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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로마 제국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 50사건 11
김창회 지음, 진선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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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차원에서 읽어 봤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는게 낫지만, 읽기가 귀찮아 청소년용인 이 책을 읽었다.

초중학생을 위한 책 치고는 내용이 꽤 탄탄했다. 그 많은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썻다. 만화의 첫 시작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부터 시작한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 부터,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등장과 몰락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시저를 읽으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난 명장이지만, 지도자로서는 황제를 꿈꾸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독재관을 지내다가 갈리아 내전기 포로로 잡았던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당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시저가 암살당하면서 끝이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개혁과 정복전쟁에서의 공로 그리고 독재자로서의 모습을 얘기하며 과연 위대한 지도자인지 혹은 독재자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마 이후에 나타날 마키아벨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이사르를 꿈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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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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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서평: 유사역사학은 파시즘의 변형된 형태다.

내가 환단고기를 처음 알게 됐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당시 고구려사를 전공한 모 교수님은, ˝한국에도 대마도 회복을 외치는 모 집단이 있다.˝ 혹은 ˝환단고기라는 판타지 위서를 추종하는 집단이 있다.˝라고 주장했었다. 당시 환단고기에 대해 모르던 필자는 ˝무슨 소고기 이름이냐˝하고 그냥 넘겼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6년이었다. 당시 페이스북을 굉장히 열심히 했던 필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페친을 맺었다. 이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환빠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이런 말도안되는 주장들을 진서라며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17년 대전에 있는 증산도라는 사이비 종교를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시중에 나온 책들 중엔 환단고기와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 책들은 찾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수많은 서점에서는 소위 환빠 교주 안경전이 저자인 환단고기와 개벽과 같은 종교화된 서적들이 시중에 나도는 모습을 보았고, 굉장히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난 가끔씩 환빠들을 까는 글들을 SNS를 올렸다. 2018년 소방서 사회복무요원을 마치고 그 기념으로 1달간의 미국여행을 갔다오고 나서였다. 내가 미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을쯤 이 책이 출판되었고, 책의 저자인 이문영 선생을 SNS를 통해 알게 됐다. 그를 통해서 ‘유사역사학 비판‘을 알게됐고, 궁극적으로 환빠들에 대한 위험성과 비판부분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내리는 결론은 자명하다. 유사역사학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외세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등감에서 부터 시작된다. 즉 한국 역사는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역사이기에, 과거의 영토들 왜곡하고 과장해서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정상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세력들을 죄다 ‘이병도 제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나라의 유사역사학자들이 한 얘기는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서 주어와 목적어만 약간 변형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캐임브릿지 대학에서 인정한 하버드대 한국사 교수가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 유사역사학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성난 침팬지들 처럼 날뛴다.

참으로 재밌는 사실은 그들이 그리도 진실이라 하고 싶은 환단고기를 진실로 규정한다면 그건 역으로 과거에는 위대했으나 중국에게 털려 시간이 갈수록 영토가 줄어든 열등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위대함만을 고수하는 그들에겐 그런건 전혀 상관없다.

과거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전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나치와 비슷하다.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외치던 그들의 구호에서 주어만 바꾸면 환빠가 된다.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듯이 민족우월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나치독일과 일본은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6천 5백만명의 목숨을 빼았았다. 그렇다. 이 처럼 위험한 사상이 바로 유사역사학이다.

몇몇이들은 이들도 종교니까 종교로서 인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것은 이들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다. 그렇다면 네오나치도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유사역사학은 학문과 사실관계를 자신들 멋대로 조작하여 식민사학과는 무관한 역사학계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추종하는 파시즘을 대중들에게 이식시킨다.

따라서 굉장히 위험하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학문이라는 것을 대중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학계의 잘못도 있다. 어쨋든 유사역사학은 굉장히 위험하다. 이를 알고 비판적인 의식을 길러야 한다. 이문영 저자님의 저서 ‘유사역사학 비판‘은 올바른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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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제작년이나 작년쯤이었던것 같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전쟁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전 하더라도 필자는 베트남 전쟁을 한국경제에 이바지한 전쟁이라 생각했었다. 그 관점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때 틀린말은 아니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외화벌이는 분명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비록 우리는 돈을 벌었지만, 그 나라에 가서 민간인을 학살했고,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늘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올려볼까 한다.

