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 글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반전운동에 나섰던 리영희 교수의 연설문입니다.)

 

평화 국가의 위상이 위기에 처해 있는 이 시각, 며칠 동안 계속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모처럼 갖지 못했던 귀중한 이 기회에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고 아울러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를 이라크에 절대 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첫째, 그 동안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합법화하려고 선전한 사항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화학무기와 그밖에 유엔 안보리가 결정하고 제재를 가할 만한, 미국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따라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거짓된 주장과 요구를 몇 달에 걸쳐 심의한 결과도, 그리고 현지에 파견된 조사단의 철저한 조사 결과도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이번 전쟁은 침략전쟁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국가들의 행동 규정을 결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헌장, 이 모든 것을 미국은 위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군사 공격은 명백한 침략 전쟁입니다.

 

, 파병은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되는 유엔 헌장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은 국제 관계에서 국제 행동은 유엔 헌장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또 우리 헌법에는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명백한 조항이 있습니다. 파병은 이것에 대한 위반입니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결정에 의해 탄생한 국가인 만큼 유엔 정신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 결의가 없는 미국의 불법적 전쟁 행위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유엔 헌장 위반이며 대한민국의 법적 뒷받침이 되고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겁니다. 따라서 노대통령과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이며,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대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과 파병 지지 세력들은 파병이 한-미 동맹 관계에 바탕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1954년 발효된 것으로, 이 방위조약에는 분명하게 군사행동에 대한 제한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동맹이라 해서 모든 군사행동이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학생이나 그 연배 분들인 거 같아서 대한민국의 군사 행동에 관한 한미방위조약에 관한 강의를 할까 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은 그 전문에서 상호 군사 행동을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1.파병은 오히려 한미 방위 조약 위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국이 미국을 도와도, 미국이 한국을 도와도 그것은 외부의 무력 공격이 있어야만 정당화됩니다. , 그 지역은 태평양 지역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노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명백한 군사 행동이 없었는데도 대한민국이 한미방위조약에 입각했다고 착각하고 미국의 군사공격에 지지를 보낸다면 한미방위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방위조약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하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평화적 수단을 다했습니까?

 

, 국제 관계에서 유엔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 위협이나 무력 공격을 삼간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유엔에 위배되는 이라크 공격은 한미방위조약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크가 무력 공격을 해 왔습니까? 이라크 국민들이 한국 국민들에게 손가락질 하나 한 일이 있습니까?

 

이라크가 아시아에 있습니까? 극동 지역에 있습니까?

 

이라크가 선제 공격을 했습니까? (청중들:아니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 공격을 지지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이제 미국과의 동맹 관계라는 허황된 논리로 파병을 결정하려 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다섯째, 여러분은 젊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상황을 잘 모를 겁니다. 대한민국 군대 35만 명이 베트남에 갔고 상시적으로 5만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갈 때도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은 이 조약에 근거해 대한민국 군대를 베트남까지 끌고 갈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을 취했냐 하면 남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독자적으로 군대 파병을 요청하게 하는 군색한 방식을 썼습니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멍청한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이 미국 요청 없이 자발적으로 갔다고 하는 엉터리들이 있는데,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근거가 없으니까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요청하도록 한 것일 뿐입니다. 아주 교활하고 못된 방법을 쓴 것입니다.

 

여섯째, 그렇다면 동맹 국가는 다른 동맹 국가의 전쟁에 무조건 참전해야 하는가? 베트남 전쟁 때 영국은 군대를 포함해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국이 하도 요청하니까 급기야 의장대 6명을 보냈습니다. 사이공 공항에 의장대를 세워 놓고 마치 영국이 미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인 양 쇼를 한 겁니다. 영국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할 것을 마셜 플랜을 비롯한 미국의 원조로 살아난 나라입니다. 미국과 같은 앵글로 색슨 핏줄인 영국은 우리 나라보다도 더욱 대대적으로 미국의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장대 6명만을 보냈다는 사실은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일곱째, 국가 이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가 이익을 획득하는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살인·강도의 방법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의 선량한 국민들을 해치면서 돈을 벌고, 시장을 개척하고, 석유 이권을 챙기는 것을 원하는 극우 반공주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도·살인, 절도·강간·파괴·방화 이런 방법으로 번 돈이 얼마나 유익하고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여덟째,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전략적으로 미국을 지지했다고 고통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위기를 해결하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을 지지했다면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특히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세력에게는 미국의 이익이 행동 규범입니다. ‘동맹 국가의 희망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부시 정권의 고려사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양과 아첨을 떤다고 부시 정부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부시 정권의 철학과 정책과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입니다.


 

아홉째, 한국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쳐 높은 민주 의식과 도덕성을 갖췄습니다. 세계인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파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자주적이어야 합니다.

