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 관련한 리뷰를 거의 7개월간 안했네요.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여러 차례 연기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끔씩이라도 시간이 나면 긴 리뷰를 남기겠습니다.
(The Veneer of Civilization 인트로 영상 장면)
1946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어스틴에서 태어난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은 22살이 되던 해인 1968년 징집장을 받고, 미군에 입대하게 됐다. 징집장을 받은 오브라이언은 부모님과 점심 식사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복무한 그의 부모님은 아들인 오브라이언을 베트남에 보내게 됐다.
(팀 오브라이언,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인 미라이 학살에 대해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는 오브라이언의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화면을 베트남으로 바꿔 방송의 한 구절을 보여준다.
“모든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해라!”
(베트남 전쟁 당시 매주 발생하는 미군 전사자 수치, 미국의 언론들은 이를 통해 술 마시고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과 베트콩의 사망자가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영국의 기마 경찰들도 보인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68혁명 당시 파리는 혁명의 열기로 넘쳤다. 파리의 젊은이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 그리고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들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스웨덴 또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팀 오브라이언이 미군에 입대한 1968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습으로 시작된 구정 대공세는 미국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에서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를 촉발시켰으며, 이른바 68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스웨덴·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영국·서독·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 그리고 일본까지 격렬한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에 휩싸였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68혁명을 계기로 체게바라식 무장투쟁을 도시에 적용한 무장활동을 벌이는 단체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가 등장했고, 일본에서는 이와 비슷한 적군파(赤軍派)가 등장했다.
(미군 본토에서 벌어진 건물 파괴,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방화가 일어났고 건물이 불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잔혹성을 알리는 반전 시위대)
(흑인을 무자비하게 체포 및 조사하는 미국 경찰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깃발을 들고 반전시위를 하는 미국의 젊은이들)
구정 대공세로 확장된 반전 운동은 미국에서 많은 의제를 사회이슈로 불러왔다. 미국 사회는 흑인 문제, 여성 문제, 전쟁 문제, 사회 문제, 장애인 문제 등 온갖 모순점들이 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드러났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북베트남을 향한 미군의 폭격은 계속 됐다. 한편 미국의 언론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전사자 수치를 일일이 보도를 했는데, 이는 미군 전사자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에서였다. 결국 이런 점이 심화되며,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게 됐고, 미국 민주당은 다른 후보를 내세워 대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다큐멘터리의 한 내용을 보자.
“그 후 몇 달간, 남베트남의 전쟁터와 시골에서 진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척이 너무 더디고 인명 피해가 컸기에, 전쟁을 반대하는 또 다른 전쟁이 미국 본토에서 심화됐고, 계층과 세대가 서로 등을 돌렸으며, 정치 지도자들을 향한 불신이 퍼졌습니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을 끝낼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였습니다. 전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다른 전쟁에서 싸워야 했을 때, 직면하지 않아도 됐던 문제와 선택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가? 자신이 믿지 않는 전쟁에서 싸우라고 한다면 어떡해야 하나? 군인은 은밀한 적과 그들이 지켜야 하는 베트남 민간인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케산의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뚫기 위해 투하된 네이팜 폭탄이 터지는 장면)
사실 구정 대공세는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구정 대공세 10일 전 시작된 케산 포위전은 77일이 지나서야 끝났다. 미국은 북베트남군이 만들어 놓은 케산 포위망을 뚫기 위해, 막강한 화력을 쏟아부었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수천 명에서 1만 5,000명의 전사자를 낸 채, 물러나게 됐다. 케산 포위전 당시 존슨이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케산이 또 다른 망할 디엔비엔푸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돼!”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지 패튼 휘하에서 싸운 에이브람스는 이탈리아 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탱크 부대를 지휘하면서 활약한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이후 그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를 이어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미군 총 사령관이 됐다. 그의 이름은 미군 주력 전차인 M1 탱크의 이름이기도 하다.)
