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역사문화기행 - 참전 수병 유교수와 함께 가는
유일상 지음 / 하나로애드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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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해가 끝나간다. COVID-19가 멈추질 않아 많은 이들이 힘든 해였고, 나 또한 그러했다. 전염병 전파로 항로가 막히게 됨에 따라, 해외여행은 그저 추억이 됐다. 해외여행을 못 가게 되니, 해외로 나가고 싶어지는 마음만 굴뚝같이 쌓이는 중이다. COVID-19 초기인 20201월과 2월에 나는 베트남 여행을 갔었다. 군 복무 시절 소방서에서 공익으로 근무하며 베트남의 역사와 호치민에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게 된 나는 전역 후 베트남에 가고 싶었지만, 가족 사정 때문에 20201~2월이 돼서야 가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도 갔다 온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베트남에 못가 봤을 것이다.

 

나는 베트남의 역사를 높이 평가한다. 2천년에 걸쳐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프랑스 식민주의에 저항했고, 일제의 침략과 프랑스의 재침략 그리고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그들의 역사는 민중사적 시각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유일상 교수님과는 몇 년 전부터 페이스북 친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심취해있던 나는 네이버에서 자료를 검색하던 중 유일상 교수의 블로그 글을 보게 됐다. 이후 페이스북을 통해 내 페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자료들을 얘기하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최근에 그 분이 책 한권을 내게 된 사실을 알게 됐고, 나는 이 책을 구매해서 읽었다.

 

책은 저자가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한 글을 정리한 것이다. 책은 베트남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부분부터 시작하여, 저자가 여행한 베트남 북부(하노이, 디엔비엔푸, 박닌, 까오방 등), 베트남 중부고원지대(달랏, 부온마투옷, 플레이쿠 등), 베트남 중부(다낭, 후에, 호이안, 케산 등) 그리고 베트남 남부(호치민, 비엔호아, 미토, 푸꾸옥 등)의 여행 이야기와 각 지역의 역사 및 문화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여행 가이드 서적이 아닌, 베트남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사실 미국과 비교했을 때, 국내에는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들이 현저하게 적다. 그러나 유일상 교수의 저서는 베트남 전쟁을 포함한 베트남 근현대사 역사를 많이 다뤘으며, 국내 서적에서 찾기 힘들거나 없는 내용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 저쟁에 대해 제법 공부해본 나 또한 많은 공부가 됐다.

 

예를 들면,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 관련 내용이나 1968년 구정 대공세와 더불어 전개된 케산 포위전(Seige of Khe Sanh) 관련 내용들이 그러했다. 서방측 자료와 베트남측 자료를 동시에 비교하면서, 전투의 전개 과정 및 성과를 정리한 것이 개인적으로 좋았다. 책에 나온 관련 자료들은 나에게 있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됐다. 디엔비엔푸 전투 관련 자료는 최근에 국내에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디엔비엔푸로 가는 길과 디엔비엔푸 합본)를 열심히 필기해가며 읽었지만, 마찬가지로 유 교수님의 책에 쓴 내용들도 호치민(Ho Chi Minh) 주석과 베트남 민중의 독립을 향한 투쟁을 알 수 있어서 공부가 됐고 기뻤다. 무엇보다 디엔비엔푸의 전개 과정을 비교적 읽기 쉽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제법 공부가 됐다.

 

1946년부터 1954년까지 8년간의 항전을 통해 호치민과 공산당 그리고 베트남 민중은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 지배를 종결시켰다. 독립을 향한 이들의 영웅적 투쟁은 정말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이며, 이후 알제리 독립 전쟁을 포함한 제3세계 반식민지 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이 56일 간의 포위 끝에 승리한 전투다.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되었던 프랑스군 16,200명 중에 11,721명을 포로로 붙잡고, 2,293명을 사살했으며, 6,650명의 부상당하면서, 베트민은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베트남의 명장 보 응우옌 잡이 이끄는 5만 명의 병사와 애국심과 독립을 향한 열정 하에 모인 25만 명 이상의 민중이 쟁취한 위대한 승리다. 나는 이 디엔비엔푸 전투가 프랑스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 그리고 프랑스군에 빌붙어 친불 매국노 짓을 일삼던 남베트남 반동 세력에 맞서 승리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심금을 울린다.


