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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이 한참이던 2015년 국내에 있는 오월의 봄 출판사에서는 좌파계열 미국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책 <한국의 민중봉기>를 번역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봉기를 재조명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연구로 저명한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의 자료와 분석을 적절히 비판 및 분석하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책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9506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War of National Liberation)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전쟁을 북한과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인정하는 역사관은 단순히 조지 카치아피카스만의 관점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를 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이후 박명림 교수를 중심으로한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기도 했지만,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나 또한 과거 커밍스가 쓴 저서를 읽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지만, 최근에 보게 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는 커밍스보다 훨씬 더 과감한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아니 오히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관점을 좌파적 입장에서 여러 근거를 밝혀가며 비판한다.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1968년 당시 이른바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가 미국 FBI에게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한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저지른 광주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러 사회운동과 역사학적인 연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전남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보내기도 했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의 훌륭한 학자라면,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적 성향을 가진 좌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625일에 일어나고 난 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첫 라디오 연설은 바로 한국과 미국이 포기한 지역에서 즉각 인민위원회를 재건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627일부터 민중들은 연백에서 15인 인민위원회를 세웠고, 한달 안에 수백 개 마을에서 비슷한 선거가 이루어졌으며, 선출된 대의원들은 읍·, ·, 도 단위 정부 당국의 대표자들을 뽑았다고 한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에 주둔한 미군 항공병력의 출격이 없었다면, 조선 인민군이 해방자들을 환영하는 대중적지지 속에서 전체를 장악했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한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공군 개입이 즉각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생각은 틀리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초기에 개입한 미군 공군 병력은 북한의 원산과 평양 등에 전략폭격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남한의 보수 논객들은 대부분 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묘사하지만, “어떻게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침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1950625일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날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고 한다. 우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항상 한반도 전체의 통제를 약속했고, 그 밑의 장군들은 계속해서 38선 너머로 북한군에 대한 습격을 명령했다. 1949년 한 해에만 북한군 병사 수백 명이 살해된 2,617건의 공격이 있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이미 전쟁이 1950625일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커밍스가 가진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다.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 하에서 5년간 무려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른바 작은전쟁을 통해 학살당했다. 심지어 홀거 하이데라는 인물은 이것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인 2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해석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육해공에서 체계적으로 민간인을 공격한 것과는 달리, 북한군 병사들은 대부분 규율이 잡혀 있었고 잔인한 공격을 자제했다고 한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조선인민군 장교의 80% 이상이 중국에서 활동했고, 1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투 경험을 했다고 추정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10만 이상의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 혁명에 동참한 이후 북한에 파견되어 조선인민군이 되었음을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강조한다. 더 나아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한정하는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을 길게 인용하겠다.

 

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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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과 이승만, 본인 스스로 백두산 호랑이라 칭하던 김종원은 이승만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이 말하는 애국이란 이런 학살자들과 친일파들을 앞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우익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고한국전쟁에서만 대략 70만 많게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국민 보도연맹 학살만 하더라도 최소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과 그 지지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에서는 1948년 여순항쟁 시점부터 소위 빨치산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여순항쟁 이후 빨치산이 게릴라전을 벌인 이유는 분명했다이승만과 미국이 여수와 순천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파푸아뉴기니 전투에 참전했던 김종원은 1948년 여순항쟁 당시진압군을 지휘한 김종원은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민간인들을 뫃아놓고 온갖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그는 직접 나서서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즐겨 벳고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민간인들을 쏘아 죽였다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김종원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했었던 것이다.

(최덕신, 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1951년 거창양민 학살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며, 더 나아가 1980년대에 월북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같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나서도 소위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이승만 정부는 또 다시 천인공노할 학살을 자행했고, 38선을 돌파하여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도 양민 학살을 저질렀다이러한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발생했으며특히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리산 지역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자행됐다. 1951년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다시 재점령하며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반격을 하던 시기또 다른 양민학살이 한국군과 우익들에 자행됐다그것이 바로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다.

