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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 51개 주제로 본 우리민족 절반의 이야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4.27시대연구원 지음 / 도서출판 4.27시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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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이것저것 바쁜 일이 많아서 독서를 다소 게을리한 측면이 있지만, 작년 11월에 읽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권을 펼쳤다. 사실 1권을 읽은 이후 2권을 바로 읽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바쁜 일들이 많아서, 지속해서 미뤘었다. 지난번 서평에서도 언급했던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라는 존재에 막연한 오만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라는 존재는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되고 평가되며 판단되어야 할 존재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인들 내면에 막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일종에 왜곡된 인식이 편견과 오만을 양산한다고 할 수 있다.

 

탈북자들을 생각해보자. 국내 종편 언론 TV조선과 채널A에서 방영하는 모란봉 클럽이나 이제는 만나러 갑시다를 보면, 북한이라는 존재는 항상 남한이라는 존재보다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전제하에서 방송을 진행한다. 이 채널들은 탈북자들을 모아서, 북한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양산해내며, 북한이라는 사회는 마치 인간이 살면 안되는 쓰레기 같은 곳으로 묘사한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adio Free Asia)이 하는 주장들과 똑같다. 대개 이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열악한 배급 사정, 전력 공급이 부재 등, 절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얘기들 뿐이다. 나는 이만갑이나 모란봉 클럽이 양산해내는 북한에 대한 관점이 과거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타국을 악마화하는 수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사회에서 나오는 북한에 대한 내용들을 상당 부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대한민국 정부의 나팔수로서, 것 잡을 수 없이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일부 탈북자들이 증언에 더더욱 비판적이다. 예를 들면, 과거 북한군의 광주학살처럼 묘사된 송림 제철소 사건은 나중에 주성하 기자가 조사해본 바로는 상당 부분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을 정도다. 송림 제철소 사건이 한국 사회에서 과장된 이유에는 일부 탈북자들의 증언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비판적으로 보려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에 이어 이번에 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는 그런 거짓말들이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는 한국 사회에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는 책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북한의 현대사를 쉽고, 제법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1권이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를 다뤘다면, 2권은 북한에서 소위 전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선포하던 1980년부터 시작하여, COVID-19가 한참이던 2021년 북한에서 개최한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까지를 다룬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된 북한 현대사 관련 서적들이 1950,60년대 북한 경제발전의 성과를 인정한다면, 1970, 80년대 경제에 대해선 비판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다. 또한,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을 단행한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와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그리고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개혁개방을 한 덩샤오핑의 모델을 비판하는 점도 책을 읽으며 눈에 들어왔던 점이다. , 이 책은 남한학계가 북한의 경제적 문제를 비판하기 위해 비교 대상으로 삼는 모델을 비판한 것이다. 국내에 나온 책들 중에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비판하는 책은 찾기 힘들다. 따라서 이런 점은 제법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책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남측 학계가 북의 경제건설 노선을 비판하며 비교 대상으로 삼은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이른바 '글라스노스트(개방)',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노선은, 북의 입장에서 보면 흐루쇼프때 등장한 현대수정주의의 연장으로 외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중단의 촉진제였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내세운 이른바 '개혁ㆍ개방' 정책 역시 자본주의화를 수용한 수정주의 경향의 하나였다. 게다가 북은 미국과의 군사적 대치가 상수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수정주의 확산으로 전체 사회주의진영에 악영향을 끼치고,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환경속에서 자체 역량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지속해야 했던 북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게 합리적 시각이라 하겠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p.24

 

중간중간에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 집필 과정이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주체사상에 대한 소개 및 그 나름의 해석 등도 제법 볼만했다. 책은 <세기와 더불어>가 이제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국내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호치민, 마오쩌등, 아옌데, 카스트로, 체게바라 등의 자서전 및 평전은 있지만, 정작 김일성에 대한 책은 일단 검열부터 하고 본다. 물론 나는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 북한 측 입장에서 쓰인 책들을 막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극우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어긋나기까지 한다. 따라서 책의 주장대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자유롭게 읽혀야 한다.

