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4개월 만에 연재하는 글이네요. 이것저것 하다 보니 많이 늦네요.)

 

1991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까지를 통틀어 우리의 현대사를 잘 조명한 역작이다. 채시라와 최재성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적잖은 시청자들에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 시대적 혼란 속에서 꽃피는 남녀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여명의 눈동자’는 비슷한 시기 방영했던 ‘머나먼 쏭바강’과 ‘모래시계’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봐야할 드라마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다. 여기서 채시라가 맡은 역인 윤여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배우 채시라가 맡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인 윤여옥은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과 해방정국에서의 좌우갈등 및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주인공 윤여옥의 비극은 드라마 1화부터 시작이 된다.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여옥은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일본군 장교를 접대해야 했고, 일본군 장교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 여옥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에 배치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무수히 많은 일본군과 성관계를 맺어야 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왜 드라마 상에서 여옥은 이런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는 신세가 된 걸까?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는 그 시기 ‘정신대(挺身隊)’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번에는 한일 역사문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법 이슈가 됐다. 국내를 포함하여 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빈번이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 강간 등이 일어났었다. 1894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1918년 적백내전기 시베리아 출병과 1920년 간도 출병 등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한 일본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를 강간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러한 일본의 폭압 통치는 중국인들이 항일의지를 부추겼다. 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 있으면서 스노가 본 ‘붉은 연극’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당시 만주의 일본군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만극은 제목이 <침략>이었다. 막이 오르면 1931년 만주의 어느 마을이 나타나고. 이곳에 일본군이 밀려와서 ‘무저항’의 중국군을 몰아낸다. 2장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어느 농가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중국인 남자들은 두 팔과 무릎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이들의 의자 구실을 하고 술에 취한 장교들은 이 농민들의 아내를 겁탈한다.”

 

출처: 중국의 붉은 별 p.145

 

이처럼 일본군의 약탈과 강간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런 만행이 극을 찍었던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벌어진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에서였다. 6주 동안 20~3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중국인 아녀자들을 겁탈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고 강간당했다. 그 숫자는 최소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난징 대학살이 종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38년 1월 일본군은 소위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고, 여기에는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의 경우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했지만, 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을 띄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중국 전역으로 전선이 더 확대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일본 군부는 소위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위안부를 경영하는 상인인 오쿠다 진자부로와 후쿠다 요네자부로는 기업의 거액 융자를 획득한 후에, 동년 5월 17일 대척회사공사에 같은 방식으로 하타마 도모시치에게 1만8천엔을 대출해주었고, 이 세 명의 상인은 바로 1939년 4월 28일과 5월 24일에 각각 위안부를 소집하여 총독부의 어용선 금령환 호에 탔다. 위안부 징발책의 운영은 이와 같은 민간인 업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한편 2001년 한국의 위안부 증언집 조사 결과 한국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 일본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

(1944년에 찍은 일본군 위안부 사진, 사진 속에 임신한 여성은 바로 박영심 할머니로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써 일본을 규탄하는 행동에 착수했으며, 2006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위안소에서 줄을 서 있는 일본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루에 20명 이상의 남성을 상대했다고 한다. 생리를 포함하여 몸이 아파도 봐주지 않았으며, 사실상 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반항하면 일본군은 이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 지역은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 만주지역,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버마, 인도네시아 등이었고, 이것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들이었다. 중국에는 상하이부터 항저우, 난징, 한코우, 수조우, 우후, 난창, 한코우, 잉샨 등의 도시만 합쳐도 13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중국 대륙 전역에 있던 위안소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필리핀에는 30개소 버마에는 50개소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는 40개소 이상의 위안소가 있었고, 이걸 합치면 120개소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호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솔로몬 군도만 하더라도 20개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2년 9월 3일 일본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서에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이 400개소 정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난징에 있던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 위안소 위치 지도, 지도에 나온 바와 같이 일본이 지배하던 곳 대부분 지역에 위안소가 존재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현지 여성의 조달, 유괴와 납치, 가난 및 가족의 빚 청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일종에 취업 사기 형식으로도 존재했으며, 군을 동원한 비혼 여성에 대한 납치 및 협박을 동원한 경우도 많았다. 소위 일부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러한 일인 것을 알고서 지원하는 것이 아닌, 돈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위안부일을 하게 된 일종에 취업사기 형식이었다. 그리고 소위 정신대로 모았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차출하기도 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귀향)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영화 허스토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어찌됐든 일본 제국주의가 군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목적으로 강제성을 동원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가 20만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이 정도의 숫자가 다소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장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추산에 대한 의심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가려주는 것도 아니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피해자가 된 사례를 증언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많이 있고, 그것이 바로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두 명의 여성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제법 많고 다양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것을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기에 대표적으로 정서운 할머니와 박영심 할머니만 언급하고자 한다.

