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제안들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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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로비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칼이 들어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작가와 작품을 직접 연결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희곡이건 소설이건 그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신상과 신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는 1967년 인터뷰 대화에서 나의 모든 이야기와 희곡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인물이 하나씩 있는데, 그 인물을 감독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듯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의 직접의 현신이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는 곰브로비치의 희곡 작품 전체를 수록한 희곡집이다. 표제에 명기된 세 편의 작품 외에 희곡 오페레타의 초기 원고로 추정되는 미발표 희곡인 역사-이야기와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콘스탄티 옐렌스키(Kostanty A. Jelenski ;1922~1987)의 평설인 맨발에서 나체까지가 더해져 비톨드 곰브로스키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완결된 작품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해 번역자 정보라의 앵무(鸚鵡)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라는 오감도정립된 의미를 파괴하는 터무니없는 모더니스트의 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일종의 해설은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콘스탄티 옐렌스키(), 비톨드 곰브로비치()


아무튼 몹시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 있으며 병들고 타락한, 더욱이 유치찬란하며 조롱과 위악이 버무려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하는 쾌감은 콘스탄티와 정보라 두 문인의 덕택이다. 이 야릇하고 기이한 희곡을 해독하느라 진이 빠져 정작 작품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글을 먼저 읽고 각 희곡 작품으로 나가는 것은 큰 도움이 되어준다. 두 글에서 곰브로비치의 기질 등 개인사와 시대의 정황, 그의 작품 전반의 시종일관하는 일련의 연계성, 각 작품마다 드러나는 비톨드의 현현, 나아가 나름의 인물 해석은 분명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희곡들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향 잡이가 된다. 물론 하나의 단서로서, 또는 작품 배경이 되는 시대상과 주제라는 커다란 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밖에 해당 작품을 읽는 이의 인상에 따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의 특성상 다종다양할 것이다. 이를테면 희곡 결혼식의 주인공인 프랑스에 주둔하는 폴란드 군인 헨리크는 꿈속에서 자신의 집이 여관으로 변한 것을 본다, 그리곤 어느새 여관은 궁정으로 변모하고 자신은 왕자가 되어 옛 연인 마니아와의 결혼식 거행을 준비한다. 불모성으로 가득한 이 연극에서 헨리크가 주절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대뜸 여느 정치 담론가의 비아냥거리는 영 쓸데없는 목소리의 본질을 들었다. 그 대사는 이렇다. 불쌍한 주정뱅이의 암시는 사실 꽤나 분명해서 그 더럽고 미끈거리는 혓바닥으로 희생자를 낼 수도 있었거든, 하 하 하!”

 

우리 모두 안감에 어린아이가 꿰매져 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언행들이란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혼란스레 얽힌 한 편의 촌극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모든 상황이 꿈과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에 헨리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고, 자기 꿈속이니까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며, 스스로 다음 줄거리를 만들어갈 자유까지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서 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어진 담론 권력을 휘둘러 아무 말 대잔치로 정치여론을 휘젓고는 책임으로부터는 벗어나 부하뇌동하는 우중을 세력으로 악의를 더해가는 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아버지 왕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결혼식을 강행하려는 행위는 실패함에도 이 환상의 후과는 아주 더럽다. 이미 절친이 헨리크 자신의 협박, 아니 위협에 의해 자살하였으니 그 무책임한 세 치의 혓바닥은 정말 추하다. 이 부조리극을 나는 내 의지에 의하여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오직 나의 이해로 삼았다. 텍스트가 이처럼 독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부조리극의 독특한 맛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톨드와 내 의지가 구상하며 읽어가는 텍스트의 의지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톨드는 1904년 폴란드 동남부 산도미의 부유한 귀족 가문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첫 소설 페르디두르케(Ferdydurke)가 발표된 것이 1937년이었으니 서른네 살 늦깎이 데뷔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희곡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발표했다. 이보나는 못생긴 얼굴에다 그녀의 숙모들의 표현에 따르면 몸이 부어오르고, 곰팡내가 나며, 콧물이 흐르고, 두통을 달고 다니는,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가씨다. 왕자 필리프는 이렇게 세상에서 소외된 여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 하찮음 때문에 아무렇게 대해도 무관한 존재로 여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자신이 이 여인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혼 대상자라고 선언한다.

 

극은 해프닝과 말도 되지 않는 진행과정들로 꾸역꾸역 이어진다. 사실 대사들은 천박하고 유치하며 종잡을 수 없는, 맥락도 없는 대화들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유치함 속에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진실의 사유들이 빛나고 있음을 제아무리 눈치 없는 독자도 읽어낼 수 있다.

 

왕자: 너희들을 이 비뚤어진 여왕님(이보나)에게, 이 오만한 빈혈증 환자에게 소개하겠다!

이자: 이 무슨 바보짓이에요! 그 아가씨를 놔두세요! 뒷맛이 안 좋아질 것 같다고요.

왕자: 그럼 언제는 뒷맛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보나를 친구들에게 자신의 신부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방자하고 치졸한 대화들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급기야 궁정에서 이보나를 맞이하는 왕과 왕비의 태도는 이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무반응에 쩔쩔매다 상하가 역전되어 알랑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경악하기도 한다. 이보나는 거의 대부분의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쩌다 맥락 없는 짧은 한 마디를 뱉는 둥 마는 둥 한다. 자신의 면전에서 궁정 귀족들의 행태는 무례하고 비이성에 차있으며 미성숙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그녀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의 전편은 오직 왕과 왕족, 궁정귀족들의 비루하고 천박하고 유치하고 추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폭력적인 모습들의 적나라한 해부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역설적? 혹은 반어적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아마 소설 페르디두르케의 노골적으로 유치한 인물이 어처구니없는 모험과 부조리한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드러나는 신분, 연륜, 지위를 가진 자들의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이 극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비톨드 곰브로비치는 바로 이 미성숙의 유치함 속에서 인간 본연의 솔직함과 고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순수성을 대비시키려 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미성숙함, 엉뚱함, 유치함이 세상의 가장 깊은 진실에 맞닿아 있음을, 아니 얽혀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저속하고 비열한 인간이며, 동시에 연민과 포용과 온화한 관대함을 지닌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한한 모순 덩어리 자체다. 어떤 직면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결혼식과 더불어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또한 마치 비현실, 광기, 특이할 정도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존재하고 있다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은 그야말로 인간 세계의 부조리 그 자체의 표상일 것이다.

