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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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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저작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이 완역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20231월 내가 베트남 하노이에 막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늦은 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데이터를 켰고, 아는 페친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그 친구가 보낸 카톡은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2023년에 완역될 예정이라는 한 국내기사였다.

 

사실 나는 의심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80년대 그 암울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월서각에서 이른바 해적판으로 <한국전쟁의 기원> 1권만 번역했는데, 2권은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워낙 유명한 학자의 저서이고 나와도 절대로 안 팔릴 일이 없는데 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2023년인 올해 완역됐고, 5월에 출판됐다. 일월서각 출판사의 해적판이 1986년에 나왔으니, 이 책의 완역된 것은 첫 번째 시리즈가 나온지 27년이 지나서인 것이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이 책이 빨리 완역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3월 대학원 석사 2학기가 시작될 쯤에도 항상 알라딘을 통해, 이 책의 출판 근황을 수시로 모니터링 했다. 그러던 4월에서 5월 쯤 알라딘에서 후원받는 것을 확인했고, 나는 거리낌 없이 큰 돈을 후원했다. 후원한 이후 5월 말쯤 신간이 내 집에 도착했다. 나는 정말 기뻤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쉬웠다. 왜 이제야 완역된 것일까?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해 7월 나는 국내 통일운동 단체인 AOK를 통해,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됐다. 거기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통일운동 단체서 활동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고, 728(미국 시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커밍스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커밍스 강연에 만족했고, 그를 직접 만나 악수 및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으며, 신간에 저자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친 건 인천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도중 비행기 안에서였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14시간이나 걸리니, 일부러 책을 읽었다. 물론 비행기 특성상 독서를 편하게 하지는 못하니 많이 읽지는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책을 다시 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을 방문해야 했기에 조금 밖에 못 읽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정독해가며 읽게 된 것은 9월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사실 1권이야 해적판을 통해, 몇몇 부분을 수업 발제를 하면서 읽기도 했고, 반공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참고를 여러 번 했지만, 완독을 하고 나니 많은 것들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올해 출간한 버전이 보다 읽기에는 편했고, 더 잘 읽혔다. 책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형성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일제가 패망한 이후 여운형의 건준과 인민위원회 체제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커밍스는 많은 부분을 집중하고 분량을 할애했다.

 

1980년대 시절 해적판으로 나온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를 읽었던 운동권 학생들은 당시 리영희 교수가 말했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했다. 박정희 시절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으며, 정치사회적으로 극도의 억압성을 보였던 한국 사회에서 해방 정국 과정을 반공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며 사실상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북한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과 혐오감 그리고 극단적인 타자화가 일상화된 이 사회의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커밍스를 읽고 경험하게 되는 충격이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커밍스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형성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성이다. 또한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기 위해 일제 식민지 시절의 상황과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토벌과 반토벌의 역사에도 집중했다.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 당시, 일본은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친일파들을 동원하여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고, 당시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은 이에 대항했다. 커밍스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당시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파들이 1945년 이후 미군정과 결탁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봤다. 반면에 이들에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은 1945년 소련의 지원 아래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형성했으며,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커밍스는 해석했다.

 

따라서 쉽게 정리하자면, 1930년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 모인 것이 대한민국 정부였고,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및 독립운동을 한 세력이 모인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라는 것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친일파들의 토벌에 맞서 싸웠던 인물은 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과 그의 혁명 동지들인 김책, 최용건, 강건, 최현 등이었다. 반면에 당시 친일을 했던 백선엽이나 김석원을 포함한 친일 군인들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군 요직을 차지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가 주목한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이었던 것이다.