(박영심 할머니, 1998년 북한에서 인터뷰한 영상이다. 할머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인생을 다룬 단편 애니매이션, 정서운 할머니는 1992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힌 인물로,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여러 증언을 남겼다.)

 

1992년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을 확산시켰던 정서운 할머니는 경남 하동 악양 입석리에서 태어나 1938년 14살의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15살 때부터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태국-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했으며, 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 본인 증언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 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에 의해 다른 위안부들과 더불어 집단 학살 당할 뻔했지만, 미군이 일본군 기지를 공습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1년간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46년에 부산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92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했으며,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 대회에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했으며, 1996년에는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 그러던 2004년 진해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난징 대학살의 현장인 중국 난징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소의 이름은 리지샹 위안소로 면적이 6700㎡나 된다. 이 위안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현재까지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이 위안소로 끌려온 피해자 중에는 박영심 할머니도 있었다. 평남 출신의 박영심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에 난징 위안소로 끌려와 대략 3년 동안 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박영심 할머니이며, 해방 이후 1946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그렇게 북한에서 살다가 2006년에 85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 박영심 할머니에 대한 자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보고서로도 확인이 되며, 1944년 9월 8일 생산된 중국 원정군 Y군의 G-3(작전) 작전 일지에는 “쑹산 포로 중에는 한국인 여성 6명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이 중 한 명이 박영심 할머니다.

(와패니즈인 토니 마라노, 토니 마라노는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극우와의 커넥션이 깊은 인물이다. 몇 년전 그는 미국에 있는 소녀상에 가서 이런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박정희와 박근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도 탄핵되기 1년전 비슷한 짓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문제이다. 그리고 현재도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근처에서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분명한 전쟁범죄다. 소위 일반 성매매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라는 점에서 규탄 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막중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강제 징용 문제 그리고 사할린 한인 문제 등을 졸속으로 끝내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일본에게 “한국은 합의했다.”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일본 제국주의는 위안부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1938년부터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전선에 보내야 했고, 결국 식민지 지역에서 인력을 차출했다. 대대적인 징용이 바로 그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1937년 12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남경)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바다와 지옥도가 나타났다.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대는 이곳에서 소름끼치는 학살극을 전개했고, 이 학살극은 2달간 전개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난징 대학살(Nanjing Massacre)이다. 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다.

(아이리스 장의 저서 <난징의 강간>, 서구사회에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책이다.)

 

1997년 중국계 미국인이던 아이리스 장(Iris Chang)은 <난징의 강간, 제2차 세계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라는 저서를 집필하여, 미국 사회에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를 널리 알리기도 했었다. 3년 전 미국 워싱턴 DC에서 ‘홀로코스트 박물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을 들렸던 필자 또한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본적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범죄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이번에는 난징 대학살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결과와 이 학살극에서 한명의 생명을 더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아시아판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와 같은 휴머니즘 스토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1937년 7월 28일에는 베이핑과 천진 그리고 탕구 전역에 걸쳐 중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게시했던 일본군은 8월 25일에 중국 만리장성을 돌파했고, 그 여세를 몰아 차하얼 성을 침입한 뒤, 차하얼 성의 성도인 장자커우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시 상하이에서도 전투를 시작하여 3개월간의 전투 끝에 승리했다. 중일전쟁의 베르됭 전투라 불렸던 제2차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반면, 중국군은 20만 명을 초과했다. 당시 일본군이 최소 300대 이상의 전차를 포함한 상당수의 군함 그리고 항공기를 이 전투에 투입했을 정도로 제2차 상하이 전투는 대규모 전투였다.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 탱크)

 

상하이 전투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 뒤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푸산, 쑤저우, 우장 그리고 중국의 여러 도시들을 접수했다. 이렇게 되자 장제스는 1937년 11월 19일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이후 일본군은 1937년 12월 6일 난징 성 교외에 도달했고, 4일 뒤인 10일에는 탱크와 중포를 앞세워 난징 성의 각 성문으로 돌격했다. 그리고 2일 뒤 일본군은 난징 성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며, 일본군은 국민당군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은 한 일본인 종군 기자에 의해 “난징 공략에 성공하다!”라는 보도로 일본 본국에 전해졌다.

