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루스 커밍스의 저작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이 완역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20231월 내가 베트남 하노이에 막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늦은 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데이터를 켰고, 아는 페친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그 친구가 보낸 카톡은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2023년에 완역될 예정이라는 한 국내기사였다.

 

사실 나는 의심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80년대 그 암울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월서각에서 이른바 해적판으로 <한국전쟁의 기원> 1권만 번역했는데, 2권은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워낙 유명한 학자의 저서이고 나와도 절대로 안 팔릴 일이 없는데 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2023년인 올해 완역됐고, 5월에 출판됐다. 일월서각 출판사의 해적판이 1986년에 나왔으니, 이 책의 완역된 것은 첫 번째 시리즈가 나온지 27년이 지나서인 것이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이 책이 빨리 완역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3월 대학원 석사 2학기가 시작될 쯤에도 항상 알라딘을 통해, 이 책의 출판 근황을 수시로 모니터링 했다. 그러던 4월에서 5월 쯤 알라딘에서 후원받는 것을 확인했고, 나는 거리낌 없이 큰 돈을 후원했다. 후원한 이후 5월 말쯤 신간이 내 집에 도착했다. 나는 정말 기뻤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쉬웠다. 왜 이제야 완역된 것일까?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해 7월 나는 국내 통일운동 단체인 AOK를 통해,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됐다. 거기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통일운동 단체서 활동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고, 728(미국 시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커밍스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커밍스 강연에 만족했고, 그를 직접 만나 악수 및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으며, 신간에 저자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친 건 인천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도중 비행기 안에서였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14시간이나 걸리니, 일부러 책을 읽었다. 물론 비행기 특성상 독서를 편하게 하지는 못하니 많이 읽지는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책을 다시 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을 방문해야 했기에 조금 밖에 못 읽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정독해가며 읽게 된 것은 9월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사실 1권이야 해적판을 통해, 몇몇 부분을 수업 발제를 하면서 읽기도 했고, 반공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참고를 여러 번 했지만, 완독을 하고 나니 많은 것들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올해 출간한 버전이 보다 읽기에는 편했고, 더 잘 읽혔다. 책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형성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일제가 패망한 이후 여운형의 건준과 인민위원회 체제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커밍스는 많은 부분을 집중하고 분량을 할애했다.

 

1980년대 시절 해적판으로 나온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를 읽었던 운동권 학생들은 당시 리영희 교수가 말했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했다. 박정희 시절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으며, 정치사회적으로 극도의 억압성을 보였던 한국 사회에서 해방 정국 과정을 반공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며 사실상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북한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과 혐오감 그리고 극단적인 타자화가 일상화된 이 사회의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커밍스를 읽고 경험하게 되는 충격이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커밍스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형성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성이다. 또한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기 위해 일제 식민지 시절의 상황과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토벌과 반토벌의 역사에도 집중했다.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 당시, 일본은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친일파들을 동원하여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고, 당시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은 이에 대항했다. 커밍스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당시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파들이 1945년 이후 미군정과 결탁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봤다. 반면에 이들에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은 1945년 소련의 지원 아래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형성했으며,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커밍스는 해석했다.

 

따라서 쉽게 정리하자면, 1930년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 모인 것이 대한민국 정부였고,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및 독립운동을 한 세력이 모인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라는 것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친일파들의 토벌에 맞서 싸웠던 인물은 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과 그의 혁명 동지들인 김책, 최용건, 강건, 최현 등이었다. 반면에 당시 친일을 했던 백선엽이나 김석원을 포함한 친일 군인들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군 요직을 차지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가 주목한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이었던 것이다.

 

커밍스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결탁했으며, 특히나 대중들의 원망을 산 친일경찰들을 제한없이 채용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미군정은 초기부터 그 당시 민중들이 원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갔으며, 이것이 정치 문제와 심각한 경제문제로 이어지며 민중들이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1946101일에 시작된 대구에서의 민중봉기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치경제적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무자비한 폭력과 진압이었으며, 커밍스는 미군정이 민생을 해결하기 보단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구실로 이런 폭력을 옹호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커밍스는 소련의 북한 점령과 군정 체제에 대해 미군정과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물론 커밍스가 보기에 소련군은 초기 약탈과 아녀자 강간을 자행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비교적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이끄는 단체의 활동을 보장하고, 이들의 국가 건설 사업을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친일 경찰들을 주요 요직과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시켰으며, 인민을 위한 새로운 경찰을 만들기 위해, 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래 한국전쟁의 기원에 나오는 내용을 보자.

