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질문의 책 12
자크 파월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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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미국의 신화를 낱낱이 파헤친 역사 연구

“유럽 진공에 참여하는 연합군 전우 어러분! 여러분들은 수 개월 간 준비해 왔던 위대한 십자군 원정의 목전에 와 있습니다. 전세계가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전세계의 시민들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여러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연합군 전우들은 독일의 전쟁 기계가 부서지는 걸 볼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해 왔던 나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 세계를 수호할 것입니다. (중략....) 대세는 바뀌었습니다! 전세계의 자유시민들이 우리와 함께 승리를 위해 힘차게 전진할 것입니다! 저는 어러분들의 용기, 의무에 대한 헌신, 전투 기술에 대하여 무한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제 우리는 승리만을 남겨 놓고 있을 뿐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여러분들이 걸어야 할 위대하고 영광스런 고난 앞에 하느님의 무궁한 영광이 깃들기를 염원합니다.”

해당 연설은 1944년 6월 6일 영미 연합군이 이른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하기 전 연합군 총 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한 연설이다. 해당 연설은 2001년 HBO에서 만든 드라마이자, 미군 제101 공수사단 이지중대(Easy Company)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1화 마지막 장면에서 인용되는 연설이다. 또한, 2005년 인피니트 워드(Infinity Ward) 회사에서 만든 FPS 게임 콜오브듀티 2(Call of Duty 2) 미군 캠페인에서도 영상을 통해 인용된다. 해당 드라마와 게임은 미국에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들에서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관련 연설이 인용된다는 것은 현재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인식하는 지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해당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게임을 플레이 하다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매체에서 주장하는 미국의 관점에 쉽게 빠져들기까지 한다. 10대 시절 나 또한 두 작품 외에 미국서 만든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게임을 통해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관을 쉽게 흡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존의 통념과 정반대되는 학술적 역사 연구가 있다. 즉, 미국의 주류 및 사회적 시각과는 전혀 반대되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분석을 한 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 책이 바로 캐나다의 역사학자 자크 파월(Jacques R. Pauwels)의 저작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The Myth of the Good War - America in the Second World War)』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들은 주로 영미 연합군 그중에서 미군이 저 간악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맞서 어떻게 세계를 파시즘으로부터 구하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며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은 파시즘 체제인 독일과 일본이 일으킨 전쟁인 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과 1939년에 시작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전쟁의 시작점은 1937년 중일전쟁이나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것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고 난 다음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미국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파월의 책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부터 그리고 참전한 이후와 전쟁 승리 이후 미국이 한 행위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한다. 책을 읽다보면, 과연 현재까지도 미국과 서방 세계가 내세우고 있는 소위 “나치 독일의 억압에 맞서 미국이 세계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수호했다.”는 주장이 너무나도 허구적으로 느껴진다. 해당 저서에서 파월이 주장하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역사학자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이 공동으로 쓴 저서이자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완독했다. 1,000페이지 이상의 분량이나 되는 두 권의 책이라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미국의 이면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던 책이었다.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절반 정도 시청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1권에서 나는 나치 독일이 미국의 기업들과 어떻게 거래했는지를 알게 됐고, 그 내용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역사학자 자크 파월의 저서는 그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 동원된 전쟁기계들이 사실상 미국 기업들이 준 도움 때문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더 나아가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도 미국 기업들이 준 도움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파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독일은 1930년대에 군대를 실어 나를 트럭과 함께 탱크와 항공기를 엄청나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와 고무를 수입하여 비축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석유의 상당량을 미국 회사들로부터 구입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친절하게도 석탄으로 합성연료를 만드는 비법을 전해주기도 했다. 독일 육군과 공군은 1939년과 1940년 이 설비 덕분에 수천 대의 항공기와 탱크를 동원하여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의 방어수단을 단 몇 주 만에 제압할 수 있었다. 번개처럼 빠른 전쟁(blitzkriege)에는 번개처럼 빠른 승리(blitzsiege)가 뒤따랐다.”(자크 파월, 윤태준 옮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오월의봄, 2017, 86쪽.)

사실 전쟁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원은 석유다. 즉, 석유가 있어야 탱크와 항공기 그리고 트럭을 이용할 수 있다. 군인을 동원하는 데 있어 식량이 매우 중요하듯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차량과 탱크 그리고 항공기는 석유가 필요하다. 즉, 그런 석유들을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미국 회사들이 나치 독일에게 제공했고, 그런 제공은 당연히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다. 솔직히 이런 얘기는 매체에서 민주주의 수호자로 알려진 미국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역사다. 파월은 이와 같은 미국의 기업들이 사실 나치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반대했다는 구체적인 근거를 책에서 밝힌다. 미국의 기업이 나치를 적대하지를 싫어한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결국 자본(Capital)이었다.

자본주의가 탐욕과 무절제한 생산 그리고 생산수단을 일방적으로 소유한 개인이 폭리를 취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가들의 탐욕 현상은 소위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미국의 자본가들에게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살고 있거나, 관심을 가지기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학교나 사회에서 이런 사실을 전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에서 언급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절대다수가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독일과 미국의 인종 계층 관념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여론조사를 통해서 드러났듯이, 1930년대에는 수많은 미국인들이 나치의 인종주의에 반대하지 않았다. 히틀러으 반유대주의와 그의 파시스트 동지들도 미국에서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1920~1930년대에는 반유대주의가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에서 상당히 유행했다. 그들 자신도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이 나치의 반유대주의 조치들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에 관대했다. 기업가와 은행가들을 비롯한 미국의 권력층도 이런 일반적인 규칙의 예외는 되지 못한다. 일례로 유대인은 대개 상류계급이 애용하는 회원제 클럽과 고급 호텔에 출입이 금지되었다. 기업인 헨리 포드(Henry Ford)는 히틀러를 경애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1920년대 초 <국제 유대인(The International Jew)>이라는 반유대주의 책을 출판해 히틀러에게 영감을 준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였다. 둘은 서로를 존경했다. 총통은 집무실에 포드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그를 반유대주의라는 영감의 근원으로 인정했으며, 1938년에는 나치 독일이 외국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포드 또한 괴링의 친구이자 유명한 비행사인 찰스 린든버그가 미국 전역에서 활발하게 진행하던 친나치 선전 캠페인에 자금을 지원했다.”(자크 파월, 윤태준 옮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오월의봄, 2017, 48~49쪽.)

계속해서 파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국의 사업가와 은행가들이 대체로 나치즘이나 파시즘이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대로 그들은 바로 그 반유대주의 때문에 파시스트, 특히 히틀러에게 공감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런 사람들이 이끌던 미국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이유로 유럽 십자군 계획에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자크 파월, 윤태준 옮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오월의봄, 2017, 50쪽.)

따라서 미국의 자본가들과 엘리트들은 나치즘의 폭력성에 대해 전혀 비판적인 의식이 없었고, 그들과의 거래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봤으며,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도 이들과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미국의 이 지배층들은 히틀러가 반공주의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크게 해가 될 소련 볼셰비즘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된다 생각했고, 히틀러의 반공주의적인 면모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역사에 익숙치 않은 몇몇 사람들은 현재 내가 쓴 서평이 매우 낮설게 느껴지겠으나, 지금 언급한 내용들은 전부다 파월의 책에 나온 내용들이다.

