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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인상 - 현대한국학연구소 자료총서 8
백남운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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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소련에 맞서 반공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확장했고,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미국에 맞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확장해나갔다. 미국에 힘입어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은 냉전시기 소련의 위협을 더 많이 강조했고, 그런 역사적 내지는 정치적 관점은 지금도 그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개입한 사례보다 소련이 영향력을 확대한 사례를 세계사 시간에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서방에서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그러한 전제들은 과연 정확한 판단인 것일까? 

 

여기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과 서방 중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서방 중심이 판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백남운이 집필한 쏘련인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고 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소련을 방문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다. 사실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이라는 책 이전에도 소련 방문기를 다룬 책으로는 월북한 문학작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도 있지만, 지도부를 중심으로 북한 정치인들이 공식적으로 만난 부분을 다뤘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처럼 분명히 개인 저술이기는 하지만, 북한 정부 수립 이전에 집필된 이들 방문기와는 그 성격과 간행 취지가 다르다. 쏘련인상은 북한 정부 수립 직후 국가적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북한 내각의 최초의 공식 소련 방문 일정과 성과를 정부 각료의 입장에서 정리하였기에 기본적으로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방문 보고서다. 그리고 쏘련인상은 이태준 작가가 처음 방문하여 썼던 쏘련기행하고도 시대적인 차이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태준 작가가 소련을 처음 방문할 당시는 냉전이 점차 시작하려던 시기였고,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이 되기 이전이었던 반면에, 백남운의 쏘련인상은 냉전초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노골화 되고, 한반도 분단 정부가 남북한에 수립된 상태였다.

 

여기서 국제적인 동향을 얘기하자면, 백남운이 김일성, 박헌영 그리고 홍명희와 더불어 북한 정치 지도부로써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은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개입과 폭력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던 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임자인 해리 트루먼은 19473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시점으로 그리스 내전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노골화 했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과 같은 자주통일을 위한 시도를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고, 이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더 나아가 제주4.3항쟁에서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이유를 들어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으며, 여수와 순천에서도 잔혹한 학살극이 미국의 지원세력들에 의해 일어났다. 또한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서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군사물자를 장제스 세력에게 지원하여 반공의 보루를 강화했다.

 

이처럼 백남운이 소련을 방문하던 1949년 초의 미국은 제국주의적 개입과 간섭을 통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수법은 정말로 간악하고 사악했다. 그들은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인권, 민주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개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개입을 합리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권탄압과 학살도 자연스럽게 합리화됐다. 쏘련인상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악한지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저자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자 내지는 역사학자답게 이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순을 매우 잘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이 왜 거짓과 위선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책에 있는 내용들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국가의 소위 원조정책은 미제의 마샬안이 대표적인 것이다. 마샬식 원조의 특징은 상대국가의 식민지화와 미제의 반공파쇼제 확립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달러를 구세주로 광신하는 채귀인 셈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05

 

쏘베트정부의 평화정책은 미영 반동도당들의 격렬한 저항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국가들은 전쟁준비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쟁 전시기에 비하여 군사비 지출을 현저하게 증가시켰습니다. 미제예산에 있어서 1948~1949년도 군사비 지출은 1939~1939년도에 비하여 거의 15배로 증가되었습니다. 1949~1950년도에는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의 교서에 지적된 바와 같이 군사비 지출은 예산총액의 38%에 달하며,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다른 항목의 지출을 총계하면 1949~1950년도의 미국군사비는 국가예산의 반액 이상에 달하는 것입니다. 1949년도의 영국군사비는 1939년도에 비하여 3배로 증가되였습니다. 이상의 숫자들은 북미합중국과 영국의 현재의 지도자들의 침략적 정책을 여실히 증시하는 것입니다.”

 

출처 : 쏘련인상 p.149

 

세계대전의 전범자들을 완전히 처단하기도 전에 그 처단을 약속한 미제가 오늘은 전쟁방화를 일삼고 있다. 세계평화 옹호의 세력이 나날이 장성되여 가는 오늘에 있어서 반쏘전쟁뿔럭인 북대서양동맹(NATO)을 체결한 미제는 소위 세계제패의 야망을 방공선결성에 빙자하여 엄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파쇼 두목이였던 히틀러 강도배의 수법을 되푸리라는 신파쇼 두목인 미제의 전략태세인 것이다. 미제의 제2 ‘방공선즉 동양침략선은 그 거점인 하와이로부터 인도양과 호주 비율빈(필리핀) 등을 거쳐 유구(오키나와) 열도의 중거점과 연결하고 거기서 다시 조선 동해안을 거쳐 화태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지대를 행동의 제일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출처: 쏘련인상 p.210

 

따라서 저자 백남운이 지적하듯이 미국이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여 내세우는 개념은 일종에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기만적 행위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소위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방어를 위해 개입했다.”는 식의 논리는 제국주의 세력들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에 반해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계는 미국과는 달리 소련이 제국주의적으로 어떠한 국가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나 서방에선 마치 소련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의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실제로 소련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휘두른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정도였으며,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이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동유럽을 중심으로만 사회주의 라인을 형성했을 뿐이다. 즉 트루먼 독트린처럼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구실로 타국의 침략하고 정복하는 행위를 소련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되는 학습과 교육을 받는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 사회에 반소 반북주의가 퍼져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소련이 한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지도부가 소련의 스탈린과 회담했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쏘련인상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보고 느낀 백남운의 감정을 담고 있다. 그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그 회담이 조소(북한과 소련)관계에 있어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했다고 얘기하며, 동등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에게 모든 것을 다 넘기고 무조건적으로 친미만 외치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하고는 분명히 다르며 매우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저자 백남운은 회담에서 자신의 받은 인상을 요약했는데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담은 오후 8시로부터 920분까지 계속되엇던 것이다. 나는 이 회담 중에서 받은 인상을 요약하려 한다. 첫째로 조쏘 양국간의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구체적 계획성이 일층 강화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결코 외교적으로 빠게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적인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실제적 요구와 민주적 원조가 통일적으로 결부되는 형태로서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감이 더욱 두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쏘련정부의 최고지도자의 성의있는 태도에 경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딸린 대원수의 차관에 관하여 직접 말한 민주적 원조의 원칙이 타민족의 자주 독립권을 존중하고 보장하여 주는 쏘련정부의 대외정책이 기본이 되는 것을 절실히 나는 체감한 바 있었다.

 

둘째로 위대한 쓰딸린의 말하는 모습은 토막 토막 그치는데 그것이 붉은 실로 짼 구실처럼 원칙으로 일관된 것이다. 인류의 신사회를 창조하는 최고의 기사인 만큼 세계 노동인민의 태양으로서 숭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니와 사물에 정통하는 태양이 그 두뇌 속에 서리고 있는 듯이 세계 정치사정을 꿰뚫으고 있는 천재적 정치가인 인상을 받게 되였다. 회담하는 중에 두 번이나 쓰딸린이 입을 빙그레 하고 눈우슴을 보냈다. 조선사정에도 정통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미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행동이 가소롭다는 표정인 듯하였다. 쓰딸린의 일언일소는 실로 세계 민주정치의 역사적 발전방향의 지표인 인상을 직각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문화 협조에 대한 기본적 원칙으로서 해명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 회담의 결과로 대표단의 방쏘 목적이 달성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는 우리 조국의 통일발전을 위하여 불가능이 없다는 자신을 더욱 굳게한 바 있었다.

