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이클 매클리어의 책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당시 미국은 이른바 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군들을 바탕으로 특수부대를 만들었으며이들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으며많은 공로를 세웠다이 특수조직이 바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이 OSS에는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의 출신인 아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라는 인물도 활동했었다아키메데스 패티는 1913년 뉴욕에서 태어나 1941년 미군에 입대한 인물이었다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입대한 패티는 특수임무반 장교 신분이었고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살레르노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었다.

 

패티의 주된 임무는 반파시스트 비밀 단체와 연락한 다음 협력하는 것이었으며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 목적이었다패티는 주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외에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활동했었다. 1944년 초 연합군이 이른바 안치오(Anzio) 상륙작전을 준비할 당시 패티의 근무지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변경됐다그로부터 5개월 뒤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했고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전투가 치열해졌다그 시기 소령이었던 패티는 한밤의 추위를 느끼며 군 수송기에 올랐고, OSS 총책임자인 윌리엄 도노번(William J. Donovan)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탈리아 해안기지에 도착했다참고로 윌리엄 도노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의 사진)

 

OSS 총책임자였던 도노번 장군은 유럽에서 반파시스트 단체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듯이아시아에서도 추축국 일본에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당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에 맞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고마오쩌둥의 공산당 또한 마찬가지였다도노번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주목했고버마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했듯이 이 지역에서도 반일단체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따라서 도노번은 당시 항불항일을 내세우며 이에 저항하고 있던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과 연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 OSS는 인도차이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따라서 도노번은 인도차이나 지역 같은 곳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패티 소령을 인도차이나에 보낸 것이다물론 패티 또한 인도차이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패티가 아는 것은 그냥 그 지역이 아시아의 어느 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를 해방시키고난 이후 패티는 인도차이나로 향했다패티 소령의 파견 목적은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효과적인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패티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사전 정보 수집을 위해 수개월 동안 백악관과 국무부 전문가들에게 상세한 브리핑을 받았으며인도차이나가 중국 본토와 남태평양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전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전략적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노이에 모인 베트민과 OSS)

 

1945년 4월 초 패티는 중국 남부에 있는 도시인 쿤밍에 도착했다당시 패티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는데그것은 바로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을 만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이들의 만남은 1945년 4월 30일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는 날에 이루어졌다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외진 시골의 허름한 찻집에 들어섰을 때패티는 한 노인을 만났다그 노인은 완벽한 영어로 어서 오시오친구!”라고 첫인사를 건냈으며그는 패티에게 자신이 호치민이라고 소개했다이들은 이렇게 만남을 가졌고서로가 다양한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호치민을 만나기 전 패티는 베트남의 역사가 중국에 대항해서 대략 2,000년간 맞서 싸운 역사인 것과 자신이 만나게 될 호치민이 전설적인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심지어 OSS의 기록에서도 호치민을 베트남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얘기했을 정도였다.

(OSS 사슴팀 대원들과 호치민, 반바지를 입고 있는 이가 호치민이고 양복을 입은 이가 보 응우옌 잡이다.)

 

패티는 베트남 인민들이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항해서 격렬하고 끊임없이 항거해 온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미국의 전시 동맹국인 프랑스에 대항해 싸우는 호치민의 독특한 투쟁 방식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패티는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 체류할 당시 공산주의 학습을 받았고그가 창설한 베트민은 공산당의 한 지류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베트민은 정보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베트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패티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쓴 저서 <왜 베트남인가?(Why Vietnam?)>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호치민과 역사적인 만남 이후 실질적인 면에서 호치민과 베트민은 내가 인도차이나에 정보망을 구축하는 데 구체적인 해답이 되었다그는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했다. ‘진부한 강령이나 외치는 망상적인 혁명주의자나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과격분자로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나의 이런 열망은 미국과 어떠한 충돌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당시 호치민은 미국의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구식민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패티와 호치민이 공유하고 있던 공통적인 입장이었다호치민과의 만남을 통해 입장을 확인한 패티는 워싱턴에 호치민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전달했다그는 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중경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공식 보고했다패티가 보낸 보고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호치민은 무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며베트남 독립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삼고 싸우는 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미국의 OSS와 베트민은 1945년 초부터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방향이었다특히나 1944년 베트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를 호치민이 구출해주면서 미국 OSS는 호치민과의 협력하고자 했다. 1945년 5월이 되자 호치민의 베트민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6월에는 호치민이 패티에게 미국이 필요하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언제든지 약 1,000명의 베트민 게릴라 부대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까지 했었다실제로 패티는 인도차이나에서 최초의 미군 군사작전을 계획했었다패티는 이른바 사슴팀(Dear Team)을 만들어 베트민을 미국 무기로 무장시키고 군사훈련까지 제공했다. 7월 16일에는 패티 소령의 후배 장교인 앨리슨 토마스(Allison Thomas) 소령이 이끄는 OSS 게릴라 부대가 하노이 인근 산악 지대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으며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미국의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온 패티)


(패티의 저서 <왜 베트님인가?> 베트남어로도 번역됐다.)

 

패티는 베트민과의 공동작전 수행을 위해 그들을 훈련시키는 한편베트민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패티는 이들에게 기관총과 자동소총 그리고 수류탄 등을 낙하산을 통해 제공했다미군 무기로 무장한 잡 장군의 게릴라 부대는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OSS 사슴팀은 베트민과 공동작전을 펼쳤다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와중에 미국 OSS와 베트민이 치렀던 대일전이었다이러한 공동협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끝나면서 종결됐다분명한 건미국과 베트민이 협력했고당시 그 누구도 불과 20년 만에 미국과 베트남이 참혹한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패티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OSS 사슴팀 교관과 수류탄 투척 훈련을 받고 있는 베트민 대원)

 

패티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둘(패티와 호치민)이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4월 30일이었습니다그리고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을 떠난 날짜가 30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이었고요그 동안에 나를 따라서 280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는데그 중에서 약 5만 7,000명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이 조용한 나라에서 벌어진 의문투성이의 전쟁에서 200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도 희생되었습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당시 호치민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하는 호치민) 


돌이켜보면, OSS는 불과 1개월 동안 약 200여 명을 선발하여 미래의 베트민 지도자로 양성한 셈이었다얼마 후 베트민군 사령관이 된 잡은 사슴팀이 자신들을 도와 점령한 마을을 탄짜오라고 명명했다그 뒤 호치민이 이 마을에 임시정부를 설립함에 따라 탄짜오는 베트남의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다. OSS는 이후에도 계속 호치민의 군대를 훈련무장시킨 다음 함께 전투를 펼쳤다이와 같은 일은 훗날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를 살펴볼 때아리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출처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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