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신서 114
와다 하루끼 / 창비 / 1992년 8월
평점 :
절판


 

김일성!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이름을 공개적으로 꺼내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 괴뢰 도당은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가르쳐 왔던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절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관해 그저 악마화된 이미지만 부각했던 우리 사회는 일제시기 그가 만주에서 전개했던 항일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았었고, 군사정권 시기 어용학자들은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북한 괴뢰 정권의 수괴 김일성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김일성 가짜설은 대중들에게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런 궤변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수구 세력인 뉴라이트가 이어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라이트와 수구 세력들의 주장과는 달리 북조선의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그 김일성이 맞다. 김일성 가짜설은 1945년 10월 그가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에서 모습을 비추면서 떠돌게 된 얘기였다. 당시 민중들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전개했던 김일성의 얼굴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생겼던 해프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우익들이 이를 이용 또는 악용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이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김일성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맞았다. 1980년대부터 남한으로 탈북한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은 일제시기 무장투쟁을 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렇다면 왜 뉴라이트와 수구세력들은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1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반일 활동을 했었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론을 읽었던 그는 만주로 갔고,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2년에는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었다.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변절자들이 설립한 민생단 공작으로 인하여, 숙청의 피바람이 불 때 살아남은 김일성은 1933년 둥닌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무송현성 전투와 대덕수 전투, 소덕수 전투 그리고 이도강 전투 등을 치르는 등 전투를 계속하면서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1달 전인 1937년 6월 김일성은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의 보천보에 잠입하여 진공작전을 개시했었다. 그 과정에서 최소 14명 이상의 일본군 순사와 군인이 죽고 부상당했다. 보천보 전투 이후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간삼봉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제는 1938년부터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김일성 휘하의 부대들은 이른바 100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해야했다.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1940년 3월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홍기하에서 추격해오던 마에다 부대 120명을 매복공격하여 섬멸했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고, 1942년 8월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 휘하의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되게 된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김일성이 속해있던 만주의 독립군들은 1942년까지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었다. 비록 1945년 8월 소련군이 개시한 만주 진공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의 만주 빨치산파 지도부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고, 소련에서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왔다. 따라서 반공주의에 심취한 수구 세력들에게는 이러한 김일성의 항일 경력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테고, 국민들에게 숨기고 싶었을 테며, 이를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이 책을 통해서 수구세력들이 왜곡해오거나, 숨기고 싶어했던 김일성 항일투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항일무장투쟁 당시 군사 지도자 김일성의 지도력이 잘 발휘되는 모습들이 무장투쟁에 같이 참여했던 후세대들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을 잘 통솔했다. 그랬기에 보천보 전투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고,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피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추격해오던 관동군 측 마에다 부대를 홍기하에서 전멸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 중반 김일성은 장백산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여기서 말한 장백산은 우리가 아는 백두산이다. 즉 김일성은 1930년대 중반에 백두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했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봣을 때, 현재 북측에서 백두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선 김일성과 만주 빨치산파들이 1948년 북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이후 북조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나온다. 만주 빨치산파 대다수는 북조선에서 주요요직을 차지했고, 북조선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조선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인사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대다수가 항일운동을 했다. 1949년 조선 인민군 창설 1주년에 수여된 48명의 군 간부 서훈을 보면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자가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조선 인민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난 지 1년 뒤인 1992년에 출간되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또한 항일 투사로서의 경력을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마저 빨갱이로 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당장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는 것은 절차 및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다 하루끼나 브루스 커밍스 같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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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그저 그의 항일운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집필했습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였고, 아버지와 어머니 둘다 기독교 신자였다. 김성주는 3.1운동 이후 출옥한 그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1925년 까지 외조부의 교회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1926년 6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했는데, 아버지의 사망을 전후로 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타도 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27년 김성주는 동만주의 대도시 지린에 있는 유원중학에 입학했고, 그 시기 블라디미르 레닌이 집필한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이때 일본 측으로부터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이퉁이나 화이떠 현 등의 농촌지역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교제했다. 당시 김일성은 리종락이라는 사람이 결성한 조선혁명군에 참가했는데, 1931년 리종락이 체포되면서 그의 부대가 궤멸되어 버렸고, 체포를 면한 김일성은 그 시기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31년 9월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했다. 중국과 일본간의 전투가 격해지던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에서 구국군 유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창설한 부대를 이끌고 통화의 조선혁명군 사령 양세봉을 방문하여 민족주의자의 군대와 연합을 시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일성은 1933년 2월 왕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왕칭유격대에 합류했고,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 5월 반민생단 사건이 투쟁이 전개되면서, 많은 조선인 당간부들이 일제가 만든 민생단 단원으로 몰려 체포, 구속 처형당했고, 이후 김일성도 왕칭유격대대에서 해임되었다. 그래도 김일성은 1933년 9월 동닝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반민생단 사건 당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35년 김일성이 왕칭으로 다시 돌아온 뒤, 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었고, 김일성은 정치위원으로 부활했다. 1936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이 결성되었고, 김일성은 신설된 제3사의 사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국내에 침투하여 어느 지역에 대한 습격에 나서는 데 그게 바로 신화화 혹은 전설이 된 보천보 전투다.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부대는 먼저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고에서 각종 총기와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으며, 동시에 면사무소와 우편소, 농사시험장등 주요 관공서도 공격했다. 보천보가 습격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제 당국은 혜산진 경찰서 경찰대 31명과 국경수비대 60명 그리고 헌병대 8명으로 토벌대를 꾸려 게릴라 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로 인한 김일성 부대의 피해도 적잖았다. 사실 보천보 전투에서 주재소를 습격했을 당시 일본 측 전사자는 2명이었는데, 한명은 요리사였고, 다른 한명은 오발로 죽은 두 살짜리 아이였다. 이것과는 별개로 김일성의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전투를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군 7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보천보 전투 이후 동아일보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김일성은 조선의 영웅으로 등극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일제 측의 탄압도 심해졌다. 1938년부터 일본은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고, 1938년 11월부터 1939년 3월 까지 100일 간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며 행군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하고난 지 1달이 지난 시점인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고, 이번에는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유격대를 막다른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가장 혁혁한 성과를 올리는데 그게 바로 훙치허 전투다. 당시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의 대장 마에다는 “김일성의 목은 내가 벤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다녔다. 그는 “김일성 부대가 허룽현 훙치허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해갔다.”는 신고를 받은 뒤 경찰 및 군부대를 출동시켰는데, 매복해있던 김일성 부대에게 공격당하여 부대가 전멸당한 것이다. 김일성 부대는 훙치허 전투에서 대략 100~120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섬멸했고,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토벌대 측의 경기관총 5정, 소총 100여 정, 탄알 1만여 발, 무전기 1대를 노획했다.

