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방전이 한참이던 1941년 12월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애리조나호를 비롯한 다수의 미국 군함과 선박이 파괴되었고, 이로써 27개월간 중립을 표방해오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Pearl of Harbor)의 소식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치 독일에게도 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가 없다. 3천 년 동안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나라가 동맹국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나라에게 공격을 받았으니 루스벨트도 충격이 컷을 것이다.”

 

히틀러의 이런 황당무계한 전제의 밑바탕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품어 온 시나리오가 있었다. 즉 일본이 참전하면 미국은 태평양에 발이 묶이게 되고 극동에 식민지를 둔 영국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의 심복이자 선전장관인 괴벨스 또한 이런 히틀러의 반응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세계의 그림이 확 바뀌었다. 이제 미국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국에도 변변한 물자를 공급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일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선포하자 히틀러 또한 미국과 전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모든 정치권력자들이 미국과의 전쟁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리벤트로프가 그러했다.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우리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참가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건 그들의 전쟁입니다. 먼저 미국을 도발한건 일본입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히틀러는 이 말에 대해 “그것은 동맹 조약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은 다음날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인 오시마 히로시를 불러 이를 축하해줬다. 또한 히틀러는 12월 8일에서 9일 사이 카를 되니츠 제독이 이끄는 유보트 부대에게 미국 배를 침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차츰차츰 그 과정을 진행해 나갔다.

 

미국을 향한 나치 독일의 선전포고는 진주만 기습 공격 4일 후인 1941년 12월 11일에 이뤄졌다. 목요일 오후에 있던 히틀러의 ‘대미선전포고’ 연설은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졌다. 그는 연설 전반부에선 유럽 전선 즉 소련과의 전쟁에서 나온 전과를 세세하게 나열했고, 후반부에선 “악마처럼 교활한 유대인의 사주를 받고 루스벨트가 전쟁으로 독일을 파괴하려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유대주의를 자극했다. 이렇게 하여 히틀러는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으로 끌어들였다.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다음 날 히틀러는 진주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부터 설명했다. 일본이 나서지 않았으면 독일이 언젠가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햇을 것이라 그는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확전이 되면 유보트도 대서양에서 활개를 펼 수 있고, 유보트에 침몰되는 적의 선박도 크게 늘어나며 이것은 전세를 크게 좌우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히틀러는 굳이 일본이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미국하고 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2일 뒤인 12월 14일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인 오시마 히로시에게 독일독수리황금대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이처럼 히틀러는 미국과의 전쟁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장밋빛 그림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였다. 오히려 현실을 아주 정확하게 직시했던 인물은 히틀러가 아닌 윈스턴 처칠이었다. 일본이 미국에게 선전포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처칠은 매우 기뻐하며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그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하는 것을 보며 연합국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후 역사가 증명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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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곳곳에서 반공의 가면을 쓰고 다른 나라름 침략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곳곳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중남미·아시아·아프리카뿐 아니라 유럽·오세아니아에까지 손을 벌리는 통에,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미국을 달가워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수많은 인민들도 미국을 싫어합니다. 일본도 미국을 싫어합니다. 미국이 자국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에는 미국의 참략을 받지 않은 나라가 한 곳도 없습니다. 미국은 중국 영토인 타이완을 침략했습니다. 개중에는 미국의 동맹국도 있습니다. 인민들이 불만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조차 미국을 싫어합니다.

 

피압박 민족은 모두 독립을 갈망합니다.

 

만물은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큰 세력이 부패하면 새로운 작은 세력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작은 세력이 커지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미제국주의의 큰 세력도 작아질 것입니다. 미국 인민들이 자국 정부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평생이 이런 변화를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 중에는 청조시대에 태어난 이도 있고,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태어난 이도 있습니다.

 

청조는 오래 전에 무너졌습니다. 누가 청조를 무너뜨렸을까요? 그것은 손문이 이끄는 당파 인민이었습니다. 순몬의 세력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청조의 관료들은 이들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그는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청조를 전복시키고 말았습니다. 큰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큰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청나라를 전복시킨 이후 손문은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민의 요구, 예를 들자면 토지와 반제국주의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반혁명을 진압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반혁명 세력이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후에 그는 베이양군벌 사령관 위안스카이에게 패배를 당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손문보다 세력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세력이 작더라도 인민과 연대하면 강하며, 세력이 크더라도 인민과 대립하면 약하다는 법칙 말입니다. 이후로 손문의 유산계급민주혁명파는 우리 공산당과 합작하여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벌 세력을 패퇴시켰습니다.

