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요약한 글입니다.)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서방 사회에서 가장 많은 비판 내지는 비난을 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서방의 주류학계를 포함하여 스탈린에 대한 대부분의 시각은 잔혹한 독재자 혹은 학살자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장 유튜브에 가서 스탈린만 검색하더라도 숙청’, ‘학살과 같은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스탈린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한 것이라기보다는 서방의 전통주의적인 시각이 투영된 느낌이 강하다. 스탈린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그런 것으로만은 해석하기에는 복잡한 인물이며, 단순히 악인으로만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방이나 국내에서 내리는 평가와는 달리, 스탈린이 통치했던 러시아나 과거 구소련 연방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것 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제법 적지 않다. 물론 1932년에서 1933년에 대기근을 겪었던 우크라이나나 1940년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던 발트3국의 경우는 다르지만, 대체로 그가 부정할 수 없는 공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은 무엇일까? 나는 스탈린의 업적으로 크게 3가지를 보고 있다.

 

1. 공업화의 성공

 

러시아 현대사를 보면, 러시아는 19세기부터 산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구 유럽국가들에 비해 많이 낙후된 국가였다. 1905년 러일전쟁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흔들렸는데, 이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열악했던 레닌의 혁명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았고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혁명 러시아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을 탄생시켰지만, 경제적으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이에 따라 1921년부터는 네프(NEP)라 하는 신경제정책을 실행하여 경제상황을 일정부분 회복했으나.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볼셰비키에게는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았고 이 과제를 실행한 사람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9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빠른 속도로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무상의료와 무상복지와 같은 노동자 위주의 정책도 실행되었으며, 이는 서구 사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 속에서도 생산력이 상승하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일부 미국인들이 소련에 와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업화 시기 소련의 경제지표는 자신들 기준으로 연 20%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서방의 통계로도 연 14~15%의 성장률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일부지역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사실 이것은 의도적인 학살이 아닌 자연재해에 가까운 참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업화 도중에 단행된 집산화는 이후 소련 경제의 높은 식량생산률과 농업생산률의 근간이 됐다. 확실한 건, 이 공업화를 통해 소련은 1930년대 당시 경제 규모로만 세계 2위였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무상의료 무상복지, 사적소유 철폐와 같은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2.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공업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스탈린은 군의 현대화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탱크와 장갑차 중심의 기계화된 대규모 병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던 토대가 되었다. 물론 1936년 스페인 내전이나 1938년 노몬한 전투에서는 큰 효력을 못 보았고, 1939년 이른바 겨울전쟁에서도 붉은 군대는 열악한 측면이 있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에도 소련군은 초기에 후퇴를 거듭했고, 수십만의 병사가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이기도 했다.

 

초기 전화에서 소련군이 밀렸지만, 스탈린은 1941년 모스크바 전투와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무엇보다 그의 연설과 노력을 통해 수많은 소련민중이 조국을 방위하겠다는 일념으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그는 주코프나 바실렙스키 등과 같은 인물들과 잘 타협하여 이들이 군사적 지휘를 잘 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보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은 2,700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내고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도자는 바로 스탈린이었다. 물론 수많은 인민의 희생이 있었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 교수의 주장처럼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유능했던 전시 지도자였다. 스탈린의 군대는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바그라티온 작전과 동유럽 해방 그리고 베를린 전투까지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고, 이것은 19458월 만주진격 작전에서 불과 1주일 만에 만주와 중국 일부, 사할린, 한반도 북부를 해방시키는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3. 냉전시기 국제적인 사회주의 세력의 상징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은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사회주의권에서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소련이 당시 혁명을 지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지원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만 하더라도 지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소련은 불가리아 국경을 통해서 물자를 지원했고,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마오쩌둥의 홍군에게 지원했다.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적잖은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았다.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의 경우 크게 지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1950년에 들어서 소련으로부터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았고, 그 시점부터 중국을 통해서 소련의 물자지원도 크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었다. 당시 적잖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소련에서 혁명과 공업화가 성공한 것을 보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세력들이 그러했다. 1970년 국민투표로 정권을 잡은 칠레의 아옌데만 하더라도, 1953년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 “스탈린은 인류의 진보와 휴머니즘을 위해 투쟁한 상징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냉전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위성국화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동유럽 국가의 사회주의 체제 건설은 단순히 소련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소련이 그 국가들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이라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동유럽에 있던 좌파세력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체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고, 이들이 행동한 이유에는 스탈린이 건설한 소련 사회의 진보적 가치의 영향력도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소련은 빠르게 전후재건에 나서서 1947년에는 배급제를 영국보다 7년이나 앞서서 폐지했고,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지금까지 스탈린의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았다. 나는 이러한 점이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세 가지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스탈린이 분명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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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레닌(Lenin)과 볼셰비키(Bolshevik)는 이른바 10월 혁명(October Revolution)을 단행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과의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경제가 악화되던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니콜라이 황제를 타도하기 위해 시민들이 봉기한 2월 혁명이 발생했었다. 러시아 구력은 현재 우리가 쓰는 율리우스력이 아닌 그레고리력으로 13일이 느린데, 2월 혁명이 일어난 날이 바로 현재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2월 혁명으로 차르 정부가 타도되고,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이 들어섰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내각은 시작부터 위태로웠고, 민중들이 원했던 독일과의 전쟁 중단을 이루지 않았다. 오히려 19176월과 7월에는 갈리시아 공세를 감행했다가 2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은 중립국인 스위스에 있었는데,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 귀국하여 혁명을 주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레닌은 독일을 건너 러시아로 향했으며, 4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크세신스카야 저택으로 가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4월 테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All Power to the Soviet)!”

