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릴라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 북한과 제3세계 관계사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14
벤자민 영 지음, 고자연 외 옮김 / 너머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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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몇 년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북한이 만든 영상물 하나를 보게 됐다. 영상물의 제목은 백두의 영광이었고, 외국인이 지은 시라고 소개됐다. 아프리카 기니에서 온 인물이 백두산 천지에 올라 시를 읊었다. 기니에서 온 사람은 기니주체문학사상연구회 회장인 아브톨라이에 디알로였고,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대한 존경심과 주체사상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인 생각을 로 읊었다. 영상 마지막에는 프랑스어로 말하던 기니인이 김정은 장군 만세!”를 한 번은 프랑스어로, 두 번은 우리말로 외친다. 영상 자체가 매우 희망차 보였고, 별생각 없이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음악이 연속적으로 나왔다. 만약 대다수 한국인이 이 영상을 본다면 상당히 어이가 없을 것이다. 아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나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영상 자체가 (meme)’화될 가능성도 높다.

 

한국인 대다수는 그렇게 소비하고 분석하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영상을 보며 북한이 이런 영상물을 찍고 편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됐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영상물이 북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알려면 결국 북한의 역사, 즉 북한의 제3세계 외교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3년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 말리로 대표되는 아프리카 사헬 지대의 국가들에서 반정부·반서방 봉기가 일어났다. 이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지도자 이브라힘 트라오레였다. 트라오레는 부르키나파소가 더 이상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현재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움직임을 두고 일각에서는 미국과 서방 중심의 일극 체제가 끝나고 러시아와 중국, 그 밖의 제3세계 국가들이 중심이 되는 다극화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에서 일어난 반서방 쿠데타 과정에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국 국기와 더불어 두 나라의 깃발을 들고나온 모습이 서방 언론에 포착됐다. 하나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의 깃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깃발인 인공기였다.

 

여담으로 필자는 한 여행 유튜버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아프리카의 부룬디를 방문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에서 유튜버는 부룬디에서 가장 좋은 대학의 도서관에 갔고, 한국 관련 책을 찾다가 결국 김일성 저작집을 소개받았다. 한국 사람들이 이름조차 모르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Korea’라고 했을 때 북한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다. 반정부 시위와 봉기, 쿠데타에서 북한의 깃발이 등장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또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부룬디의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인 유튜버가 소개받은 ‘Korea’ 관련 서적이 김일성 저작집인 것 역시 단순한 우연일까? 필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결국 이 부분은 북한의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해 보겠다.

 

2. 책 내용과 1960~70년대 북한 외교의 독자성

 

실제로 북한은 냉전 시기 제3세계라는 범주 속에서 외교적 독자성을 가진 나라였다. 3세계라는 범주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묶을 수 있는 매우 넓은 개념이다. 3세계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의 국가들을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냉전기 사회주의 국가임을 분명히 했고 사회주의 진영을 강력히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북한은 냉전 시기 고립되지 않았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벤자민 영(Benjamin Young)은 북한의 제3세계 외교사를 주제로 논문을 썼다. 영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북한 제3세계 외교사를 연구했으며, 북한이 전혀 고립되지 않은 국가였음을 역사학적으로 보여줬다. 그의 논문은 2021년 영미권에서 먼저 출간됐고, 2026년에는 한국어로 번역됐다.

 

책은 1950년대 북한이 전후 재건을 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한국전쟁의 여파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동시에 1955년 반둥 회의를 통해 점차 태동하기 시작한 제3세계와 비동맹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북한은 인도네시아의 국부로 불린 수카르노와의 관계를 강화했고, 1965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로 그가 축출될 때까지 북한과 인도네시아의 관계는 돈독했다. 1960년대 북한은 반미 투쟁의 최전선에 있던 라틴아메리카의 쿠바와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도 관계를 강화했다.

 

쿠바는 1898년부터 대략 60년간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1961년 미국 존 F. 케네디 정부의 침공을 받았다. 이후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해 제3차 세계대전이 임박하기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은 쿠바에 대한 제재와 봉쇄를 끊임없이 이어 나갔는데, 북한은 사회주의 형제국인 쿠바를 도와 미국에 맞섰다. 북한과 쿠바의 관계는 그 이후에도 우호적으로 유지됐다. 피델 카스트로가 1986년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는 것은 양국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베트남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으며, 전쟁 이후 프랑스가 다시 침략했다. 베트남의 국부로 불린 호찌민은 혁명 군대를 규합해 프랑스에 맞서 싸웠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종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국이 베트남을 자의적으로 분단했고, 베트남은 미국의 분단과 침공으로 전쟁을 치르게 됐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한반도의 전쟁 위기와 연결해 보았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도왔다.

 

북한의 베트남 지원은 한국전쟁과 연결해서 보아야 북한이 왜 베트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은 무차별 폭격을 겪었고, 대공 방어망이 전무해 국토가 사실상 달 표면과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파괴됐다. 북한 인구의 20%가 미군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추정이 있을 정도니, 북한이 전쟁에서 겪은 고통은 결코 작지 않았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일부터 1972년 크리스마스까지 북베트남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와 달리 북베트남에는 중국과 특히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최신식 대공 무기가 존재했지만, 북베트남 전역 또한 초토화됐다. 북베트남에는 100만 톤 이상의 폭탄이 투하됐고, 1972년 제2차 라인배커 작전만 보아도 미군이 해당 작전에서 사용한 폭탄의 폭발력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5개와 맞먹는다고 하니, 북베트남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의 폭격 경험과 미국의 베트남 분단 및 침공 등은 북한이 베트남을 돕게 된 가장 큰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북베트남 측이 북한의 도움을 극찬했던 것을 보면, 북한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김일성과 회담 후, 레 탄 응이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북한 지도자들은 매우 솔직하고 개방적이었으며, 우리와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였고, 그들의 지원은 매우 직접적이고 정직했고 이기적이지 않았다." 주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는 북한 정부의 동원 사업이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레 탄 응이는 북한을 철저히 '이타적'이며 미국과 싸우는 베트남 투쟁을 전적으로 돕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김일성은 베트남 지원을 통해 제3세계에서 자신의 혁명적 위상을 강화하려 했다. 북베트남 지도부가 김일성의 지상군 파병 및 지하터널 건설 전문가 지원 제안을 왜 수락하지 않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65년 가을, 북한은 중국 철도를 이용해 대량의 건설 자재, 공구, 자동차를 북베트남으로 보냈다. 이 지원은 북한 대외경제관리국이 주북한 중국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조직했다. 중국 정부는 때때로 철도 사용 요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으나, 북베트남에게 운송비 부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북한은 이 자재들을 북베트남에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했다. 그러므로 북한은 중국이 북베트남의 반미 투쟁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1967년 소련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는 중국이 베트남 지원에 충분히 협력하지 않는다고 비공식적으로 비판했다.”

