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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지대에서 바라보는 세계 - 시와 그림에 떠오르는 그리운 고향 ㅣ 박동환 철학선집 시리즈 8
박동환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3월
평점 :
우리 정신에 침윤(浸潤)된 서구의 생존 전략은 그대로 괜찮은 것인가?
“인간의 언어는 자연에 없는 금을 긋고 경계를 구축해서 온갖 허상을 만들어
자연과 인간 자신을 규제하고 통치하는 수단이다.” -19쪽
“인생과 자연에 임하는 자아 방어, 자아 본위의 상호대결 아니면
상호경합으로 일관하는 호모에렉투스의 생존양식으로 인류가 탈주하려는
제 3 지대의 새로운 생존양식의 발견은 가능한 일인가?” -20쪽
위에 인용된 두 문장이 전제(前提)하는 물음에 대한 고찰이 이 책의 논지일 것이다. 또한 인류 전체에 당면한 인류세(人類世)라는 위기에 대응하는 대안의 세계관을 발상 전개하려는 회심(回心)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닥쳐 올 위기를 외면하면서까지 이합집산의 패거리 이익을 위해 몰두하는 정치경제 공동체의 현실은 대체 어떤 이유와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도대체 인류의 어떤 생존양식에서 연원(淵源)하는 것일까? 인간 각 개체가 소속된 문명과 그에 따르는 국가체제, 나아가 세계 체제가 강요하는 경쟁과 대결의 관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통치 양식, 즉 세계의 지배질서가 된 서구의 양식(樣式)을 이대로 이의 없이 수용 지지하는 것이 옳은가? 오늘의 한국인, 우리들의 사고와 행위 습관은 서구와 동양의 오랜 전통의 주변부에서 그것들에 종속되어 어느덧 서구의 가치에 매몰, 포섭되어 그것의 결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국면에 이르렀는지 모를 일이다.
저자 박동환은 그의 일생이 동서의 지배적 전통이 답습해 온 철학, 오늘날 세계의 주류 사고가 된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자아라는 주체 중심 관점의 철학을 비판하고 주변부, 즉 그 바깥의 시각에서 새로운 철학, 탈 인간, 탈 주체의 철학을 실천해 온, 미래 철학의 토대를 준비하고 쌓아올린 철학자이다. 오늘의 서구 철학들도 인간주체의 철학에 대한 반성으로 객체지향, 또는 실재론적 존재론과 같은 타자철학이나 신유물론을 내걸고 비인간 중심의 철학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저마다의 주장이 진리를 담보한다고, 궁극의 이론이거나 여전히 언어-논리 기반의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한계일 것이다. 오늘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는 AI와 같은 인류가 경험한 지대가 아닌 미지의 미래다. 더구나 진화의 제약 조건들로부터 어느만큼 인류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서구 철학과 과학이 오만하게 웅변하고 있지만, 정작 인류는 지구의 생물학적, 지구화학적 시스템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이 얽매인 존재임을 외면 또는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러한 사태가 초래된 근원의 추적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1. 인류 생존전략과 방식의 근원
오늘의 인류가, 아니 서구 주류가 주변세계에 퍼뜨려 생존전략으로 채택한 상호투쟁과 경합의기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돌을 깎아 주먹도끼를 만들고 돌조각으로 화살촉을, 그리고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웠던 흔적을 고고학자들은 발견하고, 수십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그들의 생존을 위한 계획과 실행, 집단생활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행위와 집단생활을 위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가 출현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본위, 즉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타자를 찌르고 내려치는 투쟁과 경합이었으며, 이를 위한 언어-논리적 접근 전략이었다. 이 생존전략으로부터 온갖 이념과 종파, 그 핵심도구로서 언어-논리 규칙들이 만들어지고, 제각각 소속하는 지역과 문화와 언어에 따라 다른 모양의 언어로 박제된 개념의 존재인 신(神)들이 출현했다.