 

세째로 회담하는 분위기가 마치 친숙한 동지들이 공사를 상의할 때 정색하는 정도로 그렇게 막이 없는 분위기이였다. 그것은 쏘련정부가 조선문제에 대한 일호의 야심이 없는 까닭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 대표단이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된다는 까닭이였다. 그러므로 조쏘 양국간의 영구 친선관계를 더욱 공고화하는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독립을 보장하는 유일의 정치노선이라는 원칙이 이 회담으로써 다시금 재확인될 뿐 아니라 전진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쏘련인상 p.86~87

 

그 외에도 쏘련인상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처럼 레닌박물관을 포함한 소련의 여러 박물관들을 포함한 관광지들을 본 것과 학교 및 공장시설을 방문한 것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백남운이 보게 된 소련은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된 그리고 인민이 생각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복지혜택을 받으며 사는 사회였다. 쏘련인상에서 가장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소련의 농업관련 분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고 있는 소련의 농업분야는 발전적이지 못하고 풍족하지 못하다는 편견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 백남운이 접하게 된 소련의 농업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괜찮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전후재건을 마친 소련의 농업생산은 예전에 공업화를 추진하던 시기와 전쟁 이전의 시기보다도 훨씬 더 풍족한 상황이었다. 즉 전후재건이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소련의 농업이 발전했다는 것을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꼴호즈 조직의 창조자인 쓰딸린의 창안에 의하여 1927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농업집단화의 방침이 결정되였던 것이며 1929년부터는 꼴호즈 조직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전전인 1940년도의 쏘련농업은 벌써 7천여 개소의 농기지정소와 53만대의 뜨락또르와 182천대의 꼼바인 228천대의 화물자동차가 작업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기계화의 수준이 미국을 훨씬 능가하였던 것이다.

 

1940년도에 쏘련 꼴호즈에서는 쏘련 토지경작의 4분지 3과 모든 파종면적의 절반 이상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고 곡물면적의 절반을 꼼바인으로 추수하였다. 1940년도에 미국에서는 대지주의 자본주의적 농업체제로서 토지경작의 절반과 파종면적의 3분지 1만을 뜨락또르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농업기계의 능률에 있어서 미국 뜨락또르의 1마력이 5.8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한다면 쏘련 뜨락또르의 1마력은 32.6헥타르의 면적을 경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업노동의 기계화는 농업노동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제고시킨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1~112

 

쏘베트정부는 대독전쟁을 세계사적으로 승리한 이후 새로운 전후 5개년계획에 있어서 꼴호즈와 쏘호즈의 생산조직을 재건할 뿐 아니라 전전의 수준을 초과하기 위한 모든 방책을 쓰고 있던 것이다. 이 전후 5개년계획을 수행하는 동안에 농업부문에 있어서 1940년도에 대비하여 1950년도의 말기에는 토지경작의 기계화가 70%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며 기계화된 춘기 및 추기 파종은 59%로부터 70%로 곡물에 대한 꼼바인의 추수는 43%로부터 50%로 휴간지의 재경과 전지의 추경은 71%로부터 90%로 장성하게 되어 있다. 1949년도의 농업부문에서는 15만대의 뜨락또르와 29천대의 꼼바인과 160만대 이상의 견인기계 기타 농업기계를 받았다. 농기 농구의 거대한 기술적 발전은 그 품질의 개진과 새로운 구조형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도의 농촌경제는 전전인 1940년도보다도 4배 이상의 뜨락또르 기타 농기를 받았던 것이다.”

 

출처 : 쏘련인상 p.112

 

이처럼 백남운과 북한 정치인들이 비춰진 소련의 모습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사회주의적인 가치가 실현된 사회였다.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으며, 파시즘적임 침략을 무찌르고 급속도로 전후재건에 성공한 소련이 백남운을 포함한 북한 정치인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로 비추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 이것이 초기 북한 정치인들이 추구했던 사회였고, 실질적인 목표로 삼았던 과제였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현재 북한은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아직도 실행하고 있다. 북한도 이런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저자 백남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백남운은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개척자로서, 1930년대 초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과 역사상을 창도하여 한국 근현대 학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조선사회경제사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조선에 뿌리심어 놓은 책이었다. 그 또한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신민당에서 활동했고,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과 협력했으며 1947년 그가 창당한 근로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여운형 암살과 좌우합작운동 실패 이후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그 또한 월북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김구가 주도한 남북협상에도 참가했고, 북한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초기 북한의 교육을 담당했다. 1961년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그리고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를 관장했다. 197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역임했고, 1979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처럼 백남운은 북한 정권에서 여러 직책을 맡은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해 서방의 왜곡되고 편견에 가득찬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다. 마르스크주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 백남운이 쓴 쏘련인상은 그러한 편견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고, 북한 정권 초기 인사들의 소련 방문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알기 위해선 문학가 이태준의 쏘련기행과 더불어 같이 읽어야할 책이다. 그 책과 같이 읽으면 반소주의와 반북주의의 편협한 제국주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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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전집 6 : 쏘련기행 중국기행 외 이태준 전집 시리즈 (소명출판) 6
이태준 지음, 상허학회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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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의 침략을 받았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전후재건의 속도를 보여줬다. 소련이 전 세계에 보여준 변화상은 놀라운 수준이었고,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냉전시기 소위 반공 제국주의 진영에 섰던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준 소련의 놀라운 변화상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소련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는 당연히 1948년 정부수립부터 강력한 반공국가를 유지해왔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8년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분명히 좌익이라는 존재와 가치를 파리나 벌레만도 못한 대상으로 취급하던 극단적 매카시즘 국가였지만, 정부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민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한에서 친일 경찰에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좌익인사들이 월북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또 많은 이들이 월북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월북을 선택했던 이들 중에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상징적 지표인 이태준이 있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던 이태준은 좌우대립이 남한 내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던 19468월 월북했다. 월북을 하게 된 이태준은 북한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에서 만든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써 소련을 여행하고 오는 일이었다. 이 여행 과정에서 이태준은 자기가 직접 보고 체험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쏘련기행(The Trip of The Union of Socialist Republics)’이었다.

 

이태준 작가가 쓴 쏘련기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468월부터 10월까지 방소문화사절단의 일행으로 경험했던 소련 기행문이고, 두 번째는 10월 혁명 32주년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쪽 일원으로 방문했을 당시의 소련 기행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6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게 된 이태준은 월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곳바로 소련여행을 떠나게 됐다. 소련에 가기 위해 평양에 있는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게 된 이태준은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소련 제1극동전선군의 제25군 사령관이자, 소련군정 최고 사령관인 치스차코프로부터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19463월 영국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지도자였던 윈스턴 처칠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이른바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직은 미국의 반소 반공정책인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 발표되진 않은 시점이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갈등은 심화됐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 또한 마찬가지였고, 특히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친미정권을 세우고자 했으며, 여기서 친일파들의 힘을 빌렸다.