 

경찰과 군사 부문의 발전도 1946년 초에 전개된 중앙집권화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일제가 패망할 때 북한의 여러 조직에 있던 지역적 분포는 치안 유지를 맡은 기관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 기관은 치안대(남한과 같다)나 보안대·적위대·민위대 등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근무한 한국인은 외딴 지역에서만 계속 재직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은 쫓겨났다. 새로운 지방경찰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었다. 미국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일반 경찰에 임명됐다”. 각 지방에서 치안 유지를 맡은 단체도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이를테면 함경북도 민위대는 최용건을 비롯해 만주에서 돌아온 인물이 이끌엇으며, 평안남도에서 이른바 적위대는 현준혁·김창일·장시우 등이 지휘했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19)

 

“19464월 말 중앙은 전국적 보안대 조직 내부에 적절한 지휘 계통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 권력은 아래에서 중앙으로 이동했지만, 일부 권력은 여전히 지방에 남아 있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의 경찰력은 모든 15,600명으로 도마다 2,300~2,600명 정도였다(예외적으로 평안북도는 3,900, 강원도는 1,560명이었다). 적절한 인원을 배정한 것은 중앙이지만, 각 도의 실질적인 임명과 배치는 해당 인민위원회가 맡았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경찰과는 정반대로 주민의 호응을 얻고 지방에 뿌리내린 경찰이 나타났다. 비판적 태도를 보인 미국의 공식 자료조차 이런 성취를 인정했다. “새로운 경찰은 (다수가 여성인데) 자기 업무에 경험을 쌓았다. 그들은 대중에 기반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의 존경과 협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중에 한국전쟁 때 체포돼 심문받은 면의 파출소장은 "일제강점기의 경찰의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직하고 박식하며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고문과 강압에 따른 심문은 법률로 금지됐다. 그런 방법은 때로 사용됐지만대부분 상세한 질문과 재교육으로 대체됐다. 이처럼 북한 경찰은 "일제의 폭정 고문에 따른 자백의 상징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21)

 

이와 같은 커밍스의 책의 내용을 근거해서 보았을 때, 분명히 북한은 친일파 청산의 노력을 상당 부분 보였으며, 실제로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악질적인 친일 경찰들을 숙청했다. 그 점에서 커밍스는 북한이 남한 보다 민족적 정통성 측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아마도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했거나, 주로 우익들의 시각에서만 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 부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북한의 경우 친일파를 숙청하는 작업을 거쳤고, 이 점에서 남한 보다 훨씬 철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법적으로 친일 때문에 처벌받은 친일파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 이점에서 북한은 분명히 민족적 양심을 지켰다.

 

사실 북한의 친일파 숙청이나 미군정의 반민중적 친일세력 등용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한국과 북한의 근현대사가 상당히 비교됐던 것 같다. 비록 북한이 현재는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민족적 차원에서 보았을 땐 남한이 훨씬 더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군정 시기 등용된 경찰의 대략 85%가 친일 경찰이었다는 사실과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독립운동가 출신의 인물 최능진이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암울하기까지 하다.

 

1980년대 일월서각 해적판을 읽었던 학생들이 상당부분 NL이 된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근현대사의 진실은 당연히 남한이 북한보다 정통성이 부재한 국가로 보이도록 유도했다. 거기다 전두환 시기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현존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며 연행되는 현실은 충분히 학생들을 급진화할 만한 배경이었다.

 

사실 나는 커밍스의 과감한 역사적 분석이 상당부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재 남북한의 경제격차는 많이 나지만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한 반면 남한의 친일파들은 기업가 혹은 자본가로 탈바꿈했으며, 군과 행정 그리고 정치 요직을 차지했다.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90% 이상이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가 떳떳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아주 정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신냉전의 구도로 대한민국을 끌고 가려는 윤 정권 하에서 이걸 실행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커밍스의 책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커밍스의 대표저작을 한글 완역본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영광이고 기쁨이다. 그러나 몇몇 번역 부분에선 상당 부분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대구 10.1 항쟁에 대해 설명하는데, 봉기를 일으킨 시민에 대해 폭도라고 칭하거나 봉기를 폭동으로 칭해서 부정적인 늬양스를 주는 것은 상당부분 불편했다. 아니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시위군중 혹은 봉기라 번역한 해적판이 더 적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선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굳이 한국인이라고 다 써야하는 지 의문이 들었다. 식민지 시기나 해방 정국 시기에는 그냥 조선인이라고 표현하면 되고, 소련군정기 북한의 경우 북한인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이 점에서 몇몇 표현들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정말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이 책을 읽으려는 이가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적극 권할 것이다. 조만간 2-12-2권을 꼭 읽을 예정이다. 2권에 대한 서평은 다음에 작성하도록 하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종백제인 2023-09-17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때 펴낸 그 책은 오자 띄어쓰기 탈자 투성이로 기억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지자체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내용과 수준이 빌려 볼 단계가 아니어서 전자 책으로 샀습니다.

