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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진짜 미국이야기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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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서평: 미국의 실체를 낱낱이 알 수 있는 명저

평창동계올림픽이 진행되던 2018년 나는 우연히 책 한권을 받았다. 그 책이 바로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였다. 당시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와 더불어 이 책을 읽었던 나는 미국여행을 하면서 책 한권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책이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이었다.

하워드 진 선생이 쓴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4년 전에 읽은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의 개정판이다. 이 책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며, 미국이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범죄와 살인을 저질렀음을 보여준다.

자국의 자본과 기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범죄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미국이다. 그런 악행을 통해, 많은 이들의 생명을 잃어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 무수히 많은 군 기지를 소유하고 있고, 그 나라 보호를 명분으로 타국에게 막대한 주둔비를 요구하기도 한다.

1898년 미국이 쿠바를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거짓 명분으로 일어난 미서전쟁은 미국의 쿠바 식민지 건설과 필리핀 식민지 건설로 이어졌다. 특히나 미국은 필리핀에서 수십만 명의 필리핀인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10세 이상의 필리핀을 죽여도 된다는 기준을 세워놓고 저지른 학살이었다.

특히나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정말 잔인했다. 니카라과에서의 콘트라 반군 지원과 엘살바도르에서의 친미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 미국은 자유라는 이름 하에 중남미의 독재자들과 학살자들을 지원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유엔 헌법의 기준을 운운했지만, 미국은 절대로 이를 지키지 않았다. 뻔뻔스럽게도 레이건은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사일 몇기만 팔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2,000기 이상 팔았고,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미사일을 팔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미사일을 팔았고, 콘트라 반군에 자금을 주었다. 레이건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미국은 자국민에게 있어서도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다. 사업가 조지 풀건은 경제 불황을 핑계로 노동자의 임금을 25%나 삭감했지만, 주주에 대한 배당금은 올렸다. 이에 저항한 노동조합 운동가 유진 뎁스는 결국 감옥에 구금됐다. 1889년에만 22,000명의 미국 철도 노동자가 사고로 죽거나 다쳤다. 그런데도 자본가들은 이윤축적을 위해 이러한 현실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었다.

미국은 냉전초기 스탈린의 독재 체제로부터 나라를 지킨다고 운운하며, 자국 국민을 매카시즘으로 탄압했다. 또한 중국의 국공내전과 그리스 내전 그리고 전후 필리핀 문제에 개입하여, 각국의 민족 반역자들을 지원했다. 그리스 내전에서 미국이 지원한 세력은 과거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반역자들이 대다수였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아마도 단편적으로 알 것이다. 특히나 외교와 정치 그리고 역사부분에 있어서, 6.25 전쟁과 함께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종북좌빨‘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전개하고 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전쟁에서 프랑스의 전쟁비용 80%를 지원했고, 이란의 지도자 모사데크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자 그를 쿠데타로 축출하여 이란에 친미왕조 경찰독재국가를 세웠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미국의 정책이 과연 민주주의적이었는가? 하워드 진 선생이 쓴 책은 이점에서 많을 걸 생각하게 만든다. 미국은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에게 경제제재를 가하여, 125만 명의 이라크인을 아사시켰으며, 이런 경제제재를 통한 범죄행위는 현재 이란과 베네수엘라 북한 등에서 자행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워드 진 선생의 지적처럼 미국은 절대로 대외적으로 폭력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단순히 미국의 제국주의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미국이 베트남을 불법적으로 침략했지만, 미국인들은 전쟁에 반대하여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차별받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인권운동가들과 더불어 민권운동을 전개했고, 많은 부분에서 권리를 쟁취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은 미국 민중이 함께 병행한 투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주장이다. 최근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많은 한국인들이 신경쓰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 세력을 버젓이 지원하고 있다. 단순한 인도적 지원이 아닌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미국이 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 얻으려는 목적이 뭘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국은 현재 러시아를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가난에 허덕였던 러시아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극심한 경제제재와 국제적 및 군사적 압박을 할 이유가 없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탈산업화 이후 이득을 본 것은 바이든을 포함한 미국의 군수산업과 민간기업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때, 미국에 대한 비판은 매우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에선 미국에 대한 비판이 너무 약하다. 하워드 진의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왜 우리가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해야하는지 그 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몇년만에 다시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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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학살을 요약한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저지른 학살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상상을 초월했다워싱턴DC에 가면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58,000명의 미군 전사자 이름이 적힌 비석을 볼 수가 있지만당시 베트남 민중이 치러야 했던 희생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1995년 베트남측의 추정에 따르면 이 전쟁에서 총 500만이 죽었는데, 100만 명이 군인이고 40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확실하게 조사된 것은 없지만이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다고 주장했으며베트남 전쟁의 미국의 명백한 실수 및 과오였음을 인정했다대다수의 추정으로는 대략 남북베트남 민간인이 2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움직이는 것은 모든 쏴죽여라, 닉 터스가 쓴 저서다.)

