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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의 힘을 빌리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1945815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815일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발빨리 움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몽양 여운형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고,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며 일장기 말소사건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일제의 그 어떤 회유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42년 도쿄에서 미군의 폭격을 직접 경험했던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고, 1944년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준비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천황이 항복하기 전 자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당시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이 있던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8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한반도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고만장했던 친일파들은 목숨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거기다 몽양 여운형 또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친일파들에게 있어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해서 한반도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했다. 한반도 이북에 입성한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하여,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작업들을 단계적으로 해나갔다. 한반도 이북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자,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대에 서야했다. 그들 중 생계형 친일의 경우 용서받거나 인민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악질 친일파들의 경우 처벌받았다.

(얄타회담,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처벌받는 다는 소식은 한반도 이남에서도 전달됐다. 한반도 이북은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부터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일본의 행정체계가 붕괴되었지만,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여운형의 건준이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지만, 조선 총독부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아더는 아베 총독에게 포고문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총독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이전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빅3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그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45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했다. 미군이 상륙하기 2일 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자,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무찔러 준 것에 대해환영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반도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본인들 스스로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99일 서울에 입성하여 그들이 발표한 포고령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친일파들이 살기 위해 해야할 일은 분명했다. 점령군으로써 한반도 이남을 다스리게 된 미군정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에겐 어떠한 나라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큰 비전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도좌파 여운형이나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그들은 친일파로서 단죄당할 것이 분명했다. 임시정부의 김구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군정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발빠르게 움직였던 세력은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세력을 등용했다.)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다. 지난번 5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귀국하기 전 주일미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와 한반도 이남에서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던 하지 사령관과 일본에서 만났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맥아더가 지원해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 사령관과 함께 귀국하게 된 이승만은 그의 주선으로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그는 기자회견과 귀국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승만의 귀국 기자회견 내용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곧 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나오고 지금까지 애만 써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미주를 떠나 하와이, , 일본 동경 등을 거쳐 급기야 어제 저녁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과 얘기해 본 즉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 갈 수 있음을 믿었다. 여기에 나는 우리들의 합동이라는 것을 크게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3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으므로 국내 형편은 잘 모르나 차차 알아가면서 여러분과 합동해 가겠다. 특히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 정부의 대표도 아니오 외교부의 책임자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끝까지 한국의 평민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군정부와 아무런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나 여기 온 길을 열어준 것은 이분들이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 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미한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많았다.”

(미군정의 서울 입성, 이것은 또 다른 외세의 지배를 뜻했다.)

 

당연히 그의 회견과 방송에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이나 미군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는 동포들의 일심협력과 맥아더, 하지, 아놀드 장군의 고마움안 피력할 뿐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일단 독립운동 세력들은 그와 힘을 모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10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이 결성됐고, 이승만은 독촉의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것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 및 사회단체 200여 개가 모여 구성된 협의체였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는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지만, 11월 중순 조선공산당 측에서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했고, 결과적으로 독촉은 해체되었다.

 