(수도 난징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일본군)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이후 난징에 있던 일부 중국군 병사들은 탈출하지 못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를 탈출하려는 이들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있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추격 및 토벌하는 작전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양쯔강에 있던 군인 및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해서 난징 대학살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후 1937년 12월 17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난징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승전 퍼레이드 이후 일본군은 난징 곳곳에서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국인을 생매장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은 난징 교외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그 앞에 포로들을 줄지어 세워 놓은 채 기관총을 난사했으며, 일본도로 한 사람씩 차례로 참수한 다음 목을 모아놓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부녀자들을 강간한 후 참수하거나 불구덩이에 집어던지거나 소총 총검으로 찔러죽이거나 총으로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 밖에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힘든 잔혹행위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람의 목을 베놓고 웃고있는 일본군 병사)

 

‘중국인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였던 이들 중에는 노다 쓰요시 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300명 목 베기에 성공한 다나카 군키치 대위도 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런 잔혹행위는 일본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되었으며, 기념사진까지 있다. 이처럼 일본군은 포로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 수없이 많은 중국인이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 표적이나 목 베기 내기의 희생물이 되었다. 산 채로 파묻히거나 칼부림에 난도질당하기도 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세워 놓고 몸에 석유를 부은 다음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했으며,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어 시체더미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난징에서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들)

 

일본군의 인간 사냥'은 여성들에게 더욱 혹심했다.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ㆍ강간한 뒤에 죽임)'은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았으며,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한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한 일본군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일로 무료함을 달랜다.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

 

난징이 점령된 지 수일 만에 시내 곳곳에는 ‘사지’가 절단되거나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쌓였다. 일본군은 살해한 여성의 성기를 도리거나 그 위에 막대기를 쑤셔놓았다. 이런 광기어린 학살은 1938년 2월까지 대략 6주 동안 전개됐다. 이런 광란의 학살극으로 최소 20만 명에서 30만 명이 대량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런 학살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성과 남성, 군인과 노인, 아이를 가리지 않고 행해졌으며, 말 그대로 난징은 피바다가 됐다. 현재 중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게 난징 대학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며 사과를 요구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1938년 1월, 히로다 고키 일본 외무대신이 주미 일본대사관에 비밀 전문을 보냈었다. 그 비밀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신문기사에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대회)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 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히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난징 대학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아사카 왕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맥아더 정부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난징을 점령했던 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외국 조계도 포위하여 중국군을 일일이 색출해 처형했는데, 사실 점령 이전단계부터 일본의 항공기가 조계지를 오폭하기도 했었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 이후 학살극이 심해지자, 이를 막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노력한 서양인이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독일 나치당원 출신의 기업가 존 라베(John Rabe)였다. 존 라베는 대략 27년간 중국에서 머물렀던 독일 지멘스(Siemens AG)사의 중국지부 사장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학살극을 보게 된 라베는 중국에 있던 조계지의 서양인들을 모아 ‘난징 안전지대 국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존 라베와 미국인 출신의 로버트 윌슨 박사가 주도했으며 총 19명으로 구성됐다.

(국내에 개봉했던 영화 <존 라베 난징대학살>, 나치당원으로 중국인 25만 명을 살렸던 독일인 사업가 존 라베의 난징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존 라베의 노력으로 이들은 일본군과 협정을 맺어 조계에 안전 구역을 만들어 중국인 피난민들을 수용하였으며, 여기서 이들이 구출한 중국인은 무려 25만 명에 달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군과 결탁하여 적잖은 중국인들을 희생시켰다는 주장을 피기도 한다. 물론 일본군은 안전 구역에 마음대로 출입하여 행패를 부려도 국제위원회는 속수무책이었고, 그 지역 밖에서의 일본군의 학살이 중단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독일 깃발로 일본군의 폭격으로부터 중국인들을 구했던 존 라베, 영화에서 묘사되는 장면이다. 영화상에서 독일 건물인 것을 확인한 일본군 전투기들이 폭격을 멈춘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인 25만 명을 구한 것은 유대인을 구한 나치당 인사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일본 외교관 신분으로 수천 명의 유대인을 나치독일 치하에서 구출했던 스기하라 지우네(Chiune Sugihara, 杉原 千畝)와 같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이후 존 라베는 1938년에 나치 독일로 돌아갔고, 자신이 본 이야기를 독일에서 알리려다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나치독일과 일본의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라베는 독일에서 근무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나치당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산을 빼앗게 비참하게 살다가 1950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물론 중국 정부에서 라베에게 지원금을 보냈지만 당시는 제2차 국공내전으로 중국 정부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다. 존 라베의 휴머니즘적 이야기는 2009년 영화로 독일에서 제작되어 개봉했었고, 2013년과 2014년에는 국내에서도 잠시 개봉했었다.