NamGiKim 2023-09-17 21:49   좋아요 0 | URL
완독할만힐 가치가 높은 책이죠.
 

현재 우리나라를 정치지형만 놓고 보면, 민주당은 전라도 국민의힘(이라 쓰고 국민의짐 혹은 국민의암이라 읽는다.)은 경상도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특히나 대구 경북 지역은 국민의힘 후보인 윤석열이 압도적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이 진보는 전라도 보수는 경상도로 등식화 된 계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절 야당 후보인 김대중과의 대립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구는 과거에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도시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력과 착취에 맞서, 민중들이 봉기하기도 했었다. 대구 10.1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천인공노할 민간인 학살이 벌어져 무수히 많은 보도연맹원이 산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집단학살 해놓고서,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을 보면, 대구를 포함한 경북지역은 현재와는 달리, 야당 성향도 제법 강했다. 1956년에 치러진 선거를 보면, 비록 민주당의 신익희가 열차에서 급사하기는 했지만, 진보당 소속이던 조봉암이 이승만과의 선거대결에서 210만 표를 득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선거에서 경상도 일부 지역은 조봉암이 승리를 거두었다. 대구와 경주 그리고 진주에서 진보당 후보인 조봉암이 많은 득표율을 얻었고, 이는 이승만보다도 높은 득표율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득표율은 부정선거였기에, 정당한 득표율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봉암의 득표율이 이승만 보다 높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선거가 끝난 이후 조봉암은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 당이 바로 진보당이다. 당시 조봉암이 주장한 것은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봉암은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개회사에서 “자본주의 세계도 날로 수정되어 사회민주주의적인 전법을 쓰고 있고, 공산주의 세계도 날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수렴론을 펴면서 사회민주주의 사회로 가자고 호소했다. 즉, 진보당의 강령은 195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기반을 두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진보당원의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도 프랑크푸르트선언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국가는 그러한 가치 마져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회였다. 진보당은 각 지역에서 도당 결성대회를 가졌는데, 유지광과 같은 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렸다. 심지어 전남도당 결성대회 때는 괴한들이 권총과 단도를 가지고 단원들에게 테러를 하는가 하면, 당시 야당 쪽에 있는 인사들도 이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진보당의 평화통일에 대해 문제 삼았던 것이 바로 당시의 민주당이었다.


결국 진보당은 1958년 1월 12일부터 정부에 의해 검거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 당시 검사였던 조인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 남침구호로 단정했으며, 신문들은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거나 간첩과 접선했다는 식의 가짜뉴스들을 보도했다. 1958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사례를 들자면, 조봉암 관련 기사 제목이 바로, “조봉암씨 김일성과 모종내통”이다. 기사 내용의 핵심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공산당이 부르짖는 노선 및 방법과 똑같은 것을 문구상 합리화시켜 놓은 것”이었다.


1958년 6월 검사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중형을 구형했으며, 7월 2일 유병진 판사는 불법 무기 소지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양명산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한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소위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괴한 300명이 법원에 난입하여,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하라”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또한 이승만의 정당인 자유당은 산하 단체들로 하여금 친공판사규탄대책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사법부를 위협했다. 


1심 판결 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2심 재판은 결국 김용진이라는 인물이 맡았다. 그는 1심과는 반대로 양명산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는데도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주심은 김갑수였다. 이 판결이 있기 전 홍 법무장관은 국무회의에서 김갑수 대법관 등은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가 우리와 같고, 정부로서 그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왔고, 본인으로서도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국무회의 기록에 쓰여 있다. 1959년 2월에 있은 대법원 판결에서는 결과적으로 조봉암은 사형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당시 미국도 이 사건을 주시했다. 다울링 주한미대사는 이기붕을 만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미국한테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현실정치가였지만, 민족을 냉전보다 위에 놓고 냉전을 타넘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역풍의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조봉암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식 파시스트 독재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거나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 남쪽에 만들어진 멸균실 수준의 반공사회였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말대로 조봉암은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의 희생물이었다.


