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독일에서 만든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의 초반부를 보면서독의 학생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서독의 젊은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고경찰은 이를 강경진압으로 대응한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경찰이 쏜 총탄에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에서는 급진적인 무장투쟁 조직인 바더 마인호프가 창설되기에 이른다당시 서독의 젊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한 이유는 바로 이란의 전제군주 팔레비 샤(Pahlavi Shah)가 서독을 방문을 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란의 샤가 도데체 어떤 인물이기에서독의 좌파 대학생들은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했던 것일까?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 나오는 1967년 이란 샤의 서독 방문 반대 집회)

 

독소전쟁이 한참이던 1941년 9월 영국과 소련은 레자 샤 팔레비 국왕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이란을 침공해 강점한 뒤 레자 샤를 해외로 쫓아내고 당시 22살 밖에 안 된 아들 샤를 이란의 왕으로 앉혔다대다수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이이란은 원유가 풍부한 나라였다사실 미국은 1920년대부터 이란의 원유에 눈독을 들여왔고영향력을 확대했었다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은 이란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했다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미국 회사들이 이란의 원유에 눈을 들였다면소련의 스탈린은 이란 북부지역의 유전을 개발하고자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은 이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두려워했다일단 이란의 국경은 소련으로부터 북쪽으로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물론 스탈린은 이란에 영국 및 미국에 허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원유 관련 이권을 달라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2차 세계대전 당시 들어간 군대를 이란에 주둔시켰다반공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소련과 대결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처칠은 1946년 3월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 소위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여소련을 자극했다이는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이란 석유회사 브리티시 퍼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은 수익의 84%를 차지하며이란인들에게는 기껏 16%만을 돌려주었다놀랍게도 관련 세금도 이란이 아닌 영국에 납부했으며실제로 이 화사가 본국에 납부한 세금이 이란의 로열티로 가져간 액수의 2배가 넘었다즉 영국이 이란 원유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대다수의 이란인들은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당시 유전 노동자들은 일당이 50센트도 안 되었으며다른 혜택이나 유급 휴가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란의 진보적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크)

 

이란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1950년이었다이란에 진출한 미국 석유회사 아람코가 사우디 원유에서 얻는 수익의 50%를 주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랑 계약을 맺으면서였다당시 미국은 이란이 중동 원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기 때문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당시 이란의 총리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는 영국 이란 석유회사의 석유 독점권을 박탈하고자 했다그 외에도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모사데크는 대다수의 이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심지어 이란 주대 미국 대사는 본국에 모사데크는 이 나라 국민 95~98%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보고를 올렸을 정도였다그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란 민중은 이에 열광했던 것이다.

 

모사데크가 반기를 들자 역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영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을 금지하고 이란으로 들어가는 물품을 막았다미국 용인하에 잉글랜드 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이란에 대한 대출 및 거래를 중단했으며이란의 경제는 점차 어려워졌다. 1951년 10월 윈스턴 처칠과 보수당은 선거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처칠은 이란에 대한 군사개입 압력을 높여갔고이에 대한 대응으로 모사데크는 영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추방했다이런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가 이란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가 주도한 이란 쿠데타 당시 샤를 지지하는 동원된 군중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는 CIA를 통해 모사데크를 제거할 방안을 논의했다모사데크는 사회의자가 아니었다다만 좌파 조직인 이란 대중당(Tudeh party)와 관계가 좋았다따라서 미국의 아이젠 하워 행정부는 모사데크를 극단주의자로 봤으며막후에서는 CIA가 비밀공작에 들어갔다. CIA는 이른바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을 실행했다놀랍게도 이 작전의 지휘자는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커밋 루스벨트였다영국 정보부 MI6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이란의 왕 샤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미국의 이란 쿠데타 공작이 시작된 것을 안 모사데크는 샤가 쿠데타 음모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외로 추방했다.

(이란의 왕 샤와 그의 일가족들)

 

미국 CIA의 공작은 치밀하고도 사악했다. CIA는 이란의 언론인종교인군경 간부국회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한 뒤이들을 통해 CIA의 지시에 따라 반정부 여론을 조장했다심지어 CIA는 이슬람 전사들(Warriors of Islam)’의 폭력까지 돈을 주고 동원했다. CIA가 공작한 쿠데타 역사를 정리한 한 연구서에 따르면 이들은 극렬 테러리스트 깡패 집단이었다. 1953년 8울 루스벨트는 수도 테헤란에 폭도를 풀어 혼란 상태를 만들기 시작했으며우선적으로 모사데크가 공산주의자이며 유대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1953년 이란 쿠데타 관련 포스터)