 

1940년 7월 김일성 부대는 340명 규모의 부대로 확대되었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토벌 때문에 1940년 10월에는 소부대로 나누어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0년 말에는 사령부를 선두로 부대 전체가 소련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주둔했다. 하지만 소련은 1941년 4월 추측국 일본과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고, 따라서 소련은 만주에서 일본과 충돌할 가능성을 줄여야 했고, 이 때문에 김일성 측의 유격대는 소련 영내의 야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42년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패하자 소련은 항일유격대원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해 8월 소련은 제88특별여단을 만들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제88특별여단에 편성되었고, 항일전을 치를 날을 소련에서 준비했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인물로는 최용건, 김책등이 있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은 그해 7월 대일전쟁에 대비해 정보요원을 차출했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은 만주와 조선에 투입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의 관동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여러지역들을 해방시켰지만, 정작 김일성 측 부대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렇게 하여 김일성은 대일전에 제대로 참전해 보지도 못했고,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참고문헌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하루끼, 창비, 2014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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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넘었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북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특히 역사의 경우 그러하다. 가까운 곳에 있지만,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북한의 역사에 대해 필자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최근 북한을 공부하기 위해 김성보 교수가 쓴 북한의 역사를 읽었다.

 

1. 과연 북한은 적화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북한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네이버 뉴스 기사에 북한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 마다 북한은 한국을 적화통일 하고 싶어 한다.”라고 주장하며, 반북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북한이라는 나라는 믿을 만한 세력이 아니고, 적화야욕이 가득 찼기에,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남북평화 노선은 적국 북한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그러나 트럼프가 남북 평화를 얘기하면 입을 다문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북한의 역사를 모르고서 하는 일종의 반공주의적인 프로파간다다. 물론 1960년대나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았던 것은 맞는 말이다. 따라서 북한은 1968년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을 남한에 침투시켜 박정희를 사살하려 했던 것과, 울진 삼척 지역에 120명을 침투시켰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미국의 함선을 북한이 나포했던 푸에블루호 사건도 그때 일어났다. 물론 이 이면에는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투쟁과 베트남 전쟁에서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투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고, 오히려 역으로 대한민국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게 피해망상적인 반공주의를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만들었다. 그 전략에 실패를 맞본 북한은 이 전략을 버리고, 1970년대 들어서 7.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노선을 수정했다. 소위 대한민국의 극우세력들이 말하는 적화통일노선은 1960년대 북한이 스스로 폐기했다는 얘기다. 거기다 남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차이는 1980년대 남한이 앞섰다. 즉 현재 대한민국의 반북주의자들이 얘기하는 적화통일론은 1950,60년대 북한을 바라보던 관점에서 바라본 시대역행적인 관점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말했듯이 한국도 변하듯이 북한도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극우세력들이 주장하는 적화통일론에 1도 공감할 필요가 없다.

 

2. 북한의 경제

 

위에서 상술했듯이 한국전쟁과 1960년대 시점에서 남북한을 놓고 보자면 북한은 분명히 남한보다 잘살았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을 전쟁 끝날 때 까지 받았던 북한은 전쟁이 끝난 뒤, 경제재건에 앞장섰다. 1950년대 후반에는 천리마 운동이라 하여 경제를 발전시켰고, 그 덕분에 당시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기의 한국보다 잘살았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북한은 군대를 현대화시키는데, 많이 투자했고,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 남한을 압도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력이 그리 낙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경제가 위태로워 진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80년대의 북한은 경공업과 식량 생산에 있어서, 국가가 제시한 할당량에 못 미치는 생산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을 시작으로 동구권의 몰락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이 끊겼고,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연방의 옐친정권은 북한을 독재정권으로 보며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가 덮쳤고, 이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는 극심했으며, 국가에서 실시하던 배급제가 끊겨 인민들이 아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동유럽 해체 이후 북한이 동유럽이나 소련처럼 붕괴될 거라 믿었던 미국은 북한이 망하도록 고립시켰다. 그 결과 1990년대 북한이 겪어야 했던, 경제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김일성 사후 김정일 집권 기간인 1990년대 중후반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 사태로 인하여 200만 명의 북한 인민들이 아사했다.

 

3. 북한의 체제는 사회주의를 따랐는가?

 

북한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북한은 과연 사회주의 국가가 맞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일제 패망 이후 소련 군정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북한은 분명 소련식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었다.

 

그러나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을 기점으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고, 그해 8월에는 몇몇 파벌세력들이 김일성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면서부터 북한의 체제는 점차 인민민주주의에서 스탈린주의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김일성은 1960년대 중소분쟁시기 마오이즘의 영향을 받은 주체사상을 만들어 자신의 통치에 이를 적용했다.

 

그 주체사상의 폐해가 극에 달한 것이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부터다. 이때부터 북한 체제는 일당권력에서 더 나아가 일인권력을 구축했고, 1980년에는 그의 아들 김정일 까지 가세하여, 권력 세습의 틀을 마련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그리고 차우셰스쿠도 해내지 못한 권력 세습을 북한이 해냈다.

 

따라서 북한은 1972년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완벽히 적용하면서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버린 거라 볼 수 있으나, 그 이전의 북한사회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담긴 체제였던 것은 맞는 말이다.

 

4.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최초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전쟁이다. 3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3백만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100만 이상의 양측 군인들이 사망했다. 세계최강대국인 미국도 이 전쟁에서 3만 명 이상의 병사가 전사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극우적인 시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이라는 전쟁을 대한민국을 지킨 전쟁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봄으로써, 전쟁 시기 있었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의식을 갖는다.

 

물론 한국전쟁은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고, 전쟁시기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자유민주수호로 미화하는 세력들은, 북한에 대한 적대의 식을 부추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반북주의로 인하여 감춰진 한국전쟁의 진실은 인민군이 했던 양민학살 보다 대한민국 국군과 극우청년단체에 의하여 벌어진 양민학살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인민군 학살이 1이면 국군의 학살은 6,7이다. 이는 진실화해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거라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야만적인 폭격으로 100만 이상의 북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한국전쟁을 대한민국의 관점 즉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보다보면, 이러한 것들은 외면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한국전쟁은 분명 북한이 일으킨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는 하나, 잔인성이나 비인간성에 있어서 우리 측이 더 했고, 이를 토대로 하여 한국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

 

5. 미국이냐 소련이냐 분단의 책임에 대하여

 

극우주의자들은 해방 이후 분단의 책임은 미국보다 소련에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탄압한 쪽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당시 해방군으로 들어온 소련군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자치활동을 인정했고, 자신들이 지원하던 김일성과 협력하도록 했다. 즉 들어오자마자 남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죄다 해산시켜 버리고, 총독부 행정기관을 그대로 유지하여 친일세력들을 앞세웠던 미국의 처사하고는 달랐다.