구정 대공세가 끝난 이후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새로운 미군 사령관을 맞이하게 됐다. 그의 이름은 크레이튼 에이브람스(Creighton Abrams)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유명한 조지 패튼 중장의 직속 부하였으며,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후 걸프전쟁에서 활약하게 되는 미군 탱크 이름에도 붙게 됐고, 그 탱크가 바로 M1 에이브람스다. 무튼 에이브람스는 전임자인 웨스트모어랜드 보다 미국인 기자들에게 솔직하고 열린 사람으로 인식됐다고 한다.
(전사 10;1 비율을 보여주는 장면)
(빈센트 오카모토, 일본계 미국인 출신의 참전용사로 베트남 전쟁 당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동양계 미군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의 전과 보고 및 달성은 여전히 시체의 숫자를 세는 바디 카운드였다. 즉, 미군 2명이 전사하고 베트콩 20명이 전사하여 비율이 1/10이면 엄청난 전과로서 보도됐다.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으로 참전했던 빈센트 오카모토(Vincent Okamoto)가 한 얘기로 이를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들의 행위가 여전히 잔혹했음을 일면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빈센트 오카모토의 가족 사진, 그의 가족은 일본 이민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했으며, 그의 형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오카모토 또한 그들을 본받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미군에 입대한 빈센트 오카모토)
빈센트 오카모토는 일본계 미국인 출신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러니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행정명령 제9066호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일본인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많은 형 둘은 일본계 미국인 부대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싸운 442연대 전투부대 출신이었고, 이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김영옥(한국계 미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 부대에서 활약함.)이 이끌었던 부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카모토는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 입대하여 베트남으로 갔으며, 소대장자리까지 진급했다.
(구찌터널의 구조를 보여주는 지도, 글쓴이 또한 베트남 호치민시 근처에 있는 구찌 터널을 가본적이 있다. 이때 구찌터널을 구경하며 베트남 인들의 투쟁정신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구찌 터널에서의 싸움은 미군들에게도 지옥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카모토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베트남 여행 코스로 많이 가는 구찌 터널 쪽에 배치되어 베트콩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는데, 운 좋게 한 마을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일본계 미국인 출신인 오카모토에게 있어 이는 베트남에 와서 몇 개월 만에 먹는 쌀밥이었다. 마을의 한 할머니가 해준 쌀밥을 먹은 그는 집안에 쌀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순간적으로 베트콩이 있는지 의심을 했다. 그렇게 해서 땅굴로 의심되는 곳을 발견하여 그곳에 수류탄을 던졌고 그렇게 해서 7~8명을 사살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거기에 있던 베트콩은 자신에게 밥을 해준 할머니의 아들이었고,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살인했다는 걸 인지하게 됐다고 한다.
(훈장을 수여받는 빈센트 오카모토)
이후 그는 22번의 헬기 공격 작전을 수행했고, 캄보디아 국경지대로 도망치는 베트콩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다가 부상당했고, 생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당시 작전에서 새운 공로로 오카모토는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고, 오카모토는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남아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일본계 미국인이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선전물, 북베트남을 침범한 미군 항공기 2,500대 가까이를 격추시켰다고 써 있다.)
(구정 대공세를 보도하는 북베트남의 선전)
(승리만 얘기했다고 말하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신문을 읽고 있는 베트남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구정 대공세는 분명히 미국과 남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지만, 당시 북베트남 신문에 보도되던 것은 자신들의 승리뿐이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서는 피해 얘기를 상세히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북베트남의 승리만 강조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북베트남은 수천 대의 미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북베트남의 언론에는 이러한 사실만 있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후이둑(Huy Duc)이란 베트남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현재도 베트남 사람들이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과 동포가 죽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다음은 북베트남군 참전용사 출신인 팜룩(Pham Luc)의 증언이다.
