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우크라이나는 정말 국제적으로 큰 화제였다우크라이나 전 대통령인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에 반대하는 시위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까지, 2014 ISIS가 갑자기 세계뉴스에서 화제가 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 사태는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거리였다특히나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푸틴(Putin) 정권이 주된 비판거리가 되었고우크라이나의 반러시위는 민주화 시위 독재정치에 맞선 시위로 옹호됐다그러나 이러한 서방의 시각에 크게 문제를 제시하고자 한 미국의 영화감독이 있다그는 한국에서도 영화 <플래툰(Platoon)>이나 7 4일생(Born On The Forth Of July) 그리고 <JFK>로 유명한 영화감독인 올리버 스톤(Oliver Stone)이다.

 

2013년 제주도 미해군 기지 건설 반대시위에도 참가했던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특히나 그는 러시아의 푸틴 정권과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한 미국의 제국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모습에 비판적이다현재 우리가 많이 이용하는 동영상 사이트 넷플릭스(Netflix)에 들어가 우크라이나를 검색하면유로마이단 사태에 옹호적 스텐스를 취한 윈터 온파이어우크라이나의 자유 투쟁(Winter On Fire: Ukraine's Fight For Freedom)’ 다큐멘터리가 있지만올리버 스톤이 2016년에 제작한 ‘Ukraine On Fire’나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을 인터뷰한 푸틴은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이점부터 현재 대중들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얼마나 제1세계적 즉 친미주의적으로 보고 있는지를 내심 느끼게 된다.

 

올해 3월 나는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 Ukraine On Fire를 유튜브에서 봤다이 1시간 30분짜리의 다큐멘터리는 우크라이나의 근현대사와 2004년 소위 오렌지 혁명’ 그리고 2013년과 2014년의 유로마이단 시위까지를 아주 심층적으로 분석한 명작이다특히나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들이 이 시위에서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이 과정에서 미국이 또 어떻게 개입했는지도 아주 낱낱이 밝혔다그리고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 상당히 합리적인 명분과 이유가 있었다는 것도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개인적으로 이 다큐멘터리에서 소위 우크라이나의 민족영웅으로 알려진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와 그의 조직 OUN이 얼마나 잔혹하고 끔찍한 범죄 집단인지도 아주 상세히 알 수 있었다.

 