 

1990년대 북한에서 겪었던 고난의 행군에 관한 서술도 흥미롭다. 물론 나는 고난의 행군 300만 명 아사설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지만, 책에서 체계적으로 아사자 수치를 반박하니 반가울 따름이다. 사실 고난의 행군은 너무나 끔찍한 참사였지만, 실질적인 책임은 의도적으로 경제제재를 가하여 사람들을 굶어 죽게 하여 그 나라를 망치려 했던 미국에 있다고 본다. 1932년에서 1933년 당시 소련 시기 우크라이나를 휩쓸었던 홀로도모르에 대해선, 스탈린의 학살이라 우기는 분들이, 정작 미국의 의도적인 고난의 행군 초래는 미국의 학살이 아니라고 보니 참으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책은 미국의 고립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한다.

 

북이 1990년대 중후반기를 항일무장투쟁 때 고생이 막심했던 전투 행군에 비유한 것은 그만큼 간고했기 때문인데 난관은 "수백년래에 처음 보는 무서운 자연재해"만이 아니었다. 김 주석 서거 이후 확산된 이른바 '북 조기붕괴설'을 현실화하려 미국은 대북 봉쇄와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이는 소련 해체와 사회주의 시장 붕괴 이후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주요 원료 및 물자 교역마저 가로막아 북의 경제난을 심화시켰다. 그런 결과로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됐다는 게 북의 설명이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 p.129~13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이 순수히 김일성 시대만을 다뤘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2>는 김정일과 김정은 시대까지 다루고 있다. 책 내용 중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7.1 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 책에 따르면, 이 조치는 사회주의 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 가장 큰 실리를 얻을 수 있는 경제관리방법이라 북에서 일컫으며, 내용의 핵심은 가격조정을 통한 사회주의 분배의 현실화. 전차(버스) 요금과 쌀 값이 급상승했는데, 이에 따라 일반 인민들의 생활비도 대폭 상승시켰다. 그리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는 노동의 특성과 기술 수준, 생산성 등에 따라 차등지급했다고 한다. 책을 통해 7.1조치에 대해 처음 알았다.

 

그 외에도 현재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의 성장과정이나 군 생활, 그리고 김정은 시대의 여러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트럼프의 도발적인 대북 발언이나, 4.27 평화선언 그리고 북미 1,2차 회담 및 2021년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까지 현재 시점의 북한 이야기까지 다루니 흥미롭게 다가왔다. 물론 책을 재밌게 읽었지만,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학시절 1,200여 편의 논문과 담화를 발표했다는 부분이나, 세습 관련 부분에 대한 입장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내 생각과 상반되는 부분들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2권 또한 얻어가는 점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책은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자칫 북한찬양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온 얘기들 중에는 우리가 북한에 대한 막연한 편견에 빠져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들을 알려준다. 또한, 반공주의자들이 양산한 거짓 자료에 대한 반박도 담고 있다. 한국 사회가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이러한 책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보장해줘야 한다. 말로는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하면서 정작, 북한 자료는 탄압하려는 이 사회 모순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번에도 북한 현대사에 대한 공부가 제법 됐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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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하바로프스크 야영지에서 찍은 제88특별여단 대원들의 사진, 사진에는 북한의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도 있다.)

 

1937년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 이후 김일성은 일본군 부대의 대대적인 추격을 받았다. 1940년 3월 이른바 홍기하 전투(훙치허 전투)에서 대략 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한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그 이후에도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았다결국 김일성을 포함한 항일연군의 지휘부는 병력을 이끌고 소련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지도자였던 웨이정민(위증민)은 1940년 7월 모스크바 중앙에 서한을 보내 부상자와 연장자를 소련 영내로 보내고 남은 대원은 소부대로 나누어 식량공작에 투입하겠다는 새로운 방침을 보고했다즉 이에 따라서 김일성 또한 부대를 이끌고 소련 영내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1958년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1941년경 항일무장투쟁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투쟁방침을 고쳤습니다한편으로는 혁명의 전도를 예견하고 소련 일대에서 많은 간부를 양성하였으며다른 편으로는 역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대부대 활동을 소부대 활동으로 변경하고 지하투쟁을 강화하였습니다.”

