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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동안의 광복 - 1945년 8월 15일-9월 9일,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길윤형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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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영화 강철비2를 봤다. 영화 강철비2는 북·미 정상회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영화는 가상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문제가 주변국의 이해관계와 국제관계에 따라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아주 객관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한반도 평화 문제가 단순히 한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닌 그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화는 미국 대통령 스무트(트럼프 역할)의 결정과 판단에 따라 한반도 문제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데, 이것은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문제점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이 왜 중요한지를 아주 강력하게 역설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이루어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해 42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양국의 교류 및 관계 형성, 종전협정을 논의했고, 612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역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다음해인 20192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안타깝게도 회담은 결렬됐다. 이것은 책 저자의 주장대로 한반도가 해방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미국이라는 외세의 규정력이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분단 75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단이라는 냉전의 모순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강철비2와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외세에 의한 작용도 매우 크다. 남북한은 서로 대치하고 전쟁 상황직전까지 가는 위험 혹은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양국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한 발걸음 또한 주기적으로 있어왔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미친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음에도 우리가 자주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룩하려는 움직임은 남북한에서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이념갈등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은 남북 분단 체제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존재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러한 노력은 분명히 있었으며, 일제의 패망과 미군상륙과정 속에서도 존재했다. 이 과정을 재조명 한 책이 길윤형 작가의 신간 <26일 동안의 광복>이다.

 

많은 학자들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을 1945년부터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얄타와 포츠담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에 주둔하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연합국들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합의하기 이전부터 일제치하의 식민지 조선에선 일본의 패망을 대비한 조선인들이 해방 이후 한반도 정국을 어떻게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며 점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4년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단체를 뿌리내린 여운형을 들 수 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남은 소련군이 주둔하던 이북과 달리 세력이 크게 3개로 나뉘어 각파 전을 벌였다. 첫 번째는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여 정국을 이끌어 나갔던 몽양 여운형과 같은 좌익 인사들이었고, 두 번째는 일제시대 당시 전향하여 친일활동을 벌인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이들로써 몽양 여운형을 포함한 좌익인사들에 대립하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사실상 40년간 한반도를 통치해오다 패망하자 한반도에 거주하던 90만 일본인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였다. 26일 동안 벌어진 삼파전은 194599일 오키나와에 있던 아시아의 패튼 하지 준장의 제24군단과 제7사단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막을 내린다.(물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은 전신조직인 건국동맹에서 그랬던 것처럼 좌익과 우익의 연합체를 결성하고자 했다. 좌와 우를 통합시키려는 여운형의 노력은 이후 우익 민족주의 정당 한민당의 주역이 되는 고하 송진우에 의해 두 번이나 무산되었다. 송진우가 이끌게 되는 한민당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그는 친일 문제에 있어선 매우 깨끗한 인물이었고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켰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 패망 이후 좌우연합체 결성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스스로가 거부했고, 분열의 씨앗을 창조했다.

 

당시 송진우가 좌익과의 연합을 거부했던 이유에는 건준에서의 좌우익 비율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는 안재홍과 같은 우익들이 있었지만, 그 비율이 좌익들에게는 매우 밀리는 수준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우익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송진우가 규합한 세력들은 그를 제외하면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좌익들이 정권을 주도하면 자신들에게 더불리해 질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송진우가 주장했던 임정봉대론은 이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란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매개로 세 개의 이질적인 그룹이 뭉친 느슨한 연합체였다. 첫째는 이만규·최근우·이여성·이상백 등 여운형의 오랜 측근 그룹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이 어느 길을 택하든지 끝까지 따를 이들이었다. 두 번째는 정백을 비롯한 옛 서울파와 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 여운형과의 개인적 인연에 따라 합류해온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마지막은 이들과는 이념적 색깔을 달리하는 안재홍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여운홍은 당시 건준 구성을 공산당원인 극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 우익, 무조건 형님을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으로 나뉘어질 수 있었다고 적었다.”

