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송광성 지음 / 나무이야기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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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남북 분단 정부가 수립되고 그 분단 정부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사실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분단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고, 그 분단의 책임에 누가 가장 결정적으로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설사 알더라도 반공주의의 여파로 이를 쉬쉬하는 측면이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는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 광주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신군부와 이를 지원한 미국에 대해 알게 된 수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80년대 내내 대학가에서 반미시위를 전개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서 반미 성향의 학생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준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바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이다. 사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의 극우들의 믿음과는 달리 친북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저 미국 대외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분석한 학자였을 뿐이다. 글쓴이가 커밍스의 책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군복무 말기인 2018년이었다. 그 당시 글쓴이는 대체복무로 소방서에서 근무했고, 2017년에 번역된 커밍스의 저작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었다. 그전에도 여러 한국 근현대사 서적들을 군복무 내내 탐독했지만, 커밍스의 저작은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커밍스가 분석한 남한과 북한 지도부의 성격과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은 7년 전 글쓴이에게 소위 한국전쟁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보통 한국전쟁을 생각하면 1950625일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소련의 스탈린의 지령과 허가를 받고 기습 남침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커밍스는 이와 같은 내러티브에 전면적으로 도전했고, 그런 서사가 왜 무의미한지를 너무나도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반박했다. 글쓴이는 바로 이런 점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군복무 전후로 글쓴이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제국주의적 개입을 다룬 서적들을 여러 권 읽었다. 이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얼마나 많은 나라들에 개입하여 학살과 인권을 유린했는지를 알게 됐다. 여러 진보성향의 학자들의 분석을 종합해보면서, 글쓴이는 해방 이후 미군정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적인 지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가나의 국부로 평가받는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는 저서 <신식민주의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Neo-ColonialismThe Last Stage of Imperialism)에서 신식민주의의 본질은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가 이론상으로 독립적이며 국제상의 주권국으로서의 모든 외적 장식물들을 지니고 있지만, 실상은 그 경제 체제, 따라서 그 정치적인 정책은 외부의 지시를 받고 있다.”라며 냉전 시기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이와 같은 은크루마의 논리로 보자면, 미국의 한반도 강점은 분명히 이런 측면이 강력히 남아 있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 세워진 미군정은 시작부터 점령군임을 표방했고, 과거 일제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결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연결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미군정의 문제점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던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했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미군정은 일제 식민 경찰에 근무했던 조선인을 대부분 재임명했다. 미군정 정보 전문가 존 콜드웰은 미국은 일본 경찰 제도가 유지되도록 내버려두었다. 경찰 고위 간부는 대부분 일본이 훈련한 사람들이라서, 그들은 식민지 인민을 위한 정의와 인간적 대우에 대해 오직 일본식 방식과 일본식 생각만 알고 있다.”라고 했다. 실제로 자료를 확인해보면, 최소 80~85%의 미군정 치하 경찰들이 친일 경찰들이었다. 그 당시 대중들이 가장 증오하던 친일파가 바로 친일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자면, 미군정은 매우 반민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군정의 한반도 이남 정책은 냉전 시기 미국이 친미 반공독재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이 해방 이후 미군 점령기간 동안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역사적 진실들을 항상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미군정의 정책들을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었다며 미화하는 세력들이 너무나도 막강하게 살아있다. 이와 같은 극우 반공 사상을 가진 이들이 죽지않고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지난 202412.3 계엄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증명됐다. 지난 2024년 윤석열 정권이 한국 사회를 망치고 있을 당시, 너무나도 좋은 책 한권이 출판됐다. 바로 송광성 선생의 저서 <미군 점령 4년사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글쓴이는 이 책을 읽으며 과거 커밍스의 책을 읽으며 느낀 지적 자극을 다시한번 느꼈고, 너무나도 감명깊게 읽었다.

