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NL계열 운동권 사이에서 북한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가 쓴 또 하나의 祖國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라는 책이다. 실제로 루이제 린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서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던 윤이상이라는 음악가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고, 민전이 전개한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에도 린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 그와 더불어 린저는 1980년부터 무려 1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북한의 지도자이던 김일성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나 또한 이 책을 어렵게 인터넷을 통해 구매했고, 완독은 아니어도 몇몇 부분을 조금씩 읽어봤다.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내용은 북한의 교화소 관련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유린으로 드는 소재 중 하나가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 관련한 내용이다. 이른바 미국이나 한국의 극우들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은 과거 솔제니친이 묘사한 스탈린 시절 소련의 굴라그나 빅터 프랭클이 묘사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곳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른바 서방 진영에서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박연미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다.

 

, 서구에서 그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보는 북한의 수용소에 대해 창 살 없는 교화소라고 책에 대놓고 묘사했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묘사는 미국이나 제1세계의 프로파간다라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인권유린을 묘사하는 내러티브가 과거 냉전시기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산디니스타가 통치하는 니카라과의 모습을 악마화할 때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친미국가들이 자행된 인권 유린들, 예를 들어 피노체트 하의 칠레의 강제 수용소 등은 항상 외면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주제를 다시 루이제 린저로 돌리자면, 그녀가 남긴 북한 관련 기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교화소 문제도 그렇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저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을 무려 10차례나 방문하여 자신이 본 것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이미지는 이른바 밝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독재국가다. 아래의 린저의 발언을 통해 보도록 하자.

 

저는 북한이 어두운 독재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김일성 주석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 모든 것을 감독하는, 그래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가장이자 어버이로 여겨집니다.”

 

,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분명 한 지도자가 영구적으로 통치하는 독재 국가이지만, 그녀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나 그런 체제를 이식받은 동유럽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린저가 보기에 북한은 서구 보다 가난하더라도 인민들이 어둡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녀는 북한에서 맛본 과일과 아채를 순수한 그대로의 맛, 기름지고 무해한 북한의 토양에서 우러나온 맛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북한의 공기게 맑다고 얘기했다. 린저는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도시들은 녹지대로 채워지고, 화학공장들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현대적인 정화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 린저는 북한 사회가 수질오염이나 대기오염이 서구보다 훨씬 덜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린저가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은 그녀가 서독의 진보정당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그녀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아무래도 1960년대 68운동의 흐름 속에서 린저는 친환경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린저가 주목한 밝은 독재라는 개념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린저가 북한에 대해 독재라고 분석한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이 있다. 하나는 개인숭배를 포함해서 북한의 모든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유교적 전통 때문이라고 봤다. , ‘어버이 김일성 수령이라는 식으로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존경하는 것을 전통적인 유교의 산물이라 본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이 평화를 원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협, , 미국 제국주의의 군사적 무력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린저는 분석했다. 미국은 핵무력을 포함한 온갖 군사적 무력으로 북한을 압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적인 자유가 제한받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두 가지 지점을 통해 린저는 북한체제가 개성이 용인되지 않은 독재국가라 봤다. 그러나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비록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강요, 구금, 추방이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또한, 린저는 권력자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국민에 대한 권력자의 불안이 만연하는 현상도 북한에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핸 린저는 북한의 교화소를 직접 방문했고, 거기서 담장, 감시탑, 가시철조망, 쇠창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린저는 이에 대해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사실 북한의 수용소는 교화소가 있고, 정치범 관리소가 따로 있다. 교화소는 주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의 폭력이 전혀 없다고 하면 빈말이겠으나, 북한의 방침 자체가 주로 교화 및 갱생에 맞춰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시설의 열악함이나 그 내부에서의 폭력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1세계가 묘사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와 같은 정치범 수용소식 묘사는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의 경우 실제로 교화소에 갔다 온 한 탈북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1990년대 교화소의 경우 구타와 같은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경우 1~2개월 교화소 생활을 하다가 탈북을 했는데, 글쓴이는 이 부분이 아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마져도 일각에서 떠드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허구라고 말했으니, 글쓴이는 신동혁이가 묘사한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거짓이라고 본다.

 

