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허승철 감수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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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소련사 서평: 소련 역사를 개괄적으로 알 수 있는 책

내가 소련사 역사학사 쉴라피츠패트릭을 처음 알게 된 건 아마 코로나 초기였던 2020년이었다. 쉴라피츠패트릭의 책 <러시아 혁명 1917-1938>은 스탈린의 대숙청도 러시아 혁명의 일부라는 관점을 유지했는데, 세간에 알려진 대숙청이 단순히 이오시프 스탈린 개인의 권력욕에 의한 것이 아닌, 소련 대중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계급투쟁 과정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이 돋보인 책이었다.

물론 해당 저작은 분명히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상당하지만, 서구의 기존 내러티브와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였다는 점에서 나름 신선했다. 사실 소련사 연구는 여러 역사연구가 그렇듯,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연구가 있다. 예를 들어 전통주의적 연구는 소련의 스탈린의 학살을 매우 강조했다면, 수정주의 연구는 소위 서구 사회에 알려진 스탈린의 학살이 매우 과장되었음을 지적하며, 역사의 또 다른 측면에 접근했다.

수정주의 연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스탈린의 대숙청을 깊이 연구한 아치 게티라는 인물이 있다. 게티의 저작 <대숙청의 기원(Origin of the Great Purges)>은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민중들이 부패한 관료들을 고발한 사례나, 고발당할 수밖에 없던 군 인사의 숙청, 그리고 대숙청 시기 처형된 숫자가 서구에 의해 어떻게 과장되었는지를 밝혔다.

이와 같은 수정주의 연구들을 통해 우리는 소련 역사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 수정주의 연구를 한 인물 중에는 호주 출신의 역사학자 쉴라피츠패트릭도 있다. 그녀 또한 스탈린의 대숙청을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했다. 또한, 서구 사회에 깊게 잡힌 내러티브인 ˝히틀러와 스탈린의 공통된 전체주의론˝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양자의 차이성에 주목했다.

따라서 이 책은 소련사 전문가가 쓴 간략한 개론서라 볼 수도 있다. 책은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1991년 소련의 붕괴까지를 다룬다. 내 입장에서는 소련사 관련 책들을 여러 권 읽었기에 다시 한번 복습한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스탈린 시기에 대한 쉴라의 분석은 동의 안 되는 지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쉴라는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주장하는 홀로도모르 제노사이드론에 비판적이다. 비록 이 저작에서 깊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해당 부분에 대한 그녀의 입장은 ˝강압적인 집산화가 기근의 원인이 되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한 것은 아니다.˝이다. 또한, 책 후반부의 소련 붕괴 이후 관련 내용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홀로도모르 신화의 역사적 재해석을 시도˝했다는 표현이 그녀의 입장을 보여준다.

스탈린 시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은 그 중요성에 비해 뭔가 짧게 다뤄지는 느낌이었지만, 가볍게 읽기는 좋았다. 그리고 냉전 초기 소련과 이스라엘 관련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도 의미가 있다. 소련이 단순히 친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을 쉴라의 책이 보여줬기에 나는 그 의의가 좀 있다고 보는 편이다.

물론 나는 쉴라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다. 쉴라는 스탈린 시기 집산화를 실패로 간주하고, 이후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 발전이 신속히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물론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농업 생산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며, 식량 소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1960년 기준으로 소련 인민들은 매일같이 고기식단을 즐길 수 있었는데, 스탈린 시기 최소 1주일에 한번 육류를 섭취할 수 있던 것과는 삶의 질이 달라졌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집산화의 경우 분명 우크라이나나 카자흐스탄 그리고 남부 러시아에서 안타까운 대참사가 벌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집산화를 실패로만 보기에는 과거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의 삶을 가만하자면, 단순히 실패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집산화가 단순히 강제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린 바이올라의 연구에서도 알 수 있다. 린 바이올라에 따르면,

