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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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에드아르 르베(Édouard Levé, 1965~2007)20071015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출판사 P.O.L에 송고한 유작이다. 아니 유작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유서이다. 한 사람의 삶을 응축 글과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작가의 선택이라는 편집자의 말은 일생을 끝장내기에 앞서 이글을 써내려갔을 르베의 의지와는 다른, 마치 이 글을 자살의 실천을 증언하는 글처럼 만들어버린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자신의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음에 대한 이해의 요구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애석함이며, 삶을 보다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다독임의 유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살이라는 책을 읽으며 죽음이라는 끝에 이를 때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고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 살해를 더는 회피할 수 없도록 한 이유 속에서 그것에 이르지 않을 틈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르베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제3의 목소리로 그저 살고 싶다는 욕구가 더는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또한 삶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그 부조리함 속에서 완결된 것들의 일관성을 실현할 수 없음을 인식한 자가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한 실현임을 그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그 어떤 설득의 장황한 설명도 없으며, 감정적 광기의 열정도 없다. 삶을 구성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자의 이 곳이 아닌 그 어떤 저곳, 진정 생명력이 들끓는 곳, 죽음이 삶을 구현한다고 믿은 자의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실천적 행위였음을 그저 시선으로 쫓을 수 있을 따름이다.

 

떠남으로써 음성(陰性)적인 아름다움에 안착 르베의 삶의 편린들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명석한 고독을 따라가다 절망적 확신 속에는 이미 반항이 있다는 카뮈의 말, 생에 대한 희망의 찬가가 얼마나 허약한 웅변인지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그 부정성을 명료하게 인식하며 끊임없는 투쟁의 성실함,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희망차게 역설하는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로의 복귀는 아무런 유혹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메마른 불모의 길에서조차 생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그 초인이 지닌 꺾이지 않는 희망은 대체 어디서 출현하는 것일까? 공허로 더욱 가득해지기만 한다. 인간 개체와 세계 사이의 불일치, 삶을 끝장내는 죽음이라는 원초적 부조리를 삶에 껴안고 그 불화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내야 한다는 카뮈의 영웅적 삶이 과연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르베는 자신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내면의 생김새, 취향, 사교 관계, 일화적 사건들의 장면들을 통해 진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미지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었음을, 다른 쪽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여기보다 나으리라 확신했음을 말한다. 그는 이 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다. 이 생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조리를 받아들인 자가 그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은 진정 부조리한 인간이 아니라고 카뮈는 비난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항력이기에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긑판왕인 ()의 측량기사 K 조차도 반복되는 실패의 여정을 거듭하고 마침내 도덕과 논리, 정신의 진실들을 저버리고 자신의 비정상적인 희망이라는, 부당함과 증오의 뒤에 무관심한 얼굴을 한 신의 은총이라는 사막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카뮈는 이를 부조리에 굴복하고 신의 세계라는 비약으로 향했다고 카프카의 소설을 부조리의 소설에서 제외하려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그 모순의 생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생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조리든 모순이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산 자들의 언어일 뿐이다. 그 죽음이 자살이 되었건 병사이건, 사고사이건, 자연사이건 간에 그저 동일한 끝이라는 점에서 같다. 카뮈는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정말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끝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운명에 저항하는 가장 부조리한 극한의 몸짓 아닐까?

 


르베는 자신의 자살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진화의 우발적인 흔적인, 결함이 있는 고리였을 것이다. 다시 꽃이 피는 운명을 지지 않은 일시적인 변칙이라고.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자연의 당위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자살에 대한 이유를 열거해본다. 산다는 것의 피곤함과 그를 따라다닐 흔적에 대한 거부감, 공허함, 그리곤 자살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삶의 죽음이었으며, 자살은 죽음의 삶의 구현이라고 믿게 된 인간에게 일생이라는 유한한 시간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는 희망을 주는 환상들(영원성에 대한 믿음 등)을 거부한다. 그는 어쩌면 폐허의 미학에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되지도, 관리하지도 않아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는 폐허의 아름다움은 앞선 떠남의 음성적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르베에게는 자살이란 이처럼 부조리의 철저한 긍정이지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의 부정이 아니다.

 

흐린 날씨, 겨울, , 혹은 추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은 자신의 기분에 일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러한 성향은 그의 유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보호의 조건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논리나 현상학적 정당성의 변이나 실존주의자들의 죽음의 부정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자들의 행위를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 유서의 마지막에 아내와 지인들이 느낄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한 애석의 표현이 있으며, 물론 이 유감의 표현은 우리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만, 결국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 대해 느껴지는 고통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자살의 이기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 자살을 앞둔 그에게 가장 고심을 안겨준 것이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삶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내일을 기대함으로써 오늘을 소모하는 연기(延期이자 演技)는 아마도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인간에게 진지한 철학적 유일의 문제는 인생이 굳이 살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카뮈의 선언처럼 이 질문 뒤에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살아내던가, 아니면 결정적 행위로서 끝장내던가 하나의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살아내기로 했는가? 그렇다면 세계의 부조리함에 넋두리는 소용없으니 그 모순을 안고 반복되는 실패와 실의가 고통을 안길지언정 저 시지포스처럼 캄캄한 산의 광물조각 하나도 하나의 세계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입증하는 인간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르베의 이 아무런 자기 정당화도 없는 글에서 더 이상 살아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작은 균열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인간은 정말 항상 잘못 판단하는 존재인가? 정말 최악은 무엇인가? 존재의 강약과 광협은 어떻게 인식되는 것일까? 내 존재의 가벼움과 협소함이 더 없이 강렬한 감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르베와 카뮈를 함께 읽으면서 이 두 결정적 길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사이에서 멈칫거리며 영원히 오지 않을 그 부조리의 끝을 부정하며 사는 것일 게다. 그 영원성의 환상을 머금은 채. 뒤척이다 희미한 빛을 느끼며 깨어있음을 자각하곤 다시 이 세계에서의 저주스러운 반복을 이어간다. 르베의 실패없는 치밀한 결행의 순간이 당분간 내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르베의 아내가 서랍에서 발견한 그의 삶이 응축된 14쪽에 이르는 삼행시 중 몇 구절을 옮기며 맺는다.

