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러우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구 인터넷에서 한 유튜브 동영상이 논란이 되었다. 그 동영상은 붉은 별이 달린 모자를 쓴 미국인 남성이 러시아군의 기갑 행렬 앞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영상에서 이 미국인은 우크라이나의 해방자들과 함께 전선에 있다고 말하며, 우크라이나의 좋은 사람들을 돕고 나쁜 사람들을 박살낼 것이라고 말한다. 유튜브의 친러시아 동영상 검열에 따라 곧바로 삭제되었지만, 트위터 등을 통해 여러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2014년 돈바스 전쟁이 발발했을때, 여러 나라에서 돈바스 주민들의 항쟁을 도와 마이단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서유럽 국가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돈바스로 간 자원자가 있었는데, 그가 오늘 소개할 미국인 사회주의자 러셀 벤틀리이다.


러셀 벤틀리는 텍사스 출신으로, 1960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동네인 텍사스에서 자란 부잣집 아들이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점차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는 호치민과 체 게바라의 저작들을 읽으며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인들이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고, 피델과 체의 혁명은 쿠바를 도박장이자 매음굴로 만든 외국인들을 몰아낸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벤틀리는 중학교를 중퇴한 뒤 검정고시를 보고, 미군에 입대해 독일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후 텍사스 해안으로 돌아가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고 록 밴드 활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쿠바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벤틀리는 쿠바에서 쿠바군 장교를 만났는데, 그 장교는 벤틀리에게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벤틀리는 "나는 겁쟁이로 사는 것을 그만두고 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가 된 벤틀리는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1996년 미네소타에서 대마초 합법화 운동을 하다 대마초 밀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1999년 탈옥하기도 했으며, 이후 워싱턴 주에서 살며 시애틀에서 열린 반세계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밖에 걸프전 반전 운동, 이민자, 여성, 동성애자의 인권 신장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다 2007년 재수감되어 2012년에 석방되었다.


그레나다 침공, 유고내전 개입,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 등을 겪으며 조국 미국에 대한 벤틀리의 실망과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2011년 미국의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을때, 그는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마이단 쿠데타가 일어났다. 벤틀리는 이 쿠데타를 미 국무부와 CIA가 배후에 있는 색깔 혁명으로 바라봤고, 오데사 학살 사건으로 반 마이단 시위대들이 마이단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며 친러 분리주의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이단 정권이 들어선 후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는 우크라이나 군대의 무차별 폭격을 당하게 되었다. 벤틀리는 루간스크 시가 우크라이나군의 미사일 공습으로 파괴되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롤링스톤 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공습으로 다리가 잘린 채 죽어가는 여성을 언급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가 나에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할 것인가? 손을 잡고 평화를 외치며 미국을 횡단할 건가? 아니면 쿰바야(아프리카 영가)를 부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아니, 난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죽이러 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벤틀리는 그의 다짐을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러시아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는 도네츠크로 간 후 이탈리아 출신의 자원병을 만났고 그를 통해 도네츠크 민병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 였고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지만,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군과 싸우기 위해 민병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텍사스'라는 호출부호로 불리며 도네츠크 공항 등 격전지에서도 싸웠고 "자유 돈바스 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유튜브에도 동영상을 업로드 했다. 벤틀리는 자신은 자원병이며, 아무에게도 돈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7년 그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시민권을 받았고, 2020년에는 러시아 시민권도 얻었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전쟁에 대해 "빌어먹을 미국 정부가 8년 전에 시작한 전쟁을 러시아가 끝내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라고 평하며, 푸틴에 대한 지지와 젤렌스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그는 젤렌스키를 "그는 광대, 꼭두각시고 약쟁이다. 말그대로 마약중독자다. 그는 포로셴코처럼 훈련받은 원숭이다. 워싱턴의 주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가. 젤렌스키는 포로셴코보다 더 한심한 아첨꾼이다."라고 평했다.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서구 언론의 러시아군이 고전하고 있다거나 우크라이나군이 이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도(당시는 4월 1일)들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진격이 느린 것은 우크라이나 군과 그들의 나치 부대가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으며 러시아군이 집집마다 확인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인간 방패는 우크라이나군의 전략 중 하나이고 그들은 믿을 수 없고 비겁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의 나치 대대들은 진짜 나치들이다. 스와스티카 문신을 하고 '하일 히틀러'나 '반데라 만세'를 외치고 다닌다. 반데라는 나치 협력자이자 끔찍한 전범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돈바스 주민들에 대해 "지구의 소금이자, 인간성의 정수"라고 극찬하면서 교양적이고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벤틀리는 8년째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사실상 미국을 적으로 두고 싸우고 있지만 가족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는 여전히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이념을 사랑한다. 나는 미국인과 미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한다." "나는 어디에서나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파시스트 정권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갈 의사는 없음을 밝혔다. 그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애는 여기서 하는 것처럼 미국을 해방하는 러시아 전차에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맨몸으로 미국으로 돌아간다면 내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라며, "난 미국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 난 DPR 여권을 갖고 있고,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시민이고, 러시아 시민이기도 하다. 난 작은 집과 큰 마당, 아름답고 똑똑하고 강한 훌륭한 아내가 있다. 그녀는 3개 국어를 하고 90%의 미국인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여기 말고 살고 싶은 곳은 없다."라고 도네츠크에서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이 러셀 벤틀리의 일생으로, 롤링스톤과 뉴스위크, 스푸트니크의 인터뷰를 참조했다. 본래 롤링스톤의 기사 전문을 번역하려 했지만 서구 주류 언론인 롤링스톤답게 벤틀리를 미치광이 음모론자로 묘사하고, 기사 중간중간에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을 끼워넣고, 도발, 조롱이 목적인 질문도 서슴치 않는 내용이라 번역하기엔 불쾌감이 느껴져 벤틀리의 일생 부분만 참조하고 거기에 뉴스위크와(여기도 부정적인 논조지만 롤링스톤보단 온건함) 스푸트니크의 기사를 참고해서 작성했다.