책에 나온 이런 이야기들은 현재 소위 미국 지배층들이 강요하는 역사만 아는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역사다. 나 또한 이 책에 나온 내용을 전혀 모르던 것은 아니지만, 자세히 알게 되니 신선한 충격을 적잖게 받았다. 저자 파월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미국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면 그 어떤 이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고, 그 어떠한 인권유린도 용인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20세기 역사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피노체트(칠레)나 비델라(아르헨티나) 그리고 소모사(니카라과)와 같은 유사 파시스트 독재자들을 지원했다고 강조한다. 즉, 미국이 이런 악랄한 독재자들을 지원한 것은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이윤관계에 전혀 해가되지 않기 때문이며,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결국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것을 저자는 강력히 얘기하고 있으며, 그 자본주의가 전쟁과 폭력 그리고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이 저자의 강조점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당 저작에서 내가 정말 놀란 부분은 저자가 소위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서구의 시각에 상당히 도전하는 지점이다. 해당 저작은 1939년에 체결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즉 독소 불가침 조약이 나치 독일과 소련의 군사동맹이 전혀 아님을 역설한다. 그리고 스탈린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서방이 소련에게 보인 적대적인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파월이 서방이 주장하는 스탈린 독재자론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파월은 소련의 스탈린이 무자비한 측면이 없던 지도자는 아니었으나, 소위 독재자 프레임이 서구에 의해 악용되고 이용되었으며 실제로는 억울하게 프레임화된 측면이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 당시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공공의 영역에서 이득을 취했기에, 미국과 서방의 자본가들이 소련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였다는게 파월의 입장이다. 캐나다 역사학자가 이 정도로까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해 분석한 것이 놀라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르며, 파시즘을 무찌르는 데 가장 큰 공로가 있는 주체는 바로 소련과 스탈린임을 분명히 언급한다. 파월의 입장 중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서구 역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함에 있어 폴란드에 대해 무조건 동정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하면서 유럽의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대륙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해방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치 독일도 아직 정복되지 않은 채였다. 그러는 동안 소비에트가 폴란드 전체를 해방시킬 것이 분명했고, 그런 전망은 많은 폴란드인들, 특히 보수적이고 강력하며 반소비에트적인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를 걱정에 빠지게 했다. 게다가 이 정부 구성원들은 충실한 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 전쟁 전 히틀러와 공모하여 뭔헨조약 때 체코슬로바키아 일부를 가져간 선례를 따랐던 독재적인 폴란드 정권을 대표한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고 있었다.”(자크 파월, 윤태준 옮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오월의봄, 2017, 182쪽.)

이런 지점들은 사실 서방 역사학자들이 쓴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에서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이다. 그 외에도 파월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2년 전에 감행된 영국·캐나다 연합군의 디에프 상륙작전에 대해 기존의 시각과는 전혀 다르게 분석한 것도 흥미로웠다. 파월에 따르면, 디에프를 상륙한 것이 노르망디 예행연습이 아닌 제2전선을 열어달라는 스탈린의 강력한 요청과 이에 따른 영국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의사를 의식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대패였지만 말이다. 또한, 1943년 무솔리니 축출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이탈리아 빨치산과 파리 해방에 기여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등이 좌파적인 성향 때문에 서방 연합군에게 어떻게 배척받았는지를 책은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1941년부터 나치에 맞서던 ELAS라 불리던 그리스 빨치산이 서방에게 어떻게 배척받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즉,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나 프랑스 그리고 그리스에서 소위 나치에 격렬히 저항하던 좌파 게릴라보다는 지배층들을 선호했다는 얘기다. 그게 자신들의 패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미 연합군은 과거 무솔리니 정권에 있다가 무솔리니 축출 이후 집권한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권을 승인했고, 그리스에서는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 세력을 지지했으며, 프랑스에서도 좌파운동을 하던 국내 레지스탕스가 아닌 반공주의 성향이 강하며 친서방적인 샤를 드골의 집권을 승인했다. 이탈리아의 바돌리오는 과거 무솔리니 정권의 에티오피아 침공 당시 항공기 동원을 통한 무차별 폭격과 독가스 살포 등 전쟁범죄를 저지른 인물이었고, 그리스 왕당파 세력은 앞서 언급했듯이 나치 협력자들이며, 프랑스의 드골 정권은 사실 프랑스 국내에서의 투쟁에 힘을 쓴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섰던 공산당들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는 과정 속에서 미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그리스에서는 소위 내전에 개입하여 친나치 우익 세력을 도와 10~15만 명의 그리스인을 죽였다.

즉, 이와 같은 미국의 행보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도 있었다는 것이 파월의 주장이며, 소위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여 여러 나라들에 그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 허구적이라는 것이 파월이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부터 미국은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취했다. 실제로 미국 지도부에 있던 이들은 소련에 맞설 생각을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했었다. 사실 이들의 경우 원래부터 소련을 싫어했던 이들이었고,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소련을 비난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제로 이들이 나치 독일이 항복하든 항복하지 않든 간에 소련에 맞서 이들과 협력할 생각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미군 명장으로 알려진 조지 패튼(George Patton)의 경우 나치 독일에 있든 잔당들과 협력하여 소련에 맞서 싸워야 한다 주장했다. 그게 1945년의 일이다. 심지어 패튼은 아예 우리 미군이 독일과 협력하여 모스크바까지 진격하자는 말도 안되는 주장도 했었다. 실제로 미국 CIA의 전신인 OSS는 그런 가능성을 염두해 두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위르겐 브룬의 얘기를 들어보자.

“사회적으로 말해서, 미국 산업계의 최고 경영자들, 월스트리트 증권 중개인과 변호사, 과학자, 군 고위층, 정치가, 그리고 소위 방위 전문가들의 혼합체였다. OSS는 명백히 미국 지배계급을 대표했다. OSS 요원들은 여전히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를 물리치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소련을 하나의 국가로서 제거해버리거나, 적어도 종전 후 유럽에서 그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자크 파월, 윤태준 옮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오월의봄, 2017, 238쪽.)

