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전 - 혁명 그 이후 1917-1921
앤터니 비버 지음, 이혜진 옮김 / 눌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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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적백내전 관련 통사가 한국에 번역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전투 위주의 서술도 분명 군사적 측면의 분석은 분명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친서구적인 시각이 많다. 뭐 첫 술에는 배가 부를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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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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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도서관에 들리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지난 토요일인 315일 집 근처 도서관에 들렸다. 사실 지난번에 읽다 만 책을 빌리려 했는데, 필자 눈에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 한권이 발견됐다. 그 책은 바로 뉴스타파에서 출간한 책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이었다. 이 책은 지난 2021년 뉴스타파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든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시리즈 중 첫 번째인 초토화 폭격을 책으로 집필한 것이다.

 

해당 도서는 2023727,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에 맞추어 출간됐다. 2022년에 탄생한 윤석열 정권은 202412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내란을 하기 전까지 북한에 대한 호전적인 적대감을 보여왔다. 내란수괴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이 북한을 자극하여 최소 국지전 수준의 전쟁 도발을 하려 했다는 내막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평양에 무인기가 침투한 것도 사실상 주체가 한국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비상계엄 선포 전후로 한국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에 북한군이 있다는 가짜뉴스들을 마구잡이로 살포했다. 우크라이나가 퍼뜨린 가짜뉴스들 중에는 너무나도 수준이 낮은 조작들이 판을 쳤고, 이런 거짓들을 필자는 속속이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이 북한군 가짜뉴스가 만들어진 내막에는 윤석열 정권이 우크라이나에 파병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윤석열 정권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전쟁을 부르짖었다. 윤석열은 한반도를 전례없는 전쟁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 과정에서 남북관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전쟁위기는 전적으로 윤석열 정권과 미국 바이든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때도 없는 한미 군사훈련과 더불어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감 등은 윤석열 정권의 본질이었다. 심지어 윤석열 정권에 복무하는 이들은 친일 성향도 가져서. 일제의 식민 지배가 한국을 산업화 시켰다.”라는 망언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기까지 했다.

 

, 윤석열 정권의 대미·대일 종속 외교와 친미·친일 사상의 근원에는 바로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윤석열 정권이 북한을 적대하고, 미국과 일본을 편중편애하는 것은 바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있기에 가능하다. 12.3 비상계엄도 바로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했다. 이는 윤석열 정권이 반국가 세력종북세력 척결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반공주의의 내재된 문제점을 보여줬다. 필자는 윤석열의 이런 지점들을 총괄하는 문제점이 바로 반북·반공주의라고 생각한다.

 

다소 서론이 길었다. 필자는 3년 동안 윤석열 정권을 지켜보면서 항상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윤석열은 과연 한국 역사를 공부해본 적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이다.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윤석열의 역사지식 수준이 과연 어느정도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그가 공개석상에서 보인 모습은 뉴라이트들의 수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윤석열은 뭐만하면 자유를 외치면서,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보였고 한국전쟁에서의 대한민국과 미국을 미화했다. 그의 발언에선 전쟁의 비극이나 참혹함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윤석열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모른다고 믿고 있다. 윤석열의 반공주의적 생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같은 냉전 시기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만큼이나 참혹하고 추악하며 잔혹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런 참극이 미국에 의해 벌어졌다.

 