˝비록 중앙에서 시작하고 승인되었지만, 집산화는 상당할 정도로, 농촌의 지역과 지구에 있는 지방 당과 정부 기관의 자유롭고 진취적 기획에 의하여 특별한 정책이 되었다. 집산화와 집단 농장은 스탈린과 중앙 당국에 의해서라기보다 훈련되지도 않았고 권한도 없는 농촌의 관리들과, 자활에 맡겨진 집단 농장의 지도자들의 실험에 의해서, 후진적인 농촌의 현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했을 때, 나는 스탈린 시절 집산화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분명한 사실은 집산화가 농촌의 삶을 바꿨고, 열악함이 있었음에도 과거 혁명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는 것이다. 또한, 해당 저작에서도 강조하는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의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은 사실 그 토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재건의 영향력이다. 따라서 나는 이런 점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쉴라피츠패트릭의 말대로 소련사회는 분명 고르바초프 이전까지 안정적이고 발전적이며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았다.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은 브레즈네프 시절 300루블 정도였고, 고등교육을 받은 이는 평균 500루블 이상을 받았으며, 서구가 생각하는 노멘클라투라와 일반 인민의 생활 수준이 자본주의 국가처럼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의료ㆍ교육ㆍ주거가 무상으로 제공됐고, 소비재 생산도 안정적이어서 사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며 그 가격도 매우 저렴했다. 구매력 지수로만 보면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낫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의 대량생산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사회에서 이룬 업적으로서 내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지 6년 만에 무너졌다. 쉴라 또한 강조한 것과 같이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매우 어려웠다. 남성의 평균 수명이 짧아졌고 자살률이 급증했다. 러시아의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나 유럽에서 몸을 팔았고, 이 과정에서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떼돈을 벌어 현재의 올리히가르히가 됐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가 소련 시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급증한 것이다. 이것이 보리스 옐친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러시아에서 푸틴의 등장은 쉴라의 말대로 이런 혼란의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물론 푸틴은 장기집권을 했고, 과거 소련을 부활시키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쉴라가 지적하듯이, 미국과 서구는 소련이 붕괴되었음에도 러시아를 적대했다. 고르바초프와 아버지 부시는 NATO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약을 맺었지만, 소련 해체 이후 NATO는 지금까지 꾸준히 동진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러우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서구는 소련과 러시아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결국 그런 무지가 소련 해체 30년 뒤 서방과 러시아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소련사를 개괄적으로 훑어보게 됐다. 솔직히 책 자체는 재밌었다. 개인적으로 일부 동의 안 되는 관점이나 반론할 부분도 있었지만, 소련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한다.

해당 저서의 원서는 2022년에 나왔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세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8년이 지났다. 그 당시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더 나은 사회를 원했고, 비록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실제로 과거 보다 더 나은 사회를 건설했다. 그러다 1991년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붕괴됐고, 다시 자본주의 국가로 복귀했다.

비록 현재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지만, 아직도 소련 시절 사회주의 유산이 완벽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러시아인들은 대조국 전쟁 시기 그러니까 히틀러 파시스트 침략에 맞서 소련이 승리를 거둔 역사를 여전히 기리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와 정신은 2022년 러우전쟁에서도 연결점이 분명히 있다.

한국 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지만, 러우전에 참전한 러시아 병사들 중에는 소련 깃발을 걸고 나선 이들이 있었고,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붙이고 전투에 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1야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우크라이나 공산당ㆍ돈바스 공산당과 더불어 푸틴이 주장한 특수군사작전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러시아 침략자라는 논리로 접근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소련의 역사와 연결해서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소련사 개론서다. 소련은 분명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부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으로 볼만한 요소들도 많이 있었다. 문제는 전자만이 너무 한국인들에게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 중에는 소련 시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 점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왜 현재의 러시아 사람들이 소련을 잊을 수 없는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소련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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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을 무찌르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소련이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무려 2,700만 명이나 사망했고, 2,500만 명에 달하는 소련 사람들이 집을 잃었으며,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즉, 히틀러와 나치가 일으킨 파멸적인 전쟁으로 소련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살육과 인명살상 그리고 파괴와 초토화를 경험했다. 사망한 소련 사람 2,700만 명 중 1,000만 명은 군인이었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이와 같은 민간인 사망자 수치는 나치가 소련에서 저지른 학살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는 역사적 수치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사망자 대다수는 소련과 폴란드 측 유대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치가 소련에서 벌인 전쟁은 파괴와 대량학살 그 자체였다.