Ukraine On Fire를 보고난 이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버 스톤이 2019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Revealing Ukraine의 존재를 알게 됐다사실 이런 명작 다큐멘터리들의 경우 국내에서는 번역하는 사람이 없기에 영어로만 알아들어야 한다는 큰 한계가 있다사실 Ukraine On Fire도 어쩔 수 없이 무자막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서도 막상 감상하기를 다소 주저했던 것 같다하지만 나는 그 이후의 내용이 궁금했기에 이번에 용기를 내서 Ukraine On Fire의 후속작인 Revealing Ukraine을 감상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Revealing Ukraine은 Ukraine On Fire의 후속작이다전작에서는 친러 우크라이나 인사과 특히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초점에 맞추어 다큐멘터리를 전개했던 것과는 달리이번 다큐멘터리는 빅토르 메드베추크(Victor Medvedchuk)와의 인터뷰에 가장 큰 초점을 두고다른 인사들과의 인터뷰 자료를 부차적으로 사용하며 전개했다이 다큐멘터리에서 사실상 주인공과도 같은 빅토르 메드베추크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인이 된 인물이다그의 부모님은 스탈린 시절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1954년에 빅토르 메드베추크를 낳았다그는 1978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키예프 대학을 졸업했고법학학위를 딴 인재였으며아이러니 하게도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소련 공산당에 절대로 입당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가 되자 그는 우크라이나 국회에 진출했고우크라이나 경제정책에도 상당한 공로를 세웠던 인물로 보인다다만 차이가 있다면그는 소련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연방과 친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친러파였고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도 사실상 절친일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었다그의 어린 딸은 푸틴을 God Father(대부)라 불릴 정도로 푸틴이 지극히 아끼는 관계다친소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는 절대로 아니다오히려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을 찬성하는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그는 친러성향의 우크라이나 정치인이다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유로마이단 사건 이후 그는 급부상하는 반러주의 반소주의 그리고 반러주의적 인종차별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탄압과 폭력에 노출된 상태다그의 아내인 옥시나 마르첸코(Oksana Marchenko) 또한 이러한 삶을 견디지 못해서 가족과 같이 아예 우크라이나를 떠날 생각까지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였다메드베추크의 증언에 따르면실제로 반데라를 찬양하는 네오나치 그룹이 자신의 살던 집 중 하나를 불태우고사무실에 쳐들어가 파괴 및 방화를 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소위 유로 마이단으로 탄생한 정권은 이런 짓거리를 한 이들의 주동자를 절대로 처벌하지 않았다이들이 메드베추크에게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분명했다그가 바로 친러성향의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정말 충격적인 진실즉 서방의 언론과 국내의 언론에서 일체 보도되지 않았던 부정할 수 없는 진실들을 잘 정리해서 설명해준다그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마이단 학살(Maidan Massacre)이다이 사건은 유로마이단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인데몇 명이 누가 쏜 총(시위대 측에선 경찰이 쏜 것이라고 주장)에 맞아 죽으면서 문제가 커진 사건이다그러나 이 사건에는 서방과 국내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맥락 무시된 숨겨진 진실이 있다이 사건에서 총을 쏜 주체는 경찰이 아니라는 주장과 더불어반정부 시위대측의 선동 및 주장과는 달리 물러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시위대에게 총을 쏠 것을 단 한번도 명령한 적이 없었고시위대에게 사격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충격적이게도 이 시위를 주도한 세력은 바로 우크라이나의 극우성향의 네오나치(Neo Nazi)들이었다여기서 끔찍한 현장을 고의적으로 계획한 것은 올레크 타니복(Oleg Tyahnybok)이 이끄는 스보보다(Svoboda)와 같은 반유대주의적이고 친나치적 친반데라 성향의 인사들과 그 시위대였다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이들은 애초에 희생자를 만들어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반러시아 쿠데타를 획책했었다는 사실이다즉 마이단 학살이 이들이 고의적으로 계획한 시발점이었던 것이다또한 이 과정에서 이들은 미국의 지원도 전폭적으로 받았다소위 민주주의라는 위선적인 포장을 쓰고세계 언론까지 자신들의 편을 들게 만들었다쉽게 말해 나치주의자가 민주주의자로 포장되는 순간이었다이런 행위를 통해 이 극우주의자들은 이른바 친러성향의 야누코비치를 몰아내고새로운 친서방 반러성향의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해서 2014년에 정권을 잡게 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바로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였다. 2014년에 동부 우크라이나를 기점으로 시작된 돈바스 내전(Donbas Civil War)도 사실상 전쟁을 시작한 주체는 러시아가 아니라 서방의 지원을 받은 포로셴코 정권이었다올리버 스톤은 푸틴과의 인터뷰를 보여주며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침공할 생각과 점령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없다는 사실을 누누이 밝힌다놀랍게도 내전에서 포로셴코가 보낸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아조프 부대와 같은 네오나치 군대가 기계화된 군대를 동원해 포격과 폭격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파괴하고적잖은 인명피해를 만들었다.

 

그럴 때 마다 포로셴코가 동원하는 방법은 참으로 계산적이고 노회하다내전의 모든 인명피해와 파괴를 전부다 푸틴과 러시아의 탓으로 국내 언론과 세계 언론을 통해 전가시키는 것이다여기에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서방이 이를 전적으로 지원해준다내전 기간에 우크라이나측 군함이 크림반도 영해를 침범하여 러시아를 자극했었다물론 이것은 포로셴코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한 행위였다나는 이런 사실에서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이 생각나기까지 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사태는 서방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각색되고 지극히 왜곡된 정보만이 대중들에게 퍼져있다진실을 알려고 하는 이들에게 포로셴코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정부는 친러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었다마치 한국 정치상황에서 뭐만하면 종북이니 중국몽이니 친중이니 하는 극우주의자들이랑 오버랩된다심지어 이 우크라이나 정권은 자신들의 역사적 배경과 정체성마져도 무시하는 행위를 저지른다포로셴코 의회는 러시아어계 주민들이 다수인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제2공식어로 한다는 법령을 폐기했으며러시아어보다 영어를 더 가르치는 쪽으로 추진했다이것은 포로셴코의 우크라이나 정부가 마치 우크라이나 고유의 민족 정체성만을 고집하면서 벌어진 문제다사실 우크라이나는 리투아니아폴란드러시아오스만트루크 등의 민족들이 섞이게 되면서 여러 다민족 국가가 되었는데즉 그러한 역사적인 맥락과 다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이다다큐멘터리 상에서 빅토르 메드베추크는 올리버 스톤에게 이에 대해 아주 명확한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우크라이나 포로셴코 정부는 놀랍게도 자신들의 국가적 이익에 따라 2016년 미국 대선기간 동안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푸틴과 협잡한 인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민주당을 도왔다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오바마 시기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따라서 힐러리 클린턴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에 의거한 것이었다실제로 미국 민주당에는 우크라이나 출신들이 꽤나 관여했고이들이 트럼프와 푸틴을 묶어서 이미지 메이킹을 아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즉 푸틴이 트럼프를 지원하고 돕는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경제에 대해 얘기하겠다.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많이 어려웠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들어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으며잘나갈때는 연 경제 성장률이 11%까지 찍었었다그러나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 경제는 내전과 더불어 급격히 악화되면서다시 마이너스 성장률을 찍었다우크라이나는 소련시기 자원과 군사기술 외에 여러 과학기술이 있던 나라인데 2014년 마이단 이후로는 경제가 악화되면서 그 모든 것들이 다 나락을 찍게 됐다거기다 미국은 우크라이나라는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해나갔으며대표적으로 석탄산업이 그러했다그리고 이런 경제잠식에는 현재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과 그 일가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들의 경제적 이윤을 얻고 있다빅토르 메드베추크는 다큐멘터리에서 어떤식으로 마이단 사건 이후에 경제가 악회되고 미국이 우크라이나 자원 및 경제 분야를 잠식해나가는지를 아주 상세히 언급한다.