 

출처 : 26일 동안의 광복 p.226

 

실제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서중석 교수의 주장 따라 좌경화가 있었다. 당시 건준에는 사회주의자들이었던 정백, 이강국 등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좌경화 현상은 태평양 전쟁기 광주 벽돌공장에 노동자로 숨어있다고 등장한 박헌영의 영향도 컸었다. 전형적인 우익 독립운동가인 송진우의 입장에서 보면 좌경화 현상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다르게 얘기하자면 좌우 통일된 조직의 건설보다 헤게모니 장악을 더 우선시 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여러 가지 사례와 그들의 이해관계를 통해 한반도 분단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격동의 26일을 재조명했다. 또한 필자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들과 나름 새로 밝혀진 자료들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걸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필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좌익들 보단 우익들과 미국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나온 바와 같이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연합과 좌우 협력을 거부하려 했던 세력이 바로 해방 후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98일 상륙한 하지 장군의 미군은 한반도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들어왔고, 좌익들이 선포한 인공과 건준을 해산해버렸다. 또 다른 분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 최초의 전기인 <중국의 붉은 별>을 집필한 에드가 스노 지적한 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해방정국은 크게 방향을 달리했을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을 활용하지 못한 건 미국이었다.

 

그리고 그 미국에게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접근한 송진우와 우익 세력들은 해방 이후 좌우를 연합하여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여운형에 대해 친일파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신공격을 주도했다. 이런 공격을 했던 한민당원 대다수가 친일파들이었고, 근거가 될 만한 물증도 전혀 없었다. 이게 역사적 팩트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봤을 때,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1차적으로나 2차적으로나 우익들에게 있다. 물론 좌익들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했던 욕심이 있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큰 틀에서의 연합을 거부한 이들이 우익이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분단을 고착화 한 것도 우익이기에 분단의 책임은 이들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 75년 분단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8.15 해방부터 미군정 탄생까지인 격동의 26일에서 가장 높게 평가 받아야 할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또한 사회주의 성향을 겸비한 중도좌익이어서 그가 이끄는 단체는 좌익인사들을 대다수로 결성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좌우연합체를 결성하여 통일된 국가와 조직을 만들어나가고자 했던 그의 노력과 행적이다. 그런 점에서 몽양 여운형은 매우 높게 평가 받아야 한다. 분단과 갈등 그리고 대립보단 좌우연합과 통일,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여운형의 노력과 정신이 인정받고 높게 평가 되어야 하는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그가 추구했던 통일 및 통합정신이 현재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남북평화통일과 화해의 목적과 비슷한 맥락과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외에 중국에서 한반도 침투 작전을 준비했던 중경 임시정부의 스토리와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이야기,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 총독부의 동선,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상황 및 이야기 그리고 우익들의 모습까지 매우 폭 넓게 알 수 있었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 75주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가 분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분단이 된 과정과 그 사이에서 벌어진 통합의 노력은 잘 모르는 편이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몰랐던 공백을 채워줄 것이고, 분단이 아닌 통합과 통일이 왜 중요한 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려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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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9-11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책을 읽다보면 과거 인물들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선택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역사적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음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비록, 그 선택이 지극히 개인의 이익에 편향된 것이라할지라도 자신의 기준에서는 최선이었겠지요...) 또한, 해방 전후의 극심한 혼란기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존경받는 분들도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경우가 있다는 점도 고려한다면, 해방전후의 비극을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를 살아간 인물들의 한계와 시대 상황 속에서 빚어진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여겨집니다...^^:)