 

난징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일본 히로히토 천황(Hirohito Emperor)의 숙부 아사카 야스히코 왕자(Prince Yasuhiko Asaka)였다. 아사카 왕자는 난징을 점령했을 당시 “모든 포로를 죽여라”라고 비밀 명령을 각 부대에 전달하였다. 즉 이러한 명령이 내려졌기에 일본군은 난징에서 닥치는대로 민간인을 학살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중국인 목 베기 대회에서 100명을 참수한 노다 쓰요시 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 그리고 300명을 참수한 다나카 군키치 대위는 그 부대 사단장이던다니 히사오 중장과 함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중국으로 송환되어 난징 대학살의 전범으로서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에서 처형당했다. 물론 이 학살극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던 아사카 왕자는 맥아더 사령부의 “천황의 일족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1937년 12월 일본 항공기의 오폭으로 격침된 파나이호)

 

난징 전투 당시 일본군의 항공기들은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기도 했었다. 당시 난징의 상공에서는 수십 대의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였고 중국의 포함 몇 척이 일본 함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었다. 그 와중에 일본 96식 중폭격기의 오폭으로 미국 국적의 석유운반선을 호위하던 미 해군의 포함 파나이호가 격침되어 2명이 사망하고 4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이들을 구조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 호 역시 공격을 받아 반파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로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오폭으로 미국 군함까지 폭침했다. 물론 당시 뉴딜정책을 추진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를 방관했다. 그 이유는 당시 루스벨트가 중립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과의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불가피한 대립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본격화 됐다. 일본군은 1937년 난징 점령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후 일본군은 군대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이유를 들어 수많은 여성들에게 강제로 성행위를 시켰다. 그것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불리는 일본군 성노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이 책은 2015년 박근혜 정부 시기 사화과학 베스트 셀러 중 하나였다.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를 담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다.)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는 1936년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으로 나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따라 소련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2.26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37년 여름 일본은 이른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조르게의 추측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중일전쟁은 1937년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시점까지 대략 8년간 진행됐다. 물론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일본은 1920년대 후반부터 중국대륙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벌였으며, 1931년에는 중국 대륙 중 일부인 만주를 침략했었다. 1937년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시점을 1931년 만주사변부터 잡는다면 중국과 일본이 치른 전쟁의 기간은 아마 15년으로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이들은 25년 동안 중국 대륙을 놓고 싸웠다. 이들은 제1,2차에 걸쳐 내전을 치렀고, 제1,2차에 걸쳐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장제스는 대만으로 피신가고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지도자로 등극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을 통해 중국대륙을 대상으로 한 팽창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으로 나뉘어 이른바 내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 내전은 1927년부터 시작됐다. 1927년 4.12 쿠데타를 통해 장제스가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학살에 나서자, 마오쩌둥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른바 홍군(Red Army)을 조직했고, 장제스 국민당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이것이 제1차 국공내전의 시작이었다.

(중국의 붉은 별,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가 쓴 책으로 3대 르포 문학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마오쩌둥의 생애와 대장정 그리고 시안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만, 그만큼 국민당의 포위 및 전투도 격렬해졌다. 국민당군의 포위전은 제5차 초공전까지 진행되었다. 제4차 초공전의 경우 장제스의 경우 최소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화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는데, 여기에는 국민당이 보유하고 있던 전투기도 동원됐다. 장제스는 1933년에 있던 5차 초공전에서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으며, 1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토치카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포위 믹 군사 작전으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34년 10월 16일 강서성과 서금을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작전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작전인 대장정(Long March)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10만 군대는 1년간의 대장정을 거치며 군대가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급감했지만, 대장정이라는 전쟁사적 신화를 창조했다. 당연히 수백 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공격과 추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대장정은 시작한지 1년 뒤인 1935년에 마무리 되었으며, 에드가 스노(Edgar Snow)가 저서 ‘중국의 붉은별(The Red Star Over China)’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중국 공산당은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장제스와 장학량, 1936년 시안 사건을 통해 장제스 또한 공산당과의 연합을 추구하게 됐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60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당시 장제스 휘하에는 일본군에게 폭살당한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있었는데, 그는 1931년 만주사변부터 그 이후까지 일본군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단행했던 장제스에게 크나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에서 장제스 정부가 안 싸운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을 뿌리 뽑는 것을 선행과제로 생각했다. 1933년 열하사변에서도 일본군은 러허성 그리고 허베이성을 단숨에 점령해버렸다. 1935년에도 일본 관동군은 본격적인 화북침략에 나섰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우고 있던 1936년 10월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앞세워 내몽고 지역을 침공했었다. 따라서 장학량의 시각에선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합리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장학량은 1936년 12월 12일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안 사건이다.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물론 장학량은 장제스의 보복으로 인해 60년 동안 감옥살이(가택연금도 포함)를 하게 됐다. 장학량의 요구에 다라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연합의지를 보이면서 중국 대륙은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내전에 휩싸여 있던 중국 대륙이 다시 힘을 합쳐 뭉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현재의 노구교, 노구교는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점이다.)