 

글쓴이는 이 책의 존재를 올해 초에 알게 됐다. 부끄럽게도 이 책이 이미 1990년대 초에 출판된 책이라는 것을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다. 무엇보다 이 책이 1980년대 후반 해당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거기다 미국 UCLA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글쓴이가 눈여겨 본 것은 해당 저작의 연구 방법론이다. 해당 연구는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벌어지는 민족모순과 더불어 계급모순도 함께 분석했다. 그런 점에서 본 저작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도 함께 연결하면서 민족주의적 시각과 같이 본 셈이며, 그 당시 기존의 연구와는 차별성을 보인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접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미군정은 단순히 민족적 모순만 부각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군정이 친일 및 반동적인 우익 인사들에게 생산 및 공장 경영을 맡겨 도시 노동자들과 어떻게 갈등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했고, 오히려 자주적인 노동자들이 미국이 내세운 인사들 보다 더 잘 공장 생산을 잘하고 관리했음을 입증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해당 저작의 내용을 보자.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의 몇 가지 예는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인이 소유한 서울 영등포에 있던 조선피혁 공장에서는 해방 전에 1,3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군수품을 생산했다. 19458월에 일본이 항복한 후, 그 공장 사무직 노동자 10명과 육체노동자 25명이 자주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인에게서 소유권을 양도받았다. 자주관리위우너회는 108일에 공장을 다시 움직여 물품 생산을 재개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주말 휴일, 건강보험, 소비조합 등 개선된 노동환경 아래에서 노동자는 낡은 기계를 수리해 신발 생산을 100%, 가죽 생산을 200% 증가시켰다. 그러나 1946410일 미군정은 노동자들이 선출한 위원회 위원장 박인덕을 해고하고 체포했다. 그리고 조균훈을 새로운 경영자로 임명했다. 조균훈은 노동자위원회를 폐지하고,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 경영으로 노동생산성을 67%나 하락시켰다. 노동자는 새로운 경영자에 맞서 파업을 일으켰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16.

 

이와 같은 계급적 의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왜나하면,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현대사를 보는 데 있어서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여러 부분에서 한반도 이남을 매우 가혹하고 잔혹하게 통치했다. 앞서 언급한 계급모순의 사례는 아래의 예시를 통해 다시한번 확인이 가능하다.

 

경성철도 노조의 행동은 철도 고용인 30%를 해고하고 월급제에서 일급제로 바꾸라는 91일자 군정법령 제55호에 대응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은 노조의 요구 조건을 무시했고, 운수국장 코넬슨은 "인도인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62.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송광성 선생은 미군정을 실시한 미군이 남조선을 점령한 정복자였음을 분명히 한다. 미군정은 일본과 미국 정복자를 다함께 반대한 혁명적 조선 민족주의자를 잔혹하게 탄압했고, 일본인 공장을 자주적으로 관리하던 노동자를 몰아내고 친일 분자를 관리자로 삼았으며, 이런 미군정의 행동으로 노동자들의 강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가 대구 10.1 항쟁이었다. 1946년 대구 10.1 항쟁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매우 잔혹하게 진압했다. 서구의 많은 이들이 1989년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했다고 규탄하지만, 정작 서구 세력이 더 무자비하게 봉기 진압에 나선 것에 대해선 외면한다. 대구 10.1 항쟁에서 최소 1,000명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군정에게 있었다. 저자 송광성은 미군의 봉기 진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경찰은 미군이 깜짝 놀랄 정도의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 군중에게 보복했다. 미군정 역사는 "혼란한 틈에 경찰의 극단적인 잔학 행위가 발생했다."고 시인했다. 미군 전술부대의 잔악 행위도 국립경찰의 잔혹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31일 전라남도 목포에서는 전술부대가 시위 군중 사이로 트럭을 몰고 지나가 많은 사람이 다쳤다. 미군정은 10월 민중항쟁이 공산주의 선동가 때문에 일어났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81.

