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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평점 :
이 책 『kapitalismus und Todestrieb; 자본주의와 죽음충동』의 메시지들을 나는 자기파멸적 세계로 향하는 우울한 현상에 은폐된 실체들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분명 저자가 지적하는 자유의 착각, 투명사회와 긍정과잉 사회가 지니는 의미들, 만물의 상품화로 인한 인간의 자기 전시화(展示化)나, 자발적 통제사회로의 이행의 괴멸적 현상들은 많은 부분 현실의 통찰일 것이지만, 이로 인해 인간 운명의 미래를 어둠의 지옥, 종말의 귀결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필연적 결과라면 구태여 이러한 비평적 글들은 공허한, 의미 없는 말잔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문제에 도사린 근본적 문제들을 개선하거나 제거하는 실천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의 우리들은 행동하고 있을까?
신자유질서가 지배하는 오늘의 지구화된 세계가 노정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냉소적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다 알고 있어. 그런데 불가피한 것이잖아.’, ‘나는 그 문제를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인간 삶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거예요.’와 같은 이 모순적 인식에는 징그러운 흉측스러움이 있다. 비판적 지식을 마치 수용한 것처럼 말하면서 그 비판의 효율성을 무력화하는 비논리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작동하기에 저항의 목소리는 동력을 잃고 만다.
현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이 근본적 망상은 그래서 문제에 대한 아무런 행동을 실행하지 않는다. 기후온난화, 디지털 기업들의 개인정보 수집의 위험성, 다름과 타자에 대한 부정성의 낙인찍기, 성과(成果)주의 윤리의 괴멸성 등 인간의 자유와 존엄, 생명성에 위협을 가하는 요인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해결을 위해 실행되지 않는다. 이 책 15편의 비평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실천적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현상 내재적 속성을 규명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가 개방성과 소통을 강조함에도 심리화에 치우친 주관주의 담론은 객관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정신 건강으로 전환시켰다.” - 한병철, 『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 刊
이 문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좀처럼 공동체라는 ‘우리’라는 감정주체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를 지적하는 말이다. 객관적인 구조의 문제들을 한낱 개인들의 심리적이고 위생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사적 문제로 개별화, 국소화(局所化)하는 현 세계의 체제를. 이 앞선 저술(『심리정치』)에서의 관점은 이 책에서 ‘자유’로 옮겨가는데, 이 자유는 자신에 예속된 것조차 알지 못하는 ‘착각된 자유’, 이를테면 발가벗은 자유이다. 국역된 제목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바로 이 착각된 자유로 인해 인간 삶의 근본인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유가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 부존재한 자유의 시스템 내에 있게 됨으로써 마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착각에 빠져있는 오늘의 인간들은 저항의 의지 자체가 생성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지배기술은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타자 억압과 착취라는 폭력의 형태를 전혀 띠지 않으며, 우호적 모습을 취하고 심지어 그 착취를 개개인 스스로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공격을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어떤 저항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데, 바로 자유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를 다치게 하지 않은 듯 행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 강제를 자유로 느끼는 사회
산업사회의 체제유지 권력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그 실체가 확연한 저항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에 저항하면 실체적 폭력이 작동하고, 사람들은 빼앗기는 자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규율과 억압의 질서를 보다 효율적인 영리한 지배기술을 발휘한다. 그것은 순응(복종)이 아니라 사람들을 독립적인 체계로 인식토록 함으로써 개체 외부인 사회문제가 아니라 개체 내인 자신의 문제로 인식케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지배 맥락에 예속하게 한 것이다. 이 기막힌 체제는 오늘날 노동자들을 스스로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인식케 하고, 모든 각자가 모든 각자를 상대로 경쟁하는 절대적 경쟁의 상태로 만들었다. 자기 노동의 경영자가 된 노동자는 자신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희열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착취」에서는 이러한 자발적인 자기 착취로 이행된 현실을 설명함으로써 “어떤 강제도, 어떤 명령도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발가벗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 왜곡과 부조리로 인한 형상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봉사하는 서점의 선반을 가득 메운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자기 노력과 능력의 탓이고, 자기 선택의 과실이 된다. 모든 인간을 자기 경영자로 명명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결코 노출하지 않고 자발적 노예들에 의해 매우 효율적으로 생산성의 과실을 독차지한다. 각자도생을 부르짖은 저 내란우두머리를 비롯한 극우집단이 시종 일관한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적 불온함이다.
