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얼굴 - 얼굴로 본 인간 진화의 기원
애덤 윌킨스 지음, 김수민 옮김, 김준홍 감수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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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얼굴 구조에 대한 21세기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미시간해부학교수를 지낸 도널드 엔로(Donald H. Enlow)인간의 얼굴은 특이하다. 일반적 포유류의 기준에서 인간의 이목구비는 이례적이고 전문화되었으며, 어떻게 보면 기이하기까지 하다.”며 그 특이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보아 온 인간 얼굴의 익숙함은 한 번도 왜 이런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해부학자의 말처럼 그 어떤 포유류와도 닮지 않은 피부가 드러난 얼굴과, 주둥이가 길게 튀어나오지도 않았으며, 한 평면에 나란히 눈과 코, , 그리고 이마가 수직으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 인간 얼굴(Making Faces)은 바로 이러한 인간 얼굴의 형태가 왜 오늘의 모습을 하게 되었는가의 물음에 대한 지난한 추적의 기록이다. 그것은 5억만 년 전 눈도 코도 없는 동물로부터 시작되어 눈과 입, 턱과 뇌를 지니는 동물로 변화하는 진화적 사건들과 그것들을 촉발한 자연의 선택압들, 그때 이러한 선택압에 대응하여 변이를 만들어내고 적응케 하였던 유전자와 세포들, 유전자 네트워크,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가한 선택압에 대한 복잡하기 이를데없는 유전자 조절 시스템의 기능과 역할, 작용을 탐사한다. 고생물학에서 시작하여 생물의 본질인 유전자와 세포의 기능과 역할, 그 구조와 형태의 발현에 이르는 진화론적 이론들과 증거를 파헤치고 추정하며 규명한다. 생물학적 진화의 그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완벽함의 과정을 따라가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1장에서 4장에 이르는 얼굴을 만드는 유전자와 유전적 기반, 발생학적 이론들의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야말로 5장에서 10장에 이르는 흥미진진한 얼굴의 진화역사와 얼굴 형성에 작용하는 정신적, 사회적 역할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 얼굴이 품고 있는 그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물학적 의미는 물론 역사성과 사회성의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이 책의 논지, 즉 지향점은 인간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들기 위한 형태로 진화했다는 것으로 압축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문장은 척추동물 문에서 그 하위 계통인 포유동물 아문으로 분지하면서 영장류인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인 호미닌의 진화에 작용한 힘을 시사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눈도 코도, 얼굴이 없는 동물이 눈과 턱, 이빨이 있는 얼굴을 지니게 되는 5억만 년이란 긴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의 유전자의 기능과 역할을 보는 것은 이후의 진화적 사건을 이해하는 과학지식의 토대를 제공하고, 다시금 두뇌와 사지(四肢)가 발생하고, 그 생성에 작용하는 유전자기반을 이해하는 것도 쏠쏠한 생물학적 유전학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얼굴의 형태가 지닌 함의(含意). 왜 다른 포유동물들은 주둥이가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있는데 유독 인간을 비롯한 호미닌 계열의 종은 주둥이가 퇴화되었을까? 하는 질문이나, 왜 얼굴에서 털이 사라졌을까?, 한 쌍의 눈과 입, 작은 턱이 대칭으로 구성되고, 이마를 지니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수직적인 평면에 정면을 보도록 모아져 있을까? 의 물음에 대한 경이로운 응답이 바로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형태상의 차이점들은 진화적 변이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징후이자

변이가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인류가 하고 있는 지금의 얼굴에 이르는 데는 놀라운 다양성을 가진 모든 복잡한 유전자 조절 시스템의 진화를 통한 발현이 있다. 진화과정은 어떤 계획에 의한 제작물의 일사천리식 조립이 아니다. ‘어설픈 땜장이의 작업처럼 기존의 유전적 장치의 일부를 차용하고 조정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는 시행착오의 반복이다. 실패하면 자연계에서 버려지고, 성공하면 남아 후손에 그 형질을 전달하면서 살아남아 지속되는 적응의 존재들이다. 침팬지는 눈 위부분이 뒤로 경사면을 이루어 이마가 거의 없다. 반면 인간은 이마가 앞으로 튀어나와 얼굴 전체의 수직면 상부를 이룬다. 뇌 특히 대뇌피질의 발달 때문이다. 대뇌피질의 발달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주둥이의 퇴화도 단지 입으로 사냥감을 묻어 뜯을 일이 없어졌다거나 나뭇가지나 풀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이유만이 아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다리가 아닌 두 다리의 직립보행과 앞발의 손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손의 사용으로 턱과 입의 형태가 돌출될 필요가 없어진 것이고, 이러한 선택압은 유전자의 돌연변이, 형질 변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주둥이의 퇴화는 눈이 정면으로 모이고, 손에 자유를 주었을 것이다. 이로써 감각수신 정보는 더욱 입체적이 되었고, 손은 사회적 동물인 조상 호미닌들의 몸짓과 손짓이라는 의사소통의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의 증대는 정보의 해석과 활용을 위한 신경계의 증가를 압박했을 것이며, 이는 다시금 두뇌의 크기를 증가토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의사소통의 증대는 단지 눈과 코와 턱의 조정과 손의 사용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닐 것이고, 얼굴에 있던 털이 제거된 일부 종이 성선택에서 유리한 혜택을 지니게 됨으로써 변이 형질로 폭넓게 채택되었을 것이다. 털이 사라지고 드러난 입과 눈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상대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이는 의사소통을 더욱 증진시켰을 것이며, 두뇌의 신경세포들과 연결망 확장의 강한 선택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 언어의 사용과 뇌 규모의 물리적 한계에 이르면서 지금의 얼굴 형태로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이 간략하고 거칠게 표현된 인간 얼굴의 진화과정은 일관되게 하나의 현상으로 향하고 있다. 얼굴은 의사소통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정신적 능력의 되먹임 과정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저자 애덤 윌킨스는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강조처럼 사회적 두뇌가설 동물의 문화적 진화를 기반으로 인류 진화의 비밀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야기된 상태의 등장, 이 상태가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면 이를 생명체의 고정된 부분으로 만드는 돌연변이를 위한 선택압이 되어 유전되고, 결국 표현형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지금의 인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한 적응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얼굴 의식이라는 개성과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동요인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새롭게 획득된 특성으로써, 사회적 정보 교환을 위해 얼굴 인식이 증가했음을 그 방증으로 세우고 있다. 즉 문화가 지속적으로 성장함으로써 더 많고 다양한 사회적 접촉이 발생하고 이러한 되먹임은 얼굴 의식을 더욱 성장하고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아울러 얼굴 이미지의 과잉시대가 된 현대사회의 얼굴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말한다.

 

, , 입술, 턱에 이르는 미용 성형의 증가라는 자신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 얼굴에 물리적 변화를 가하는 최초의 동물로서 인간의 얼굴에 대한 집착을 성찰하기도 한다. 이에 더해 세계화의 물결 속에 민족적으로 다른 생김새를 한 사람들의 이동은 이들 교배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점점 균질화되어 아마도 아시아인에 가까운 생김새로 수렴될 것이라 예측하기도 한다. 결국 민족 집단의 차이들을 만드는 표현형 요소도 감소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민족 집단에서 타자의 다른 얼굴들을 구분할 줄 안다. 아마 70억 인류의 얼굴은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모두 다르다. 이러한 다양성의 존재 이유는 물론 차이의 인지 능력 또한 적극적으로 선택된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의 유전자 총 개수 21천개 중 단 32개면 70억 인간이 모두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증식 가능성과 조합 능력을 우리들은 지니고 있다. 정말 경이로운 것은 겉모습은 전부 다르지만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이 가진 수없이 다양한 얼굴은 바로 이러한 잠재된 엄청난 유전적 능력의 소산이다. 그저 이 신비로운 자연선택의 과정에 경탄을 내지를 밖에 없다. 인간 개개인 모두의 존엄함의 생물학적 표현이라 해도 될 것이다. 얼굴은 한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대표하는 신분증이다. 그 어떤 타자도 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얼굴을 대신할 수 없음이다. ‘자네 얼굴 한 번 보여주게.’라는 말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이 품격 있는 인간 진화의 책은 바로 인간 삶에서 얼굴이 이렇게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것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다. “인간의 얼굴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광범위하게 표현 할 수 있도록 매우 정교하고 민감하게 진화한 도구라 할 수 있다.