 

이와 같은 미군정의 진압은 1948년 제주 4.3과 여순에서도 나타났다. 4.3이나 여순은 계급모순과 더불어 민족모순이 매우 부각 되었고, 여기서도 미군은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진압에 나섰다. 19489월부터 19495월까지 2개월 동안, 미군정은 유격대뿐만 아니라 유격대에 동조하는 제주 도민까지 폭력으로 진압했다. 미군정의 진압으로 500~2,000명의 유격대가 죽은 것에 비해,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3만에서 최대 7~8만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정이 유격대와 싸운 것이 아니고 제주 도민을 대량 학살했음을 의미했다. 여순에서도 그렇게 수천 명(최근 추산치는 1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미군정이 1948년 제주와 여순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학살한 데에는 자신들의 반공보루인 이승만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괴뢰였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친미 집단을 양성하면서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분쇄하느라고 3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서, 미국 군인들은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도 남조선에 이승만 정권이라는 반공보루를 구축했다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을 이어받았고 미군정의 정부 기구, 관리, 법률, 심지어 빚까지 떠맡았다. 이승만 정권은 형식상으로만 민주적이고 독립적이었으나, 사실상 독재정권이고 미국에 깊이 종속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미군사력은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제에 간섭했다. 미군사력은 1948년 여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전라도 지방으로 확산했을 때,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막았다. 미군은 남한 전역에 걸친 광범한 '좌익소탕', 특히 한국 군대에서의 좌익 숙청을 끝마친 후에야 비로소 한국에서 철수했는 데, 그때도 미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켰다. 이와 같은 역사는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됨으로써 한국이 미국에서 진정으로 독립되었다는 신화를 반박한다. 결국 미점령군과 조선 인민의 관계는 제국주의 국가와 그 식민지 국가 간의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미점령군은 인공을 파괴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구조와 인맥을 지속시켰으며, 다시 대한민국으로 이월시킴으로써 미국에 깊숙이 종속하게 했다. 그리하여 남조선은 일본 속박에서는 벗어났지만, 미국 신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05~206.

 

또한, 한국의 극우들이 그리도 칭송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사실은 반민중적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엔임시위원단은 전국 규모의 선거를 감시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유엔위원단은 남쪽만의 단독 선거 가능성을 토의했다. 조선에서 개진된 의견 중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 미군정 당국만이 남쪽의 단독 분리 선거를 지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김구와 같은 보수주의 지도자를 포함한 조선 민족주의자들은 남쪽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나섰다. 남쪽 내에서만도 상당수가 단독 분리 선거를 반대했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345.

 

송광성 선생의 책은 미군 점령이 말 그대로 신식민주의적인 지배체제였다고 주장한다. 글쓴이 또한 이런 시각이 틀렸다고만 보지는 않는다. 분명히 미군정 체제는 태생부터 반민중성을 내재하고 있었고, 미군정의 친일 경찰 등용과 대구와 제주 그리고 여순에서의 민중항쟁 진압이 이를 입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나온 논문인데도, 여전히 사회 분석 틀은 유용한 점이 많다. 이와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과 남베트남 그리고 한국과 그리스 등의 여러사례를 비교 분석해보는 것도 의미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해당 저서는 1980년대 후반에 나온 저자의 학위 논문이기에 이후 한국 사학계와 사회학계가 축적한 연구를 반영하지 못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연구를 계승 발전한 총괄적인 연구서가 필요하다.

 

좀 있으면(202563)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아마도 63일이 지나면 정권이 교체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란 세력들은 멀쩡히 살아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설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면서 우리는 친일 청산에 완벽히 실패했다. 그 여파는 현재까지도 윤석열과 같은 내란 세력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란 세력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친일 세력이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야 한다. 앞으로의 미래에는 우리 민중들이 저 윤석열 내란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역사부터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따라서 80년 전의 우리 현대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송광성 선생의 책은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글쓴이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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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 혁명 그 이후 1917-1921
앤터니 비버 지음, 이혜진 옮김 / 눌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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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적백내전 관련 통사가 한국에 번역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전투 위주의 서술도 분명 군사적 측면의 분석은 분명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친서구적인 시각이 많다. 뭐 첫 술에는 배가 부를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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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 보림 창작 그림책
서진선 글.그림 / 보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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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을 읽으며

