 정당성 부여"라는 점에서 소름끼치게 닮은 사실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한번 확인했다. 나는 과거 리비아때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이들이 서방의 흑색선전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카다피 선생을 모함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한계점도 있지만, 마지막화도 제법 볼만했다. 여전히 친미주의적 관점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잘 만든 다큐멘터리임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되도록 추천하는 쪽이며, 중동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화까지 리뷰했으니 조만간 다큐멘터리에 대한 총평도 올리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