아래부터는 2018년 좌파 유튜버 'TheFinnishBolshevik'가 인터뷰한 내용 중 돈바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답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질문 5: 당신은 이전의 많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왔다. 당신과 당신의 조직인 'Essence of Time'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노보러시아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사유 재산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기본적 구조들이 여전히 돈바스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답: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서방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을 비웃는다. 그들 대부분은 위선자, 겁쟁이, 얼치기들로, 그들의 공산주의는 아마존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사는 것, 그리고 아마 끝없이 인용할 수 있는 한두권의 책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서방에 앉아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완벽한 예다. 그들은 실제 파시스트와 싸우는 것 보다 동지를 비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서구의 아무 "공산주의자" 그룹에게 실제로 나치를 죽였는지 물어봐라. 난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천 배를 더 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는 사람들은 경멸할 가치도 없다. 내가 1995년 쿠바에 갔을 때, 쿠바 육군 대위와 아주 계몽적인 토론을 했다. 나는 내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자, 그녀는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내가 둘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다." 기꺼이 싸우겠다는 것은 기꺼이 죽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서방에는 공산주의자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나와 'Essence of Time'의 내 동지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자격을 얻었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그렇게 할 때가 되었다.


DPR에서 의료와 교육은 무료다. 식품, 에너지, 주택, 교통과 통신비는 서방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질은 더 좋다. 이것은 좋은 시작이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서 이긴 사회주의이다. 이것과 동일하거나 더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은 우리를 비판하거나 조언을 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이나 하러 가라.


질문 6: 위키피디아같은 일반적인 인터넷 자료를 통해 돈바스 전쟁을 조사해 보면, 노보러시아 군대에서 싸우는 부대 목록에 민족볼셰비키, 러시아 국민 연합, 세르비아 체트니크 같은 대부분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대할 극우 부대들이 있다. 이것은 서방의 많은 좌파들에게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에 관심을 잃게 하는 것이다. 서구 맑스주의자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에 나치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노보러시아쪽에도 나치와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우익 부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이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볼 것이다.


답: 전쟁 초기 노보러시아 군대에 "민족주의자"들이 일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나와 함께 전선에서 싸운 사람들은 나치 문신이나 나치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싸우지 않을 것이다. 노보러시아 군에는 카자크나 심지어 왕정주의자까지도 있지만 그들은 파시스트나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진짜 공산주의자들 옆에 서서 나치와 싸우는 전우들이다.


돈바스 공화국을 위해 싸우는 나치나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둘 다이다. 그건 "공산주의는 나치만큼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멍청한 말이다. 그들은 이것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공산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혁명적 운동 중 하나를 지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한다. 비겁함과 위선의 반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파시즘과 싸워 이긴 사람들에게 부적절하고 자격 없는 비난을 한다.