물론 이와 같은 증언과는 상충되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미국 시민 매튜 토드 밀러라는 사람은 20144월에 그 나라에 적대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6년의 노동형이 선고되어, 북한 교화소에서 212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이후 밀러는 뜻밖의 좋은 대우에 자신도 놀랐다고 얘기했으며, 감옥에서 자신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도록 허용했다고 증언하기 까지 했다. 또한 밀러는 북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자신의 공개 사과가 강요된 것이었다는 서방의 보도들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추정을 부인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진실했다고 말했다. 석방 전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밀러는 노동교화소에서의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부분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을 한다.”라면서, 구타나 폭행 같은 것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교화소 시설은 분명 다를 테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반북 내러티브만으로 북한의 처벌과 교화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교화소에 들어가 교화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1세계가 퍼뜨린 북한의 수용소 내러티브는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교화소의 실상이 어떻든 간에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모습은 독재국가이지만 법과 물리력에 의한 강제로 통제 및 검열하는 국가는 아니었다. ,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자기통제와 자기검열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한편으로는 부정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또는 자본주의 보다 나은 점이 있는 사회로 본 데에는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 시작된 68운동은 신세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서구 좌파들은 소련이나 동유럽 체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당시 체게바라나 호찌민 그리고 마오쩌둥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저 또한 그러한 인식 하에서 북한과 김일성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즉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한 린저의 인식과 사유는 긍정과 오류를 떠나 서구 지성사의 흐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루이제 린저의 동양 호기심과 밝은 독재국가 북한, 그리고 윤이상, 동방학지20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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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300~400만 명이나 되는 한반도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100~150만 명은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양민 학살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 비슷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로버트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다. 노엄 촘스키는 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 보다 3배 이상 기간이 더 길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나 일본에게 한 것 보다 파괴적이었다. 1950년 11월 8일 맥아더 사령부가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을 때, 대공 방어막이 전혀 없던 이곳엔 지옥이 펼쳐졌다. 그날 미군 B-29 폭격기 70대를 포함한 100대 이상의 항공기가 8만 5,000발의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총 3,017호에 달하는 신의주 공공건물 중 2,100호가 파괴됐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16개의 초등학교와 14개의 중등학교, 15개의 교회와 2개의 병원도 이날 폭격으로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당일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중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즉,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80%는 여성과 아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경험했던 참극의 역사였다. 놀랍게도 당시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전쟁 내내 지속됐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영토는 개전 초기의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그러나 1951년부터 전쟁이 다시 38선 인근에서의 전투로 전개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대규모 공습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북한은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12시간이 지날 때까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먼저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개로 미군의 폭격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면서 내세웠던 기준에 따라 보자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은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계기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사지가 불타고 찢기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반미교육을 강화한 데에는 전쟁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트라우마는 결과적으로 전후재건기 방공망 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대 당시 북한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소련의 S-25(장거리 지대공미사일)가 배치된 유일한 도시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최신식 지대공 무기들이 북한 전역에 배치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존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 공격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고조시켰다. 1958년 1월부터 미국은 남한에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 결과 대략 950개나 되는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됐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핵무력으로 파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의 무력이면 당시 북한과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 초중반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탄투는 대략 700개 정도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물려받아 북한의 위협을 정치 및 사회적으로 항상 내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현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시 북한이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를 가질만했다. 



실제로 미 합동참모본부는 “북한군을 상대로 대규모 핵 공습이 즉각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 영토 위로 감시 비행 활동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방위에 관한 상세하고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고, 이를 남한의 공군과도 공유했다. 1958년 1월 말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은 한반도 이남에 150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MGR-1 어네스트 존 로켓포 시스템, 280mm 대포와 203mm 핵 곡사포, ADM 핵지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3월에는 미국의 타격 전투기들이 자체 핵탄두를 장착했고,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MGM-18 라크로스와  MGM-19 서전트, M-28 데이비드 크로켓 활강포를 포함한 전술핵무기를 위한 발사 장치가 즉각 뒤를 이어 배치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핵미사일 배치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재래식 포 자산으로 방비가 삼엄한 미군 기지를 포격하는 것 말고는 잠재적 핵 공격에 대응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누가 봐도 한반도의 힘의 균형은 미국에게 압도적으로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미군 첩보기가 북한 영공을 비행했으며,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 10대 이상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됐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석방된 인질들을 데려왔다. 당시 미국의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범에 대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행위를 집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나온 북한방문기인 『분단을 뛰어넘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분단의 장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땀이 흘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서민의 혈세가 소비되었을까? 또 한편 저 분단의 공사를 함으로써 높은 분과 군 장성 그리고 청부업자들의 배를 얼마나 부르게 했을까.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2배나 되는 인구를 갖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 그리고 최신의 미제무기를 장비로 갖춘 국군, 그 뒤에 미 지상군 4만과 해공군의 지원, 핵탄두 700개, 그것을 갖고도 현대판 만리장성까지 쌓았다. 그리고도 계속 남침의 위협을 고창하면서 국민을 억압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주장은 1958년부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반공 정부의 프로파간다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군사적 불균형과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도발행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북한에서 나온 남조선혁명론과 1968년 김신조 사건은 과연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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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진실을 부정하는 분단Yuji세력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정치검찰파쑈독재정권은 허구한 날 ˝선제타격!˝만 외쳐대고 허상에 가까운 북한붕괴론을 맹신하여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있죠...
 

지난 2023년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 등 사헬 지역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반제국주의 쿠데타 및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에, 한국의 언론과 서구 언론에도 제법 보도가 됐다. 니제르의 쿠데타 지지 시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순히 러시아 깃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한 국기인 인공기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제법 놀랄 것이다. 저 아프리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인공기가 보였으니 말이다. 

(북한의 인공기와 이집트 국기)


사실 북한은 현재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부터 여러 국가들과의 교류를 쌓은 경험이 있으며,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던 국가에 지원을 한 역사가 있다. 대표적으로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지역이 그러한 무대였으며, 북한의 제3세계 연대 및 지원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초월했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인지지 표명을 넘어서 물적 인적 지원을 포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1960년 쿠바와 수교를 맺었으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 국제연대회의가 창설되자 이에 참가하여 미국 케네디 정부의 쿠바 해상봉쇄 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북한의 김일성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나세르는 이집트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국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베트남의 경우는 물적 인적 지원이 더욱 명확했다. 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에 이미 수교를 맺었으며, 1957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평양을 방문하면서부터 양국의 관계가 강화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김일성은 “만약 미 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무너진다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완전히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을 지지합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요청이 오면, 설사 우리 계획에 지장을 받더라도 요구에 응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전직 북베트남 공군 소장이 밝힌 2007년 기록에 따르면,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북한 항공기 조종사 87명이 베트남에서 복무했으며, 그중 14명이 전사했고 미군 항공기 26대를 격추했다. 더 나아가 베트남의 군 소식통은 그 숫자를 96명의 항공기 조종사를 포함한 384명의 조선인민군 공군 요원이 복무했다고 밝혔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MIG-21기와 전투기 조종사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의 조종사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북한의 지원은 이집트에서도 있었다. 2021년 4.27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에 따르면, 북한과 이집트의 외교수립과 제4차 중동전쟁에서 군사고문단 및 공군 파견도 주목할만하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은 1970년대 초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 처음으로 개입했으며, 그 후로 큰 폭으로 개입이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가 그 지역에서 첫 번째로 북한의 주요한 전략적 동반자였다. 사실 이집트는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반서방 정권이 들어섰고,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했으며, 1956년에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소유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작전회의를 진행하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군에 배치한 3연장 SA-6, 게인플(2K-12)과 1발짜리 SA-2, 가이드라인(뒤쪽) 지대공 미사일, 모두 당시엔 매우 위력적이었으며 지금도 이용되는 무기라고 한다.)


