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에 대해 비하하는 분들은 대한민국에 넘칩니다. 그러나 비하하기 전에 그들이 어떠한 인생을 살았고,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지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이 투쟁현장에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토대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걸 알기에 지난 겨울과 봄 LG트윈타워 연대투쟁에 거의 매주 나갔던 것이고요. 아래의 글은 제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한 글입니다.)


내가 한국의 정치상황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2년이었다당시 일반적인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현재는 탄핵 된 대통령인 박근혜 후보가 점차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 걸 보았다시대가 이명박 정권 시대였기에 나 또한 그 정권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중학교 3학년인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나에게 있어 대대적인 반북의식을 고취시키는 사건이었다거기다 KBS에서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방영했던 드라마 전우는 북한을 더더욱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물론 부모님이 친민주당 성향에 가까워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극우적인 견해는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근혜가 인기를 끌게 되자 할아버지(외할아버지다)는 박근혜를 찍어야 한다고 얘기했다또한 친북주의자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고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이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이라고 얘기했다물론 나 또한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 말에 공감은 하면서도 박정희가 독재를 한 것에 대해선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원에는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2학기 때였다당시 국어 선생님은 안철수와 문재인이 힘을 합쳐 박근혜를 이겨야 한다 주장했다또한 박정희가 친일파이며 남로당이었고폭압적인 통치를 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다나 또한 그 선생님의 주장에 점차 공감하게 됐고문재인이 당선되길 원했다여기서 나의 인식에 있어 제1차적인 인식의 변환이 있었던 것 같다알다시피 2012년 대선은 박근혜가 이겼다나 또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 시기는 초기부터 시끄러웠다당시 고3인생을 시작하던 나는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에 따른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보게 되었고그 외에도 박근혜 정권에 대한 안 좋은 목소리가 많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또한 그 시기 국정원에 대한 안 좋은 소문과 이석기 사건 등이 있었다일베들의 사악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행위들을 보면서 박근혜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쌓였던 것 같다당연하게도 이것은 학원의 국어 선생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은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재수하지 않고 2014년에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새내기가 된 나는 대학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그럭저럭 학창생활을 해나갔던 것 같다새내기 초기인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세월호 사건이 터졌지만당시의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새내기 생활이 바빴던 것도 있고그해 여름에 1달 간 유럽 여행을 갔다 온 이후론 머릿속에 해외여행 생각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그래도 고등학교 2~3학년과 대학교 새내기 생활을 하면서 확실히 대한민국의 체제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 자체는 있었다따라서 북유럽의 복지 모델이 좋아 보이긴 했다.

 

그렇게 해서 2015년을 맞았다. 2015년을 맞은 나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 1945를 정주행하게 됐다드라마 서울 1945를 정주행하게 된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지점들을 그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여기서 제2차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나는 해방 이후 남북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헌신을 다했던 몽양 여운형을 좋아하게 되었다무엇보다 김구의 남북협상 이전에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이렇게 해서 2015년 대학교 2학년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대학교 2학년 시절이던 2015년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그게 바로 박근혜 정권의 국정 교과서 사건이었다국정 교과서 사건은 나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다박근혜 정권이 우리 역사를 자신들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는 걸 본 역사학계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많은 대학교 사학과가 이에 동참했다인서울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 또한 이에 동참해야 한다 생각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당시 국정교과서 사태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연대서명을 우리학교에서 총 4명밖에 하지 않았다이에 대해 학과 단톡방에 항의하기도 했다그 이후 서명하는 이들이 늘었다.

 

