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우전쟁은 9월인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이번 전쟁을 보며 확실히 느낀 것이 있다. 비록 러시아가 자본주의 국가이고, 여러 문제점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지만, 미국이라는 국가가 얼마나 위선적인 언론 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미국은 과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무자비한 침략전쟁을 자행했다. 이 나라에서 대략 100만 명의 인명을 학살했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수도 바그다드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고,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 과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절 무차별 폭격이 보여주듯이, 미국이 벌인 중동전쟁은 민간인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그런 미국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빌미를 들어, "러시아를 전범국가로 규탄한다."는 위선을 보였다. 그러고 나서 경제제재를 자행했다. 물론 러시아는 산유국이기 때문에 경제적 타격이 크지 못했다. 이는 미국이 쿠바나 북한, 이란, 베네수엘라에 한 짓과는 상당히 대조됐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의 생활수준을 소련시대로 하락시키겠다."는 아주 멍청한 소리를 대놓고 했다. 정작 바이든은 소련 시절 그 나라 민중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전혀 보지 못하는 무지함을 보여줬다. 1960년대 초 기준으로 매일같이 고기식단을 먹고, 각종 복지와 휴가가 보장되었으며, 의료와 교육이 무상이었던 사회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까 그런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이든의 이런 망언은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식의 발언을 대놓고 하는 미국의 오만이다. 그런 발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 우즈 체제를 통해 달러로 세계패권을 지배하는 미국이 자신들의 그 패권을 어떻게 악용했는지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당장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가 걸프전쟁 이후 미국의 제재로 125만 명이 의도적으로 학살당했다. 순전히 미국과 UN의 경제제재로 말이다. 이런 학살에 대해 당시 미국의 국무장과 매를린 울부라이트는 '가치있는 희생'이라고 미화했다. 이런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대해 미국이 규탄할 자격이 있을까? 나는 전혀 없다고 본다.

 

한마디로 미국은 "지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면 민주주의고 정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폭격하면 범죄고 민간인 피해다. 전쟁 초기 러시아가 키예프까지 건드리는 일을 벌였지만, 미국의 바그다드 폭격을 다루는 서방언론의 태도와 러시아의 키예프 폭격을 다루는 서방언론의 태도는 분명 달랐다.

 

물론 키예프에도 폭탄이 투하되어 시민들이 잠시 공포에 떨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폭격의 수준이 몇 발 정도가 일부 지역에 오폭으로 떨어진 수준이었지, 미국이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과거 키예프를 아비규환으로 묘사했던 서방 언론들은 현재 키예프에는 폭탄한발도 안떨어진다는 사실과 시민들이 잘만 일상생활을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정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당연히 이런점에서 서구의 위선이 너무나 잘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의 진격은 초기부터 동부에 집중됐다. 동부는 과거부터도 친러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있던 곳으로 정체성도 러시아에 가까웠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들을 설득하고, 자치와 민족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전혀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돈바스 인민 공화국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탄생했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맞서 싸웠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 때 독재적이고 학살을 자행하는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에 맞서 민중이 봉기하여 베트콩을 창설하고, 국가 내의 국가를 만든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아조프 연대 같은 네오나치 성향의 민병대 조직을 이용하여 이들을 탄압했고, 결과적으로 네오나치 병력을 정규군화 했다. 우크라이나에는 각종 네오나치 조직들이 즐비했다. 아이다르 대대, 크라켄 대대, 프라비 색토르, 스보보다 등 무수히 많은 네오나치 조직들이 있었고, 이들은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리고 러시아인을 대량학살한 나치협력자 스테판 반데라를 우크라이나의 민족영웅으로 찬양했다.


네오나치 정규부대는 최소 사단급 이상이며, 이들은 탱크와 장갑차를 운용할 정도로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주력부대를 맡았으며, 또 맡고 있다. 이런 나라가 우크라이나이며, 네오나치즘을 분명히 현존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 전쟁이 시작되자, 동정여론에 휩싸인 나머지, 아조프 부대의 영상물들을 대대적으로 국내언론이 활용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 나는 이 점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를 까는 것에 반대하여, 러시아의 용병그룹인 바그너 그룹을 언급한다. 바그너 그룹의 경우 대표 개인이 나치 신봉자인 것은 사실이나 본질은 그저 용병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나치즘을 부정하는데 반해 우크라이나는 국가 차원에서 나치즘을 옹호하고 나치 부역자를 국부로 숭배하며, 나치 상징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고, 네오나치 무장 조직을 정부 조직에 편입하고 특정 민족에 대한 악질적인 탄압을 수년간 계속해 왔다. 이 둘을 동일시하거나, 러시아 나치 운운을 말 그대로 억지가 가득한 양비론이다.