북한은 반서방 노선을 걷던 이집트와의 관계를 1960년대부터 개선하기 시작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전쟁에서 이집트가 서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군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개전 초기에 최소 3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이스라엘은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어렵자 북한은 이집트에게 5,000톤의 식량 원조를 제공했다. 나세르가 사망한 이후 이집트는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다. 사다트 또한, 정권 초기 나세르처럼 소련과 제3세계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의 지원도 받았다. 사다트는 집권 초기 이집트 영토에서 소련군을 내보낸다는 뜻밖의 칙령을 공표했는데, 놀랍게도 북한의 지원은 받았다. 이집트의 방위가 위태로워지고 훈련된 항공기 조종사가 부족해 곤란을 겪는 가운데, 북한 지도부가 조선인민군 분견대 파견을 포함한 지원을 제안했다. 이집트는 이 요구를 수락했고, 북한은 전투기 조종사를 포함하여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북한의 지원은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참모총장 사드 알 샤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의 원조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보고서를 남겼는데, 이후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북한의 MIG-21기, 1970년대부터 북한은 이 전투기를 이용했으며 지금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이 이집트를 방문 중이었고, 나는 해결책을 번뜩 떠올렸다. 3월 6일, 수에즈 전선 순시 차 북한 인민무력부 부상 장송 장군을 호위하는 동안, 혹시 그들이 비행 중대를 파견해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지, 그들의 조종사들이 실질적인 전투 훈련을 시킬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당시 북한이 MIG-21기를 운항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논의를 거쳐 4월에, 나는 그 계획을 완결짓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향한 공식 방문길에 올랐다. 그 비범한 공화국에서 매혹적인 열흘 간의 일정을 보내면서, 흔히 제3세계로 불리는 작은 나라가 자체 자원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준 모범 사례가 내게 얼마나 고무적이었는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베이징에 잠시 들른 일이 그러했듯 그것은 이 회상록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다수 비행시간 2,000시간 이상으로 경험이 풍부한 북한 조종사들이 6월에 이집트에 도착했고, 7월부터는 실전에 참여했다. 당연히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은 머지않아 통신을 감청했고, 8월 15일 북한인들의 주둔을 단언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지도부는 그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외국인 전력 보강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인들은 역사상 가장 소규모 병력이었을 것이다. 조종사 20명, 조종 장치 8대, 통역사 5인, 관리자 3인, 정치고문 1인, 각 1인의 의사와 요리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훨씬 더 컸다. 그들은 8월과 9월에 이스라엘군과 2~3차례 조우했고, 비슷한 횟수로 전쟁에서도 접전을 벌였다. 그들이 와준 것은 감동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함이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던 우리 지도부의 인색함에 대해 사과하고자 함이다.”


인용문에 나온 바와 같이, 북한이 보낸 인력은 조종사 20명과 통역사 5명, 관리자 3명, 정치고문 1명 그리고 각각 1명의 의사와 요리사였다. 또한, 앞서 인용한 인용문만이 북한에서 파견한 인력에 대해 고평가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방과 이스라엘의 보고서에도 “참전한 조선인민군 조종사들이 그들의 상대인 이집트인들보다 공중에서 훨씬 유능했다.”고 나온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MIG-21기 1대가 이스라엘 F-4E 팬텀기 2대를 대적해 여러 발의 미사일을 요령 있게 잘 피했고, 이스라엘 전투기가 결국 기지로 귀환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 요원들이 조종하는 미그기가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당시 사정상 성급한 훈련과 열악한 지휘 구조 탓에 이집트 지대공 미사일 담당 사병들이 걸핏하면 아군 비행기를 요격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전선 및 전황을 표시한 지도)


(한 유튜버가 만든 제4차 중동전쟁 관련 영상, 심지어 이스라엘이 사라질뻔했다고 표현했다.)


정리하자면, 제4차 중동전쟁에서 조선인민군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집트의 MIG-21기를 운항한 것이 조선인민군이었다. 반면에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직후 이스라엘군 내 조종사 부족 사태로 인해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를 운항한 것은 미군 항공병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미군의 최신 기종인 SR-71 전략 정찰 항공기들도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에 나섰으며, 전쟁의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파견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맞서는 공중전에서 유일한 비아랍인 전투원들이었고, 미국인들은 이스라엘의 공중전에서 유일한 외국인 조종사들이었다. 즉, 평양과 워싱턴이 각자 상대편에 맞서 중동의 한쪽 당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셈이다.