여기서 위르겐 브룬이 주장한 계획에는 나치와의 협력도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맞서 이 나치주의자들을 이용했다. 소위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이라 불리는 나치 과학자들 미국 이주 계획은 성공적으로 실행되어, 나치 과학자들이 미국 과학기술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고 그 덕분에 미국은 1969년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이 나치 무장 친위대 장교 출신으로 전쟁 시기 수천 명을 노예노동으로 사망하게 한 장본인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자크 파월의 책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있던 OUN의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와 UPA의 미콜라 레베드(Mikolka Lebed)와 같은 나치 학살자들을 소련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정치 공작에 이용했다. 특히나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베드는 나치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전쟁범죄자들이었음에도 미국은 이들을 지원했다. 특히나 1943년 볼린 대학살의 경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도 잔혹한 학살이었고(해당 학살은 여성과 노인 그리고 갓난아기를 의도적으로 타겟으로 삼아 학살하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말 그대로 악마와 사탄도 충격받을 전쟁범죄였다.), 최소 10만 명의 폴란드인을 학살당했지만, 학살을 자행한 레베드는 미국의 보호아래 잘 살다가 죽었다. 심지어 레베드의 경우 미국에서 매년 현재 돈으로 9,000만 원에 가까운 지원금을 받았으며, 1990년대 편히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바로 냉전이었고, 냉전에서 소련을 악마화하고 적대적 정책을 취함으로써 자본가들이 많은 이득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냉전에 대해 소련의 책임을 묻지만, 많은 역사 연구가 보여주듯이 그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파월의 말대로 스탈린은 전후에도 미국이나 영국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으려 했다. 소위 소련이 동유럽에서 자신들의 전리품을 막 챙겨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우려 한 것도 사실은 미국이 자극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미국은 이것을 마치 소련과 스탈린이 전 세계 공산화를 통해 자신들을 위협하려 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선전으로 잘 이용해먹었다. 그 이후에도 미국은 전쟁을 만들어 냈고, 전쟁의 동력은 결국 미국 스스로가 키워낸 자본주의였다. 그 자본주의가 파시즘적 인사들에 대해 호의를 보였고, 도덕적인 측면도 어기게 만들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미국은 여전히 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중국, 북한, 베네수엘라 등등. 미국은 해당 나라들에 인권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이들을 적대한다.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등장한 러시아 연방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적대적인 정책을 취해왔다. 결국 현재 세계는 다시 한번 신냉전에 들어가게 됐다. 이것은 결국 저자의 말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미국의 유산일 수도 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장식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최근 리비아, 시리아, 그리고 이라크 같은 나라들에세 불타올랐고, 이제 그것은 러시아와의 새로운 냉전으로 대체되고 있다. 미국의 파워엘리트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면 이란, 북한 그리고 심지어 중국까지도 언젠가는 새로운 좋은 전쟁의 상대가 될 것이다. 그런 전쟁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분명히 가능하다. 부시와 블레어는 우리 미디어 대다수의 열성적인 지지를 얻고도 이라크와의 전쟁을 팔아먹기가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에게 전쟁을 그만두도록 계속해서 강요한다면 진실의 순간이 미국 경제에 도래할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평화가 발발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끝없이 포위당했던 나라 소비에트의 사회주의는 살아남지 못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포위되지 않고도, 적이 없이도, 위협받지 않아도, 그것이 좋은 전쟁이건 아니건 간에 전쟁을 하지 못해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자크 파월, 윤태준 옮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의 추악한 진실』, 오월의봄, 2017, 378~379쪽.)

현재 세계는 미국이 유도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은 항상 제2차 세계대전처럼 좋은 전쟁으로 포장하려는 미국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전쟁의 이면을 보면 미국의 추악한 면모가 드러난다. 정말 훌륭한 책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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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김동택 해제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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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폭력의 시대 서평: 폭력의 시대 21세기를 앞으로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이름을 2020년에 처음 알았다. 정확히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됐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역사학자는 하워드 진이었는데, 물론 지금도 그를 존경하지만 홉스봄이라는 인물은 영국 공산당 당적을 포기하지 않고 역사학의 길을 갔다는 점이 여러모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홉스봄의 책을 딱 두권의 책을 읽었다. 한권은 그의 대표 저작인 <극단의 시대>고 다른 한권은 <혁명가>라는 책이었다. 그리고 올해 그의 또 다른 저서 <폭력의 시대>는 1990년대부터 2004년까지 그가 한 강연 내용과 소논문 그리고 기고한 기사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따라서 해당 책은 말 그대로 21세기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나오던 2000년대 초중반은 소위 미국의 세기로서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의 침략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9.11 테러로 3,000명의 미국인이 그날 뉴욕에서 사망하자, 미국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분노를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해소하고자 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멈추지 않았다. 2년 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라크를 침공하여 명분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네오콘으로 불리는 소위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미국식 자유주의 이념이 타국에 전파되야 한다 믿었고 그것이 가능하며 실제로 그 나라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홉스봄의 말대로 매우 위험한 생각이며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당장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는지를 보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홉스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전 지구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있음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인한 농촌 인력 감소가 그러하다. 이는 한국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얘기다. 한국은 과거 농업인구가 많았으나, 현재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인구 비율 매우 극소수다. 이는 과거 농업 국가였던 동남아시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농업에 종사해야 하기에 이런 현상은 분명 국가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대책을 강구해야한다.

질병에 대한 얘기나 컴퓨터 기술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다. 우선 질병 문제부터 얘기하겠다. 홉스봄이 이 글을 쓰던 당시는 소위 사스(SARS)가 유행하던 시기다. 나 또한 초등학생 시절 해당 질병이 뉴스에서 나와 자주 언급되고 국가적으로 대비했던 과거가 생각이 났다. 사스라는 질병이 의미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단기간에 이동이 가능한 시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질병이 퍼지는 속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0년 COVID-19만 보더라도 이것은 우리의 일상과도 연관이 있기에 매우 와닿는 설명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 인구 수억 명이 감염됐고, 700만이 사망했다. 이 중 120만 명은 미국인이다. 아마도 미국은 자신들 역사 250년 동안 전쟁에서 전사한 전사자 수치보다 코로나로 죽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전파 속도는 인간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었고, 지속된 기간도 그러했다. 격리ㆍ확진ㆍ치료ㆍ마스크ㆍ백신 등 전 세계인 모두가 대략 3년간 지쳤던 걸 생각해보니, 홉스봄의 강연은 은근 소름까지 돋는다.

컴퓨터 기술도 그러하다. 과거에는 인간의 영역이었던 것이 점차 컴퓨터의 영역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복잡한 수학적 계산은 요즘 컴퓨터가 다한다. 과거에는 사람이 하던 계산이었다. 거기다 챗 GPT의 등장과 AI 기술의 발전은 무섭기까지 하다. 물론 해당 기술도 사람이 만들기에 결국 만드는 이의 주관이 들어가게 되는 오류는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 글을 쓰는 이들에게 훨씬 편리하게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 기술의 혜택과 수혜를 인류가 보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홉스봄이 코로나나 AI의 발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에 해당 저서는 다소 한계가 있을지는 몰라도, 홉스봄이 기술의 발전 및 여러분야의 문제점들에 관심을 가졌다는 걸 이번에 다시 깨달았다.

홉스봄의 분석에 따르면, 20세기는 가장 끔찍한 전쟁과 파괴가 있으면서 동시에 경제 및 물질적 발전과 기술적 발전이 있던 시대였다. 말 그대로 극단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0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뺏어간 제1차 세계대전과 7,000만 명이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같이 한 나라에서만 벌어졌는데 수백만 명이 사망하게 되는 수많은 전쟁들. 어찌보면 20세기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에 반해 21세기는 이런 극단적인 전쟁이 줄어들었으나, 전쟁 자체가 사라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폭력과 파괴는 여전히 지속되고 전쟁의 양상도 달라지며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2022년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드론 투입을 보게 됐다. 물론 여전히 탱크와 장갑차 같은 재래식 지상전력이 투입되고 또 전투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전투 양상의 극단적인 불균형을 21세기에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최신식 무장력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인종청소를 벌이는 중이지만, 정작 팔레스타인의 저항조직 하마스를 소탕하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21세기에도 폭력적인 전쟁은 지속되고 있고, 소위 평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해당 저작에서 홉스봄이 흥미롭게 언급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침공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걸까? 물론 한 나라가 한 나라를 침공한다는 것은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홉스봄은 폴포트의 킬링필드를 종결시킨 베트남의 캄푸치아 침공과 우간다 이디 아민 정권을 무너뜨린 탄자니아의 우간다 침공을 예로 든다. 홉스봄은 캄푸치아와 우간다의 경우 내정 불간섭 원칙을 크게 손상하지 않고 단기적인 개입으로 즉각적인 효과를 얻었고, 어느 정도 지속적인 개선 효과도 얻었으며 제국주의의 암시도 없었고 더 넓은 세계 정치에 개입하지도 않았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았을 때, 전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를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글쓴이는 비폭력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물론 해당 가치가 가지는 아름다움과 의의는 잘 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비폭력으로서 해결될 수 있다 생각하지도 않고, 자칫하면 제3세계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을 폭력이라는 단어로 비난하며 서구 제국주의식 논리에 쉽게 빠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전 세계적 비폭력주의자들이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표면적인 양비론을 보이다가도, 사실상 러시아만 집중적으로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신나치즘 문제에 흐린 눈을 하는 이중성을 너무나도 잘 안다.