 

곰브로비치의 모든 극을 읽다보면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독자의 낯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부조화로 일그러지게 한다. 아마 발견하지 않으려해도 상대적 약자를 향해 조롱과 무례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바로 그 업신여긴 위치로 전락해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시종 날카로운 비수를 이들 사회 엘리트라 자부하는 자들의 목을 겨냥한다. 내겐 희곡 오페레타가 가히 최고 걸작이다. 이 작품은 정말 예리한 칼날이 도처에서 번뜩인다. 아마 미완성 희곡인 오페레타의 초고이지만 이야기의 전개와 등장인물이 다른 역사-이야기의 생생한 날 것의 이야기, 즉 작가가 쓰고자하는 희곡에 부여하려 했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기에 이를 통해 선()지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 무렵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시대배경이 극 속에 드러나지 않으나 1막 대본에 앞서 희곡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희곡을 연극 대본이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읽히는 텍스트로 썼다. 이후 연극 연출자들의 불평에 따라 점점 무대 대본으로 극 형식의 완결미를 갖춘 듯 하지만, 그의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걸 보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이야기로 읽는 것이 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여기선 가면이 가면을 고문하는구나! 모두들 가면을 벗으시오! 보통의 인간이 되시오!”

 

사실 극 자체만으로도 우스꽝스럽다.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망나니이자 난봉꾼인 히말라이 대공이란 자의 아들 샤름 백작이 아가씨 중의 으뜸인 알베르틴카를 유혹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유혹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물론 이는 무수한 시대적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발단의 한 장면이 중요한 데, 샤름은 알베르틴카를 유혹하는 우연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둑을 자신의 개로 이용한다. 백작의 신분이니 자신이 직접 여인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시종을 시켜 먼저 전갈하는 것도 체통에 맞지 않기에 몰래 도둑을 시켜 그녀가 졸 때 그녀의 소지품을 훔쳐 내고, 그러한 도둑을 자신이 잡아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 도둑은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다가가 그녀의 몸을 한동안 더듬는다. 알베르틴카는 꿈결에 그 손의 감각이 가져온 쾌락을 간직한다.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알베르틴카는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아준 행위보다는 꿈결의 감각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샤름은 그녀를 화려한 패션과 장식으로 치장하여 귀족적 만족감을 더하려하지만, 알베르틴카는 오히려 나체를 꿈꾼다. 이것은 오페레타의 초고인 역사-이야기맨발에 가닿는데, 이 헐벗음은 머슴, 하녀, 노동자 등 낮은 사회적 위상으로 꾸밈없는 아름다움이자 무엇이든 가능한 맨(naked) 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높은 사회적 위상인 대공과 그의 처인 공주, 아들 샤름과 귀족 나부랭이 고관대작들의 잔혹함이라는 구세계의 질서와 대립되어 이들의 속물주의와 유치함, 폭력성, 비굴함, 비겁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마 내 기질과 닮은 모습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아마 구세계의 귀족들의 너절함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패션쇼, 아니 가면무도회가 된 히말라이 성이 혁명의 놀음에 의해 폭탄으로 파괴된 이후의 장면은 그야말로 여느 코미디를 능가한다.

 

피오르(패션의 거장): 여기 누구 있소?

대공: 전등입니다.

피오르: 누구?

대공-전등: 전등이요.

피오르: 대공 아닙니까!

대공-전등: 쉬이잇....쉬이잇...., 제발 부탁이니! 조심하세요!

피오르: 웬 바람이 이렇게!

대공-전등: 이건 역사의 바함(바람)입니다.

여기 옆에요, 선생은 못 알아보시나요? 탁자인 척하고 있어요.

피오르: (탁자에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다. 탁자는 사실 네발로 엎드려 화려한 식탁보를 덮고 숨은 공주다) !        - 오페레타3막 중에서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기 코 막힌 프랑스어 발음으로 듣기조차 거북한 말을 하는 귀족계급과 상류 계층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치욕적 모습으로 ~인 척 하는 변장으로 숨기에 바쁘다. 비겁한 엘리트에 대한 조소와 그들의 거대한 희화화(戱畵化)된 소극(笑劇)이자 비극(悲劇)이다. 이것은 역사-이야기의 맨발로 화신한 비톨드의 목소리와 공명하여 울려 퍼진다.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절대로 내 목소리를 빼앗지 못해요.... 나의 벗은 맨발이 내 입을 동반할 거야.....여기, 아래쪽에서. 내 인성을 드러나게 하고 난 맨발로 말할 거야, 맨발로...., 난 세상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모든 종류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는 속물주의 근성의 귀족들, 구세계 질서는 물론 그 어느 것이든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그릇이 없는 형태들에 대해 신랄한 칼을 갖다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브로비치는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에겐 하나의 질서만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이러한 유치 졸렬함과 유아성과 더불어 고귀한 진실, 순수한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함께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고 괴물 같이 표상된다고.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 쪽에 서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으니, 귀족의 그 우아하고 잔혹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이기를 자처한 이 전간기(戰間期:1919~1939) 모더니즘 거장의 글에 산재한 그 반골기질의 후예로서 경의를 보낸다. 반복되는 대사, 무의미한 소리들의 아우성,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분위기 속의 난데없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는 의미의 뒤섞임 속에서 그저 이야기 자체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독자 고유의 의미들이 새록새록 부여될 것이다. 이것이 부조리극의 참 묘미이다. 아마 곰브로비치의 까탈스럽고 이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한 번 빠지면 그의 전작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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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상은 프린스턴, 뮌헨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2, 미래 윤리에 있어서의 토대와 방법의 문제의 몇 절을 기초로 필자의 현실 自省의 생각이 더해져 작성된 것입니다. 선과 당위 등 존재론적 물음을 비롯해 도구의 목적성이 지니는 윤리성 등, 사유를 더 이어가시고자 분은 원()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스 요나스는 전통적 윤리는 대체로 행위자행위피해자가 가까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데 비해, 생명공학, AI, 유전자 편집, 자율 시스템 등 기술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 존재할지도 모르는 인간의 조건, 심지어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나스가 윤리의 시간적 지평을 미래로 확장했습니다. 즉 미래의 인간을 위해 현재의 행위를 규율할 당위에 대해 윤리적 검토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 윤리에 대한 문명 비판의 성격을 지닌 새로운 선도적 윤리의 길을 개척한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저술이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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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힘이 미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만큼 책임의 범위도 미래로 확장되어야 한다."

