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진짜 미국이야기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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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서평: 미국의 실체를 낱낱이 알 수 있는 명저

평창동계올림픽이 진행되던 2018년 나는 우연히 책 한권을 받았다. 그 책이 바로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였다. 당시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와 더불어 이 책을 읽었던 나는 미국여행을 하면서 책 한권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책이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이었다.

하워드 진 선생이 쓴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4년 전에 읽은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의 개정판이다. 이 책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며, 미국이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범죄와 살인을 저질렀음을 보여준다.

자국의 자본과 기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범죄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미국이다. 그런 악행을 통해, 많은 이들의 생명을 잃어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 무수히 많은 군 기지를 소유하고 있고, 그 나라 보호를 명분으로 타국에게 막대한 주둔비를 요구하기도 한다.

1898년 미국이 쿠바를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거짓 명분으로 일어난 미서전쟁은 미국의 쿠바 식민지 건설과 필리핀 식민지 건설로 이어졌다. 특히나 미국은 필리핀에서 수십만 명의 필리핀인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10세 이상의 필리핀을 죽여도 된다는 기준을 세워놓고 저지른 학살이었다.

특히나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정말 잔인했다. 니카라과에서의 콘트라 반군 지원과 엘살바도르에서의 친미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 미국은 자유라는 이름 하에 중남미의 독재자들과 학살자들을 지원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유엔 헌법의 기준을 운운했지만, 미국은 절대로 이를 지키지 않았다. 뻔뻔스럽게도 레이건은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사일 몇기만 팔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2,000기 이상 팔았고,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미사일을 팔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미사일을 팔았고, 콘트라 반군에 자금을 주었다. 레이건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미국은 자국민에게 있어서도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다. 사업가 조지 풀건은 경제 불황을 핑계로 노동자의 임금을 25%나 삭감했지만, 주주에 대한 배당금은 올렸다. 이에 저항한 노동조합 운동가 유진 뎁스는 결국 감옥에 구금됐다. 1889년에만 22,000명의 미국 철도 노동자가 사고로 죽거나 다쳤다. 그런데도 자본가들은 이윤축적을 위해 이러한 현실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었다.

미국은 냉전초기 스탈린의 독재 체제로부터 나라를 지킨다고 운운하며, 자국 국민을 매카시즘으로 탄압했다. 또한 중국의 국공내전과 그리스 내전 그리고 전후 필리핀 문제에 개입하여, 각국의 민족 반역자들을 지원했다. 그리스 내전에서 미국이 지원한 세력은 과거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반역자들이 대다수였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아마도 단편적으로 알 것이다. 특히나 외교와 정치 그리고 역사부분에 있어서, 6.25 전쟁과 함께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종북좌빨‘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전개하고 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전쟁에서 프랑스의 전쟁비용 80%를 지원했고, 이란의 지도자 모사데크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자 그를 쿠데타로 축출하여 이란에 친미왕조 경찰독재국가를 세웠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미국의 정책이 과연 민주주의적이었는가? 하워드 진 선생이 쓴 책은 이점에서 많을 걸 생각하게 만든다. 미국은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에게 경제제재를 가하여, 125만 명의 이라크인을 아사시켰으며, 이런 경제제재를 통한 범죄행위는 현재 이란과 베네수엘라 북한 등에서 자행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워드 진 선생의 지적처럼 미국은 절대로 대외적으로 폭력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단순히 미국의 제국주의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미국이 베트남을 불법적으로 침략했지만, 미국인들은 전쟁에 반대하여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차별받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한 인권운동가들과 더불어 민권운동을 전개했고, 많은 부분에서 권리를 쟁취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은 미국 민중이 함께 병행한 투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주장이다. 최근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많은 한국인들이 신경쓰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 세력을 버젓이 지원하고 있다. 단순한 인도적 지원이 아닌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미국이 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 얻으려는 목적이 뭘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국은 현재 러시아를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가난에 허덕였던 러시아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극심한 경제제재와 국제적 및 군사적 압박을 할 이유가 없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탈산업화 이후 이득을 본 것은 바이든을 포함한 미국의 군수산업과 민간기업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때, 미국에 대한 비판은 매우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에선 미국에 대한 비판이 너무 약하다. 하워드 진의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는 왜 우리가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해야하는지 그 답을 제공해 줄 것이다. 몇년만에 다시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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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경 미 국무부는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고, 그를 배제한 어떠한 해결 방안을 통해서도 확실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며", 그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장악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미국이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함"을 개탄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공격하는 명분을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합의한 대로 전쟁 비용의 80%를 부담했고,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마련했다. - P309