 

벤자민 영, 옥창준 외 옮김, , 게릴라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북한과 제3세계 관계사, 너머북스, 2026, 80~81.

 

1960년대 북한은 자신들과 더불어 쿠바와 베트남 같은 나라들이 혁명적 반제국주의 투쟁의 최전선에 있으며, 이들이 반제국주의 연대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김일성은 전 세계적인 반미·반제국주의 연대를 구상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60년대 내내 고군분투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북한이 사회주의 진영 안에 있으면서도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과 달리 소련에 종속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북한은 중국 및 소련과의 동맹 관계와 이들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나 중국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앞서 언급한 1960년대 말 김일성과 북한의 세계관이 보여주듯이, 반미 투쟁의 최선봉은 실제로 미국의 침공과 억압을 받고 있는 나라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으면서 이 나라들이 단결해 서구의 지배를 거부해야 한다는 북한의 세계관은 수정주의와 교조주의, 즉 소련과 중국의 편향을 반대한다는 주체사상 이론과도 연결된다.

 

북한의 이러한 인식은 1970년대 들어 더욱 확대됐으며, 이른바 쁠럭불가담 운동, 즉 비동맹 운동 참여를 통해 한층 확장됐다. 이에 대해 저자인 벤자민 영은 북한이 1960년대의 실질적으로 대가 없는 원조에서 벗어나 1970년대에는 자국의 이익과 희생 및 지원에 대한 대가를 원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전자든 후자든 북한이 많은 나라에 지원과 원조를 제공한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에 대한 대다수 사람의 인식과는 달리, 이 시기 북한은 전후 재건에 성공하고 사회주의를 완성해 나가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실제로 북한은 1980년대 이전까지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였고,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였다. 그런 맥락에서 북한은 이러한 국력과 힘을 바탕으로 제3세계의 혁명과 사회주의 전파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믿었다.

 

1970년대 북한은 비동맹 운동 가입을 전후해 박정희 정부와의 경쟁 속에서 수많은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고, 1975년 유고슬라비아의 도움으로 비동맹 운동에 가입했다. 한국이 가입하지 못한 것과 달리 북한은 가입에 성공했고, 이를 자국 외교의 거대한 성과라고 주장했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를 덧붙이자면, 1970년대 북한 외교의 핵심 성과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개선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의 책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지만, 북한은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를 현대 수정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강력히 규탄하고 비판했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 데탕트를 전후해 양국 관계를 발전시켰다. 김일성은 비동맹운동 가입 2개월 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던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를 방문해 티토를 만났고, 티토의 도움을 받아 비동맹운동에 가입했다. 이후에도 양국 관계는 비동맹운동에서의 협력 속에서 발전했다. 19778월 티토는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평양을 찾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북한은 1970년대 쁠럭불가담 운동을 반제혁명의 역량으로 인식했고, 이를 위해 유고슬라비아와 접촉해 반미·반제 연대의 장으로 활용했다. 북한과 유고슬라비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가 준비 중인 석사학위논문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북한이 외교적 확장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미국과 서방에 맞선 국가들에 실질적인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1차 오일쇼크를 촉발한 제4차 중동전쟁에서 북한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을 지원했고, 군사고문단을 비롯해 전투기 조종사도 시나이반도에 파병했다. 1973년에만 92명을 파병했다고 한다. 아직 이 부분은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많기에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1970년대 중후반까지 북한 군인들이 현지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북한의 베트남 지원도 2000년대에 들어 밝혀졌다. 또한 북한은 1970년대 중반 앙골라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을 도왔고, 군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지원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쿠바와 소련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앙골라에 파병한 나라가 북한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따라서 1970년대는 북한이 반미·반제 외교의 장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더욱 확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북한의 대아프리카 외교에는 당연히 박정희 정부의 해외 영향력을 약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북한은 이 시기 앙골라, 이집트, 리비아, 마다가스카르, 에티오피아, 자이르(콩고의 옛 이름), 토고, 모리셔스, 라이베리아, 탄자니아 등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1970년대 북한은 대아프리카 외교의 정점을 찍었고,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은 2020년대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의 반서방 쿠데타 및 봉기에서도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부룬디의 최고 대학 도서관에서 김일성 저작집이 ‘Korea’ 관련 책으로 소개된 것도 이 맥락에서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북한은 일본의 적군파와 미국의 흑표당, 그 밖의 제1세계 혁명 및 진보운동 조직과도 접촉했다. 솔직히 북한과 흑표당의 접촉은 매우 흥미롭다. 일본 적군파의 평양행은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굿뉴스를 통해 회자되면서 사람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졌지만, 흑표당은 여전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여담으로 흑표당의 영어 이름인 블랙팬서(Black Panther)는 미국 마블 영화 시리즈의 블랙팬서에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역사인 것 같다. 정리하자면 북한은 1970년대에 제1세계와 제2세계, 3세계 모두와 접촉했고, 특히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를 확장했다.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와 달리 고립되지 않았던 셈이다.

 

3. 1980년대 북한에 대한 벤자민 영의 시각과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 그리고 사소한 오류

 

저자 벤자민 영은 1980년대에 들어 북한 외교가 좀 더 폭력적이고 부패했으며, 불법적·침략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책을 끝까지 읽어 본 결과 어떤 맥락에서 말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크게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영에 따르면 북한은 1980년대 남한과의 경쟁 속에서 이러한 노선을 걸었다고 한다. 저자는 1983년 버마 테러 사건과 1987KAL기 폭파 사건 등을 그 사례로 든다. 또한 북한이 에티오피아의 독재자 멩기스투 정권과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정권, 우간다의 오보테 정권을 도와 이들 군대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데 관여했다고 설명한다(230~231, 239, 242~243). 아무튼 이 시기 북한은 점차 경제적 위기를 겪었고,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응해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다고 한다.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 남한 운동권 조직 전대협의 대표 임수경이 평양을 방문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둘러싸고 북한 정권과 참가자들 사이에 예상보다 큰 입장 충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1990년대 초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만, 북한은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았고, 내부로 눈을 돌려 군사 개발, 특히 핵무기 개발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1990년대 남한은 농촌 개발 사업에 상당한 투자를 하면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모델을 아프리카 국가에 수출한 반면, 북한은 관련 활동을 대부분 중단해 사실상 한국에 아프리카 외교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것, 그리고 반식민주의 발전 모델을 제시하던 국가에서 결국 생존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국수주의 군주국이 되었다는 것이 아마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268). 5장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시각은 필자가 보기에 지나치게 무리하며, 역사학적으로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1983년 버마 테러 사건과 1987KAL기 폭파 사건은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김정일이 랑군 폭탄테러에 직접 연루되었다는 결정적인 문서 증거는 없다”(202). 그런 상황에서 김정일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과정에 버마 사건을 연결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심히 의심된다. 또한 KAL기 폭파 사건은 버마 사건보다도 논란이 더 많은 사건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작설도 제법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이를 단정적으로 북한의 테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이것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2010년에 일어난 천안함 사건의 경우 한국에서는 북한의 소행으로 설명하지만 영문 위키백과는 개요에서 한국과 북한 양측의 의견을 밝혔다. 또한 교전 세력 부분에서도 북한 추정이라고만 표기했다. 예전에는 알 수 없음으로 표기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사건의 진상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역사학적으로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서라면 모를까, 자신의 역사학 박사학위논문을 기반으로 한 단행본에서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서술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논리적 연결이 다소 무리했다는 이야기다.

