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은 미국과 일본이 교전을 벌인 전투 장소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자,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부터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주의 노선을 유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와 미국령 알래스카주의 알류샨 열도까지 점령했다. 1941년 12월 당시 일본은 영국령 길버트 군도의 타라와 환초와 타라와 근처에 있는 마킨 환초를 점령했다. 오늘은 타라와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이곳이 한국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타라와의 위치: 말 그대로 아시아쪽 태평양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섬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영토를 보면 매우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서쪽으로는 영국령 인도를 위협했고,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위협했으며, 북서쪽으로는 미국령 알래스카를 위협했다. 또한, 일본 해군은 1941년부터 1942년 초까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대표적으로 1942년 2월 27일 인도네시아 자바해에서 일본은 영국·미국·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를 상대로 경순양함 2대와 구축함 3대를 격침시키고, 중순양함 1대(당시 투입한 연합군 전력은 중순양함 2대 경순양함 3대 구축함 9대다.)에 심각한 손실을 야기했다. 또한, 연합군 병사 2,300명이 전사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36명이 전사하고 구축함 한 대가 심각하게 손실 당했다.

(타라와 해변의 모습)


(상공에서 촬영한 타라와의 모습)


그러나 이처럼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전황이 바뀐 것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미 해군에게 대패하면서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11척의 전함과 8척의 항공모함(이 중 4척이 주력 항공모함) 22척의 순양함, 65척의 구축함, 21척의 잠수함을 동원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고, 중순양함 1대를 잃었으며, 35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렇게 되면서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점차 패배하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2달 뒤 치르게 된 과다카날 전역은 일본이 미국과의 지상전에서도 패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과다카날 전역에서 미군은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은 2만 명 가까이 전사했으며, 결국 일본군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철수했다.


미군이 과다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1943년 2월 쯤이었다. 사실 이 시점은 전세가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유리해지는 시점이었다. 1943년 당시 전황을 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소련에게 패배했고, 더 나아가 소련은 8월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규모 전차전을 치른 뒤 승리했다. 또한,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투가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그해 7월에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과 본토에 상륙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동맹인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축출당하고 연합군이 접수한 이탈리아 남부에는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정부가 세워졌다.

(타라와 전투 관련 그 당시 미국의 보도)


따라서 1943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전황이 뒤바뀐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이 마킨 환초와 타라와를 점령한 것은 1941년 12월이었다. 비록 1942년 8월 중순에 미군이 마킨 환초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급습한 적은 있지만, 이 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1943년 전황이 급변하면서 미 해군 지도부는 일본 본토 및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이나 인도차이나 혹은 대만이나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즉, 그 과정에서라도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 바로 길버트 제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3년 11월 20일 미군은 타라와 섬과 마킨 섬 두곳을 그날 동시에 상륙 및 공격했다. 그 당시 미군은 2척의 항공모함, 1척의 경항공모함, 5척의 호위항공모함, 3척의 전함, 8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 17척의 수송선에 미 해병 2사단을 동원했다. 이런 화력을 동원했음에도 미군은 첫날 상륙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당시 타라와에는 일본군 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군이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 공격에 고전했다. 이날 상륙한 미군 중 5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 사진: 미군은 사흘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타라와를 점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과 수륙양용 장갑차)


(타라와 해변에 널부러진 미군 시신들)


미군 군함의 함포가 일본군 진지를 공격했지만, 일본군 거점을 부수지 못했기에, 결국 거점을 점령하는 것은 미 해병대 병사들이었다. 상륙한 다음날의 전투는 탱크와 수륙양용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가 일본군의 거점을 점령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영국의 군사사학자인 존 키건은 책에서 “타라와는 일본군이 지키는 가장 작은 섬을 차지하려는 싸움조차도 얼마나 무시무시할 수 있는지를 미 해병대에 가르쳐준 전투였다.”고 서술했다.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토치카와 벙커 그리고 참호의 방어를 돌파하여 점령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숫자로 보면 미군이 일본군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군은 5,000명인데 반해, 총 상륙한 미군은 18,000명이었기 때문이다. 타라와 전투의 치열함은 종군기자 로버트 셰로드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해병대원 한 명이 방조제를 뛰어넘어 코코넛 통나무로 만들어진 특화점 안에 TNT(폭약) 몇 덩이를 던져 넣기 시작했다. 해병대원 두 명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방조제를 기어올랐다. TNT 또 한 발이 특화점 안에서 터져 연기와 먼지가 뭉게뭉게 솟았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사람이 옆 출입구에서 뛰어나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화염방사기에서 뿜어 나온 강렬한 불길이 그를 휘감았다. 화염이 그에게 닿자마자, 그 일본놈이 필름 조각마냥 확 불타올랐다. 그는 즉사했지만, 까만 숯이 되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다음에도 그가 찬 탄대 안에 든 총탄이 꼬박 60초 동안 폭발했다.”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1)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2)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3)


타라와 전투 상륙 이틀째 되던 날 미 해병대원은 1,000명이 죽고 2,000명이 부상당했다. 이 무렵 일본군 일부가 바리키리 섬에서 타라와의 베티오 섬으로 지원차 접근하고 있었지만, 미리 정보를 입수한 미 해병대가 항공 지원과 전차, 곡사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들이 상륙하려는 순간 공격하여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타라와 전투가 후반부로 접어들 무렵 일본군은 미군에 맞서 이른바 반자이 돌격(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총검을 찬 소총을 들고 자살돌격을 하는 행위)을 감행했다. 당연히 총기 화력에서 일본군보다 압도적인 미군은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을 무력화했다. 결국 타라와 전투는 11월 23일에 종결됐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총 1,700명이 전사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추가적으로 호위 항공모함 1척이 침몰했다. 그에 반해 타라와에 주둔했던 5,000명 가까이 되던 일본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타라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일본군 생존율이 가장 낮은 전투였다. 1970년에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 통사를 집필한 존 톨랜드의 저서에 따르면, “5,000명의 일본 방어병력은 거의 다 전사했고,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은 17명 밖에 안됐다.”고 한다. 이걸 일본군 생존자 비율로 계산하면, 0.34%다. 말 그대로 병력 전부가 전멸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노동 병력 및 비전투원 병력의 생존률을 합쳐도 0.6%를 넘지 않는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처참한 비율이냐면, 이후 치르게 될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생존률은 1.2%였고, 타라와 이전에 치른 과다카날 전투가 2.8%였으며, 태평양 전쟁의 미군-일본군의 마지막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가 12%를 기록했다. 말 그대로 타라와 전투는 일본군 전원이 옥쇄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 참혹한 전투였다.