1123일 김구를 포함한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했다. 김구를 포함한 임정인물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는 하지가 동원한 환영식이 거창하게 열렸지만, 이들이 귀국할 때는 미군장교 1명과 통역 한명만 마중나올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김구와 같은 임정인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줄 수 있었지만, 김구에게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도자로 칭송받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식됐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상웅은 자신의 저서 이승만 평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와 관련 이른바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한국인 250여 명을 구속하면서, 역설적으로 이승만의 존재가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전파되고,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성은 해방 정국에서 그의 위상을 한껏 부풀리는 기능을 하였다. 여기에 젊은 날의 행적,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임시정부 대통령,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복합되고 부풀려지면서 명성과 함께 신비성을 더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그의 행적이 이런 맥락속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1945916일 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를 포함한 우익인사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다. 이 한민당은 지주와 친일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득권 정당으로 미군정의 구미에 맞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10월에 귀국한 이승만과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친일파와 지주들을 중심으로 뭉친 한민당은 이승만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힘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가 해산되고 나서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노선을 표명했다. 그는 19451221<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했거니와 우리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극렬파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이 분자들은 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돌아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노선과 아집은 모스크바3상회의를 기점으로 더 심해졌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3상회의 당시 미국은 신탁통치를 필요하다면 5년 더 연장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그보다 더 빨리 독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모스크바3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왜곡돼서 전달되었다. 그 바람에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성립이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연히 반탁을 외쳤고 선동했다. 이승만이 반탁을 외침에 따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세력들 또한 반탁운동에 나섰고,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모스크바3상회의 오보, 모스크바3상회의의 내용은 동아일보에 의해 왜곡보도됐다. 미국은 신탁통치 연장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진실은 반대로 보도됐다. 결국 이 왜곡된 보도는 왜곡된 반탁운동을 창조해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시위대, 반탁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들과 이승만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한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신탁통치 논쟁이 거치면서 한반도 이남에서의 좌우갈등은 극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46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지만,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떠한 성과물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6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었다. 정읍 발언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체제를 만들자는 이승만의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등극한 극우단체와 친일집단은 좌익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특히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좌익에 대한 탄압은 더 극심해졌다. 1946101일에는 대구에서 미군정에 맞선 항쟁이 일어났고, 결국 친일 경찰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 발언은 이승만이 통일보단 분단과 외세의 결탁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하자, 이는 미군정에서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외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좌우합작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이승만 세력들의 의도적인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테러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여운형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우익세력들이 여운형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세력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지도자 여운형은 1947719일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7312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좌우합작운동 시기 미국에 로비를 지속적으로 넣었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의 반공 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론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610월 이범석에 의해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 즉 족청은 이승만의 방계 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좌익에 대한 폭력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승만 주변으로 몰린 친일파들은 각종 정보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이범석이 만든 족청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들은 이승만을 위해 좌익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이 만들어낸 각종 경제적 실패로 인해 시위를 하던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공장이나 철도 그 외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경찰과 함께 그들을 진압했다. 여기엔 김두한과 같은 조직폭력배 조직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인 집단은 해방 후 친일지주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행위를 경찰의 비호아래 저질렀다. 당연히 이들은 경찰과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았다.

(여순항쟁 당시 사진, 여순항쟁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민중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항쟁이다. 그러나 이 항쟁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당시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권력이 있었다. 일단 그는 맥아더와 하지 그리고 미국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이용하여 통일정부수립을 막았고,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또한 그들과 결탁하여 극우세력의 테러 행위을 방관하거나 옹호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끝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맡겼다. 유엔에 맡겨진 이후 남과 북은 분단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섰고, 1948815일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정부 수립 과정은 참으로 잔혹하고 혹독했다. 소위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학살당했다. 좌익은 씨가 말렸고, 이들 중 일부는 지리산과 같은 곳으로 숨어서 외로운 투쟁을 한국전쟁 이후까지 해나갔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물러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은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점에서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친일파 척결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란 지도자는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승만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악행은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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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이승만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은 스위스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이승만을 재조명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평가절하했던 이승만은 19321110일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건대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배려로 19333월 국무의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국제연맹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승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1925년 탄핵당한 이후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다. 결국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이민온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승만이 국제연맹일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을 당시 그는 몇 개월 뒤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는데, 쫓겨났었다.

 