 

열번째, 대한민국의 전투병을 이라크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보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 포로 수용소 경비병이야말로 훗날 전범 재판에 회부될 가장 위험한 직책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연합군 병사들을 포로 수용소에 가두었고 조선인들이 경비병 노릇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앞잡이로 몰려서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습니다. 포로 수용소 경비는 1급 전범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 미국의 행동 규범

 

열 한번째, 우리가 왜 12억 아랍 인구를 적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나라의 적을 새로 만들어서 국제 외교에 지장을 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열 두번째, 국내 반공 수구 세력, 미국의 말이라면 뭐든지 무조건 따르는 일부 수구 세력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열 세번째, 노 대통령 자신이 취임 전과 취임 후에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한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태도를 가지겠다 해서 여러분들은 아마 이 정권에게 표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입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함으로 해서 대한민국 국민을 배신하고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열 네번째, 이번에 파병하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 국민은 미국에 더욱 예속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국처럼 취급받아 왔는데, 이번 파병은 이런 상황을 심화시킬 겁니다.

 

끝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해 놓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대북 적대 정책에 무슨 근거로 대항할 수 있습니까? 미국은 우리의 요구와는 반대로 행동할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군대를 파병해야 할 비밀 협약이 있는가? 한미방위조약 이외에 그것을 백지화하는 미국과의 비밀 조약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헌법과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마땅히 그것을 무효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국민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재원 2020-09-25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유합니다

NamGiKim 2020-09-25 15:1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쿠자누스 2020-09-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교수님 연설보다 몇 달 전이 되겠네요.
시사저널에 제가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8686

NamGiKim 2020-09-25 18:50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댜.^-^
 

몇개월간 미제국주의 역사를 연재하며 참고한 참고문헌들 올립니다.  

미국사, 이주영, 대한교과서, 1997
미국사(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09),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있는책, 2015
미국사 산책 시리즈,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0...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I II III, 앨런 브링클리, 황혜성, 휴머니스트, 2011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 손세호, 랜덤하우스코리아, 2011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II, 올리버 스톤, 이광일, 들녘, 2015
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유종선, 가람기획, 2012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상), 황성환, 민플러스, 2018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임승수 문경환 (외), 시대의창, 2008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C. 데이비스, 이순호, 책과함께, 2004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노엄 촘스키, 김보경, 한울(한울아카데미), 2007
하워드 진의 만화로 보는 미국사, 하워드 진, 송민경, 다른, 2013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래리 고닉, 노승영, 궁리, 2018
전쟁 국가의 탄생, 레이첼 매도, 박중서, 갈라파고스, 2019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 정소영, 2018
미국 민중사 I II, 하워드 진, 유강은, 이후, 2008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 김영진, 추수밭, 2008
전쟁과 기독교, 김상구, 책과나무, 2013
현대 미국의 이해, Russell Duncan, Joseph Goddard, 민병오, 명인문화사, 2015
이현상 평전, 안재성, 실천문학사, 2013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2017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정병선, 책갈피, 2004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 2010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사, 황재연, 군사연구, 2017
아프가니스탄 왜?, 권희석, 청아출판사, 2017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천경록, 책갈피, 2004
좌파세계사, 닐 포크너, 이윤정, 엑스오북스, 2016
미국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역사, 조성일, 소이연, 2013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 유강은, 이후, 2016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한겨레출판, 2015
진실이 밝혀지다, 마리오소사, 노사과연 편집부, 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1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행인 2020-04-01 0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NamGiKim 2020-07-20 13:54   좋아요 0 | URL
잘 참고하세용!
 