 

굳이 소련의 한계를 뽑자면 신의주 학생 사건과 신탁통치 논쟁으로 인하여, 반탁을 주장하던 조만식을 구금해버린 사건일 것이다. 이를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건 소련은 초기에 인민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만식을 중심으로 모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하고 협력하고자 했었다.

 

거기다 소련은 한반도를 집어 삼키겠다는 욕심에 차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서의 세력확장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의 한반도 적화의 야욕에 차있었다느니 혹은 분단 최대의 원흉이 소련이니 하는 주장은 역사를 왜곡한 주장이다.

 

6. 현재의 북한을 바라보며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은 그의 아들 김정일이 통치했고, 김정일 사망 이후 그의 아들 김정은이 통치하게 되며, 현재까지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고, 경제를 조금씩 회복해 나갔고, 김정은 정권 들어서면서,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시골 가면 많이 낙후된 도시들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됐다.

 

발전하고 있는 북한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앞으로의 북한이 얼마나 발전하고, 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북한을 얼 만큼 더 잘 아느냐 에서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북한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북한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던 필자로선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몇몇 부분은 필자의 견해하고는 안 맞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저자의 글에 공감하며 읽었다. 이 책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음에는 작년에 출판된 김정은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북한의 역사를 좀 알았으면 한다.

 

북한을 바르게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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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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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인 올해는 남북한의 각 정부가 들어선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1948년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아래 놓여있다. 더군다나 6.25전쟁이라는 민족적인 비극과 그 잔재가 서로와의 협력과 교류를 막았고, 거기에는 외세의 힘이 작용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북한이라는 주제를 말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요즘 다시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2018년 4월 27일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만났고, 2018년 6월 12일에는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만나 북미정상회담을 가졌었다. 변해가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북한을 제대로 알고 공부하자”이다. 그렇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아래 한국도 북한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 하거나 편협한 눈으로 바라봤지, 이성의 눈을 가지고 서로가 학술적으로 연구할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는 이성의 눈을 가지고 북한의 역사를 연구한 명저일 것이다. 이번에 쓰는 서평은 이 책의 내용을 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 보단, 책에 나온 북한 현대사를 순서대로 나열해볼까 한다.

1. 김일성의 탄생과 항일무장투쟁 그리고 일제의 패망(1912~1945)

1912년 4월 15일, 평양의 교외 대동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바로 김성주(김일성)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1917년 조선인국민회의 결성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참가했던 조직은 오래가지 못했고, 김형직은 체포되었다가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그때 김일성도 만주에 갔었다. 그 뒤 소년 김일성은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외조부의 교회학교에 다녔고, 1927년에는 동만주 대도시 지린에 있는 유원 중학에 입학했다. 이때 김일성은 레닌이 쓴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한다. 1929년부터 여러 조직에 가담했던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체포당해 투옥되기도 했고 그 시기 리종락이 결성한 조선혁명군에 참가했다. 김일성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부터인 걸로 추측하고 있다.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은 1932년 안투라는 지역에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1933년 2월, 김일성은 왕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왕칭유격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왕칭유격대대에서 해임되었고, 1935년 왕칭으로 다시 돌아와 동북인민혁명군 정치위원으로 부활한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에 속해있던 김일성은 1937년 그 나름의 신화를 만들었다. 보천보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보천보 전투는 북한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 북한의 자료는 사실상 소설에 가까울 정도이긴 하다. 1937 6월 김일성의 부대가 보천보를 습격했을 때 그들이 주재소에서 사살했던 것은 오발로 죽은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2살짜리 유아였다. 그러나 습격하고 난 뒤 일본군 경찰과 군인이 김일성 부대를 추격했는데 추격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경찰 및 군인이 7명 이상이 죽고 14명이 부상당했다. 븍한의 과장된 주장을 떠나서 보천보 전투는 당시 대대적으로 이슈가 됐던 것만은 사실이다.

보천보 전투 이후인 1938년 동북항일연군에도 위기가 닥쳤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파죽지세로 중국 전선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전선의 조금은 교착되기도 했지만 1938년 까지만 해도 전황 상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리해 보였다. 1938년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선 일본군은 동북항일연군 조직을 와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다. 1939년과 1940년 만주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고난 그 자체였다. 1940년 3월 김일성 부대는 생각보다 놀라운 항일 업적을 남겼다. 홍치허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홍치허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는 일본의 마에다 부대를 섬멸했고, 1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전투에서 사살했다. 이후 김일성 부대는 1940년 10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가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 정착하게 된 건 1941년 2월쯤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가 연해주에 정착한 것과는 별개로 세계정세는 희망적이지 않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정일은 그 당시 소련에서 태어났다.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이 체결 된 이후 히틀러의 독일은 1941년 6월에 소련을 침공했고, 히틀러의 동맹국이던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942년부터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전세는 연합군측으로 기울어졌다.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소련 연해주에서 제88특별여단으로 편성되었고, 후에 있을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1945년 4월 말 히틀러가 자살 한 뒤 5월 8일에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하고, 미군이 오키나와 점령에 성공하고 난 이후 미국은 일본 본토상륙작전을 망설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한 뒤 만주에서부터 밀고 내려왔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단련된 소련군은 일본군기지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한반도까지 밀고 내려갔다. 김일성의 88특별여단은 참전하지 못했지만, 후에 북한정권에 소련파의 핵심이 될 정상진과 같은 몇몇 소련파 출신 인물들은 소련군으로 참전해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아주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한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은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치러졌고, 김일성은 9월 5일 하바롭스크를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군함을 타고 9월 19일 원산에 상륙했다. 따라서 “김일성 동지께서 왜놈들을 족치며 해방군과 함께 들어왔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그 해방군은 김일성 부대가 아닌 소련군이었다.

2. 해방정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5~1948)

해방은 아주 갑자기 찾아왔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이자, 외세의 힘에 의한 해방이었기에 해방 이후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으로 활동했고, 북조선에서도 건준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당시 북조선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인물은 우익 민족주의 계열인 고당 조만식이었다. 조선의 간디라 불리던 조만식은 독립운동가로서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였던 조만식은 소련과의 마찰이 있었고, 결국 그는 북조선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9월 19일 김일성이 원산에 상륙함으로써 귀국했다. 귀국한 김일성은 소련의 힘을 얻어 북조선 분국을 설립하고, 10월 14일 평양시민대회에서 연설했다. 평양시민대회는 김일성이 공개석상에서 처음 내비치게 된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이 젊은 이였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실제 김일성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일성 가짜설과 동명이인 설은 여기서 생긴 것 같다.

