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2년 김남섭 교수가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저서인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s: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의 내용을 바탕으로 겨울전쟁을 요약한 글입니다.)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1939년 8월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또한 스탈린 정부의 폴란드 분할과 핀란드 침공에 대해서도 당연히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서방의 입장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동맹이었고, 부당한 제국의 팽창을 했다.”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론은 없는 것일까? 당연히 반론도 존재한다. 오늘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의 또 다른 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겨울전쟁 당시 전선 지도)
1930년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관된 정책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팽창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한 것도 파시즘에 맞선 새로운 전략이었고, 실제로 1936년 프랑코가 파시스트 쿠데타를 일으키자 공화파를 지원했다. 스탈린은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약 2,000명의 소련군을 파병했으며, 보병의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는 탱크 부대도 보냈다.
스페인 내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겨울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아시아와 유렵에서 전쟁을 치렀다. 우선 만주와 몽골 쪽에선 하산호와 노몬한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고, 1939년 폴란드 분할 당시 소련군은 병력을 보내 폴란드의 절반을 접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스탈린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스탈린은 갈등을 촉발한 국경과 안보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정치협상은 파탄이 났고, 그 결과가 군사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1939년 10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은 협정에 대한 요구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핀란드에게 해군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핀란드만의 몇몇 섬을 조차하거나 임차하고 싶다는 요구를 내밀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서 3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소련-핀란드 국경을 북서쪽으로 옮기기를 원했으며, 그 보상으로 핀란드에 극북의 소련령 카렐리야 영토를 주고자 했다.
협상을 준비하면서 소련 외무부는 일련의 최대 요구와 최소 요구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최대 요구에는핀란드에서의 군사기지, 북부 핀란드의 페차모 니켈 광산 지역 양도, 발트해 연안의 핀란드 군사 시설에 대한 거부권이 포함되었다. 물론 핀란드 대표단은 양보를 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반면 소련은 소련-핀란드 상호 원조 협정까지 포기하며 최소한의 영토를 요구하는 쪽으로 물러났다. 즉, 소련은 핀란드에게 협상에서 양보를 하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던 것 같다.
(소련-핀란드 전쟁 관련한 영문 서적)
그러나 협상은 궁극적으로 깨졌으며,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핀란드는 10월 중순에 군대를 동원했고, 핀란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체포했다. 핀란드가 이렇게 나가자, 스탈린과 소련 국방 인민 위원 보로실로프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 보로실로프는 11월 20일까지 소련군을 레닌그라드 지역에 완전히 집결시켰고, 지역 사령관들은 11월 21일까지 기동 준비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소련군은 핀란드군 사이에서 벌어진 국경 충돌에서 개전 이유를 찾았으며, 11월 28일 몰로토프는 1932년에 맺은 소련과 핀란드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고, 소련은 1,500대의 탱크와 3,000대의 항공기 지원을 받는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진격을 재현한 사진)
초기 공격은 실패했고, 준비된 핀란드군 또한 제법 잘 싸웠다. 로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날씨에 소련군의 공격은 서툴렀고 조율도 억망이었다. 그러나 그해 2월 스탈린이 세묜 티모셴코를 소련의 핀란드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핀란드가 만들어 놓은 만네르하임선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고, 핀란드군을 잘 갖추어진 전선에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사상자가 핀란드군 보다 많았다는 점을 보자면, 군사적 손실 측면에서 핀란드가 이겼다고 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1940년 3월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 방어의 남은 부분을 붕괴시키고 수도 헬싱키로 진격한 다음 온 나라를 짓밟고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스탈린은 핀란드의 평화 협상 타진에 반응하여, 종전 조약을 협상해서 체결하기로 했으며, 1940년 3월 12일에 맺은 조약의 조건에 따라 핀란드는 소련의 주요 영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독립과 주권을 보전했고, 여느 발트국가들과는 달리 상호 원조협정을 맺는 일과 본토에 소련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스탈린은 비교적 겨울전쟁 종전에 대한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T-26 전차)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에서는 비교적 짧게 언급된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 정부의 공산주의자 탄압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가 아는 핀란드는 레닌 시절 적백내전 속에서 탄생한 국가였다. 당시 핀란드는 레닌을 지지하는 볼셰비키 좌파와 반공성향의 우파가 내전을 벌였는데, 1948년의 대한민국처럼 우파가 승리했다. 내전 당시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는데, 적색테러로 죽은 사람이 1,650명인 반면, 백색 테러로 죽은 사람은 무려 8,2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즉, 백색 테러의 규모가 적색 테러보다 몇 배는 더 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핀란드 정부는 명실상부 반공 성향의 우익 정부였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부당한 침공을 지적할 수 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겨울전쟁 이후 핀란드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 빌붙은 아주 충실한 반공 성향의 동맹국가였다. 겨울전쟁 이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을 돕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