1930년대의 국제정세는 급변했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3년엔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침략의 길을 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에선 파시스트 히틀러가 민주적인 투표로 지도자가 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세계를 감돌게 됐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파시즘 진영과 민주진영으로 나뉘어 전투를 치르게 됐고, 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39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 내막기, 이 책은 1941년 이승만이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을 예상하고 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에게 경전급으로 찬양받는 서적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 계속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393월 수도 워싱턴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다. 또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거듭 요청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의 서유럽 정복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했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는 미국과 일본사이에 곳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됐다. 또한 그는 그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교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승만은 매우 반공적인 인물이었기에 불화를 일으켰다. 1940년 광복군 창설이 있을 당시, 백범 김구는 약산 김원봉을 임정에서의 입각을 추진했는데.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은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하며 김구와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했다. 이것은 비록 반공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일제에 맞서 좌우를 연합시키려던 백범김구의 행적하고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공산주의하면 치를 떨었던 극반공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혐오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노예국화 하는 것이기에 오직 미국의 성의있는 원조에 기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인 1941년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한 것에 대해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서술은 어떤면에선 기회주의적 처사였다. 그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한 것은 사실 크게 이상한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팽창으로 나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0년 일본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이것은 소위 미영프(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승만이 그 책을 쓰던 1941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까지 내렸다. 즉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전황으로 치닷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놓여있던 조건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예측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정과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라는 인물을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며 매도했었다.

 

1939년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던 이승만은 1941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자기자신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임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대미 외교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시점까지 절대로 혁명가나 철저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미활동을 전개하게 된 시점은 194112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부터였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승만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승만은 19433월말 하원의원 오브리엔을 통해 한국 임정의 승인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국무장관 헐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혼란과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여,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기각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대국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 OSS의 책임자였던 도노반은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와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는 정한경, 이원순, 임병직 등이 그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뒷날 이승만이 집권했을 때 외무장관(임병직), 주일대표부 초대공사(정한경),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이원순) 등의 요직을 지내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는 주구장창 외교활동을 견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42년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지속중이던 와중에 소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리는 활동을 했지만, 한편으론 무장투쟁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자격을 갖고 있었고,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를 통해 실제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카탈리나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엔젤레스 롱비치 인근에 있는 카탈리나 섬은 CIA의 전신인 OSS를 훈련시키는 훈련소로 활용되었었다. 당시 이승만이 추천한 일부 한인 대원들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년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필자는 고래투어 하는 배에 올랐다가 우연히 카탈리나 섬을 육안으로 보게 되었는데, 당시 이 사연을 선원에게 얘기해주니 흥미로워 했다.)


(서울 1945에서 재현된 OSS 훈련, 한국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71부작짜리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드라마 주인공 중 한명인 이동우가 전쟁 막바지에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받는다.) 

 

 

이승만은 당시 OSS의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였던 굿펠로우로부터 큰 호감을 받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OSS가 중경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와 함께 협력하여 대일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여기에는 이후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도 관여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굿펠로우와 만나 미주에 있는 한국인을 대일전에 참가시킬 계획을 세웠다. 1944년 한일 게릴라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넵코(NAPKO) 프로젝트가 수립되었고, 이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관여했다. OSS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권 초기 활동했던 장석윤, 장기영, 유일한 등이 있다. 그들은 1944~1945년 당시 켈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 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즉 이들이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1943년 일본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패배했고, 1944년에는 일본령 사이판섬에 미군이 상륙했으며,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3월에는 이오지마가 함락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6월에 오키나와가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1945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즉 UN을 창설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발언이었다. 즉 이승만은 예전에 그랬듯이 반소련 입장을 미국에게 강력히 보여주고 싶었던 목적도 있었던 것을 보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7월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 전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반소 반공의 입장을 맥아더에게 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강력했던 맥아더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전적으로 돕게 된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체류 중에 여러 차례 반소 반공의 입장을 밝히는 언론 기고를 하였는데 맥아더에게 보낸 것은 이후 자신의 한반도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 (한국-필자)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주리 호에서 공식적으로 치뤄진 일본의 항복,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이것이 맥아더로 하여금 이승만을 한국의 반소 친미 지도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의 귀국을 전적으로 돕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도 끝이 났다. 이승만은 해방의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는 이제 해방된 한반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5104일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떠나 10일 뒤인 14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거기서 맥아더를 통해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를 만났다. 당연히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을 뿐 독립투사들의 노고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이승만, 이 사진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맥아더와 이승만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자 답게 이승만을 좋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던 초기 때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당연히 이승만이 추종하는 나라 미국의 입장이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섬기면서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데 아주 최적화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독립운동의 분열을 낳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미국을 위해선 친일적인 발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이승만의 한반도 귀국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암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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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이승만과 임정 탄핵 그리고 이봉창 윤봉길 의거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임정요인들에게 환영 받았던 이승만,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와 노선적 갈등이 있었지만 그가 상해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해주었다.)    