이 수백 혹은 수십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이미 개척해 놓은 생존전략을 답습하는 것이 오늘의 인류이다. 그렇다고 이 생존전략, 특히 그 핵심 도구인 언어-논리가 그대로 온전하게 전해진 것은 아니다. 기원전 6세기 이전, 파르메니데스 이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들에 의해 우주적 시간대의 막을 수 없는 흐름을 인간의 언어 기술로 박제화 해버리기 이전 헤라클레이토스는 물론 소피스트 철학자들로부터 언어의 치명적 한계가 지닌 세상 만물과 그 사태의 경직된 논리를 거부하고 대안의 길을 모색한 역사가 있다. 인류는 불운하게도 ‘말을 가지고 생각하는 이(verbalizer)’들의 끈질긴 개념 정의와 범주체계의 의지로서 동일률(동일 보존), 모순 배제의 형식논리인 독선의 절대성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세계 자연 모두를 형식화 박제화하려는 개념 정의와 규칙체계의 의지는 그 어떤 모순이나 다름, 타자를 수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개략적 기원에 대한 탐사에서 우리는 인간의 지독한 자기중심주의, 자기본원의 오만함을 보게 된다. 서구의 철학, 서구라는 몸체에 깊게 각인된 생존철학은 이렇게 인류의 생활 습속을 장악했다. 근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자아중심, 주체중심, 인간본위의 관점, 언어-논리의 맹목적 답습을 반성하는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실존주의니, 해체철학이니 하며 타자 관점의 전환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서구 철학은 언제나 인간중심주의로 회귀했다.
저자는 이러한 인류 생존전략으로서 자아, 주체중심의 관점에 대전환을 불러온 혁명을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우주의 영원한 중심이라 여겼던 인간중심의 관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한낱 우주의 작은 중심주변을 배회하는 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 인간본위의 관점의 대전환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혁명을 자처했던 칸트는 물론 그를 계승한 주관의 초월론 및 매체 초월론자인 후설, 비트겐슈타인도 결국에는 독단적 자아중심의 유아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논리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인식처럼, 세계의 모든 사태를 언어의 한계, 논리 규칙 안에 잡아넣는 독단론은 논리 규칙 밖에는 어떠한 가능 사태의 근거도 없다는 말처럼 자아중심적 망상이 어디 있을까. 서구의 철학자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인류가 행위와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한 자가 없다. 저자의 지적처럼 “인간은 고작 태초로부터 우주의 영원한 주인이 펼치는 여정(旅程)에 초대된 ‘한나절의 객(客)일 뿐’” 인데 말이다.
세상 존재 그 무엇이 스스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운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 개체는 물론 삼라만상 모두가 세계를 움직이는 참 주체의 주변을 맴도는 존재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주변 존재인 한낱 종속 변수일 뿐이다. 인류세라는 세계 자연, 우주의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야기된 오늘의 위기는 이처럼 자연과 우주를 인간 자신이 주체로서 조작할 수 있는 피동적 ‘대상’이거나 ‘타자’로 취급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2. 영원의 한 조각 분신, 기억체계 x (x 존재론)
동서의 전통적 주체중심, 언어-논리 중심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제3 지대의 철학, 인류의 미래 삶의 토대로서의 철학을 사유하는 영원의 기억으로까지 소급되는 우주를 담고 있는 기억, 세포 수준에서 공동체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몸(體)을 가지고 있는 한계 지워진 존재 전 영역을 아우르는 미지의 개별자를 저자는 x라고 명명한다. (그의 잘 알려진 존재론의 설명은 『x의 존재론』참조 하세요) 즉 x란 태초의 경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원성을 지닌 한 조각 기억체계이고, 조건부로 주어진 어떤 정체성의 임시의 동일자에 불과하다. 한편 세계를 만나는 개체의 두 번째 방식으로 개체 x의 일탈과 거부 행위를 통해 확보된 보편의 지평으로서 현실에 결박되어 있는 x를 거부하는 모든 내재성을 ‘¬x(never x)’라 명명한다. 이 내재 가능성의 원천이 바로 일탈을 꿈꾸는 기억과 상상이다. 일반자 X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탈주해가는 파격의 반란이다.
서구 철학이 앞선 언급처럼 자아본위, 언어-논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반성을 지극히 깊숙이 실험했던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이름도, 종류도, 법칙도 없는 야생의 자연, 즉 인간중심의 언어-논리체계를 벗어나 대변하는 세계란 어떤 것인지를 20세기 청년 장 폴 샤르트르는 초유의 상상실험의 기록을 『구토』로 정리해 놓았다. 샤르트르 본인의 분신인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순수의식과 존재 자체(물자체) 사이에 서로 주권을 독점하려는 대립관계를 그린다. 그는 칸트가 설치했던 순수의식과 물자체 사이의 양면단절의 이분법 관계가 허위라는 것을 증명한다. 양면단절은커녕 단절의 관계를 걷어차며 존재 자체가 거침없이 행위주체로 폭발하는 이변을 연출한다.
