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에드워드 허만(Edward S. Herman)이 공동집필한 책 여론조작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오스에서도 정치적 해법을 외면했다이는 그레이엄 파슨스(Graham Parsons) 대사가 국회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명백하게 증명되었다. “나는 연립정부의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16년간 노력했다.” 미군의 임무는 민간인 뒤에 숨어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장군을 앞세워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으며미국이 라오스를 지원한 데에는 이 나라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지원 규모는 라오스가 미국으로부터 군 예산의 100%를 지원받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였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여론조작,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이 쓴 책이다.)

 

이런 와중에도 라오스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치러진 공정 선거를 통해 1958년에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미국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쉽게 좌파의 승리로 끝났다파테트 라오(Pathet Lao: 라오스 애국전선약칭 NLHS) 게릴라군이 내세운 13명의 후보 중 9명과 중도좌파(파슨스는 그들을 동행자라고 불렀다) 4명이 국회 의석을 점령했다. ‘공산주의자나 동행자가 경합을 벌인 21개의 의석 중 13개를 차지한 것이었다그리고 득표수를 가장 많이 얻은 파테오 라오의 총수 수파누봉 공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곧 미국의 압력(가장 중요한 지원 철회 위협을 포함한)으로 친서방 중도파’ 인물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자유세계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그는 연립정부를 성공적으로 구성한 협정을 파기함으로써 파테트 라오를 해산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하지만 그는 CIA의 비호를 받는 초강경우파인 푸미 노사반 장군에 의해 축출되었다미국에 우호적인 선거감시인들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서슬 시퍼런 1960년 총선거에서 친미정권이 승리하자 곧 내전이 발발했다이는 미국이 지원하는 극우파와 실제로 정치 영역 전체로 세력을 뻗어나가던 연립정부를 지원하는 소련과 중국 간의 전쟁이었다오스트레일리아의 맹렬한 반공주의 기자 데니스 워너(Denis Warner)가 언급한 대로미국 정부는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1만여 개 마을 대부분을 총괄하는 조직이 구축된” 농촌 지역을 수중에 넣은 “NLHS가 1961년 봄 무렵 전국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이러한 상황은 이제 익숙한데바로 미국과 친미정권은 군사적으로는 강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약하다는 것이다.

 

자국의 정책이 벼랑 끝에 와 있다는 것을 자각한 미국은 1962년에 새로운 해법을 제안할 예정인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다그러나 협정은 순식간에 결렬되었고내전은 베트남전의 확산에 편승해서 진용이 달라지고 미국과 그 우방의 개입이 증가한 상태로 재개되었다미국의 비밀 군사작전은 1961년에정기적인 폭격은 1964년 초에 시작되었다그리고 북부 라오스를 목표로 한 배럴 롤(Barrel Roll) 작전은 정기적인 북베트남 폭격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인 1964년 12월에 시작되었다북부 라오스에 대한 폭격은 1966년에 한층 강화되었고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중지’ 명령(실제로는 폭격의 재분배와 같아서 전투기들은 라오스로 방향을 돌렸을 뿐이었다)이 내려진 1968년부터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이 폭격한 라오스 지역을 나타낸 지도)

 

라오스에 대한 초기의 언론 보도는 때때로 상당히 많았다펜타곤 페이퍼의 분석가는 1961년에 <뉴욕타임스>가 베트남보다 3배가량의 기사를 내보냈다고 평가했다하지만 그 내용은 터무니없었다예를 들어, 1958년에 라오스에서 선출된 정부를 미국이 전복시키는 데 핵심이었던 원조 삭감은 전국의 언론에 의해 단 한번도 보도되지 않았다.” 이들은 사건을 거의 다루지 않다가 워싱턴의 거짓말이 담긴 잘못된 논평을 실었다버나드 폴은 중요한 위기를 연출하고 미국이 타이(태국)와 인도차이나에 더 깊이 개입하도록 만든 선동적인 조작극을 포함한 더욱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을 자세하게 소개했다대부분 조작된공산당의 군사 작전에 관한 조셉 앨솝(Joseph Alsop)의 보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베트남전이 가속화됨에 따라 라오스는 딘 러스크의 말대로 베트남이라는 돼지 몸에 난 사마귀이거나월터 헤이니(Walter Haney)가 나중에 캄보디아를 빗대어 한 말처럼 부수적인 전쟁이 되었다이 부수적인 전쟁이 확대되는 동안 언론 보도는 반대로 점점 줄어들었다미국의 전쟁은 명확히 세 종류만이 있었다즉 남부의 호치민 루트에 대한 폭격미국 정부가 남베트남의 전쟁과 무관하다고 밝힌 북부 라오스 농촌에 대한 폭격그리고 CIA가 지휘하는 산악 부족으로 구성된 용병과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미국이 타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용병들을 지원하는 것과 같이 파테트라오 사이의 비밀 전쟁이 그것이다남부 라오스에 대한 폭격은 다양하게 보도되었다그러나 비밀 전쟁과 북부 라오스에 대한 폭격은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고 터무니없이 표현된 북베트남의 침공과 관련한 기사와는 달리 보도되지 않았다.