 

미래 윤리라는 말은 현재라는 사건에 얽매여있는 오늘의 전통적 윤리로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도덕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기에 출현한 윤리의 이름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기술들의 후과(後果)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기술들과 달리 훨씬 장기간에 걸친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 기술은 인간생명 조건의 변형을 통한 종() 자체의 변화, 인간 삶의 의식에 대한 중대한 가치의 변화, 지식 생산과 그 실천적 수행의 기계로의 이전과 의존 등 인간의 본질과 삶의 형태에 대한 근본적 수정 또는 종말을 품고 있다. 이것은 근()미래이거나 먼 미래에 이르는 인류에 대한 위협을 가할 기술적 수행이 인류의 본질을 건드리는 근원(根源)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특히 인류 전체에 대한 인간상()을 위협할 수 있음에도 단지 상업적 이익과 장밋빛 기술의 낭만적 이점만을 내세우며 거침없이 나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대기술 사업에 대한 우려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덕적, 종말론적 위기로 표현(*4.부기 참조)되어 왔기에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의 외침들은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처럼 개인 자신들과는 동떨어진 머나먼 나라의 일이거나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언어이기에 전혀 어떤 공포도 일으키지 않으니, 제아무리 전지구적 규모의 심각한 위협일지언정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미래 윤리를 주창하면서 첫 번째 명령을 도출하는 가운데 공포의 발견술(Die Heuristik der Angst)’ 이라는 인간본성의 취약점을 건드림으로써 하나의 윤리 명령을 도출해낸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개인의 삶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자신의 현재적 삶의 중요 문제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가의 방편으로 소개하고 싶어진 것이다.

 

1. 공포의 발견술: 도덕관념의 발원(發源)

 

요나스의 진술을 대강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을 인간은 어떻게 떠올렸을까? 아마 인간에게 살인의 능력이 있었으며, 또한 이 행위 능력을 통해 타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살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생명의 신성함은 물론 살인 금지 명령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짓이 없었다면 진실의 가치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부자유가 없었다면 자유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침해사실을 가시화할 수 있어야지만 어떤 윤리 명령, 즉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되고, 이런 일을 자신들이 당하지 않고 보호될 수 있기 위해 윤리개념을 발전시킨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위협이 알려지지 않는 한 무엇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이란 것은 무언가에 대해 경악하는가에서 발원(發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보자. 우리는 질병을 보지 않고서는 건강에 대한 찬가를 읊을 수 없으며, 파렴치한 행위를 보지 않고서는 진실을 찬양하는 데 미숙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서 평화를 찬양하는 것도 심히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자기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직접적 체감의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 한 인간은 위협을 감지하는 데 몹시 서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악(,malum)의 인식이 선(,bonum)의 인식보다 무한히 쉽다. 악의 인식은 더 직접적이며 설득력 있고 의견의 차이에 별로 시달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가식적이지 않다. 반면 선은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며 반성하지 않으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이 비로소 노출되어서야 감지한다. 즉 선에 관해서는 대체로 악의 우회로를 통해 확실성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의 윤리 도덕관념은 희망이나 선보다는 공포와 악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공포의 발견술은 우리가 윤리명령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2. 신중성의 도덕적 명령 : 思惟의 의무로서의 도덕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기술들은 훗날의 결과를 추론을 통해서만 인식해야만 하는 고도의 어려움이 있다. 미래의 발명품을 미리 발명할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적 탐구 불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의 미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기술 행위가 지속된다면 우리와 우리들의 직접적 후손은 물론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칠 효과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명령을 할 수 있을까?

 

현대기술의 대사업은 자연적 발전 과정의 수많은 작은 행보들을 소수의 거대한 행보로 응축시킴으로써 천천히 움직이는 자연의 생명(즉 진화의 긴 여정)을 보장하는 이점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조직에 대한 기술적 침해가 가지는 인과적 속도는 마찬가지로 인과적 규모를 야기한다, 그 침해의 파급속도와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것, 혹은 결정적 파국의 초래일 수 있음에도,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여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의도적 계획으로 대체하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진화적 성공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인간에 대한 기술적 침해의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불안과 위험을 산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대기술들이 선전하는 위대한 목표에 이르는 시간의 축소에 비례하여 완전히 회피불가능하고 더 이상 작지도 않은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오류의 불가피성에 관한한 우리가 자연적 진화의 장기성을 인간적 계획 행위의 상대적 단기성으로 대체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들이 매우 급속하게 인간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론적 행위에 의해 근거리 목표를 가지고 그때그때마다 진행되었던 발전들은 스스로 자율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간의 학문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기술적 발전은 자신의 고유한 강제적 역동성을 띠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자동적 동인(動因)으로 인해 기술적 발전은 비환원적일 뿐 아니라, 자체 추진력을 가지고 행위 하는 사람들의 의욕과 계획을 뛰어넘기도 한다. 한 번 시작된 것은 우리에게 행위 법칙을 빼앗아가고, 시작이 만들어 놓은 완성된 사실은 점증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영속성의 법칙이 된다. 이것은 근현대 3세기동안 기술 발전의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들이다. 기술적으로 추진되는 발전의 가속화는 자기 수정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에도 수정은 어려워지며, 그럴 수 있는 자유 또한 극도로 작아진다.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생체기술, 로봇기술 등은 오직 산업의 경제적 합리성의 잣대와 산업국가 간의 헤게모니 쟁탈에 매몰되어 기술 정당화의 의무가 면제된 채 자유주의 관점으로 천명된 무책임성이 마치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듯 행위하고 있다. 세상에 전체 인류가 이처럼 산업기술의 무책임성에 동시에 맡겨진 적이 없다. 인류를 이끌어갈 지도적 표본의 규정 없이 대체 그 어떤 권위가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충분성에 칼을 댈 수 있다는 것일까? 대체 누가 인간의 왜곡과 위협과 변형의 권한을 주었는가?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이익의 전망도 희생의 위험도 이러한 행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마치 작금의 기술과 기술자본은 초월적 권능을 가지기라도 했다는 듯 자신들의 기술론적 연금술의 도가니에 인류를 던져 넣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 윤리의 명령을 또 하나 도출해 낼 수 있다. 인간사회가 우선성을 부여하는(작금의 한국 정부의 AI 우선 정책과 같은 것) 최초의 시작들에 주의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하는 것으로써의 의무와 신중성의 의무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사유(思惟) 의무라는 도덕이다.