 

최근에 러시아가 잠시 밀린 부분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보도하기 바쁘다. 지금까지 러시아가 꾸준히 동부로 진격하여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한 점에 대해선 제대로 언급 및 보도조차 하지 않다가, 우크라이나군의 반자이 돌격식 진격에는 왜 이리 집중하는 걸까? 정작 체코와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싫더라도 가스를 위해서 러시아와 협력해야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지만, 왜 이런 점에는 주목하지 않는걸까?


이번 전쟁을 통해 젤렌스키가 상당히 미화되었지만, 그 정권이 아주 비민주적인 행태를 부리는 사실은 전혀 보도가 되지 않고 있다. 젤렌스키 정부가 전쟁을 빌미로 공산당을 포함 진보정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지만, 이걸 비판하는 보도는 없었다. 젤렌스키 정부가 노동개악을 해서 우크라이나 노동법을 19세기 자본주의로 되돌리려 하지만, 이걸 보도한 국내 언론은 없었다. 우크라이나에 감정이입한 결과가 바로 이런 편향된 국내의 언론보도다.

 

현재 러시아의 물가가 안정되고 있는 반면, 서방의 물가는 휘청거리고 있다. 당장 국내의 석유값만 하더라도 현실정치적인 측면에서 러시아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전쟁을 통해 그저 우크라이나에 감정이입하는 이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추악하고 악랄한 현실을 봐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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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우크라이나의 추악한 현실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우크라이나의 악랄하고 추악한 현실(네오나치 사상 추종, 반소련 반공주의, 사회주의 탄압, 노동법 개악)에 대해 보도하는 국내 언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Mariupol 산부인과 병원의 가짜 공습 테러후 러시아 잔인함을 선전하며 전세계 미디어의 모든 표지에 등장했던 산모 Mariana 가 해방된 마리우폴 지역의 91일 학교 첫날 아이들에게 러시아 색깔 풍선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중:

 

폭격으로 파괴된 마리우폴 병원을 잔해 속에 남겨둔 사진이 화제가 된 임산부 Marianna Podgurskaya는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군대가 병원 건물을 막사로 만들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비디오를 촬영하는 데 사용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

 

Mariana에 따르면 공습은 없었고 참석한 사람들 중 누구도 비행기 소음은 듣지 못했고 포탄 폭발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군이 산부인과 병원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출산 중인 여성들의 음식도 빼앗았다고 확인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와서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임산부용이라고 했는데 다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우리 5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더 요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언급한 또 다른 중요한 세부 사항은 폭발 직후 산부인과 병원 문 앞에 있던 기자(유명한 우크라이나 선전가 Yevhen Maloletka)였습니다. Mariana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촬영되었다고 말했습니다.”

[ Marianna Vyšemirskaja 텔래그램 에서,

 

국제앰네스티(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음)의 보고서에 대한 논의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캔들은 너무나 널리 퍼졌고, 그 뒤를 이어 국제앰네스티 우크라이나 사무소 책임자인 Oksana Pokalchuk이 해고되었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국제앰네스티는 최근 학교와 병원을 포함한 민간 부지에 우크라이나 군 기지를 배치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주요 불만은 보고서의 내용이 아니라 이 정보가 공개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습니다.

 

내 경험상 마리우폴의 사회 기반 시설을 점거하는 우크라이나 군대를 직접 목격하면서 국제앰네스티의 결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Azov 기지(Azov 또는 AFU -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 군인이 주둔했다는 사실)가 있다고 알려진 주산기 센터(1번 산부인과 병원)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만실 여성을 위한 최고의 시설을 갖춘 의료시설이었습니다. 제가 출산하러 간 제3병원의 구역에는 우크라이나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정확히 우리 건물이 아니라 건물 건너편에 있는 종양 병동입니다. 이는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의 규칙과 직접적으로 모순됩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점령된 건물 근처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마리우폴의 경우도 그랬지만 우크라이나의 다른 도시들도 민간인의 이익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존경받는 국제기구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공격적으로 비판하고 우크라이나의 적으로 만들며 많은 증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점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프로파간다에 악용 당했지만 이제는 여러 매체와 인터뷰 하며 오히려 진실을 알리고 있다. 이렇게 진실이 드러나도 여전히 왜곡하고 날조하는 기더기 앵무새들, 모든건 러시아 소행 프로파간다 라고 러시아에게 협박을 받아 거짓 증언 한다고 굳게 믿는 반공아메바가 천지다.