디엠은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반대의견을 억압했는데, 그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막대한 달러로 간단하게 이런 일을 해치웠다. 그 돈은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오래전에 축출당할 뻔했던 한 남자에게 권력을 안겨주었다. 디엠의 중요한 지지자들은 자유 베트남이 아닌 북아메리카에 있었다. - P310

전쟁 말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총 사망자 수가 400만 명 이상에 달했고(각주 1), 국토와 사회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각주 1) 폴 퀸저지(Paul Quinn-Judge)는 1965년 이후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해도 300만 명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보도했다.(Far Eastern Economic Review, Oct. 11, 1984.) - P313

평화 정착을 성공적으로 좌절시킨 미국과 그 꼭두각시 정권은 수십만 명을 투옥하고 또 그만큼의 인명을 살해하면서 내적인 탄압에 착수했다. 디엠의 지지자이자 고문인 조셉 버팅어(Joseph Buttinger)는 1956년 "대규모 원정대"의 병사들이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마을을 습격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국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주요한 탄압 대상은 반프랑스 저항세력과 베트민이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들이 폭력에 의지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이는 많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농민을 규합해서 NLF를 재조직하는 데 성공한 베트민을 견제할 유일한 대응책은 폭력뿐이었다. 미국에게는 활동무대를 취약한 정치 분야에서 무력 분야로 변경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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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점점 인기를 잃어가면서 정부 내부 인사나 정부와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동의의 테두리를 박차고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예는 대니얼 엘스버그였다.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수학한 엘스버그는 해병대 장교를 지낸 뒤 미국 정부를 위해 주로 기밀사항인 특별연구를 수행하는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에서 일하고 있었다. 엘스버그는 국방부의 베트남 전쟁사 집필을 도왔는데, 같은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앤서니 루소의 도움을 받아 일급 기밀문서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사이공에서 만났는데, 각기 다른 경험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참사를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이제는 미국이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행동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엘스버그와 루소는 근무를 마치고 매일 밤 한 친구의 광고대행사에서 7,000쪽에 달하는 문서를 복사했다. 엘스버그는 이 사본을 여러 하원의원과 뉴욕타임스국방부 문서라 알려지게 된 이 사본의 일부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닉슨 행정부는 대법원에 출판금지신청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그것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사전 제약(prior restraint)’이며 따라서 헌법에 위배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정부는 국가기밀 문서를 승인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는 이유로 엘스버그와 루소를 방첩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을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러나 판사는 배심원단의 심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무효심리를 선고했다. 당시 밝혀지고 있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검찰 측의 부당한 관행이 낱낱이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엘스버그는 이런 대담한 행동을 통해 정부 내의 반대론자들이 정책상의 작은 변화를 기대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자기 의견을 억제하는 일반적인 행동양식을 깨뜨렸던 것이다. 한 동료는 이제 엘스버그가 접근통로를 가지게 됐으므로 정부를 떠나지 말라고 권했다. “너 자신을 잘라내지 마. 네 목을 자르지 말라고.” 엘스버그는 대답했다. “인생은 행정부 바깥에 존재하는 거야.”