 

현재 중국 정부의 수도인 베이징은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점이었다. 1937년 7월 6일 일본군 500명이 중국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노구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었다. 문제는 이 지역이 중국군의 관할이었기에, 당연히 일본의 이러한 행위는 도발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날인 7월 7일이었다. 그날 오후 10시 40분 일본군의 훈련이 끝나던 찰나에 몇 발의 총성이 들렸고, 제8중대장이던 시미즈 세쓰오 대위는 점호했다. 그러나 이등병 한명이 안보였고, 제8중대장이던 시미즈 대위는 총성을 근거로 중국군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이에 따라 시미즈는 대대장인 이치키 소좌에게 “노구교에서 중국군이 선제공격하여 아군 1명이 실종되었다.”라고 보고했으며, 실종된 병사를 수색하여 찾고자 했다.

(중국군 기지를 포격하는 노구교에 주둔했던 일본군들)

 

사실 실종된 병사는 설사 때문에 상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비웠었고, 20분 후에 부대로 복귀했다. 즉 확인되지 않은 오보를 한 것이었다. 이를 보고한 시미즈 대위는 책임 추궁이 두려워 미적거리다 뒤늦게 이치키에게 보고했다. 그 사이에 지나주둔군 사령부를 거쳐 일본 본국에 까지 보고가 올라갔고 사건은 국제 문제로 비화될 만큼 커져버린 상태였다. 이후 시미즈 대위는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고 한다.

(무타구치 렌야, 그는 노구교 사건의 책임자로 이후 버마 전선에서도 여러 기행으로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숨겨진 독립운동가라는 조롱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의 허가를 받지 않고 병사가 대열을 이탈해 천천히 용변을 보다가 늦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걸 어떻게 사실대로 밝힐 수 있겠는가. 그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음 날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기에 별다른 처분을 내리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 다음날인 새벽 4시에 상관이던 무타구치 렌야는 공격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은 포격을 가하며 노구교를 관통하는 핑한 철도 철교의 중국군 초소를 기습 공격했다. 이후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게시했고, 1937년 7월 28일에는 베이핑과 천진 그리고 탕구 전역에 걸쳐 중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게시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7월 30일 밤까지 일본군은 베이핑과 천진을 완전히 점령했는데, 3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사상자가 1만 6천 명이었던 반면 일본군 사상자는 불과 600명밖에 안됐었다고 한다.

(상하이 전투 당시 중국군 정예부대, 당시 장제스가 투입한 2개 사단은 독일식 훈련과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상하이 전투에 투입됐던 일본군 탱크)

 

이로부터 몇일 뒤 1937년 8월 2일 중국 국민당 정부의 린썬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여 “전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대일 항전에 임하라”라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중국 공산당의 주더와 저우언라이도 참가했으며, 이로써 일본 침략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이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체결됐다. 사실 1931년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투쟁과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자고 했던 중국 공산당과 비교했을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어찌됐든 이를 통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연합하여 항일투쟁에 나서게 됐다.