또한 국정 교과서 사태 때 난생 처음으로 집회라는 것을 참가해보게 됐다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제3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난생 처음 집회에 나갔을 때우연히 거리행진을 하는 우리를 보고 북한으로 가라라고 확성기를 통해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어버이연합 트럭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나는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국정 교과서 반대 집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국정 교과서 사태는 제3차적인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내가 사회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 2015년 국정 교과서 사태이기 때문이다이후 나는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그 다큐멘터리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해서 만들어진 다큐였고거기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 시킨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해주었다는 내용이 있었다이리하여 난 레닌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2학년 2학기를 마친 이후 2016년이 되었다. 2016년 초 나는 학교 친구를 통해 한 단체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그 이후 나는 민중총궐기와 3.1절 집회 등을 포함하여 이쪽 계열 사람들과 같이 활동했고여러 집회에 참여했다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이 단체는 민중당(현재는 진보당성향을 많이 띈 단체였다한국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반북의식 때문에 나 또한 이쪽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비판의식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고거기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그래서 나는 이쪽 계열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당적을 가지게 되었는데처음 입당한 당이 심상정의 정의당이었다내가 정의당에 입당한 이유는 분명했다반북의식과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적인 환상 때문이었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2016년 당시 나는 레닌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이 영향으로 난 아르바이트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군복무를 하기 전 러시아 여행을 갔다 올 수 있었다러시아 여행을 가기 전 나는 러시아 역사책과 더불어 레닌과 사회주의에 관한 책도 읽었다그때 처음 읽은 것이 책갈피에서 출판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공산당 선언>, <국가와 혁명그리고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 시리즈>였다이런 책들은 내가 레닌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물론 책갈피에서 쓴 책들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소련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인드도 조금은 생겼다물론 스탈린을 싫어했었다아무튼 2016년 10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레닌 묘를 들어가 보게 된 나는 레닌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러시아에 갔다 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는 앞으로 역사에서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 터졌다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그리고 나는 이런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인 10월 말에 소방서에서 공익 근무를 하게 되었다박근혜에 대해 증오와 혐오가 쌓여있던 나는 촛불집회의 첫 시작부터 매주 토요일 마다 참가했다집회는 평화로웠다전국적으로 천만 이상이 참여하는 이 집회 속에서 나 또한 촛불집회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었다비록 3월 10일 현장에는 없었지만그 이전의 매주 토요일 집회는 2~3번을 제외하고는 빠지지 않고 민중들과 함께했다.

 

이런 과정 속에 있던 2017년 1월 우연히 노동자 연대에서 파는 소책자를 사게 되었고서명을 한 덕분에 노동자 연대 쪽에서 하는 세미나에도 참가해 볼 수 있게 되었다당시 노동자 연대의 입장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토니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론을 처음 접했을 때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이것이 바로 제4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이 영향에 따라 나 또한 스탈린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레온 트로츠키를 좋아하게 되었고노동자 연대쪽의 입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무엇보다 마르크스라는 타이틀을 단 것이 참으로 심장으로 와 닿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민주당류의 기류를 완벽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아직도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도그마와 북한에 대한 반북의식 그리고 스탈린과 그 외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남아있었다그리고 사회민주주의를 여전히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즉 인식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심지어 나 자신이 페이스 북에다 나는 사회주의자면서 사회민주주의자 그리고 민족주의자라는 이상한 말을 진심으로 선언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그리고 촛불집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했을 정도로 문재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기에 2017년 5월 대선에서 나는 문재인을 찍었다.

 

2016년 10월 말부터 시작한 소방서 공익 근무 시절 나는 구급 출동하지 않는 시간에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넘쳐났다당시 와이파이가 없고 똥컴이 놓여있는 소방서에서 사무실에서 잘 안가는 시간을 소비하는 방법은 독서를 하는 것이었다그 시기 나는 정말 많은 책들을 읽었다. 24개월이라는 공익 근무 기간 동안 거의 100권 가까이 사회과학 서적들을 완독했다그리고 소방서 공익 근무는 나에게 있어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을 주었다왜냐하면 구급 출동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정말 힘든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이런 현실에 직면했기에 사무실에서 읽던 사회주의자들의 전기나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 더 와 닿았다이렇게 해서 2018년 중반에 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선포했다이것이 제5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

 

2018년은 평창올림픽과 남북공동선언 북미회담 등이 있으면서 시기적으로도 화해모드가 진행되었다거기에 힘입어 공익 근무 말기 나는 북한에 대해서도 좀 다르게 보게 되었다북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본 책들을 읽는 것과 동시에사회주의 원전 및 혁명사 등도 읽었다이와 더불어 미국의 저항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책도 읽었다이렇게 되면서 사회주의자적인 면모가 보다 내 자신에게 의식적으로 생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또한 이 경험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웬만한 반북주의적 인식도 많이 희석되었다.

