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은 전 세계를 강타했다. 10월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919년부터 이른바 제3인터내셔널(The Third International)을 창설하여제국주의로부터 억압받는 국가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하고자 했다이에 따라 일제 치하 조선과 군벌전쟁을 겪던 중국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베트남을 포함하여무수히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193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상상화, 호치민과 혁명 동지들은 영국령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 중에서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매우 혁명적이다이들은 19세기부터 대략 100년간의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 지배를 하러 들어오자프랑스에 맞서 8년간 전쟁을 치렀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다프랑스가 물러난 이후 미국이 들어오자이들의 침략에 맞서 저항했고, 1975년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룩했다이것이 바로 현재 베트남 공산당이 가진 자랑스러운 역사다따라서 오늘은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과정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에서도 적잖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현재 베트남에서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호치민(Ho Chi Minh)은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위선에 크게 실망했었다그는 응우옌아이꾸옥(Nguyen Ai Quoc)이라는 가명으로 파리의 베르사유에 찾아가 안남 민족의 요구(Peuple Annamite)’를 미국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Woodro Wilson)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강대국들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이에 실망한 호치민은 레닌과 소비에트의 노선을 따르고자 했다. 1920년 프랑스 파리에 있던 호치민은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러시아의 레닌이 발표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태제를 보고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23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서 유학을 하며 코민테른(Commintern) 극동국에서 활동했다그는 레닌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아쉽게도 생전의 레닌을 만나지 못했다.

(쩐푸, 모스크바 유학파인 그는 193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이후 호치민과 대립하기도 했었다.)


(레홍퐁, 쩐푸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 유학했으며, 황포군관학교도 다녔었다. 베트남 공산당 초대 총서기를 지냈으며, 1938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1942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던 1924년 11월 중국 광저우로 가서 활동했으며, 1925년에 새로운 혁명 조직인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했다여기서 호치민은 교사로도 활동했으며잡지 탄니엔(청년)’을 발행하기도 했다여기서 활동했던 이들 중에는 레홍퐁(Le Hong Phong)이나 호뚱머우(Ho Tung Mau)도 있었다이 단체의 활동은 베트남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새로운 세대를 의미했다당시 베트남 독립운동의 민족주의 노선은 과거 근왕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판보이쩌우(반패주, Phan Boi Chau)와 판쭈찐(Phan Chu Trinh)으로 대표되었다그러나 호치민이 주도한 베트남 혁명 청년회와 1927년에 탄생한 베트남국민당(VNQDD, Vietnam Nationalist Party)의 등장으로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 교체됐다.

 

청년을 만든 호치민은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호치민의 추천에 따라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입학했다참고로 황포군관학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이 다녔던 곳이기도 하다그 외에도 쩐푸(Tran Phu)나 레홍퐁 같은 이들이 모스크바 동방노동자대학에 유학을 갔으며이들을 통해 혁명 요원들을 양성했다. 1927년에 와서 그 수가 대략 200명에 달했고, 1929년에는 청년의 당원 수가 많게는 1,000명에 이르렀다당시 호치민은 <혁명의 길>이라는 책자도 썼으며이는 베트남의 <공산당 선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냔단을 읽고 있는 호주석 포스터, 신문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게 인상적이다.)

 

1929년 5월 1일 베트남 혁명 청년회의 전국 대회가 영국령 홍콩에서 개최됐다이것을 시작으로공산당 창당 논의가 베트남 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활발해졌다이 과정에서 베트남 좌파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세 분파로 나뉘어 대립했다이중 공산당 결성파의 경우 1929년 6월 하노이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수립을 선언했다청년회 내의 일부는 비밀 공산당 조직인 안남공산당을 만들었으며마지막으로 신월혁명당쪽의 급진적 당원들이 가세한 인도차이나공산주의연맹이 만들어졌다즉 이렇게 세 조직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경쟁했다세 분파는 1929년 말까지 대립했다이러자 코민테른은 이들의 통일을 요청하는 서신을 베트남으로 보냈으며그 이후부터 이들은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베트남 공산당 초기 마크)

 

코민테른은 서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설립의 근본 교리들을 강조하면서세 개의 공산주의 정당이 통일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시했다이에 따라 호치민(당시 응우옌 아이 꾸옥)은 제3인터내셔널의 지침이라는 명분으로 베트남의 공산주의 조직을 통합하기 위한 회합을 소집했다. 1930년 1월 말 호치민은 홍콩에 도착했으며다른 공산당 조직들도 홍콩에 도착했다. 1930년 2월 3일 홍콩의 구룡에서 회의가 열렸으며놀랄 정도로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회의는 2월 3일부터 7일까지 대략 5일간 비밀리에 행해졌으며이 회의에서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 조직을 통합해서 하나의 공산당을 창설한다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그리고 통일된 당의 명칭을 베트남 공산당으로 정했으며당의 정강과 책략 및 당헌의 초안과 대중 조직에 관한 원리의 초안 등을 새로이 채택하는 것도 합의했다.

