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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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그러면 나의 우주가 그렇듯, 타인의 우주 안에도 다양한 작동 원리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 작가의 말, 269쪽에서

 

표제작 타인의 집의 화자인 '시연'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온 햇살" "가늘게 뜬 눈 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중학생 소녀 '보라'는 장례식장의 "오래되어 갈라진 벽, 그 틈" 을 통해 "검은 곰팡이, 간헐적 울음소리, 삶에 관한 이야기, 찐득한 술 냄새, 그리고 죽음이라는 갑작스러운 사건"을 경험한다. 활짝 드러나 너무 뻔한 것일지언정 벽, 블라인드로 가려진 ''을 통해 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비로소 무심히 지나쳤거나 외면되었거나 혹은 가려져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타인이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수히 다른 삶의 이야기들이.

 

타인의 집은 불안한 생활의 터전으로부터 도약을 꿈꾸는이 시대 젊은 세대의 풍경이 고스란하다. 체인 어학원 상담업무로 위태로운 만족의 삶을 살아가는 '시연'은 집주인에게 세 들어 사는 걸 숨기고 전세입자에게 월세를 지불하는 방에 산다. 명목상인 전대차(轉貸借)의 집이지만 "탐탁지 않을지언정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에 소속돼"있다는 위안의 장소가 되고, "엄연한 집"으로서의 만족감을 준다. 다중 속에 위치해 있다는 안정감과 달리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타인과) 블렌딩 인 될 필요 없"음에 대한 욕구처럼 그 모순과 갈등의 풍경이 소소하게 풀어헤쳐진다. 창가에 서서 "각자 빛을 뿜어내며 차고 넘치도록 많은 풍경 속의 집들"을 바라보는 시연, 오늘의 젊은 세대들 시선이 시리게 다가온다.

 

''과 발음이 같은 zip이라는 제목을 지닌 단편에서는 막상 이렇게 소유된 집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인 '영화', 마치 압축된 동영상 파일을 풀어 놓듯 한 여인의 작은 우주로서의 집과 절묘하게 조우하는 듯하다. 여자에게 집은 편안히 머무는 곳이 아닌 블랙홀 같은 곳, "견고하되 구멍이 많고 드나들 수 있지만 도망칠 수 없는 울타리와 지붕",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굴레다. 고요했던 여자의 삶에 바람을 피우고, 재산을 탕진하는 등 "너무나 많은 드라마를 제공했던" 남편 '기한'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분노와 복수심으로, 그리곤 미움의 정열마저 태워버리기엔 너무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망치고자 했으나 늘 회귀했던, 모든 것이 눌러 담긴 작은 우주"였던 집에 담겨 전달되는 21세기판 '여자의 일생' 압축파일이라 할까? 여자라 지녀야 했던 오래된 질서와 속박들...

 

"평화와 안온함의 상징, 단란하고 완결된 가족을, 때로는 뭔가를 더 완성시키기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모든 것을 어그러지게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

- 괴물들 , 51

 

불임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험관 시술로 쌍둥이를 얻은 여자, 이 과정의 불화는 부부의 관계 단절로 이어지고, 사고로 생계능력을 상실한 남편을 대신해 여자는 어린이집 교사로서 고단한 삶을 꾸려간다. 쌍둥이가 함께 사용하는 듯한 다이어리에 써진 "아빠를. 죽일거야. 오늘, 저녁. 우리 손으로."라는 섬뜩한 이 소설 괴물들 의 첫 문장은 어쩌면 부인하고 싶은 여자의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평온함마저 변질될 수 있음을 여자는 시간이 감에 따라 느끼고 있었다."는 목소리처럼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씌워진 자본주의의 허상이 사람들을 어떻게 황폐화 시키고 있는지 그 적나라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어린이집 교사의 돌봄 노동의 실상까지 더해져,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만들어지는 '마음의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 여자로부터 오늘 우리들의 세계가 외면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괴물들은 누구일까? 교사에게 과다한 수의 아이를 맡기는 어린이집 원장? 자신의 자유를 위해 아이를 맡기고는 책임만을 강요하는 아이들의 부모?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안일한 관료행정? 어린이집 교사를 범죄자 취급하는 미디어와 이기주의의 대중?