 

35년간 조선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 소련을 매우 적대시했다.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많은 사회주의 단체들과 학생운동들이 일어났고,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이들은 민족주의 계열보다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농민·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주장하며, 대중과 민중속에 파고들어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근간을 흔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소련을 당연히 악마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세력도 그 당시 이 흐름을 따랐다.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결탁하였던 친일파들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부역하며 반소선전과 반공선전을 일삼았다. 즉 해방 후 미군정을 등에 업고 반소선전을 했던 친일파들의 거짓말과 선전은 35년간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했던 반소선전과 일맥상통했다. 필자가 보기에 소련군정 최고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이태준 작가에게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고 말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해방 후 친미 제국주의자들이 하는 반소선전의 거짓말이 어떤 것인지를 소련에 가서 직접 알아보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 소련의 상황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처참했다. 무엇보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이 일으켰던 독소전쟁으로 모든 것이 초토화 된 상황이었고, 4년간의 반파시스트 항쟁에서 2700만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죽었다.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며 저지른 만행은 씻을 수 없는 인류 최악의 전쟁 범죄였다. 그러나 단결한 소련 인민들은 침략자 히틀러에 맞서 군대와 인민이 단결했고, 소련의 육··공군은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영웅적으로 무찔렀다. 책의 저자 이태준은 10월 혁명 32주년에 맞춰 두 번째로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소련군 퍼레이드를 보게 되었는데, 이들을 본 이태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마다 선두에 말굽소리 달리며 사령관의 열병을 맞이하는 우라!” 소리가 성벽을 진동하며 일어났다. 뒤이어 역사박물관 쪽으로부터 자동차에 실린 낙하산부대와 대지를 뒤흔드는 탱크부대가 들어섰다. 탱크들은 앞에 내뻗은 포열마다 적의 비행기와 탱크를 쳐부순 수효대로 비행기와 탱크의 흰빛으로 그렸는데 하나같이 10여대씩 그린 영웅 탱크들이었다. 서구에서 10여 국가들을 침략하였고 이 위대한 10월에서 탄생했으며 레닌과 스탈린에게 영도되는 쏘련을 감히 유린해 들어오던 히틀러 야만들을 꺼꾸러뜨린 영용한 군대와 병기들이 바로 이 군대와 이 병기들이며 동양에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을 비롯하여 여러 약소민족들에게 악독한 흡혈귀 노릇을 하던 일제를 쳐부순 것도 저 성스러운 군대와 병기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22

 

이태준 작가의 말대로 소련의 탱크와 비행기 대포는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을 멸망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련은 이 전쟁에서 수많은 산업기반이 전시 초기에 파괴되었고, 2700만이나 되는 인명이 이 전쟁에서 죽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소련은 경제적으로 다시 재건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른바 전후재건을 위한 5개년 계획에 착수했고,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련인민들은 전후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태준이 방문했던 1946년 소련은 분명히 전후재건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낙후성을 던져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유로 들어 간악한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반소선전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들은 항상 편향된 자료와 관점을 가지고 거짓선전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소련민중이 왜 스탈린과 소련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지를 놓쳤다. 그것은 바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쏘련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민족들의 연맹에의 가맹과 탈퇴는 자유이며 민족들의 선진, 낙후의 차별이 없이 절대평등이 원칙으로, 자민족문화 중심으로의 발전의 자유, 그리고 이런 자유와 평등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서는 낙후민족의 경제 상태를 비약시키지 않을 수 없으므로 농본지대를 농공지대화, 혹은 공농지대화의 중대한 과입이 생긴 것이라 한다. 전 연방 내에서 러시아공화국 같은 선진민족으로도 자기만 경공업에까지 손을 대어 인민의 일반 소비면을 윤택하게 해주지 못한 것은, 그래서 외부인들이, “소비에트 인민들의 생활이 무엇이 풍족하냐?”고 성급히 보아버릴 수도 있게 된 원인은, 실상은 16공화국이 다 잘살 수 있는 광범하고 평등한 공업기초에부터 전력을 집중해온 때문이었다. 그 결과 낙후된 민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라고 있었는가는, 키르키스스탄 공화국이 혁명 전에는 제유공장 1, 치즈공장 1, 제혁공장 2 모두 수공업적인 4개 공장이던 것이 1945년에는 대소 5천 공장이 생기었고, 그중 4백여 공장은 전 연방적으로 유력한 공장들이라 한다. 이 낙후된 농본지대였던 키르키스는 지금 국민경제의 70%가 공업생산에 의존되는 것이라 했고 이런 부력의 비약은 모든 문화의 조건을 또한 비약시켰을 것은 필연의 사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55~56

 

그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1930년대 공업화를 통해 이른바 중앙아시아에 있는 연방과 그 약소민족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했고, 자본주의가 하지 않는 사회적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다. 의료와 보건은 무상이었으며,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국가가 전액을 지원하는 무상교육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무상교육의 혜택은 소련에서 유학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이태준이 만났던 소련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천문학적인 학비를 유학생들뿐만 아니라 자국민에게 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또한 책에서 나온 소련은 원주민과 유색인종에게 인종차별을 마음껏 발산하던 제국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으며, 인종차별은 철폐되었고, 소련에 사는 소수민족의 권리가 증진되었으며 이들의 교육율도 매우 높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외면당하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진실이다. 쏘련기행에선 당시 미국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과 소련의 소수민족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얘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도 보았지만 25(인구)밖에 안 되는 도시에 전문대학이 아홉, 중학교가 60, 영화관과 극장이 열, 이런 고도의 문화시설은 그만한 경제력의 배경 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아르메니아의 단독실력으로는 이런 비약적 건설을 도저히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장이라고는 넷밖에 없던 키르키스스탄공화국이 공장 5천을 가진 것이나, 이것은 1940년에 미국 '트라이셀'이란 평론가가 지적한 것이지만, 1913년대에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소비에트의 타자키스탄공화국이 문맹비율이 동일했었는데, 17년 후 1930년에 이르러, 아메리칸 인디언은 문맹이 2%가 줄었고 소비에트의 타지크는 문맹이 60% 가 줄었다는 것이 우리는 어떤 감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출처 : 쏘련기행 p.114

 

19468월부터 10월까지 이태준을 포함한 방소문화사절단은 격리촌부터 시작하여, 이르쿠츠크, 치타, 모스크바, 아르메니아공화국, 그루지야공화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와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돌아보고 왔다. 2달 동안의 여행과정에서 이들이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비록 전후재건 중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민의 당연한 권리가 적어도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인정되고, 인식되는 국가였다. 무엇보다 히틀러 침략으로 인한 상상을 초월하는 타격을 입고도 전후재건에 나서는 소련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에게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으며, 그런 감동적인 감정들이 책에 묻어나 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9년 이태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 문화 활동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됐는데, 그가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불과 3년전 하고도 매우 달랐으며, 더 많은 방면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 방문하던 1946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물자가 풍족하지 않아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1949년 시점에는 소비재 부분도 많이 성장하여 배급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국영상점들이 늘었으며, 소련 자체생산 기술로 조립된 자동차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태준은 이런사실들을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3가지 내용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호텔 건너편에는 큰 식료품점이 있어 마주 건너다 보였다. 김 서린 진열창에 포장 화려한 식료품들은 온실 속의 화초 같았고 자정 가까울 때까지 문이 열려 있는데 자동차를 세우고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우선 나의 시야는 호텔 주변에 국한된 것이나 왕래하는 시민들의 의복이나 신발이 3년 전에 볼 때와는 월등히 우수해졌고 식료품 상점 앞에서도 배급을 타러 줄지어선 광경은 다시 볼 수 없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출처: 쏘련기행 p.201