잠시 얘기를 베트남 전쟁으로 돌려보자. 베트남 전쟁 당시 찍은 사진들 중에는 전쟁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 사진들 중에는 AP통신의 기자 닉 우트(Nick Ut)가 찍은 사진인 네이팜 소녀(Napalm Girl)’가 미국 및 서구사회에 잘 알려진 사진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을 무차별적으로 베트남에 투하했다.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민간인들이 매우 많았다. 사실 베트남 전쟁이 미국 내에 반전여론을 불러일으킨 것에는 미국 정부의 거짓선전(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거짓말.)도 있었지만, 네이팜 폭격과 같은 미군의 전쟁범죄 행위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는 제대로 된 통계가 없다. 다만 전쟁을 일으킨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에 따르면,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에 근거해서 보자면, 미국이 학살한 베트남인이 300만 명 이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의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 학살은 이미 벌어진 역사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에서 이런 학살극이 벌어졌다. 수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대한민국을 북한의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해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보면 이야기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보다 더 참혹한 수준으로 한반도를 폭격했다. 한반도 이남과 이북에는 베트남에 비해 산업시설이 더 많았고, 따라서 미군의 폭격으로 더 많은 산업 시설들이 파괴됐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인명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에 대해, 한반도는 달의 표면으로 변했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사실이다. 말 그대로 미국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폭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앞서 언급한 네이팜탄이 한반도 전역에 투하됐다. 미국 CIA 보고서에 따르면 미 공군은 한국전쟁 당시 총 32,357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11갤런(416리터)짜리 대형 네이팜탄 기준으로 한국전쟁 31개월 동안 매일 69발가량을 투하한 셈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네이팜탄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실전에 사용되어 총 14,000톤이 투하됐다. 그러나 2배가 넘는 양의 네이팜탄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투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말 그대로 한반도나 일본 비행장에서 B-29 폭격기가 발진하여 폭격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폭격기 호위용으로 전투기들이 투입됐다. 그 외에는 미군 항공모함에서 폭탄을 탑재한 전투기들이 발진하여 목표물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갈기는 방식이었다. 앞서 언급한 네이팜탄 32,357톤은 사실 미 해군과 해병 항공기가 투하한 투하량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추산해보자면, 32,357톤보다 더 많은 네이팜탄이 한반도에 투하되었다고 보면 된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정부의 선전과 동원으로 700만 명 이상의 관객 돌파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했던 시기 월미도 주민들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함포사격 및 폭격 장면에서 월미도를 마치 인민군 기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은 군사적 표적이 없는 민가를 무차별 폭격했다. 그 결과 최소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고, 유족들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미군의 악명높은 민간인 학살 사건인 노근리 학살 또한 학살의 시작은 피난민에 대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격이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땅은 불과 70~75년 전 미군 폭격으로 불바다가 됐다. 서울만 하더라도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까지 최소 4,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희생됐고, 그 중 2,700명은 용산에서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은 사실 미군 폭격의 결과물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모르면서 한국인들은 일상생활을 살아가고 있고,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나면서 더더욱 우리 기억 속에서 비극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전쟁 당시 미군의 북한 폭격은 말 그대로 지도에서 그 나라를 지워버리는 수준이었다. 미군이 상공에서 촬영한 북한의 도시들은 마치 달에 있는 크레이터들을 보는 느낌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의 수도 평양에는 멀쩡한 건물이 2~3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한은 미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과거 대한민국 군대 및 교내에서 존재하던 가학적 체벌인 원산폭격도 사실 전쟁 당시 미군이 자행한 원산폭격을 빗대어 만들어진 체벌이었다. 미군은 원산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여 말 그대로 초토화했다. 원산의 도시 파괴율은 80%75%인 평양보다 더 높았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죽었는지는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 북한 인구의 20%가 미군 폭격으로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을 지휘한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사령관은 전쟁 3년 동안 우리는 그 나라 인구의 20%를 살해했다.”라고 증언했고,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명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라고 증언했다.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현재 북한이 가진 반미주의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이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에 맞아가며 죽는 모습을 본 북한 사람들이 이후 미국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과 복수심을 느낀 것은 앞서 언급한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할 것이다. 자신들 눈앞에 폭격으로 인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북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남북한 모두 초토화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문제는 그 당시 미 공군의 전략전술을 보면,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군은 실험삼아 마을을 네이팜탄으로 초토화했고, 흰옷을 입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공산주의자라며 기총소사의 타깃으로 보았다. 말 그대로 한국인들은 미국에게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고 봐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의 종군기자인 매러이 티보르는 북한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군사적 표적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종종 기관총 세례를 받았는데, 그 조종사들은 표적에 발포하기를 즐겼다.”라고 말을 했다. 이는 그 당시 미군 전투기가 한반도에 사는 민간인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이면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당 서적은 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다루고 있다. 주로 사진자료들을 많이 첨부했다. 사실상 사진으로 보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스타파는 해당 다큐멘터리 및 책을 쓰기 위해, 미국에 있는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자료를 수집했다. 책에 나온 사진들 중에는 필자가 예전에 보았던 사진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진들도 상당히 많았다. 책 마지막 장면에 1953727일자 항공기 사진에는 휴전협정 당일도 미군은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1953727, 5공군 335전투요격비행대대 소속 파(PARR) 대위가 조종하는 세이버 제트전투기가 작전 중 촬영한 영상이다. 아래는 같이 출격한 B-26의 폭격 장면이다.(296.)”라고 나온다. 이렇게 보자면 북한은 개전초기부터 정전협정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까지 총 31개월간 미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미국이 북한을 얼마나 미친 듯이 폭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에는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추악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내란수괴인 윤석열은 이런 사실을 절대 얘기하지 않고 있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 절대다수가 이런 역사를 하나도 모른다. 비극의 서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필자는 뉴스타파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또 이걸 책으로 출판한 것에 대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이면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 보인 헌신과 노력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은 미국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전쟁, 자유를 수호한 전쟁으로 미화되어 왔다. , 뉴스타파는 그런 신화를 걷어차고, 폭력적이고 비극적이며 참혹한 한국전쟁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뉴스타파의 진실을 탐구하는 정신을 높게 평가한다. 사실 한국전쟁 폭격을 다룬 서적들을 여러 책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사진자료를 활발히 활용했고,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최신의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사료가치가 높다. 또한, 사진자료가 책의 전반을 포함하고 있기에 너무나도 술술 읽힌다.