지압 장군 지휘 하에 19545월 베트남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오랜 저항 전쟁을 끝내는 분기점이 마련되었다. 이 승리로 1954721일 프랑스와 제네바 협정을 체결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의 군대 철수에 합의했다. 므엉팡의 사령부에서의 귀로에 므엉팡 전승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화강암으로 웅장하게 조각된 승전기념 석조기념물이 해 질 녘에 그 위용을 더한다.”

 

출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207

 

최근에 밝혀진 내용들이나 몇몇 연구 성과들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앞에서 언급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CIA를 통해 비밀리에 참전한 미군 병사 2명이 전사한 사실이나,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할 때, 대만을 통해 미국으로 도망친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의 실질적 금괴 액수,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의 이름이 “1943년 국민당군의 감옥에서 그를 석방하는데 힘써준 중국 국민혁명군 제4전구 정치부 부주임인 후지밍(Hou Zhiming) 장군의 이름이라는 사실 등이다. 우선 티에우가 금괴를 들고 도망친 사실은 예전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책에서는 티에우가 가진 금괴가 2~3톤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5년 캐나다 출신 미국 CBS 기자 세이퍼가 밝힌 사실에 따르면 티에우가 가지고 있던 금괴는 2~3톤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16톤이었다. 이걸 보니 남베트남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인지 다시 실감하게 된다.

 

책에 나온 호치민 이름의 기원이 중국 국민혁명군 제4전구 정치부 부주임인 후지밍이라는 사실은 이 책에서 정말 처음 알게 됐다. 윌리엄 J.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을 여러번 탐독했지만, 호치민 이름의 기원이 어딘지는 책에서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처음 안 것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전에도 알고 있었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에서 이들이 항공 폭격과 전술핵 투하도 고려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 했다는 사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존재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특히 2004CIA가 비밀 해제한 정보에 따르면 전사한 이의 이름은 맥거번 2(James B. McGovern Jr),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였다.

 

책 제목이 베트남 역사문화기행이다 보니, 당연히 베트남의 소수민족 관련 이야기도 나온다. 베트남의 경우 54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 87%가 킨족(베트족)이다. 이런 점은 56개의 소수민족을 이루면서 95%가 한족인 중국의 소수민족 구성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미국-베트남 전쟁)은 사실 따지고 보면,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인민과 소수민족들의 공동투쟁이었다. 앞서 언급한 디엔비엔푸 전투도 타이족과 같은 지역 소수민족들이 베트민을 도와서 승리에 기여했었다. 대다수의 소수민족이 베트민과 베트콩 그리고 공산당을 지지했지만, 프랑스와 미국 편에 섰던 이들도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소수민족 자치를 요구하며 독자적인 반군을 만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의 소수민족들이 그러했다. 1960년대 남베트남에 있던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선 참족이나 에데족 등등의 산악부족들이 모여 이른바 FULRO가 창설되었고, 이들은 베트남인들을 학살했으며, 캄보디아가 이를 은근슬쩍 방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92년 캄보디아의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무장해제 당하면서 항복했다고 한다. 이것과는 별개로 미국은 중부고원지대에서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베트콩이 두려워 미군 특수부대는 이들을 반공 민병대로 조직하여 이용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이후 2000년대 들어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들이 현 베트남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조용한 걸로 봐선 베트남 정부가 그쪽 소수민족들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중국의 티베트, 위구르 갈등이나 미얀마의 로힝야족 문제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문제 등을 생각해 봤을 때, 베트남은 소수민족 문제를 확실히 잘 풀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책 저자가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다 보니, 책도 주로 베트남 전쟁 관련 내용을 많이 할애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도 많이 공부가 됐다. 원래부터 이승만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비판을 많이 했던 인물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남베트남의 초대 지도자 응오딘지엠은 정말로 변론의 여지가 없는 미국의 꼭두각시이자, 민중을 대량 학살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따르면 응오딘지엠은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반대파 약 12,000명을 살해했고 집권초기부터 1960년까지 9만 명을 학살했으며, 80만 명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고 19만 명을 고문하여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친미주의에 빠져, 미국이 지원하는 국가는 민주적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이 보여주듯이 이는 허구적인 상상일 뿐이다. 미국이 지원한 지엠 정권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없었으며, 빈곤과 부패 그리고 대량 학살과 강제수용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마치 한국의 이승만 정부와 매우 유사하다.