 

커밍스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결탁했으며, 특히나 대중들의 원망을 산 친일경찰들을 제한없이 채용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미군정은 초기부터 그 당시 민중들이 원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갔으며, 이것이 정치 문제와 심각한 경제문제로 이어지며 민중들이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1946101일에 시작된 대구에서의 민중봉기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치경제적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무자비한 폭력과 진압이었으며, 커밍스는 미군정이 민생을 해결하기 보단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구실로 이런 폭력을 옹호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커밍스는 소련의 북한 점령과 군정 체제에 대해 미군정과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물론 커밍스가 보기에 소련군은 초기 약탈과 아녀자 강간을 자행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비교적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이끄는 단체의 활동을 보장하고, 이들의 국가 건설 사업을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친일 경찰들을 주요 요직과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시켰으며, 인민을 위한 새로운 경찰을 만들기 위해, 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래 한국전쟁의 기원에 나오는 내용을 보자.

 

경찰과 군사 부문의 발전도 1946년 초에 전개된 중앙집권화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일제가 패망할 때 북한의 여러 조직에 있던 지역적 분포는 치안 유지를 맡은 기관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 기관은 치안대(남한과 같다)나 보안대·적위대·민위대 등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근무한 한국인은 외딴 지역에서만 계속 재직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은 쫓겨났다. 새로운 지방경찰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었다. 미국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일반 경찰에 임명됐다”. 각 지방에서 치안 유지를 맡은 단체도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이를테면 함경북도 민위대는 최용건을 비롯해 만주에서 돌아온 인물이 이끌엇으며, 평안남도에서 이른바 적위대는 현준혁·김창일·장시우 등이 지휘했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19)

 

“19464월 말 중앙은 전국적 보안대 조직 내부에 적절한 지휘 계통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 권력은 아래에서 중앙으로 이동했지만, 일부 권력은 여전히 지방에 남아 있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의 경찰력은 모든 15,600명으로 도마다 2,300~2,600명 정도였다(예외적으로 평안북도는 3,900, 강원도는 1,560명이었다). 적절한 인원을 배정한 것은 중앙이지만, 각 도의 실질적인 임명과 배치는 해당 인민위원회가 맡았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경찰과는 정반대로 주민의 호응을 얻고 지방에 뿌리내린 경찰이 나타났다. 비판적 태도를 보인 미국의 공식 자료조차 이런 성취를 인정했다. “새로운 경찰은 (다수가 여성인데) 자기 업무에 경험을 쌓았다. 그들은 대중에 기반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의 존경과 협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중에 한국전쟁 때 체포돼 심문받은 면의 파출소장은 "일제강점기의 경찰의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직하고 박식하며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고문과 강압에 따른 심문은 법률로 금지됐다. 그런 방법은 때로 사용됐지만대부분 상세한 질문과 재교육으로 대체됐다. 이처럼 북한 경찰은 "일제의 폭정 고문에 따른 자백의 상징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21)

 

이와 같은 커밍스의 책의 내용을 근거해서 보았을 때, 분명히 북한은 친일파 청산의 노력을 상당 부분 보였으며, 실제로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악질적인 친일 경찰들을 숙청했다. 그 점에서 커밍스는 북한이 남한 보다 민족적 정통성 측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아마도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했거나, 주로 우익들의 시각에서만 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 부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북한의 경우 친일파를 숙청하는 작업을 거쳤고, 이 점에서 남한 보다 훨씬 철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법적으로 친일 때문에 처벌받은 친일파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 이점에서 북한은 분명히 민족적 양심을 지켰다.

 

사실 북한의 친일파 숙청이나 미군정의 반민중적 친일세력 등용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한국과 북한의 근현대사가 상당히 비교됐던 것 같다. 비록 북한이 현재는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민족적 차원에서 보았을 땐 남한이 훨씬 더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군정 시기 등용된 경찰의 대략 85%가 친일 경찰이었다는 사실과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독립운동가 출신의 인물 최능진이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암울하기까지 하다.

 

1980년대 일월서각 해적판을 읽었던 학생들이 상당부분 NL이 된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근현대사의 진실은 당연히 남한이 북한보다 정통성이 부재한 국가로 보이도록 유도했다. 거기다 전두환 시기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현존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며 연행되는 현실은 충분히 학생들을 급진화할 만한 배경이었다.