 

이튿날 우리는 모스크바의 중요한 거리들을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았다. 네거리를 만날 때마다 앞을 가로 건너는 자동차의 떼로 한참씩 기다리게 되는데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차는 어쩌다 한대씩 볼 수 있는 정도다. 물론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 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즐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13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혈색이 좋고 명랑한 기분드로 일하였다. 그전 일제 때 조선서 전매국에 다니는 여공이라면 으레 담뱃독에 찌들은 것 처럼 얼굴빛 누르고 한참 학교 다닐 소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 담배공장에는 그런 과로와 빈혈의 여공들은 볼 수 없었다. 모두 흰 작업복들을 입고 먼지 없는 작업장에서 유쾌히들 일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착취되는 노동이 아니라 자기들의 공장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위햐 하는 노동이며 더욱 세계 전체를 착취 없는 사회로 개조하는 위업에 선두에 나선 쏘련 노동자다운 긍지들로 차 있었다. 2천 명 노동자중에 약 2백 명우 벌써(1110) 연간 계획량의 200프로를 초과완수하고 있었다. 노동임금은 최하 견습공이 5백 루블부터요 숙련공은 2천 루블까지 있었다. 모스크바서 승용차 한 대에 7천 루블이라 하니 숙련공의 석달 반 월급이면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공장 안에는 식당이 있는데 빵고기우유맥주사이다케이크 등이 실비로 제공되고 있었고 식당은 김 서리는 접시들과 함께 따스하고 정갈하였다. 공장 곁에 있는 노동자 주택을 가보았는데 군데군데 자동 엘리베이터가 있고 부엌 식당 침실 목욕간 등과 스팀 전열 가스 수도의 완비와 가구들의 호화로움은 물질생활의 높은 수준을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라디오, 손풍금, 바이올린 등 악기들과 책상 위에는 문학 서적이 많을 것을 보아 이 공장 노동자들의 문화 정도의 높음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노동자의 집에는 사진기도 걸리었고 오토바이와 사냥총도 있었다.

 

이런 공동주택을 이웃하여 탁아소와 아동공원이 있었다. 탁아소는 조선에도 많이 있거니와 아동공원이란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학교에 들기 전 어린이들이 오는 유치원 셈이다. 여기는 아이들 놀기 좋고 자연과 친할 정원이 있고 집안에는 노래하는 방, 유희하는 방, 낮잠 자는 방, 밤에 자는 방, 식당 등이 있다. 아이들은 오면 똑같은 옷으로 갈아 입었고 집에서 다니는 아이와 여기서 자며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출처: 쏘련기행 p.244~245

 

많은 사람들이 소련하면 오로지 군사력만 투자한 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문학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을 읽어보면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풍요롭진 않더라도 미국보다 민중의 권리와 복지를 훨씬 더 많이 책임지고 있었으며, 전쟁의 폐허속에서도 그러한 가치들을 지키고 실천했다. 즉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당시 경쟁자였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보다 인종차별, 교육, 의료, 주거면에서 훨씬 더 진보적이고 인민들에게 많은 부분을 챙겼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외면하는 소련의 진실이며, 소련의 어떤 사회였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명확한 팩트다. 그런 점에서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소련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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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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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러시아 혁명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17년 인류최초의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1789년 자유, 평등, 우애라는 가치아래 전개되었던 프랑스 혁명이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만큼 그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소위 민주주의라는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혁명과 쿠바 혁명, 베트남 혁명 그리고 그 외의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각종 민족해방투쟁들은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영향아래 일어난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러시아 혁명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혁명가 레닌이 식민지 민중에게 주장했던 가치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탄생시킨 계기였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떠나서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지도하게 된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가 단행했던 공업화와 대숙청까지를 혁명의 일환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서방학계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러시아 혁명을 연결해서 보려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서구에서 독자적인 좌파조직을 만들어 좌파운동을 해왔던 토니 클리프류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레닌의 사후를 끝으로 스탈린 집권 시기를 아예 반혁명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서방 학계에서는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1990년대 수정주의 학파들이 많은 연구 성과물을 냈다. 개방된 소련의 문서를 통해서 서방세계에 과장되서 알려진 대숙청(The Great Purges)이 매우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사실을 밝혀낸 아치 게티(Arch Getty)가 바로 그러했다. 아치 게티 외에도 소련 역사를 수정주의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쉴라 피츠패트릭(Sheila Fitzpatrick)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냈고, 그가 쓴 개설서 러시아 혁명 1917~1938(The Russian Revolution)’은 러시아 2월 혁명부터 1936~1938년에 일어난 스탈린의 대숙청까지를 수정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책이다. 그가 쓴 러시아 혁명사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

 

2. 근대 러시아의 상황과 러시아 혁명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분명했다. 대다수 민중의 삶이 매우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강대국인 동시에 매우 낙후된 나라였다. 러시아의 낙후성은 1931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했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연설중 발췌한 일부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투르크의 베이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스웨덴의 봉건 통치자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 귀족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모든 패배가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인구 대다수가 농민을 차지하던 러시아가 산업혁명의 바람을 맞은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도시 노동자 계급의 탄생도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서구 열강에 비해 매우 늦었다. 대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19세기 러시아 또한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전제정 또한 유지됐으며 황실과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는 말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던 1905년 아시아의 신흥강국 일본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본 러시아에선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이 혁명은 차르와 그 지지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1905년 혁명 이후 차르 또한 일정부분 굴복했는데, 전국적으로 선출된 의회 두마를 설립함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비밀경찰의 활동으로 탄압당하기 일쑤였다. 1905년 혁명은 차르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과 일정부분 두마 허용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또 다른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며 혁명을 막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됐다. 1914년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8월 유럽에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프랑스·영국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현대화된 전쟁에서 싸우게 됐다. 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동반한 무기의 현대화는 구식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제국군의 극심한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독일군은 제국의 서부 영토를 깊숙이 뚫고 들어왔고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은 총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함과 그 과정에서 라스푸틴과 황후의 추문 및 부정부패는 민중을 분노하게 했고, 2월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했다.

