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그는 누구인가?

1966년 9월 22일 대한민국 국회는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로 인하여 시끄러웠다. 그 국회에서 정일권을 비롯한 국무총리 각료들에게 똥물을 투척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주먹‘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건달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인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대중매체를 통해 생애가 나름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90년대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이나 최고 시청률 57%까지 찍었던 124부작의 대하 드라마 야인시대를 비롯하여 김두한은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는 매체는 대체로 그를 협객이나 주먹왕으로 묘사되기에 그의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김두한의 생애를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다.

김두한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918년에 태어났다. 1924년 그가 7살이던 시절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자 자신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에도 역사적 고증이 전혀 맞지 않는 오류가 있는데, 김두한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7살이 되던 시절 만주로 가서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군 수천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 청산리 전투는 1920년에 있었다. 그외에도 그는 여러 역사적 고증 오류로 인하여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있고, 무엇보다 김두한의 딸인 김을동 의원이 DNA검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사실무근 관련한 의심을 받을만 하다. 따라서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김두한과 김좌진의 만남은 처음부터 허구에 기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가족 했던 주장중 가장 황당한 주장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1884년 3일천하 갑신정변의 주요 인사인 김옥균˝이라는 소리다. 이것또한 전혀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거짓말이다. 일단 김좌진 자체가 김옥균의 양자가 아니다. 즉 김옥균과 김좌진이 족보적으로 연결되는 접점이 전혀 없다. 굳이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의 공통점이라 하자면 안동 김씨라는 같은 성씨라는 사실 뿐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거지 생활을 했던 김두한은 원노인에게 거두어져 자랐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확실히 확인된 바는 없다. 아무튼 그는 18세가 되던 1935년 종로의 유명한 극장 우미관에서 일하며, 건달로써 유명해졌다. 우미관에서 일하던 그가 당시 유명했던 건달 구마적과 신마적을 넘어서고 종로 제1일의 주먹패가 된 것은 아주 거짓말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김두한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일본 상인들로부터 조선의 심장이자 마지막 보루인 종로 상권을 지켜냈다.˝는 주장은 믿기 힘들다. 당시 시기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조선 전체가 이미 일제의 식민통치에 철저하네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즉 그 시기에 일본 상인들로부터 지킨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말이 안된다는 거다. 김상구 저자의 ‘김두한 출세기‘라는 책에 나온 표를 보면 1930년부터 1940년까지 폭력배 관련 언론 기사에는 일본 야쿠자와의 싸움에 대한 기사는 없다. 김두한 및 그의 동료 깡패들은 쉽게 말해 종로 상인들 자릿세를 갈취해 가고, 극장 및 유흥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폭력배일 뿐이다. 설사 하야시와 같은 혼마찌 일본 건달들과 싸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제적 이권 다툼일 것이다.

김두한의 주먹 조직이 또 다른 변화를 겪게된 것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격해지면서 부터다. 태평양 전쟁이 격해지면서 일본은 대대적인 징용을 시작했고, 그 범위가 주먹패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주먹패들중 일부도 징용되어 전선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게 일본군 내의 사고 및 문제로 이어졌다. 그로 인하여 조선 총독부는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패들을 모아 1943년 소위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했다. 이들중 일부가 친일의혹이 있지만, 김두한 개인의 친일행적은 특별히 없다. 이들은 후방에서 지원하는 용도로 만들어졌기에 김두한과 그의 주먹패는 거기서 활동하다 1945년 해방을 맞았다.

김두한 본인 회고에 따르면 해방 이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에서 활동하며, 일본 해군무관부를 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대 나온 다큐멘터리 ‘건달의 역사‘에 따르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김두한의 주장은 건준에 잠시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이유가 어찌됐건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반탁 진영의 선봉에 서면서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다.

1946년 4월 그는 대한민청이라는 극우 조직을 결성했고, 여러 테러활동들을 전개했다. 대한민청은 극우파쇼인 이범석이 주도로 만들어진 족청이 발전한 것이었다. 그가 쓴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에 나온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 중앙극장 폭파사건, 철도파업진압, 전평 본부 습격, 민청집회장소인 삼각산 문수암 급습, 경전 파업 진압, 인천 조선기계제작소 파업 진압, 남로당 대회장 습격 등이 있다. 이런 활동은 무자비한 파업 진압은 좌익 노조활동의 근본적 파괴를 가지고 왔다. 심지어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여운형 암살에 관여했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패러디 소재인 심영 습격도 실제로 김두한 측에서 실행했고, 심영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 맞췄다고 한다. 또한 김두한은 이화룡측의 서북청년단과도 큰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지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정진영이 사회주의 쪽에서 활동하자 무자비하게 죽였다.