나치는 이와 같은 학살과 파괴를 벌였지만,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나치의 주력부대를 전면적으로 상대했던 나라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1941년에서 1942년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이 200~300개 사단이 넘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상대한 독일군은 4~5개 사단 정도였다.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하여 제2전선을 연 것이 1944년 6월 5일이었음을 생각해보자면, 사실상 소련 혼자서 독일을 상대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베를린 공방전까지 스탈린이 지휘한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또한, 제3제국의 심장에 승리의 깃발을 나부끼게 한 것도 소련이었다. 오늘은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일을 맞이하여 베를린 공방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으로 진격을 재개한 것은 1945년 1월에 이르러서였다. 소련군의 이 대공세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가 실패로 마무리될 시점에 개시됐다. 이 작전이 바로 비스와-오데르 작전이었는데, 소련의 붉은 군대는 폴란드를 휩쓸고 동프로이센과 동부 독일로 진격했다. 1945년 2월 공세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붉은 군대의 선발 부대들은 독일 수도에서 80km 지점까지 도달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220만 명의 병력에, 4,500대의 탱크, 5,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붉은 군대는 하루에 25~30km 속도로 진격하면서 총 14만 7,0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5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을 파괴하거나 거의 파괴할 수 있었다. 비스와-오데르 작전은 2월 말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크림반도에서는 얄타 회담이 진행됐다.


그해 3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분쇄하면서 동프로이센과 포메른으로 진격했는데, 소련군의 본격적인 독일 본토 진격은 4월 16일에 개시됐다. 1945년 4월 16일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베를린 동쪽에 있는 젤로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였던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부대에 의해 큰 피해를 보긴했지만, 그 다음날인 17일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젤로 고지를 우회하여 다른 전선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소련군의 전방 부대가 베를린의 동쪽 교외에 이르렀으며, 소규모 공격 집단을 이용해서 방어자들을 한 구역 한 구역 뒤로 밀어 붙였다. 이때부터 소련군은 베를린을 대상으로 포격과 폭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베를린 공방전을 통틀어 공세에 가담한 소련군은 총 250만 명이나 됐다. 이중 206만 명이 전투병력이었고, 15만 5,900명이 소련과 함께 진격하는 폴란드군이었다. 소련은 탱크와 자주포 6,250대, 화포와 박격포 41,600문, 항공기 7,500대를 공방전에 투입했다. 반면에 소련에 맞서는 독일군은 1,519대의 탱크와 돌격포, 9,303문의 화포와 박격포로 무장했으며, 병력은 최소 75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4월 19~20일 사이 소련의 붉은 군대는 95km를 진격했고, 다음 날 초센 지역에 있던 독일 총사령부를 점령하여 독일군에게 남아 있던 작전 수행 능력을 제거해버렸으며, 베를린 남쪽 교외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4월 22일 해가 질 무렵, 중부 지구에서는 소련군 선견대가 독일 수도의 남부에서 슈프레 강에 도당해, 교두보를 확보했다. 24일에는 추이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이 리발코가 이끄는 병력과 함께 베를린 남동부에서 결합하여 베를린 남동쪽 베스코프 부근의 독일군을 포위했다. 25일 소련군은 미군과 연결하여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이 됐다. 소련군과 미군의 만남이 있는 동안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순군은 오데르 서쪽 강을 건너 서안의 독일군 방어진을 돌파했고, 베를린 포위를 더욱 좁혔다. 히틀러는 슈타이너군집단이 베를린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망상에 있었지만, 결국 완전한 패배임을 인정하게 됐다.


주코프가 지휘하는 붉은 군대는 4월 26일 공식적으로 베를린 돌격을 개시했고, 베를린 시가지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다. 과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들이 엉켜있는 곳에서 양측의 총격전과 포 사격이 벌어졌다. 1945년 4월 30일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군 수비대를 4개로 나누어 고립시켜 버렸고, 각개 격파에 들어갔다. 또한 소련군은 제국의 심장의 상징과도 같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그곳에 낫과 망치가 들어간 붉은 깃발을 게양했다. 같은 날 히틀러는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자살을 했다. 그러나 베를린 공방전은 종결되기 까지 며칠이 더 걸렸다. 베를린 공방전은 결국 1945년 5월 8~9일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면서 소련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