 

올리버 스톤의 2016년작 Ukraine On Fire를 감상한 이후로 정말 훌륭한 명작 다큐멘터리를 감상했다특히나 한국 사회와 서방 사회가 외면하거나 숨기는 진실을 이 다큐멘터리가 있는 그대로 알려줘서 정말 고맙다서방에 의해 각색되고 왜곡된 우크라이나 사태의 진실 즉 유로마이단의 쿠데타와 미국의 공작질 그리고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의 실체를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제대로 알 수 있다이것이 바로 다큐 Revealing Ukraine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많은 사람들에게 이 다큐멘터리의 시청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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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 8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945 8 6일에는 히로시마에 투하됐고, 3일 뒤인 8 9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됐다그리고 그로부터 6일 뒤인 8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연합국에게 선언했으며, 9 2일에는 전함 미주리호에서 공식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했다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당시 대본영에 있던 일본 지도부들 대다수는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이 자신들의 항복을 앞당겼다고 주장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사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 태평양 전선에서 전세를 잡은 미국은 일본과의 섬 쟁탈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1945년 2월에 있던 이오지마 전투만을 제외한다면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 숫자는 일본군보다 항상 적게 나왔다.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 3만 명과 일본군 7만 명 그리고 민간인 수만 명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지만이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치르게 된 마지막 전투였다제공권의 경우 이미 연합군이 장악한 상태였기에일본은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 이후 본토가 폭격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45년 3월에 있던 도쿄 공습으로 B-29를 포함한 미국의 항공기들은 일본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었으며최소 8만 명에서 10만 명의 민간인이 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일본은 미국의 공습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항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이로써 일본은 혼자서 연합군에게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으나일본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오키나와 전투는 2달간의 전투 끝에 미국과 일본 양측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면서 끝났고이는 미국이 일본의 본토 상륙작전을 주저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만약 미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계획대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일본 본토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벌이게 된다면최소 50만에서 100만 이상의 미군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측했었다다만 이러한 추측은 소련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 리틀보이)

 

사실 소련은 독소전쟁을 시작하기 2개월 전 이미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일전 참전을 들어주지 않았었다물론 여기에는 히틀러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소련이 연합국에게 제2전선을 열어달라는 강력한 요구의 반영이기도 했다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른 미국의 대통령들에 비해 식민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인물이었고소련과도 제법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그러나 그는 1945년 4월 뇌출혈로 사망했고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해리 트루먼은 젊은 시절 미국 인종주의 단체 KKK에 가입하려 했었던 이력이 있던 인물로 아주 친미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리틀보이를 탑재했던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

 