 

당의 정강과 책략에서는 베트남 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타도한다는 목적 아래조국의 독립을 되찾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지도하에 공산주의 사회로 도약해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임이 천명됐다당의 노선은 농민 대다수와 뚜렷한 반혁명세력이 아닌 부농 및 중·소지주들을 규합하고프티 브루주아지와 인텔리겐치아 및 중농과 제휴하는 것이었다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대였으며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인민을 지도할 수 있게끔 하는 수단이었다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된 것이다새로 창당된 정당은 통킹과 안남에 204코친차이나에 51중국에 15태국에 40명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930년 2월 새로운 정당의 결성과 더불어 응우옌 아이 꾸옥은 베트남 혁명의 다음 단계로 이행할 준비가 되었다그가 눌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듯이이 정당은 입헌당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 연맹(곧 해체되어 그 조직원들 대부분은 베트남공산당에 입당한다.), 하노이에 기반을 둔 베트남국민당이제 기능이 정지된 혁명청년회 등을 포함하는 몇 개의 정당과 분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그러나 꾸옥은 공산당이 비록 아직 어리고 작았지만, “그 모든 조직들 가운데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활동적이라고 단언했다이제 두 개의 주요한 공산주의 분파 사이의 싸움이 끝났기 때문에베트남 공산당은 정확한 정책과 새로운 내적 통일로 무장하고 급속하게 성장할 터였다마침내 응우옌 아이 꾸옥은 15세기의 애국자 레 로이가 외적으로부터 동포를 해방하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인 마법의 검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출처호치민 평전 p.268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은 영국령 홍콩에서 창당됐다베트남 공산당 창당은 세 개의 분파를 통합하고 새로운 혁명적 단계의 규정 및 노선 설정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었다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모스크바 유학파인 쩐푸가 그러했다쩐푸는 베트남 공산당 결성이 당시 코민테른의 노선을 크게 일탈했다고 판단했으며실제로 호치민에 대해 이론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그는 베트남 공산당을 코민테른의 노선에 충실한 당으올 변혁시키려고 했었다. 1930년 10월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쩐푸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당의 지도권을 장악했으며쩐푸는 당명을 베트남 공산당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변경했다그렇게 해서 오랜 기간 동안 베트남 공산당의 당명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이기도 했다.

(202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90주년 포스터 1, 2020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되던 193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한 봉기가 통킹과 안남 일대에서 일어났다시작은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했다물론 베트남 공산당 또한이 봉기에 가담했으며대표적으로 응에안 성 하틴 소비에트 봉기(Nghe-Tinh Soviet)가 그러했다공산당은 세포조직을 이용하여 곳곳에 소비에트를 수립했으며토지의 재분배를 비롯한 소작료 인하와 세금의 경감 등을 실행했다진보적인 정책들을 직접적으로 실행했던 것이다결과적으로 이 봉기는 1931년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됐다프랑스 당국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이 봉기를 진압했다인도차이나 공산당은 그 이후 조직 재건에 힘썼으며이는 성공적이었다.

(202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90주년 포스터 2, 2020년 베트남 다낭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1930년 봉기 이후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완벽히 사회주의 세력들이 주도하게 됐다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호치민은 1941년 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했다호치민은 1911년 21살의 나이에 베트남을 떠나 1941년 51살의 나이에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예리하고 선견지명을 가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침략이 있자이들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다그것이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베트민은 당연히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주를 이루었으며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침략까지 무찌를 수 있는 역량을 창조하고또 지휘했으며 궁극적으로 제국주의를 무찔렀다.

 

참고문헌

 

쟝 라꾸뛰르안혜련(), 베트남의 별소나무, 1988

 

베트남공산당사연구회김종욱(), 베트남공산당사소나무, 1989

 

윌리엄 J. 듀이커정영목(), 호치민 평전푸른숲, 2003

 

송필경왜 호찌민인가?에녹스, 2013

 

