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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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st is silence. (今歸于黙), 이제 남은 것은 침묵뿐.”

 

21세기는 어쩌면 인류의 오랜 진애(塵埃)를 떨어내고, 평상(平常)하고 무심(無心)한 깨달음이 요구되는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한국사회도 이제 묶고 낡아빠져 부패한 것들, 죽음 충동, 짙게 드리웠던 그 어두운 그림자를 떨치고 새로운 도약으로 바야흐로 나아가는 삶의 지대에 이르게 된 것 같다. 대체 그 깨달음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한국인의 모습을 위해, 어떤 결여도 없는 유정(有情)의 여여(如如)함에 내재된 무궁한 잠재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음이라


불교의 대표 공안(公案)집인 벽암록은 승방(僧房)에 좌선하는 선승(禪僧)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고, 그 에너지를 삶으로 전환코자하는 각고(刻苦)의 분투이다. 도올은 그만의 생각으로 풀어 벽암록을 오늘, 이 시대의 사유거리로 현재화했다. 그것은 곧 세계에 대한 인식과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위의 문장은 결투 끝에 죽어가는 햄릿의 마지막 한마디다. 이 말이 뭐 어쨌다는 것인가. 만일 이 말의 속뜻을 헤아린다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또는 희곡작품에 대한 불경(不敬)을 저지르는 것이라도 될까? 도올은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하나의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즉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과제로 제기되는 언행이고 문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내가 실재하고 세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전제한다. 혜능(慧能)은 누구인가. 선종(禪宗)의 씨앗을 뿌린, 하나의 문명에 깨달음이라는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킨 진정한 창시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六祖 혜능(慧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올은 아마 삶의 차별이 해소되는 무차별인 죽음, 열반(涅槃), 삶의 근원적 충동으로서 내면화된 열반에 대한 대오(大悟)와 대각(大覺)을 햄릿으로부터 발견했던 모양이다. 정말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주절거리던 “To be or not to be, this is the question;” 이 햄릿의 실존적 결단의 우유부단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멜로 드라마적 비극의 원천이 아니던가?

 

도올은 접속사 ‘or'을 결단의 모멘트로 해석하는 순간, 한 영혼을 지배하는 독백의 외침을 듣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삶의 현존의 한 순간에 밀어 닥치는 모든 'or'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즉 존재와 비존재가 초월되는 그 무엇으로서의 해탈일 수밖에 없다고. 햄릿 자신이 죽든 말든, 그의 문제의식은 죽느냐 마느냐하는 실존적 결단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의 독백은 죽음과 삶의 선택이 강요되는 독백이 아니라, 죽든 살든 그 선택이 근원적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무의미성에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차별에서 오는 희비(喜悲)의 연속이고, 삶 속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까닭에, 그 근원적 충동으로서의 열반이요, 대각이라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일체감을 보았기 때문일까? 햄릿의 독백이 과연 결단의 망설임에 방황하는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요, 열반인 삶의 완성에 대한 심원한 목소리였을까?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어 萬古長空, 一朝風月.”과 하이쿠 한 구절이 인용되고 있는데, 만고의 변함없는 스페이스(Space), 그 무차별한 시공(時空), 그런가하면 한 아침 바람에 지는 달이 있다. 혼돈과 질서, 무차별과 차별, 영원과 한 순간, 깨달음의 계기는 이 만고장공에 그려지는 일조의 풍월에 있음에 우리의 직관적 총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적막한 옛 못/ 개구리 날라드네. / 물소리 퐁 당”, 적막한 옛 못 위에 던져지는 그 삶의 계기인 퐁 당이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근원인 열반의 의미인 것인가?

 

삶과 죽음의 이중주가 있는 바로 여기, 우리는 열반이 삶의 완성이라 되뇌지만 불현 듯 밀려오는 공포의 아이러니가 분별심을 자아내고, 그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든다. 우리는 삶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햄릿은, 선의 깨달음은 죽음이라는 해탈 그 자체가 해탈되는 곳에 구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었다는 것이다. 열반을 두려워 한 겁쟁이, 이러한 자들이 득시글댈 때 세계는 어둠에 묻힌다. 무장한 계엄군에 맞서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분별을 초월한 해탈의 한 형태를 보았다.

 


선불교의 대표적 공안집인 벽암록에 대한 부분적 해설인 이 책을 비롯하여 무문관과 같은 선문답에 대한 해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을 듣곤 한다. 즉 선()의 굳건한 주장이 언설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이거늘, 그 수시(垂示)에 개념의 실체화를 도모하는 행위는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선지는 모르겠으나, 시중 대부분의 역서(譯書)들이 단순 문자번역이거나 어의의 해설일 뿐, 그 내면적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배면의 깊은 뜻을 언어화하지 못하면 그 번역(해석)의 정당성도 검증할 길이 없다.” 는 도올의 지적처럼, 벽암록이 합리적 언어의 질서 속에 있지 아니하다는 이유만으로 언어의 궁극에 부닥쳐 자기의 깨달은 바를 여여하고 소박하게 진솔한 마음으로 풀어내지 않는다면, 불립문자 뒤에 숨어 기만적 언행을 일삼으며 무식함을 영구히 나르는 무식의 항구화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벽암록의 초합리(超合理)는 비합리(非合理)가 아니다. 선계(禪界)를 지배하는 병폐는 초합리를 합리의 벼랑길에서 밝히지 아니하고 또다시 무지의 기만 속으로 얼버무리고만 있다는 지적에 나는 동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자기 해석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한 방편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내 오류나 무지를 걷어내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말이다.

 

벽암록에는 이와 유사한 논쟁의 수시가 있다. 조주스님과 그의 제자 무리의 한 승려가 나누는 대화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재유언어 시간택? 노승부재명백리, 시여환호석야무? (至道無難, 唯嫌揀擇, 纔有語言, 是揀擇? 老僧不在明白裏, 是汝還護惜也無?)

時有僧問: 기부재명백리, 호석개집마? (旣不在明白裏, 護惜箇什麽?)

州云: 아역부지 (我亦不知.)