따라서 트루먼은 나치독일이 패망한 이후 소련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심을 표출했던 인물이었다사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은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Alamogordo)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이 성공했다이로써 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실제로 1945년 7월 말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미국이 강력한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당시 스탈린은 일부러 처음 알게 된 척을 했으나이미 소련의 첩보망을 통해 알고 있었으며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예측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트루먼은 소련을 무찔러야할 적으로 생각했던 인물이었고소련에게 자신들이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했다따라서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고,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에 투하했다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 따르면당시 트루먼은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에 기쁨을 느꼈지만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의 군 원수였던 게오르기 주코프는 절망적인 심정이었다거기다 스탈린과 주코프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본을 패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5년 9월 2일 미국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미국이 소련을 적대시하게 된 시점은 정확히 말해서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항복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할 수 있다물론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미국의 언론들은 소련과 스탈린을 대대적으로 찬양하는 보도를 했지만이러한 보도는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사라졌다나치 독일의 항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련의 군사적 업적을 찬양하던 미국의 한 보수 언론지는 소련을 경계하는 보도를 했고이에 따라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도 소련을 경계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았다즉 이런 맥락 속에서 미국은 초기 대소정책을 수정함에 따라소련에 대한 일종의 위협차원으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원자폭탄 투하로 최소 16만의 일본 민간인이 사망했다.

 

미국의 이러한 대소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이어지게 되는데, 1946년 스폰지밥 시리즈로 유명한 비키니 섬에 최초 수중 핵실험을 한 것도미국이 소련보다 군사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차원이었다즉 냉전시대 당시 양국의 핵실험 경쟁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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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years ago, the arrival of Ngo Dinh Diem in Viet Nam to be the US-puppet ruler of the South; I had just completed 7th grade in a quiet town in upstate New York.

 

66년 전 베트남에 도착한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지도자가 되었다당시 나는 뉴욕 북부의 조용한 마을에서 7학년(당시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을 마쳤다.

 

June, 26, 1954, fifty-four-year-old Ngo Dinh Diem was a Vietnamese aristocrat from a Roman Catholic mandarin family that had dutifully served the French-controlled, imperial court at Hue, in central Viet Nam. For four years before being selected as premier, Diem had resided at Maryknoll Catholic Order headquarters in New York State under the auspices of conservative Cardinal Francis Joseph Spellman.

 

1954년 6월 26일 54살의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중부 후에의 궁전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충실하게 복종했던 중국계 로마 가톨릭교도 가문 출신의 베트남 귀족이었다수상으로 임명되기 4년 전에는 보수주의적인 프란시스 조셉 스펠먼 추기경의 후원으로 뉴욕에 있는 메리크놀 가톨릭 교단 본부에서 거주했었다.

 

France had relinquished legal control of Viet Nam on June 4, 1954, giving Viet Nam its independence. Diem’s arrival on June 26 to begin preparing for his rule was less than a month BEFORE the signing of the Geneva Agreements officially concluding the war. The agreements would stipulate unifying elections be held two years hence, but in the meantime, no introduction of arms or troops to de-stabilize any part of Viet Nam. But in fact, the US was already making sure there would be no elections. Meanwhile, at about the same time in early July that Ngo Dinh Diem formally took office as premier of Viet Nam, Ho Chi Minh renamed the Viet Minh the North Vietnamese People’s Army (NVPA).

 

프랑스는 1954년 6월 4일 베트남에 대한 명시적인 지배를 포기하면서 베트남의 독립을 승인했다디엠이 6월 26일 도착하여 통치준비를 시작한 시점은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기 위한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기 한 달조차 남지 않은 때였다제네바 협정은 2년 이내로 전국적 선거의 실시를 약속하면서동시에 군수물품이나 베트남 각지에 불안요소로 되는 병력의 배치를 금지했다그러나 미국은 총선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이미 품고 있었다한편 응오딘지엠은 7월 초엽으로 접어들 무렵 공식적으로 남베트남 수상에 취임했으며호치민은 베트민을 북베트남 인민군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President Eisenhower welcoming NGO Dinh Diem as the new US puppet ruler of South Viet Nam, 1954. Ho Chi Minh greeting villagers in Viet Nam, 1954.

 