(난징 대학살 추모비, 30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일본군이 학살한 민간인의 숫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진격은 신속했다.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중국의 경제능력을 분쇄하기 위해 중국의 금융 중심지인 상하이에 제2 전선을 조성했다. 하지만 상하이를 방어하는 장제스측의 대응도 결코 작지 않았다. 장제스는 나치독일식 훈련과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2개 사단을 상하이에 투입했다. 이를 통해 대략 3개월가량 일본군을 저지했으나, 그 이후 중국군의 방어선은 손쉽게 무너졌다. 상하이 전선이 뚫리면서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가는 길이 뚫리게 됐다. 이후 일본군은 난징으로 들어가게 됐고, 거기서 소름끼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것이 바로 난징 대학살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기 베스트 셀러가 됐던 권성욱씨의 ‘중일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병사의 설사가 순식간에 중일 양국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무려 8년에 걸친 참혹한 싸움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그리고 2천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시간과 방법의 문제일 뿐 어차피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출처: 중일전쟁 p.208~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했는데, 거의 5개월 가까이 연재를 하지 않았군요. 기다리신 분들을 위해 사과드립니다. 다시 방학기간이니, 졸문이지만 종종 연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일본은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일련의 침략행위를 통해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잠자고 있던 서방 세력에게 힘을 과시했다. 비슷한 시기 지구반대편에서도 파시즘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일본의 만주 점령 10년 전 이미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Blackshirts)이 수도 로마로 진군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다. 즉 이탈리아에선 10년 가까이 파시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26 사건, 1936년에 일어난 이 군부의 쿠데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하게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건 반공주의 성향의 조직들을 모아 폭력과 무력으로 잡은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이러한 반공주의 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1920년 히틀러를 당수로 둔 나치당(Nazi Party)이었다. 이들은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을 예시로 삼아 갈색셔츠단 즉 돌격대(Stormtrooper)를 만들어, 군대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에 나섰다. 그러나 1923년 바이마르 당국의 진압으로 실패했고, 히틀러 또한 감옥생활을 경험했다. 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은 그 이후 계속 유지되다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으면서, 나치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 흔들렸었다. 경제 대공황 이후 다시 경제가 휘청거리자, 나치는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서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20세기 파시즘을 추구한 인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무솔리니가 선배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면서 히틀러의 힘이 무솔리니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던 시대는 끝났고, 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가 형성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시작됐다. 또한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도 시작이 됐다. 이노우에 닛쇼가 결성한 국가주의 단체 혈맹단은 일본 정부의 전 대장이나 대신 그리고 재벌 총수 등을 차례로 암살했다. 1932년엔 5.15 사건이라고 하여, 일본 해군출신의 청년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살해하고, 육사 생도등이 정부와 정당 기관 그리고 일본 은행 등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당시 히로히토 천황의 측근과 정당 그리고 재벌에 대한 테러이자 쿠데타였다.

(5.15 사건을 보도한 일본의 언론사)


(찰리 채플린, 무명영화 배우로 유명한 찰리 채플린 또한 이 사건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덴뿌라를 먹고 있어서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이런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들은 재판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방위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이들은 가담의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과 집행유예 및 훈방조치를 받았다. 당시 일본 민중들이 정당정치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오히려 반란 장교를 구명하려는 탄원이 많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사형을 받은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 재판을 받은 40명 중에 거의 전원이 1~2년 내에 석방됐다. 그러나 일본에서 일어난 5.15사건은 1920년대로 대표되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식민지 조선에서는 문화통치로 일컬어지던 시대의 종말 즉 정당내각 시대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2.26 쿠데타 당시 진격하는 일본군)


(2.26 쿠데타 관련 일본 측 서적)

 

1932년에 일어난 5.15 사건은 이렇게 끝났지만, 1936년 2월 26일에 일어난 이른바 2.26 쿠데타는 아니었다. 1936년 2월 26일 수도 도쿄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사단의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1,400명의 병력은 말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육군대신의 공관을 포위했고, 경시청을 점거했으며, 총리대신과 대장 대신, 내대신, 시종장을 암살했다. 그리고 육군 교육총감의 집으로 몰려가 총감을 살해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존황토간(尊皇討奸)’으로 천황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 간신들을 치겠다는 의미였다. 이들은 천황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 육군대신의 공관으로 몰려들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알려줬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정치사회적 개조와 통제파 지도자들을 체포할 것

2. 황도파 장교들을 요직에 임명할 것

3.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아라키 장군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당시 2.26 쿠데타에 연루가 됐던 인물 중에는 사회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입장에 있던 기타 잇키(Kita Ikki)도 있었다. 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일본 제국 패망사』의 저자 존 톨랜드(John Tolland)는 그에 대해 “사회주의 강령에 제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쓴 열렬한 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급직적인 사회상을 꿈꾸면서도 천황 숭배 사상에 사로잡혔었다고 톨랜드는 주장했다. 물론 톨랜드의 주장과는 달리 기타 잇키가 천황제를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고, 2.26 쿠테타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잇키, 그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성향이 혼합된 인물로 말 그래도 짬뽕인 인물이다.)


(국내에 출판된 기타 잇키 전기,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간했다. 분량과 가격이 만만치 않은 책이다.)