베를린 공방전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군 잔존 병력을 박살냈고, 10만 명 이상이 독일군이 전사했으며, 소련군은 48만 명이나 되는 독일군을 포로로 붙잡았다. 소련 측의 피해도 컸는데, 소련군은 전사자 8만 명을 포함하여 36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탱크도 거의 2,000대나 파괴됐고, 항공기도 900대나 격추됐다. 폴란드군의 경우 2,800명 정도 전사했다고 한다. 민간인 피해도 제법 컸다. 최소 2만 명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베를린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가장 희생이 컸던 전투는 도시보다는 베를린으로 가는 진입로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시가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보다 훨씬 짧게 진행됐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소련군은 분명히 파시즘을 무찔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소련의 공로가 매우 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소련군에 의한 전시 강간은 전쟁 이후 냉전을 통틀어 서방 진영이 가장 많은 공격과 비판을 가한 주제이기도 하다. 서구의 학자들은 이 시기 소련군이 강간한 독일 여성이 200만 명이라 추산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반박도 있다. 사실 글쓴이도 이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반론을 글로 쓴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좋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pfbid02e2rspvSVoWpLw9oFtwKWYWrkeDqD2xGb7sgFieGY54vzJ4TYPEqkWALBwFmUSQwfl&id=100001070470657


앞서 공유한 글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전시강간 문제는 숫자가 심각하게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베를린 공방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그러나 히틀러 정권의 붕괴가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은 아니었다.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과 독일 본토에서 만나고, 제국의 심장에 붉은 깃발을 꽂으며 승리를 쟁취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본의 오키나와 섬을 두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고, 6월이 되어서야 미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 미 공군은 일본을 지속적으로 폭격했지만,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몰락한 이후 소련 또한 과거 루스벨트 대통령이 원했던 소련의 대일참전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사망했고, 그의 후임자 해리 트루먼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트루먼은 극성 반공주의자였고 소련을 경계했다. 사실 트루먼이 일본이 저항의지가 없음을 알았음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던 그 날 소련은 만주에서도 진격을 게시했고, 불과 열흘 남짓한 사이에 만주와 남사할린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항복시켰으며, 70만 병력을 자랑하던 관동군을 섬멸했다. 수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하고 60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따라서 소련은 히틀러를 몰아낸 공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공로도 분명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진행되면서 서방 진영에 의해 부정당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권도승 외 옮김, 『독소전쟁사 1941~1945 - 붉은군대는 어떻게 히틀러를 막았는가』, 열린책들, 2007.

로버트 서비스, 윤길순 옮김, 『스탈린, 강철 권력』, 교양인, 2007.

리처드 오버리, 류한수 옮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풍경, 2003.

오키 다케시, 『독소전쟁 - 모든 것을 파멸시킨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1.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옮김, 『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열린책들, 2022.


https://blog.naver.com/seed_0815/223441519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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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4-05-09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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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5-11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의 ˝자유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소련 붉은 군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라는 말에서 보듯, 나치독일과 일제를 몰아내어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맞서 인류를 지켜낸 소련 붉은 군대의 희생은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사망했다. 올해 2024년은 레닌 서거 100주년이다. 20세기 레닌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이후 등장한 수많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레닌은 위대한 혁명가이자 이론가로서 존경받았다. 레닌이 죽고 난 다음 소련 공산당에서 최종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었다.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당내투쟁이 있었다. 트로츠키(Trotsky), 부하린(Bukharin), 지노비예프(Zinoviev) 그리고 스탈린이 경쟁했는데, 스탈린이 승리했다.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트로츠키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트로츠키주의자(Trotskyist)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난할 때 사용하는 소재 하나가 있다. 바로 ‘레닌의 유언’이다. 즉,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거나,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로츠키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들도 잘만 인용 및 이요하며 스탈린을 헐뜯기 바쁘다. 이 부분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연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레닌의 유언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사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대해 안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기 위해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898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 러시아 대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3년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이후 당 내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파가 분리됐다. 당시 레닌이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다수파를 의미하는 볼셰비키라 불렀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소수파를 의미하는 멘셰비키라 부르게 됐다.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을 비방하고 헐뜯는 멘셰비키파에 있었다. 트로츠키가 볼셰비키로 노선을 바꾼 것도 1917년 러시아로 귀국한 다음이었다.