 

앞서 언급한 1980년대의 아프리카 지원도 그러하다. 책에서도 북한 군대가 몇몇 학살에 가담했다는 문헌적 혹은 현장 증언에 입각한 증거를 밝히지는 않았으며, 영국 등 서방의 추정을 지나치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가운데 읽으면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북한이 폴포트의 크메르루주 학살을 지원했다는 대목이다. 북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폴포트 정권을 승인한 것과 학살을 지원한 것은 매우 다른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김일성이 폴포트를 지지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북한의 지지와 연결해 단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잘못된 서술이다(247). 이 부분은 캄보디아의 역사를 알아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 캄보디아에서는 1970년 닉슨 정부의 침공으로 론놀과 크메르루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 과정에서 특히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그 여파로 50만 명이 죽었다. 이 때문에 폴 포트의 킬링필드 이전에 이미 미국이 제1차 킬링필드를 자행했다고 보는 역사적 시각도 존재한다. 이 시기 시아누크는 크메르루주와 협력해 론놀을 무너뜨렸고, 결국 19754월 중준 크메르루주가 집권했다.

 

폴포트의 크메르루주는 말 그대로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몰고 갔고, 2차 킬링필드로 150만 명이 죽었다. 1978년 베트남 공산당의 군대가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할 때까지 북한과 폴포트의 관계는 지속됐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점은 당시 많은 이가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주관적 견해를 좀 더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실제로 노엄 촘스키 같은 인물도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폴 포트를 옹호한 적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을 연구했고 현재도 미국의 진보운동 진영에 속하는 학자인 가레스 포터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리영희 교수가 문화대혁명에 대해 초기에 제한된 정보로 무리하게 미화했던 맥락과 비슷하다. 이 학자들은 나중에 실체가 알려진 뒤 비판하게 됐다. 북한은 초기에 폴 포트 정권과 접촉했다가 이후에는 접촉을 중단하고 시아누크와의 관계를 강조했다. 시아누크 역시 초기에 협력했으나 이후 크메르루주와 갈등하게 됐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북한도 그러지 않았나 싶다. 1978년 이후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 관련 언급이 로동신문등 북한 매체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 아마 그럴듯하다. 이런 추정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영이 설명한 크메르루주와의 관계는 사실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제3장에 등장하는 베네수엘라 공산주의자이자 시인인 라메다의 사례도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하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국제앰네스티의 이야기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에서는 라메다가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언급하며 수용소의 끔찍한 실상을 강조한다(137). 이 역시 교차 검증이 필요한 자료라고 본다. 예를 들어 책에서 김일성을 직접 만난 인물로 언급되는 루이제 린저는 자신의 저서에서 북한 교화소를 창살 없는 교화소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사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2010년대 북한에서 교화소에 수감된 미국인 매튜 토드 밀러는 구타가 없었다고 말했고, 비슷한 시기 선교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교화소에 수감된 케네스 배 역시 노동은 힘들었지만 구타와 폭력은 없었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사례도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여러 논란이 있는 만큼 영의 인용이 적절했는지는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사소한 실수도 언급하겠다. 3장에서 저자는 북한이 비동맹운동을 외교적 도구로 활용한 사실을 언급하며 김일성과 티토가 1977년에 만난 일을 짧게 다루고 있다. 본문에는 “19779, 티토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다라고 나오는데, 엄밀히 말해 날짜가 틀렸다(170). 티토가 북한을 방문한 기간은 824일부터 30일까지다. 벤자민 영이 인용한 출처는 필자도 읽어 본 기밀 해제된 루마니아 대사관 문서다. 이 문서는 윌슨센터 디지털 아카이브에 있다. 9월은 루마니아 대사관이 티토의 북한 방문을 보고한 시점이지, 티토가 북한을 방문한 시점은 아니다. 티토는 평양 방문 이후인 그해 9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북한자료센터에서 관련 자료를 일일이 찾아봤기에 이 부분은 확실하다. 물론 큰 실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역사책에서는 세부 사항이 중요하다.

 

4. 추가적으로 궁금한 점

 

앞에서 책의 내용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점을 길게 이야기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을 한다고 해서 필자가 이 책의 가치를 전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게 읽었기에 이렇게 긴 서평을 쓰게 됐다.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긴 부분도 많았다. 북한과 제3세계의 외교를 깊이 다루다 보니 굉장히 많은 국가와 단체, 인물이 언급된다. 그중 가장 의아했던 사례는 바로 북한과 자이르(콩고)의 관계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콩고는 1959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했다.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은 파트리스 루뭄바였고, 루뭄바는 소련과 관계를 돈독히 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벨기에 당국에 의해 제거됐다. 루뭄바가 죽은 이후 미국과 벨기에 당국이 내세운 인물은 한때 벨기에군 장교로 복무했던 모부투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미국이 루뭄바보다 모부투 같은 친미 독재자를 내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어째서 북한과 자이르의 관계가 좋았는지 궁금해졌다. 참고로 모부투는 1980년대 대한민국 대통령이던 전두환과 만나 양국의 친선 관계를 강화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알던 모부투는 친미 독재자이자 전두환과 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모부투가 이끄는 콩고와 관계를 강화한 것은 의아했다. 북한은 분명 모부투 집권 전후로 루뭄바를 옹호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1960년대 초 루뭄바를 옹호한 로동신문기사를 북한자료센터에서 읽은 적이 있다.

 

또한 북한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도 많이 궁금하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 사이에서 해적판으로 출판된 북한 자료인 조국통일전선에 실린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다. 해당 책에는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미국의 쿠데타로 전복된 이후 북한이 발표한 성명이 실려 있었다. 참고로 살바도르 아옌데는 1969년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했고, 김일성의 북한을 보고 무상의료에 감탄했다. 칠레와 북한의 관계도 분명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북한과 칠레의 관계는 짧은 기간이지만 분명 돈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가 집권한 뒤 북한은 어떻게 반응했고, 한국은 칠레를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문제의식과도 겹친다. 아옌데의 사례가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또한 북한과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의 관계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너무 짧게 다뤄진 점도 아쉽다. 이왕 다룰 것이라면 이 부분도 좀 더 자세히 다루었으면 좋겠다.