 

갈리시아 공세 이후 민중들은 이른바 7월 봉기를 일으켰고, 이 봉기는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으나, 진압됐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들은 다시 조직이 흩어졌고, 레닌 또한 잠시나마 핀란드로 망명했었다. 핀란드 망명 시기 그가 쓴 저서가 바로 그 유명한 <국가와 혁명(The States and Revolution)>이었다. 그로부터 1달 후에 백군에 충성했던 반동적인 장군인 코르닐로프가 이른바 반혁명을 주도했으나 진압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셰비키들은 다시 러시아에서 세력을 모아 혁명을 주도했으며, 그레고리력으로 10월에 오로라호의 함포 사격을 시작으로 10월 혁명을 게시했다. 10월 혁명은 성공적이었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왔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1024,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이후 레닌은 집권 초기에 혁명 정권을 위한 진보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나갔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이었으며, 전 세계의 위대한 모범이 됐다. 또한 레닌은 19183월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에서 발을 뺐다. 그러나 이는 제국주의 국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곧바로 적백내전으로 이어졌다.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수년간 제국주의의 침략과 구황제파들의 반동적 움직임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와 동시에 1919년 레닌은 또 다른 것을 실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3 인터내셔널(The Third International) 즉 코민테른(Comintern)의 창설이었다.

 

레닌이 코민테른을 창설한 이유는 분명했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도 혁명의 물결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주도한 독일 혁명이 있었고, 헝가리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으며, 수많은 유럽 국가들에서도 좌파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커짐에 따라 이른바 적색공포라는 반동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도했던 독일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헝가리에서의 사회주의 정부 수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동적인 세력에 의해 전복 당했다. 여기서 레닌이 파트너로써 주의깊게 생각했던 존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등의 식민지 민족들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공부해본 이라면 잘 알겠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미국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희망을 가지고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3.1운동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진압이 되면서, 결국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위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는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베트남의 호치민 또한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의 제3인터내셔널 창설은 수많은 식민지 지배 국가들에게 큰 희망과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으며, 당연하게도 수많은 식민지 국가의 젊은이들이 레닌에게 매료됐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당연하게도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레닌의 제3 인터내셔널은 중국의 마오쩌둥과 베트남의 호치민 그 외의 여러 식민지 민족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로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레닌의 코민테른 창설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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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시작됐다. 냉전은 미소양국의 군사적 대립과 갈등으로 표출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양국은 경쟁했다. 현재 한국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나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냉전의 구도를 마치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거의 없는 이야기일 뿐이며, 그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위선과 기만 속에서 만들어진 주장일 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역사적 팩트가 존재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과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의 협력이다.