 

이 전쟁에서 최소 200만에서 500만에 달하는 베트남인이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이러한 학살극의 중심에는 바로 미국이 있었다특히나 B-52를 포함한 최신식 무기를 동원한 무차별 폭격과 고엽제 살포 그리고 수색과 섬멸 작전에서의 민간인 사살 등으로 상당히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특히나 베트콩만 하더라도 농민군에 가까운 존재였기에 미국은 사실상 민간인과 군인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을 치렀다미국의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1970년 닉슨의 캄보디아 침공이 있는데이 캄보디아에서만 50만에서 80만의 민간인이 미국의 융단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학살당했다.

(베트남 미국의 홀로코스트,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마틴 쉰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미국은 수년간 북베트남과 호치민루트베트남 중부고원지대를 포함한 남베트남 전역을 무차별 폭격했는데통계의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부고원지대에서의 폭격으로 산악부족들을 포함하여 최소 2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정확한 통계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켄 번즈(Ken Burns)가 제작한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 5화를 보면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연설을 하는 장면에선 반전 시위대의 피켓에 베트남 어린이 100만 명 부상 25만 명 사망이라고 나와있다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서의 대량 폭격에 의한 학살로 죽은 민간인은 최소 200만이 넘는다 할 수 있으며바로 베트남 전쟁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미군의 융단폭격, 미국의 폭격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만들었다.)

 

미군 폭격에 의한 학살로 최소 100만에서 200만 그리고 3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죽었다고 할 수 있는데고엽제에 의한 학살도 만만치 않았다미국은 케네디 행정부때부터 디엠정부의 베트콩 소탕작전을 지원하면서 네이팜탄과 고엽제 살포를 실행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대략 10년간 남베트남과 호치민 루트라오스캄보디아에 대량의 고엽제가 투하되었다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가 투하됐다주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고엽제였는데베트남 인민 1인당 2.7kg 달하는 다이옥신을 퍼부은 셈이다고엽제 투하로 최소 50만 명이 사망했으며, 400만 명이 넘는 베트남 민간인이 극심한 피해를 봤다.

(베트남 밀림에 살포되고 있는 고엽제, 미국은 남베트남 전역을 고엽제로 색칠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줬다.)

 

미국의 학살은 군사작전 과정에서도 벌어졌다일각에서는 1968년에 윌리엄 캘리 중위(William Calley)가 저지른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 미군 개인의 일탈이나 유일한 학살이라 주장하는데이는 사실이 아니다미라이 학살은 엄밀히 4시간 동안 꽝응아이성에 있는 손미마을과 미케 마을에서 30명의 미군에 의해 벌어진 학살이었고군에 의애 철저히 베트콩 사살로 은폐 당했던 사건이다미라이 학살로 총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이중 1/10은 영유아였고대다수는 노인여자아이들이었다또한 적잖은 여성들이 학살 전에 미군에게 강간당했다이런 학살은 사실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 책 관련 인터뷰에서 주장했듯이베트남 전역에서 발생한 일이었다심지어 당시 주월미군 총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 또한 민간인도 베트콩으로 간주하는 전략을 추구했었다.