 

그가 동원한 깡패들은 대중당 당원인 척하면서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이슬람 사원 한 곳을 파괴했다폭도들 중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모사비 호메이니도 있었다나중에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그 호메이니다. 8월 19일 이란의 테헤란은 무정부 상태가 극에 달했다루스벨트는 파즈롤라 자헤이 장군을 CIA가 마련한 은신처에서 빼냈으며자헤디는 당시 이탈리아에 가 있던 샤가 자신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고 선언했다총격전 끝에 쿠데타 음모 세력은 모사데크를 포함한 모사데크 지지자 수천 명을 체포했고일부는 처형했다결국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됐다이후 샤는 테헤란으로 돌아왔으며커밋 루스벨트와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왕좌는 신과 나의 백성나의 군대 덕이오그리고 선생 덕이기도 합니다.”

 

이란의 지배자가 된 샤는 이후 25년간 이란을 통치했다샤의 통치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과 선거 조작이 있었으며, 1957년에는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의 반대파 탄압 책동이 있었다샤가 이란의 통치자가 되자미국은 이 부패한 동맹세력을 위해 돈을 풀었다미국 석유회사들은 이란 원유개발을 위한 컨소시엄 지분의 40%를 차지했다미국은 샤에게 금고도 열어줬다쿠데타 성공 2주 만에 미국은 샤에게 긴급원조 6,800만 달러를 제공했으며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이것이 바로 쿠데타를 통한 미국의 친미정부 건설 과정이었다결국 이 친미 정부는 1978년 극단적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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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포인트 포스터, 이 포스터는 9.11 테러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제법 잘 담아낸 것 같다.)

몇 일 동안 안보던 넷플릭스 다큐인 터닝 포인트를 봤다. 지난 번에 내가 쓴 리뷰를 보면 다큐가 ˝소련 침공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본인들이 키운 탈레반에 대해 여성인권 운운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썼다. 또한 미국의 애국주의를 다소 강조하는 부분에 불편함을 느낀 것도 글에서 낱낱이 드러냈다.

나는 그러한 감정을 잠시 내려놓은 뒤, 몇 일 전 보다가 말았던 2화를 오늘 다시 봤다. 2화는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얘기를 보다 광범위하게 확장한다. 9.11 테러 당시 뉴욕 현장에 있던 이들과 워싱턴 펜타곤에 있던 이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던 부시의 측근들까지로 말이다.

1시간 정도의 러닝 타임을 자랑하는 이번 편에서는 당시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인들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보여준다. 즉 미국이 어떤 식으로 전쟁에 들어가게 됐고, 정서상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다큐는 9.11 테러를 당한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지옥같은 현장으로 뛰어 들었던 사람들의 용기와 헌신을 있는 힘껏 보여준다. 군복무를 소방서에서 했던 나로서, 위험한 현장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희생한 경찰과 소방관 그외 직원들의 희생정신은 당연히 공감한다. 9.11과 같은 테러 현장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생활전선에서 소방관 대원들의 극한직업을 체험해봤기에, 그들의 희생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얘기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행동과 잘못된 분노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이걸 많이 강조하고 싶다. 다큐는 9.11 테러의 현장과 긴박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신속히 넘어간다. 전쟁 초기 탈레반과 내전 중이던 북부동맹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대다수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점령했다. 여기까지가 2화의 내용이다.

나는 이 다큐가 미국에서 만든 다큐로서, 9.11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애한 것에는 크게 불만이 없다. 다만 지나친 피해자성 부각에 약간의 불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얘기에서의 결정적인 문제점이 아직까지 크게 언급되지 않았다. 그 문제점이 뭔지는 총평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그래도 당시 미국인들의 정서가 어떤지는 제법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이 점에서 미국인들이 1991년 걸프전쟁을 통해, 소위 베트남 증후군을 이라크 사막에다가 뭍어버렸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아무튼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잊어버린 이들이 결국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라는 실수를 반복했음을 유의하면서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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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2003321241,500명의 미군과 3만 명의 영국군,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이 이라크 영토에 진입했다.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단기간에 이라크의 정규 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렸으며, 개전 3주만인 49일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것이 바로 이라크 전쟁(Iraq War)이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그로부터 2년 전 미국은 21세기가 시작됨에 따라 9.11테러로 충격을 받았다. 9.11테러는 미국에게 새로운 전쟁인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미국은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략했다.