질문 7: 돈바스 지역은 사회주의 이념과 반파시스트 정신의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이 탄생한 곳이며, 2차 대전 동안 돈바스는 나치 독일에 영웅적인 저항을 했고, 최근까지 오데사는 수백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매우 다문화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당신은 노보러시아 사람들이 소련 시절의 향수나 민족적 자부심을 제외하고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열광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답: 도네츠크도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적이고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1869년 존 휴즈가 이곳에 제철소와 탄광을 지었을 때, 그는 전세계에 이곳에서 좋은 일자리와 정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100개 이상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도네츠크로 이주했고, 그 후 "유조브카"(도네츠크 시의 옛 이름)라고 불렸다. 돈바스 지역은 역사적으로 소련에서 가장 굳건한 공산주의적 지역 중 하나였다. 이 곳 사람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한 이론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 그들의 투쟁, 희생, 승리의 역사, 사회주의의 보상과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폐해에 대한 현실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싸워야 할 때 기꺼이 싸울 것이다. 나는 돈바스 공화국이 그 결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의 선두이자 가장 좋은 예시라고 말하고 싶다.


질문 8: 우리는 돈바스의 몇몇 공장들이 국유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유화가 얼마나 퍼져있는지, 이것이 경제의 다른 분야로도 확산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답: 몇몇 공장과 기업체들이 올리가르히로부터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DPR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부유층을 부유하게 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도록 조정된다. 그것은 진행중인 과정이다. 나는 이곳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미국이나 심지어 유럽연합 대부분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인민의 뜻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 9: 돈바스가 국교(동방 정교회)를 믿는 것과 공산주의 원칙을 어떻게 조화시키나? 냉전기 소련과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에서 종교는 권장되지 않았다. 당신은 이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나? 해방신학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


답: 예수 그리스도는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신전에서 채찍으로 환전상들을 쫓아내고,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는 이곳에 정교회 사제인 친한 친구 3명이 있다. 그들 모두 DPR군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참호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반파시스트들 중 일부는 성직자다. 디트리히 본회퍼, 오스카 로메로, 베리건 형제, 그리고 하산 나스랄라.


'Essence of Time'은 소련의 반종교적 측면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여긴다. 나는 공산주의와 종교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비록 나는 조직된 종교를 의심스럽게 보긴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가 기독교의 주요 종파 중 가장 부패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교회는 "국교"가 아니다. 이곳에 국교는 없다. 도네츠크에는 유대인, 개신교도, 무슬림들이 있으며 예배 장소도 있다.


질문 10: 당신은 돈바스에 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동영상에서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만약 돈바스에서 실업자가 된다면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길거리로 쫓겨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가? 돈바스에선 직업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직업을 가질때까지 국가가 돌봐주는가? 돈바스에는 노숙자가 어느정도 존재하나?


답: 돈바스 인민공화국에는 노숙자가 없다. 말그대로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가 살 곳을 준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도 전기가 꺼지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고용되어 거리를 청소하거나 공공 정원을 가꾼다. 꼭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임금은 적지만 먹고 살기엔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서방의 어느 곳보다 좋고, 계속해서 개선되고 있다. 포위된 상황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다.


질문 13: 돈바스 지역의 반군의 통제가 러시아 제국주의의 증거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러시아는 1990년 초부터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신은 그들을 제국주의자로 보는가?


답: 다시 말하지만, 바보와 거짓말쟁이들만이 "러시아 제국주의"를 말한다. 돈바스 사람들은 외국에 의해 세워진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리를 돕는다. 러시아는 많은 결점들이 있지만 제국주의는 그 중 하나가 아니다. 소련은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곳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줬지만 그 장소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이익이나 자원을 착취하지 않았다. 오늘날 돈바스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연방은 돈바스를 지원하는 대가로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준다. 러시아의 시리아 지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은 서방보다 낫고, 러시아에서는 삶의 질이 계속해서 향상되고 있지만 서방에서는 계속 낮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참고자료


https://www.rollingstone.com/politics/politics-features/russell-texas-bentley-putin-propaganda-ukraine-interview-1315433/ 롤링스톤 기사


https://www.newsweek.com/russell-texas-bentley-interview-pro-russia-donbas-ukraine-1684450 뉴스위크 기사


https://sputniknews.com/20220401/nazism-is-disease-texan-came-to-donbass-to-protect-people--tell-the-truth-about-8-year-long-war-1094369347.html 스푸트니크 기사


https://mltheory.wordpress.com/2018/08/31/interview-with-russell-bentley-american-communist-in-donbass/ 인터뷰 전문