(김일성과 무바라크 대통령, 북한과 이집트의 관계는 1980년대에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전투병력이 미국 항공병들과 직접 격돌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북한의 이집트 지원은 제4차 중동전쟁 승리에 기여한 것은 분명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 공군은 6일전쟁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군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달성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반환했기에 이집트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후에도 이집트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받았으며, 북한은 이집트가 군사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특히 핵을 가진 이스라엘에 맞서 이집트 측 탄도 미사일의 성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80년대 이집트에는 친미 성향이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집권했는데, 무바라크는 수차에 걸친 평양 방문을 통해 양국 사이에 미사일 개발에 관한 협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 결과 이집트의 탄도 미사일 전력은 거의 전부가 북한 측 장비로 이루어지게 됐다.


참고문헌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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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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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비록 새해에는 옆 나라의 쓰나미와 국내에서의 백색테러라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런 일 말고 많은 이들에게 기쁜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참이던 2020년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우연히 인터넷 상에서 오프라인으로 만나게 된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됐다. 지인은 나에게 이 책이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가 쓴 책이며, 북조선 초기 역사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사게 된 나는 몇 년 후 영문판으로 일부분만 읽어봤다. 예를 들어, 토지개혁이나, 선거 그리고 젠더 관련한 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일반적인 책들에서 찾기 힘든 내용이라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러던 20238월 초 드디어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참으로 기뻤고, 따라서 인터넷을 통해 바로 책을 구매했다. 책을 읽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요즘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독서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새해를 맞이하며 완독하니 상당히 기쁘다. 브루스 커밍스 선생이 가르치고 키운 수제자의 책을 이리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지(영어로 Suzy Kim)는 루트거스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북한사를 연구한 인물이며,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글쓴이는 평화운동 국제연대 차원에서 작년 여름에 미국에 갔다왔었다. 그때 워싱턴 D.C에서 접촉한 여성주의 성향의 평화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가 바로 Women Cross DMZ이며, 이 책의 저자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단체는 사실 국내 언론사에도 많이 실렸는데, 구글이나 네이버에 우먼 크로스 DMZ’ 혹은 위민 크로스 DMZ’로 검색하면 여러 기사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미래한국같은 우익 언론사에선 종북단체 혹은 북한의 꼭두각시라 욕하며 혹평 일색이다. 이번에 읽은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2013년 그녀가 쓴 책인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북한사는 역사학 분야에 있어서 아직은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주제 및 분야이며, 또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자 주제다. 물론 우리가 이에 대해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국 그리고 미국 자신의 책임도 크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폐지되지 않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도 한몫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북한사는 자료의 접근이 많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북한사 연구의 경우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전까지는 비교적 연구가 축적됐다. 이는 소련 해체로 인한 냉전의 영향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측 문서고가 열리고, 한중수교가 성사되면서 중국 측 자료도 비교적 열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미국에서 북한사 연구를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미국 안에 있는 문서고를 통해 가능했다. 이와 같은 연구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1980년대에 완성된 커밍스의 연구는 미국 워싱턴 근처에 있는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노획문서를 통해 진행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진을 한 미군은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무수히 많은 문서를 확보하여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여기 담겨 있는 문서들 중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도 많다.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는 이들이 이 곳을 방문하는데,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그만큼 자료가 많이 있다.

 

NARA국립문서보관소에는 전쟁 시기 북한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1945년부터 1950년 전쟁 이전까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진행되고 수행된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는 1946년 북한에서 실행된 토지개혁에 관한 것도 있고, 당시 여성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자술서를 비롯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현재는 남한 땅인 인제군이나 양양 그리고 속초 등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시기 강원도 지역의 모습을 담은 자료들도 NARA국립문서보관소에 많이 있다.

 

김수지의 책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은 과거 미국이 노획한 북한 측 1차 사료를 바탕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 나온 한국 사학계 측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수지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나타나는 인민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또한, 김수지는 2010년대부터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젠더의 문제도 북조선의 역사를 통해 접근하고자 했다. 사실 젠더 부분에 대해선 많이 모르는 글쓴이 입장에선 책을 통해 많이 배우는 느낌이었다. 책에서 현재 대한민국 영토인 강원도 인제군에 집중한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김수지는 1945년 해방 이전 일제 하에서 여성의 문맹률이 90%였는데, 해방 이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실질적으로 나타난 문맹퇴치의 성과를 언급한다.

 

“1945년 당시 여성의 90%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문맹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큰 문제였다. 이 점에서 문맹 퇴치 운동은 여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했는데, 실제로 [문맹 퇴치] 학교의 학생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1948년 인제군 졸업생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3~4배가 더 많았다(<3.11>참조). 글을 읽지 못하는 인제군 주민들[대체로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 남녀]은 거의 모두 한글학교에 다녔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겨울철 농한기에 이루어지는] 4개월 과정이 끝난 후 치러진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62~163.

 

인용문을 보면 북조선에서 실행한 문맹퇴치운동이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고, 그 혜택을 여성들이 많이 보았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근거를 통해, 김수지는 북조선에서 진행된 혁명의 성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김수지가 북조선 혁명에서 나타난 여성상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내세우면서 정권 초기에 나타난 육아와 보육의 부재나, 일부 여성 지도자들이 북조선 정권 하에서 쓴 자서전 및 책에서 나타난 맥락 생략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북조선 혁명 하에서 진행된 여성 혁명의 성과들 또한 많이 보여줬다. 예를 들어,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의 가입 비율이나 조직화 등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19451118,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이하 '여맹으로 약칭)의 결성과 더불어 여성은 가장 먼저 조직된 단위 가운데 하나였다. 중앙집권화되기 전 마을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성 단체 역시 여맹의 우산 아래 모이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홑어진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1946510일 첫 번째 총회를 개최할 무렵 여맹은 12개 도시 89개군 616개 면에 지부를 두고 총 8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1946년 말까지 여맹 회원은 103만 명으로 확대되어 18~61(은퇴 연령) 성인 여성 인구의 3분의 1을 조직한 상태였다. 1947년 무렵 여맹의 회원 수는 150만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농민이 73퍼센트를 차지했다. 노동자는 5.3퍼센트 사무원은 1퍼센트 미만이었으며, 나머지 20퍼센트는 '기타로 분류되었는데 대부분 주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87.