 

그 밖에도 북한이 남태평양의 작은 국가인 피지 같은 나라와 접촉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남북한이 외교 경쟁에서 수많은 나라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장에 따르면 1970년대 중후반 소련 외무부 극동 제1부 차장인 미하일 바스마노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계속해서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정책을 조율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며 소련 등 동구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168). 이는 북한의 자주외교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첫째, 북한이 독자성을 가졌다고 해서 사회주의 진영 자체와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둘째, 비슷한 시기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중 하나인 동독의 호네커 정부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부와 북한의 관계가 상당히 좋았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즉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연대와 갈등, 그 속에 존재하는 간극과 공통점, 차이점이 궁금할 따름이다.

 

5. 맺음말

 

오랜만에 재미있는 독서를 했다. 솔직히 쓰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분량상의 한계로 다 다루지는 못했다. 이 책은 북한을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나 종속국이 아니라 독자성을 가진 국가로 보았다는 점에서 기존 관점보다 진일보한 성격을 지닌다. 한국인들은 흔히 북한을 세계적으로 고립된 나라로 인식하지만, 벤자민 영의 책은 그러한 인식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역사학적으로 부각한다. 사료 활용도 독특하다. 대한민국의 외교 문서를 1차 사료로 활용해 북한 외교사를 재조명했다. 로동신문같은 북한의 1차 자료도 활용하지만, 해당 자료의 보도 내용을 깊이 추적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북한과 제3세계 외교라는 주제 자체가 너무 큰 것 같다. 한국 대학 역사학과에서 누군가 이런 주제로 석·박사학위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지도교수님이 거의 100%의 확률로 주제가 너무 넓고 시간적 범위도 너무 넓으니 반드시 줄여!”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학위논문으로 북한과 제3세계 자체를 다룬 것은 너무 광범위하지만, 그만큼 역사적으로 다양한 사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책 앞부분에는 한국어판 서문이 실려 있는데, “북한에서 새롭게 나타난 친러 성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통해 북한은 국제 무대에서 핵으로 무장한 독불장군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너무 미국 중심의 시각이 아닌가 싶다(9). 영의 미국인 정체성은 감사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동물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반려견도 감사의 말에 등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대목은 확실히 미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준다(353). 사족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두 대목은 벤자민 영의 미국인 정체성을 보여준 대목이다.

 

벤자민 영이 제시한 역사학적 근거와는 별개로 그의 시각에는 솔직히 의아한 부분이 많았지만, 이 책을 많은 이에게 추천하고 싶다. 책의 옮긴이인 옥창준 선생의 말대로 지금 이 시기에 북한 대외관계사를 쓸 때는 소련, 중국, 미국, 남한과의 관계망이 아니라 제3세계라는 측면이 반드시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363). 북한을 강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바라봐 왔기 때문이다. 벤자민 영의 책이 지닌 장점은 북한과 제3세계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북한이 강대국에 휘둘리는 국가가 아니었음을 역사학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많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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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NL계열 운동권 사이에서 북한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가 쓴 또 하나의 祖國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라는 책이다. 실제로 루이제 린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서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던 윤이상이라는 음악가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고, 민전이 전개한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에도 린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 그와 더불어 린저는 1980년부터 무려 1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북한의 지도자이던 김일성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나 또한 이 책을 어렵게 인터넷을 통해 구매했고, 완독은 아니어도 몇몇 부분을 조금씩 읽어봤다.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내용은 북한의 교화소 관련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유린으로 드는 소재 중 하나가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 관련한 내용이다. 이른바 미국이나 한국의 극우들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은 과거 솔제니친이 묘사한 스탈린 시절 소련의 굴라그나 빅터 프랭클이 묘사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곳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른바 서방 진영에서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박연미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다.

 

, 서구에서 그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보는 북한의 수용소에 대해 창 살 없는 교화소라고 책에 대놓고 묘사했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묘사는 미국이나 제1세계의 프로파간다라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인권유린을 묘사하는 내러티브가 과거 냉전시기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산디니스타가 통치하는 니카라과의 모습을 악마화할 때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친미국가들이 자행된 인권 유린들, 예를 들어 피노체트 하의 칠레의 강제 수용소 등은 항상 외면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주제를 다시 루이제 린저로 돌리자면, 그녀가 남긴 북한 관련 기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교화소 문제도 그렇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저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을 무려 10차례나 방문하여 자신이 본 것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이미지는 이른바 밝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독재국가다. 아래의 린저의 발언을 통해 보도록 하자.

 

저는 북한이 어두운 독재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김일성 주석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 모든 것을 감독하는, 그래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가장이자 어버이로 여겨집니다.”

 

,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분명 한 지도자가 영구적으로 통치하는 독재 국가이지만, 그녀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나 그런 체제를 이식받은 동유럽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린저가 보기에 북한은 서구 보다 가난하더라도 인민들이 어둡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녀는 북한에서 맛본 과일과 아채를 순수한 그대로의 맛, 기름지고 무해한 북한의 토양에서 우러나온 맛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북한의 공기게 맑다고 얘기했다. 린저는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도시들은 녹지대로 채워지고, 화학공장들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현대적인 정화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 린저는 북한 사회가 수질오염이나 대기오염이 서구보다 훨씬 덜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린저가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은 그녀가 서독의 진보정당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그녀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아무래도 1960년대 68운동의 흐름 속에서 린저는 친환경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린저가 주목한 밝은 독재라는 개념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린저가 북한에 대해 독재라고 분석한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이 있다. 하나는 개인숭배를 포함해서 북한의 모든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유교적 전통 때문이라고 봤다. , ‘어버이 김일성 수령이라는 식으로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존경하는 것을 전통적인 유교의 산물이라 본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이 평화를 원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협, , 미국 제국주의의 군사적 무력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린저는 분석했다. 미국은 핵무력을 포함한 온갖 군사적 무력으로 북한을 압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적인 자유가 제한받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두 가지 지점을 통해 린저는 북한체제가 개성이 용인되지 않은 독재국가라 봤다. 그러나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비록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강요, 구금, 추방이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또한, 린저는 권력자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국민에 대한 권력자의 불안이 만연하는 현상도 북한에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핸 린저는 북한의 교화소를 직접 방문했고, 거기서 담장, 감시탑, 가시철조망, 쇠창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린저는 이에 대해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사실 북한의 수용소는 교화소가 있고, 정치범 관리소가 따로 있다. 교화소는 주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의 폭력이 전혀 없다고 하면 빈말이겠으나, 북한의 방침 자체가 주로 교화 및 갱생에 맞춰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시설의 열악함이나 그 내부에서의 폭력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1세계가 묘사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와 같은 정치범 수용소식 묘사는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의 경우 실제로 교화소에 갔다 온 한 탈북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1990년대 교화소의 경우 구타와 같은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경우 1~2개월 교화소 생활을 하다가 탈북을 했는데, 글쓴이는 이 부분이 아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마져도 일각에서 떠드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허구라고 말했으니, 글쓴이는 신동혁이가 묘사한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거짓이라고 본다.