사실 이승만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원 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 처형당했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였던 백범 김구도 암살됐으며, 그 이전에는 여운형 또한 이승만의 지지자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1950년대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선거 도중 병사했고, 현직 부통령 장면도 이승만의 수하들이 총을 쏴서 죽을 뻔했다. 결국 조봉암 또한 그런 사례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반공과 안보를 내세워 조봉암을 죽음으로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몰고 간 이들의 출신성분이다.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몰고 간  관료, 청지인, 검사, 판사 중에는 과거 일제 때 친일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누대를 두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조봉암의 죽음을 큰 틀에서 보자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봉암의 죽음은 결국 이승만과 일본 제국주의 협력자 무리배들이 독립운동가를 죽인 천인공노할 범죄인 것이다.


참고문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김삼웅, 『죽산 조봉암 평전』, 시대의창, 201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3-07-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 시기 민주항쟁 탄압으로 이어졌다가, 21세기에는 MB, 윤석렬, 국짐당 등 現 수구세력들의 민주인사 박해 및 노동운동 탄압, 통일운동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쟁 중의 한 가지를 뽑자면, 아마도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는 빠질 수 없는 논쟁일 것이다. 사실 이승만 시대부터 이어온 반공주의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은 저 북한 괴뢰집단이 일으킨 침략전쟁이고, 전쟁을 일으킨 북괴의 수장 김일성은 민족반역자다.”는 생각을 국민들에게 주입해왔다. 그러던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이른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해지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다시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저작은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일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을 통해, 단순히 북한의 침략이라는 미국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 전쟁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분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그 기원을 추적했으며, 그 결과 만주에서의 독립군 대 친일파라는 간단명료하면서도 복잡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80년대 당시 커밍스의 저작에 영향을 받았던 박명림과 같은 학자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커밍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으며, 그 결과 커밍스의 연구 중 몇몇 부분들이 반박당했다. 박명림의 경우,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러시아측 기밀문서에 집중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전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구체적인 근거를 통해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연구결과가 학계의 연구성과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장을 입증한 셈이 됐다. 즉, 그 연구를 바탕으로 현재까지도 남한의 주류학계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북한과 김일성의 침략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옛 소련 문서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공개됐고, 또 어떠한 정치 편향성을 가졌는지를 학계와 사회가 크게 집중하지 못한 것 같다. 


우선 소련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문서들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과정과 옐친의 연방 해체라는 시대사적인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고르바초프든 옐친이든 이들은 근본적으로 소련 사회의 업적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이 1930년대 단행한 대숙청에 대해 공격했고, 옐친은 더 나아가 소련을 건국한 레닌 그 자체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됐고, 기밀해제 되었던 자료들이 공개됐다. 


사실 소련에서 기밀해제한 자료들을 통해, 스탈린 시기 진행된 대숙청의 진상이 공개되어 아치 게티(Arch Getty)가 쓴 『대숙청의 기원(The Origin of the Great Purges)』과 같은 훌륭한 연구저작도 나왔지만, 한국전쟁의 경우 도리어 미국의 주류적 시각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수정주의 연구가 미국 학계의 주류적 견해는 아니며, 여전히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반공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냉전의 종결이 한국사회에서 진행된 현대사 관련 연구를 한쪽 측면으로만 이끈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당시 학자들은 1950~1987년 동안 언급하기만 해도 곧바로 감옥에 끌려갔던 역사 당연히 불법이었던 그 역사를 발굴하고 있었으며, 민주화 정부를 거치며 진실화해조사위원회와 같은 단체가 만들어저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진행했다. 


그 결과, 이제 1945~1946년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던 좌익 인민위원회, 1946년 가을 남한 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각종 봉기들, 1948년 제주도와 지리산의 항쟁과 그리고 여수-순천 항쟁, 남한 보안대와 우익 비정규 학살단이 자행한 수십만 명의 무고한 남녀와 아이들의 학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 논문, 문서, 구술사, 기타 자료들이 무수히 많이 나왔다. 심지어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서 운영했던 일본군 위안부의 후신인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가 1990년대 김귀옥(현재 한성대 교수)이라는 연구자를 통해 실증적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김동춘(현재 성공회대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 또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과 훗날 국가폭력의 연관성에 집중한 연구성과가 나왔으며, 김태우라는 연구자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의 참혹한 실태를 연구한 성과도 나왔다.