 

사실 나는 커밍스의 과감한 역사적 분석이 상당부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재 남북한의 경제격차는 많이 나지만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한 반면 남한의 친일파들은 기업가 혹은 자본가로 탈바꿈했으며, 군과 행정 그리고 정치 요직을 차지했다.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90% 이상이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가 떳떳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아주 정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신냉전의 구도로 대한민국을 끌고 가려는 윤 정권 하에서 이걸 실행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커밍스의 책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커밍스의 대표저작을 한글 완역본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영광이고 기쁨이다. 그러나 몇몇 번역 부분에선 상당 부분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대구 10.1 항쟁에 대해 설명하는데, 봉기를 일으킨 시민에 대해 폭도라고 칭하거나 봉기를 폭동으로 칭해서 부정적인 늬양스를 주는 것은 상당부분 불편했다. 아니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시위군중 혹은 봉기라 번역한 해적판이 더 적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선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굳이 한국인이라고 다 써야하는 지 의문이 들었다. 식민지 시기나 해방 정국 시기에는 그냥 조선인이라고 표현하면 되고, 소련군정기 북한의 경우 북한인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이 점에서 몇몇 표현들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정말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이 책을 읽으려는 이가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적극 권할 것이다. 조만간 2-12-2권을 꼭 읽을 예정이다. 2권에 대한 서평은 다음에 작성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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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백제인 2023-09-17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때 펴낸 그 책은 오자 띄어쓰기 탈자 투성이로 기억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지자체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내용과 수준이 빌려 볼 단계가 아니어서 전자 책으로 샀습니다.

NamGiKim 2023-09-17 21:49   좋아요 0 | URL
완독할만힐 가치가 높은 책이죠.

공동체주의자 2023-11-14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포함해서 다른 글들도 잘 읽고 갑니다. 추천 글과 서평을 쓰신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소장하며 읽고 싶어져서 바로 두 권 구매했네요. 곧 나머지 한 권도 구입하려고 합니다.

이 책이 198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인데 이제야 완역된 것이다 보니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최신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지 못한 점도 고려해야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어째서 6.25전쟁을 연구하는 후속 연구자들이 브루스 커밍스의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반드시 인정하고 넘어가는지 대충만 읽어봐도 저절로 수긍이 갑니다.

1990년대 중반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를 반영한 박명림 교수님이나 정병준 교수님의 저서도 함께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6.25전쟁의 ‘발발‘에 있어서는 몰라도 그 ‘기원‘에 있어서는 미국의 비밀문서 등 사료에 밀착해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을 최대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조망하면서 어째서 해방의 기쁨이 전쟁의 비극으로 흘러갔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커밍스가 이 책을 쓸 당시 6.25전쟁의 ‘발발‘과 관련해서는 북침설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일축했으면서도 남침이 아닌 남침유도설에 더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커밍스의 주장의 핵심이 남침유도설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것 역시나 당사자 입장에서 억울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네요. 커밍스의 주장은 6.25전쟁의 ‘발발‘ 그 자체보다 ‘기원‘에 집중하자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말이지요. ‘누가 먼저 총을 쐈느냐‘도 중요하게 다룰 수 있지만, 그보다도 ‘어쩌다가 이제 막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끼리 갈라져 총을 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느냐‘를 중요하게 다루겠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6.25전쟁 연구에 있어서 갖는 의미는 여전히 크고,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무려 ‘현대의 고전‘이라고 칭하며 완역본을 출간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저 역시나 생각합니다.

좋은 책을 추천해주시고 서평도 써주셔서 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소개 받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글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서재에 올라온 글들의 내용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입장이 다르기는 합니다.

제가 기존의 질서,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틀 안에서의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해 나가는 것에 지지를 보낸다면,

선생님께서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급진적인 변혁을 갈망하는 편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에 기대를 건다면,

선생님께서는 사회주의를 통해서 평등한 세상을 실현할 날을 꿈꾸고 계십니다.