“신문과 라디오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 신문을 즐겨 읽었지만, 패배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좀 이상함을 느꼈죠. 승리만 있다면 사람들이 묻겠죠. 내 아들은 어디 있고, 어디서 죽었는지요. 참 복잡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 땐 조용히 있는 게 제일 안전했습니다.”
(자유와 독립보다는 소중한 것이 없다는 호치민의 명언이 세겨진 한 오두막)
북베트남의 언론은 승리했음을 강조했지만, 전략적으로 승리한 사실과는 별개로 여전히 남베트남 친미 꼭두각시 정부는 유지됐고, 미 공군은 무자비한 공습을 북베트남에 이어나갔다. 이 부분과 더불어 다큐멘터리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바로 북베트남에서 징집된 이들 대다수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자식들로 혁명의 승리를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소련으로 유학을 간 베트남의 학생들)
다른 한편, 북베트남 정치 지도부의 자식들 중 일부는 혁명전쟁에 참전했지만, 레주언(Le Duan)의 아들처럼 징집을 피해 유학길에 오른 이들도 많았음을 다큐멘터리는 강조한다. 그러나, 과연 남베트남은 그런 징병기피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미국의 지도부의 부패를 생각해보면, 가진 것 없던 북베트남 지도부를 이에 비견되는 듯이 비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유학을 떠나는 이들 중에 꼭 지도부의 자식들만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아니며, 노동자 출신의 비율도 높았지만 다큐멘터리는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도 맥락생략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닉슨, 1968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이후 그는 베트남에서의 철군을 주장했으나, 궁극적으로 전쟁을 확장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본토에서는 존슨이 대선 출마를 하지 않게 되면서, 공화당의 새로운 인물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바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부통령을 맡았고 케네디와의 대선에서 간당하게 졌으며,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맡았던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혼란 덕분에 미국 역사상 가장 멋지게 정치계에 돌아오게 됐다. 따라서 미국의 공화당 대선 후보는 리처드 닉슨이 확정됐다.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미국 경찰들)
반전 운동은 대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2020년 개봉한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Trial of the Chicago)’의 배경이 된, 사건이 68년에 발생했다.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거리에서 대규모의 반전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은 참으로 폭력적이었다. 곤봉으로 시위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리며, 이들을 체포했고, 최루탄을 발사했으며, 그로 인한 부상자들도 속출했다. 오죽하면, 이런 강경진압에 대해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비유되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인 월터 크론카이트는 다음과 같이 방송을 했다.
(반전 시위대를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미국 경찰들, 한국의 전경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경들도 이렇게 사람을 마구잡이로 패고 폭행했다.)
(저녁에 있을 집회를 위해 모여드는 시민들)
“안전과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시위자들에게는 표현의 자유조차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경찰국가에서 곧 개최될 겁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론 페리지가 호주에서 본 텔레비전의 한 장면)
헬리콥터 승무원장이던 론 페리지(Ron Ferrizzi)는 이런 일이 발생하던 시기인 1968년 8월 마지막 주에 호주에 갔는데, 숙소에서 TV를 키니 첫 장면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쯤 되 보이는 경찰들이 자신 또래의 아들들을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패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을 아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글에서 허깨비 잡으러 지구 반대편에 보내져 아무 이유없이 누군가의 할머니를 죽인다는 걸 깨달았다.”고도 증언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이 상당히 분열되어 있음을 론 페리지는 깨달았다.