 

1919년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독립운동사에서 화합의 상징이 아닌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의 상징이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을 둘러싼 갈등에서 외무총장인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에 이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이회영과 신채호 같은 무장투쟁론쪽 인물들이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갔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길을 열었던 이동휘는 레닌이 지원한 독립자금 관련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처리하다 물의를 일으켜 1921년 임시정부를 떠나게 됐다.

 

1920년 당시 미국 수도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그해 125일 상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소개로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프트 목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1213일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처음으로 국무위원, 의정원 의원들과 상면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하던 이승만이었지만, 그가 도착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갈등은 뒤로하고 환영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환영도 잠시였다.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사표를 제출했고, 그 뒤를 이어 안창호와 김규식 등이 차례로 임시정부를 떠났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에 거주하게 됨에 따라 외교론을 고수했는데, 이런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많은 이들에게 분열을 일으켰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그의 외교독립론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이승만의 진정한 목적, 그는 독립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사용했다.)

  

우리 형편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승만이 이런 허무맹랑한 비젼을 내놓은 데에는 돈줄과 연관되어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인들은 독립성금을 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서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그런데 소위 대통령이라는 이승만이 여기에 끼어들어 소위 중개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는 성과가 사실상 없는 외교활동을 주장하며 13%만 정부에 송금했는데, 그러나 독립전쟁 준비를 모두 국민들에게 떠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이승만으로서는 정부에 보낼 돈을 파격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대통령을 자처하며 이러한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던 이승만에게 임정 요인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밤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발하여 이동휘ㆍ안창호ㆍ김규식ㆍ남형우 등 거물급 지도자들이 속속 임시정부를 떠났고, 이승만은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이승만이 주장했던 외교독립론과 대척점에 있었던 무장투쟁론은 만주에서 여러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 조선 시대의 현재 기준으로 수백억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이회영 선생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1919년 젊은 청년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은 1920년대 여러 가지 사보타주 활동을 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압잡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20년 당시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홍범도의 지휘 아래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김좌진 장군의 지휘 아래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소름끼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는 시기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한 것은 별로 없었고,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말았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시절 당시 그가 보인 행적, 그는 돈가지고 장난치는데는 고수였다.)

 

이처럼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 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했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됐다. 이승만이 반대의사를 표명해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1921529일 마닐라행 기선 콜롬비아호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물론 그는 대통령직을 절대 사퇴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동지회 창립석상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자신에 반대한 임정 세력들에 대한 치졸한 보복행위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1921929일 태평양회의(위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침을 받고 하와이에서 수도 워싱턴 D.C로 돌아왔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고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워싱턴 D.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이승만 등이 한국위원회를 발족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는 미 대표에게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당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는 안중에도 없었고, 워싱턴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워싱턴회의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에 아예 정착하게 됐다. 1923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의 남학생 12, 여학생 8명으로 하와이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 건축비 조달을 목적으로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관과 교섭하여, 이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갖고 한국을 방문하게 했다. 그는 여기서도 일본에게 우호 내지는 친화적인 발언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가 무책임하게 상해를 떠난 이후 상해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고, 임시정부 의정원들은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수습을 요청했지만, 그는 사태수습을 외면하고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일주일 간의 토의 끝에 6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하였다. 정부 수립 6년여 만에 임시 대통령 불신임안이 채택된 것이다.

 

임시 의정원의 불신임결의에도 이승만은 이를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봤고, 그는 구미위원부 사업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활동비에 충당했다. 19253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곽헌ㆍ최석순ㆍ문일민ㆍ고준택ㆍ강창제ㆍ강경신ㆍ나창헌ㆍ김현구ㆍ임득신ㆍ채운개의 명의로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고, 임시 대통령심판위원장 나창헌, 심판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 선임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한 지 6년여 만에 의정원에서 면직되었고, 쉽게 말해 탄핵됐다

(1925년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문서, 우리는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된 것을 두고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탄핵에 성공했다 했지만, 박근혜 탄핵 90년 전 이승만 또한 임정에서 탄핵당했다.)