따라서 글쓴이는 홉스봄이 주장한 전쟁과 개입에 대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어도, 적어도 극단적인 비폭력주의 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분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얘기가 나온 김에 북한 문제도 언급하고자 한다. 현재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는 분명 대량인명살상무기다. 물론 끊임없는 군사경쟁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는 것도 분명 사실적인 부분이 있고 일리가 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대적하는 북한이 핵무장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북한의 핵무장이 역으로 한반도의 전면전 가능성을 낮췄다고 본다. 핵 없는 나라를 미국이 어떻게 했는지를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홉스봄의 분석 중 가장 흥미로운 분석은 바로 게릴라전과 반게릴라전 그리고 테러에 대한 분석이다. 홉스봄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쪽이 학살과 테러를 벌인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페루의 마오주의 단체인 ‘빛나는 길‘의 경우 소위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성노동자와 일반 시민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적잖게 학살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단체의 지도자 아비마엘 구스만의 경우 해당 건으로 페루에서 재판받고 감옥살이를 하던 중 몇년 전 옥사했다. 그러나 홉스봄에 따르면. 이들의 학살과 테러가 소위 해당 게릴라를 토벌하던 페루의 정부군 토벌대 보다 심했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 수많은 역사를 보면 이와 같은 홉스봄의 문제의식은 사실임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엘살바도르도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이 테러를 벌였지만, UN 조사에 따르면 내전 기간 학살의 최소 85%는 정부군이 저질렀고, 5%는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이 저질렀다. 하다못해 1948년 여순학살만 보더라도 학살의 95%는 이승만과 미국이 보낸 우익 토벌대가 했고, 5%만 봉기한 병력이 했다.

홉스봄은 테러를 분석하며, 테러의 위험률을 일부러 과장하는 서구 언론을 비판한다. 이것은 그 당시 진행되던 9.11 및 중동전쟁과 연관이 있다. 사실 테러로 희생되는 사람 보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당장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만 보더라도 침공 3개월도 안되 아프간인 사망자가 9.11 테러 총 사망자 보다 더 많이 발생했다. 즉, 테러의 공포를 이용해 자신의 전쟁 행위를 합리화하는 미국의 문제를 홉스봄은 해당 저서에서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21세기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여전히 전쟁은 지속되고 있고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모든게 다 비폭력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 상황에 우리가 길러야 할 것은 국제정세와 현 상황을 파악하는 냉철한 의식이다. 전반적으로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물론 좀 동의안되는 내용도 있었으나, 홉스봄의 분석은 여러모로 와닿았다.

홉스봄이 해당 저서에서 이른바 미국의 색깔혁명에 대해 분석하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쉽다. 그래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독서였다. 21세기를 어떻게 준비하고 분석할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여전히 숙제를 남기고 더 많은 생각지점을 남길 것이라 글쓴이는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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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40 2025-11-18 0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프로필에 20대 청년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혹시 이제 30대 되신 거 맞으시면 정정 부탁드려도 될까요? ^^

NamGiKim 2025-11-18 08:11   좋아요 0 | URL
생일 지나고 바꿀 예정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이제 3년이 다 되어간다.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2013년 서구가 유로마이단 폭동을 획책한 이후 시작된 돈바스 내전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사실 나는 2022년 푸틴이 이른바 특수군사작전을 게시하기 이전부터 우크라이나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민족 영웅 내지는 국부로 평가하는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가 사실은 나치 협력자고, 나치와 함께 홀로코스트에 가담하여 수많은 유대인과 러시아인 그리고 폴란드인을 인종청소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1943년에 스테판 반데라 지지자 세력인 우크라이나민족주의자기구(OUN)와 우크라이나 봉기군(UPA)가 볼린에서 10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을 어떻게 인종청소(Ethinic Cleansing)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군이 탈환한 부차 시내)


또한, 스테판 반데라나 로만 슈케비치, 미콜라 레베드 등 인종청소를 자행한 우크라이나 나치들을 미국과 캐나다 등 서유럽이 냉전 시기 어떻게 지원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냉전 시기 미국의 CIA는 이들을 침투시켜 소련에서 비정규적인 비밀작전을 수행하도록 했으며, 그 과정에서 3만 5,000명에서 5만 명의 소련인을 죽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에 맞추어 출간한 저서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에서 나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썼다. 유로마이단이 사실은 민주주의 혁명이 아닌 폭동이었다는 사실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지난 2011년 서구가 리비아를 전복시켰듯이, 소위 색깔혁명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정권을 레짐 체인지한 사실을 올리버 스톤(Oliver Stone)의 다큐멘터리 ‘Ukraine On Fire’와 ‘Revealing Ukraine’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필자는 2013년 유로마이단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개입하고 스보보다 같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을 선동하여 레짐체인지를 한 폭동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 당시 필자는 러시아의 대규모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진입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의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에서 특수군사작전을 게시했다. 물론 개전초기부터 최소 1년 이상은 필자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우크라이나 파시스트들에 대한 증오감은 날로 깊어졌다. 그리고 ‘자유’를 외치며 이들을 정치적으로 지원하고, 무기와 물자를 지원하는 서구 제국주의의 행태에도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들과 같은 이들이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징으로 포장된다는 것에 분노를 느낄만했다.


(부차 현장을 방문한 젤렌스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전쟁은 특수군사작전(Special Military Operation)이다. 러시아는 개전 초기에 돈바스의 해방과 비나치화와 그리고 NATO의 동진을 저지하기 위해 들어간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실제로 아조프와 같은 네오나치 세력들을 포로셴코 정권 시기 민병대로 키웠고,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무력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마이단 폭동으로 집권한 포로셴코 정부는 2014년부터 국가의 예산 지출 방향을 복지로부터 군사력 강화로 바꿨다. 2015년에서 2019년까지 우크라이나의 국방비는 17억 달러에서 89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2019년에는 GDP의 6%를 차지하는 수준에 달했다. GDP 비율로 비교해 보자면 우크라이나는 서방 선진국에 비해 3배나 더 많은 금액을 군대에 투자한 셈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는 군사력을 강화했고, 이들을 실전에 투입했다. 2014년부터 친러계열 주민들이 돈바스 지역에서 저항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시작된 것이 돈바스 내전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부터 2022년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게시하기까지 NATO는 러시아와의 약속을 어기며 끊임없이 동진을 해왔다. 그렇게 해서 폴란드·발트삼국(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헝가리·체코·루마니아·불가리아 등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동진에 협조하고, 그들 중 적잖은 나라가 NATO에 가입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경우 다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주민투표로 합병한 이유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이 쿠바에게 보인 반응과 비슷한 맥락이다. 크림반도는 19세기 크림전쟁과 20세기 독소전쟁 당시 세바스토폴 공방전이 벌어진 곳으로 러시아에게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곳이다. 그런 곳에 NATO 제국주의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면, 러시아의 안보가 뚫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만큼은 러시아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한계치였다.