제가 아무리 신냉전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중국, 러시아와 완전히 척을 지지는 않기를 바라고, 유라시아 대륙과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상대로 외교 지평을 넓히기를 바라지만, 그러면서도 한미동맹을 고려하여 미국, 유럽연합, 호주, 캐나다, 일본 등 서방 진영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노선에 가깝다면,

선생님께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의 어두운 면을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제3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높이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제가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보수주의자라면,

선생님께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개성,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 혹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전통 도덕철학인 유학/유교, 그마저도 아니면 매킨타이어나 샌델 류의 공동체주의 철학에 상당히 우호적이라면,

선생님께서는 과연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시는 분답게 무신론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사를 기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주의자라는 점에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한, 그 남북통일이 급진적 비평화통일(무력통일)이나 급진적 평화통일(급격한 흡수통일)이 아닌 점진적 평화통일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세대에서 대한민국 공식 통일 방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남북연합 단계나 경협 심화를 통한 경제통합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많이 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직접 통일운동에 참여하며 행동하고 계신 듯하니 존경스럽습니다.

비록 ‘보수적‘ 민족주의자와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입장 차이는 분명 적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계승하고 남북통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자‘에게 그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뉴라이트만 아니면 환영한다고 하시니 책 추천 글과 서평 덕분에 명작을 구해 읽게 되어 고마운 마음을 전함과 동시에 주저리주저리 길게 적어봅니다.

NamGiKim 2023-11-14 16:04   좋아요 1 | URL
오 정말 긴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저는 이렇게 건설적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댓글을 좋아합니다. 졸문인데, 이리도 좋은 평 및 좋은 의견을 댓글로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또한 이 책을 사서 읽고자 하신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좋은 독서가 되길 기대합니다. 저 또한 역시 공동체주의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1950625일 북한 김일성이 기습 남침을 감행하여 전쟁이 일어났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 우방이 참전하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켰다.”로 요약이 된다. 물론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1950625일만 놓고 본다면 북한이 먼저 시작한 것은 맞는 이야기라고 본다. 1990년대 들어 박명림 교수나 정병준 교수 등이 찾아낸 소련측 기밀문서는 김일성이 1950625일에 계획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한에서 진행된 이쪽 연구는 1980년대 당시 소위 남침유도설로 대표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기도 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1950625일이라는 날짜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아주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연구성과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커밍스의 책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진행되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 커밍스의 저서는 한국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적 징크스를 벗어던지려 했던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만큼이나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 책을 읽었던 뜻있는 대학생들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점을 자각하면서, 해방 후 국가 정통성 면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그런 영향을 주었던 커밍스 교수의 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자, 반박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동구권의 붕괴 속에서 흐름을 같이 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상황은 남한의 경제력은 88 올림픽을 전후로 상승했던 반면 북한의 경제력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및 교류가 끊기면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참사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거기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1991년에 해체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은 단순히 사회주의는 실패 자본주의는 생존이라는 정형화된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셈이다. 1990년대 우고 차베스와 같이 사회주의를 시도하려는 중남미의 움직임과 미국의 패권에 맞서려는 이들의 진보적인 투쟁 등은 이 정형화된 틀 속에서 외면 받았다.

 