“물체들...그것들은 쓸모가 있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장 폴 샤르트르, 『구토』, 하서출판 P22
자연과 사물로 하여 존재 자체의 자발적 주체성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을 샤르트르는 열어놓은 것이다. 인간의 언어기술로 자연과 사물에 덮어 씌웠던 온갖 특성과 개성, 행태와 법칙이 무력화되는 반란, 반전의 가능성이 자연과 사물이라 불리는 존재 자체에 있음을 기록한 아마도 최초의 철학 사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실존주의 행동철학자는 자연과 사물에 행위 주권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로캉탱은 줄기차게 구토를 극복하며 창작과 창조행위의 절대가치를 찾으려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결국 인간 본위의 실존주의 행동가에 머물고 만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물이 인간이 부여한 특성, 모양, 일반화한 형태나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직관은 적어도 지니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다음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우연이다.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우연성은 지워버릴 수 있는 허상이나 외관이 아니라 절대다.” - 『구토』, 동일 책, P242
16세기 인간중심주의의 폐기를 선언했던 혁명가 폴란드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완료되기를 기다리는 미완의 혁명은 21세기 또다시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에 의해 샤르트르를 넘어서 인류의 자아의식이 스스로 취해야 할 반성, 즉 인류 스스로 주변 존재로의 반성과 반전(反轉)이 선언되고 실천된다. 그녀는 인간본위의 관점을 대체할 제 3지대의 관점으로 ‘제 4인칭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오랜 동안 인류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해 온 자아독선의 주체성을 사양하는 ‘주체사양(主體辭讓)’ 과 인간 자신을 온전히 본래의 고향, 즉 무한의 경계로 반환하는 절대 환원, 영원성의 한 조각임의 깨달음의 처신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서구 문명이 강요해온 언어-논리, 자아중심, 인간중심, 주체중심의 관점이 인류세의 위기를, 극한 갈등과 패거리 이익에 의존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았는가. 토카르추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1인칭 언어에 의한 세계 질서를 폐기하고 4인칭 관점을 취함으로써 지배적 세계관 탈출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리라. 인간 중심의 시계(視界)밖으로 탈주하는 자아탈출, 자아 해탈의 제3의 지대를 향한 여정이 지금이라도 우리가 걸아가야 할 길 임을.
이 같은 서구 주류질서, 언어-논리, 자아중심의 세계에서의 탈주를 고통스럽게 사유한 이들이 그 변경지대인 한국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 출현일지도 모르지만,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통해 호모에렉투스가 그 때의 환경에 주어진 혼돈의 사태를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경합의 도구인 언어가 오늘의 인류가 처한 위기의 사태임을 알아보았던 것 같다.
“더 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한 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토의 기미를 느꼈다.” -한강 『희랍어 시간』, P15~16, 문학동네, 2012.
샤르트르가 직관은 했으나 인간본위로 회귀하고 말았던 '구토'는 한강에 이르러 그 인간본위의 핵심 원인인 언어의 폭력성을 폐기함으로써 태초의 고향, 영원성의 한 조각으로 향한다.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운명인 초월의 질서, 자아의 초월이라는 새로운 질서여야 함을 감각한 것일 게다. 한강은 소설에서 인간의 언어에서 “꼬챙이처럼 찌르는” 감각을 표현한다. 언어란 돌도끼 못지않은 동료인간과 비인간 자연을 향해 찌르고 다스리려는 자아중심의 방패막이와 같은 배타적 세계질서를 세우는 구토를 일으키는 도구였음을 알았던 것일 테다.