원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pd&no=131032&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B%8F%88%EB%B0%94%EC%8A%A4&page=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강철비 2: 정상회담>을 보면미국과 일본이 한 팀이 되어 중국과 대립하려는 구도로 나온다영화상에서 일본의 정치계를 사실상 사로잡고 있는 모리 신죠라는 한 인물이 나온다그는 일본 내 극우 단체의 물질적 지주 역할을 하는 야마토 재단의 총수로 아베 신죠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모리 신죠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정의의 대동아 전쟁이라고 믿으며 원자폭탄 투하를 얘기하며전형적인 일본의 역사왜곡 인식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그는 어제 죽은 아베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일본의 이익에 맞게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인물로도 작중에서 비추어 진다.

(욱일기와 성조기를 같이 들고 있는 일본 자위대)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패망시킨 나라가 미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일본의 침략을 무찌르고, 1945년 8월 원자폭탄을 투하하여일본을 항복시켰다는 것이다물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기여한 공로가 큰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실제로 일본 대본영이 1945년 8월에 조기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 때문이었다소련의 진격을 워낙 신속했고일본의 저항의지를 완벽히 꺾었다대다수 일본 제국의 전쟁광들은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미국과 함께하는 일본 자위대 행사)

 

물론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일본의 신속한 항복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태평양 전쟁 당시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다카날 전투펠렐리우 섬 전투와 레이테만 해전 등 미국의 전쟁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조기 항복한 이후미국은 일본을 점령했다일본 본토에 미군이 주둔했으며더글라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GHQ가 창설됐다이후엔 도쿄 군사재판도 열고 일부 전범들이 처벌받기도 했으나대다수 전범들은 살아남았다. 731 부대로 유명한 이시이 시로 같은 전쟁범죄자들이 맥아더와 결탁하여 살아남았다.

(욱일기를 바탕으로 서서 웃고 있는 미군 병사)

 

미국은 1946년과 1947, 1949, 1952년에 치러진 조기 선거를 지도했다맥아더가 통치하는 미점령군은 극우 세력(자유당)과 자유주의 세력(민주당)이 연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대적하도록 만들었고, CIA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민주당과 자유당이 함께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이 민주자유당이 바로 1955년 일본의 자유민주당 즉 자민당이 된 것이다당시 민자당에는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결집했다하토야마 이치로나 기시 노부스케 등이 바로 그들이며일본 극우 CIA요원 고다마 요시오를 포함하여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친미주의자들로 변모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미군 마크)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일본은 미국의 전쟁물자 보급기지 및 수리기지로 변모했다이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에도 성공하여세계적으로 막강한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다일본의 자유민주당은 친미외교노선을 추구하며냉전시기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주의 라인을 형성하는데 주력했으며이러한 기조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분명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렸지만그 일본제국주의적 잔재를 가지고 반공국가 일본을 만든 것 역시 미국이었다따라서 미국과 일본은 한패며현재 일본의 극우들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한국 극우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도 아마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암살 당한 아베 신죠는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가 결합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일본 제국주의자 아베가 미일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며일본의 과거사를 부정하며 한국과 북한중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자극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미국 제국주의가 아베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미제국주의는 아베 신죠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극구부정하는 정권이어도 일단 친미주의만 한다면 받아들인다미국의 부시 정부와 버락 오바마 정부 그리고 조 바이든 정부까지 이들은 일본의 극우주의자들과 사이가 좋았고한일관계에 있어서 항상 일본편에 섰었다.

(주일미군 해군 마크)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얘기할 때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을 지적한다그러나 이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 731일 부대와 같은 제국주의적 범죄를 부정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고세력이 견고한 이유에는 자신들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외면하고 있다또한 이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반공주의 라인을 형성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이용했다는 사실도 항상 외면받는다.