(1968년 미라이 학살 관련 사진, 미군은 미라이에서 총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런 학살은 베트남 전쟁 당시 전반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닉 터스(Nick Turse)는 2013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이라는 책에서 미라이 학살 사건 외에도 최소 100건 혹은 그 이상의 학살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친미성향의 역사학자이자 한때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지지했던 권터 루이(Guenter Lewy)는 자신의 책 America in Vietnam에서 미군의 바디 카운트(Body Count)로 최소 22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측했다또한 미군의 수색 작전 중 하나인 초고속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에서는 15,000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이 중 7,000명에서 10,000명 가까이가 민간인이었다쉽게 말해 이런 민간인 살상은 미군이 동원한 헬기 사격과 폭격자유사격지대에서의 기관총 및 소총사격에 의해 발생했다.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언급했다많은 사람들이 다소 외면하는 사실인데엄밀히 따졌을 때 미국이 전쟁에서 적으로 규정한 베트콩은 1960년 대다수의 민간인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였다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가 주연을 맡은 영화 <굿모닝 베트남(Good Morning Vietnam)>에서는 루이스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나오며미국이 수렁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이 장면 중 하나에는 미군 혹은 남베트남군으로 추정되는 군인이 베트콩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을 체포하여 재판도 없이 총살하는 것으로 나온다실제로 남베트남 내부에서 이러한 일은 자주 일어났었다그 외에도 고문 및 강제구금과 같은 여러 범죄행위들이 일어났다이것은 미국과 그의 하수인인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일어났다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극이라 봐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미국대외정책론촘스키임채정일월서각, 1985

 

America in Vietnam, Guenter Lewy,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Nick Turse, Picador, 2013

 

Vietnam: American Holocaust(2008, Documentary), Martin Sheen, Linux Beach Productions, 2008

 

The Vietnam War, Ken Burns, PB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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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20년 만에 끝나가고 있다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미군은 거의 다 철군을 한 상태다사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그러나 2015 10월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아프가니스탄 문제는 결국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갔다트럼프 행정부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및 병력 감축을 추진했으나임기까지 대략 수천 명의 미군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두고이 문제는 다시 민주당의 조 바이든 행정부로 넘어갔다.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위치)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예상보다 오래갔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빈라덴의 알카에다 소탕을 외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미국은 20년 동안 이 전쟁을 치렀다. 2,40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1만 9,000명 이상의 미군이 부상당했으며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또한 2~3만 명이 전사했다미군 다음으로 병력이 많던 영국군 또한 500명이 전사했다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게릴라전으로 미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던 탈레반 또한 최소 4만에서 5만 많게는 10만 가까이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민간인 또한 1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 복장을 한 로버트 베일스 하사, 그는 2012년 3월 11일 16명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을 혼자서 학살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초기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토대로 탈레반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고 장악했다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도널드 럼스펠드(올해 고인이 됨)는 아프간 동굴 속 테러리스트 수백 명을 찾아내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이 병력을 증강하던 2008이 전쟁은 현재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아이언맨(Iron Man)이 영웅으로 탄생하는 곳으로 영화에서 등장하기도 했다영화상에서 보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적인 탈레반을 최신식 무기를 장착한 로봇으로 괴멸시킨다심지어 이들이 가진 탱크까지 미사일 한방으로 격파한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을 본 이라면 이 장면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미국 헐리우드사는 이런 장면을 통해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합리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로버트 베일스의 사진, 이 사진은 군감옥에 수감중 찍은 사진이다.)

 

그렇다면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가려진 이면은 무엇일까베트남 전쟁 당시 손미 지역과 미케 지역에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과 비슷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어났다미라이 학살에 비하면 학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미국의 폭격과 군사작전으로 죽은 민간인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가 바로 2012년 3월 11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칸다하르 학살(Kandahar massacre)이다.

(칸다하르 학살 증거인멸 시도 현장, 로버트 베일스 하사는 학살을 저지르고 나서 시신을 불태워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당시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소속의 로버트 베일스(Robert Bales) 하사는 2012년 3월 11일 새벽 3시 경에 M203유탄 발사기를 장착한 M4 소총과 M9권총으로 무장했다야간투시경까지 착용한 로버트 하사는 중무장 상태로 부대를 빠져나와 부대에서 약 1.6km 떨어진 발란디와 알코자이 마을의 농가 세 곳을 습격하여민간인들을 학살했다새벽에 급습을 받은 마을 주민들은 로버트 하사에게 끌려나와 사살 당했으며총 16명의 민간인이 로버트 하사의 총탄에 살해됐다로버트 하사는 자신이 죽인 민간인들의 시체를 구석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증거인멸까지 시도했다한 마디로 학살을 저질러 놓고그 증거까지 없애려는 치밀함을 보여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통화중인 버락 오바마, 이 사건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오바마가 직접 사과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었다.)