(거창양민 학살 당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시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일대로 숨었고노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순창·정읍·남원·장성·구례등 호남일대와 거창·산청·함양·합천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한국군의 단독적인 38선 돌파 이후 이승만 정부는 10월 2일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빨치산 출몰 지역에서 토벌에 나섰다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숨어있던 빨치산들은 신원지서를 습격했었으며 이에 따라 경찰과 군인 몇 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학살을 나타낸 박물관에 있는 모형)

 

이에 따라 한국군은 거창과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에서 이른바 공비소탕작전을 펴기로 했고, 2월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갔다. 195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진입했고인근 지역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여기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모두 박산골로 끌고 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류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동시에 마을 집들도 모두 불태웠다놀랍게도 이러한 전략은 만주에서 일본군이 했던 전략이고그리스에서 미군사고문단과 왕당파들이 했던 전략이며제주 4.3 항쟁 당시 한국군이 했던 전략이다또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거창에서만 719명이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은 전부다 죄없는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노인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심지어 1~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여성이 51.3%였고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이외에도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학살당했으며총 1,424명이 학살당했다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은 이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피해 현지와 외부의 왕래를 차단하고 생존주민에게 실상을 발설하는 자는 공비로 간주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이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최덕신이었다그는 이후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다가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에 월북했다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경남 거창에 있는 희생자들 묘비)

 

그러나 한 달 후인 1951년 3월 학살 소식을 들은 신중목은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했으며조사단이 4월 6일 현지에 파견됐다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이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결코 덮지 못했다여순항쟁 당시 양민 학살에 앞장섰던 김종원도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그는 자신의 병력을 빨치산으로 위장하여조사단에게 따발총(PPSH-41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들기도 했다.

 

진상조사 초기 이승만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지만결국 진상조사를 실시했고오익경한동석 그리고 김종원에게 징역을 선고했다그러나 총 책임자인 최덕신은 처벌받지 않았으며김종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으며징역을 선고받은 이들 모두 1년 내로 석방됐다이 사건이 다시 조명 받은 것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부터였다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민주화 이후에 다시 조명됐다.

 

참고문헌

 

김삼웅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10

 

임기상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인문서원, 2015

 

임종금대한민국 악인열전피플파워, 2016

 

손호철'작전명령 5'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프레시안, 2021.03.2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2318150663165#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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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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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 의혹은 국내에서 제법 얘기가 된 주제다미국의 세균전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한참이던 1952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북한과 중국에서 조사를 벌이던 국제민주법률가협회 국제과학조사단 미국이 조선과 중국에서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결론지었다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북한의 대표적인 15개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으며그곳들에서 발견된 곤충이 1952 1 28일과 3 12일 사이에 확증되었다고 밝혔다북한이 미국의 세균전을 규탄한 시점은 1952년 초부터로 확인된다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세균전에 대해 언급하며미국을 비판하는 공개 발언을 했다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니덤 보고서, 국제과학자협회 조사단이 북한에서 조사한 미국의 세균전 관련 공식 문서다.)

 

“1월 28일 적 군용기들은 조선에서 종전에 보지 못하던 세 종류의 벌레들을 이천·동남·농소동·용수동 등 지구에 대량적으로 산포했는바그 첫째 종류의 형태는 검은 파리와 같으며 둘째 종류의 형태는 벼룩과 같으며 셋째 종류의 형태는 빈대와 같다. 2월 11일 적군 비행기들은 철원 지구의 아군 진지에 대하여 벼룩·거미·모기·개미·파리 및 기타의 작은 벌레들이 가득 찬 종이통과 종이 봉지를 투하했다시번리 지구에서는 파리를 대량적으로 투하했으며 또한 평강 지구에서는 벼룩·파리·모기·귀뚜라미들을 대량적으로 뿌렸다.”(박헌영 평전 p.555~556)

 

현재 북한은 미국이 이미 1950년 겨울부터 세균전을 벌엿다고 주장하고 있다아래의 인용문은 북한의 조국전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놈들은 쫓겨 가면서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 북반부지역(평양시평안남북도함경남도강원도황해도)에 천연두 병균을 살포하였다그리하여 당시까지 천연두가 전혀 발생한 일이 없었던 이 지역들에서 천연두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1년 4월에 이르러 천연두 환자는 3,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10%가 사망하였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미군 비행사 포로들에 대한 심문 등을 근거로 세균전이 실험단계와 작전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첫 단계(실험단계)에서는 주로 효과적인 세균탄 투하의 목표를 선정하며 투하방법 및 세균전 전술을 련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둘째 단계(작전단계)에서는 오염지대를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하를 일층 강화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p.88)