 

우리네 삶의 현실이 안고 있는 이러한 지배적 몰지성과 몰염치함의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품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노인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의 계급화 된 노인 구획의 가장 아래 등급 바로 위인 'D등급 유닛'에 대한 미화된, 아니 "실마리도 없는 지옥 같은 미로"를 은폐하는 구역의 이야기다. 부유한 노인들이 거주하는 유닛 A로부터 점차 B,C,D,F로 하향 이동한다. 경제력도 신체와 정신력도 떨어짐에 따라 점차 야만적 원시적 구획으로 하강한다.

 

노인 '미화'는 유닛 C에서 유닛 D로 이동했다. 그녀는 마지막 등급인 F로의 이동을 지연시키려고, "구성원 실태에 도움 되는 정보를 '민원 AI'에 전달"함으로써 화폐처럼 사용되는 '생활평가지수 RM'을 쌓기 위해 노력한다. 이 점수로 소위 이야기 동무인 복지파트너를 초대해 "살아있음을 향한 본능"을 충족시키려한다. 그녀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되게 하는 기분(느낌)을 주는 아이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위협적 낙폭의 출산율, 이를 해결키 위한 불가피한 이민자 수용, 남북개방 등 단일성 지배문화가 다인종 계층이 넘실대는 곳으로 변모한' 세계는 어쩌면 눈앞의 근미래에 대한 우리의 현실이라해도 무방할 듯하다. 압도적인 노령화가 야기하는 경제적 부담의 정의에 대해서, 이민자 등 다양한 계층적 차별이 야기하는 혐오와 배제 등 사회 갈등에 대해서, 노인 사회가 만들어 낼 돌봄 등 인권 사각지대의 확산에 대해서, 청년 실업과 일자리 감소에 따른 세대 간 질시와 분열에 대해서 등 편협한 시야를 서로 촘촘히 연결된 복합적 과제로 확장하게 이끈다. 이 작품을 sci-fi 소설로 범주화하는 이들의 안일한 이해가 있는 듯하다. 닥친 과제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엄혹한 현실적 허구로 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

 

 

【 『타인의 집스위치 에디션 & 편지엽서

 

"누가 도와달랬어요? 감사하다고 충분히 말했잖아요. 한번 도움을 받았다고 평생 죄인처럼 살라는 겁니까? 누가 도와달랬느냐고요..."

-상자속의 남자, 180

 

위의 인용된 문장은 작품 상자속의 남자 화자가 언덕에서 굴러 내리는 트럭에 무방비로 깔리는 아이를 구하고 대신 영원히 삶의 길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된 형을 대신해서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감사의 마음을 너무 쉽고 바르게 망각하는 사람들, 택배 상자를 분류하고 하루치 물량을 배송하는 택배 노동자인 ''는 세상이 가르쳐주는 이 교훈으로부터 "굳이 남들이 감사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가 고마워할 만한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더 위험해지거나 손해를 본다는 뜻이니까.(181)"라고 상자 속에 살기로 한다. 안전이라는 삶의 모토를 지키기 위해.