(딕 체니)

 

9.11 테러를 주도한 인물은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을 중심으로 핵심 인물 19명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들 중 16명은 미국의 중동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바로 중동 여성의 해방과 민주주주의 전파였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허구였다. 미국의 진짜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권 장악을 통한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이란에 대한 군사적 견제였다. 이라크 침공의 목적은 말 그대로 석유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확인된 원유 매장량이 2,590억 배럴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적대국인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은 1,120억 배럴로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3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라크의 실질 매장량이 4,000역 배럴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다.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 전역을 장악한 미국이 우선적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라크 측 국영기업들을 해체해 석유 부문을 석유 관련 다국적기업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2004년 딕 체니가 소유주로 있던 핼리버튼은 12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남부 석유시설 재건 계약을 따냈고, 미국은 자신들이 세운 이라크 정부에게 지지부진한 석유화학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딕 체니가 CEO로 있는 기업 핼리버튼)

 

핼리버튼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에서 이윤을 긁어모았다. 이라크에만 4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던 핼리버튼은 200824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윤 대다수는 의문스러운 수의계약을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 미군 군납업체 순위 19위에서 1위로 등극했다. 미국 상원 의원 패트릭 레이히 상원이 당시 부통령이자 핼리버튼 회사 소유주인 딕 체니(Dick Cheney)에게 핼리버튼 회사의 부당한 폭리 추구에 이의를 제기하자, 딕 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좆 까 이 새끼야(Fuck yourself)!”


(딕 체니가 이라크 전쟁을 통해 번 돈)

 

핼리버튼과 자회사 KBR은 여러 차례 발주처에 비용을 부당하게 과다 청구했다. 이들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혼란을 통해 막대한 자본과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이라크의 상황은 악화됐다. 후세인 정권 몰락 이후 인민들의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폭탄 테러가 빈번히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교적 교리 갈등도 더 심각해졌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이라크에 배치된 미군들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 전사자가 급증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까지 최소 4,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는 급증하여, 이라크인 65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라크의 여성들은 미군에게 강간당했으며, 양민들은 미군의 직접적인 학살과 드론 공습 그리고 무차별 헬기 사격의 공포와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재생산한 빈곤에 고통받았다.

(영화 바이스)

 

따라서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는 이렇게 끔찍하고 무책임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놓고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남에게 총을 쏘고도 사과하지 않는 인성을 가진 딕 체니는 당연하게도 이라크 전쟁에 대해 단 한 번도 국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뻔뻔하게 자신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을 옹호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아주 뻔뻔스럽게 잘먹고 잘살고 있다. 딕 체니는 자신의 자본가 동료인 럼스펠드와 콜린 파월을 따라 이승탈출하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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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터닝 포인트)

 

Netflix에 있는 다큐멘터리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1화를 오늘 봤다. 시작은 2001년 전 세계를 뒤흔든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 9.11 테러에 대한 묘사를 하다가, 미국의 중동전쟁의 기원을 얘기하기 위해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말한다. 그리고 무자헤딘과 냉전 이후 탈레반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만든 것 답게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이 강조하는 소련 침공은 아프가니스탄 좌파들을 지원하는 형식이었고, 미국은 이러한 진보를 막기 위해 탈레반의 사실상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무자헤딘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무자헤딘 간부 중 한 사람이 부르카를 안 쓰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얼굴에 염산을 뿌렸다는 것과 1996년 탈레반 집권 시기 여성 인권이 바닥을 달렸다는 것은 얘기하지만, 소련군이 들어 왔던 시점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고 가장 많은 여성 인권이 보장되었으며, 그걸 반동적인 탈레반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던 것이 미국이었다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전반적으로 볼만한 다큐멘터리이자, 제법 미국의 실책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맞다고 생각한다. 제법 나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 중심의 미국 지배층들과 아프가니스탄 친미주의자들의 인터뷰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조는 이 다큐멘터리가 미국 중심주의적 편향을 못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다양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던 넷플릭스의 전 시리즈 중 하나인 PBS 베트남 전쟁과 크게 차이가 나며, PBS 베트남 전쟁이 미국 중심적 사고관에도 불구하고 왜 훌륭한 명작인지 다시 한번 직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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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이 세계를 제패하던 13세기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격퇴했던 나라가 동남아시아에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당시 베트남은 리 왕조의 뒤를 이어 쩐 왕조가 수립됐고그 왕조는 대략 200년간 장기 집권했다이 정권이 베트남에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베트남의 명장이자 영웅인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왕의 존재 때문은 아닐까오늘은 베트남의 명장이자 쩐 왕조의 왕이었던 쩐흥다오가 어떻게 몽골의 제1차 침략을 막아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현재 호치민시에 있는 쩐흥다오 동상,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막아낸 그는 현재 베트남에서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혹은 강감찬 장군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칭기즈칸 사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팽창했던 몽골 제국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서방으로 팽창하는데 주력했었다이 과정에서 쿠빌라이칸은 현재 중국의 운남 성의 대리국으로 진격하여 국경을 현재 베트남과 맞대게 되었다당시 쿠빌라이칸은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남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쩐 왕조는 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오히려 사신을 투옥시키고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수군에 대한 지휘를 쩐 리에우의 아들 쩐 꾸옥 뚜언(Trần Quốc Tuấn) 쩐흥다오에게 맡겨 국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몽고군은 남하했을 시기베트남의 일부분을 점령했었다그 이유는 베트남의 군민을 대송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당시 몽고군을 지휘했던 인물은 우량하타이였다우량하타이의 군대는 베트남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몽고군은 홍강과 로강을 따라 두 길로 나뉘어 남하했는데수도인 탕롱(현재 하노이서북쪽 약 50km 지점까지 접근했다. 1258년 1월 몽고군과 쩐흥다오가 이끄는 베트남 주력군은 홍강과 로강다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비엣찌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1차 침공 당시 몽고군의 진격도, 몽고군의 진격은 매서웠고 초기 베트남군 또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초기 몽고군은 주저 없이 강을 건너 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퇴각하는 베트남군을 따라 진격했다베트남군은 급히 병력을 수습해 탕록 북쪽 푸로(phù lỗ)에서 2차 방어선을 편성했다물론 이 방어선도 몽고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으며베트남군은 탕롱을 버리고 후퇴했다탕롱에 입성한 몽고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몽고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태종의 동생 등 일부 인사들은 송나라로 피신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그러나 쩐흥다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시기 베트남군이 사용했던 전투 코끼리, 열대지방에 위치해 있는 베트남 또한 코끼리를 전투용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베트남 이웃나라인 라오스는 한때 코끼리 왕국으로 불렸었다.)