(비디오 머그에서 보도한 타라와 전투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영상)


(2019년 타라와 관련 한겨레 기사)


타라와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지만,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잊지 말아야할 역사가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일본군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조선인들도 전쟁 속에서 죽었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포로 145명을 붙잡았다. 즉, 앞서 언급한 17명의 일본군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 128명이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었다. 존 톨랜드에 따르면, 이것보다 1명이 더 많은 129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최소 1,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기록에 따라선 타라와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가 1,400명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1,200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전투 과정에서 사망한 것이다.

(2023년 12월 국내에 열린 타라와 전투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제)


2019년 10월부터 타라와 지역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의 유골을 찾아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19년 한국의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공식 확인한 한국인 희생자는 586명이라고 한다. 2018년 12월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타라와 전투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가족 391명에게 유전자 정보 채취를 요청했고 이 가운데 184명이 동의해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2019년 3월 법의학·법유전자·법화학 전문가를 유해가 보관된 타라와와 하와이에 보내 아시아계 희생자 유해 시료(뼛조각) 150여개를 가져왔으며, 유해를 국내로 가져올 계획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연기되었다가, 2023년 12월에 이르러 그 당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을 봉환했다. 한국과 타라와의 거리는 6,100km로 알려졌다. 이 거리만 보더라도 얼마나 멀리서 그들이 끌려왔는지 짐작이 된다.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 CD 케이스 정면과 후면)


이 글을 쓴 필자는 타라와 전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10대 때였다. 그 당시 필자는 FPS 게임(총쏘는 게임)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아는 사람에게 CD게임 하나를 선물받았다. 그 게임의 이름은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Medal of Honor Pacific Assualt)였다. 그 게임의 시작과 끝이 바로 1943년 타라와 전투였다. 타라와 전투가 수미상관적 구조를 이룬 게임이었기에 게임을 하면서 이 전투에 대해 알게 됐다. 반일 불매운동의 여파가 한참이던 때, 존 톨랜드가 쓴 책인 ‘일본 제국 패망사’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책을 코로나 초기에 3달에 걸쳐 완독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타라와 전투 당시 포로로 붙잡힌 사람들 중에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게 됐다. 컴퓨터 게임으로 알게 된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연관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일본 강제 징용으로 죽은 조선인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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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카트야 호이어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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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90년은 세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과 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마침내 통일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로부터 1년 뒤 미국과 더불어 냉전의 한 축을 차지했던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동일 통일과 소련 해체를 전후로 수많은 동구권 국가의 체제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됐다. 1980년대 전두환의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한국의 학생들은 이와 같은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1990년 독일의 통일은 한국 사람들에게 따라야만 할 통일의 기준이 되었고, 그러한 인식은 2024년 현재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다.

 

1990년의 독일통일은 서독의 흡수통일이었다. , 자본주의 국가인 서독이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을 완벽히 흡수한 통일이라는 얘기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독일통일을 보며 한국이 북한을 그렇게 흡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독일 통일 이후 동독에서 생긴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들을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통일 이후의 문제점이라고 해봐야 한국이 북한 사람들 먹여 살려야 한다라는 식의 지극히 재벌·자본가의 인식이 우리나라 사람들 인식일 것이다. , 한국 사람들 인식에는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되고 난 이후에 이들이 겪어야 했던 실업·극대화된 빈부격차·임금격차·남녀차별·토지권 박탈 등의 문제가 있었는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동독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다. 필자는 어린 시절 이원복 교수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시리즈를 즐겨 읽었었다. 특히나 필자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묘사한 동독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원복 교수가 만화에서 묘사한 동독은 자유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고, 생필품은 항상 부족하며, 인민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항상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만화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서독의 입장만을 생각하게 됐고, “역시 공산주의는 이래서 안된다!”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글쓴이가 동독에 대해 다시 재평가하게 된 것은 대학생 시절 독일 통일 이후 역으로 여성인권이 하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5~6년 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비교적 흥미를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후 대학원 수업에서 자유주제로 동독 시절 여성인권에 대해 발제를 한 적이 있다.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느꼈지만, 동독의 여성인권은 세계 최고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때마침 올해 2월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 번역됐다. 그 책이 바로 카트야 호이어가 집필한 장벽 너머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이다.

 

2. 사라진 나라 동독은 어떤 나라였는가?

 

사라진 나라 동독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국가다. 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결국 전쟁에서 패망했다. 전쟁에서 패망하자 독일은 동과 서로 분단됐다. 독일의 서부지역은 미국·영국·프랑스가 점령했고, 동부지역은 소련이 점령했다. 흥미롭게도 수도 베를린의 경우 소련이 접수했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소련은 서구 진영에게 베를린도 분할 접수하도록 양보했다. 그렇게 해서 독일은 베를린도 소련 지역과 미국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소위 우리가 아는 서독과 동독은 1949년에 탄생했다. 서독이 먼저 탄생했고, 그로부터 몇 개월 뒤에 동독이 탄생했다. 서독의 공식 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이었고, 동독의 공식 명칭은 독일민주공화국이었다.