 

물론 이와 같은 증언과는 상충되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미국 시민 매튜 토드 밀러라는 사람은 20144월에 그 나라에 적대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6년의 노동형이 선고되어, 북한 교화소에서 212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이후 밀러는 뜻밖의 좋은 대우에 자신도 놀랐다고 얘기했으며, 감옥에서 자신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도록 허용했다고 증언하기 까지 했다. 또한 밀러는 북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자신의 공개 사과가 강요된 것이었다는 서방의 보도들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추정을 부인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진실했다고 말했다. 석방 전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밀러는 노동교화소에서의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부분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을 한다.”라면서, 구타나 폭행 같은 것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교화소 시설은 분명 다를 테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반북 내러티브만으로 북한의 처벌과 교화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교화소에 들어가 교화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1세계가 퍼뜨린 북한의 수용소 내러티브는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교화소의 실상이 어떻든 간에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모습은 독재국가이지만 법과 물리력에 의한 강제로 통제 및 검열하는 국가는 아니었다. ,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자기통제와 자기검열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한편으로는 부정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또는 자본주의 보다 나은 점이 있는 사회로 본 데에는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 시작된 68운동은 신세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서구 좌파들은 소련이나 동유럽 체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당시 체게바라나 호찌민 그리고 마오쩌둥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저 또한 그러한 인식 하에서 북한과 김일성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즉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한 린저의 인식과 사유는 긍정과 오류를 떠나 서구 지성사의 흐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루이제 린저의 동양 호기심과 밝은 독재국가 북한, 그리고 윤이상, 동방학지20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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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300~400만 명이나 되는 한반도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100~150만 명은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양민 학살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 비슷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로버트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다. 노엄 촘스키는 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 보다 3배 이상 기간이 더 길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나 일본에게 한 것 보다 파괴적이었다. 1950년 11월 8일 맥아더 사령부가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을 때, 대공 방어막이 전혀 없던 이곳엔 지옥이 펼쳐졌다. 그날 미군 B-29 폭격기 70대를 포함한 100대 이상의 항공기가 8만 5,000발의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총 3,017호에 달하는 신의주 공공건물 중 2,100호가 파괴됐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16개의 초등학교와 14개의 중등학교, 15개의 교회와 2개의 병원도 이날 폭격으로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당일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중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즉,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80%는 여성과 아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경험했던 참극의 역사였다. 놀랍게도 당시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전쟁 내내 지속됐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영토는 개전 초기의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그러나 1951년부터 전쟁이 다시 38선 인근에서의 전투로 전개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대규모 공습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북한은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12시간이 지날 때까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먼저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개로 미군의 폭격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면서 내세웠던 기준에 따라 보자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은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계기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사지가 불타고 찢기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반미교육을 강화한 데에는 전쟁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트라우마는 결과적으로 전후재건기 방공망 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대 당시 북한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소련의 S-25(장거리 지대공미사일)가 배치된 유일한 도시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최신식 지대공 무기들이 북한 전역에 배치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존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 공격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고조시켰다. 1958년 1월부터 미국은 남한에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 결과 대략 950개나 되는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됐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핵무력으로 파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의 무력이면 당시 북한과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 초중반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탄투는 대략 700개 정도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물려받아 북한의 위협을 정치 및 사회적으로 항상 내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현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시 북한이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를 가질만했다. 



실제로 미 합동참모본부는 “북한군을 상대로 대규모 핵 공습이 즉각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 영토 위로 감시 비행 활동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방위에 관한 상세하고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고, 이를 남한의 공군과도 공유했다. 1958년 1월 말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은 한반도 이남에 150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MGR-1 어네스트 존 로켓포 시스템, 280mm 대포와 203mm 핵 곡사포, ADM 핵지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3월에는 미국의 타격 전투기들이 자체 핵탄두를 장착했고,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MGM-18 라크로스와  MGM-19 서전트, M-28 데이비드 크로켓 활강포를 포함한 전술핵무기를 위한 발사 장치가 즉각 뒤를 이어 배치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핵미사일 배치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재래식 포 자산으로 방비가 삼엄한 미군 기지를 포격하는 것 말고는 잠재적 핵 공격에 대응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누가 봐도 한반도의 힘의 균형은 미국에게 압도적으로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미군 첩보기가 북한 영공을 비행했으며,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 10대 이상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됐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석방된 인질들을 데려왔다. 당시 미국의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범에 대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행위를 집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나온 북한방문기인 『분단을 뛰어넘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분단의 장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땀이 흘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서민의 혈세가 소비되었을까? 또 한편 저 분단의 공사를 함으로써 높은 분과 군 장성 그리고 청부업자들의 배를 얼마나 부르게 했을까.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2배나 되는 인구를 갖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 그리고 최신의 미제무기를 장비로 갖춘 국군, 그 뒤에 미 지상군 4만과 해공군의 지원, 핵탄두 700개, 그것을 갖고도 현대판 만리장성까지 쌓았다. 그리고도 계속 남침의 위협을 고창하면서 국민을 억압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주장은 1958년부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반공 정부의 프로파간다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군사적 불균형과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도발행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북한에서 나온 남조선혁명론과 1968년 김신조 사건은 과연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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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진실을 부정하는 분단Yuji세력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정치검찰파쑈독재정권은 허구한 날 ˝선제타격!˝만 외쳐대고 허상에 가까운 북한붕괴론을 맹신하여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있죠...
 

지난 2023년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 등 사헬 지역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반제국주의 쿠데타 및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에, 한국의 언론과 서구 언론에도 제법 보도가 됐다. 니제르의 쿠데타 지지 시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순히 러시아 깃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한 국기인 인공기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제법 놀랄 것이다. 저 아프리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인공기가 보였으니 말이다. 