(스테판 반데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현실은 나치에 협력하여 인종청소를 포함한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 대학살자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예전부터 반소감정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와 같은 극우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침략자 나치를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OUN의 지도자였던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는 나치와 협력하여 소름끼치는 대량 인종 학살들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으로 1941929일에서 30일에 수도 키예프(Kiev)외각에 있는 바비야르(Babi Yar)에서 33,721명의 유대인을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한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나치의 우크라이나 점령 기간동안 대략 15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는데, 스테판 반데라가 지휘하는 OUN 대원들은 나치의 천인공노할 정책에 적극 협력했으며, 1941년에만 최소 30만의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미콜라 레베드, 우크라이나 봉기군의 지휘자로 수만에서 수십만의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리고 러시아인 등을 인종청소하고 학살한 전쟁범죄자다. 그러나 미국 CIA는 그를 후원했으며, 그 덕분에 천수를 누리며 살다 1990년대에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조직으로는 우크라이나 봉기군(UPA, Ukrainian Insurgent Army)가 있었으며,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나 로만 슈케비치(Roman Shukhevych)와 같은 UPA 인사들은 볼리니야아 갈리치야 지역에서 반데라의 군대가 그랬듯이 소름끼치는 민간인 학살 및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1943년 볼리니아 지역에서는 최소 35,000명에서 7만 명 혹은 10만 명 이상의 폴란드 주민들이 이들에게 무차별 학살당했으며, 스테판 반데라 또한 이런 천인공노할 인종학살극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였다.

(CIA,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CIA는 소련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서유럽에서 파시스트들과 협력했다. )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이 점차 반격하기 시작하자, 나치와 소련군을 동시에 대항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런 게릴라전은 1945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이들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반파시즘 항전에 참가한 소련 인민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1944년부터 1945년 상반기 까지 91,615명의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군대가 소련군에게 사살됐고, 비슷한 비율의 숫자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스테판 반데라와 같은 몇몇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성향의 인물들은 연합국 점령지역으로 도망쳤고, 몇몇은 서유럽이나 미국 등에 정착했다.

(냉전 당시 OUN과 CIA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 올리버 스톤의 다큐인 우크라이나 불에 휩싸이다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1945년 당시 나치 전범들을 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있었는데, 반데라와 같은 우크라이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심판이나 처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냉전 초기 미국은 이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CIAOUNUPA 지도자들의 미국 이주를 후원했었으며, 이들을 소련 전복을 위한 전복부대나 첩보부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 전쟁범죄자들을 이용했다. 심지어 볼리니아와 동부 갈리시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1990년대까지 뉴욕시 퀸즈에 살았었다. 미국의 지원 아래 이런 전범들은 잘먹고 잘살았었다는 얘기다.

 

더욱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미콜라 레베드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로 탈출하여 연합국과 접촉했는데, 미 육군 방첩대는 그를 뮌헨으로 빼돌렸으며, 19496월에는 CIA의 협력하에 미국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법무부가 레베드를 미국서 추방하려고 했으나 후일 CIA 국장이 되는 앨런 덜레스(Allen Welsh Dulles)미콜라 레베드는 CIA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며, 핵심적인 반소작전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스테판 반데라 동상, 스테판 반데라의 동상은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때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는 서방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냉전 초기 소련 휘하의 우크라이나에 침투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있던 일부 잔존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1946년과 1947년에 여러 작전들을 게시했다. 벨라도나 작전(Operation Belladonna 1946), 스라소니 작전(Operation lynx, 1946) 그리고 삼지창 작전(Operation Trident, 1947)등이 있다. 실제로 미국 CIA는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인물과 협력하여 194995일 우크라이나인 스파이 선발대를 낙하산으로 소련에 침투시켰다. 그리고 이런 공작은 1954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소련은 이런 제국주의 무리들을 신속히 처리해버렸다.

 

이처럼 미국은 나치 협력자들을 통해 소련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공작을 했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냉전 당시 적국에 대한 값비싼 정보를 워싱턴에 제공한 대가로 CIA는 그 보답으로 민족주의자 퇴역군인들을 영향력 있고 권위 있는 지위에 두면서, 그들이 기존대학에서 준 학문적인 기관이나 학술적 지위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줬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며 이런 전쟁범죄자들과 파시스트들을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피시스트들은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진실은 서방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았다. 반공주의 교육과 제국주의 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보여주는 역사다.

 

미국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이유에는 동유럽에 대한 소련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런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이와같은 사실에서 미국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냉전 초기에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리 트루먼이 말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의 진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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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22-03-16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서 잘 보았습니다. 저도 서첩반 반걸랍/스테판 반데라를 박노자 교수 문서에서 확인한 바 있었는데 문서에서 더 확실하게 보았고요 나중에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틀류라에 대해서도 써 주세요... 관련 문서들의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필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튤류라는 영문자료 뿐이네요...