 

2018년 10월에 전역한 나는 1달간 미국 여행을 했다미국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하워드 진의 묘도 찾아가 보았고미국 자본주의의 민낯도 보게 되었다이미 사회주의자를 선언했던 터라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서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리고 2018년 시기부터 스탈린에 대해서 나름 긍정적인 면모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당시 내가 내리던 스탈린의 평가는 공과 6정도였을 것이다그래도 나는 피델 카스트로나 호치민레닌마르크스엥겔스체게바라 등의 인물들을 좋아했다.

 

아무튼 미국 여행도 마쳤고그 다음해인 2019년 나는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3년만에 한 복학이었다복학한 나는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인 면모보다 부정적인 면모를 더 많이 봤다그래도 스탈린의 긍정적인 면모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싶었다그러나 스탈린을 객관적으로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던 2019년 1학기 말에 데이비드 글랜츠가 쓴 <독소전쟁사>라는 책을 완독했다이 책은 비록 미국 군사학자가 쓴 책이지만독소전쟁 시기 소련군의 업적을 나름 객관적으로 조명한 책이었다이 책을 완독한 나는 흥분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의 책 <진실이 밝혀지다>도 읽었다이 책을 읽은 뒤에 나는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굴라그 수용소가 매우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것을 시작으로 나는 스탈린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고그를 존경하게 되었다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는 나에게 있어 마지막 변화인 제6차적 인식의 변화다.

 

내가 사회주의자를 스스로 선언한 것은 2018년이었다공익 근무 말기 나는 우연히 같은 근무지에서 쌍용차 투쟁을 하다가 공익으로 들어온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사상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이쪽의 영향도 받았고여러 가지 좋은 조언들도 많이 받았다무엇보다 이 분 덕분에 사회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내가 사회주의자가 되기에는 여러 과정도 있었지만가장 중요한 것은 소방서 공익 시절의 경험이었다그 시기 내가 구급출동을 하면서 보게 된 현실은 사회주의자가 되기에 충분했다또한 그 시기 읽은 책들은 내가 사회주의자가 되는 데여러 가지 인식의 전환을 주었다.

 

나는 아직도 사회주의를 추구하기 위해선 더 많은 학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그러기 위해선 앞으로도 이론과 더불어 실천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아무튼 나 또한 여러 과정속에서 리영희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이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나로 하여금 단순히 학습 뿐만 아니라 실질적 투쟁에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었다민중총궐기노동절 집회퀴어 축제반미시위국가 보안법 철폐 시위이석기 동지 석방 시위등이 바로 이러한 인식적 전환의 영향을 받았기에 나 자신이 참여했던 것이라 생각한다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지 않은 채 2021년을 맞이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의 내모습을 보면 좌경화의 역사인가? 뭐 아무튼 내가 사회주의자인 것이 자랑스럽다앞으로도 난 내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가고 싶다.

 

사회주의는 불멸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앞으로도 인류가 성취해야할 과제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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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10-01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한 개인의 인식 변화가 우리 사회 굵직한 사건들과 연계되어 일어났네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니 대단해 보입니다~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는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앞으로의 길을 응원합니다!!

NamGiKim 2021-10-01 20:12   좋아요 1 | URL
기본적인 이론을 가지고, 그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것이 결정적이라 봅니다.ㅎ

필리아 2021-10-01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이 누구도 소외,배제됨 없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네 소망이지요. 이데올로기에 천착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만 NamGiKim님의 진솔한 자기 성찰에 입각한 신념의 실천을 향한 노력에는 마음껏 응원하고 싶습니다.

NamGiKim 2021-10-01 20:12   좋아요 1 | URL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2년을 공들여 쓴 책인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을 오늘부터 알라딘에서 구매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예전에 알라딘 블로그를 포함하여 SNS에 연재하던 '미제국주의 역사'를 보다 정리하여 책으로 냈습니다. 알라딘 친구분들을 포함하여 이 글을 보신 분들이, 이 소식을 널리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이 책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부터 올해 종결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를 총체적으로 다룬 책입니다. 미국사의 이면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공부를 더 해야하는 학생신분이지만, 그래도 하나의 큰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책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0555188


(미제국주의 역사 연재 시리즈)

https://blog.aladin.co.kr/759779161/category/70614412?CommunityType=MyPaper&page=6&cnt=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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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30 17: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고생많으셨고 앞으로 더 큰 학업적 성취를 기원합니다.