따라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 등의 연구 또한 이런 시대적 흐름속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절대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특히나 전쟁의 기원을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 맞추어 북한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에서, 기존의 한국사회가 주장하던 김일성 침략자, 북한에게 아주 큰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보다 많은 근거를 통해 세련되게 다진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식의 논리는 오히려 한국전쟁에 대한 보다 많은 자료 접근과 다방면적 시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사건들 중에는 그러한 논리로만 접근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생각해보자. 미국은 1950629일부터 1953727일까지 이른바 북폭을 단행했다. 미국은 대략 65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북한에 투하했고, 남한 또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북한에서만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대략 100만 명 이상의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도 남북한 전역에 투하됐다. 이런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한국전쟁 기간 자행됐고, 미군 폭격은 한국전쟁 민간인 사망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을 과연 김일성의 침략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을까? 이는 당연히 억지논리를 양산해내기 쉽다. 그 외에도 국민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나 북한 지역에서 반파시즘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활동하던 국제여맹의 활동, 북한과 중국 베트남의 사회주의 반미 국제연대 등은 앞에서 언급한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시도를 당연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필자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국의 공화국 전면적인 침공에 대해서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의 기간을 1950년이 아닌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분단이 획책된 시점부터 따진다면, 그런 북한의 주장에는 다소 부정하기 힘든 근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1948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평화적으로 협력해야할 대상이 아닌 무력으로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승만의 통일관은 정복주의적 통일관이었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38선을 중심으로 양측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히 있었고, 이러한 교전들 중에선 남한에게 전쟁책임을 물어야 할 만큼 중대한 사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9년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호림부대의 정탐행위가 그렇다. 한왕룡 소령이 부대장을 맡아 출범한 이 특수부대는 여순항쟁 이후 지리산으로 숨은 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도리어 북한 지역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원도 양양군에 침투했으며, 실제로 조선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결과 106명이 인민군에게 사살됐고, 44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게 됨에 따라, 미군은 북한관련 자료들을 노획했는데, 미국이 노획한 북한측 비디오 중에는 호림부대 재판 관련한 자료도 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모란봉극장에서 공개로 진행되어 사형이 선고됐으며, 침투되었던 이들 중 탈출하여 남하한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 육군 호국군에 편입됐다.

 

호림부대 사건은 현재 북한이 주장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의 침략행위라는 점에 있어서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을 토대로 보았을 때, 한국전쟁 발발을 1950625일에 맞춰 모든 책임을 북한에게만 전가시키는 행위는 너무나도 정형화된 사고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있던 이른바 작은전쟁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기 진행된 작은전쟁에서 최소 1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이들에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홀거 하이데라는 학자는 그 수를 2배로 측정하여 1945년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20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하기까지 했었다. 이러한 상황을 외면하며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것은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주장대로 전쟁의 책임을 북조선에게 떠넘기는 데 기여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만 맞춰 보기에는 오류가 많은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사회는 한국전쟁의 그 모든 책임을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떠넘기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듯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세련된 반공주의적 관점을 뛰어넘어야 할 시점이며, 그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많이 넓혀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자꾸 1950625일 북한의 침략이라는 일부 사실 관계에만 맞추려는 점은 앞으로 우리가 극복해야할 사안인 것이다. 이제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야 한다. 앞으로는 보다 더 많은 연구가 나오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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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7-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박명림 정병준 둘 다 읽어본 입장에서 그 둘의 책의 의의와 시사점을 너무 좁고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건 아닌지

NamGiKim 2022-07-27 16:22   좋아요 0 | URL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서 읽어봤지만, 사회주의의 실패를 지엽적으로 강조하죠. 그 분들의 연구 성과가 없다는 것이 아닌 한계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커티스 르메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추축국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폭격을 진행했다나치 독일과 일본은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 됐다드레스덴 폭격이나 도쿄 폭격은 미공군의 폭격이 얼마나 많은 대량살상을 불러일으키고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는 행위임을 보여준다이러한 폭격의 양상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며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의 사용 빈도도 급증하게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대량 37만 5,000톤의 네이팜 폭탄을 동남아시아에 투하했다이들이 베트콩 게릴라를 붙잡는다는 명분을 들어남베트남의 농촌과 밀림에서 했던 행위들은 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다네이팜 폭탄이 투하된 곳들 대부분은 마을과 농촌 그리고 숲이 우거진 밀림이었고대부분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이었다한 마디로 미국은 아시아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따라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가 속출한 것이었다베트남 전쟁 이전 미국은 또 다른 전쟁에서 이러한 잔혹행위를 자행했다바로 한국전쟁이다.

(B-29기의 폭격 장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대로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현재까지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억 속에서그 본질이 왜곡되어 왔다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은 쉽게 외면 받는다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폭격의 책임이 있는 커티스 르메이는 절대로 저평가 받지 않는다오히려 북한을 폭격해서 군사적 효율성을 높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극우들의 기억 속에서 한국전쟁의 이미지는 침략자 북괴군을 몰아내자.”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가까운 수준이다.