미제국의 폭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소위 신대륙에 도착하여 저질렀던 침략의 역사부터 2020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결까지 총 27개의 주제로 나누어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정리해보았다. 페이스북과 더불어 SNS에 ‘미제국주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몇 개월간 글을 올리면서 필자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보다 자세하게 공부할수 있는 기회였다. 처음 시작은 페친들에게 미국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기 위해 간단히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집필할 거리들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 올리게 된 미제국주의 역사는 단순히 미국의 팽창 혹은 침략의 역사만을 다루지 않았다. 주로 미국이 일으키거나 개입한 전쟁들을 위주로 글을 쓰긴 했지만 미국사회에서 억압받고 멸시받던 흑인들의 역사와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미국 지배계급의 역사도 집필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리즈 중 일부는 흑인노예의 역사와 백인들의 인종테러 그리고 1950,60년대 흑인인권투쟁도 다뤘다.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위 자유주의 체제를 현재 유럽보다 더 많이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민낯을 너무나도 모른다. 19세기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기업가 계층으로 성장한 지배계급들은 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인간 이하의 노동을 강요했고, 낮은 임금을 부여했다. 십일조를 안 기업인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 극찬을 받는 석유 재벌 록펠러는 1914년 콜로라도주에 있는 러들로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하자 개틀링 기관총으로 무장한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의 기업가들은 노동자에게 인간이하의 노동을 강요했고, 1889년에만 보더라도 최소 22000명 이상의 철도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에선 만약 노동자가 산업재해에서 팔이 잘리거나 다리가 잘려 가난을 면치 못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여겨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하버트 후버 또한 가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떠받들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정책을 하기 이전까지 미국은 국가가 시장경제에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역사에선 흑인의 역사를 빼놓을 수가 없다. 17세기 초 북미 대륙에 소위 영국의 식민지가 건설된 이래로 버지니아주를 포함한 미국 남부에는 흑인 노예제도가 자리 잡았다. 그들이 북미 대륙에 오게 된 이유는 유럽에서 오던 계약 하인제를 대체하기 위한 노동력 확보였지만, 식민지 미국인들의 이윤 창출을 위한 목적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들은 백인들의 노예가 됐다. 이런 노예제도는 독립전쟁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웠다는 건국의 아버지들 또한 그들의 처지를 전혀 생각지 않았기에 19세기까지 고스란히 유지됐으며,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노예제도에서 벋어나지 못했다. 남북전쟁 이후에도 흑인들에 대한 멸시는 계속됐고, KKK와 같은 인종주의 단체들은 20세기까지 린치라 하여 흑인들을 목메달아 죽이거나 십자가에 산채로 태워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다. 흑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차별받았고, 미소냉전이 한참이던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미국의 인종차별과 흑인 멸시는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침략의 역사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루이지애나주를 선물받은 미국은 영토 팽창에 나섰다. 1840년대에는 멕시코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현재의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콜로라도 등의 광활한 영토를 강탈했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정복 전쟁에 나설 때 미국 또한 영토 팽창에 나섰다. 미국은 괌과 하와이등을 합병했고, 미서전쟁 이후 쿠바를 사실상 식민지 지배를 했으며, 필리핀을 합병한 뒤 대략 20만 이상의 필리핀인을 학살했다.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미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과 더불어 베이징에 간섭군대를 파병했고, 청나라의 의화단 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됐다. 1차 세계대전이 있던 1910년대 미국은 니카라과를 침략했고, 도미니카 문제에 개입하여 8년 동안 그 나라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전역에서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돕기 위해 12000명의 미군을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상륙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타국 문제에 개입하고 간섭했으며 때로는 침략을 자행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국은 미군정이라는 이름하에 3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다. 미국은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건국사업과 치안 유지를 해나가던 여운형의 조직을 불법 단체로 간주하여 강제로 해산시켰고, 한반도 이남에 자신들의 패권 유지를 위해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게 결탁했던 친일 세력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친일세력들이 세력화하면서 한반도 이남에선 수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다. 친미세력들의 이러한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최소 30만 이상을 학살한 국민 보도연맹사건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남북한 할 거 없이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 외에도 미국은 1947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그리스 좌익의 씨를 말린 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에서 시작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미국은 반민중적인 장제스 정권에게 1949년까지 20억 달러를 원조했으며,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한때 동맹이었던 호치민을 버리고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전쟁 비용 80%를 제공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쿠바혁명이 성공하여 친미국가 쿠바에서 사회주의에 기초한 국가가 탄생하려 하자 미국은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때는 핵전쟁을 운운하며 쿠바와 소련에게 막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 베트남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베트남 민중 80%가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 미국은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친미괴뢰정권을 만든 뒤,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정통성 없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진적으로 증가시켰고, 여러 작전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전개하면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남베트남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을 침략했다. 무차별적인 네이팜 폭탄 및 백린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를 통해 미국은 수백만의 베트남 민간인에게 테러행위를 저질렀으며, 수백만의 베트남인을 학살했다.

 