 

1. 경제 성장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는 군복을 벗은 뒤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 초기에는 한국의 경제력이 매우 열악했다. 한국전쟁 이후 천리마 운동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북조선보다 훨씬 못살았고, 이승만과 친일파 정권의 극에 달한 부정부패는 한국 경제를 더더욱 망쳐놓았다. 따라서 박정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정권 기간동안 경제개발을 주도했다. 그러던 시기 박정희는 미국에게 요청을 받았다. 바로 베트남 파병이다. 외화를 벌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박정희는 전세계가 비판하는 그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많은 군대를 파병했고, 전쟁 기간동안 연 5만 이상의 군대를 베트남에서 유지시켰다.

(베트남으로 파병 되는 한국군 병사들. 악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베트남 전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다.)

 

박정희가 파병한 그 전쟁은 결국 미국이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한국군 또한 1973년 3월에 완벽히 철수했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유신독재를 감행하며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미화했고, 대한뉴스같은 선전매체들은 베트남 전쟁을 왜곡했다. 거기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핑계삼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다시한번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얘기하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이 옥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베트남 전이 진실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에서 청룡부대에 의해 벌어진 학살이다. 퐁니 퐁넛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군이 벌인 퐁니 퐁넛 학살로 인하여 7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여자나 아이였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ㅡ 미안해요 베트남 p.157

(퐁니 퐁넛 학살을 담은 사진)

 

10일 뒤인 2월 22일 청룡부대는 꽝남 성에 있는 또다른 마을인 하미 마을에서 13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135명을 학살한 한국군은 그 시체를 암매장해버렸다. 학살당한 민간인들 중에는 1살이나 2살 짜리도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 - 8시 경에 호이안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

 

ㅡ 팜티호아,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의 증언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퐁니 퐁넛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66년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떠이션 현에 있는 고자이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이고, 다른 하나는 꽝응아이 성에 있는 빈호아라는 곳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맹호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고자이 학살 사건으로 인하여 총 380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고, 청룡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빈호아 학살로 총 43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빈호아 학살 한국군 증오비)

(고자이 학살 위령비)

 

"한국군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땅굴에 숨었지. 그들이 땅굴 속으로 최루탄을 던져넣었어. 눈물콧물이 뒤범벅이 되고 ‘컥’하니 숨이 막혀왔어.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땅굴 밖으로 기어오르면 한명씩 총을 쏘아 죽였지."

 

ㅡ 고자이 학살 생존자 판티부이 할머니의 증언

 

“1966년 12월3일(음력 10.22) 빈호아 사, 롱빈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3일에서 6일까지 모두 430명이 집단학살을 당했지요. 응옥흥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인 후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기도 했지요. 또 2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1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습니다.”

 

ㅡ 1999년 한겨레21의 구수정 통신원과 인터뷰를 한 마을 부주석의 증언

이외에도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총 5개 성에서 9000여 명이 사망했고, 꽝남성에서만 4000여 명이 죽었다. 즉 이 글에 언급된 것 외에도 학살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2. 학살 부정측에 대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전면 부정하는 월남전 참전 용사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1990년대 베트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수정 박사가 공론화를 하면서 부터였다. 그래서 그 이후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을 찬양하는 극우계열 인물들과 세력들은 학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히 위에 언급한 고자이 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그 마을 벽화에 그려진 고양이과 동물은 호랑이가 아닌 흑표범이다. 즉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의 흑표범 마크지 맹호부대의 호랑이 마크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 마치 정말 그러한듯 하다. 실제로 찾아보면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피해자들은 분명히 한국군의 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정확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보도연맹 학살. 1950년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은 잠재적인 빨갱이일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을 3개월 동안 대량 학살했다.)

 

학살 부정측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대민사업을 예시로 들며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은 거짓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것과 달리 한국군은 그리 이성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뿌리는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했던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잠재적인 빨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심증만 가지고, 최소 30만이나 되는 자국 민간인을 단기간에 학살했던 전력이 있다. 많게 보면 100만까지도 잡는다. 즉 한국군은 자국민 수십만을 학살했던 전력이 있기에, 절대 깨끗한 집단이 아니다. 자국민을 수십만 학살했던 집단이 과연 타국에서 도덕성이 지켜진다는 믿음은 그저 학살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상상이다.

