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은 친일 문제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설립된 이래로 한반도 이남에선 역으로 친일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특히나 하지가 이끌던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했는데, 당시 경찰의 최소 85%가 친일경찰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친일파 청산을 향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 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미군정장관이던 윌리엄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됐다.

 

194885일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국회에 설치되었는데, 정부 수립 공포 다음날인 8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안이 상정되었고, 91일에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이른바 반민법은 친일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가 살포됐다. , 여기서부터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반공의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친일파들의 거센 방해 속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발족됐다. 위원장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이, 특별재판부는 독립운동을 변호했던 김병로, 특별검찰부에는 권승렬이 임명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반민특위는 박흥식·이종형·최린·최남선·이광수·김연수 등을 구속했으며,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한 노덕술과 하판락 등도 체포됐다. 놀랍게도 이승만은 이와 같은 반민특위 활동에 분노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끼던 수도경찰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고문왕으로 불리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그는 신간회, 광주학생항일운동,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해방 이후 월남한 그는 장택상의 눈에 띄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을 숙청했으며,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노덕술은 본인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할 것 같자,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국회 내 반민법 관련 핵심 인물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노덕술의 암살 리스트에는 극우인사인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이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백민태라는 인물이 검찰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간부들을 불러 항의했으며, 2월에는 반민특위 내의 특별경찰대(특경대) 폐지를 요구하는 강경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이승만이 펼친 논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민특위 와해는 1949517일 노일환과 함께 소장파 리더 격이었던 이문원 등 세 의원이 구속되면서 일어난 연쇄사건 속에서 발생했다. 이들을 석방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정부 당국의 방조를 받으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531일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세 의원 석방동의안에 가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은 88명의 의원이 아니었다. 바로 반민특위 그 자체였다. , 여기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한 이다.


 

이들은 63일 반민특위로 쳐들아가서,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반민특위 측은 이들을 체포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잇단 시위의 배후에 친일경찰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있음을 파악한 다음 최운하를 포함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66일 중부경찰서장이 경찰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무기와 서류 등을 빼앗고 직원들을 연행해 고문했다. 당시 이 습격을 주도한 이가 바로 내무차관이던 장경근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온 장경근 또한 일제시기 친일을 한 사람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된 인물이다.

 