사회적 소통망을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모두가 스스로 산출한 욕구를 배설하는 사진, 동영상과 짧은 글들로 가득하다. 또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행적은 고스란히 데이터가 되어 수집된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채우고, 자기 정보를 기꺼이 제공한다. 심지어 건강 기록에서 시시콜콜한 내밀한 영역의 이야기까지 부끄럼없이 내보이려는 욕구들로 가득 차 있다. 사회적소통망의 영주는 이들 개인들을 감시, 통제하며, 그들이 스스로 생산한 산물들의 과실을 차지하고 자본 축적의 쾌락을 향유한다. 개인들은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들의 노동력 착취를 결코 강제된 착취라고 느끼지 않으며, 통제 불능 또한 억압이라 생각지 않는다. 즉 성과 주체인 개인들은 자유의 느낌을 동반한 이 자기착취라는 스스로 산출한 자유로운 강제에 예속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의 의미다. 신자유는 곧 강제를 자유로 느끼게 하는 기괴하게 의미를 역전시킨 억압의 다른 얼굴이며, 보이지 않는 통제의 욕망이다. 이 신자유세계라는 시스템 안에 살기에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이 다급한 자기 통제의 외침은 자기착취로 소진되는 현 인류에 대한 연민의 목소리다. 모든 일이 자유라는 허울아래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자유를 착취하는 세계다. 타자 없는, 즉 지배없는 착취인 자기 착취는 외견상 자유의 영역에서 일어나기에 대단히 효과적일뿐더러 저항할 대상은 물론 맞설 ‘우리’라는 것도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배의 부재와 우리의 부재가 세계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
2. 긍정성 과잉, 투명성 사회
특정 수준에 도달하면 한계에 봉착하는 타자착취와 달리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자기착취는 자신을 붕괴시킬 때까지 한계가 없다. 그러다 실패하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고난이나 파산을 겪으면 오로지 자신의 잘못이라 스스로를 책망한다. 이것은 자기 안으로 침몰하여 익사하는 우울증과 몹시 흡사하다. 자기 자신에 의하여 완전히 소진되고 마모되는 오늘날 증가하는 정신질환들(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소진 증후군 등)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성과(成果)윤리의 교활한 속성의 병리적 증상이다.
모든 문제를 ‘나’를 의문케 하는 신자유주의의 음흉한 윤리는 그래서 사람들을 나르시시스적 내면성에 침잠해 온통 ’나를 쓰다듬어라, 나를 돌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항의하는 대항하는 타자가 없는 존재가 되어, 타자의 다름을 보지 못하게 하고, 곧 예의를 상실한 인간들은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존중하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요즘 이 세계에 부쩍 나르시시스트가 늘어난 것은 자기 동일성을 반복하며, 다름과 타자를 무조건 부정성으로 제거함으로써 귀결된 긍정성 과잉의 현상일 것이다. 이렇게 부정성이 말끔히 제거된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같음만이 출몰하는 매끈한 세계다. 그래서 탈(脫)면역시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매체의 구별 없이 모든 미디어들의 프로그램이 건강의학 정보로 가득 채워진다. 부정성을 걷어내고 긍정성, 같음으로 매끄럽게 획일화된 것들을 숭배한다. 반죽음, 혹은 설죽은 인간들이 성형과 온갖 약물과 보정으로 매끄러운 신체를 과시한다. 불멸을 향한, 죽음을 거부하는 이 행위들에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속성을 본다. 죽음이라는 부정성을 회피하기위해 죽음충동이라는 또 다른 반(反)명제를 세움으로써 자신을 은폐하는 속성 말이다. 이 긍정성 과잉의 균질 사회는 다른 말로 투명사회다. 투명성이라 말하니 마치 부패와 부정의 드러남이라는 긍정성을 떠올리는 것은 심한 오해다. 이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투명성이다. 비밀이 완전히 사라진 포르노적 속성, 세상 모든 것을 전시, 상품화하고, 시간을 두고 인내하지 못하는 즉시성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우려스러운 현상을 본다. 투명성은 언급했듯 부패와 부정이 깨끗이 척결된 청결, 청렴으로 비치고, 즉시성이라는 신속한 화답을 하는 실용성의 정치 행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세상의 일, 특히 국가 정책으로서의 정치에는 시간을 두고 숙성되어야 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어떤 하나의 비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지체라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투명사회를, 실용정치를 외치는 것은 비전 없는 정치라는 속빈 실체의 다른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포퓰리즘이라는 대중선호정치에는 미래 없는 사회, 다시 말해 예측 가능성을 꿈꾸는 미래로의 행위가 실종된 오직 계산의 합리만이 존재할 것 같아 근심이 앞서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미래는 결코 투명성, 실용성, 긍정성이 모토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정보사회가 야기하는 병리적 증상들, 151쪽에서】