NamGiKim 2020-09-11 13:06   좋아요 1 | URL
네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죠. 그러나 그 주체가 무엇을 추구했냐, 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그들 나름의 목표와 선택지의 이유를 다방면에서 접근했습니다. 그래도 전 개인주의를 추구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 보다 통합의 노력을 기울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 같은 분들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김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0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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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새는 '.'의 날개로 난다등의 저서를 남겼던 저항적 언론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은 워싱턴포스트에서 근무하던 1960년 일본 도쿄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했었다. 구입했던 몇 권의 책들 중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의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었다.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가 그 책에 끌렸던 이유는 바로 아리랑(Ariran)’이라는 반가운 낱말이 눈에 띄어서였지, 책의 내용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당시 조봉암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를 정도로 부정부패하고 타락했던 이승만 정권은 소위 반공(Anti-Communism)’이라는 가치에 맞지 않는 것들을 일체 부정했었다. 조금이라도 진보적이거나 혁명에 대한 긍정적 색체가 보이면 그것은 빨갱이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만큼 반공이라는 가치가 강요되고 우선시 되는(혹은 그 모든 악행들이 합리화 되는) 사회였기에 한국전쟁에 미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리영희가 그 책의 존재를 알기에는 시대사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이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됐던 것이 일본의 수도 도쿄였던 것은 시대사적인 흐름에서 너무나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도쿄에서 아리랑을 구매하게 된 리영희 선생은 그 책을 읽고 감명 받았다. 그 책 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한 혁명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제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고, 세계를 뒤흔든 열흘카탈로니아 찬가와 더불어 3대 르포문학 작품인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를 집필한 에드가 스노(Edgar Snow)에게는 옌안지구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 하던 당시 미국인 아내 한명이 있었다. 스노의 아내는 님 웨일즈(Nym Wales)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그가 바로 헬렌 포스터 스노(Helen Foster Snow)였다. 스노의 아내 헬렌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로 한 혁명가를 만나 인터뷰 했다. 그녀가 인터뷰한 혁명가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년이었고, 중국공산당 안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인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였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김산(Kim San)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장지락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화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1960년대 김산이라는 인물에 매료됐었다. 그것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 당시로써는 반공주의에 어긋나는 중국 근현대사와 중국 혁명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2005년에 출간된 아리랑 개정판에는 1991년에 쓴 리영희 선생의 추천 글이 같이 실려 있다. 추천 글에 따르면 그는 중국 혁명을 공부하면서 김산을 떠올렸고, 본인이 직접 총을 쏘고, 굶고, 쫓기고, 고문당하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만큼 김산을 포함한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내가 김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4년 전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휴학생이었던 나에게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라면 중국의 붉은 별 저자 에드가 스노의 아내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필독서로 읽어야 한다.”고 충고 및 조언을 해줬고, 그렇게 해서 나 또한 김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박근혜 퇴진 집회가 한참이던 2016년 말 나는 사회복무요원(공익)으로 소방서에서 복무하게 됐다. 당시 퇴진 집회가 한참이라 매주 토요일 마다 열심히 나가 집회에 참가했었다. 이와 동시에 나는 소방서에서 복무하면서 체게바라 평전,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공산당 선언 등 닥치는 대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24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내가 읽게 된 책은 점차 쌓여갔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리영희 선생이 젊은 시절에 읽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도 있었다.

 

내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읽은 것은 2017년이었다. 당시 나는 3교대로 근무하며 1주 주간 그리고 2주는 야간근무를 하며 구급출동에 나갔었는데, 새벽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걸리는 구급출동과 그 과정에서 보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의 아픔 및 고통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난 그때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한 인간으로써 추구했던 사상과 혁명을 위해 실천했던 그들의 행동과 역사에 감동받았었다. 당연히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또한 그런 감동을 나에게 주었고, 그의 남편 스노가 집필한 중국의 붉은 별 또한 그러했다.

 

COVID-19로 인해 발목이 잡힌 요즘 나는 김산이 일대기를 다룬 책을 다시 펼쳤다. 바로 이원규 작가가 2006년에 집필한 김산 평전이다. 이번에 읽게 된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나에게 과거 리영희 선생이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나 또한 경험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책에서 나온 혁명가 김산을 읽으며 직접 혁명현장에서 총을 쏘는 느낌이었고, 국민당군에게 추적당하며 굶고 쫓기기는 느낌을 받았으며, 일제 형사들에게 고문당하는 기분도 들었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흥미진진했고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김산은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 러일전쟁이 한참이던 1905년에 태어난 김산은 15살의 나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그 대가로 4일간 구금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했었다. 이후 작은형의 도움을 받아 일본 도쿄에서 살던 김산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의 민족해방에 대한 노력에 감명받아 모스크바로 유학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주에 있는 이회영 소유인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이후 약산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도 가입했고, 1923년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북경에서 의대를 다니며 의학을 전공하기도 했었다.