 

획득 형질도 동물 행태의 변화에 기여하는 진화적 힘일 수 있다.”

 

이제 라마르크의 개선된 후성 유전에 대한 설명으로 야기된 하나의 돌발 상상으로 감상을 마쳐야겠다. 발생 생물학자 C.H. 와딩턴은 환경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발달 변화들이 새로운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바꾼다면, 그래서 적응적 가치를 가진다면, 발달적 변화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돌연변이를 위한 선택압이 있을 것이라며, 새로운 행동들이 유전적 변화들을 위한 선택압을 만들어내, 이 변화들이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형태변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싶은 기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성형을 하는 인간 집단의 세계에서 그 행동들로 인해 변화된 얼굴 형태의 유전자 변이가 발생하고 세대로 이어질까하는 상각이었다. 일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이 유전자 변형의 선택압으로 작용했으며, 진화의 적응 산물이라면, 즉 동물의 문화적 진화도 하나의 선택압으로 작용한다면 왜 후성 유전이 안 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하는 상상이었다. 과연 자연은 이러한 인위적 인간의 행동에 어떤 적응으로 화답할지 모르겠다. 미래 인류의 얼굴은 정말 균질화 될까?

 

인간 얼굴의 진화를 담은 이 책의 현실적 실익은 무엇일까를 계산하는 독자들은 그 이해판단을 멈추어도 될 것이다. 영장류 진화의 기간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런 진화의 연속적 사건들을 발생시킨 다양한 선택압과 아울러 사회적, 정신적 요소들이 얼굴의 신체적 진화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천기누설에 가까운 이 성찰적 연구 성과를 읽게 되면, 우리 인간 사회는 물론 인간 개체에 대한 더할 수 없는 관대함과 애정이 솟아날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사회적 소통의 촉진을 위해 진화되어왔다, 바로 그 산물이 우리들의 얼굴이다. 미래에 민족적 다름이 감소하고 인류가 균질화된 얼굴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면 비과학적 용어인 인종이란 언어의 멸실과 아울러 보다 사회 응집력이 촉진되는 세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인류라는 집단 구성원들의 생존을 높이는 변화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게 된다.

 

수없이 증가하는 사회적 소통망(SNS)의 증가는 표현력의 증대를 가져오면서 그 상호작용의 증가만큼 갈등의 골도 깊어졌다. "사회성이 사회성을 부른다."고 했지만, 그 사회성이란 것이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적 자기 강화과정으로만 작동한다면 인간의 얼굴은 지금까지의 진화의 동역학을 폐기하고 다른 선택압, 단절의 선택, 분열의 선택을 또다른 선택압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과연 어떤 얼굴이 미래 인간의 얼굴이 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이 흥미진진한 인류 진화의 미스터리로 독자들을 적극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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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 (포켓 에디션) - 생물.도시.기업의 성장과 죽음에 관한 보편 법칙
제프리 웨스트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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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생명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621

 

스케일(scale, 규모)’이라는 언뜻 모호하고 낯선 제목을 한 책이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금 생뚱맞지만 그저 익숙한 삶의 반복성에 매여 이 복잡다단한 세계에 대해 더 이상 알고자하는 의욕조차 사라지는 것에 대한 어떤 반항, 혹은 의기소침해진 정신의 전환 필요성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책은 복잡계 연구의 선도적 연구기관인 샌타페이연구소()를 한때 이끌었던 물리학자 제프리 웨스트 교수의 대중을 위해 쓰인 복잡성 과학, 즉 물리학을 비롯한 생물학, 수학, 생태학, 화학, 경제학, 경영학 등 학제를 아우르는 복잡적응계 과학의 역작이다. 나는 이 번뜩이는 통찰로 가득한 책에 홀랑 빠져버렸다.

 

왜 세상이 이 모양일까? 왜 생명은 노화하고 죽어야 하는 것일까? 닫힌 세계인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지금처럼 자원의 무한정 소비가 언제까지 가능할까? 도시는 왜 자꾸 비대해지고, 사람들은 도시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토록 하는 어떤 궁극적 법칙이란 것이 있을까? 만일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들에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법칙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이들 물음을 예측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까?

 

후기(後記)에서 제프리 웨스트교수는 이 책의 주된 메시지를 담을 적절한 핵심단어나 짧은 문장을 고심할 때 크기는 정말 중요하다”, “생명나무 스케일링”, “만물의 척도등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모두가 바로 이 책의 주제라 할 것이다. 세포에서 도시, 기업에서 생태계에 이르는 생명의 복잡성에 담긴 단순성과 통일성에 대한 탐구가 책을 관통하는 기본정신이며, 원대한 우주적 관점과 현실세계의 더 구체적인 문제들 사이의 중요한 상호작용을 포착해 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저술이다. 책의 부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해주는데, 생물, 도시, 경제, 기업 모두에 적용되는 성장, 혁신, 지속 가능성, 삶의 속도에 관한 보편 법칙이다. 탐구 대상으로 생물, 도시, 경제, 기업을 삼고, 이것들의 성장과 혁신, 지속가능성, 삶의 속도의 동역학인 보편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규모(scale)라는 렌즈를 통해 이들 탐구대상을 들여다보면 그 밑에 놀라운 통일성과 단순성을 지닌 우리네 직관에 반하는 어떤 일관된 법칙성에 제약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규모라는 관점에서 개념적 사고의 힘을 정량화하여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요인)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그것들의 동역학과 관계망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예측, 판단하여 우리가 직면한 이 세계에서의 삶이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세포의 집합체인 인간의 몸부터 도로와 건물과 각종 상하수배관, 교통망으로 이루어진 도시에 이르기까지 이들 집합구성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며, 그 까닭은 그 각각의 계()들을 이루는 요소들이 상호 얽혀 작용하는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몸을 구성하는 100조개의 세포 중 어느 하나도 그 집합구성의 총체인 몸인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특성을 지닌 것은 없다. 즉 내가 내 자신이라 여기는 것은 세포의 단순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세포들 상호작용의 집단적 표현 형태인 것이고. 여기에는 이들의 단순 집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계의 내외부를 망라한 끊임없는 되먹임과 상호작용 과정들의 통합이 있다.

 

크기와 규모는 고도로 복잡한 진화하는 계의 일반적 행동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다.”  -36

 

여기에 모든 복잡계의 신비로움이 있다. 하나하나의 세포가 지니지 않는 특성이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되는 무수한 창발적 행동과 현상, 자기 조직화와 자기 회복성 등 적응의 역학은 우리들 직관에 몹시 반하는 반응을 현시(顯示)한다. 복잡계란 계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나 교란이 어떤 다른 부분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강된 반응을 일으키는 행동을 지닌 체계를 이른다. 따라서 우리 인간 개체도 세포의 단순 집합체가 아닌 것은 복잡계의 이런 특성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개별 구성 요소나 행위자가 모이면 대개 그 개별 구성요소나 행위자의 특성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그 특성으로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집합적 특성이 드러나는 전형적 복잡계인 것이다.

