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동안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온 일본은 1853년까지 영토 쟁탈전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그러던 중 이해에 미국 매슈 C. 페리 제독이 에도만으로 들어와 대포로 위협하고 중세에 머물러 있던 일본의 문호를 개방해 근대 국가로 유도했다일본인들은 페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55

 

에도막부를 거치며 이른바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은 2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주변국들 일부를 제외한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일본이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 하지 않던 2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구반대편에선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유럽인들은 소위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라고 부르던 곳에 가서 정착 및 이주를 시작했고, 1776년 미국에선 독립혁명이 일어났으며, 1789년 프랑스에선 자유평등우애라는 가치를 내걸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또한 1804년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 정복에 나섰으며(물론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끝났지만), 19세기 초 영국에선 소비재 대량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공장건설이 일어나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과 과학 생산의 발달과 더불어 유럽을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 국가로 이끌었다. )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유럽은 자본주의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도의 생산력을 보여줬으며 노동자 계급을 탄생시켰다또한 군사력의 현대화도 이루어졌다그러나 자본주의의 활성화는 소수의 상류계층이 중심이 된 착취를 의미했고자본은 노동자들을 하층화 내지는 비인간화시켰다그와 동시에 산업혁명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 있었다그게 바로 제국주의(Imperialism)’이다영국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량생산을 위한 값싼 원료를 제공받고자 했고여러 나라들을 식민지화했으며필요에 따라선 총과 칼을 동원했다나폴레옹 황제가 잠자는 사자에 비유했던 중국(당시는 청나라)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으며무굴제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인도는 영국의 독점기업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아편전쟁, 아편전쟁은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제국주의 국가의 과학과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친 나라들은 전부다 이런 과정을 거쳤고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도 똑같은 과정을 통해 많은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당연히 일본은 국제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무감각했으며태평한 나날을 보냈다그러던 1853년 일본의 역사가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미국이 들어온 것이다미국은 신생국가였지만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였다어쩌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여기서 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른다. 1853년 6월 3(양력으로는 7월 8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동인도 함대 소속의 군함 4척이 일본 에도만의 우라가 항에 나타났다. 1852년 3월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을 부여 받은 페리 제독은 그해 11월 미국의 필모어 대통령 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하여 7월 8일 우라가 항에 입항했다.

(페리 제독, 페리 제독은 미영전쟁의 영웅 올리버 해저드 해리의 동생이다. 그 또한 전쟁영웅이 될 형을 따라 1812년 미영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페리는 1850년대 군함을 이끌고가 일본을 개항시켰다.)

 

페리 제독은 막부의 관리들에게 미국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면서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다이는 당연히 10년 전 영국이 청나라에게 했던 방법과 비슷했으며만일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도 같이했다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현대식 군함 4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페리제독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다페리 내항 사실을 조정에 알렸으며 각 지역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이 과정에서 막부는 페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을 취한 반면조정과 다이묘들은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는 양이론을 내세웠다. 1854년 1월 페리 제독은 이번엔 7척의 배를 이끌고 에도 만 안으로 다시 입항하여 답변을 재촉했다결국 막부는 페리 제독의 요구를 수용하여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 들어온 미군 군함, 미국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처럼 산업혁명과 자본주의화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길렀다.)


(성조기를 달고 있는 미국 군함)

 

미일화친조약 체결로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의 길에 들어섰다하지만 미국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타운젠드 해리스가 제한적 개방에 불만을 갖고 통상의 자유화를 주장하면서해리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막부는 1858년 7월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정식 조인했다이 조약으로 일본은 개항장을 다섯 개(요코하마하코다테니가타고베나가사키)로 늘리고무역의 전면 자유화 및 협정 관세 채택외국인에 대한 영사재판권 인정하게 됐다또한 막부는 네덜란드와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체결했다개국을 한 일본이 서양 열강이 지배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일본에 입항한 페리 제독과 그의 병사들)