 

1925410일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공포했지만, 이승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3년 뒤인 1928년에 구미위원부는 폐쇄상태가 되고 말았다. 1920년대 중후반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이승만이 탄핵당한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 자리에는 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가 오르게 됐다. 그는 비록 반공주의적이고 우익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지만, 조국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지켰다

(윤봉길 의거에서 보인 이승만의 반응)

 

사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활동적인 단체로 거듭난 것은 1932년 백범 김구가 주도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통해서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는 천황을 암살하려고 하다 체포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해 홍구공원에선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으로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를 포함한 일본 제국주의의 거물들 7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알게된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100만 명의 중국인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인 1명이 했다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게 됐다. 당시 윤봉길 의거의 방법론에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1932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며,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집필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이 보였던 윤봉길 의거에 대한 반응, 같은 극우파임에도 이처럼 독립운동에 대해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반응은 과거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단행했던 스티븐슨 사건에서 보인 행보처럼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도 주제넘게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거에 대해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196587일 경향신문에 실렸던 <이승만박사 해외독립운동 내막>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 건물에서 찍은 이승만 사진)

 

“19321월 이봉창 의사는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고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의 유력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져 여러 명을 폭살 또는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만주를 비롯해서 고국에 무장투사가 잠입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러한 행동을 크게 비난하고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크로니클>지 보도에 의하면, 그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비밀사절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에 의하면 이봉창이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한국의 독립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일본 내막기, 진주만 기습공격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이 쓴 책이다. 일각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승만의 반일사상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 이전에 이승만이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보여주었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이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위를 끝내지 않았다. 그는 1910년대 초와 1920년대 당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사설이나 발언들을 자주 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독립자금을 사적인 영역에 이용했다.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감행했을 때, 이것은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짓이라며 이를 주제넘게 평가 절하했다. 이러는 시기 국제정세는 점차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불러왔고,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화는 미국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 또한 일본에 대한 반일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다. 결정적으로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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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20-05-06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

NamGiKim 2020-05-06 17:41   좋아요 1 | URL
김삼웅 선생의 책과 민족문제연구소 다큐 그리고 그외의 몇개 서적들 참고해서 썻습니다. 하루빨리 이승만식 반공주의를 벗어나야 할텐데
 

위임통치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파리강화회의 당시 모인 연합국 정상)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시기 식민지 조선과 세계 정세는 변화해 가고 있었다.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이래로 일제는 소위 무단통치를 실행했다. 무단통치란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일본이 조선을 무단통치롤 지배하고 있을 시기 세계는 크나큰 전쟁에 휩싸였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1)이다. 1914628일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것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전하게 되는 전쟁이었고, 1000만 명 이상 죽게 만든 전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1917년에 참전하게 됐고, 1918년 연합국 측은 독일제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승국들은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1919년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자 이승만의 스승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은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는데,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에 짓밟혀왔던 약소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됐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시기 신한쳥년당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Lyuh Woon Hyung, 呂運亨)은 김규식을 프랑스 파리에 보내 열강들에게 독립을 청원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16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안창호(安昌浩) 만났다. 그 뒤 뉴욕을 거쳐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 이승만은 서재필, 정한경, 장택상 등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했다. 그는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지만, 윌슨은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과 그 일행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 내용)  

  

파리강화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무시했지만, 그해 식민지 조선에선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3.1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이었고, 비록 일제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났지만, 민중 대부분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 그것이 바로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1919225일 이승만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는데, 이 청원서 내용이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 알려지면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가 작성한 청원서의 한 부문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 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이 청원하는 바입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거리행진)  

  