 

반전운동은 성장 초기부터 낯설고 새로운 지지자들을 발견했는데, 가톨릭 교회의 신부와 수녀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민권운동을 통해 각성하게 됐고, 또 다른 몇몇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 아래 횡행하는 빈곤과 불의를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험으로 현실에 눈뜨게 됐다. 1967년 가을, 필립 베리건(Philip Berrigan) 신부(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으로 성요셉 신부회 사제였다)는 화가 톰 루이스(Tom Lewis)와 친구인 데이비드 에버하트(David Eberhardt), 제임스 멘겔(James Mengel)과 함께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병무청 사무실로 가서 징병기록을 피로 흠뻑 적시고는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재판에 회부된 그들은 2~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5월 필립 베리건(볼티모어 사건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였다)은 예수회 사제이자 북베트남을 방문, 미국의 폭격이 야기한 결과를 직접 목격한 친형 대니얼(Daniel Berrigan)과 함께 두 번째 행동을 벌였다. 베리건 형제와 다른 일곱 명은 메릴랜드 주 캐튼스빌(Catonsville)에 있는 병무청 사무실에 들어가 기록을 꺼내 나와서는 기자와 구경꾼들이 있는 가운데 징병서류에 불을 질렀다.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들은 캐튼스빌의 9(Catonsville Nine)’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대니얼의 애칭) 베리건은 캐튼스빌 사건 당시 이런 묵상을 적어뒀다.

 

훌륭한 벗들이여, 순조로운 질서를 깨뜨린 데 대해, 아이들 대신에 종잇장을 불살라버린 데 대해, 납골당 정문을 지키고 있는 당직병들을 성나게 한 데 대해 사죄를 구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는 살인은 무질서이며, 생명과 온화함과 공동체와 이타심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질서하고 말합니다. 그런 질서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선량한 이름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공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순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던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감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됐을 때 대니얼 베리건은 종적을 감췄다. 연방수사국이 추적하는 와중에 대니얼은 자신이 교편을 잡고있던 코넬 대학의 부활절 축제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방수사국 요원 수십 명이 군중 사이에서 그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무대에 올라섰다. 그 순간 조명이 꺼졌고, 무대에 있던 빵과 인형 극단의 커다란 인형 속에 몸을 숨긴 대니얼은 트럭에 몸을 싣고 인근 농가로 도망쳤다. 대니얼은 4개월 동안 지하에서 머물면서 시를 쓰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극비 인터뷰에 응하고, 필라델피아의 한 교회에 갑자기 나타나 설교를 한 뒤 다시 사라지는 등, 연방수사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나, 한 밀고자가 편지를 가로채 그의 소재를 고발함으로써 결국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다.

 

캐튼스빌의 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전에 수녀였던 메리 모일런(Mary Moylan)역시 연방수사국에 자진출두하지 않았다. 연방수사국은 모일런을 결코 찾아내지 못했다. 지하에서 쓴 글에서 모일런은 자신의 경험에 관해,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입장에 다다랐는지에 관해 되돌아보았다.

 

우리 모두는 결국 감옥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 칫솔을 가지고 갔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작은 옷상자를 꺼내 간이침대 밑에 밀어 넣고 침대로 올라갔다. 볼티모어 군 교도소에 있는 여자들은 전부 흑인이었다. 백인이라곤 딱 한 명뿐인 듯했다. 여자들이 나를 깨우더니 물었다. “왜 울지 않지요?”, “왜 울어요?” 여자들은 말했다. “당신 지금 감옥에 있는 거예요.” 나는 대답했다. “, 나도 여기 올 줄 알았어요.”

 

그 여자들 둘 사이에 끼어 잤는데, 매일 아침 일어나 보면 팔꿈치를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들은 나에게 말하곤 했다. “밤새도록 자더군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내 인생에 정치적 전환점이 온 것은 우간다에 있을 때였던 듯하다. 미국 비행기들이 콩고를 폭격하던 와중에 그곳에 있었는데, 콩고 국경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비행기들이 국경을 넘어 날아와서 우간다의 마을 두 곳을 폭격한 일도 있었다. 도대체 미국 비행기들이 왜 거기까지 온 것일까?

 

그 뒤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탄자니아의 수도)에서도 조금 머물렀는데 저우언라이가 그곳에 왔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이 사람이 더러운 공산주의자이므로 미국인은 절대 거리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뒤 워싱턴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의 상황, 즉 경찰의 미친 짓거리와 야만행위, 그 도시의 시민 대부분(70%가 흑인)이 영위하고 있는 삶에 마주쳐야만 했다.

 

그리고 베트남, 네이팜탄과 고엽제, 폭격 등이 있었다.