 

장제스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중국 통치를 승인받았습니다. 22년간 집권하면서 그의 세력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졌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세력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반혁명 세력을 진압하는 와중에 5만 당원은 1만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도처에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강대한 적이 실패한 것은 인민과 동떨어졌기 때문이요, 약한 우리가 승리한 것은 인민과 연대하여 인민을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지금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항일전쟁 시기 일본은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국만당 군대는 오지로 밀려났으며,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 세력 또한 적 배후의 농촌에서 유격전을 치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일본은 베이징·텐진·상하이·난징·우한·광저우 등의 대도시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독일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몇 년 못 가서 붕괴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퇴각하는 동안, 수십만 병력은 수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장정 25000리 끝에 남은 병력은 25000명뿐이었습니다.

 

공산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좌우 노선 할 것 없이 많은 오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오류는 천두슈의 좌경 노선과 왕밍의 우경 노선이었습니다. 그 밖에 장궈타오·가오강 등도 우경 노선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오류를 저질렀다고 해서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통해 인민과 당을 교육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본·미국, 장제스·천두슈·리리산·왕밍·장궈타오·가오강 등 수많은 반면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면교사에게서 학습하느라 우리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과거에 영국은 우리와 여러 번 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미국·일본·프랑스·독일·이탈리아·제정러시아·네덜란드 모두 우리의 당덩어리에 군침을 흘렸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반면교사이고, 우리는 저들의 학생입니다.

 

일본에 맞서는 항전의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군대는 90만 대군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해방전쟁을 치렀습니다. 우리의 총포는 국민당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민당 군대는 400만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가 소탕한 적국의 수는 총 800만에 이릅니다. 국민당은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한 자가 반드시 승리하는 법입니다.

 

현재 미제국주의가 강하다 하나, 이는 진정으로 강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아주 취약합니다. 대다수의 인민과 동떨어진 탓에,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정부를 싫어합니다. 미국 인민들도 마찬가지로 정부를 싫어합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실제로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 없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겉은 호랑이처럼 보이나 종이로 만들어진 탓에, 비바람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전체 역사, 즉 인류 계급사회의 수천 년 역사가 입증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강한 것이 약한 것에게 자리를 내준다는 것입니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주의가 멸망해야만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종이호랑이가 쓰러지는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스스로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종이호랑이를 무너뜨리려면 비바람이 몰아쳐야 합니다. 우리가 미제국주의를 종이호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호랑이는 발톱과 이빨이 있습니다. 이 녀석을 쓰러뜨리려면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려야 합니다. 예컨대 이빨이 열 개 있다면 우선 한 개를 뽑아버립니다. 그러면 아홉 개가 남습니다. 다시 한 개를 뽑아버립니다. 이제 여덟 개가 남습니다. 이빨을 다 뽑아버렸으면 이번에는 발톱 차례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하게 나아간다면 결국 승리를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전략적으로는 완전히 무시합니다. 하지만 전술적으로는 중시하는 것입니다. 이들과 전쟁을 벌일 때에는 매 전투마다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현재 미국의 세력은 강대합니다. 하지만 전체 모습을 폭넓은 시각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십시오. 미국과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국의 정책을 싫어합니다. 미국은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합니다. 이런 이유로 호랑이는 반드시 거꾸러질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얕잡아 보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미국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은 철강을 매년 1억톤씩 생산하여 곳곳에서 공격을 일삼고 있습니다. 미국은 철강을 매년 1억 톤씩 생산하여 곳곳에서 공격을 일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과 싸울 때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또한 한 번에 하나씩 물리쳐야 합니다. 여기에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상황을 보건대, 라틴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은 끊임없이 미국과 충돌할 것입니다. 이는 비비람이 종이호랑이를 박살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남미 국가에서 유럽 출신 백인과 본국의 인디오가 단결해야 합니다.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통치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피통치 계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받는 백인들은 토착민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의 벗들, 아시아··아프리카의 벗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하는 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인민을 위해 일하며, 제국주의가 인민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노력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성공을 거둔다면 제국주의의 억압을 근본적으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동지입니다. 제국주의의 억압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여러분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다만 지역, 민족, 그리고 언어가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국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제국주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제국주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중국 인민은 제국주의를 원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인민 또한 제국주의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1956714,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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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이 매춘을 탄압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도데체 그게 금지되야할 대상이지? 난 합법이나 비범죄화 해도 된다고 생각함. 매춘이 부도덕하다거나 그 행위 자체가 폭력이라는 근거는 없다고 봄. 각자의 결정권과 가치관의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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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아프팍 전쟁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5
조너선 닐 외 지음, 차승일 옮김 / 책갈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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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쟁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이 사실상 종결됐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20년간 치렀던 미국과의 전쟁은 그 이전 미국이 치렀던 베트남 전쟁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그런 전쟁이 올해 2월 29일 도하합의를 성사시키며 미국의 패배로 끝난 것이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20세기 후반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왔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0년간 전개됐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7~8년 동안의 내전 즉 종족분쟁과 세력분쟁이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휩쓸었다. 그런 내전이 얼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었다.