(작렬하는 네이팜 폭탄)

 

극우세력들의 믿음과는 달리베트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인명피해는 공산주의 진영이 아닌 미국에 의해 발생했다그 이유는 미국이 한반도 민중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북한의 전쟁 3년 동안 미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1952년 7월 11일과 12일 미군의 B-29 폭격기가 북한의 수도 평양을 폭격했고당일 폭격으로 6,000~7,000명의 평양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이 때 1만여 통의 네이팜 폭탄과 6만 2천 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조사활동 및 국제연대 활동을 벌였던 국제여맹 인사들은 이후 자신들이 북한에서 본 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충분히 보았다.(We had seen enough)”

 

출처냉전의 마녀들 p.154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이 겪은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3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대략 90만 명에서 100만 명의 북한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폭격의 피해는 남한 안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철로 등에 투하됐다.

(폭격으로 파괴된 현장)

 

글쓴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안양이나 수원도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한 조사에 의하면 1950년 11월 말 중국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이후부터 유엔군의 반격이 본격화되는 1951년 2월 말 킬러작전(Killer Operation) 이전까지 약 3개월간 미 공군은 한국전쟁 전 시기에 소요된 폭탄의 40%네이팜 폭탄의 2/3를 사용했다고 한다물론 이 기간에 사용된 폭탄의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 사용되었지만남한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실제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네이팜 폭탄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초토화 작전(Wildness of Scorched Earth)’을 시행했다미군은 중공군과 인민군의 반격에 밀리자북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의정부·원주 등에서 네이팜 폭탄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고그 결과 수많은 마을이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1951년 1월 19일에는 실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에선 미군 공수부대의 요청으로 공중폭격이 실행됐다작전상 이는 성공적인 사례로 보고됐지만적잖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물론 이 폭격 과정에서도 네이팜 폭탄이 사용됐으며전투기들은 50구경 기관총으로 기총소사를 마을에 갈겼다이 폭격으로 136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사상자 중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당시 남자들은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나무를 하러 갔지만여자들은 마을에 모여 명주를 짜다가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빨치산들 또한 미군의 폭격과 소탕작전을 경험했다. 1951년 당시 미군이 지리산 인근 지역에 항공기를 투입한 이후 적잖은 빨치산 대원들이 재귀열이 발병했으며미군은 이현상이 지휘하는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지리산에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네이팜 폭탄 투하로 죽은 빨치산이나 인근 마을 주민들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심지어 미군은 상주군 화북면 운홍리에서 동네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을 벌였다따라서 이 지역에 잠시 들어온 빨치산들은 주민들에게 신고당하지 않았었다.

(네이팜 폭탄을 투하한 미군 무스탕 전투기) 


이처럼 남한 내에서도 미군 폭격은 항상 있었다특히나 한국전쟁 초기 미군은 남한의 무수히 많은 지역을 폭격했다낙동강 전선에서도 이러한 폭격은 있었으며당시 북한의 종군 기자였던 리태준은 1950년 8월 16일 B-29 폭격기의 폭격에 대해 글을 남기기도 했다경북 칠곡에 있는 왜관에서는 농장과 주택이 있는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고최소 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당시 리태준이 묘사한 폭격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섰고당시 폭격으로 죽은 최소 131명 이상의 희생자 수를 파악했다이 공식적인 희생자 외에도 피난민의 피해까지 합하게 되면 200명이 죽었다는 리태준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950년 9월 2일 미군의 B-29 25대는 김천과 고창 그리고 진주에 225kg 폭탄 803발을 투하했으며다음날에는 안동과 성주의성합천고령상주영동제천 전선 부근의 병력과 장비를 공격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 지역들을 폭격했다. 1950년 9월 14일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의 B-29기 17대는 전선과 무관한 대전과 안동을 폭격했으며인민군이 점령했던 포항 또한 네이팜 폭탄의 폭격을 받았다. 1950년 8월 29일 포항 칠포리에서는 미군의 네이팜 폭격으로 최소 수백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됐다이 폭격은 미공군의 기록에 따르면 마을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고 나온다당시 죽은 민간인들 대다수는 여성과 노인 아이와 같은 인민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들이었다.

