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의 웃음 -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최초의 선언 앳(at) 시리즈 10
엘렌 식수 지음, 이혜인 옮김 / 마티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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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웃을(rire) 차례야.

우리가 쓰고-웃을(éc-rire) 때야.“ - 장미가시 효과, 113쪽에서

 

[Helene Cixous, The laugh of the Medusa]


2026년 제49회 이상 문학상 대상 및 우수상 수상작이 모두 여성 작가(위수정,김혜진·성혜령·이민진·정이현·함윤이)의 작품이라며 성비(性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담론을 보았다. 나는 이러한 잡설들에 대해 논의의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데, 억압되고 재갈 물려 처형되었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표상 불가능하거나 짓눌림에서 풀려나 세계의 전체적 목소리를 지니게 되었음의 한 상징적 사건으로 환영할 따름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글쓰기가 젊은 엘렌 식수가 아마존의 전사가 되어 팔루스로고스(pallogocentrique)중심의 여성 억압의 장막을 찢고 저 높이 비행(볼리;voler) - 飛行, 非行, 卑行 - 하며 분기탱천하여 깔깔대던 그 쾌활한 분노의 웃음소리 - 메두사의 웃음-가 요구되는 시대로부터 제법 멀리 날아올랐음의 증거일 게다.

 

하지만 한 문학상 수상 작가들이 모두 여성이라고 시비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전히 망상적인 팔루스를 쥐고흔들어대는 못난 남자들과 젠더에 의해 세뇌된 여성성에 잠자고 있는 팔루스적 여성들이 있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다, 이 세계의 모든 시대의 역사들이 보여주듯 동시대라고 모두 동시성의 인식이나 지각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항상 동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퇴행적이거나 반동적으로 역행하는 비동시성의 무리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장미가시가 필요한 것이다. 저 깊숙이 켜켜이 쌓인 먼지들 속까지 찔러대는 가시 말이다.

 

메두사의 웃음(1975)2003년에 쓰여지고 2010년 판본에 추가 수록된 장미가시 효과에서 위의 인용 문장처럼 우리(여성)가 웃을 차례라고, 쓰고-웃을 때라고 전하고 있듯, 이젠 여성이 그 몸으로 멍에와 검열을 깨부수고 사방으로 온몸을 관통하는 의미의 팽창을 발화한다고 피비린내 나는 처형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오늘의 웃음은 메두사의 분노에 찬 조롱의 웃음이 아니라 마음껏 여성 고유의 힘을 무한히 발산할 수 있음에 대한 자유의 유쾌한 웃음일 것이다.

 

이 책을 다시금 찾아 읽게 된 연유는 이처럼 동등한 주체로 자리매김한 여성의 시대에 대한 소회를 감각하는 것이 하나였고, 또 하나는 여성이 공적 공간에서 입을 열어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 곧 금지의 위반이던 시대에 살며 자신을 감금했던 초자아화된 팔루스중심 구조를 탈주하여 자신의 (1)섹스트들(sextes)을 보여주려 했던 김명순, 나혜석, 이선희 등 최초의 싸움의 현장에 나섰던 식민지조선 여전사들의 고통의 실체를 엘렌의 글쓰기로부터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전사들을 무참히 처형했던 김기진, 김동인, 방정환 등 일군의 남성 문인들의 저열함에 나는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성()위계의식에 터 잡은 비루한 권위의식이다. 지적으로 세련된 여성을 욕망하면서도 그 각성한 지성의 존재들의 행위는 참을 수 없어했던 뒤틀린 욕망의 소유자들이었던 당대 남성들의 전근대적 지각이 그렇게 싫을 수 없다.

 

사실 엘렌 식수의 이 텍스트를 나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 즉 팔루스중심의 가부장적 권위가 극성을 부리던 시대에 그 전통적 남자들과 불가피하게 싸우며, 그녀들의 견지(와 성적충동)에서 여성들과 여성들의 역사를 도래하게 해야 하는 보편적인 여성-주체되기를 향해 여성들의 성기를 지닌 텍스트들, 여성들의 진정한 텍스트들을 썼던 여성 작가들의 불안 속 용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교과서로 읽는다. 거의 모든 문장이 그 첨예한 최초의 경계 전장에 나섰던 김명순과 나혜석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어인 것만 같다.

 


해서 엘렌의 문장들은 그 자체로 그녀들 삶의 목소리로 들리기까지 한다. 엘렌은 공식석상에서 여성이 말한다는 것은 만용이며 위반이었다는 것을, 설령 그 위반을 과감하게 수행했더라도 그 말이 닿는 곳은 거의 항상 귀먹은 남성들이었기에, 그 남성들은 오직 언어 속 남성으로 말하는 것으로만 해석할 줄 몰랐을 뿐임을 지적한다. 팔루스가 지배하는 담론에 도전하는 것은 처절한 응징에 맞서 싸우는 길 뿐이었을 게다. 엘렌은 마치 이러한 전장의 결과를 눈앞에서 보듯 쓰고 있는데,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는 누이이자 연인들, 어머니 같은 딸들, 어머니이자 누이들이 살기를 원하다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 통제 불가능한 분자들에 대한 즉각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처형으로 끝나는 싸움이었음을, 한국사회 최초의 여전사들은 정말 미치거나 죽어야만 했다.

 

창피함과 두려움을 집어삼켰어. 네가 미쳤구나! 혼잣말을 했지.” -18쪽에서

 

여성들의 역사를 도래하게 하기 위해 싸움에 나선 전사는 엘렌의 혼잣말처럼 미쳐버려야 하는 공간에서의 처절한 투신이었다.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미친 여성들의 텍스트들에서 차오르고 범람하여 펄펄 끓어오르는 전정한 목소리를 듣는다. 엘렌 식수의 여성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이 위대한 텍스트가 반백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이렇게 현실 사회의 틀 내에서 유지, 수용 거부되어 내쳐졌던 불가능했던 여성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이러한 점이 팔루스중심의 남성 지배사회가 용서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게다. 성적 대립의 모든 기호를 조잡하게 운반하는 장소로서 대상화된 여성, 욕망의 배출구로서의 여성이 아닌 여성이 욕망의 주체가 된 텍스트는 질서, 자신들 권력의 전복이었을 테니 말이다.

 

엘렌의 이 텍스트 속 많은 문장들이 문학 비평이 주제인 글들의 해석도구로 인용되거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연유일 것이다. ()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을 쓰기. 모든 상징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소송에서 마침내 그녀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관계자이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서와 같이 팔루스가 지배하는 담론의 도전에 응하면서, 상징 안에, 상징으로 그녀에게 부과된 자리, 즉 침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긍정하게 하는 글쓰기의 전범인 까닭이다.