(파테트 라오의 선전 포스터)

 

1968년 7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동남아 통신원 자크 드코르노이(Jacques Decomoy)는 폭격당한 북부 라오스 지역을 직접 목격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긴 기사를 썼다. “······소리 없는 세상이었다주변의 마을들이 사라지고주민들은 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위험해서 낮이고 밤이고 몸을 노출할 수 없다.” 모두가 적의 점령지를 과학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무차별적인 폭격 때문이었다기자는 1965년 2월에 미군의 폭격을 처음 당한 삼누아 지방의 중심지에 널린 숨죽인 폐허와 버려진 가옥들의 모습을 전달했다그는 이 인구밀집지역은 대부분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며 최근의 폭격도시 여기저기에 패인 거대한 탄공”, “무너져 내린” 교회와 집들민간인 사상자 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투하된 파편폭탄의 잔해를 목격했다고 덧붙였다드코르노이의 보도 이후 공군이 북부 라오스의 민간인 마을에 살인적인 공격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었다그러나 끔찍한 파괴의 모습들이 담긴 그의 기사들은 계속 언론의 관심을 자극했으나 결국 무시되었다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예 은폐되었다나중에 실제 전쟁에서 비밀 폭격으로 묘사된 미군의 공격은 정말로 비밀이 되었는데이는 흔히 말하는 정부의 이중성뿐만 아니라 언론의 공모에 그 원인이 있었다.

 

언론은 방어력이 없는 민간인 마을을 공격한 정보를 보도하거나 직접 추가적인 조사를 벌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주 드물게 폭격 사실이 언급될 때에는 부정확한 변명조의 기사를 내보냈다. 1969년에 라오스에 대한 폭격이 보도되기 시작하면서그것은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들어가는 침투 경로(일명 호치민 루트’)를 목표물로 삼았다는 주장그리고 나중에는 미군 전투기가 북베트남 침공자들과 교전하는 정부군을 전술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드코르노이가 목격하고 보도한 내용과 사뭇 다른 이 주장들은 수용할 수 없는 사실을 수용할 수 있는 사실로 바꾸어놓았다.

 

<뉴욕타임스>의 경우만 하더라도 1968년 한 해 동안 파테트 라오의 불평을 보도하는 작은 기사들(1968년 12월 22, 23)외에는 폭격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1969년 5월 18일에는 미군의 라오스 폭격을 보도하면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으로 병력과 물자를 전달하는 이른바 호치민 루트가 목표물이라고 주장했다. 6월 14일에는 미군 전투기의 폭탄은 라오스 전역특히 라오스의 공산당 저항운동을 주도하는 파테트 라오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으로 적의 물자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호치민 루트에 조준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7월 16찰스 모어는 미군 폭격은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통하는 라오스의 침투 경로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7월 28일에는 북베트남군을 목표물로 삼고 매일 폭탄을 탑재한 200대의 전투기가 라오스 북동부로 출격한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8월 2헤드릭 스미스는 미국이 라오스의 북베트남군 기지를 폭격하고 있다는 워싱턴 발 기사를 덧붙였다. 8월 25올먼(T. D. Allman)은 북베트남군과 싸우고 있는 정부군을 전술적으로 지원하고, “라오스 북동부 전역의 공산당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뒷내용은 용인될 보도의 범위를 슬쩍 넘어서고 있다전술적 지원과 북베트남군의 보급 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미군에 관한 9월 7일자 보도에 이어 울먼은 라오스에서 전례 없는 가장 강도 높은 폭격의 지원을 받은 타이 병사들에 의해 증강된” 병력에 힘입어 정부군이 성공적으로 방어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9월 18또한 워싱턴과 비엔티안에서 미 공군이 북베트남 보급로 폭격과 더불어 정부군의 교전을 위한 전술적 지원을 하고 있다고 확인하는 워싱턴과 비엔티안 발 보도도 있었다.(9월 19, 20, 23, 24, 30특히 미군 전투기의 파테트 라오 지역 폭격을 알리는 AFP의 특전(9월 23)은 폭격이 보급로와 전투작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암시를 주었는데이는 파리와 비엔티안에서는 모두 다 아는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보도되지 앟았다.