 

당시 쩐흥다오가 이끄는 몽고군은 후퇴하며 건물과 다리 그리고 도로를 파괴했고몽고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이는 1812년 조국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사용했던 전술이나, 1941년 독소전쟁 초기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술과 유사하다쩐흥다오의 병력이 후퇴한 이후 몽고군들은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고낯선 풍토병으로 고전하기 시작했다결국 베트남을 침공한 몽고군의 사령관 우량하타이는 베트남에게 화의를 제의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1258년 뀌화 전투 당시 게릴라전으로 기습 공격을 했던 베트남군과 우왕좌왕하는 몽고군, 1차 침공 당시 쩐흥다오가 사용한 게릴라 전술은 이후 레러이의 대명항쟁과 응우옌 후에의 대청항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의 게릴라 전술과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까지 이어진다.)

 

전열을 가다듬은 쩐흥다오의 베트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퇴각했던 베트남군은 몰래 홍강을 넘어 탕롱 건너편에 있는 동보더우(Đông Bộ Đầu)의 몽고군 주둔지를 공격해 점령했다이는 개전 후 처음으로 베트남군이 거둔 승리였다이후 베트남군은 강을 건너 아군 진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승리의 기쁨에 겨워 미친 듯이 강둑을 내달리는 베트남군 기병들을 탕롱 성벽 위에서 바라본 몽골 병사들은 충격을 받았다결국 우량하타이는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철수했다철수하는 길드 순탄치 않았다몽고군은 탕롱에서 국경 사이 중간쯤 되는 옌바이 성 뀌화(Quy Hóa)에서 소수민족인 무엉족 군민의 기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258년 뀌화 전투 재현 모형, 위에 있는 사진과 같다. 게릴라전을 통해 몽고군을 몰아냈던 베트남을 보면, 베트남이 20세기 당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침략을 무찌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각하는 몽고군은 허겁지겁 이동하느라 주변을 약탈할 여유도 없이 지나가 베트남 북부에서는 몽고군이 진짜 불적(부처 같은 적)이었다라는 조롱 섞인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다결국 몽고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베트남은 몽골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맺은 뒤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이는 또 다른 침략을 막으려는 베트남측이 벌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1차 대몽항쟁의 승리는 베트남 측의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게 여러 가지 소중한 자산을 안겨주었다. 1차 대몽항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몽고군도 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으며최선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몽고군의 가장 큰 무기인 공포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웠고그들이 청야전술과 유격전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도 전술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무엇보다 아무리 강한 외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왕부터 백성까지 하나로 뭉쳐 막아내겠다는 강력한 투쟁 의지를 갖는 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유인선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이산, 2002

 

오정환천년전쟁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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