앞에서 언급한 이런 훌륭한 연구들이 나왔음에도, 한국 사회와 학계가 주장하는 한국전쟁 시작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미국의 공식적인 견해를 따라가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시하기 힘든 사회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1990년대 냉전의 해체라는 분위기에서 한국은 성공 북한은 실패라는 등식화된 논리가 한국전쟁의 시작점에 대한 논쟁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잠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훌륭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전쟁 발발에 대해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거치며 공개된 소련의 기밀 자료들은 심하게 제한되고 정치적으로 선별되어 해제된 문서들이었다. 즉, 정치적으로 옐친의 입맛에 맞는 자료들이 주로 공개된 셈이다. 그래서 사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주 공정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자료를 통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김일성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다.”라고 말한다면 반박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에 걸맞은 충실한 사료가 아직 발견된 것도 아니라는 말밖에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편향성에 대해선 얼마든지 공격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 가지 사건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한반도에 나타난 분단이라는 현상은 당연하게도 미국의 책임이 막중했으며, 당시 해방된 조선 민중을 무시하며 친일 경찰을 대거 등용한 대에서 문제가 생긴 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고, 그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주 4.3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민간인 학살을 통해, 최소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러시아 기밀문서만 고집해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설명한다면,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점은 논쟁에서 사라지며, 그 결과 역사적 맥락생략이라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농후해진다. 즉,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견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는 시각이며, 브루스 커밍스 교수 또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얘기했다.


또한 현재까지 러시아에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러시아 기밀문서에 어떠한 내용이 있을지도 유심히 봐야한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당장 미국에 있는 NARA 국립문서보관소만 하더라도 새로운 사료발굴을 통해, 기존의 주장을 뒤집어엎는 내용이 나오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극구 부정하던 세균전의 경우 2010년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미국이 당시 세균전을 명령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미국이 주장했던 공식적인 견해와 상반된 입장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관련한 것도 새로운 사료발굴이 러시아 기밀문서나 미국 문서를 통해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옐친 시대에 발굴된 기밀문서를 통해 한국전쟁 자체를 김일성의 침략으로만 보려는 시도는 시대적인 한계도 있고, 그러한 한계성을 극복해야한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갈 길이 멀다. 커밍스 선생께서 말한대로,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아직도 일반인들과 사회에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무수히 많은 문서 속에서 그러한 사실관계를 밝혀내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내며, 발전해 나가야 하는 태도가 바로 사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필요하며,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반공주의적 인식 극복도 그중 하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2년 마지막 해에 올리는 글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195010월 중국이 이 전쟁에 참전한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으로 후퇴했고, 195114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줬다. 중공군 참전 전후로 이승만 정부는 한국군 병력을 보충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른바 국민총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령이 내려짐에 따라 전국적으로 남한에 있는 청년들은 영장을 받지 않았음에도 닥치는대로 소집 장소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소집명령은 당연히 강제적인 방법이 동원됐다.


1950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세에서 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병력이 대략 5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많게는 68만 명이 소집되었다고 한다. 그중 42만 명 이상이 서울과 경기, 강원, 인천에서 소집됐고, 소집된 장정들은 국민방위군 장교들이 200~300명씩 중대 단위로 편성해 도보로 교육대가 있는 경상도로 인솔했다고 한다. 막대한 예산이 편성되었으나, 1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이나 군복 하나 안주고 소집 장소만 하달했을 정도로 방위군에 대한 정부의 대우는 최악이었다. 12월 특성상 겨울이었는데, 이런 혹한기에 장정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말이다.