트로츠키가 1917년 10월 혁명에 참가했으며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를 지휘한 공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가 스탈린에게 전혀 없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스탈린 또한 적백내전에서 소련의 붉은군대를 지휘했다. 특히나 1919년 5월에는 유데니치가 지휘하는 백군에 맞서 페트로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하기 위한 전권을 볼셰비키로부터 물려받았다. 또한 차리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그는 붉은군대 지휘관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3년 동안 볼셰비키 공산당에서 레닌 다음의 2인자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2년 4월 23일 레닌의 추천에 의해 총서기장에 임명됐고, 당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조직국 위원이자 볼셰비키 공산당의 총서기장이었던 인물은 스탈린이 유일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고 자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레닌의 건강상태를 알 필요가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1년 뒤인 1918년 8월 러시아 사회혁명당원인 핀야 카플란의 암살 시도 때문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1922년 4월 23일 총탄들의 하나를 처치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받았으며, 1달 뒤 그의 오른쪽 손과 발이 마비됐다. 1922년 12월 16일 레닌은 두 번의 위험한 발작을 겪었고 12월 23일에 또 한 번의 발작이 있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은 새로운 발작 때문에 신체 절반이 마비되었고, 언어 능력도 앗아갔다. 그렇게 해서 레닌은 더 이상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24년 1월 21일 사망했다. 따라서 레닌은 1922년부터 생과 사를 오갔으며, 유언을 작성했다. 그 유언으로 알려진 문서가 있는데, 이 유언이 작성된 문서의 시점을 볼 필요가 있다.


소위 ‘레닌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문서는 1922년 12월 23일과 31일 사이에 구술됐다. 1923년 1월 4일에 한층 보충되었으며, 이는 그가 발작을 겪어 건강상태가 안 좋던 시기였다. 특히나 공산주의의 적들이 ‘레닌의 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1922년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의 기간 동안 구술된 것이다. 1922년 12월 22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선별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해 전화로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를 힐책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화 통화가 크룹스카야로 하여금 카메네프에게 스탈린의 무례함에 대해 불평하는 글을 쓰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 내지는 작가들은 레닌의 유언에 집중했다. 여기서 서구 학자들은 레닌이 유언에서 트로츠키를 위해 스탈린의 제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벨기에 왕립군사학교의 명예 교수인 앙리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정상적으로는 트로츠키가 레닌을 계승했어야 했다.... (레닌은) 그를 후계자로 여겼다. 레닌은 스탈린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출처는 어디일까? 바로 트로츠키 자신이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스탈린이 당에 숨긴 레닌의 유언과 관련해 분개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23일과 1923년 1월 5일 사이에 레닌이 구술한 서신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나는 중앙위원회의 신망을 두텁게 하기 위해, 우리의 행정 기구를 충분히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중앙위원회 분파 간의 갈등이 당의 미래에 과도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당이 노동계급 출신에서 50명에서 100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을 요구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분열을 막는 방책’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안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같은 중앙위원회의 그러한 위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분열의 위험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끝이 없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진술한 전문을 보면,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태도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트로츠키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레닌은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1923년 3월 5일 새로운 서신을 구술했다.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귀하는 전화상으로 나의 아내를 호출하여 질책하는 무례함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저질러진 일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아내가 당한 것이 또한 내가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귀하가 말한 것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는 지, 혹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귀하가 신중하게 숙고하기를 요청합니다. (레닌)”


레닌은 이러한 구술 서신을 남겼지만, 역사학자 이안 그레이에 따르면 크룹스카야는 비서에게 그 서신을 스탈린에게 전달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에게 전달이 안됐던 것이다. 거기다 레닌이 진술한 유언에서 트로츠키에 대해 비볼셰비즘이라고 비난하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10월 혁명(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 동안에 했던 실수에 대해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반면에 스탈린에 대해선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무례함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이 실수들을 했다는 것에 대한 단 한마디도 없었다. 참고로 트로츠키는 말년에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앞서 언급한 벨기에 제국주의자 앙리 베르나르는 이와 같은 트로츠키의 억지주장을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추가하며 책에 서술했다.