 

피곤은 나를 진정시키고

권태는 나를 낙담시키고

고갈은 나를 멈춰 세운다

 

도착하는 것은 나를 사로잡고

보관하는 것은 나를 안정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나를 가볍게 한다

 

나이는 나를 엄습하고

젊음은 나를 떠나고

기억은 나에게 남는다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

슬픔은 나를 뒤 따르고

죽음은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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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끝을 부여하는 어느 하루, 즉 죽음의 날을 맞이한다.”

- 이창익 ,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107, 인간사랑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폴-루이 란츠베르크(Paul-Louis Landsberg;1901-1944)의 자살의 도덕적 문제(The experience of Death & The Moral Problem of Suicide)를 접하게 된 것은 내겐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엄습하는 멈춘 시간과 같은 나만의 시간성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마 이로 인해서였을 터인데,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향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던 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태도가 생의 욕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삶 전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종의 자살자들이 겪는 유치(幼稚)증이라는 논지를 만난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우려스러운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는 어렴풋한 경계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는 점에 당혹스러워 했으니까 말이다.

 


란츠베르크의 이 저작은 인간이 왜 자살의 유혹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다. 란츠베르크의 논지에 공감하게 된 것은 자살을 절대금기로 선언하는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한 점이다. 신이 금지했으니 안 된다는 식의 교리적 답변으로 자살의 문제를 설득하려 했다면 아마 내 시선을 결코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자살 충동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의 일부라고 보며, 절망, 고통, 수치, 실패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을 끝내고 싶어 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살 유혹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그의 설득의 논리가 더욱 믿음직스러워 진다. 그의 관심은 왜 죽고 싶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살의 유혹에 저항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 진심이 통했다는 말이다.

 

생명은 자연이며, 신의 소유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자살은 죄다.’ 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자살 금지논리를 내세웠다면 그 논리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니 살인이고, 살인은 십계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니 자살은 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순으로 점철된 이해(사형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왜 죄가 아닌가)는 자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더구나 자살과 살인은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의 헛소리에 가깝다. 살인자는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인격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설득 논리를 통한 자살의 금지 강령은 자살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지니지 못한 자의 억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 나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케 하는 인간 내면의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종교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유명한 자살 금지 논증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 가지 논증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1) 자살은 자기보존의 자연적 경향에 반한다. 2)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공동체를 해친다. 3) 생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신만의 권리이다. 는 것이다. 이 또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논리로 세상의 염오와 한계적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논증부터 반박하자면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빈 말에 가까울 것이고, 설혹 신을 섬기는 자라해도 대부분의 자살자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지도 않을뿐더러, 신을 넘어서는 오만을 부리기 위해 자살하지 않는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기에 자살하는 것이지, 기독교 맥락에서만 가능한 논리로 일반화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번째 논증은 인간은 자연이기에 자기보존을 하지 않으면 한 된다는 것인데, 자살의 유혹이란 것도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하나라는 점에서 자살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자살이란 것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두 번째 논증을 생각해보자. 이 논증에는 사실 가장 가슴 아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웅크리고 있어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이 논증은 다른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 폭력에서부터 사회가 나에게 무의미한 곳이거나, 내가 사회에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자살하는 것이라면 내가 자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박 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은 자살은 자기 가족에 대한 범죄이기에 자살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자살자는 가족이 없거나 박살난 가족이거나, 가증스러운 가족이 있을 뿐이기 십상이고, 더구나 머지않아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회와 가족은 이를 극복하기 마련인데, 이를 일반화하여 자살의 권리가 없다는 말은 과도한 일반화 논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이들 논증으로 자살을 하지 않아야 될,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살을 비난 할 권리를 사회가 갖는 것은 정말 무분별한 발상이다. 사회가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왜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의미 찾기의 실패가 존재를 의미 없음으로 가득 채워 죽음 이외에는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설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이 우려스러운 출입문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다. 자살 금지 논리들을 그저 이성의 논리로 격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그 금지의 설득, 다시 말해 끝까지 일생(一生, lifetime)’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일생(一生)', 이 말은 시작과 끝이 형상하는 하나의 시간성을 품고 있는 말이다. 이 일생을 끝장내는 것이 죽음이라는 끝이다. 죽음 없는 인간에게는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당연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생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부단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그때그때마다 내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현재적 적합성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융화작용을 하지 못하면서 내게서 현재적 적합성이 없음을 느끼게 하고, 이윽고 그 시간성이 단단하게 굳어버려 살아있음의 감각을 서서히 앗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살았다는 것이 고작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는 상실의 과정일 뿐이라면 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경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인생이라고 기억할 만한 얼마 되지 않은 것들, 그중에서도 내 실존적 경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시절의 회상을 헤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정신적 시간으로 육화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턱 없이 적은 것임을 자각했을 때, 세네카가 말했듯 오랜 시간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에 불과한 일생이었음의 이해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이 모두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추었을 때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지적은 다시금 내 일생이라는 끝의 급격한 당도(當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많이 늦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엮는 내 낡은 시간의 실을 새로운 실로 다시 엮을 시간이 있을까? 다시 새로운 시간성을 얻어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과거의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할, 기존의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위의 윤리학,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앞에서 주춤거리며, 내 일생의 관념을 형성하는 필연적 경계선을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 금지된 매혹이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나를 내리치는 저 앞의 문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On the Shortness of Life)에서 말하는 기억과 회상의 힘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성화(聖化)시키는 유한의 성화로써 무한성에 참여시키는 구원론 따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확고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죽음을 만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현자로서 세네카가 자기 일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무한성으로 영토화한 신념만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기억과 회상은 아마 자기 주도성으로 가득 차 물화되어 가라앉은 쓸모없는 시간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란츠베르크는 죽음의 유혹에 저항할 이유의 답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감각만 느낄 뿐이다.”, 여전히 가장 최악의 도덕적 고통들이 늘 존재한다며 고통이 나에게 최악의 지옥을 선물하더라도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낼 수 있는 힘, 바로 이 존재의 힘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아무리 자살을 강요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말이다. 삶이 유한한 것처럼 고통도 유한한 것이니 그 일생이라는 하나의 주기를 살아내라고어차피 그 경계는 올 것이고, 그 순간까지 견딤이 삶의 의미 자체라고. 내겐 이 응답이 여전히 미흡하다. 망가진 인생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이를 위해 시간을 지우고 자기를 지우는 종교적이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이 내겐 잡히지 않는다.