 

그 외에도 이번에 유일상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베트남에 대해 많이 공부할 수 있었다.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의 발전상이라든지, 필수 관광 명소는 어떤 것이 있는 지 등이다. 베트남 여행 북부 파트에선 동당 기차역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2019년 나는 4.27 남북회담과 6.12 1차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평양공동선언을 보면서 한반도 종전과 평화의 꽃이 필 줄 알았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회담은 아쉽게도 결렬됐다. 비록 아쉽지만 역사적인 일이었고, 앞으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움직임은 반북 반공주의를 넘어 지속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당 기차역은 201922일 김정은 위원장이 베트남 열차로 환승한 역으로 과거 김일성도 이를 거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일어날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동당 기차역은 2019226일 베트남 시간 오전 815분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미정상회담에 참석하기위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특별열차로 이 역에 도착하여 내렸다가 베트남 열차로 환승한 역이다. 이 역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이 역에 하차했을 때 베트남 정부가 최상급 의전을 베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베이징-난닝-하노이(북경-남녕-하내) 국제열차는 하노이 기차역을 출발하여 베트남에서는 마지막 역인 이 역을 경유해 중국의 베이징 서역까지 운행된다. 3일에 한 번씩 운행되는 베이징과 하노이 간의 철도 여행 총 시간은 36시간이다. 남북 간에 평화가 정착되면 중국을 거쳐 하노이까지 쉬엄쉬엄 중간에서 쉬면서 철도편으로 베트남 하노이를 거쳐 호찌민시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218

 

저자 유일상 교수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겠다. 나랑 페친이자 베트남 역사문화기행의 저자인 유일상 교수는 젊은 시절 고려대학교 불문과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하여 베트남에 파병됐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베트남에서 군복무했으며,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도 직접 경험했다. 이후 언론학을 전공했으며, 박정희 정부에 의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9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적도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러 글들을 인터넷과 뉴스기사에 올리고 있으며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직을 역임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그의 참전 경험은 책에 잘 나타나 있다. 20대인 나에겐 몇 십 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유일상 교수가 들려주는 내용이 마음속 깊게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전했던 이야기와 더불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점과 어른 세대들의 무지함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용기에는 정말 감동했다. 이 책은 단순히 참전 수기만은 아니다. 책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자의 반성도 들어가 있다. 예를 들면, 전쟁 시기 미군과 한국군의 명령을 받고 고엽제를 뿌려, 저자 또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이야기나, 이후 1990년대 들어 국내에서 공론화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그러하다. 나는 저자의 입장에 상당히 동의하고 공감했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유일상 교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꾸이년박물관에 전시된 집단학살 증오비의 기록들을 보면서 나는 국가가 먼저 사과하고 병역의무자들을 그 전쟁터에 용병으로 보낸 당시 한국 정권실세의 비자금을 찾아내 배상을 해줘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베트남 전쟁 참전을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자금의 실태와 사용처를 밝히고 이를 횡령한 자의 재산이 개인명의든, 재단명의든 몰수하여 이제는 노구의 몸으로 고엽제 피해에 시달리는 특히 병역 의무 복무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제2대 주월한국군사령관 이세호 장군이 생전에 밝혀 보려던 일이기도 하다. 꾸이년을 방문할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감안해서라도 이 증오비만은 딴 곳으로 옮겨 줄 것을 교섭하면 어떨까? 이제는 70대 이상 할아버지가 된 참전자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후손들에게 비록 국가의 요구에 따랐다 하더라도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이 경제 발전의 신화를 이룩했다는 것만으로 결코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다. 참전 노인들도 베트남 파병이 한국 경제 부흥에 기여했다는 자부심만 되풀이 주장하지 말고 자신이 살기 위해 일어났을 수 있는 전쟁범죄에 대해 깊이 회개할 것을 소망한다.”

 

출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391~393

 

유일상 교수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은 나에게 있어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정말 많은 부분에서 공부가 됐다. 앞으로 베트남을 공부할 나로썬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책을 읽고 나니 20201~2월에 갔던 베트남 여행 시절이 그립다. COVID-19가 완화되면 베트남에 놀러갈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베트남 여행을 준비하거나 베트남의 자랑스러운 역사 무엇보다 독립투쟁의 역사를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2021년을 마무리 하며,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2022년에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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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did we fail to consider China and Vietnam in the same light as we did Yugoslavia-a Communist nation independent of Moscow? For several reasons, I believe. Tito seemed unique; he and Stalin had openly fallen out. China’s and North Vietnam’s heated rhetoric made us think they sought regional hegemony. And Cuba’s recent tilt toward the Soviet Union seemed illustrative of how ostensibly independent Third World movements quickly placed themselves within the Communist orbit. Thus, we equated Ho Chi Minh not with Marshal Tito but with Fidel Castro.