“나는 이와 같은 사건의 경과를 어느정도 상상해본다. 레닌은 1923년 2월 말에 독약을 요구했고, 겨울이 다가오자 레닌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햇으며 그의 언어 기능은 돌아오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권력의 다음 차례였다. 그의 목적이 가까워졌으나, 레닌으로부터의 나오는 위험은 훨씬 더 가까웠다. 이런 때에 스탈린은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겨야 되는 결심을 해야 했다. 레닌이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레닌에게 독약을 주었는지, 아니면 스탈린이 보다 직접적인 수단에 의존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애초에 1923년 3월 6일부터 레닌이 죽을 때까지,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그의 누이 그리고 그의 비서들은 그의 침대 곁에 있었다. 즉, 레닌은 그들 몰래 독약을 먹을 수 없었으며, 스탈린이 암살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이를 받아 적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해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따라서 무슨 레닌이 자신의 후계자를 트로츠키로 임명했다거나, 레닌이 그의 유언을 통해 스탈린을 공격하는 등 반스탈린 투쟁을 했다는 주장이나 스탈린이 레닌을 독살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사하로프라는 러시아 학자가 잘 반박했으며, 이는 서구 역사학계에서도 유명한 스티븐 코트킨 또한 높게 평가하는 자료다. 스탈린에 대한 얘기 중 하나는 그가 소련 공산당에서 인기가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엉터리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빌 블랜드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세계의 지도적 맑스주의자로서 레닌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서기장의 자리로부터 스탈린의 제거에 대한 그의 유언에서의 요구는 소련 공산당 제13차 대회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그 문서가 쟁점이 된 환경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이 당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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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4년간 치러진 이 전쟁으로 1,000만 명이 죽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3,000만 명의 사상자가 이 전쟁에서 나왔다.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빠지게 됐는데, 이는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여파 때문이었다. 19세기부터 낙후된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전쟁 초기 독일은 슐리펜계획에 따라 대부분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했으나, 예상외로 잘 버틴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짐으로써, 전쟁은 4년간이나 지속됐다. 


러시아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적잖은 패전을 거듭했다. 1915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동부전선에서 유리한 전세를 잡았으며,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군은 총 200만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200~3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500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한 것이다. 그러나 1917년에 시작된 2월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고, 러시아는 점차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쪽으로 가게 됐다. 특히나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은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등장시켰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한 레닌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을 외쳤다.

(아르헨겔스크에 상륙했던 미군 사진, 성조기를 들고서 이렇게 기념 사진도 찍었었다.)


1918년 3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려 했던 소비에트 정권은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은 러시아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진행중이던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침공하며 백군을 지원했는데, 이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바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었다. 적백내전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려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이에 맞서는 차리즘 복권 세력 간의 전쟁이었다. 볼셰비키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불법 침공이었다.


1918년에 시작된 내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백군 세력·체코 군단·영국·미국·프랑스·일본·폴란드·그리스·에스토니아·이탈리아로 구성된 반란군 및 침략군대를 무찔렀고,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승기를 잡았으며, 궁극적으로 내전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은 적백내전에 병력을 보냈다. 그 이유는 바로 미국이 적색공포에 빠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 이른바 좌파 색출작업을 단행했는데, 그 결과 적잖은 좌파 운동가들이 감옥에 갔으며, 미국 내에서의 반공주의 정서가 극심해졌다. 우드로 윌슨 정부는 1918년 러시아에 미군을 보냈다. 말 그대로 혁명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침략군을 보낸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된 간섭군들, 열병식을 하는 이들 중에는 미군들도 있었다.)