 

동독의 경우 국가가 탄생하기 전 소련군정 하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진보적인 개혁 및 사회변혁을 거친 다음 탄생했다. 저자에 따르면, 1950년대 동독은 신생 공화국으로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기틀을 잡는 데 거의 전적으로 매달렸고, 1960년대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다음 야심찬 건설 사업과 더불어 우주경쟁, 그 밖의 과학적 성과를 달성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들어 동독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 중 생활수준이 가장 윤택한 국가가 되었고, 유엔 회원국이 되어 세계의 여러 국가들에게 인정 받았다. 1980년대에는 여전히 생활수준이 발전하고 많이 윤택했지만, 동독 사람들은 서독을 부러워했고 결국 스스로 변화를 꾀했으며 이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동독은 결국 서독에 의해 흡수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책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매우 잘사는 국가였다. 1990년 기준 소련의 1인당 GDP9,200달러였는데, 동독은 이것보다 400달러 높은 9,679달러였다. 참고로 그 당시 미국이 21,082달러고, 서독이 15,300달러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독의 생활수준은 결코 못살지 않았다. 그 당시 경제성장으로 비교적 중진국 정도로 잘살게 된 한국의 1인당 GDP5,000달러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거기다 1970년대 동독의 호네커 정부는 주택·복지·오락에 막대히 투자했고,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었으며 1980년대 동독인들의 평균 월급은 1,021마르크였다. , 평균 월급도 꾸준히 상승했고, 1987년 기준 절반 이상의 동독 가구가 자가용을 소유했으며, 모든 가구가 세탁기·냉장고·텔레비전을 적어도 한 대는 보유했다. 또한, 1970년대 초중반 기준 서독의 4인 가구가 순수입에서 최소 21%를 집세로 지출했지만, 동독의 4인 가구의 집세 지출은 4.4%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파트를 포함한 집들의 수준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질적으로 향상됐다.

 

이는 당시 전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의 빈민층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생활이다. 거기다 1962년부터 동독 정부는 프리츠 헤케르트호와 같은 유람선을 만들어 동독 시민들에게 서독이 이룬 경제 수준에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생활 수준을 구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참고로 동독의 퓔커프로인샤프트호는 1980년대까지 동독에서 운영하였고, 20217월 미국 여행사가 매각하여 현재까지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배의 성능이 질적으로 나쁘지 않으니, 현재까지도 운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을 보자면, 동독은 분명 책의 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인민들에게 제법 윤택한 생활을 제공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단순히 자본주의적 성장이 아닌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토대를 바탕으로 둔 성장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 사회주의 국가들도 자신들 나름 기술과 과학 그리고 일생에서의 생활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물론 동독이라 해서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 또한, 슈타지와 같은 경찰 공권력 강화나 베를린 장벽의 탄생 등을 지적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자동차들의 경우 받기까지 대기시간이 최소 7년은 걸렸다. 물론 트라반트나 몇몇 기종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이 되면서 바로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최신 자동차들의 경우 여전히 대기시간이 오래걸렸다. 그리고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동독의 질적 발전은 분명 사회주의적 성과임에도 지나치게 물질을 강조한 측면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윤택함을 부러워했고, 이것은 결국 동독 정권의 해체를 불러왔다. , 물질주의 그 이상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사상 및 계급 교양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 같다. 동독의 해체는 다른 의미에서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동독의 한계점도 분명히 명확하다.

 

또한,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았다. 최소 3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갔다. 이는 동독이 서독보다 높은 출산율을 보였음에도 동독이 저인구 상태를 유지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필자가 생각하는 동독의 한계를 짧게 언급한 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동독의 한계점과 책 저자가 생각하는 동독의 한계 및 문제점은 상당히 다른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책을 보며 가졌던 비판점들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자 한다.

 

3. 책에 대한 명확한 비판 지점 및 문제점들

 

카트야 호이어의 책은 분명 한국 사회에서 깊게 다루지 않는 동독 사회를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히 높은 점수를 받을만한 책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책의 한계나 비판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저자의 친서구적인 내러티브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 저자는 책 초반부에서 소련의 독일 점령을 얘기하며, 붉은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전시 강간에 대해 지적한다. 물론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서구 학계의 전형적인 클리셰이긴 하다. 그리고 이를 언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과장된 숫자를 인용하는 것은 지적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소련군의 전시강간 피해자가 200만 명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당히 과장된 수치다. 다른 여러 자료를 같이 인용해야할 사례인데, 서구 반공주의자들이 하는 자료를 너무 액면 그대로 인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친서구적인 관점은 동독과 서독의 건국 과정 및 1950년대 상황에 대한 얘기에서도 상당히 많이 드러난다. 저자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중반까지의 동독의 전후재건과 경제성장 및 사회발전에 대해 부정적인 요소들만 강조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와 같은 동독 상황을 비교하며, 서독의 발전이 경제 및 정치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러나 서독의 경제성장이 동독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전후재건기 동독의 경제적 한계만 지적하는 것이 과연 페어(공평)한지는 상당히 의구심이 든다.

 

대표적으로 저자는 동독에서 이루어진 토지개혁에 대해 매우 강도 높은 비판을 하는데, 여기서 내세우는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동독의 토지개혁은 돈 있는 사람들 기존에 토지를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독일의 대토지 소유층인 융커들이 서독으로 이주하여 이는 경제발전에 타격을 줬다.” 대략 이런 식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동독의 토지개혁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1946년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을 생각해보자. 북한의 토지개혁은 5정보 이상의 토지소유자들을 무상몰수하여 무상분배했다. 이는 빈농 계급을 중심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데 성공적이었으며, 심지어 25일 만에 종결됐다. 조선시대부터 수백년간 지속된 봉건주의적 불평등이 사라졌고, 심지어 몰수당한 지주들도 토지를 일부 분배받아 경작하게 됐다.