 

기타 잇키는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와 지도력이 없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생각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입장에서도 나타났다. 물론 그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했고, 그러한 차별을 완벽히 철폐해야한다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나의 일본제국 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일본의 지배 자체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또한 2.26 쿠데타에 관여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혼합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2.26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은 천황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32년 5.15 사건을 생각하며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쿠데타 소식을 들은 천황은 매우 분노했고,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겠다고 하며 큰소리를 쳤다. 반면 일본 육군은 청년 장교들의 취지에 공담한다면서 천황을 설득하고자 했다. 결국 천황의 명령에 따라 일본 군대는 쿠데타 진압에 나섰다.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장교 2명이 자결하고 세 차례의 재판 결과 주모자 및 적극 가담자 18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6명이 무기징역형, 22명은 1년 6개월~6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서 2.26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도쿄에 있던 독일 대사관도 이 소식을 접했고, 당연히 반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당시 나치독일의 언론 지였던 『프랭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비공식 통신원으로 일하던 대사관의 무관 비서관은 2.26 쿠데타에 관한 임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보고서를 2개나 작성했다. 하나는 나치 독일에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 임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의 증조부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친구사이였다. 그가 바로 소련의 스파이로 독소전쟁에 큰 기여를 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였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나온 박정희, 어린 시절 그는 2.26 쿠데타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군 중위가 된 박정희, 그는 결국 1940년 만주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의 기회주의적인 생애가 시작된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 2.26 쿠데타는 25년 뒤 한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 군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한 청년이 이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Park Chung hee)였다. 2.26 쿠데타가 진압으로 끝나면서 통제파가 전면에 서게 되었고, 일본 군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전시체제가 확고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덕분에 소련은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 대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련이 예측한 대로 일본은 1년 뒤 중국과의 확실한 전면전에 돌입했고, 그것이 바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제국 패망사』 제1장 게코쿠조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리하르트 조르게, 그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소련은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스파이임이 발각되어 1944년 처형당했고, 1960년대 초 소련에서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에 있는 조르게의 묘, 현재는 러시아 대사관 측 인물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2. 26 사건은 끝났다. 여기서 발생한 폭력 사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유혈극이었다. 다만 목숨을 잃은 사람이 7명에 불과했고 폭도들은 순수히 항복했다. 가장 뛰어난 용기의 모범은 여인들이 보여주었다. 반대로 장군들은 허둥거렸다. 대부분의 외국인에게 이 반란은 초국가주의자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단 소련은 알았다. 이 사태가 중국 내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한 조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끝났지만,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은 이미 태평양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출처: 일본 제국 패망사 p.91~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1931년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도)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펑톈 시 외곽 북쪽으로 7.5km 떨어진 류타오후에서 뤼순과 펑톈 그리고 창춘을 연결하는 만주철도를 달리던 특급열차는 달리던 중 폭음을 듣게 됐다. 다행히 폭발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파괴되지 않았고, 제 갈 길을 달렸다. 같은 시각 철도 주변에는 일본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 소속의 공병들이 숨어 있었고, 이들은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그 시각 보고를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의 명의를 제멋대로 사칭하여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펑톈 교외에 있는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과 중국군간의 전투가 시작됐다. 이것이 바로 1931년에 일어난 일본의 만주사변이었다.

 

지난 1920년대의 일본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중국 대륙의 영토를 대상으로 침략전쟁을 본격화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31년의 일본은 비록 만주이긴 해도 중국 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해 나갔다. 이것은 1937년에 일어날 중일전쟁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몇몇 학자들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적으로 군국주의로 나가는 방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일까?

(검은 화요일,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검은 화요일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제 공황을 불러 일으켰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일본 정부는 기업의 도산 사태를 막기 위해 ‘진재어음’을 발행하는 것으로 수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1927년에 이르러 일본의 만성적 불황은 금융공황으로 비화됐고, 가까스로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29년 만성적 공황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다른 일이 일어났다. 바로 그해 10월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인해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검은 화요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경제 대공황은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의 경우 1924년부터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지만,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자, 직격타를 맞았다. 일본 또한 경제 대공황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경제 대공황으로 수출 시장이 축소되고, 공업 생산이 급감했다. 이것은 일본의 임금 하락과 실업 증가로 나타났으며,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여기서 일본이 선택한 노선이 바로 팽창정책이었다.