정리하자면 김두한은 해방 이후 정치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더 커졌다. 그가 자행한 백색테러는 경찰총장 조병옥과 장택상의 대대적인 지원과 친일파들의 지원 그리고 미군정의 방관속에서 이루어졌다. 해방정국 시기 여러 테러 활동이 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우익쪽에서 했고, 그 대상은 어린이, 노인, 임산부까지 확대되었었다.

1948년도에 김두한은 미군정에 의해 구속되어 하지 사령부에게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특전으로 그는 사면되었다. 일각에서는 사형수 시절 오키나와 미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하나 이 또한 김두한의 자작극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러 조직에서 배제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그는 군인으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포항 전투에 참전했다는 얘기 또한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 김두한 또한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전쟁이 끝날때 까지 부산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시기 이승만으로 부터 내무부장관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 또한 근거가 없다.

한국전쟁 이후 김두한은 서울로 돌아와 1954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당선이 된 이후부터는 반이승만 반자유당 노선에서 활동했고, 심지어 진보당의 조봉암을 옹호하기도 했었다. 사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 못지 않게 레드 컴플렉스를 보이던 조병옥과 장택상 그리고 유진산 같은 인물들이 반이승만 노선을 1950년대에 택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무튼 그는 1950년대 반이승만 노선을 표명했고, 형식적으로 야당쪽에 있었다. 그 바람에 한때 동료였던 자유당의 이정재측과 여러 갈등을 보였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뒤,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그는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시기 정치쪽에서 밀려나 있었던 김두한은 1965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의 재보궐선거에서 용산구에 한국독립당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이로써 생애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어 8년 만에 국회 재입성했다. 하지만 김두한은 당선되자마자 한일회담 시위관련하여 한독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같혔었다. 물론 그게 국회에 문제가 되어 석방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1966년 현재 이건희의 아버지 이병철이 사카린을 밀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똥물을 가지고 와 말 그대로 똥물을 투척했다.

참으로 재밌는 것은 그 시기 김두한은 해방 후 자신이 했던 백색테러를 합리화 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지가 어떻다니 노동자가 어떻다니 하며 권리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다. 이후 김두한은 1967년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었고 당선도 되었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세 연설 도중 체포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1971년 다시 선거에 나서서 그 동안 얻었던 득표율에 비하면 큰 표를 얻었기는 했다만 간발의 차이로 낙선하였고, 1972년 11월 김두한은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두한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묘한 존재다. 그는 일제시기 깡패였고, 해방 후에는 정치 깡패로 변모하여 민간인에게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박정희에 맞서는 야당인사였다. 또한 말년에는 자신이 받고 있던 국가 유공자 연금 전액을 고아원에 지원했었다. 그리고 그는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독특한 인생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은 지극히 김두한 자신이 미화한 것을 어떠한 검증없이 받아들인 것이기에 당연히 비판적으로 봐야 하고, 해방 후 자주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테러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아야할 인물이다.

참고자료

김두한 출세기, 책과 나무, 김상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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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은 1941년이 되서였다. 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중립주의를 내세웠던 미국은 1941127일 진주만 기지가 일본군에 의해 기습 공격을 당하자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고, 일본의 동맹세력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현재 CI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OSS(Office Strategic Services)를 창설하여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태평양 전쟁 기간 미국은 아시아에서 자신들과 협력하여 대일전을 전개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고, 그 결과 중월 국경지대에서 베트민 조직을 이끌던 베트남의 호치민(Ho Chi Minh)과 협력하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을 떠난 지 30년 만에 돌아온 호치민은 베트민을 창설하여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여러 투쟁을 전개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과 영국 중국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반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자, 호치민은 연합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해왔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당 측에게 공산당 스파이로 오인받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급격히 변해가던 시기에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불행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194411월 미국의 루돌프 쇼 중위가 모는 정찰기가 중월 국경의 산악지대를 비행하다가 엔진 고장으로 인하여 정글에 불시착한 적이 있었다. 그 지역 베트민 부대원들은 쇼 중위를 찾았고, 그를 호치민이 있는 곳으로 보내기로 한 그들은 1달 후 호치민에게 보냈다. 쇼 중위를 만난 호치민은 그를 중국 국경을 넘어 쿤밍에 있는 공군지상지원국에 돌려보내면서, 1945년 초가 되어 최종적으로 미국 측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미국 해병대 찰스 펜 중위와 앨리슨 토머스 소령 그리고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과 같은 미군측 요인들과 접촉하여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19454월 미국 OSS의 패티 소령이 중국 운남성의 한 찻집에서 호치민과 만난 이후, OSS는 베트민에게 의약품, 무전기 한 대, 추가의 무기 등 보급품을 팍 보 근처에서 공중 투하해주었다. 당시 베트남에 남아있던 프랑스 측은 호치민과 베트민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에게 온갖 선전을 했었지만, 1945년 초중순 부터는 호치민의 베트민과 미국 OSS측의 관계는 점차 좋아졌다. 19455월부터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호치민의 베트민 부대는 OSS에게 미국이 필요하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언제든지 약 1000명의 베트남 게릴라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까지 했었다.