그 외에도 미국은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중남미 지역의 국가를 침략하고 친미괴뢰정권을 만들면서 무수히 많은 폭력을 저질렀다. 특히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 CIA가 진행한 콘도르 작전으로 5만 명에서 6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됐으며,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혀 인간 이하의 고문에 시달렸다. 심지어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에 잡힌 인질들을 통해서 이란에게 무기를 판매했고, 그 무기판매대금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콘트라 우익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이처럼 미국은 1776년 워싱턴과 같은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탄생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무수히 많은 침략전쟁과 내정간섭을 일삼아왔고, 자신들에 대항하는 세력들에겐 경제제제라는 가차없는 야만 행위를 하여 그 나라 국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대표적으로 1990년대 걸프전쟁 이후 최소 100만에서 150만 명이 아사했던 이라크가 그러했고,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북한 또한 그러했으며, 21세기 사회주의 사회를 꿈꾸던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그러하다. 필자가 미제국주의사를 SNS에 연재하기 전에는 미국의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후안 과이도라는 괴뢰를 내세워 반동 쿠데타를 획책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연재하는 와중인 20201월에는 이란의 장군인 솔레이마니를 암살하여 미국과 이란 간의 긴장 관계를 극대화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란은 전면전에 돌입할 뻔했었다. 따라서 현재도 미국의 전쟁 도발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이란 사태를 보며 필자는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찬성하고, 미국의 군사적 도발 행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극단적으로 찬양하는 친미극우주의자들이 모습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필자가 이 글을 연재한 이유 중 하나는 많은 한국인이 대체로 친미성향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미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라는 이름하에 미국이 보여준 폭력성에 대해 너무 간과하고 있다. 비록 필자의 능력이 못미쳐 많은 부분이 부족했지만, ‘미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이 보다 미국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기를 희망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행인 2020-03-23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

NamGiKim 2020-03-23 21: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20년간 치른 제2의 베트남 전쟁

(메달오브아너 티어 1, 이 게임은 2010년 미국 EA 게임 회사에서 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게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군의 활약상을 주로 다룬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기 2년 전 군사적인 침공을 개시했던 또 다른 나라가 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이다. 2020년 현재까지도 미국과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최빈국이자,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고,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략 40년간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다. 20세기 당시 영국의 지배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했던 아프가니스탄은 1973년까지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했었다. 197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한 아프간 정부의 유혈진압과 폭력이 나타났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성공시켜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남녀평등이나 토지 소유 제한 및 재분배와 같은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구했고, 이것은 도리어 극보수적인 아프간 민중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반발이 아프간 내부의 유혈사태로 번졌고,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세력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12 솔져스, 2018년에 국내에도 개봉했던 이 영화는 소위 애국주의로 가득차 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은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공격 헬기를 동원하여 전쟁을 전개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고전했던 것처럼 고전하기를 바랐고, 소련군에 맞서 저항하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지원했다. 미국의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이 무자헤딘 세력을 돕고자 했고, CIA는 영국제 소총인 리엔필드 소총과 중국제 AK-47 소총, 알라의 요술봉이라고 불리는 RPG-7 대전차 로켓과 미국산 지대공 미사일인 스팅어 미사일까지 지원했다. 따라서 무자헤딘은 미국이 지원한 무기와 장비로 소련군에게 맞서 싸웠고, 소련군은 미국이 바랬듯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이후에 미국의 적이될 오사마 빈라덴도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소련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

(치누크 헬기에 탑승하는 미군)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지쳐갔다. 1980년 6월 아프가니스탄의 팍티야주에선 소련군 1개 대대가 무자헤딘에게 섬멸당했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수많은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공격헬기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포화 속에서 사라졌다. 1986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이 11만 5000명까지 늘어났지만, 고르바초프는 철수를 발표했다. 1987년 한 해에만 소련 항공기 270대가 격추되었을 정도다. 결국 소련군은 연방이 해체되기 2년전인 198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 당시 소련에 지원받던 공산주의자들과 더불어 1990년대에는 민족 갈등이 대두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던 무자헤딘은 1990년대를 거치며 탈레반으로 거듭났다. 즉 그들이 탈레반이 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 것이다.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에서 벌어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주동자로 빈 라덴이 지목되면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카에다 근거지에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다. 이를 시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반미정서가 불붙기 시작했다.


21세기가 시작되던 2001년 미국에서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번지기 시작했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Al-Qaeda)가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항공기 테러를 가해서 최소 3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게 만들자, 미국은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했다. 9.11 테러 2일 뒤인 9월 13일 미국의 부시 정부는 파키스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에게 탈레반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의 지원중단, 파키스탄 영공 통과와 이-착륙 백지 위임장을 요청했고, 파키스탄 대통령은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다.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게 숨겨 놓은 오사마 빈라덴을 인도하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탈레반은 이를 거부하며 미국에게 증거를 제시하라 요구했다. 미국은 탈레반과의 협상은 불가하다는 견해만 거듭했고,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도널드 럼스펠드는 "아프간 동굴 속 테러리스트 수백 명을 찾아내겠다"라고 말했다.

(북부동맹,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반탈레반적 소수민족들과 군벌의 연합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몽족이나 산악부족 같은 소수민족을 이용했듯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들을 이용했다.)