 

당신 일생을 회상해보라. ....기억 속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보라. ....당신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적은 것만이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지를! 당신의 알맞은 때 이전에 당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렸는가.  -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어떻게 인생을 되감을 수 있을 것인가? 풀려 헝클어진 인생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지 않겠는가? 영생이니 영원성이니 불멸이니 하는 신비에 대한 환상으로서가 아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져 본 적이 없다. 생의 무의미에 봉착한 인간은 진저리치며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탈출하려 한다. 어머니의 품으로, 자궁의 아늑함으로, 탄생 이전의 그 어떤 곳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물론 자살을 통해 빠져나가면 바로 죽음 너머에 그 어떤 곳이 있으리라 믿지도 않는다. 어떤 시간이든 죽음을 내포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 시간성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존재의 실체는 점점 희미하게 흐려지게 된다. 그 흐려진 존재를 그저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어찌 막아낼 것인가?

 

란츠베르크는 자살에 저항하는 힘 세 가지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첫 째로 꼽으면서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 속 존재로서 를 일깨운다. 자살은 나의 죽음일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기에 자신의 삶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타인들에 대한 책임의 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존재는 항상 함께-있음이라는 낭시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함께-있음도 현재의 적합성이 생동하고 있을 때의 문제이지 않은가? 이미 경화된 시간 앞에 서있는 인간을 설득하기에는 근본적이지 못하다.

 

두 번째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자살은 단순히 생명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고통을 견디고 해석하면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라고. 자살은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지금 마주한 난제가 바로 그것이기에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제안이다. 완성되지 않은 삶에 대한 충실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나무람이니 내 충실성을 들여다 볼 일이다. 정말 모든 노력을 다해본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을 일이다. 세 번째 힘으로 내세운 초월에 대한 희망은 내 삶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완전히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이 설득은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처럼 들린다.

 

인간은 더 없이 취약한 존재이다. 1944년 나치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란츠베르크는 과연 이 초월에 대한 희망을 유지했을까? 나는 엄숙한 생의 시간성의 기로에 나도 모르게 들어섰음을 란츠베르크의 글로 인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곡진한 설득의 작업들은 음양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란츠베르크의 고통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살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는 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실존적 결단임을 가르쳐준다. 삶은 본능이 아니라 선택이고, 자살에 저항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책임, 고통의 의미,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기 존재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자살의 씨앗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명철한 정신으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이 죽음의 게임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한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P17, 열린책들


인간 실존 내부에서 인간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유 발견의 시간이었다.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다시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이데거와 훗설과 함께 철학적 사유를 이끌던 위대한 철학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류에게 그 풍성한 지혜를 전달치 못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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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램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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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주석들과 해석이 쌓여있는, 이 작품이 발표 된 이후 흡혈귀 소설의 전형이 된 브람 스토커의 DRACULA에는 성의 정치학이 어떠하다든지, 문화적 편견의 집대성이니, 신구 세계의 충돌이라든가 하는, 한편 정신분석적 비평이니,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이니 하는 진부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관점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작품의 재미를 오롯이 즐기기 위해 낯선 것이 주는 서늘함을 느끼기 위해 읽었다.

 

계속되는 무더위와 더불어 지치고 지루해진 일상적 연속감을 잠시 상실케 할지도 모를 어떤 낮선 것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너무 지치고 내 삶을 구성하는 주변의 일상을 단절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오래된 소설을 집어 들었다. 가장 낯선 것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무엇이 아주 조금 이질적으로 변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몸이 굳어버림으로써 공포를 비로소 체감하듯 이질성을 통해 불연속적인 이질적 세계의 당혹스러움이 필요했던 탓일 게다.