다음 날인 67일 대통령 이승만은 한 발 더 나아가 AP통신 기자와의 단독회견에서 자신이 특경대 해산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의 요구에 따라 국회가 공소시효를 2년에서 1949831일로 단축하면서 종결됐다. 특히나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국회프락치 사건과 안두희의 김구 암살을 겪으며 친일파 청산은 정말 물거품이 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검거활동을 시작했는데,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이었다. 이 중에 체포가 305, 미체포 193, 자수 61, 영장취소 30, 검찰송치 559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한 내의 친일파 청산 노력은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그 결과 남한에서 처벌한 친일파의 숫자는 말 그대로 0명이 됐다. 그렇게 해서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 행정, 군사, 기술, 학계 및 여러 분야에서 암약할 수 있었고, 부를 더 축적하여 재벌 및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남한 정부가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최소 90% 이상이 일제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 미국 CIA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과 그의 정권은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닌 남한 사람 거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수에게 평판이 나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4-03-1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되어 있지만, 이승만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응징한 전명운, 장인환을 변호하는 것을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인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아마 2018년 12월이나 2019년 1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페북으로 연락하던 한 페친과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페친과 만난 나는 같이 집회에 참여했으며,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한국 현대사 관련 얘기를 나눴다. 이때, 나무위키의 친미 극우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페친이 소위 한국 건군의 아버지로 알려진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X들이다!”라고 말한 것을 나무위키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사진, 하우스만은 이후 1990년대 KBS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을 읽게 되면서였다. 김득중의 논문에는 “미군고문단이 여순항쟁에 군사작전상으로 개입한 사실”이 상세히 나와 있었고, 거기서 다시 한번 제임스 하우스만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게 됐다. 글쓴이는 지난번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완독하면서, 미군사고문단이 4.3에 어떻게 개입하여 학살에 관여했는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오늘은 한국 현대사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참전했고, 1944년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로 알려진 벌지 전투(Battle of Bulge)에도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1년 후인 1946년에 한국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하우스만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 및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당시 이남의 군병력과 경찰의 지휘체계는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출신 그리고 친일경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으며, 그 이유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자를 덜 적대했다.”는 데에 있었다. 하우스만에게 있어서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할 만큼 제임스 하우스만을 신뢰했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개입이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여순항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과 더불어 여순에서 토벌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주체가 미국이었음을 지금까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우스만 사망을 보도한 국내 기사, 마치 한국의 군사전문가로만 소개가 됐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가 진압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봉기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동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이 보낸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이 현재까지 발견된 시신만 3,384명이지만, 실제 사망자는 12,000명이라는 추산치가 있을 정도다. 김득중에 따르면, 여순항쟁 당시 미국은 정규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신 고문단이 들어갔고, 이들은 사실상 진압군의 지휘관이자, 한국군 장교들과 장성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모든 한국군 부대에 미국인 고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사는 진압작전의 주요 고문으로 임명된 할리 풀러 대령과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 미군 정보부 G-2의 존 리드 대위였다. 여순항쟁 당시 미군은 C-47 수송기를 동원해 한국군 병력과 무기 및 기타 장비를 실어 날랐고,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이 이어지는 기간 내내 그 지역을 감시했으며, 미국 정보기관들은 미군과 경무부의 정보과에 긴밀히 협력했다. 김득중에 따르면, 당시 하우스만은 토벌대 총사령관인 송호성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여순에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이후 KB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문관의 역할을 했다”고 했으며, 하우스만은 여순항쟁 진압을 위한 작전계획을 백선엽과 협의하여 수립했다. 즉, 여순항쟁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나온 것은 제임스 하우스만이 세운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우스만에 대해 강연을 했던 역사강사 배기성)


실제로 제임스 하우스만은 1949년 1월 10일 미 국방부로부터 미 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바로 아래의 4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 보충역 대위에게 이런 훈장이 주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따라 김득중의 경우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1948년 11월 20일, 총 99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이 결의안을 주도한 최윤동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군은 여수순천 반란과 대구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만약 미군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전멸당했을 것이다.”

(여순항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고문단과 한국군)


이런 점에 근거하여 보자면, 여순항쟁에 개입하여 총사령관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하우스만은 학살의 방조자이자 진정한 수행자였다. 또한, 이 사건에서 남로당이었던 박정희를 살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창룡을 신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창룡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며, 전쟁 이전 군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 사냥을 자행했다. 2014년에 작성된 제주 언론사 『제주의 소리』 기사에 따르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 폭파에도 책임이 있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이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강다리를 폭파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우스만은 이후에도 46년간이나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우스만은 제주 4.3 항쟁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던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하우스만은 3.15 부정선거 이후 반이승만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사령관으로서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지지 철회를 통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우스만이 민주주의적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절대 볼 수 없다. 그 증거는 아래 하우스만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룬다는 환상이란 없었다. 초보자들에게는 너그러운 독재자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제주 4.3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좌익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그 시체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발사한 인물이 제임스 하우스만이었다. 이후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한 인물이 하우스만이었으며, 제주도 시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하우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 이 책은 여순항쟁을 분석한 책으로 당시 미군의 개입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순에서의 민간인 학살 또한 사실은 미국이 자행한 학살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을 보면 하우스만은 ‘너그러운 독재자’라 표현했다. 그러나 하우스만이 지원한 한국의 독재자들은 너그러운 독재자가 전혀 아니었으며, 가난한 빈민들을 챙기는 독재자 또한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분배와 빈민 해결보단 성장과 재벌 계급의 부의 축적을 우선시했다. 따라서 하우스만이 얘기한 너그러운 독재자들은 실제로 보자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박정희 또한 5.16을 하기 전 군부 내 쿠데타 기도를 파악한 하우스만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전했고, 하우스만은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결과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81년이다. 지난 2023년 말 국내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품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개입이다. ‘서울의 봄’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아쉽게도 미국의 개입은 전혀 조명하지 못했다. 글쓴이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굴곡에 있던 하우스만의 입김이 12.12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은 앞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어야할 한국 현대사 주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김관후,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제주의 소리, 2014.12.26.,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322>.


https://ko.wikipedia.org/wiki/제임스_하우스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루스 커밍스의 저작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이 완역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20231월 내가 베트남 하노이에 막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늦은 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데이터를 켰고, 아는 페친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그 친구가 보낸 카톡은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2023년에 완역될 예정이라는 한 국내기사였다.