(북한의 인공기와 이집트 국기)


사실 북한은 현재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부터 여러 국가들과의 교류를 쌓은 경험이 있으며,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던 국가에 지원을 한 역사가 있다. 대표적으로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지역이 그러한 무대였으며, 북한의 제3세계 연대 및 지원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초월했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인지지 표명을 넘어서 물적 인적 지원을 포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1960년 쿠바와 수교를 맺었으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 국제연대회의가 창설되자 이에 참가하여 미국 케네디 정부의 쿠바 해상봉쇄 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북한의 김일성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나세르는 이집트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국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베트남의 경우는 물적 인적 지원이 더욱 명확했다. 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에 이미 수교를 맺었으며, 1957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평양을 방문하면서부터 양국의 관계가 강화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김일성은 “만약 미 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무너진다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완전히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지지합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요청이 오면, 설사 우리 계획에 지장을 받더라도 요구에 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전직 북베트남 공군 소장이 밝힌 2007년 기록에 따르면,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북한 항공기 조종사 87명이 베트남에서 복무했으며, 그중 14명이 전사했고 미군 항공기 26대를 격추했다. 더 나아가 베트남의 군 소식통은 그 숫자를 96명의 항공기 조종사를 포함한 384명의 조선인민군 공군 요원이 복무했다고 밝혔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MIG-21기와 전투기 조종사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의 조종사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북한의 지원은 이집트에서도 있었다. 2021년 4.27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에 따르면, 북한과 이집트의 외교수립과 제4차 중동전쟁에서 군사고문단 및 공군 파견도 주목할만하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은 1970년대 초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처음으로 개입했으며, 그 후로 큰 폭으로 개입이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가 그 지역에서 첫 번째로 북한의 주요한 전략적 동반자였다. 사실 이집트는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반서방 정권이 들어섰고,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했으며, 1956년에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소유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작전회의를 진행하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군에 배치한 3연장 SA-6, 게인플(2K-12)과 1발짜리 SA-2, 가이드라인(뒤쪽) 지대공 미사일, 모두 당시엔 매우 위력적이었으며 지금도 이용되는 무기라고 한다.)


북한은 반서방 노선을 걷던 이집트와의 관계를 1960년대부터 개선하기 시작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전쟁에서 이집트가 서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개전 초기에 최소 3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이스라엘은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어렵자 북한은 이집트에게 5,000톤의 식량 원조를 제공했다. 나세르가 사망한 이후 이집트는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다. 사다트 또한, 정권 초기 나세르처럼 소련과 제3세계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의 지원도 받았다. 사다트는 집권 초기 이집트 영토에서 소련군을 내보낸다는 뜻밖의 칙령을 공표했는데, 놀랍게도 북한의 지원은 받았다. 이집트의 방위가 위태로워지고 훈련된 항공기 조종사가 부족해 곤란을 겪는 가운데, 북한 지도부가 조선인민군 분견대 파견을 포함한 지원을 제안했다. 이집트는 이 요구를 수락했고, 북한은 전투기 조종사를 포함하여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북한의 지원은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참모총장 사드 알 샤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의 원조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보고서를 남겼는데, 이후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북한의 MIG-21기, 1970년대부터 북한은 이 전투기를 이용했으며 지금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이 이집트를 방문 중이었고, 나는 해결책을 번뜩 떠올렸다. 3월 6일, 수에즈 전선 순시 차 북한 인민무력부 부상 장송 장군을 호위하는 동안, 혹시 그들이 비행 중대를 파견해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지, 그들의 조종사들이 실질적인 전투 훈련을 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당시 북한이 MIG-21기를 운항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논의를 거쳐 4월에, 나는 그 계획을 완결짓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향한 공식 방문길에 올랐다. 그 비범한 공화국에서 매혹적인 열흘 간의 일정을 보내면서, 흔히 제3세계로 불리는 작은 나라가 자체 자원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준 모범 사례가 내게 얼마나 고무적이었는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베이징에 잠시 들른 일이 그러했듯 그것은 이 회상록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다수 비행시간 2,000시간 이상으로 경험이 풍부한 북한 조종사들이 6월에 이집트에 도착했고, 7월부터는 실전에 참여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은 머지않아 통신을 감청했고, 8월 15일 북한인들의 주둔을 단언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지도부는 그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외국인 전력 보강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인들은 역사상 가장 소규모 병력이었을 것이다. 조종사 20명, 조종 장치 8대, 통역사 5인, 관리자 3인, 정치고문 1인, 각 1인의 의사와 요리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훨씬 더 컸다. 그들은 8월과 9월에 이스라엘군과 2~3차례 조우했고, 비슷한 횟수로 전쟁에서도 접전을 벌였다. 그들이 와준 것은 감동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함이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던 우리 지도부의 인색함에 대해 사과하고자 함이다.”


인용문에 나온 바와 같이, 북한이 보낸 인력은 조종사 20명과 통역사 5명, 관리자 3명, 정치고문 1명 그리고 각각 1명의 의사와 요리사였다. 또한, 앞서 인용한 인용문만이 북한에서 파견한 인력에 대해 고평가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방과 이스라엘의 보고서에도 “참전한 조선인민군 조종사들이 그들의 상대인 이집트인들보다 공중에서 훨씬 유능했다.”고 나온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MIG-21기 1대가 이스라엘 F-4E 팬텀기 2대를 대적해 여러 발의 미사일을 요령 있게 잘 피했고, 이스라엘 전투기가 결국 기지로 귀환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 요원들이 조종하는 미그기가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당시 사정상 성급한 훈련과 열악한 지휘 구조 탓에 이집트 지대공 미사일 담당 사병들이 걸핏하면 아군 비행기를 요격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전선 및 전황을 표시한 지도)


(한 유튜버가 만든 제4차 중동전쟁 관련 영상, 심지어 이스라엘이 사라질뻔했다고 표현했다.)


정리하자면, 제4차 중동전쟁에서 조선인민군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집트의 MIG-21기를 운항한 것이 조선인민군이었다. 반면에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직후 이스라엘군 내 조종사 부족 사태로 인해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를 운항한 것은 미군 항공병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미군의 최신 기종인 SR-71 전략 정찰 항공기들도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에 나섰으며, 전쟁의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파견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맞서는 공중전에서 유일한 비아랍인 전투원들이었고, 미국인들은 이스라엘의 공중전에서 유일한 외국인 조종사들이었다. 즉, 평양과 워싱턴이 각자 상대편에 맞서 중동의 한쪽 당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셈이다.

(김일성과 무바라크 대통령, 북한과 이집트의 관계는 1980년대에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전투병력이 미국 항공병들과 직접 격돌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북한의 이집트 지원은 제4차 중동전쟁 승리에 기여한 것은 분명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 공군은 6일전쟁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군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달성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반환했기에 이집트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후에도 이집트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은 이집트가 군사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특히 핵을 가진 이스라엘에 맞서 이집트 측 탄도 미사일의 성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80년대 이집트에는 친미 성향이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집권했는데, 무바라크는 수차에 걸친 평양 방문을 통해 양국 사이에 미사일 개발에 관한 협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결과 이집트의 탄도 미사일 전력은 거의 전부가 북한 측 장비로 이루어지게 됐다.