아이젠하워는 1954년 남베트남의 새로운 미제 꼭두각시 지도자로써 응오딘지엠을 환영했다같은 무렵에 호치민은 베트남의 농촌의 인민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125309824515683&id=10001110028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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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호치민(Ho Chi Minh)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하고 난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호치민과 프랑스측은 퐁텐블로 협상(Fontainebleau Agreements)을 통해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나프랑스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베트남에게 드러냄으로써 협상은 결렬됐다그러던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Hai Phong)을 무차별적으로 포격 및 폭격했다이 과정에서 최소 6,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와 더불어 프랑스군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 하노이(Ha Noi)를 점령했다이러자 호치민은 1946년 12월 19<전 인민에게 저항전쟁 수행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하여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맞선 항전을 선포했다프랑스-베트민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퐁텐블로 협상 당시 프랑스에 들렸던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 일설에 따르면 당시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 있던 생활을 떠올리며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전쟁 초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항공기와 탱크 그리고 장갑차 등과 같은 현대화된 전쟁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그에 반해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그리고 공산당이 이끄는 베트민(Viet Minh)은 혁명적 농민군과 이를 지지하는 민중들 그리고 일본군과 미국 0SS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하노이 전투가 프랑스의 점령으로 끝나면서 베트민은 후퇴할 수박에 없었다그러나 베트민은 1945년에 이미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조직으로 성장한 상태였고식민지 지배를 위해 다시 들어온 프랑스군을 환영하는 베트남인들은 소수의 가톨릭과 기득권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끌었던 베트민, 베트민은 빠르게 군대를 양성했고, 1946년 12월 시점에서 정규군 6만 명을 보유했었다.)

 

거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던 1946년 12월 베트민의 군사력은 6만 명이었으며소총을 보유한 군대는 4만 명이나 됐다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이 6만 명의 병력은 숫자 확인이 불가능한 지역의 의용대와 게릴라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라고 책에서 주장했다즉 이 얘기는 베트민이 그 숫자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1947년 1월 중순 프랑스 부대가 중국인 구역의 가장자리에 있는 시장까지 도착하자베트민군은 많은 지역 주민과 더불어 그 지역을 버리고 홍 강(Hong River)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었는데그 전투에서 대략 수백 명의 베트민이 전사하고 프랑스군 100명 정도가 전사했었다이에 따라 호치민과 베트민의 주력부대는 북부 통킹의 근거지인 비엣박(Viet Bac) 지역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항복한 베트민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프랑스는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그것이 바로 레아 작전(Operation Léa, Chiến dịch Việt Bắc)이었다당시 프랑스군이 레아 작전을 개시한 이유 중 하나는 산악과 밀림 지역에서 베트민이 농민과 열성 지지자들 그리고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민중들을 자신들 편으로 규합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레아 작전의 목적은 8,000에 달하는 호치민 정부의 거점인 험난한 산악지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프랑스군은 랑썬과 까오방을 점령한 다음 병력을 남하시키고그러는 한편 다른 부대를 배로 홍강과 로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함으로써베트민의 중심부인 박칸을 공격하는 양면작전을 전개했다.

(레아 작전 전개도)

 

레아 작전은 박칸에 프랑스 공수부대를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됐으며프랑스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곧 베트민 본부를 찾아냈다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고호치민 정부 지배 아래 있던 몇몇 도시를 점령하는 한편 보급과 무기 생산시설을 파괴했다또한 수천 명에 달하는 베트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한 것으로 알려졌다세계게릴라전사를 집필한 로버트 에스프레이(Robert B. Asprey)에 따르면, “마치 독일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서 허풍을 떨었던 것처럼이곳의 프랑스군 지휘관들도 적을 포위한다고 떠들어 댔으며”, 또한 프랑스군은 적군 8,000명을 사살하고 수천 정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고 주장했으나베트민의 군사력을 오랫동안 분산시키는 데도 실패했다.”고 한다한마디로 기고만장 했었다는 것이다.

(비엣 박을 점령하고 나서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프랑스군)

 

초기 기선 제압으로 프랑스군은 호치민 지휘부의 거점과 비엣 박의 마을들을 점령했지만궁극적으로 호치민을 체포하지 못했다참고로 호치민은 공격을 당했을 당시 사령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지만프랑스 공수부대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즉시 탈출했다이것이 프랑스군이 호치민 사령부를 점령하기 하루 전의 일이었고다음날 프랑스군이 사령부를 점령했을 당시엔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에 따르면프랑스군은 오두막의 책상에서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들과 호치민의 서명만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후 며칠 동안 프랑스군은 소탕작전을 전개 하려 했지만실제로 베트민 부대와 직접 맞닥뜨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베트민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프랑스군을 고전하게 만들었다결국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으로 얼마 후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고결국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됐다따라서 레아 작전은 궁극적으로 실패한 작전으로 종결됐다프랑스군의 염원과는 달리 전쟁은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이에 따라 여러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게릴라전에 고전했고교착된 전선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한 가지 외교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그것이 바로 바오다이 해결책(Bao Dai Solution)이었으며이것은 당연히 식민주의의 유산이라는 토대 위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세계게릴라전사 3, R.B 에스프레이편집부일윌서각, 1989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호치민 평전윌리엄 J. 듀이커정영목푸른숲,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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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
울리 에델 감독, 마르티나 게덱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2008년 독일에서 제작한 영화 <바더 마인호프(The Baader Meinhof Complex)>를 봤다소위 68혁명이라고 하는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구의 젊은이들은 기존의 세계질서와 가치관에 저항했다이런 저항은 무장투쟁이라는 급진적인 혹은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도 표출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와 일본의 적군파가 그러했다고 할 수 있으며이런 움직임은 역으로 대중의 반발을 사기도 했었다.