 

사실 나는 의심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80년대 그 암울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월서각에서 이른바 해적판으로 <한국전쟁의 기원> 1권만 번역했는데, 2권은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워낙 유명한 학자의 저서이고 나와도 절대로 안 팔릴 일이 없는데 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2023년인 올해 완역됐고, 5월에 출판됐다. 일월서각 출판사의 해적판이 1986년에 나왔으니, 이 책의 완역된 것은 첫 번째 시리즈가 나온지 27년이 지나서인 것이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이 책이 빨리 완역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3월 대학원 석사 2학기가 시작될 쯤에도 항상 알라딘을 통해, 이 책의 출판 근황을 수시로 모니터링 했다. 그러던 4월에서 5월 쯤 알라딘에서 후원받는 것을 확인했고, 나는 거리낌 없이 큰 돈을 후원했다. 후원한 이후 5월 말쯤 신간이 내 집에 도착했다. 나는 정말 기뻤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쉬웠다. 왜 이제야 완역된 것일까?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해 7월 나는 국내 통일운동 단체인 AOK를 통해,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됐다. 거기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통일운동 단체서 활동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고, 728(미국 시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커밍스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커밍스 강연에 만족했고, 그를 직접 만나 악수 및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으며, 신간에 저자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친 건 인천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도중 비행기 안에서였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14시간이나 걸리니, 일부러 책을 읽었다. 물론 비행기 특성상 독서를 편하게 하지는 못하니 많이 읽지는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책을 다시 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을 방문해야 했기에 조금 밖에 못 읽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정독해가며 읽게 된 것은 9월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사실 1권이야 해적판을 통해, 몇몇 부분을 수업 발제를 하면서 읽기도 했고, 반공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참고를 여러 번 했지만, 완독을 하고 나니 많은 것들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올해 출간한 버전이 보다 읽기에는 편했고, 더 잘 읽혔다. 책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형성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일제가 패망한 이후 여운형의 건준과 인민위원회 체제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커밍스는 많은 부분을 집중하고 분량을 할애했다.

 

1980년대 시절 해적판으로 나온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를 읽었던 운동권 학생들은 당시 리영희 교수가 말했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했다. 박정희 시절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으며, 정치사회적으로 극도의 억압성을 보였던 한국 사회에서 해방 정국 과정을 반공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며 사실상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북한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과 혐오감 그리고 극단적인 타자화가 일상화된 이 사회의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커밍스를 읽고 경험하게 되는 충격이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커밍스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형성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성이다. 또한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기 위해 일제 식민지 시절의 상황과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토벌과 반토벌의 역사에도 집중했다.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 당시, 일본은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친일파들을 동원하여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고, 당시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은 이에 대항했다. 커밍스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당시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파들이 1945년 이후 미군정과 결탁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봤다. 반면에 이들에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은 1945년 소련의 지원 아래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형성했으며,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커밍스는 해석했다.

 

따라서 쉽게 정리하자면, 1930년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 모인 것이 대한민국 정부였고,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및 독립운동을 한 세력이 모인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라는 것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친일파들의 토벌에 맞서 싸웠던 인물은 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과 그의 혁명 동지들인 김책, 최용건, 강건, 최현 등이었다. 반면에 당시 친일을 했던 백선엽이나 김석원을 포함한 친일 군인들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군 요직을 차지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가 주목한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이었던 것이다.