 

100조개의 세포는 순환계, 호흡계, 배설계, 세포내 연결망,...등 상위의 계들로 이어지고 이들은 다시금 상호 망()들을 통해 에너지, 대사산물, 정보를 공급하고 나눈다.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한 다윈의 진화론을 알기에 개별 생명체의 형태와 구조가 오랜 시간에 걸친 진화적 산물임을, 그래서 그것들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지만, 왜 그런 형태와 구조를 지녀야 했는가, 그것에 어떤 생물학적 기원을 넘어서는 다른 초월적 제약이 가해진 것은 아닌가는 묻지 않았다.  『스케일(Scale)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응답이다. 크기와 규모가 진화의 결정 인자라는 것이다. 가장 작은 포유동물인 땃쥐에서 인간, 코끼리, 대왕고래 등 수십 그램의 동물에서 수십 톤의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무게는 10, 10², 10³, 10, 10배에 이르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 수명은 작은 동물은 엄청 짧은 반면에 대왕 고래같은 대형포유 동물의 수명은 상대적으로 엄청 길다. 왜 그럴까? 스케일링(Sacling)은 크기가 변할 때 계()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을 규명하는 일이며, 이것은 자연의 기본 힘들, 진화의 동역학, 보편적 원리나 구조를 밝히는 지금까지의 최고의 방법적 수단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묻는 것이다. 동물의 먹이가 반으로 줄어들면 먹이를 먹는 양도 절반으로 줄어들까?, 도시의 인구가 2배로 늘어나면 범죄건수나 특허 건수도 2배로 늘어날까? 실제 측정하면 계의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체계적으로 에너지가 절약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가 발생하는 것인데, 이를 저선형 스케일링이라 부른다. 몸집이 커질수록 필요한 단위당 에너지양이 더 적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에서 나타나는 수확체증, 초선형 스케일링의 정반대 행동이다.

 

이러한 비선형(저선형, 초선형) 행동의 기원과 그 행동이 과학, 기술, 경제, 경영 뿐 아니라 일상생활, 과학소설,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들에서 이끌어낸 폭넓은 범위에 걸친 오랜 연구노력의 성과가 풍부하게 담겨있다. 코끼리는 땃쥐보다 1만 배 더 무겁고, 세포수도 1만 배 더 많다. 세포수가 1만 배 많으니 음식 소비량도 1만 배 더 많을까?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1,000배 많이 먹는다. 즉 땃쥐보다 10분의 1만큼 덜 소비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어떤 자연의 법칙이 있을까? 있다. 대사율은 지수가 43에 아주 가까운 거듭제곱법칙(멱법칙)에 따라 증가한다는 것이다. 대사과정에서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덜 쓰며 활용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세포의 손상율도 줄어들고 수명도 길어진다. 이 대사율 스케일링 법칙을 발견한 생리학자의 이름을 따라 막스 클라이버(Max Kleiber)법칙이라 부른다.

 


한편 어떤 포유동물의 크기가 2배되면 심장 박동수는 4분의 1만큼 줄어든다. 4분의 1제곱 스케일링이 널리 퍼진 보편적 법칙이라는 것이고, 이는 자연 선택이 개별 생물의 설계를 초월하는 물리학적 원리들에 제약을 받아왔음을 시사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생물학의 망 동역학은 생물의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삶의 속도가 4분의 1제곱 스케일 법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감소하도록 제약 받음을 의미한다. 4분의 1스케일링의 비선형 함수는 생물의 진화에 중요한 제약으로서 하나의 법칙성을 갖는다.

 

이 중대한 물리법칙은 우리들의 몸은 물론, 도시와 기업의 운명, 그 계의 부침을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체중이 100배 증가할 때마다 대사율은 동일하게 32배 높아진다. 거듭제곱 법칙은 일반적인 자기 유사성의 대표적 사례다. 체계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이 형태는 생명의 다양성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화된 설계에 상관없이, 즉 땃쥐가 되었든 대형 고래가 되었든 생물의 측정 가능한 특징들 중 상당수를 결정하는 데 근본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 놀라운 스케일링 법칙은 생물이 진화하면서 얻은 개별적 설계와 독립되어 망 설계의 궁극적 동역학으로 작동해왔다는 것이다.

 

거듭제곱 법칙 스케일링은 자기 유사성을 하나의 특성으로 지닌다고 했다. 여기서 자기 유사적 프랙털 구조는 어쩌면 자연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프랙털 구조란 요철이 심한 해안선이나 국경의 모양이 동일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는 것이고, 이에따라 직선과 대비하여 그 울퉁불퉁한 선들의 길이를 지수로 표시하면 노르웨이 해안선은 1.5에 가까운 즉 1.5배를 보인다고 한다. 프랙털 구조는 다시 공간 채움이라는 물리적 속성으로 데려다놓는데, 표면적을 최대화하여 대사나 에너지 흡수, 혹은 열 발산과 같은 기능의 최대 효율을 위한 산물이다.

 

겹겹이 이어진 다층적 분자나 주름, 정보, 에너지와 자원이라는 생명의 본질적 요소들이 흐르는 표면적을 최대화함으로써 운반을 최적화하려는 기하학적, 물리적 원리의 실현이다. 허파꽈리 총면적은 테니스장 면적만하며, 우리의 모든 동맥과 정맥, 모세혈관을 한 줄로 늘어놓으면 총 길이가 10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공간을 충분히 채우는 주름진 선은 마치 면적인 양 규모를 증감한다. 우리 신체의 이러한 프랙털성과 공간채움의 물리학은 성능을 최적화하려는 오랜 진화시간의 결정이다. 대왕고래는 땃쥐보다 세포 하나에 피를 공급하는 데 에너지가 겨우 100분의 1밖에 안 된다.

 

결국 대사에너지의 사용 효율을 높이고, 세포와 계의 구성 요소들의 피로도를 최소화하도록 진화했다. 하나 의문이 든다. 이왕 효율을 높이고 세포의 손상을 최소하도록 진화하는 김에 그 손상을 ‘0’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영생하는 존재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의 존엄함을, 그 위대성을 보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음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바로 그러해야 합니다. 죽음은 생명의 최고 발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변화 촉진자입니다. 낡은 것을 없애서 새로운 것을 위해 길을 엽니다.” -127

 

개별 생명체인 우리 개인들에게는 죽음은 부조리하게 여겨지겠지만, 자연은 개체의 번식과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형질과 변이가 자연선택을 통한 적응을 거쳐 종의 다양성을 낳도록 제약한 것이다. 자연은 죽음을 생명의 최고 발명품으로 만든 것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서 새로운 것의 길을 열도록 죽음을 생명의 변화 촉진자로 형성한 것이다.