僧云: 화상개부지, 위집마각도부재명백리 (和尙旣不知, 爲什麽卻道不在明白裏?)

州云: 문사기득, 예배료퇴 (問事旣得, 禮拜了退)

 

조주는 말한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선택적 판단을 싫어할 뿐이다. 인간의 선택적 판단에 떨어지지 않으면 명명백백한 절대경지에 가게 된다. 그런데 이 늙은이조주는 말이야, 그 명명백백한 절대경지에도 있지 않단 말이야. 그런데 그대들은 아직도 그 절대경지를 구하고 있지 않는가? 이때 한 스님이 일어나 묻는다. 절대경지에도 있지 않다면 구할 대상조차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저희들이 뭘 구하겠습니까? 조주는 말한다. 나도 몰라. 스님께서 나도 몰라 하신다면, 왜 명명백백한 절대경지도 있지 않다고 아는 체 하셨습니까? 다 물었냐? 그럼 이제 절하고 가봐. (본문 번역 인용)

 

이 공안을 어떻게 풀까? 평행선을 달리는 이 공안, 즉 논리와 분별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조주와 논리의 철저성을 추구하고 무분별을 거부하는 문승(問僧)이 있다. 왜 이 공안을 풀어 설명하는 책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이 피 튀기는 논쟁의 문제, 논리적 맥락의 도움을 받는 것이 왜 안 된다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 길을 안내 받는 것이 왜 선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인가? 진리에 대한 준열함을 엿보는 것이 진정 깨달음을 훼손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주의 말뜻은 나는 그걸 바로 알았단 말이야.’ 명백(明白)이란 인간의 상대적 집착이고, 그것은 상대가 모두 멸절되어버린 절대적 경계를 말하는 것임을. 조주는 이 절대적 경계마저 부정했던 것이다. 우리네 삶이란 직관의 총체다. 궁극적으로 무언가 알아들어 먹으려면 스스로 여우굴에 열 번이고 백번이고 들어갔다 나와도 될까말까 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직관 속에서 깨달아야 함이다. 그걸 한마디로 말하라고? 거저 먹으려구, 그렇게 되면 얼마나 손쉽겠나. 오로지 스스로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한국인들은 이제 조금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법치와 정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달았을 터이다. 이 불의한 장애적 사건이 어떤 깨달음의 시간을 주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이 책은 해석을 거부하는 수전 손택을 거부한다. 어찌 주관성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인간 개체는 누구 하나 같지 아니하다. 다만 그러함에도 우리가 지향하는 길을 찾음에 있어 그 방편의 안내는 불가피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문명이 가능했겠는가. 혜능이 비록 의법상전(依法相傳)의 법통을 깨부수고 적통의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써 선을 우뚝 세웠지만, 그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禪師의 가르침을 전승하지 않았던가? 그 전승이 바로 해석이지 아니한가?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가장 숭배하는 언어 呵佛罵組(가불매조)’. 깨달음의 우열을 말하고, 법랍의 서열을 말하고, 큰 스님을 말하고, 조실(祖室)을 말하고, 방장의 권위를 말하는, 본체는 전하려 하지 않고 의발(衣鉢)만을 전하려 하는 편협과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의 언어다. 이것이 우리사회 전반에 흐르는 필히 뒤엎어야 할 근원적 부조리다. 선생의 권위에 머무르며, 제자의 지식을 억압하고, 빼앗으며, 체하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말이다. 소위 갑질이 여전하다. 윤의 사태도 이 갑질의 뿌리인 권위주의에 기인한 일제의 뿌리깊은 잔재일 것이다. 이제 온 분야에서 걷어내야 할 터이다.

 

벽암록1에서 5에 이르는 덕산과 암두, 황벽과 임제의 일화들은 스승과 제자의 배움의 여정에 있어 서로의 기지를 뛰어넘으려 경쟁하는 격렬한 치고받음을, 그 스스럼없는 평등의 현장을 보여준다. 배움과 깨달음의 격정적 현장이 바로 선종의 극성(極盛)기였음은 아마 진정견해(眞正見解), 무사지인(無事之人)의 생생한 증거일 것이다. 제발 뭘 한다고 꾸미고 으스대고 폼 잡지 말라. 그저 평상한대로 있으시오.(但莫造作, 祇是平常.)” 平常無事! 오늘 우리사회, 정치, 교육의 꼬락서니를 보면 납승(衲僧)의 다반사(茶飯事)에도 못 미치는 연놈들로 무성하지 아니한가? 마치 제가 제일 잘난 연놈처럼 구는 모습에서 부패의 냄새가 진동한다. 짐짓 자신을 뽐내려는 의지로 달마에게 如何是聖諦第一義?(최고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오?)”는 설익은 양무제(梁武帝)처럼 말이다.

 

“확연무성(廓然無聖)”, 텅 비었는데 뭐가 성스러워?, 영혼과 신의 합일을 논구할 바탕조차 없는 것일 진데, 뭐 말라빠진 이냐! 라는 말은 경건조차 없을 때, 비로소 절대, 경건이 우뚝 솟게 된다는 얘기다. 정신과 진리의 정체로서 당당히 대결하고, 그러한 존재로서 만날 때, 아마도 이 세상은 조금은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가 될 게다. “절단중류(截斷衆流)”, 사고의 뭇 흐름이 자유로워야 한다. 역순, 종횡, 여탈로부터의 해방, 그래야 비로소 사유의 세계는 비상한다


이제 이 땅을 잠식해 온 썩은 뿌리들을 도려내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힘찬 발돋움을 도모 할 때에 이르렀다. 깨달음이란 저 심오한 열반과 해탈의 지향이 아니다. 삶의 방편에 대한 바른 스스로의 각성,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삶의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다. 심오한 문장 하나, 기발한 문구하나, 신선한 문제 제기 하나 얻어, 선종의 공안에 펼쳐진 이야기 하나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닐 것이다. 책을 통해 자기만의 작은 깨달음 하나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이 책은 삶의 지혜에 대한 또 하나의 올곧은 전승(傳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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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한글개정신판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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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의 구극(究極)적 탐구자세는 물샐 틈 없는 면밀함이고, 이에 기초한 자유로운 신랄함이다. 내 생활이 갑갑하게 느껴지고, 흐트러져 난삽(難澁)함에 휩싸일 때면, 어떤 말끔하게 씻어낼 지혜의 목소리를 갈구하게 된다. 그럴 때면 도올 김용옥선생의 침묵함으로써 침묵하지 아니하는 金剛經講解하는 이 책은 최고의 시(), 평온한 노래소리가 되어준다.