 

나도 처음에는 위기배우로 오해했었고 블러그 개인 사진까지 널리 퍼졌었는데 아직도 많은 오해와 위협을 당하는 듯하다. 그 난리와 공포 속에 아이를 출산하고 힘든 시간 보내고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고맙고 미안하다.

 

https://www.facebook.com/angie.kim.779/posts/pfbid0Ds8bGpEhuJghireU9RfLRW7UhcMyDv9oZC6aha2yYi9cxWUj6119xNmReQ2gyJ8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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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사실을 다루는 국내 언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러시아 탓하고.....
 

나는 이들이 하는 소리 99.9%는 개소리고 구라며, 새빨간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국정원에서 써주는 연극 대본을 앵무새처럼 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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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친일반민족언론의 대명사 조선일보(조센닛뽀)와 TV조선(테레비조센), 동아일보(도아닛뽀)와 채널A(챤네루A)는 극우 탈북자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하는 ‘반민족 기레기언론‘의 대명사죠.
 

내가 아는 페친이 있는데, 이 친구가 개인적으로 SNS로 연락하는 러시아 친구가 있음. 이 친구 할아버지가 고려인이고, 우크라이나 돈바스 출신임. 그 친구는 현재 러시아에서 살고 있고, 돈바스 내전때 러시아로 피난옴. 07년생인 그 친구는 7살때 우크라이나 돈바스에서 살았는데, 본인 고모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신 토막내는걸 직접 봤다고 한다. 그런 테러와 학살을 피해서 러시아로 왔다고. 이런 얘기 들으니 우크라이나 지지한다는 우뽕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https://matomehub.jp/ukraine/page/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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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온갖 반인륜적이고 악랄한 만행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는데, 언론은 침묵하고 있어요!
 
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모노그래프시리즈 11
도미엔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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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폭격>의 저자로 유명한 김태우 교수가 집필한 신간 한권이 있다. 책의 이름은 <냉전의 마녀들>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사회에서 반파시즘 연대운동을 벌였던 국제여맹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1951516일부터 527일까지 북한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벌였던 국제여맹의 조직원은 총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으로 구성되었었다.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베트남 출신의 여성도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은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차원에서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과 같은 소위 제3세계로 불릴 수 있는 국가의 인물들과도 교류를 했던 것이다.

 

<냉전의 마녀들>에선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시기 전개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 당시 호치민(Ho Chi Minh) 정부는 미국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 북한과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4.27 시대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을 보면, 1960년대 당시 북한이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 등과 같은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연대와 지원을 한 것으로 나온다. , 북한과 베트남의 반제국주의 연대 차원에서의 관계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 두 권의 책이 제법 자극제를 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2022년 올해, 아주 흥미로운 책 한권이 출간된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 책이 바로 베트남 연구자인 도미엔(Do Mien)씨의 저서 <붉은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간추린 것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동맹관계를 재조명한 책이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며, 올해 들어 정말 흥미롭게 읽은 책이 됐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이승만 시대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극단적 반공주의(Anti-Communism)이 아직도 남아있는 사회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모종의 잘못된 행위로 간주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일반인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그것도 베트남 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공동연대의식을 조명했다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 건드리기 다소 힘든 점을 용기 있게 조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도미엔씨는 북한과 베트남의 연대의식의 시작점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양국이 경험했던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비슷한 경험의 공통성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호치민이 독립을 선포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8년간 전쟁을 치렀다. 북한 또한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이후 불과 2년 만에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양국의 전쟁에는 미국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미국은 이 두 전쟁을 반공주의의 논리로 접근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개발에서 비롯된 매카시즘이 사회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러한 반공주의는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성격을 가진 전쟁을 오로지 반공주의적 논리로 접근하게 만든 것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에 형성된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의식이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의 남북분단 상황과 미국의 남베트남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베트남 침략에서 보다 구체적인 양국의 반미의식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되자,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얘기하는 국내 기사들이 제법 나왔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 당시 전사한 조선인민군 공군조종사의 묘가 베트남 박장 성에 있다는 사실도 기사화됐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이들의 연대의식이 기원이 과연 어디인지 얘기하는 기사는 없었다. 그러한 점을 이 책이 충분히 채워줬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명장인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 번역한 잡 장군의 책에는 디엔비엔푸 전투 10주년을 맞아 그가 쓴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라는 글도 같이 실려 있는데, 그 글에서 잡 장군은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썼다.