 

여성 관련한 얘기들 중 글쓴이가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지점을 뽑자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여성의 기억이다. 흥미롭게도 남한에서 빨치산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이 빨치산 운동에 참가한 것을 보람있게 생각했으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녀평등이었다.

 

여성들 역시 민족 해방 문제를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박선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가 없으면 여성 권리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더 이렇게 학대를 받고 이렇게 한단 말이야.” 민족 해방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해방 곧 여성해방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수많은 빨치산 여성들이 산에서 보냈던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던 시간으로 설명했다. 누군가의 아내 또는 딸이 아니라 남성 동지들과 동등하게 혁명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빨치산 시절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변숙현은 산에서 보냈던 삶에 대해 내 생애에서 젤로 보람 있게 산 시간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 큰 포부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으니까라고 말하며, “보람 있게살았다고 단언했다. 박선애도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없었어요. 왜냐면 너무 우리가 억압당하고 살았잖아. 긍께 이제야말로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맘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 우리도 여성이지만 인간으로 살 수 있다.”

 

두 여성의 감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다.”는 해방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는 전통적인 가족(그것이 친정이든 시댁이든)과 연계된 그 어떤 의무나 책임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녀들은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해방공간을 경험했던 것이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346~348.

 

이와 같은 김수지의 여성 관련 서술들을 글쓴이에게 젠더적 관점에서 본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줬다. 이 부분에 대한 글쓴이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글쓴이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에서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적인 것 보다 긍정적인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에서 언급한 부분대로 일정부분에서의 한계나 미흡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절과 비교해보자면, 여성이 혁명과 일상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길이 보다 열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수지가 결론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이후 북조선에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며,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의무교육이 전적으로 무상화됐고, 마찬가지로 의료도 무상화됐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은 전체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며 그들의 부단히 높아 가는 물질적문화적 수요를 더욱 더 완전히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와 복지의 제공은 북한이 실제로 그걸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김수지의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다. 일각에서는 남한의 부재한 친일청산 역사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오류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책의 5장인 자서전, 혁명의 내러티브파트를 보면,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였거나 부유층으로서 소극적 혹은 적극적 친일에 가담한 이가 어떻게 해방 후 혁명 속에서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표현하는지가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학교에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칭송했던 한 인물의 경우, 혁명 정권이 들어선 뒤 쓴 자서전에서 이를 부끄럽게 간주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으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북한 사회가 친일한 이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사회적으로 반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의 경우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이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그러나 이런 기만적인 사실을 이해 못하고 그 교육 이념과 그 정책을 옳다고 인정한 나의 친일적인 사상을 해방된 오늘에 반성하여 볼 때, 너무나 양심의 가책과 무익한 인간 생활을 한 것이 원통하다고 뉘우친 것처럼, 해방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의 죄책감을 표현하면서 리원갑은 해방 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전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1945815일 우리 조국과 민족의 해방의 날이 우리 조국을 찾아왔다. 소련 군대의 영웅적 투쟁으로우리 민족은 일제의 기반에서 해방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는 소련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못가지고, 우리 북조선에 진주한 후에도 적극적으로 이 소련 군대에 대한 친절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물론, 로어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 큰 원인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지방 인민들의 요청으로 다시 나의 모교인 동상인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 일제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인제야 나의 과거의 과오와 이제부터의 나갈 방향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조선 민족의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하여 힘써 나갈 것을 교육했다. 이 동안에 상부에서의 지시, 각종 회의, 북조선에서 발간하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나갈 길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465월부터 19471월 사이 평안북도 교육국의 추천으로 그에게 북조선로어학교에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매달 500원의 장학금을 비롯해 모든 필수품과 기본 용품을 제공받았다 일제가 주도한 식민지 근대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해 왔던 사람들에게 해방 후의 상황은 훨씬 더 열악했을 것이기에, 이 같은 상황은 확실히 그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55~256.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무엇보다 1946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에 있다.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혁명정부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하 토지개혁법)’194635일 공표했다. 이 법령에서는 일본 정부 일본 국민과 기관 그리고 일본인에 협력한 조선인 반역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5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됐으며, 지주들이 계속해서 소작을 주고 있던 토지는 면적과 상관없이 몰수됐다.

