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을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대한민국 영토에 3~4배는 작은 나라 아이티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무려 10만 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TV 속에 비추어진 지진으로 파괴된 아이티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러한 장면과 더불어 충격적인 장면이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굶주린 아이티의 아이들이 진흙쿠키를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 장면이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얼마나 먹을 게 없고 굶주렸으면 영양가 하나도 없고 신체에 지극히 해로운 진흙을 먹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충격적이다.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


현재 아이티의 기아지수는 항상 최악이었다. 세계 최악의 기아지수를 매년 자랑하는데, 기아 문제가 최악인 인도나 현재의 북한보다도 항상 낮게 측정이 된다. 참고로 이 기아지수 추정치는 미국에서 낸 것이다. 즉, 아이티는 인도나 북한보다도 훨씬 굶주리는 국가인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1990년대 대기근을 겪었던 시기에 자국민에게 진흙쿠키를 나눠준 적은 없었다. 반면 아이티는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최악의 빈곤 국가 중 하나였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그리고 기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아이티는 어째서 굶주렸던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아이티의 친미독재 정권에게 있었다.


(아이티 국기)


특히나 분단 상황에 있는 한국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타국의 경제를 잘 도우며 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착각에 많이 빠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한국은 이승만 정권 이후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성장 동력을 얻었지만, 한국·일본·대만·싱가폴이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미국의 패권적 영향이 미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을 보면 얘기가 전적으로 달라진다.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바로 국가 아이티의 존재다.


(아이티 지도)


아이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2년이 되던 1791년에 독립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의 급진좌파라 할 수 있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아이티의 독립이었다. 혁명으로 아이티에 독립국가가 탄생했지만, 1804년 마무리된 혁명 이래로 아이티는 항상 위협적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프랑스 정부는 아이티 독립 초기 220억 달러를 강탈했다. 19세기 내내 프랑스는 아이티에게 배상금 지불이라는 명목으로 이 나라의 국고를 털어갔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미국이 아이티 문제에 개입하였는데, 이것도 미국쪽 기업의 이익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1915년 미국은 아이티를 침공했으며 1934년까지 군정 통치를 했다. 사실상 아이티를 식민지 지배한 셈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아이티에서도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뒤마르세 에스티메였다. 그 또한 미국에 의해 제거 및 축출됐고, 미국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친미 독재정권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집권하게 된 인물이 바로 그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다.


(2019년 아이티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시위)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57년 정권을 잡았으며,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를 만들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 및 숙청했다. 참고로 이 비밀경찰 조직은 뒤발리에의 준 군사 조직이었고, 이들은 미군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연히 그는 자신을 따르는 집단에겐 경제적 과실을 집중적으로 주었고, 그의 집권기간 내내 아이티는 경제파탄을 겪었다. 심지어 선거도 부정선거를 저질렀는데, 1960년대 아이티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그는 반대표가 하나도 없는 132만 748표를 얻었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가 “라틴 아메리카는 그동안 많은 부정선거를 겪었지만, 뒤발리에보다 터무니없는 작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앞서 언급한 그의 폭력통치는 학살도 동반됐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무려 5만 명이 살해당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7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아들인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19살의 나이에 아이티 대통령이 됐다. 즉, 아이티는 친미 독재 세습에 성공했다. 아들 또한 마찬가지로 15년 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반대파를 납치, 처형, 고문하면서 민생을 유린했다. 그 결과 1986년 아이티의 민중봉기로 쫓겨나게 됐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공포와 거짓으로 사회 내 반공 및 반민중 정서를 심화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아이티는 계속 가난했고, 경제 상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즉, 예나 지금이나 사는 것이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미국은 꾸준히 아이티 내의 우파 군부를 지원했으며, 내정을 이간질했다.