소련의 지원하에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1946년 2월에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3월에는 토지개혁을 실행한다. 토지개혁 이후엔 김일성 종합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1946년 7월엔 남녀평등권법을 공포했고, 8월에는 북조선로동당을 결성했다. 이해 11월에는 박헌영의 주도로 남조선에서 남로당이 결성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남쪽은 좌우익의 대결이 극심했던 데에 비해 북조선은 소련 군정 하에서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차츰 진행해 나갔다. 김일성 또한 좌우합작에 관심을 가졌는지 좌우합작운동시기 여운형을 만나기도 했고, 1948년 남북협상 시기에는 김구를 만나 통일을 논의하기도 했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됐고 1948년 들어서 남북모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북한 또한 남한처럼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길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수상은 김일성, 부수상은 박헌영, 제3부수상은 홍명희, 농림상은 백남운등 주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거나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 북한의 고위직을 점했다.

3. 한국전쟁(1948~1953)

1948년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됐다. 하나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나라 모두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경우 남침을 허가 받기 위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설득시키느라 고군분투했고, 이승만의 경우 틈만나면 ‘북진통일’ 외쳐대기 십상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1950년이 돼서야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줬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1월 대한민국에서의 미군철수가 진행됨에 따라 애치슨 라인이 발표됐다. 즉 스탈린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 게임이 된 것이었다. 스탈린의 허가를 받은 김일성은 모택동으로부터 조선족2개 사단을 받은 뒤, 남침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사실 분단 정부 수립 이후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었다. 크고 작은 교전을 통하여 북한은 대한민국의 군대 상황을 파악한 셈이다.

1950년 6월 23일과 24일 전방에 있던 조선인민군은 공격명령을 받았다. 공격명령을 받은 인민군은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탱크와 비행기 야포 박격포 등을 지원받은 북한군의 전력은 한국군에 비해 너무나도 강했다. 인민군은 개전 3일 만에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에는 다시 진격해 나감으로써 대전과 전라도 일대를 점령한 뒤, 8월에는 포항까지 점령함으로써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기대와는 달리 박헌영이 기대한 남로당 봉기는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대통령 이승만은 바로 도망치면서 한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여 북한의 진격을 며칠간 늦췄고, 예상과는 달리 미군의 개입은 매우 빠르고 적극적이었다. 미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250대 이상의 T-34전차를 앞세워 8월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었다. 그러나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전세는 한미연합군쪽으로 기울었고, 1950년 10월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돌파했으며 미군도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10월 말에는 평양은 물론이고 압록강 까지 밀렸지만,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아래 중공군이 전쟁에 참가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용인까지 밀렸다. 1951년 3,4월 쯤 리지웨이가 이끄는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회복하고 3.8선 부분까지 북진했다. 그 시점인 1951년 7월부터 휴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됐다. 휴전 협상은 양측의 포로문제와 영토를 어디에 그을까 하는 문제가 핵심이었지만, 양측 포로문제에서 합의를 잘 보지 못해서 1953년 7월이 돼서야 휴전이 성사됐다. 즉 한국전쟁은 무차별한 파괴와 살상을 남긴 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으로 끝났고, 양측의 민간인은 수도없이 학살당했다. 특히 개전 초반 국군이 자행한 보도연맹 학살 사건만 하더라도 최소 20,30만 이상의 민간인이 짧은 기간 동안 학살당했고, 인민군 또한 인민재판을 통하여 적잖은 양민을 학살했다. 물론 그 규모나 범위면 에 있어서 한국군이 더 했다. 미군의 경우 노근리 학살이라고 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있긴 하지만, 한국전쟁시기 미군의 자행한 가장 광범위하고 잔인한 학살은 무차별 폭격일 것이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북한 전역에다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고, 사망한 민간인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폭격은 1953년 까지 지속되었다. 한국 전쟁 시기 미국은 총50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한국전쟁에 사용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38선 부근에서의 전투는 지속 되어 국군, 인민군 할 거 없이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갔다.

4. 박헌영 숙청과 8월 종파사건, 사실상 모든 권력을 김일성이 장악하다.(1953~1956)

무력으로 한반도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오판한 김일성은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책임을 물어야할 희생양이 필요했다. 희생양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정적은 바로 박헌영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개전 이전 박헌영이 주장한 ‘남로당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박헌영을 미제간첩이라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시기 김일성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박헌영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을 창당했던 그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계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40년대 까지 변절하지 않았고, 해방 후 남쪽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그의 노선을 따르던 이들이 바로 남로당이다. 남로당 인사들은 해방정국 시기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맞섰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박헌영이 미제 스파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면 1953년 3월 박헌영은 체포됐다. 죄목은 미제 스파이였다. 박헌영이 체포 된 이후 북한에서는 남로당 대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이 시기 이강국, 리승엽, 임화를 비롯한 남로당 계열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대부분의 남로당 인사들이 사형선고나 징역선고를 받고 숙청당했을 시기 북한의 전 부수상이었던 박헌영만은 사형시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남로당 숙청이후 북한의 모든 권력은 김일성의 것이 되어 갔다. 남로당 숙청에 위기감을 느낀 연안파 계열과 소련파 계열은 서로 연합한 뒤 김일성을 당내에서 제거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1956년 8월 종파사건이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소련의 후르시쵸프는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아주 강력하게 비판했고, 이는 동유럽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북한 또한 충격을 받았다.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 격하 운동 또한 북한의 연안파와 소련파의 8월 종파사건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연안파와 소련파의 계획과는 달리 8월 종파사건은 실패로 끝났고, 실패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와 소련파는 대거 숙청당한다. 8월 종파사건 이후인 1956년 12월 박헌영 또한 총살당했다고 한다. 8월 종파 사건 이후 자신의 정적을 웬만큼 제거한 김일성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되었다.

5. 김일성의 시대(1956~1994)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은 사실상 북한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북한 입장에선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을 것이다. 이 시기 북한은 소련과 중국식 경제개발에 영향을 받아 전후재건에 나섰다. 그 결과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57년에는 ‘제1차 5개년 계획’이 실행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경제 재건에 있어 당시 북한에 주둔해있던 중공군 또한 많은 도움이 됐다 한다. 중공군은 1958년이 돼서야 북한에서 완벽히 철수했다. 1959년 북한에서는 천리마 운동이 전개되었다. 천리마 운동은 ‘북한식 스타하노프 운동’이었다. 천리마 운동을 통하여 북한의 경제 상황은 많이 좋아졌다. 이는 1950년대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종말을 맞은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과 비교가 되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경제가 북한을 넘어서기 시작한건 1970년대 초중반 부터였다.