 

한국 사회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지만이제는 본질을 알아야할 때다한국의 반공주의도 일본의 반공주의 및 제국주의도 사실 따지고 보면 미제국주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이번에 아베 신죠가 일본의 한 극우주의자에게 사망하자미국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포함하여미국 및 서구 세계의 언론들은 아베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다일본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아베를 마치 민주주의자로 미화하고 있다왜 그러겠는가이것은 결국 미제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공주의 친미주의의 문제가 아니겠는가이런 점에서 아베의 죽음은 미제국주의의 추악한 민낯을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3-08-0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미국은 대통령이 공화당(리차드 닉슨, 로날드 레이건, 조지 H.W. 부시, 조지 W. 부시, 도날드 트럼프 등)이건 민주당(죤 F. 케네디, 린든 B. 죤슨,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이건 항상 한일갈등에서 일본 편을 들어왔죠.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미국은 항상 영국 편을 들고, 영국 중심의 유럽정책을 편다. 중동에서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 편을 들고, 친이스라엘적인 중동정책을 편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은 항상 일본 편을 들고, 동북아 패권정책에서 일본 중심적인 정책을 편다‘!

게다가 앞서 설명하신 것처럼, 악랄한 전쟁범죄를 자행하고도 하나도 반성하지 않는 사악한 국가 일본이 국제제재를 받고 매장되기는 커녕 큰소리치고 떵떵거리며 ‘아시아 유일 선진국‘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것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패권국가들이 일본을 지원하고 있음에 있다는 것도 알면 좋습니다.

역시 미국이나 일본놈들이나 우리 민족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 패권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은 똑같군요!
 
붉게 타오른 1917 - 만화로 보는 러시아 혁명
존 뉴싱어 지음, 팀 샌더스 그림, 김원일 옮김 / 책갈피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붉게 타오른 1917 서평: 세계를 뒤흔든 1917년

1917년은 세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세계최초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세력은 자본가 계급과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들은 과거 봉건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봉건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던 부를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이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짧은 기간안에 그러한 것들을 이루었다. 비록 내전이 일어나, 기반이 초토화되어 복구작업을 거쳐야 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인류에게 준 희망과 꿈은 실로 거대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독점해야한다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과 경쟁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해서 창출한 가치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으로 타파해야 한다 생각했으며, 레닌은 이를 봉건적인 국가 러시아에서 성공시켰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을 본다면, 혁명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19세기 후반 들어서 급속한 자본주의화른 거치던 러시아에선 노동자 계급이 탄생했고, 이런 노동자들은 착취와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로 노동자들이 봉기했지만, 차르의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차르는 자본가와 봉건 귀족계급만을 대변했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모한 제국주의 전쟁을 지속했다. 차르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 처럼 자국의 노동계급을 총알받이로 내세웠으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거듭해서 패배했다. 식량과 물자는 떨어지지만, 부유층들은 여전히 호화롭게 살았던 반면, 노동자 계급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렇게 해서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2월 혁명이 발발했다. 2월 혁명을 통해 과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서 볼셰비키와 경쟁했던 멘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멘셰비키 주도로 구성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내각은 사실상 차르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고, 이는 당연히 민중의 반발을 샀다.

이때 레닌은 스위스에서 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가서 4월 테제를 발표했으며, 3개월 뒤 7월 봉기를 주도했다. 7월 봉기는 임시정부의 진압으로 실패했지만, 임시정부는 코르닐로프의 반혁명적 반란과 더불어 민중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결국 10월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키가 주도한 혁명이 시작됐고, 이들은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소련을 탄생시켰다.

이 만화는 1917년 2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대략 8개월간 혁명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일을 한 여성 노동자와 병사를 통해 전개해 나가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혁명은 과거 지배계급들이 강요하던 억압체제에 맞선 저항이었고,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방법이었다. 여성에게는 여성의 권리를, 노동자에게는 노동자의 권리를, 배고픈 이들에게 빵을, 토지가 없는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것들을 단기간에 이루고자 했던 하나의 시도였고, 실제로 그러했다. 책의 서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이하던 2014년 영국에서 출판되거나 방영된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가득찼었다고 한다. 마치 영국이 참전한 이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이었음에도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커녕 오히려 미화되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제점은 단순히 영국만의 문제점은 아닐 것이다. 당장 한국 사회만 하더라도 제국주의적 모순성이 강한 한국전쟁을 다룬 책이나 다큐멘터리 대다수는 한국전쟁이 가지고 있는 그 제국주의적 문제가 항상 거세당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2014년 영국에서 나타난 문제와 현재 한국사회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문제점은 비슷하다.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5주년이자, 소비에트 연방 선포 100주년이다.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1991년 미국과 경쟁했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해체만을 보고서 하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전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좌파들의 목소리와 반미 국가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준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진보의 꿈은 폐기되어야할 유물이 아닌, 계승되어야할 진보적 과제이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 인류적 과제의 기본적 틀인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적 모순이 살아있는 현재의 세계가 그 모순적 구조를 자각하면 할수록 세계인들은 1917년 러시아 노동자 농민이 자각했던 것을 자각할 것이며, 이러한 해답은 사회주의의 길임을 인식하게 될거라 믿고 있다. 사회주의는 실패한 것이 아닌, 우리 인류가 야만주의에 맞서 추구해야알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년 독일에서 개봉했던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를 보면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아나키스트 루디 두치께가 한 괴한에 의해 총탄에 맞고 부상당하자이에 분노한 이들이 집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집회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상황까지 치달았고어느 한 독일의 반전인사는 불에 타고 있는 시위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드레스덴!