 

1940년 10월 김일성의 부대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다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1940년 7월 기준으로 김일성이 이끌던 부대의 규모는 대략 340명 정도였다고 한다최소 300명 이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의 훈춘을 떠나 김일성은 소련으로 들어갔다당시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들어간 이들 중에는 조선인 대원 전문섭강위룡최인덕이두익 그리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 등이 있었다.

 

김일성을 포함한 동북항일연군 부대가 소련으로 피신하던 시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정말 암울한 시기였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김일성이 일본군에게 추격당하던 시기 나치 독일은 영국을 제외한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을 점령했으며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도시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김일성이 상대하고 있던 일본 제국은 중일전쟁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났고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한 상태였다거기다 1년 뒤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다이처럼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암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북항일연군도 큰 타격을 입었다이른바 고난의 행군 과정에서 많은 혁명 동지들이 전사했고김일성 부대가 소련을 떠난 뒤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제3방면군 총지휘자인 진한장이 일본군에게 사살당했고1로군에 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이자 김산의 친구이며 의열단 대원이었던 오성륜도 일본군에게 투항했다안타깝게도 오성륜은 이후 변절하기까지 했다또한 앞에서 서술한 웨이정민도 밀영 속에서 사망했다.

(제88특별여단의 깃발, 러시아어 글자가 들어가 있는게 인상적이다.)

 

소련에 도착한 김일성과 그를 포함한 동북항일연군은 소련군에게 취조를 받고이른바 1941년 초의 하바로프스크회의를 거쳐 두 개의 야영에 배치됐다현재 우수리스크 근처에 B야영(당시는 우수리스크가 스탈린의 심복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땀.)과 하바로프스크 북동쪽 70km 지점에 있는 아무르 강가의 비야츠코 마을에 A야영(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라고 일본 관헌자료에 나옴)이 만들어졌다당시 김일성이 들어간 곳은 B야영이며 대략 몇 백 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이렇게 만주에 정착한 이들은 단순히 소련에서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일부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남아있는 독립군 잔존세력을 도왔다다만 1941년 일본과 소련의 중립조약이 체결되면서그러한 활동은 매우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와다 하루끼가 쓴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 따르면 1942년에 와서도 이 소부대들은 야영을 출발하여 정찰과 전단살포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당시 부대의 정예 대원이던 조상지는 1942년 2월 일본군과의 전투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됐지만, 1941년에 들어서 동북항일연군에게도 변화가 생기는 일이 나타났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그해 12월에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비록 소련은 이 시점까지 이들이 만주로 다시 돌아가 활동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을 이들을 활용하고자 했다. 1942년 6월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게 대패하고 난 뒤소련은 항일유격대원들에게 훈련을 실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실제로 이들을 소련의 붉은 군대에 편입시켰다그것이 바로 제88특별여단이다.

(1945년 가을 북한에 입성하고 나서 찍은 김일성과 소련군 지휘관들의 사진)

 

88특별여단은 1942년 8월 1일 창설됐다88특별여단 소련 붉은군대(Soviet Red Army)의 일원으로 러시아어로는 제88특별저격여단(88 Otdel'naya Strelkovaya Brigada)이라는 명칭이 부여됐다여기서는 이 글에서는 그냥 줄여서 제88특별여단이라고 부르겠다이 부대에는 중국인과 몽고인 그리고 조선인과 러시아 소수민족인 나나이족이 같이 근무했으며동북항일연군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김일성 또한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88특별여단의 병력은 초기에 1,500명 정도로 이 중 항일연군 인사는 1,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88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소련장교의 지도에 의해 행해졌으며총검술·실탄사격·전술진공·방수훈련·행군연습·동계 야외 노영훈련·낙하산강하훈련 등이 이루어졌다겨울에는 스키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최소 1,500명 이상이나 되는 제88특별여단에는 항일연군 병사가 다수를 차지했으나이 중 조선인은 최소 120명에서 많게는 4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하며 환영했다.) 