 

1926년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4.12 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하자, 1927년과 1928년 그 또한 광주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힘든 전투를 치렀다. 1929년 초에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공산당 지하투쟁에 참가했으며, 국민당측에게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진 뒤 혹독한 고문을 받았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베이징에서 학생과 노동자 시위를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가 석방되고 난 이후 다른 공산당 동지들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었고, 1931년엔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1932년 김산은 사노 마나부의 포이어 바흐, 마르크스·레닌의 일생을 번역하였고, 그해 8월 중국 공산당 하북성위원회가 주도했던 무장봉기에 참여하였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맹목적 봉기를 비판하는 의견서를 냈다가 트로츠키파로 몰리기도 했었다. 이후 그는 장제스가 만든 반공조직 남의사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졌고, 19337월에 고국으로 압송되기도 했지만, 8월에 석방됐다. 193512월 그는 북경 남쪽 도시 석가장에서 청년학생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대장정 이후 중국공산당이 발표한 8.1선언을 지지하는 시위를 이끌기도 했으며, 1936년 서안사변 이후 홍군이 거점지로 주둔하고 있는 연안으로 갔다. 그 다음해인 1937년 에드가 스노의 아내 헬렌 포스터 스노 즉 님 웨일즈를 만났고, 그와의 기나긴 인터뷰를 함으로써 헬렌이 자신의 전기 아리랑을 집필하게 만들었다. 중일전쟁이 개시 된 이후 홍군에서 소위 일제첩자 밑 반혁명파 그리고 트로츠키파 숙청이 일어나면서 그 또한 캉성(Kang Sheng)에 의해 트로츠키파 내지는 일본첩자로 몰려 처형된다. 19381019일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총살당했고,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스노의 아내였던 헬렌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에 김산 전기인 아리랑을 출간하여 생전에 김산과 약속했던 일을 지켰다. 하지만 이 책도 헬렌의 남편 스노가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이 책도 탄압을 받았다. 1934년 그와 결혼했던 조아평은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들 고영광은 1978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심의를 공식 요청했고, 이 요청은 1981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의해 심사에 들어갔으며, 19831월 중국공산당은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 당시 중국공산당이 내린 결론은 결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결정문은 맨 밑에 있다.)

    

처형된 지 45년 만에 복권된 독립운동가 김산은 200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혁명가적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김산은 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혁명에 몸바친 혁명가였다. 그 또한 일제시절 다른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 활동들을 전개했다. 그랬던 김산이었기에 1937년 그를 만났던 헬렌도 그에게 매료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에 읽은 김산 평전은 또 다른 점에서 김산을 알 수 있었다. 헬렌이 아리랑을 집필하면서 국민당의 감시와 검열을 피해 의도적으로 틀리게한 서술들과 인터뷰 과정에서 놓쳤던 일부 얘기들이다.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이런 세세한 부분들을 바로잡아줘서 혹시나 잘못알고 있게 될 얘기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헬렌이 집필한 아리랑 그 자체의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김산 평전에서 읽은 혁명가 김산의 생애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3년 전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이 이번에 더 많이 와 닿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책을 읽으며 과거 리영희 선생이 느꼈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반공주의적 편견과 오만감에 빠져있는 이들은 김산을 그저 빨갱이로 판단하는 저열한 인식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들이 심장이 뜨겁지 않은 냉혈한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일제 시절 조선의 독립과 중국 혁명을 위해 싸웠던 그의 뜨겁고 열정적인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고, 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왜 불의에 투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장명 동지는 김산, 유청화, 이철암, 한국유, 유한평 외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인으로 1905년생이다. 20년대에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7년 광주폭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장은 우리 지하당의 북경시위 조직부장 재임시 체포되어 조선으로 보내졌다. 몇 달 뒤 장은 다시 북경에 왔으나 1933년 5월 1일 체포되어 다시 조선으로 보내졌다. 1934년 장은 도 북경에 왔다. 이 기간에 우리 지하당은 그를 트로츠키파나 일번의 특무로 의심하고 그를 조직과의 관계에서 회복시키지 않았다. 1936년 우리 북방국은 그를 연안으로 가도록 소개하였다.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그에 대하여 조사를 실시하고 일본 특무에 준하여 처리하였다.