(개항한 일본의 도시를 나타낸 지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칙허(임금의 허가함)의 문제를 계기로 일본은 정치적 갈등이 전면에 드러났다막부는 통상조약 체결을 결정했고천황에게 칙허를 요청했는데결정적으로 고메이 천황이 이를 거부했다물론 막부는 천황의 의견과는 별개로 통상조약 조인을 강행했다개항을 하게 된 일본이 겪어야 했던 문제는 바로 경제적 문제였다개항으로 인한 수출 급속 증대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물가가 폭등했고물가상승으로 인한 하급무사와 서민의 생활의 막대한 부담으로 이어졌다거기다 미국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여기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이런 불만은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1860년 해리스 통역관이 사쓰마번의 낭사(浪士)에게 살해당했고, 1861년 도젠지의 영국 임시 공사관이 습격당하기도 했으며영국 공사관이 일본인들의 습격으로 불태워지기도 했었다.

(일본이 미국에 보낸 사절단, 1860년 일본은 미일수통상조약의 비준 및 교환을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의 개항은 그들이 서양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860년 이른바 신미사절단이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그해 4월 4일엔 수도 워싱턴의 미국의회를 방문했었다. 1861년 말 일본은 개항연기 교섭 담판을 위해 다케우치 사절단이 유럽에 파견되었고이들은 1862년 5월 24일 네덜란드 의회를 방문했으며여기 수행원 중 한 명이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프로이센 의회를 방청하기도 했다. 1863년 12월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이케다 사절단이 파견됐고이들은 1864년 7월에 귀국했다막부 말기부터 일본은 서구 열강을 배우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고이는 일본이 서구 열강에 따라 근대화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에도막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변화였다. 또한 일본이 서구 열강에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에도막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막번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체제구상으로 공의정체론이 부상했고서양세력의 침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이 필요성을 깨달았다이 과정에서 막부와 반막부세력으로 나뉘어 1860년대 일본은 이들의 격동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1867년에 들어 막번체제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867년 12월 반막부 세력은 왕정복고 쿠데타를 주도하여 천황의 궁정을 장악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울 발표했다이에 따라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었던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렸다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었고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이른바 서구화 및 탈아입구(脱亜入欧だつあにゅうおう)의 길에 들어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41 12 7일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했던 이 기습 공격으로 24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사망했고소식은 미국 본토 전역으로 전파됐다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다음날인 12 8일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미 의회를 긴급 소집하여 일본에게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이렇게 해서 미국이 치르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이 뉴스를 들었던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이것으로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일본도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고 하며 환호성을 외쳤고중국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도 자신의 일기에 행운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소식을 들었던 이들 중에 기쁨을 표출했던 지도자가 연합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당시 유럽 정복에 착수했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도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장제스나 처칠은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에이들이 미국의 참전 소식을 기뻐할 이유가 충분했다하지만 히틀러의 경우는 달랐다미국의 참전 소식은 엄밀히 말해 나치독일이 치르고 있던 양면전선에 부담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히틀러가 미국의 참전소식에 기뻐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당시 그가 했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 없다우리는 지난 3천 년간 패배한 적이 없는 파트너가 생겼다.”

 

여기서 히틀러가 얘기하는 파트너는 일본을 뜻하고, 3천 년이라는 숫자 단위는 일본의 역사를 뜻한다히틀러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역사를 2600년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3000년이라는 얘기를 했었다일본에서 주장하는 2600년 내지는 3000년 역사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660년 초대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즉위했다고 나오고이것을 일본 역사의 시작이라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쉽게 말해 한국으로 치자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된다.

(진무천황, 기원전 660년에 천황으로 즉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화가 아니라 신화이기 때문에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선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또한 일본의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 또한 진무 덴노는 신화이지 실존 인물이 이니다라고 주장했다가 공산주의자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아무튼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학살이 있긴 하지만주로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와 비교하여 천황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후대가 연대를 올려 고쳤다는 설과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즉 이 두 가지 설이 학계에선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거기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에서 나오는 진무천황이 즉위하던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보았을 때이른바 조몬 문화 시대였다매머드가 사실상 멸종하던 기원전 1만 년부터 야요이 문화 시대가 열리는 기원전 3세기까지를 조몬 문화시대라고 하는데이 시기에는 토기 발명과 밤나무나 도토리 채집 내지는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으로 살던 시대였다따라서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운 2600년 내지는 3000년이라는 역사는 어떤면에선 과장이 섞였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일본 역사는 조몬 문화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로 넘어가는데이 야요이 시대는 3세기까지 계속되었고벼농사의 시작과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등장하였다또한 당시 인접국이던 가야나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이것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선진 문물을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규슈(九州)나 시코쿠 등 일본 서부 지역에 위치한 각종 소국들을 복속시켜 나갔으며 점차적으로 관동지역 일대에 주거하고 있던 아이누 계통의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현재 일본의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야마토 시대, 일본 문명의 시작점이다.)