 

미국의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세균전이라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주장했다그가 쓴 <한국의 민중봉기>라는 책에 따르면미국은 1947년부터 생물학전 무기를 개발했고그 당시 메릴랜드 주 데트릭 기지가 미군 세균전의 중심지였으며, 1951년부터 1953년 회계연도에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에 3억 4,500만 달러를 사용했고이는 한국전쟁 동안 미국이 배치한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었다.(한국의 민중봉기 p.209)

(아랍계 언론 알자지라의 미국 기밀문서 해제)

 

미국의 이러한 세균전 자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실제로 미국은 마루타 부대로 유명한 731 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를 살려줬다그를 살려준 주체는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다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에는 이에 못지않게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 당국이 악명 높은 731부대에서 활동했던 일본군 장교와 연구자들에게 비밀리에 완전 면책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그 대가로 미군은 만주에서 죄수 3,000명을 상대로 일본군이 실시한 인간 생체실험 관련 자료를 넘겨받았다.”고 나온다.(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5)

 

반면 현재까지의 미국 공식 입장은 세균전이 없었다는 것이다즉 북한과 중국이 지어낸 것이라는게 현재 미국의 입장이다정말 그러한 것일까미국의 공식적 입장과는 달리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북한과 중국 자료 뿐만 아니라 미국의 공식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미국의 세균전에 대한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은 공교롭게도 미국 언론인 존 윌리엄 파월(John W. Powell)이다.

(세균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폭탄)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영문 <월간 중국 리뷰(China Monthly Review)>를 발행했는데 자신이 직접 목격한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집중보도했다매카시즘이 한참이던 1953년 미국 정부는 잡지의 국내 반입을 금지하고, 1956년엔 그와 2명의 편집 실무자를 반역죄와 선동죄 등 13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파월은 미국 정부에게 비밀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등 완강히 대응해 기소는 철홰됐고미국 정부는 1961년 소송 자체를 취하했다이런 사실은 2000년 7월 2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회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에서 소개됐다.

(북한에 투하된 것으로 추정되는 벼룩)

 

그 외에도 미국의 세균전 문제를 심층 분석한 대표적 연구물은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 교수와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 교수가 1998년에 쓴 <The United State and Biological Warfare(미국과 생물학전)>은 국내에선 2003년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도서출판 중심)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이 책은 미국 생물학전의 기원에서부터 일본과의 커넥션세균전 프로그램 연구개발 및 작전계획 과정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문제 등을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자료 등을 근거로 치밀하게 추적 분석했다.

 

2010년에는 아랍계 언론인 알자지라(Al Jazeera)’을 통해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한 사실이 문서로 증명됐다알자지라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를 공개했고, 1951년 9월 21일 작성된 이 문서에는 "미 합참이 작전상황 중 (세균전에 사용되는특정 병원체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고 기록돼 있음을 밝혔다. 1951년 9월 21일자 문서였으며당연히 미국 측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미국 문서였다.(“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세균전 관련 중국의 프로파간다)

 

2015년에는 미국이 세균전 방법을 일본으로부터 배위 한국전쟁에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니덤 보고서가 원본 전문이 최초 공개됐다.”는 기사가 나왔다니덤 보고서는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 1952년 작성한 것으로 보고서에는 미 공군이 일제 강점기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에게 기술을 건네 받아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세균전을 치른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이 전문은 조사 내용만 670페이지나 된다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참고자료로 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 일대에 뿌려진 벼룩 사진해당 지역의 주민 사진세균을 뿌리다 잡힌 미군 포로의 수기 진술서미군의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등 세균전을 뒷받침할 증거가 200장 가까이 수록됐다.(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세균전이 없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미국의 기밀문서나 영국의 조지프 니덤 등이 조사한 자료가 보여주는 증거가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은 분명 존재했고규탄받아 마땅하다.

 

참고문헌

 

한국전쟁 중 세균전 현장실험 명령”, 한겨레, 2010.03.19.

 

단독",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전문 나와연합뉴스, 2015.06.09.