 

따라서,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의심한 부분이 바로 동독의 토지개혁과 성과에 관한 부분이었다. 저자는 동독 토지개혁에 대한 성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얻은 동독에 대한 토지개혁 관련 정보는 대지주의 관점으로만 보게 되는 편향성이라는 문제가 분명히 있다. 필자는 이에 관한 부분이 궁금하여 몇몇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찾아보니 동독의 토지개혁이 유혈없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학계의 평가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또한, 소련의 강압적 측면이 발현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 사실도 같이 알게 됐다. 오히려 문제는 1990년 통일 이후 발생했다. 과거 동독으로 도망친 서독의 구 융커 출신들과 그 후손들은 통일 이후 자신들의 땅을 동독인들로부터 빼앗았다. 이에 따라 역으로 독일의 지역갈등이 심화됐다. 따라서 동독에서의 토지개혁에 따른 무토지 계층의 성장과 확장을 안다룬 점은 크나큰 한계다.

 

아무래도 저자가 영국왕립역사학회 정회원이다 보니, 서독 아데나워 체제에 대한 칭송이나 토지개혁에서의 맥락 무시 등의 문제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 체제에 대해 내리는 평가도 너무 친서구적 내러티브를 따른 것 같았다. 저자는 울브리히트가 스탈린 체제의 소련에서 살아남으면서, 스탈린식 숙청과 권력독점욕을 배웠다고 얘기한다. 스탈린의 편집증 또한 마찬가지다. 스탈린 대숙청에 대한 저자의 주관은 대숙청 전통주의에 상당히 가깝다. 이와 같은 내러티브는 소련사를 연구하는 수정주의 학자들이 상당부분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거기다 발터 울브리히트를 스탈린 체제의 전적인 수호자로만 보려는 저자의 시각에도 상당히 의문이 든다. 저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울브리히트는 친스탈린 노선을 수정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1970년 이후에 후계자 에리히 호네커에게 직책을 넘겨줬다. 또한, 그가 1950년대 이후 저자가 생각하는 그런 권력 독점욕을 불렀다는 증거가 없다. 저자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오히려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들이 책에서 제법 부각됐다. 따라서 발터 울브리히트를 서구가 생각하는 스탈린 내러티브에 맞춰 보는 것이 앞뒤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부분은 북베트남 관련 서술이다. 저자가 관련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거슬리는 내용들이 있었다. 저자는 북베트남 체제가 전시 동원을 위해 고혈을 짰다거나 착취했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미국이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남부베트남에 친미정권을 세웠다고 묘사한다. 너무나 친서구적인 관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첫째, 북베트남 정부 또한 집산화와 국유화를 끝냈기에, 생산물을 부당하게 취하는 계층이 없었다. 둘째, 북베트남 정부는 대중동원은 강압이 아닌, 자생성과 민족성에 기인했다. 따라서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셋째, 미국이 남부베트남에 만든 정권은 프랑스에 부역하던 식민지 협력자들이 집권한 정권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맥락을 생략한 성의 없는 설명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책의 비판 지점들을 비교적 길게 썼다. 비판 지점을 길게 쓴 이유는 필자가 이 책을 폄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싶은 개인적인 생각도 있지만, 앞으로 국내에 번역될 동독 및 동유럽 현대사 관련 책들이 이런 친서구적인 내러티브에서 좀 벗어난 시각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할까?

 

4.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2장에서 설명한 부분과 연결이 되는 것 같다. , 저자가 설명하는 동독의 사회발전 부분은 상당히 읽어볼 만하다. , 동독 정부가 인민 생활 발전을 위해 노력한 부분들은 한국 사회가 상당히 모르는 부분이다. 실제로 울브리히트는 생활수준을 향상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냈다. 1960년에는 6%의 가구만이 세탁기를 소유했으나, 1970년에는 절반 이상이 손으로 빨래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여성들이 집안일을 돌보면서도 전업으로 일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1970년에 이르러서 56.4%의 동독 가구가 냉장고를 소유해 28%인 서독을 웃돌았다. , 책에 나오는 이러한 설명들은 상당히 읽어볼만한 자료다.

 

그 외에도 2장에서 언급한 자동차 보유 및 공급의 증가, 여성인권의 성장, 주거생활의 확장 등은 당연히 읽을만한 지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참고할 부분은 상당하다. 또한, 동독 군대 장교의 인적 구성에 대한 얘기나, 동독의 양심적 병역 거부의 허용 등의 내용도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동독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동독의 일반적인 노동자들과 같은 임금을 받고, 제도적 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저자의 지적과 주장도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다. , 사회주의의 단결이 인종차별을 어떻게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최소화했는지(물론 동독이 인종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인종문제에서 차별을 최소화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3장 비판지점에서 저자는 소련군의 전시강간을 얘기했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소련군의 전시강간 문제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전시강간이 심했고 처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저자가 강조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전쟁 시기 여성과 아이들에게 잘 대해주던 소련군에 대한 언급도 분명히 한다. 독일의 한 유부녀가 아이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소련군을 달래줬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러한 부분은 비교적 참고할 부분이라 생각이 들며, 앞으로 더 사례별로 연구가 되어야 할 부분이라 본다.

 

저자가 탈나치 청산에 있어서 동독이 서독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 본다. 동독 정부는 탈나치화를 위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는 것을 감수했다. 서독의 경우 나치 출신을 공직계·교육계·문화계, 심지어 경찰 조직에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독일민주공화국은 반파시즘을 기본 신조로 유지했다. 비록 군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홀로코스트 조사가 충분하지 않았던 점 등 굵직한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동독의 탈나치화는 훨씬 더 전면적이었으며, 학자와 경찰이 사라진 자리는 미숙하더라도 이념적으로 문제가 덜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런 점에서 동독의 탈나치화 과정은 분명 재평가가 필요하다.