1. 체포에 관한 문제

여러 차례의 조사에 의하면 장명은 1930년 12월 9일 체포되어 심문 중 시위원회 조직부장임을 강력히 부인하고 자기는 조선독립당 사람으로 공산당은 동정하나 중국국적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뒤에 증거 부족으로 조선으로 인도되었으며 3년간 중국 입국을 금하는 처분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장명은 비밀리에 중국에 욌으나 1933년 5월 1일 다시 체포되었다. 장은 이번 체포뒤 태도를 바꾸고 ‘나의 고백’이라는 것을 써서 광서인으로 1935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현재의 공산당 정책결정이 절대로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어떤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고 공산당의 맹목적 정책과 국민당의 대일본 무저항주의 및 대내의 군벌 혼전 국면을 반대하였다.


2. 트로츠키파 가입에 관한 문제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 여부의 문제는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 조사 시에 인정하지 않았다. 1933년 5월 1일 재차 체포 뒤 역적 장문운이 적에게 장명이 트로츠키파라고 진술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사 뒤 장명은 트로츠키파 마계강, 양수이 등과 왕래한 적이 있음이 밝혀졌다. 양수이는 장은 단지 그들에게 일본 글을 가르쳤을 뿐, 정치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현재 조사된 트로츠키파 인원과 관련 자료에 모두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가를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보건대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는 부정할 수밖에 없다.

3. 일본 특무 참가에 관한 문제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장명의 일본 특무참가 문제를 조사하였다. 당시 보안처 보고에 의하면 ‘이 범인은 일본의 특무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되어 있고, 강생은 ‘위원회 결정에 따라 비밀리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장명의 일본 특무 참가 여부 문제는 장이 두 차례의 체포에서 볼 때 당 조직의 문제를 누설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장은 중국에 돌아온 뒤 1931년부터 1936년꺼자 6년간 적극적으로 당과 관계를 가지려 했다. 그는 북경 지하당의 조직부장으로서 많은 기층 조직 상황을 이해했으며, 우리의 많은 지하당 책임자와 당원을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당원과 발전된 관계를 유지하여 그가 연안에 가기 전까지 당의 조직에 손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기간 국민당 북경시 공안국과 일본의 주 북경경찰서에 수사 체포된 적이 있다. 이런 설명은 장명이 일본의 특무라는 것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상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장명 동지는 체포된 뒤 당에 불리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당의 조직과 기밀은 누설하지 않았다. 트로츠키파 참여와 일본 특무 문제는 증거가 없으므로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 조건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마땅히 정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당에 대한 충성은 우리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공헌이 있으므로 그가 장기간 받았던 억울한 누명을 마땅히 깨끗이 씻어주고 명예를 회복해주며 그의 당적을 회복시키는 바이다.

1983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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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전두환 1~2 세트 - 전2권 - 2판
백무현 글.그림 / 시대의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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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재산 29만원을 가지고 골프를 즐기고 있다는 얘기가 뉴스를 통해 들었다. 그 뉴스가 있기 전까지 그는 알츠하이머가 있어서 재판에 불참석했다는 얘기가 들렸지만, 최근에 나온 뉴스를 보니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대통령인 것 같다. 그런 인물이다 보니 최근들어 백무현 선생께서 집필한 ‘만화 전두환‘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1979년 박정희 사망 부터 그가 일으킨 12.12 쿠데타 그리고 5.18 광주학살까지를 다루고 있고, 2부는 삼청 교육대 부터 1997년 전두환의 석방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은 2007년 골프를 치던 전두환이 경상남도 합천에 자신의 아호를 딴 공원이 만들어 진다는 소식을 들으며 시작되고,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전두환 그는 1979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를 합리화 하기 위해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어 수천명을 학살했고, 이를 철저히 통제하여 정보를 차단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통치체제는 이승만, 박정희가 그랬듯이 반공주의였다. 깡패 소탕이라는 명분하에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삼청 교육대에 보냈으며,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 자신의 정권을 합리화 시켰다.

그는 1980년대 등장한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 기생하기도 했었고, 일본 극우 통치자들의 수법을 실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친미와 친일을 같이 했던 것이다. 1983년 소련이 격추 시킨 것으로 알려진 KAL 007기 격추 사건은 미국 레이건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공작이었고,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명령에 따라 소련 상공에서 대놓고 스파이짓을 했다.