예산횡령이 횡행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서북청년단 출신이자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인 김윤근이라는 사람을 준장 계급에 임명했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전투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다.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고, 신성모의 비리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김윤군은 방위군을 유지하기 위해 받은 비용을 뒤에서 챙겼고, 기생집에 가서 원하는 만큼 돈을 쏟아부으며 사용했다. 김윤근을 포함한 4명이 착복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 양곡 52천 섬에 달했다. 국회조사단이 진상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책정된 예산 209억 원 중 실제 집행한 액수는 130억뿐이었고, 740만 명 정도의 유령병력을 조직하여 235천만 원의 현금과 52천여 섬의 식량을 부정유출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1인당 1일 양곡 4, 취사연료비 40, 잡비로 10원을 책정해서, 3개월 예산으로 209830만 원이 배정됐는데, 그중 최소 1/10 이상을 김윤근을 포함한 4명이 착복한 셈이었다. 거기다 실제로 집행한 액수가 130억도 안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지만, 이들이 잡은 군인에 대한 대우가 가장 처참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들이 책정한 1인당 1일 양곡 4홉은 하루 55작을 지급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한 대우였다. 그리고 모집된 국민방위군의 숫자를 생각해보자면, 어떤 부정이 없었다 해도 1인당 실제 집행액이 원래 계산만큼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심지어 난방비와 피복비는 아예 책정조차 하지 않았고, 엿공장은 생산 능력 대비 소비됐다면서 쌀 양이 계획안보다 6배가 넘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엄청난 뒷돈을 상층부가 챙긴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250대를 구입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20대밖에 구입하지 않았다. 명태는 386만짝을 구입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구입한 양은 4,000짝뿐이었다. , 국민방위군의 예산은 상층부가 뒷돈을 챙기기 위한 수법으로 진행됐다. 위에서 언급한 현금 횡령뿐만 있던 게 아니다. 현금 횡령이 235,000만 원이었다면, 양곡횡령이 202,710만 원이었고, 예하 공금 횡령이 288,328만 원이었다. 728,000만 원이나 횡령한 셈이다. 근데 이마저도 김윤근을 포함한 수뇌부만 해 먹은 것으로 공식적으로 드러난 액수일 뿐, 얼마나 횡령을 많이 했는지는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최소 100일 동안 자국 군인이 대량으로 아사 및 동사 그리고 병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소문으로는 최소 5만 명에서 10만 명가량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는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50만 명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추산했다. 심지어 뉴라이트 출신으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찬양하는 정치학자 유영익마저도 이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선, “9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노무현 정권 당시 활동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른 추산은 대략 5만 명에서 8만 명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그 한국전쟁 당시 국회조사에 따르면, 사망자 상당수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었고, 100일 동안 각종 질병, 동상, 아사, 도주 등 이유로 전체의 40%에 달하는 27만여 명이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한 셈이다. 보통의 경우 7만 명에서 12만 명 사이로 보는데, 이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아무튼, 자국 정부의 방산비리로 최소 1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아사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이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생했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사망자가 14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인데, 그것보다 조금 적은 숫자가 방산비리로 아사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김윤근을 포함한 지도부 4명은 결국 사형해 처했고, 국민방위군은 해산됐다. 하지만 1심 재판에서 연루자 16명 중 실형 4, 파면 10, 무죄 2명으로 판결이 났다. 특히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가 선고됐는데, 국민은 판결 소식이 들리자 극도로 분노했다. 특히 부통령 이시영이 이 사건에 대해 분노를 표하면서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통령인 이승만마져도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국방장관 신성모를 경질했으며,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앉혔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으로는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했으며, 여론을 의식하여 김윤근을 포함한 지도부 4명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왜 한국군의 대우가 역사적으로 안 좋았는지다. 그러나 열악한 군인 대우의 시작은 결과적으로 군인에 대해 아무런 배려의식이 존재하지 않던 이승만에서 시작한다. 이승만 정부가 군인에 대해 제대로 된 대우를 안해줬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이 자의적으로 대중을 죽이고 패가며 만든 이승만 정부에게 있는 셈이고, 또 그 점에서 이승만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꼬마요정 2022-12-31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천인공노할 사건입니다. 평화로운 때도 아니고 전쟁 중에 방산비리라니... 썩을 놈들 욕이 다 아깝네요. 올려주시는 글들 읽으면서 새삼 공부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올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GiKim 2022-12-31 23:46   좋아요 1 | URL
제 PBS 베트남 전쟁 그 긴 리뷰를 열심히 읽고 계시니 참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꼬마요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4.3, 미국에 묻다
허호준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843일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대의 봉화가 타올랐다. 43일에 시작된 봉화는 19549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며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843일에 시작된 봉기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진압됐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동반됐다. 4.3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인구의 1/1030,000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산이다. 현재 북한에서도 30,000명 이상으로 추산하며,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도 대략 3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진상조사로 확인된 사망자만 하더라도 최소 10,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숫자보다 더 높은 사망자 추산도 존재한다. 1949년 당시 제주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사망자가 6만 명이라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2016년 제주4.3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추정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추산을 종합해보자면, 제주 4.3사건으로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60,000~80,000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1/5에서 1/4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제주도 인구의 4명 중 1명이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있었던 무차별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다.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제주 4.3사건은 명명백백하게 국가가 국민에게 무차별 적으로 행한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 호로위츠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은 국가기구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로위츠가 규정한 정의를 고려해서 보자면, 제주 4.3사건 당시 발생한 무수히 많은 죽음들은 명명백백히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전두환 정권 당시가 학창시절인 이들은 단체관람 했던 영화 중 킬링필드(Killing Field)라는 헐리우드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를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면, 캄보디아인 주인공 디스 프란은 크메르 루주가 세운 강제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 사람들의 시신과 해골로 이루어진 곳을 목격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이 영화를 국민들에게 단체 관람하도록 한 목적은 반공주의를 합리화하기 수단이었고, 실제로 이런 영화를 통해, 북한에 대한 대북적대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절 똘이장군이나 헐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를 보며, 반공주의적 의식을 길렀지만, 정작 우리 현대사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하지 못했다. 우리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인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였으며, 피해자들은 반공이라는 어두운 그늘 아래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제주 4.3사건이 국민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87년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이며 수많은 진상조사와 활동들을 통해 현재는 적잖은 국민들이 인식하는 비극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자리까지 올랐다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 제주도를 방문했고, 첫날에 제주 4.3 박물관을 가족이랑 함께 들렸다. 당시 제주 4.3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지만, 학살의 과정과 잔혹성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경악했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피해자들 중에는 도저히 남로당 게릴라라고 판단될 수 없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있었다. 도저히, 남로당측의 봉기군이라 판단할 수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 4.3의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학살을 주도한 세력은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경무부장인 조병옥 그리고 미군정과 우익들이 파견한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 대원들이었고, 이들이 바로 제주도 대학살을 주도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파견된 경찰과 우익 청년단 그리고 군대는 말 그대로 제주도라는 섬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자행했고, 학살의 피해자는 순전히 제주 민간인들이었다. 심지어 학살 피해자의 80~90%는 이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에는 또 다른 책임자가 존재했다.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the United States)이었다.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대학살에는 소위 미국이라는 존재가 아주 깊숙이 개입해있었다. 허호준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 관련한 영상물에서는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 연락기, 미군 함정이 내뿜는 해안의 검은 연기, 낯선 이방인이 산야를 누비며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 그 옆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두려운 눈빛의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미국이라는 존재가 제주 4.3사건에 얼마나 깊이 개입했는지 알 수 있는 방증일 것이다.