 

1952년 스탈린 각서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중요하다. 저자는 그 당시 스탈린이 독일에 중립국으로서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음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지적은 과거 냉전 시기 스탈린과 소련이 팽창적이었다는 전통주의적 사관과는 분명 다르다. 또한, 1953년 동독에서 발생한 1953년 동독 봉기에 대해서도, 단순히 동독 사회주의 정부가 억압했다고만 보지 않고, 그 시위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점도 읽어볼만한 지점이다. 1953년 동독 봉기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친서구적인 관점이 없지는 않으나, 적어도 서구의 정치공작과 개입에 대해 인정하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한 지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길게 인용하고자 한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냉전 전문가로 미국의 동독과 서독에 대한 정책을 전공한 크리스티안 오스터만(Christian Ostermann)은 이런 명명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봉기는 과한 노동량과 적은 임금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것이지만, 서방이 부추긴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는 독일민주공화국 정권을 전복하는 데 힘을 실어 줄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승인하지는 않았으나, 616일과 17일 내내 서베를린 방송국 리아스를 통해 독일에서 운동을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될 병참 정보를 내보냈다. 서독 요원들은 미국 정보부의 지원을 받아 봉기 이후 독일민주공화국의 정치를 와해할 목적으로 추가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서류에 남은 증거와 최근 공개된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를 연구한 오스터만은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봉기에 화들짝 놀랐으나 금세 롤백정책의 기회를 포착했고 동독의 상황을 더욱 불안정하게 할 목적으로 심리전을 계획했다.” 동맹 미국을 등에 업은 서독은 617일의 사건을 빌미로 동독의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봉기 닷새째가 되던 날, 서베를린 상원은 샤를로텐부르거 쇼세의 이름을 ‘617일의 거리로 변경했다. 3.5km 길이의 이 대로는 서베를린을 가로질러 동독 구역이 시작되는 브란덴부르크문까지 이어진다. 2주도 지나지 않아 서독 정부는 617일을 국경일로 선포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서방의 개입이 미친 영향을 연구하고 있으나, 하나 확실한 것은 울브리히트와 그의 조력자들은 자신들의 공화국이 포위되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팎의 적들에 맞서 독일민주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안체계를 구축했다.”

 

카트야 호이어, 송예슬 옮김, 장벽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서해문집, 2024, 209~211.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서구의 개입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지점들은 분명히 읽어볼만하다. 이제 개인적으로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점과 결론을 간략하게 얘기하고자 한다.

 

5. 책에서 추가적으로 재밌게 읽은 내용과 결론

 

전반적으로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앞서 언급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깊게 다루지 않은 동독의 역사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다룬 서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본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몇몇 부분들은 주의해서 읽어야할 것이다. 책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은 또 다른 내용을 얘기하자면, 동독의 락문화와 1973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관한 내용 그리고 동독으로 이주한 미국의 가수인 딘 리드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딘 리드의 경우 말 그대로 이 책을 통해 난생 처음알게 됐다.

 

미국인 대중 가수 중에 1960년대 단순히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넘어 칠레의 아옌데를 지지하고,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신념을 드러는 인물의 사례가 명확히 있음을 확인해서 흥미로웠다. 책에서는 깊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1950년대 초 동독에서 벌어진 양키 딱정벌레 잡기 운동도 기회가 된다면 보다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싶다. 사실 올해 여름 필자는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갔다왔고,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사회주의 시절을 전시한 박물관에 들렸다. 거기서 필자는 폴란드 사회주의 정부가 만든 양키 딱정벌레 퇴치 운동 영상을 봤다. 이 부분에 상당 부분 흥미가 생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카트야 호이어와 같은 책이 동유럽 현대사 관련하여 비슷한 책들이 국내에 번역 및 출간되면 좋겠다. 아마 관련 연구들과 비교하는 것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선 흥미진진할 것이다. 카트야 호이어의 책의 원서는 2023년에 출간되었다. , 몇몇 문제에도 불구하고 동독에 관한 최신 연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읽을 가치는 분명히 높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면서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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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올해 7월 말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여행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12일 동안 머물면서, 소련군 묘역과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방물관,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구 시가 광장을 방문했다. 이와 더불어 폴란드 사회주의 시절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저항과 물건들을 전시한 폴란드 인민공화국 생활 박물관(Museum of Communism, Warsaw)도 들렸다. 박물관은 당연히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 비해 훨씬 나았다. 사실 현재 폴란드의 경우 과거부터 존재해온 반러시아 감정과 이후 현대사에서 나타난 반소련 감정이 매우 강한 나라다. 한국의 경우 소련 깃발을 거리에서 들고 다닌 다해서 처벌받지는 않지만(북한 깃발 들면 처벌받겠지만), 2024년 폴란드의 경우 충분히 처벌받을 수 있다.

(감자잎벌레, 원래는 북미지역에서 살던 곤충이지만, 19세기 유럽에도 전파됐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의 경우 소련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묘사가 상식 이상으로 매우 악의적이고 적나라해서 너무나도 의아했다. 반면 폴란드 인민공화국 생활 박물관의 경우 1980년대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반체제 활동을 하던 자유노조 운동(‘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라고 불림)을 약간 옹호하고 카틴 대학살을 소련의 학살로 규정하지만, 현재 폴란드라는 나라에서는 그게 최선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박물관은 폴란드 사회주의 시절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 등도 제법 균형있게 다뤘다. 따라서 상당히 볼만한 박물관이었다. 필자는 이번에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인민공화국 생활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본 사건이 있었다. 그게 바로 폴란드 내에서 벌어진 반미 캠페인이었다.

 

이 반미 캠페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에 의해 폐허가 된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전후재건에 나섰다. 소련이 접수한 동부 독일과 폴란드도 그러한 전후재건의 시대를 거쳤다. 당연히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며 토지 국유화가 진행됐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동독과 폴란드에서는 농업생산에 타격을 주는 해충들이 창궐한 것이다. 당시 창궐한 벌레의 종류는 감자잎벌레(potato beetle)였다. 감장잎벌레는 주로 북미대륙에 살던 종이고 1811년에 처음으로 서구인들에 의해 발견됐다. 유럽에는 1870년대에 퍼져 작물생산에 피해를 준 것으로 알려졌다.