2001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인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단 한번도 자국 영토가 공격받아본 적이 없던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도 테러리즘에 바탕을 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진주만 기습 공격 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나왔으니 미국사회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9.11 테러를 시작으로 미국이 일반적인 침공을 감행했던 나라가 있다. 하나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였고 다른 하나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한다. 이들은 미국에게 침략 받던 시점에서 이미 20년동안 전쟁을 치른 상태였다. 즉 2001년 9월 미국이 침략해서 일으킨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세계 최강의 경제국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를 공격한 것이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할때 내세운 명분은 크게 나눠 두가지다. 첫번째는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여성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국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이었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진정한 목적은 아니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진정한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 사이의 패권경쟁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9.11 테러 이후부터 미국 네오콘의 상징인 도널드 럼즈펠트 국방장관과 부통령 딕 체니는 9.11의 희생양으로써 이라크를 침공하고 싶어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 이란과 붙어있어 미국이 장악했을시 그들이 소위 ‘악의축‘이라 부르던 이란을 압박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거 이라크에 들어가면 이란을 견제하는데 미국이 매우 유리해진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진짜 이유였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은 개전 초기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농촌에서 저항이 일어나긴 했지만, 초반에 들어간 미군이 한 것은 지역을 다스리며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4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선 탈레반이 주도하는 게릴라전이 미군 점령 지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여기에 미군이 대응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게릴라 소탕 방법 그대로였다.

그 결과 오히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을 더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미군이 얘기하는 소위 부수적 피해는 민간인들이 많이 죽게되는 이유였다. 과거 베트남에서 그랬듯이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 증강을 감행했고, 이것은 부시 행정부를 이어받은 오바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오바마는 부시 행정부 보다 더 나갔다. 그들은 탈레반이 있을거라 예상되는 파기스탄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했다. 2007년부터 시작된 드론 공격은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횟수가 더 늘어났다. 오바마 또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오바마 집권 초기인 2009년에 출간된 책이다. 책에서 언급하듯이 실제로 오바마는 2010년 아프가니스탄의 주둔 병력을 10만 명 이상까지 증강했다. 10만 명까지 증강하던 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은 최소 500명을 넘겼었다. 2009년에 집필한 책이기에 그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 점이 조금 아쉽다.

지난 12월 필자가 읽었던 ‘아프가니스탄 왜?‘라는 책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이 그것보다 더 났다. 왜냐하면 전자는 아프가니스탄 지원사업에 나섰던 인물이 쓴거라 미국에 대한 비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바마의 아프팍 전쟁‘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고찰이 있다.

미국이 침략해서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보였던 미국의 실책과 과오 그 자체다. 미국은 애초에 가망이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게 바로 베트남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연결고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왜 미국의 패배로 끝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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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의 힘을 빌리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1945815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815일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발빨리 움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몽양 여운형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고,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며 일장기 말소사건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일제의 그 어떤 회유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42년 도쿄에서 미군의 폭격을 직접 경험했던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고, 1944년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준비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천황이 항복하기 전 자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당시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이 있던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8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한반도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고만장했던 친일파들은 목숨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거기다 몽양 여운형 또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친일파들에게 있어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해서 한반도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했다. 한반도 이북에 입성한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하여,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작업들을 단계적으로 해나갔다. 한반도 이북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자,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대에 서야했다. 그들 중 생계형 친일의 경우 용서받거나 인민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악질 친일파들의 경우 처벌받았다.

(얄타회담,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처벌받는 다는 소식은 한반도 이남에서도 전달됐다. 한반도 이북은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부터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일본의 행정체계가 붕괴되었지만,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여운형의 건준이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지만, 조선 총독부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아더는 아베 총독에게 포고문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총독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이전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빅3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그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45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했다. 미군이 상륙하기 2일 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자,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무찔러 준 것에 대해환영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반도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본인들 스스로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99일 서울에 입성하여 그들이 발표한 포고령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친일파들이 살기 위해 해야할 일은 분명했다. 점령군으로써 한반도 이남을 다스리게 된 미군정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에겐 어떠한 나라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큰 비전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도좌파 여운형이나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그들은 친일파로서 단죄당할 것이 분명했다. 임시정부의 김구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군정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발빠르게 움직였던 세력은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세력을 등용했다.)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다. 지난번 5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귀국하기 전 주일미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와 한반도 이남에서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던 하지 사령관과 일본에서 만났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맥아더가 지원해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 사령관과 함께 귀국하게 된 이승만은 그의 주선으로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그는 기자회견과 귀국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승만의 귀국 기자회견 내용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곧 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나오고 지금까지 애만 써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미주를 떠나 하와이, , 일본 동경 등을 거쳐 급기야 어제 저녁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과 얘기해 본 즉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 갈 수 있음을 믿었다. 여기에 나는 우리들의 합동이라는 것을 크게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3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으므로 국내 형편은 잘 모르나 차차 알아가면서 여러분과 합동해 가겠다. 특히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 정부의 대표도 아니오 외교부의 책임자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끝까지 한국의 평민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군정부와 아무런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나 여기 온 길을 열어준 것은 이분들이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 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미한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많았다.”