(아이티에서 아이들이 먹는 진흙쿠키)


2009년 아이티 정부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0.24달러에서 0.61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최저임금법 도입으로 아이티 노동자는 하루에 5달러를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티 4인 가족의 하루 생활비인 12달러보다는 훨씬 낮은 임금이었다. 그럼에도 아이티 내 미국 섬유 기업들은 주 아이티 미국 대사관을 통해 불만을 제기했고, 대사관은 정부에 로비를 펼쳐 최저임금 인상을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대사관의 요청으로 아이티 정부는 최저임금을 결과적으로 0.07달러만 인상했고, 그 덕분에 프루트오브더룸, 헤인즈, 리바이스 등의 읠 기업은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즉, 아이티는 프랑수아 독재가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미국에 의해 정치와 경제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 바로 아래에 있는 나라에 친미국가를 만들어 경제를 빨아 먹으면서, 인도나 북한보다도 기아지수가 훨씬 높은 나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한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미국이 세계를 부유하게 만들고 있는가? 결국 그 부의축적은 미국과 과거 19세기 서구 열강들을 중심으로만 돌고 돌았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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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티의 뒤발리에 부자가 한 짓을 보면 칠레의 피노체트랑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지독한 중남미 ‘숭미 극우 독재정권‘의 민낯을 보여 주죠.

2024-04-04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러나다 - 촘스키, 다극세계의 길목에서 미국의 실패한 전쟁을 돌아보다
놈 촘스키.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유강은 옮김 / 시대의창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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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이었다. 나는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SNS를 통해 그가 세계적인 진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게 됐다. 프라샤드와 촘스키는 신간 한권을 들고 있었고, 그 책의 이름은 바로 The Withdrawal이었다. 책 제목을 직역하자면, ‘철수하다라는 뜻이다. 남한 사회에서 각종 반미집회에 간혹 참여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같이 책을 썼다는 점에서 참으로 기쁘고 놀라웠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국내에 빨리 번역되기를 기대했다. 나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고, 하워드 진(Howard Zinn)의 베스트 셀러 미국 민중사를 번역한 유강은씨가 이 책을 올해 번역했다. 이렇게 좋은 책이 국내에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기뻤다.

 

나는 노엄 촘스키를 좋아한다. 촘스키는 미국의 좌파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지만, 여러 분야에서도 박학다식한 세계적인 천재이기도 하다. 특히나 촘스키가 가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근거와 출처도 탄탄하다. 베네수엘라의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Hugo Chavez)는 유엔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차베스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가리키며, 살아있는 악마라고 표현했다. 당시 차베스가 부시에게 악마 혹은 제국주의자라 강하게 표현한 이유는 분명했다. 2003년 부시 행정부가 불법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했고, 베네수엘라에 대한 살인적이고 폭력적인 전쟁범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연설 당시 차베스는 한 권의 책을 보여주며, 미국의 대통령에게 독서를 권장했다. 그 책이 바로 촘스키의 책 패권인가 생존인가였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미국의 패권이 종말의 길로 갈 수 있음을 경고하는 훌륭한 저작이었다. 그 외에도 내가 감명깊게 읽은 촘스키의 책 중 하나는 미국 대외정책론여론조작이다. 전자의 경우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국내에서 출간됐고, 후자는 2006년 에코리브르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대외정책론의 경우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의 폭력적 행위에 대한 고발이 담겨져 있었고, 여론조작은 미국 지도부가 어떻게 자국의 적국을 악마화하고 또 언론을 통해 가짜뉴스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지를 아주 낱낱이 고발했다.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과 공저로 집필한 두 권의 책은 내 서재에 결코 빠져서는 안 될 필수적인 책이다.

 