 

엘렌이 예언처럼 전하는 문장이 있는데. 과거에 사형당한 이 여성들을 앞서가고, 그녀들 이후에 오는 그 어떤 상호주관적 관계도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이 최초의 싸움에서 미치고 죽어간 여성들 이후의 여성 글쓰기는 결코 팔루스 지배질서로 회귀할 수 없음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그대, 길들일 수 없는 여자, 시적인 몸, 기표의 진정한 여주인’, 그대의 효력, 우리는 그걸 내일 이전에 볼 것이다!” 여성의 말은 더 이상 억눌리지 않을 것이며 그것의 효력은 바로 지금에서부터라는 얘기다.

 

이 텍스트에서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지적이 있는데, 그것은 페미니스트들이 빠지곤 하는 오해에 대한 지적이다. 바로 의식화를 가장하여 추가적인 금지 사항으로 여성을 짓누르지 말자.”, 결혼과 임신이 남성과의 싸움이라는 격전지에서 가당치 않다는 목소리에 대해 비판한다. 엘렌은 말한다. “쾌락과 현실이 서로 껴안은 모순들의 공감에서 그대의 위치를 그대가 결정하라. 타자를 살려 두어라. 다른 욕구를 기입하라(Mets l'autre en vie)” 만약 우리(여성)가 내킨다면, 임신의 감미로움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임신한 여성에 관한 터부, 그녀에게 투여된 팔루스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또 다른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말라고. 그러면서 내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남성이 대상화한 욕구가 아니라 여성 주체의 욕구 드러내기가 바로 여성의 글쓰기임을 공표한다. “나는 모든 걸 원한다. 나는 그의 전체를 원하고 동시에 내 자신 전체를 원한다. 내가 왜 나에게서 우리의 일부를 박탈하겠는가?” 라고 묻기까지 한다.

 

오래된 팔루스적 소극들(pharces)”에 위협받는 여성은 옛날 여성이라고 말이다. 남성들, 메두사를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워 방패로 가리고 시선을 피한 채 검을 휘둘러대는 남성들을 겁나게 하는 정체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죽음과 여성의 성기다. 벌벌 떨며 뒷걸음치면서 방패와 부적으로 무장한 채 메두사에 다가서는 그 못난 남성 신화는 발가벗겨져 저 멀리 내팽개쳐진다. 우리가 웃을(rire) 차례야.” 가장 내밀하고, 가장 강렬하며 가장 경제적인 민주적 대리보충인 이 여성 글쓰기의 선언문은 이처럼 맑고 청아하며 유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있다. 메두사, 퀴어의 퀸, 엘렌 식수의 텍스트는 모든 여성들은 물론 장 주네(Jean Genet)를 닮은 남성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기쁘게 해줄 것만 같다.

 

(1) 섹스트(sextes) : 섹스(sex)와 텍스트(texte)가 결합된 조어로 복수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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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그로 넌센스: 근대적 자극의 탄생 살림지식총서 154
소래섭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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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아쉽긴 하지만 흥미로운 담론서다. 우리사회에 대중적인 근대적 자극이 본격화 된 시기는 대략 1930년 전후의 시대라 할 수 있는데, ‘에로그로’, ‘넌센스는 당시의 대중적 화두였던 모양이다.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를 일본식으로 줄여 쓴 이 외래어가 식민지 조선을 휩쓸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첨예한 이념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의 불황, 게다가 식민지민으로서의 불안과 제국주의적 약탈식 자본주의의 침투로 인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 등으로 사회 전체가 극단적인 의기소침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압도적 시각문화를 동반한 새로운 감각적 자극이 당대인들의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일까?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소비 배출구로써 향락산업과 성 풍속의 식민지로의 이동, 근대화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와 대중사회의 도래는 시대환경과 결합하여 현대적인 것의 맹목적 지향과 눌려진 욕망의 분출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고, 에로 그로 넌센스는 당시 모든 문화적 현상들의 배후에서 욕망을 압축한 말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저작은 바로 이를 근대성의 징후로서 인식하고 당시 대중 연예잡지라 할 수 있는 별건곤(別乾坤 ), 문예지 동광을 비롯하여 각종 미디어 매체, 산업의 현상, 대중의 일상적 풍경을 통해 한국사회의 민중문화를 해독하고 있다.

 

3차 산업의 확대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었지만 가부장적 팔루스중심 사회에서 이들이 주로 향한 곳은 도시의 소비문화 및 향락산업에 치중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예로 그간의 전통적인 상인이 갖추어야 할 전문적 지식보다는 여성의 애교를 통한 판매력 증진이 더 효과적인 상술이 되고, 숖걸(점원), 데파트걸, 바걸, 헬로걸(전화교환수), 티켓걸, 카페여급(웨이트리스)과 같이 첨단직업부인 걸 전성기를 맞이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31낙원이라는 카페가 문을 열면서 가벼운 우울, 살이 미소하며 엉덩이가 춤을 추는 날카로운 육감, 상대자를 탐색하는 야릇한 피로, 귀가 멍멍한 음향, 농염한 색채, 환각적 말초신경의 기괴한 발동으로 가득찬 청춘의 놀이터’”로서 향락을 구비한 곳, 에로에 대한 욕망의 배출구로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시대배경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회적 열기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모던의 색등(色燈)에 시각을 빼앗긴 그들은 드디어 맹목이 되고 과민한 백치가 되었다.”는 비평이나, 이상(李箱)타락으로 이루어진 축제라는 시선, 웃음마저 자본주의 체제 속에 편입시켜버린 카페와 흥행물을 통해 복제되고 대량생산되는 상업화된 웃음과 같이 조롱과 냉소, 자성이 잇따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 또한 남성권력의 이익중심, 즉 모던걸에 투여된 자신들의 욕망에 기초한 것이었을 뿐, 이중적 시선에 의한 모순의 발로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저작에서 주목할 만한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당대를 대표하는 한 묶음의 에로 그로 넌센스에서, 넌센스가 지니는 의미의 고찰이다. 즉 넌센스는 에로와 그로와 같은 향락산업의 진전과 어울려 이를 진작시키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려는 욕망으로서 에로그로로 대변되는 현실의 떠들썩한 남성지배계층을 풍자하고 전복하는 냉소적 태도로서 작동하였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열기는 강력한 근대적 감각으로서의 시각문화로 다른 감각들이 퇴화됨에 따른 반작용으로 그렇게 퇴화된 감각들에 대한 향수, 즉 현대적 감각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가깝다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성찰은 집단의 공동체성을 강화시키고 재확인하는 유력한 수단이었던 전통적 민속적 축제를 단절시키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 에로-그로, 불야성의 별천지라는 새로운 이 근대의 변질된 축제는 개인을 공동체에 동화시킬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편 이처럼 고대의 신성성으로부터 멀어지기는 하였지만 삶의 권태와 피로를 떨치고 위안을 얻는 축제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매체로서 유성기, 영화, 연극의 대두는 비근대인들을 근대인의 삶으로 체화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읽어내기도 한다.