 

source: 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 p.33

 

왜 우리는 중국과 베트남을 모스크바로부터 독립한 공산주의 국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선상에서 인식하는 데 실패한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티토는 좀 특이한 경우였다. 우선 티토와 스탈린은 공공연하게 갈라졌다. 중국과 북베트남의 열띤 선전은 우리에게 마치 지역패권을 추구하려 한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그리고 최근 쿠바의 친소련적 행보는 표면상 독립적인 것처럼 보였던 제3세계 운동이 공산주의권에 재빠르게 흡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호치민을 티토 원수가 아닌 피델 카스트로와 동일시 한 것이다.

 

출처: 회고록, 베트남 전쟁의 비극과 교훈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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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대량살상 무기인 을 실전에 사용한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미국은 1945 8 6일과 9일 일본의 히로시마(Hiroshima)와 나가사키(Nagasaki)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원자폭탄 투하는 미국의 최신식 폭격기인 B-29 폭격기가 수행했으며두발의 원자폭탄으로 16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즉사했다이러한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성과는 별개로 미국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그 이유는 이러한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다.)

 

미국의 원자폭탄 실전 사용은 사실상 냉전(Cold War)’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당시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이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한 이유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다포츠담 회담 당시 미국은 이미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킨 상태였고당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신무기의 존재를 은근슬쩍 알려줬다따라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소련의 지도부가 이를 경계했던 데에는 미국이 자신들을 견제하려고 한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동맹관계는 깨졌으며이에 따라 냉전이 시작됐다이 냉전은 1990년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끝났으나미국과 소련 양측의 군비 경쟁은 45년간 지속됐다이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많은 부분에 재정을 투입한 무기는 바로 핵무기였으며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경우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1962년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가 터졌을 때인류는 실제로 멸망을 두려워했었으며흐루쇼프와 케네디가 합의를 보았을 때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소련의 핵 미사일, 냉전 시기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퍼레이드 할 때도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경우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주로 미국의 입장에서만 보지만실제로 가장 많은 위협과 협박을 행한 주체는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사실 소련이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한 이유에는 미국이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이었다터키에 배치된 핵 미사일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따라서 소련 입장에선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쿠바에 핵 미사일을 설치하는 맞대응을 한 것이다일종에 전략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쿠바 미사일 위기는 지나치게 미국의 시각에서 해석되고 있으며오히려 미국이 더 많은 위협과 협박을 자행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의 비키니 핵실험-1)

 

사실 미국은 냉전 초기부터 핵전력 우위를 점했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 섬에서 핵실험을 단행했다당시 소련은 핵무기가 없던 시점이었다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자소련의 보리스 이자코프는 <프라우다(Pravda)>에 미국이 진심으로 군축을 원한다면 원자탄 성능 향상에 그토록 목을 매눈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기 1년 전 미국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에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당시 커티스 르메이의 목적은 분명했다바로 전략공군사령부를 소련과 전쟁하여 승리할 수 있는 부대로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의 비키니 핵실험-2, 미국은 비키니 섬에서만 23번의 핵실험을 했다.)

 

커티스 르메이는 이제 전쟁이다!”라고 선언하며소련과의 전쟁 시 원자폭탄 133개를 소련의 70개의 도시에 투하하여 방어망을 단번에 궤멸시킨다는 계획을 추진했다이럴 경우 소련 산업의 40%가 파괴되고 270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했다르메이가 설계한 전략공군사령부 비상전쟁계획은 원자폭탄 보유량 전체를 단 한 번의 대량 집중 공격에 쏟아 붓도록 했다사실상 민간인 피해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학살 계획이었다그랬기에당시 미국의 육군과 해군 모두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했을 정도다그러나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공군 편을 들었으며, 1948년 말 SAC의 비상전쟁계획을 승인했다무엇보다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이 이 결정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더글라스 맥아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하자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고, 실전에 사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당시 미국은 소련보다 핵무력에서 앞선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소련의 핵무장과 중국의 공산화가 미국 사회에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를 불러왔지만미국의 핵무력 우위라는 전제를 깨뜨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 이유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참전 이후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핵무력을 사용을 강력히 주장하다 해임되었기 때문이다물론 트루먼이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맥아더를 해임시켰으나어디까지나 확전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전할 위기에 직면하자미국은 핵폭탄 투하를 실제로 고려했었다이는 미국의 덜레스와 닉슨 그리고 레드퍼드 등이 논의했었다물론 베트민이 미군 개입 이전에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켰기에미국의 실질적 군사적 개입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냉전 시기 미국은 항상 소련보다 핵무력을 우위에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쿠바 미사일 위기 전후로 흐루쇼프가 핵무장을 보다 더 강화한 데에는 비대칭전력의 격차를 줄이려 했기 때문이었다이와 같은 힘의 불균형을 생각해 보았을 때냉전의 실질적인 책임은 소련이 아닌 미국의 책임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본다따라서 냉전의 책임론은 미국 책임론이 보다 현실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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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과의 관계가 점차 좋아지면서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이슈가 된 문제다. 1990년대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사에 대한 발언을 꺼낸 이례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는 한국인들에게 많이 각인되었다이에 따라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이 많이 강해졌으며사실상 주류적 흐름이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의문을 표하는 집단들도 있다이는 인터넷 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그들은 대게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증거가 없다.”, “베트콩이랑 민간인이랑 구분이 안 된다.” 그리고 월맹군이나 베트콩도 학살을 많이 했다.”로 요약이 된다.