 

한국전쟁의 또 다른 진실과 이면을 알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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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 보림 창작 그림책
서진선 글.그림 / 보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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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을 읽으며

올해 1월 한베평화재단에서 가는 평화기행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기행에서 나는 같은 운동조직에서 활동하는 동지와도 함께 갔다. 5박 6일간 갔고,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기행에서 상당히 친해진 선생님이 계셨다. 이 책의 주인공 서진선 선생이다. 사실 기행 첫째날부터 버스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 분도 뒷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고 너무나 다정해서 더 가까워졌던 것 같다. 여행 막바지에 한베평화재단 활동가인 짜노와 서진선 선생과의 대화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서 선생은 1980년 5.18 당시 고3으로 광주에 있었고, 비극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분이었던 거다. 그리고 작가로서 아이용 그림책을 썼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다. 얘기를 듣고나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도서관에 들렸다가 이 책을 어린이도서관에서 펼쳤다. 책은 아이의 시각으로 5.18을 설명한다. 책에는 5.18 당시 저자가 겪은 경험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아이가 기다리는 누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 비록 아이에게 계엄군의 물리적 폭력이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광주시민의 아픔이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5.18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은 하나하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저 계엄군에 맞서 저항했다. 중고등학생도 계엄군에 맞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저항했다. 시민군을 위해 거리의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헌혈을 했다. 이는 영화 ‘택시운전사‘에도 잘 묘사됐다. 심지어 성노동자도 시민들과 시민군을 살리기 위해 헌혈을 하며 참여했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에서 2개월간 일어났던 일이 1980년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리영희 선생이 표현한 것과 같이 말이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은 M-16 소총을 조준한 다음 군인을 환영하러 나온 초등학생에게 까지 발포했다. 군인이 자국 민간인을 평시에 이렇게 학살했다.

나는 광주를 절대 잊을 수 없다. 5월이 되면 항상 광주에 내려가려 한다. 광주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을때, 유혈없이 계엄이 해체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광주의 추억 덕분이다.

광주라는 역사적 경험이 우리를 살렸다. 우리모두 광주에게 빚이 있다. 그래서 5.18 역사왜곡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지난 2024년 5월 광주에 내려갔다가, 광주에서 5.18을 북한군의 개입이라 선동하는 극우를 봤다.

나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이 그 사람 입밖으로 나왔다.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5.18 광주는 44년 후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듣고 겪은 이야기를 그림 형태로 풀어낸 그림책이다. 그림과 사진이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임팩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도 이 책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잘 읽혀 5.18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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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은 친일 문제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설립된 이래로 한반도 이남에선 역으로 친일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특히나 하지가 이끌던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했는데, 당시 경찰의 최소 85%가 친일경찰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친일파 청산을 향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 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미군정장관이던 윌리엄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됐다.