 

또한 3세기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는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연합국 시대를 거쳐 4세기 초 긴키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의 성립되었다그리고 이 야마토 정권은 5세기 무렵 왜 5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역 세력들의 연대를 전제로 성립된 호족 연합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6~7세기 무렵 일본은 국가로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이 아스카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한반도를 거치지 않은 채 중국의 선진 문활르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이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를 기입하여 이를 보여주기도 했다이게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일본의 특징인 그들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 사용되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덴무(673~686)와 지토(690~697) 천황의 시대에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또한 일본 군주의 호칭인 천황이 처음 사용된 것도 목간을 비롯한 당시의 실물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덴무 시대다따라서 일본의 천황제는 7세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일본은 7세기 이후 대륙의 선진 문화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9~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달라졌다특히나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발해가 멸망하면서 일본은 이 나라들과 대외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적인가치를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10세기 이후에는 이른바 국풍화 현상이 나타났다즉 문학과 학술적인 측면에서 일본적 특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무사계급 즉 유럽 중세로 치면 기사에 속한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중세로 들어갔다중세로 들어가면서 일본에선 소위 무사라는 계급이 등장했고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문이 생겻으며, 11세기 중엽부터 이들은 군사 전문가인 동시에 토지 개간자 혹은 그 관리자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이 시대가 바로 헤이안 시대였다. 12세기 일본은 이른바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되었다이 가마쿠라 시대는 150년간 존재했다가마쿠라 시대에는 소위 쇼군이라는 명칭이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따라서 쇼군은 막대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으며이것은 천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몽골의 일본 침략, 1281년 쿠빌라이칸은 일본을 침공했었다. 그러나 그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가마쿠라 시대인 1281년 일본은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게 대대적인 침략을 받았었다. 13세기 몽골의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세계 최강의 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이들 또한 침략을 받은 것이다초반에 몽골 고려 연합군은 하카타 만에 침입하였지만거센 태풍이 오는 바람에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당시 일본을 침략했던 몽골-고려 연합군을 빗대어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은 경멸과 공포의 언어가 되었고몽골군을 무찌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바람은 신풍 즉 가미카제라는 말로 불리게 됐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항공모함에 자살돌격을 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전국시대 당시 영주세력들, 15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말 그대로 엄청나게 많은 세력과 전쟁을 초래했다.)

 

몽골 침략을 기점으로 가마쿠라 시대는 점차 쇠퇴했고, 1333년 멸망했다가마쿠라 막부 이후인 1338년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이 되었지만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나타난 남북조 시대의 갈등과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이렇게 하여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보았다면 무조건 들어봤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전국시대는 일본의 여러 세력들이 나와바리 다툼에 참여했는데이 전쟁은 대략 150년간 지속되었다이 과정에서 고려 이후 새로 탄생한 나라 조선에게 대마도를 침공당하는 일도 벌어졌다그러던 1543년 전 세계적으로 무역로를 넓혀가던 포르투갈이 일본에게 획기적인 무기하나를 갖다 주었는데그게 바로 나는 새도 잡는 다는 조총이었다이 조총의 도입으로 오다노부나가라는 인물이 전국을 평정해 나갔다그러나 그는 부하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고노부나가의 충실한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통일을 이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 성분은 안좋았지만 일본 최고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개인적 기대와는 달리 처참한 패배와 실패를 맛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전투를 가리킨 지도)

 