미국과 NATO는 마이단 폭동 이후 포로셴코 정권과 젤렌스키 정권을 지원하며 러시아에게 전쟁을 도발해 왔다. 우크라이나를 NATO에 가입시킨다고 떠들며 러시아를 자극했고, 더 나아가 젤렌스키 정부는 2021년 4월 NATO 가입이 안될 시 핵무장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러시아군이 특수군사작전을 게시하기 1주일 전부터 우크라이나 정규군은 민스크 협정으로 설치된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우크라이나 ‘특수감독 미션’은 돈바스 내 우크라이나와 분리 공화국 사이의 접촉선을 따라 매일 휴전 위반 사항을 기록했는데, 이기록에 따르면 2022년 2월 16일부터 돈바스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포격이 시작됐다. 이 기록을 보면, 2월 16일 509회의 정전 위반과 316회의 폭발음이 있었다. 2월 17일부터 22일까지의 기록을 보면, 17일에는 870회의 정전 위반, 654회 폭발음, 18일 1,566회 정전 위반, 1,413회 폭발음, 19~20일 3,231회 정전 위반, 2,026회 폭발음, 21일 1,927회 정전 위반, 1,481회 폭발음, 22일 1,710회 정전 위반, 1,420회 폭발음이 기록됐다.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이것이 바로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에 대해 얘기할 때 생략하는 부분이다. 러시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권 국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해서 영토전쟁을 벌인다는 생각은 서구의 망상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맥락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다. 그렇게 러시아의 침공을 난리 치던 사람들이 2024년 8월 파리 올림픽이 한참일 때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러시아의 쿠르스크를 침공하여 점령한 것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게 바로 집단 서방이 보이고 있는 모순적인 행태다.


러우전쟁이 게시되자, 집단서방은 온갖 프로파간다와 가짜뉴스들을 쏟아냈다. 키이우의 유령이라는 우크라이나 공군 조종사가 러시아 전투기 40대를 혼자서 도그파이팅으로 격추해 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이런 가짜정보는 비디오 머그를 포함한 한국 언론들이 무비판적으로 보도했다. 또한, 러시아군이 의도적으로 민가를 폭격하고 민간인을 학살한다는 새빨간 거짓말도 진실로 보도가 됐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오폭도 러시아군이 한 것으로 왜곡보도했다. 서구와 우크라이나 당국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에 의해 한국 내의 진보세력들도 상당히 동요했다. 팩트는 러시아는 과거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침공 당시 벌였던 무차별 폭격을 이 전쟁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바그다드를 야간에 무차별 폭격하고 초토화한 것에 반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그러한 무차별 폭격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키예프에 전력과 인프라가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은 러시아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방증이다.


(부차 학살 현정에서 발견된 민간인 시신: 이 시신은 하얀색 밴드를 차고 있다. 러우전쟁에서 하얀 밴드는 친러인사를 의미한다.)


(부차에서 발견된 시신들)


러우전쟁 초기 서구의 악랄한 거짓말은 2022년 내내 판을 쳤다. 그중 가장 악랄한 사례는 부차 학살(Butcha)이다. 부차 학살은 러시아군이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 키예프 인근인 부차를 점령했을 당시 벌어진 학살로 알려졌다. 최소 400~5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크라이나와 집단 서방은 러시아군이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언론도 서구의 주장들을 앵무새처럼 받아 적었다. 한국 주류언론의 특징이다. 일단 서구 언론이 주장하면 묻지도 의심하지도 따지지도 않으며 그대로 Control+C+V를 한다. 서구 언론이 거짓이어도 아무런 비판 없이 복붙 한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언론 검열과 왜곡보도가 생기는 것이다.


(서구의 언론 보도를 그대로 보도하는 한국의 주류언론들)


필자는 초기에는 정말 러시아군이 한 것인지 의심했다가, 나중에 몇몇 글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벌인 조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제로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학살을 조작한 적이 있다. 2023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에게 반격을 가하자, 서구 언론들은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주장을 토대로 하마스가 영유아 40명을 참수했다는 가짜뉴스를 살포했다. 1990년 미국은 걸프전쟁을 시작하기 전 쿠웨이트 대사의 딸 나이라흐를 데려다가 거짓증언을 시켜 후세인의 군대가 쿠웨이트 병원에서 영유아를 인큐베이터에서 꺼내 학살했다는 무시무시한 얘기를 시켰다. 이후 이것을 앰네스티를 비롯한 서구 인권단체가 받아 적어 300명 이상의 아기를 이라크군이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전부다 조작과 거짓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필자는 부차학살도 그렇게 조작된 사례라고 생각하며,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가 북한군 파병에 대해 가짜 자료를 언론에 유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2022년 4월 러시아 언론인 스푸트니크(Sputnik)에 따르면, 미국 상원의원 후보이자 탐사 저널리스트인 마크 댄코프는 “나는 부차에서의 보츠맨의 사람들의 작업이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개인적으로 봤다.”라고 말했다. 이 비디오에 나오는 보츠맨이라는 인물의 실제 이름은 세르게이 코로트킨이다. 코로트킨은 벨라루스 탄생으로 급진적 우익 활동가이자 UN에 의해 ​​돈바스 민간인에 대한 잔학 행위로 기소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아조프 부대의 전 사령관이다. 앞서 미국 상원의원 후보가 말한 영상은 우크라이나군이 부차를 수복했을 때, 아조프 부대 간부인 보츠맨은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가 삭제한 영상이다. 그 영상에서 보츠맨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네오나치 세르게이 코로트킨이 올린 영상: 이 영상에서 코로트킨은 친러 인사는 총쏴도 된다고 말했다.)


“파란색 띠 안 찬 애들은 다 쏴도 되는 건가?”


“ㅇㅇ 당연하지!”


실제로 부차에서 죽은 민간인들의 시신을 보면, 죄다 하얀색 띠를 차고 있다. 하얀색 띠는 이 전쟁에서 친러성향의 인사를 의미한다. 또한 학살된 시신들 중에는 러시아군 전투식량을 소지한 민간인 시신도 있다. 이들의 옷이 벗겨진 것을 보면 소지품을 검사받은 후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23년 한신대학교의 이해영 교수가 쓴 저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를 보면, “부차 학살 당시 적어도 하얀색 밴드를 찬 이들은 우크라이나 당국에 의해 학살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나온다. 개전 초기 서방 언론이 이른바 “러시아의 만행에 대한 증거”로 유포한 부차 거리에 누워있는 시체의 영상과 사진에는 흰색 완장을 차고 있거나 완장이 없는 일부 시체가 나와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하얀색 밴드는 친러인사를 의미하지만, 이걸 지적하는 한국의 주류언론은 없었다. 그저 서구의 입장만 반복해서 전달할 뿐이었다.