 

금강경은 원시불교의 아주 소박한 수트라(sutra)로써, 소박한 붓다 설법의 기술(記述)이다. 도올선생이 표현하듯 고졸(古拙)하나 참신하기 그지없고, 소략하나 세밀하기 그지없으며, 밋밋하나 심오하기 이를 데 없,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요, 한 편의 이다. 시중의 수많은 번역서들에는 엄청난 현학적 주석과 더불어 현란한 해석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걸어 잠그게 한다. 굳이 그러한 헛소리들을 금강경에 들이 댈 필요가 있을까? 있는 그대로, 문자가 표현하는 그 자체의 의미를 새기며, 암송하면 절로 마음에 새겨질 것을.

 

이 책은 정확히 고려제국대장도감판(高麗帝國大藏都監版)’, 즉 해인사 장경각 고려대장경본을 유일하게 사용한 우리말 금강경(金剛經)이다. 본디 금강경의 한역본(漢譯本)鳩摩羅什(구마라집,kumarajiva), 보뎨류지, 진체, 급다, 현장, 의정이 각기 번역한 六種이 있으며, 한글번역본은 모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역본(譯本)이다. 그런데, 구마라집의 定本이 바로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본임에도 이를 사용하는 한글본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놀라울 일이다.

 

일어판본은 고려대장경을 베껴 만든 대정대장경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근본도 없는 판본들의 번역이 난무하는 것이다. 대정대장경고려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만들다보니 오식(誤植)으로 인한 오자나 탈자가 있다. 이것을 그대로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실상은 가히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한글 판본에 대한 비난은 그치기로 하고, 금강경이 한 인간의 현존을 위무하는 읽기가 되었는가를 말하여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내 반골기질에 맞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일체의 교화(敎化)불교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난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매우 급진적인 토착운동으로서 일종의 반()불교운동이었기에 정서가 일치하였던 것일 게다. 교리도 계행도 필요치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키는 통찰의 설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무릇 모든 종교가 궁구했던 통찰을 말하고 있는 까닭이기에 그 슬기로운 공존, 이념간의 배타성을 아우르는 진리의 목소리로 다가왔던 까닭이기도 하다. 금강경은 아직 대승(大乘)과 소승(小乘)불교로 구분하기 이전의 초기 경전이지만, 소승불교인 부파불교의 차별주의를 냉혹하게 비판하는 대승불교의 대표 경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들어가는 글과 금강경에 이해를 돕는 도올 선생의 목소리가 100쪽에 걸쳐 기술되고 있는데. 대체 대승은 무엇이고, 보살이란 무엇인지, 한국 불교와 기독교의 현재의 실상이 대체 왜 이 상태인지, 금강경의 金剛은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가 이 경전에서 읽게 될 것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현재적 신랄한 비평적 시선은 가히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金剛은 범본(梵本, 고대 인도어), ‘vajra(바즈라,跋折羅)’를 번역한 것으로 원래 의미는 벼락이다. 그리고 그 일차적 의미는 능단(能斷,자른다)으로, 청천벽력처럼 내리치는 지혜를 뜻한다.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벼락은 어디에 내리쳐야 하는 것일까? 바로 내 머리통을 내리쳐야 하기에 나는 이 경전을 읽는 것이다. 각성이 흐려져 흐릿하게 더럽혀져 사리분별을 망각하는 내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벼락은 나의 존재를 둘러싼 대상 세계에 대한 집착의 고리에 내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떨어져, ‘(我相)’無化되고 空化되어 나가 없어지면 대상도 사라지고, 집착이라는 고리도 존재할 자리가 잃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리를 제아무리 끊어봐야 가 여전히 존재하며, 대상이란 실체도 엄존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금강경無我의 경전이다! 나라고 하는 고집스레 자신을 주장하는 환멸의 실체, 그 환상을 떨쳐낸, 홀가분한 무심의 경지가 그리워졌기에 그런 것일 테다. 하찮은 것들이 나를 내세우며 꼴값을 얼마나 떨어대는 세상인가! 그 흉물스러움이란.

 


백담사 오현(五鉉) 큰 스님이 도올 선생에게 들려주던 일화는 금강경경전 본문을 읽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전해준다. 오현스님이 아직은 어린 사미승이었던 시절이니 한국사회가 전란으로 고통스러웠던, 끼니 해결조차 어려웠던 시절의 애기일 것이다. 배고픈 사미승은 밥동냥을 하러 다니곤 했는데, 문둥이들이 밥을 잘 얻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문둥이를 빨리 내치기 위해 사람들은 얼른 찬밥을 내주었던 모양이다. 사미승 오현은 그날부터 문둥이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문둥이들의 거적지에서 함께 껴안고 자고 뒹굴었다.

 

문둥이는 요놈 사미승, 맛좀 봐라! 너 정말 문둥이 될래?” 하고 정말 오현을 문둥이로 만들 생각까지 하였지만, 문득 사미승이 분별심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던 게다. 어느 날, 훌륭한 스님이 될 터이니 성불(成佛)하거라!”하는 작은 쪽지를 하나 남기고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미승 오현은 깨달았다. 아하! 부처님이 문둥이구나!”, 이보다 수월하게 無我를 인식하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이 일화에는 보살(菩薩)과 대승(大乘)과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는 열 마디 여래(如來)의 경전보다 더 깊숙이 마음을 채운다. 한하운 스님의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의 한 구절은 아상(我相)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아름다운 시경을 체득케 한다. 버드나무 밑에서 / 찌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 또 한 개 없다.”, 문둥이는 그렇게 시시각각 내가 떨어져나감을 깨닫는다. 날로날로 아상이 없어져가는 문둥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을. 체험의 종교, 실천의 종교를 생각토록 한다.