2001년 10월 7일 미국은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하여 아프가니스탐 침공을 시작했다. 미군은 폭격기와 미사일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있는 탈레반의 주요 시설에 대규모 공습을 단행했고, 특수부대인 그린베레(Green Beret)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반탈레반 소수민족 연합체인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과 연합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조브레이커 팀이 이끄는 CIA 특수행동국 소속의 군사요원 110명, 미국 그린베레 특수부대원 300명 그리고 이들과 동맹을 맺은 수만 명의 북부동맹 병력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동원되었다. 10월 21일부터는 카불 북부에 위치한 탈레반 주둔지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었고, 11월까지는 대형 폭탄을 동원한 공습이 이어졌다. 즉 그러는 사이 북부동맹이 탈레반을 압박하여 수도 카불로 밀고 내려왔다.

(탈레반, 과거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소련군에 맞서 싸웠지만 2001년부터는 미국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2001년 12월 13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 산악지대인 토라보라에서 미군 특수부대가 오사마 빈 라덴 일행을 추적 중이었다. 미군이 토라보라 지역에서 급습하여 전투를 전개했을 때, 오사마 빈라덴과 그지지 세력 다수는 탈출하면서,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미군은 12월 4~7일까지 사흘간 폭격기를 동원하여 총 300톤가량의 폭탄을 투하했지만, 얻은 것은 없었다. 미국이 북부동맹과 연합하여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세력이 약화되자 아프가니스탄은 혼란 상태에 빠지면서 군벌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즉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정부를 세웠고, 미 공군은 수도 카불 북쪽에 있는 바그람에 공군기지를 세웠다. 그 정부의 병력들에게 무기를 지급했지만, 무기를 수령하자마자 언제 받을지 모르는 급여를 기다리지 않고 탈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이런 상황을 틈타 세력 재건에 나서 3월엔 1000명이 넘는 병력 규모를 형성했다.

(아나콘다 작전 지도)


(아파치 헬기)


(메달오브아너 티어 아파치 헬기)


2002년 3월 2일 미군은 소위 ‘아나콘다 작전(Anaconda operations)’을 전개하여 탈레반과 알케에다 잔존세력을 섬멸하고자 했다. 아나콘다 작전을 미군이 전개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군벌들이 이 전투에 참여하였고, 미군은 아파치 공격헬기와 같은 최신식 전투 헬기를 사용하여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공격했다. 3월 18일에 아나콘다 작전은 끝이났는데, 샤히코트 계곡에 숨어든 800~1500명 이상의 탈레반과 알카에다 병사들이 전사했다. 미군 지휘부가 실제로 확인한 탈레반과 알카에다 병사 사살 숫자만 600명이 넘었다. 아나콘다 작전 이후 탈레반은 다시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세력을 모았다. 아프간 파슈툰주를 중심으로 탈레반의 소규모 훈련캠프가 꾸려졌고, 200명 정도였던 캠프의 규모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거기다 미국은 2003년에 있을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문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미군이 이라크에서 고전하고 있던 2005년 아프간에서는 군벌들이 지방을 완전히 장악해 중앙 정부의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2007년 탈레반 활동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미군)


(2010년 당시 아프가니스탄 파티카 지역에서 근무하는 미군병사)


2004년 미국의 예산지원 하에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35000명 정도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능력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수준이었고, 추가적으로 파키스탄에서 8만 명의 병력을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배치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경계작전만을 수행했기 때문에 실제 탈레반이 파키스탄 국경을 통과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2004년 이후 수백여 건이 넘는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피해가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소위 알카에다 조직원이 은신하고 있는 이슬람 학교와 모스크를 공습하는 등, 전장의 모습은 악화되어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자살 공격은 2004년에 3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는데, 2005년에는 21건, 2006년에는 131건, 2007년에는 150건 2008년에는 142건이나 발생하며 숫자가 증가했다.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병력 비교표)


탈레반 또한 세력을 확장하여 2007년이 되었을 때는 병력이 최소 1만 명까지 늘어났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다국적군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은 조직 규모를 확장한 것이었다. 2007년 당시 추가적으로 3500명을 파병한 미국은 이라크 파병 숫자의 증가함과 더불어 아프가니스탄에 추가적인 병력 파병을 증가시켰다. 2007년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의 병력 숫자는 2만 6000명이었는데, 20008년 6월에는 4만 8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2008년 9월이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파키스탄 영토까지 번졌다. 2008년 미군의 사망자 수는 113명을 기록했고, 탈레반은 나토의 전쟁물자와 자금을 공급하는 통로를 공격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주둔군 그래프)