올해 1월 한베평화재단에서 가는 평화기행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기행에서 나는 같은 운동조직에서 활동하는 동지와도 함께 갔다. 5박 6일간 갔고,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기행에서 상당히 친해진 선생님이 계셨다. 이 책의 주인공 서진선 선생이다. 사실 기행 첫째날부터 버스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 분도 뒷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고 너무나 다정해서 더 가까워졌던 것 같다. 여행 막바지에 한베평화재단 활동가인 짜노와 서진선 선생과의 대화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서 선생은 1980년 5.18 당시 고3으로 광주에 있었고, 비극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분이었던 거다. 그리고 작가로서 아이용 그림책을 썼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다. 얘기를 듣고나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도서관에 들렸다가 이 책을 어린이도서관에서 펼쳤다. 책은 아이의 시각으로 5.18을 설명한다. 책에는 5.18 당시 저자가 겪은 경험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아이가 기다리는 누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 비록 아이에게 계엄군의 물리적 폭력이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광주시민의 아픔이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5.18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은 하나하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저 계엄군에 맞서 저항했다. 중고등학생도 계엄군에 맞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저항했다. 시민군을 위해 거리의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헌혈을 했다. 이는 영화 ‘택시운전사‘에도 잘 묘사됐다. 심지어 성노동자도 시민들과 시민군을 살리기 위해 헌혈을 하며 참여했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에서 2개월간 일어났던 일이 1980년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리영희 선생이 표현한 것과 같이 말이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은 M-16 소총을 조준한 다음 군인을 환영하러 나온 초등학생에게 까지 발포했다. 군인이 자국 민간인을 평시에 이렇게 학살했다.

나는 광주를 절대 잊을 수 없다. 5월이 되면 항상 광주에 내려가려 한다. 광주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을때, 유혈없이 계엄이 해체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광주의 추억 덕분이다.

광주라는 역사적 경험이 우리를 살렸다. 우리모두 광주에게 빚이 있다. 그래서 5.18 역사왜곡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지난 2024년 5월 광주에 내려갔다가, 광주에서 5.18을 북한군의 개입이라 선동하는 극우를 봤다.

나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이 그 사람 입밖으로 나왔다.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5.18 광주는 44년 후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듣고 겪은 이야기를 그림 형태로 풀어낸 그림책이다. 그림과 사진이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임팩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도 이 책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잘 읽혀 5.18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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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은 친일 문제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설립된 이래로 한반도 이남에선 역으로 친일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특히나 하지가 이끌던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했는데, 당시 경찰의 최소 85%가 친일경찰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친일파 청산을 향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 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미군정장관이던 윌리엄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됐다.

 

194885일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국회에 설치되었는데, 정부 수립 공포 다음날인 8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안이 상정되었고, 91일에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이른바 반민법은 친일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가 살포됐다. , 여기서부터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반공의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친일파들의 거센 방해 속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발족됐다. 위원장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이, 특별재판부는 독립운동을 변호했던 김병로, 특별검찰부에는 권승렬이 임명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반민특위는 박흥식·이종형·최린·최남선·이광수·김연수 등을 구속했으며,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한 노덕술과 하판락 등도 체포됐다. 놀랍게도 이승만은 이와 같은 반민특위 활동에 분노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끼던 수도경찰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고문왕으로 불리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그는 신간회, 광주학생항일운동,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해방 이후 월남한 그는 장택상의 눈에 띄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을 숙청했으며,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노덕술은 본인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할 것 같자,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국회 내 반민법 관련 핵심 인물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노덕술의 암살 리스트에는 극우인사인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이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백민태라는 인물이 검찰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간부들을 불러 항의했으며, 2월에는 반민특위 내의 특별경찰대(특경대) 폐지를 요구하는 강경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이승만이 펼친 논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민특위 와해는 1949517일 노일환과 함께 소장파 리더 격이었던 이문원 등 세 의원이 구속되면서 일어난 연쇄사건 속에서 발생했다. 이들을 석방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정부 당국의 방조를 받으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531일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세 의원 석방동의안에 가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은 88명의 의원이 아니었다. 바로 반민특위 그 자체였다. , 여기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한 이다.