 

19484월 말에서 5월 초 진압군을 지휘한 김익렬과 유격대를 지휘한 김달삼 사이에서 잠시나마 휴전 및 총성을 멈추기 위한 평화협상이 있었다. 물론, 글쓴이는 이 협상이 지켜질 것이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일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선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노력을 단번에 산산조각을 내버린 존재가 바로 하지가 이끄는 미군정이었다. 하지 사령관이 제주도에 보낸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 뿐이다.”라는 태도로 토벌작전에 임했다. 양측의 협상이 깨진 것도 바로 브라운 소령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제주 4.3을 대하는 미군정과 미국의 태도는 항상 일정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뿌리 뽑아야하고, 제주 4.3은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와 테러를 막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창조해낸 냉전이라는 이분법적인 반공주의 사고방식이 결국 제주도를 양민의 시체와 피로 뒤덮인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미국의 이런 반공주의 정책은 제주도 사태를 강경진압을 추진한 이승만이나 우익세력들과 항상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공주의 국가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미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 바로 제주 4.3사건이었다.

 

미국은 제주 4.3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대사관 등이 본국에 보낸 각종 정보와 보고서를 통해, 제주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제주도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트루먼을 포함한 미국 지도부들에게 있어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인권이 유린되든 말든 무조건 죽여 마땅한 존재였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은 이 사건에 개입하여 진압하는 데에도 아주 열정적이었다. 미국은 제주도에 파견된 경찰과 군대에게 물자와 장비를 지원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던 극우 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키는 것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군대 안에도 장교 출신의 미군고문단들이 적잖게 배치됐고, 실제로 이들은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며,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사살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투입된 미군들과 그 미군들을 지휘하는 미군정 및 주한미군사령부 등은 진압군의 무자비한 학살과 진압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강경진압을 막는 그 어떠한 행동에도 착수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학살을 군사작전 상에서 적극 지원하고 도왔다. 그들에게 있어 진압군이 죽이고 체포하는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일 뿐이며, 이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파괴하려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트루먼식 반공의 논리는 공산주의자 민간인은 대량으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미군들에게 심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48년 당시 미군정이 제주 4.3사건을 어떻게 대응했는지, 책에 있는 내용을 보자.

 

“5.10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제주도 사태는 미군정 수뇌부의 직접 개입뿐 아니라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딘과 워드의 제주도 동시 방문과 군정 수뇌부의 제주도 현지회의 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전면적인 유격전(full-scale guerrilla warfare)’으로 보고 진압을 강화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63

 

아래는 진압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미군정 주도 하에서 전개된 토벌작전의 절정은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의 제주도 파견이다.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는 고문관은 물론 제주도 주둔 경비대와 경찰의 작전을 지휘통솔하는 명실상부한 제주도 총사령관이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80

 

2003년에 나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발언도 나온다. 아래 인용된 책의 내용을 보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35

 

위의 세 가지 인용문만 보더라도 제주 4.3사건에서의 학살에 미군정과 미군 그리고 미국 정부가 크나큰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이러한 개입은 1949년에도 지속됐고, 195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국은 제주 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데에도 열정적이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여수와 순천에서, 진보적 성향의 군인들이 이승만 정부의 무차별 폭력과 제주 4.3학살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켰는데,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진압에 아주 열정적이었다. 여순사건은 군사고문단이 채택한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시험무대였는데, 한국군이라는 파트너에게 적절히 충고와 자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 미국은 이 여순사건에 아주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은 진압작전을 수행중인 송요찬의 부대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살극을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작전은 중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이 모택동의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사용한 작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통령 이승만이 19481117일 이른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음에도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학살극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반공국가의 수장으로 치켜세웠고,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진압작전을 수행한 군인들에게 훈장 및 상을 줬다.