 

3. 맺음말: 경험되지 않은 대상의 문제

 

참으로 오늘의 세계에서 그 의미의 힘이 한없이 취약해지고 잊혀져가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의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보존되지 않은 바로 오늘, 이를 구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경험도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상()을 문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악을 위해서 우리는 경험된 악 대신에 표상(表象)된 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악과 공포의 침해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즉 체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비로소 윤리 명령의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상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이렇게 표상을 미리 생각하여 제공하는 것을 미래 윤리가 갖는 예비적 의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표상된 악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내 자신을 위협하는 경험된 악과 같은 자발적 의미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즉 대상에 대한 공포는 그 많은 위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듯, 결코 자신의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홉스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도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리 본성에 주어져 있는 자기보존 욕망에 대한 가장 비자의적이고 억압적인 반동으로써 극단적 공포를 유발한다. 자기에게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 공동 생활의 유대로 결합된 다른 어떤 사람과도 상관이 없는 지구의 운명은 차치하고라도, 미래 인간에 관해 표상된 운명은 자체로부터 우리의 심정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향을 표상된 악의 제작을 통해서라도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수용, 후세대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촉발되도록 스스로 준비하는 태도가 미래 윤리이다. 우리는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도덕적 창발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이 미래에도 과연 존재 당위의 권한이 있는가? 현재가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라는 장기에 발생할 후과에 대해 책임을 왜 가지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도박에 걸어도 되는가? 나는 타인의 이해관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권한을 대체 어디서 획득했는가? 인간의 실존이 내기의 담보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인류가 실존해야할 무조건적 의무라는 것이 과연 존립 가능한 윤리명령인가? 이러한 논증들을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의 순간에 구원의 예측이라는 낙관적 기대보다는 불행의 예측을 더욱 중시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현재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윤리원칙만으로는 이미 접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내포하고 있는 기술들의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세력이 현재에서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지금의 기술 행위들은 그 대상과 규모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며, 그것은 모든 직접적 의도와 무관한 결과에 따르며 전혀 중립적이지도 않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로부터 윤리적 진공 상태에 이른 지금의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가 던지는 물음들에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윤리 명령을 구할 필요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오늘날 소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확대하고 사용을 강제 받고 있는 극단적 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윤리가 없다. 인간을 가장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이러한 힘들에 대해 규율할 수 있는 윤리를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작 장기적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위로만을 쓰다듬으며 책임을 방기하는 가장 악질의 인간들이 살던 시대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종류의 행위 능력을 가진 작금의 기술들은 윤리의 새로운 규칙을 요구한다. 그 새로운 미래 윤리에 대한 사유가 반세기 전에 한 위대한 철학자에 의해 검토되었음에 위안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에 대한 논의가 미약하다.

 

4. 부기(附記) - 더 읽어 볼 현대 기술의 미래 윤리를 체계화한 글들

 

요나스는 현대 기술들은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비해, 닉 보스트롬(Nick Bostrom)Superintelligence: paths, dangers, strategies(2014)에서 인류의 실존적 위험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인류문명의 장기적 잠재력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히 인류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확률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라는 최고명령을 위한 윤리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반면 인간을 더 이상 생물학적 개체로 보지 않고 정보적 존재로 보는 루치아노 플로리디(Luciano Floridi)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The Ethics of Biomedical Big Data에서 인간을 계산 가능한 정보 객체로 본다. 이러한 인물에게는 윤리라는 것이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을 평균적인 통계적, 집단적 형상으로 환원해서 기계적 존재로 변질시킨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역량의 창조(Creating Capabilities: The Human Development Approach)(2013)에서 미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해야 한다.’며 인간의 실존을 중시하지만 요나스와는 달리 단순 생존이 아니라 신체의 온전성, 사고와 상상, 자율적 선택, 정치적 참여와 같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중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미래 윤리는 안전성만이 아니라 인간 능력 보존의 문제를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결국 인간을 능력면에서 존속을 말하는 것과 인간 생명체 자체의 실존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무튼 이 철학자는 모호한 경계선을 주행한다. 그런데 요나스의 장기주의적 윤리를 더욱 밀고나가서 극단적 장기주의 윤리를 내세우는 일군의 학자들도 있는데, 요나스의 책임의 윤리와 다르게 이들은 현재의 몇 십만 명의 희생보다 미래의 수십 억 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극단성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희생시키는 괴이한 윤리이다. 즉 기술 종속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기술 성공주의의 역설적 윤리파괴를 잠재한 위험한 윤리로 보인다. 따라서 맥어스킬이나 보스트롬 같은 장기주의자들과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엄격히 다른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미래 기술과 관련한 윤리 담론이 형성조차 되지못하고 있기에 문제 제기 차원에서 짧은 단상을 해보았다. 아무쪼록 우리에게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단기적 현실과제에 매몰되는 우리들의 실용주의적 정치체(政治体)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많이 늦었지만 윤리학자, 철학자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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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9-01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요나스 저 책 읽었는데, 하두 오래돼서 하나두 기억이 안납니다...ㅜㅜ
저런 내용이었나?? 라는 완전 새로움...^^;;

비의식 2026-09-01 20:14   좋아요 0 | URL
97년도에 처음 국내 번역되었으니, 그때 읽으셨다면 30년이 다 되었으니 기억에서 흐려지는 것이 당연할거예요. 더구나 H.요나스가 인간 본질을 위협하는 현대기술을 이야기 할 때 AI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였으니, 우리들에게 그 어떤 직접적 위험을 상상하기 쉽지 않았으니 현실적 문제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요나스는 인간의 실존 타당성을 깊숙이 다루고 있는데요, 이를 위한 도덕적 명령의 타당성에 대한 깊숙한 철학 고찰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시 책을 펼치시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법 선선한 날씨가 되어 책 읽기 좋은 시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 여름의 더위에 몹시 취약해서 고전했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시간되십시요~, yamoo님 고맙습니다.
 
돈 후안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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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돈 후안; 사랑과 쾌락으로 신의 질서에 맞선 부조리의 영웅인가?

 

돈 후안은 돈키호테, 파우스트만큼이나 신화가 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연구자가 있는가하면, 그것은 억지춘향이고 단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학적, 철학적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전문연구자 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보다는 수도원장이었던 사제이자 희곡작가였던 티르소 데 몰리나가 창조한 이래, 돈 후안은 장르를 넘나들며 거장들에 의해 거듭 태어나 생명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석상에 초대받는 자라고 개작, 재구성하여 공연하였고,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여 돈 후안을 영속시켰다. 푸시킨은 석상의 방문객으로, 페터 한트케는 소설 돈 후안을 써서 생명을 불어넣는데 일조했다.

 


이들을 이토록 매혹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대중의 관음증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문학적 인물의 명성에 올라타기 위해서? 가장 진부하지만 작가 나름의 세계관을 투영하기 좋은 인물이라서? 이도 아니면 티르소가 부여한 돈 후안에게 다른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 후안은 1630년 발표 된 이래 4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의미심장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자신을 어필한다. 몰리에르의 희곡작품을 읽은 이래 티르소의 원작은 처음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이라는 부조리를 말하는 카뮈의 에세이 부조리한 인간돈 후안주의라는 짧은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이 실존주의자는 돈 후안을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세우며, 하늘 자체에 맞선 자기 삶의 게임을 당차게 밀고나간 인물로 치켜세운다. 돈 후안이 카뮈가 해석한 묘사와 같다면 부조리한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티르소가 그려낸 바람둥이 돈 후안이 그런가하는 확인을 위한 읽기를 시작했다.