 

성장과 노화, 그리고 죽음 또한 자연의 물리적 제약의 산물인 것이다. 생물의 크기가 2배로 늘어나면 세포수도 2배로 늘어난다. 하지만 대사율은 앞서 언급했듯 43 제곱 스케일링에 따른다. 즉 대사율은 1.75배만 증가할 것이다. 대사 에너지의 공급되는 속도보다 에너지가 증가하는 속도가 더 낮다. 더구나 성장에 쓰일 에너지는 체계적으로 줄어들다 이내 0으로 수렴해서 멈추고, 세포의 재생과 손상된 세포의 수리와 유지안정에 쓰기 바쁘다. 노화는 대략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미 세포의 유지보수와 재생에 모든 에너지를 써야할 만큼 세포의 손상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노화는 피할 수 없는 물리적, 생물학적 마모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의사이자 소설가였던 안톤 체홉은 엔트로피만이 쉽게 해낸다.”며 인간 생명이 결국 죽음에 굴복하는 엔트로피와 국지전에서의 패배를 오래 전에 말하기도 했다. 왜 인간은 20세 정도에서 성장이 멈추고, 이후 안정된 모습을 하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는 바로 이 거듭제곱 스케일링의 저선형 법칙 때문이다. 손상되는 세포의 유지보수 에너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4분의 3 대사율! 이 지엄한 물리법칙은 우리를 에워싼 지구 내 모든 인위적, 자연적 산물을 막론하고 강력한 제약 조건이다. 죽는 다는 것은 진화과정의 핵심이며, 좋은 일이고 중요한 역할인 것임을 시사하는 것일 게다. 죽음에 대한 부조리는 해결되었다! 부조리가 아니라 닫힌 공간 지구에서 만물이 살아내기 위한 빼어난 본성으로서의 법칙인 것이다.

 

이 책의 일부분인 생명의 단순성과 통일성에 내재된 법칙을 위와 같이 극히 부분적 내용을 대표적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우리 뇌에서부터 종이뭉치, 심전도와 주식시장의 시계열도에서 공히 발견되는 거듭제곱의 법칙을 따라 반복되는 자기 유사적 프랙털 구조를 비롯해서 도시의 성장과 사회경제적 망의 동역학, 기업의 성장과 쇠퇴와 죽음, 인류 경제의 전망에 이르기까지 각 계들의 행동과 그 미래의 예측 가능한 이해의 지표를 제공하는 데에까지 확장된다.

 

이 기계학적 물리학에 기반한 초학제적 연구의 산물인 정량화 결과에 의심의 눈초리를 지닌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야를 크게 넓히고 편협한 단일 학제의 마음가짐에 작은 관대함을 가진다면 엄청난 도전과제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수많은 노벨상 수상 석학들의 연구결과가 누적된 이 저술은 샌타페이연구소의 복잡계 연구에서 이룩한 업적의 집적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 읽다보면 우리들이 마주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다가서는 어떤 연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그러한 상상으로부터 실제의 연구와 노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도시도 대사하고 성장하고 진화하고 잠을 자고, 늙어가고 질병에 걸리며, 손상을 겪고 스스로 수선을 한다. 즉 성장에 쓰일 에너지양과 수선, 유지에 쓰이는 에너지양의 스케일링 법칙이 생명의 비선형 거듭제곱 스케일링 법칙과 동일하게 제약받고 있음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도시와 기업에 관한 무수한 스케일링 법칙의 현상들의 사례는 책에 맡기기로 하고, 내게 아주 중대하게 이해된 지속가능성에 대한 숙의를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인상을 마쳐야 할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려다 보니 지면이 무한정 늘어날 것 같다.)

 

바로 유한시간 특이점((finite time singularity)’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 인류 사회는 열린 경제, 다시 말해 자원이 무제한 제공되는 성장 일변의 세계를 낙관적으로 상정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와 혁신의 초선형 스케일링으로, 때로는 지수적 차원도 넘어서는 성장으로 이어지며, 붕괴 가능성이 실현되기 전에 시계를 리셋팅(재설정)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성장을 이어왔다는 것이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창의와 혁신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 증기, 석탄, 컴퓨터, 인공지능을 포함한 오늘의 디지털 정보기술 등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혁신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함으로써 열린 성장을 유지하고 붕괴를 피해왔다. 이러한 크고 작은 발견은 인류가 비범한 창의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 증언하지만, 불행하게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지금 인류의 사회 경제를 이끄는 동역학은 지속적인 적응 상태가 표준이라는 것이고, 이는 초선형 스케일링을 통해 추진된다는 것이다. 허지만 아주 근원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초선형 스케일링에 의한 성장 함수가 생물의 규모 경제인 저선형 스케일링의 토대에 서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유한시간 특이점이라는 뜻밖의 특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불가피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아마도 문제가 생길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유한시간 특이점은 GDP, 특허건수든, 범죄 건수든 해당 대상을 통제하는 증가(성장) 방식의 수학적 해()가 어떤 유한 시간에 무한히 커진다는 것의 가리킴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유한한 도서관 진열실의 무한한 방향으로의 지속되는 도서관처럼 소설적 표현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이러한 신호는 바로 지금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경고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어떤 획기적 혁신을 통한 위상학적 상전이가 없다면 붕괴될 것이라는 의미다.

 

오늘의 성장이란 것이 거듭 제곱의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함수이지만 이것은 무한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다. 즉 특이점을 미래로 무한정 연기시키면서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한 특이점은 사정이 다르다. 이것은 초선형 스케일링 성장이 유한시간 특이점에 접근하는 지수 성장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문제에 있다. 이 말은 풀어쓴다면 성공적인 혁신간의 시간 간격이 체계적이고 필연적으로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열린 성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소비하는 한, 삶의 속도도 불가피하게 빨라질 뿐 아니라 점점 더 빠르게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이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혁신의 주기가 놀라울 정도로 그 간격이 극도로 짧아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현상 때문이다. 파국에 앞선 창의적 혁신이 우리 눈앞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도 그 이유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 열린 성장을 고집하면서 어떻게 다가오는 초지수 성장이 몰고 오는 정체와 붕괴의 파국을 회피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혁신이란 지금까지 계가 작동하고 성장해 온 조건들을 바꿈으로서 시계를 사실상 다시 맞추는 것이다. 지금까지 창의성, 독창성, 발명 능력이 붕괴의 허용을 막음으로써 특이점을 미래로 미루어왔다. 그런데 패러다임의 전환은 혁신의 주기가 지속적으로 더 빨리 되풀이되어야 함을 압박하고 있다. 새로운 혁신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속도로 새로운 상태로 옮겨가야 한다. 오늘 우리 한국인의 삶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진행되는 것은 한국인의 빨리빨리 특성을 마치 민족적 DNA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바로 짧은 산업화 기간에 이루어진 혁신간격의 압축적 속도, 그 급진적 성장 속도 때문이랄 수 있다.

 

이제 전체 과정은 놀랍고도 기이할 만큼 정신병적 행동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집단적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처럼 기괴한 것이다. 사실 시시포스의 형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한 번 굴러 내려온 돌을 산으로 올리는 주기가 점점 단축되어야 하는 시시포스가 아연실색할 정도의 국면인 것이다. 미래학자인 레이커즈 와일은 1993년에 특이점이 온다에서 낙관적 미래 전망을 내놓으면서 2023년이면 초인공지능을 창조할 기술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론 이 전망은 빗나갔지만, 어쩌면 가까운 시간 안에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잘못을 하고 있는데, 바로 단순한 지수성장을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수성장만으로는 결코 특이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초지수 성장이 유한 특이점을 몰고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성장도 지속불가능한 성장이긴 마찬가지다. 다만 그 시기의 도래가 좀 늦추어지겠지만 말이다.