(2007년 코로트킨이 러시아에 있을 당시 했던 범죄행위: 2007년 코로트킨은 러시아 네오나치 막심 마르친케비치와 더불어 외국인 두명을 칼로 참수 및 총살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세르게이 코로트킨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도 히틀러를 찬양하는 네오나치들이 판을 쳤었다. 적어도 2000년대까지는 그런 자들이 러시아 내에서 각종 테러와 살인을 일으켰었다. 2007년 러시아의 네오나치가 다게스탄인과 타지키스탄인을 납치하여 참수한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 한 사람은 목이 칼로 썰렸고, 다른 이는 권총에 맞고 즉사했다. 그 영상은 모스크바 인근에 있는 숲 속에서 촬영되었으며, 영상은 나온 네오나치들은 하켄크로이츠를 배경에 두고 두 외국인을 죽인 다음 나치식 경례를 하며 끝난다. 필자 또한 이 영상은 2010년대 초에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세르게이 코로트킨: 현재 아조프 대대 간부로 러시아 네오나치였다가 우크라이나로 도망쳐 아조프에 합류했다.)


알고 보니 이 영상에도 대단히 소름 끼치는 맥락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러시아에 있던 네오나치들은 실제 러시아 네오나치 조직 소속이었고, 그 단체는 2010년 러시아에서 금지됐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학살 가담자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러시아 네오나치 막심 마르친케비치와 세르게이 코로트킨을 지목했다. 막심의 경우 2020년 러시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고, 세르게이 코로트킨은 2014년에 우크라이나로 넘어가 아조프 대대에 합류했다. 결국 과거의 포로셴코 정권과 현재의 젤렌스키 정권은 그런 인물을 보호해주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 연방 법원은 코로트킨을 2007년 참수자로 2021년에 기소했다. 물론 우크라이나가 보호해주고 있기에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고 있지 않다.


(스카이뉴스 이탈리아어판 기사 및 영상)


그런 인물이 부차에 가서 앞서 언급한 영상을 찍었다는 점은 부차 학살을 서구가 주장하는 얘기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다 2022년 4월 2일 우크라이나 측의 언론보도를 보면, 우크라이나 경찰이 부차에서 부역자들을 청소했다고 보도했다. 2022년 6월 6일 스카이뉴스 이탈리아어판 기사는 전직 우크라이나군 병사를 인터뷰한 영상을 올렸다. 그 병사는 인터뷰에서 “부차에서 러시아에 정보를 제공한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일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측 기사는 부차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이 부역자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22년 4월 2일 부차에서 부역자를 색출했다고 보도한 우크라이나측 언론 보도)


서구 언론이 부차에서 러시아가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는 플레셰트 탄이다. 플레셰트 탄이란, 폭발 시 3cm짜리 철로 된 플레셰트 수천 개를 흩뿌리는 폭탄이다. 이 폭탄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을 소탕하며 잘만 사용하던 무기다. 물론 그 당시 미군은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이 거의 없었기에, 민가에다가도 이런 무기를 잘만 사용했다. 괜히 미군이 네이팜탄을 민가에 투하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는 한국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미국이 부차 학살 이후 부차에서 플례세트탄이 발견되자 러시아가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해 댔다. 그리고 서구 언론들은 민간인 시신들의 사망 시간이 러시아군의 부차 점령 당시라고 추정하며, 러시아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러시아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포격을 날려서 자폭이라도 했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져본다. 즉, 앞뒤 맥락이 너무나도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우크라이나군 역시 플레셰트 탄을 사용하고 있고, 돈바스 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도네츠크 등 민간인 주거 지역에 플레셰트 탄을 잘만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이후 서구 언론들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민가에 준 피해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논란이 많은 위성사진)


또한, 러시아 국방부는 크라이나의 주장을 단호하게 반박하고 우크라이나 당국이 퍼뜨린 부차 이야기를 폭로하는 사실들을 제시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모든 러시아 부대가 빠르면 3월 30일 부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고 지적했으며, 3월 31일 부차 시장이 비디오 메시지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당시 그 마을에는 러시아 군인이 없었고, 러시아인이 저지른 “잔혹행위”나 거리에서 민간인이 총에 맞은 사례는 언급되지 않았다. 러시아 국방부는 텔레그램에 “그러므로 부차에서 이른바 ‘범죄의 증거’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우크라이나 보안국과 우크라이나 언론 대표가 마을에 도착한 4일 차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썼다.


(부차 학살을 빌미로 제재를 가하겠다는 미국)


이와 함께 국방부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공개한 영상에는 사람들의 시신 모두 "최소 4일 이상 경직되지 않았고, 전형적인 사체 시반도 없고, 상처에 피가 말라붙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라고 전했다. 국방부는 부차 주민이 러시아군 통제 하에 있을 때 폭력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지적하면서 인도주의적 통로는 열려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군은 부차를 포함한 키예프 지역의 민간인에게 452톤의 인도적 지원을 전달 및 배포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크라이나군은 대구경 포병, 탱크, 다연장 로켓 시스템으로 부차 남부 외곽에서 중단 없이 포격을 가했다고 러시아 국방부가 밝혔다.


지난 2024년, 러시아 외무부는 러시아군 철수 직전인 2022년 3월 28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휴전협상이 있었는데, 우크라이나가 영국의 지시에 따라 협상을 결렬시키고 사전준비한 러시아제재 패키지를 가동할 목적으로 부차학살 조작극이 준비되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볼커 투르크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을 포함한 국제기구에 사건의 모든 정황을 규명하고, 부차 거리에 있던 시신들의 신원에 대한 확실한 리스트를 비롯한 기타 정보들을 제공해 달라고 수 차례 요청했으나 2년이 다 되도록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자하로바 대변인은 “이 끔찍한 연극을 기획한 자들이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국제기구들이 우크라이나 감싸기를 중단하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정확한 이름, 사망 시간과 원인, 시신 이동 흔적 유무를 밝히고, 책임자들을 색출하라”라고 촉구했다.


(부차 학살 관련 올리버 스톤의 트위터)


이와 같은 정황과 발견된 사실에 입각해 볼 때, 부차 학살은 러시아가 저지른 것이 아닌 우크라이나가 저지른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또한 개전 초기 부차 학살이 서구의 조작임을 주장하는 트위터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다. 필자 또한 올리버 스톤이 한 주장에 대해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2023년 하마스의 영유아 참수가 서구의 가짜뉴스였고, 1990년 나이라흐의 증언이 위증이었듯이, 필자는 부차 학살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의 조작이라 굳게 믿고 있다. 러우전쟁이 끝난 이후 부차학살을 조사하여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감춘 진실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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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5월 북아프리카 전역이 미국·영국·자유 프랑스·호주·뉴질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북아프리카 전역은 이탈리아의 졸전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전쟁을 통틀어 무려 35만 명 이상의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히틀러는 동맹국인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을 보냈지만, 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El Alamein)에서 패전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한때 롬멜의 독일 국방군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Cairo)까지 진격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의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후퇴를 반복하게 됐다. 결국 북아프리카 전역은 513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허스키 작전 지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한 영국과 미국은 이탈리아에 상륙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구상했다. 작전을 세우는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의 의견차이는 있었지만, 그해 여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Sicily)에 상륙하기로 결정한다. 그 당시 독일군은 아프리카 뿐만아니라 동부전선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1943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반격에 나섰다. 19437월 독일군은 최신식 전차인 티거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허스키 작전에 투입된 미군 제82 공수부대 대원들)