최성춘의 <연변인민항일투쟁사>에 따르면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소련과 만주를 왔다갔다하며 항일투쟁을 이어나간 것으로 확인된다. 1942년 5월 12일에는 박덕산소부대가, 5월 29일에는 안길소부대가 그리고 7월 17일 시세영소부대가 연변으로 돌아왔으며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이들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적정찰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갔으며소부대의 이런 활동은 1945년 봄까지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88특별여단이 독자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했다는 확실한 문서는 없으나이들 중 일부는 소련군에 편입되어 붉은 군대로 대일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소련 문서와 주보중(항일연군 지휘간부)의 회고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들 중 일부는 소련의 붉은 군대 대원으로서 1945년 소련의 대일전에 참전했다또 이들 중 일부는 한반도 북부로 진격했으며이른바 해방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45년 10월 연단에 선 젊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당시 많은 이들이 김일성의 존재를 노장이라 생각했으나 너무나 젊은 인물이어서 한편으로는 근거없는 '가짜설'이 유포되기도 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김일성도 호치민처럼 연합국의 편에서 싸웠다.”고 주장했다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주장에 따르면, 1944년 11월 일본의 한 경찰 보고서를 보면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됐으며, “국경지대에서 미국 공군의 공습과 조율하여 철도를 파괴하기 위해 조선-만주 국경을 따라 주요 지점에 정보원을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이른바 인민전선에 따른 반파시즘연합전선 차원에서의 행동일 것이다베트남의 지도자이자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 또한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미국 OSS와 접촉하여 베트민을 훈련시키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김일성을 포함한 사회주의 계열 항일무장독립군들은 많은 이들이 친일을 선택할 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그리고 이들은 이후 1948년에 설립되는 북한 정부의 핵심이 됐다브루스 커밍스의 말대로 김일성과 김책최현최용건 그리고 그 외의 200여 명의 핵심 지도자들은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면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현재 북한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항일무장투쟁에서 찾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와다 하루끼이종석().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비, 1992

 

최성춘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연변대학, 1999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역사와비평사, 2014

 

와다 하루끼남기정().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창비, 2014

 

조지 카치아피카스원영수(). 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 2015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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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이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박정희 시절 피카소를 이름을 크레파스에 넣었다고 처벌받았던 이도 있을 정도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발생한 국민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만 하더라도 2~3달도 안 되는 사이에 남한 땅 전역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이러한 사실을 통해한국전쟁에서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러한 학살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나서도 지속됐으며, 9.28 서울 수복 후에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아래 이승만 정부의 또 다른 양민 학살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학살은 미군에 의해서 발생하기도 했으며특히나 폭격에 의한 학살이 가장 광범위했다한국전쟁 시기부터 현재까지 북한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다그것이 바로 신천양민 학살(Sinchon Massacre)이다.

(현재 북한에서 제시하는 신천양민 학살 민간인 희생자의 수치, 이 숫자는 대략 그 지역 인구 1/4 수준이다.)

 

신천양민 학살은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북진하며 전진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학살로 대략 3만 5,000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놀랍게도 학살당한 민간인의 숫자는 그 지역 인구의 1/4이다신천양민 학살은 과거 한국에서 신천 10·13 반공 의거라고도 불렸고현재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로 불리고 있다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북한에 있던 우익 세력인 반공 청년단들이 한 것으로 판단하거나좌익과 우익 갈등 속에서 희생된 것으로 얘기한다반면 북한에서는 이 학살을 미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로 얘기한다신천양민 학살은 양측의 입장과 의견이 판이하게 갈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신천 박물관에 있는 상상화)

 