아무튼, 이와같은 이승만의 위임 통치서가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더 분기충천하게 만든 일은 1919314일 이승만의 측근인 정한경이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 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한 데에 있다. 즉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은 말 그대로 미국이 대신 조선을 일본 대신 통치해주자는 발언이었고, 이것은 이승만의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이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고 난 다음에도 위임통치 문제를 가지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이 보인 행동은 친미 사대주의적인 행보였다. 이승만을 연구한 이화여대 교수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라델피아에서의 행진 당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이승만)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인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 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 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이승만은 310일 서재필에게서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들었고, 재미 독립운동가들은 미국 독립운동의 요람지로써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414일 한인대회를 열었다. 14일부터 16일까지 대략 3일 동안 필라델피아 소극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서재필, 이승만, 임병직, 조병옥, 유일한 그리고 노디 김 등이 참가했고 총 150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다. 비슷한 시기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이 시도되었고, 19193~4월 국내외적으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이중에서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해 그리고 한성정부였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소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임시정부 건국 강령)  

  

1919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상하이에서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구 대표 30명이 4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했다. 그리고 국무위원을 선출했는데, 여기서 국무총리는 바로 이승만이 되었다. 더나아가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초기 개화운동 이후에 아무것도 한게 없었던 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엇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주진오 교수는 무엇보다도 그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비쳤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배재학당 시절부터 맺어진 미국인 선교사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늘 막강한 배경을 이루었다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국내에 과장되게 알려졌던 그의 외교활동 성과도 큰 몫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해임시정부의 운동노선이 외교론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때 가장 주된 관심의 대상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그러므로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잘 수행해 낼 수 잇는 사람으로서 이승만이 주목된 것이 그가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왕족의 후손이라는 신화와 35일 간에 불과했던 중추원 의관의 경력, 그의 구속이 사실은 박영효 역모사건과 관련때문이었지만 만민공동회 활동의 결과라는 인상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920년 이승만이 이끌던 구미위원부)   

 

하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자 그의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있었다. 즉 이승만이 국무총리를 맡아서 되는 지에 대한 적격성 논란이었다. 1911년 전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우당 이회영이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그리고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었던 박용만 등 무장 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은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선출되자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 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단재 신채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승만에 대해 비판을 한 단재 신채호, 그는 이승만을 이완용 보다 더 한 매국노로 간주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부터 그 권위를 이용했다. 그는 상하이임시정부의 거듭된 현지 업무 집행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1910월 초부터 19206월 말까지 자신의 비서 임병직과 함께 미국 주요 도시를 순방하면서 교포들과 미국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임시정부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외교노선으로 이회영 신채호 등이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 버렸다. 또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그 기관의 돈줄부터 장악하고자 했다. 그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국채를 발행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무장투쟁을 추구하던 이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임시정부를 내분에 휩싸이게 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에서의 이승만의 존재는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에 찬 상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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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적 언사와 의형제 박용만과의 갈등 그리고 배신

(경술국치 당시 사진) 

  

이승만이 미국서 유학하던 시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로 한 일제는 1910829일이 되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을사늑약 이후 국내에서는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신민회가 전개했던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등 조선사람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지 1년 정도인 1911년 식민지 조선의 총독이었던 데라우치는 무단통치를 실행했다. 또한, 그는 1912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700여 명을 체포하고 105인을 기소했다. 이것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이승만은 19101010일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다. 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변호를 살인자 변호라며 거부했던 그는 미국에 있을 시기 별다른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었다. 외교를 주장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1912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검열과 탄압이 심해지자 이승만은 410일 감리교 동북아 총책인 헤리스 감독과 함께 식민지 조선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본인과 같은 종교를 믿는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이 105인 사건으로 고난을 겪던 와중에 친일파 목사의 주선으로 해외를 떠난 것이었다. 물론 이승만은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지도 않았고, 일본 정부가 발행한 일본인 여권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의 이승만)

 