후루타 모토오이정희(), 베트남왜 지금도 호찌민인가학고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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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수십만 명의 병력과 수백 척의 함대를 동원하여 그리스를 침공했다.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연합은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웠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최정예부대와 함께 천연의 요새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웠다. 최정예부대 300명은 왕 레오니다스를 포함하여 모두 전사했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에 진입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제독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대함대에 반격하여 승리했다. 다음해인 기원전 479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을 플라타이아이에서 격파함으로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많은 지역 세력들이 그리스군에 합류했었다.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당시 그리스는 동지중해 지역을 완전히 지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가장 부강한 세력이 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두 동맹이 탄생함에 따라 서로 대결하는 체제로 돌입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만들어졌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는 펠로포네소스 동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정치적으로도 달랐으며, 군사적으로도 달랐다. 아테네는 해군을 스파르타는 육군에 주로 의존했다. 이들이 충돌하며 결국 일어난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크게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기원전 431~421)는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의 아테네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양측은 10년 동안이나 소모전을 치르고도 아무런 결과가 없이 종결됐다. 2단계(기원전 421~415)는 양측이 휴전을 맺고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3단계(기원전 415~404)에서 아테네가 시칠리아의 내전에 개입하고 원정군을 보냄으로써 다시 큰 전쟁으로 확대됐다. 시칠리아 원정에서 아테네의 해군은 큰 타격을 입고 원정에 실패했다. 그 이후 스파르타는 수 차례에 걸쳐 아테네를 침공했는데,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사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강화하고, 육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곳곳에서 아테네 군을 제압했 이에 따라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

 

결국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했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을 파괴하도록 강요당했으며,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함으로써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아테네는 수비를 위한 12척의 배만 남기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가 중심적 역할을 했으나 그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파르타에 패한 아테네 해상 동맹은 스파르타의 독단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페르시아가 중간에 끼어 이들을 더욱 이간질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은 수십 년에 걸친 혼전을 시작하게 됐으며, 동시에 엄청난 국력의 소모를 겪었다. 그 대신 북쪽에서 마케도니아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으며, 마케도니아는 전 그리스를 통일했다.

 

사실 북쪽의 마케도니아는 과거 그리스 전성기 시절 야만인으로 취급받았었지만, 이후 그리스 전역을 장악했다. 이 마케도니아가 바로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본 인물인, 알렉산더 대왕을 탄생시킨 나라였고, 이후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가 정복전쟁을 하게 됨에 따라 영토를 팽창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단숨에 읽는 세계사>, 역사연구모임, 2009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김희보, 2010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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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평전 - 역사 속의 삶, 역사가 된 삶
리처드 J. 에번스 지음, 박원용.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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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꼭 읽어야할 필독서가 한권 더 생겼네요. 홉스봄 선생의 <극단의 시대> 여러모로 감명깊게 읽었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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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플 시험도 제재받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3월 13일부터는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은 토플 시험도 제대로 치를 수 없게 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합니다. 한국도 대북재재할때는(표면적으로) 인도적 교류를 막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미국의 러시아 경제제재는 인도적 차원의 교류도 제재하는 야만성을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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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으로 들어가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

오늘 드디어 터닝 포인트 4화를 봤다. 1화부터 3화까지 다큐멘터리가 사실상 미국이 겪은 9.11 테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4화부터는 본격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전쟁 초기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지했던 반면, 알카에다와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에는 입장이 갈렸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미국이 동원한 것이 바로 여론조작이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은 명분없는 전쟁임을 알고 있었지만, ˝사담 후세인이 신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언론을 통해 대사기극을 벌였다. 이런 사기극이 바로 이라크 전쟁이었다. 미국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 몇몇 곳에 신무기가 있다고 전쟁전에 주장했지만, 이라크 침공 결과 그곳에는 신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침공한 이후 모든 면에서 명분이 없었음이 드러났고, 미국은 4,500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으며, 수십만의 이라크인이 미국의 침공으로 사망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독재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미국이 한 것은 상황악화였고, 2008년 대선에 출마한 오바마 후보는 이라크 철군을 주장했다.

대선 시기 오바마는 이라크 철군을 주장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옳은 전쟁‘으로 포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한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수렁에 빠지게 됐지만, 미국은 올바른 명분이 있다며 이 전쟁을 포장했다.

여기서 이 다큐멘터리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명분이 없었음을 드러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들을 통해 보여준다. 전투 현장에 배치됐던 한 병사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고 증언한다. 결국 자신들이 그 나라를 돕기는 커녕 폭격으로 파괴했음을 시인한다.

이번 화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실책을 제법 여과없이 드러냈다. 물론 몇몇 점들은 미국의 입장에서 부각된 측면이 있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법 객관적으로 중동사태를 분석했다고 본다.

이제 이 다큐멘터리도 마지막화만 보면 된다. 다음에는 마지막화인 5화 리뷰를 올릴 예정이고, 마지막으로 다큐멘터리 총평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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