 

본문 576, <지속 가능성의 대통일 이론> 중에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특이점들은 순차적으로 계속 쌓이고, 미루어지지만 70년 전에 위대한 물리학자이자 컴퓨터과학자인 폰 노이만은 인간 활동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인류 역사의 어떤 '진성 특이점(essential singularity)'에 다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말했다. 오늘처럼 살아간다면 인류는 궁극적 특이점의 위협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가속화되는 변화속도는 도시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어쩌면 지금 한국정치사회가 처한 이 위기의 혼란의 여러 원인 중 이 속도의 스트레스도 하나의 지대한 영향 요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제 전체는 심각한 파괴와 붕괴를 향해 질주해 갈 것이다. 우리의 도전 과제는 명료하다, 우리들 자신이 진화해 온 더 나은 생태적 단계에 상응하는 지점으로 돌아가서 어떤 저선형 스케일링 판본과 자연적 한계나 성장이 전혀 없는 안정적 형태에 만족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것일까? 이 실질적 가속이 오늘날의 사회관계망에 내재된 지속적인 양의 되먹임 메커니즘을 통해 생성되는 창발적 현상임은 책의 지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사회적 상호작용은 더 많은 상호작용을 낳고 더 많은 착상을 자극하며, 부는 더 많은 부를, 범죄는 더 많은 범죄를 야기한다. 이 끊임없는 초선형 스케일링의 사회적 연결성의 상승 강화는 인간을 비롯한 생태계 전반의 붕괴로 이어진다. 우리의 생물학적 시간은 이 사회경제적 시간의 초지수적 시간을 따라가지 못한다. 정확히 수학적 물리학의 규칙을 따른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무수한 창발적 착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착상의 가속화가 생물학적 저선형 스케일링을 위한 인류의 공존을 위한 것이라면 긍정적일 것이다.

 

왜 실물교량이나 대형 선박의 설계에서 축소한 모델을 통한 실험의 결과를 선형적으로 적용하면 안 되는지, 30년이 지난 뒤 남아있는 기업은 5퍼센트도 안 되는지, 왜 생물의 크기는 무한히 커질 수 없는 특정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지, 전쟁과 국제 갈등이 주로 무엇에 의해 촉발되는지와 같은 개발된 정량적 이론을 통해 그 유사한 형태의 인위적 조성물- 정치체, 종교집합체, - 과 같은 대상에 대한 숨겨진 스케일링을 발견하는 사유의 토대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놀라운 통찰이 담긴, 복잡하게 보이는 이 세계에 담긴 비밀을 건져 올리는 가히 위대한 지혜의 보고다. 나는 이 책에 설명되고 있는 기업의 스케일링 법칙을 통해 특이점에 도달한 한 정당(政黨)의 운명을 상상했다. 도시계획, 기업경영, 도시행정, 생명의학, 경제전반, 사회학, 그리고 물리학과 생물학 등 학제를 망라한 모든 분야에 종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적어도 몇 가지의 번쩍이는 착상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이제야 이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강력추천!

 

A.R. :

1) 코로나 19의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자 계엄령이 앞을 가로 막았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이은 희곡작품 계엄령을 소개하는 문구이다. 왜 역사는 이렇게 지리멸렬한 반복으로 우리를 실험하는가? 이러한 세계에 대한 예측 가능한 법칙은 없을까? 만일 이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역사적 반복성에서 스케일링 법칙을 발견한다면 인간 사회는 훨씬 건강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2) 크기가 생명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하니까 빅데이타를 옹호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겠기에 스케일링에서 말하는 크기란, 물론 많은 데이터를 선호하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의 필요성을 없앤 그저 무작위한 양적 크기로서의 작금의 정보업계에서 말하는 빅데이타가 아니라 거시적 개념틀, 기계론적 인과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개념틀에 속박된 크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차이를 지니고 있는 개념임을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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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죽음 - 자전적 에세이, 단편소설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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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 주제는 다르지만 인간 단독성의 측면에서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과 관련한 에세이를 읽었을 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인 어느 시인의 죽음이 연상된 것은 하나의 유사한 장면 때문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비평가 앨 앨버레즈의 앞에서 자신의 시를 낭독한다. 한편 시인 마야콥스키는 파스테르나크 앞에서 자신의 비극성 짙은 시를 들려준다. 이 두 장면은 낭송하는 시인들의 제발 나를 도와줘요.’라는 동일한 목소리만 같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파스테르나크 생애의 러시아는 혼돈과 격동의 시기였다. 혁명과 전쟁, 그리고 또 혁명, 공포의 전체주의 독재정치가 휩쓸던 시대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시인에 대한 하나의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직접의 원인은 19~20세기 러시아 문화사를 다룬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에서 언급되는 이사야 벌린의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한 인상적 기록 때문이었다. 고리키 류의 문학이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스탈린의 피의 숙청 속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던 파스테르나크가 수다스러울 정도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오해들에 대해 과다한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이사야 벌린의 증언은 파스테르나크의 정치적 처신에 대해 의혹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소위 구()인텔리겐차에 속하는 비()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인은 숙청 대상이었기 때문인데, 파스테르나크는 너무도 온전했던 것이다. 이 읽기는 이러한 의심, 하나의 편협한 왜곡이 불식(拂拭)되기를 바라는 기대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했던 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사랑할 기회를 맞았던 

상황에 따라서모두가 저마다의 인간이 된다.” -114

 

이 에세이는 3부로 나뉘어 있다. 유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시간적 연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인은 너절하고 사사로운 술회는 극도로 억제하고, 간결한 문체로 한 인간의 예술적 성장의 전환적 사건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렇게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단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그 대상이 시인을 거부하거나 근접을 불허하여 이상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고통스러워할망정 그로인해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이라는 실체의 면모를 비로소 깨우치게 하여주는, 하나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충실함을 주기에 그에게 사랑은 곧 예술이고, 저항이며, 삶의 정신이자 인간 됨이다.

 

1부는 음악 거장 스크랴빈에 대한 흠모와 음악에 대한 열정에 묻혀있던 소년시절의 전환적 장면을 술회하고 있다.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이 예술가 집에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들락거렸고, 그 중에서도 때때로 찾아와 자신의 곡을 연주해주던 스크랴빈의 선율에 대한 감동과 숭배는 소년의 감성과 지성의 주 연료였다. 이때의 자신을 이렇게 술회한다. 나에게 음악은 하나의 신앙 같아서, 나의 내면에서 가장 미신적이고 자아를 부정하는 모든 힘이 한 덩어리로 뭉치는 정점에까지 이르렀다고. 음악 없는 인생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년의 운명은 스크랴빈 부부 앞에서 자신이 쓴 곡을 연주함으로써 산산이 부셔진다. 이 천재 시인은 자기 성찰에서도 능숙할만큼 조숙했던 모양이다. 스크랴빈의 조언과 함께 그는 철학공부로 방향을 전환한다. 하지만 한 순간에 음악의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고, 이 음악적 성향은 상징주의 시인들의 문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안드레이 벨리(필명 보리스 부가예프)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등 상징주의 시인들의 모임인 무사구에트(Musaguet)에 가입함으로써 다른 세계로 들어선다. 이 시기에 그에게 시가 탄생하는데, 시인은 그 사연을 말한다. 무엇보다 사랑이 가장 격렬한 흐름을 이루었다.

 

청년에게 격렬한 흐름을 이루게 한 사랑, 그래서 시까지 탄생시킨 사랑은 그가 가르치던 V라는 소녀로 추정된다. V는 훗날 파스테르나크가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코헨 교수 아래 신칸트주의 철학의 세례를 받다 돌연 학업을 중지하고 러시아로 돌아오게 하는 시인의 사랑을 거절하는 여인 V일 것이다. V는 철학을 전환적 삶의 길이었던 청년을 사랑의 거부라는 부정성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긍정성, 새로운 신념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 역할을 한다.