 

티르소의 전설적인 희곡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1막을 정사를 막 치른 후작부인 이사벨라와 옥타비오 공작으로 가장한 돈 후안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사벨라는 제가 받은 영광이 진실이며 약속과 헌신이며 은총과 수행이며 의지와 우정인가요?”라고 묻고 돈 후안은 그렇소, 내 사랑이라 화답한다. 그리곤 이 행운이 진실인지 확인하겠다며 불을 가져오려 하지만 돈 후안은 가져온다 해도 꺼버리겠다며 불을 밝힐 것을 거부한다. 이사벨라는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나로 말하면, 이름 없는 남자, 이제 소동이 벌어진다.

 

돈 후안은 도망치는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촌마을 처녀 티스베아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티스베아라는 여성은 사랑이라는 독사가 쏘아대는 독을 걱정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이며, 맛있는 과일처럼 내 정조 짚 더미 속에 보존하고, 행여나 깨질세라 유리 덮어 지켜보네.”라며 남성에 대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오늘의 말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스트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돈 후안의 몇 마디에 당신을 지성껏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되겠어요. (...) , 이리 오세요, 저를 따라오시면 사랑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을 나눌 신방이 생긴답니다.” 하고 자신의 정조를 내어준다. 물론 이 장면에 앞서 돈 후안이 왕가의 근친으로 대귀족의 자제라는 그의 시종의 말을 티스베아는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그토록 자부하던 자신의 처녀를 내어주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돈 후안이 너무 잘생기고 멋진 남성이어서? 아니, 돈 후안이 그녀를 대하는 진실성과 뜨거운 열정에 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결정적인 말은 쳐다보기만 해도 멀 것 같은 그대의 아름다운 눈에 대고, 그대의 남편임을 맹세하겠소, 이것이 내 손이고, 내 믿음이오.”

 

이제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 후안이 이 여성에서 저 여성으로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애정 결핍 때문이 아니다. (...) 돈 후안이 타고난 자기 능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은 여성들을 똑 같은 열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다.”  - 카뮈,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이 일반적 호색가나 바람둥이와 다른 점은 여인들을 수집하는, 즉 과거의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열함이 아니라, 다수의 여인을 다만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여인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회까지 모두 소진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그는 평범한 유혹자이고, 유혹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이 점을 늘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사벨라와 티스베아, 두 여인과의 사랑의 장면에서 돈 후안은 카뮈의 주장처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사랑하며, 그 행위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희망도 품지 않는다. 이것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성이라고 카뮈는 부른다. 동의한다. 지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쾌락의 양을 추구하며 최대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 이 양()의 윤리, 세상만사 심오한 의미를 믿지 않는 행위가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 또한 동의한다. 다만 돈 후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에서 오는 공감이지, 작품 속 돈 후안의 행위가 그렇게 해석되는 데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이렇게 읽는 인간도 다 있구나! 라는 감탄이다.

 


마초임을 자부하던 카뮈의 남성 중심의 시선은 돈 후안을 이렇게 신화화 한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왜 자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이 양의 윤리의 물음은 반항, 저항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깊게 배어있다. 그런데, 어둠을 이용하고, 가장하고, 거짓 약속을 하고, 권세를 이용하여 사랑을 탈취하는 것은 자연세계의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갈취이며 약탈이고 착취이지 않은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기망으로 얻는 것은 때문에 결코 반항이 아니다. 반항이 아니기에 부조리를 밀고나가는 부조리한 인간도 아니다. 이에대해 카뮈는 투쟁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정복하고 남김없이 소진하기가 돈 후안의 인식 방법이며, 그는 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삶이라는 게임의 법칙임을 모두 수용한 너그러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론 할 것 같다. 바로 이처럼 세계에 대한 환상 없는 의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환상이 주장하는 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 인간의 지극한 삶의 열정이라고 말이다.

 

이제 그 유명한 석상의 기사(騎士)로 회자되는 에피소드에 이르렀다. 친구 모타 후작이 연모하는 도나 아냐의 편지를 가로채 모타로 가장하여 아냐를 품으려하는 사건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 사건임은 돈 후안의 사후에 말을 전하는 시종 카탈리논에 의해 드러나지만, 이때 의심과 함께 놀라움으로 외치는 딸의 절규에 달려온 아버지 돈 곤살로와 돈 후안의 결투에서 곤살로가 죽는 사건이다. 이 기사의 죽음은 그의 무공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석상으로 세워진다. 여기서 달아난 돈 후안은 가던 길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마을을 통과한다. 신부인 아민타가 너무도 아름답다. 양을 추구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은 신랑을 모욕하고, 대귀족으로서 일종의 초야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이때도 돈 후안은 최선의 열정과 진정을 다해 예비신부인 아민타가 스스로 자신의 순결을 바치도록 한다. 가히 대단한 유혹자이다. 물론 이 여인도 귀족과의 정식 혼례로 인한 부귀를 꿈꾸었을 터이다.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청년을 저울에 올려놓을 것도 없이 이미 저울추는 돈 후안으로 기울었을 터. 여기까지에 이르면 이 희곡은 당대 귀족, 특히 왕의 근친가문인 대귀족들의 성()편력에 대한 견제 없는 권력의 행세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선적이며 폭력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에 가까워진다. 돈 후안을 그럼에도 유한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그런데 반전이다. 이미 죽은 도냐 아나의 아버지인 돈 곤살로의 석상이 유령이 되어 돈 후안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이때 돈 후안의 시종 카탈리논이 말한다. 기다리는 건 지옥 뿐이라고. 지금까지 당신의 여성 편력이 불러 온 벌이라고 말이다. 이에 돈 후안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시큰둥하게 답변한다.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자기 삶의 의미이자 가장 큰 기쁨인 모든 여자를 유혹하는 것, 즉 세상의 질서라는 환상에 저항한 삶을 살아왔는데 신의 부름이라는 죽음은 가소로운 것이라는 얘기이다. , 정말 부조리한 인간 맞다. 자신이 옳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내려진 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운명으로서 죽음이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의 창작자인 사제 티르소가 종단으로부터 세속적 작품을 더는 쓰지 말 것이라는 주문과 함께 처벌을 받은 즈음에 쓰인 작품이기에 종교적 죄를 지은 죄인에게 상징적 신의 권능으로서 거대한 돌덩어리의 손아귀에 죽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작품 내내 전설의 그 허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도발하며 자기만의 건강하고 유쾌하며 너그러운 삶을 견지했던 돈 후안의 삶의 행보와 견주어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그래서 이 마지막 결말은 경멸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이 거대한 석상은 영혼 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고, 돈 후안이 영원히 부정했던 권능의 상징에 불과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돈 후안은 가장 철저하게 반항하는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종단으로부터 벌을 받고 한미한 수도원장으로 밀려난 티르소의 의지도 이러했을 것만 같다고 여겨지고 싶어진다.