 

나는 예배당에도 절간에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십계명을 외우고, 반야심경의 진송을 외우며, 성경을 읽고, 반야경을 읽는다. 나는 신을 섬기지 않으며, 극락이나 천당과 지옥을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나는 나만의 세계를 가지며, 그것을 일구고 수행하려 애쓴다. 나는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며,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 특권의식을 거부한다. 나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적 해결,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 선언하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된, 또한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된,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된 저 무명(無明)의 엉터리 종교인들을 증오한다. 제도와 권력과 돈, 그 우상들을 쫓는 종교 아닌 종교를 신앙한다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나는 이러한 종교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종교적인 인간이 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인류가 그토록 많은 지식을 축적했음에도 여전히 지혜를 지니는데 실패하였음을 지적하였듯, 사랑과 베품, 삶의 도덕성과 규율성, 종교적 삶의 정진, 참음과 용서, 삶의 가치에서의 우선적 덕목을 그렇게 노래하였지만, 결코 지혜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이 세계의 불완전성에 얼마나 혼란스러워 하며, 종말적 위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바로 이 지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기에 나는 또 읽고 외우며, 노래하려 한다. 자기를 비우고 배움을 청하는 2000년 전 인류 최초의 불교 가람인 기원정사(祗圓精舍)의 대지에 오른 쪽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공경하는 장노(長老) 수보리(須菩提)의 아름다운 겸허의 예법에서 비움과 我相의 철폐를 목격한다.

 

, 長老須菩提, 在從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이때, 장노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先賢起請分 第二. 2-1

 

사실 너절하게 그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服其心? (2-3.)” 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마음을 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 애처로운 물음을 하는 수보리(須菩提)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일진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anuttarā samyaksambodhi’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의미한다. 인간의 욕망과의 갈등 구조를 문의(問義)하는 이 문장에 한동안 머물렀다. 욕망의 항복을 위해 반복해서 암송해본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如來者, 無所從來, 亦无所去, 故名如來.”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29-2

(여래는 어디서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디서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우리 아름다운 삶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어찌 창조와 종말을 운운하는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흘러간 대중가요의 그 가사가 존재의 취산(聚散), 합리(合離)를 지극히 생활에 스며있는 지혜로 노래하지 않았던가. 아마 노래를 부르던 그 가수는 환()의 가능성에 지배된 자신을 체득했던 게 틀림없었을 것이다. 철저한 인식론적 반성 위에서 그는 세계를 논구했던 것일 게다.

 

뿌커수어 뿌커쓰이! (不可說, 不可思議)’, 모든 것을 말하려 들지 말라. 말 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우주요 인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침묵하라는 말과 겹친다. 금강경은 이렇게 맺는다. 不取於相, 如如不動.” 상을 취하려 하지 말라, 여여하게, 부동하게(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왜 그러 하냐구?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기 때문이라네.

 

모든 사람들, 인류에게 바쳐지는 헌시(獻詩)금강경을 나는 노래처럼 반복해서 외워본다. 도올 선생이 제시하듯, 간결한 주제의 반복이자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기에, 그 향기 속에 취해 그 위력을 체감하기 위해 거듭 읽듯 노래한다. 유교(儒敎)의 극성을 과시하던 세종이 만년에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여 유교적 합리주의에 노출된 정신의 한계를 위무 받으려 했듯, 아마도 나 또한 번쇄(煩瑣)한 현실에서 잃어버린 현실 감각을 되돌려보려 안간힘을 쓰는 어떤 무의식이 이 책을 반복하여 읽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 자! 인간 구원의 이 혁명적 보살(菩薩)의 운동을 설파하는 금강경은 정말 한 번 온 이 삶에 잘 사는 방편을 헤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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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 갈로티 서문문고 316
레싱 지음, 송전 옮김 / 서문당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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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소년은 오래전 동숭동 연극공연을 보려 맨 앞줄 좌석에 앉았다.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열정적 사랑의 몸짓과 그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충격적 장면만이 오랜 시간  뇌리에 남았었고, 그로부터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낭만적 격정의 소설을 다시 펼쳐든다. 흘러간 세월 탓인지, 이젠 사랑의 열정에 대한 감상(感傷)은 휘발되어 사라지고 남은 이성의 찌꺼기만이 진실처럼 내게 날아든다. 자살한 청년이 마지막에 읽었을 책상 위에 홀로 펼쳐진 책, 에밀리아 갈로티의 상징성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런 탓일 게다. 청년 괴테의, 아니 그의 분신인 소설 속 베르터의 진짜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만이 관심사가 된 것이다. 메마른 이성의 고지식함만이. 아마 은 베르터의 고뇌는 바로 경직된 합리주의적 논리인 이성, 이것이 외면하고 있는 비논리적 감성을 말하려 한 것에 대한 정면으로 배치되는 읽기를 하게 된 것이니, 정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젊은 괴테가 쓴 자전적 삶의 일화에서 출생한 소설이다. 줄거리는 물론 작품의 성격에 대해서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듯한 그런 상식이 되어버린 소설이지만, 피상적인 이해만큼 사랑과 실연의 지독한 열정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지식인 청년 베르터가 온전히 차지할 수 없는 한 여인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자살하고 마는, 18세기말 당대에 베르터 신드롬까지 낳았던 감상적 낭만주의의 격정어린 소설이지만, 이는 서사(敍事)의 표면적 묘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마 지역 무도회에서 마주쳐 한 눈에 사로잡힌 영지 주문관의 딸인 실제의 여성 샤를로테에 대한 짝사랑의 경험은 소설의 서사 축을 형성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맞춤의 골격이었겠지만, 정작 괴테가 소설을 통해 하고자 했던 목소리는 시민계급의 사회적, 직업적 한계에 대한 좌절과 그로인한 무기력이었던 것 같다. 사실 당대 시민계층은 이중적 모순에서 갈팡질팡했던 같다. 귀족계급인 상류사회에 편입을 원하면서도 그 진입여정이 요구하는 굴욕과 모욕의 인내라는 노예성에 대한 반감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한편으론 하층계급에 대한 차별로 인한 이익을 지속하여 누리고자 하는 마음 또한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베르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일은 시민사회의 숙명적인 신분의식이야.

