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유혹 -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
존 A. 샌포드 지음, 노혜숙 옮김 / 아니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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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부가 아닌 것은 절대 남을 괴롭힐 수 없다.”

                                    - 헤르만 헤세

 

 

책의 제목과 달리무의식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다만, 심리적 균형이 무너졌을 때 의식에 무언가의 정보를 보낼 뿐이다. 이 신호를 내 의식이 받아들일지, 억압할지, 무시해버릴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곧잘 무의식을 부정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알지 못하기에 부정하는 것이고,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한 개체 내에 두 개의 주체란 터무니없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그의 저서 인간과 상징에서 자기네 합리주의가 인류를 심적인 지하세계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무의식이 은밀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계획이나 결정에 몰래 개입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주인일 수 없다.”, 무의식과 소통하는 법을 상실한 현대인의 무지함과 심리적 무능력을 질타하기도 했다.

 

가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현듯 떠오르는 심상(心象)에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무엇일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던 적이 내겐 그리 적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꿈을 꾸면서 조차 깨어나면 이 꿈의 이미지들이 뜻하는 것을 나름 해석해 보려고 어쭙잖은 시도를 해 보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내 행위들은 이 이미지들이 내게 무엇인가를 알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만큼 융의 무의식의 원형들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림자 인격 등은 내 삶에 깊숙이 들어앉은 인식이랄 수 있다. 책은 이러한 무의식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또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한 인격의 전체성에 있어서 얼마나 심대한 의미인지를 설명한다.

 

내겐 무엇보다 무의식을 어떻게 내 의식의 표면위로 끌어올려 내 삶의 태도에 반영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동기였다. 따라서 무의식이 어떠한 방식으로 신호를 발하는 것인지, 그것은 어떠한 이미지 혹은 관념들로 알리고 있는 것인지, 나아가 무의식과 소통하는 그 구체적 방법론의 작은 실마리라도 붙들고 싶은 간절함 탓에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다리, 무의식과 소통하기라는 3장과 5장은 밑줄과 중요표시로 울긋불긋해졌다. 이러한 목적성에 더해 저자 A. 샌포드'는 남녀의 관계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파트너들(the invisible partners)’이라는 남자의 심연 속 여성성인 아니마(anima)와 여자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animus), 그리고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자아를 위해 은폐된 무의식인 그림자 인격 등을 통해 온전한 인격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아니무스와 마주치면 5분도 안되어 아니마에 사로잡힌다.”(본문 100에서)

 

이 문장은 남녀의 무의식이 의식의 표층위로 드러나 충돌하는 사태의 표현을 절묘한 희화성에 담아낸 절창이다. 아니마는 여성성의 원형적 심혼이며, 아니무스는 남성성의 심혼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그자체로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는가, 즉 자아가 이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우리 삶의 태도를,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시초에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그네들의 심혼에 담겨져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상, 긍정적인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맞춰져 그에 부합하는 대상으로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덧없는 질주로 열정은 식어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 환상은 자취를 감추며, 이 원형적 무의식은 부정적으로 변화하여 혐오와 증오로 둔갑한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그들의 여성성과 남성성은 각자의 단점이 되어 부각된다. 아니무스는 당당한 남성의 권위적 목소리로 남자를 비난하고, 아니마에 사로잡힌 남자는 은근히 빈정대며 방어적이 된다. 야속한 마음이 든 여자의 아니무스는 검이나 곤봉을 들고 나타나 남자를 비난하면서 공격을 시작한다.”이때 남녀 각자는 자신들이 진정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기 내면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 무의식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혹은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은 상대의 본 모습이 아니라 내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그려낸 환상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투사(projection)',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생각, 감정, 동기, 소망들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본문 33에서)

 

이러한 경험을 나는 피해가지 못했다.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미워하게 되었을 때, 내 짜증과 분노가 오롯이 상대에게 투사되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적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러해야만 한다는 내 아니마의 이상적 기준에 맞춰진 타인이 존재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곧 그것은 내 심혼이 투사한 환상일 뿐임을. 요즘은 타인에 대한 불만의 싹이 보이면 내 마음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원적인 무엇의 존재여부를 사유하는 과정을 갖는 것을 습관하고 있다. 이러한 내면 응시의 습관을 더 강화하게 된 계기는 비교적 근자의 사건이랄 수 있다. 선한 얼굴을 한 악인, 권력의 최정점에 이른 자의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한 아이로 남아있는 우매한 정신, 그 끔찍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관계하는 세계의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거나 인정받기에 거북한 욕망이어서 부정되고 억압되어 무의식의 심연에 침전되어 있는 것들이 무수하다. 이것을 그림자 인격이라 부르는데, 외부세계에 드러낸 얼굴 표면아래 은닉되어 가려진 인격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무의식의 이름일 것이다. 자기 안의 추악한 것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선한 얼굴이라는 단 하나의 페르소나에 자기 인격을 완전히 동일시하였을 경우 저자가 지적하듯이 가장 위험한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책에 소개되고 있는 로마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의 무자비와 잔인함처럼 익히 알려진 역사세계에서 무의식의 대면, 다시말해 자기 내면의 응시를 무시했던 인간의 전형, 그 최후를 볼 수 있다.