 

그러나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부 주민들은 아프가니스탄 당국과 미군에게 알렸고로버트 하사 또한 복귀하여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자수했다이후 로버트는 쿠웨이트를 거쳐 본국으로 이송됐고영창에 수감당한 상태에서 군사재판을 받게 됐다당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 정부와 미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대통령인 오바마 또한 책임자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는 시민들이 반미 시위를 벌이며 미군들에게 돌을 던질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다이 소식을 들은 탈레반 또한 미군에게 보복 혹은 테러를 감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2년 12월 재판에선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으나, 2013년 6월 로버트 하사 본인이 유죄를 인정하면서 사형은 불가능해졌다대신 그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남은 생애를 교도소에게 보내게 됐으며지금도 균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현재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의 절차를 밟고 있다미군은 사실상 거의 다 철수한 상태고탈레반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토 70%를 접수한 상황이다뿐만 아니라 미국과 NATO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대상으로 보복도 벌어지고 있다탈레반 세력의 잔혹함과는 별개로 현재 이들이 승기를 잡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아프가니스탄 내에 반미감정이 극심하다는 반증이다아프가니스탄인들의 반미감정이 심해진 이유에는 당연히 이런 민간인 학살 사건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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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소련의 해체를 생각해 보았을 때, 이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라는 식의 논리는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다는 미국 우익 중심적인 시각에 매몰되기 쉬운 듯하다. 공산주의 이론의 아버지인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당시 산업혁명을 통해 확산된 자본주의에 대해 아주 강도 높은 비판을 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이 된다.

 

당시 마르크스가 했던 주장을 쉽게 말하자면 바로 이렇다. 소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착취하고 학대해서라도 자본주의는 이윤이라는 가치를 만들고자 하는데, 여기서 이른바 과잉 생산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 신발이나 양말이 100개만 필요한데 200개 그리고 300개가 생산되어 남아도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잉여생산을 팔아 치우기 위해서 19세기 당시 필요했던 것이 바로 제국주의 팽창을 통한 식민지였고,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런 자본주의를 토대로 제국주의 팽창에 나섰다. 물론 여기에는 제국주의 국가들끼리의 세력다툼도 있었고, 미국 또한 뒤늦게나마 이 대열에 합류했었다.

 

19세기 말기 미국 또한 식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영향력을 상실한 구제국주의 국가로 전락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이 신제국주의로 급부상했다. 신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을 핑계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익과 야욕아 아주 충실했다. 그리스, 한반도, 베트남, 그 외의 여러 중남미 국가들에서 이런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었다. 따지고 보면, 냉전은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이었으며, 그런 구도에서 냉전기 여러 분쟁들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얘기하자면, 마르크스가 지적한 제국주의는 현재 미국이 유지하고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의 신제국주의는 1991년 냉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오늘은 21세기 미국의 신제국주의의 사례들을 얘기해볼까 한다.

 

21세기는 20019.11 테러와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미국의 신제국주의는 1999년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 하나인 코소보 내전에 개입하여 대량 살상을 벌이며 20세기를 종결시켰지만, 21세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20019월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또한 2003년에는 후세인 정부가 신무기가 있다는 거짓말을 빌미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라크인 60만을 대량 학살했다. 당연히 이라크에는 신무기는 없었으며, 이라크 침공의 진짜 목적은 중동의 석유를 독점하겠다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딕 체니(Dick Cheney)는 자신이 CEO로 있는 헬리버튼 회사를 통해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였다.