 


소설 첫 장을 펼치면 헝가리-루마니아 지역인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의 성으로 향하는 변호사 조너선 하커의 마음에 드리운 불안과 황폐한 풍광이 어우러져 그의 행보가 마치 죽음의 덧으로 들어가는 듯한 어둠의 그림자로 뒤덮여 읽는 이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를 백작의 성으로 실어 나르는 마차와 기이한 마부, 늑대들의 울음소리와 보이지 않는 동물들의 안광(眼光), 굳게 닫친 성의 문 앞에 장시간 홀로 서 있어야만 하는 조너선이 느꼈을 두려움이 온전히 전달되어 온다. 일단 이 소설 읽기는 성공한 것이리라. 그 이질적 세계의 시공 속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나는 뛰어들었으니까.

 

엄청나게 큰 성에 자신과 백작 이외에 그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조너선 하커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을 땀줄기의 성분은 혐오와 공포, 백작이 내뿜는 썩은 내 나는 악취의 진저리였을 것이다. 런던에 백작의 거처 구입과 관련한 계약을 위해 고용주 호킨스를 대리한 조너선의 방문은 그 본래의 목적과 무관하게 백작의 음흉한 의도에 의해 자유를 빙자한 감금 상태에 처해지고, 백작의 실체를 확인하게 됨에 따라 탈주를 향한 그의 시도들은 긴박함과 실패의 두려움이 혼합된 죽음의 공포로 뒤범벅되어 독자의 정신을 꿰찬다.

 

장면은 훌쩍 넘어 조너선 하커의 약혼녀 미나와 그녀의 친구 루시 웨스턴라가 살고 있는 영국의 휘트비로 향한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일기와 편지, 전보, 신문기사 스크랩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재된 기록 일자들을 서로 이어 맞추며 그 간극에 있을 추리와 논리는 독자의 몫이다. 조너선 하커, 그의 생존을 알 수 없이 끝난 일기에 이어 미나의 편지와 일기가 등장하여 휘트비 항에서 발생한 이상한 사건을 진술한다. 폭풍우 속에 항구에 도달한 배와 느닷없이 뛰어내려 홀연 사라진 개 한 마리, 그리고 키잡이에 묶인 채 사망한 선장의 시신 외에 그 어떤 생명도 없는 배, 이후 평소 몽유병을 앓고 있던 절세 미녀인 루시 웨스턴라의 이유를 알 수 없이 수척하고 창백해져만 가는 병세는 드라큘라가 이미 영국에 거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더해 루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정신병원 소장 수어드 박사, 그의 스승인 반 헬싱, 미국에서 왔다는 아서 홈우드의 친구 퀸시 모리스, 약혼자인 아서 홈우드(고달 경), 드라큘라 행적의 전조로서 간접적 기호로 작동하는 렌필드라는 광인에 대한 관찰 기록이 뒤엉켜 드라큘라의 루시를 향한 지속되는 흡혈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이어진다.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장면이 있는데, 루시를 위해 남성들이 돌아가며 수혈을 하는 것인데, 이 소설이 써질 때 혈액형과 항체반응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지만 수혈이 마구잡이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는 어느 만큼의 이해가 있었음에도 굳이 수혈 부작용의 확률을 늘리면서까지 네 명의 남자가 모두 한 번씩 수혈하는 것이다. 드라큘라에 의한 과다한 혈액의 누출로 루시는 기어이 사망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은데, 루시는 혈액이 모자라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수혈자인 모리스의 혈액이 루시의 혈액형과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비평가들은 반 헬싱의 무지에서 비롯된 폭력을 보았기에 이 같은 논평을 그치지 않는 것일 게다.

 

그 이유야 어쨌든 흡혈귀를 쫓는 만능의 지식자로 행세하는 반 헬싱이라는 인물의 행위는 시선을 끌었는데, 조너선 하커가 이국의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미나와 혼인함으로써 수어드 박사의 정신병원에 임시 거처를 정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사단이다. 미나 하커에게 모든 기록들의 정리자로서, 드라큘라를 쫓는 계획의 주요 종사자의 임무를 맡김으로써 여성의 능동성과 평등성을 은연히 표현했다는 점은 반 헬싱의 남성중심주의와 보수주의적 작품이라는 딱지를 상당부분 떨어내게 해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언데드(undead)가 되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흡혈귀가 된 루시의 영원한 죽음을 위한 행위와 드라큘라의 행적을 쫓는데 시선이 빼앗기고 있을 때 그들의 안 마당에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뒤늦은 발견의 장면이다.

 