그러나 촘스키의 자료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책을 다소 어렵게 집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촘스키의 책을 번역하는 번역자들은 그러한 난해함에 고통을 겪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물러나다에서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눈 비자이 프라샤드는 어떠할까? 여기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선 내가 만난 비자이 프라샤드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지난 202212월 나는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국제전략센터(International Strategy Center)에서 개최한 북콘서트였는데, 비자이 프라샤드와 뜻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프라샤드의 저서 워싱턴 불렛을 번역한 심태은씨와 3세계의 붉은 별을 번역한 원영수씨도 함께 했으며, 북콘서트가 끝난 이후 뒤풀이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자리에서 페이스북으로 우연히 알게 된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을 번역한 이재우씨랑도 만날 수 있었고, 나는 프라샤드와 더불어 이 분들과도 뜻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비자이 프라샤드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쓴 3세계의 붉은 별을 통해서였다. 또한 2022년에 번역된 그의 저서 워싱턴 불렛은 미국 제국주의의 폭력을 너무나도 노골적이면서, 아주 쉽게 설명한 책이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가진 것과 동시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역사를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내는 그의 서술방식에 나는 참으로 감탄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프라샤드를 꼭 만나보고 싶었었다. 실제로 그가 북콘서트에서 한 강연은 굉장히 알아듣기 쉬웠다. 심지어 프라샤드가 사용하는 영어 또한 결코 어려운 단어나 문장이 많이 등장하지 않았으며, 번역자를 위해 문장 하나하나를 끊어서 번역하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심까지 보여주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며, 나 또한 앞으로 저렇게 대중성을 가진 역사학자가 되겠다고 깊이 다짐했었다.

 

북콘서트 이후 프라샤드와 나눈 대화 또한 감명 깊었다. 나는 프라샤드에게 한국전쟁 관련한 이야기와 베트남 전쟁 관련한 이야기 그리고 중국 국민당의 부패한 지도자 장제스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나나 프라샤드나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체이기에, ‘I Like Stalin’만으로도 서로 기쁘게 반길 수 있었다. 나는 프라샤드에게 현재 대한민국 인터넷 및 SNS 상에서 만연하는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 흐름을 얘기해주고, 그가 장제스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리는지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하고 핵심적이었다. 프라샤드는 나에게 그는 그저 부패한 독재자이고, 무능한 정치인입니다. 간단히 말해 한국의 이승만이나 박정희일 뿐입니다. 평가내릴 게 뭐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프라샤드는 항상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전달하는데 타고난 기질이 있는 인물이며, 실제로 그의 영상이나 강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 물러나다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프라샤드와 촘스키가 나눈 대화록이다. 책은 미국이 건국 이래 최초로 패전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거치고, 이라크 그리고 리비아를 거쳐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를 다룬다. 생각해보면 이 순서는 전쟁이 시작된 순서를 따른 것이다. 일반인들이 읽어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핵심적인 내용이 잘 들어가 있다. 거기다 이 책은 간단한 전개를 하고 있으면서도 촘스키의 장점과 프라샤드의 장점을 적절히 잘 살렸다. 쉽게 말해, 촘스키나 프라샤드가 하는 얘기들이 전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저서를 읽어봤지만, 이번에도 그들의 책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리비아 관련한 얘기 중에선 내가 모르던 사실들 또한 있었다. 세간에 폭압적인 독재자로 알려진 사담 후세인을 보자. 물론 사담 후세인이 친미주의자에 폭압적인 통치를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다 후세인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를 사용해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학살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냉정한 비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후세인의 폭압성만 강조했지 그가 1990년 쿠웨이트 침공 이후 실수를 깨닫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려고 했던 시도에 관해선 얘기가 잘 안 된다. 오직 사담 후세인의 이미지에는 독재자와 쿠웨이트 침공자라는 전쟁광적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리비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경우 아랍 사회주의 및 자마히리야라 하여 생각보다 괜찮은 국정운영을 했다. 1980년대 리비아는 1인당 GDP1만 달러를 찍었던 나라이기도 했으며, 완비된 복지와 사회보장제도 그리고 선진적인 여성인권의 증진까지 이룩했던 나라였다. 심지어 전기와 수도까지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했고, 자동차 비용도 정부가 절반 가까이 부담하는 나라였으며, 집값도 상당 부분 국가가 부담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서구에 의해 악마 또는 히틀러에 버금가는 광인으로 묘사됐고, 이러한 묘사는 극우 반공주의자인 로널드 레이건을 넘어 버락 오바마에게까지 전해졌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바로 리비아 반군에 관한 것이다. 프라샤드와 촘스키는 리비아 내전 초기 카다피 정부군이 반군의 거점을 장악하자, 미국·영국·프랑스가 NATO의 이름을 걸고 리비아를 무차별 폭격했는데, 카다피의 협상시도가 리비아 반군과 서방에 의해 철저히 외면받았다는 사실이다. 카다피는 리비아가 서방에 의해 폭격당하는 가운데, 제이콥 주마와 5명으로 구성된 아프리카연합 대표단 방문단과 대화를 나눴고, 그들이 제안한 평화 로드맵에 동의했다. 제이콥 주마는 언론에서 카다피는 반군 지도부와 벵가지에서 합의에 도달하는 즉시 휴전을 시행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NATO와 리비아 반군 지도부는 이러한 제안을 철저히 거부했다. , 이들에게 있어 카다피는 무조건 죽이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국토 리비아는 폭격으로 파괴돼야 할 나라였다.