2008년 선거운동에서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조속히 종결짓겠다고 공약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필요한 전쟁(War of Necessity)’라고 평가했다. 2009년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추가공습을 승인하고, 지상전투 병력의 수를 늘렸다. 또한 그는 파키스탄에 대한 무인폭격기를 이용한 폭격과 기습공격을 확대해나갔다. 이렇게 해서 2013년까지 12년 동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600역 달러라는 전쟁비용을 사용했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2009년 8월까지 4만 7000명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은 6만 8천 명으로 확장했다. 다음해인 2010년에는 1월부터 7월에 걸쳐 3만 3000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면서 아프가니스탄 미군 병력은 10만 명을 넘겼다. 미국 오바마 정부가 10만 명까지 병력을 증가하던 2010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가 격렬하게 일어났고, 그해에만 최소 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지 9년이 지났음에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넵튠 스피어 작전 전개도)


 

(드론 전투기)


2011년 5월 1일 미국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은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 소재의 한 주택에 기습 작전을 실시해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2011년에 전개된 오사마 빈라덴 암살 작전인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은 대통령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 정치 인사들과 각료들이 생중계로 보면서 진행되었고, 그들은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작전을 승인한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전쟁지역이 아닌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하는데, 사전에 파키스탄 정부에 어떠한 얘기나 허가 없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의 체면을 망가뜨렸고, 파키스탄 국민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 2004년부터 2007년 그리고 2008년까지 부시 행정부는 파키스탄에서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대상에게 최신식 살상 무기인 드론을 이용한 공습을 실시했었는데,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드론 공격의 횟수는 급증했었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의 사람들은 반미감정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게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고, 오사마 빈라덴을 암살했으니 파키스탄 사람들 입장에선 미국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와 아프가니스탄, 부시 행정부에서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트럼프 집권기 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사마 빈라덴이 암살된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군 압력은 더더욱 높아졌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2011년 7월을 철수 개시 시점으로 하여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종결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점진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2014년까지 전쟁을 종결시키지는 못했다. 거기다 2015년 10월 15일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철군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2015년 12월 22일 미군 사령부가 있는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자폭테러로 미군 6명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6년 말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미군을 1000명까지 축소한다는 공약을 지키지 못했고, 8400명의 미군병력을 주둔시킨 채,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게 넘겼다. 2017년 6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놓고 고심 끝에 4000명의 병력을 증원하기로 해버렸다.

(2020년 도하합의, 결국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한 뒤 철수하기로 했다.)


미국이 지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무능했다. 2018년 1월 기준으로 국토의 30%만 통제하고 있었고, 나머지 70%는 탈레반이 장악하거나 정기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2018년 2월 8일 비행기 공습을 강화하려 탈레반에 화력을 집중했지만, 1주일 뒤인 2월 15일 탈레반 측에서 아프간 정부측에게 평화회담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정부는 “미국은 탈레반이 평화회담에 나오는 것을 환영하지만, 그 전에 끔찍한 테러공격부터 중단해야 한다.”라고 밝혔기에 평화회담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2018년에도 아프가니스탄 내에서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201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2019년 9월 미국과 탈레반은 협정을 조건부로 체결했고, 2020년 2월 29일 대략 20년간의 전쟁을 종지부를 찍는 ‘도하 합의’를 성사시켰다. 이 합의에서 미국은 “135일 이내로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을 8600명까지 줄인다는 것”과 “14개월 안에 미군을 포함한 국제동맹군을 모두 철군”하기로 합의를 봤다. 현재(2020년 2월 기준) 아프가니스탄에는 대략 13000명 정도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결국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하여 완벽히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20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이 최빈국인 아프가니스탄에게 패배한 것이다.

(킬 팀 사건, 2010년 5명의 미군은 민간인 3명을 죽인 것으로 재판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한 미군의 전쟁범죄나 폭력이 존재했다. 2005년에는 2002년 바그람에서 아프간 포로 2명이 군검사관에게 가혹행위들 당한 채 숨졌지만, 미군범죄수사대가 이를 은폐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었다. 2010년엔 ‘킬 팀 사건’이라 하여 재미삼아 민간인을 죽이고, 손가락을 전리품으로 보관하는 만행을 저지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사들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이 미군병사 5명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최소 3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이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현장에서 불을 지르는가 하면 반군을 정당하게 사살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한 희생자의 시체 옆에 AK-47 소총을 놓아두기도 했다. 2012년 1월에는 미해병대원 5명이 피흘리는 탈레반 시신 3구를 향해 집단으로 방뇨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촬영되었었다. 2012년 3월 11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주의 판지와이 구에서 미 육군 부사관 1명이 총기를 난사하여 어린이 9명을 포함한 16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201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 16명을 살해한 미 육군 소속 로버트 베일스 하사관의 사진.)