(후에 학살 이후 시신을 발견한 후에 민간인들, 문제는 여기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규모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미군의 폭격과 남베트남군의 보복에 의한 것인지 확실히 진상규명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경우 증오비나 위령비가 있을 정도로 베트남 내에서도 증거가 결코 없다고 할 수 없으며과거 하미 마을 학살 추모비를 세우는데 돈을 보탰던 한국군 참전용사들이 기록삭제를 요구하려 했던 행동들이 드러났었다.(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p.204)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군의 학살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그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과 민간인 자체가 구분이 없는 게릴라전인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군의 학살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그 이유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기본적으로 양민들의 지지를 받으며전쟁을 전개하기 때문이다이는 퐁니 퐁넛 학살에 대해 증언한 베트남전 참전용사 류진성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는 한국군이 작전 수행 중 베트콩들이 민간인을 집단 살해하고 사라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증언했다.(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무용담처럼"베트남 참전 해병대원의 고백뉴스1, 2021년 11월 16)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며그 규모가 크다고 한다결론부터 말하자면그들에 의한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그러나 이는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구조상 좌익의 학살이나 테러가 우익보다는 작을 수 밖에 없다또한 이들은 적어도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앞서 보았듯이 제네바 협약은 호치민에게 베트민군 전체를 남부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그러나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베트민을 지지하는 수십만의 게릴라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각기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여전히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그래서 디엠의 테러 정책은 곧바로 보복 테러를 당했다그러나 디엠의 폭력 행위는 그가 적으로 간주한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했던 반면 베트민은 디엠의 앞잡이들만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거의 아무도 테러 당한 앞잡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이처럼 디엠은 농민을 멀리했고베트민은 가톨릭 신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았다.”(호치민 평전 p.280, 2001년에 출간된 호치민 평전으로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베트콩이 학살이 있다그것은 바로 후에 학살(Massacre of Hue)그러나 이 후에 학살의 특징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한 것이 강조 받는 한편 도시의 70%를 파괴한 미군 폭격에 대해선 입을 닫는 다는 점에서 정보의 편향성이라는 문제점과 여론조작 및 각색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예를 들면 닉 터스(Nick Turse)가 2013년에 쓴 ‘Kill Anything That Moves’에 따르면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폭격과 함포사격 그리고 포격 및 미군의 화력에 의해 죽었으며, 11만 6,000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Kill Anything That Moves p.103)

(1960년대 중반 베트콩에 의해 가족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한 아이의 사진)

 

후에 학살은 보통 월맹군이 2,500명에서 최대 6,000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또한 과장되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터스는 후에 학살을 언급한 부분에서 각주로 여러 자료들을 인용했는데거기 인용된 각주에 따르면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은 후에 학살로 월맹군에게 죽은 희생자는 300~400명이며수천 명이라는 숫자는 매우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Kill Anything That Moves p.306) 그 외에도 노엄 촘스키나 에드워드 허만 그리고 가레스 포터 등이 후에 학살에 대한 반론과 미국의 여론조작을 폭로한 저서들이 다수 있다노엄 촘스키는 저서 <여론조작>에서 후에 전투를 취재했던 영국의 사진 기자 필립 존스 그리피스(Philip Jones Griffiths)의 주장을 인용하며, “후에 탈환으로 발생한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미국의 무차별적인 화력 사용으로 죽임을 당한 뒤 공산주의자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로 탈바꿈되었다고 증언했다.(여론조작 p.371)