 

이 사건을 시작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가 더해지는데, 눈앞에서 모녀인 두 여인이 잔혹하게 살해당할 때 ''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때 문 앞에서 무참히 스러져가는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경직되어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고 은테 안경너머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예의 소년과 마주한다. 소년은 ''에게 말한다. "알고 싶을 뿐이에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서요.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187)" ''의 형이 마지막처럼 남기는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는 말이 과연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이 불가능해 보이는 답에 근접하는 것은 우리들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한 위로의 방식이랄 수 있는 마지막 에피소드일 것 같다. 타자를 향한 내 태도만큼은 자신을 위해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이 될 수 있기를.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면 성장하고 나면 소설가 '손원평'이 되었을 것 같다고 여기고 싶은 문학소녀 '보라'가 있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다. "어둠을 갈라내는 빛"을 향해 자기만의 소설을 완성해가는 씩씩함, 그리고 시니컬함 속에 위트까지 담고 있는 재치 있으며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심리적 능숙함이 던져주는 즐거움 탓이었다 할까? 문학계 원로라는 그럴듯한 의상까지 걸친 소설가 윤석이 세간의 맹목적 열광을 빌어 남의 작품을 자기만의 언어로 닥아 낸 후 출간하는 뻔뻔함 등 작품 내 갈등구조나 서사도 소설의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흥미롭지만 내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세계에 시선을 맞추고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맞는 기성 권력의 추악한 위선과 기만의 양상들이며, 그리곤 호들갑을 떨어대는 세상의 방정맞음에 대해 우아하게 날리는 마지막 질책의 한 방이다.

 

"놀랍지만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망각했고 또다시 처음처럼 경악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워도 낡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도, 전부 똑같거나 혹은 전부 달랐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236

 

이 소설집의 처음을 시작하는 4월의 눈속 어느 눈 녹은 날 서로 어깨를 토닥여주는 이방의 여인과 남자의 정경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이 책방을 열기 전까지" 열리지 않은 책방의 비 그친 길을 걸어가는 "손님이었던 한 사람과 주인이 아니었던 다른 이의 허밍이 섞여" 흐르는 장면은 어느 한 폭의 그림처럼 깊은 잔상을 남긴다. 유토피아를 잊어버린, 아니 부존재라 낙인찍었던 세상의 가능성에 도전해야 할 의미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무한히 다른 타자의 세계를 알아가려 할 때 아마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한 정의라 해도 된다고 선언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이 "대중에서 시민으로, 관중에서 독자로 이끄"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해낼 만한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작품집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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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트랜스필 총서 4
권용선 외 지음, 최진석 엮음 / 비(도서출판b)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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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感應;affect)이다."

- 16쪽에서

 

사실 '감응(affect)'이란 개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재적 힘"으로 규정한 바있다. 다만 이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사유의 도구'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것의 잠재력을 문학을 비롯한 예술, 사회정치 및 세계를 고찰, 규명하는 시도들이라 할 것이다. 여섯 명의 저자가 쓴 여섯 꼭지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유물론적 시학'을 말하는 이진경의 문장을 빌어 말한다면, '내 신체 속으로 밀고 들어와 스며들고 휘감겨', 어떤 변화를 표현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마다 수용능력이라는 감각이 다르니 말이다.

 

.  첫 번째 평설인 이진경의 감응이란 무엇인가?는 제목처럼 감응에 대한 입문으로 제격이다. 그의 말처럼 전공자의 호구가 된, "전공자의 가정된 지식 없이는 무의미한 단어"들을 남발하는 그런 조악하고 오만하며 무지를 포장하는 언어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념이란 철학자의 이론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그 개념만으로도 사람들의 사유나 삶 속에 파고들어가 무언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효과를 가진 독자적인 말"이라는 그의 정의가 그것이다. 어떤 외부- 책의 문장이 되었든, 사람 그자체가 되었든 - 와의 만남으로부터 촉발 받을 능력이 있는 신체라면 누구라도 이 감응의 시학과 함께 섞이며 감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경은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쓴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감응의 모호한 일원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가는 소설"이라고 35년째 폐지 압축 일을 하는 주인공 '한탸'를 통해 감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압축되어 버려지는 책들을 보면서 점점 스스로가 버려지는 책이 되는 감응을 갖게 되는데, 아마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예술 작품이란 감응의 응결"이란 문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구나라는 반가운 깨달음을 얻게된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딪치며 (...)