19128월 이승만은 자신의 의형제이기도 한 박용만을 만나러 미국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에 있는 한인소년병학교에 가서 그를 만난 뒤 향후 진로에 대해 상의했다. 이승만은 1912년 후반까지 뉴저지주 감텐시의 YMCA에서 머물다가 19132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당시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할 당시 대략 6000명이나 되는 한인 교포들이 하와이세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탕수수밭 백인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나마 도시에 진출한 이들은 채소상, 재봉소, 이발관 등과 같은 상업에 종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가 하와이에 정착하게 될 당시 교민들은 이승만을 환영하지 않았다.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승만에 대해 전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이승만의 친일적 발언)  

 

“1913년에 이승만 씨가 하와이에 왔다. 이승만 씨가 일찍이 본국에 들어갔다가 재미를 못보고 청년회 대표 명의를 띄고 미주로 나왔다. 4면으로 돌아보아야 자기를 그렇게 환영하는 곳도 없고 또한 발 붙힐 곳도 그리 많지 아니한 것은 이승만 씨의 학위가 영세중립학이라, 그 학식을 가지고는 별로 쓸 곳이 없고, 한인이 모인 곳이라고는 미주에 하와이나 캘리포니아 뿐인데, 캘리포니아 한인은 장인환 재판시에 통역하기를 거절한 고로 달게 여기지 아니하고, 하와이에서는 당시 박용만 씨를 청하여 국민회에 인도자로 봉대하고 한인사회가 일신 건설되고 있는 때에 비유컨대 수탉 두 마리가 한 횃대에서 서로 용납지 못하는 것 같이 두 호걸이 한 섬 중에서 각자 주장이 다른 이상에 화목이 병진하기에 곤란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의아가 바이 없지 아니하여 국민회로서는 이승만을 초청할 뜻이 없었는 데 부자중에 이승만 씨가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당시 국민회 총회장 박상하 씨가 개인적으로 통신 연락이 있었던 것이라 한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영문 월간지 발행을 서둘러 했고, 하외이를 중심으로 폭넓게 활동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그가 창간한 것이 태평양잡지(Korean Pacific Magazine)’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쓴 태평양잡지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보다 오히려 서방 제국주의와 일본에게 우호적인 기사들을 실기도 했는데. 이것은 하와이 교민으로 하여금 크게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태평양잡지에는 인도가 영국에 식민지가 되어 안락을 누린다는 것과 필리핀이 미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 그리고 안남(베트남)이 법국(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다들 안전한 생활을 하고 평화로이 안전하다라는 말이 실렸었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교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했는데, 이 교육사업은 다른 독립운동 단체가 하는 것과는 달랐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들이 나온다.

(반일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던 이승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자작한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1916106일 하와이 호놀룰루 스타블러틴 신문에서 이승만은 한인 학교에서 반일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고 한다. 신문에 따르면 이승만은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오해는 빨리 풀수록 좋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1912년 하와이에 오기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회견에서 한일합방후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의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이것은 놀랍게도 현재 뉴라이트에서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똑같은 발언이다.

 

이승만이 이러한 친일적인 언행을 했던 것은 그가 뼛속까지 친미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분위기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한 국제정세를 알고 있던 이승만은 미국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 앞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와이 교민들 앞에선 반대로 반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손 끝에 바람을 불며 내가 일본놈들의 감옥에 간 것만 생각하면 손 끝이 시리다라고 하며 제대로 된 연기를 보였다. 이승만과 제1공화국을 주로 연구한 이화여대의 정병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미일 간의 평화가 지속되면 이승만은 대일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특히 그가 활동의 근거지로 삼은 하와이에서는 일본인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이전에는 미일 간의 우호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기독교·교육·언론계의 지도자로 활동했는데, 하와이 소수민족 중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일본인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스스로의 입지를 허무는 일이었다. 이승만이 노골적인 반일 언론·반일운동이나 무력· 폭력 노선을 취하지 않은 데는 하와이의 특수한 상황이 일정하게 작용했다. 이승만은 1910년대 중반 이후 하와이 YMCA에서 일본인 지도자들과 함께 간부진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19229월 하와이로 귀환했는데, 기자화견을 통해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조선총독이 많은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고 발언했다. 같은 해 이승만을 교주로 하는 한인기독교회 건립식이 개최되었을 때 하와이 한인 사회 최초로 일본 총영사가 참석해 기부금을 내기까지 했다.”