우선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의 학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현재 북한에서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하고 있고신천에 만들어진 박물관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북한에서는 신천 미점령군사령관인 해리슨과 그 휘하의 미군을 학살의 주체로 지목한다북한의 자료에 따르면미군과 한국군이 들어온 시점부터 후퇴하게 되는 시점까지 신천에서 미군들에 의한 학살이 발생했으며그러한 학살은 매우 야수적이었다고 한다. MBC에서 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신천학살 편을 보면 이들의 증언도 확인이 가능하다한 북측 시민의 증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때 미군 한 놈이 나타나더니뭐라고 지껄이면서사람들을 직접 쏴 죽이면서말하는 것이었습니다옆에 통역 놈이 말하기를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이 놈이 바로 미국 장교 해리슨이라는 놈이었습니다.”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한 것은 비단 북한 뿐만은 아니었다대표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활동했던 국제여맹 단원들이 그러하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는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한국군 그리고 우익들의 학살과 잔혹행위 등을 조사했었다이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양민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하는 증언들을 기록했다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유엔군 점령 기간 동안 대략 12만 3,000명의 황해도 시민의 학살당했다고 썼다이 수치는 당시 영국 노동당 신분으로 참가했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이 제시한 것으로 국제여맹 인사들 중에 가장 우익 성향의 인물이 주장한 것이다펠턴의 주장에 따르면황해도 안악시에서만 1만 9,092명의 주민들이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이는 아마도 당시 북한 측의 제시한 수치와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통해 나온 것으로 확인된다.

(신천양민 학살 희생자의 묘, 이 묘 또한 신천 박물관 근처에 있다.)


(신천양민 학살 당시 양민들이 학살당한 현장)

 

앞에서 제시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즉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이 결코 없지 않았고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뽑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결코 만만치 않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신천양민 학살을 다룬 편에서월남한 생존자들과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의 사건을 추적해 들어갔다그러나 당시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은 지명만 기억할 뿐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으며 북진하기 바빴고신천에 주둔한 기간이 매우 짧았다고 한다또한 또 다른 미군은 부대가 지나갔음에도 본인 스스로 그 지명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의 배후로 뽑은 윌리엄 해리슨은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며그가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도 있다.

(신천양민 학살을 묘사한 벽화)


(2010년대에 새로 단장한 신천 박물관 일부 모습, 자세히 보면 미군 옆에 하얀색 완장을 낀 우익 치안대도 보인다.)

 

즉 이러한 부분에서 북한의 자료와 미국의 자료가 엇갈리는 점이 있기에 나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이라 결론짓지 않는다그러나 미군 자체가 아예 무고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우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온 내용에는 좌우익 양측의 학살이라는 점에 주목했지만중공군과 인민군의 남진 이후 미군이 과연 후퇴시기에 신천을 거쳤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400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미군에 의한 학살 가능성이 후퇴도중 일어났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을 미국이 한 것이라 보는 입장은 이런 점에서 맥락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지목되는 반공 청년단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한 세력이기 때문이며설사 미군 자체가 학살의 배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들을 지원하는 주체는 미국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이들을 방조한 책임도 크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당시 신천양민 학살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나는 이 학살의 주체가 북한에 숨어 있던 반공 청년단이라 본다사실 반공 청년단의 존재는 맥락적으로 그리 생소하지 않다우선 한국전쟁 시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포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었고양측의 포로 문제는 휴전회담에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또한 북한에서 주장하는 신천양민 학살의 참혹성이나 잔혹성을 따지고 보면제주 4.3 항쟁이나 여순항쟁에서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보였던 행위들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다거기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 중 월남한 이들은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대해서 제법 많이 증언했다그리고 북한 자체도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다만 주된 주체를 미군으로 설정해놓은 것 뿐이다.

(신천 박물관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 신천 박물관은 196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만들어져 김정일 김정은까지 그 규모를 확장했고, 반미주의 학습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신천에서는 천인공노할 학살이 이승만 정부 하에서 발생했다필자는 신천양민 학살을 이승만 정부의 북한 통치 기간에 저질러진 우익들의 양민 학살로 생각한다그런 점에서 소위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북한 민중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본다마지막으로 미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더 첨언하고 싶다물론 내가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에서의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소 부정하는 투로 얘기했지만나는 미군이라면 그러한 짓거리를 저지르고도 남을 주체라 생각한다북한에서 묘사한 신천학살의 참혹성은 실제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벌이던 전형적인 군사작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이들은 민간인의 시체를 베트콩 사살로 처리하고 전과를 과장했다그런 점에서 미제국주의 군대의 잔혹성은 굳이 신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러 근거를 통해 입증이 가능하다.