 

커밍스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결탁했으며, 특히나 대중들의 원망을 산 친일경찰들을 제한없이 채용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미군정은 초기부터 그 당시 민중들이 원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갔으며, 이것이 정치 문제와 심각한 경제문제로 이어지며 민중들이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1946101일에 시작된 대구에서의 민중봉기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치경제적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무자비한 폭력과 진압이었으며, 커밍스는 미군정이 민생을 해결하기 보단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구실로 이런 폭력을 옹호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커밍스는 소련의 북한 점령과 군정 체제에 대해 미군정과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물론 커밍스가 보기에 소련군은 초기 약탈과 아녀자 강간을 자행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비교적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이끄는 단체의 활동을 보장하고, 이들의 국가 건설 사업을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친일 경찰들을 주요 요직과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시켰으며, 인민을 위한 새로운 경찰을 만들기 위해, 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래 한국전쟁의 기원에 나오는 내용을 보자.

 

경찰과 군사 부문의 발전도 1946년 초에 전개된 중앙집권화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일제가 패망할 때 북한의 여러 조직에 있던 지역적 분포는 치안 유지를 맡은 기관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 기관은 치안대(남한과 같다)나 보안대·적위대·민위대 등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근무한 한국인은 외딴 지역에서만 계속 재직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은 쫓겨났다. 새로운 지방경찰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었다. 미국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일반 경찰에 임명됐다”. 각 지방에서 치안 유지를 맡은 단체도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이를테면 함경북도 민위대는 최용건을 비롯해 만주에서 돌아온 인물이 이끌엇으며, 평안남도에서 이른바 적위대는 현준혁·김창일·장시우 등이 지휘했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19)

 

“19464월 말 중앙은 전국적 보안대 조직 내부에 적절한 지휘 계통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 권력은 아래에서 중앙으로 이동했지만, 일부 권력은 여전히 지방에 남아 있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의 경찰력은 모든 15,600명으로 도마다 2,300~2,600명 정도였다(예외적으로 평안북도는 3,900, 강원도는 1,560명이었다). 적절한 인원을 배정한 것은 중앙이지만, 각 도의 실질적인 임명과 배치는 해당 인민위원회가 맡았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경찰과는 정반대로 주민의 호응을 얻고 지방에 뿌리내린 경찰이 나타났다. 비판적 태도를 보인 미국의 공식 자료조차 이런 성취를 인정했다. “새로운 경찰은 (다수가 여성인데) 자기 업무에 경험을 쌓았다. 그들은 대중에 기반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의 존경과 협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중에 한국전쟁 때 체포돼 심문받은 면의 파출소장은 "일제강점기의 경찰의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직하고 박식하며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고문과 강압에 따른 심문은 법률로 금지됐다. 그런 방법은 때로 사용됐지만대부분 상세한 질문과 재교육으로 대체됐다. 이처럼 북한 경찰은 "일제의 폭정 고문에 따른 자백의 상징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21)

 

이와 같은 커밍스의 책의 내용을 근거해서 보았을 때, 분명히 북한은 친일파 청산의 노력을 상당 부분 보였으며, 실제로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악질적인 친일 경찰들을 숙청했다. 그 점에서 커밍스는 북한이 남한 보다 민족적 정통성 측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아마도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했거나, 주로 우익들의 시각에서만 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 부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북한의 경우 친일파를 숙청하는 작업을 거쳤고, 이 점에서 남한 보다 훨씬 철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법적으로 친일 때문에 처벌받은 친일파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 이점에서 북한은 분명히 민족적 양심을 지켰다.

 

사실 북한의 친일파 숙청이나 미군정의 반민중적 친일세력 등용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한국과 북한의 근현대사가 상당히 비교됐던 것 같다. 비록 북한이 현재는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민족적 차원에서 보았을 땐 남한이 훨씬 더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군정 시기 등용된 경찰의 대략 85%가 친일 경찰이었다는 사실과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독립운동가 출신의 인물 최능진이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암울하기까지 하다.

 

1980년대 일월서각 해적판을 읽었던 학생들이 상당부분 NL이 된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근현대사의 진실은 당연히 남한이 북한보다 정통성이 부재한 국가로 보이도록 유도했다. 거기다 전두환 시기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현존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며 연행되는 현실은 충분히 학생들을 급진화할 만한 배경이었다.