각각의 존재자의 신체에 변화를 야기한다." - 15쪽에서

 

감응이란 이처럼 "어떤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내 신체에 발생한 변화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효과를 신체 안에 수용하여 얻는 능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 철학자이자 시인인 진은영의 시를 비롯한 감응의 다양한 양태들이 소개되는데, 이해되지 않아도 의미화 되지 않아도 전해지고 파고드는 감응의 독특한 능력, 특이함의 문턱을 넘어 흘러가지 않고 기억되어 신체 속에 응결되어 다시금 다른 것을 촉발하는 '사건의 말없는 신체'인 사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는 합리주의 이성을 말하면서 이러한 감응의 능력을 잃게되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다 내재된 것임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우리에게는 이같은 탁월한 감응의 능력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신체 안에 응결되어 있던 강밀했던 감응의 기억은 어쩌다 무심코 무엇인가에 의해 밀려 들어와 삶의 장소에 쏟아 내게 될 때가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이진경의 평설은 문학작품을 쓰는 이, 그리고 읽는 이들 모두에게 진짜배기 사유의 도구로서 감응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자가 되어 줄 것 같다.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감응, 그렇게 밀려든 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시간과 환경이 달라져도 잊지 않기 위해 신체를 갖는 어떤 것으로 응결"시킨 것이 곧 예술작품임을.





.   아마 내가 감응을 지녔던 두 번째 평설은 최유미가 쓴 공생의 생물학, 감응의 생태학이 될 것 같다. 생물의 다양성은 세대를 거듭한 차이의 누적이 계통수의 분기로 나타난 결과라는 전통적 진화론을 거부하고, "생물 다양성의 원동력은 분기가 아니라 융합"이라 주장한 1967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gulis)'의 이질적 세포의 공생, 이종간의 우발적인 엮임,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라 말하는 새로운 배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의 진화론과 신다윈주의자들의 게놈 중심적 생물학은 '타자와 관계를 경쟁과 적대'로 보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연결하는데 소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개체는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임을 인정하는 순간, 타자와의 관계는 화합과 공생의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시지구에서의 고세균과 박테리아가 

서로가 서로를 먹던 시대의 영상을 돌려본다. 이 적대의 일상이 

어느 순간 멈추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고세균이 박테리아를 먹다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느닷없는 실패가 다른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틈을 연다.

이들은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각자를 자신의 부분과 융합한 것이다."

- 78~79쪽에서, 부분 변형 발췌인용

 

우리(인간)는 개체였던 적이 없다. "소화불량 메타포는 약육강식이라는 계산된 드라마"의 허위를 들추어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에게 다른 신체와의 마주침, 서로 밀려들어가고 응결되어 새로운 감응을 촉발하는 것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종혼효적 결합의 아름답고 멋진 사례인 꿀물을 제공하지 않는 오프리속 난초와 꿀벌의 공생 이야기는 수분과 꿀물의 교환이라는 타산적 경제원리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과학을 "자연이란 무자비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규정"하여 인간사에 투사하려는 물신화된 왜곡의 도구화 환상을 깨부순다.

 

난초와 꿀벌이 서로의 즐거움과 놀이를 위해 서로 감각을 촉발하고 반응하는 모습은 매혹 이상의 '감흥의 생태학'이 발설하는 얽힘, 그 현명한 신체들의 마주침의 의미를 읽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신체에 맞춰나가는 성취의 기쁨, 아마 고매한 지능을 가졌다는, 신이 되려하는 인간이 망각한 이것을 되살려내려는 노력이 바로 지금에라도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각성을 촉발한다.