3. 그림을 떠올리며 찾아가는 이(visualizer)들 / 임자말(주어) 생략과 중간태(middle voice)
서구 철학의 시발(始發)은 파르메니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언어 기술자들, 즉 ‘말을 가지고 생각하는 이(verbalizer)’들은, 세계 자연을 개념과 정의, 법칙으로 박제화를 시도함으로써 동일보존과 모순배제의 형식논리를 끈질기게 주창한 인간본위의 주체적 자아, 타자 배제의 치명적 한계 논리이다. 반면 이들에 앞선 현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언어로 박제화 하지 않고 그대로 시각화 감각화하여 언어의 무한한 결핍을 돌파하려는 ‘그림을 떠올리며 찾아가는 이(visualizer)'이였다. 언어는 그것이 그 무엇을 지시하던 그 무엇의 무한한 영원성, 내재성의 수많은 성분이 다 빠져나가고 채에 걸러 남은 몇몇 찌꺼기일 수도 있다. 영원성이라는 우주적 시간대의 막을 수 없는 흐름에 휩싸여 있는 존재를 그 무엇으로 가둬놓고 특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의 모든 것이 돌아가야 하는 절대 환원, 그 궁극의 영원의 고향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없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의 흔적과 그리움을 안은 우리들의 기억, 그 영원성의 기억인 x를 이미지로 그려야 함을 알았을 게다. 시인은 말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님을, 말은 삶의 실상을 흐리고 가리는 허상임을 알았기에, 치명적 언어의 한계를 알았기에, 형상으로 굳혀 박제화한 착각임을 알았기에 흘러가는 장면마다 추억처럼 떠오르는 생생한 그림을 그린다.
“과학과 철학은 극히 추상화된 기호의 수준에서 박제된 언어로서만 전개한다.
수많은 사태가 그 추상의 그물을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전혀 존재 자체가 아닌
굵은 찌꺼기들이다.” - W. J. T. Michell, 『The Language of Image』
한강의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에는 늦은 저녁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피어 올라오는 김을 보고 그 무엇인가가 영원히 지나가버렸음을 알았다고 쉼 없이 하늘로 달아나는 연기의 사라짐에서 존재의 영원성, 영원성 한 조각인 존재를 알아본다. 언어라는 추상적 상상의 한계 밖으로 쫓겨난 실재하는 것은 그렇게 존재의 지위를 되찾는다. 자연에 없는 금을 긋고 경계를 만드는 인간 언어의 허상, 시인은 그렇게 태초의 기억, 그 흔적을 따라 거슬러 먼 여정을 떠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인류가 소속된 지배 문화의 탈출 과정이다.
저자는 제 3지대 새로운 미래 철학의 출발지는 서구에 물들었지만 여전히 주변지역으로서 바로 지금 그 한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폐기되어야 할 서구 지배철학의 대안으로서 존재의 영원성과 내재성을 기억하는 우리가 그 토양임을 의식하는 듯하다. 우리말에는 임자말(주어, 주체) 자리에 아무것도 놓지 않고 그 자리를 결정할 수 없는 미지의 상태 x로 기억하며, 주어의 쓰임새를 삼가며 유의한다. 우리말은 이렇게 주체의 자리를 비워놓는다. 고대 희랍어에도 이러한 유사 언어태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중간태라 부르며, 주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술어 동사에 의해 행위를 하기도 하고 행위를 받기도 하는, 행위자이자 수용자로서 행위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운명의 숨은 결정권자 x를 상정한 주체가 아닌 미지의 x였다.
여기서 서구 철학의 위대한 이정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칸트의 행위 자율권에 대한 생각, 즉 자유의지가 선험성을 이루는 인간 개체의 내재성이라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의적 허상임이 드러난다. 고대 희랍인들에게는 중간태가 말하듯 의지라는 개념 같은 것이 없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유일 단독의 자율권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결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내세운 행위 원칙, 즉 행위의 배타적 자율권은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가? 서구를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와 사고인 칸트의 배타적 형식논리는 B.C. 5세기를 전후한 플라톤 철학의 세상 모든 사태의 일치와 긴장에서 오는 모순과 대립을 참을 수 없어했던 동일함, 매끈함에 대한 집착이었다.
동일성의 규칙, 모순배제의 규칙이라는 형식논리를 밀어붙여 두 개의 서로 모순되는 논증, 양면논증을 제거해버린다. 모든 문제에 내재하는 양극화하는 잠복한 대립의 긴장사태를 부정하고, 하나로 통일된 폭력적 단순함을 진실이라고 정의한 것이 바로 칸트 사고의 연원이다. 비극이 사라진 것은 바로 이러한 말을 가지고 생각하는 이들이 세계질서의 주류가 됨으로써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은 뒤틀리고 왜곡되고, 결여를 안은 허상이었다. 예수의 메시지에 “에르코마이(ερχομαι), ‘내가 가다’”라는 중간태의 표현이 있다. 나를 가게 하는 그 주체는 하나님이었을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가 가다라고 기록 한 것이다. 한 개인은 스스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배후의 시킴에 의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드러나지 않은 배후의 다 알 수 없는 조건들이 함께하는 데서 한 개인의 행위와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불교 아미타여래의 본원의 힘인, 타력(他力)을 떠올리게 된다.