 

결국 돈 후안은 사랑과 쾌락을 통해 신의 질서와 권위에 맞서며, 인간 존재의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으로 삶을 개척하는 반항적 존재인가? 라고. 돈 후안의 이야기는 이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인간의 자유와 욕망,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유효한 신화로 남아 끝없는 물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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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당한 목표 없는 경쟁을 물으며;


지금 벌어지는 AI 기업 간의 과열 경쟁은 단지 그들 기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일종의 군비경쟁(arms race) 구조가 이들 산업주체들의 전략적 경쟁논리가 됨으로써, 이를테면 1960년대 미소간의 핵무기 경쟁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경쟁자가 더 큰 모델을 훈련하면 뒤처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어 더 큰 GPU, 더 큰 데이터 센터(Data Center)’가 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서 보면 전혀 최적(最適)이 아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 집합행동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각 행위자는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과는 비효율적인, 즉 현재 투자 규모가 미래 전망에 의해 정당화되는 실제 수익보다 큰, 수요보다 기대가 먼저 움직이는 과다한 낭비이다.

 

<현대의 고전이 된 AI 윤리비평 >


AI의 미래 가치가 이미 현재 가격에 과도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부분의 과잉투자에 대한 비합리성에 대한 우려이지만, 이 불합리성으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전가되는 비용 부담의 문제가 대두된다. 기대되는 미래가치를 가격에 반영하면서 소비자 대중은 그 비효율적 비용을 떠안아야 하고, 더구나 기술 편익을 누리는 사람과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지금의 AI 경쟁은 인류 자원의 측면에서 어떤 조건에서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 마치 AI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한 무조건적 당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나아가 과열 양상의 AI 산업에 그 어떤 면밀하고 세심한 도덕적, 정치적 고려도 없으며,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AI관련 연구나 저술들도 획일적으로 AI의 장밋빛 그림이나 그저 효율적 사용방법에 맞춰져 있고, 더구나 AI에 대한 여하한 문제의 제기도 대세에 낙오된 자의 푸념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된 AI 산업과 관련하여 예견되는 각양의 형태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고, 이러하다보니 그저 AI데이터 센터 건설이나 관련 산업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아예 고려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관련 연구가 멸종하다시피한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AI 연구자들은 AI 기술의 현재가치 평가와 미래 세대 비용의 문제, 향후 50년 뒤에도 지금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문제, 경쟁적 인프라 구축의 경쟁적 투자의 문제, AI의 인류사회에 대한 편익(효용)의 문제, 기술의 가능성이 그 기술의 실행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기술적, 정치적 연구와 논의가 학계와 정책 분야에서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우리는 정말 필요한 만큼의 AI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경쟁 때문에 과잉투자를 하고 있는가?"

 

AI가 필요한가? 라는 이미 떠난 기차의 문제 제기가 아니다.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자원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인류 사회에 대한 책임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AI 개발 목표가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인간의 복지와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기술 자체보다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AI 의 숨겨진 비용을 예리하게 분석한 명저>


대중들은 AI를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와 기술을 역사학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하버드 역사학교수 질 레포어(Jill Lepore, 1966~)인공人工 국가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Artificial State)(2026.8)이라는 조지오웰의 분위기를 흠씬 풍기는 최근 저술에서 AI기술이 어떻게 전 세계 민주주의를 부식시키고 인간 공동체와 자치 능력을 파괴했는지를 설명하면서 AI 국가의 등장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정에서 봉건주의 파시즘, 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체제들도 결국 해체되었듯 AI 체제도 해체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반()AI체제 논의도 있지만, 지금 제기하고자 하는 물음은 ‘AI체제라는 새로운 기술문명이 지금의 가공할 만한 자원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이다. AI와 거대 기술기업들이 국가 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행세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당해 산업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국가 의지라도 되는 양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압도하고, 나아가 잠식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제 물음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미국 내 인디언 부족연합체인 체로키 네이션은 부족 소유지 내 AI 데이터 센터 건설을 금지하고, 부족 영토 내 다른 부지의 개발에 대해서도 사전 협의를 요구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에너지 소비, (用水) 사용, 대기·소음·빛 공해, 문화유산 보호, 지역 사회가 획득 가능한 실질적 이익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그네들의 전통적 숙고의 원칙인 이로쿼이 7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란 것에 사유의 뿌리가 있다. 오늘의 선택이 7세대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정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대략 정책 결정으로부터 200년까지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주 단순하다. 지역 사회가 감당해야하는 물, 전기, 토지에 비해 AI 데이터센터로부터 지역사회가 얻는 효용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막대한 전력 소비, 대량의 냉각수 사용, 소음 및 빛 공해, 생태계 압박,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고용효과, 자원소비 대비 경제 기여가 턱없이 불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물 거버넌스(governance)는 민주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원초적 문제를 야기한다. 물 사용량 증가와 더불어 공공요금 상승, 지역 물 공급 약화 등을 초래한다. 특히 막대한 전력 소비는 급격히 증가할 가능성이 더욱 크며, 이는 지역 전력망 부담, 전기 요금 상승, 발전소 증설 압력으로 연결된다. 실제 이러한 요구가 한국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국가 정책에서도 우선 논의될 정도이다. 또한 데이터센터가 유치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부추기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 경제효과가 해당 지역에 남는가? 로 바뀌어 실제 운영상태에서는 고용효과가 극히 작을 뿐 아니라 수익은 당해 기업의 본사로 집중되어 지역 경제에는 상대적 부담만 가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시적인 자원 효용과 배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데, 지역민이 감수하여야 할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 있어 민주주의 공동체 유대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정보 비공개, 불투명한 협상, 사후 통보 등 절차 적 소외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건설할 것인가가 중대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사용의무, 물 재활용시스템, 지역전력망 투자, 지역사회 이익공유, 환경영향 공개, 주민동의 절차 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사회는 이러한 법제도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적 법규와 체제가 미비한 상태에서 거대기업의 건설행위가 추진되고 있기에 각 지역마다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투자수익자가 비용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과실만 챙기려는 현재의 AI기업들의 체리피킹식 행태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며, 나아가 데이터 주권과 AI정책의 수립에서 단지 적극적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과 전기, 토지와 생태계의 비용은 나 몰라라 하고서는 지역민, 다른 공동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작금의 거대기술 기업들의 행태에 대한 절대 교정(矯正)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이익을 얻는가? 50년 뒤에도 이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이 같은 정치철학적 질문 없이 행위가 앞서는 지금의 AI 국가 정책과 기술기업의 행보는 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AI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자원을 지금과 같이 소비할 만큼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증명하라는 것이다. 실제 오늘날 건설되는 엄청난 수의 AI데이터 센터와 이를 추진하는 거대 기술기업들, 그리고 사회 전체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AI가 인류사적 전환점이 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미국 및 유럽 대다수의 학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의 투자 규모와 자원 투입이 그 목적에 비례하는지는 짙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는 대표저술 책임의 원칙에서 현대기술의 파괴적 힘에 맞서 미래 세대와 자연환경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태학적 책임 윤리를 주장했다.