(수파누봉 왕자와 호치민, 라오스의 수파누봉은 호치민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웠고 이후에는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요컨대 북부 라오스에 대한 테러 공격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인데도 의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거의 보도되지 않거나다르게 보도 되었다하워드 엘터먼은 좌파 주간지 <내셔널 가디언>이 실제 상황을 광범위하게 보도한 사실을 제외하면 1969년 한 해 동안 라오스와 캄보디아 전쟁은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한다.

 

1969년 1, <뉴욕타임스>의 울먼은 마침내 전쟁 전체를 통틀어 중요한 기사 한 건을 보도했다그는 현재 미국의 주요 목표물은 반군의 경제적·사회적 토대이며미국의 폭격은 낮 시간 동안 주민들을 동굴과 굴속으로 몰아넣어 파테트 라오가 점점 더 줄어드는 사람들로 인해 인민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또한 현재로서는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미국의 폭격기가 도시마을적군이나 민간인의 집결지 등을 원하는 대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제한적인 평화 운동의 테두리 내에서는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주류 언론에서는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던 이러한 사실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넘어갔다. CIA 비밀 부대는 앞서 몇 달 동안 자르 평원을 모조리 휩쓸어 남은 주민들을 부근의 비엔티안 지역으로 내몰았다이들의 비참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는 알려졌으나 미국에서는 대체로 무시되었다라오스 주재 미국 대사 윌리엄 설리번(William Sullivan)은 라오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인 월터 헤이니가 난민들의 증언을 꼼꼼하게 수집해서 엮은 기록을 두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준비되었다고 설명했다헤이니는 라오스에 있는 한 유엔 관리의 증언을 인용하며 이는 폭격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미국 CIA가 전개한 라오스 비밀 전쟁을 규탄하는 쿠바의 프로파간다)

 

“1968년의 폭격은 인근 마을에서 생명체가 전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1969년에 폭격기들이 매일 날아와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 하면서 폭격이 절정에 달하자 마을 사람들은 외곽으로 빠져나가거나 숲속으로 점점 더 깊이 숨어들었다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주민들은 참호나 토굴 혹은 동굴에서 연명했다그들은 밤에만 농사를 지었다밀고자들은 예외 없이 자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전쟁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폭격은 주민들의 물질적인 기반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데 주력했다.”

 

케네디 분과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미군 폭격의 주요 목적은 파테트 라오 점령지의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기반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이는 실제 기록에 의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어떤 서방 기자는 북부 라오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미국이 아닌 해외에서 보도한 적도 있다올먼은 1971년 말에 자르 평원으로 날아가 목표 지역은 그곳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사용된” 네이팜탄과 B-52의 집중 폭격에 유린된 채로 텅 비어 있다고 보도했다또한 모든 식생이 자취를 감추었으며탄공은 말 그대로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고 연이은 폭격으로 끝없이 파헤쳐진 땅에서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같은 시기에 <워싱턴포스트>는 공군차관 로버트 시먼스(Robert Seamans)의 증언을 보도했다그는 북부 라오스에서는 무차별적인 폭격의 증거가 전혀 없고”, “거친” 것은 바로 북베트남 사람들이며라오스 국민은 미국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라오어를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기자 존 에버링엄(John Everingham)은 1970년에 “CIA를 믿을 만큼 순진하고” 지금은 CIA의 비밀부대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돌아오지 못할 헬리콥터 탑승을 제안받는 먀오족(몽족)의 죽어가는 마을을 여행했다그는 폭격으로 인해 라오스 전역의 절반이 검은 폐허의 땅으로 뒤바뀌어 사람들은 하늘을 두려워할 정도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물려줄 건물이나 살아 있는 것이 전혀 남지 않았다고 보도했다소규모 반전 언론을 제외하면 미국의 언론은 그의 기사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나중에 가서야 먀오족을 공산주의자의 희생자로 묘사하면서 그곳의 끔찍한 참상을 안타까워했다. 1970년 <방콕 월드>(10월 7일자)는 미군의 폭격이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는 AP의 보도를 기사로 내보냈다.