물론 나도 차별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누구 못지않게 알고 있네,

다만 그런 차별이 내게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설의 도입부 역시 청년 작가 괴테의 무도회 기억에 색을 입힌 것이어서, 그의 분신격인 베르터는 첫 눈에 영지 주문관의 딸인 로테에 빠져든다. 하지만 로테와의 친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약혼한 남성이 있는데, 궁정에서 큰 총애를 받는, 궁정관직을 지닌 훌륭한 자질의 청년 알베르트. 여행에서 돌아 온 알베르트가 나타나자 베르터는 로테를 떠나 친구와 어머니가 추천했던 공사(公使) 보좌역에 취임하고, 직업적 성취를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지각없는 천박함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관례만을 고집하는 늙은 공사와 점증하는 갈등으로 직업의 미래에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다.

 

이윽고 공사의 상사인 C백작의 경고와 능력의 가능성에 우회적 칭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베르터는 공사보좌역을 박차고 나오는데, 그 결정적인 사건의 에피소드는 상류계급과 시민계급이 한 자리에 어울릴 수 없다는 엄중한 분리이고, 이는 그 무엇보다 선명한 차별, 직업과 신분적 한계를 특징짓는다. 상류 사회 신사숙녀의 저녁 모임이 있는 C백작의 오찬모임에 초대받은 베르터는 오찬 후에도 떠날 줄 모르고 어슬렁거리다 저녁 만찬을 위해 도착한 F남작, S부인, B양등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미 친교가 있었던 B양 조차 그를 외면한다. 급기야 C백작은 사람들이 자네가 여기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네.”라고 나가줄 것을 요구한다. 훗날 B(귀족으로 추정)으로부터 뒷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귀족 부인들이 당신과 같이 어울리느니 차라리 남편들을 데리고 나가버리겠다고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괴테는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에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호메로스에서 낭만주의 사조의 서사시 오시안으로 이동한다. 오시안이 호메로스를 내 마음속에서 몰아냈어.”, 격정적 영웅의 찬미에서 달빛 아래 선조들의 혼령을 이끌고 가는 거센 폭풍우에 휩싸여 황야를 헤매고 다니는 망령들의 신음소리이고, 고귀하게 전사한 애인의 무덤가의 (...) 애처로운 통곡소리가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것이다. 청년의 마음에 들끓는 여인 로테의 소유를 향한 갈증은 그의 도덕성, 즉 출구없는 억제 속에서 광적 혼란으로 치닫는다. 그 결말은 독서 여부와 무관하게 알려진 대로 권총 자살이다. 그런데 베르터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현장 묘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포도주는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습니다.

사면 책상 위에는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이 문장은 편집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명목 하에 베르터가 남긴 쪽지, 부쳐지지 않은 편지, 그 밖의 정보들로 엮인 베르터가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와 자살현장의 묘사의 말미(末尾)이다. 앞의 문장은 술에 취한 충동적 자살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문장은 그가 자살 직전까지 레싱의 희곡작품인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고 있었음을, 이 작품과 베르터의 죽음과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베르터는 왜 레싱의 작품을 읽었으며, 책의 펼쳐진 곳에는 어떤 장면이 있었을까, 그 장면이 자살을 촉발한 결정적인 것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하게 된 것이다.

 

에밀리아 갈로티는 당대 독일 시민계급의 비정치적 행동양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시선이 주를 이루었던 모양이고, 괴테는 이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품평을 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봉건 영주에게 레싱이 창을 겨눈 것이라고 비평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일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전제군주의 자의적 지배에 대항하여 도덕적으로 항거하는 결정적 발걸음이었다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영주민에게 군림하던 영주 혹은 군주와 빌붙은 귀족 나부랭이들의 횡포가 극심하던 시절이고,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보니 레싱은 자신의 희곡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부던히 애를 썼던 모양이다. 따라서 연극의 배경도 18세기 독일이 아닌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소공국 구아스탈라로 설정하여 자신의 삶에 혹여 미칠지도 모를 불행을 방지하려 했음이다.

 

희곡(5막 42장)의 내용은 에밀리아 갈로티라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한 바람둥이 영주가 이미 결혼이 예정된 에밀리아를 손에 넣기 위한 이중의 기만성을 띤 살해 납치 자작극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 자작극을 기획 연출하는 관방대신 마리넬리를 앞세운 비열하고 교활한 납치극을 벌이고서는 그 후과(後果)가 영주 자신에게 미칠까봐 마리넬리에게 책임을 씌우는 것이고, 권력에 위협당하는 여인이 정조(貞操)를 위해 아버지의 조력을 받아 죽음으로 권력이 자행하려는 치욕에 저항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시민 계급의 각성과 자의식을 일깨우려는 형상화인 것이다.

 