윌슨 정부는 총 13,000명 정도의 미군을 러시아에 보냈다. 1918년 9월 러시아 북부에 있는 아르헨겔스크와 극동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미군 병력이 상륙했으며, 이들의 임무는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3,000명의 미군 병력 중 5,000명은 아르헨겔스크에 주둔했고, 나머지 8,000명은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러시아로 파견된 미군들 또한 전투를 치렀다. 1918년 10월 붉은 군대는 미군을 공격하여 적잖은 사상자를 안겨주기도 했는데, 미군들은 아르헨겔스크에서 전투에 투입됐던 병력의 10% 정도를 잃었다. 총 11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30명이 실종되었으며, 또 다른 70명은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2021년 프랑스에서 나온 르몽드 기사에 따르면, 부상당한 미군은 눈보라치는 숲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얼어 죽었고, “그해 가을과 겨울 미군은 이미 끝난 전쟁에서 미국 정부에 의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장교들에게 속고 동맹국에 혹사당했으며, 적과 싸우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사진)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대다수는 흥미롭게도 겨울 날씨에 잘 버티는 미시간 출신의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군 지휘관들은 이들이 아르헨겔스크의 추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배치되기 전 영국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이들이 받았던 훈련 중에는 영하 기온에서 버티는 방법도 있었으며, 이걸 교육한 사람은 남극을 탐험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탐험가 에르네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아르헨겔스크에서의 군생활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들 중 하나였던 헨켈맨과 3명의 병사는 연대장에게 최후통첩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3월 15일까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러시아 적군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미국에서 만든 시베리아 파병 미군 병사 관련 프로파간다, 이 프로파간다는 시베리아에 있는 미군들 지원하기 위해 전쟁우표를 살 것을 요청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는 1919년 1월에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게시했다. 7일간의 공세 기간 동안 미군 병력은 8 대 1이라는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고, 이 미군들은 바가 강을 포함하여 지키고 있던 여러 곳에서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의 점진적인 공세는 5월에도 지속됐고, 미군은 1919년 6월 15일 아르헨겔스크에서 철수를 마쳤다. 아르헨겔스크에서 9개월간 주둔했던 미군은 총 235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윌슨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미군을 주둔하며 백군을 지원하고자 했다. 


2019년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 중이던 콜차크 제독의 백군들은 점령한 지역에서 백색테러를 했다고 한다. 대량 처형이나 고문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기사에 따르면 “코사크 장군 출신인 그리고리 세메뇨프(Grigori Semenov)나 이반 칼미노프(Ivan Kalmikov)가 지휘하는 백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비호하에 점령한 지역과 마을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미군들이 백군 세력을 도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20년 1월 우드로 윌슨 정부가 시베리아에서의 철군을 결정하면서, 미군은 4월 1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시베리아에 있던 미군 병력은 전사자 189명을 남긴 채 철수했다.

(현재 러시아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간섭군대 관련 묘비)


적백내전기 미군 전사자 숫자는 344명에서 424명 정도로 추정되며, 부상자도 최소 3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적백내전기 미군의 파병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적백내전은 볼셰비키 세력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1921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1922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 즉, 소련(Soviet Union)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적백내전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만큼이나 참혹했다. 대략 1,000~1,200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사망했는데, 1921년에서 1922년에 강타한 기근으로 최소 500만 명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인 전사자도 100만 명을 넘었다. 이러한 숫자를 보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 못지 않게 참혹한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 내전의 존재를 아는 유럽인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서양 현대사마저도 루소포비아적 시각에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단행본

쉴라피츠패트릭, 고광열 옮김, 『러시아 혁명 1917-1938』, 사계절, 2017.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1』, 일월서각, 1993.


기사

마이클 M.필립,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미군들”, 르몽드, 2021.07.30.,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30>.

Blake Stilwell, “The United States' Invasion of Russia Was a Yearlong Freezing Hell for the Troops”, Military.com, 2022.06.28.,

<https://www.military.com/history/united-states-invasion-of-russia-was-yearlong-freezing-hell-troops.html>.

Erick Trickey, “The Forgotten Story of the American Troops Who Got Caught Up in the Russian Civil War - Even after the armistice was signed ending World War I, the doughboys clashed with Russian forces 100 years ago”, Smithsonian Magazine, 2019.02.12.,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forgotten-doughboys-who-died-fighting-russian-civil-war-180971470/>.


인터넷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Allied_intervention_in_the_Russian_Civil_War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650&code=kc_age_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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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2년 김남섭 교수가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저서인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s: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의 내용을 바탕으로 겨울전쟁을 요약한 글입니다.)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1939년 8월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또한 스탈린 정부의 폴란드 분할과 핀란드 침공에 대해서도 당연히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서방의 입장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동맹이었고, 부당한 제국의 팽창을 했다.”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론은 없는 것일까? 당연히 반론도 존재한다. 오늘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의 또 다른 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겨울전쟁 당시 전선 지도)


1930년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관된 정책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팽창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한 것도 파시즘에 맞선 새로운 전략이었고, 실제로 1936년 프랑코가 파시스트 쿠데타를 일으키자 공화파를 지원했다. 스탈린은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약 2,000명의 소련군을 파병했으며, 보병의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는 탱크 부대도 보냈다.