전국시대는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끝이났다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꿈이 매우 큰 사람이었고단순히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그는 과거 자신의 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던 몽골처럼 일본을 대제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그렇게 해서 명나라를 먹는 다는 이유를 들어 1592년 이른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 사람들의 거센 저항과 명나라의 지원 그리고 전멸에 가까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났고전쟁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일본군도 철수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때 군대를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히데요시 죽음 이후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일본의 쇄국정책,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며 일본은 에도 막부에 들어섰고, 이른바 쇄국정책에 들어섰다. 이 사진은 1945년 미국 국방부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난 이후 일본에서는 또 다른 인물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섰다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군대를 전혀 보내지 않았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틈타서 세력을 확장하나갔다.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그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는 에도막부가 시작됐다하지만 에도막부를 시작으로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해오던 서방과의 무역을 중단했다.

(일본과 미국, 1776년 독립전쟁을 통해 탄생한 소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일본의 쇄국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1612년엔 가톨릭 금지령이 내려졌고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도 시작됐다즉 쇄국정책으로 들어간 것이다물론 나가사키 같은 곳은 네덜란드 상인들의 무역로를 열어놓기도 했지만딱 거기까지였다. 17세기 중반 일본은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고네덜란드에게는 나가사키에만 문을 열었으며중국과의 무역은 나가사키를 통해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를 통해류큐(오키나와)하고는 사쓰마를 통해 관계를 맺고 있었다. 200년 뒤 일본의 이런 정책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한 서구 문명이 일본에 큰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일본의 쇄국정책에 엄청난 충격은 나라는 서구세력이었고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였다바로 미국(Untied States)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년 반일 불매운동 로고, 한일관계가 파탄으로 치달았던 2019년 많은 사람들이 이 로고를 들고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일본 불매운동에 참가했다.)

 

2019년 7월 한국에서 반일 불매운동이 아주 거세게 일어났다클리앙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떤 유저가 만든 ‘NO, BOYCOTT JAPAN’이라는 로고가 유튜브나 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었다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이 로고를 사용하는 이들이 많아짐에 따라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본 제품 불매 및 관광거부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특히나 일본군 위안부나 731 부대 그리고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역사 왜곡 기업들에 대한 불매로 이어졌다.

(일본 불매운동 당시 아베 규탄 집회, 많은 사람들이 아베를 규탄하기 위해 이 집회에 참가했었다.)

 

민주노총한국진보연대 등 680여 곳의 시민단체로 이루어진 아베 규탄 시민행동은 매주 토요일마다 아베 규탄 집회를 진행했고주한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부근에서도 진행되었다. 7월에 시작된 불매운동은 8월에도 계속되었고박원순 서울시장은 한국 시민사회는 강력한 불매운동을 벌이면서도 그것이 일본 그 자체에 대한 적대가 아닌 아베 정권과 부당한 경제보복그 조치의 기반을 이루는 군국주의와 일방주의가 타깃임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일본 불매운동으로 인하여 일본산 자동차의 경우 3개월 만에 판매량이 72%나 줄어드는 타격을 받았었다. 11월에 실시된 시사저널의 여론조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불매운동의 지지율은 78.9%로 매우 높았고불매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응답률도 75.8%에 달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소녀상, 이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강제로 끌고갔던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아시아에서 큰 이슈가 되면서 한국에서도 일본의 정식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오늘날까지도 반일집회 할때 빠지지 않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필자 또한 4년전 서울 일본 대사관 근처에 있는 이 소녀상을 지키는 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

 

2019년 일본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데에는 바로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문제가 있었다일본과 한국의 갈등에는 20세기의 피의역사가 있다식민지지배강제징용일본군 위안부, 731 부대 생체 실험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인 노무자 학살군함도 등 과거 일본이 한국에게 저지른 범죄와 악행의 역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이런 범죄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민족성을 말살시키며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이런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극우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일본 극우들은 이런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침략의 상징이었던 욱일기를 들고 다니는 것도 그런의미다. 필자는 이런 일본극우를 대마도에서 봤던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인은 분노하지만 대다수 일본인의 경우자신들에게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을 공식적으로 이해하기 보단 문제 삼으려고 하고 있다심한 경우 해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일삼는 일본의 극우들의 경우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비하를 일삼으며 망발을 하기도 한다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망발을 일삼거나역사적인 차원에서 일본 정부나 일본인들의 사상은 대체로 군국주의 내지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이들에게 있어 조선의 식민지 지배는 그들에게 문명화와 발전을 선물한 유산이고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인 태평양 전쟁(Pacific War)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즉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선택으로 기록되고 있다제국주의 침략의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미화돼서 기록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대해 망언을 하는 극우 파시스트 아베)