 

(탈레반 시신에 방뇨하는 미군 병사들)


그리고 20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죽어나갔다. 2001년 10월 16일 카불 시내에 위치한 국제 적십자사 구호소와 와지르 아크바한 병원이 미군의 폭격을 받았는데, 입원 중인 어린이 환자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400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이 수치는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서 사망한 민간인 숫자를 상회하는 수치다. 유엔은 아프간에서 지난 2017년 동안 무장세력의 폭탄 공격과 미군 등의 공습으로 민간인 1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고 밝혔는데, 최소 수만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페이퍼, 1971년 대니얼 엘즈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 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추악한 민낯이 2019년 이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이자 사회운동가 라폰, 2011년 20살의 나이로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이후 공산주의자가 된 뒤 불명예 재대를 하고 사회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2019년 아프가니스탄 페이퍼 관련해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며 미국은 최소 24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5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7천600억 달러를 사용했다. 2019년 12월 미국에서는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펜타곤 페이퍼(The Pantagon Papers)’를 전 세계에 공개하여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밝혀졌듯이,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소위 ‘아프가니스탄 페이퍼(Afghanistan Papers)’라는 문건이 밝혀짐으로써 그 추악한 전쟁의 민낯이 드러났다. 대략 2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기밀 보고서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여했던 핵심 인사들을 포함한 400여명을 인터뷰한 내용이 담겼는데, 대부분이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실패라고 인정했다. 또한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통계 조작 등의 방법으로 자국민들을 속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희생은 “미국인들이 계속 속고 있었다는 결과”라고 보도했다. 과거 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그랬듯이 미국의 지배층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명한 증거들을 숨겨가면서 장밋빛 전망들을 늘어놓았다”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아프가니스탄 페이퍼를 폭로하면서 보도했다. 2019년 워싱턴포스트가 폭로한 아프가니스탄 페이퍼가 증명하듯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한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 지배계급들의 거짓과 위선이 가득차 있다. 이렇게 추악한 미국의 침략전쟁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나서 끝나게 됐다. 결국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제2의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패배했다.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역사적 반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9.11 Terror and Invasion of Iraq 2003)

(비행기 테러를 당한 쌍둥이 빌딩)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 미국 뉴욕에서 발생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쯤 ‘아메리칸 항공 11기’가 뉴욕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Center) 북쪽 빌딩에 충돌했다. 그로부터 20여 분이 지난 9시 3분 유나이티드 항공 175기가 다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Center) 남쪽 빌딩에 충돌했고, 30분 뒤에는 ‘아메리칸 항공 77기’가 수도 워싱턴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들이받았다. 이 국제적 테러를 감행한 세력은 극단적 이슬람주의 단체인 알카에다와 그 알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이 뉴욕에 감행한 테러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세기의 대폭발 테러로 인해 최소 3000명 이상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비행기가 충돌한 세계무역기구 건물인 쌍둥이 빌딩은 무너져 버렸다.

(현재 9.11 기념관 근처에 있는 쌍둥이 빌딩 위치, 현재는 이것을 잊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9.11 테러는 미국에게 있어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자신들의 본토가 공격당한 사례였다. 이 테러 사건이 있고 나자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했다. 부시 대통령과 그의 공화당 측근들은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하는 이슬람 군사조직인 알카에다(Al-Qaeda)를 괴멸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9.11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탈레반이 오사마 빈라덴을 숨겨주고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을 대상으로한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에 나섰다. 그 결과 미국의 부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단기간에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하고 알카에다를 섬멸시키는 목표를 실패하게 되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오사마 빈라덴)

이렇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2001년 9월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한 미국의 조지 부시는 2002년 1월 미국하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북한, 이란, 이라크를 향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표현했다. 미국의 부시 정부가 21세기를 시작하며 타국을 대상으로 군사적으로 위협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모습을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통해 보여주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부시 정부는 의회에서 소위 ‘미국애국자법(Patriot Act)’ 통과시켰다. 이 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법무부에 부여한 것이었다. 즉 이 법에 따르면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고, 그렇게 지정된 조직에 성원이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대략 1000명 이상의 아랍계 미국인들이 어떠한 기소 절차 없이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미국은 9.11 테러를 거치면서 소위 자신들이 표현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적대국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더불어 또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한 군사적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후세인의 이라크였다. 부시 정부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전략은 미국인들에게 잘 먹혀들어 갔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미국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적인 군사적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부시는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의 민주화’, ‘대량 살상무기의 개발과 은닉’ 그리고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조작과의 연계’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침공 작전 이름도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표면적으로 이라크을 침공하기 위해 만든 구실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진 목적은 석유였다. 이라크는 세계에서 석유매장량이 3위였다. 즉 이런 이라크의 지정학적 조건 미국으로 하여금 이라크에서 석유 이권을 독식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자극했고, 이라크는 미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됐다.