(감자잎벌레를 잡은 동독의 소년단원들, 이 사진에 나온 동독 소년은 하루에 2,000마리를 잡아 그 당시 벌레잡기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카트야 호이어는 2023년에 출간한 장벽너머라는 책에서 동독은 1950년 이후부터 병충해로 농작물 수확량의 20%가 피해를 봤다고 썼다. 그러면서 호이어는 농산물 생산 목표가 무계획적인 토지분배와 토지국유화로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딱정벌레조차 동독인들의 식량을 죄다 먹어 치우려 들었다.”고도 서술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감자잎벌레가 동독 농업에 적잖은 피해를 줬다는 사실이다. 폴란드 또한 동독과 마찬가지로 감자잎벌레에 의한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폴란드 언론사인 폴스키 라디오(Polske Radio)의 기사를 보면, 주로 사회주의 국가의 캠페인을 비난하고 있지만, 1952년에서 1956년 사이에 이 해충이 폴란드의 농업 생산에 타격을 주었다고도 언급하고 있다.

(동독에서 해충박멸 캠페인을 전개할 당시 만들어진 반미 선전물, 당시 동독은 이를 미제국주의의 침략 및 간섭 행위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에서 해충박멸 캠페인을 전개할 당시 만들어진 포스터, 폴란드 또한 동독처럼 해충박멸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동독과 폴란드에서 감자잎벌레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무렵이었다. 양국 다 이 벌레가 미국이 의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발전과 전후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살포한 것으로 규정했고, 이와 관련한 반미선전활동을 1950년대에 강화했다. 동독 정부와 폴란드 정부는 미국 비행기들이 정해진 비행 구역을 침범하여 동독 지역에 감자잎벌레를 살포했다.”고 보도했다. 폴란드 또한 마찬가지로 미국 비행기들이 벌레들을 살포했다고 주장했다. 동독과 폴란드 둘 다 반미주의 선전전을 진행했다. 양국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현재 작물을 파괴 및 생산을 방해하고 있는 이 벌레를 바로 미국이 뿌렸고, 미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파괴하기 위해 이런 행위를 벌였다.”는 것이었다. 폴란드에서는 "Walka z stonką(딱정벌레에 맞서 싸우자!)"는 전 국민적 캠페인이 벌여졌고, 동독에서도 감자잎벌레를 양키 딱정벌레(Amerikanischer Käfer)’라고 부르며 폴란드와 비슷한 전 국민적 해충박멸 캠페인이 벌어졌다. 동독에서는 소년단들이 앞장서서 감자잎벌레를 수집했는데, 한 소년의 경우 하루만에 2,000마리를 잡아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었다.

(미국의 딱정벌레 살포를 규탄하는 사회주의 시절 폴란드의 신문, 폴란드 또한 미국의 침략과 정치공작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에 대한 서방의 입장은 동독과 폴란드의 반미 캠페인이이며 사실무근이라는 것이다. 2013년에 BBC에서 쓴 관련 기사를 보면, “실질적으로 딱정벌레를 무기로 사용한 증거는 없다는 주장과 더불어, 가이슬러라는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당시 동독 농업부에서 작성한 목격자 및 전문가와의 인터뷰를 포함한 보고서는 감자잎벌레 외의 다른 침입종에 대해서는 발표한 적도 없고 주로 과학자가 아닌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신뢰할 수 없으며 동독 정부가 자신들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프로파간다다.”라고 썼다. 쉽게 말해 미국이 딱정벌레를 동독과 폴란드에 퍼뜨렸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선전으로만 보긴 힘든 측면도 있다. 우선 동독에 사는 한 농부인 맥스 트로거(Max Troeger)1950년 당시 미국 항공기 두 대가 자신이 경작하는 밭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고 알렸었다. 앞서 언급한 BBC의 기사에서도 인정한 것이지만, 실제로 미국 항공기들은 냉전시기 서베를린으로 가거나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동독 상공을 많이 다녔었다. , 미국 항공기가 동독에 위장침입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다 19502월 당시 미국 하원의원인 맥클로이(McCloy)의 주도로 동독에 반대하는 정치활동과 선전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정치경제계획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동독의 생산적인 기반을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49년 색슨 섬유산업과 1952년 솔베이 기업프로젝트에서 그리고 1953년 크라이스 비츠스톡 지역 농업생산에서 생산파괴행위가 있었다.

(폴란드 서적에서 발견한 내용, 미군 항공기가 딱정벌레를 낙하산에 실어 보내는 묘사는 마치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연상시킨다.)


(동독에서 나온 또 다른 반미 선전물, 이 또한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을 연상시킨다.)

 

아직 밝혀질 것이 많지만,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감행한 것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현재까지도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북한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한 사람들의 증언은 미국의 공식입장과는 다른 주장들도 많다. 세균전을 단순히 북한의 선전으로만 볼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2010년 중동 언론 알자지라가 미국 NARA에서 발견한 문서다. 이 문서는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세균전 실험을 명령한 문서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1950년 당시 미국이 동독과 폴란드에 비슷한 행위를 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룬 미국의 동유럽 생물학전은 깊이 연구가 되지 않았다. 만약 사료만 바탕이 된다면 미국의 동독 및 폴란드에서의 생물학전과 한국전쟁에서의 세균전을 비교한 연구가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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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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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시점이 언제였을까? 아마 2015년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면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던 중 과거 중학교 시절 친구와의 통화에서 메갈리아라는 존재를 알게 됐고,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됐다. 조금 의문이 들어서 친누나에게 물어보니 누나는 메갈리아에 대해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그 당시 메갈리아가 뭔지 딱히 관심도 없었지만, 2016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이슈가 점점 한국에서 확산되었던 것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정의당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 관련 논평 논란으로 상당히 인터넷상에서 시끄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페미니즘에 대해 워낙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보니 나 또한 2015년이나 2016년에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와 문화 사회생활에 대해 꾸준히 공부했지만, 대략 2020년까지도 안티 페미니즘적 사고관에도 상당부분 개인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었다. 소방서에서 대체복무를 하던 2016년에서 2018년 사이 대략 90~100권 가까이 되는 사회과학 및 역사 관련 서적들을 완독하면서, 페미니스트인 누나가 추천해준 남성 페미니스트 토니포터가 쓴 <맨박스(Man Box)>를 읽었지만, 상당히 건성으로 읽어서 내용자체는 기억이 거의 나질 않는 수준이다.