1960년대부터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베트남의 호치민이 중국과 소련의 물타기 외교를 했듯이 북한의 김일성 또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둘다 필요로 했을 것이다. 1961년 대한민국에서는 5.16 쿠데타가 일어나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부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대한민국에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제1의 국시로 삼은 정권이었다. 이를 안 북한은 박정희 정권을 ‘파쇼정권’으로 규정하고 반미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경제나 군사력 면에서 대한민국을 압도했었다. 당시 그들이 남북연방제를 주장했던 것도 어쩌면 “우리가 남반부를 평화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냉전시대는 참 긴장감 있게 전개되었다. 1961년 쿠바 사태와 베를린 장벽 설치로 3차세계대전의 위협이 닥치기도 했고,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수많은 최신식 무기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의 주장한 자유와 독립이라는 구호아래 단결한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미국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했던 1965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남조선혁명에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주, 이것이 우리 당이 일관하게 견지하고 있는 립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북한에서 만든 주체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1965년 김일성은 주체사상 자신만의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냈다.

베트남 전쟁은 점차 장기화 되어 갔다. 베트콩의 대미투쟁을 보던 김일성은 1966년 제2회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남조선혁명노선”을 채택한다. 즉 김일성은 베트남 전쟁처럼 게릴라 전과 간첩 침투를 통한 남조선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은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했다. 무장공비는 남파한 다음날 밤10시에 청와대 뒤에 있는 북한산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1명이 생포되고 나머지 30명은 사살됐지만, 한국측 사망자는 68명이나 되었다. 체포된 김신조는 인터뷰에서 “박정희 목 따러 왔다.”고 얘기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청와대 사건이 일어난 지 1일 뒤인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함정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었다. 나포 작전 도중 미국 승무원들은 1명 빼고는 전원 포로로 붙잡혔다. 이에 분노한 미국정부는 제7함대(미국 최강의 함대)를 한국 영해에 급히 출동시켰다.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북한은 “전투도 불사 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허세였을 것이다. 그런 한반도의 긴장감이 고조되던 가운데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아주 결정타를 날렸다. 구정 공세(테트 공세:Tet Offensive)가 바로 그것이다. 구정시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세를 가하자 미국의 관심사는 베트남으로 갔다. 따라서 한반도 긴장상황은 베트남의 구정 공세로 좀 약해진 셈이다. 대남적화 전략을 뿌리치지 못한 김일성과 북한이 1968년 11월 한 번 더 일으킨 사건이 있다. 그게 바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약100여명의 무장공비가 울진과 삼척에 상륙했지만 대부분 토벌 됐다. 토벌 과정에서 한국측 사망자는 약70명이나 된다.

김일성의 대남적화 전략은 도리어 박정희 정권이 강화되는 역효과만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가 매우 강화된 정권이었다. 김일성과 북한은 베트남식 전략을 어중간하게 모방했고, 그 결과 실패한 것이다. 1968년 시기 미국과 서유럽에선 68혁명의 여파로 사상적 사회적 발전을 거듭했지만, 대한민국은 북한의 도발로 인하여 반공주의 강화라는 역효과만 얻었다. 1969년부터 김일성은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후계자로서의 레슨을 시작했다. 1969년 그의 아들 김정일이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취임했다. 1970년 미국의 베트남 전 개입은 막바지로 들어섰다. 1972년 베트남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인 미국의 닉슨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미중수교를 맺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북한의 김일성과 대한민국의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하여 김일성은 사회주의 헌법 개정이라는 목표아래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했고,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남북한 둘 다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시작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4년 북한의 김정일은 ‘속도전’을 주창했고, 10월에는 ‘70일간 전투’를 제안했다. 즉 현재 뉴스에서 나오는 몇일 전투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북한의 상황과 더불어 10월 유신 이후 한국의 상황도 급변했다. 1973년 일본도쿄에서 야당의원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다 목숨을 잃을 뻔 했고, 1974년 4월 한국에서는 반 유신독재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베트남 전쟁 종결 이후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민주주의을 탄압하는가 하면 인혁당 사건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1976년 3월1일에는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한 문익환 목사와 김대중 후보를 포함한 13명이 체포되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한번 한반도 상황이 다시한번 긴장상황에 놓였다. 1977년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미군철수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 군부의 반발과 한국사람들의 반발로 미군을 철수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1979년 대한민국의 상황은 막장을 달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하려다 자신의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은 뒤 박정희 밑에서 세력을 키웠던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반발하여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전국에서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그 과정에서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전개와는 별개로 1980년대에 들어서자 북한의 경제사정도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까지만 비슷했던 생활수준은 1980년대 들어서 대한민국이 북한을 훨씬 압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력 면에서도 대한민국의 북한을 조금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 상황에서도 북한은 평양의 인민대학습당, 개선문, 주체사상탑을 잇달아 완성했다. 1983년 북한의 주도로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이 일어나서 한반도 관계가 다시 긴장관계에 돌입하기도 했지만, 1985년 9월에는 최초의 남북이산가족 상호방문이 실현되기도 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시작된 6.10민중항쟁으로 전두환 독재 정권은 막을 내렸다. 그해 11월 대한항공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소련, 중국,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다. 1989년 1월 고향이 북한출신인 현대그룹회장 정주영이 남북교류에 있어서 크나큰 관심을 보였고, 북한과 금강산개발에 대해 협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민주화 운동가이자 통일 운동가인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고, 1989년 7월 1일 외국어대학교 학생인 임수경이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여 남북 모두에게 큰 이슈가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방북하고 돌아온 임수경을 처벌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1990년에는 소련하고 수교하고 1992년에는 중국하고도 수교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중시하던 북한에게는 노태우 정권의 외교에 당황했을 것이다. 1980년대 북한의 경제는 점차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1991년 전 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구 공산권 국가들이 몰락했다. 이를 본 미국은 “북한도 조만간 망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거기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강력한 육군력을 자랑하던 이라크군이 미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완패했다. 이는 북한에게 있어 “미국과의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각인시켜 줬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에서는 각종 자연재해가 덮쳤다. 1990년대 북한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1993년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때때로 북한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기도 했지만, 과거 극단적인 메카시즘하고는 좀 달랐다. 1994년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닥쳤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전쟁준비까지 했었다. 미국이 검토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개전 초기 90일 동안에 사상자는 미군 5만2000명이고, 한국군은 49만명이 예상되며, 전쟁이 본격화되면 미군 전사자 8~10만 명을 포함해 군과 민간인 사망자는 100만 명에 이를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육해공군 1만 명 증강과 F117 스텔스 전투기의 증강, 항공모함의 근해 배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안을 채택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영삼은 절대적으로 전쟁반대에 나섰고, 그 결과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잘 넘어갔다. 전 대통령 카터의 방북 또한 전쟁위기를 넘기는데 크나큰 기여가 되었다. 이후 북한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수십년간 북한을 통치해오던 김일성이 사망했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충격에 빠진 북한은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이로써 김일성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6. 김정일 시대(1994~2011)