 

사실 나는 커밍스의 과감한 역사적 분석이 상당부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재 남북한의 경제격차는 많이 나지만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한 반면 남한의 친일파들은 기업가 혹은 자본가로 탈바꿈했으며, 군과 행정 그리고 정치 요직을 차지했다.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90% 이상이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가 떳떳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아주 정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신냉전의 구도로 대한민국을 끌고 가려는 윤 정권 하에서 이걸 실행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커밍스의 책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커밍스의 대표저작을 한글 완역본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영광이고 기쁨이다. 그러나 몇몇 번역 부분에선 상당 부분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대구 10.1 항쟁에 대해 설명하는데, 봉기를 일으킨 시민에 대해 폭도라고 칭하거나 봉기를 폭동으로 칭해서 부정적인 늬양스를 주는 것은 상당부분 불편했다. 아니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시위군중 혹은 봉기라 번역한 해적판이 더 적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선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굳이 한국인이라고 다 써야하는 지 의문이 들었다. 식민지 시기나 해방 정국 시기에는 그냥 조선인이라고 표현하면 되고, 소련군정기 북한의 경우 북한인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이 점에서 몇몇 표현들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정말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이 책을 읽으려는 이가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적극 권할 것이다. 조만간 2-12-2권을 꼭 읽을 예정이다. 2권에 대한 서평은 다음에 작성하도록 하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종백제인 2023-09-17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때 펴낸 그 책은 오자 띄어쓰기 탈자 투성이로 기억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지자체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내용과 수준이 빌려 볼 단계가 아니어서 전자 책으로 샀습니다.

NamGiKim 2023-09-17 21:49   좋아요 0 | URL
완독할만힐 가치가 높은 책이죠.

공동체주의자 2023-11-14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포함해서 다른 글들도 잘 읽고 갑니다. 추천 글과 서평을 쓰신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소장하며 읽고 싶어져서 바로 두 권 구매했네요. 곧 나머지 한 권도 구입하려고 합니다.

이 책이 198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인데 이제야 완역된 것이다 보니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최신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지 못한 점도 고려해야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어째서 6.25전쟁을 연구하는 후속 연구자들이 브루스 커밍스의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반드시 인정하고 넘어가는지 대충만 읽어봐도 저절로 수긍이 갑니다.

1990년대 중반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를 반영한 박명림 교수님이나 정병준 교수님의 저서도 함께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6.25전쟁의 ‘발발‘에 있어서는 몰라도 그 ‘기원‘에 있어서는 미국의 비밀문서 등 사료에 밀착해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을 최대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조망하면서 어째서 해방의 기쁨이 전쟁의 비극으로 흘러갔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커밍스가 이 책을 쓸 당시 6.25전쟁의 ‘발발‘과 관련해서는 북침설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일축했으면서도 남침이 아닌 남침유도설에 더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커밍스의 주장의 핵심이 남침유도설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것 역시나 당사자 입장에서 억울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네요. 커밍스의 주장은 6.25전쟁의 ‘발발‘ 그 자체보다 ‘기원‘에 집중하자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말이지요. ‘누가 먼저 총을 쐈느냐‘도 중요하게 다룰 수 있지만, 그보다도 ‘어쩌다가 이제 막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끼리 갈라져 총을 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느냐‘를 중요하게 다루겠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6.25전쟁 연구에 있어서 갖는 의미는 여전히 크고,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무려 ‘현대의 고전‘이라고 칭하며 완역본을 출간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저 역시나 생각합니다.

좋은 책을 추천해주시고 서평도 써주셔서 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소개 받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글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서재에 올라온 글들의 내용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입장이 다르기는 합니다.

제가 기존의 질서,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틀 안에서의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해 나가는 것에 지지를 보낸다면,

선생님께서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급진적인 변혁을 갈망하는 편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에 기대를 건다면,

선생님께서는 사회주의를 통해서 평등한 세상을 실현할 날을 꿈꾸고 계십니다.

