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만에 연재하는 글이네요. 이것저것 하다 보니 많이 늦네요.)
1991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까지를 통틀어 우리의 현대사를 잘 조명한 역작이다. 채시라와 최재성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적잖은 시청자들에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 시대적 혼란 속에서 꽃피는 남녀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여명의 눈동자’는 비슷한 시기 방영했던 ‘머나먼 쏭바강’과 ‘모래시계’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봐야할 드라마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다. 여기서 채시라가 맡은 역인 윤여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배우 채시라가 맡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인 윤여옥은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과 해방정국에서의 좌우갈등 및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주인공 윤여옥의 비극은 드라마 1화부터 시작이 된다.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여옥은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일본군 장교를 접대해야 했고, 일본군 장교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 여옥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에 배치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무수히 많은 일본군과 성관계를 맺어야 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왜 드라마 상에서 여옥은 이런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는 신세가 된 걸까?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는 그 시기 ‘정신대(挺身隊)’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번에는 한일 역사문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법 이슈가 됐다. 국내를 포함하여 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빈번이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 강간 등이 일어났었다. 1894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1918년 적백내전기 시베리아 출병과 1920년 간도 출병 등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한 일본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를 강간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러한 일본의 폭압 통치는 중국인들이 항일의지를 부추겼다. 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 있으면서 스노가 본 ‘붉은 연극’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당시 만주의 일본군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만극은 제목이 <침략>이었다. 막이 오르면 1931년 만주의 어느 마을이 나타나고. 이곳에 일본군이 밀려와서 ‘무저항’의 중국군을 몰아낸다. 2장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어느 농가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중국인 남자들은 두 팔과 무릎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이들의 의자 구실을 하고 술에 취한 장교들은 이 농민들의 아내를 겁탈한다.”
출처: 중국의 붉은 별 p.145
이처럼 일본군의 약탈과 강간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런 만행이 극을 찍었던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벌어진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에서였다. 6주 동안 20~3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중국인 아녀자들을 겁탈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고 강간당했다. 그 숫자는 최소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난징 대학살이 종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38년 1월 일본군은 소위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고, 여기에는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의 경우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했지만, 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을 띄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중국 전역으로 전선이 더 확대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일본 군부는 소위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위안부를 경영하는 상인인 오쿠다 진자부로와 후쿠다 요네자부로는 기업의 거액 융자를 획득한 후에, 동년 5월 17일 대척회사공사에 같은 방식으로 하타마 도모시치에게 1만8천엔을 대출해주었고, 이 세 명의 상인은 바로 1939년 4월 28일과 5월 24일에 각각 위안부를 소집하여 총독부의 어용선 금령환 호에 탔다. 위안부 징발책의 운영은 이와 같은 민간인 업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한편 2001년 한국의 위안부 증언집 조사 결과 한국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 일본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
(1944년에 찍은 일본군 위안부 사진, 사진 속에 임신한 여성은 바로 박영심 할머니로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써 일본을 규탄하는 행동에 착수했으며, 2006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위안소에서 줄을 서 있는 일본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루에 20명 이상의 남성을 상대했다고 한다. 생리를 포함하여 몸이 아파도 봐주지 않았으며, 사실상 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반항하면 일본군은 이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 지역은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 만주지역,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버마, 인도네시아 등이었고, 이것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들이었다. 중국에는 상하이부터 항저우, 난징, 한코우, 수조우, 우후, 난창, 한코우, 잉샨 등의 도시만 합쳐도 13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중국 대륙 전역에 있던 위안소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필리핀에는 30개소 버마에는 50개소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는 40개소 이상의 위안소가 있었고, 이걸 합치면 120개소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호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솔로몬 군도만 하더라도 20개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2년 9월 3일 일본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서에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이 400개소 정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난징에 있던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 위안소 위치 지도, 지도에 나온 바와 같이 일본이 지배하던 곳 대부분 지역에 위안소가 존재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현지 여성의 조달, 유괴와 납치, 가난 및 가족의 빚 청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일종에 취업 사기 형식으로도 존재했으며, 군을 동원한 비혼 여성에 대한 납치 및 협박을 동원한 경우도 많았다. 소위 일부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러한 일인 것을 알고서 지원하는 것이 아닌, 돈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위안부일을 하게 된 일종에 취업사기 형식이었다. 그리고 소위 정신대로 모았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차출하기도 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귀향)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영화 허스토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어찌됐든 일본 제국주의가 군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목적으로 강제성을 동원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가 20만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이 정도의 숫자가 다소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장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추산에 대한 의심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가려주는 것도 아니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피해자가 된 사례를 증언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많이 있고, 그것이 바로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두 명의 여성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제법 많고 다양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것을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기에 대표적으로 정서운 할머니와 박영심 할머니만 언급하고자 한다.
(박영심 할머니, 1998년 북한에서 인터뷰한 영상이다. 할머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인생을 다룬 단편 애니매이션, 정서운 할머니는 1992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힌 인물로,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여러 증언을 남겼다.)
1992년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을 확산시켰던 정서운 할머니는 경남 하동 악양 입석리에서 태어나 1938년 14살의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15살 때부터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태국-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했으며, 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 본인 증언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 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에 의해 다른 위안부들과 더불어 집단 학살 당할 뻔했지만, 미군이 일본군 기지를 공습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 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1년간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46년에 부산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92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했으며,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 대회에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했으며, 1996년에는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 그러던 2004년 진해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난징 대학살의 현장인 중국 난징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소의 이름은 리지샹 위안소로 면적이 6700㎡나 된다. 이 위안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현재까지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이 위안소로 끌려온 피해자 중에는 박영심 할머니도 있었다. 평남 출신의 박영심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에 난징 위안소로 끌려와 대략 3년 동안 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박영심 할머니이며, 해방 이후 1946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그렇게 북한에서 살다가 2006년에 85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 박영심 할머니에 대한 자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보고서로도 확인이 되며, 1944년 9월 8일 생산된 중국 원정군 Y군의 G-3(작전) 작전 일지에는 “쑹산 포로 중에는 한국인 여성 6명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이 중 한 명이 박영심 할머니다.
(와패니즈인 토니 마라노, 토니 마라노는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극우와의 커넥션이 깊은 인물이다. 몇 년전 그는 미국에 있는 소녀상에 가서 이런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박정희와 박근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도 탄핵되기 1년전 비슷한 짓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문제이다. 그리고 현재도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근처에서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분명한 전쟁범죄다. 소위 일반 성매매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라는 점에서 규탄 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막중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강제 징용 문제 그리고 사할린 한인 문제 등을 졸속으로 끝내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일본에게 “한국은 합의했다.”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일본 제국주의는 위안부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1938년부터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전선에 보내야 했고, 결국 식민지 지역에서 인력을 차출했다. 대대적인 징용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