 

반면 새로운 매체이긴 하나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는 소설이나 신문을 읽어주고, 전통 가락이나, 민속적 고적 문화를 들려줌으로써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하게 하는 등 전통적 유산을 부활시키는데 기여함으로써 외래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들이 부딪치고 굴절되어 대중문화로의 근대적 요소의 침투를 완충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저술의 대미라 할 수 있는 이상(李箱)과 채만식 두 문인의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민중문화가 지니고 있던 급진성과 전복성을 거세시킨 에로 그로 넌센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분석으로서, 고유의 비근대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 ‘죄지은 자의 징벌이라는 구조를 통한 풍자와 자조의 경향이 앞서는 냉소라는 작품 고유의 틀을 통찰하여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당대서사문학들에 대한 독법은 귀중한 문학적 지식기반을 제공하여 준다.

 

1930년대 우리사회를 깊숙이 들어가서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 그리고 넌센스라는 시대의 문화적 현상이 근대화를 어떻게 촉발하고 사람들을 변화시켰는지, 또한 그 변화과정에서 충돌하였던 시각문화와 청각문화의 조화, 현실의 불만과 우울을 해소하려는 욕구로서 이들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압축적으로 명쾌하게 서술되고 있는 이 저술은, 21세기 오늘의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소비과잉과 과시적 사회의 현상이 당시대의 야릇한 화두가 발설하고 있는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아 낯설지 않은 공감을 형성한다. 깔끔한 대중문화 연구서이자 유쾌한 문화역사 담론서로서 손색없는 저작으로 보다 풍부한 비판적 시선을 읽기를 위한 개괄입문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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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마인즈 - 문어, 바다, 그리고 의식의 기원
피터 고프리스미스 지음, 김수빈 옮김 / 이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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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정신)’에 대한 우리 인간의 지식이 소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조금씩 쌓여왔다. 오늘날 동물생태학의 시조라 불리는 윅스퀼에서 시작하여 생물철학자들인 마뚜라나와 바렐라를 경유하며 이 책의 저자인 피터 고프리스미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는 달랐지만 이들 비인간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수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책의 부제와 같이 문어와 갑오징어 등 두족류(頭足類,cephalopod)의 연구를 통해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의식이란 무엇인지,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적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일단 밋밋하고 흉물스러운 머리와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지닌 별로 매력적인 생김새라 할 수 없는 이 동물에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내 편견이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이렇게 알량한 이해를 전복시키는 과학철학적 내용임에도 저자가 주인공으로 나서서 들려주는 논구에 재미있는 옛 이야기처럼 빠져든다. 문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온통 문어요리 손질하는 법, 숙회 삶는 법 등 미식가들이 적어놓은 글들과 식당 광고들로 화면이 가득 채워진다.

 

그런데 문어가 통증을 느끼는 주관적 경험을 하고,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을 구분할 줄 알며, 따라서 목표 지향적이며 계획을 할 줄 아는 동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펄펄 끓는 물이 있는 솥단지에 던져 넣는 행위는 더없이 야만적 행위처럼 느껴질 것이다. 유럽연합은 동물실험 규범에 문어 등 두족류를 명예 척추동물로 등재함으로써 뇌 절제, 신경 절단 등 고통을 가하는 실험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명문화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사회의 어부들이나 식당들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주장이냐며 펄쩍 띌 것 같다. 아니 이들을 즐겨 먹는 우리들에게도 입맛을 거북하게 하는 주장으로 여겨질 것도 같다. 통증을 느끼는 동물을 식용의 대상으로 삼을지 말지는 이 책의 주제가 아니기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책은 언제부터 감각-행동 반응을 가진 동물이 출현했으며, 이러한 반응 행동을 위한 신경세포의 진화적 등장과 더불어 그것이 단세포에서 다세포 유기체에서 어떠한 기능의 요구에 의해 달성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문어 등 두족류가 우리 포유류 인간과 언제 공통조상에서 분기하여 각자의 고유한 신체 구조와 신경연결과 뇌를 발달시켜 왔는가를 추적한다. 고생물의 진화적 분기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의식의 차원으로 이어질 때면, 이 의식이란 것이 인간 등 척삭동물(등쪽 신경삭에서 유래한 중추신경계를 갖는 동물군)의 고유한 것이라는 이해에서 어떤 진화적 우월의식의 분기를 전제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는 중추신경계, 즉 큰 뇌를 발달시킨 동물에 대한 포유류의 자부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하고 활동적인 신체를 갖는 종을 배출한 동물문은 세 가지가 있다. 절지동물, 척삭동물, 그리고 연체동물의 한 집단인 두족류가 그러하다. 문어가 큰 뇌와 많은 뉴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겐 전혀 새로운 이해이다. 참문어는 대략 5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1천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뇌의 상대적 크기, 한 동물 개체가 뇌에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은 상대적 크기이다. 이러한 상대적 비교에서 문어는 단연코 엄청난 신경세포를 지닌 보기 드문 동물이다. 뇌는 행동을 제어하는 도구상자와 같다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이 도구상자는 일종의 인지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상정하곤 한다. 그렇다고 문어가 인간과 같은 인지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비롯한 척삭동물의 뇌 구조와 문어의 뇌구조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지녔다. 더구나 문어 한 개체가 지닌 뉴런은 뇌에 모여 있지 않고 다리에 뇌의 두 배에 달하는 뉴런이 분포되어 있다. 문어의 신체는 전체가 뉴런으로 덮여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두족류의 진화역사 - 신경계의 진화

 

잠시 진화의 사다리를 거슬러 이러한 신경세포가 왜 발달되어야 했는가의 의문은 캄브리아기 대폭발로 불리는 생물군의 무한한 다양성이 나타났던 시기에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신경세포의 진화가 생물체들에게 왜 필요하게 되었는가의 현상을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캄브리아기에 앞선 시기를 대략 65천만 년~54,200만 년의 에디아카라기(Ediacaran)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우리의 조상과 문어의 조상인 공통조상이 분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한 생물학자의 우연한 화석 발견에서 시작된다. 양치식물 잎사귀를 닮은 생물로 몸 전체가 누비이불처럼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으며, DNA로부터 신경계가 존재했음을 추정케 하는 동물 디킨소니아(Dickinsonia)이다. 아마 인간과 문어의 공통조상은 이 벌레 같은 동물과 닮았으리라 추정된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 디킨소니아(Dickinsonia) 화석

 

이들에게는 큰 눈도, 발톱도 가시도 껍데기도 없으며, 그 어떤 무기도 방패도 없다. 즉 캄브리아기가 도래하기 전인 이 시대의 생물들은 전혀 다른 생물을 감지할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음을 뜻한다. 이때에는 단세포가 다세포가 됨으로써 주변의 다른 세포들의 존재와 활동을 감각하던 것이 다세포, 즉 단세포의 뭉텅이가 됨으로써 다른 존재가 지각하고 반응하도록 하는 화학물질이라는 신호보내기가 자신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세포들 간의 상호작용을 위한 신호, 협응의 신호능력에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동물들 내부에서 일부 세포들 사이의 화학적 상호작용이 신경계의 기반이 되었다. 여기 한 가지 난제가 존재한다. 이 내부의 소란을 통제하기 위한 신경계의 구축은 비싼 경제적 대가를 요구한다. 매 초 수백 번씩 배터리가 충전되고 방전되는 전기적 경련을 위한 에너지는 매우 사치스러운 경제이다.