 

월맹군에 대한 학살 및 테러에 대한 자료를 담고 있는 것으로는 미국의 친미성향의 역사학자 권터 루이(Guenter Lewy)의 <America in Vietnam>이 있다책에 따르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총 3만 6,725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America in Vietnam p.272~273) 이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도 미군의 전쟁범죄 피닉스 작전과는 별개로 이 숫자를 인용하며, “전쟁 초기에는 어림잡아 약 3만 7,000명이 게릴라들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69)고 서술했다이러한 숫자가 과연 정확한지는 다소 의심을 품을 만 하다그런 의심과는 별개로 권터 루이의 책에선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바디 카운트로 죽은 민간인이 22만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 있다.(America in Vietnam p.450~451)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에 의한 희생보다 1/6 내지는 1/7 수준으로 적다는 것이다이러한 추산은 한국전쟁 당시 좌익의 학살과 우익의 학살을 비교했을 때나타나는 수치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2011년에 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미국인의 감수성에는 크게 불편하겠지만기록은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이를테면 한 곳에서는 지주 8다른 곳에서는 경찰 14명 같은 식이었다)을 보여준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76~277)

 

이러한 커밍스의 주장은 앞에서 언급한 호치민 평전의 저자 찰스 펜의 주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권터 루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학살의 숫자를 어느 정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그러한 이유는 바로 촘스키나 허만 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들의 학살과 테러에 대한 보도가 미국 언론에 의해 조작되고 각색되는 사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일본인 기자인 가츠이치 혼다는 사이공의 미군 총정보국에서 나온 베트콩의 테러활동이라는 제목의 주간 보고서를 조사했었는데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발견했다.

(반공 역사학자 더글라스 파이크의 저서,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저서 중 하나인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는 1980년대 운동권이 읽던 불온서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친미주의적 입장에서 베트남사를 연구한 인물이다.)

 

놀랄 만큼 야만적이고 지속적인 테러가 정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테러는 사이공의 정보통제에 의해 일반의 조사로부터 사실상 은폐되고 있었다살인사건이 결코 베트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곧 드러났다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격화하는 베트남 전쟁의 무대 뒤에는 비밀스럽게 숨겨지고 있던 '끔찍한 사실'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미국 대외정책론 p.417)

 

1970년 10월 북베트남의 포탄이 안호아에 있는 한 고아원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그런 사건이 일어나자 ABC의 조지 왓슨(Geroge Watson)은 겁에 질려 아무도 이 학살에 대비하지 못했다이것은 북베트남인이 안호아에서 저지른 비이성적인 살인이다.”라는 논평을 했었다그러나 민간인 사상자는 압도적으로 미군의 화력에 의해 발생했다하지만 텔레비전이 지적한 책임 소재는 7/10의 비율로 적군에게 돌아갔고, ‘계산적인 테러작전은 미군의 작전에 의한 불행하지만 정당한 부작용과는 대조를 이루었다.(여론조작 p.344~345) 1968년 미군이 자행하여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에는 일부 생존자들이 남베트남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이 수용소가 파괴되면서 미라이 학살 생존자들이 사망했는데이는 베트콩의 테러로 왜곡되었다촘스키와 허만이 쓴 미국 대외정책론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사실들이 단순한 사고로서 등장하기도 하였다한 가지 특히 기이한 예를 들자면미라이 학살 사건의 생존자들이 강제 소개되어 있던 수용소가 1972년 봄 남베트남군의 공습 및 포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이 파괴는 통상 그렇듯이 베트콩의 테러로 돌려졌다이 사실은 그 지역에 있던 퀘이커 봉사단원에 의해 폭로되었다.”(미국 대외정책론 p.417)

 

그 외에도 술에 취한 남베트남 정부군 병사가 자신들끼리 언쟁을 벌이다가 수류탄을 던져 옆에 서 있던 구경꾼들을 죽인 것도 이른바 베트콩의 테러행위로 보도됐었었다.(미국 대외정책론 p.417) 이러한 사실들을 보았을 때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테러와 학살은 많은 부분에서 조사와 의심을 해봐야 할 사항이며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로 알려진 후에 학살만 보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의구심과 조작 그리고 과장이 있었으며맥락적으로 도시 70%가 미군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수천 명의 민간인이 미국과 남베트남의 화력에 의해 죽은 것에 대해선 언급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의 저서 <여론조작>, 이 책은 미국 정부가 어떤 식으로 여론을 조작하는지 분석한 책이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은 후에 학살이나 몇몇 베트콩의 테러행위를 언급하며,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한국군 보다 민간인 학살을 더 많이 저질렀다.”는 위로아닌 자신들 만의 위로를 하고 있다이러한 주장에는 이러한 반론도 가능하다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캐나다군이 민간인 60명을 학살했는데이는 인민군이나 좌익이 한 규모에 비해 작으니캐나다군은 잔인하지 않은 건가?(캐나다군의 양민학살 관련 자료는 <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캐는 프라이스 교수한겨레, 2005년 8월 11>가 있다.)