NamGiKim 2021-09-30 17: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관심 있으시면, 한번 읽어보길 추천합니다. 분명 미국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붕붕툐툐 2021-09-30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와우!! 축하드립니다!! 공들인 책이 나왔다니 엄청 뿌듯하시겠습니다!! 이 주제는 요즘 핫하지 않습니까? 판매도 쭉쭉 잘 되시길!!🙏

NamGiKim 2021-10-01 00:02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제가 이 책의 출판 작업을 조직에서 진행하고 있을 때,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있었죠. 그거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분명 얻어가는 것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무튼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1-10-01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간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10-01 1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제는 미국의 이면을 들어봐야한다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2021-10-01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NamGiKim 2021-10-01 12: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관심 있으시면 일독을 권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10-01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10-01 21: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분명 얻어가는 것이 있을 겁니다.
 

내가 책 출판과정을 거치고 있던 8월에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20년 동안 지속되던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탈레반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탈레반의 공세는 올해 6월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군을 궤멸시켰던 역사가 생각나게 만들 정도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전에선 미군사고문단이 50명도 채 안남은 상태였지만, 이번 아프가니스탄은 3,000명 이상의 미군이 있었다는 점이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속도도 매우 빨랐다. 9.11 20주년 전까지 철수를 마치겠다던 바이든의 주장을 보다 더 빨리 실현하게 만들었다. 8월 15일 카불이 함락되면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사실상 장악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8월 30일에 종결됐다. 미국과의 전쟁 20년 혹은 40년 전쟁이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가던 시점에서 서방의 언론과 국내 언론은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보도의 대부분은 탈레반의 잔학성과 잔학행위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들이 전근대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인권을 억압한다는 식의 주장들이 난무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탈레반의 잔학성과 비인간성에 대해 옹호할 생각은 1도 없다. 또한 이들은 반동세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시초는 반소주의 반공주의에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느 서방과 국내의 편향된 언론보도에 분노를 많이 느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 아프간인들의 탈출 뉴스를 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전쟁기간 동안 이웃 파키스탄으로 피신하였던 수십만명의 난민들이 탈레반의 카불 입성후 그들의 고향땅으로 귀국했던 수십만 명의 이야기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탈레반의 잔학성 부분도 마찬가지다. 탈레반의 잔혹행위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전쟁 제1의 원흉인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전쟁이 어떤 배경에서 시작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의해 희생되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런 편향성을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때 국내 언론과 외신언론들은 아주 낱낱이 보여줬다. 즉 이나라의 언론은 이에 대한 심층분석없이 서구의 통신사와 언론들이 제공하는 그들의 시각에서의 아프간 기사를 분별없이 수용하고 실어나르기에 급급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인 여성인권 부분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인권문제는 굳이 탈레반이 아니더라도 심각한 문제였다. 패망한 친미 정부 또한 여성들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았다. 미국이 내세웠던 여성해방이라는 글자 그 자체는 위선이었을 뿐 미국 정부는 아프간 여성들을 해방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탈레반의 반동적인 여성관과는 별개로 미국 통치시기의 아프가니스탄은 인권도 생명도 여성의 권리도 그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하는 소리만 받아적었던 이들이 모습은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은 자칭 좌파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탈레반에 대해 미군을 몰아냈다는 점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에도 온갖 힐난을 보인다. 탈레반이라는 집단의 성격을 긍정적으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왜 다들 하지도 않은 주장을 열심히 비판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도대체 수많은 '진보', '좌파'를 자처하시는 분들은 왜 우리가 종교근본주의 집단을 무조건 지지하고 있다고 오독을 하는걸까...