(미라이 학살.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의 부대는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총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하루 만에 학살했다. 이 사건은 군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를 통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이 부정하기 위해 드는 것들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하가지만 더 들겠다. 학살 부정측은 미국의 미라이 학살을 들며 한동안 여론화 되지 못했던 한국군 학살을 부정한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의 그리 학살했으면 미군처럼 이미지가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했을 것"이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미라이 학살 사건 또한 파뭍힐 사건이었다. 파뭍힐 뻔하던 사건이 양심적인 기자에 의해서 공론화 된 케이스다. 즉 그 사건도 얼마든지 한국군의 학살처럼 장지간 동안 묻힐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사건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베트남 전 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동원했던 알제리측 부대가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서방세계는 명성이라곤 별로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고, 동맹인 미국 또한 한국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즉 그들은 이점을 놓치고 있다.

 

3. 결론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붙히자면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극우반동세력의 모략을 잠재우는 방법은 공동 진상조사다. 현재 승전국 위치에 있는 베트남 입장에서도 입을 닫고 있는 상황이라 진상조사는 좀 힘들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당장의 해결이 힘들지라도 최소한 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라크 전쟁. 2003년 미국이 공격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당시 한국의 한나라당은 베트남 전쟁을 운운하며 이라크 파병을 적극 주장하였다.)

 

극우세력들이 학살에 대해 부정하려고 하지만, 필자는 분명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을거라 믿는다. 왜나하면 필자는 내 나라의 군대가 아주 쓰레기 같은 똥별 똥군기 집합체들로 인하여 민간인 수십만을 학살했던 사실을 역사를 공부하며 배웠기 때문이다. 즉 필자는 한국군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우세력이 뭐라하든 구수정 선생을 비롯한 진보 계열 학자들이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필자는 학살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보지만, 베트남 전 참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본다. 베트남 전쟁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정 공세 이후 대규모의 반전운동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랬던 전쟁이기에 미국사람들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는 미국이 만든 수많은 베트남 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베트남에서의 잘못을 반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미안해요 베트남'운동 )

 

그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었다다. 즉 긍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세력들은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다"라며 전투부대 파병을 주장했었다. 한나라당 세력들의 무책임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을 아주 잘 보여준 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부터가 잘못됐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반성의식을 가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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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기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필하시길^^

NamGiKim 2019-02-01 22:23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벨루치님도 즐거운 명절 잘 보내시길^-^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들어섰다. 이러한 냉전의 대립은 좌우익간의 내전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런 좌우익 대립은 어느 유럽의 한 국가에서도 나타났다. 그 나라가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역사로 잘 알려진 그리스다.

 

2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나치독일은 그리스를 점령했다. 나치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이에 반발한 그리스인들은 나치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 인민해방전선을 창설했다. 이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고, 나치독일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8월 그리스는 나치로부터 해방됐다. 당시 동유럽 전역에서 진격해오던 소련군을 막기 위해 대다수의 독일군 병력들이 철수했고, 그해 10월 그리스에는 영국군이 상륙했다. 영국군은 수도 아테네에 입성했다. 당시 그리스는 영국군을 해방군으로 보지 않았다.

 

나치독일이 떠난 이후 그리스에는 연합정부가 세워졌지만, 영국은 군사개입을 통해 대중적인 민족해방전선을 제지했다. 거기다 그 연합정부는 우익 군주독재국가의 형태를 뗬다. 따라서 반체제인사들이 투옥되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제거되자 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해방 운동이 성장했고, 이는 충돌로 이어졌다. 이게 1차내전의 시작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수도 아테네와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제외한 그리스 전지역을 장악했지만, 영국과 우익독재세력들은 이를 진압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회담 시기 그리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했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1946년 3월 총선이 치러졌고, 아주 간신히 국왕파가 승리했다. 이는 다시 좌우갈등으로 번졌고 결국 내전이 일어났다.