 

2000년대 당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고 진상규명해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기 위원회 활동 조사 기간 동안 접수된 미군 폭격 관련 사건은 530건이었다하지만 이중 진실규명된 경우는 120건으로 규명률은 22.6%에 불과하며른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의 규명률에 비하면 가장 낮은 수치다예비검속과 대구 10.1 사건은 100%,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98.9%, 부역혐의 학살은 87.5%, 군인·경찰에 의한 학살은 80.1%,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은 80.3%, 여순사건은 75%,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45.9%의 규명률을 보인 것을 생각하면한국전쟁기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 사건의 규명률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도쿄 폭격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전쟁범죄에 크나큰 책임이 있는 인물인 커티스 르메이는 의외로 한국 내에서 큰 비판이 나오고 있지 않다한국전쟁 시기 커티스 르메이가 실행한 폭격에 의해 무수히 많은 남한 민중이 살해되고 학살당했지만현재 사회는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범죄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미국이 한국을 구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그러나 남한의 국토 대다수를 폭격으로 대량 파괴한 것이 과연 한국을 구한 것일까나는 이점에서 매우 회의적이다미군의 전쟁범죄는 반드시 규탄해야 하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 시기 남한 민중을 폭격으로 대량 살상한 미국은 자신들이 자행한 역사에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기광서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4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휴머니스트, 2010

 

김태우폭격창비, 2013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서중석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20

 

김태우냉전의 마녀들창비, 2021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초토화 폭격뉴스타파, 2021.07.27. https://www.youtube.com/watch?v=keasLxTpL9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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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이 한참이던 2015년 국내에 있는 오월의 봄 출판사에서는 좌파계열 미국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책 <한국의 민중봉기>를 번역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봉기를 재조명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연구로 저명한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의 자료와 분석을 적절히 비판 및 분석하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책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9506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War of National Liberation)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전쟁을 북한과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인정하는 역사관은 단순히 조지 카치아피카스만의 관점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를 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이후 박명림 교수를 중심으로한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기도 했지만,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나 또한 과거 커밍스가 쓴 저서를 읽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지만, 최근에 보게 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는 커밍스보다 훨씬 더 과감한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아니 오히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관점을 좌파적 입장에서 여러 근거를 밝혀가며 비판한다.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1968년 당시 이른바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가 미국 FBI에게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한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저지른 광주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러 사회운동과 역사학적인 연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전남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보내기도 했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의 훌륭한 학자라면,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적 성향을 가진 좌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625일에 일어나고 난 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첫 라디오 연설은 바로 한국과 미국이 포기한 지역에서 즉각 인민위원회를 재건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627일부터 민중들은 연백에서 15인 인민위원회를 세웠고, 한달 안에 수백 개 마을에서 비슷한 선거가 이루어졌으며, 선출된 대의원들은 읍·, ·, 도 단위 정부 당국의 대표자들을 뽑았다고 한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에 주둔한 미군 항공병력의 출격이 없었다면, 조선 인민군이 해방자들을 환영하는 대중적지지 속에서 전체를 장악했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한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공군 개입이 즉각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생각은 틀리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초기에 개입한 미군 공군 병력은 북한의 원산과 평양 등에 전략폭격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남한의 보수 논객들은 대부분 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묘사하지만, “어떻게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침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1950625일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날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고 한다. 우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항상 한반도 전체의 통제를 약속했고, 그 밑의 장군들은 계속해서 38선 너머로 북한군에 대한 습격을 명령했다. 1949년 한 해에만 북한군 병사 수백 명이 살해된 2,617건의 공격이 있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이미 전쟁이 1950625일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커밍스가 가진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다.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 하에서 5년간 무려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른바 작은전쟁을 통해 학살당했다. 심지어 홀거 하이데라는 인물은 이것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인 2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해석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육해공에서 체계적으로 민간인을 공격한 것과는 달리, 북한군 병사들은 대부분 규율이 잡혀 있었고 잔인한 공격을 자제했다고 한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조선인민군 장교의 80% 이상이 중국에서 활동했고, 1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투 경험을 했다고 추정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10만 이상의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 혁명에 동참한 이후 북한에 파견되어 조선인민군이 되었음을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강조한다. 더 나아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한정하는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을 길게 인용하겠다.