(박용만, 그는 한성감옥에서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또한 이승만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다.)

 

이런 이중적인 플레이를 했던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자신의 세력이 형성되자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과 갈등이 생겼다. 1908년에 있던 덴버회의 사건으로 이승만은 박용만과 독립운동노선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교육·출판이나 외교 활동을 통한 노선이었지만, 박용만은 무장투쟁노선이었기 때문이다. 박용만은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했었다. 그는 국민개병설’, ‘군인수지라는 책을 발간했고, 대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교포가 많이 사는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아,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어 항일 논조를 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하와이의 한 농장을 임대하여 동포 청년들과 공동으로 경작하면서 항일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의 노력이 힘입어 총 124명의 독립군이 대조선국민군단에서 양성됐다.

(대조선국민군단, 1914년에 창설된 이 군단을 통해 박용만은 미주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

 

이렇게 박용만과 노선 갈등이 있던 이승만은 19155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주도권과 재정문제로 박용만 측과 대결하게 됐다. 많이 서술했듯이 박용만은 이승만과 한성감옥에서 의형재를 맺었던 인물이었고,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사람도 박용만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와 하와이지역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박용만 제거에 나섰다. 이 시기 이승만은 박용만과 대한인국민회가 하는 사업들을 일일이 반대했다. 그는 반대하며 그 집은 외 짓느냐, 건축을 하면 누가 있겠느냐?”라는 식으로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고 싶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어렵게 사는 교민들이 자금을 바치는 곳이었고, 그로 인하여 미주지역 전체에서 모이는 독립운동 자금처였다. 이 사실을 안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기 위해 싸웠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테러와 폭력도 불사했다.

(하와이의 파인애플밭, 당시 하와이에 살던 교민들은 이러한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당시 하와이에 살던 교민들은 이렇게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의 돈을 갈취해갔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은 마침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6년 여학생 기숙사를 확장하여 한인여자성경학원으로 발족시켰고, 19178월에는 태평양 잡지사를 통해 독립정신2판을 출판했다. 19187월에는 호놀룰루에 신립교회를 설립하고, 같은 해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제의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 개편했다. 실제로 그는 국민회를 장악하면서 엄청난 부동산 재태크의 달인이 됐다. 1914714일 이승만은 여학생 기숙사 건립기금 2400달러로 부동산을 구입했다. 그 당일날 이승만은 자신에게 땅을 판 프레드 베링거에게 그 땅을 담보로 1400달러를 빌렸다. 당시 돈일 빌리는 조건으로 1년내 상환이고 이자는 연리 8%였다. 1년후인 19157월에 이승만에게 돈을 빌려준 베링거가 돈을 값으라고 항의하자, 이승만은 자신이 만든 빚 1400달러를 대한인국민회에게 값으라고 떠넘겼다. 그는 국민회 재산인 한인 여학교를 단돈 1달러에 인수했고, 국민회의 재산을 담보로 부동산 2개를 저당잡혀 4250달러를 대출했으며 나중에는 자기 소유로 만든 국민회 재산을 전부 매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돈을 챙겼다.

 

이후 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계속되자, 일부는 이에 반발했다. 특히나 박용만 쪽 인사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자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를 동원하여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재정문제에 반발한 이들을 미국 경찰에 고발했다. 고발 사유는 폭동죄였다. 1918227일 하와이 법원에서 이승만은 법정의 증인으로 나와 미국 판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믿기 힘든 말을 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미국의 한 문서,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친일적인 언사를 했고, 자신과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까지 배신했다. 그는 박용만이 만든 독립군대를 미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존재라 주장했고,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12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똑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친일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저지른 짓거리였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탄생했을 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다름아니게 이승만이었다.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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