 

이라크에서 미국이 치른 전쟁 또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야만적이었다. 200411월 제2차 팔루자 전투 당시 미군은 도시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2차 팔루자 전투 당시 미 해병대의 대규모 공격이 이뤄졌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의 행위는 전쟁범죄였다. 미군은 종합병원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병원 환자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의사를 자빠뜨리며 한데 묶었다. 당시 뉴욕타임스에는 그 종합병원이 사진이 실렸는데, 여기서 발생한 파괴와 살상의 모든 책임을 테러리스트 탓으로 돌렸다. 이에 대해 노엄 촘스키는 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며, 이는 미국이 자신들이 벌이는 잔학 행위를 집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력히 역설했다. 생각해보면, 미국은 이라크 침공에서 다량의 감손 우라늄, 대량의 방사능 등 위험한 무기를 사용했다. 또한 이라크에서 시아파와 수니파를 사용하여 종족분쟁을 부추겼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이 베트남부터 리비아에서 자행한 전쟁수행은 그 자체로 전쟁범죄였고, 대량학살이며 노골적인 테러리즘이었다. 심지어 이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은 비백인 국가라는 점도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과거의 북한과 현재의 북한이 미국에 대해 극단적인 반감을 보이는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베트남과 더불어 미군의 무차별 폭격 학살 만행 피해가 아주 극심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책의 추천 글 중 하나에는 한신대 교수인 이해영 선생의 말이 있다. 이해영 교수는 북한이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미국이 자신들에게 한 일 때문이고, 남한이 미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미국이 자신들에게 한 일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에서 이해영 교수가 쓴 추천사가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글로벌 대원로 노엄 촘스키와 인도의 진보인사 비자이 프라샤드의 대담집이다. 9-11 즈음 부시가 물었다. "사람들이 왜 우리를 미워하지?" 펜타곤 조사단이 답을 찾았다.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건 우리가 그들에게 한 일 때문"입니다. 그리 보면 북한 사람들은 왜 저렇게 미국을 미워할까? 답은 간단하다. 미국이 "그들에게 한 일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한 사람들은 왜 저렇게 미국을 사랑할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다. 미국이 자신들에게 한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류 중의 주류 새뮤얼 헌팅턴이 1999년 《포린어페어스》에 이렇게 썼다. "많은 나라가 볼 때 미국이야말로 깡패 초강대국이 되는 중이다." 그래서 촘스키는 "미국이 세계 최고의 테러리스트 국가"라고 말한다. - P7

갤럽에서 한번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오바마 시절인 2013년이었다. "세계 평화에 가장 위협이 되는 나라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미국이 압도적으로 1위였습니다. 한참 뒤처진 파키스탄이 2위였는데, 인도쪽 표 때문에 크게 부풀려진 게 분명했지요. 중국, 북한, 이스라엘, 이란이 미국에 한참 뒤처져서 3위군을 형성했습니다." - P7

과거 냉전 시기, "무엇을 하든 간에 ‘러시아인들이 쳐들어온다‘고 말하면 됐지요.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복잡한 변명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현재? 마찬가지다. 또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냉전기나 지금이나 "유럽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기보다는 일관되게 미국에 종속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 P7