 

1945716OSS 사령부로부터 베트민과 접촉하라는 임무를 받은 패티의 후배 장교이자 디어 팀(Deer Team)’의 지휘관 앨리슨 토머스 소령은 대략 50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원들과 함께 북쪽 산악 지대의 작은 마을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다. 앨리슨 토머스 소령이 이끄는 사슴팀은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잡 장군은 OSS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고, OSS는 기관총, 브라우닝 자동소총, 수류탄 등을 낙하산으로 제공하여 베트민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켰으며, 훈련까지 담당해줬다. 이렇게 미군의 훈련을 받은 잡 장군의 게릴라 부대는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하여 성과를 올렸고, OSS의 사슴팀 또한 베트민과 공동 작전을 펼치면서 관할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협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급격히 변하면서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45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국에게 패배한 일본은 미국의 B-29 폭격기에게 융단 폭격을 받게 되면서 패망해가고 있었다. 호치민과 OSS가 협력하게 되었을 쯤에는 태평양에서의 전황이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호치민은 베트민 조직에 있는 지도부들과 협의하여 총 봉기를 계획했고, 1945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이를 실행에 옮겼다. 총 봉기를 일으킨 호치민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194592100만 명의 인파가 모인 하노이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Vietnam Independence)’을 선포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말기 호치민과 베트민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는 노선을 택했다. 그 당시 호치민을 만났던 미국의 주요 인사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보단 민족주의자로 판단했고, 전쟁이 끝나가던 시점에 베트민 조직에게 소총과 수류탄, 기관총 등의 무기를 지원해주기도 했으며, 그들과 협력해 일본군에 맞서 소규모의 전투를 벌이기도 했었다. 당시 호치민과 협력했던 OSS의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은 자신이 쓴 책 <왜 베트남인가?>에서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호치민과 협력관계를 구축했던 미국은 그로부터 20년 뒤, 한때 자신들이 지원했던 그들과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그런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호치민의 협력관계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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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스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만화화한 작품. 흐루쇼프와 케네디가 팔씨름을 하고 있다.)

 

경제 호황이 한참이던 1950년대 미국은 냉전이라는 구도에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경쟁을 이어나갔었다. 이러한 경쟁은 우주와 세계 정치 그리고 문화를 놓고도 이루어졌지만, 군사력 경쟁이 가장 위협적이고, 민중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소련 간의 군사력 경쟁에서 양측은 상당히 많은 재정을 군비를 확장하는데 지출했는데, 핵무기 개발은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긴장 및 불안감이 존재하던 1957년 미국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Sputnik)를 우주에 쏘아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스푸트니크호 발사를 시작으로 양측은 우주 경쟁을 끊임없이 했는데,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소련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이 분야에 있어선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우주경쟁이 있던 1961년 동과 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의 베를린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는 일이 있자, 양측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는 자칫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했는데, 그게 바로 1962년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시작될 뻔했던 나라 쿠바는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를 찾은 이후부터 쿠바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었다. 그러던 19세기 중후반 쿠바인들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결과적으로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서전쟁에서 스페인이 물러간 이후 미국은 쿠바에다 형식적으로 독립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쿠바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못했던 것은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미제국의 경제적 지배로 이어졌다.

(쿠바 혁명 당시 시에라마에스트라를 중심으로 혁명 투쟁을 했던 혁명 게릴라들)

 

이렇게 해서 쿠바는 제국주의 앞잡이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정권에 이르기까지 50년 동안 미제국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었다. 쿠바 경제의 중심인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자본은 당연히 미제국의 자본가들을 배불리는데 사용되었고, 쿠바의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착취하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1956년 대략 82명의 혁명가들을 태운 보트 그란마 호가 쿠바에 상륙했다. 그 상륙작전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다. 상륙했을 당시 바티스타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았던 그들중 살아남은 일부는 쿠바의 밀림속으로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했고, 1958년 여름에 대략 200명 이상의 게릴라군을 확보했다. 그렇게 하여 쿠바에서 혁명투쟁을 하던 그들은 1959년 1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800명의 게릴라로 바티스타 괴뢰군을 격퇴하고 쿠바를 장악했다.