히로시마!

베트남!”

 

영화에서 한 반전인사가 외친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그리고 베트남은 폭격으로 인한 대량 인명피해를 나타내는 것이다2차 세계대전에 대해 조금 공부해본 이라면,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에 있던 드레스덴 폭격을 들어봤을 것이다. 2일간의 공습으로 적잖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일단 나치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에 따르면 20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이후 연합군 측의 조사에서는 20만 명이 아닌 3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나오지만미국의 반전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종합적으로 10만 명이 죽었다고 여러 저서에서 주장했다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20만 명은 조금 부풀려졌을 수도 있고, 3만 명은 너무 축소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따라서 종합적으로 6만 명에서 10만 명 정도가 직접적인 죽음과 부상으로 인한 죽음을 포함하여 희생되었을 것이라 본다.

(B-17 폭격기)

 

드레스덴 공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미 연합군에 의한 공습 희생자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물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은 당연히 전쟁을 시작하고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나치 독일에게 있다나치 독일은 유럽 전역에서 인종청소와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무수히 많이 자행했고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트레블링카 그리고 아인자츠 그루펜의 전쟁범죄 등을 통해 입증이 된다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파시즘에 맞선 전쟁이었지만그 과정에서 연합군에 의한 전쟁 피해도 분명히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따라서 이 글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공습에 의한 독일 본토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서유럽 침략 과정에서 공습을 단행했다.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에는 영국을 침략하기 위해대대적인 공습에 나섰고,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습했다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 공습으로 인해서 대략 5만 명 이상의 영국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대다수의 독일군 병력과 물자는 동부전선으로 향했고비록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습은 1944년까지 있었지만, 1942년부터는 연합군이 서부전선에서 완벽히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사실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의 활약으로 독일은 승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바로 그렇기 때문에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영국과 미국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습을 하고 있는 B-17 폭격기 편대)


(영국군의 랭커스터 폭격기)


1942년 3월 영국 공군은 파리 르노의 공장공습에 성공한 데 고무받아 3월 28일부터 29일까지 발트 해의 유서 깊은 한자 동맹 도시 뤼백에 공습을 가했다그리고 4월에는 발트 해의 또 다른 중세도시인 로스톡에 나흘 밤 연속으로 소이탄을 쏟아 붓는 공습에 다시 성공했으며, 5월에는 폭격기 1,000대를 동원하여 쾰른을 공습했다. 6월에는 에센과 브레멘에 공습을 가했으며, 1942년 8월에는 영국에 도착한 미 육군 제8항공군이 루앙에 있는 조차장을 공습해서 첫 공습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함부르크)

 

미공군과 영국공군은 주간과 야간에 독일 본토에 대한 폭격을 실행했다특히나 미군은 B-17 폭격기를 유럽전선에 많이 투입했으며그로 인한 군사적 효과는 극대화됐다. 1948년 8월 17일 미공군(8항공군)은 독일 한복판에 있는 슈바인푸르트를 폭격했다. B-17 229대 가운데 36대가 격추되어 소모율이 16%였을 정도로 공군의 피해가 컸다주간공습이었던 것과 독일의 촘촘한 대공망이 이러한 피해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1943년 7월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를 폭격했다주간에는 미군이 야간에는 영국군이 몇일간 함부르크를 공습했고그 결과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는 함부르크 시민들이 사망했다시의 몇몇 구에서는 주민의 치명적 사상자 수가 30%를 넘어섰고여성사망자가 남성 사망자보다 40% 더 많았다.