 

신경계는 왜, 뭘 위해서 필요했는가의 문제이다. 기본적 기능은 다세포 유기체가 자신의 지각 행위를 이끌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다세포유기체가 된 자신의 행위를 유용한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은 일과 본 것을 연결하는 일이다, 즉 주변환경을 포착하고 이 정보를 이용해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행위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무수한 일부분들이 만들어내는 수축, 뒤틀림, 경련들을 가지고 한 개체 차원에서 행위를 만들어내는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단세포들의 미세-행위들을 다세포인 하나의 유기체로서 거시-행위로 빚어내야 하는 것이다. 미시행위의 조정자로서 행위-형성적 능력을 초기 신경계가 한 것이다.

 

에디아카라기의 생존한 많은 생명체들은 이러한 기초적 신경세포를 구축했지만, 캄브리아기가 되자 이 세포유기체인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동물의 환경에서 주요한 일부분이 되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감각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이 시점부터 정신은 다른 정신에 반응하여 진화해왔다고 저자는 급진적으로 의인화된 표현을 구사하며 캄브리아기 고대 생물체들에 정보혁명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이때 겹눈, 카메라눈이 모두 등장했으며, 감각 정보의 유입으로 복잡한 정보를 내부에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빠르게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의 군비경쟁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포식이 등장하면서 서로의 존재가 생존이 결린 결정적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 새로운 관계는 연쇄반응을 촉발, 한 종의 진화가 다른 종에게 변화된 환경이 되었고, 그 다른 종 역시 그에 맞춰 진화해야 했다. 추적, 추격, 방어, 사냥감이 숨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는 진화능력을 갖추면 포식자는 추적하고 제압하는 능력을 향상시켜야 했다.”

 

이때 공통조상으로 분기된 두족류는 자기 길을 걷기 시작한다. 두족류는 초기에 껍데기로 몸을 싸고 있었다, 두족류의 하나인 앵무조개는 2억 년 전의 모습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 일부 두족류는 껍데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는데, 움직임의 자유를 얻는 대신에 취약함이라는 대가를 가지게 되었다. 갑오징어는 껍데기를 몸 안에 보존했으며, 오징어는 몸 안에 연갑이라는 칼 모양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문어는 완전히 껍데기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 이로써 자신의 눈알만한 크기의 구멍을 통과하는 몸의 형태를 지닌 유일한 두족류가 되었다. 완전한 유연성을 확보한 것이다.

 

문어, 갑오징어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서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나폴리동물연구소에서는 피터 듀스라는 인물에 의해 문어에 대한 행동연구가 실험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문어는 자신만의 생각을 지닌 동물임이 보고되었다. 장난과 호기심이 많고, 수족관의 불을 끄는 법을 익히고,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대상에게 물을 뿜기도 한다. 불을 끄기 위해 자리를 잡고 빛을 겨냥할 가치가 있음을 빠르게 익혔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이 야생이 아닌 수족관에 갇혀있다는 걸 모른다, 반면에 문어는 자신이 갇혀있음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상을 식별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은밀히 파악하고 있다가 보고 있지 않을 때 행동을 개시한다. 이 실험은 저자가 옥토폴리스로 불리는 시드니 해안의 15미터 해저에 열 두어 마리의 문어가 서식하는 야생에서의 관찰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옥토폴리스는 문어가 즐겨먹는 조가비들이 많은 곳이다. 그곳은 조가비 껍데기기 수북이 쌓여 그 사이에 굴을 만들어 들어앉아 서로를 주시하거나 간헐적으로 굴에서 나와 돌아다니거나 서로를 지나치다 다리를 내밀어 상대를 쿡 찔러보거나 탐색하며 그에 대한 응수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는 모습을 들려준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사냥하는 포식자로서 유연하고 까다로운 추출식 먹이 사냥을 한다. 문어의 다리에는 수많은 뉴런이 있다고 했다. 다리는 그 뉴런들에 의해 독자적인 감각-행동을 한다. 문어의 뉴런이 대량으로 증가한 것은 이렇게 제어하기 힘든 다리와의 협응과 제어를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신경세포의 필요는 내부적 제어를 위한 진화의 산물이었지만 그것은 부산물로써 부수적 이익을 가져왔다.

 

앞선 실험 사례처럼 외부 대상의 식별은 지각 항상성이라는 시점을 달리하여도 동일한 대상임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반면 척삭동물인 많은 새들은 이러한 지각 항상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비둘기 눈 실험에서 한 쪽 눈을 가리고 사물을 보게 했을 때, 다른 눈으로는 그 사물을 알지 못한다. 즉 비둘기는 반쪽의 뇌를 가졌다. 동일한 대상을 식별하지 못한다, 새들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안구(眼球)간 전달이 되지 않는 지각항상성이 결여되었기에 여러 방면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는 조잡스러운 임시방편으로 고안된 기술이다. 문어는 자신이 먹을 수 없는 새로운 사물에 호기심을 보인다. 대부분의 동물은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지만 문어는 한동안 그 사물을 잡고 이리저리 훑어보고 자신의 놀이기구로 삼는다. 이러한 관찰 사례들은 문어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의식의 한 편을 다른 차원에서 인식하게 한다.


일부 생물학자들은 저자의 문어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 경험을 의식으로 이해하는 데 반론을 편다. 경험하는 것은 생명체 개체 내부의 복잡한 활동들이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세계의 내적 모형이기에 문어와 같은 단순한 생물에게는 이러한 내적 세계의 모형이 없으므로 의식이란 어불성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통증이나 갈증, 호흡곤란과 같은 원초적 감정들, 즉 신체적 결핍과 상태를 파악하는 느낌과 같은 주관적 경험의 오래된 것들을 왜 의식이라 할 수 없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느낌들은 정교한 세계에 대한 내적 모형 없이도 느낄 수 있으며, 결코 복잡한 인지 처리 능력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회의적 태도는 언제나 가능하지만 통증은 보편적인 주관적 경험의 형태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 인간의 경험을 동물에게 투사하여 우리에게 없는 특성에 기대어 판단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문어는 심하게 손상된 자신의 다리를 잘라냈고, 부상 입은 부위를 한동안 살피고 보호했다. 돌봄과 보호는 통증의 지표이며,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구별하는 것은 주관적 경험 능력의 표지라는 것이다. 문어의 사냥 여행 관찰에서 저자는 고리 형태의 경로를 기록하며, 능동적으로 이동하고 제어가 가능하며 목표 지향적으로 가득한 삶의 모습을 여행을 마친 후 본래 자신의 굴에 돌아와 앉는 문어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의식으로써의 문어의 주관적 경험을 입증한다.