(시칠리아 해안에 상륙하고 있는 연합군)

 

194379일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영미 연합군은 총 10개 사단을 작전에 투입했다. 이 중 8개는 바다에서 그리고 나머지 2개는 하늘에서 데리고 왔다. 여기서 언급한 2개 사단은 미 제82공수사단과 영 제1공수사단이다. , 공수부대를 작전에 투입시킨 것이다. 이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예측한 연합군의 상륙 능력치를 넘어섰을 뿐만아니라, 시칠리아 섬에 배치된 추축국의 병력을 규모로 능가했다. 물론, 이탈리아군은 12개 사단이 있었지만, 이 중 절반인 6개 사단은 기동성이 없는 군대였고, 나머지 4개 사단도 연합군의 병력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인 병력이었다. 사실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졸전을 거듭한 군대였고, 그나마 유능한 군대도 이미 독일을 돕겠다며 동부전선에 투입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 군대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게 크게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1943년 7월 21일 시칠리아 전선 상황)

 

물론 연합군이라 해서 작전이 처음부터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군 제82공수사단과 영국군 제1공수사단의 공수부대들은 경험이 없는 항공기 조종사가 부대원을 바다에 떨어뜨리고 신경이 곤두선 대공포 사수가 자기편 항공기를 쏘아 떨어뜨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군 공수부대는 독일군 공수부대의 역공에 부딪혀 큰 희생을 치렀다. 비록 공수부대는 작전 중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었지만, 해안에 상륙한 부대들은 한결같이 상륙하는 데 다 성공했다.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흥미롭게도 히틀러는 만슈타인 장군에게 시칠리아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갑 군단 일부를 이탈시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쿠르스크 전선에 있던 독일군 기갑부대 일부가 이탈리아 쪽으로 배치되기도 했다.

(조지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시칠리아에 상륙한 이후 미군과 영국군은 진격을 지속했다.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은 시칠리아의 서쪽 절반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몽고메리의 군대는 에트나 산 동쪽을 지나 짧은 경로로 메시나를 가고자 했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몽고메리 예하사단은 재전개하여 서쪽을 지나가야 했다. 720일 영국군의 해롤드 알렉산더(Harold Alexander)는 패튼에게 팔레르모와 트리파니에 가할 공격을 늦추고 대신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해안도로를 따라 내달려 메시나로 가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공수부대와 앞서 언급한 기갑사단을 보내 시칠리아의 방어를 강화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전진이 느려졌다. 결국 패튼과 몽고메리는 82일이 되어사야 이어지는 진지선을 형성했다. 816일 이후에야 추축군을 강력한 방어진지에서 몰아냈고, 그제서야 겨우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817일 연합군이 메시나에 입성하자 독일군은 빠져나가고 없었다.

(팔레르모에 입성한 미군 기갑병력들)


(작전에 참여한 영국군 병사들)

 

허스키 작전은 1943817일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외에 자유 프랑스와 캐나다 그리고 호주의 군대가 이 작전에 참여했다. 허스키 작전 기간 동안 영국군은 총 2,938명이 전사하고 9,212명이 부상당했으며, 2,782명이 실종됐다. 미군은 2,811명이 전사하고 686명이 실종됐으며, 6,471명이 부상당했다. 반면에 이탈리아군은 4,678명이 전사, 32,500명이 부상당했고, 11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 독일의 경우 4,325명이 전사하고, 13,500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 명이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나온다. 흥미롭게도, 독일군은 811일부터 단계적으로 이탈리아 본토로 철수했다.

(허스키 작전 관련한 영문 서적)

 

허스키 작전으로 시칠리아를 점령한 연합군은 사실상 지중해를 거쳐 중동으로 들어가는 연합군의 병참선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국의 군사사학자 존 키건(John Keegan)이 때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이것이 실속없는 성취였다.”라고 평가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군 사단 병력 일부가 동부전선에서 이탈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히틀러가 빼낸 사단은 주로 서부전선에서 온 사단들이었고, 앞서 언급한 쿠르스크 및 동부전선에서 온 기갑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부전선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연합군은 한 가지 성취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한 것이다. 허스키 작전이 진행될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이마누엘레왕은 파시스트인 디노 그란디와 함께 무솔리니 탄핵 결의안을 통과시켜 무솔리니를 해임했다. 그런 다음 후임 총리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임명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사임한 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애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아펜니노 산맥 골짜기의 그란 삿소에 있는 산장에 연금됐다. 이것은 결국 히틀러가 무장 친위대 출신의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대원들을 보내 구출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 일부가 추축국에서 연합국 쪽으로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로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소위 빨치산 운동이 일어나 독일군과 독일의 꼭두각시인 이탈리아 사하 공화국의 파시스트 군대들에 맞서 투쟁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탈리아 내의 진영을 나누어 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허스키 작전으로 시작된 이탈리아 전역은 이후 2년을 더 끌었다. 그동안 서방 연합군은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1945년 독일 본토로 진입했으며 결국 동부전선에 있던 소련군과도 만났다. 히틀러가 사망하기 이틀 전 무솔리니 또한 애인과 함께 처형당했고, 이탈리아 전역도 55일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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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조건 -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
자라 바겐크네히트 지음, 장수한 옮김 / 제르미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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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에 알게 된 한 독일 정치인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자라 바겐크네히트(Sahra Wagenknecht). 바겐크네히트는 1969년 과거 동독 지역인 예나에서 이란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 군사훈련에 적응 못하여 동독 정부로부터 크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일부 불이익을 받았던 자라는 1989년 봄 막 다른 길목에 내몰린 사회주의를 재구성하고 기회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동독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녀가 공산당에 가입했을 시기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무너졌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했다. 그 당시 바겐크네히트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외 독일 통일을 반동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통일 이후 그녀는 예나 대학과 홈볼트 대학에서 철학과 독일 근대문학을 공부했으며, 19969월 네덜란드의 흐로닝언 대학 철학과에 등록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5년부터 국민경제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시작하여 20128월 그녀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독일의 로자룩셈부르크 재단의 연구 교수이자 켐니츠 대학의 미시경제학 교수인 프리츠 헬메닥에게 제출해 좋은 평가와 함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이와 더불어 독일 통일 이후에도 좌파로서 정치활동을 이어갔고, 2015년 이후부터는 좌파당의 원내대표로 활동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좌파당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가지고 갈등하다 2024년 바겐크네히트 동맹을 만들어 현재까지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에 구 동독 지역에서 적잖은 지지율(10~15%)을 얻는 것처럼 보였으나, 2025년 안타깝게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총선결과 4.97%를 득표하고 0.03% 차이로 봉쇄조항에 미달하여 모든 의석을 잃고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2016년에 쓴 책이 있다. 책의 제목은 ‘Reichtum ohne Gier: Wie wir uns vor dem Kapitalismus retten’이다. 바로 풍요의 조건이다. 이 책은 2018년 제르미날 출판사에서 번역했고,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작년에야 알게 됐다. 사실 이 책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서다. 현재 우리가 생활과 일상에서 숨쉬듯이 체감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석했다. 해당 비판이 흥미로운 것은 현재 21세기 자본주의 경제를 앞으로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경제 봉건주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분석에서 바겐크네히트는 일정 부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통해 현재의 시장체제가 소수의 독점 자본가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성과나 책임 그리고 경쟁에 토대를 둔다고 하지만, 21세기 상황은 그것이 실행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바겐크네히트는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면서 이런 얘기도 한다. “소수가 멋진 요트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반면, 다수는 겨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증대하는 압박을 견디면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로 정성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보편 선거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해야 상위 10%, 때로는 겨우 최상위 부자 1%만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정치가 거듭해서 다시 실현되는 것을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5.) 그녀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했다. , 현재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들이 극소수의 자본가들을 위해 체제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이러한 부분에 전혀 문제의식을 못느끼거나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걸 바겐크네히트는 경제학적으로 알기 쉽게 풀어낸다. 계속해서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자.