베르터는 아마 에밀리아의 자살에 내재된 도덕적, 정치적 저항의 의미를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결혼이 예정된 여인을 손에 넣기 위한 영주의 무모한 술책의 끝, 그 좌절이라는 비극성을 보았던 것일까? 청년 베르터는 시민계급의 직업적 성취란 귀족들이 독차지한 고급 관료가 아닌 하급 관리나 기껏해야 공사나 추밀 참사관이 한계인 것을 알았고, 결코 상류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깊은 무기력에 빠져들었으며, 이를 타개하는 방편이 한 여인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의 대상조차 궁정 관료인 남편을 둔 유부녀였으니, 이것은 자신의 현존이 지닌 한계에 대한 크나큰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시안의 서사시 속, 무덤가에서 들려오는 애인의 통곡 소리를 듣는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 되었을 것 같다. 250여년이 지난 오늘이라고 인간사회의 계급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명칭이 바뀌었을 뿐. 어쩌면 베르터의 차별에 대한 이중적 시선에 그 답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진 차별의 관점 말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말이 요즈음 유행하듯, 자기 이익과 자기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 갖는 그 수직을 향한 환상적 욕구, 이 욕구를 이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는 계층의 조작이 지속 가능할 때 아마 화창한 미래를 꿈꾸었을 청년들의 좌절은 참담함이요, 자기 경멸의 역겨움일 것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격정적 사랑에 휩싸인 청년의 차지할 수 없는 연인을 향한 내적 갈등이란 이야기에 당대 신분사회의 한계와 그 저항을 은닉한 꾀바르고 은밀한, 도래할 시민혁명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싱과 괴테, 동시대를 살던 두 문학 거인의 작품은 어리석은 세상의 눈을 속이고 진실을 외치고자 했던 목소리들이다. 시간의 흐름은 하나의 텍스트에 다른 관점을 들이댈 수 있을 만큼 무상하게 변하는 것인가 보다. 불가피한 운명에 순응하지 마라!” 불가피한 것이란 없다. 아마 이 역설의 목소리가 이들의 외침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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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우리 본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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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는 현란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오직 진리를 찾고 싶어 한 절박한 욕구를 위해”, 또한 대중의 행복과는 대조적인 소수 계급의 교만과 권력을 혐오한”, “인간성의 유익을 위해 이득과 명성을 포기하고, 도덕적 용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대의 비판가로서 윌리엄 해즐릿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글들이다. 1830918, 그의 아들과 찰스 램 단 두 사람만이 지킨 임종 후, 세인트 앤 교회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날선 것이었는지 영국 당대 귀족사회와 이에 기생하는 무리들은 고인(故人)의 묘지를 무참히 파괴하였다. 상층의 지배계급들에게 그는 가히 화끈거리는 상처였으며, 그의 영향력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파괴된 채 근 200년의 풍파를 거친 2003년이 되어서야 노동당 당수 마이틀 풋의 주도하에 가디언의 모금으로 복구되었으며, 위의 인용문장은 묘비명의 일부 문장으로서 그 기념비에 새겨졌다. 해즐릿의 글은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이은 두 번째의 마주함이다. 진리와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애(人間愛)의 지지 않는 옹호자로서의 그의 격정적인 글 속에서 한 인간에 대한 고귀한 열정과 경애의 마음을 갖게 된다. 해즐릿의 신랄하면서 결코 가볍지 않은 숙고된 통찰의 예리한 비판적 시선들은 이후 수많은 철학과 문학, 사회비평의 귀중한 아카이브로서 역할을 했을 것임을 나는 19세기 이후의 문장들에서 확인한다.

 

이권과 허영심이 결합한 수구의 전형인 에드먼드 버크와 이러한 무리들의 권력지향성과 몰염치한 가면, 부패한 매춘(賣春) 경향성의 근저를 파헤쳐 그 더러움의 심연을 지적하거나, 소위 패션이라는 유행이 지닌 태생적 자기모순의 현상을 알아 본 것도 아마도 그가 처음일 것이다. 고상함을 가장하는 태도가 많은 곳에 반드시 두 배로 많은 상스러움이 있다.(110)”는 이 간결한 문장은 손에 넣기 힘든 신속함과 변화무상에 공을 들여 허세를 유지하는 패션의 본질에 대한 그의 심안(審眼)을 반영한다. 해즐릿의 글은 이렇게 폐부를 깊숙이 찔러대는 냉혹한 비판적 성찰만이 아니라 그에 이르는 여정의 글들에는 시적 향취와 여느 소박한 소시민의 애틋한 경험들이 또한 놓여있다.

 

이러한 시정(詩情)은 표제인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단연 두드러지는데, 우리는 친숙해서 하찮아진 지금 여기에서 숨 쉬며 저 너머 멀리 펼쳐져 흐릿한 시야에서 사라지는 풍경에 욕망과 고상한 존재 양식을 투사하곤 한다. 그리곤 그 먼 것에 비현실적 상상의 색을 입히며, 발견하고 싶은 희망과 소원을 품는다. 그는 말한다. 지평선의 아련한 능선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는 인간을. 윌리엄 워즈워스와 윌리엄 콜린스의 시구가 어우러져 발산되는 풍부한 상상의 이미지들인 우리네 착각, 그 자체의 고귀함과 신비로움에 감사케 한다.

 

나는 기억 상자를 열어 기억의 포로들을 끌어낸다.” -61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거닐던 월위스 몽펠리에의 차()농원의 추억, 해즐릿은 이 빛나고 생생하고 육감적이며 섬세한, 슬픔을 생각과 격정의 보존액에 계속 담금질되어 변형된 당의(糖衣)가 씌워지고 축제 장식이 장식된 듯한 지나간 멀고 먼 기억을 더듬는다. 그는 이것이 상상 속에 색을 입힌 착각임을 모르지 않는다. 소망이 투영된 흔적임을. 그렇게 아득한 것은 좋아 보인다.

 

어쩌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해즐릿의 이 산문을 읽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냄새와 맛과 소리가 시각보다 더 원형적이어서 반복에 따른 마모가 덜한 것이라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마들렌의 그 맛과 향기에서 연원하는 기억의 향연 말이다. 해즐릿은 연인의 목소리, 청각에 각인된 고유한 특성을 세익스피어의 문장을 통해 소리가 주는 그 은은한 마법을 들려준다. 밤이 되면 연인의 혀는 어찌나 달콤한 음악소리 같은지. 로미오와 줄리엣》Ⅱ..207”, 상상의 자극을 받은 우리의 귀로 들려온 목소리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천국을 항해한다.

 

~, 시적 애상 넘치는 이 에세이는 곧이어 시대에 대한 격정으로 전환되어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엄혹한 통찰, 실체 자체를 마치 꿰뚫어내기라 하듯 혜안 번뜩이는 글들이 펼쳐진다.

 

편견과 악의는 언제나 결점을 실제보다 크게 과장한다.