 

1946년 사회주의 세력은 게릴라전을 다시 재개했다. 1946년 후반이 되자 사회주의자들은 인구 700만의 나라에서 17000명 이상의 군대를 모았고, 5만 명 이상의 지지자와, 약 25만 명의 동조자를 끌어 모았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의 봉기에 대처하기 힘들었던 영국은 그리스 내전에 미국을 끌어들였고, 미국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1947년에 전투는 더욱 격렬해져 그리스 국군과 우익세력들은 북 이필로스,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와 텟살리아에서 대규모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내전에 개입한 미국은 1947년의 마지막 5개월 동안 아테네 우익 정부에 대포와 급강하 폭격기, 네이팜탄 등이 포함된 7만 4000톤의 군사 장비를 보내줬다. 미국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이끄는 250명의 장교단이 전투 현장에서 그리스 군대를 조언해주며 도왔다. 밴 플리트는 게릴라들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지지기반을 제거하기 위해 농촌 지역의 그리스인 수천 명을 강제로 소개하는 정책에 착수했고, 이는 게릴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국군은 1948년 작전지역을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티카까지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국군은 마을들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벌였고,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했다. 결국 그리스 내전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우익독재 세력이 승리했고, 1949년 사회주의 계열 게릴라들은 괴멸됐다. 이후 그리스는 미국 기업들의 자본이 밀려들어왔고, 1974년 민주화가 되기 이전 까지 우익군사독재시기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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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더불어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했던 전쟁이다. 280만 명의 미군이 참전했고, 800만 톤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에서 베트남에게 패배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애국심을 가지고 참전했던 참전용사들 마저 이 전쟁을 규탄했다. 당연히 이 전쟁은 냉전시기 미국과 대립했던 소련이나 중국을 비롯한 구공산권뿐만 아니라,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도 이 전쟁을 비판적으로 봤다.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헐리우드에서 만든 풀 메탈 자켓이나 지옥의 묵시록그리고 ‘74일 생과 같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제적으로 그리고 미국 내에서도 비판받는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던 나라가 있다. 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1965년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던 박정희 정권은 1973년 미국이 철수함에 따라 이 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을 때, 그 악명 높은 긴급조치 9를 발동하여,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유신독재를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 측의 승리로 끝나자 이를 악용하여 반공주의를 강화해나갔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박정희의 특별 담화)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고,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이 이룬 승리는 민족해방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자유월남의 패망이었다. 이런 반공주의적인 시각은 지금도 사회 깊숙이 남아있다. 작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그 나라의 독립 영웅 호치민을 칭찬했을 때, “자국민을 공산치하에서 수도 없이 학살한 호치민을 찬양하는 빨갱이 라며이에 대해 간질발작을 보이며 잎에 개거 품을 물었던 일각의 모습이 그 반증이다. 그렇다면 그들 말대로 베트남 전쟁은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었고, 호치민은 단순한 빨갱이었을까? 이는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만 제대로 안다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 베트남의 독립선언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집필한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시작점을 1945년 미국이 당시 베트남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을 지원하던 시점으로 봤다.

  

(2차세계대전 당시 베트민을 훈련시키는 미국 OSS 요원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베트민을 지원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의 베트민은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던 시점인 19458월 호치민의 베트민은 전국적으로 총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194592일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 날짜에 맞춰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연합국은 베트남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군이 남에는 영국군이 입성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는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이는 베트남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갈등은 격해졌고, 이는 결국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의 독립선언. 호치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선언문은 미국의 독립 혁명 당시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것과 비슷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초반에는 프랑스가 유리했지만, 1949년 중국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프랑스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지 1년이 지난 시점인 1954년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이 대승을 거두면서 프랑스의 참패로 끝이 난다.

 

그러나 미소 냉전이라는 대립 속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반공적인 시각으로 보았고, 프랑스를 지원해줬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대패한 것이다.

 