 

194885일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국회에 설치되었는데, 정부 수립 공포 다음날인 8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안이 상정되었고, 91일에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이른바 반민법은 친일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가 살포됐다. , 여기서부터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반공의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친일파들의 거센 방해 속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발족됐다. 위원장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이, 특별재판부는 독립운동을 변호했던 김병로, 특별검찰부에는 권승렬이 임명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반민특위는 박흥식·이종형·최린·최남선·이광수·김연수 등을 구속했으며,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한 노덕술과 하판락 등도 체포됐다. 놀랍게도 이승만은 이와 같은 반민특위 활동에 분노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끼던 수도경찰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고문왕으로 불리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그는 신간회, 광주학생항일운동,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해방 이후 월남한 그는 장택상의 눈에 띄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을 숙청했으며,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노덕술은 본인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할 것 같자,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국회 내 반민법 관련 핵심 인물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노덕술의 암살 리스트에는 극우인사인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이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백민태라는 인물이 검찰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간부들을 불러 항의했으며, 2월에는 반민특위 내의 특별경찰대(특경대) 폐지를 요구하는 강경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이승만이 펼친 논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민특위 와해는 1949517일 노일환과 함께 소장파 리더 격이었던 이문원 등 세 의원이 구속되면서 일어난 연쇄사건 속에서 발생했다. 이들을 석방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정부 당국의 방조를 받으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531일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세 의원 석방동의안에 가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은 88명의 의원이 아니었다. 바로 반민특위 그 자체였다. , 여기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한 이다.


 

이들은 63일 반민특위로 쳐들아가서,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반민특위 측은 이들을 체포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잇단 시위의 배후에 친일경찰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있음을 파악한 다음 최운하를 포함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66일 중부경찰서장이 경찰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무기와 서류 등을 빼앗고 직원들을 연행해 고문했다. 당시 이 습격을 주도한 이가 바로 내무차관이던 장경근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온 장경근 또한 일제시기 친일을 한 사람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된 인물이다.

 

다음 날인 67일 대통령 이승만은 한 발 더 나아가 AP통신 기자와의 단독회견에서 자신이 특경대 해산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의 요구에 따라 국회가 공소시효를 2년에서 1949831일로 단축하면서 종결됐다. 특히나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국회프락치 사건과 안두희의 김구 암살을 겪으며 친일파 청산은 정말 물거품이 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검거활동을 시작했는데,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이었다. 이 중에 체포가 305, 미체포 193, 자수 61, 영장취소 30, 검찰송치 559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한 내의 친일파 청산 노력은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그 결과 남한에서 처벌한 친일파의 숫자는 말 그대로 0명이 됐다. 그렇게 해서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 행정, 군사, 기술, 학계 및 여러 분야에서 암약할 수 있었고, 부를 더 축적하여 재벌 및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남한 정부가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최소 90% 이상이 일제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 미국 CIA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과 그의 정권은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닌 남한 사람 거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수에게 평판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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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되어 있지만, 이승만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응징한 전명운, 장인환을 변호하는 것을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인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아마 2018년 12월이나 2019년 1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페북으로 연락하던 한 페친과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페친과 만난 나는 같이 집회에 참여했으며,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한국 현대사 관련 얘기를 나눴다. 이때, 나무위키의 친미 극우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페친이 소위 한국 건군의 아버지로 알려진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X들이다!”라고 말한 것을 나무위키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사진, 하우스만은 이후 1990년대 KBS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을 읽게 되면서였다. 김득중의 논문에는 “미군고문단이 여순항쟁에 군사작전상으로 개입한 사실”이 상세히 나와 있었고, 거기서 다시 한번 제임스 하우스만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게 됐다. 글쓴이는 지난번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완독하면서, 미군사고문단이 4.3에 어떻게 개입하여 학살에 관여했는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오늘은 한국 현대사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참전했고, 1944년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로 알려진 벌지 전투(Battle of Bulge)에도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1년 후인 1946년에 한국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하우스만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 및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당시 이남의 군병력과 경찰의 지휘체계는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출신 그리고 친일경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으며, 그 이유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자를 덜 적대했다.”는 데에 있었다. 하우스만에게 있어서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할 만큼 제임스 하우스만을 신뢰했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개입이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여순항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과 더불어 여순에서 토벌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주체가 미국이었음을 지금까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우스만 사망을 보도한 국내 기사, 마치 한국의 군사전문가로만 소개가 됐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가 진압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봉기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동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이 보낸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이 현재까지 발견된 시신만 3,384명이지만, 실제 사망자는 12,000명이라는 추산치가 있을 정도다. 김득중에 따르면, 여순항쟁 당시 미국은 정규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신 고문단이 들어갔고, 이들은 사실상 진압군의 지휘관이자, 한국군 장교들과 장성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모든 한국군 부대에 미국인 고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사는 진압작전의 주요 고문으로 임명된 할리 풀러 대령과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 미군 정보부 G-2의 존 리드 대위였다. 여순항쟁 당시 미군은 C-47 수송기를 동원해 한국군 병력과 무기 및 기타 장비를 실어 날랐고,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이 이어지는 기간 내내 그 지역을 감시했으며, 미국 정보기관들은 미군과 경무부의 정보과에 긴밀히 협력했다. 김득중에 따르면, 당시 하우스만은 토벌대 총사령관인 송호성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여순에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이후 KB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문관의 역할을 했다”고 했으며, 하우스만은 여순항쟁 진압을 위한 작전계획을 백선엽과 협의하여 수립했다. 즉, 여순항쟁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나온 것은 제임스 하우스만이 세운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우스만에 대해 강연을 했던 역사강사 배기성)