(수도 아바나에서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체게바라)

바티스타 정권 타도 이후 등장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혁명정부는 외세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세우려 했다. 당시 그들은 미국에게 빼앗긴 경제 주권을 되찾고자 국가의 주요산업을 국유화했고, 극심한 빈부 격차를 줄이고 소외된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즉 그들은 쿠바의 부를 학교와 병원, 복지를 늘리는 데 활용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들을 실행에 옮기자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는 쿠바에게 경제적 제제 및 방해공작을 일삼았다. 1959년 10월 쿠바에 대한 불법 공습을 개시했던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는 1960년 3월부터 쿠바 침공을 위한 반공 게릴라를 양성했다.

(콜오브듀티 블랙옵스에서 나온 피그스만 침공 당시 미군의 비행장 폭격)

(피그스만 침공 당시 포로로 붙잡힌 CIA 군대)

이렇게 하여 미국과 쿠바의 긴장관계는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1961년 3월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F케네디는 그해 4월 17일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쿠바 망명자들로 구성된 1400명의 병사를 쿠바의 피그스 만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들을 상륙시킴과 동시에 미국은 쿠바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을 대비했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은 침략을 무찔렀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은 망명자로 구성된 CIA 부대의 병사 114명을 사살하고 1189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러나 케네디는 쿠바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침공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1961년 11월 케네디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를 실행하여 쿠바를 겁박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1962년 4월에는 미군 4만 명이 “카리브해의 한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목표로 2주간 군사훈련을 실시했었다. 그해 5월에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훈련이 두 차례나 있었고, 케네디 정부는 그해 여름과 가을에 걸쳐 쿠바 침공을 위한 비상 계획을 강화했다. 1962년 10월에는 카리브해의 한 섬에 해병 7500명을 상륙시켜 현지 정부를 전복시키는 가상 침공훈련을 전개했다.

(쿠바 지도)

(쿠바 미사일 기지 사진.)

미국의 쿠바 침공을 격퇴하고 난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관계를 확장했다. 다음해인 1962년 10월 소련의 수상 니키다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쿠바에다 핵폭탄이 정착된 ICBM을 설치했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에서 충격적인 사진들을 찍어 보내왔는데, 분석 결과 사진에 포착된 것은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과 소련이 제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10월 22일 미국은 데프콘 3를 발령했고, 10월 24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데프콘 2까지 발령했으며 소련 지역 목표물들에 대한 타격 준비를 마치기 까지 했다. 또한 케네디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최후통첩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쿠바 ‘고립책’의 일환으로 해상 봉쇄 명령을 내렸고, 쿠바 침공을 위한 총공격 태세에 돌입했다. 심지어 핵무기를 탑재한 B-52 폭격기까지 발신시켰었다.

(쿠바 미사일 위험도를 보여주는 관련 지도)

(미국의 쿠바 봉쇄를 나타낸 그림)

(쿠바를 봉쇄했던 미국 군함들)

 

그러자 소련의 니키다 흐루쇼프는 “미국이 우선 쿠바를 다시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다음으로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한다면 소련도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라고 응답했다. 비록 존F케네디가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케네디가 첫 번째 요구안을 받아들이자 1962년 10월 26일 소련의 니키다 흐루쇼프는 쿠바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쿠바에 있는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13일간 지속되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고 끝이 났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미국의 역사 교과서나 소위 자유주의 역사 교과서에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마치 소련과 쿠바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며 위협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은 위협을 가하고, 협박을 표출했던 주체는 소련이 아닌 미국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소련보다 군사력에서 압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 소련이 4기의 ICBM을 가지고 있었을 때, 미국은 대략 45기의 ICBM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기 소련이 192대의 중폭격기를 가지고 있었을 때, 미국은 1500대 이상이나 된는 중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이 약 2만 50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때, 소련은 그것에 1/10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13일 간의 핵전쟁 위기가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데프콘 2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소련의 흐루쇼프를 향해 “미국이 소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렇게 해서 위기는 1962년 11월 20일에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0시 1분 전. 이 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책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은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소련을 압도한다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힘의 논리’라는 것에 심취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소련과 쿠바를 위협했고, 그 과정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도 쿠바를 상대로 각종 경제 제재를 가해왔다. 이것또한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로 맞서는 미제국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던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선 패배를 향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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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ger Close: The Battle of Long Tan, Now a Major Motion Picture (Paperback)
Bob Grandin / Allen & Unwin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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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탄 대전투를 감상하며

어제 아침 보고싶었던 영화 한편을 감상했다. 그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호주군을 주연으로 한 영화로 전투에서 승리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댄저 클로즈: 롱탄 대전투>다.