 

“21세기가 시작된 지금도 최고 부자 1%가 중요한 경제적 자원을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마음대로 사용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토지와 부동산 외에 산업시설, 기술 노하우, 디지털 혹은 다른 연결망, 서버, 소프트웨어, 특허 그리고 여타 다른 많은 것들 또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자원들에 대한 소유권은 변함없이 세습 및 혈연원칙에 따라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으며 그 수익은 오늘날에도 많은 경우 거의 세금도 물지 않은 채 소유자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그것이 노동소득으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생활양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인구의 99% 중 압도적 다수는 이들 새로운 금융 귀족들을 위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9~30.)

 

21세기 들어 자본주의는 높은 생산력과 부를 창출해냈고, 물질의 향상과 기술력의 향상을 불러왔다. 그러나 앞서 바겐크네히트가 지적하듯이, 과거 귀족들이나 부르주아들이 부를 세습하는 사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계급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희생하며 하루 밥벌어 먹고살고 있다. 물론 이것이 19세기의 물질적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다르지만, 여전히 불평등한 생산관계 속에서 모순이 재생산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그녀의 분석은 책을 읽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바로 1인당 GDP에 관한 얘기였다. 세계은행의 계산에 따르면, 아프리카 주민의 1인당 GDP가 식민지 체제의 해체 당시에 견주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아프리카 가나의 건국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가 레닌의 제국주의론적인 분석에 근거하여 신식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적잖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전후 냉전기 독립을 했음에도 여전히 저발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가난에 직면한 이유를 자본주의 지배체제에서 은크루마는 찾았다. 그녀에 따르면, 아프리카 뿐만아니라 서부 발칸 국가들의 경우에도 사회주의 해체 이전인 1989년에 비해 현재(2016년 기준) 산업생산 수준이 10%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 지난 25년간 자본주의는 성장을 이루지 못했고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73.) 물론, 반대 사례로서 중국이나 한국 등은 분명히 번영을 이룬 것도 빠지지 않고 설명하지만, 여기서 바겐크네히트는 이들 나라를 부자로 만든 것이 과연 자본주의인가?라고 의문을 던진다.

 

그 외에도 바겐크네히트는 교육기관의 문제, 식품 생산의 문제, 환경 문제, 최저생계의 문제, 자본의 카르텔, 독점 기업 등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을 분석했다. 심지어 21세기에 들어온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알고리즘, 유튜브, 구글, 그 외의 sns 등도 분석했다. 사실 우리가 무심코 구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면, 그에 맞는 데이터들이 뜨는데, 구글의 검색 엔진을 사용할수록 더 많은 데이터들이 축적되며 구글은 이 데이터들을 처리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 광고 지출의 10%에 이르는 금액이 검색 엔진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는 구글이라는 한 회사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바겐크네히트는 국내총생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국내총생산이 번영의 기준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할 것까지는 없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연 3만 달러인 나라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1인당 국내총생산이 3,000달러에 머물러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잘산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빈곤퇴치가 국내총생산의 성장과 결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보건대, 부자 나라에서 국내총생산과 가난은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 더 많은 물품과 서비스가 생산되고 이어서 팔린다면 우리 경제는 성장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으려면, 실업이 줄든 인구가 성장하여 하여튼 더 많은 사람이 일하게 되거나 같은 수의 사람이 더 오래 일하거나 혹은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하면 된다. 바로 이 사실에서 이미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업이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정규직 노동자가 더 긴 시간 노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같은 물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반드시 개선하지도 않는다. 물품에 대한 수요는 결국 언젠가는 충족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기업가는 물론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이 '그들의' 성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풍요는 그것을 통해 반드시 높아지지는 않는다.”(자라 바겐크네히트, 풍요의 조건, 2018, 208~209.)

 

, 국내총생산이 증가해도 이것이 반드시 소위 자본주의적 풍요를 절대다수에서 보장하거나 향상시킨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은 분명 경제적으로 성장했다. 국내총생산과 국민소득도 향상됐다. 그러나 그 성장 이면에는 현재 청계천에서 살던 판자촌 주민들이 있었고, 비교적 성장을 하게 된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이들은 개미굴이라 불리는 곳에서 사실상 노숙 생활을 했다. , 빠른 성장이 국민들의 균형적 복지와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그 당시와 2000년대를 비교하면, 사람들의 보편적인 물질적 수준은 매우 향상됐다. 그리고 성장을 하더라도 한국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말 그대로 굶지는 않더라도 하루 밥벌어 먹고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에 반해 상위 1%는 그때도 풍족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순을 생각해보자면,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분석은 많이 공감이 된다.

 

그녀의 책 풍요의 조건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대중적인 언어로 담고 있는 책이다. 상당히 읽어볼만하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을 정도다. 또한, 경제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몰입해서 읽었을 정도니 바겐크네히트가 대중적으로 책을 집필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바겐크네히트의 책이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새롭고 흥미진진한 분석을 그녀가 내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해결 방법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변혁과는 거리가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진보당만 하더라도 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녀의 주장에는 이와 같은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진보좌파라면 지금 당장의 자본주의 해체를 주장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기간 산업의 국유화 정도는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얘기가 없다. 이게 좀 많이 아쉬웠다. 자본주의적 봉건체제의 극복이나 대외문제 의식 그리고 경제문제 의식은 좋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주장이 너무 없는 것은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인에게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상당히 친 동독 정부 성향이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독일이 친동독적 주장을 상당히 막고 있기에 바겐크네히트 또한 정치인으로서 문제될 것을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러우전쟁 관련해서도 언급하겠다. 바겐크네히트는 서문에서 러시아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과두 자본주의로 전환한 후 세계 무대에서 잠시 사라졌으나 이제 다시 영향력을 높이려는 투쟁에 나섰다.”고 언급한다. 그녀는 그 당시 진행되고 있던 2013년 유로마이단과 2014년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돈바스 내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돋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측면이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정권에 대한 무기 지원을 항상 반대해왔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전 이후 독일은 그녀의 주장과는 달리 망상과 루소포비아에 빠져 전쟁을 선동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그래서 내가 바겐크네히트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있다.

 

아무튼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을 완독했다. 현대 21세기 자본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 한번 쯤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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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25-03-25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라 바겐크네히트 이름은 들어 보았는데 저런 도서의 저자이자 다른 몰랐던 이력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달인가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이라고 이 분이 이끌던 정당에서 한때 지지를 획득하다가 선거에서는 1/5555(0.018%)차로 원내진입을 실패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