 

1972년에는 미국의 언론에도 가끔씩 그런 기사가 출현했다그리고 나얀 찬다(Nayan Chanda)는 자르 평원을 찾아가 하늘에서 보면 그곳은 폭탄으로 뚫린 구멍들 때문에 달 표면을 연상케 하는데이는 미국의 폭격기가 6년 동안 비밀폭탄을 계속 투하하면서 이 지역의 사람과 건물을 모두 제거한 명백한 증거이다땅에서 보면 예전에 무시당했던 난민들의 말처럼 죽음과 파괴의 징후가 훨씬 더 만연해 있으며성도도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도했다.

 

전쟁 중에 활동한 자원봉사자들과 라오스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미국인 구호단원들은 전후 라오스에 관한 정보를 언론에 알리려고 노력했으나 거의 소득이 없었다. <뉴욕타임스기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생략하거나 객관적인 증언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밝혀온 적도 있다.

 

미국정부는 이 모든 사실들을 공식적으로 부인했고그것들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진 이후에도 기만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라오스에서 벌인 전쟁을 성공’(제이콥 자비츠(Jacob Javits)와 스튜어트 시밍턴(Stuart Symington) 상원의원혹은 눈부신 성공’(전 CIA 라오스 지부장 토머스 매코이(Thomas McCoy))으로 여겼다.

 

규모와 관심에서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는 젊은 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그곳 난민에 관해 보고한 내용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결과가 크메르 루주의 점령 이후에 서방에서 대대적으로 공개된 캄보디아 난민에 관한 연구 결과보다 더 심각하다모두 미국이 진행하는 아주 끔찍한 작전들과 아주 잘 들어맞는 이야기들이었다그러나 이 자료들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주류 언론에서는 원칙적으로 배제되어 순식간에 잊혀졌다테러의 주체가 자기들의 원칙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언론은 1968년에는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정보를 보도하지 않았고그것들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화엥 놓인 1969년 말에도 추가적인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덕분에 대중은 성공적으로 기만당했고 파괴 작전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ABC 뉴스의 논평자 해리 리즈너(Harry Reasoner)는 라오스와 그 유순한 민족이 “CIA의 어릿광대짓과 북베트남의 사악한 침공” 이후에 평화적인 방안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자신의 희망을 표했다. “CIA의 어릿광대짓으로는 북부 라오스의 반군들의 경제·사회 기반시설” 파괴와 더불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살해당한 알려지지 않은 수의 인명 희생, CIA의 명분에 참여했다가 쓸모가 없어지자 버림을 당한 먀오족 등을 꼽을 수 있다그러나 북베트남의 사악한 침공” 탓으로 여기에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없다. 1968년 3월 북베트남 폭격과 미국이 주도하는 용병들에 의한 북베트남에서의 작전을 인도하기 위해 사용된 북베트남 국경 부근의 한 미군 레이더 기지에서 12명의 미 공군 병사를 살해한 정도의 잔학행위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크레이터가 생긴 라오스의 국토)

 

<뉴욕타임스>는 전쟁이 끝날 무렵에 라오스 전쟁을 검토하면서 인구의 1/10이 넘는 35만 명의 인명이 살해되었고또 다른 1/10은 외부인과의 전쟁을 함으로써 비극적인 비율로 증가된 동족간의 싸움에서 희생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이 동족간의 싸움은 외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1958년에 연립정부에 의해 중단되었을 것이다미국은 전반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이는 몇 가지 오도된 논평을 제외하면 역사적인 분석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이처럼 뒤늦게까지도 <뉴욕타임스>는 미군 폭격이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겨냥한 것이라는 주장을 그 외의 사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계속했다실제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 역시 배제되거나 크게 잘못 표현되었다이후의 보도들 역시 폐허를 만든 미국의 역할을 삭제하고 전후 문제를 공산주의자의 탓으로만 돌렸는데이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회피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영광스럽지 못한 언론의 기록은 선전모델에 의해 아주 잘 설명된다.