 

그런 상태로 페미니즘에 관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세월을 보내왔다. 군복무 과정에서 영화 기생충에서 보여준 반지하 빈민 및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스스로 좌파가 되었고, 그 이후에도 좌파 운동을 해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를 깊게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해 잘은 몰라도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페미니즘과 안티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 큰 입장을 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기가 뭔가 낯설고 생소했었다. 물론 나에겐 페미니스트인 미국인 절친이 있고, 그 친구의 입장도 이해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올해 사귀게 된 여자친구의 존재는 나에게 페미니즘이라는 의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가르쳐준 존재였다. 아마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가장 많이 생각해보게 만든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스로 좌파 내지는 사회주의자(혹은 공산주의자)를 자처해온 나지만, 정작 페미니스트가 보기엔 상당히 문제가 많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올해 들어 하게 됐다. 여자친구 또한 좌파 성향의 페미니스트이다 보니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적 접근도 점차 궁금증이 생겼다. 여자친구는 나에게 대표적으로 두 권의 페미니즘 서적을 추천해줬다. 하나는 1960년대 흑표당 활동으로 유명한 운동가이자 학자인 안젤라 데이비스의 <여성, 인종, 계급(Women, Race & Class)>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feminism for everybody)>이었다.

 

여자친구가 한국 사람이 아니다 보니 제목을 영어로 들었는데, 찾아보니 두 권 다 한글 번역본이 있었다. 무튼 페미니즘에 대해 한번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1960년대부터 여성운동을 전개해 온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의 페미니스트라는 점과 진보적인 의식이 책에 녹여 들어가 있었다는 점은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운 독서시간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거기다 내용도 너무나도 쉬워서 말 그대로 책이 술술 읽혔다.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계급문제, 폭력문제, 임금문제, 복지문제, 지배세력의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다뤘다.

 

저자 벨 훅스는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스트이긴 하나 이 책에서 이른바 혁명을 주장하거나, ‘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생각하는 진보적인 의제와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설득력 있게 소화한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벨 훅스는 페미니즘의 흐름과 경향들을 얘기하면서 자유주의 성향의 페미니스트들의 여성 및 유색인종 여성 노동계급의 임금 문제를 등한시 하거나, 잘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벨 훅스의 지적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타당하고 합리적인 지적이다. , 이런 식으로 벨 훅스는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책에서 설득력 있게 소화했다.

 

벨 훅스가 다룬 주제 중 아동 폭력 혹은 가정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당히 신선했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가 단순히 남성의 폭력 문제로만 비화시킬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 근거로 저자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아동 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가 제법 많음을 얘기한다. , 폭력의 악순환적 재생산이다. 가장인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아내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그 결과 그 폭력을 경험한 아이가 나중에 성인이 돼서 여성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벨 훅스의 분석이 상당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런 맥락에서 벨 훅스는 이와 같은 폭력의 구조를 사회적으로 근절하고 타파하기 위해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페미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것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정의한다. 이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페미니즘 또한 워낙 사상과 분파가 다양하기에 남녀평등 보다는 남녀갈등을 조장하는 일부 분파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글쓴이가 말하자면,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도 여러 분파가 존재한다. 한국같이 냉전의 최전선에 있고 반공주의적 정서가 지금도 현실성을 가지는 사회에선 사회주의 하면 단순화된 사고로 다 빨갱이야하는 식의 인식을 보이지만, 이 또한 매우 복잡한 입장과 차이 그리고 갈등을 보인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호자주의, 티토주의,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불교사회주의, 수정주의, 교조주의, 주체사상, 아나코 사회주의 등 엄청많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 중 일부가 남성혐오적이고 친자본주의적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페미니즘 전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 또한 그들 중 일부가 잘못된 모습을 보인다 해서 건설적인 비판을 할 수는 있지만, 이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맥락적으로 파악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과 같이 여성들의 경우 남성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성행위와 관계로 자신의 진심으로 원하는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단순히 이성과의 성관계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동성간의 성관계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생겼음을 저자는 설명한다. 즉 한 쪽의 지배적인 성관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설명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적 사고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 여기서의 페미니즘은 서로가 동등한 조건에서 누리는 평등을 의미한다.


워낙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히는 책이라 정말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도 제법 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이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해 집필된 책이기 때문에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로써 가지는 또 다른 문제의식을 자세하게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저자의 경우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미국과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을 크게 분석하지는 않는다. 나는 벨 훅스가 당연히 비판하는 이른바 리버럴 페미니스트들이 과거 미국의 침략전쟁에서 미국의 논조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은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여성들을 해방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미국의 목적은 이라크의 풍부한 석유였지, 여성인권이 아니었다. 거기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이라크의 여성인권은 훨씬 더 악화됐다. 심지어 이라크의 여성들 중에는 미군에게 강간당하고 학살당한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시기 미국의 리버럴 페미니스트들은 이와 같은 문제점 보다는 미국의 논리에 흡수됐다. 마찬가지로 2011년 리비아 내전 때도 서구의 리버럴 페미니스트들은 카다피를 악마화하는 미국의 전략에 그대로 동조했으며, 2023년 팔레스타인의 해방전쟁에서도 학살자 이스라엘 편을 드는 이상한 페미니스트들도 제법 있었다.

 

물론 제국주의 옹호현상은 단순히 페미니스트들의 문제만은 절대 아니지만, 당연히 비판해야할 부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글쓴이는 이와 같은 내용을 저자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다루기를 내심 기대했다. 아마 저자의 다른 저서들에는 분명히 있을 내용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좋은 책을 집필했다고 칭찬하고 싶다. 페미니즘에 대한 신선한 접근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기쁘다. 이 책을 읽도록 추천해준 내 친누나와 여자친구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안젤라 데이비스의 저서 <여성, 인종, 계급>도 읽고 싶다.