박노자 교수의 문서

http://www.redian.org/archive/71712

https://blog.naver.com/bec5483?Redirect=Log&logNo=221996757798

사첩반 반걸랍/스테판 반데라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5%8C%ED%8C%90_%EB%B0%98%EB%8D%B0%EB%9D%BC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틀류라

https://en.wikipedia.org/wiki/Symon_Petliura

NamGiKim 2022-03-16 19:47   좋아요 0 | URL
오마이 뉴스도 있습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810842
 

나는 평소에 책을 읽으면 서평을 쓰곤 한다그리고 그러한 서평들을 내가 자주 이용하는 알라딘 웹 사이트에 서평을 올리곤 한다물론 아주 가끔의 경우는 책을 안 읽고 서평을 쓰는 경우도 있다물론 책을 안읽고 리뷰를 쓰는 데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첫 번째는 지나치게 부당한 이유로 폄하당하는 경우이다즉 일부의 악플로 테러 행위로 인해 책이 지나치게 부당한 평가를 일반인들에게 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두 번째는 책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 되는 경우이다책 내용이 너무나 안 좋은데 많은 이들이 고평가 하니균형 있는 비판이 필요하다 느껴서이다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 책에 대해 단순히 욕을 하기 위한 경우이다물론 이런 경우 알라딘에서 100자 평을 이용하기도 하지만욕설이 들어갈 경우 제재를 받는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의 경우는 내가 알라딘에 올린 김일성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리뷰이다물론 나는 이 책을 중간중간 부분적으로만 접했지 완독하지 않았다그러나 책을 안읽었음에도 리뷰를 단 것은 이 책의 가치에 비해 너무 폄하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나는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알라딘에다 최고 점수인 별 5개와 더불어 장평의 리뷰를 달았다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의 경우는 최근 글항아리에서 출판한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Synder)의 저서 <피에 젖은 땅(Bloodland)>에 대한 리뷰에 해당한다.

 

최근 들어 스나이더의 책이 국내 네티즌들과 책 리뷰어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이 책의 내용은 부제목에서 밝히듯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을 다뤘고이 두 명의 독재자들로 인해 20세기 유럽사가 피로 물들었다는 것이 책의 저자 스나이더의 주장이다쉽게 말해 과거 냉전시기 팽배했던 히틀러 스탈린 전체주의론적인 접근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이 책이 국내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북한과 대립하며 반공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거기다 저자 스나이더가 다루는 동유럽 현대사는 필연적으로 반소주의적인 스텐스를 취하기 쉬운 소재다이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 사회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선상에서 접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저자 스나이더가 하는 주장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또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미국 몽클레어 주립대학교의 교수인 그로버 퍼(Grover Furr)는 2014년 당시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피에 젖은 땅에 대한 체계적인 반박서를 출간한 적이 있다. ‘Blood Lies’라는 제목을 가진 퍼 교수의 책은 스나이더가 책을 쓰며 이용한 1차 사료들을 하나하나 파헤치면서 반박했으며심지어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등 원어 사료까지 파헤쳐서 반박했다굳이 그로버 퍼 교수의 체계적인 반박서가 아니더라도스나이더의 관점은 소련사에 대한 수정주의 학파 측 관점으로 보아도 문제가 많은 책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나이더 책의 문제점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에 나는 지난 4월 말에 책에 대한 반박 리뷰를 쓴 것이다.

 

물론 알라딘에 글을 올린 뒤 많은 이들의 댓글이 달렸다그중에는 예전부터 내 블로그에 와서 뉴라이트적 시각으로 욕설과 비방만을 일삼던 이도 있었고알라딘 친구분들의 긴 댓글 및 질문도 있었다내가 글을 쓰면서 스탈린 2천만 학살을 언급하며 비판의 소리를 높인 건 사실이다그러나 그 2천 만 학살론을 스나이더가 한 것으로 내가 주장했다고 생각했던 분들도 있었다물론 자주 언급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라 생각한다내가 2천만 학살설을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한국사회에 잘못알려진 부분에 대한 지적이지 스나이더가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큰 틀에서 보자면 스나이더의 주장이 그러한 반공주의적 주장과 크게 맥락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얘기이긴 하지만어쨌든 스나이더가 스탈린 2천만명을 죽였다고 거짓말 친다.”라고 한 적은 없다그 외에도 다른 부분에 대한 주장 및 반박을 달면서 내가 책을 안 읽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책을 안 읽었다는 사실을 밝힌 게 출판사 측에서 태클을 거는 요인이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워낙 잘 팔리는 책이라 하지만출판사 측에서 내 리뷰가 판매에 문제가 될거라 판단하고선 알라딘 측에 요구하여 게시글을 강제 비공개 처리 해버렸다강제 비공개 처리가 된 것은 4월 30일 그것도 내가 가장 바빴던 날 그러니까 여러 집회 및 개인적 용무가 많았던 날에 일어났다출판사 측에서 책을 안 읽은 것을 문제 삼은거야 원론적인 차원에서는 맞는 얘기긴 하다하지만 내 리뷰가 책과 관련 없다는 공문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왜냐하면 내가 쓴 리뷰는 스나이더가 한 히틀러 스탈린 전체주의론에 대한 반박문이기 때문이다.