 

그 밖의 주관적 경험의 양태들

 

문어는 위장의 대가이다. 문어는 자기 주변의 색깔들과 완전하게 일치된 색깔로 변색한다. 이 뿐 아니라 수많은 화려한 색깔들로 수초 사이에 파노라마처럼 색을 변화하며 마치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듯하기도 한다. 색깔, 포즈, 디스플레이의 다양한 패턴으로 의례화(儀禮化)된 디스플레이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짝짓기 상황에서 신호와 반응의 조합은 그 다채로운 색깔의 변화가 미묘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일 수 있음을 비추기도 한다.

 

문어의 피부는 그 자체로 빛을 감각하며 동시에 피부의 색깔에 영향을 미치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문어는 피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정교한 색채 제어 기제를 조작하여 반응한다.”   -본문 166쪽에서

 

정말 놀라운 것이기도 한데, 노란색, 은회색, 검붉은 색 등 무수한 색깔로 자신의 신체를 변색하는 문어가 실은 색맹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변화하는 찬란한 색을 볼 수 없다면 이 무슨 해괴망측하고 사치스러운 조화란 말인가? 막대한 비용을 소요하는 이 변색은 위장과 신호보내기를 위한 진화 산물이었으며, 그 부산물로 위장과 신호보내기의 중간적 위치인 데이마틱 디스플레이(deimatic display)라는 포식자로부터 도주하면서 생성하는 강한 대비의 패턴을 통해 적을 놀라게 하거나 혼동케 하려는 시도의 효과를 얻었으며, 나아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표지, 일종의 언어(?)로의 가능성을 얻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즉 위장 기제가 의사소통과 정보 전파의 수단이라는 새로운 쓰임을 얻은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눈은 색맹이지만 피부 세포는 이러한 빛을 감지하는 소포들이 있어 자신의 색깔을 피부가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변화하는 색깔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판단은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비고츠키나 다윈과 같은 탁월한 생물학자들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언어는 복잡한 사고에 필수적 중요 도구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언어 없이는 지각, 인지와 같은 의식에 다른 행동은 불가능하다며 문어와 같은 단순한 두족류의 감각-행위행위-형성적 활동을 부정했다. 그러나 내면의 언어적 흐름 없이도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조직화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언어 중추가 손상된 실어증 환자의 실험 사례는 언어를 잃었어도 주변세계의 감각과 판단, 행동에 문제가 없었으며, 단 세 가지 정도의 소리를 내는 개코원숭이는 이러한 단순한 소리를 해석하여 주변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 없이 인지-판단-행동 활동은 부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어도 역시 이러한 경험 기억과 계획하는 마음이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 어

 

2015년 처음으로 문어의 유전체 염기서열이 분석 되었던 모양이다. 각 개체의 생애 동안 신경계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읽었는데, 인간의 몸에서 발견되는 세포가 정확하게 연결되도록 하는 프로토카트헤린이라는 분자군이 문어에게서도 동일한 일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문어와 인간이 유사한 분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다. 또한 최근의 갑오징어 연구에서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인 일화기억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의 기억과 구분하기 위해 주관적 경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유사 일화기억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 용어를 동물에게 적용해도 되는 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명명일 것이다. 특정한 먹이로 무엇을, 언제,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료한 기억을 지녔음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각기 다른 계열에서 거의 확실히 평행 진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전혀 다른 신체에서 큰 뇌를 진화시킨 이들 두족류의 신경계 진화는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왔던 인간중심주의는 이제 그 환상이 비인간들의 적대가 환경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관계로 이해될 것을 요구하는 도전과 마주하고 있다육지 생물은 물론 바다의 생물도 남획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점증하는 스트레스로 사라지고 있다. 어떤 생물체도 살아갈 수 없는 오염물질과 산소가 희박한 데드존이 바다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1883년 다윈의 전사를 자처했던 토마스 헉슬리는 "중요한 물고기의 어장은 무한정에 가깝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낙관론은 틀렸으며,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바닷물의 산성화로 PH균형도가 무너지면서 유기체들의 영향이 심각한 것이 각종 생물체의 군집 붕괴현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수년 간 바다 속 야생의 문어 관찰지였던 옥토폴리스에도 문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바다를 기원으로 한 생명체들이다. 기원이 파괴되고 있다. 아더 마인즈(Other Minds), 타자의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저술은 큰 신경계를 지녔으며, 일화기억은 물론 풍부한 주관적 경험의 실례들을 지닌 문어, 갑오징어 등 이들 두족류가 통증을 느끼는 생명체일 가능성을 강렬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비인간들의 마음의 세계를 마치 인간의 다운그레이드(down-grade)된 버전 정도로 인간적 경험으로 투사하는 인식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그들만의 독특한 마음(?)이 있음을, 그것을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생태학적 문제는 물론 행성 지구의 보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나무, 그 어느 지점에서 분기된 공통조상을 지닌 생태계 만물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획득하게 되는 저술이다. 의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타자에 대한 이해는 극단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 그 타자가 문어가 되었건 저 어느 곳에서 배제된 채 고립된 존재들이건 그들의 주관적 경험이란 것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이 행성을 조금은 더 살아있음의 풍요로운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다 속 낯선 존재, 징그러운 외형의 연체동물, 문어의 삶을 쫓다보니 더는 이들 두족류를 먹거리로 여기는 게 불편해진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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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문학 여성문학의 길을 열었던 김명순의 소설을 몇 차례에 나눠 각 작품의 내용과 소소한 몇 글자 감상기록으로 남겨둔다. 191711청춘11호를 통해 작가 생활을 시작케 했던 의심의 소녀19203월 작가의 아명이자 필명이기도 했던 탄실 이전에 망향초(望洋草)라는 필명으로 여자계4호에 게재했던 조모의 묘전에서, 그리고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1년 남짓한 교토의 음악학교로 추정되는 생활 끝에 학비와 생활비의 곤궁으로 다시 귀국한 192112~192222회에 걸쳐 개벽18~19호에 연재했던 칠면조세 편으로 시작하련다.

 

彈實김명순 1896.1.20.~1951.6.22


단편 의심의 소녀는 내겐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 산월에 대한 애도이자 자기 삶에 대한 주체자로서의 세상을 향한 투명한 공개선언으로 여겨진다. 소설은 평양의 한 마을에 기거하게 된 범네로 불리는 8,9세 소녀와 그녀의 외할아버지 황진사에 대해 동리 사람들의 의혹에 가득 찬 시선으로부터 그네들의 삶에 드리웠던 진실을 점진적으로 드러내며, 당대 세력을 지닌 남성들의 중혼과 축첩의 야만성과 그로인한 모욕과 폭력에 더불어 이를 감당하여야만 했던 여인네들의 삶의 현실에 애도를 보낸다.

 

소녀 범네에 대한 세간의 묘사를 보면 풋남() 순안치마에 담황색 겹저고리 입고 분홍신을 신었다....실로 새마을 동리 소녀들과는 군계일학 이지만 그 어여쁜 얼굴에는 어린 아이에게는 없을 비애(悲哀)에 지친 빛이 보인다.“ 오지랖 넓은 마을 아낙네는 어느 날 황진사와 범네가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한 남자의 행적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전해들은 마을 이장의 목소리로 범네는 탕자인 조 국장과 강제 혼인하게 되었던 황진사의 무남독녀가 낳은 딸 가희(佳姬)임이 드러난다.