제가 아무리 신냉전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중국, 러시아와 완전히 척을 지지는 않기를 바라고, 유라시아 대륙과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상대로 외교 지평을 넓히기를 바라지만, 그러면서도 한미동맹을 고려하여 미국, 유럽연합, 호주, 캐나다, 일본 등 서방 진영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노선에 가깝다면,

선생님께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의 어두운 면을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제3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높이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제가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보수주의자라면,

선생님께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개성,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 혹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전통 도덕철학인 유학/유교, 그마저도 아니면 매킨타이어나 샌델 류의 공동체주의 철학에 상당히 우호적이라면,

선생님께서는 과연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시는 분답게 무신론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사를 기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주의자라는 점에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한, 그 남북통일이 급진적 비평화통일(무력통일)이나 급진적 평화통일(급격한 흡수통일)이 아닌 점진적 평화통일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세대에서 대한민국 공식 통일 방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남북연합 단계나 경협 심화를 통한 경제통합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많이 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직접 통일운동에 참여하며 행동하고 계신 듯하니 존경스럽습니다.

비록 ‘보수적‘ 민족주의자와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입장 차이는 분명 적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계승하고 남북통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자‘에게 그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뉴라이트만 아니면 환영한다고 하시니 책 추천 글과 서평 덕분에 명작을 구해 읽게 되어 고마운 마음을 전함과 동시에 주저리주저리 길게 적어봅니다.

NamGiKim 2023-11-14 16:04   좋아요 1 | URL
오 정말 긴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저는 이렇게 건설적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댓글을 좋아합니다. 졸문인데, 이리도 좋은 평 및 좋은 의견을 댓글로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또한 이 책을 사서 읽고자 하신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좋은 독서가 되길 기대합니다. 저 또한 역시 공동체주의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정치지형만 놓고 보면, 민주당은 전라도 국민의힘(이라 쓰고 국민의짐 혹은 국민의암이라 읽는다.)은 경상도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특히나 대구 경북 지역은 국민의힘 후보인 윤석열이 압도적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이 진보는 전라도 보수는 경상도로 등식화 된 계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절 야당 후보인 김대중과의 대립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구는 과거에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도시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력과 착취에 맞서, 민중들이 봉기하기도 했었다. 대구 10.1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천인공노할 민간인 학살이 벌어져 무수히 많은 보도연맹원이 산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집단학살 해놓고서,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을 보면, 대구를 포함한 경북지역은 현재와는 달리, 야당 성향도 제법 강했다. 1956년에 치러진 선거를 보면, 비록 민주당의 신익희가 열차에서 급사하기는 했지만, 진보당 소속이던 조봉암이 이승만과의 선거대결에서 210만 표를 득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선거에서 경상도 일부 지역은 조봉암이 승리를 거두었다. 대구와 경주 그리고 진주에서 진보당 후보인 조봉암이 많은 득표율을 얻었고, 이는 이승만보다도 높은 득표율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득표율은 부정선거였기에, 정당한 득표율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봉암의 득표율이 이승만 보다 높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선거가 끝난 이후 조봉암은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 당이 바로 진보당이다. 당시 조봉암이 주장한 것은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봉암은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개회사에서 “자본주의 세계도 날로 수정되어 사회민주주의적인 전법을 쓰고 있고, 공산주의 세계도 날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수렴론을 펴면서 사회민주주의 사회로 가자고 호소했다. 즉, 진보당의 강령은 195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기반을 두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진보당원의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도 프랑크푸르트선언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국가는 그러한 가치 마져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회였다. 진보당은 각 지역에서 도당 결성대회를 가졌는데, 유지광과 같은 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렸다. 심지어 전남도당 결성대회 때는 괴한들이 권총과 단도를 가지고 단원들에게 테러를 하는가 하면, 당시 야당 쪽에 있는 인사들도 이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진보당의 평화통일에 대해 문제 삼았던 것이 바로 당시의 민주당이었다.


결국 진보당은 1958년 1월 12일부터 정부에 의해 검거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 당시 검사였던 조인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 남침구호로 단정했으며, 신문들은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거나 간첩과 접선했다는 식의 가짜뉴스들을 보도했다. 1958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사례를 들자면, 조봉암 관련 기사 제목이 바로, “조봉암씨 김일성과 모종내통”이다. 기사 내용의 핵심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공산당이 부르짖는 노선 및 방법과 똑같은 것을 문구상 합리화시켜 놓은 것”이었다.