1987년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같은 민주투사들의 투쟁으로 전두환 시대가 끝이 났지만, 노태우의 시대가 열렸고, 그런 과정 속에서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은 늦추어 졌으며, 김영삼 정권이 와서도 그들을 처형하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광주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과 그 유신잔당들 그리고 그 뒤를 봐준 미국에게 많은 분노를 느꼈다. 광주에 투입된 전두환 휘하의 공수부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민간인들을 향해 M-16 소총을 쏘았고, 총검으로 찔러 죽였으며, 심지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다. 이걸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책은 전두환이 저지른 만행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책이다. 즉 전두환이 어떠한 짓을 했는지를 고발하는 책이다. 최근 전두환이 역사적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그의 뻔뻔함과 반성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광주학살자 전두환은 지금당장이라도 처벌받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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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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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남단에 존재하는 섬 제주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관광지 중 하나다. 연애 중인 커플들이나 결혼한 연인들끼리 놀러 가는 곳이기도 한 제주도는 평화롭고 경치도 매우 아름다우며 자연환경도 좋은 섬이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휴양하기 위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도는 미국의 하와이나 일본의 오키나와 중국의 하이난도(해남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같이 참으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고 여행하기 좋은 제주도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참으로 비극적이다 못해, 지옥과도 같은 섬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송장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투명하고 푸른 바다나 계곡은 피로 물들었으며, 한라산에 핀 꽃들은 붉게 물들었었다. 왜냐하면, 1948년 4월 3일을 시작으로 제주도에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광기 어린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주 4.3 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제주도는 해방을 맞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물러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사업을 해나갔고, 제주도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조직되어 그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사업은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이 제주에 들어왔을 초기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인민위원회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은 일제 친일 경찰들을 등용하여 제주도를 통치하려 했고, 이러한 미군정의 행동은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샀다. 더 나아가 미군정의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제주도의 경제 사정 또한 안좋아 졌기에 민중들은 점차 미군정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으며, 미군정 또한 제주도민에게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1947년 초에는 대략 300~400명의 학생이 미군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3.1 운동 제28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제주도민이 참가했던 이 행사에는 국내의 사회주의 조직이었던 남로당도 참가했었는데, 이를 좋지 않게 본 경찰이 어린아이를 말발굽에 부딪치게 만들면서 죽였고, 이에 반발하는 시민에게 총을 발포하여 1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했다. 그 사건 이후인 3월 10일 남로당을 이끄는 좌익 계열 인사들과 민중들은 이에 총파업으로 맞섰고, 미군정과 경찰은 이 집회를 진압했다. 진압한 이후 그들은 서북청년회 출신의 인물들과 더 많은 우익경찰들을 제주도에 배치했고, 대대적인 좌익 탄압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런 탄압은 서북청년단의 민간인 테러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1948년 3월 초 제주도 내에 있던 남로당원들은 이러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인사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켜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나섰다. 이들이 무장투쟁으로 맞서자 이에 당황한 미군정과 경찰은 본토로부터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우익 출신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제주도에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적인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이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나서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우익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에게 학살당했다. 좌익이 저지른 것도 없진 않았으나, 대체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세력들을 대상으로 일어났다.


1948년 11월부터 시작되었던 초토화 작전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압을 거부한 여수 순천의 14연대는 이에 저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러한 우익들의 학살로 인하여 제주도민 희생자 80% 이상이 우익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3만 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거의 다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에서 생겼다는 것이다. 제주 4.3 항쟁 시기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아이, 어른, 노인, 여자, 장애인을 가리지 않았다. 진압 작전에 나섰던 토벌대는 초등학교까지 가서 한 아이를 체포하여 운동장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고, 빨갱이라고 의심한 무고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살, 2살짜리 영유아도 마을 주민들과 같이 학살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어떤 마을에선 수백명 단위로 학살되어 마을 하나가 전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광적인 학살은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일어났다. 따라서 제주도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푸른 바다는 죽은 사람의 피가 넘치는 바다가 되었으며, 한라산에 있는 꽃들은 죽은 사람의 피로 붉게 물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제주도의 비극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다시 한번 반복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제주도민들은 다시 한번 검거당해야 했고, 이들 중 대다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해 암매장 되고 했다. 따라서 빨갱이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던 살아남은 제주의 젊은이들은 국군에 자진해서 자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빨갱이’라는 의심의 눈초리하고 연좌제라는 사회 제도적인 공권력 탄압이었다. 4.3을 겪었던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할 권리를 잃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 과거에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기억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건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되면서부터였다.