 

.  내게 감응을 일으킨 세 번째 평설은 문학평론가 송승환이 쓴 증언의 문학성과 시적 감응의 정치성 이다. 2차 세계대전 독일강제수용소 체험의 기록을 쓴 '로베르 앙텔므''프리모 레비', 고문의 기록을 쓴 '장 아메리' 글을 통해 공백의 언어, 비인간의 증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증언 불가능성의 고백이야말로 감응의 말임을 듣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난 세살 가량 되어 보이는 죽어가는 아이의 환원 불가능한 언어, "'후르비네크(Hurbinek)'의 언어"가 비언어롤 읽힐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지금-여기 부재하는 증인임을 의미화 하는 문장들은 그 상상 불가능성의 사건을 내 신체의 어느 공간 속으로 풀어 놓는다. 이것은 시인 랭보의 1인칭 주체의 시선을 상실하고 타자로서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 새로운 이해와 경험을 신체에 새기게 되는 시()를 통해 증인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일 수밖에 없음을 몽롱하게 바라보게 한다.

 

.   '발터 벤야민'192612월 모스크바 박물관에서의 세잔의 그림과 우연의 마주침은 "예술작품을 관조와 반성의 대상적 위치로부터 탈출시켜 작품 고유의 무게를 방사하는 '신체'로서의 지위"가 되었다는 신체 또는 감응의 전도체를 말하는 권용선의 평설은 '감응'이 예술작품을 새로운 공동체적 신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각성의 전도체임을 가리킨다. 이밖에 스피노자의 'affect'에 대한 해설이라 할 현영종의 글과 문학평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최진석의 글이 감응의 역동적 적용을 시도하여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 글에는 여전히 일본식 번역어인 '정동(情動;affect)'의 사용이나, 또는 감응과 감정의 명료한 개념적 분리 없이 혼용되어 독자의 읽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감정은 감응의 산물이다. 감응이 "상이한 정서적 반응이 섞이는 이행상태"라면, 감정은 "이렇게 섞인 정서적 반응이 귀착되는 정서적 상태"이다. 이진경의 지적처럼 사람들의 사유에 파고들 수 있는 언어로서 개념어들의 정리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세계의 이해와 통찰 도구로서 감응이 많은 사람들의 신체로 확산되기를 염원하는 그런 멋진 걸음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삶이란 부단한 배움의 연속인 것만 같다.

 

"동종과 동류가 아닌 것들 사이의 상호적인 포획은 어떻게 하면 상대를 더 잘 촉발할지,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잘 촉발될지를 부단히 배워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든 신체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어나간 부단한 배움의 기록이다." - 105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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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란 / 철학이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월드북 67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김현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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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질서가 횡행하는 것을 이것도 자유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고 

체념할 것이다."

- 존 윌리엄 워드(John William Ward; 1781~1833)

 

1930년 발표된, 당시 부상하던 파시즘에 대한 경고와 대중민주주의의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저술을 2020년 다시 깨워야 하는 것은 "범용한 정신이 ...모든 곳을 밀어 붙이려고 하는(19)" , 고정된 자기 인식에만 맞춰 사는 편협의 공존으로 퇴화하는 사회대중의 현상 때문이다. "말을 토해내고 싶다는 욕망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63)", 정작 필요의 의론은 중지시키고 적의와 선동적 야만이 여론을 장악하는 역사적 오류가 반복되고 있음에서이다.

 

오르테가는 '대중'이란, "스스로를 ...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생각하고 타인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느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16)" 이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형을 스스로 반복하는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 다른 생각을 배제(19)"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자기 관념의 창고 안에 들어있는 인식에 만족하며 이는 자신이 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자신 밖에 있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이 "관념의 창고에 안주하고 자기 폐쇄의 메커니즘(59)"을 반복한다. 바로 편협성, 무지의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에 터 잡은 위력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이같이 지성이 폐쇄된 인간들의 군집인 대중은 파시스트가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알량한 지식, 이미 정해져 있는 관념의 변죽을 울리며 자신의 머리에 쌓인 공허한 문장에 감탄하며 그 외곬의 대담함으로 황색언론의 기수로 변신한 스스로에 감동한다. 정의와 공정성을 외치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부정의에 따른 자기 편익뿐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모순된 형태는 자만한 도련님이라는 형태이다." 