 

한반도 문제에서도 미국은 제국주의적인 위선을 보였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한 이유에는 결정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있었으며,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트럼프가 북미회담을 하기 전까지 적어도 21세기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나 버락 오바마 등은 북한의 지도자와 진지하게 대화를 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군사적 도발만 앞세웠다. 특히 이런 군사적 도발은 민주당 정권이었던 오바마 정부에서 더 강력하게 표출됐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 또한 화염과 분노라는 도발적인 언행을 하긴 했으나, 이유가 어찌됐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두 번씩이나 만나 최소한 대화하는 노력이라도 보였었다. 트럼프 이전까지의 미국 대통령들은 대화보다는 진지하게 대립과 압도적인 군사적 도발만을 추구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적 구도는 엄밀히 따지자면 친미제국주의자인 이승만부터 내려오는 대결주의적인 한반도관에 입각한 성질의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문제 또한 미국은 아주 제국주의적으로 대처했다. 우선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세우려 하자, 미국은 석유가지고 경제적인 장난질을 일삼았으며, 베네수엘라가 사회주의를 하지 못하도록 온갖 추잡한 악행들을 저질러왔다. 심지어 2019년에는 친미주의자 후안 과이도를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차베스를 이은 마두로 정권을 붕괴시키려 했었다. 실제로 미국은 이런 제국주의적인 개입을 통해 이른바 레짐 체인지를 성공시키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2011년 리비아의 반카다피 시위가 그러했다. 사실 이 리비아 폭동은 정부군의 힘이 강했지만, 미국은 NATO라는 자신의 제국주의적 군사동맹을 끌어들여, 친서방 폭도들에게 공중지원을 해줬다. 물론 리비아 내전 개입에도 역시 석유를 포함한 미국 기업의 이권이 주된 원인이었다.

 

미국은 현재는 자본주의가 되어버린 러시아와 맞서는 것에도 각을 세우고 있다. 폴란드나 발트삼국 그리고 루마니아 등에다 자신들의 무기들을 배치하는 것은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위함이다. 또한 미국은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반러시아 시위에 개입하기도 했으며, 그 사례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사태다. 미국은 의도적으로 친서방 반공주의적인 세력들을 도왔으며, 여기에는 아조프 부대와 같이 대놓고 나치즘을 찬양하는 이들도 있으며, 친나치 협력자인 스테판 반데라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이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2019년 홍콩 사태때도 미국이 조슈아 웡과 같은 친서방 인사와 일종에 커넥션을 만든 것 또한 이런 레짐 체인지나 대중정책의 일환이라 봐야한다. 물론 홍콩 시위 자체의 성격은 친서방으로만 해석하긴 힘들다 하더라도 그 세력의 주류인 조슈아 웡과 같은 이들이 지원을 받는 이유에는 미국이 자주하는 레짐 체인지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

 

최근에 쿠바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레짐 체인지의 일환이며,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반정부 폭동일 뿐이다. 사회주의 쿠바는 체제 전복의 목적이 아닌 이상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 그 자체를 탄압하지 않는 사회다. 실제로 동성애의 권리가 인정받은 것이나, 쿠바사회에서 동물권 투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사회주의 쿠바 또한 소위 다양성이 나름 보장되는 사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일어난 반정부 시위는 말 그대로 미국 정부와 플로리다 쪽에 거주하는 친미 반공주의적인 쿠바계 미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일어났으며, 쿠바 정부의 훌륭하고 신속한 대처로 사상자 거의 없이 진압됐다. 오히려 쿠바 사회주의를 수호하려는 친정부 시위는 반정부 시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21세기에도 반복되고 있다. 내가 미국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현재 나는 전적으로 쿠바 정부편이며, 반혁명 폭동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생각한다. 미국의 제국주의가 무너지기를 바라며, 졸문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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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감독 아담 맥케이(Adam McKay) 2018년 딕 체니(Dick Cheney)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이스(Vice)’를 제작했다영화 바이스는 2001년 오사마 빈라덴의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받은 미국은 전역에 비상이 걸리고백악관의 지도부들 또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러나 영화상에서 아주 침착하게이 사건을 대응하며 즐기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였다영화에 따르면 많은 미국인들이 이 딕 체니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그가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모른다고 한다그렇다면 딕 체니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일까?