 

<오늘 맞이하고 있는 기술은 현재의 도덕만을 말하는 전통 윤리로는 대응할 수 없다.

완전히 새로운 미래의 문법을 지닌 AI는 새로운 윤리로서 '책임의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AI가 필요한가? 라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지구(생태)자원이 현재와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이 선행되어야 할 질문도 없이 자본과 개발기술의 사용 논리에 압도된 자본헤게모니 쟁탈이 진행되다보니 윤리와 인류 복지와 정치적 문제를 건너뛰고 진행되는 기이한 양상이 되어버렸다.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막대한 전력은 누구의 자원인가? AI가 창출하는 생산성 증가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환경 비용은 어느 지역과 세대가 부담하는가? 기술 경쟁은 실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경쟁 자체를 위해 계속 확장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기술공학보다는 정치철학, 환경윤리, 경제사에 가까운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을 기술기업이나 기술공학자들로부터 빼앗아 지금이라도 경제학자, 정치학자, 생태학자, 철학자,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사회의 AI체제에 대해 그 근원부터 다시 숙고해야 할 것이다.

 

"AI는 구름(cloud)이 아니라 광산(mine)에서 시작된다"

- Kate Crawford, The Atlas of AI(AI 지도책)

 

AI의 숨겨진 비용부터 다시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학계와 관련 연구자들은 이 중대한 과제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서구 학계는 'AI의 생애 주기에 대한 연구'가 중대하게 수행되고 있다. 사용 자원이 AI 잠재적 이익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무수히 들려온다. 또한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그 정당한 목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목적인지, 테크노크라트의 사회를 통한 권력의 쟁취인지, 자본이라는 재화에 대한 끝없는 탐욕인지, 이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공 국가(Artificial State) 부상의 성급함과 무모함에 대한 독보적 비판서>


이러한 연구 결과물중 AI 윤리비용을 추적하는 케이트 크로포드(Kate Crawford, 1974~)The Atlas of AI(AI 지도책)는 단연 돋보인다. AI 관련 윤리의 많은 연구들이 알고리즘의 공정성 문제에 한정되어 AI 체제 전체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출신의 이 호주인 AI 연구가는 AI를 단순 기술로서가 아니라 자원, 노동, 데이터, 권력이 얽힌 거대 산업체계로 분석한다. 그래서 AI 윤리는 단순한 기업의 자율규제나 착한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정의·노동권·데이터 권리·민주적 통제를 함께 고려하는 정치적 과제가 된다. 특히 크로포드는 AI를 자동화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의 분류와 검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수집된 이미지와 개인정보, 무수한 데이터 산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AI는 혁신 기술이라기보다는 자원 추출과 노동 통제, 데이터 수집, 권력 집중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계의 총아일 뿐이라고 해부하고 있다.

 

오늘날 AI 기업들이 사용하는 '클라우드', '가상공간', '지능' 같은 표현은 마치 AI가 비물질적인 것처럼 들리게 하지만, 크로포드는 그 뒤에 있는 광산, 발전소, 데이터센터, 공급망, 그리고 인간 노동을 보라고 요구한다. 이 점에서 Atlas of AI는 앞서 언급한 AI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에 대한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 문제는 ‘AI가 유용한가가 아니라, 그 유용성을 위해 어느 정도의 토지·전력··희귀광물·인간 노동을 소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크로포드의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데, 기술윤리서이면서도 생태철학과 정치경제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때문에 크로포드의 이 연구 결과물은 기술 비평서이며, 21세기 디지털 산업의 환경사(環境史)’이자 자원사(資源史)’라고까지 말 할 수 있다. AI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라는 이 원색적 질문을 회피해서는 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사회는 장기주의적 관점을 잃어버린 듯하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계와 시민대중에 이르기까지 눈앞의 편리에 어마어마한 인간의 삶을 그저 내버릴 가능성은 없는지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다시 사유해야 한다. 기술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기술적 사실만으로 정치, 윤리, 인류경제를 모른 체하고 질주하고 있는 형세이다. 할 수 있다면 해보자라는 이 무식한 도전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때는 용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런 저급한 사회가 아니다.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반()AI, ()기술주의가 아니다. AI산업이 한국 사회의 국민경제의 중심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기실적과 주가 중심의 경제시스템만으로 체제를 이해하는 정책은 정말 우려스러운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의 이로쿼이 7세대 원칙은 시간의 척도를 현재에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축,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또한 수익자와 비용 부담자의 편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매우 기본적인 물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절차, 즉 이 사회 구성원의 삶과 미래 세대의 삶을 고려하는 윤리적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AI는 우리들의 삶과 연결되어 더욱 아름다운 구상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현대 기술은 과거에 비해 훨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책임의 범위도 그 만큼 길어져야 하는 것이다. 집단행동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우리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간과한 것들을 지금이라도 하나씩 짚어보는 과제에 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제 남의 뒤 만을 따라가는 과거의 후진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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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고백록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제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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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출판시장의 유별난 편식으로 인해 한 작가의 잘 팔리는 소설만 찍어내는 현실에서 많은 아쉬움을 지닌 도스토예프스키의 국내 미출간 작품인 작가 일기의 일부 글을 발췌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췌본으로는 지만지에서 출간한 원작의 5%내외를 발췌한 발췌본이 있는 정도이다.

 

작가일기1873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시민지에 작가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1876년부터는 1인 저널 작가 일기로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8811월 급작스러운 폐기종으로 사망함에 따라 중단될 때까지 발행된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 고백록이라는 표제 아래 작가일기의 글 몇 편이 발췌 수록되어 있고, 또 하나의 발췌본인 지만지 출간의 책에도 원작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그나마 공상과 몽상, 유럽에 대한 공상들등 몇 편이 중복되어 있어 그 실제 분량은 원작에 비해 아주 적은 형편이다. 물론 시공간의 커다란 간극으로 인해 시의에 적절치 못한 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발표작과 관련한 시대배경이나 주제의식과 관계를 맺는 다수의 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상이다.

 

작가일기9편의 글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함께 구성해 도스토에프스키의 고백록이라 엮어낸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메모에서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고 썼던 죄와 벌, 미성년이나, 애초 작가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적 형식을 염두에 두었을 뿐 아니라 수기의 주인공이 자기폭로로서 고백이라 말했듯, 이들 일련의 글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노출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편역자 제윤 박사(모스크바국립대 Ph.D.)의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록된 사회비평, 에세이는 소설과 어울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준다.