 

조 국장이라는 자는 경성에 세력의 기반을 둔 여색에 몰두하는 파렴치한이다. 이 자는 세 번 처를 바꾸고 첩을 갈기도 10여 인이고, 화류에 놀고 촌백성 계집까지 희롱하는그야말로 희대의 탕자(蕩子)이다. 범네, 즉 가희의 어머니인 조 국장 부인은 학대와 감금의 비관 끝에 24세에 자결하였으며, 황진사는 어린 가희가 조 국장의 첩들에 의해 곤경을 겪을 것을 걱정해 이름을 범네로 바꾸고 조 국장의 시선을 피해 방랑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이 소설이 이광수에 의해 선외가작으로 뽑혀 청춘에 등단하게 된 것은 중혼과 축첩이라는 악습에 대한 얼마간의 시대적 공감이 태동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단편 조모(祖母)의 묘전(墓前)에서는 장편(掌篇;손바닥)소설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인데, 여성의 혼인 풍습이 지닌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다. 박춘채(春菜)는 열일곱 여성이다. 당시 유명한 여자 묵화가인 할머니 운계(雲溪)여사의 손녀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한다. 그런데 운계여사에게는 남자 자식이 없어, 상철이라는 사내를 아들로 입적시킨다. 운계가 임종하자 막대한 유산을 가로 챈 상철이란 자는 사업을 벌이다 운계로부터 받은 상속 재산은 물론 춘채의 재산까지 몰수하여 말아먹는다.

 

이에 더해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되자 춘채를 채권자의 방탕한 자식 김영수에게 부리나케 시집보낼 준비에 돌입한다. 작가 김명순은 아들 입적이라는 당대 호주 상속제에 의문을 보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성을 한낱 금전적 소모품으로 여기는 가부장제 남성들과 사회 인식에 대한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유탕자(遊蕩子)는 심산에 나날이 시들어 말라가는 산 백합을 돌아도 

안 볼 뿐 아니라도화의 이름 난 기생을 작첩하였다

상철의 부처는 춘채를 김수영에게 약혼시켰으므로 

부채를 담당치 않고...” - 조모(祖母)의 묘전(墓前)에서에서

 

처를 박대하는 것은 물론 구타와 학대를 일상으로 자행하는 유탕자(遊蕩子)에게 춘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재정적 이익을 위해 혼사가 강행된다. 소설의 제목이 할머니 묘지 앞에서인 것은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몰린 춘채가 할머니 묘소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하소연하기 때문이며. 바로 그 탄식의 음성에 고스란히 당대 남성중심의 질서에 대한 강한 전복의 의지가 있음이다. 치욕의 혼인 가마를 김씨 댁 문내에 머무를 손녀의 비운을 모르십니까?”에 이어, 금지옥엽 길러주신 열일곱 생명이 구수(仇讐)되어 금전에 바뀌어 물품같이 유탕자(遊蕩子)의 희생이 되어가는 손녀의 운명을 어찌하오리까?”라고 할머니 묘소 앞에서 부르짖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한 여성의 자기 주체로서의 분노에 찬 항의였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에 의해 채색되어 문란한 여성으로 낙인이 찍혀 문단 내 남성 작가들을 비롯, 세간의 온갖 혐오스러운 비난은 김명순을 재차 일본의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그러나 그 식민제국인 일본 유학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에 똬리를 튼 또 다른 식민지 조선 남성들의 동족 여성들에 대한 성 착취의 시선이고, 경제적 곤궁의 고통이었다. 필요 생활경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모국으로 돌아 온 직후 개벽에 발표한 소설이 칠면조.

 

【《開闢18호에 게재된 소설 ‘칠면조(七面鳥’), 김명순 여사로 표기됨.


칠면조는 조금 독특한 소설인데, 서간문, 즉 편지의 형식을 띤 작품이라는 것이다. 즉 서간문이란 수신자를 향한 쓰는 이의 내면이 밝혀지는 글이며, 그것이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을 알며 쓰는 편지의 경우 일종의 자기고백으로, 자신에게 향하는 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수신자는 -나 슐츠 선생으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소설의 화자가 교토 음악학교를 다닐 때의 스승으로 짐작된다. 즉 음악(피아노)학교 시절에 대한 자신의 고단한 삶의 여정에 대한 내적 고백의 기록이라는 얘기다. 서구 문명에 대한 이른 학습을 했던 작가 김명순은 칠면조라는 단어가 말이 많지만 의미 없는 소리어리석은 사람을 은유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특히 실패자라는 의미로 암암리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두 번째 감행된 1920년에서 1921년의 1년 남짓한 일본 유학생활은 그녀의 의지를 다방면에서 좌절케 하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소설에서 K()라고 표기되는 지역은 교토(京都)를 이르는 것일 게다. 음악학교는 화자에게 월사금을 보증하는 사람을 세울 것을 요구하고, 궁여지책 끝에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재일 조선인 노동자 박의 보증을 받게 되지만 그 남자의 태도에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 박이 화자에게 아직도 여자답고 활발치 못한 데가 있다고 무엇을 풀어버리라는 듯이 말하였습니다.”와 같이 은근한 성적 개방의 요구를 암시하는 말을 건넨다.

 

화자는 D씨로 불리는 미소하던 흰 얼굴에 시원한 눈이 애교있는 입이 기꺼운 해조(諧調)를 외우려는 듯한세련된 젊은 남성에게 호감이 있다. 그러나 화자는 세상에 대한 불안의 시선이 내재되어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망설인다. 사교계에 나서려는 것은 과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실 사회는 너무도 잔혹하지 않을까 겁도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대 여성의 자기 억압으로 온전한 주체를 정립하는 데 여전히 불안의 심리를 떨쳐내지 못했음의 자기 성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은 화자의 이러한 세상 남자들과의 자유로운 교제의 생각에 음란한, 문란한 이라는 혐오의 수식어를 붙이며 여성의 자유는 곧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라고 사회 밖으로 내쫓는다. 안 뜰에 심겨진 동백꽃 나무에서는 비 맞는 꽃송이들이 그 담 밖 길가에 떨어졌습니다.”라는 시적 문장은 화자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내쳐질 것을 예감하는 문장일 것 이다. 1917년으로부터 1921년에 이르는 대략 5년 남짓한 시간의 경과 속에서 작가 김명순이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여전히 높은 불안이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 같다. 김명순의 소설은 시적 정체성과 아울러 당대 조선인들의 지적 수준을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김명순은 이러한 내적 불안과 외적 공포라는 이중의 적들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김명순 소설의 두 번째 감상기록은 당대 식민지조선의 남성들이 지닌 자유연애와 여성의 성적 정결에 대한 이중의 모순에 놓인 위태로운 욕망의 갈등을 묘파하는 외로운 사람들이 될 것 같다. 이 소설은 탄실이와 주영이에 한 달 앞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오늘날 경장편 분량의 작품으로, 당대 남성 문인들이 김명순에 가하는 질시와 혐오가 본격적으로 가해지는 시기에 즈음한 작품이기에 예사롭지 않은 글이라 하겠다. 김명순은 영어, 독일어, 일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했던 남녀불문 당대 보기 드문 지식엘리트였다. 이 특출한 여성에 대한 못난 식민지조선 남성들의 머리와 욕구는 여전히 전근대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으니 그 간극만큼이나 각성한 여성 주체의 삶은 커다란 고통이었을 것이다. 으이그 지지리 못난 놈들의 역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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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 - 김명순 소설집
김명순 지음, 송명희 엮음 / 한국문화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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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실이와 주영이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背後より)에 대해서