 

시인은 이를 예술에서 가장 분명하고 고귀하고 중요한 본질로서 잉태(孕胎)’라고 말하는데, V의 거절이 곧 그 잉태였던 것으로, 사랑의 의무를 스스로 풀어주는 고뇌 속에서만 사랑이 가능한, 바로 그러한 실제 감각으로서의 시가 탄생하는 것이었을 게다. 파스테르나크에게 마르부르크에서 만나게 된 V로부터 확고한 거절에서 느낀 아픔이 불러 온 느닷없는 환희로 돌연 철학공부를 단절하고 본격적인 문학예술의 길에 오른다. 지금까지의 자기 삶인 과거와의 단절을 서정적 문장에 담아 시적 향취 그득한 글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기차가 멈추자 (...) 가방을 먼저 던져 올린 다음에 기차로 뛰어올랐다. 비명을 지르며 기차가 출발했고, 떨그럭거리며 문이 닫혔고, 나는 차창에 달라붙었다. 기차는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과 생활로부터 나를 깨끗이 단절시켰고,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란 강과, 건널목과 길거리와. 최근에 내가 묵었던 집이 시야에서 섬광처럼 사라져갔다.” -210, 82

 

이렇게 2, 철학을 경유하며,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청년은 시인의 길, 3부의 장년기로 들어선다. 이 글이 써진 것이 1931년이니 자유가 박탈된 내면의 불안감과 한편으론 이를 극복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그의 정신적 경외의 존재인 시인 마야콥스키에 대한 예술적 존경과 그의 죽음은 파스테르나크가 인식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또 다른 인간으로의 성장의 시간이었을 것 같다. 사실 이 3부의 글은 파스테르나크의 정치적 위치와 예술적 존재에 대한 정체에 대한 중요한 장()이라 하겠다. 우선 나는 앞서 언급했던 이사야 벌린의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모호한 증언이 야기한 의혹을 해소하는 기회로 삼았으며, 또 한편으로는 당대는 물론 오늘에까지 영향력 있는 마야콥스키의 이상(理想)을 감각해보는 감상의 시간이 되었다.

 

이사야 벌린은 스탈린 정권하에서 온갖 핍박으로 생계조차 어려웠던 시인 아흐마토바를 만나 그녀에 도움을 준다. 이사야 벌린에게 아흐마토바는 전체주의 스탈린 체제에 저항하는 서구의 시각에서 위대한 여전사로 보였을 것이고, 그녀에 대한 연민은 이러한 바탕이었을 것이다. 허나 파스테르나크에게 아흐마토바는 어떤 존재로 인식되었을까? 313절에는 '초보 시인 A'의 집에 미래파, 상징주의 시인들이 가득 모여 낭송하던 일화가 있다. 파스테르나크 자신을 비롯한 마야콥스키, 안드레이 벨리, 츠베타예바, 발몬트 등 당대 명성있는 시인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문학마당이다. A는 분명 아흐마토바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파스테르나크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훗날 얼마나 대단한 시인으로 성공할 재목인지를 나에게 설명해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고 회고하며, 그녀가 집필중이라던 멋진 시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지만 (...) 사람들의 눈길을 순식간에 끌어 모으는 단순성을 알아차렸다고 말한다. 이후 그녀가 핍박받을 때 파스테르나크가 그녀에게 물심양면 물질적, 직업적 도움을 주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사야 벌린의 증언은 파스테르나크에게 너무 가혹한 편향된 관점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파스테르나크는 혁명 이전의 구 인텔리겐차 계급으로 아흐마토바와 마찬가지의 혁명이전의 지식인 계급에 속한다. 그럼에도 파스테르나크가 스탈린 치하에서 어떤 박해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의혹의 대상이 될 만하지만, 그렇다고 적대적 시선을 들이 댈 까닭이 되지 않는다. 사실 3부의 지면 많은 부분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우회적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세간의 의혹의 눈길을 의식한 듯, 마르부르크 대학 시절 친구로 지냈던 스탈린 정부의 인민교육위원회 관리 G와의 인연을 전체 글의 압축성을 거슬러가며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가하면, 마야콥스키와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잠시의 동행에서 고리키를 만난 일화나. 러시아 혁명적 열기의 중심에 선 마야콥스키의 시와 애도에 그의 장년의 자전을 거의 할애하다시피 하는 것은 결코 자신은 스탈주의자가 아니라는 과다한 변명처럼 이해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는 마야콥스키의 영향에 전적으로 지배되었으며, 이후 그의 시적 세계는 서정적 낭만주의와 결별하고 비낭만주의적 상징주의 작품으로 돌아선다.

 

파스테르나크 앞에서 마야콥스키는 자신의 시, Ya)를 읽어준다. 1인칭으로 세상과 맞서는 인간, 시의 소재이자 시의 이름인 마야콥스키의 비극성으로 온통 물들어진 시를. 이때 파스테르나크는 그를 잃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파스테르나크 자신의 삶 속에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괴리감과 비약적 변화를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그랬다는 것이다. 이건 경외(敬畏)의 감정이기도하지만, 마야콥스키가 지향하는 우상 파괴적 혁명 열기나, 고차원적 형제애의 형태인 미래 공산주의 유토피아 전망에 동의할 수 없었음의 표현일 것이다. 파스테르나크는 구시대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새로운 혁명적 전망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몰고 올 삶의 형태, 금욕주의적 정신생활로의 대체와 같은 급진성은 잃을 것이 많은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본다. 마야콥스키는 바로 파스테르나크와 같은 문학 지식인들, 과거의 우산 속에 있는 물질주의가 발하는 음란성을 모조리 처분하고 싶어 한다.

 

 마야콥스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책세상, 245쪽 발췌인용.

 

마야콥스키가 뱉어내는 외침은 싸대기를 세게 얻어맞은 듯 얼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콥스키의 비극적 목소리를 떠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시 150,000,0002시간 15분 동안 읽고 검토 한 후, 마야콥스키의 정신에 순응한다. 왜 순응하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왜 자신의 작풍을 전환키로 결정했을까? 사랑이 승리 한 것이다! 파스테르나크는 이미 그의 몇 차례의 인생의 전환적 사건에서 보았듯, 그것은 상처와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사랑이 가지는 불가피한 속성,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스테르나크가 1958닥터 지바고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것도 이러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잉태케 한 마야콥스키와 V와 코헨과 스크랴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1930년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마야콥스키는 죽음으로 발견된다. ‘어느 시인의 죽음은 마야콥스키의 죽음을 가리키기도 하겠지만, 마야콥스키로 인해 다시 태어난 파스테르나크 자신의 상징적 죽음이기도 하고, 당대 무수히 숙청되어 사라져간 동료 시인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이기도 할 것이다.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콥스키의 죽음을 자살로 받아들인 듯하다. 마야콥스키가 죽기 불과 몇 개월 전에 쓴 미완으로 남겨진 제목 없는, 자살에 대한 시를 전하고 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그들이 말하듯이,

            서툰 이야기.

사랑의 배는

           충돌하네

           존재에 대해.

그리고 우리는 떠나네

           삶에서.

           그런데도 왜 우리는

헛되이 서로를 비난하며

           고통과 모욕을 가하는 것일까?

남은 자들에게 - 행복을 기원한다.