 

출처여론조작 p.41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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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만주를 침략한 수만 명의 일본군은 1932년에는 괴뢰황제 푸이(Puyi)를 내세워 이른바 자신들의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State of Manchuria)을 세웠다그러나 만주사변을 전후로 만주 지역에선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됐으며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싸우던 이들 중에는 만주에서 살던 혹은 만주로 결집한 식민지 조선인들 많았다이에 따라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게시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 초부터 1935년 봄까지 간도 지역에서만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3차에 걸쳐 이른바 대토벌을 벌였다여기에는 일본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하천용 군함까지 동원되었으며총 10만 이상의 병력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11월 중순에 있던 일제의 2차 대토벌에서만 보병과 기병 그리고 포병으로 구성된 6,000명의 병력과 항공기가 동원됐다.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도 자행됐다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마오쩌둥을 취재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Edgar Snow)가 쓴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도 중국의 붉은 혁명 연극에서도 일본의 만주 침공과 학살을 다룬 장면이 언급된다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만주사변 시점부터 혁명 세력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

(혁명가 웨이정민,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1941년에 전사했다. 또한 그는 민생단 사건의 피해자들을 막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김일성을 도왔다.)

 

일본은 간도에서 이른바 친일 단체를 이용한 공작을 감행했다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이용했었고그것이 바로 민생단이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어용단체였다당시 친일파 조선인 몇 명이 일본 이민당국을 설득해 동만지역의 항일무장세력에 대항할 민생단을 결성했다이들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연합을 분열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러나 민생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일본은 1932년 괴뢰정부 만주국이 모습을 드러내자 만주국이 내세운 5족협화(만주국을 구성한 만주족·한족·몽고족·일본인·조선인)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6개월 만에 단체를 해산시켰다.

 

민생단이 해산된 이후인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인물이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고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간행물인 민주조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었다.

 

민생단 주구들이 우리 당과 청년단에 침투했다부녀자와 아동들도 예외가 아니다틈만 있으면 민생단이 다 파고들었다적색구역과 백색구역적색 유격대 할 것 없이 민생단원투성이다토비와 농민들 중에도 민생단원이 있다.”

 

소위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논리가 먹혀 들었다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돼 형장이나 감옥으로 끌려갔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이 민생단 사건의 조선인 희생자는 최소 500명에서 많게는 2,0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유격대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1933년 코민테른이 파견한 양쑹은 당시 반민생단 투쟁에 관여했던 저우바오중을 통해상황을 보고 받고 경악했다 이에따라 하얼빈시 서기 웨이정민을 동만 지역에 급파했으며웨이정민은 회의를 소집하여 임의롸 체포구금살인을 불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민생단 사건은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불신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1935년 8월 제7차 코민테른 대회(Seventh World Congress of the Comintern)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가 천명한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이 채택되면서사실상 종결됐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동지인 저우바오중 가족이 48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일가와 찍은 사진.)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이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만주에 있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연합하여 더 가열차게 투쟁을 벌였고이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1930년대 초중반 만주를 피의 숙청으로 몰고간 반민생단 투쟁(민생단 사건)은 또 다른 인물을 체포했다가 항일 영웅으로 만들었는데그가 바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Kim Il Sung)이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김일성은 1932년 이른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구국군에서 조선인 항일 유격대인 왕청항일유격대를 이끌었다이들은 일본군의 대토벌에 맞서 전투를 치렀으며, 1933년 9월에는 동녕현성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했었다그러나 김일성 또한 민생단 사건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하여감옥에 수감되었었다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스중헝은 김일성같은 위대한 애국자가 절대로 민생단일 수 없다.”고 하며 그의 신원을 보증하여 김일성은 풀려날 수 있었으며재판으로 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까지 회복했다이후 김일성은 만주 항일투쟁의 붉은 별(Red Star)로써,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고7차 코민태른 대회 이후엔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김명호중국인 이야기 3한길사, 2014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와다 하루끼남기정(),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창비, 2014