반 헬싱은 미나 하커가 황홀감에 도취되어 드라큘라에게 목이 물려 피를 빼앗기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피를 미나에게 주는 언데드의 세례를 보는 장면이다. 흡혈과 수혈의 행위를 유사 성행위의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여기서 미나가 드라큘라의 피를 마시는 것은 그 선정성을 더욱 첨예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이 쓰여지고 있던 1890년대가 빅토리아시대의 절정기였다는 점이다. 엄격한 순결주의, 도덕주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적인 엄숙주의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게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마 반 헬싱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시대의 윤리적 기만을 가장 선명하게 대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문학비평가 크리스토퍼 F. 벤틀리는 그의 저서 침대의 괴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나타난 성적 상징(1972)에서 성기 없는 성교, 혼란 없는 성교, 책임 없는 성교, 죄책감 없는 성교, 사랑 없는 성교, 더 나아가 성교 그 자체라고, 일종의 근친상간적이며 시체 애호적이고 가학적 성교 요소가 뒤엉킨 작품이라고 비난한 것은 어쩌면 일정 부분 정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출간되자 극도로 선정적, 문학적 감각뿐 아니라 건설적 예술성도 부족하다고 비난한 1897. 6. 26애서니엄(Athenaeum)런던 이나 예술적 절제가 결핍된 문학적 실패작이라 논평한 미국판 출간에 대한 1899.12.9. 웨이브(wave)샌프란시스코 처럼 선정성이기는커녕 당대의 위선에 대한 역설적 은유에 가깝기에 닐 게이먼의 비난처럼 소설적으로 취약한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브람 스토커가 쓴 서문의 한 문장에 더욱 주목했는데, 우리의 철학이 꿈꾸는 것 이상으로 하늘과 이 지상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이 말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 너머에 훨씬 더 많은 미지의 것, 낯선 것, 외면한 것 들이 있다는 지성에 대한 겸허한 환기였기 때문이다. 그 낯선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드라큘라 백작과 그의 흡혈 행위는 당대, 아니 오늘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익숙한 것에의 안주라는 편협이 야기하는 위선과 폭력성의 희생물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것에 덧씌운 자기 몰지각과 편벽함, 아마 당대 영국인들, 나아가 서유럽인들의 심리를 채우고 있던 순혈주의가 여성들의 순결과 궤를 같이 함으로써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그 묘사가 일치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즉 드라큘라의 흡혈은 인종적 위협의 상징적 기호로서 드라큘라의 불쾌한 체취, 희생자의 피의 오염과 더불어 오늘날에도 작동하고 있는 문화적 편견의 한 예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이 소설의 원제목을 두고 스토커는 고심했던 같은데, 집필 원고의 제목은 언데드였으며, 소설로 출간하기 직전 자신이 영업매니저로 일하던 라이시엄 극장 공연을 위한 드라마 개작 작품명은 드라큘라 혹은 언데드였던 것으로 보아도 죽음과 살아있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경계지대의 존재임을, 미지의 영역을 활보하는 존재로서 드라큘라를 표현하려 했던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된다. 눈에 보이고, 자신이 아는 것만을 인식하려 할 때 우리는 고집불통이 된다. 루시의 약혼자인 아서는 자신의 피앙새(fiancée)의 시신에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한 시체훼손에 대해 강한 반대 의지를 보이지만, 반 헬싱의 조작으로 루시의 언데드가 성난 흡혈귀의 표정으로 자신의 시선에 들어오자 급작스레 그녀의 시신에 대못을 내리치는 일을 손수 하는 모습은 작가 의도의 한 표현 예라 해도 될 것 같다.

 

Luc Besson, Dracula: A love Tale, 2025》】


드라큘라의 안식처인 언데드가 휴면을 취할 흙으로 채워진 관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 끝에 영국을 떠나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는 드라큘라 백작을 쫓아 마침내 모리스가 그의 보이나이프를 심장에 꽂는 순간 미나 하커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은 길이 남을 장면일 것 이다. 흡혈의 피의 세례로 백작과 텔레파시의 소통력을 지니게 된 미나 하커가 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움이다. 백작이 분해되는 동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평온한 표정에 미나 하커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기뻐할 것이라는 표현은 자못 이중적 의미로 다가온다. 백작의 부재로 인한 자유에 대한 기쁨일까, 아니면 영적 파트너였던 백작의 평온한 표정이 준 그와 연결된 자기 영혼의 지속성에 대한 환희였을까. 사실 소설이 끝났음에도 드라큘라를 정말 없애는 데 반 헬싱과 동료 사냥꾼 무리들이 성공한 것인지 장담하기가 애매하다. 낯선 이질의 문명에 대한 반감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란 말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든 그것은 우리에게 다시금 이질의 괴물성으로 출현하고 부단히 편협의 질서와 투쟁할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네의 세계는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는 의문부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표되고 60년이 지날 때까지 대중성이라는 폄훼의 시선에 의해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작품이었다는 점도 아마 우리들의 집요한 배제의 논리에 은폐된 순수에 대한 혐오스러운 집착 때문일 것이다. 이제 무수한 아류(pastiche)들을 낳고 있으며, 오늘날 가장 강력한 소설 중 하나로 연구되고 기억되는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낯섦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붙인 이름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은 더 많은 세계를 포용할 수 있을 게다.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뾰족한 송곳니, 아직까지도 살아있고, 예술로서 성공하고 많은 주석과 해설을 이끈 역작이다. 마침 뤽 베송 감독이 다크 판타지 물로 각색한 Dracula: A love Tale, 2025가 올 여름(8.26) 개봉될 예정인 모양이다. 아마 브람 스토커의 원작과는 달리 15세기 일명 꼬챙이 블라드로 불렸던 블라드 드라큘라(Vlad Dracula) - 오늘날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기려지는 - 가 활약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21세기 드라큘라라는 낯선 존재가 이 프랑스인에게는 어떻게 표현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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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예찬 - 데라야마 슈지 가출론
데라야마 슈지 지음, 손정임 옮김 / 미행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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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악덕, 저항, 독립’, 네 범주의 예찬(禮讚)’을 하고 있는 이 책은 1963년 첫 출간되었지만, 인간과 인간사회에 있는 그 항상(恒常)적 내용처럼 21세기 오늘과 동시대적이며, 기존 질서에 대한 명확한 반감의 냄새가 범상한 글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 당대에는 급진성으로 비난과 공감의 물결이 마구 뒤엉켰을 문제작이었을 것 같다. 특히 이 책의 글들이 흥미로운 것은 현학을 흉내 내거나 진지함을 방패로 삼지 않으며, 그 어떤 위선도 날려버린 날 것의 체 하지 않는 솔직함이다.