참고문헌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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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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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비록 새해에는 옆 나라의 쓰나미와 국내에서의 백색테러라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런 일 말고 많은 이들에게 기쁜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참이던 2020년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우연히 인터넷 상에서 오프라인으로 만나게 된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됐다. 지인은 나에게 이 책이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가 쓴 책이며, 북조선 초기 역사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사게 된 나는 몇 년 후 영문판으로 일부분만 읽어봤다. 예를 들어, 토지개혁이나, 선거 그리고 젠더 관련한 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일반적인 책들에서 찾기 힘든 내용이라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던 20238월 초 드디어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참으로 기뻤고, 따라서 인터넷을 통해 바로 책을 구매했다. 책을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요즘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독서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새해를 맞이하며 완독하니 상당히 기쁘다. 브루스 커밍스 선생이 가르치고 키운 수제자의 책을 이리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지(영어로 Suzy Kim)는 루트거스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북한사를 연구한 인물이며,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글쓴이는 평화운동 국제연대 차원에서 작년 여름에 미국에 갔다왔었다. 그때 워싱턴 D.C에서 접촉한 여성주의 성향의 평화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가 바로 Women Cross DMZ이며, 이 책의 저자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단체는 사실 국내 언론사에도 많이 실렸는데, 구글이나 네이버에 우먼 크로스 DMZ’ 혹은 위민 크로스 DMZ’로 검색하면 여러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미래한국같은 우익 언론사에선 종북단체 혹은 북한의 꼭두각시라 욕하며 혹평 일색이다. 이번에 읽은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2013년 그녀가 쓴 책인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북한사는 역사학 분야에 있어서 아직은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주제 및 분야이며, 또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자 주제다. 물론 우리가 이에 대해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국 그리고 미국 자신의 책임도 크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폐지되지 않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도 한몫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북한사는 자료의 접근이 많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북한사 연구의 경우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전까지는 비교적 연구가 축적됐다. 이는 소련 해체로 인한 냉전의 영향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측 문서고가 열리고, 한중수교가 성사되면서 중국 측 자료도 비교적 열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미국에서 북한사 연구를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미국 안에 있는 문서고를 통해 가능했다. 이와 같은 연구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1980년대에 완성된 커밍스의 연구는 미국 워싱턴 근처에 있는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노획문서를 통해 진행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진을 한 미군은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무수히 많은 문서를 확보하여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여기 담겨 있는 문서들 중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도 많다.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는 이들이 이 곳을 방문하는데,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그만큼 자료가 많이 있다.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전쟁 시기 북한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1945년부터 1950년 전쟁 이전까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진행되고 수행된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는 1946년 북한에서 실행된 토지개혁에 관한 것도 있고, 당시 여성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자술서를 비롯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현재는 남한 땅인 인제군이나 양양 그리고 속초 등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시기 강원도 지역의 모습을 담은 자료들도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많이 있다.

 

김수지의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은 과거 미국이 노획한 북한 측 1차 사료를 바탕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 나온 한국 사학계 측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수지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나타나는 인민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또한, 김수지는 2010년대부터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젠더의 문제도 북조선의 역사를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사실 젠더 부분에 대해선 많이 모르는 글쓴이 입장에선 책을 통해 많이 배우는 느낌이었다. 책에서 현재 대한민국 영토인 강원도 인제군에 집중한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김수지는 1945년 해방 이전 일제 하에서 여성의 문맹률이 90%였는데, 해방 이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실질적으로 나타난 문맹퇴치의 성과를 언급한다.

 

“1945년 당시 여성의 90%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문맹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큰 문제였다. 이 점에서 문맹 퇴치 운동은 여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했는데, 실제로 [문맹 퇴치] 학교의 학생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1948년 인제군 졸업생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3~4배가 더 많았다(<3.11>참조). 글을 읽지 못하는 인제군 주민들[대체로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 남녀]은 거의 모두 한글학교에 다녔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겨울철 농한기에 이루어지는] 4개월 과정이 끝난 후 치러진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62~163.

 

인용문을 보면 북조선에서 실행한 문맹퇴치운동이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고, 그 혜택을 여성들이 많이 보았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근거를 통해, 김수지는 북조선에서 진행된 혁명의 성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김수지가 북조선 혁명에서 나타난 여성상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내세우면서 정권 초기에 나타난 육아와 보육의 부재나, 일부 여성 지도자들이 북조선 정권 하에서 쓴 자서전 및 책에서 나타난 맥락 생략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북조선 혁명 하에서 진행된 여성 혁명의 성과들 또한 많이 보여줬다. 예를 들어,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의 가입 비율이나 조직화 등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19451118,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이하 '여맹으로 약칭)의 결성과 더불어 여성은 가장 먼저 조직된 단위 가운데 하나였다. 중앙집권화되기 전 마을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성 단체 역시 여맹의 우산 아래 모이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홑어진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1946510일 첫 번째 총회를 개최할 무렵 여맹은 12개 도시 89개군 616개 면에 지부를 두고 총 8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1946년 말까지 여맹 회원은 103만 명으로 확대되어 18~61(은퇴 연령) 성인 여성 인구의 3분의 1을 조직한 상태였다. 1947년 무렵 여맹의 회원 수는 150만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농민이 73퍼센트를 차지했다. 노동자는 5.3퍼센트 사무원은 1퍼센트 미만이었으며, 나머지 20퍼센트는 '기타로 분류되었는데 대부분 주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87.

 

여성 관련한 얘기들 중 글쓴이가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지점을 뽑자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여성의 기억이다. 흥미롭게도 남한에서 빨치산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것을 보람있게 생각했으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녀평등이었다.

 

여성들 역시 민족 해방 문제를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박선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가 없으면 여성 권리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더 이렇게 학대를 받고 이렇게 한단 말이야.” 민족 해방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해방 곧 여성해방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수많은 빨치산 여성들이 산에서 보냈던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던 시간으로 설명했다. 누군가의 아내 또는 딸이 아니라 남성 동지들과 동등하게 혁명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빨치산 시절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변숙현은 산에서 보냈던 삶에 대해 내 생애에서 젤로 보람 있게 산 시간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 큰 포부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으니까라고 말하며, “보람 있게살았다고 단언했다. 박선애도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없었어요. 왜냐면 너무 우리가 억압당하고 살았잖아. 긍께 이제야말로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맘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 우리도 여성이지만 인간으로 살 수 있다.”

 

두 여성의 감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는 해방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전통적인 가족(그것이 친정이든 시댁이든)과 연계된 그 어떤 의무나 책임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녀들은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해방공간을 경험했던 것이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346~348.