 

나는 약 1년 전에 여성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캐튼스빌 사건 때눈 감옥에 가는 게 의미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흑인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토록 많은 흑인들이 항상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감옥에 가는 게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걸 원치 않는다. 1970년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일 것이고, 나는 우리의 자매와 형제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거기서 신비로운 경험이나 어떤 다른 경험을 하든 간에 그렇게 그들을 소모시키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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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들은 징병명부 등록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소집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일찍이 19645월부터 우리는 가지 않겠다라는 구호가 널리 알려졌다. 징병 등록을 한 젊은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자신들의 징병카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오브라이언(David O’Brien)은 사우스보스턴에서 자신의 징병카드를 불태웠다.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대법원은 자신의 행동은 헌법으로 보호받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된다는 그의 주장을 기각했다. 196710월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조직적인 징병카드 반납운동(turn-ins)’이 벌어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만도 300장의 징병카드가 정부에 반려됐다. 같은 달에 국방부 앞에서 거대한 시위가 있기 직전에 수합된 징병카드 한 부대가 법무부에 제출됐다.

 

1965년 중반까지 380명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소됐고, 1968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숫자가 3,305명에 달했다. 1969년 말에는 전국적으로 징병거부자가 33,960명에 이르렀다. 19695월 캘리포니아 주 북부 전역의 징병대상자들이 출두하는 곳인 오클랜드 병무청은 4,400명에게 징병 소집장을 보냈으나 2,400명이 응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1970년 일사분기에는 선발징병제도가 부활된 이래 최초로 할당수를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보스턴 대학 역사학과 대학원생인 필립 서피나(Philip Supina)196851일에 애리조나 주 투산(Tucson)의 병무청에 편지를 보냈다.

 

징병을 위한 사전 신체검사 출두명령서를 동봉해 보냅니다. 나는 그런 신체검사나 징집명령, 아니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행위 자체에 어떤 식으로든 협조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서피나는 스페인의 철학자 미겔 우나무노(Miguel Unamuno)가 스페인 내전 중에 한 말을 인용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때로는 침묵이 거짓말이다.” 서피나는 유죄를 평결받고 실형 4년을 선고받았다.

 

전쟁 초기에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사건이 있었다. 1965112일 늦은 오후, 수천 명의 직원들이 몰려나오던 국방부 건물 앞에서 32세의 평화주의자로 세 아이의 아버지인 노먼 모리슨(Norman Morrison)이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3층 사무실 창문 바로 밑에 서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임으로써 전쟁에 저항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같은 해 디트로이트에서는 앨리스 허즈(Alice Herz)라는 82세의 여성이 인도차이나의 참사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놀라운 감정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던 1965년 초에는 보스턴 공원에 100명이 모여 분노를 표출했다. 19691015일에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보스턴 공원에 모인 사람이 10만 명에 이르렀다. 그날 전국 곳곳의 도시와 마을에서 약 200만 명이 집회를 가졌는데, 이곳들 대부분은 한번도 반전집회가 열린 적이 없는 곳이었다.

 

1965년 여름 몇 백 명의 사람들이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행진을 벌였다. 맨 앞줄에 있던 역사학자 스토튼 린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조직가 밥 모지즈, 노련한 평화주의자 데이비드 델린저(David Dellinger)등은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붉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에 열린 워싱턴 평화집회에는 수십만 명이 참여했다. 1971년에는 2만 명이 시민불복종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 워싱턴으로 집결, 베트남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살육에 대한 혐오감을 표명하기 위해 워싱턴의 교통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이 때 연행된 1,400명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자원자 수백 명도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칠레에서는 평화봉사단원 92명이 단장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쟁을 비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평화봉사단원을 지낸 800명도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시인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은 백악관 행사에 초대받았지만 참석을 거절했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 역시 초대받았지만 참석하지 않고 총성이 울리면 예술은 죽는다라는 전보만 보냈다. 백악관 잔디받에서 열린 오찬에 초청된 가수 어사 키트(Eartha Kitt)는 영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모든 참석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대통령상 수상자로 백악관의 초청을 받은 한 십대는 수상식 자리에서 전쟁을 비판했다. 할리우드의 미술가들은 선셋 대로에 18미터 높이의 항의의 탑(Tower of Protest)을 세웠다. 뉴욕에서 열린 전국출판대상(National Book Award) 수상식에 참석한 50명의 작가와 출판인들은 험프리 부통령이 연설하는 도중에 그가 전쟁에서 행한 역할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런던에서는 미국 젊은이 두 명이 미국 대사가 주최한 독립기념일 만찬장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건배를 외쳤다. “베트남에서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그들은 경비원들에게 쫓겨났다. 태평양에서는 두 명의 젊은 수병이 타이의 공군기지에서 폭탄을 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미군 군수품 수송선 한 대를 납치했다. 두 수병은 배가 캄보디아 해역에 다다를 때까지 잠들지 않으려고 각성제를 먹으면서 나흘 동안 수송선과 승무원들을 지휘했다. 1972년 말, AP통신은 펜실베이니아 주 요크로부터 이렇게 보도했다.