4. 제3지대 세계관 - 귀얄(풀비) 자국
둥서를 관류하는 그 어떤 생존전략이든 모두 인류가 마주한 위기 앞에서 그 인식에도 불구하고 소속된 문명과 국가체제가 강요하는 지배적 생존양식을 회피할 도리가 없다, 개인 간, 공동체간,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의 터전에서 발을 빼는 것은 곧 현실적 생존의 불가능성인 까닭이다. AI의 인간 제작자를 넘어서는 것이 뻔히 예견되고, 그것이 곧 인간 생존에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리라 보이지만, 자아중심의 뼛속까지 스며있는 습속은 닥쳐 올 위기를 외면하게 한다. 즉 오늘의 문명과 국가 체제를 지배하는 철학은 각양각색의 일치와 불일치의 관리 및 통치 양식으로 불가피한 경쟁과 대결의 관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누구도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쟁과 대결의 관계를 통치하는 체제는 생명의 고유한 개체성이 훼손 왜곡 당하는 것을 모른 척하거나 부인할 도리밖에 없게 되는 것이리라. 주체중심, 인간본위, 언어-논리의 관점을 대체할 제 3지대의 세계로 어떻게 옮겨가야 하는가? 대안의 세계관 발상 전개라는 것이 공허한 독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천성을 내재해야만 할 것이다. 즉 인간 개체들의 생활에 깊숙하게 침입해서 그것이 생활양식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해야만 할 것이다. 저자는 x존재론을 통해 자아독선의 주체성을 사양하고 절대환원이라는 영원성의 고향, 무한의 경계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지나침을 삼가야 한다고 한다. 왠지 공허하다. 물론 작금의 나로 격화되는 상대 경합이라는 생존양식은 결국 인류문명의 멸종이라는 울타리에서 빠져나올 출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영원의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한 조각 분신으로서 x를 품고 태초의 고향, 품고있는 영원성의 소속감을 깨우치는 것이 과연 모든 인류의 마음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요원해 보인다.
조금 구체적으로 저자는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는 민속신앙의 생존 양식에서 제 3지대의 주체 사양을 발견하고, 붓의 흐름에 따른 자연 발생적인 정형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연 생성자국 같은 귀얄자국이 바로 제3지대 양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오늘의 도시 문명은 강요하는 상대 환원의 생존양식인 체제 통치의 필요에 따라 정형화, 법제화된 전제를 거부하는 개체성이 귀얄지국처럼 살아 움직이는 더없는 토양이라고 말한다. 특히 리처드 세넷의 친밀함의 횡포와 전제(tyranny, 專制)을 예시하며, 사적인 친밀함의 횡포에서 해방되는 생활의 매체로서 도시생활의 간격과 분열이 오히려 현대 인류의 개체성 해방을 위한 필수의 장치이자 기회라고까지 말한다. 무도한 계엄령에 맨 몸으로 대처한 대도시 서울의 시민들의 경험처럼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이것은 흉측한 이면을 또한 내재하고 있다. 바로 극단적 대결로 인한 분열의 극치로 인한 온갖 불의한 술책과 전횡의 출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류학(anthropologie)은 차라리 엔트로폴로지(entropologie)로 바꾸는 것이 낫다.”라며, 이 지금의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과 제도와 관습이 엔트로피 증가 과정의 부분임을 역설한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제아무리 귓전을 때릴지언정, 지구촌을 지배하는 의식세계와 상상이 결박하는 압박을 대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에 이르면 그것은 분명 공허하고 쓸쓸한 여운만을 가을바람처럼 마음에 흔적만을 남긴다.
저자가 천착한 x의 존재론, 현재의 모든 체계, 모든 존재에 대하여 수직의 관계로 침입하여 결국 그가 이끄는 태초의 귀향길에 합류시킨다는, 영원을 향한 자아탈출, 초월하는 삶을 꿈 꾸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살아 움직이며 실감하는 현상계의 ‘나’, ‘자아’를 페기하기에는 언어의 결박이 너무 세차서 그저 구차스럽기만 하다. 아니 샤르트르의 로캉탱처럼 개념과 범주로 장악된 독선의 절대성이 완전히 허물어진 야생의 사태가 하도 고통스럽고 끔찍해서 인간본위의 세계로 다시 조작하여 선회하고만 말 것 같다.