(당시 롱안의 모습)
(롱안 지역에 살던 일반적인 베트남인들)
(롱안의 선무공작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한 미국인 여기자)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최남단에 있는 롱안(Long An) 지역은 1960년대 초 응오딘지엠 정권 시점부터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선무공작의 중요한 시험장이었다. 1968년 구정 대공세 이후 에이브람스 장군은 수십만이나 되는 남베트남군이 시골을 확보할 여유가 생겼고, 사이공 정부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피닉스 프로그램에 동원된 남베트남 인사)
(베트콩을 도운 것으로 의심되는 한 노인을 누워놓고 물고문하는 남베트남군, 이렇게 피닉스 프로그램에 동원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애나 어른 노인 여성을 가리지 않고 고문과 학살 그리고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얼굴에 수건이 덮혀 물고문 당하는 노인)
(고문에 꿈쩍하지 못하는 노인)
(남베트남군의 포로로 잡힌 10대로 보이는 베트남인)
이에 따라, 베트콩 용의자를 색출하고 또 그들의 정치적 사회 기반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피닉스 프로그램(Phoenix Program)이었다. 피닉스 프로그램은 대략 2년간 진행됐고, 특히 롱안 지역에서 많은 작전 및 검거를 벌였다. 당시 미군 고문단 장교와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는 베트콩 용의자로 보이는 이들을 색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다큐멘터리가 전달하는 내용을 들어보자.
“나중에 가서야 피닉스 프로그램을 지휘했던 부장은 미국 의회에 고백했습니다. 살해된 사람 2만 명 이상이 무고한 사람이 몇 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요.”
(베트콩 용의자로 의심받아 총살당한 사람의 시신)
(이를 상세하게 사진으로 남긴 미국측 자료-1)
(이를 상세하게 사진으로 남긴 미국측 자료-2)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우 대통령, 그는 미국과 협력하여 이런 학살과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책 저자이자 동명 다큐멘터리의 제작자인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 또한, 살해된 사람 2만 명 중 이들이 베트콩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책에 썼다. 보통의 경우 피닉스 프로그램으로 학살당한 민간인의 숫자를 2만 명에서 4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범죄와 학살 때문에, 역으로 베트남인들은 티우 정부를 원망하게 됐다. 롱안 지역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35%의 사람들이 티우 정권에 투표할 것임을 밝혔고, 20%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지지했으며, 45%는 베트콩과 미군이 지원하는 사이공 정부를 반대하는 누구든 지지한다.”고 결과가 나왔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의 모습, 파리의 상징 중 하나인 개선문이 보인다.)
(1968년 프랑스 파리에 모인 각국 대표단들)
1968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베트남 전쟁 당사자들끼리의 회담이 열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회담은 자리 배치 문제 때문에 모든 것이 지연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북베트남 대표단은 사각 테이블에서 테이블 각 면에 각 대표가 않아 4자회담을 하자고 주장했다. 즉, 하노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사이공 정부(남베트남), 미국 모두가 말이다. 하지만, 남베트남측 대표단은 하노이와 베트콩이 테이블의 같은 쪽에 앉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10주간 이어졌으며, 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한건 소련이었다. 소련은 바로 원형탁자에 앉아 마주보고 회담을 하자고 제안했고, 4국 모두 이를 수용했다.
(부상당한 한 미군)
(참전용사 칼 말렌테스, 그는 높은 학위를 바탕으로 징집을 면할 수 있었음에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후회가 되는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팀 오브라이언)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참전용사들의 경험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오리건주 애스토리아에서 태어난 칼 말렌테스의 경우 벌지 전투 참전 용사의 아들이었다. 그는 예일 대학를 다녔고 옥스퍼드 대학에도 다녔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드문 인물이었다. 말렌테스는 베트남에서 가서 부도덕한 짓을 할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에 참전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오브라이언의 “제가 정말 후회하는 건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에요.”라는 인터뷰 증언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베트콩에게 포로로 붙잡혀 남베트남 밀림 한 가운데 있던 참전용사의 증언도 들려준다. 그러면서, 전쟁의 잔혹함과 비극성을 강조한다.
켄 번즈의 베트남 전쟁 시리즈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명작이지만, 다른 한편 미국식 애국주의적 서사와 참전용사들에 대한 헌신과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려는 노력도 절대 게을리 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고도 생각한다. 즉, 그런 점이 미국 위주의 관점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큐멘터리가 1시간 50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다보니, 7화 리뷰 나머지는 후반부에서 다룰 생각이다.
그럼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