1948년 제주 4.3 항쟁 당시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 학살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있었고,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리라”라고 말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던 조병옥이 있었으며, 미군정이 있었다. 누군가는 제주 4.3 항쟁을 폭동이라고 한다. 특히나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리는 극우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제주 4.3 항쟁을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던 토벌대와 이승만의 입장에서 제주 4.3 항쟁을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관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다.


허영선 시인이 집필한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픔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책 한 페이지씩 넘기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책 한 페이지마다 지옥도를 경험했던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저자가 시인이다 보니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도 많았기에 더 와닿았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8년 1월 필자는 제주 4.3 박물관을 방문했었다. 당시 그곳을 방문한 필자는 눈물을 흘렸었다. 도대체 왜 이 무고한 사람들이 이렇게 학살당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이번 기회에 허영선 시인의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읽게 된 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의 장점은 제주 4.3 항쟁과 그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따라서 역사 지식이 없더라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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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몰았는데, 그 수법이 너무나도 잔인했다. 이 중 가장 악질적인 만행이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2004년 장동건과 원빈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장동건의 와이프가 아무것도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우익 청년단이 쏜 총에 맞고 죽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에 따르면, 그녀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은 그저 쌀이나 보리를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자본주의가 뭔지 혹은 사회주의가 뭔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무엇이었길래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몬 것일까?

 

1. 보도연맹이란?

  

보도연맹에 관해 얘기하기 이전에 먼저 해방 전후사에 관해 얘기하겠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미군이 진주한 한반도 이남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익 세력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고,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힘을 얻은 이승만은 그런 노력들을 무력으로 무마시켰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과 친일 세력들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은 여러 곳에서 봉기했었는데,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고 난 이후 이승만 정부는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이다. 보도연맹 조직을 확장하면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했다. 심지어 10대인 중·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할 정도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비단 좌익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 및 사정을 들어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생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정리하자면 보도연맹 단체는 해방 후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키려고 만들었지만, 대다수 민간인이 더 많이 가입했으며, 그 절차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었다.

 

2. 학살의 시작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엄청난 보복 및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부텨였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기에, 한국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과의 전쟁 속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전향자들의 배신을 우려하게 되었고, 그런 이승만의 우려가 결국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을 따라 후퇴하던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은 정부의 명령 아래 보도 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이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 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 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그 외에도 진해, 통영, 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중 가장 악질적인 사건은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이었다. 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보도연맹은 19506월부터 8월 혹은 그 이후까지 전개되었는데, 최소 20~30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학살당했다. 통계에 따라선 최대 100만까지 잡기도 하는데, 확실한 건 이승만이 전개한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이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들도 있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들도 존재했다. 이 학살의 중심에는 항상 북진통일과 반공을 부르짖던 이승만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이 한국전쟁 시기 학살당했다.

 

3. 반공주의가 침묵을 강요했다.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물론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학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주나 자본가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나 군경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이 규모나 무차별 학살이라는 측면에서 인민군보다 더 했고, 더 잔인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을 겪었던 유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고, 연좌제가 두려워 이런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유가족회가 결성되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부 또한 이승만 정부 못지않게 이를 막았고, 유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결국,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9월에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2009년까지 진행되었다. 보도연맹 학살을 2000년대 조사하면서 대략 5000구 정도의 보도연맹원 시신이 밝혀졌고, 많은 증언과 한국군 자료들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나오면서, 역사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얘기할 때, 항상 인민군의 학살만 강조됐다. 그러나 2000년대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던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의 학살은 한국군의 학살에 비해 훨씬 적었고, 거의 16 비율이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인민군보다 더 잔인했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아직도 6.25가 되면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만 강조하며, 마치 우리는 피해자다라는 식의 피해의식을 국가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장치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숨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금기시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보도연맹 학살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한국군의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그런 만행을 우린 한국전쟁일인 오늘 기억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4. 참고 자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르스 커밍스 저, 조행복 역,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저, 2005

이승만 평전, 김삼웅 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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