 

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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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과 이승만, 본인 스스로 백두산 호랑이라 칭하던 김종원은 이승만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이 말하는 애국이란 이런 학살자들과 친일파들을 앞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우익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고한국전쟁에서만 대략 70만 많게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국민 보도연맹 학살만 하더라도 최소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과 그 지지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에서는 1948년 여순항쟁 시점부터 소위 빨치산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여순항쟁 이후 빨치산이 게릴라전을 벌인 이유는 분명했다이승만과 미국이 여수와 순천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파푸아뉴기니 전투에 참전했던 김종원은 1948년 여순항쟁 당시진압군을 지휘한 김종원은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민간인들을 뫃아놓고 온갖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그는 직접 나서서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즐겨 벳고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민간인들을 쏘아 죽였다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김종원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했었던 것이다.

(최덕신, 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1951년 거창양민 학살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며, 더 나아가 1980년대에 월북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같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나서도 소위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이승만 정부는 또 다시 천인공노할 학살을 자행했고, 38선을 돌파하여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도 양민 학살을 저질렀다이러한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발생했으며특히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리산 지역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자행됐다. 1951년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다시 재점령하며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반격을 하던 시기또 다른 양민학살이 한국군과 우익들에 자행됐다그것이 바로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다.

(거창양민 학살 당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시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일대로 숨었고노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순창·정읍·남원·장성·구례등 호남일대와 거창·산청·함양·합천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한국군의 단독적인 38선 돌파 이후 이승만 정부는 10월 2일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빨치산 출몰 지역에서 토벌에 나섰다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숨어있던 빨치산들은 신원지서를 습격했었으며 이에 따라 경찰과 군인 몇 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학살을 나타낸 박물관에 있는 모형)

 

이에 따라 한국군은 거창과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에서 이른바 공비소탕작전을 펴기로 했고, 2월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갔다. 195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진입했고인근 지역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여기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모두 박산골로 끌고 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류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동시에 마을 집들도 모두 불태웠다놀랍게도 이러한 전략은 만주에서 일본군이 했던 전략이고그리스에서 미군사고문단과 왕당파들이 했던 전략이며제주 4.3 항쟁 당시 한국군이 했던 전략이다또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거창에서만 719명이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은 전부다 죄없는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노인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심지어 1~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여성이 51.3%였고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이외에도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학살당했으며총 1,424명이 학살당했다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은 이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피해 현지와 외부의 왕래를 차단하고 생존주민에게 실상을 발설하는 자는 공비로 간주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이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최덕신이었다그는 이후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다가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에 월북했다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경남 거창에 있는 희생자들 묘비)

 

그러나 한 달 후인 1951년 3월 학살 소식을 들은 신중목은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했으며조사단이 4월 6일 현지에 파견됐다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이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결코 덮지 못했다여순항쟁 당시 양민 학살에 앞장섰던 김종원도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그는 자신의 병력을 빨치산으로 위장하여조사단에게 따발총(PPSH-41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들기도 했다.

 

진상조사 초기 이승만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지만결국 진상조사를 실시했고오익경한동석 그리고 김종원에게 징역을 선고했다그러나 총 책임자인 최덕신은 처벌받지 않았으며김종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으며징역을 선고받은 이들 모두 1년 내로 석방됐다이 사건이 다시 조명 받은 것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부터였다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민주화 이후에 다시 조명됐다.

 

참고문헌

 

김삼웅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10

 

임기상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인문서원, 2015

 

임종금대한민국 악인열전피플파워, 2016

 

손호철'작전명령 5'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프레시안, 2021.03.2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2318150663165#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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