- 본문 86

 

이 밀봉된 마음의 존재는 자기만의 규칙에 따른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자만한 도련님의 규칙이 아닌 이유이다. 그저 자신의 견해만이 정의라는 태도를 취하는 인간 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대 입장에 어떠한 존중 의지도 없는, 상호 따라야 하는 일련의 규제를 인정하려하지 않는, 결국 의지할 사회적 규준의 권위가 사라지고 협의(協議)의 의론이 불가능(62)"하게 된다. 기댈 수 있는 규칙이 없으니 문화가 존재할 도리가 없어진다. 결국 이 결여는 문화를 사멸시키고 야만성이 득세케 한다.

 

오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와 원한의 거친 언어가 정치 무대를 지배하고, 여기에 환호작약하는 대중의 원시성이 활개를 친다, 조중동을 비롯한 황색언론과 미디어들, 기득권을 결단코 내려놓지 않으려는 수구정당과 검찰 등 권력기관, 여기에 주구노릇을 하며 자기 이익의 기회를 엿보는 기회주의적 담론가들이 마치 정의의 수호자 행세를 하며, 대중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 불어 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야만 상태이며 대중민주주의, 포퓰리스트들이 마음껏 날뛰는 세계를 조성해준다. 틈만 나면 규제의 폐기를 제안하는 '야만인의 대헌장'이 수시로 읊조려진다. 내가, 우리가, 이들 대중이 아니기 위해, 전체주의 세계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해 무지의 편협을 벗어나야 하는 까닭이다.

 

"세계 안에서 풍부한 수단만 보고 고뇌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대중! " 

- 본문 85

 

이제 마음껏 "활개치고 있는 것은 대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세력을 부여받은 원시성 충만한 범용(凡庸)(81)" 인간이 외관상의 승리를 향유한다. 어리석음, 프로파간다, 적의(敵意) 충만한 언어로 인간본능의 가장 저열한 부문을 자극해 점점 지배력을 확장한다. 그래서 오르테가의 책 제목은 '대중의 혁명'이 아니라 '대중의 반란'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 정신적 야만성을 밀어붙이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자기 영역의 아주 작은 한쪽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래서 대중의 평범성에 기생해 이 사회 모든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하는 터무니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누구인가?

 

더구나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복잡 미묘해져만 가는 문명 자체의 진보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것을 해결할 수단을 획득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지능과의 부조화(77)"를 깨닫지 못한다. 기술 문명에 킬킬대며 저항할 이유도 느끼지 못한 채 엉뚱한 반문을 하기까지 한다. 앎의 깊이가 어디까지이냐고? 타자의 고뇌를 헤아릴 만큼, 자기 앎이 천박한 것을 인식할 만큼, 이것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자기 관념의 창고가 결여, 공백 투성이임을, 그래서 끊임없이 타자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게 될 만큼 겸허한 앎이면 대중에 파묻히고 휘둘리는 정신을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르테가가 정리한 '대중의 심리구조'라 기술한 항목들을 열거하며 맺어야 할 것 같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권위로부터 자기를 폐쇄하고 자신의 의견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매사에 개입하며 자신의 평범한 의견을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혹여 자기 삶에서 비극적인 제약이란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야만적 정신의 응석받이를 탈피해야 우리가 가까이 가려하는 민주주의, 자기 삶의 주역임을 잃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와 그 사생아인 전체주의는 너무 빼 닮았기에 이를 인식하는 것은 오직 개인의 몫이다. 대중은 항상 어리석기 때문이다.(1) 대중에 대한 이 신랄한 비판적 고찰의 서술은 어쩌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회귀할 테마일 것 같다.