 

오늘 주 경찰이 반전운동가 5명을 체포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되는 폭탄 외피를 생산하는 공장 근처의 철도시설을 파괴했다고 한다.”

 

행동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중간계급과 전문직 종사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705, 뉴욕타임스는 워싱턴발로 제도권변호사 1,000, 반전시위에 동참이라는 머리기사를 내보냈다. 대기업들 역시 전쟁이 자신들의 장기적인 기업 이익을 저해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는 전쟁을 지속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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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최초의 징후 중 일부는 민권운동으로부터 나왔다. 아마도 흑인들은 정부로부터 겪은 경험 때문에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정부의 주장 전부를 불신하게 됐을 것이다. 19648월 초에 린든 존슨이 통킹만 사건에 관해 국민들에게 말하면서 북베트남을 폭격한다고 발표하던 바로 그 날, 미시시피 주 필라델피아 인근에서는 흑인과 백인 활동가들이 그해 여름에 살해된 민권운동가 3명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연사 한 명은 존슨이 아시아에서 무력을 사용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하면서 이를 미시시피의 흑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비교했다.

 

1965년 중반 미시시피 주 매콤(McComb)에서는 이제 막 베트남에서 자기 학우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흑인 젊은이들이 전단을 배포했다.

 

미시시피 주에서 모든 흑인이 자유롭게 되기 전에는 이곳 흑인들 중 누구도 백인들의 자유를 위해 베트남에 가서 싸워서는 안 된다.

 

이곳 미시시피의 흑인 소년들은 징병을 감사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이 전쟁에 나가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미국의 백인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와 베트남에서 우리의 목숨을 걸고 다른 유색인을 죽이라고 요구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미시시피 주를 방문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상원의원 존 스테니스(John Stennis)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자, 백인과 흑인 학생들은 베트남에서 불타 죽은 어린이들을 기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1966년 초에 미국은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침략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그해 여름,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성원 6명이 애틀란타의 병무청에 침입한 죄로 체포됐다. 그들은 유죄를 평결받고 몇 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무렵,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활동가로 이제 갓 조지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줄리언 본드(Julian Bond)는 전쟁과 징병에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발언을 했고, 주 하원은 그의 발언이 선발징병법(Selective Service Act)을 위반하는 것이며 주 하원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그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대법원은 헌법 수정조항 1조에 의거해 본드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의원직을 되찾아 줬다.

 

흑인 권투선수이자 헤비급 챔피언으로 미국의 위대한 운동선수 가운데 하나인 무하마드 알리는 이 전쟁이 백인의 전쟁이라면서 군 복무를 거부했다. 권투협회는 그의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했다. 마틴 루터 킹 2세는 1967년에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에서 소리높이 외쳤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미친 짓거리를 끝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고통받는 베트남 빈민들의 형제로서 말합니다. 국토가 불모지 상태가 되고 집들이 부서지고 문화가 파괴되고 있는 저 사람들을 대신해 저는 말합니다. 국내에서는 희망이 산산조각나고 베트남에서는 죽거나 타락해야 하는 이중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미국의 빈민들을 대신해 저는 말합니다. 우리가 취해 온 행로에 대해 아연실색해버린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말합니다.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서 저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전쟁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다고.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주도권은 분명코 우리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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