실제로 제임스 하우스만은 1949년 1월 10일 미 국방부로부터 미 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바로 아래의 4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 보충역 대위에게 이런 훈장이 주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따라 김득중의 경우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1948년 11월 20일, 총 99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이 결의안을 주도한 최윤동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군은 여수순천 반란과 대구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만약 미군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전멸당했을 것이다.”

(여순항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고문단과 한국군)


이런 점에 근거하여 보자면, 여순항쟁에 개입하여 총사령관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하우스만은 학살의 방조자이자 진정한 수행자였다. 또한, 이 사건에서 남로당이었던 박정희를 살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창룡을 신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창룡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며, 전쟁 이전 군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 사냥을 자행했다. 2014년에 작성된 제주 언론사 『제주의 소리』 기사에 따르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 폭파에도 책임이 있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이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강다리를 폭파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우스만은 이후에도 46년간이나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우스만은 제주 4.3 항쟁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던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하우스만은 3.15 부정선거 이후 반이승만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사령관으로서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지지 철회를 통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우스만이 민주주의적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절대 볼 수 없다. 그 증거는 아래 하우스만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룬다는 환상이란 없었다. 초보자들에게는 너그러운 독재자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제주 4.3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좌익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그 시체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발사한 인물이 제임스 하우스만이었다. 이후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한 인물이 하우스만이었으며, 제주도 시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하우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 이 책은 여순항쟁을 분석한 책으로 당시 미군의 개입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순에서의 민간인 학살 또한 사실은 미국이 자행한 학살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을 보면 하우스만은 ‘너그러운 독재자’라 표현했다. 그러나 하우스만이 지원한 한국의 독재자들은 너그러운 독재자가 전혀 아니었으며, 가난한 빈민들을 챙기는 독재자 또한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분배와 빈민 해결보단 성장과 재벌 계급의 부의 축적을 우선시했다. 따라서 하우스만이 얘기한 너그러운 독재자들은 실제로 보자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박정희 또한 5.16을 하기 전 군부 내 쿠데타 기도를 파악한 하우스만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전했고, 하우스만은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결과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81년이다. 지난 2023년 말 국내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품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개입이다. ‘서울의 봄’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아쉽게도 미국의 개입은 전혀 조명하지 못했다. 글쓴이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굴곡에 있던 하우스만의 입김이 12.12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은 앞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어야할 한국 현대사 주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김관후,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제주의 소리, 2014.12.26.,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322>.


https://ko.wikipedia.org/wiki/제임스_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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