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공산당이 벌인 집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됐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했고, 이들은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치, 경제, 군사, 과학기술 및 사회문화에 있어서 경쟁했다. 미국이나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냉전의 책임을 일반적으로 동유럽에 세력을 확장했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냉전 초기의 양상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무력과 폭력 그리고 내정간섭을 일삼았던 것은 소련의 스탈린이 아닌,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 소련의 스탈린보다 훨씬 더 내정간섭을 했고, 군사적 무력을 사용했다는 그 증거는 무엇일까? 물론 증거야 20세기 세계 혁명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차고 넘치지만, 이 글에선 냉전 초기 미국의 대표적인 개입 사례인 그리스 내전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46년 3월 미국 풀턴 미주리주에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이른바 철의장막(Iron Curtain) 연설이 퍼지면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 대한 적대심을 드러냈다. 처칠이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에는 소련에 대한 반공주의 강화라는 측면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나 이탈리아 그리고 핀란드 등 각국의 총선에서 공산당이 최소 2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배경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선거로 집권할 조짐이 보이자, 무솔리니 시절의 파시스트들을 이용하여 노조를 파괴하고 물자지원을 끊었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오늘 얘기해보고자 하는 그리스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놀랍게도 당시 미국이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그리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41년 초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그리스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나치 독일에 맞서 저항했고, 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주체는 그리스 공산당 휘하의 군대인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이였다. ELAS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알바니아의 호자 그리고 나치 독일 점령하의 소련 영토에 있던 빨치산 세력들처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침략자 나치에 맞서 싸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던 1944년 나치 독일은 그리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이 그리스에서 물러나자, 영국군이 그리스에 상륙했다. 영국은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을 이용했다. 당시 영국이 지원했던 세력이 바로 그리스 왕당파 세력이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좌파민족해방전선(그리스 공산당이 주도함)을 전복시켰고, 우파 독재정권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1946년 그리스 좌파 세력들은 왕당파에 맞서 다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내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정적으로 힘들던 영국의 처칠 정부는 미국에게 그리스 반군을 진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스 내전은 1947년에 접어들면서 격렬해졌다. 1947년 3월 미국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했고, 그리스 내전에 개입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대포와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4,000톤의 군사 장비를 지원했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이끄는 250명의 군사고문단을 투입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영국과 맺은 협정에 따라 그리스 공산군에 대한 지원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소련의 물자가 불가리아 국경을 통해서 들어가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지원이었다고 하기는 다소 힘들었다. 어쨌든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되자, 소련은 분노했다. 소련의 <프라우다>지는 “미국이 자선을 빙자해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고 있으며, 먼로 독트린을 유럽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군사고문단은 1947년 6월에 그리스 교전 지역에 배치됐다. 밴플리트가 이끄는 고문단은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 세력을 도우며 그리스를 전술 시험 장소로 활용했다. 당연하게도 노조파괴, 고문, 민간인 마을에 대한 네이팜 폭탄 투하, 주민 대량 소개 후 재판 또는 기소 없이 강제수용소에 구금, 위험인물의 아내와 자녀에 대한 대량 투옥, 군사재판에 의한 대량 처형, 언론 검열 같은 전술들을 활용했다. 이는 1948년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활용했던 전술이기도 하다. 그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왕당파 세력은 1948년에 이르러 작전지역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티카까지 확대했으며, 1949년 내전에서 승리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는 군주정지지 세력과 부유한 실업가들 수중에 들어갔으며, 당연하게도 이들 대다수는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반면, 이들에게 학살당한 희생자는 주로 나치와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따라서 이점만 보더라도 미국은 철저히 반민중적인 인사들 편이었다.

3년간 전개된 그리스 내전으로 최소 10만 이상의 그리스인이 사망했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그리스 내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기에, 25년 동안 우익 독재정부가 그리스에서 활동했다. 결국 1974년 민주화를 이룩할 때까지, 그리스는 암울한 친미 독재정권 시기에 놓이게 됐다. 그리스 내전은 미국이 타국의 주권을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침범한 대표적이 예시이며, 소련보다 미국이 더 개입주의적임을 입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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