 

워낙 잘 팔리는 책이라 출판사 측에서 내 리뷰가 거슬렸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깊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짓거리는 출판사 측에서 상당히 강제적이고 비상식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심지어 이의를 제기하여 해결하려면 방통위에 분쟁조정을 신청하라는 알라딘 측의 메일이 왔는데상식적인 선에서 말이 안 되는 조치라 할 수 있다그 이유는 기존 홈페이지에 올라온 알라딘 리뷰 중에는 책을 안읽고 쓴 리뷰가 많기 때문이다즉 그러한 기준으로 보았을 때책을 안읽고 올린 다른 이들의 페이퍼나 리뷰 또한 제제를 당해야 하고 현재 <세기와 더불어>에 달린 악플들 또한 차단 되야 한다따라서 이러한 부분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출판사 측의 조치는 소위 스나이더가 침마르게 주장하는 진정한 전체주의론적 행동이다.

 

워낙 어이가 없어서 결국 출판사측에 전화를 했는데원칙적으로 출판사측에서 책을 안읽은 리뷰에 대해 그런 조치를 할 수 있다고 한다책을 읽고 쓰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조금 믿기지 않아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지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렇다고 한다따라서 책을 읽고 쓰면 이번에 차단된 내 리뷰를 올려도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내 리뷰에 대해 이러한 전체주의적 행위를 하며 보여준 조치에 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고 어이가 없었으며 화도 조금 났었다본인들 스스로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서적을 출판해놓고 일개의 블로그 리뷰어에게 전체주의적 행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상당히 실망한 나는 올해 안에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책을 읽고 이 반공주의적 서적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과 과장 그리고 제국주의와 반공주의적인 서적인지를 아주 낱낱이 밝힐 생각이다두고 해라 피에 젖은 땅!!!!

 

리뷰를 읽고 싶은 사람은 여기를 클릭하시오

 

(로자갤에 올린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pd&no=57566&search_head=100&page=1

 

(페이스북에 올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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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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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승전 76주년을 생각하며

1945년 4월 거침없이 진격하던 소련군은 독일 국경에 도달했다. 독일 국경에 도달한 소련군은 4년간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군의 종심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붕괴시켰고,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도달했다.

베를린에 도달한 붉은 군대는 도시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독일은 1944년부터 총동원으로 모집한 국민 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까지 동원하여 전투를 치렀지만, 소련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련군은 250만 명의 병사와 6,200대의 전차 및 자주포, 7,500대의 항공기 그리고 41,000문의 대포가 동원됐다.

베를린 방어구역에 대한 포위봉쇄에 동원된 병력만 해도 150만이나 되었을 정도다. 거기다 1945년 1월 벌지 전투가 서방 연합군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ㆍ영ㆍ프를 중심으로한 연합국 군대는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했고, 1945년 4월 26일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만나 악수와 우정을 나눴다. 말 그대로 독일은 동서남으로 포위된 것이다.

소련군의 진격이 베를린의 국회 의사당에 도달하자 히틀러는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 자살을 했다. 그의 애완견 블론디도 독약을 먹고 죽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한 뒤에도 전투는 1주일이나 더 이어졌다.

히틀러에 이어 총통이된 카를 되니츠와 베를린 방어군 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를 포함하여 1945년 5월 8일 항복을 선언했다.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은 소련에게 두시간이나 빨랐고, 따라서 소련에게 있어 승전 기념일은 5월 9일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치른 희생은 어마어마했다. 2,700만이 죽었는데, 이중 1,000만 명은 군인이었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대다수는 독일이 자행한 무차별 학살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나치 독일의 학살은 극에 달했는데, 나치가 전개한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에서만 3년간 벨라루스 민간인 300만이 학살당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나치와 이에 협력하는 세력들에 의해 수백만이 죽었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 대다수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나왔다. 우크라이나 민족 영웅으로 알려진 스테판 반데라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학살했다.

아무튼 이러한 희생을 거치고 소련은 나치 독일을 멸망시켰다. 미국의 문학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절대 값을 수 없는 빚을 졌다.˝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보다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는것은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희생도 있다. 이런점에서 우리는 소련과 스탈린의 공로가 매우 크다는 사실은 잊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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