 

이와 같은 김수지의 여성 관련 서술들을 글쓴이에게 젠더적 관점에서 본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줬다. 이 부분에 대한 글쓴이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글쓴이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에서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적인 것 보다 긍정적인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 언급한 부분대로 일정부분에서의 한계나 미흡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절과 비교해보자면, 여성이 혁명과 일상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길이 보다 열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수지가 결론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이후 북조선에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며,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의무교육이 전적으로 무상화됐고, 마찬가지로 의료도 무상화됐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은 전체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며 그들의 부단히 높아 가는 물질적문화적 수요를 더욱 더 완전히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와 복지의 제공은 북한이 실제로 그걸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김수지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다. 일각에서는 남한의 부재한 친일청산 역사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오류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책의 5장인 자서전, 혁명의 내러티브파트를 보면,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였거나 부유층으로서 소극적 혹은 적극적 친일에 가담한 이가 어떻게 해방 후 혁명 속에서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표현하는지가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학교에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칭송했던 한 인물의 경우, 혁명 정권이 들어선 뒤 쓴 자서전에서 이를 부끄럽게 간주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으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북한 사회가 친일한 이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사회적으로 반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의 경우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이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그러나 이런 기만적인 사실을 이해 못하고 그 교육 이념과 그 정책을 옳다고 인정한 나의 친일적인 사상을 해방된 오늘에 반성하여 볼 때, 너무나 양심의 가책과 무익한 인간 생활을 한 것이 원통하다고 뉘우친 것처럼, 해방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의 죄책감을 표현하면서 리원갑은 해방 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전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1945815일 우리 조국과 민족의 해방의 날이 우리 조국을 찾아왔다. 소련 군대의 영웅적 투쟁으로우리 민족은 일제의 기반에서 해방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는 소련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못가지고, 우리 북조선에 진주한 후에도 적극적으로 이 소련 군대에 대한 친절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물론, 로어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 큰 원인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지방 인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나의 모교인 동상인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 일제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인제야 나의 과거의 과오와 이제부터의 나갈 방향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조선 민족의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하여 힘써 나갈 것을 교육했다. 이 동안에 상부에서의 지시, 각종 회의, 북조선에서 발간하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나갈 길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465월부터 19471월 사이 평안북도 교육국의 추천으로 그에게 북조선로어학교에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매달 500원의 장학금을 비롯해 모든 필수품과 기본 용품을 제공받았다 일제가 주도한 식민지 근대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해 왔던 사람들에게 해방 후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했을 것이기에, 이 같은 상황은 확실히 그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55~256.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무엇보다 1946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에 있다.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혁명정부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하 토지개혁법)’194635일 공표했다. 이 법령에서는 일본 정부 일본 국민과 기관 그리고 일본인에 협력한 조선인 반역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5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됐으며, 지주들이 계속해서 소작을 주고 있던 토지는 면적과 상관없이 몰수됐다.

 

토지개혁으로 전체 105만 정보가 몰수되었고 25일 만에 98만 정보가 모두 71만 농민 가구에 무상으로 재분배되었다. 토지개혁은 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렸으며, 지주들 가운데 대다수는 일제 부역자로 규탄받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규탄 받으며 토지가 몰수된 반면에, 북조선 전체 농민 가구의 70%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 1946년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토지가 없는 다수의 농민과 빈농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일제 식민지 시기 친일을 했던 지주들은 쓴 약을 삼켜야만 했다. 일제 시대 당시 지주였던 한 사람이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 것을 보도록 하자.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는 우리의 토지를 모두 하룻밤에 빼앗아 소작농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토지개혁 제1조라고 불렀다. 토지는 인민들의 것이 되어야만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토지를 잃었다. 그들은 우리를 집에 머물게하고, 우리 집과교회 사이에 있는세 개의 논을 남겨 놓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논 내가 거머리 밭이라고 부르던 에 발을 담갔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34~135.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자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토지개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 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 하에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분명히 대조된다. 따라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전혀 하지 않은 집단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던 이남 정부다. 앞서 인용 및 언급한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 또한 김수지가 쓴 책을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그 진싱을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당한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외에도 김수지의 책들은 북한의 선거 제도와 인민위원회 및 각종 단체들의 결성과 과거 일제시기 억압받던 계층들의 참여를 통해, 혁명 하에서 나타난 북조선의 일상들을 보여줬다. 그런 점도 상당히 좋았다. 과거, 억압과 외압으로만 봐왔던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부분을 일상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수지의 말대로 북조선 혁명은 그 자체로 20세기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중 선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시행된 급진적 토지개혁을 통해 전례 없이 많은 농민들이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 만큼 매우 폭넓은 대중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매우 급진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은 인민들의 참여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북조선 혁명에서 주체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인민들이었고, 정권 초기 이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혁명적 일상에 반체제적 감정을 품었다는 근거는 없다. 일부 지주 및 기독교 계층의 반발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것을 일반 민중들의 심각한 불만으로 등치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런 편견에 대한 반박과 교정작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며, 특히 북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적극 추천하는 역작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소련에 대한 얘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책은 북한 사람들이 당시 소련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한 얘기가 많지 않다. 물론 일반 민중들이 인민민주주의 정권에서 교육받는 커리큘럼을 통해, 이들이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배웠다는 점을 알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들이 어떻게 소련을 인식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아무래도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글쓴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김수지의 경우 당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고, 또 환영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 고 있다. 이 부분은 보충적으로 찾아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지는 북한에 대한 편견에 대해 얘기하겠다. 사실 아직까지도 전 사회적 영역에서 북한을 보는 시선은 큰 틀에서 보자면, 왜곡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의 자본가인 일론 머스크가 한반도의 위성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일론 머스크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남한은 불빛이 많이 있고, 북한은 평양이나 일부 지방도시들 빼고는 어둡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과 주장들은 역사학자인 김수지가 자주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진의 경우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이다. 거기다 김수지에 따르면, 북조선은 한국이나 일본보다 야간 조도가 낮은 유일한 국가가 아니며,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미국과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 , 이 점에서 프로파간다와 서구식 발전주의의 프레임이 사회에 편향 및 선전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북한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수지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아래 김수지가 책에 쓴 내용을 언급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의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이남은 그 주변 지역과 함께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반면, 이북 지역은 수도인 평양을 제외하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이 사진은 20021223일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뉴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이후 북조선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밤에 찍은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남쪽이 빛과 에너지 그리고 활력과 경제 호황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반도 북쪽은 그저 어둡기만 합니다.” 뒤이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비극입니다.” 분명 북조선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된 위성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 기술의 산물인 위성사진은 지구궤도에서 다각도로 촬영한(정확하게 말하자면, 236개 궤도에서 촬영한) 다중 이미지를 합성해 화재나 번개 같은 이상 현상을 보정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거쳐 완성된다. , 럼스펠드의 말처럼 위성사진은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모습이 아닐뿐더러 그 사진 자체가 원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으로 약칭]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 역시 북조선에 대한 어떤 일정한 전제들에 맞춰 사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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