 

잡 장군이 1964년 글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이었다는 것을 1950년대 북한의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래는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 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사실은 전 세계 피압박 인민들에게 민주진영의 적극적인 지지 밑에 자기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전 민족이 단결하여 일떠서 싸우면 어떠한 제국주의도 물리칠 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하여 주었습니다. 실례로 지금 이란, 애급, 윁남, 말라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 인민들이 조선 인민의 투쟁에 고무 되여 민족해방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전을 요구하며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정전이 된다고만 생각하고 장기전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출처: 붉은혈맹 p.59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북한과 베트남은 중국과 더불어 소위 반제국주의 연대를 구축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 중에는 중국 군사학교에 간부 및 군인으로 파견된 베트남인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책에 따르면 19506월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북베트남인 3,000명가량이 중국에서 군사훈련 및 정치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정세를 볼 필요가 있다. 1949년 중국이 마오쩌둥의 주도로 통일이 되면서, 아시아에서의 냉전진영은 극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은 호치민의 지도하에 1946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침략자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에 맞서고 있던 호치민 정부를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베트민 병력이 중국에서 군사 및 정치훈련을 받았고, 더 나아가 일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김일성은 침략자이기에 나쁜 놈이다라는 이미지가 유난히 부각되며 사회적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책에 나온 사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실들은 그러한 하나의 사실관계만으로는 한국전쟁을 파악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504월부터 9월까지 중국은 베트민에게 다량의 군수품과 일반물품을 원조했다. 그것은 14,000자루의 소총과 조종사, 1,700자루의 기관총과 무반동총, 150문의 박격포, 60문의 포, 300개의 바주카포뿐만 아니라 탄약, 약품, 통신 재료, , 음식 2,800톤을 포함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양국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반공정책과 연관이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중국의 베트남과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당시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갈등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에 바탕을 두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프랑스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한 미국의 움직임을 한반도-대만-인도차이나 세 방향에서 중국을 포위-침공하는 전략을 실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3국의 상황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중국과 아시아의 혁명이 거대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거시적으로, 마오는 중국의 한국전쟁 및 항불전쟁 참여가 세계와 아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및 반제국주의 혁명 수행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붉은혈맹 p.45~46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분단이 되자,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거부했다. 미국이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내세운 응오딘지엠은 과거 항불 투쟁하던 이들에 대해 탄압과 구금 그리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결국 1960년 베트콩 창설에 큰 이유를 제공했다. 응오딘지엠이 전직 베트민 투사들에 대해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던 1957년 호치민은 대략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대미행장에 힘쓰기 위해 북한·북베트남 연대를 강화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호치민은 북한과 북베트남의 분단문제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양국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미 제국은 조선 및 베트남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군사기지를 늘리며 긴장상태를 일으키고 있고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미 제국의 전쟁도발 음모에 당면했기에, 선두에 선 소련과 중국, 그리고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은 인류의 평화문제와 사회주의 업적에 책임을 인식하여 단결심을 강화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을 증진해야 합니다.”

 

출처: 붉은혈맹 p.65~66

 