 

1924614일부터 같은 해 715일까지 조선일보(朝鮮日報)27회 연재된 김명순의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는 당대 신여성이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과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또한 여성 대다수인 구여성은 물론 동료 신여성에게 조차 한 인격체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발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한국문학사에 있어 최초의 여성 저항의 음성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또 다른 측면에선 당시 일본의 소설가로서 김명순을 모델로 쓰여졌다는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背後より)에 대한 비판적 위치에서 써진 김명순 자신과 조선인으로서의 변호의 소설이기도 하다.

 

카프(KAPF)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김기진은 김명순이 나카니시 소설의 모델(순결을 잃는 여성인물-주영이)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원색적 비하와 혐오 발언을 쏟아 부었다. 또한 방정환은 공개장을 통해 자신들의 공개장에 대한 김명순의 반박문 게재 지면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신문 지면을 통해 김명순의 명예를 더없이 추락시킨다. 김동인이 김명순을 모델로 한 소설을 발표하여 2차 가해를 가하며 가장 더러운 추행을 가하기까지 한다. 이들 당대 문단의 남성 작가들은 문란하고 더러운 여성의 이미지를 그녀에게 가두고 매체를 이용하여 방탕하고 오염된 여성으로서의 낙인을 찍는다. 자신들의 좌절된 욕망과 한계를 김명순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투사하여 공격하면서 그 비루한 감정을 배설했다.

 

공개장, 신문, 잡지 등 온갖 매체를 이용한 이들의 공격은 대중에게 학습되고 용해되어 광범위하게 김명순과 신여성에 대한 혐오감정으로 퍼져나갔다. 식민지조선의 남성들의 저열하고 무분별했던 당대의 사태를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서 일종의 못난 놈들의 비열한 시기심과 그 천박하고 무지한 욕망의 방향이 식민지 통치 권력인 일제로 향하지 않고 자신들의 동료인 잘난 여성에게 향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집을 읽게 된 배경에 대한 약술은 이쯤하기로 한다.

 

이 책 외로운 사람들은 김명순이 작가로 데뷔하게 되는 191711월 잡지 청춘(靑春)11호에 게재된 의심의 소녀에서부터 192112월부터 19221개벽(開闢)18~19호에 연재된 칠면조를 비롯, 신여성(新女性),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문단등에 연재되거나 게재된 총 15편의 소설 작품 모음이다. 표제가 된 외로운 사람들탄실이와 주영이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직전인 1924420일부터 같은 해 531일까지 연재된 거의 장편 분량에 가까운 소설이다. 수록된 많은 작품들이 원본 결락과 부분 손상으로 인하여 완전성을 지니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탄실이와 주영이가 어떠한 사유도 없이 돌연 연재 중단되었던 사정도 알길 없이 미완의 작품으로 수록될 수밖에 없었음에 애석함이 가득하다. 당대 문단은 물론 오랜 시간 김명순을 한국문학사에 지워버리려 했던 남성문인들의 작태가 거들었던 비열함의 흔적인 것만 같아 더욱 분노가 치민다.

 


단편 탄실이와 주영이에 대해서;

 

탄실은 김명순의 아명(兒名)이자 필명(筆名)이다. ‘주영은 일본 소설가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背後より)의 여성 주인공 이름이다.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가 두 명의 남성 문인(시인과 소설가)이 탄실이 의지처를 삼고 있는 이복오빠인 의사 김정택의 병원을 방문하여 너희들의 등 뒤에서가 탄실을 모델로 하였음을 화제로 하여 탄실의 정절 상실에 대한 당대 남성들의 시선에 도사리고 있는 이중의 모순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또한 나카니시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동정의 연민을 보내지만, 그의 소설적 상상력이란 자신의 욕망을 식민지 조선인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지배적 평가처럼 소설을 통해 일본인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우리(조선인)에게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는 반론이다. 탄실은 이러한 일본인 작가의 은폐된 욕망을 간파하고 있다. 이는 조선인 두 문학청년을 향해 탄실의 처지를 두둔하는 의사 김정택의 입을 통해 대변되고 있다.

 

소설의 시작 문장은 당대 식민지조선 서울 종로의 풍경과 그 안의 인간군상의 모습이 대비되어 기술되고 있다.

 

“6월 초승의 요사이 일기로는 아주 더운 어느 날 오후였다. 석양은 지금 황금빛같이 찬란함으로 조선 서울 종로 네거리에 뜨겁게 내리비친다....상점의 광고판들...,종로경찰서 지붕 위 독일병정 모자 같은 시계,...지루한 볕에 반짝이는 반()서양식 건물의 유리창들...마치 찬란한 심포니를 보는 것 같을 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의 구릿빛같이 무르익을 것을 저들의 약함으로써 받는 모든 학대 때문에, 기운이 쇠침해지고 행동이 느려져서 전체로 빈혈 된 그들의 얼굴에는 붉은빛이라고는 볼 수 없고, 누렇고 검어서 부질없이 의지 약한 힘없음을 보인다.“

 

일본 경제의 소비 도시화된 식민지 경제의 지루한 찬란함과 무력감과 무능함, 비루함으로 체화된 인간들을 이렇게 소설의 전면 배경으로 삼은 것은 김명순이 식민지 조선과 그 나라의 사람들에 지니는 비판적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이 성폭력의 피해자를 문란한 여성으로 매도하는 데 대한 단순한 변명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 병정처럼 뾰족하게 높이 치솟은 시계탑 같은 일제의 억압에 눌려 의지가 빈약해진 남성들은 자신들의 결여와 무능을 가부장적 남성의 권위의식을 통해 조선의 여성들을 이중으로 식민화했다.

 

남성들은 근대화와 함께 밀려든 서구 문명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정신적 사랑의 물결에 대한 동경으로 지적이고 세련된 신여성을 욕망하면서 그런 여성들이 성적 사회적 욕망의 각성을 통한 주체로의 전환, 공동체적 자아로의 확장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발견을 향한 탐색에 나설 때는 방종하고 문란한 여성이라는 딱지를 붙여 여성 주체의 언어를 말하는 여성을 무참히 내몰아 매장해버렸다. 탄실이와 주영이는 바로 여성의 성적 운명, 즉 순결한가, 순결을 잃었는가에 따라 여성에 대한 평판이 좌우되었던 가부장제 식민지 조선의 남성중심사회에서 자기 존재를 새로이 증명하려는 깊은 투쟁이다.