투명사회란 기다리는(인내) 능력의 상실이라고 말했다. 즉 미래로 이어지는 약속에 대한 불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래가 사라진 즉시성에 몰두하는 사회는 책임 맡기, 약속, 사랑 등의 본래의 함의가 위축되거나 훼손된다. 신자유의 체제의 이 대표적 속성인 투명사회는 그래서 국가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현저하게 목격하게 한다. 시민들의 무고한 죽음들, 각종 인적 재난들에 대해 고위관료들을 비롯한 권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며 무능력을 여실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요즘 사람들의 사랑에서 이상한 징후들을 보게 된다. 사랑에서조차 상처를 받지 않으려하고, 다친 상태가 되는 것을 지극히 꺼려한다. 사랑이 그런 것인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이미 그 자체로 부상이고, 실제 많은 걸 쏟아 부어야 하는 상처의 위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부정성을, 거친 표면을 거부하는 이러한 태도에서 매끄러움에 대한 숭배를 본다. 저자는 「뛰어 오르는 사람들 ; Menschen springen(People jumping)」에서 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부쩍 펄쩍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많은가하고 묻는다. 갑자기 신자유체제가 사람들의 생명력을 증가시켜서? 아니면 나르시시스적 병적 경련인 건가? 사진의 전통적 가치는 순간을 회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식(禮式)가치였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인 초상이 사진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사진에서 인간의 얼굴은 물러나고 도발적으로 눈에 띄는 전시(展示)가치에 압도되고 있다.
즉 상표처럼 두드러지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기억과 역사가 없는, 그저 뛰어오르며 현재 가치를 증명하는 사진, 한 순간에 소진되는 사진, 쇼윈도 같은 사진을 전시하려는 것이다. 주목 받기 위해 뛰어오르는 상품인 인간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인 통찰과 지혜의 미덕은 자취를 감춘 ‘호모 살리엔스(Homo saliens; 뛰어오르는 인간)’, 스스로 상품이 된 발가벗은 자기 착취의 욕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투명사회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까? 스스로 산출한 이 욕구가 수치심을 넘어설 때 인류는 스스로 들어선 통제사회, 강제된 예속사회 깊숙한 곳에서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3. 맺는 말
지금 우리는 자유의 위기에 처해있다. 자유는 강제의 맞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른 체 강제에 굴복하면서 그 강제를 자유라고 인식하게 한다. 자유 종말의 뚜렷한 징후다. 이 지배 없는 강제, 강제하는 상대가 없으니 저항이 애초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더욱 이 보이지 않는 상위의 지배질서는 저항 없이 매끄럽게 인간을 노예화한다.
긍정성 과잉이나 투명성이란 다름 아닌 획일화다. 다름과 부정성을 회피하고, 죽음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는 이제 디지털 질서로 이행되면서 그 실체를 인지하는데 더욱 곤란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속성들은 이 세계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 그 존재의 이유를 풍성하게 하는 사랑과 앎에 대한 욕구와, 분석 비판의 지성 능력 등은 물론 존재의 근본인 자유의 지각조차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무책임, 무관심, 극한의 이기적 욕구, 타자의 부정과 배척을 그 본질적 요소로 한다. 발터 벤야민의 “인류의 자기소외는 어쩌면 인류가 자기파괴를 미적 향유로 체험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는 예견적 문장이 실재하는 현실사회로 여실하게 도래한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한 대담자가 그가 음모론자처럼 느껴진다며, 세상을 험담하고, 사람들을 절망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저나 저의 분석이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자비하고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어떻게 이 잘못된 세상에 즐겁게 있을 수 있죠?”라고 반문한다. 다만 자신은 이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 놓여있는 세계를 더 많이 보려고, 또한 보기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소음과 지식 없는 정보만이 난무하고, 딜레탕티즘(dilettantism)이 만연하는 이 불온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들은 늘 지배구조 안에 내장된 권능들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이 숙고의 능력마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정말 인간을 상실하고 기계화된 노예들의 모습만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 이해에 조금은 접근할 수 있는 문제적 저술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착취의 질서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