(영화 바더 마인호프 포스터)

 

영화 바더 마인호프는 1960년대와 70년대 서독 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급진적인 좌파 조직 바더 마인호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영화의 시작은 이란의 왕족 샤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일어난 집회부터 다루고 있다이 집회에서 시작된 충돌을 시작으로 68혁명이라는 흐름 속에서 급진적인 좌파 조직 바더 마인호프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성 해방과 과거사 청산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이들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걸고 자신들 나름의 투쟁에 나섰지만투쟁의 형태가 테러를 동반한 전략으로 흐른다.

 

물론 이들에게는 무장투쟁을 행할 때자신들 나름의 기준과 원칙이 있었으며최대한 그것을 준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예를 들면 독일에 있는 몇몇 은행을 습격하여 자금을 마련하는데이것은 과거 스탈린이 은행 강도 시절 부르주아 기관을 공격한다는 명분과 비슷했다서독에 있는 미군기지에 이들은 폭탄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데이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는 닉슨 정부의 제국주의적 만행의 잔혹함을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들은 이스라엘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독일 언론사에 폭탄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데이것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당하는 팔레스타인과의 연대에 의거한 것이었다.

(바더 마인호프의 로고, 로고로 MP5 기관단총을 삽입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들의 무장투쟁 노선이 불필요한 희생을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 누군가는 지적할 것이다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테러리스트 조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까나는 이러한 질문을 영화 <바더 마인호프>가 최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하지 않은 채던졌다고 생각한다나중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는 이들이 영화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접했을 때나는 이 영화가 바더 마인호프 조직을 다면적으로 크게 접근했다는 것을 격렬히 느꼈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했던 독일의 68혁명 세대, 이들은 실제로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이름을 외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이러한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했다이런 과정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폭력이 존재했다특히나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많은 이들이 미국의 폭력성에 큰 분노를 느꼈음을 보여준다. 68운동의 지도자인 한 사람은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과 연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반제국주의 투사인 호치민의 이름을 외친다영화상에서 수많은 독일의 젊은이들이 베트콩의 깃발과 붉은 깃발을 들며이에 동조한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바더 마인호프 일행은 요르단에 가서 팔레스타인 투사들에게 군사훈련을 받는다이 두 가지 국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대미제국주의 문제는 바더 마인호프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무장투쟁에 나섰던 바더 마인호프,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다. 영화 상에서 이들은 주로 자신들이 적으로 선정한 기관을 공격하거나 관련 인사들을 살해했다. 즉 무차별 민간인 살상을 추구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를 단순한 테러조직으로만 보지 않는다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사회주의에 대한 순수한 믿음도 제법 잘 보여준다누군가는 이들을 보고 테러리스트라고 욕하겠으나나는 이들의 순수한 혁명정신도 숭고했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며 멈출 수가 없었다물론 이들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불행이었을 수도 있고불필요한 희생은 당연히 안타깝다그러나 영화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지적하는 무관심’ 그러니까 자유라는 이름하에 당시 팔레스타인과 베트남에서 저질러진 범죄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대다수의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관심을 넘어 옹호로 나가지 않았는가이러한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멈출 수가 없었다.

(68혁명 당시 휩쓴 시위현장, 당시 서구사회의 젊은이들은 80년대 한국 학생운동처럼 격렬히 저항했었다.)

 

영화는 시청자에게 바더 마인호프의 양면을 보여줌으로써이들에 대한 해석을 숙제로 남긴다나는 이 영화가 혁명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지혹은 부정적으로 생각할 지 이 두 갈래에서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은 교훈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즉 영화는 한 가지 판단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나는 이점이 아주 긍정적으로 다가온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그들이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졌던 이상과 생각을 함부로 욕할 수 있을까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오랜만에 정말 훌륭한 영화한편 감상했다안본 사람이 있다면이 영화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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