 

마지막으로 짧게 얘기하자면, 페미니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이를 통해 건설적인 논쟁이 이어져 남녀갈등이 최소화되고 궁극적으로 철폐되는 사회까지 나아가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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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참이던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대학살(Indonesia Genocide)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65년에 시작되었으며, 학살당한 숫자 규모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아무리 낮게 잡은 축소된 수치가 8만 명이고, 최대 30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610월 당시 인도네시아 국가 보안기구 의장인 수도모 제독은 네덜란드의 한 TV 방송에서 학살 당시 최소 5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증언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 하비비 전 대통령은 100만명이라고 했고, 학살을 지휘한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은 300만명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 학살 추정치를 50~300만 명으로 추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경우 가장 끔찍한 피해를 본 지역이 바로 휴양지로 유명한 발리(Bali)였다. 학살 당시 북부 수마트라와 동부 자바섬의 경우 학살의 규모가 너무나 커서 위생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으며, 발리는 제주 4·3 때처럼 진압군에게 잡히는 사람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총살이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학살당한 사람들의 경우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됐고, 참수당했으며 피부를 벗기는 식의 고문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학살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발리의 경우 섬의 인구가 200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2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학살이 일어난 데에는 그 배후에 미국과 CIA가 존재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으로 알려진 수카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에 맞서 잠시 일본에 협력하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이후 노선을 바꿔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 지배하려 하자 이에 맞서 4년간의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군 6,000명이 전사했고, 인도네시아군은 45,000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도 대략 수만 명이 사망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살 대다수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자행됐다. 당시 수카르노는 서방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에 맞섰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이와 같은 수카르노의 반공노선은 초기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지만, 1950년대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하면서 반미·친소 노선으로 돌아섰다. 미국의 CIA1955년에 수카르노 암살을 검토했었다. 이 시기 수카르노는 소련의 흐루쇼프와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동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보다 광범위하게 했었다. 이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반수카르노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1960년대 수카르노의 반미감정은 더욱 커졌으며, 19658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에 반제국주의 자카르타-프놈펜(시아누크)-하노이(호치민)-베이징(마오쩌둥)-평양(김일성) 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미국은 1950년대부터 반공성향의 군부 장성들을 규합했고, 그 중 하나인 수하르토를 내세워 쿠데타를 전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친미 쿠데타에 성공한 미국은 수하르토 정권의 학살을 도왔으며, 그 결과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학살은 1968년에서 1969년에 종결됐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는 이 수하르토 친미독재정권을 민주적인 정권이라며 칭송했다. 수하르토는 거대 다국적기업들을 수익률 높은 제안으로 유치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실질적인부를 축적했다. 물론 1960년대 인구의 절반 이상에서 1966년 약 12%로 빈곤을 감소시켰고, 수십 년간 꾸준히 연 7%의 경제성장도 보이긴 했다. 그와 동시에 수하르토는 집권 시기 포르투갈로부터 해방된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1975년 수하르토는 군대를 보내어 동티모르에서 대략 10~20만 명을 학살했다.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은 1970년대 후반까지 가장 극심하게 전개되었는데, 미국의 카터 정부는 끊임없이 수하르토 정권에게 원조를 제공했다. 그리고 수하르토 정권의 동티모르 학살을 저지하려는 유엔의 시도도 봉쇄했다.

 

1982년에서 1984년까지 레이건 행정부 아래서 수하르토 정권에 판매한 무기는 10억 달러 선을 넘었으며, 이 동티모르 학살은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19911112일 최소 273명의 동티모르인이 딜리에서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앞서 언급한 수하르토의 가족 제국은 실로 거대했다. 1998년 기준으로 수하르토의 재산은 미화 160억 달러로 추정됐으며, 이는 세계에서 6번째로 부유한 사람임을 의미했다. 일각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300~400억 달러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수하르토의 가족사업은 호텔에서 인공위성까지 뻗어갔고, 루슨트 테크놀로지, 제너럴 일렉트릭, 하얏트 호텔, 휴스 등과 맺은 협력 관계를 이들은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수하르토의 통치 30년 동안 세계은행은 그를 적극 지지했고, 300만 달러 이상의 차관을 제공했다. 수십 년 동안 자체 보고를 포함한 수많은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부패를 용인하고, 그릇된 정부 통계에 그릇된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그것을 다른 나라의 모델로 제시하여 독재를 정당화하고, 인권 실태와 경제의 독점적 통제에 만족했다.” 1997년 대한민국 경제에 큰 악영향을 준 IMF는 인도네시아에게도 큰 악영향을 줬다. IMF로 하룻밤 사이에 인도네시아는 급속한 경제 악화를 겪었으며, 수백만 명이 가혹한 생존 조건에 몰렸다. 화폐가치가 폭락했고, 전염병이 자카르타로 퍼졌으며 국제 투기꾼들은 인도네시아 주식을 팔아버림으로써 시장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IMF 위기가 가속화 됨에 따라 물가가 상승했고, 이는 식량폭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1998년 인도네시아 내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불러왔다. 그해 3월 수십 개 캠퍼스에서 수하르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힘을 얻었고, 학교에서의 시위가 격화됐다. 4월에는 2,000여명의 여학생들이 주도한 행진에 스미랑이라는 작은 도시에 살던 주부들이 합류했으며, 5130개가 넘는 자카르타 노동자단체의 대표들이 데폭의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캠퍼스에 와서 4시간 동안 학생 활동가들과 만났다. 12일에는 1만 명의 학생이 평화적으로 행진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엘리트 대학인 트리삭티 캠퍼스에서 주요 고속도로로 진출했다. 투입된 경찰이 최루탄으로 진압을 했고, 경찰 저격수의 사격으로 학생 4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충격으로 그리고 분노로 이어졌으며, 513일에서 15일까지 파괴적인 유혈시위가 솔로, 우중판당, 족자카르타, 괄렘방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시위가 유혈폭동으로 변해 수많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죽고,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와 같은 사태 속에서 반수하르토 시위가 격화되어 결과적으로 1998521일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게 됐다. 이로써 30년 이상 지속되던 수하르토 시대는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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