전쟁은 하나님이 미국인에게 지리를 가르치는 방식이라고 한다. 전쟁은 미국인의 지리 수업 시간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전쟁 없이는 살 수 없다. - P8

베트남, 라오스, 아프간, 이라크, 리비아. 이렇게 이 책의 순서를 그냥따라가면 된다. 아주 쉽다. 그러면 나온다. 우크라이나!"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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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국민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을 자유민주주의 용사로 찬양하는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본질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당시 여러 역사적 증거들이 입증해주듯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에 따라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 국가였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46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를 지원했고,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도 친일 경찰과 친일파들을 앞세워 민중을 탄압하는 이승만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패망한 일본을 제국주의자들을 앞세워 재건한 것도 미국이었으며, 프랑스가 과거 자신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침략하여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자,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위해 전쟁비용 80%를 대신 부담한 나라도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의 과테말라 개입을 다룬 영어 서적)


미국의 중남미 지역 내정간섭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다. 니카라과, 칠레, 엘살바도르, 브라질, 멕시코, 쿠바, 아이티,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그레나다 등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굶주림과 독재정치, 학살, 빈곤,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다. 말 그대로 미국의 중남미 통치는 대다수 중남미 민중에게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고 협박했다. 미국이 이러한 짓을 자행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연합과일 회사(United Fruits Company)와 같은 자국 기업의 이익을 마음껏 보장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과테말라 또한 미국에 의해서 주권과 인권 그리고 권리가 무참히 짓밟혔으며, 미국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일 것이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진성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이유를 들어 무수히 많은 나라의 주권을 침해했었던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이 후원했던 유비코 정권이 종결되고, 새로운 내각이 등장했다. 유비코 정권은 14년 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독재정치를 자행하다가, 전국적인 시위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 당시 미국이 후원한 유비코 정권 하에서의 삶은 아주 열악했다. 전 국민의 2%가 과테말라 전체 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반면 국민의 50%는 전체 토지의 3%를 경작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원주민들의 경우 50센트도 안되는 일당으로 살아가는 수준이었다.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의 사진, 그는 아레발로 정권을 이어 과테말라를 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던 1950년 과테말라 국민은 38세의 젊은 대통령인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르벤스는 소수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를 개선하여 인민위 권익을 성장시키기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사실 유비코 정권 이후 집권한 아레발로도 개혁을 실행했지만, 아르벤스는 이보다 더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1951년 3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 과테말라가 가진 모든 부를 다 합쳐도,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품위와 건강 그리고 행복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를 우리는 잘 분배해야 합니다. 덜 가진 사람들은 더 혜택을 보고, 더 가진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되 덜한 정도로 하자는 것이지요.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처한 가난과 열악한 건강 상태, 교육의 결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34~435


아르벤스는  법령 900을 발표해 272헥타르보다 크고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기로 했다. CIA의 1952년도 비망록에는 과테말라의 상황이 “사회 개혁과 민족주의적 정책을 호전적으로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미국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르벤스는 대규모 토지개혁 정책을 예고하고, 그 첫 단계로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 소유 토지 947㎢(2억8,646만 평)에 대한 국유화에 착수했다. 이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중 90% 이상이 놀리는 땅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에 보상금으로 6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가만히 눈 뜨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곧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이용해 미국 본국에 찌르고 CIA를 이용해 쿠데타를 계획했다.

(연설하고 있는 아르벤스 대통령)


