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에 대해 비하하는 분들은 대한민국에 넘칩니다. 그러나 비하하기 전에 그들이 어떠한 인생을 살았고,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지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이 투쟁현장에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토대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걸 알기에 지난 겨울과 봄 LG트윈타워 연대투쟁에 거의 매주 나갔던 것이고요. 아래의 글은 제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한 글입니다.)
내가 한국의 정치상황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2년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현재는 탄핵 된 대통령인 박근혜 후보가 점차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 걸 보았다. 시대가 이명박 정권 시대였기에 나 또한 그 정권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인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나에게 있어 대대적인 반북의식을 고취시키는 사건이었다. 거기다 KBS에서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방영했던 드라마 전우는 북한을 더더욱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부모님이 친민주당 성향에 가까워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극우적인 견해는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근혜가 인기를 끌게 되자 할아버지(외할아버지다)는 박근혜를 찍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또한 친북주의자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이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이라고 얘기했다. 물론 나 또한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 말에 공감은 하면서도 박정희가 독재를 한 것에 대해선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원에는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2학기 때였다. 당시 국어 선생님은 안철수와 문재인이 힘을 합쳐 박근혜를 이겨야 한다 주장했다. 또한 박정희가 친일파이며 남로당이었고, 폭압적인 통치를 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다. 나 또한 그 선생님의 주장에 점차 공감하게 됐고, 문재인이 당선되길 원했다. 여기서 나의 인식에 있어 제1차적인 인식의 변환이 있었던 것 같다. 알다시피 2012년 대선은 박근혜가 이겼다. 나 또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 시기는 초기부터 시끄러웠다. 당시 고3인생을 시작하던 나는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에 따른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보게 되었고, 그 외에도 박근혜 정권에 대한 안 좋은 목소리가 많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그 시기 국정원에 대한 안 좋은 소문과 이석기 사건 등이 있었다. 일베들의 사악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행위들을 보면서 박근혜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쌓였던 것 같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학원의 국어 선생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은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재수하지 않고 2014년에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새내기가 된 나는 대학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럭저럭 학창생활을 해나갔던 것 같다. 새내기 초기인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지만, 당시의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새내기 생활이 바빴던 것도 있고, 그해 여름에 1달 간 유럽 여행을 갔다 온 이후론 머릿속에 해외여행 생각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2~3학년과 대학교 새내기 생활을 하면서 확실히 대한민국의 체제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 자체는 있었다. 따라서 북유럽의 복지 모델이 좋아 보이긴 했다.
그렇게 해서 2015년을 맞았다. 2015년을 맞은 나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 1945를 정주행하게 됐다. 드라마 서울 1945를 정주행하게 된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지점들을 그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여기서 제2차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해방 이후 남북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헌신을 다했던 몽양 여운형을 좋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김구의 남북협상 이전에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이렇게 해서 2015년 대학교 2학년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대학교 2학년 시절이던 2015년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그게 바로 박근혜 정권의 국정 교과서 사건이었다. 국정 교과서 사건은 나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우리 역사를 자신들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는 걸 본 역사학계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 많은 대학교 사학과가 이에 동참했다. 인서울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 또한 이에 동참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당시 국정교과서 사태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연대서명을 우리학교에서 총 4명밖에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과 단톡방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 이후 서명하는 이들이 늘었다.
또한 국정 교과서 사태 때 난생 처음으로 집회라는 것을 참가해보게 됐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제3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 난생 처음 집회에 나갔을 때, 우연히 거리행진을 하는 우리를 보고 “북한으로 가라”라고 확성기를 통해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어버이연합 트럭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국정 교과서 반대 집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국정 교과서 사태는 제3차적인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사회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 2015년 국정 교과서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다큐멘터리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해서 만들어진 다큐였고, 거기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 시킨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해주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리하여 난 레닌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2학년 2학기를 마친 이후 2016년이 되었다. 2016년 초 나는 학교 친구를 통해 한 단체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민중총궐기와 3.1절 집회 등을 포함하여 이쪽 계열 사람들과 같이 활동했고, 여러 집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 단체는 민중당(현재는 진보당) 성향을 많이 띈 단체였다. 한국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반북의식 때문에 나 또한 이쪽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비판의식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쪽 계열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적을 가지게 되었는데, 처음 입당한 당이 심상정의 정의당이었다. 내가 정의당에 입당한 이유는 분명했다. 반북의식과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적인 환상 때문이었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2016년 당시 나는 레닌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영향으로 난 아르바이트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군복무를 하기 전 러시아 여행을 갔다 올 수 있었다. 러시아 여행을 가기 전 나는 러시아 역사책과 더불어 레닌과 사회주의에 관한 책도 읽었다. 그때 처음 읽은 것이 책갈피에서 출판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공산당 선언>, <국가와 혁명> 그리고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 시리즈>였다. 이런 책들은 내가 레닌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물론 책갈피에서 쓴 책들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소련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인드도 조금은 생겼다. 물론 스탈린을 싫어했었다. 아무튼 2016년 10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레닌 묘를 들어가 보게 된 나는 레닌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러시아에 갔다 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는 앞으로 역사에서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 터졌다. 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 그리고 나는 이런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인 10월 말에 소방서에서 공익 근무를 하게 되었다. 박근혜에 대해 증오와 혐오가 쌓여있던 나는 촛불집회의 첫 시작부터 매주 토요일 마다 참가했다. 집회는 평화로웠다. 전국적으로 천만 이상이 참여하는 이 집회 속에서 나 또한 촛불집회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었다. 비록 3월 10일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 이전의 매주 토요일 집회는 2~3번을 제외하고는 빠지지 않고 민중들과 함께했다.