 

민중이 혁명을 했던 이유에는 경제적 궁핍함과 차르 정권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전쟁에서 빠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19176월에서 7월 초에 케렌스키가 감행한 러시아의 갈리시아 공세는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혁명가 레닌이 그해 4월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하여 크세신스카야 저택으로 가서 4월 테제를 주장하고 선언한다. 볼셰비키 레닌이 주장한 4월 테제의 핵심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였고, 또 다른 구호 , 토지, 평화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책에선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새 혁명 지도부하에서 활력을 되찾아야만 부르주아지에게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권력을 이양하는 핵심 기관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제시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는 사실상 계급 전쟁을 요구하는 구호였다. 레닌이 4월에 제시한 다른 구호인 , 토지, 평화에 담긴 혁명적 함의도 비슷했다. 레닌의 용법에서 평화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철수가 자본의 전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토지는 지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 스스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토지를 장악하는 형식과 매우 가까웠다. 한 비판자가 혁명적 민주주의 도중에 내전의 깃발을 꽂는다고 레닌을 비난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104

 

19177월 갈리시아 공세가 처참한 패배로 끝난 후 페트로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7월 봉기다. 최대 50만 명에 이르렀던 군중은 크론슈타트 수병·병사·페트로그라드 공장의 노동자 조직으로 구성됐고,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깃발을 들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7월 봉기 이후 임시정부는 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핀란드로 도피했다. 다음해 8월에는 전제주의자 코르닐로프가 반혁명적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고, 이후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 동료들은 10월 혁명을 주도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제헌의회 선거에 도전하여 25%의 득표를 얻었지만 40%를 얻은 사회혁명당쪽에 선거에서의 패배를 맛보았다. 물론 볼셰비키는 선거에서 완벽히 이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퇴하지 않았고, 통치의 위임이라는 면에서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집단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볼셰비키는 의회를 해산하게 된다. 분명한건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노동자계급의 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사실이었다.

 

3. 적백내전과 신경제정책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실제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전쟁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독일과의 전쟁은 1918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빠져나왔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정권이 치러야 했던 전쟁처럼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게 바로 적백내전이다. 1918년에 시작된 적백내전은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졌고, 볼셰비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방해 그리고 차르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적백내전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는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19세기부터도 낙후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타격을 받았던 러시아의 경제는 내전을 통해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1921년엔 기근이 일어나 수백만이 아사했으며, 비슷한 시기 크론슈타트에선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적백내전을 통해 볼셰비키가 얻은 또 다른 결론이 있었다. 군의 현대화와 공업화 중심의 경제 발전 모델의 추진이었다. 또한 적백내전을 거치며 많은 이들이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27년 기준으로 볼셰비키 총 당원 중 33%1917~1920년에 가입한 반면, 1917년 이전에 가입한 당원은 1%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적백내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는 반증이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그리고 그 외의 당시 볼셰비키들이 지휘했던 붉은 군대는 내전을 통해 그 규모가 늘어났다. 내전 중에 5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가 한때라도 붉은 군대에 복무했다. 내전 기간에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처음으로 징집됐고 내전 기간 내내 이들은 전투부대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했으며, 내전이 끝날 무렵에 붉은 군대는 주로 농민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의 거대 기구가 됐다. 비록 1/10만이 전투부대였고(붉은 군대든 백군이든 전선에 배치된 부대가 10만 명을 초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머지는 보급, 수송, 행정 일을 맡았지만, 군대의 성장은 놀라운 성과였다.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는 기존의 전시 공산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신경제정책 이른바 네프(NEP)를 추진했다. 물론 네프라는 것은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네프는 후퇴였다. 네프를 통해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시 복귀했기 때문이다. 네프에서도 문제점이 없진 않았지만, 분명한건 1926년에서 1927년 당시에는 상당한 부분의 경제 회복을 거쳤다. 최소 1926년에서 1927년 기준으로 소련의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프가 진행되는 동안 볼셰비키의 지지층도 늘었다. 1927년에 이르면 공산당은 100만 명이 넘는 정규 당원과 후보 당원을 거느리게 되는데, 그중 39%는 현재 노동자였으며 56%는 당에 가입했을 때의 직업도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볼셰비키가 민중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4. 스탈린의 공업화와 대숙청

 

그러나 볼셰비키에게 있어 네프가 영구적인 대안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하나의 후퇴였을 뿐이다. 즉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였다고 볼 수 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포함한 볼셰비키들은 낙후된 러시아가 공업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만 공업화를 추구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당시의 공업화는 소련을 매우 낙후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볼셰비키들이 추구한 대안이었다. 책에 따르면 옛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유리 퍄타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개별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농업집단화를 극단적인 비율로 채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내전 수준의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물론 나는 우리가 내전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계급의 적과 무장 투쟁을 하며 일했던 시기에 우리가 지녔던 것과 똑같은 긴장을 지니고 일해야 한다. 사회주의 건설의 영웅다운 시기가 도래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47

 

1924년 레닌이 죽고 나서 볼셰비키는 스탈린과 트로츠키 그리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중심으로 권력투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즉 스탈린이 단행한 공업화는 볼셰비키들이 추구했던 1차적 과제를 수행함을 의미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기존에 실행하던 네프를 포기하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9년에 추진했다. 공업화와 농업집산화가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거기에 대한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929년 말에 이르면 당은 농업을 집단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해 12월에 스탈린이 선언했듯이, 쿨라크의 착취 경향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쿨라크는 계급으로서 박멸돼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저항 및 일탈로 1932년과 1933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북부 카프카스 그리고 볼가강 중류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300~400만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근은 엄청나게 혹독한 유산을 남겼고, 볼셰비키 또한 이들을 막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 기근 자체가 어느 한 집단이나 민족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겠다는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스탈린이 기근을 명령했다는 자료는 전혀 없다. 비록 공업화 과정에서 기근과 같은 혹독한 사태가 있었고, 공업화 자체도 여러 문제점들이 있긴 했자만 공업화의 성과물은 고무적인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성공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그것이 대다수 민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도시 노동자들(주로 모크스바,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의 대공장에서 모집된 그 유명한 이만오천인을 포함)이 콜호즈 조직자나 의장직을 맡기 위해 농촌에 긴급히 동원됐고, 1932년에 농가의 62%가 집단화됐으며, 그 수치는 1937년에 이르러 93%까지 상승했다. 집단화를 거치며 콜호즈 생산량에서 조달량은 곡물의 40%에 이르거나 예전에 농민들이 시장에 팔았던 비율의 두 배에서 세배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소련의 지도부는 공업화와 집단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자화자찬이 포함된 주장을 했다. 적 계급은 박멸됐고, 실업은 사라졌다. 초등교육은 보편적으로 의무가 됐고, 성인 문해율은 90%까지 올랐다고 주장했다. 15개년 계획 동안 도시는 맹렬하게 성장했다. 옛 산업 중심지는 광대하게 확장됐고, 조용하던 지방 도시에 거대한 공장이 출현했으며, 새로운 공업·광업 지대가 소련 전체에서 출몰했다. 대규모 금속 공장과 기계 제작 공장이 건설 중이거나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투르크시브 철도와 거대한 드니프로 수력발전 댐도 지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이른바 문화혁명을 추진했다. 물론 이 문화혁명은 1960년대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과는 비교적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대한 수의 노동자들이 산업 경영진으로 발탁됐고, 소비에트난 당의 관리가 되거나 중앙정부 및 노동조합 관료제에서 숙청당한 계급의 적자리에 임명됐으며, 1933년 말에 소련에서 지도 간부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류된 861,000명 중에서 1/6이 넘는 14만 명 이상이 5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15개년 계획 동안 사무직으로 옮겨간 총 노동자 수는 최소한 150만 명으로 변화가 있었다.