 

학살의 규모가 어떠하든 캐나다군의 학살은 미군의 노근리 학살이나 한국의 국민 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그 개입의 성질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잏후에 등장한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정책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누가 전쟁을 먼저 일으켰느냐와는 다른 문제다베트남 전쟁의 부분도 마찬가지다만약에 친미주의자 권터 루이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군이 양민 9,000명을 학살한 것보다 좀 더 크다 할지라도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의 개입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 부정될 수는 없다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한 혁명적 테러리즘과는 별개로 한국이 제국주의적 전쟁에 참전하여 민간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선 당연히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대한 테러와 학살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다수 미국이나 남베트남 측의 조작 및 각색 그리고 본질적 맥락 생략이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있다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검증과 비판 없이 미국과 남베트남측의 자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사료를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학살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은 기본적 맥락 생략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후에 학살을 언급할 때단순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대한 언급만 할 것이 아니라미군의 가공할 만한 화력으로 죽은 민간인에 대해서도 언급해야한다적어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 학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선 그러한 시도를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미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대략 200~300만의 민간인을 죽였다사망자 대다수는 폭격과 고엽제 그리고 미군 군사작전에 의한 것이다.(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p.197~198) 1968년 베트남 국영 출판사에서 출판한 <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에서는 1967년 1월 기준으로 미군의 화력에 의해 25만 명의 남베트남 아이들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1967년 1월 램파트 잡지(Rampart Magazine)에 뉴욕 머시 칼리지의 아동기관 위원이었던 윌리엄 페퍼(William Pepper)에 따르면, “총 25만 명의 남베트남 아이들이 미군 화력에 의해 사망하고 또 다른 75만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p.20)

 

그러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을 주장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부정론자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그것은 바로 반공주의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기에 주요모순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문헌

 

박주희한국전 때 캐나다군 범죄’ 캐는 프라이스 교수한겨레, 2005.08.11. https://m.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56791.html#cb

 

이장호"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무용담처럼"베트남 참전 해병대원의 고백뉴스1, 2021.11.16. https://www.news1.kr/articles/?4495022

 

저자 불명The American Crime of Genocide in South Vietnam, Gial Phong Publishing House, 1968

 

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Oxford University, 1978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임채정(), 미국 대외정책론일월서각, 1985

 

찰스 펜김기태(), 호치민 평전자인, 2001

 

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유문화사, 2002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정경옥(), 여론조작에코리브르, 2006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박태균베트남 전쟁한겨레 출판, 2015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비엣 타인 응우옌부희령(),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더봄, 2019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어깨걸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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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9세기 당시 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등 사실상 모든 분야를 섭렵했었다. 따라서 그가 천재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유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에게는 자신을 재정적 그리고 철학적으로 보조해주는 동지 한명이 있었다. 그가 바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였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첫 만남을 가졌던 것은 184211월 어느 날이었다. 이 만남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생의 벗이자 동지가 되었다. 오늘은 바로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생애를 다뤄보고자 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201128일 프로이센의 바르멘(Barm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방적공장의 소유주였다. 당시는 산업혁명이 한참이었기에, 이러한 공장 소유주는 당시 대 부르주아 계급을 상징한다고 봐도 손색이 없다. 또한 엥겔스의 아버지는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엥겔스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엄격한 부르주아적 행동규범과 정통 신앙 아래에서 자식들을 키우고자 했다. 엥겔스가 17살이 되던 해 그의 부친은 공부하는 아들을 억지로 집으로 불려 들여 가업을 돕게 했다. 부친의 뜻을 크게 거부하지는 못했으나 엥겔스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철학, 물리, 화학 등 과학적 지식과 역사 그리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등 무려 10개 국어를 익혔다. 당시 엥겔스가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독일 관념론 철학의 아버지인 헤겔의 저서들이었다.