 

가출예찬을 비롯한 네 개의 예찬은 공히 오늘날 가족 제도의 근간인 ’, 페미니스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일부일처와 그들의 아이들로 견고하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깨부수고 그 질척질척한 애정으로 묶인 혈연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군상들의 허위의식과 기만성을 박차고 진정한 자신의 삶의 주체로 날아오르자는 변()이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는 심리적 젖떼기이고,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자신의 에고이즘을 정당화하는 엄마들의 자신을 속이는 변명의 내부를 해체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 아이의 독립적 인생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한편 스위트홈의 중추인 부부중심의 결혼 제도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 유명한 성()혁명론자이자 성정치론자인 빌헬름 라이히의 주장을 토대로 관능적 체험의 결과로서의 성적인 애착의 충족 관계가 지속가능한 것인가 하고, 오늘날 사회의 생산수단 사유화로서 경제 기반만을 문제 삼게 되면서 허울뿐인 부부생활을 만들어내고 있는 에 씌워진 권위주의로 포장된 긍정의식을 해체하고 있다.

 

스위트 홈의 일부일처의 불모성을 비판하는 사례로써 제법 길게 인용되고 있는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 원작의 만화 사자에 씨(サザエさん)의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러나 마치 가장 정당한 이데올로기인 양 오늘날 가정을 지탱하는 일부일처제 중심의 에 대한 충성심을 집요하게 주입하는 교조성을 비판한다. 집의 힘에 의해 거세당한 사자에 씨의 남편 마스오와 에로티시즘에 무관심한, 오로지 일부일처를 지켜야 한다는 체념에서 집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하는 사자에 씨의 경제적 헤게모니에 복속된 집의 현상을 날카롭게 통찰해 내고 있다. 이 만화가 일본인들의 최고 드라마로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로 각색되어 21세기 오늘날까지 그네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성정치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을 통치하려하는지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가출을 말하는데 있어 입센의 인형의 집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인데, ()에는 없는 노라의 가출 이후에 조명을 맞추어 집을 나가 매춘부가 되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노라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인형으로 취급했던 으로부터의 단절을 감행했다는 것, 즉 노라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가출한 것이므로 그녀 자신의 존재 형성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선택이 중요한 것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불행한 시대에 선천적으로 존재했던 집, 노라와 헤르마가 마주해 창조해서 만든 집이 아닌 집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집 제도와 관련한 수많은 속박과 금기가 작동한다. 바로 이 금기로서 금지된 것들은 황홀감과 불안이라는 기묘한 쾌락을 대기시키고 사람을 유혹한다. 하지만 이 금기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으니 절대적 윤리 덕목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데라야마 슈지는 대다수의 스위트 홈을 둘러싼 금기란 생생한 연대성을 강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성을 잃지 않은 이러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통에 찬성하지 않는데, 그 이유 또한 의외의 희극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이중계약으로서 사기인 기브앤테이크의 불균형때문이란다.

 

한국사회도 형사상 범죄에서 비범죄화한 것뿐이고 여전히 민법상 불법으로 보고 있으니 간통에는 신의(信義)의 원칙, 즉 경제적, 심리적 균형에 대한 기대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깊숙이 응시하면 자본주의가 주입한 일부일처, 집에 대한 환상이라는 뿌리와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아마 집이라는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이 경제조건을 전제로 유지되는 한 간통에 대한 불안한 법적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악의 예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디즘과 연결 지어 그 발음의 유사성을 지닌 아베 사다(阿部定)’의 실화사건을 소설(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락원), 영화화한(오시마 나기사 감독 감각의 제국) 가학적 성욕을 둘러싸고 사다이즘이자 사디즘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며, 이들이 이러한 소재를 주제로 삼은 것은 새로운 모럴, 인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사색과 행동의 제안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상에 악이라 생각하는 것 중에 선이 있고, 습관화된 선행 속에 악이 있지 않은 지 자문해 보라고, 스스로 묻지 않고서는 새로운 모럴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당신을 충족시키고 있는 행복의 질서는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이렇게 악의 예찬을 읽다 그의 악의 숭배 속에 자유에 대한 인간적 욕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일상 파괴 논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라 할 때, 바로 그것이 예찬의 속뜻임을 알아차린다. 그는 인간을 변혁시켜 나가는 에너지 원천으로서 악을 숭배하는 것이지, 악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조금 시선을 달리해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예시하고 있는데, 주인공 윌리 로먼은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비프야, 지금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남들한테 미움을 받으면 안 돼. 모두가 너를 좋아해야 해.” 남에게 욕을 먹지 않아야 성공한다는 이 착각이 그를 하찮은 소시민으로 죽어가게 했다. 어떤 인간에 대한 확실한 평가 같은 게 존재할리 만무한 것이고, 욕을 먹음으로써 오히려 한 인간을 효과적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칭찬하는, 말끔하게 청결한 인간은 데라야마의 말처럼 무능한 인간이기 십상일 것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남의 시선에 속박된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먼저 욕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채근하는 데라야마의 충심은 스스로 얽어맨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아마 이 책을 구성하는 무수한 주제를 지닌 작은 글 조각들은 그 가리키는 곳의 삶의 엄중함 탓에 거의 모두가 매혹의 색채를 띠고 있다. 어머니의 약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가난한 소녀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소극적 연민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연대의식에 대해 막연한 사회의식을 지니고 실체적인 책임과는 관계없이 분위기적 책임의식으로 치환하여 실질적인 무책임을 가린다.