 

신천양민 학살을 저지른 반공 청년단들은 말 그대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이들이다이들은 북한에서 그런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으며이승만 정부의 북한 점령 2달 동안 수십 만명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할 역사적 사실은 바로 그 점에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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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소련의 친선을 강조하는 포스터)

 

북한 정부의 수립 과정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 형성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소련군이 해방자를 표방하며 직접 주둔했고소련의 영향력 아래 사회주의자들의 힘이 강화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압박을 받으며 결국 힘이 약화 되었다토지개혁 등 북한의 제반 개혁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막상 북한은 이후 동유럽 국가들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다국가 형성전쟁전후 경제 복구 등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북한은 점차 독자 노선을 표방하는 주체의 국가로 부상했다이 차이점은 어디에 연유하는가북한은 위성국가에서 자주국가로 뒤늦게 변모한 것인가아니면 처음부터 자주적인 국가였는가이에 대하여 균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당시 소련의 동아시아와 북한에 대한 정책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의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간주하여 이곳에 소련군의 역향을 대부분 투여한 다음군사력을 바탕으로 점령정책을 실행하면서 소련에 충성하는 국가들을 세우는 데 깊이 개입했다그에 비해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가급적 미국 등 다른 연합국에 협조하는 가운데 자신의 국가이익을 보장받는다는 수세적인 자세를 취했다소련의 본래 동아시아 구상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의해 통일될 중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일본 점령에의 동참한반도의 신탁통치 참여 등이었다하지만 그 구상은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미국의 일본 단독점령한반도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광범한 반대로 인해 근본적으로 뒤틀렸다결국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의 공상화와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일본의 반공국가화는 소련의 애초 의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동아시아 내부의 혁명 대 반혁명의 충돌과 이에 대응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북한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게 된 것은 동아시아 내부의 반제국주의 반봉건 국가 건설의 흐름 속에서 국가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소련은 국경을 같이하는 한반도를 포기할 수 없었으며이에 북한 지역을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적극적인 원조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있던 일본의 공장과 기업소를 전리품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버리고중요산업 국유화 조치를 통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소유임을 확정해주었다그리고 이들 시설의 재가동을 위해 적극적인 원조를 했으며더 나아가 북한 스스로의 군사력 강화엘리트 양성 등에 체계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1949년에 중국혁명이 달성되자 소련은 동아시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맏형으로 인정해주었으며한국전쟁 때는 직접 개입을 자제하고 중국이 북한을 후원하게 했다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소련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이후 중소분쟁이 발생하면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3세계와의 관계 확장을 통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처럼 북한 정부는 소련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수립되었으나그렇다고 초기 북한을 단순한 위성국가로 볼 수는 없다북한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자율성을 지녔으며소련은 북한의 든든한 후원국가였다북한 집권층은 소련을 비롯한 국제 공산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후 경제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었으며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외압에 대처하면서 1950년대 후반 시점에는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요컨대 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의 대외관계는 상대적 자율성에서 절대적 자율성으로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출처북한의 역사 1 p.24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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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당사자들은 김일성이 소련 여단 군복을 입은 모습을 즐겨 묘사한 반면일본 상급자의 제복을 빌려 입고 찍은 남한 장교들의 사진은 조직적으로 감추었다아마도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그런 군인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김정일 코드 p.47

 

이 내용은 한국전쟁을 연구한 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저서 김정일 코트(North Korea: Another Country)에 나오는 내용이다북한의 초대 지도자 김일성(Kim Il Sung)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영역이다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6.25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단순한 명제로 결론짓는다이 부분에서 더 나아가면 그냥 독재자라는 이미지만을 부각시킨다북한에 대한 체제의 성격과 해석은 우리 사회에서 다양할 수 있다나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며그러기 위해선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업도 분명 중요하다 생각한다.