 

마야콥스키의 죽음은 타살과 자살의 의견이 엇갈린다. 당대에는 자살로 처리된 듯하지만, 여러 정황은 타살을 가리킨다. 마야콥스키는 연인 릴리 브릭과 그녀의 남편 오이프 브릭과 3인이 함께 가족생활을 했다. 마야콥스키가 상상하는 미래 공동체적 삶의 작은 실천이었던 것 같다. 마야콥스키는 릴리 브릭에 대한 사랑의 연시(戀詩), 프로에토 proeto(이것에 대하여, 1923.)를 쓰기도 했다. 물론 연시 라고는 하지만 다분히 정치성이 내재된 시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릴리가 마야콥스키에게 두 달간의 별거를 강제 요청했다. 이 강요는 마야콥스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촉발했고 그 악화로 인한 자살이라는 왜곡된 원인을 갖다 대지만, 에이젠슈타인의 발견된 문서기록은 마야콥스키가 소비에트 NKVD(비밀경찰, 후일 KGB)에 의한 체포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누군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 총을 쏘고 이웃의 눈에 띄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비밀 출입구로 사라졌다고 타살의 의혹을 제기한다.

 

더구나 릴리 브릭은 NKVD의 비밀 요원으로 마야콥스키에 대한 감시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다는 기록 또한 발견되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죽기 얼마 전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돌파하고 구원을 위해 인텔리겐차들의 문학을 두들겨 부수는 고리키식 혁명 전위단체인 RAPP(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 않았음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념적 잣대, 이데올로기의 편협성은 극도로 끔찍스러운 폭력이다. 소비에트 문학의 단 하나의 임무는 계급투쟁의 묘사다.”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단일성으로의 획일적 전체주의는 그 외의 모든 것을 죽여 없앨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비단 예술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그 어떤 미명(美名)으로도 하나의 테두리에 인간의 생각을 가두려 하는 순수치 못한 권력에 대한 경계의 마음은 100년 전 러시아와 오늘의 한국사회와 다르지 않다. 매판 수구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 항시 예술인들을 비롯하여 시민 모두를 좌우로 구분하여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정상적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루틴이 되고 있다. 한 망나니를 비롯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저 종일(從日) 반민주적 종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지한 노예들이 존재하는 한 시인의 죽음이라는 비판과 분노의 애도는 멈출 수 없는 것일 테다. 책은 죽음이라는 가장 무거운 상처와 희생이라는 사랑의 이야기이고, 곧 시라는 인생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예세닌을, 마야콥스키를 펼치도록 이끄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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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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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march)’라는 같은 의미가 중복 표현된 제목에는 야릇한 기만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마치 아닌데 그것인 체하는, 혹은 무심한 반복이 지닌 그저 그러함의 자연이 주는 무의지의 쓸쓸함.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 평생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로 살아온, 배우 이마치. 나는 소설의 두 번째 문단을 시작하는 “3월이지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듯 쌀쌀한 날씨였다.”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어야 했음을 다 읽고 난 후 알아차렸다. 알츠하이머병, 자신을 잃어가는 한 여인이 멈춘 겨울같은 3월의 시간, 화창한 봄날로 가장된 춥고 외로운 인생이야기임을.

 

전 무대에 서면 취해요. 거기서는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이제 알 것 같아요. (...)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들도 명예나 성공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   - 체홉, 갈매기/ 3월의 마치175쪽에서

 

열다섯 살 이마치가 어머니의 학대로 화장실에 가두어졌을 때 외우던 체홉의 희곡 속 니나의 독백이다. 일곱 살 마치와 아홉 살 언니 준, 어린 자식들을 내버린 채 미군장교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어머니. 그리고 그 혹독한 헐벗음과 버려진 집에서 죽어가던 어린 언니와 그녀의 죽음과 같이 지냈던 지옥같은 기억들, 미국에서 버려지자 돌아올 도리밖에 없었던 어머니라는 여자와의 재회와 마치의 의식에 남겨진 공포와 증오의 감정은 반복되는 폭력으로 되돌아오고, 집을 벗어나는 일, 새벽 신문배달, 극장에서 하루종일 죽치는 일, 그러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다 같이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연극부의 일원이 된다.

 

그녀는 배우, 다른 사람이 되는 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것으로서 연극에 빠져든다. 그녀의 유일한 환희가 된다. 그렇게 재능을 인정받고 이상한 운의 연속 속에서 유명 배우가 되지만, 세상은 수군거린다. 너무 많은 감독의 손을 탔다.”, “잠자리 오디션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마치는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임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녀에게 삶의 정수는 무대 위에 있었기.

 

이야기들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은퇴한 노배우 아마치가 담당의에게 술회하는 기억의 편린이고. 가상공간에서 행해지는 VR치료 속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혹은 은폐되었던 자신의 과거와의 재회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 앎의 복기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남자와의 결혼, 첫 아이의 출산과 아이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그 낯섦의 감정들, 위협과 강박 속에 갖게 된 둘 째 아이와 그 아이의 실종에 어린 죄의식, 남편의 무책임과 가장의 부담을 지어야만 했던 여배우의 강박적 연기의 몰두, 매니저 K의 헌신과 그의 사랑을 외면하였던 허위의 자존심,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앎을 넘어설 수 없는 어머니로서의 사랑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 온 아이에 대한 무관심 등, 혹독하기만 했던, 그래서 망각해야만 했던 자기의 지난 삶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증오심과 죄의식, 좌절, 절망의 안타까움, 가면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여인의 인내로 점철된 자기와 마주함으로서 채색되어 기만되었거나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소환된다. 그녀가 배우지 못한 삶의 방식들, 생존 이상의 것을 꿈꿔본 적 없는그래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꿈꿀 수 없는 것이었음을 경험한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네 상상의 공간이 지닌 협소성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체험, 그 좁은 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그 고집스러움의 태도가 지닌 한계를. 인생이란 12월생인 이마치가 3월의 이마치가 되듯 허영과 위선, 기만으로 포장된 가면극인지도. 우리들은 결국 밀려오는 무한한 파도, 자기만의 파도 속에 한줌의 공기처럼 가벼워져 날아오르는 그런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토록 진실을 가리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내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전달했을까? 배우자에게는,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가면을 썼을까? 이젠 이런 지난 일들에 배어있었을 감정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읽어나가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내가 누락한 것, 혹은 포장하여 기록 한 것, 숨기고 싶어하는 기억은 무엇인지, 아마 나를 알게 되는 여정이 될 것도 같다. 그럼으로써 나와 한 때 함께했던 사람들 모두에 대해서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발견하고, 이제라도 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경험의 한계를 무한히 확장하도록 상상의 공간을 넓힐 것을, 아마 그 책무를 성실히 수행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3월인데 왠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가면의 집착 때문인 것일까?  이마치처럼 언젠가 내 삶과 화해를 하고 나만의 파도에 훌훌 올라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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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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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살(suicide)에 관한 에밀 뒤르켐 식의 사회학적 성찰이 아니다. 인간의 죽음에 관한 작가들과 그네들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고 그것의 반영으로서 문학의 이해이다. 집단적, 사회적 현상으로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관점이 아닌, 결코 말 할 수 없는 개인의 복잡한 심리, 그 내면과 환경의 영향에 대한 특정한 관심의 표현이다. 또한 그 개별성이 투영된 시와 소설과 산문들을 통해 왜 스스로를 살해하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응답의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자살을 사건화한 뉴스나 여타 들려오는 소문에 그 어떤 선악과 찬반의 의욕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에 관심을 지니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왜 이 책에 관심을 가졌는가는 실로 아이러니하지만, 문학, 특히 시(,Poem)는 이 자기 파괴적 죽음과 분리할 수 없는 본성 자체라는 생각의 연쇄반응이었거나, 아니면 무관심을 통해 혹시라도 알게 될 삶에 대한 고귀성이 밝혀지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살의 연구는 느닷없이 내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내가 자살을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원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8.9.-1948.3.)