 

박태균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안재성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2009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조지 카치아피카스(), 원영수(), 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 2015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I,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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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3 16일 새벽 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을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 인근에 내려 놓았다미라이 마을에 진입한 병사 30명은 이후 4시간 동안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있는 생명체는 남김 없이 학살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들은 인근에 있는 미케(My Khe) 지역으로 가서 양민을 학살했다 5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고이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 274채가 불에 탔으며 수천 마리의 가축이 죽었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노근리 학살 현장인 쌍굴다리, 글쓴이는 작년 겨울과 가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확산시킨 사건이었다이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자행하는 짓들이 바로 이러한 학살극이었음이 드러났다미라이 학살을 통해미국인들은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 없이 학살할 수 있는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의 실체와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됐다이와 같은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완벽히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미라이 학살이 일어나기 18년 전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그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한국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하자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 개입했다. 1950년 7월 2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상륙했고, 7월 5일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한국전쟁에 투입된 스미스 부대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패배했다즉각적인 지상군 개입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7월 19일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붙잡혔다.

(영화 작은 연못의 포스터, Kill Them All이라는 영화의 문구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을 연상시킨다.)

 

결국 미군은 그해 8월에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후퇴하기 바빴다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이런 사고를 가졌던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고이 과정에서 대량의 양민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No Gun Ri massacre)이다.

(영화 작은 연못에서 나온 피난민들의 모습, 피난민들은 3일간 쌍굴다리 밑에서 이렇게 학살당했다.)

 

1950년 7월 23일 후퇴하던 미군은 충북 영동군 주곡리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분산 명령)을 내렸다이에 따라 주민들은 짐을 싸서 임계리로 이동했고, 2일 뒤인 25일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지역주민 수백 명(최소 600)을 후방으로 인도해 하가리 하천변 노천에 숙박시켰다다음 날인 26일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노근리를 지나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피난을 갔다그러자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이 과정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는 모르지만최소 수십 명은 죽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의 항공 폭격과 기총 사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항공기 공격을 피해 쌍굴다리 안으로 달아났다이것이 이날 오후 2~3시에 일어난 일이었다당시 노근리 지역에 있던 미군 제7기병연대는 노근리 철도 언덕과 위쌍굴 앞뒤에 기관총 부대를 배치하여 도망친 민간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그러고 나서 굴다리 밖으로 나오는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쌍굴다리를 포위한 미군들은 굴다리를 나오려는 민간인들은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피난민들은 공포와 갈증배고픔에 떨며 28일 오전까지 이 쌍굴다리에 숨어있어야 했다배고품을 못견딘 아이들이 울면미군은 쌍굴다리를 향해 집중 사격을 했다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노근리 학살을 표현한 그림)

 

노근리 학살은 7월 26일 오후 3시부터 29일 새벽까지 무려 60시간 동안 진행됐다이 학살로 죽은 사람은 어린 아이와 노인여성을 가리지 않았다겁먹은 피난민들은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미군에게 학살당했다몇 명이 야음을 틈타 쌍굴을 탈출했고쌍굴 안에서 살아남은 이는 20명도 안된 것으로 확인된다. 3일간의 학살로 노근리에서 최소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학살을 마친 미군은 노근리를 떠나 남으로 후퇴했다이것이 바로 후퇴하던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의 시작을 알린 미군의 항공폭격과 기총사격)

 

노근리 학살이 한국 사회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2001년이 되어서다한국전쟁 이후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였던 한국에서 노근리 학살을 꺼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서 노근리 사람들은 침묵해야 했다한미동맹과 반공을 외치는 사회는 이들의 아품을 감추려했고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과정에서의 미국 정부의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하지만 미국은 최소한 이에 대한 자료 중 일부는 파괴하지 않았고정보공개법을 통해 이를 공개했다조 잭먼 등 당시 부대원들이 용기 있게 증언을 해주었으며, AP 같은 언론도 병사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해 노근리의 비극이 알려질 수 있었다이후 노근리 학살 이야기는 2010년 국내에서 영화 작은 연못(A Little Pound)’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근리 이야기, 2011년에 출판된 노근리 학살 관련 만화책이다.)

 

노근리 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였다그러나 노근리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라이 학살 만큼의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다그 이유는 바로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 강화되는 시점에 치러진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반전여론이 너무나도 미미했다그리고 전쟁 자체가 원점에서 끝나며 미국인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이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 한국전쟁의 미라이 학살임에도 불구하고많은 미국인들이 모르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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