스페인 내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겨울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아시아와 유렵에서 전쟁을 치렀다. 우선 만주와 몽골 쪽에선 하산호와 노몬한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고, 1939년 폴란드 분할 당시 소련군은 병력을 보내 폴란드의 절반을 접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스탈린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스탈린은 갈등을 촉발한 국경과 안보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정치협상은 파탄이 났고, 그 결과가 군사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1939년 10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은 협정에 대한 요구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핀란드에게 해군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핀란드만의 몇몇 섬을 조차하거나 임차하고 싶다는 요구를 내밀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서 3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소련-핀란드 국경을 북서쪽으로 옮기기를 원했으며, 그 보상으로 핀란드에 극북의 소련령 카렐리야 영토를 주고자 했다.


협상을 준비하면서 소련 외무부는 일련의 최대 요구와 최소 요구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최대 요구에는핀란드에서의 군사기지, 북부 핀란드의 페차모 니켈 광산 지역 양도, 발트해 연안의 핀란드 군사 시설에 대한 거부권이 포함되었다. 물론 핀란드 대표단은 양보를 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반면 소련은 소련-핀란드 상호 원조 협정까지 포기하며 최소한의 영토를 요구하는 쪽으로 물러났다. 즉, 소련은 핀란드에게 협상에서 양보를 하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던 것 같다.

(소련-핀란드 전쟁 관련한 영문 서적)


그러나 협상은 궁극적으로 깨졌으며,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핀란드는 10월 중순에 군대를 동원했고, 핀란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체포했다. 핀란드가 이렇게 나가자, 스탈린과 소련 국방 인민 위원 보로실로프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 보로실로프는 11월 20일까지 소련군을 레닌그라드 지역에 완전히 집결시켰고, 지역 사령관들은 11월 21일까지 기동 준비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소련군은 핀란드군 사이에서 벌어진 국경 충돌에서 개전 이유를 찾았으며, 11월 28일 몰로토프는 1932년에 맺은 소련과 핀란드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고, 소련은 1,500대의 탱크와 3,000대의 항공기 지원을 받는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진격을 재현한 사진)


초기 공격은 실패했고, 준비된 핀란드군 또한 제법 잘 싸웠다. 로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날씨에 소련군의 공격은 서툴렀고 조율도 억망이었다. 그러나 그해 2월 스탈린이 세묜 티모셴코를 소련의 핀란드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핀란드가 만들어 놓은 만네르하임선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고, 핀란드군을 잘 갖추어진 전선에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사상자가 핀란드군 보다 많았다는 점을 보자면, 군사적 손실 측면에서 핀란드가 이겼다고 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1940년 3월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 방어의 남은 부분을 붕괴시키고 수도 헬싱키로 진격한 다음 온 나라를 짓밟고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스탈린은 핀란드의 평화 협상 타진에 반응하여, 종전 조약을 협상해서 체결하기로 했으며, 1940년 3월 12일에 맺은 조약의 조건에 따라 핀란드는 소련의 주요 영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독립과 주권을 보전했고, 여느 발트국가들과는 달리 상호 원조협정을 맺는 일과 본토에 소련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스탈린은 비교적 겨울전쟁 종전에 대한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T-26 전차)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에서는 비교적 짧게 언급된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 정부의 공산주의자 탄압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가 아는 핀란드는 레닌 시절 적백내전 속에서 탄생한 국가였다. 당시 핀란드는 레닌을 지지하는 볼셰비키 좌파와 반공성향의 우파가 내전을 벌였는데, 1948년의 대한민국처럼 우파가 승리했다. 내전 당시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는데, 적색테러로 죽은 사람이 1,650명인 반면, 백색 테러로 죽은 사람은 무려 8,2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즉, 백색 테러의 규모가 적색 테러보다 몇 배는 더 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핀란드 정부는 명실상부 반공 성향의 우익 정부였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부당한 침공을 지적할 수 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겨울전쟁 이후 핀란드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 빌붙은 아주 충실한 반공 성향의 동맹국가였다. 겨울전쟁 이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을 돕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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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유럽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핀란드도 추축국이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