사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호주와 뉴질랜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 병력을 파병했던 국가 중 하나다. 호주 또한 미국이 만들어낸 도미노 이론을 철썩같이 믿었고, 그런 반공적 믿음은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이어졌다. 호주는 미국과 한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그들은 주로 남베트남의 남부에서 작전을 전개했었고, 영화에서 나오는 롱탄 대전투 또한 수도 사이공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영화에 대해 얘기하자면, 영화를 제작한 측에서 전투 재현 및 고증에 충실하고자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등장하는 인물들 거의다 실존인물이고, 항공기, 대포, 네이팜 폭탄, APC 장갑차등 등장시킬 수 있는 장비는 최대한 등장시켰다. 비록 12세 이상 관람이다 보니 잔혹한 장면은 없었지만, 위워 솔져스 그 이상으로 전투씬이 훌륭했다.

무엇보다 영화상에 있는 호주군들은 혼자서 몰려오는 적들을 죽이는 느낌이 아니라 병사 하나 하나가 서로 협력하며 공격을 차례 차례 방어하며 버티는 느낌이었다. 예를들면 탄약 확인해가며 조준사격으로 한발씩 쏜다든지, 베트콩들이 무조건 적으로만 죽지는 않는다는지 하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이런점은 역사 고증은 무시하고 전투에 대한 과장 및 왜곡으로 얼룩진 봉오동이나 장사리하고는 질적으로 다른것이 느껴졌다.(물론 딱 한번 베트콩이 독일제 Stg 44를 사용하는게 포착되었지만, 대다수가 AK-47을 사용했으니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고증은 좋았지만 이 영화는 매우 치명적인 결점 및 비판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호주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으로 일어난 제국주의적 전쟁 범죄였다. 그리고 침략국은 패배했다. 그런 패배한 전쟁과 명분조차 없던 전쟁을 단순히 애국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영화 제작자들의 의도가 참으로 좋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영화상에서 호주군 병사들이 베트콩으로 부터 포격을 받고 난 뒤 이런 대사를 한다.

호주군1: 적은 또 언제 공격해올까요?

호주군2: 어제 그 공격은 우리 간을 보기 위한 테스트였어! 즉 우리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그랬던 것지.

호주군2: 너 디엔비엔푸 전투 들어봤어?

호주군1: 아뇨 들어본적 없어요.

호주군2: 알지 않는게 좋을거야!

디엔비엔푸 전투에 대해 알지 않는 것이 좋다고 얘기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가 베트남 전쟁의 본질적 문제는 아예 숨기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만큼 이 영화는 반공적 시각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상에서 병사들은 ˝역사가 우리를 기억하겠지?˝ 따위의 소리를 한다.

1966년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싸웠던 이 전투에서 호주군 18명이 전사했고, 베트콩은 2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그 이유는 호주군이 전투기 대포 APC 장갑차등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은 최대한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호주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고, 남베트남 민중의 민심을 얻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를 볼 때 생각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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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 반대 집회를 참여하며.

오늘 광화문에서 열리는 이란 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2020년 새해가 무섭게 중동 분쟁은 긴장감이 최고도까지 상승했는데, 이는 트럼프가 이란의 군사령관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란과 미국사이의 긴장 및 중동지역의 긴장감은 급격히 상승했다.

과거에도 미국은 그러한 정치공작을 일삼았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었고, 리비아의 국가 지도자 카다피를 암살하기 위해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며, 베네수엘라에서 반동 쿠데타를 획책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이란을 위협하며 중동의 평화를 깨뜨렸다. 자칫하면 미국과 이란간의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단계까지 오게됐다.

현재 미국과 이란간의 긴장관계가 높기에, 자칫하면 중동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거기다 한국또한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을 논의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현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것에 맞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및 반동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반대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난 오늘 열린 이란과의 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지난번 이석기 동지 석방 요구 집회때도 느꼈던 일이지만, 이번에도 우리의 전쟁 반대 집회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압도적인 규모로 우리를 포위하여 온갖 추잡한 욕설들을 내뱉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로지 친미만 내세우는 그들은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교훈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욕할 수 밖에 없다.

미제국주의의 깡패짓으로 현재 중동이 위태롭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제국주의의 이란 때리기 행위와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반대해야 한다. No War With 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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