(와다 하루끼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이미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자료들과 해석은 대한민국 사회에 널려 있다반면북한의 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나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한 자료들은 거의 없다더 정확히 말하자면국가 보안법이라는 정치적 영역을 통해 탄압받고 있다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북한을 찬양하고 숭배의 대상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흐름 속에서 북한에 대한 다른 평가를 하나의 담론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김일성에 대한 평가도 충분히 그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대표되는 식민지 시기이다일제 지배 35년 동안 적잖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섰고또 많은 이들이 산화했다한국 사회에서는 소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포함하는 우파 민족주의 계열의 활동을 강조한다최근 들어 임정과의 연합을 추진했던 인물 약산 김원봉을 강조하지만편협한 색깔론에 큰 희생양이 되고 있다한국 사회는 조금이라도 사회주의 계열에 있었거나 월북 이력이 있는 인물에 대해선 극도의 발작 증세를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깃발)

 

이는 잘못된 행보다왜냐하면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 계열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실 독립운동 세력들 중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추구한 이들이 많았다그리고 이들 대다수가 독립운동가를 이루고 있었으며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또한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공내전에 참가하여중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이런 업적을 달성한 이들이 바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었다. 1948년에 탄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독립운동가로서일제시대에는 항일투쟁 그 이후에는 항미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다물론 한국전쟁 자체는 그가 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3세계적 관점에서 보면항미투쟁으로 볼 수 있다이는 김일성과 그가 이룬 체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리영희 교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북한에서 묘사한 항일무장투쟁 당시 김일성)

 

김일성은 젊은 시절부터 열혈 반일투사였다그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시점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다중국 공산당에도 입당했으며중국 공산당과의 국제 연대를 통해 공동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193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백두산을 거점삼아 항일 무장병력을 이끌었다그가 이끌던 항일무장조직의 명칭은 구국군’, ‘왕청 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조선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등 다양하다한홍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만주 동부에서 큰 명성과 높은 지위를 지닌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개인적으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전투가 있다그 전투는 바로 1940년의 홍기하 전투다홍기하 전투에서 김일성의 부대는 자신들을 추격해온 일본군 100~150명을 사살했고경기관총 5소총 100여 정탄알 1만여 발무전기 1대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이는 아주 큰 전과라 할 수 있다이 홍기하 전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김일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무것도 안했다.”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이 허황된 주장이라는 것이다그 외에도 김일성이 일본군을 상대로 치른 전투는 무수히 많다이는 와다 하루끼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통해 알 수 있다.

(동북항일연군)

 

당시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빛나는 붉은 별이었다북한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항일무장투쟁에서 찾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이력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김일성의 이력은 국내 교과서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왜 그럴까나는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이 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만약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 분야에 있어서 당당하다면홍기하 전투 그 자체를 숨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그러니 한국 사회에선 좋든 싫든 임시정부만 언급하는 것이다물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그러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사에서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 북조선분국 지도자일 당시의 김일성)

 

앞서 보았듯이김일성의 항일투쟁은 분명 높게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다물론 독립운동사를 김일성 중심으로만 서술해서도 안 될 것이다그러나 그가 항일투사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하냐는 문제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1930년대 만주에서 전개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무장투쟁과 더불어재조명 받고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이력이다그리고 그들이 이후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했다는 사실에서항미투쟁적 성격도 제3세계의 시각으로 볼 가치도 충분히 있다그런 시각을 하나의 담론으로 인정하는 것부터가 진정한 학문의 자유다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마지막으로 2011년 브루스 커밍스가 인터뷰에서 주장했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딘 애치슨은 호치민에 대해 언급한 모든 것은 김일성한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김자동(), 일월서각, 1986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와다 하루끼이종석(), 창비, 1992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남성욱석(), 따뜻한손, 2005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간도특설대김효순서해문집, 2014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남기정(), 창비, 2014

 

중국인 이야기 3김명호한길사, 2014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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