서구의 주변부로서 우리보다 일찍이 서구의 세례를 받아왔던 일본의 일군의 인류학자와 철학자들에게서도 애니미즘과 불교, 인류학 연구를 통한 타력 중심의 미래 철학을 논의하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의 후학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새로운 제3지대의 철학이 인류의 미래 정신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국경을 초월한 협력의 연구도 요구되리라 여겨진다. 미래철학이다, 인류가 마주한 위기를 전환시킬 철학이지 않은가? 제3지대의 철학을 말하는 이 책에 앞선 저자의 『x의 존재론』을 비롯한 철학적 노고의 총합서로 읽었다. 분명 저자의 지적처럼 인류 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적 범위의 시야를 가지고 대응하는 철학자가 주류세력으로 출현하고 있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안의 세계관을 전개하려는 이를 접하기도 어려운 것이 실상임에도 외로운 길을 고고히 걸어 온 한국의 철학자에게 머리 숙여 경애(敬愛)의 마음을 보낸다. 철학자 김동규의 『멜랑콜리아』가 인도한 독서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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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다음의 용어 정리 중 x존재론 관련 항목은 이 책 본문과 김동규의 『멜랑콜리아』의 x의 존재론에 대한 설명부분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상대환원은 필자의 이해이다.
1. 미지수 x는 박동환 선생이 정리한 미래 철학의 간결한 표제다. 소문자 x는 개체를 뜻한다. 이 개체는 세포수준에서 공동체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몸(體)을 가지고 있는 것, 즉 한계 지워진 존재의 전 영역을 아우른다. 이 개체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든가, 자기 정체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정체성은 조건부 임시의 동일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개체를 미지수 x로 표기한 것이다. 또한 개체는 한 조각 기억체계 x이다. x는 태초의 경계 X가 토해냈다가 언젠가는 다시 삼키는 파편이다. X는 인간적인 것을 포함해서 세상에 출현하는 모든 것을 삼키는 심연, 곧 ‘탈-근거’이다. X는 x에 대하여 의미의 원천이라기보다는 무의미의 원천이고, 해석의 지평이라기보다는 해석의 무덤이다.
2. ¬x(never x), 네버 엑스로 읽는 이것은 개체 x의 일탈과 거부 행위를 통해 확보되는 보편의 지평이다. 즉 현실에 결박되어 있는 상태 x를 거부하는 모든 내재성을 의미한다. 이 내재 가능성의 원천이 바로 기억과 상상이다. 기억과 상상은 무한히 일탈을 꿈꾼다. 그래서 ¬x는 일반자 X에 포섭되기는커녕 도리어 거부하고 탈주해가는 ‘파격의 반란’이라고 부른다.
3. X( ) 또는 X(x, ¬x)로 적기도 하는 것, 이것은 세계와 만나는 세 번째 방식이다. X와 ¬x 의 해법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사건, 두 길이 모두 막힌 상황을 암시한다. 개체가 세계로 접근한다기 보다 세계가 개체에 엄습하는 형국이다. 어떤 지혜와 상상의 노력으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이를 모두 초과하는 사태, 모든 인위적 기획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사건,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단숨에 깨트리는 파국과 대격변, 그것이 바로 X( )이다.
4. 상대 환원: 환원이란 어떤 높은 단계의 개념을 더 낮은 단계의 요소로 분할하여 정의하는 철학적 관념이다. 예를 들어 “결국 인간이란 단지 무수히 많은 쿼크와 글루온, 전자 등이 모여 있는 집합체일 뿐이다”라는 문장처럼 인간을 궁극지로 거슬러 환원하면 결국 쿼크이고, 전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절대 환원’이라하면, 긍극의 근본으로 회귀한 도래지이다. 반면 ‘상대 환원’은 비교 상대를 자의적이고 상대 절하하는 논리, 즉 경합의 논리로 인한 환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학은 심리학의 응용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인위성에 의한 상대 환원일 것이다. 오늘을 지배하는 인류의 사고는 이러한 상대환원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경쟁과 갈등, 분열과 압박, 위계와 강제는 모두 상대환원에 그 토대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