김일성이 죽고난 뒤 북한의 최고 권력은 김정일에게로 넘어갔다.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정일이 지지자와 세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썻던 전략은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김정일은 1995년 정초부터 부대 방문을 시작했다. 김정일에게 있어 가장 큰 위기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는 1938~1939년 김일성의 독립군 부대가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1996~2000년 북한을 덮친 대기근을 그 사건에 빗대어 고난의 행군이라 표현한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참으로 처참했다. 최소 60만에서 최대300만(서방측에서 과장했다는 주장이 있다.)되는 북한인민들이 굶어죽었다. 이처럼 1990년대 북한의 경제는 참으로 위태로웠다. 1997년에는 북한정권의 최측근인 황장엽이 망명했다. 1998년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자신의 정권 기간 동안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과의 평화와 협력을 추진했었다. 그 결과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6월 15일에는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김대중과 김정일이 만나는 모습을 본 몇몇 사람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기도 했다.” 그해 10월 울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일과의 회담을 하면서 남북관계에도 변화가 보이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에도 그 나름의 변화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2001년 그 해 당선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며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2001년 9월11일 오사마 빈라덴이 9.11테러를 일으켰다. 영상속의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9.11테러를 시점으로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를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평화를 위한 노선으로 나아갔다. 2002년과 2003년 남측 공연단이 평양으로 가서 감동적인 공연을 하기도 했었다. 김대중 정권을 이은 노무현 정권 또한 원칙적으로 남북평화노선을 지지했다. 그와는 별개로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지난 걸프 전쟁 때처럼 이라크군은 미군한테 개전 초반에 궤멸 당했다. 심지어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기까지 했다.

2004년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은 북한을 방문하여 납치피해자 가족 5명이 일본으로 귀국하는 등 북일관계도 점차 변화해 가는 것 같았고, 2005년 9월에는 6자회담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국과 북한간의 마찰로 인하여 남북관계는 다시 금이 가는 듯 보였다. 2006년 7월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에는 지하 핵실험을 했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는 평화의 길을 선택했기에 임기 말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었다.

2008년 기업인 출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북한을 매우 적대시 하는 정권이었다. 남북관계가 나빠짐과 동시에 2008년에는 김정일의 건강 또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으로 2008년 10월 북한은 테러지원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2009년 북한은 다시 핵실험을 했고, 이번엔 외국인 기자 납치사건까지 일어났다. 2010년 4월에는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고, 그해 11월 북한은 연평도를 포격하여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었다. 다행히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1년 남북 상황은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2011년 12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이 사망했다. 김정일의 죽음으로 김일성 사망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눈물바다가 되었었다. 이로써 17년간 지속되던 김정일 정권 또한 막을 내렸다.

7. 김정은 시대(2011~?)

김정일 사망 이후 그의 뒤를 이은건 바로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었다. 김정일 아들 중에 김정은은 가장 막내였다. 1983년 김정일과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은은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살며 학비가 수천만 원대 하는 국제학교를 다녔다. 쉽게 말해 부르조아 교육을 스위스에서 받은 것이다. 김정일의 개인 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을 첫째 정남이나 둘째 정철보다 훨씬 아꼈다고 한다. 김정일 사망 이후 정권을 잡은 김정은은 2011년 12월 30일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2012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2년 12월에는 북한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데 성공했다. 2013년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은 정전 협정을 백지화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허세였다.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은 핵실험을 감행했다.

2013년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북한에서는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김정은이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재판에 세워 사형을 선고한 뒤 처형해 버린 것이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하기 이전까지 한국의 북한전문가들 중에는 장성택을 높이 평가하며 김정은에게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김정일 사망 이후 ‘SBS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장성택을 언급하며 앞으로의 북한의 변화상을 예측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그러한 추측은 의미가 없어졌다.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을 비난 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물론 자신의 고모부를 말 같지도 않은 죄목을 씌어 처형한 건 분명 잘못된 일일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장성택이 “마약을 유통한 범죄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의 주장을 꾀꼬리처럼 따라하는 주장이기에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분명한건 장성택 처형 이후에도 김정은 정권은 건재하고 몇몇 이들의 기대 혹은 바람과는 달리 김정은의 내부 지지 세력은 견고하고, 북조선 국민의 지지는 생각보다 높은 것 같다.

김정일 사망 이후 몇몇 이들은 “김정은 정권은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이 또한 의미가 없어졌다. 2018년 들어서 남북관계는 다시 좋아지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정신을 계승한 문재인 정부 또한 마찬가지로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그랬듯이 남북 평화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앞으로의 김정은 체제는 어떻게 가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8. 글을 마치며