우리는 무지만으로도 그 사람들을 괴물이나 유령으로 만든다.” - 74

 

멀어서 흐릿한 것, 그래서 가까이 접촉하지 못해 알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매혹적인 추억이나 소망의 투영인 것만은 아니다. 소문이나 추측만으로 특정한 결점을 과장하여 비현실적 관념을 씌우는 짓들이 얼마나 난무하고 있는가! 알지도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적의를 품고, 관념상의 증오와 무자비한 혐오를 들씌워 대상화하는 부당한 적의(敵意) 말이다. 당파적 적개심에 휩싸여 인간과 세계를 잔혹하게 갈라치기하는 그 던적스러움 또한 눈에 멀리 보이는 것에 입혀지는 부당한 상상이며 착각이다. 우리들은 관념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결함으로 가득한 동물이기도 하다. 시인 존 세필드가 그의 詩論에서 세상에 결함이 없는 괴물 같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쓴 이유일 것이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 148쪽에서

 

오늘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써진 것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아니 그 정치적 시각이 지닌 보편성의 통찰이야말로 현재를 문제적으로 성찰토록 돕는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라는 글이 그것인데,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는 책인 프랑스 혁명 고찰,(1792)을 쓴 에드먼드 버크를 시작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비열함, 그리고 압제하고 압제당하는 사회체제를 정당화하는 그 부패한 시선들의 민낯을 여지없이 발가벗긴다.

 

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신문인 모닝 클로니클의 정치기자 생활은 인간 심리와 세상사의 이치를 그 스스로 납득하는 사유의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였을 터이다. 이에 터 잡은 준엄한 지성은 독재자 하나에 수없이 많은 준비된 노예들이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독재자를 사랑한다. (...) 필연적으로 불행과 퇴보가 일반인들에게 너무 널리 만연하고 깊게 침투한다.”, 독재자인 군주와 그에 빌붙은 기회주의자, 아첨꾼들의 노예근성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들 비열한 노예들은 가장 이상적 아첨꾼이며, 언제나 가장 확고한 독재의 토대라는 것이다. 주인 마차 꽁무니에 올라타 민중을 개와 돼지라고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것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성이 마비된 인간들, 자발적 복종의 노예근성에 찌든 저 비루한 인간무리들을 보라!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저 열등함과 무지로 버무려진 인간 군상들을. 경배가 변태적일수록 욕망 어린 아집에 만족해하는당대 귀족계급들과 그 기생의 무리들을 지켜보면서 일구어낸 생생한 증언일 것이다.

 

지금 독재를 획책하던 내란 범 윤의 지지를 떠들며 성조기를 흔드는 사대주의, 독재와 친일을 찬양하는 저 노예근성의 무리들은 해즐릿이 통찰한 바로 200년 전 영국의 그 흉측스러운 폭력의 무리들 바로 그것일 것이다. 나는 해즐릿의 권력의 본성에 대한 이 비범한 에세이에서 훗날 윌리엄 골딩이 쓴 파리 대왕에서 그려내고 있는 파괴적이고 무력에 기승한 권력과 공포와 짐승의 다른 이름인 종교의 묘사를 발견한다.

 

이 에세이집에는 이 밖에도 근대 형법의 교범으로 일컬어지는 베카리아의 죄와 벌 논고(1764)에서 주장한 사형제도 비난에 대한 반박의 글을 비롯하여 삶의 애착과 죽음에 대한 불쾌감의 상관성에 대한 논의, 허영과 배타적 자기본위의 산물로서 패션에 대한 비판, 성공의 조건에 대한 실제성 존중이라는 독특한 논의 등 인간애와 일반 민중의 상식이라는 눈높이에서 바라본 당위적이어야 할 도덕의 논의도 있다. 사실 어느 글 하나, 어느 문장 하나 소홀히 읽어나갈 것이 없는 빛나는 지혜의 시선으로 가득하다.

 

특히, 옮긴이의 글은 해즐릿의 소설 리베르 아모리스의 일부 소개와 함께 산문 런던의 고독으로 갈음되고 있는데, 그것은 늘 그 자리를 지키는 등대와 같은 사랑의 이야기이며, 지배계급의 기만과 악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생애 내내 고통을 감수하여야만 했던 인류의 용기인 지성이 대도시 런던에서 얼마나 소외의 고독을 느껴야 했는지에 대한 은유의 기록으로 읽히기도 한다.

 

밖에는 박애의 이슬이 땅을 적시는데 그의 마음은

기드온의 양털 한 뭉치처럼 말라 있을 것이다.” - 190

 

돈과 권력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파렴치한 도시에서, 외롭게 귀족들과 그 노예들 무리의 부조리와 부당성과 기만과 이기심과 거짓을, 그리고 탐욕스러움과 무지와 은밀한 폭력과 열등함을 보았으며, 그를 주저하지 않고 비판했던 용기있는 지식인의 고독과 쓸쓸한 죽음을 본다. 비록 진정한 친구 찰스 램과 아들 두 사람에 불과한 임종이었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라는 유언은 시공을 초월한 오늘의 독자인 나에게 겸허와 존경의 마음을, 어떤 위로의 감정을 지니게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직 접하지 못한 그의 문장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갖게 된다. 혹여 그의 소설 리베르 아모리스의 출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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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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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8 0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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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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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꾸준히 독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를 생각게 되는데, 아마 인간의 두 대립하는 성향을 마치 시뮬레이션 하듯고립된 섬이라는 실험 공간에서 극명하게 관망케 함으로써, 적나라하게 인간 본성이라는 것을 직관적 체험의 장으로 이끌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은 반성적 성찰 대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감성,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방편 대 눈앞의 편익의 매몰, 합리적 논리 위에 선 민주주의 대 비합리적 권위주의의 폭력성의 대결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이야기의 전개 때문일 것이다.