사실 미국이 주도한 과테말라의 쿠데타는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개시됐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으며, 1951년 6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과테말라라는 암 덩어리” 운운하며 "아르벤스 대령이 대통령이 된 지 2달밖에 안된 시점에 이미 과테말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과 환멸"이 넘쳐나고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미국의 정치공작은 참으로 집요했다. 유나이티브프루트는 과테말라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다는 기사를 활용해 의회에 로비하는 데 당시 돈으로 50만 달러를 썼고, 이를 통해 미국 의회와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에 무기 공급을 중단하자 아르벤스 정부는 동구권 국가인 체코로 부터 무기를 사들였는데, 미국은 서구 언론사에 이러한 무기 거래의 영향을 과장해서 전달했다. 제10회 미주대륙회의에 참석하고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과테말라를 강조하며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 과테말라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정치공작을 했다. 심지어 NBC 방송 중계는 과테말라의 붉은 정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댔다.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작은 이러한 여론 및 정치공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래는 인도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워싱턴 불렛>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최고의 PR 전문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미국 의회에 공산주의 음모론을 퍼트리도록 했다. 그는 "공산주의 선전물에서 유나이티드프루트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를 미국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버네이스는 유나이트드프루트와 미국이 유의어이며, 그렇기에 유나이티드프루트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을 향한 공격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버네이스는 <시카고트리뷴>, <뉴스위크>, <뉴욕타임스>, <타임> 등의 기자들에게 유나이티드푸르트의 자금을 뿌려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에 대해 보도하도록 했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1951년 7월 14일자 무기명 보도에서, 기사 작성자는 고산지대에 있는 고대 마을에 사는, 글도 모르고 주류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마야인이 공산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썼다. 이 기자는 고산지대에 사는 그 누구도 직접 취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준 보도자료를 갖다 썼다.”


출처: 워싱턴 불렛 p.88~89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아르벤스가 1953년 8월 12일 2차 토지 수용을 단행한 후, CIA 작전조정위원회(Operation Coordinationg Board)는 아르벤스를 최우선 순위로 놓고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카스티요 아르마스(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의 지원을 받앗던 인물)의 용변단을 훈련시키고 전체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 미국이 과테말라 체제 전복 시점부터 현재까지 이용하는 정권 교체 매뉴얼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여론’을 공작하라

2. 현지에 적임자를 임명하라

3. 군 장성을 준비해라

4.경제가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라

5. 외교적으로 고립시켜라

6.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

7. 청신호

8. 암살 연구

9. 부인하라


더 나아가 CIA는 1953년 9월 11일, 대과테말라 하이브리드 전쟁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경제적 압박이었다. 보고서는 과테말라 정부의 경제가 압박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석유 공급, 해운업, 주요 수출입 물품 등 가능한 부문을 겨냥한 비밀 경제 전쟁 방식이 적용될 것이라고 써 있는데, 아래에 후술된 칠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아옌데 정부에게 가했던 살인적인 경제제재 계획 및 국가 뒤흔들기 방식은 과테말라에서 선행학습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6월 CIA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소재 기지를 떠나 과테말라로 침투했고, 미국은 항공지원을 해가며 이들을 도왔으며,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6월 27일 아르벤스는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퇴했다.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의 지원한 과테말라 군부 쿠데타를 표현한 풍자화)


(과테말라 독재자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쿠데타로 인해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한 아르벤스는 고별 라디오 연설에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은 유나이티드 프룻 컴퍼니가 미국 고위층과 결탁해 벌인 일이며, 앞으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놀랍게도 아르벤스의 발언은 현실이 됐다. 과테말라에서의 체제 전복이 성공한 이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 대중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말이 안되는 발언을 하며 쿠데타를 극찬했다.


쿠데타 이후에는 친미정부가 개혁을 깡그리 되돌렸지만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어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 정부는 당시 과테말라의 친미적인 정권이 미국이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라고 믿었지만, 문제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만 보더라도 실상은 딴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앤서니 루이스는 칼럼에서 소위 반송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헬기를 타고 농촌 마을에 들이닥쳐 벌초용 칼로 여성들을 난도질하고 오두막을 불태우고 주민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도를 상세히 소개했다. 루이스는 당시 과테말라 친미 정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학살로 규정했다. 뻔뻔스럽게도 미국은 이후 자신들이 세운 친미 정부 하에서 자행된 학살을 돕고 방조했지만, 자신들의 관여한 행위를 부정했었다. 아래는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르벤스가 타도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을 때 미국은 관련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전율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주 온두라스 미국 대사 화이팅 윌로어에게 쿠데타(실제로 덜레스는 혁명이라고 불렀다.) 전문을 보냈다. 나중에 월로어는 덜레스가 보낸 전문이 사실상 나 아니었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1966년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른 언론인의 정보 공개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은폐해 왔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그 어떠한 문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서 공개 거부는 과테말라군이 반대 세력에게 자행한 학살을 미국이 조장하고 관여하며 공모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미국 국무부의 바이론 바키는 1968년 3월 내부 비망록에 CIA가 과테말라에서 용인하고 자행한 폭력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우리의 이미지, 우리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의 신뢰도 측면에서 지대한 문제를 가져다주었다고 적었다.”