 

현재 일본의 아베 극우정권이나 이에 부역하는 이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데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자라는 사실에 있다따라서 양국 국민이 가지는 보편적인 관점이 매우 다른 것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도움과 1950년 한국전쟁의 여파로 자본주의 방식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복을 입었을 때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천황제를 유지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전범들은 이른바 민주주의 정치에 참여하여 세력을 키우고 확장해 나갔다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존재하는 것이 일본의 자민당이다여기에는 세계대전 이후 나치독일과는 달리 전범청산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미국의 책임도 막중하다당시 청산되지 않고 이른바 민주정치에 입문한 이들이 현재 일본 극우세력의 뿌리라 보면 된다.

(반일 종족주의, 2019년 뉴라이트 출신 학자 이영훈은 이 책을 집필하여 많은이들로부터 지탄받았었다.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것에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 지배 과정과 태평양 전쟁에서 저지른 과오들과 악행들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지만우리가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하기도 힘들다왜냐하면 해방 후 한국은 정부수립 과정에서 친일 출신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며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했고 그 잔재들 또한 대한민국 사회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현재 대한민국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고반일불매운동시기 이른바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출간되어 전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반일종족주의의 저자인 이영훈이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반일을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일본군의 전쟁범죄는 과장되고 날조된 것이며친일을 비판하는 것은 친북이다.”라는 것이 그가 책에서 근본적으로 하고 있는 주장이다.

(신친일파, 양심적인 학자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를 반박하는 차원에서 집필한 책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우리 또한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이 사회적 영역에서 청산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옹호는 냉전의 유산인 반공주의하고도 손쉽게 연결되기도 한다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에 빌붙었던 친일파들이 내세웠던 논리가 바로 반공이기 때문이다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반공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나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고유사점이 많다더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한국의 반공주의와 현대 일본 제국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다.

(일본 제국 패망사, 이 책은 미국인 논픽션 작가 존 톨랜드가 쓴 책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담고 잇는 책이다.)


(일본견문록, 이 다큐멘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미국 국방부에서 제작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본성을 1592년 임진왜란에서부터 찾고 있다.)

 

필자가 이번에 일본 제국주의성장과 패망의 역사라는 시리즈를 준비한 이유는 개인적인 차원에선 언젠가는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고보다 큰 차원에선 SNS를 통해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원했기 때문이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역사와 범죄 그리고 성장과 패배를 보다 정확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사실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들과 이들의 패배를 다룬 서적들은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출판됐다따라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분명히 밝히지만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기존의 학설에 무조건적으로 도전하는 글이 아닌말 그대로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과정과 패배 그리고 범죄를 기록한 글이다.

(일본 제국이 접수했던 최대 영토, 제2차 세계대전 중반기인 1942년 일본은 유럽을 대다수 점령했던 나치독일과 더불어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을 접수했고, 미국령인 알래스카와 호주까지 위협했다.)

 

제목에서 나온바와 같이 이 글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에 몸담게 되는 19세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기까지의 역사를 다룬다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라는 책과 넷플릭스에 있는 미국 국방부 제작 다큐 멘터리 프랭크 캐프라의 일본 견문록은 필자에게 이 글을 쓰는데 호기심을 불어넣어준 자극제였다그 한권의 책과 한편의 다큐멘터리는 일본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일본 제국 패망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패배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국과의 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고프랭크 캐프라의 일본 견문록은 비록 미국 국방부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그 나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잘 고찰했고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욕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부터 근원을 찾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앞으로 연재하다보면 분명 부족한 글일 테지만이 글에 큰 기대를 해주시는 분들에게 한도 끝도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공부하고 학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야욕이 불러오는 결과와 피해 그리고 허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바로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만행 그리고 패배의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