책을 읽고 난 뒤 지금 까지 내 나름 찾은 자료와 읽은 책의 내용을 참고하며 총체적으로 북한 현대사를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쓴 서평 내용 중 김일성과 김일성 집권기 일어난 얘기를 많이 다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북한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는 다르게 김일성이라는 지도자가 수십 년간 통치해왔고, 권력을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까지 했다. 따라서 북한사를 정리하다 보면 김일성에 대한 내용은 필연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롭고 재밌게 읽은 파트는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파트였다. 사실 국내에 출판 된 책들 중에서 김일성의 항일 투쟁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은 거의 없다. 있다 하더라도 1992년 창비 출판사에서 출판 된 책 외에는 찾기 힘든 듯하다. 그리고 북한에서 출간했다던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회고록이라 하기엔 신화와 과장이 너무나도 많은 책이다. 북한의 체제를 너무나도 추종하여 북한 찬양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세기와 더불어>를 극찬하지만,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북맹은 좌우할거 없이 존재한다. 한쪽은 메카시즘적인 관점을 들이대며 무작정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려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상한 논리까지 만들어 가며 “현 대통령이 적화통일을 원한다.”라는 말인지 방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은 소리를 해대고 있다. 다른 한쪽은 북한을 너무나도 추종하여 “조선의 군사력은 미제를 압도한다, 조선의 핵무기는 미제를 초월한다.”와 같은 판타지 소설과 같은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해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선 양극단의 주장을 배척한 뒤 이성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봐야 한다.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선 북한에 대한 역사지식은 필수일 것이다. 평소 북한문제에 대해 관심이 매우 많은 나는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를 읽었다. 아주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의 내용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일반 독자들이 있을 것이라 본다. 오히려 독자들은 정보로 가득한, 건조한 문장에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내용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루끼 교수는 학자로서의 도리를 지키며 이 책을 썻다. 어느 한 사건을 정치적인 입장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팩트와 자료를 통해서 최대한 팩트를 나열하는 쪽으로 책을 썼다. 제목 달기도 전혀 문학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책에 사실만 담담하게 담아냈다. 북한 현대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짧고 간략하게 썼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호평 받을 만 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이 책의 저자를 가지고 종북좌파취급하는 일부세력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색안경을 끼고, 자신들만의 잣대를 가지고 자신들과 생각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북한사를 연구해온 하루끼 교수를 종북좌파 취급하는 그들이야 말로 편향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 북한사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책을 읽었다. 남북관계가 더 좋아진다면 이와 같은 책들이 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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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는 2018-07-2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실제 김성주가 참여했는지 여부도 확실하지않는 보천보를 봉오동대첩마냥 극찬한 좌빨갱이인데 신뢰를 보내니 김남기도 좌빨성향이 강한가보군 그리고 부마폭동은 이미 진압했떤게 역사적팩트임 신문에도 나와있음

NamGiKim 2018-07-24 17:25   좋아요 0 | URL
넌 내글을 읽긴 한거냐? 난 봉오동과 같은 대규모의 전투가 아니라고 했음. 이 멍청이는 독해력도 떨어지내.

NamGiKim 2018-07-24 17:31   좋아요 0 | URL
에라잇 이 빠가야로야. 내가 쓴거 인용하마

˝사실 보천보 전투는 북한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 북한의 자료는 사실상 소설에 가까울 정도이긴 하다. 1937 6월 김일성의 부대가 보천보를 습격했을 때 그들이 주재소에서 사살했던 것은 오발로 죽은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2살짜리 유아였다. 그러나 습격하고 난 뒤 일본군 경찰과 군인이 김일성 부대를 추격했는데 추격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경찰 및 군인이 7명 이상이 죽고 14명이 부상당했다. 븍한의 과장된 주장을 떠나서 보천보 전투는 당시 대대적으로 이슈가 됐던 것만은 사실이다.˝

라고 한게 김일성 찬양이냐 거 참 웃기는 놈일세.ㅋㅋㅋㅋㅋㄱ 논리도 독해력도 매너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NamGiKim 2018-07-24 17:32   좋아요 0 | URL
너부터 공부하고 와라 무논리로 아무말 대잔치나 하지 말고^-^

NamGiKim 2018-07-24 20:13   좋아요 0 | URL
그리고 내가 가끔 안읽은 책 디스할때, 익명으로 책 안읽으면서 쓴다 뭐라 씨부리는데 당신 부터 책 읽어라. 다는 댓글 마다 조낸 유치한 수준이 다 보이네. 내가 보기엔 책 안읽은 티를 내는건 당신인듯 한데?ㅋㅋㅋ 그리고 나 스스로 좌빨이라 생각함. 그래서 뭐 어쩔건데? 면대면으로 만나면 암말도 못하며 사는 놈이 내가 쓰는 서평에 꼭 딴지를 걸지.ㅋㅋㅋㅋㅋ
 
박헌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7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내가 박헌영이라는 이름을 처음알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김두한을 비롯한 극우파 미화 논란이 심했던 드라마 야인시대를 정주행 하면서 부터였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박헌영이 첫등장 했던 것은 50화 이후 해방정국 파트였고 거기서 그려진 박헌영의 모습은 말 그대로 '김두한의 친구 정진영을 공산주의에 세뇌시켜 남조선을 공산화 시키려는 사악한 빨갱이'였다. 박헌영이라는 존재가 궁굼했던 나는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에서 그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 형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1945를 보게 됐는데 거기서도 박헌영이 등장했었다. 드라마 서울 1945는 일제시대와 해방전후사 그리고 한국전쟁까지의 우리 현대사를 좀 더 균형적인 시각에서 다룬 수작이었기에 박헌영을 '김일성과 더불어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비판을 했지만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혁명가로써의 박헌영'도 나름 중립적인 시각에서 조명했었다.

서울 1945에서 신구할아버지가 연기한 여운형 선생에 매우 감명받았던 나는 2015년 부터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매우 존경하게 되었지만 일제시대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이끌고 해방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박헌영에 대해 나름의 호기심을 갖기도 했었다.


 2015년 말에서 2016년 초 나는 청년독립군이라는 학생단체에서 한 5,6개월 정도 있었고 각종 시위에도 열심히 참가했었다. 청년독립군에서 활동하면서 청년독립군쪽 NL성향이 강한 분들과 항상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주제가 있었다. 하나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었고 다른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단행한 박헌영 숙청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은 "박헌영은 억울하게 숙청된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2016년 3월 초 일본 도쿄 여행을 떠나기전 박헌영 평전을 구매했고 5박6일간의 도쿄 자유여행을 마친뒤 돌아온 첫째날 부터 안재성 저자의 박현영 평전을 펼쳤고 주말 오전 편의점 알바를 했던 나는 편의점 알바중에도 이 책을 매우 재밌게 읽었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우쳤던 진실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고 서평을 적어보고 싶었기에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쓰게 됐다.


1. 박헌영 일대기


박헌영은 1900년 충남의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학업성적이 좋은 박헌영은 대흥소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고보에 진학했고 YMCA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YMCA에서 영어를 알게된 박헌영은 10대 후반에 미국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박헌영도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될 위기에도 몰렸었지만 퇴학은 모면했고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유학 준비에 열을 가했다. 미국유학이 매우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한 박헌영은 미국유학의 꿈을 포기한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상하이 망명생활중 후에 동지가 될 김단야와 임원근을 만났고 1921년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여운형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했고 국내로 귀국하게된 박헌영은 1925년 주세죽과 결혼했고 경성의 유명한 중국집 아서원에서 조봉암을 비롯한 동지돌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1925년 제1차 공산당검거사건이 터졌을 당시 상해에 있던 여운형과 모스크바에 있던 조봉암에게 보내려고 했던 보고서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재판기간 도중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 기간 도중 박헌영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어가며 미친척을 제대로 했고 결국 1927년 11월 석방됐다. 