1958년 6월 검사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중형을 구형했으며, 7월 2일 유병진 판사는 불법 무기 소지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양명산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한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소위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괴한 300명이 법원에 난입하여,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하라”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또한 이승만의 정당인 자유당은 산하 단체들로 하여금 친공판사규탄대책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사법부를 위협했다. 


1심 판결 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2심 재판은 결국 김용진이라는 인물이 맡았다. 그는 1심과는 반대로 양명산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는데도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주심은 김갑수였다. 이 판결이 있기 전 홍 법무장관은 국무회의에서 김갑수 대법관 등은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가 우리와 같고, 정부로서 그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왔고, 본인으로서도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국무회의 기록에 쓰여 있다. 1959년 2월에 있은 대법원 판결에서는 결과적으로 조봉암은 사형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당시 미국도 이 사건을 주시했다. 다울링 주한미대사는 이기붕을 만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미국한테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현실정치가였지만, 민족을 냉전보다 위에 놓고 냉전을 타넘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역풍의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조봉암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식 파시스트 독재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거나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 남쪽에 만들어진 멸균실 수준의 반공사회였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말대로 조봉암은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의 희생물이었다.


사실 이승만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원 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 처형당했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였던 백범 김구도 암살됐으며, 그 이전에는 여운형 또한 이승만의 지지자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1950년대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선거 도중 병사했고, 현직 부통령 장면도 이승만의 수하들이 총을 쏴서 죽을 뻔했다. 결국 조봉암 또한 그런 사례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반공과 안보를 내세워 조봉암을 죽음으로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몰고 간 이들의 출신성분이다.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몰고 간  관료, 청지인, 검사, 판사 중에는 과거 일제 때 친일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누대를 두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조봉암의 죽음을 큰 틀에서 보자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봉암의 죽음은 결국 이승만과 일본 제국주의 협력자 무리배들이 독립운동가를 죽인 천인공노할 범죄인 것이다.


참고문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김삼웅, 『죽산 조봉암 평전』, 시대의창, 201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3-07-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 시기 민주항쟁 탄압으로 이어졌다가, 21세기에는 MB, 윤석렬, 국짐당 등 現 수구세력들의 민주인사 박해 및 노동운동 탄압, 통일운동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쟁 중의 한 가지를 뽑자면, 아마도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는 빠질 수 없는 논쟁일 것이다. 사실 이승만 시대부터 이어온 반공주의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은 저 북한 괴뢰집단이 일으킨 침략전쟁이고, 전쟁을 일으킨 북괴의 수장 김일성은 민족반역자다.”는 생각을 국민들에게 주입해왔다. 그러던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이른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해지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다시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저작은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일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을 통해, 단순히 북한의 침략이라는 미국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 전쟁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분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그 기원을 추적했으며, 그 결과 만주에서의 독립군 대 친일파라는 간단명료하면서도 복잡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80년대 당시 커밍스의 저작에 영향을 받았던 박명림과 같은 학자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커밍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으며, 그 결과 커밍스의 연구 중 몇몇 부분들이 반박당했다. 박명림의 경우,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러시아측 기밀문서에 집중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전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구체적인 근거를 통해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연구결과가 학계의 연구성과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장을 입증한 셈이 됐다. 즉, 그 연구를 바탕으로 현재까지도 남한의 주류학계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북한과 김일성의 침략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옛 소련 문서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공개됐고, 또 어떠한 정치 편향성을 가졌는지를 학계와 사회가 크게 집중하지 못한 것 같다. 


우선 소련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문서들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과정과 옐친의 연방 해체라는 시대사적인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고르바초프든 옐친이든 이들은 근본적으로 소련 사회의 업적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이 1930년대 단행한 대숙청에 대해 공격했고, 옐친은 더 나아가 소련을 건국한 레닌 그 자체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됐고, 기밀해제 되었던 자료들이 공개됐다. 