 

토지개혁으로 전체 105만 정보가 몰수되었고 25일 만에 98만 정보가 모두 71만 농민 가구에 무상으로 재분배되었다. 토지개혁은 지주의 권력을 무너뜨렸으며, 지주들 가운데 대다수는 일제 부역자로 규탄받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규탄 받으며 토지가 몰수된 반면에, 북조선 전체 농민 가구의 70%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 1946년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토지가 없는 다수의 농민과 빈농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일제 식민지 시기 친일을 했던 지주들은 쓴 약을 삼켜야만 했다. 일제 시대 당시 지주였던 한 사람이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 것을 보도록 하자.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는 우리의 토지를 모두 하룻밤에 빼앗아 소작농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토지개혁 제1조라고 불렀다. 토지는 인민들의 것이 되어야만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토지를 잃었다. 그들은 우리를 집에 머물게하고, 우리 집과교회 사이에 있는세 개의 논을 남겨 놓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논 내가 거머리 밭이라고 부르던 에 발을 담갔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34~135.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자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토지개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 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 하에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분명히 대조된다. 따라서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히려 친일파 청산을 전혀 하지 않은 집단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던 이남 정부다. 앞서 인용 및 언급한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 또한 김수지가 쓴 책을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그 진싱을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당한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외에도 김수지의 책들은 북한의 선거 제도와 인민위원회 및 각종 단체들의 결성과 과거 일제시기 억압받던 계층들의 참여를 통해, 혁명 하에서 나타난 북조선의 일상들을 보여줬다. 그런 점도 상당히 좋았다. 과거, 억압과 외압으로만 봐왔던 북조선 혁명의 또 다른 부분을 일상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수지의 말대로 북조선 혁명은 그 자체로 20세기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중 선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시행된 급진적 토지개혁을 통해 전례 없이 많은 농민들이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 만큼 매우 폭넓은 대중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매우 급진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은 인민들의 참여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북조선 혁명에서 주체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인민들이었고, 정권 초기 이들이 아주 광범위하게 혁명적 일상에 반체제적 감정을 품었다는 근거는 없다. 일부 지주 및 기독교 계층의 반발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이것을 일반 민중들의 심각한 불만으로 등치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런 편견에 대한 반박과 교정작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며, 특히 북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적극 추천하는 역작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소련에 대한 얘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책은 북한 사람들이 당시 소련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한 얘기가 많지 않다. 물론 일반 민중들이 인민민주주의 정권에서 교육받는 커리큘럼을 통해, 이들이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배웠다는 점을 알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들이 어떻게 소련을 인식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아무래도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글쓴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김수지의 경우 당시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고, 또 환영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 고 있다. 이 부분은 보충적으로 찾아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지는 북한에 대한 편견에 대해 얘기하겠다. 사실 아직까지도 전 사회적 영역에서 북한을 보는 시선은 큰 틀에서 보자면, 왜곡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의 자본가인 일론 머스크가 한반도의 위성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일론 머스크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남한은 불빛이 많이 있고, 북한은 평양이나 일부 지방도시들 빼고는 어둡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과 주장들은 역사학자인 김수지가 자주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진의 경우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이다. 거기다 김수지에 따르면, 북조선은 한국이나 일본보다 야간 조도가 낮은 유일한 국가가 아니며,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미국과 유럽에 미치지 못한다.” , 이 점에서 프로파간다와 서구식 발전주의의 프레임이 사회에 편향 및 선전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북한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수지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아래 김수지가 책에 쓴 내용을 언급하며 긴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의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이남은 그 주변 지역과 함께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반면, 이북 지역은 수도인 평양을 제외하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이 사진은 20021223일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뉴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이후 북조선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밤에 찍은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 남쪽이 빛과 에너지 그리고 활력과 경제 호황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반도 북쪽은 그저 어둡기만 합니다.” 뒤이어 그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비극입니다.” 분명 북조선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된 위성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사진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 기술의 산물인 위성사진은 지구궤도에서 다각도로 촬영한(정확하게 말하자면, 236개 궤도에서 촬영한) 다중 이미지를 합성해 화재나 번개 같은 이상 현상을 보정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거쳐 완성된다. , 럼스펠드의 말처럼 위성사진은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모습이 아닐뿐더러 그 사진 자체가 원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으로 약칭]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 역시 북조선에 대한 어떤 일정한 전제들에 맞춰 사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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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 미국에 미련을 버린 북한과 공포의 균형에 대하여
정욱식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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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박근혜 시절 억울한 여론몰이로 강제추방 당했던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저자인 신은미 씨가 한 말이다. 운동권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시기 나는 이 말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우리가 아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너무 과장되고 각색되며 최소한의 사실조차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점에서 보자면 한국 일반인들이 아는 북한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한국은 윤석열 당선을 통해 다시 한번 자칭 보수세력(물론 나는 이들을 극우 꼴통들이라 생각한다.)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위태롭던 한반도 평화는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더욱 악화 일로다. 거기다 20222월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현재 심화 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서방세력과 비서방세력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 이런 과정에서 윤석열 정권은 한··일 동맹을 통한 집단서방세력의 편에 전적으로 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현실상 한미동맹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반대하는 주장이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제문제는 냉철해야 한다. 한국의 이익에 미국이 해가 된다면 당연히 반대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우리에겐 항상 부족하다.