 

 

(1)2016년 촛불을 든 시민들은 '공중'이라 부른다. 이와 달리 대중은 그저 수신자로서의 집합적 군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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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이 몰고 온 오늘의 사회는 노동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들끓고 있습니다. 정의(Justice)를 세계적 화두로 사람들을 감화시켰던 마이클 샌델교수가 바로 이러한 불공정성의 심화를 야기하는 그 연원이 짧음에도 급속하게 신화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능력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주제로 새 책 The Tyranny of Merit를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말로 의역한다면 '능력주의의 오만' 또는 '능력의 폭정'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네요.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우리의 좋은 성적과 학위는 모두 우리 자신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괜찮습니까?" 내 능력으로 성공했으니 그 과실을 독점적으로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출발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죠.

 

기회가 진정 동등하게 주어졌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나아가 이렇게 해서 기득권을 차지한 엘리트 계층이 능력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압제한다는 것이죠. 대중이 이에 혐오와 불공정함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어두운 측면인 불평등성을 폐기하지 않으면 포퓰리스트(populist)가 엘리트 계층에 전복적 시선을 지니는 것은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죠.

 




승자와 패배자를 다루는 이 능력주의라는 신화에는 불평등을 기초로 하는 교활함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가난으로 연결되고, 부자는 부자로 연결되는 사회 구조를 이루는 토대 환경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불평등성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 전투'에 덜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대학 학위(,박사 등), 성공의 정의, 일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특히 일(직업)에 대한 오늘의 가치 인식은 '벌어들이는 돈', '계급적 지위'가 아니라 "공동선에 대한 기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쓰레기를 수거하는 미화(청소)원이 의사만큼 중요한 사회적, 공공 기여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일하지 않으면 질병 통제는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데 서로 얼마나 깊이 서로 지지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 답변이 될 것입니다. 택배, 창고 노동, 간호보조, 홈케어 ..., 아마 이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검찰청의 정치 검사들보다 공공선에 훨씬 중요한 기여자들임을 부인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가치 인식을 공공선의 기여로 조정하면 지급되어야 할 돈(임금,수익 등), 직업 인식, 성공의 조건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내가 잘해서 이룬 것이라는 착각은 패배자들에 경멸을 보내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실패는 네 잘못이라는 오만함을 양산하는 능력주의는 이러한 가치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 도덕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죠. 뉴노멀의 시대, *사회적 계층의 이동성에 대한 신뢰를 포함하여 정의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공하는 저술이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 계층의 이동성: 샌델은 하위1/5의 계층 사람이 상위 1/5계층으로 이동하는 비율은 1.5~2%내외의 비율이라 지적하면서 능력주의는 허구이며, 수많은 불평등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고 비판적 사유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참조】능력주의(Meritocracy)'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마이클 영'의 저서 , The Rise of the Meritocracy(능력주의의 부상)은 마이클 샌델의 새 책을 읽는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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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가족특강 시리즈 2
이희경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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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족 특강'시리즈 두 번째 권으로 기생충과 가족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에 이은 세 번째 읽기이다자본주의의 동력축으로 근대 이후 독특한 구조로 탄생한 핵가족(엄마-아버지-아이)이 '물적 토대'의 붕괴에 따라 해체분열되며 야기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 그 대안의 모색이라 하겠다저자는 '루쉰'의 소설 광인 일기를 비롯해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한국어 번역판 제목)영화감독 김기영의 작품 하녀육체의 약속등을 통해 근대 이전의 가족 형태와 오늘의 핵가족의 차이를 설명하며나아가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가족주의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가 오마주 했다는 김기영의 하녀는 그야말로 원만한 가족행복한 가족이라는 판타지는 타자의 배제와 낭자한 피 위에 들어선 잔혹한 동화라고 말하고 있다핵가족 탄생과 관련된 이젠 고루해진 사설은 이쯤에서 그쳐야겠다문제는 21세기 오늘우리네 사회가 이러한 핵가족이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아마 1997년 외환위기로 해체가 시작된 이래 핵가족을 토대로 한 물적 기반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까닭일 것이다.