 

카뮈의 소설 전락(La Chute)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는 센 강가에 빠진 여자를 구할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수영도 할 줄 모른다며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 후 그는 강가 길을 피하여 다른 길로 우회하여 걸으며 다시는 그런 갈등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요령을 부린다. 죄책감, 위선, 기만과 심판의 문제가 뒤섞인 이 장면은 오늘의 시대가 책임의 문제, 인간 윤리의 문제를 엄중히 시험대에 올려야 할 사안임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문제들을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을 통해 무수히 건네며, 삶의 태도를 자극한다.

 

사실 이 책으로 이끈 동기는 정기현 작가의 소설 이웃집의 탐스러움에서의 짤막한 소개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제안, 데라야마의 말로 하자면 새로운 형태의 에 대한 가능성의 소망이었다. 데라야마의 말을 거는 날이라는 글은 진짜배기 소통, 대화, 사교를 잃어버린 오늘의 사회 속에서 소외 고독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들과의 친교, 아니 그 이상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임의 제안을 보게 된다.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모임,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모임,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모임.” 등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지는 작은 모임이 많이 열려도 좋을 것이라며, 파티가 끝나면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듯 대화내용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카타르시스를 향한 모임은 흥미롭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모임이 있다면 기발한 문예의 향연이고 친교 성장의 토양이 될 법도 하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기념일처럼 아무에게나 말을 거는 날로 활성화된다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친구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법하기도 하다.

 

반짝거리는 생의 걸음 길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빛나는 이 책은 그것을 급진적이고 과격한 언어라고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려는 맥락을 주의깊은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마 그 부정과 저항의 몸짓들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삶의 생동력임을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우리네 삶의 변하지 않는 질서에 대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표현일지도 몰라 옮기는 것으로 맺으련다. 삶의 미묘함이란...

 

모두가 착한 사람이고, 날씨도 좋고, 작은 새들도 지저귀는 데 일어나는 비극...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사랑이나 증오는 사악한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말로 딱 잘라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미묘함과 닿아 있어서 세 배로 눈물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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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 올-타임 1
전경린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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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균형추가 어느 사이엔가 점차 죽음에 무게가 실리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이를테면 무기물이 되어 가는 과정의 시작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 이후 오래 전 과거의 기억을 형상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들에는 기쁨과 행복의 웃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슬프고 아쉬운 것들과 때론 격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들도 있지만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조차 소중한 감정으로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자신의 어린 시절 어느 때의 시간을 그리는 천 개의 웃음과 눈물의 낙원의 화자도 따뜻하고 충만한 기쁨의 기억들뿐만 아니라 원망의 그늘을 드리웠던 슬픔과 흐느낌들을 더 없이 미소를 짓게 하는 자기 생의 원천으로 보듬는다. 그래서 화자는 누구나 자기 생의 밑바닥에 휘황한 보석이 깔려 있을까?” 라는 물음에 바로 긍정하며, 어린 시절에 묻어 두었던 보석의 황금빛 광휘라고 말한다. 화자는 나라고 하기엔 너무 먼 그 아이를 새별이라고 부르고싶어 한다. 그리고 기억 속 어린 자신은 새별이 되어 무한 생명성을 품고 환하게 살아난다.

 

슬픈 건 연못 같은 거야. 마음에 틈이 있는 것처럼 저절로 물이 새어 들었다.” -16

 

작은 틈새로 물이 새어 들어 연못이 되듯, 기억의 못에 자기 삶을 밝혀주었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시간들이 마음에 가득 들어찬다. 딸아이에 대한 소홀과 방치를 그것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새별이의 슬픔은 마을 친구들, 언니들과 키득거리며 웃음 짓던 장면들과 엄마, 아버지로부터 거부의 손짓으로 내쳐지는 봉연 할매의 따뜻한 등의 온기, 웃음이 옆구리에서 자꾸만 터져 나오던 달구지 타고 장터로 가던 길의 추억들이 감싸며 삶의 자양분으로 포용된다. 수많은 웃음과 눈물을 지닌 낙원(樂園)으로서.

 

소설은 이처럼 어린 새별이의 낙원의 기억들이지만, 그것은 틈새로 스며든 간절한 흐느낌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새로운 동력으로서의 생명을 얻은 귀중한 감정들로 수용하게 되었을 테다. 왜 그 시절 엄마들, 사람들은 그토록 질긴 편견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항상 오빠, 남자아이가 우선되고 남은 찌꺼기만을 겨우 눈치 보며 긁어야만 하는 지독한 차별의 시선은 모진 세월 다 겪어 세상에 그 어떤 업보도 남기지 않게 된 봉연 할매의 세대를 건너 뛴 천륜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사랑으로 감싸진다.