 

저자인 앨 앨버레즈(Al Alvarez, 1929-2019)는 책의 마지막 장에 미수(未遂)에 그친 자신의 자살에 대한 회고를 통해 그 지점에 이르는 환경과 심리적 상황, 그리고 계획된 죽음의 방법선택, 자살을 통해 기대했던 자기 인생의 정당화나, 뒤엉킨 두뇌 회로의 말끔한 정리와 같은 구원이란 없었음을 이야기하듯, 자살이라는 주제와 멀지 않은 인물이며, 특히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을 가깝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비평가이자 시인이다. 그렇다고 누구와 가까웠다거나 실제의 경험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주제에 더 깊은 통찰이나 식견을 지녔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해, 특히 그 개별의 죽음이 지니는 단독성에 대한 관심이란 애정을 지니지 않고서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진실성을 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책의 백미(白眉)는 제1프롤로그, 실비아 플라스라고 하겠는데, 실비아의 시가 품고 있는 그녀의 자발적 죽음으로의 행위를 의심할 바 없이 정확히 묘사하며, 자살이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숙의(熟議)한다. 쓰디쓴 초연함, 그 행위의 극적 상태나 그로 인한 고통 같은 건 조금도 드러나지 않은 자긍심과 연결된 자기 살해의 거스를 수 없는 귀결을 헤아린다. 하나의 주제로서 자살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 존재, 금기시 되었던 소재의 개인 정서 체험으로 탐구할 문을 연 시인의 시와 최종의 죽음으로의 날로 이어진다.

 

그녀의 자살이 지닌 그 복잡하고 특수한 함의들을 알지 못하면,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시의 의미 속으로 어렴풋 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이 된 도박, 막을 도리가 없는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자살. 아침노래, 느릅나무, 가장자리, 온정, 아빠, 라자루스, 피니스테레, 죽음 주식회사.....,앨의 앞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실비아, 자신이 소리높여 읽어야 하는 시라고 했던 시들에 대해서, 저자의 몰이해가 그녀를 아프게 했던 비평적 언어들의 후회의 목소리도 있다. 실비아는 결코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죽지 않았다. 가스를 틀어놓고, 누워 죽음의 행위를 하지만, 세 번째 자살 시도인 죽음의 도박은 치밀하게 계산된 이웃의 일어남과 보모가 집에 오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염두에 둔 모험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운 부엌에 메모를 붙여두었다. 의사를 불러 주세요라고 의사의 전화번호까지 적힌 메모였다. 그러나 이 세 번 째 자살은 그녀가 계산한 의도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웃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주택의 출입구는 굳게 잠겼고, 보모는 제 시간에 도착했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실비아는 그렇게 마침내 죽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실패한 성공이었다. 실비아의 자살은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 도움, 그녀의 도박을 지체시키거나 유혹하는 죽음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줄 사람이 없었다. 벨자, 에어리얼, 거상..., 나는 이 매혹적 죽음충동에 도사린 도약과 도주의 에너지들, 그 섬뜩한 쾌감에 한동안 잠겨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옴짝하지 않는다.

서리가 꽃이 된다.

 

이슬이 별이 된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누군가의 목숨이 끝났다. - 죽음 주식회사, Death & Co.,

 

자살의 역사적 배경자살과 문학등 시대가 자살을 어떻게 수용했으며, 이 수용이 문학작품과 문인들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었는지, 아니 그들로부터 시대를 해독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살을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지적했듯 영웅주의를 위한 극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습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이후의 태도이다. 자살을 범죄시하던 오랜 종교적 억압의 역사 시간이 지나고, 신으로부터, 제도의 흉측한 속임수로부터 풀려남으로써 자살은 순수한 개인의 문제가 된 이후로부터 말이다.

 


이제 자살은 그것이 최종의 궁극적 행위로 실행되도록 하는 무수한 개별성을 보도록 한다. 고대 스토아학파의 합리적인 명예의 존중으로서의 자기 살해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거시적 현상으로서의 사회적 자살, 혹은 신의 명령을 부정한 범죄로서의 자살과 같은 공허하고 조작된 몰이해로서가 아니라 개인이 겪어야하는 고통의 무수한 형태들과 그것의 내적 모습들을 비로소 심연까지 들여다 볼 용기를 가진 것이다. 18세기 낭만주의를 거쳐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문학은 죽음(자살)을 그 자신의 본질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자살자로 태어난 인간, 체사레 파베세, 능력의 과잉이 가져온 자존심을 파괴하는 세상에 대한 불가항력, 그 무기력에 좌절한 천재, 시인 체터턴 등 젊은 낭만파 영웅들의 때 이른 죽음에 내재된 죄의식과 상실감, 절망감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보게 되고, 돌연한 운명적 전환의 급경사로 치닫는 시인들에게서 나는 오히려 삶에 대한 고유의 가치를 더욱 확인하게 된다.

 

아마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 궁극적 의미도, 그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도 없는 부조리라 말한 삶이야 말로 역설적으로 그것 자체로 향유되어야 함, 그것으로서 말이다. 생이란 아무도 거절해서는 안 되는 선물이다.”는 이 선언적 문장이 의미하는 것일 게다. 실비아의 자기 살해 시도는 아마 사는 동안 한 번도 얻지 못했던 평정과 통제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실비아의 죽음은 타임의 대대적인 애도, 즉 영웅주의 극장으로 만듦으로써 그녀의 시와 죽음을 호도했지만, 어쨌거나 위대한 영감의 시인을 오늘에도 우리들이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는 문학과 시대가 자살의 금기로부터 해방되는 19세기에 이르자 성적 금기가 강화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죽음)은 낭만주의 전성기를 거치며 대중에게 심어놓은 내성 탓에 예술의 구조 일부가 되어 문학의 본질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 있지 않을 때면 

삶의 총체가 줄어든다.”   -82, 프로이트, 쾌락원리 너머

 

아마 문학이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생명의 복수(複數)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동일시했던 주인공과 함께 죽지만, 여전히 살아있음으로서 안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나는 삶이라는 것의 빈약성을 한 차례도 불신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프로이트가 지적하듯 죽음충동은 불행보다 더 많은 기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삶에 의존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삶의 비탄 그 자체를 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매일 수천에서 수만 명이 이 세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자살로 인한 사망자의 통계적 수치는 해당 공동체의 인간에 대한 관심의 지표로서 얼마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하지만 개별 인간의 자발적 죽음에 이르는 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인의 요절을 천재성으로 우상화하거나, 유명 정치인, 연예인의 죽음에 사회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도덕을 치장한 헛소리들로 짖어대지만 결코 그렇게 재단 될 수 없는 것일 게다.

 

자살에 내성을 가진 오늘의 우리들은 품위있는 놀이의 하나거나, 도피, 도주의 단순한 막다른 길 정도로 인식하는 게 고작이다. 자살은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사후적 삶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삶의 위대한 위로자로서 말이다. 숙명적 사멸, 이 부조리에 정면 대결하려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시도를 위한 극렬한 몸짓,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작업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저술은 실비아 플라스를 위한, 자신이 지닌 죽음과 취약함을 다름 아닌 자신에게 투여해 시험한 예술가들을 위한 진혹곡(Requiem)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자살의 역사와 예술사이며, 정신분석과 사회문화사의 통섭(統攝)을 통한 죽음과의 화해를 위한 치열한 예술론이기도 할 것이다. 유명한 자살의 주인공이 있는 문학작품들, 젊은 베르터의 고뇌, 악령을 비롯해 젊은 나이에 스스로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은 무수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모두의 죽음에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언어, 끝까지 밀어붙인 불가능한 언어, 죽어서야 할 수 있는 사후의 언어로써 생의 간절함 그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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