 


윌리엄 골딩은 시뮬레이션을 위해 한 장소에 모여 자신들의 생존과 구조를 위한 어떤 결정을 해야 하고, 구성원 각자의 임무와 능력을 조화하고 수행할 작업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할 리더의 선출 장면을 펼친다. 이를 위해서는 섬에 흩어져 인원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을 모아야 하고, 그 수단이 랠프라는 소년이 발견한 소라. 소라를 부는 것은 무리 전체를 공론장에 모으는 기능을 가지며, 또한 소라를 지님으로써 발언권을 가지게 된다. 즉 무리 각자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다수의 결정으로 특정 의견을 결정하는 일견 민주주의적 질서를 상징하는 도구이다. 최초의 모임에서 랠프가 대장으로 선출되고, 대장이 되고 싶어 했던 잭은 자신의 본래 무리를 이끄는 사냥대의 리더가 된다. 이로써 원시적이지만 무리의 기초적 질서가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의기투합은 이내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데, 구조를 위한 방편으로 산 정상에 불을 피워 혹시 지나가던 배로부터 구조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그들의 생존에 중대한 일이다. 인원을 나누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불씨를 지키는 임무가 주어진다. 또한 밤과 알지 못하는 두려움과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한 오두막의 축조가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두막 짓기에 관심이 없으며, 수영이나 놀이에 여념이 없으며, 봉화의 불씨는 꺼지고, 당번은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즐거움에만 열중한다. 배가 나타났지만 봉화는 불타오르지 않으며, 의무를 진 아이들은 멧돼지 사냥 놀이에 빠졌다. 희박한 구조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무리는 그것을 놓쳤다.

 

여기서 작가는 두 측면을 제시하려 하는 듯한데, 반성적 성찰없는 행위가 가져오는 직관적, 즉흥성으로 인한 생존행위의 방해가 그 하나이고, 눈앞의 편의라는 단기적 이익의 향유에 현혹되어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목표가 사라지고 마는 자기파멸적 몽매성이 또 하나일 것이다. 무리의 선출된 랠프와 사냥꾼 리더 잭은 첨예한 적대감으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의견들은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배가 이 섬 가까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산꼭대기에 연기를 피워야 해. 봉화를 올려야 한다구!”  -56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닷가에 오두막을 짓는 거였어.....해야 할 일을 밀쳐두고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조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니?”  -69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있어. 그가 뭐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냥 몰려가고...”  -69

 

생각하지 않는 것, 해야 할 일을 밀쳐두고 자기 쾌락에 열중함으로써 무리의 구조 기회를 날려버린 것, 다시 말해 개인의 편익만을 우선시 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파멸성이다. 이 최초의 갈등으로 무리는 분리되기 시작하고, 곧 이어 끔찍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 갈등과 적대감이 쉽사리 폭력으로 전이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숱하게 접했던 실상이어서 사실 그리 새로운 식견이랄 수도 없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작가가 표출하고 싶어했던 것은 두 소년의 죽음의 의미와 아주 쉽사리 잔인함과 폭력으로 전이하는 인간과 무리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종교적 상념이다.

 

두 소년, 사이먼과 새끼돼지(무어)의 죽음과 원시적 종교성은 양 극단의 대척에 서있지만 인류의 본질적 고질병,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에 맞닿아 있다. 사이먼은 섬에 고립된 아이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공포의 정체, 그것을 뱀이라고, 혹은 짐승이나 유령이라 부르며,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존재를 신비화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바로 인간인 자신들뿐임을 자각한다. 한편 새끼돼지로 불리는 무어는 생각하는 능력, 사물과 사태의 궁극을 이해하려는 사유의 필요성을 말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소년은 트로이의 예언자이자 진실의 목소리인 카산드라이다. 사이먼과 무어는 무리에게 외면당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미친 소리이거나 직면한 현실에서 아무런 울림을 가지지 못하고, 마침내 야만성과 살의로 충만한 잭 일원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인류의 역사는 늘 진실의 목소리를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저열성과 몽매성을 정당화했음의 고발일 것이다.

 

소설은 우리들에게 이해가 가능하고 합법적인 세계가 어떻게 허물어져 가는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리고는 묻는다. 대체 우리가 뭐지? 사람이야? 아니면 동물이야? 그것도 아니면 야만인이야?”, 세계는 어떤 합의된 질서, 규칙을 지키려는 상호 노력에 의해서 지탱된다. 만일 이것이 파괴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각자 자기 개인의 편익만 한없이 추구하는 홉스식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작가는 이로부터 폭력성의 얼굴을 보여주는 데, 잭과 그 사냥 무리들이 원형을 이루고 창을 치켜들며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를 반복하여 외치며 광기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피와 진흙과 숫으로 채색된 가면이 된다. 모든 수치와 분별이 가려진 짐승으로의 변신,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에서 치밀하게 통찰했던 인간 무리의 야만성에 깃든 그 시원적 폭력성을 짐승의 변장이란 이미지에 덧씌움으로써 자신들의 잔인성과 악덕을 정당화하는 기만으로서의 종교적 기원, 그것일 게다. 이 소설이 드러내고자하는 주제들의 보편성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 사회의 대립되는 두 부류의 본질에 가닿는다.

 

즉흥적이고 눈앞의 이익을 쫓으며, 비합리적 권위주의의 폭력성을 휘두르는 무리들의 야만성, 이 무리들의 탈 규칙(), 법 초월적 야만성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성하는 자기 성찰과 좌절하는 상식의 세계, 합의된 질서의 세계를 지켜내려는 무리이다. 사냥 술책과 신나는 희열과 기만적 전술의 세계가 있다면, 인간이 함께하는 삶의 세계를 위해 생각하고 조금 더 현명해지기 위해 인간과 인간사회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 세계가 있다. 우리가 규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인류가 가진 것이라곤 바로 그 규칙뿐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합의하여 가진 것, 그 규칙을 파괴하는 것은 인류의 퇴행이고 자멸이다. 그 누가 살아남겠는가? 윌리엄 골딩이 프로그램한 이 시뮬레이션을 관찰하다보면 절로 지금의 저 무도한 야만의 무리들이 해독될 것이다. 이 소설이 그침 없이 읽히는 까닭은 바로 인간과 그 무리의 본성이 발하는 어두운 진실을 밝은 하늘 아래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길은 과일 나무 숲도 침범했을 것이다. 도대체 내일은 무얼 먹을 작정이란 말인가? (...) 그들은 대체 어쩌겠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가?”  -313


P.S. 헌정 질서를 파괴해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저 무도한 무리들은 그 파괴된 질서 이후에 대체 어떻게 한 사회의 안녕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독재로 국민의 입과 손발을 묶어 탄압하는 끔찍한 저 파시즘의 세계를 원하는 것인가? 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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