 

딕 체니는 1941 1월 3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전개되는 와중이었고그의 부모님은 열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의 지지자였다어린 시절 그는 성적이 우수했으며정통적인 미국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기에미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이 투철했다그는 1950년대 미국 와이오밍주 캐스퍼에서 자랐는데고등학교 시절 앞으로 아내가 될 여자 린 빈센트 즉 린 체니를 만났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성적이 좋았기에 1960년대 초 그 둘은 예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학에 진학하자 체니는 아주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음주운전과 패싸움 등등을 하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결국 일용직 노동자로 노가다를 뛰게 되었다. 1962년 당시 체니는 아내 린 체니와 사실혼 관계였는데부인 린 체니가 그를 아주 강력학세 갱생시켰다린 체니의 도움으로 방탕하고 술에 찌들었던 생활에서 벗어난 딕 체니는 와이오밍 대학교에 입학했고, 1964년 미국 국회의사당을 뽑는 보좌관 시험에 합격했다여기서 만난인물이 이후에 이라크 전쟁을 같이 계획하게 되는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이 격해지면서적잖은 미국 젊은이들이 징병으로 동남아시아 밀림으로 끌려갔다그러나 딕 체니는 대학 진학생에 이미 1965년 정식 결혼까지 한 상태였기에징집을 보류 받을 수 있었고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반전운동이나 기존 보수주의에 대항한 히피(Hippie)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이후 위스콘신 대학교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밟게 된 체니는 도널드 럼즈펠드 밑에 있으며닉슨 정부 측근들과 인맥을 맺기 시작했다또한 이 과정에서 1970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화당 측에 있으면서 활동한 딕 체니는 1976년 카터가 당선된 이후 잠시나마 정치인생에서 정체기를 맞게 되는데, 1978년 와이오밍주 선거에 도전했다다만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이 와서 병원 신세를 졌고연설력도 부족하여 밀리는 상황이었는데그의 와이프가 선거에 나가 유세를 적극적으로 하면서간신히 당선됐다이렇게 해사 1988년까지 체니는 무려 6선에 성공하였다물론 공화당으로써 보수층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정책들을 얘기했고실행하고자 했다체니의 꿈은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꽃을 피게 된다. 1970년대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더불어 로 vs 웨이드 사건’, 낙태 문제환경 문제 등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했다물론 딕 체니는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서 이런 것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80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딕 체니의 정치 일생은 다시한번 도약을 한다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딕 체니는 레이건을 따라 무기 제한법을 막고카터 정부 시기의 친환경 정책들을 폐기 시켰으며로널드 레이건의 중남미 정책을 적극 옹호하고 지지했다당시는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는데당연히 딕 체니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잔학하고 무자비한 콘트라 반군을 지지했던 것이다그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 있으면서 1987년연 공화당 하원 회의 의장이 되었고그의 아내 린 체니 또한 국립인문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국방장관을 하기도 했지만, 1992년 공화당의 빌 클린턴이 당선되자 레즈비언인 딸 메리 체니를 위해서 잠시마나 정치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었다즉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물론 그는 기업 하나를 운영하기도 했는데석유 대기업인 핼리버튼의 사장이 된 것이다이후 그는 이 핼리버튼 CEO로 있으면서 이라크 전쟁에서 엄청난 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딕 체니를 다시 찾게 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그가 바로 아들 부시였다아들 부시 또한 딕 체니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비슷한 막무가내 생활을 했었다아들 부시의 러닝메이트 제의를 수락받은 그는 2000년 조지 부시가 당선됨에 따라 부통령이 되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그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이후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이런 과정에서 국제법과 여러 비윤리 비상식적인 행위들을 벌였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딕 체니와 그 일당들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이른바 후세인 정부의 신무기였으나사실 이것은 거짓말이었고 진정한 목적은 미국의 패권 정립과 석유강탈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초기는 미국이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체포하면서빠르게 전게 되었으나결국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과 거짓말이 드러나면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이라크 전쟁의 책임으로 부시 임기 말기 민주당 하원의원이 탄핵안까지 내놓는 등 엄청나게 비난받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욕먹은 부통령 중 하나로 남게 되었지만탄핵은 부결되었고부시정부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딕 체니는 2008년 남오세아티아 전쟁(러시아와 그루지아 사이의 전쟁)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었다거기다 2015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과 그것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사실 딕 체니는 남에게 총을 쏘아놓고도 사과하지 않은 인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는데그런 인성을 가진 그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60~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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