(이라크 전쟁 당시 사막 상공을 비행하는 미국과 영국측 군항공기)

(바그다드 폭격)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그 나라를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와 연관지어 얘기했지만, 오사마 빈라덴의 조국이자 9.11 테러범 19명 중 16명의 조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인권적이고, 억압적인 지배계급들이 미국과 협력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타국 침략 명분으로 내세웠던 구실은 큰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중동의 민주화나 중동 여성인권 보호라는 미국의 주장은 악랄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사담 후세인의 관저)

 

(바그다드 함락 이후 항공모함에서 연설하는 조지 부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12년 전 걸프전쟁에서 그랬듯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2003년에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는 24만 1500명의 미군과 4만명의 영국군이 동원되었는데, 여기에는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도 포함되었다. 3월 21일에닌 미 해병대 1사단이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지대를 넘어 이라크 영토에 들어갔고, 막각한 화력을 바탕으로 이라크 정규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리며 이라크를 장악해나갔다. 개전 3주만인 4월 9일에는 미군이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면서 후세인 정부가 붕괴되버렸다. 대량살상무기라는 핑계를 들어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즉 미국의 주장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라크의 도시와 지역들은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다. 이번에도 미국은 걸프전쟁에서처럼 막강한 공군력을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이라크를 접수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3년 5월 1일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에서 ‘임무 완수’라는 현수막을 걸고 마치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행동했다. 미군이 이라크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세인을 무너뜨린 기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혼란이 생기며 미군을 상대로 하는 게릴라전이 이라크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의 행정적인 대처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또한 이라크에 대해 사전지식이 부족했다. 미국은 당시 체포한 후세인을 2006년에 교수대로 보내 사형시켰지만, 이라크 내에서 일어나는 게릴라전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지속됐다.

(폐허속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미군)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의 이라크 전쟁은 미군과 이에 맞서는 게릴라들의 전투로 양상이 바뀌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면서 표면적인 성과와는 달리 제2의 베트남 전쟁과 같은 양상이 돼버렸다. 미군의 점령하고 있던 이라크의 도시와 지역에서 미군을 상대로하는 폭탄 테러와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2003년 10월 말 이라크 반군의 공세가 고조되기도 했었는데, 당시 미군은 한 달 동안 82명이 사망하고 337명이 부상당했다. 2004년 6월 28일에 미군 등 연합군의 점령이 공식 종료됐지만, 이라크 반군은 저항을 계속했고, 내란 양상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2004년에만 미군 848명이 사망하고 9034명이 부상당했다. 2009년에서 2010년 기준으로 이라크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최소 4500명을 넘겼다. 즉 이 말은 4500명을 넘겼음에도 미국은 이라크 전선에서 고전하며, 사태를 안정시키지 못했다는 증거다.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이는 2004년에 촬영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4조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전쟁 비용과 100억 달러 상당의 전후 복구 비용을 지출했다. 결국 이라크에서 의미없는 전쟁을 치르게 된 미국은 2007년 4월 미 의회에서 상정된 이라크 철군 결의안에 동조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을 포함한 NATO의 일원국들도 철군을 시작했고, 부시 이후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된 버락 오바마는 대선 공약으로 이라크 철군을 국민들에게 주장했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9월 1일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철군을 시작했고, 2011년 12월 15일 미국은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미군의 이라크 철수를 보여주는 시사만화)


2011년 12월 미군 철수 이후 이라크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2013년 이라크 정부군과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니파 세력이 충돌하며 수백명이 사망하는 등 분쟁이 본격화되고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있던 ‘이라크-레바논 이슬람국가(ISIL)’가 이라크 지역 중 일부를 차지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미국 오바마 정부는 2014년 6월 미국 미국민 보호 명목으로 이라크에 다시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8월 미군은 IS에 장악된 이라크 북부를 공습을 감행했다. 미군은 이라크 정부군을 돕기 시작했고, IS에게 빼앗겼던 영토 1/3을 회복함으로써, 2017년 12월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이라크 내에서의 전쟁은 완벽히 끝이 났다. 현재(2020년 1월 기준)까지도 수천 명의 미군이 이라크에 주둔하는 중이다.

(2012년에 시작된 이라크 내전을 보여주는 만화)


2003년 미국이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미국식 민주주의 전파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아주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던 네오콘들의 사상과 오만한 확신이 중동에 어떠한 피바람을 불러왔는지 또는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보여줬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기간 동안 최소 6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사망했다. 2004년에는 미군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했던 것이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라크 출신의 포로 수감자가 분뇨로 몸이 더럽혀지거나 성적 학대를 당하는 모습과 발가벗긴 채 피를 흘리면서 미군에게 맞기도 하고, 군견에게 물리거나 위협당하는 장면이 영상으로 촬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이라크에게 보였던 모습이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었다. 2006년에 행해진 설문 조사를 보면 대다수의 미국인이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이라크 전쟁을 부당한 전쟁으로 생각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