아마도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 질서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탈레반을 지지하고 있다며 비판하는 '진보', '좌파'들을 보고 있으면 이제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든다. 자칭 좌파들이나 일부 반좌파세력이 생각하는 그런 주장을 밀어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두들겨 패는 취미가 있다면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지만,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인것 같다.
혹시 "(서구식)민주주의가 아니라서 문제다"라고 생각하신다면, 적어도 진보나 좌파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가급적 삼가고, 미국의 비호를 받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수호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당신들이 가진 이념에 더욱 가까운 것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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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안개 (The Fog of War)
소니픽쳐스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주 네이버 영화에서 맥나마라와의 인터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안개의 전쟁(The Fog of War)을 봤다. 다큐멘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자, 포드 자동차 회사의 전 CEO, 하버드 대와 버클리대를 수석으로 나온 천재,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비서이자 베트남 전쟁 계획자, 세계은행 그룹 총재였던 맥나마라의 일생을 인터뷰 형식으로 다룬다.

(안개의 전쟁 포스터)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중동전쟁에 피를 뿌리던 시점에 제작됐다. 다큐멘터리는 맥나마라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다큐멘터리는 그가 가지고 있던 첫 번째 기억부터 현재까지의 기억을 알려주며, 맥나마라의 관점은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맥나마라의 첫 번째 기억은 놀랍게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것이었고, 이후에 덮친 스페인 독감이었다. 그는 미국의 전형적인 인재였다. 명문대를 다니면서, 항상 특출난 두뇌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았으며, 이것을 토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공군 전략 사령부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당시 그는 독일과 일본을 폭격하는 전략을 커티스 르메이와 함께 세웠으며, 이 전략은 미 공군이 독일과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45년 3월에 있던 도쿄폭격은 하루만에 일본 민간인 8만 명에서 10만 명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비슷한 파괴가 일본의 도시 곳곳에서 발생했다. 미공군의 폭격에 의해서 말이다.


(케네디 행정부 시절 케네디와 맥나마라)
그는 포드 회사에 근무하면서 사장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던 그에게 정치를 제안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미국의 존 F. 케네디였다. 맥나마라는 그의 비서 및 국방장관으로 있으면서, 케네디의 대베트남 정책을 세웠다.

그는 천재적인 통계와 철저한 계산을 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했다. 그에 따르면,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확전할 의지가 없었다고 하며, 이는 디엠의 암살과 케네디의 암살 이후 존슨 대통령이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베트남인 340만 명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케네디는 디엠 정권을 지원하다가 미군사고문단을 철수하려 했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그는 나중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했으며,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다. 또한 그는 자서전에서 베트남 전쟁이 전적으로 미국의 오만한 착오와 실책이었음을 솔직하게 밝혔으며, 미국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 및 군사작전으로 340만 명의 베트남인이 학살당했음을 인정했다.
(인터뷰 당시 맥나마라)

나는 맥나마라가 과거를 반성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2003년 명분없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도 반성따위는 전혀없는 부시나 딕 체니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비록 제국주의자였으나, 어쨌든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리고 평화책을 더 강구하는 모습을 말년에 보이게 됐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나는 맥나마라를 단순히 미워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다. 안본사람은 한번 감상하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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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의 열강들을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시켰다영국프랑스독일미국벨기에네덜란드이탈리아러시아 등이 이러한 반열에 있었으며이들의 식민 지배는 전 세계로 확장됐다또한 동양에서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에도막부를 거쳤던 일본이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구 열강 대열에 오르고자 했다이러한 열강들의 식민지 및 시장경쟁이 결국 전쟁으로 일어났는데그것이 바로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서구 열강들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각국의 분쟁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특히나 1871년 제2제국을 선포한 독일이 빌헬름 2세 시대에 들면서 식민지 팽창에 나섰는데이것은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영토만 거대했던 사실상 후진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도 점차 자본주의화를 거치기 시작했다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아시아 일본을 도운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 독일 세력이 확장하고 특히나 발칸반도 지역에서 각국의 대립이 1900년대 들어서 극심해졌다이것은 결국 1910년대 발칸 반도에서 민족주의 의식을 자극했으며,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라예보 사건,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터뜨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황태자비 소피(Sophie)가 현재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청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rvrilo Princip)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이것이 사라예보 사건이었다사라예보 사건 이후 영국과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야심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고이들의 야심이 전쟁으로 폭발했다당시 독일은 프랑스와의 영토분쟁이 있던 알사스 로렌 지역을 차지하고 싶어했고영국은 독일을 견제하여 대영제국의 패권을 지키고 싶어 했으며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반도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세르비아 측으로부터 양보를 의미하는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8일에는 선전포고했다이어서 슬라브계 민족의 후원자인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군을 동원하고그 후 독일 · 영국 · 프랑스 · 터키 등이 각국의 동맹조약에 따라 차례로 전쟁에 뛰어들었으며타이완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도 영일동맹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격돌이었다통일된 독일은 군사력 증강에 힘을 많이 썼었다특히나 군함과 잠수함 생산을 늘렸으며병력도 확장했다당시 독일은 슐리펜 계획이라 하여 단기간에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를 무찌를 군사작전을 계획했다물론 이들의 전략은 프랑스를 무찌르고 러시아의 군대를 무찌른 뒤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참호를 나와 돌격하는 병사들)