(미군정의 서울 입성, 이것은 또 다른 외세의 지배를 뜻했다.)

 

당연히 그의 회견과 방송에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이나 미군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는 동포들의 일심협력과 맥아더, 하지, 아놀드 장군의 고마움안 피력할 뿐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일단 독립운동 세력들은 그와 힘을 모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10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이 결성됐고, 이승만은 독촉의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것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 및 사회단체 200여 개가 모여 구성된 협의체였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는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지만, 11월 중순 조선공산당 측에서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했고, 결과적으로 독촉은 해체되었다.

 

1123일 김구를 포함한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했다. 김구를 포함한 임정인물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는 하지가 동원한 환영식이 거창하게 열렸지만, 이들이 귀국할 때는 미군장교 1명과 통역 한명만 마중나올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김구와 같은 임정인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줄 수 있었지만, 김구에게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도자로 칭송받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식됐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상웅은 자신의 저서 이승만 평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와 관련 이른바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한국인 250여 명을 구속하면서, 역설적으로 이승만의 존재가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전파되고,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성은 해방 정국에서 그의 위상을 한껏 부풀리는 기능을 하였다. 여기에 젊은 날의 행적,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임시정부 대통령,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복합되고 부풀려지면서 명성과 함께 신비성을 더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그의 행적이 이런 맥락속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1945916일 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를 포함한 우익인사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다. 이 한민당은 지주와 친일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득권 정당으로 미군정의 구미에 맞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10월에 귀국한 이승만과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친일파와 지주들을 중심으로 뭉친 한민당은 이승만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힘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가 해산되고 나서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노선을 표명했다. 그는 19451221<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했거니와 우리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극렬파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이 분자들은 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돌아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노선과 아집은 모스크바3상회의를 기점으로 더 심해졌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3상회의 당시 미국은 신탁통치를 필요하다면 5년 더 연장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그보다 더 빨리 독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모스크바3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왜곡돼서 전달되었다. 그 바람에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성립이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연히 반탁을 외쳤고 선동했다. 이승만이 반탁을 외침에 따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세력들 또한 반탁운동에 나섰고,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모스크바3상회의 오보, 모스크바3상회의의 내용은 동아일보에 의해 왜곡보도됐다. 미국은 신탁통치 연장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진실은 반대로 보도됐다. 결국 이 왜곡된 보도는 왜곡된 반탁운동을 창조해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시위대, 반탁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들과 이승만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한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신탁통치 논쟁이 거치면서 한반도 이남에서의 좌우갈등은 극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46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지만,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떠한 성과물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6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었다. 정읍 발언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체제를 만들자는 이승만의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등극한 극우단체와 친일집단은 좌익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특히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좌익에 대한 탄압은 더 극심해졌다. 1946101일에는 대구에서 미군정에 맞선 항쟁이 일어났고, 결국 친일 경찰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 발언은 이승만이 통일보단 분단과 외세의 결탁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하자, 이는 미군정에서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외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좌우합작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이승만 세력들의 의도적인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테러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여운형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우익세력들이 여운형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세력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지도자 여운형은 1947719일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7312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좌우합작운동 시기 미국에 로비를 지속적으로 넣었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의 반공 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론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610월 이범석에 의해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 즉 족청은 이승만의 방계 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좌익에 대한 폭력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승만 주변으로 몰린 친일파들은 각종 정보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이범석이 만든 족청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들은 이승만을 위해 좌익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이 만들어낸 각종 경제적 실패로 인해 시위를 하던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공장이나 철도 그 외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경찰과 함께 그들을 진압했다. 여기엔 김두한과 같은 조직폭력배 조직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인 집단은 해방 후 친일지주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행위를 경찰의 비호아래 저질렀다. 당연히 이들은 경찰과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았다.

(여순항쟁 당시 사진, 여순항쟁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민중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항쟁이다. 그러나 이 항쟁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당시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권력이 있었다. 일단 그는 맥아더와 하지 그리고 미국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이용하여 통일정부수립을 막았고,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또한 그들과 결탁하여 극우세력의 테러 행위을 방관하거나 옹호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끝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맡겼다. 유엔에 맡겨진 이후 남과 북은 분단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섰고, 1948815일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정부 수립 과정은 참으로 잔혹하고 혹독했다. 소위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학살당했다. 좌익은 씨가 말렸고, 이들 중 일부는 지리산과 같은 곳으로 숨어서 외로운 투쟁을 한국전쟁 이후까지 해나갔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물러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은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점에서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친일파 척결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란 지도자는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승만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악행은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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