 

1841년 엥겔스는 21살의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이 시기 엥겔스는 자주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청강했고, 청년 헤겔파의 한 사람이었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 당시 바우어는 마르크스와도 매우 친한 관계였고, 엥겔스 또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마르크스를 알게 됐다. 당시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트리어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마르크스를 찬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42년 엥겔스는 부친에게 밀려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맨체스터로 갔다. 물론 그가 영국에 간 것은 아버지 회사를 경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사를 상속받기 위한 훈련을 받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기회를 틈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당시 영국 맨체스터는 1842년 총파업의 중심지였고, 차티스트를 비롯한 온갖 선동가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엥겔스는 산업자본주의의 실상을 목격했으며, 이때부터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처음 만난 것은 184211월에 일이었다. 당시 엥겔스는 독일 쾰른에 있는 라인신문사무소를 방문하여 마르크스를 만났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만남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뜨거운 악수나 포옹 같은 것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담배 한 대조차 권하지 않았다. 그냥 한번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이것이 엥겔스와 마르크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엥겔스가 독일-프랑스 연보에 보낸 토마스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서평과 정치경제학 비판때문이었다.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읽은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천재의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두 번째 만남은 18448월 어느날이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두 번째로 만나기 위해 영국에서 파리로 찾아왔다. 이번 만남에서는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진실성과 솔직함을 보았음을 인정했으며,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격려하는 것을 느꼈다.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절친이 되었고, 10일 동안 파리 노동자 집회에 참석하는 등 여러 활동과 만나며 친분을 쌓았었다. 또한 이들은 저서를 공동집필했는데, 바로 신성가족(The Holy Family)였다. 1845년 마르크스는 벨기에에 있었는데, 경제 사정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자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로 와서 이웃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함께 투쟁하는 전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공동 작품 하나를 집필했는데, 그것이 바로 독일 이데올로기(The German Ideology)였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청년헤겔학파에 맞서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됐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상가인 바이틀링이 주도하던 독일 망명가들의 비밀 조직인 의인동맹(der Bund der Gerechten)’에 들어갔으며, 1847년에는 이 조직을 공산주의자 동맹이라는 공개된 혁명조직으로 바꿨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새로운 구호가 이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184711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동맹이 영국에서 연 제2차 대표대회에 참석했다. 3개윌 후인 18482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동으로 초고를 쓴 저서를 발간했는데, 그것이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었다. 1848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신라인신문을 발간했다. 다만 이들이 의도했던 독일 전역에서의 혁명은 무마됐고, 반란 선동죄로 마르크스는 18495월 독일에서 추방당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도와 영국 런던에 정착하도록 재정적으로 도왔다.

 

이후 엥겔스는 부친과 타협하여 맨체스터의 한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점부터 대략 10년간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가 모두 3,000여 파운드를 보내 주었다. 이 돈 덕분에 마라크스의 가족은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엥겔스는 1850년에는 독일 농민전쟁(The Peasant War in Germany)1852독일에 있어서의 혁명과 반혁명(Revolution und Kontrarevolution)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64년에 이른바 제1 인터내셔널(The First International)을 결성했고, 3년 뒤인 1867년에 나온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집필을 도왔다.

 

1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이후 연합 내의 격렬한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렸으며, 특히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과 의견차이가 격렬했다. 결국 바쿠닌파의 분파 활동으로 조직 내의 갈등이 심화되고 파리코뮌의 와해로 탄압이 강화되자 더 이상 조직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제1 인터내셔널은 1879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엥겔스는 1878년에는 반뒤링론(AntiDühring)1884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es, 1886포이에르바하론등을 집필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중 사망함에 따라, 자본론2권과 제3권을 출판했다. 3권은 1894년에 집필이 완결됐다. 그러던 189585일 엥겔스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작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이었다. 당시 엥겔스는 유럽 국가들에 있어 노동운동의 지도적인 중심인물이었고, 그의 유해는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카를 마르크스와 더불어 그 시기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철학자아자, 경제학자 그리고 사상가였다. 정치·철학·역사·과학·자연·가정·인종·언어·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 또한 그는 대부르주아지의 아들로써, 프롤레타리아트 세상에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쳤다. 그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유물론 철학의 토대를 세웠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변증법적으로 분석한 자본론을 완성시킨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분야의 많은 분석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es은 전통적인 가족관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되는 가족관에 대한 비판을 담았으며, 새로운 역사적 분석을 내놓았다.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엥겔스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더불어 지금도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으며,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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