 

스탈린은 젊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를 상위 교육기관에 보내는 집중적인 운동도 개시했다. 이는 대학과 기술학교에서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으며, ‘부르주아교수들은 분개하게 했고, 15개년 계획이 지속되는 동안 사무직 종사자 가정 출신의 고등학교 졸업생은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됐다. 15개년 계획 동안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상위 교육기관에 진학했고,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알렉세이 코시긴과 같이 미래의 소련 지도부로 등극하게 되는 인물들이 바로 이 문화혁명의 수혜자였다. 즉 문화혁명은 교육혁명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화 혁명 기간 소련의 도시 인구는 1929년 초의 2,900만 명에서 1933년 초에는 거의 4,000만 명으로 4년 간 38%나 급상승했으며, 모스크바의 인구는 1926년 말 200만 명을 넘었는데 1933년 초에는 370만 명으로 뛰어 올랐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며 소련은 1936년 새 헌법을 만들어 내어 헌법상 동등한 권리를 1918년보다 일정부분 더 많이 부여했다. 이로써 모든 소련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자유를 보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자유란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적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던 1936년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분기인 세 번째 혁명을 진행하는 데, 그게 바로 대숙청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이 일방적인 무차별 학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테러와도 차이점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가 단행했던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처럼, 이는 왕년의 혁명 지도자들을 주로 겨냥한 국가 테러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로 본인 또한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라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탈린이 예조프를 희생시켰다고 하지만, 그가 숙청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꼈다든지 스스로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든지 아니면 예조프를 단지 마키아벨리식 신중함 때문에 없애버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대숙청의 또다른 사실은 1980년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드러났다. 바로 일각에서 알려진 숙청의 희생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지만, 그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의 책을 인용하자면 실제 대숙청과 굴라그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고위직에 있던 공산주의자만 숙청에 희생된 것은 아니다. 인텔리겐치아(부르주아인텔리겐치아와 1920년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 특히 문화혁명 활동가 모두)도 크게 당했다. 모든 러시아의 혁명적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였고, 1937년처럼 명확하게 용의자를 명시하지 않았을 때조차 유력한 용의자였던 계급의 적출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공식 살생부에 이름을 한 번이라도 올린 사람은 결국 희생자가 됐다. 해외에 친척이 있거나 외국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 특히 위험했다. 스탈린은 상습범, 말 도둑, 종교적 분파주의자를 포함한 수만 명의 쿨라크 출신과 범죄자를 체포해서 총살하거나 굴라그로 배내라는 특별 비밀 지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현재 굴라그에 수감 중인 상습범 1만 명도 총살당했다. 서양 학자들은 소련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후 그동안 어림짐작해온 대숙청의 전체 규모를 확인하게 됐다. NKVD 문서보관소에 따르면 굴라그 교정노동수용소의 수감사 수는 19371180만 명에서 193911일에는 130만 명으로, 2년간 50만명이나 증가했다. 굴라그 죄수의 40%반혁명범죄로 기소됐고, 22%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분자로 분류됐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대숙청 희생자가 감옥에서 처형되어 굴라그까지 가지도 않았다. NKVD1937~1938년에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이 68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했다.”

 

출처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95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숙청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서방에서 주장했던 수치는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면서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대숙청도 프랑스 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혁명인 대숙청을 1938년에 마무리 했고, 이로써 저자 쉴라 피츠패트릭이 주장한 러시아 혁명의 마지막 단계는 마무리 됐다.

 

5. 무엇이 서방의 다른 책들과 다른가?(장점과 한계)

 

서방의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 혁명은 기존에 나온 러시아 혁명 자료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여 러시아 혁명을 해석한 책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38년 종결된 대숙청의 연결점을 여러 자료들을 통해 접근하여, 대숙청 또한 러시아 혁명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저자의 주장은 나름 신선했다. 한국 사람들이 스탈린의 대숙청을 접근하년 방식은 1차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대숙청이 일어난 시대사적 맥락이나 환경 그리고 배경을 판단하기 보단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의 강화라는 맥락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단행한 대숙청을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로만 해석하는 것은 비단 극우파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내 시중에 많이 출판된 토니 클리프류의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좌파들의 서적들 또한, 이런 기본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련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나 일부 출판되어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이런 토니클리프류 좌파들 또한 미국 주류학계의 핵심 주장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인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서방의 학자이기에, 레닌이나 스탈린에 대해 강력한 권위주의 혹은 공산당 사람으로만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료 독재라는 점으로 해석한 다는 점에서 필자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리고 소련 자체가 국제 혁명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나, 코민테른이 입장이 기존 러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에도 분명히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진일보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서방의 전체주의론적 접근을 일정부분 거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숙청의 과장된 기존의 반공 학설을 따르지 않았고, 그것을 혁명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쉴라 피츠패트릭의 진일보한 견해를 높게 평가해주고 싶다.

 

당연히 필자가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스탈린의 공업화와 문화혁명 그리고 대숙청 파트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1794년 테르미도르 이전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맥락과 동일선상에서 본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을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와 같은 맥락에서 보는건 필자의 견해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그리고 문화혁명 관련한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자료는 소련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데 책을 번역한 역자가 밝혔듯이,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혁명에 관한 내용은 쉴라 피츠패트릭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6. 결론

 

필자가 읽은 이 책은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다. 호주인 역사학자가 쓴 러시아 혁명 개설서다. 비록 서방의 학자가 쓴 책이라는 일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진일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다. 저자가 말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붙이자면 당시 볼셰비키가 추구했듯이, 공업화는 1차적으로 완수해야할 과제였다. 위에서 스탈린의 연설문을 인용했듯이, 1931년 스탈린은 10년 안에 그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전쟁의 위협은 그만큼 공업화의 필요성을 증명해 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극동의 소련 안보를 위협했고,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거리낌 없이 발산했다. 스탈린의 연설은 예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불과 2년 뒤인 19416월 히틀러의 군대는 소련을 침공했다. 이것은 스탈린의 예언적인 연설이 있은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생각해봤을 때, 공업화를 통한 군사력 증강과 군대개편 밑 현대화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조치였던 것이다.

 

레닌 사후 소련에 등장한 스탈린 체제는 전쟁의 위협이라는 맥락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또한 1918년에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의 경험은 전시의 위협과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과 경제적 타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했다. 거기다 러시아는 그런 경제적 타격을 받고, 공업화라는 달성해야만할 과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쥐고 있던 부담과 그 어려움은 상당했다. 저자 또한 스탈린이 러시아를 그 후진성에서 끌어낸다는 목표가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웠는지를 책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련사를 볼 때,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책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몇몇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관점들이 있었고,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라는 부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일보한 성과물이다. 서방학계의 수정주의 학파가 어떤 성과를 학술적으로 만들어 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시대사적 내지는 환경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혁명이 어떻게 해서 러시아 혁명이 일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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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20-09-25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두 권을 비교해보면 흥미롭겠어요

제1권력 2 - 자본, 그들은 어떻게 혁명을 삼켜버렸는가 | 제1권력 2
히로세 다카시 (지은이),김소연 (옮긴이)프로메테우스 2011-11-04
원제 : ロマノフ家の黃金 ― ロシア大財閥の復活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861797
 