 

조한성한국의 레지스탕스생각정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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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광주의 대학살자 전두환이 죽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서울의 봄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광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광주에서 수백 수천 명을 학살하고,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박정희가 했듯이 잡아다 고문하고 반병신 만들고 죽인 그가 그리고 수만 명을 삼청 교육대로 보내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그가 오늘 죽었습니다. 그는 끝끝내 반성하지 않았고, 마르지 않는 29만 원으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를 지원해준 세력은 누구인가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을 승인했고, 그 결과 광주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주 학살은 사실상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5.18에 미국이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포트를 지원했고, 니카라과의 대학살 세력인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으며, 대한민국 신군부를 지원했습니다.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전두환이 죽은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의적절하게 제가 쓴 책의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인용합니다.

카터 정권 시기 미국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에선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여기서 카터 정권이 방관한 대한민국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겠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에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유신 독재 그리고 1979년 12.12 쿠데타로 이어지는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존재했다. 1979년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살해된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 군부가 이른바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이러자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는 전라도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216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이른바 폭도 내지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전두환이 보낸 군대의 잔혹함이 극에 달하자, 광주시민들은 총을 들고 무장하여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1871년 당시 파리코뮌에서 압제자에 맞서 봉기했던 파리의 시민들처럼 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이 대규모의 군대와 탱크까지 동원하면서 아주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소 수백 명이(많게는 수천 명)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여기서 미국의 카터 정부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시민군을 진압하기를 원했으며, 신군부 세력의 진압 작전을 지원했다. 우선적으로 미국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 기지에서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 P216

미국에게는 한국의 민주화보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런 시각은 2005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잘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나온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보인 반응을 다음과 같았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광주 미문화원으로부터 군인들이 착검한 소총을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하네요.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저도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진압이 무자비하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광주 사태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군대 투입에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만약 한국 국민이 전국적으로 군부를 반대하게 되면 일이 커지는데...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군부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군이 사태를 진정시킬 겁니다.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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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는 무엇일까아마도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대표되는 고엽제 살포일 것이다. 100~150만 명 이상의 군인과 200~3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주체는 바로 남베트남의 민간인일 것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1965년 2월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공격받자, 3월부터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 하여 이른바 북폭에 나섰다군사적 교리상 전략폭격이었지만현실은 무차별 융단 폭격이었다따라서 북베트남 전역이 미공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고그에 따른 인명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최소 수십만 이상이 이 폭격으로 죽거나 부상자가 됐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고 있는 미군 항공기)

 

남베트남은 북폭 이전부터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됐다그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허가한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그 작전이 바로 랜치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이다랜치 핸드 작전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대략 10년간 베트남 주둔 미군이 진행한 군사작전이다이들의 목표는 베트콩이 숨어있는 정글을 없애는 동시에베트콩의 군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남베트남 농촌 일대에 고엽제를 투하하는 것이었다제초제를 담은 55갈론 드럼통을 두른 띠 색깔에 따라 에이전트 블루에이전트 화이트 그리고 에이전트 오렌지로 불렸고특히 에이전트 오렌지가 남베트남 농촌과 마을 그리고 밀림에 투하됐다특히나 이 고엽제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에이전트 오렌지였으며이 에이전트 오렌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이라는 다이옥신이 포함되어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UH-1 헬기)

 

다이옥신은 치사량이 0.15g인 청산가리의 1만배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진 맹독 물질로다이옥신 1g이면 2만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다또 이 물질은 잘 분해되지도 않고용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인체에 극히 적은 양이 흡수됐다고 해도 점차 몸속에 축적돼 각종 후유증을 일으키게 되며그 영향은 후세대에게 까지 이어진다폐암후두암전립선암 등 각종 암은 물론말초신경병버거씨병당뇨병 등 각종 질환을 불러일으키며이러한 고통은 노출된 인간에게는 평생의 고통을 주게 된다따라서 인체에 매우 해로운 물질이 바로 고엽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고엽제를 뿌렸지만비극적이게도 고엽제에 노출된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은 미군의 고엽제 살포를 환영했다왜냐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은 1960년대 초부터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마을에 파괴적인 네이팜 폭탄이 투하됐고이러한 폭격을 남베트남의 농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거기다 1965년 미군이 대규모 지상부대를 파병하면서폭격의 빈도도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일단 고엽제를 뿌리면 나무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적어도 이틀 동안은 미군이 폭격을 중지했다따라서 남베트남의 민간인이 고엽제 살포를 환영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고엽제가 살포된 남베트남 지역)