 

윤석열 정권 들어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화됐지만, 사실 자칭 진보 정권(난 민주당도 우익 정권이라 생각한다.)인 문재인 정권도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권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국방비를 투자하여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했으며, 역으로 문재인 정권이 강조하던 남북관계 개선은 실패했다. 냉철하게 판단해보자면, 문재인 정부가 가장 성공시킨 정책은 한미동맹과 국방력 강화고, 가장 실패한 정책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다. 물론 문재인 정부 또한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했다. 그런 노력을 개인적으로 나쁘게 보지는 않으며, 그 당시 나 또한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이 요구하는 한미연합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이를 수행했고 일방적으로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면 이런 것을 들어줄께라는 태도로 임했다. 거기다 미국은 2019년 하노이 회담이 있기 5일 전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 습격 사건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소위 북한인권운동을 전개한다는 자유조선이라는 단체가 주도했는데, 남 나라 대사관에 가서 대사관 직원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거기 있는 노트북과 USB를 탈취해간 사건이다. 거기다 자유조선 측에서 이 자료를 미국 FBI에게 넘겼다는 사실에서 미국이 무고하다는 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북한이 다소 과격 내지는 강경하게 상대방 측을 비난하는 것과 미사일 발사나 열병식을 통해 군사적인 대응을 하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항상 우리나라나 미국 주류 언론의 보도는 이런 사실은 생략하고 북한의 도발만 강조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나 미국은 지난 회담에서 이와 같은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우리 사회 또한 우리가 관계를 개선하면 북한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겠지.”와 같은 나이브한 태도로 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태도와 대응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정욱식 선생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북한이 온다는 여러모로 읽어볼 가치가 높은 명저다.

 

앞서 언급한 우리들의 나이브하고 안일한 태도 그리고 미국의 태도에는 도데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바로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점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코로나 초기부터 올해까지 뉴스에서 보도했던 북한의 식량난 혹은 제2의 고난의 행군과 같은 보도들을 생각해보자. 이런 기사들을 보면, 주장하는 것이 항상 일관됐다. 북한은 굶고 있고, 아사자가 속출하며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기에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들이 바로 그렇다. 이런 뉴스의 보도대로라면, 북한은 100번은 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김정은 정권 들어서는 인프라 발전도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식량 난의 출처도 문제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어왔다는 가장 큰 근거는 한국 농촌진흥청과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추정치다. 국내 언론이 자주 인용하는 농촌 진흥청 추정치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2년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451만 톤, 482만 톤, 455만 톤, 464만 톤, 440만 톤, 469만 톤, 451만 톤이다. 국제기구인 FAO의 추정치도 이와 비슷하며, 이를 근거로 북한이 매년 100만 톤 안팎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보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20217월 유엔에 제출한 <VNR> 보고서를 보면, 북한이 자체적으로 추계한 곡물 생산량은 농촌 진흥청과 FAO보다 많다.

 

2016년부터 2020년 생산량을 보면, 585만 톤, 550만 톤, 485만 톤, 665만 톤, 552만 톤이다. 2022215일자 북한의 조선신보2021년의 곡물 생산량을 550만 톤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의 통계 작성 역량의 부족을 감안하더라도 유엔에 제출한 <VNR> 보고서는 엄연한 1차 자료다. , 한국 정부와 서구 언론들은 이 자료를 감안하지 않는다. 반면 동국대 DMZ평화센터의 김일환 연구위원은 FAO 추정치의 허점을 지적했다. FAO2016년부터 개인텃밭에서의 생산량을, 2018년 이후에는 경사지에서의 생산량을 통계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개인텃밭과 경사지에서의 생산을 독려한다. FAO는 수확 후 손실량을 201675만 톤에서 2021년에는 100만 톤으로 올려 잡았는데, 이에 대해서 김일환 연구위원은 북한이 영농기계화, 운반능력, 도정 및 보관 시설을 꾸준히 개선해온 점을 들며 손실분이 감소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분석했다.

 

물론 북한이 식량이 부족하지 않다거나 식량난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2의 고난의 행군이나 대량의 아사자 속출 같은 보도는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거기다 김정은 시대 들어서 먹거리의 다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도 외면받고 있다. 2019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탈북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북한에서 고기 섭취를 얼마나 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46.6%일주일에 한 두 번’. 15.5%거의 매일 먹었다고 답했다. 탈북자들이 북한이 취약계층이라고 평가받는 점을 감안해서 보더라도, 북한 사람들이 아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정책 면에서도 북한은 축산 시설의 신축과 현대화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수산물과 그 가공품의 섭취량도 증가했다. 북한 무역수지의 효자 노릇을 하던 수산물이 2017년 유엔 안보리 제재로 수출길이 막히자, 북한 당국은 수산물을 내수용으로 돌리는 한편, 젓갈 등 가공식품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채소, 과일, 기호식품 생산도 마찬가지며, 먹을거리 다변화는 과거 현저히 높았던 곡물 의존도를 점차 낮추고 있다. 따라서 식량난 운운하는 일각의 뉴스는 이러한 사실들을 철저히 외면한 비약이 만들어낸 참사다.

 

이처럼 북한을 단순히 사람이 굶어 죽는 국가로 판단하는 것은 30년 전 고난의 행군 시절 당시의 인식이 만들어낸 나이브한 오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 김정일 시대의 북한 상황과 김정은 시대의 북한 상황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과거 김정일 시대에는 1990년대 위기 속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김정은 시대는 더욱더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으려는 모습도 포착된다. 거기다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했다. 재래식 전력에서 남한 군사력에게 밀린다 해도,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쉽게 무시당할 수 없다. 북한의 ICBM은 충분히 미국 본토를 타격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전쟁 시 미국을 공격하면 북한도 상상을 초월할 보복을 받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핵을 먼저 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은 핵을 가지고 있고, 핵 우위에서 당연히 남한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것에 대해 우려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 내에서도 자체 핵 개발 얘기가 나오는데, 남한의 기술력이 있지만, 미국이 허용해줄 리 만무하다는 점에서 실현 불가능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북제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 한국이 가하는 대북제재가 효과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 또한 현실 외면이다.

