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점점 인기를 잃어가면서 정부 내부 인사나 정부와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동의의 테두리를 박차고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예는 대니얼 엘스버그였다.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수학한 엘스버그는 해병대 장교를 지낸 뒤 미국 정부를 위해 주로 기밀사항인 특별연구를 수행하는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에서 일하고 있었다. 엘스버그는 국방부의 베트남 전쟁사 집필을 도왔는데, 같은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앤서니 루소의 도움을 받아 일급 기밀문서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사이공에서 만났는데, 각기 다른 경험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참사를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이제는 미국이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행동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엘스버그와 루소는 근무를 마치고 매일 밤 한 친구의 광고대행사에서 7,000쪽에 달하는 문서를 복사했다. 엘스버그는 이 사본을 여러 하원의원과 『뉴욕타임스』는 『국방부 문서』라 알려지게 된 이 사본의 일부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닉슨 행정부는 대법원에 출판금지신청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그것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사전 제약(prior restraint)’이며 따라서 헌법에 위배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정부는 국가기밀 문서를 승인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는 이유로 엘스버그와 루소를 방첩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을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러나 판사는 배심원단의 심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무효심리를 선고했다. 당시 밝혀지고 있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검찰 측의 부당한 관행이 낱낱이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엘스버그는 이런 대담한 행동을 통해 정부 내의 반대론자들이 정책상의 작은 변화를 기대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자기 의견을 억제하는 일반적인 행동양식을 깨뜨렸던 것이다. 한 동료는 이제 엘스버그가 “접근통로”를 가지게 됐으므로 정부를 떠나지 말라고 권했다. “너 자신을 잘라내지 마. 네 목을 자르지 말라고.” 엘스버그는 대답했다. “인생은 행정부 바깥에 존재하는 거야.”
반전운동은 성장 초기부터 낯설고 새로운 지지자들을 발견했는데, 가톨릭 교회의 신부와 수녀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민권운동을 통해 각성하게 됐고, 또 다른 몇몇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 아래 횡행하는 빈곤과 불의를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험으로 현실에 눈뜨게 됐다. 1967년 가을, 필립 베리건(Philip Berrigan) 신부(제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으로 성요셉 신부회 사제였다)는 화가 톰 루이스(Tom Lewis)와 친구인 데이비드 에버하트(David Eberhardt), 제임스 멘겔(James Mengel)과 함께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병무청 사무실로 가서 징병기록을 피로 흠뻑 적시고는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재판에 회부된 그들은 2~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5월 필립 베리건(볼티모어 사건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였다)은 예수회 사제이자 북베트남을 방문, 미국의 폭격이 야기한 결과를 직접 목격한 친형 대니얼(Daniel Berrigan)과 함께 두 번째 행동을 벌였다. 베리건 형제와 다른 일곱 명은 메릴랜드 주 캐튼스빌(Catonsville)에 있는 병무청 사무실에 들어가 기록을 꺼내 나와서는 기자와 구경꾼들이 있는 가운데 징병서류에 불을 질렀다.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들은 ‘캐튼스빌의 9인(Catonsville Nine)’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댄(대니얼의 애칭) 베리건은 캐튼스빌 사건 당시 이런 ‘묵상’을 적어뒀다.
“훌륭한 벗들이여, 순조로운 질서를 깨뜨린 데 대해, 아이들 대신에 종잇장을 불살라버린 데 대해, 납골당 정문을 지키고 있는 당직병들을 성나게 한 데 대해 사죄를 구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는 살인은 무질서이며, 생명과 온화함과 공동체와 이타심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질서하고 말합니다. 그런 질서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선량한 이름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공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순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던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감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됐을 때 대니얼 베리건은 종적을 감췄다. 연방수사국이 추적하는 와중에 대니얼은 자신이 교편을 잡고있던 코넬 대학의 부활절 축제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방수사국 요원 수십 명이 군중 사이에서 그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무대에 올라섰다. 그 순간 조명이 꺼졌고, 무대에 있던 빵과 인형 극단의 커다란 인형 속에 몸을 숨긴 대니얼은 트럭에 몸을 싣고 인근 농가로 도망쳤다. 대니얼은 4개월 동안 지하에서 머물면서 시를 쓰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극비 인터뷰에 응하고, 필라델피아의 한 교회에 갑자기 나타나 설교를 한 뒤 다시 사라지는 등, 연방수사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나, 한 밀고자가 편지를 가로채 그의 소재를 고발함으로써 결국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다.
캐튼스빌의 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전에 수녀였던 메리 모일런(Mary Moylan)역시 연방수사국에 자진출두하지 않았다. 연방수사국은 모일런을 결코 찾아내지 못했다. 지하에서 쓴 글에서 모일런은 자신의 경험에 관해,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입장에 다다랐는지에 관해 되돌아보았다.
“우리 모두는 결국 감옥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 칫솔을 가지고 갔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작은 옷상자를 꺼내 간이침대 밑에 밀어 넣고 침대로 올라갔다. 볼티모어 군 교도소에 있는 여자들은 전부 흑인이었다. 백인이라곤 딱 한 명뿐인 듯했다. 여자들이 나를 깨우더니 물었다. “왜 울지 않지요?”, “왜 울어요?” 여자들은 말했다. “당신 지금 감옥에 있는 거예요.” 나는 대답했다. “네, 나도 여기 올 줄 알았어요.”
그 여자들 둘 사이에 끼어 잤는데, 매일 아침 일어나 보면 팔꿈치를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들은 나에게 말하곤 했다. “밤새도록 자더군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내 인생에 정치적 전환점이 온 것은 우간다에 있을 때였던 듯하다. 미국 비행기들이 콩고를 폭격하던 와중에 그곳에 있었는데, 콩고 국경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비행기들이 국경을 넘어 날아와서 우간다의 마을 두 곳을 폭격한 일도 있었다. 도대체 미국 비행기들이 왜 거기까지 온 것일까?
그 뒤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탄자니아의 수도)에서도 조금 머물렀는데 저우언라이가 그곳에 왔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이 사람이 더러운 공산주의자이므로 미국인은 절대 거리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뒤 워싱턴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의 상황, 즉 경찰의 미친 짓거리와 야만행위, 그 도시의 시민 대부분(70%가 흑인)이 영위하고 있는 삶에 마주쳐야만 했다.
그리고 베트남, 네이팜탄과 고엽제, 폭격 등이 있었다.
나는 약 1년 전에 여성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캐튼스빌 사건 때눈 감옥에 가는 게 의미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흑인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토록 많은 흑인들이 항상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감옥에 가는 게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걸 원치 않는다. 1970년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일 것이고, 나는 우리의 자매와 형제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거기서 신비로운 경험이나 어떤 다른 경험을 하든 간에 그렇게 그들을 소모시키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