 

김정택과 두 문인 청년의 대화에서 소비되고 있는 일본작가의 주영이는 남성들의 성적 뒷담화로 소비되는 탄실의 왜곡된 성으로 대상화된 소모품이다. 탄실은 이렇게 자신을 왜곡하여 소비하는 세계에 대항하여 스스로 말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삶을 언어화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의 허영과 허위의식들인 그 무의미를 도처에서 들추어낸다. 한 문인청년은 말한다. 탄실이가 정조를 잃고 그 사나이에게 달려들던 생각을 하면 어찌 한낱 여자가 그다지 지독한지 치가 떨려집니다....그 남자를....사랑도 안 하면서 다시는 육체적 관계도 맺지 않으려면서 강제로 한 남자의 일평생 행복을 흐지부지 해주려 했던 것입니다.” 탄실을 겁탈했던 조선인 일본육사출신의 장교의 행위에 대한 탄실의 저항을 지독하다고, 그 남성의 일평생을 망가뜨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여성에 씌워진 순종과 무력감, 수치심으로의 절망과 침묵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발설이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꾸는 뒤넘스러운 언설인 것이다.

 

탄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이복오빠 김정택의 다음의 문장은 그녀의 자신의 목소리일 것이다. 탄실이는 그 반대로 조선 사람이면서 일본 사람의 생활 감정에 동화된 조선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았네.” 라거나, 분명한 짐승 같은 것에게 팔 힘으로 앗기었다 하면, 시방도 바로 듣지 않고 내 누이만을 불량성 가진 여자로, 때문에 탄실은 참 작은 한 여자의 10년 동안 걸어 온 길이 지독히도 무서워라는 말처럼 문단은 물론 사회 대중으로부터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의 길이었음의 증언 일 것이다. 소설은 신문 연재소설이 지닌 한계를 화자의 전환으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데, 탄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연재일마다 번갈아 서술되면서 문자그대로의 한 여성의 성장과 과거의 삶을 여성 주체자로서의 목소리로 드러낸다.

 

어머니 산월이의 가문이 갑오경장 이후 몰락함에 따라 삶의 형편으로 기생으로 팔리게 되고, 평양의 거부 김형우의 첩실이 되는 일련의 이야기가 담담히 흐른다. 당대 일반 평민의 팍팍한 삶의 형편이란 것이 이러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한 개인에 그 어떤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그의 선악을 평가할 수 있냐는 항변일 것이다. 어머니 산월이를 이끌어 교회에 갔던 날의 기억을 술회할 때, 세상이 어린 탄실에게 손가락질하며 기생의 딸, 첩년의 딸이라는 차별의 호명으로 어머니를 멀리하려 했던, 다시 말해 자신의 출신과 관련한 어머니에 대한 불신과 부정의 의식의 전환을 보여주며, 당대 여성의 삶을 당당하게 진술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로서의 거듭남을 선언하는 것으로 읽힌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세상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가졌습니다.”라는 교회사목의 말에 산월은 이렇게 대답한다. 여러분이 아다시피 기생이라는 것은 남의 큰마누라가 되는 법이 없으니까 자연히 나도 남의 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지금은 내 한 몸도 아니고 이런 어린 것이 있고 보니 그 집에서 나올 수도 없지 않습니까....이 세상 사람이 죄다 죄악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느님이실지라도 그것을 일절 헤아리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기생이라 주눅들지 않으며 여성으로서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삶을 어떻게 당신들은 죄악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이제 좀 건너뛰어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 몰래 일본 유학길에 나선 열여덟 어린 여성 탄실의 사정이 술회된다. 그녀가 관찰한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인 남성들의 모습들이란 그야말로 비루하기 그지없다. 일본 유학생 군인들은 분풀인지 낙담인지를 향할 곳 없어서 되는 대로 방탕에 몸을 맡겼다. 입으로 한국을 근심하고 상관을 욕해서 그럴 듯이 인심을 사놓고....운동비를 무척 탐해서 소비해버리고 나라가 글러서 그렇다고 핑계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열성스러운 의의도 분명히 갖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잃겠다....그런 중에서도 서로 음모하고, 서로 욕하기는 잊지 않았다.” 며 이미 심리적 종이 된 식민지 조선 남성들의 방종과 다름없는 자유를 비판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요. 심한 경멸이라고.

 

탄실 김명순은 소설을 통해 자신에게 씌워진 성폭력피해자는 곧 문란한 신여성이라는 낙인, 망가진 정체성을 벗어나기 위한 고군분투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낙인을 벗어나려는,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 질서가 근원적으로 봉쇄했던 여성의 삶에 대한 언어의 진술을 통해서 자신을 가둔 채색된 이미지로부터 탈주하여 여성이라는 제한적 이해가 아닌 보편성으로서의 인간으로 인식되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던 사회문화적 폭력에 맞서는 동시에 작품을 통해 새롭게 여성을 재정의 하려는 절박한 이 시도는 좌절되었다. 소설의 연재는 완료되지 못하고 중간에 소리 소문 없이 중단되어 끝내 그녀의 문학적 시도는 지배집단의 경계 바깥으로 내쳐지고 만다.

 

나는 이 경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남이 겉으로 명예를 찾을 때 나는 속으로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한 마디의 모욕을 백 마디로 갚고 싶었다.”

 

남성중심 사회의 강고한 질서에 대항하여 여성으로서의 자기주장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김명순은 생생하게 입증했다. 그녀에게 가해진 그 거친 모욕들을 갚지 못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다 쓸쓸히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뇌병원(靑山腦病院)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 또한 그 어떤 지배질서 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비단 젠더 투쟁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변화를 향한 욕망의 실천에서의 그 처참한 곤경을 발견하게 한다.

 

멍투성이로 실패한 여성 전사를 만나는 우리 근대소설의 읽기는 오늘에도 여전한 전근대적 성역할 고정 관념에 충실한 불평등과 불의의 문제가 잔존하고 있다는 문제인식 때문이다. 이미 지나쳐 온 20세기 한국문학 읽기는 서구의 문학들과 달리 바로 오늘의 우리네 문제에 그대로 계승 또는 이전되고 있기에 소설 문학의 미적 양태 이상의 감상을 던져준다. 이제 막 시작했다, 김명순의 소설로 시작된 한국근대문학 읽기는 내게 어린 시절 수동적으로 수용되어야만 했던 그런 읽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시선과 감응으로서의 이야기들로 전해져온다. 이선희로 갈까, 백신애로 갈까, 인격적 소통과 외설적 가능성을 여는 사랑이라는 곤경 앞에선 이선희의 글쓰기로 갈까, 아니면 김명순의 처절한 배제를 본 백신애의 광기로 갈까


[참고] 본 소설의 1924년 연재분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신문사와 일자를 검색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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