2. 분단과 남베트남의 혼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이 참패한 디엔비엔푸 전투. 디엔비엔푸 전투는 56일간의 포위 끝에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군 1만 명 이상이 항복했다. 제국주의자들을 무찌른 영광스러운 승리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당시 이 분단은 2년 이내에 총 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하에서 실시되었다.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세력이었지만, 남베트남에 들어선 응오딘지엠 정권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던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앞세웠던 꼭두각시 바오다이 황제는 자신의 신복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웠고,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한 뒤, 권좌에 올랐다.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통일을 위한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린다. 제네바 협약에 따라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도미노 이론을 믿고 있던 미국은 총선을 실시해야 했지만,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되어 부정부패를 일삼은 응오딘지엠. 가족 정치 부정부패 독재등 온 갖 악행을 저질렀다. 미국은 단지 그가 반공주의자이자 가톨릭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원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자신들의 친인척들을 남베트남 내각에 대거 편입시켰다. 당시 남베트남은 농업국가로서 농민들의 민심을 잡으려면 토지개혁이 필수였지만, 응오딘지엠은 토지를 베트남의 소수 권력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우선적으로 할당했다. 그와 동시에 민중의 90%이상이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자신의 정권에 조금만이라도 반대하는 세력들을 짓밟았다. 당시 베트남의 종교인 카오다이나 호아하오교도 응오딘지엠 정권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남베트남 고위관료들에 의한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대불항전을 전개하던 베트민 잔존세력들까지 탄압했다.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남베트남의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인민들의 사상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수 만 명이 체포되고 처형됐다.  

(1963년 6월 11일 독재정권의 불교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한 틱광둑 스님.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제수인 마담 누는 이를 두고 바베큐라며 인간이하의 발언을 했다.)

  

그들의 탄압은 무자비했고, 결국 남베트남은 각종 시위와 혼란으로 휩싸인다. 19636월에는 응오딘지엠의 독재정권과 불교도 탄압에 반대하여 고승 틱광둑이 소신공양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 이후 여러 곳에서 각종 반대 시위와 불교도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케네디 정권은 CIA를 동원하여 응오딘지엠 정권을 축출했지만, 그 이후 남베트남은 군벌들의 내부 쿠데타에 휩싸이게 된다. 즉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3. 미국의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통킹만 사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됐다. 이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미국에 맞서 싸웠다.)

  

이와 같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가족 정치와 친 가톨릭 정치는 당연히 인민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남베트남의 인민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른바 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창설되었다.

 

베트콩이라는 단체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이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맞서 무장투쟁 및 각종 투쟁을 이어나갔고, 프랑스군 출신의 남베트남 군 관료들은 베트콩과의 전투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처럼 프랑스에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로 구성된 군대는 전투에서도 무능력 했다.

 

도미노 이론을 믿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고, 조금씩 군사고문단을 남베트남에 파견했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 된 존F케네디는 남베트남에 있는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차 늘렸고, 1963년에는 남베트남 주둔 군사고문단 숫자가 3만 명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허접한 모습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압박 전투라 할 수 있는데, 1500명의 남베트남군이 300명의 베트콩에게 대패했을 정도로 무능력했다. 

(USS 매덕스 호. 통킹만 사건 당시 북베트남 해역에서 염탐행위를 하던 미국의 배.)

  

응오딘지엠이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내부 쿠데타로 축출되었지만, 이후 남베트남은 지속되는 쿠데타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남베트남의 민중은 베트콩을 더 지지하게 되었고, 이대로 있으면 남베트남은 내부총질로 무너질 상황이었다. 미국에게 있어서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9648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는 자작극을 벌였고, 이를 빌미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4. 베트남 전쟁의 시작   

(롤링 썬더 작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롤링 썬더 작전을 통하여 베트남을 초토화시켰다.)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19652월 베트남의 중부고원지대인 플레이쿠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자,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에 나선다. 이른바 북폭을 시작한 것이다. 북폭을 감행한 미국은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 하이퐁을 비롯한 대도시들과 북베트남 전역을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남베트남 정글에 무분별한 고엽제를 살포하여 산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이 전투에서 무능력함을 보이자 미국은 19653월 다낭에 첫 지상병력을 파견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도 군대를 파병한다. 그리고 그해 이후 남베트남의 젊은 장교 응우옌 반 티에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쿠데타는 종결된다  

(응우옌 반 티에우. (맨)왠쪽이 린든 존슨, 두번째가 윌리엄 웨스트 모어랜드 그리고 세번째가 응우옌 반 티에우다. 네번째에 있는 양복입은 베트남인은 남베트남 공군 사령관이던 응우옌 까오 끼다. 응우옌 반 티에우는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지속되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권의 본질적인 문제인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또한 온갖 비리를 통해 돈을 모았다.)

  

하지만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여전히 무능력했다. 19655월 말 소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더 많은 지상 병력을 파견했고, 고엽제를 살포하며 인근 마을과 숲을 무차별 폭격했다.  