이듬해인 1928년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했고 모스크바로 가던 중 딸 박비비안나가 태어났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은 1929년 엘리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국제 레닌학교에서 유학했고 이 시기에 박헌영은 자신의 호를 이정이라 지었다. 1931년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떠나 상해로 갔고 1932년 윤봉길의사의 4.29의거 이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된 뒤 국내로 압송됐다. 재판에서 6년형을 받았으나 5년만인 1939년 석방됐다. 1939년 석방된 박헌영은 이관술, 김삼룡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창설했다. 경성콤그룹을 창설한 박헌영은 비밀활동을 계속하며 소련쪽과 교신하면서 기관지를 발행하는등 여러 사회주의적 활동을 비밀리에 하였다. 1941년 경성콤그룹이 일제의 검거로 해체되었고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로 피신했고 태평양 전쟁시기 광주 벽돌공으로 위장하여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까지 자신의 몸을 숨겼다.


1945년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처음에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했지만 여운형과의 의견 갈등을 빚었고 결국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박헌영의 노선은 대체로 소련의 노선을 고수했고 폭력투쟁노선를 고수했다. 1945년 12월 박헌영과 조선 공산당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국내에서 소련의 노선을 지지하는 바람에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으로 부터 민족반역자 취급받으며 공격받기도 했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회의 당시 박헌영은 미소공동회의를 지지했지만 제1차 미소공동회의가 결렬되자 다시 노선을 폭력투쟁으로 전환했다. 1946년 여름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탄압받았지만 신전술이라는 강경한 대중투쟁 노선을 바꾸지는 않았다. 1946년 미군정 아래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승만 세력과 마찬가지로 좌우합작을 방해했고 이는 결국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론 박헌영을 따라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맞서 파업과 투쟁을 계속했고 그 상황에서 박헌영은 월북했지만 9월 총파업과 대구10,1사건과 같이 미군정에 맞선 대투쟁이 남한에서 일어났다. 


1946년 11월 박헌영은 남로당을 창설했지만 1946년부터 3.8선을 왔다갔다하다 북한에 정착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된 뒤 남북은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1948년 4월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이 제주4.3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1948년 8월에는대한민국이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상은 김일성이 부수상은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이후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으로 인한 통일을 생각하게 됐지만 초반에 스탈린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고 1950년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제외되면서 스탈린은 남침을 허용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이 시작되는 동시에 남조선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희망없는 거짓말을 했다. 박헌영의 말을 믿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기습 남침했다. 전쟁초기 T-34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거침없이 진격했다. 미군과 유엔군의 지상부대가 참전했지만 8월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그러나 전쟁기간동안 남한내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밀렸고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1951년 초 38선 부분까지 유엔군을 몰아냄으로써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박헌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국내의 빨치산 세력은 남한내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다가 결국 대부분이 소탕당했다.


박현영의 거짓말에 분노한 김일성은 1953년 그를 체포했고 박헌영을 미제 간첩으로 몰았다. 그의 측근이라 할수 있는 리승엽과 이강국은 미제 간첩혐의로 숙청됐고 북한내에 있던 남로당 세력들은 1955년 쯤에 사실상 씨가 말렸다. 남로당 세력이 사실상 전멸했음에도 소련과 중국의 압박으로 김일성은 박헌영을 쉽게 죽이지 못했지만 1956년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을 하면서 박헌영도 1956년 12월에 총살당한다.


2.박헌영은 미제 간첩일까?


박헌영은 남한에서는 빨갱이 북한에서는 미제스파이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남북모두에게 잊혀졌기에 남북 모두다 제대로된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북한의 박헌영 미제 스파이론과 심지어 그가 일제시대부터 일제와 미제에 빌붙어 간첩노릇을 해왔다는 이중첩자론은 입증할 근거가 희박하다. 저자 안재성씨는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하여 박헌영의 미제 간첩론을 반박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중엔 "1941년 광주의 벽돌공으로 숨기전 미제간첩질을 하다 자기 혼자 살기위해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은 뒤 도망쳤다."는 허무맹랑한 자료도 있을 정도다.이 글을 반박하자면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국하고 전쟁을 사작하게 되는 시기인데다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기때문에 적국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는다는 설정자체가 오류고 일제에게 팔아먹었는데 일제를 피해 광주의 벽돌공으로 위장한다는 설정 자체부터가 오류다. 이렇듯 북한에서 제시한 미제간첩론은 터무니 없는 주장들이 많다.


 북한말대로 박헌영이 미제간첩이라면 도데체 어떻게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유학하고 1948년 북한의 부수상 자리에 오르고 북한에서 숙청되고 난뒤 왜 남한에서는 미제를 위해 간첩질을 한 박헌영이 어떻게 칭찬받지 않고 빨갱이라 욕을 먹는 것에 대해 도데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걸까? 따라서 박헌영은 미제 간첩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보고 개인적으로 박헌영은 미제간첩이 아니라고 본다. 즉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오히려 미제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이 더 논리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3. 글을 마치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청년독립군 내에서 김일성의 박헌영 숙청에 대한 입장에서 갈등하면서 부터 정말 북한의 주장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이 박헌영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숙청하면서 일인독재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됐다. 책을 보다보면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사진과 이력을 정리한 페이지가 나오는데 거기 나온 인물중에 70%는 북한정권에서 숙청된 인물들이었다. 북한 정권이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는 바로 스파이 혐의 였지만 과연 그들 중에 정말 미제간첩이 있기는 한건지 의심이 된다.


 무엇보다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자신의 똥까짐 먹어가며 투쟁한 박헌영을 미제스파이로 모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저자 안재성씨와 같은 입장이다. 거기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정권에서 정적들을 숙청했던 방식이 1930년대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을 장악하고 나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주체들을 하나 둘씩 숙청해나간 방식과 1940년 멕시코에서 죽은 트로츠키를 숙청한 스탈린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2년전 박헌영 미제 간첩론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주사파들의 주장에 매우 반대했던 나는 그들이 혐오스럽기 까지 했었다. 물론 현재는 그들의 입장도 나름 존중하는 쪽이다. 그러나 아닌것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고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했던 스탈린주의식 정적 숙청에 대한 그들의 옹호를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이 책을 2년전에 읽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당시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저자 안재성 선생의 필력이 매우 좋았기에 재밌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방 이후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 시기 좌우합작을 방해했던 박헌영의 행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거기에 대한 비판 또한 없었던것 같다. 그래도 북한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반박하는 박헌영 관련 서적으로선 매우 좋은 책일 것이다. 조선의 사회주의자이자 혁명가인 박헌영을 알고 싶은 이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앞으로 박헌영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이라도 어느정도 재조명 받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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