출처: 워싱턴 불렛 p.117~118

(과테말라에서 자행된 학살을 표기한 지도)


(이후 진상규명 과정에서 발견된 학살당한 이들의 유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과테말라가 공산 제국주의에서 구원됐으며, 이는 미주 국가들의 위대한 전통에 영광스러운 새 장을 추가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덜레스의 발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이 정치공작과 독재정치 수립을 이러한 방법으로 옹호하고 미화했다. 과테말라 정부 전복작전에 참여했던 한 예비역 해병대 대령은 이후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미국)의 성공은 결국 31년간의 억압적인 군부 통치와 과테말라인 10만여 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1


놀랍게도 당시 과테말라 정부 전복애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은 1961년 존 F. 케네디가 주도했던 피그스만 침공작전 때도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에 맞서 진보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하코보 아르벤스는 사임하면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피로 얼룩진 과테말라의 파시스트 독재는 40년이나 지속됐기 때문이다. 과테말라 사건 당시 이를 직접 두눈으로 지켜본 젊은 아르헨티나의 젊은 여행객이 있었다. 그는 쿠데타군이 학살극을 벌이자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결국 그는 혁명에서는 무장투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몇 년 뒤 이를 실천하게 됐다. 그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쿠바 혁명을 주도한 체게바라다(Che Guevara).


참고문헌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것』, 한울, 1997


노엄 촘스키, 황의방, 『패권인가 생존인가』, 까치, 2004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어깨걸고, 2021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테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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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진짜 미국이야기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서평: 미국의 실체를 낱낱이 알 수 있는 명저

평창동계올림픽이 진행되던 2018년 나는 우연히 책 한권을 받았다. 그 책이 바로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였다. 당시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와 더불어 이 책을 읽었던 나는 미국여행을 하면서 책 한권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책이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이었다.

하워드 진 선생이 쓴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4년 전에 읽은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의 개정판이다. 이 책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며, 미국이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범죄와 살인을 저질렀음을 보여준다.

자국의 자본과 기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범죄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미국이다. 그런 악행을 통해, 많은 이들의 생명을 잃어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 무수히 많은 군 기지를 소유하고 있고, 그 나라 보호를 명분으로 타국에게 막대한 주둔비를 요구하기도 한다.

1898년 미국이 쿠바를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거짓 명분으로 일어난 미서전쟁은 미국의 쿠바 식민지 건설과 필리핀 식민지 건설로 이어졌다. 특히나 미국은 필리핀에서 수십만 명의 필리핀인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10세 이상의 필리핀을 죽여도 된다는 기준을 세워놓고 저지른 학살이었다.

특히나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정말 잔인했다. 니카라과에서의 콘트라 반군 지원과 엘살바도르에서의 친미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 미국은 자유라는 이름 하에 중남미의 독재자들과 학살자들을 지원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유엔 헌법의 기준을 운운했지만, 미국은 절대로 이를 지키지 않았다. 뻔뻔스럽게도 레이건은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사일 몇기만 팔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2,000기 이상 팔았고,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미사일을 팔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미사일을 팔았고, 콘트라 반군에 자금을 주었다. 레이건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미국은 자국민에게 있어서도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다. 사업가 조지 풀건은 경제 불황을 핑계로 노동자의 임금을 25%나 삭감했지만, 주주에 대한 배당금은 올렸다. 이에 저항한 노동조합 운동가 유진 뎁스는 결국 감옥에 구금됐다. 1889년에만 22,000명의 미국 철도 노동자가 사고로 죽거나 다쳤다. 그런데도 자본가들은 이윤축적을 위해 이러한 현실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었다.