 

이들은 63일 반민특위로 쳐들아가서,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반민특위 측은 이들을 체포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잇단 시위의 배후에 친일경찰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있음을 파악한 다음 최운하를 포함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66일 중부경찰서장이 경찰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무기와 서류 등을 빼앗고 직원들을 연행해 고문했다. 당시 이 습격을 주도한 이가 바로 내무차관이던 장경근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온 장경근 또한 일제시기 친일을 한 사람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된 인물이다.

 

다음 날인 67일 대통령 이승만은 한 발 더 나아가 AP통신 기자와의 단독회견에서 자신이 특경대 해산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의 요구에 따라 국회가 공소시효를 2년에서 1949831일로 단축하면서 종결됐다. 특히나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국회프락치 사건과 안두희의 김구 암살을 겪으며 친일파 청산은 정말 물거품이 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검거활동을 시작했는데,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이었다. 이 중에 체포가 305, 미체포 193, 자수 61, 영장취소 30, 검찰송치 559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한 내의 친일파 청산 노력은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그 결과 남한에서 처벌한 친일파의 숫자는 말 그대로 0명이 됐다. 그렇게 해서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 행정, 군사, 기술, 학계 및 여러 분야에서 암약할 수 있었고, 부를 더 축적하여 재벌 및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남한 정부가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최소 90% 이상이 일제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 미국 CIA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과 그의 정권은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닌 남한 사람 거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수에게 평판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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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되어 있지만, 이승만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응징한 전명운, 장인환을 변호하는 것을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인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아마 2018년 12월이나 2019년 1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페북으로 연락하던 한 페친과 처음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페친과 만난 나는 같이 집회에 참여했으며,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한국 현대사 관련 얘기를 나눴다. 이때, 나무위키의 친미 극우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페친이 소위 한국 건군의 아버지로 알려진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X들이다!”라고 말한 것을 나무위키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사진, 하우스만은 이후 1990년대 KBS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제임스 하우스만의 존재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을 읽게 되면서였다. 김득중의 논문에는 “미군고문단이 여순항쟁에 군사작전상으로 개입한 사실”이 상세히 나와 있었고, 거기서 다시 한번 제임스 하우스만에 대해 제법 상세히 알게 됐다. 글쓴이는 지난번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완독하면서, 미군사고문단이 4.3에 어떻게 개입하여 학살에 관여했는지를 얘기한 적이 있다. 오늘은 한국 현대사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로 참전했고, 1944년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로 알려진 벌지 전투(Battle of Bulge)에도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하우스만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1년 후인 1946년에 한국으로 파견된 인물이다. 하우스만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 및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당시 이남의 군병력과 경찰의 지휘체계는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출신 그리고 친일경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으며, 그 이유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자를 덜 적대했다.”는 데에 있었다. 하우스만에게 있어서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하우스만은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고 할 만큼 제임스 하우스만을 신뢰했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개입이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여순항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과 더불어 여순에서 토벌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주체가 미국이었음을 지금까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우스만 사망을 보도한 국내 기사, 마치 한국의 군사전문가로만 소개가 됐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가 진압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봉기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동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이 보낸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이 현재까지 발견된 시신만 3,384명이지만, 실제 사망자는 12,000명이라는 추산치가 있을 정도다. 김득중에 따르면, 여순항쟁 당시 미국은 정규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신 고문단이 들어갔고, 이들은 사실상 진압군의 지휘관이자, 한국군 장교들과 장성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모든 한국군 부대에 미국인 고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사는 진압작전의 주요 고문으로 임명된 할리 풀러 대령과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 미군 정보부 G-2의 존 리드 대위였다. 여순항쟁 당시 미군은 C-47 수송기를 동원해 한국군 병력과 무기 및 기타 장비를 실어 날랐고,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이 이어지는 기간 내내 그 지역을 감시했으며, 미국 정보기관들은 미군과 경무부의 정보과에 긴밀히 협력했다. 김득중에 따르면, 당시 하우스만은 토벌대 총사령관인 송호성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여순에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이후 KBS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송호성의 명령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문관의 역할을 했다”고 했으며, 하우스만은 여순항쟁 진압을 위한 작전계획을 백선엽과 협의하여 수립했다. 즉, 여순항쟁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나온 것은 제임스 하우스만이 세운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우스만에 대해 강연을 했던 역사강사 배기성)