(1945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드레스덴)

 

전쟁 기간을 통틀어 계산이 이루어지자함부르크의 폭격 희생자가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함부르크 시에서 징집된 군인의 전사자 비율보다 겨우 13% 낮았다그리고 그 폭격 희생자의 과반수는 1943년 7월의 대공습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이후 미군과 영국국은 뷔르츠부르크에서 7,000다름슈타트에서 6,000하일브론에서 7,000부퍼탈에서 7,000베저에서 9,000마그데부르크에서 12,000명의 민간인을 공습을 가해 사망하게 만들었다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1943년부터 미군과 영국군의 공습을 받았다베를린에 대한 공습은 1943년 8월부터 1945년까지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공습 초기 베를린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독일 민간인은 대략 6,000명 정도로 알려졌으며, 1944년 3월 말까지 150만 명이 집을 잃었고도시 2,000에이커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연합군이 실행한 전략폭격은 독일 민간인의 피해를 더욱 극대화했다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루르 지방의 여러 소도시에서 8만 7,000함부르크에서는 적어도 5만 명베를린에서 5만 명쾰른에서 2만 명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 마그데부르크에서 1만 5,000뷔르츠부르크에서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은 총 60만 명이고부상자는 8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많게는 10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제법 있다이러한 연합군의 공습으로 민간인 피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투입된 연합군의 항공기 손실도 결코 적지 않았다. 1944년 한 해에 미 제8항공군이 잃은 폭격기 숫자만 최소 2,400대이며이런 저런 항공기 손실을 합치면대략 수만 대는 된다아무튼 이러한 공습이 민간인 피해를 늘린 것은 사실이며영국의 경우 과거 독일에게 당한 공습의 피해를 최소 10배 이상으로 복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존 키건류한수(), 2차세계대전사청어람미디어, 2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돌프 히틀러 한길로로로 18
하랄트 슈테판 / 한길사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히틀러와 나치즘

예전에 알라딘에서 산 <아돌프 히틀러>를 읽었다. 1990년대 한길사에서 인물 시리즈 중 하나로, 원서는 독일인이 쓴 책이며, 1983년에 나온 책이다. 히틀러는 전 세계적으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1939년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했고, 홀로코스트라는 아주 끔찍한 인종학살까지 벌어졌다. 히틀러가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책은 그 당시까지 이어져온 히틀러에 대한 연구 흐름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선전 부분에 보다 많은 집중을 기울였다. 따라서 책은 히틀러가 극단적 민족주의에 빠진 이유를 찾기 위해, 히틀러의 초기 생애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즘 이데올로기의 형성 과정 및 나치와 히틀러의 활동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

히틀러를 다루는 책 치고 결코 두꺼운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제법 학술적인 부분도 보인다. 그러나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정말 수박 겉핥기식으로 넘어가는 수준이다. 인물 히틀러를 알기 위해선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다 깊이 다뤄야 하지만, 나치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만 하다보니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짧게 다룬 느낌이다. 1942년 반제회의에서 유대인 절멸정책이 결정되어 실행되었다는 구절이 책 분량에 비해 짧게 들어가 있다.

또한 책은 나치즘의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히틀러의 편협한 이데올로기는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치즘의 영통팽창적 망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들은 왜 인종 이데올로기적 사회를 추구한 것일까? 여기에 대해 내가 짧게 할 수 있는 명쾌한 대답은 바로 ˝서구 제국주의에서 비롯됐다.˝라는 대답이다.

나치즘의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와 인종차별 그리고 팽창정책 등은 엄밀히 말해서 19세기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과 같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다. 나치즘 이데올로기에서 빠질 수 없는 반공주의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나치즘과 서구 제국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책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서구적 시각과 소위 자유주의적 시각의 치명적인 한계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히틀러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제법 추천해줄만한 책이다. 존 톨랜드의 책은 글이 어렵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이 읽기에 너무 두껍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두꺼운 책을 읽기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추천할만 하다. 이 책은 제법 학술적이면서 분량도 적절한 편이고, 사진도 많이 들어가 있다.

히틀러에 대한 자료는 아주 많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밤하늘의 별만큼 자료가 넘쳐난다. 신비한 티비 서프라이즈의 소재로 나치와 히틀러가 자주 사용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서구의 학계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즘과의 공통성에는 항상 외면한다. 앞으로의 히틀러와 나치즘의 연구는 이것을 바탕으로 확산되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