소련은 어떻게 악마가 되었나
[인문견문록] 마리오 소사의 <진실이 밝혀지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책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을 읽고 지금은 없어진 ‘소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구마 에이지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수용소에서 가게 된다. 책은 그의 수용소 시절과 전후 일본에 관한 내용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본군에 비친 소련군의 ‘자유스러움‘이었다. 오구마 겐지는 서슴없이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라고 기억한다. 그의 말이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력집단인 군대의 폭력 수준은 한 사회에서 용인되는 폭력의 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추정치가 된다. 소련군은 포로가 보기에도 매우 자유스럽고 평등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정작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일본군 포로 내부에서 작업량, 식량 배분 등도 지위에 따라 차별받았다. 소련 군인끼리의 평등함을 동경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민주운동을 진행했다. 일본군 내부에서의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조직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이들의 운동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으로 무려 2700만 명의 희생을 치른 직후였다. 이 전쟁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이토록 열악한 시기의 소련에서 게다가 가장 폭력에 친숙한 군대라는 조직이 민주적이고 평등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개인의 성격은 사회의 성격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조직은 사회의 축소판이고 개인은 조직에서 사회화된다. 필자가 알고 있던 소련은 스탈린주의에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지옥이었다. 오구마 겐지가 경험한 소련은 달랐다. 궁금했다. 그래서 마리오 소사(Mario Sousa)의 <진실이 밝혀지다>(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노사과연 펴냄)를 펼쳤다.

저자 마리오 소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포르투갈에서 1949년에 태어난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반식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포르투갈 정부는 독립전쟁 진압을 위해 대규모 징집을 시작한다. 식민주의를 반대하던 마리오 소사는 탈영한 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한다. 스웨덴에서는 버스 노동자로 일하며 급진적 정치운동에 참여해왔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다 보면 꼭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말고 대안은 뭔데? 소련 망한 것 봤잖아.˝ 소련은 보수적인 사람에게도 진보적인 사람에게도 지옥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우리가 아는 스탈린주의 지옥은 실제 소련이 아니라 CIA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버스 노동자(정확하게는 ‘정치 활동가‘)의 말이라 무시할까봐 말해두자면, 소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은 소사 말고도 뉴욕주립대 역사학 교수이자 <배반당한 사회주의(socialism betrayed)>의 저자 로저 키란(Roser Keeran), 몽클레어주립대 교수이자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의 저자 그로버 퍼(Grover Furr) 등이 있다. 이들의 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쏘련(책에서 고유명사는 원음에 가까운 발음으로 사용된다. 필자 주)의 노동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살인과 의문의 죽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못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수백만의 반대파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략) 그렇지만 대체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숫자들의 출처는 누구일까?˝ 우리들은 소련에서 수백만, 수천만이 살해된 것을 당연한 사실이라고 알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이런 이야기들이 특정한 세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반박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사가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소련이 악마화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했다. 나치는 정권을 잡은 뒤 의회 화재 사건을 조작해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의 48%를 확보한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진보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독일은 또한 재무장에 돌입한다. 이때 독일 지도부는 대(大) 독일(greater Germany) 국민생활권이라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현재의 독일보다 훨씬 큰 독일을 건설하려는 욕심이었다. 대독일의 핵심 지역의 하나가 우크라이나였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통합해 독일의 곡물 기지로 변모시킬 야심에 들떠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34년 선전장관 괴벨스는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 선전을 시작했다. 별다른 증거도 없었기에 성과도 미미했다. 그들은 이내 외부에서 도움을 구했다. 외부 그것도 최강국 미국에서 협조자를 찾게 된다.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황색저널리즘을 마케팅전략으로 이용해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등을 소유하게 된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허스트가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는 미국에서만 4000만 명에 달했다. 미국 성인의 3분의 1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1934년 극렬한 보수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독일로 가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독일로부터 받은 뉴스기사는 소련에서의 대량학살, 살육 등으로 채워진 기사들 일색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괴담이 우크라이나 괴담이었다. 1935년 2월 18일 <시카고 아메리칸(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로 소련에서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허스트는 독일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자신의 언론 제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뜨린다.

마리오 소사가 말하는 기근의 진실은 무엇인가? 나치와 허스트의 언론은 볼셰비키의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소사는 사실상 계급투쟁이었다고 전한다. 1929년 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부를 독점하고 인구의 10%에 불과했던 농촌의 부농 쿨라크와의 마찰을 촉발했다.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을 빈농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내기 전에도 기근은 주기적으로 왔었다. 소사의 설명이다. ˝직간접적으로 1억 2000만 명의 농민들이 연관된 이 거대한 계급투쟁은 농업생산 불안정을 야기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식량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의 면역체계는 유약해졌고 전염병과 유행병에 걸려 죽을 확률도 높아졌다.˝ 빈농들을 구제하기 위해 농업집단화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마찰도 있었고 기근도 있었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스페인독감으로 죽어간 유럽인만 2000만 명에 이른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기까지 전염병 앞에서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련은 지속적으로 서구의 심리전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사와 그로버 퍼는 볼셰비키가 그런 희생을 의도적으로 전개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마오쩌둥의 정책 때문에 30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는 선동이 언론지상에 오르내린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는 약 1억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다. 아무도 인도인 희생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도 자본주의에는 희생자가 사라지고 중국 사회주의에만 희생자로 넘친다. 허스트 계열의 언론은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아사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이었다고 지속적으로 선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의 약발이 압도적이진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한 신화를 다시 퍼뜨린 것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였다. 소련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던 레이건 시기 콘퀘스트는 <서글픈 추수(Harvest of Sorrow)>라는 이름의 책을 펴낸다. 콘퀘스트는 어떤 사람이었나? 영국 정론지 <가디언(The Guardian)>이 폭로한 그는 영국 정보국의 정보조작부서인 IRD(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의 전 기관원이었다. 이 부서의 임무는 진보진영과 관련한 조작된 흑색선전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부서는 1977년 극우파와의 협력이 문제돼 해체될 때까지 수많은 언론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정보를 전달했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은 1942년 유대인학살에 앞장섰던 우크라이나 극우 전쟁범죄자들이었다.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미국 정보부와 협력했던 언론인, 학자들 덕분에 이런 프로파간다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꾸 접하다 보면 사실로 착각하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드디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庫)를 개방했다. 소련을 비난해왔던 사람들은 비밀문서고가 열릴 날만을 기다렸다.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문서고가 개방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서구의 선전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젬스꼬프(Zemskov)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진행한 연구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9000쪽에 달하는 그의 연구보고서가 1990년 나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반(反)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개,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다.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 정치범의 수는 콘퀘스트의 주장과 달리 45만 400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37~1939년 사이에 죽은 인원도 300만 명이 아니라 16만명이었다.

아마 여기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래요. 정보 조작한 사람들이 엄청 과장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45만 명의 정치범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잖아요?˝ 우리는 이 숫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의 판단은 덧붙이지 않고, 일단 마리오 소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우리는 쏘련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 쏘련의 인구는 거의 1억6000만~1억7000만 명이었다. 30년대는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힘겨운 시기였다. 독일의 나찌즘,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자본주의국가. 필자 주)들은 쏘련에게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힘겨운 시기 동안, 쏘련에서 형벌체계 하에 있었던 사람은 최고 250만 명이었다. 이는 대략 성인 인구의 2.4%였다.˝ 감이 안 잡힐 수 있기에 한국의 예를 들자면 교정시설 수용인원 총수는 2017년 현재 5만 7000명, 보호관찰 대상자 수는 2017년 현재 10만 5000명이다. 인구 대비 대략 0.3%가 된다.