실제로 제임스 하우스만은 1949년 1월 10일 미 국방부로부터 미 공로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은성무공훈장 바로 아래의 4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훈장이었는데, 전시가 아닌 평시에 보충역 대위에게 이런 훈장이 주어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따라 김득중의 경우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남한 상황을 전시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1948년 11월 20일, 총 99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이 결의안을 주도한 최윤동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군은 여수순천 반란과 대구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만약 미군이 없었더라면 국군은 전멸당했을 것이다.”

(여순항쟁 당시 작전을 지휘하는 미군고문단과 한국군)


이런 점에 근거하여 보자면, 여순항쟁에 개입하여 총사령관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하우스만은 학살의 방조자이자 진정한 수행자였다. 또한, 이 사건에서 남로당이었던 박정희를 살려준 인물이기도 했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창룡을 신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창룡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며, 전쟁 이전 군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 사냥을 자행했다. 2014년에 작성된 제주 언론사 『제주의 소리』 기사에 따르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 폭파에도 책임이 있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이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임스 하우스만은 한강다리를 폭파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우스만은 이후에도 46년간이나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우스만은 제주 4.3 항쟁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던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하우스만은 3.15 부정선거 이후 반이승만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사령관으로서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지지 철회를 통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우스만이 민주주의적 신념이 있는 사람으로 절대 볼 수 없다. 그 증거는 아래 하우스만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룬다는 환상이란 없었다. 초보자들에게는 너그러운 독재자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로 하우스만은 제주 4.3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좌익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그 시체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발사한 인물이 제임스 하우스만이었다. 이후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한 인물이 하우스만이었으며, 제주도 시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하우스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

(김득중의 박사학위논문인 저서 『빨갱이의 탄생』, 이 책은 여순항쟁을 분석한 책으로 당시 미군의 개입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순에서의 민간인 학살 또한 사실은 미국이 자행한 학살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을 보면 하우스만은 ‘너그러운 독재자’라 표현했다. 그러나 하우스만이 지원한 한국의 독재자들은 너그러운 독재자가 전혀 아니었으며, 가난한 빈민들을 챙기는 독재자 또한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분배와 빈민 해결보단 성장과 재벌 계급의 부의 축적을 우선시했다. 따라서 하우스만이 얘기한 너그러운 독재자들은 실제로 보자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박정희 또한 5.16을 하기 전 군부 내 쿠데타 기도를 파악한 하우스만의 집에 찾아가 상황을 전했고, 하우스만은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결과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제임스 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난 것은 1981년이다. 지난 2023년 말 국내에서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품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개입이다. ‘서울의 봄’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아쉽게도 미국의 개입은 전혀 조명하지 못했다. 글쓴이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굴곡에 있던 하우스만의 입김이 12.12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하우스만은 앞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어야할 한국 현대사 주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현실문화, 2017.


A.B. 에이브람스, 박현주 옮김, 『끝나지 않은 전쟁 I – 북미 대결 70년사』, 민플러스, 2022.


김관후,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제주의 소리, 2014.12.26.,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322>.


https://ko.wikipedia.org/wiki/제임스_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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