 

당연히 이러한 독성물질을 살포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다그러나 1954년부터 제네바 협정과 같은 국제적인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던 미국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제정된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는 것 또한 손쉬운 일이었다에이전트 오렌지는 대략 10년 동안 총 7,200만 리터가 살포됐다이는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다이옥신을 투하한 셈이라 할 수 있다이 고엽제는 남베트남 전역의 농촌과 밀림 그리고 베트콩의 보급 역할을 하던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와 라오스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집중적으로 투하됐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고엽제 살포로 사망한 남베트남인은 최소 40만 명 이상을 넘는다기형아 사망자를 포함한 각종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를 일일이 따지면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1995년 기준으로 최소 200만 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피해자의 숫자가 350만 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으며많게는 400만에서 48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의 피해자가 된 것으로 확인된다.

(고엽제로 인해 말라버린 남베트남의 밀림)

 

미군의 고엽제 살포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던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의 경우 현지 소수민족들이 이러한 피해를 아주 극심하게 본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미군편에서 싸웠던 소수민족들 남성들과 그들의 부족과 마을 주민들은 고엽제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렸다태어나는 아이들 중에 절반 이상이 기형으로 태어났으며어떤 아이는 등이 굽은 채 태어나서 걸음걸이를 하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당연하게도 이것은 남베트남에서 살던 베트남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고엽제 피해 1세대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많은 사산을 경험하였고다이옥신 농도가 높을 때는 아예 아이가 생겨나지를 않았다시간이 지나 체내에서 농도가 조금 낮아졌을 때 아이를 낳지만 거의 기형아가 태어났으며, 2009년 기준으로 베트남 정부 통계에 의하면 1년에 5만 명의 기형아가 태어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을 둔 부모에게서 태어난 기형아)

 

이러한 피해는 단순히 남베트남의 민간인과 베트콩 그리고 북베트남군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 당시 고엽제를 살포했던 미군들과 미국을 따라 참전한 한국의 군인들 또한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보았다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한국의 경우 참전한 병사 31만 명 중에 최소 2만 명 이상이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을 겪게 됐다그 외에도 라오스에서 반공산주의 작전에 이용된 소수민족인 몽족 또한 이 고엽제 피해에 시달렸다한마디로 고엽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모든 이들에게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이러한 일을 생각해보았을 때과연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한 미국의 전쟁범죄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있을까?

 

참고자료

 

김성모고엽제란?"인류 역사상 최고 맹독 물질 중 하나"조선일보, 2011.05.1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19/2011051901409.html

 

배보람다이옥신에 노출된 350만 명... '그런 전쟁'은 계속 되고 있다오마이뉴스, 2021.04.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7429&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송필경고엽제 태아 이야기경향신문, 2009.03.02. https://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14

 

주영재생태학살도 국제 범죄가 될 수 있을까?경향신문, 2016.11.30.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1611301043001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어깨걸고, 2021

 

황성환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민플러스, 2018

 

위키피디아랜치 핸드 작전, ko.wikipedia.org/wiki/랜치_핸드_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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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생일에 맞춰 나온 베트남의 포스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지도자인 호치민(Hồ Chí Minh, 胡志明)은 베트남 전쟁 당시 서구 좌파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호치민 서거 3일 뒤인 19699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에선 히피족(Hippie)’으로 대표되는 대학생들이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나와 그를 추모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한참이던 1968217일 독일의 서베를린에선 국제 베트남 회의가 열려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지원하며, ‘! ! 호치민!’을 외쳤다.