이러한 호치민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항불전쟁과 한국전쟁 시기 식민지 경험과 반식민지 투쟁에서 형성된 양국의 연대의식은 양국의 남북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반미주의적 연대의식으로 보다 구체화됐다. 즉 이러한 과정에서 북베트남과 북한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맞선 연대의식을 강화해나갔고, 이것은 1960년대 미국이 침략으로 일어난 베트남 전쟁 속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양국의 문화 및 정치도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소개되기도 했으며, 1964년에는 로버트 맥나마라를 암살하려다 체포당해 총살당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응우옌반쪼이(Nguyen Van Troi)가 북한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북한은 응우옌반쪼이 정신을 강조하기도 했으며, 응우옌반쪼이의 이름으로 생산력 강화를 주장하며 공장의 생산력 증진 및 북베트남의 지원을 강화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 파견은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을 정도로 제법 유명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이 북베트남에게 얼마나 많은 무상지원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도미엔씨의 논문은 이러한 점을 아주 잘 집고 있다.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지원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으며, 초기 지원은 북한이 요구한 것 보다 1.5배나 많기까지 했다. 북한의 지원은 단순히 공군 조종사 100명과 심리전단 인원뿐만 아니라 무상지원도 있었다는 사실을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에 시작되었다. 해당 문서에는 1965~1973년에 이르는 동안 연도별 북한의 지원액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다. 북베트남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4년 단위로 나누어 총 2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의 4년이 1단계, 1969년부터 1973년까지는 2단계이다. 1960년대 중후반 북한북베트남 관계의 진전을 잘 보여준 북한의 베트남 무상지원 1단계 양상이 <3-1>에 제시되어 있다. <3-1>에서 보듯 1965년의 지원 금액은 1,200만 루블이었다. 1965~1968년의 지원 금액은 3,000만 루블에 이르렀는데,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높은 지원 수준으로 평가했다. 북한의 북베트남 무상지원은 1970년대까지 진행되었으나, 전체 연도를 놓고 봤을 때 1965년의 1,200만 루블이 가장 고액이었고, 해당 연도가 1965~1968년 총지원액인 3,000만 루블에서 40%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1965년 지원액이 베트남 전쟁기 북한이 베트남에 지원한 최고 지원 금액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163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와 양국의 협력의식은 놀랍게도 1968년 베트남의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다소 약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저자의 근거는 당시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지원액의 감소와 1969년 전투기 조종사의 철군 등과 같은 여러 근거에 입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국의 연대의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1975년 통일 이후 양국의 약간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국에 맞서 승리한 베트남의 승리에 대해 환영해주긴 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 북한의 중국에 가까운 노선을 걷고 베트남이 소련에 가까운 노선을 걸으면서, 양국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빌미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북한은 베트남에 대해 비판 성명을 냈다. 그러한 배경이 1990년대 북한과 베트남 관계의 냉각 기류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거기다 1992년 베트남은 대한민국과 수교했고, 1994년 미국과 수교를 했다. 1986년부터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의 영향이었다. , 그러한 점은 당시 북한이 베트남과 거리를 두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래도 양국의 관계는 2000년대 들어 다시 회복세로 진입했으며, 오늘날의 관계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번에 도미엔씨의 책을 읽으며, 내가 많이 궁금해했던 주제를 많이 공부할 수 있어서 기뻤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을 가르쳐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물론 나는 이 책 내용에 100%까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훌륭한 연구 자료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베트남인 연구자이기에 베트남측 문서를 많이 활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으며, 한국 사람들이 정말 알기 쉽지 않은 최근 베트남 역사학계의 동향까지 알려준 것도 정말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이미 1967년부터 소련이 북베트남에 미국의 협상 조건을 전달했고, 북베트남에 협상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음을 드러냈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소련의 관점은 현상 유지였기 때문이다. 즉 소련은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 중단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남베트남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 및 군사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정치 및 통일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16~217

 

그 외에도 헝가리 연구자의 문서와 윌슨 센터 자료, 기존 국내에 나온 연구와 북한 자료 및 베트남 자료를 고루고루 사용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 중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최신의 자료도 제법 많이 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 또한 은연중에 언급한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을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인 리영희 교수에 의해 나온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일각에서는 낡은 관점으로 치부하며, 도리어 정통성이 없던 남베트남에 대한 옹호의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은 서방학계 일부의 흐름일 뿐, 전반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제3세계적 흐름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책의 저자 또한 베트남 전쟁을 통일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또한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자료도 입증하고 있듯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뿐만 아니라, 미국이 내세운 나라 남베트남의 정통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응오딘지엠 정부가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베트민 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학살했던 역사에서 입증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책 초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겠다.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갈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복합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통일전쟁이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8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책의 내용을 통해 저자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베트남 전쟁의 성격과 그 의미는 전쟁의 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현대사에서 찾는다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발생한 베트남의 ‘8월 혁명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19459월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과 함께 호찌민이 선언한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베트남 통일을 당시 국제사회가 승인했다면, 특히 구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후 30년에 걸친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의 전쟁), 2차 인도차이나 전쟁(미국과의 전쟁)은 연속적인 반제국주의 항쟁인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9~30

 

이 책의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이 얼마나 많은 전투기를 격추했고, 또 얼마나 많이 전투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책이 아주 잘 쓴 명저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고 이 책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다시 한 번 저자에게 깊이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사실 이 책은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 부분은 남한과 남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다. 이 나머지 부분이 책으로 나올 것을 저자는 머리말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 점에서 나머지 절반 부분도 많이 기대가 된다. 나는 북한과 베트남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앞으로 더 좋은 연구 성과가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이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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