 

북한은 대북제재를 받으면서도 핵을 만들었고, 지금도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 거기다 중국과 러시아가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관계는 미국에 맞서 보다 강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올해 7월 러시아의 쇼이구 국방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일극체제냐 다극체제냐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과거 1990년대 당시 북한의 상황으로 보는 것 또한 이제는 낡은 생각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개혁개방을 원한다고 판단하는 것도 과거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1990년대 그 어렵던 시기에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버텨오고 있다.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 사람들도 물질적으로 남한이 자신들 보다 잘산다는 거 안다. 그리고 남한 드라마 보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가 경쟁하는 사회라는 점 그리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무상주택을 하지 않는 점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동유럽 사회의 자본주의화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안보며, 체제 전복당한 리비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철저히 외면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에 근거하여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거나 과거의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닌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남북정책과 한반도 국제 정세 파악 방식도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우리는 북한에 대해 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다. 물론 북한 사회가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북한을 알기 위해선, 현실을 인정하고 단순히 편견만 가지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북한은 70년이 넘게 미국과 적대하고 있으며, 그러한 현실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은 1970년 기준으로 이미 수백개의 핵탄두를 한반도 인근에 배치한 적이 있으며, 1960년대에는 일본 오키나와에 무려 1,200개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북한은 1968년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고,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다. 1970년대 후반 기준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최소 4만 명 이상의 지상군과 700개 이상의 핵탄두 그리고 항공모함의 지원을 받는 해공군을 배치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점도 우리 사회가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023년 들어 한반도 정세 관련한 책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여러모로 많은 공부가 됐다. 또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2020년대 코로나 위기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까지 해서, 세계가 바뀌고 있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집단서방 중심의 일극체제에서 이에 대항하고 있는 세력들의 다극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초기에 대러제재를 가했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안정화되는 반면, 서구가 휘청거리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남북관계를 보는 관점도 1980년대 후반 자칭 동유럽 민주화 흐름이나 1990년대 북한 고난의 행군 시절의 관점으로 한반도 정세와 북한을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것이 정욱식 선생의 책이 주는 훌륭한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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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2023-11-12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글쓴이가 쓰신 북한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한 재고 검토가 필요하다는 부분은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과격한 행동을 자칫 그들을 이해 못한 우리의 잘못으로 넘어가는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글쓴이의 생각이 그런건지 혹 제가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나 북한 연평도 포격 사건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인해 죽어간 이들 또 피해를 입었는데도 복구하지 못하고 거기에 대북전단삐라 살포를 트집잡아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킨 행위는 도저히 정상적인 국가와 지도자의 행위라 볼 수 없습니다 그깟 삐라에 휘둘리는 나라체제라면 솔직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 구성도 못하는 테러단체라는걸 증명해주는꼴이죠 또 김정은 김여정은 한미연합훈련을 트집잡으나 실상은 중국 뒤에 서서 중국 앞잡이 노릇하면서 그들의 무기를 받아먹으며 군사력을 크게 늘리는 북한을 보면 이중잣대란 말이 생각납니다 거기에 중국이 시진핑이 등극하고 문재인 정권이 친중정권으로 중국에 숙이는 약한 모습을 보이니 즉각 동북공정을 강하게 미는 행위를 보며 대한민국 국민들은 쓸데없는 힘을 써야 하는데 정작 북한 김정은은 거기에 말한마디 한 거 없지요 중국에게 말못하고 경제적 노예를 자처하고 있는 상태이고 인민들은 탈북을 하거나 이젠 체제에 질려있으니 내부결속을 위해 온갖 패악질을 하는데 이거에 대한 비판이 없는것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미국 비판뿐 아니라 북한에 대한 시선을 재검토하되 왜 그러한지를 또 그들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면 결국 무의미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NamGiKim 2023-11-12 23:50   좋아요 0 | URL
일단 긴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천안함이나 연평도의 경우 상당히 민감힐 주제죠. 다만 천안함의 경우 제 개인적 의견을 얘기하자면, 북한이 했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다소 음모론적으로 들릴 수는 있으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연평도도 안타까운 사건이며, 당연히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죠. 이 책 또한 북한이 한반도 정세를 자극하는 일을 한다고 언급을 안하는건 아닙니다. 단 그 부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게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거죠. 물론 북한이 다소 과격하게 나온다는 점에는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과연 우리가 무결한지는 되돌아봐야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평화무드에서 한미군사연합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면, 안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때 했죠. 이 부분은 육군 예비역 준장 출신이신 한설 장군도 언급을 했습니다. 북한을 중국에 종속적인 위치에 보는 것도 다소 사실관계에 벗어난 점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북한이 중국이나 소련에 지원을 초기에 많이 받은건 사실이지만, 중소분쟁 당시 소련에 비판적인 모습이나 중국 문혁에 대해 비판적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고, 핵 무장의 경우 중국이 찬성하는게 절대 아님에도 중국 입장 생각 안하고 핵을 만들었죠. 단 북한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관계를 돈독히할 대상이 전략전술적으로 중국ㆍ러시아랑 하는게 최선이니 입장 안맞아도 협력 노선을 현재 견지하는 것이죠. 저 또한 북한을 맹목적으로 칭송하고 찬양하는건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다른 접근을 해야한다 보는건, 상대방에 대한 증오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보기 때문입니다. 아 참고로 이 책도 언급하는거지만, 문재인 정권이 가장 못지킨 공약이 남북관계 개선이고, 가장 잘지킨 공약이 국방력 강화와 한미동맹 강화라합니다. 그래서 전 문재인 정부가 친미정부였다 봅니다. 무튼 긴 댓글 감사합니다. 생각은 달라도 이런 건설적인 댓글은 나쁘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