 

이처럼 호치민은 1960년대 서구 좌파들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좌파들에게 남아있다. 2019년 칠레에서 반정부 시위가 한참일 때, 거리로 나온 칠레인들 중 일부는 호치민의 노래(Bài Ca Hồ Chí Minh)’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따라서 호치민은 단순히 베트남의 국부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좌파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다. 지금까지도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현재 좌파의 영향력도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한 인물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 사례는 아마 20세기에서는 호치민 말고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좌파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호치민은 1890519일 베트남 응에안 성(Nghệ An)에서 태어났다. 2016년부터 하노이 일월대학 총장을 지냈던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호찌민-민족해방과 도이모이에서 그의 출생 년도가 미스터리하다고 밝혔으며, 1891년이나 1893년생일 수 있다고 했다. 후루타 교수에 따르면 그의 생일인 519일도 사실은 1941519일 즉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Viet Minh) 창설일을 생일로 표기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호치민의 출생일을 1890년으로 표기했으며, 베트남 측 자료가 제법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호치민의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관리였고, 아버지를 따라 당시 수도였던 후에(Hue)로 가서 공부했다. 17살이 되던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반프랑스 시위를 했다가 퇴학당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당시 베트남에선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로 대표되는 반프랑스 독립운동이 일어났었다. 호치민 또한 판보이쩌우의 학교에서 잠시나마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그러던 1911년 사이공으로 가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했다.

 

19116월 만 21세의 나이에 베트남을 떠났으며, 30년간의 길고 긴 해외 생활을 이렇게 시작했다. 서방에서 베트남 근현대사 1세대 연구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이러한 호치민의 행적이 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마오쩌둥과의 큰 차이점이라 주장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호치민은 그 해 7월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해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체험했고, 알제리, 튀니지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을 돌아다녔다. 젊은 시절 그는 미국에도 있었는데, 뉴욕과 보스턴에도 있었으며 보스턴의 옴니 파커 하우스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도 정착했었고,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호치민은 프랑스사회당에 입당해 안남애국자협회를 조직하고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 찾아가 8개 항목으로 구성된 안남인민의 요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 언론자유 보장, 결사와 집회의 자유보장 등, 베트남인과 프랑스읜의 동등한 권리 요구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치민의 청원은 프랑스 당국 인사들과 서구 열강에 의해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에서 3~4년간 머물렀는데, 2018년에 밝혀진 문서에 따르면 김규식 조소앙과 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었다.

 

19207월 프랑스사회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민족문제와 식민지 문제에 고나한 테제 원안이 게재됐다. 이 글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에게 감명받아 같은 해 12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호치민은 1960년 그가 쓴 나를 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에서 자신이 어떻게 레닌을 신뢰하게 됐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호치민은 이 글을 읽고 울고싶을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후루타 교수는 호치민이 레닌주의를 애국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은 명백하지만 레닌주의의 수용으로 호의 민족주의도 민족독립을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호치민은 레닌의 논문에서 민족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을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독립 전사가 됐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억압받던 식민지 민족과 혁명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다.

 

이후 호치민은 1922년 르 파리아(Le-paria)라는 언론지를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베트남 지배를 비판하는 글과 사설 그리고 만화를 게재했다. 그러던 19236월 프랑스에서 도망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고, 코민테른 휘하의 기관인 극동국에서 근무하며 그해 12월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에 있으며, 호치민은 혁명가로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 이후 소련의 육군 원수가 되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등을 만났고, 여러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전의 레닌은 만나지 못했고, 1924년 그의 장례식에 손수참가했다고 한다.

 

1920년 레닌의 논문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주의자의 삶을 살게 됐다. 소련에서 중국 광저우로 돌아온 그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을 향해 전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베트남의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1930년 영국 식민지이던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이 당명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이 개정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이후 1930년 베트남 국민당이 단행한 대규모 봉기에 가담했고, 특히 응에안 하틴 소비에트 봉기(Nghe An-Ha Tinh Soviet)를 이끌었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1941년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정된 강령에 따라 애국적 민족주의자들과의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게 됐다. 실제로 베트민 활동시기 호치민은 팍 보(Pác Bó)동굴에 있으면서,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로 시냇물을 레닌으로 이름을 지었다. 레닌주의자가 된 호치민은 이 레닌주의를 소위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이 반제국주의 투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24년 호치민이 쓴 레닌 추모글인 레닌과 식민지 민족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겠다.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참고문헌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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