 

인간은 비밀이야, 그것을 풀어야만 해. (...) 나는 이 비밀을 공부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지.” - 1839.8.16.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세의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편지처럼 평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밀을 푸는 데 바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이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갈망과 인간의 자유의 인정과 생각, 감정에 몰두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실천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인간을 과연 풀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어린 도스토에프스키의 무모함이 성년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신적 열망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에게서 보이는 사회성을 거세한 유아독존적 자아는 작가 자신의 정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의 작가 일기의 한 편인 역설가라는 글은 전쟁을 주제로 논쟁하기 좋아했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하며 전쟁이 평화보다 낫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 논리는 소설가다운 능청스러운 궤변으로 일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놀이를 통해 의미의 역전을 노리는 것인데, 삶에서 생기를 제거하고 관념화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인 지하인의 역설과 매우 닮아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는 역설가의 수기라는 표현이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 표면적 내용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바로 그 그럴듯함의 뒤틀린 이면이 실제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주장글을 보자, 전쟁이 서로를 죽이러 나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러 나가는 것으로, 형제와 조국을 지키거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숭고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관대한 이념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류는 전쟁을 사랑하는 것이며, 전쟁은 사람들을 활기차고 의기충천하게 하지만 평화는 아량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냉소주의와 무관심, 권태, 악의적 조소들이 나타난다고 명예와 박애, 자기희생이 존경받고 높게 평가되는 전쟁은 인류에게 선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역설이라기보다는 이중 비판 논리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표면적으로 현실을 조롱하면서 그 현실 뒷면의 진실을 생각게 하는 이중 전략이다. 사실 오랜 평화기에 사람들은 타인에 냉담해지고, 사상은 저열화되며, 타락을 생산하고,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가의 지적처럼 평화기는 조잡한 부에 열중케 하고 그것은 인간에게 관대함을 빼앗는 것이 실제이기도 하다. 즉 실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전쟁에 환호하는 그 알량하고 저속한 인간성이라는 본질 또한 비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덕성의 가장 고상한 발현의 유일한 처방은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진정 선량해서가 아니라, 평화기에 보이는 인간의 그 추함이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나마 그 더러운 인간성이 가려지니 전쟁이 낫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성, 축소하면 당대 러시아인들의 특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수기를 쓰는 지하인의 논리 역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지하인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논리를 전개하는데, 거의 모든 인간에게 가장 나은 이득보다 귀중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물음 아래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이야기다. 모든 다른 이득보다 중요하고 유리한, 인간이 모든 법칙을 거슬러 오성, 명예, 평온, 안락, 한마디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거슬러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모든 이득과 삶의 유익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지상의 복락을 인간에게 퍼부어 머리까지 행복에 잠겼다고 해보자. 엄청난 경제적 만족으로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나 먹으며 그래 오늘날로 치면 세계 여행을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족하면, 다시 말해 완전한 최상의 편익에 있다면 인간은 어떤 짓을 할까?

 

인간은 이 완벽한 유토피아가 지겨워져 분명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를 것이란 얘기다.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가장 비경제적인 터무니없는 짓을 바랄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욕망할 필요 없음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자신은 단지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소리가 나는 건반이 아님을 확신하기 위해서 세계를 저주하며 자신은 의지가 있는,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을 살펴보면 역설가의 전쟁 옹호의 논리처럼 이중 비판의 논리임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비판이며, 돈과 자본 중심의 인간 삶이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고의 덕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하인의 수기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념적 옳음이나 가난의 추잡함에서 자유롭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지하로의 유폐라는 것이다. 이 지하는 자기 논리로 획득한 이익의 결말처럼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 욕구가 충만한 곳으로서 자가 충족적 세계인 것이다. 정신 승리하는 루쉰의 아Q와 닮은 이 지하인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한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인생에서 패배할 때 인간은 이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이념은 패배의 잉여물 같은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지혜이기는 하지만 삶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 공상 속 관념에서 출원한 것인 까닭이다.

 

지하인은 책을 읽는다. 그는 책을 통해 체험한 것이 아닌 관념적 공상을 키운다. 의식의 과잉은 사태 분석에 매우 능하지만 실제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는 그야말로 미숙하기 짝이 없다. 이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 하기 위해 압축한다면 아마 인간이란 종은 가장 유리한 이득, 모든 시스템에 물 먹이는 어떠한 범주에도 들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뒤틀린 족속이다! 라는 웅변일 것이다. 과대망상의 지옥 가운데 자기의식을 장사 지내는 이 지하인의 수기가 지금에도 읽힐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본질에 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아홉 편의 작가 일기의 글들에는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현실이나 감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 무성하고, 유별나게도 모든 글에서 러시아인과 그들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식 앞에는 유대인 놈이 등장해서 가장 더러운 비난을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는 무조건의 혐오가 발동하는 어떤 기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사회의 토지, 식량, 산업자본의 현상에 이르면 유대인 놈들이 인민의 피를 마실 것이고, 인민의 방탕과 비하를 섭취할 것이라며 거친 욕설을 동원하여 혐오하고 비난한다. 또한 왕정주의자, 국수적 민족주의와 극한의 보수성을 드러내며, 당시 유럽지향의 지식인들의 행보에 대한 뒤틀린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톨릭에 대한 극단적 비하와 혐오는 유럽선진 문명에 대한 수용과 더해져 유럽+가톨릭은 곧 반()러시아로 폄하되기도 한다.

 

다만, 유럽에 대한 공상들, 동방 문제등 몇 편의 글은 오늘 우리사회에 주름을 안기는 미국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가 유럽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처럼, 우리는 왜 미국의 신임을 쫓아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물음이 필요 할 때다, 지금 미국이 100년 전의 미국을 바라보던 시절처럼 고상한가? 그때처럼 오늘의 우리가 저급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똑같은 질문을 자국 러시아의 엘리트들에게 묻고 있다. “2세기가 지나도록 유럽의 고상함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저급하냐고. 이것은 결국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자기 정화(淨化)를 위한 형상화의 방편으로 상상의 대상을 만들어 고백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한 인간의 집요한 인간 이해의 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하인의 수기는 결정적 비관주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내외적 평화를 위해 자기 마음의 완전한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행보라고 보여 진다. 지하 존재에 대한 비평가들에 답하면서 비극성은 기형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믿음의 소멸, 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직시, 바로 이러한 세계와 그 세계의 한 개체인 자신을 스스로 제물로 삼는 고백의 공간을 통해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눈물겨운 여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사회도 보편적 기준이 거의 폐기 상태에 몰린 듯하고, 가치 또한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기만 한다. 가치도 보편적 규범도 없이 자율이라는 자기 욕망이 난무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느끼던 그네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볼테르의 말이 여간 옳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반복한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에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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