(만주사변 당시 중국 선양에 입성한 일본군과 기병대)

 

사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이후부터 만주 지역을 독점 하고자 했다. 1912년과 1916년 그리고 장작림 폭사사건에서 비롯된 1928년의 사건은 일본의 ‘만몽 자치운동’을 사주하려는 계획의 결과였다. 즉 일본은 예전부터 만주지역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미국발 경제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연맹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아시아 문제를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일본인 만주침략을 가속하 하기 위한 내적 혹은 외적 조건들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 소총 대대)

 

1931년 9월 18일 밤에 철도가 폭파되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됐다. 다음 날인 19일에는 관동군에서 조선군 사령부에도 전보를 보내어 신속한 병력 증파를 요청하였고, 대략 4천 명으로 구성된 조선군과 2개 비행중대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했다. 또한 펑톈을 방어하는 동북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240mm 중포를 앞세운 관동군의 공격 앞에 중국군은 패주했다. 이후 주요 정부 청사를 비롯해 펑톈 항공국, 병기창, 동대영이 잇따라 함락되면서 20일 새벽까지 펑톈 성 전역이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날 관동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장춘도 함락됐다. 그 다음 날인 21일에는 지린 성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일본군에게 점령됐다. 이렇게 해서 광대한 남만주 지역이 거의 2~3일 만에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만주에서 진공중인 일본군 관동군 소속 육군 부대)


(1931년 9월 19일 새벽 장학량 군대를 공격해서 펑톈 성을 장악한 것을 환호하는 일본 관동군)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국제연맹은 무능함만 드러냈다. 거기다 미국은 이해관계에 눈이 멀어 일본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고, 과거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었던 영국도 일본편을 들었다. 어쨌든 일본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재는 전혀 없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1932년 1월 3일에 진저우를, 2월 5일에는 하얼빈을 점령했고, 만주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만주에 주둔하던 장학량은 국민당의 장제스 밑에서 있었는데, 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 사변 당시 방어진지에서 전투중인 중국 국민당군)


(상하이에 입성한 일본군 89식 전차)

 

1931년 만주를 손쉽게 장악했던 일본은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중국 본토에서도 전투를 전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상하이 사변이었다. 당시 일본은 상하이에서 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만주에서 상하이로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만주 전역을 장악하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상하이와 앙쯔강 일대에 배치된 해군력을 강화했다. 항공모함을 포함한 군함들을 그곳에 증파했고, 상하이 지역에 일본군 병력을 증원했다. 또한 장제스도 그곳에 병력을 배치했고, 이렇게 되면서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상하이 사변 당시 독일제 트럭을 타고 시내오 진입한 일본군)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를 거두고 환호하는 일본군들)

 

전투는 1932년 1월 28일에 일어났다. 당시 중국군은 3만 3,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반면, 일본군은 6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30척의 군함과 최소 4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야포와 장갑차 수십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즉 화력이나 제공권에서 중국군을 훨씬 압도했던 것이다. 양측의 전투는 매우 치열해졌고, 초기에 일본군이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이는 실패로 끝이 났다. 2월 9일에는 일본군 또한 본국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2월 24일에 일본군 2개 사단이 증원되면서 점차 승기를 잡았다. 1932년 3월 1일 네 번째 총공격에서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2일 뒤인 3월 3일 양측은 정전에 합의하게 된다.

(2020년에 만들어진 중국 영화 800, 제1차 상하이 전투 당시의 전투를 다룬 영화다.)

 

상하이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2달간 전개됐던 이 전쟁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적지 않았다. 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던 일본군은 3,091명의 사상자가 나왔던 반면 중국군은 1만 4,326명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에도 일본군은 국지적인 충돌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목표 자체는 만주지역 점령과 만주국 수립에 있었기에 전투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선에서 국제적인 합의를 봤다.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은 이를 승전으로 홍보했다.

(만주국 초대 내각)


(만주국 괴뢰 황제 푸이)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에 있는 홍커우 공원에서는 일본군의 전승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그 전승행사에선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해, 시께미스 마모루 등을 포함한 7명의 일본측 대표들이 누군가가 투하한 폭탄에 의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끄는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윤봉길 의거였다. 비록 상하이 전투에서 장제스는 패배한 입장이었지만, 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을 듣고, 이에 감동을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에서 터진 폭탄, 이 폭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인 윤봉길이 던진 것이었다.)


(윤봉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물통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이후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것은 임시정부 주석이던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일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임정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게 된다.)


(윤봉길의 유서)

 

상하이 사변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내세워 이른바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국가를 만들었다. 따라서 일본은 본인들이 목표했던 것을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 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은 국제적인 반대에 시달렸는데, 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933년 3월 27일에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히틀러의 파시즘적 형제인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미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세계 경제 대공황과 일본의 만주 침략과 시작된 1930년대는 암흑의 터널을 통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Comandante 2021-02-21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주국에 대하 쓰신 글을 보니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떠오르네요^^

NamGiKim 2021-02-21 14:41   좋아요 0 | URL
푸이를 보살펴주던 중국 공산당 출신의 인물이 있었죠. 나중에 문혁으로 죽게 되지만ㅠㅡㅠ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