 

그 모든 차별과 무관심의 슬픔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관류하는 댓잎과 구름을 흔들만큼의 새별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면들은 작은 종이배처럼 접혀 새별이의 마음에만 닻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시선도 한동안 머물게 했다. 그 일화적 장면들을 꺼내 올리는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가에서 마을의 가장 친한 친구 재남이와 발가락으로 다리를 간질이고 달아나며 깔깔거리고, 함께하던 마을 언니들과 웃음을 터뜨리며, 뱃속이 간지러워 자신도 웃음을 터뜨리는 새별이의 천진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찍어 회피하는 사람들, 상이용사인 다리 하나가 없어 절룩거리며 걷는 희조 아재, 넋이 빠졌다는 복덕이, 뻘다니, 욕쟁이, 여장부로 불리는 봉연 할매도 새별이게는 무람없는 친교의 대상이다. 희조 아재의 절룩거림을 놀리고 달아나는 아이들의 무리와 달리다 누런 보리가 넘실넘실 춤을 추는 보리밭 한 곳을 깔고 누운 새별이와 풀꾹새, 여치, 신나게 웃으며 아이들을 좇다 어딘가에 자빠져 누워있을 희재 아재, 한나절의 이 장면은 차별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마을 언니들을 따라 놀러갔던 재실에 깜박 잠든 새 언니들은 모두 사라지고 금지된 장소에 혼자가 되었음을 자각했을 때 새별이는 두려움으로 운다. 그때 엄마와 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내쳤던 봉연 할매가 새별이를 업어 집에 데려다 준다. 이 장면은 오래된 어떤 그리움 때문에 내게 하나의 깊은 인상이 되었다. 허엉허엉 울자, 할매가 어이구 내 강생이, 어이구 내 강생이하며 엉덩이를 두드렸다.”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느꼈을 보호받음의 포근한 안락감은 그야말로 낙원이었을 것이다. 이 마을 언니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새별이는 자신이 아끼는 늘 업고 다니는 납작한 베개를 잃어버렸다. 엄마가 주지 않는 결핍된 사랑의 대체물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이처럼 새별이의 흐느낌과 슬픔이 작게 새어들지만 그것들에 웃음의 밝은 빛이 비추어지면서 충만한 삶의 재료들이었음을, 지금의 나 자신의 빛나는 시간들이었음을 설득한다. 새별이는 엄마와 아버지, 형제로부터 살가운 보살핌의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어린 새별이를 홀로 남겨두고 가족 모두가 서울로 가버린 날의 그 헛헛함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고작 여섯 살짜리를 집에 홀로 두고 가버릴 수 있는 엄마. 장터에 봉연 할매와 함께 간 국밥집에서 듣게 되는 눈도 크고 입매가 야무진 기, 참 이뿌게 생깄네예.”하는 국밥집 여주인의 말은 더욱 버려진 상황과 대비되어 화자의 슬픔이 강조되어 떠오르는 듯하다.

 

천지간에 혼자 된 아 속이 만신창이가 됐을낀데...” 하는 봉연 할매가 막이 할매에게 하는 천륜의 이야기는 새별이의 상황과 겹치며 아마도 이 소설의 중심 정서(情緖)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나는 고마 갸만 잘 살면 된다하는 그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내리 사랑, 천륜이 부모 자식 사이를 말한다는 것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 새별이가 놀라 입을 벌리는 장면은 이 의미를 엄마로부터 듣게 됨으로써 더욱 기막힌 장면으로 다가온다. 와 그라는데? 아니야, 아니야.” 새별이 마음이 폭삭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는 말은 깊은 슬픔이었을 것이다.

 

엄마로부터 돌아 온 말은 속에 뭣이 들어앉았는지, 참말로 맹랑하기는.”이다. 이틀간 새별이를 집에 혼자 두고 가족모두가 서울을 다녀 온 뒤 서울에서 찍은 사진에 새별이만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와 내만 서울에 없노. 나도 여기 있고 싶다.”라는 아이의 서러운 푸념, 친구 재남이에게 자신의 치마를 벗어주었을 때 새별이를 다그치는 엄마에게 내 거는 없나? 내 거는 아무것도 없나?”를 외치는 새별이의 분노가 내 마음을 휘젓는다. 여기에 그만한 일에 천륜을 입에 올리고, 아이고 여시 매구 같은 기.”라고 내뱉는 엄마의 말은 그녀의 딸아이에 대한 무신경의 수준일 것이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산속 마을 집에 홀로 두고 이틀을 비운다는 것이 그만한 일일까? 그것에 천륜의 의미를 따져 묻는 것이 여우같은 짓인 걸까?


 엄마 천륜이 뭐꼬? 아가 맹랑하거로, 그런 걸 와 묻노?

부모 자식 사이를 천륜이라고 한다. 새별이는 놀라 입을 벌렸다.“ - 110


고운 천조각을 붙여 알록달록한 베갯잇을 한 작고 납작한 베개가 새별이에게 다시 안길 때 어린 새별이는 다시 사랑의 대체물을 돌려받은 것일 게다. 사랑의 상징성을 지닌 이 베개가 화려하게 돌아 온 것은 아마 새별이가 그 어리석은 차별의 슬픔에도 사랑을 잃지 않는 매개였을 것만 같다. 소설은 빛나는 어린 시절 낙원의 기억을 소환하지만 그것은 온통 기쁨과 즐거움만이 아니라 그것의 작은 틈새로 스며드는 슬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들조차 황혼의 삶에 이른 누군가에겐 자신의 삶을 이룬 귀중한 기록일 것이다. 남은 생을 이어갈 삶 의지의 원천으로서 말이다. 산 속 깊은 마을의 감나무와 길바닥에 깔린 감꽃, 너울거리는 보리밭 물결, 새파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들, 깊은 숲 속 보슬비 내리는 소리 같은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천진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술처럼 펼쳐지는 세계에 모처럼 잠겼던 시간이다. 그 포근한 추억의 시간들, 자기애도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찬란한 빛이 가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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