 

그러나 전쟁은 예상외로 길어졌다특히나 19세기 산업발전을 통해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군사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이다거기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 굴욕의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는 예상외로 독일군의 공세를 잘 막았고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물량공세를 견뎌야 했다거기다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지원하여 독일을 압박했다이렇게 되면서 전쟁은 참호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방전이 됐다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쟁은 학살극으로 변모했다특히나 기관총의 등장과 폭격탱크 그리고 가스전은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대표적으로 솜 전투만 하더라도 사상자 단위가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을 초과했을 정도였다과거에 후퇴하는 병사들을 추격하는 용도로 사용된 기병들은 기관총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투입된 항공기, 전투기가 첫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거기다 지뢰의 발달과 장갑으로 둘러싸인 탱크의 등장 그리고 공중에서 적군을 공격하는 항공기의 등장도 인명피해를 늘리는 원인 중 하나였다특히나 가스전은 치명적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양측은 독가스를 사용했는데가스를 사용할 때마다 병사들은 방독면을 써야했으며방독면을 쓰지 않는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질식해서 죽거나 부상당했다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전의 잔혹함을 제대로 보여줬고과학기술의 파괴력을 인류에게 알려줬다1차 세계대전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극심하게 속출한 이유에는 전략전술에도 있었다당시 병사들은 적국의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소총을 들고 돌격하는 전략을 사용했는데방어하는 측에선 참호를 파놓고기관총을 난사했다따라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슐리펜 작전이 실패한 이후 전쟁은 장기전으로 가면서 양측 공방전의 반복이었다그러나 1917년 영국 프랑스 연합국 측에서 문제가 생겼다그것은 바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년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했었고구식전술에 의존했기에 사상자가 급증했었다이에 따라 민중들은 러시아 제국에 불만을 품게 됐고혁명을 주도하여 300년간 지속되던 차르 체제를 전복시켰다여기서 더 나아가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사회주의자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귀국하여 10월 혁명을 일으켰고궁극적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그러고 난 이후 레닌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 탱크가 전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1917년부터 러시아가 힘을 못 쓰게 됨에 따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특히나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하고 난 이후에는 대부분의 전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하여 영국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또 다른 보험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보던 미국은 중립주의를 표방했었다그러나 1915년 독일 잠수함이 미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사례가 발생했고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인한 미국 상선의 침몰 횟수는 1917년이 돼서 더 증가했다.

(기관총,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극심한 병력 손실을 야기시킨 무기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와 영토분쟁 중이었는데여기서 독일은 멕시코에게 달콤한 조건을 내걸었다그 내용은 멕시코가 독일을 도울시 19세기 당시 미국이 침략으로 빼앗은 멕시코 땅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근데 이 전보를 영국 측에서 가로채서 미국에게 알렸고이에 분노한 미국은 1917년 독일에게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물론 미국은 병력이 부족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모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이에 따라 실질적인 대규모 병력 투입은 1918년에 이루어졌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서부전선에 총 공세를 가하던 독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부전선에 도착한 대규모의 미군을 상대하게 됐다전쟁을 오랜 기간 치른 독일은 미국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고결국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이로써 4년간 유럽에서 전개됐던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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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1-09-21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때 페르디난트와 소피가 참 안타까웠어요. 이 사건이 없었으면 소피는 인정받을 수 있었을텐데요. 끔찍한 사건들은 많은 이들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또 다른 이들의 욕망을 채우면서 생기는 것 같아요ㅠㅠ

NamGiKim 2021-09-21 14:25   좋아요 1 | URL
일개인으로 보면 안타까운 사건은 분명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