(이아드랑 전투. 1965년 이아드랑이라는 지역에서 미국은 대규모의 헬기 부대를 작전에 투입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된 미국의 제1 기병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민간인 250명을 학살한 군대이기도 하다.)

  

미국의 막강한 화력으로 인하여 베트콩들 또한 사상자가 급증했다. 196511월 미국의 제1 기병사단은 이아드랑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막강한 공군력과 헬기 부대들을 투입했었다. 그 결과 며칠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북베트남측은 17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다른 전투에서도 미군의 항상 압승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과거 미국이 치렀던 제2차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다른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 내에서의 전쟁이었다. 즉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상대하는 적은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베트콩이었고, 이를 지원하러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내려온 북베트남군의 소수 지원 병력이었다  

(닥토 전투. 1967년 베트남의 콘툼성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즉 일정한 전선이 없는 전쟁이었기에, 전투가 어디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이었다. 미군은 수색과 섬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전을 이어나갔고, 이와 같은 게릴라전으로 인하여 미군 사상자 또한 적잖게 속출했다. 그리고 미군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미국의 특수부대인 그린베레가 베트콩에 맞서기위해 자포자기식으로 라오스쪽의 몽족과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을 비롯한 일부 소수민족들을 기반으로 만든 특수부대가 활동했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기에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6711월 베트남 콘툼성 지역에 있는 닥토에서 대격전이 벌어졌지만, 미군은 이 전투에서 베트콩 1600명 이상을 사살하며 우위를 점하지만, 그 과정에서 40대 이상의 헬기와 350명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했다.

 

5. 구정 공세와 호치민의 사망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숫자는 총 50만을 넘겼다. 1967년까지 총 2만 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지만, 정글을 B-52 폭격기로 무차별 폭격하고, 대규모의 헬기를 동원하여 수색 섬멸 작전을 이어나갔기에 미국은 베트남 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착각이었다. 1967년까지 미국이 이기고 있다 생각한 미국인들은 1968년부터 미국이 자신들에게 한 거짓말에 환멸을 느끼고 반전운동에 뛰어든다. 미국 내의 반전 운동을 촉발시킨 사건은 바로 구정 공세(Tet Offensive)’.  

(구정 공세. 1968년 1월 31일 베트남 구정에 감행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세는 미국과 서방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이 공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서독,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나라의 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 68혁명이다.)

  

19681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가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들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는 베트콩이 1달 간 점령했고, 케산은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으며, 수도 사이공은 잠깐이기는 하지만 베트콩 공격부대가 미대사관1층을 점령했다. 첫 번째 구정 공세 1달 동안 베트콩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의하여 대부분 소탕되었다. 미군 2천 명이 사망했지만, 베트콩은 3만 명 이상 사망했다. 즉 전사자 측면에서 볼 땐 미국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 당시 남베트남 전역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대중매체를 통해 미국 전역에 보도가 되었고, 이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환멸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는 결국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을 격화시키게 되었다. 결국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하지 못했고, 196811월 잠깐 동안 북폭을 중지해야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문제는 린든 존슨에서 리처드 닉슨으로 넘어가게 된다  

(1969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사망했다. 미국과의 전쟁 도중 사망한 그는 20대 청년 시절 부터 80 노인까지 오로지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살아왔다. 부패하지 않았고, 남을 잘 설득했으며, 특히나 아이들을 사랑했다.)

  

구정 공세로 인하여 수많은 베트콩들이 전사했지만, 그들은 미국에 맞서 투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단계적인 철수를 이행했다. 19699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호치민이 사망했다. 한평생을 베트남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바쳐온 위대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북베트남 인민들은 애도와 슬픔을 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단결하게 되었다.

 

6. 반전운동과 미군 철수 그리고 베트남의 승리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은 사상 최대의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베트남 전쟁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빈부의 계급적 불평들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미국은 징병제도였다. 미국의 징병제도로 인하여 가난한 백인의 자식들과 노동계급의 자식들 그리고 흑인의 자식들은 지옥의 베트남으로 가게 됐지만 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 엘리트 계층들은 학업을 핑계로 징병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베트남으로간 흑인군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 병력 13%를 흑인이 차지했고 이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치였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 징병제도는 계급과 빈부 그리고 인종간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반전운동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시위대가 반전운동을 하면 거리에 있는 미국의 경찰들은 곤봉을 돌고 시위대를 서슴없이 후려치기까지 했고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화기와 물대포가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위군을 동원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런 진압 방식을 보고 히틀러의 게슈타포에 비유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 반전운동.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은 1965년 부터 있었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그 규모가 훨씬 커졌고,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은 미국으로 하여금 베트남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인민들 또한 이 전쟁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했고, 전쟁을 끝냈다.)