 

제주 4.3사건 당시 악랄하기 짝이 없는 서북청년단을 비호한 것도 바로 미국이었다. 사실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을 경찰과 군인에 편입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노력을 보인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이들의 작전으로 적의 사살자 숫자와 무기의 숫자가 불균형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토벌을 고무 및 장려했다. 심지어 미군들은 수차례에 걸친 제주도 정찰비행을 통해, 유격대의 집결지와 사령부 그리고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속속히 알려줌으로써, 학살극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왔다. 아래에 있는 책 인용문을 보자.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을 합리화했을 뿐 아니라 조장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22

 

이처럼 미국은 제주 4.3사건에 깊이 개입했고, 학살과 진압작전을 도왔으며, 군사적인 측면에서 진압군을 적극 지원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제주 4.3학살은 미국의 학살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러한 학살을 지휘하고 돕고 지원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허호준의 4.3, 미국에 묻다COVID-19가 한참이던 2021년 초에 출간됐다. 따라서, 기존에 제주 4.3사건 관련 자료에서 찾지 못했던 미국의 개입 관련 최신 자료들도 제법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역할을 제대로 규명하고,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사태의 본질을 추론했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를 직접적으로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몇몇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책의 저자인 허호준은 김익렬과 김달삼 간 평화협상과 그 이후 사태 전개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시 내용, 미 국무부와 군부의 제주도 사건 관련 지시 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사료가 더 발굴되야한다고 역설한다. , 이 말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선 앞으로도 발굴되고 연구되어야할 자료와 사건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지만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온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주 4.3사건 전후로 미국 및 서방권 언론들이, 자신들의 경쟁자인 소련 및 사회주의권을 악마화하기 위해, 근거 없이 퍼뜨렸던 가짜뉴스들이다. 당시 미국과 서방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보도된 내용만 따진다면, 제주 4.3사건은 소련이나 북한에 의해 조작되어 만들어진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기사들은 제대로 된 근거를 밝히지 못했으며, 당연히 가짜뉴스였다. 아니 오히려 제주 4.3사건 관련해서는 소련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1950년 당시 소련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군 고문관들의 명령에 의해 남한 정부가 35,000여 명의 주민들을 죽이고 1만여 채의 집을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거기다,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이 제주도에서 했던 정책들을 보면, 미국이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시킬만한 일들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6년부터는 제주도에다가 과거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경찰들을 임명했고, 19473.1사건에서 시민 6명 이상을 죽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극우성향의 인사들을 임명함으로써,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했다. 더 나아가, 경제 문제에서도 민생을 파탄에 빠뜨리는 정책을 추진했고, 가뜩이나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던 제주도민들의 생활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연히 민생은 제주 4.3을 거치면서 더 악화됐다. 19504월 기준으로 대략 10만 명이나 되는 제주도민들이 심각한 기아에 빠져 풀을 뜯어먹고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제주도 정책이 얼마나 반민중적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다.

 

저자 허호준은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한 박사학위논문을 쓴 인물이다. 그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이 개입했던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과거에는 그리스 내전 그리고 미래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리스 내전 당시에도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그리스 민간인들이 좌파 게릴라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대량 강제이주, 노조파괴, 체포, 구금, 네이팜탄 투하가 동원된 폭격 그리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제주 4.3사건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가족을 살해한 데 대해 미군들은 그들은 게릴라의 친척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트콩에 동조적이었으며, 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분이 아니다라는 태도로 전투에 임했다. 이것은 초기 미군사고문단 개입시절에 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과 남베트남의 평정작전 이론은 농민들을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양민학살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2022년이 끝나가고, 2023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학기에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바빴다. 그래서 예전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화 및 다큐멘터리 감상도 그러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시간을 내어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읽은 것은 여러모로 많은 지적 호기심을 제공하고,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반공주의가 사회 전체를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이 자행한 폭력과 학살에 대해 이렇게 용기 있는 책을 써준 점에 대해 저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끝까지 완독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