이런 과정 속에 있던 2017년 1월 우연히 노동자 연대에서 파는 소책자를 사게 되었고, 서명을 한 덕분에 노동자 연대 쪽에서 하는 세미나에도 참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노동자 연대의 입장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토니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론을 처음 접했을 때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것이 바로 제4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 이 영향에 따라 나 또한 스탈린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레온 트로츠키를 좋아하게 되었고, 노동자 연대쪽의 입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마르크스라는 타이틀을 단 것이 참으로 심장으로 와 닿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민주당류의 기류를 완벽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도그마와 북한에 대한 반북의식 그리고 스탈린과 그 외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를 여전히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즉 인식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심지어 나 자신이 페이스 북에다 “나는 사회주의자면서 사회민주주의자 그리고 민족주의자”라는 이상한 말을 진심으로 선언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촛불집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했을 정도로 문재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기에 2017년 5월 대선에서 나는 문재인을 찍었다.
2016년 10월 말부터 시작한 소방서 공익 근무 시절 나는 구급 출동하지 않는 시간에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넘쳐났다. 당시 와이파이가 없고 똥컴이 놓여있는 소방서에서 사무실에서 잘 안가는 시간을 소비하는 방법은 독서를 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나는 정말 많은 책들을 읽었다. 24개월이라는 공익 근무 기간 동안 거의 100권 가까이 사회과학 서적들을 완독했다. 그리고 소방서 공익 근무는 나에게 있어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을 주었다. 왜냐하면 구급 출동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정말 힘든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직면했기에 사무실에서 읽던 사회주의자들의 전기나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 더 와 닿았다. 이렇게 해서 2018년 중반에 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선포했다. 이것이 제5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
2018년은 평창올림픽과 남북공동선언 북미회담 등이 있으면서 시기적으로도 화해모드가 진행되었다. 거기에 힘입어 공익 근무 말기 나는 북한에 대해서도 좀 다르게 보게 되었다. 북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본 책들을 읽는 것과 동시에, 사회주의 원전 및 혁명사 등도 읽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의 저항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책도 읽었다. 이렇게 되면서 사회주의자적인 면모가 보다 내 자신에게 의식적으로 생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 경험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웬만한 반북주의적 인식도 많이 희석되었다.
2018년 10월에 전역한 나는 1달간 미국 여행을 했다. 미국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하워드 진의 묘도 찾아가 보았고, 미국 자본주의의 민낯도 보게 되었다. 이미 사회주의자를 선언했던 터라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서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8년 시기부터 스탈린에 대해서 나름 긍정적인 면모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당시 내가 내리던 스탈린의 평가는 공4 과 6정도였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피델 카스트로나 호치민, 레닌, 마르크스, 엥겔스, 체게바라 등의 인물들을 좋아했다.
아무튼 미국 여행도 마쳤고, 그 다음해인 2019년 나는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3년만에 한 복학이었다. 복학한 나는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인 면모보다 부정적인 면모를 더 많이 봤다. 그래도 스탈린의 긍정적인 면모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싶었다. 그러나 스탈린을 객관적으로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던 2019년 1학기 말에 데이비드 글랜츠가 쓴 <독소전쟁사>라는 책을 완독했다. 이 책은 비록 미국 군사학자가 쓴 책이지만, 독소전쟁 시기 소련군의 업적을 나름 객관적으로 조명한 책이었다. 이 책을 완독한 나는 흥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의 책 <진실이 밝혀지다>도 읽었다. 이 책을 읽은 뒤에 나는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굴라그 수용소가 매우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나는 스탈린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는 나에게 있어 마지막 변화인 제6차적 인식의 변화다.
내가 사회주의자를 스스로 선언한 것은 2018년이었다. 공익 근무 말기 나는 우연히 같은 근무지에서 쌍용차 투쟁을 하다가 공익으로 들어온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상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이쪽의 영향도 받았고, 여러 가지 좋은 조언들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이 분 덕분에 사회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사회주의자가 되기에는 여러 과정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방서 공익 시절의 경험이었다. 그 시기 내가 구급출동을 하면서 보게 된 현실은 사회주의자가 되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 시기 읽은 책들은 내가 사회주의자가 되는 데, 여러 가지 인식의 전환을 주었다.
나는 아직도 사회주의를 추구하기 위해선 더 많은 학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도 이론과 더불어 실천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나 또한 여러 과정속에서 리영희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나로 하여금 단순히 학습 뿐만 아니라 실질적 투쟁에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민중총궐기, 노동절 집회, 퀴어 축제, 반미시위, 국가 보안법 철폐 시위, 이석기 동지 석방 시위등이 바로 이러한 인식적 전환의 영향을 받았기에 나 자신이 참여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지 않은 채 2021년을 맞이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의 내모습을 보면 좌경화의 역사인가? 뭐 아무튼 내가 사회주의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난 내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가고 싶다.
사회주의는 불멸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앞으로도 인류가 성취해야할 과제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