  

시위대를 진압하는 미국 정부의 방식이 무자비했다는 사실은 1970년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1970년 당시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여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교 학생들은 반전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주방위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발포했고, 그 과정에서 4명이 죽고 9명이 다쳤다. 이처럼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태도는 무자비했다.

 

그리고 1970년엔 1968316일 미군이 벌인 최악의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미라이 학살(Massacre of MyLai)의 진상이 규명됐고, 이로 인하여 베트남 전에서의 미국의 이미지는 최악이 됐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이라는 사람의 자백을 통하여, 1968년부터 1971년 까지 미국의 피닉스 작전(Operation Phoenix)으로 인하여 총 27000명 이상이 어떠한 근거나 물증 없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활절 공세. 1972년 하노이는 다시 한번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했다. 이번엔 전차와 장갑차 수백대를 동원했지만, 막강한 미군의 공군력 앞에서 많은 손실을 입는다.)

  

무튼 단계적인 철수를 실행한 닉슨 정부는 완전한 철수를 꺼려했고, 베트남 전 참전 군인들까지 반전운동 대열에 합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과 1971년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한다. 1972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인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막강한 공군력을 동원하여 무마시킨 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마지막의 대규모 폭격을 북베트남에게 감행한다.

 

미국의 마지막 협박에도 북베트남은 굴하지 않았고, 19731월 미국은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한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했지만,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에 지원했다. 남베트남은 1800대 이상이나 되는 미국 항공기를 소유했기에, 군사력이 과장되어 선전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고 간 것이지 남베트남은 그걸 굴릴 돈이 없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197412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을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75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197531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함으로써,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고, 19753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이자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197547일에는 사이공 동쪽 64 Km 부근에 있는 쑤언록에서 남북베트남군은 전투를 치렀고, 420일 남베트남 지휘부는 쑤언록을 방어하던 군대에게 수도 사이공으로 후퇴를 명한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59식 전차가 대통령궁의 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자들의 패배로 끝났다.)

  

당시 대통령이던 티우는 부정축재로 모은 금괴 2톤을 몇 대의 비행기에 실은 뒤, 베트남을 탈출했고, 19754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군대가 사이공으로 진군하고, 대통령궁에 59식 전차를 진격시킴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승리고 끝난다.

 

7. 결론  

(전환시대의 논리. 대한민국의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다. 반공주의가 극에 달하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기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파악한 책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전쟁이자,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미라이촌에서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했고, 피니스 작전을 통해 일정한 물증과 근거가 없는 민간인 2만 명 이상을 재판 없이 학살했으며, 이 나라를 무차별 폭격하고 고엽제를 살포하여 2백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을 도륙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통일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했지만,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응오딘지엠 괴뢰 정부를 수립하여 반민중적인 반공독재정권을 지원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다.

 

대한민국의 수구세력들은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남베트남 정권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친프랑스 민족반역자들이 합쳐진 정권이었다. 당시 150만 이상이던 남베트남군 지휘관들 중에 프랑스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육군 중령 1사람 밖에 없었던 데에 비해,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측의 지도급 인사 31명 모두가 베트남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항불 항일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베트남 민중이 어디를 지지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베트남의 민족반역자들을 지원했고, 결국 이 독립운동가들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물론 베트남 전쟁 전사자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58천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은 100만 이상이 사망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또한 막강한 전력을 잃었다. 항공기 3700대와 헬기 5000대 그리고 장갑차 및 탱크 800대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서 파괴됐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치른 손실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얘기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책이다. 이 책은 1980년대 13부작 짜리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와 기자의 경험담을 이 책에 담고 있고,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을 아주 잘 정리했다. 베트남 전쟁을 아는데 있어 꼭 읽어봐야할 명저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면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전쟁이고,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운 위대한 혁명가이다. 수구세력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를 부정하려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온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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