 

경제적 기초 단위로 작동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소위 '정서적 연대'라는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은 쉽게 허물어져 내린다. OECD 통계는 이혼율 1위 국가에 한국을 올리고, 1인 가족과 2인 가족의 증가와 같은 가족 형태와 주거 형태의 변화는 물론, "모성의 변화뿐 아니라 부부관계낭만적 연애에 기초한 내밀한 사랑이라는 신화도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페미니스트들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문제는 가부장제야!, 남자들이 문제야! "기존 가족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지체된 사회적 담론은 퇴행적 진단으로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만 한다.

  

물론 이 같은 가족 형태의 붕괴가 반드시 결핍의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그리고 관계의 독점과 배타적 이기주의와 같은 핵가족의 속성마저 바로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부양하는 남성아이를 양육하는 여성정서적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는 아이"라는 삼각형 구도를 깨뜨리는 근인(根因)으로서 자본주의체제가 요구하는 물적 소비와의 균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루쉰의 Q정전 '정신승리법'을 삶의 신조로 하는 아Q란 인물이 마침내 이 좌우명삶의 습속을 의심하는 "성욕과 식욕 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좌절"되는 순간을 겪는 장면은 '연애의 비극', '생계의 비극'이 어디에 토대를 둔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인간 세계의 모든 습관체제의 성립은 물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이다이 토대의 붕괴가 몰고 온 오늘의 가족주의 해체 현상은 어린아이는 물론 노인에 대한 돌봄 노동의 상실에 더해 급진적 기술사회로의 진입이 야기하는 유휴노동력의 양산초고령화 사회화로 인한 비용의 증가 등 사회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세계새롭게 요구되는 가치로의 '이행'을 위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저자 이희경은 지적한다즉 변화된 질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담론 지체로 인한 윤리적 공백의 발생이라는 것이다그나마 정서적경제적 안식처였던 핵가족의 붕괴는 폭행과 학대는 물론 버려지는 아이들방치되어 고독사로 발견된 노인들의 양산이라는 돌봄 노동 상실의 결과를 난폭하게 드러내고 있다그렇다고 자기 파멸성을 내재한 핵가족으로 다시금 회귀하여야 하는 것인가아니면 여전히 대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해체되는 가족주의를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항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마주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향수를 되살려내려 한다아마 근래의 레트로 열풍, 1970년대 디스코를 소환하여 추억의 향기에 취하게 한 최근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이나,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복고적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 위기와 돌봄 위기를 다시 가족 안으로 쑤셔 넣는"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는 시간 역행적 질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근대 가족주의가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시계를 뒤로 돌릴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경우즉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개인적사회적 대안도 없이 가족의 해체를 수용한다는 것은 버려지는 아이혐오의 대상으로서 노인에로스를 대체한 성폭력 ..., 한마디로 "공망의 세상이 될거"라 예견한다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적 퇴행이 아닌 문명적 형태의 질서정연한 연착륙은 무엇일까결국은 우리가 배척하도록경쟁의 대상자로서밟아 뭉개버릴 대상으로 배운 타자와의 관계 회복새로운 관계망의 형성이 구축해야 할 새 질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동성결혼소울 메이트다자간 사랑(폴리 아모리)을 전제한 집단결혼과 공동 양육 및 재산공유체제인 일종의 집단가족제로서 '폴리 피텔리티등을 제시하고 있지만과연 이것이 가족을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로 정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다만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공생적 관계의 회복은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연습"해야 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덕목일 것이다삐걱거리는 자본주의와 동행하던 가족주의의 붕괴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을 지금 종용하고 있다그럼에도 여전히 유대와 연대의 세계라는 그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는 내가 남는다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진정 고집스레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어쩌면 작은 관계들의 형성부터 시작하라는 저자의 조언이 변화의 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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