소사의 글에는 당시 소련 인민들이 가졌을 긴장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좌파 이론가인 채만수의 논문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노동사회과학> 제7호, 2014)의 일부 글을 인용해본다. ˝당시 나찌 독일의 대대적인 전쟁 도발, 따라서 쏘련 침략은 누가 보기에도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독일과 쏘련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전쟁, 즉 피차가 모두 그 흥망 자체를 걸어야하는 전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면서도 그 전쟁을 늦추며 시간을 벌기 위해서 1938년 9월 뮌헨협정을 통해서 체코를 진상하면서까지 쏘련을 침략하라고 히틀러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독점자본들 역시 사회주의 쏘련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궤멸시키도록 히틀러를 부추기며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 된 당시의 정세였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 교정시설 내부의 인권은 어떨까? 2005년 8월 19일 자 <시사저널>에 실린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교도소 수형자의 인권을 개선시키자는 여론은 미국에서 거의 없다. 오히려 이런 열악한 인권을 소재로 삼아서 <프리즌 브레이크>(2005년 8월~2017 5월까지 FOX에서 방영)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2017년 3월 시작해 현재 시즌 6 방영 중. 넷플릭스 제작)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미국 교도소의 수형자는 범죄자이지만 소련의 노동수용소인 굴라그(Gulag)에 있던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니지 않은가? 일단 공개된 문서고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 범죄를 저지른 죄수다. 게다가 당시 소련 인민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러시아 연구자인 서울 과학기술대 김남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의 논문 ‘굴라그 귀환자들과 흐루쇼프 하의 소련 사회‘(<러시아연구> 25권 1호, 2015)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흐루시초프의 소련은 스탈린이 사망한 3주 후 굴라그 죄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한다. 그 수는 무려 120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하면 방면된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넘칠 것 같았지만, 넘쳤던 것은 인민들로부터의 냉대였다. 당시 소련 인민들은 귀환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편지를 소련당국에 보내었다.

노동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수적 변화도 극적이다. 1934년 5.2%에서 1953년 0.3%로 크게 낮아졌다.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은 항상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사실과 사회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사망률이 매우 낮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량의 경우는 어떨까? 1939년을 보면 5년 미만의 형 95.9%, 5~10년의 형 4%, 10년 이상의 형이 1%로 나타난다. 무한정 긴 징역형이라는 괴담은 소련에 대한 심리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에는 이것 말고도 우리가 막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조작된 정보였음을 말해준다.

고전에 대한 서평을 주로 올리다가 뜬금없이 소련을 둘러싼 프로파간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이유는 필자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다. 필자의 목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급진 사상을 지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된 신념체계, 허구적 사실에 기초한 문화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사실이 아닌 믿음의 덩어리다. 마르크스, 알튀세 이래 이데올로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상가는 지젝이다.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논문 ‘지젝의 사회정의론에서 바라본 바울 이해‘(<신약논단> 제2권 제2호, 2017)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환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산물, 곧 언어를 통해 매개된 하나의 상징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마치 그것이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지젝은 이런 환상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환상 가로지르기라 부른다. 자본주의와 같이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체계로부터의 동력차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련을 악마로 만들면 사회 개혁세력을 악마의 동조자로 몰아갈 수가 있다.

격심한 빈부격차를 반복하던 북·서유럽은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미국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언어로 구축되는 질서인 담론과 상징계에서 사회주의를 지워버렸다.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수단이 정보기관을 통한 소련에 대한 프로파간다였다. 부족한 사회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개혁을 회피한다. 사회주의 소련과 바로 인접했기에 악마화(demonization)가 잘 먹히지 않았던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온건한 복지국가로 나아갔다. 대신 미국은 극단적 불평등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기득권은 외부의 적을 설정한다. 외부의 악마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사고 회로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사회개혁 세력은 늘 외부의 악마와 비교당해야 한다. 외부의 악마를 설정하면 정작 피해를 보는 것은 개혁이 힘들어지는 우리 사회다. 미국 사회의 거대한 불평등이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바로 이것이다.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출처: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45981?no=245981&fbclid=IwAR08N-7VgxFDgK5kbVDjnlzt6cKBCXd1qz1TgYk0d-vEDu7h30mfP8XbIZY#08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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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지도)

 

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시작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주사변중일전쟁스페인 내전 등이 시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이지만종결은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Atomic Bomb)은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었고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결국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그러나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진격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고, <폭격의 역사>를 쓴 아라이 신이치나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등과 같은 인물들도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 공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그러나 미국은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렀고치열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겨우 함락시켰다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면 대략 100만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실제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군사작전을 계획했었으며그렇게 될 경우 태평양 전쟁을 1,2년 더 진행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반소련감정을 내려놓고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심지어 반공주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고 독일에 맞선 소련의 공로를 매우 높게 인정했을 정도며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들어진 동영상도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하지만 이런 미국의 입장은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쯤 되어 핵폭탄 실험이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외곽 사막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핵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지했었지만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그가 생각하기에 핵 보유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미국이 원하는 조건대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길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루스벨트가 급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매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트루먼은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더 이상 소련의 참전을 환영하지 않게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슬며시 다가가 지나가는 말투로 미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물론 소련은 이미 정보부를 통해 맨해튼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따라서 스탈린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소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결국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Little Boy)를 탑재한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 섬 기지를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고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원폭투하 이후 미국의 트루먼은 환호했다당시 원폭투하의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소련은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는데 원자폭탄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사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경우 주저 없이 소련에도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신호로 생각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일본 외무성 최고위급 관리 4명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나쁜 소식을 알렸다스즈키의 반응은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였다일본이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소련군의 공세가 있자 비상 내각회의를 소집한 일본 관리들은 회의도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실을 알게 됐다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깃발을 세우는 소련군)

 

무엇보다 소련의 만주 공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당시 소련군은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고이들은 만주와 몽골중국한반도 이북 그리고 그 외의 쿠릴열도와 사할린 이남을 통틀어 공격을 개시했다당시 일본이 소련군의 만주진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것은 이러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방정책으로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했고미군과의 전투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비록 보급이 안되긴 했어도 일본군은 주로 만주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보급물자와 지원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즉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만주와 중국 한반도를 포함한 지역에서 지원을 받음으로써 미국에게 격렬히 저항할 생각이었다그러기 위해선 소련과 접촉하여 외교적인 해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런 계획은 무산되었다또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동부전선에서의 4년간의 경험은 소련군을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기술을 발전시켜 놓았고만주에서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만주전선을 붕괴시켜버렸다비단 만주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중국 일부와 쿠릴열도사할린 이남그리고 한반도 이북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있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소련의 참전을 통해 알게 됐다스즈키 총리의 경우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의 길을 선택했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추축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기사)

 

종전 후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의 이유를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만주 진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일본의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 역시 원자폭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본다라고 말했으며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장도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따라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진짜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기 보단 소련의 만주 진격 작전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 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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