사실 소련에서 기밀해제한 자료들을 통해, 스탈린 시기 진행된 대숙청의 진상이 공개되어 아치 게티(Arch Getty)가 쓴 『대숙청의 기원(The Origin of the Great Purges)』과 같은 훌륭한 연구저작도 나왔지만, 한국전쟁의 경우 도리어 미국의 주류적 시각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수정주의 연구가 미국 학계의 주류적 견해는 아니며, 여전히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반공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냉전의 종결이 한국사회에서 진행된 현대사 관련 연구를 한쪽 측면으로만 이끈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당시 학자들은 1950~1987년 동안 언급하기만 해도 곧바로 감옥에 끌려갔던 역사 당연히 불법이었던 그 역사를 발굴하고 있었으며, 민주화 정부를 거치며 진실화해조사위원회와 같은 단체가 만들어저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진행했다. 


그 결과, 이제 1945~1946년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던 좌익 인민위원회, 1946년 가을 남한 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각종 봉기들, 1948년 제주도와 지리산의 항쟁과 그리고 여수-순천 항쟁, 남한 보안대와 우익 비정규 학살단이 자행한 수십만 명의 무고한 남녀와 아이들의 학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 논문, 문서, 구술사, 기타 자료들이 무수히 많이 나왔다. 심지어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서 운영했던 일본군 위안부의 후신인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가 1990년대 김귀옥(현재 한성대 교수)이라는 연구자를 통해 실증적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김동춘(현재 성공회대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 또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과 훗날 국가폭력의 연관성에 집중한 연구성과가 나왔으며, 김태우라는 연구자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의 참혹한 실태를 연구한 성과도 나왔다.


앞에서 언급한 이런 훌륭한 연구들이 나왔음에도, 한국 사회와 학계가 주장하는 한국전쟁 시작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미국의 공식적인 견해를 따라가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시하기 힘든 사회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1990년대 냉전의 해체라는 분위기에서 한국은 성공 북한은 실패라는 등식화된 논리가 한국전쟁의 시작점에 대한 논쟁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잠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훌륭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전쟁 발발에 대해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거치며 공개된 소련의 기밀 자료들은 심하게 제한되고 정치적으로 선별되어 해제된 문서들이었다. 즉, 정치적으로 옐친의 입맛에 맞는 자료들이 주로 공개된 셈이다. 그래서 사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주 공정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자료를 통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김일성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다.”라고 말한다면 반박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에 걸맞은 충실한 사료가 아직 발견된 것도 아니라는 말밖에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편향성에 대해선 얼마든지 공격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 가지 사건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한반도에 나타난 분단이라는 현상은 당연하게도 미국의 책임이 막중했으며, 당시 해방된 조선 민중을 무시하며 친일 경찰을 대거 등용한 대에서 문제가 생긴 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고, 그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주 4.3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민간인 학살을 통해, 최소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러시아 기밀문서만 고집해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설명한다면,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점은 논쟁에서 사라지며, 그 결과 역사적 맥락생략이라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농후해진다. 즉,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견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는 시각이며, 브루스 커밍스 교수 또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얘기했다.


또한 현재까지 러시아에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러시아 기밀문서에 어떠한 내용이 있을지도 유심히 봐야한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당장 미국에 있는 NARA 국립문서보관소만 하더라도 새로운 사료발굴을 통해, 기존의 주장을 뒤집어엎는 내용이 나오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극구 부정하던 세균전의 경우 2010년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미국이 당시 세균전을 명령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미국이 주장했던 공식적인 견해와 상반된 입장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관련한 것도 새로운 사료발굴이 러시아 기밀문서나 미국 문서를 통해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옐친 시대에 발굴된 기밀문서를 통해 한국전쟁 자체를 김일성의 침략으로만 보려는 시도는 시대적인 한계도 있고, 그러한 한계성을 극복해야한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갈 길이 멀다. 커밍스 선생께서 말한대로,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아직도 일반인들과 사회에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무수히 많은 문서 속에서 그러한 사실관계를 밝혀내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내며, 발전해 나가야 하는 태도가 바로 사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필요하며,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반공주의적 인식 극복도 그중 하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