미국은 냉전초기 스탈린의 독재 체제로부터 나라를 지킨다고 운운하며, 자국 국민을 매카시즘으로 탄압했다. 또한 중국의 국공내전과 그리스 내전 그리고 전후 필리핀 문제에 개입하여, 각국의 민족 반역자들을 지원했다. 그리스 내전에서 미국이 지원한 세력은 과거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반역자들이 대다수였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아마도 단편적으로 알 것이다. 특히나 외교와 정치 그리고 역사부분에 있어서, 6.25 전쟁과 함께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종북좌빨‘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전개하고 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전쟁에서 프랑스의 전쟁비용 80%를 지원했고, 이란의 지도자 모사데크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자 그를 쿠데타로 축출하여 이란에 친미왕조 경찰독재국가를 세웠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미국의 정책이 과연 민주주의적이었는가? 하워드 진 선생이 쓴 책은 이점에서 많을 걸 생각하게 만든다. 미국은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에게 경제제재를 가하여, 125만 명의 이라크인을 아사시켰으며, 이런 경제제재를 통한 범죄행위는 현재 이란과 베네수엘라 북한 등에서 자행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워드 진 선생의 지적처럼 미국은 절대로 대외적으로 폭력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단순히 미국의 제국주의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미국이 베트남을 불법적으로 침략했지만, 미국인들은 전쟁에 반대하여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차별받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인권운동가들과 더불어 민권운동을 전개했고, 많은 부분에서 권리를 쟁취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은 미국 민중이 함께 병행한 투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주장이다. 최근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많은 한국인들이 신경쓰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 세력을 버젓이 지원하고 있다. 단순한 인도적 지원이 아닌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미국이 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 얻으려는 목적이 뭘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국은 현재 러시아를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가난에 허덕였던 러시아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극심한 경제제재와 국제적 및 군사적 압박을 할 이유가 없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탈산업화 이후 이득을 본 것은 바이든을 포함한 미국의 군수산업과 민간기업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때, 미국에 대한 비판은 매우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에선 미국에 대한 비판이 너무 약하다. 하워드 진의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왜 우리가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해야하는지 그 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몇년만에 다시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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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경 미 국무부는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고, 그를 배제한 어떠한 해결 방안을 통해서도 확실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며", 그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장악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미국이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함"을 개탄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공격하는 명분을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합의한 대로 전쟁 비용의 80%를 부담했고,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마련했다. - P309

디엠은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반대의견을 억압했는데, 그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막대한 달러로 간단하게 이런 일을 해치웠다. 그 돈은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오래전에 축출당할 뻔했던 한 남자에게 권력을 안겨주었다. 디엠의 중요한 지지자들은 자유 베트남이 아닌 북아메리카에 있었다. - P310

전쟁 말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총 사망자 수가 400만 명 이상에 달했고(각주 1), 국토와 사회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각주 1) 폴 퀸저지(Paul Quinn-Judge)는 1965년 이후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해도 300만 명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보도했다.(Far Eastern Economic Review, Oct. 11, 1984.) - P313

평화 정착을 성공적으로 좌절시킨 미국과 그 꼭두각시 정권은 수십만 명을 투옥하고 또 그만큼의 인명을 살해하면서 내적인 탄압에 착수했다. 디엠의 지지자이자 고문인 조셉 버팅어(Joseph Buttinger)는 1956년 "대규모 원정대"의 병사들이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마을을 습격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국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주요한 탄압 대상은 반프랑스 저항세력과 베트민이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들이 폭력에 의지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는 많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농민을 규합해서 NLF를 재조직하는 데 성공한 베트민을 견제할 유일한 대응책은 폭력뿐이었다. 미국에게는 활동무대를 취약한 정치 분야에서 무력 분야로 변경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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