 

그림자 인격을 비롯한 무의식은 이처럼 한 인격의 전체성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 역할을 지니고 있다. 남녀관계의 무의식, 특히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미치는 영향을 통해 온전한 인격의 지향을 말하는 이 책의 의도는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적 환상은 병적인 것이라기보다 편협하고 불균형한 의식을

교정하라고 일깨우는 무의식의 요구이다.” (본문 159쪽 변형 인용)

 

무의식에 의식이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대화할 방법이란 없다. 다만 무의식은 위와 같은 형태, , 환상, 투사의 응시를 통해 무의식이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여자의 아니무스는 성직자, 교사, 의사, 비범한 창조자, 선구자 등의 모습으로 출현한다고 한다. 이때의 꿈 또는 환상에서 나타난 이미지가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임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의 온전한 형성을 위한 멋진 시작이 되리라는 것이다. 성적 환상은 내면을 들여다보게하는 중요한 정신적 에너지를 내포하는 것이며 이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내 삶에, 내 인격에 있어서 결여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해 주리라는 것이다. “무의식은 온전한 개성을 이루고자 갈망을 열정적인 에로스로 표현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일 게다.

 

이 책은 내게 나름의 수확을 가져다주었다고 해야겠다.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기법이라는 무의식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론의 일말을 건져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연결하여 의미를 명료화하는 일련의 방법에서부터 법정 재판과정과 같은 양상으로 내면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방법, 적극적 상상을 글로 써내려가며 진실을 마주하는 것 등은 당장에 성과를 내지는 못하겠지만 내 삶의 조화와 균형을 위해 꾸준히 실행해 볼 예정이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는 본질적 인간을 상실한 평균적이고 실재하지 않는 인류라는 정서적 도덕적 기준의 추상적 인간이라는 신념을 강요한다. 정신이었던 것은 지능과 동일시되고, 막대한 정서적 에너지는 지능이라는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고 탄식했던 융의 말과 같이 무의식과의 대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비인간화되고 오직 지적 관념에만 몰두한다. 무미건조함과 물신화로 타자에게 상처를 주고, 독선과 기만에 이기심만을 양육한다. 자기안의 악은 도외시하고 타인의 악만을 탓한다. 그 타인의 악이란 곧 자기 무의식의 투사인 것을 말이다. 무의식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만큼 윤리적이고 도덕인 것이리라. 내가 먼저 변화해야 타자도, 사회도 변화 할 것이다. 무의식의 이해는 오류와 왜곡과 무지를 바로잡고 우리네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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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바치는 심장 문득 시리즈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박미영 옮김 / 스피리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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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 가운데 많은 것이 전율에 기반하고 있으며,...(中略)... 나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 에드거 앨런 포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서문 에서

 

 

포의 소설 대부분은 그의 설명처럼 독자들을 전율에 몸서리치게 한다. 소름끼치는 것과 혐오스러운 것이 한데 뭉쳐져 으스스함과 음침함의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1840년 단편소설 25편을 묶어 출간된 그의 선집 제목,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Tales of the Grotesque and Arabesque)’에서와 같이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음산하고 환상적이며 기이한 무엇의 세계, 그로테스크한 이질적 세계로 우리들을 유인한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이 이러한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일러바치는 심장에 수록된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이나 일주일에 일요일 세 번처럼 풍자적인 작품이 있는가하면, 그에게 추리문학의 창시자라는 명성을 안겨준 명민한 탐정뒤팽이 등장하는도둑맞은 편지와 같이 더 이상 그로테스크하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다.

 

그럼에도 포 소설의 독특한 매력은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던 세계가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당혹감과 그 생경함이 자아내는 통제 불능의 세계에 있으며, 여기에 더해 은닉된 인간과 인생의 모순, 광기, 부조리, 불합리, 어리석음의 드러냄에 있을 것이다. 아마 수록작 중 붉은 죽음의 가면은 이러한 감상에 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에 치명적 역병이 돌자 궁정의 신하와 숙녀를 동반하여 세상과 동떨어진 격리된 수도원의 성채로 피신하여 성의 안팎을 봉쇄해버린 후 그들만의 향락을 즐긴다. 밖에서는 역병이 격렬하게 창궐하지만 그들은 화려한 가면무도회를 꾸미기에 분주하고 일곱 개의 방으로 구성된 연회의 무대를 준비한다. 아마 이 새로운 세계의 장식을 묘사하는 문단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의 전형일 것이다.

 

확실히 기괴하게 할 것,온통 눈부셨고 반짝이고 짜릿했으며 환영 같았고, <에르나니>이후로 많이 본 광경이었다. 맞지 않는 날개며 장신구를 단 아라비아풍(아라베스크) 인물들도 있었고, 미치광이 같은 현란한 취향도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괴한 이들로 넘쳐났다. 끔찍한 모습도, 혐오감을 불러올 만한 모습도 적지 않았다.” - P 52 에서

 

이 기이한 시공은 마치 붉은 가면을 쓴 죽음이라는 음산한 존재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듯하지 않은가? 이 세계 같지 않은 혐오와 소름과 몽상적 상상이 뒤엉켜 녹아든 광경이야말로 현실 세계의 질서가 파괴되는 전조, 바로 그로테스크가 지향하는 미학적 가치일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같던 이들의 세계에 붉은 죽음의 가면은 찾아들고, “파티를 즐기던 이들은 피로 물든 벽에 둘러싸인 채....절망 속에 죽어갔다. ....어둠과 부패 그리고 붉은 죽음이 모든 것을 무한히 점령했다.”

 

현실 세계의 파괴와 새로운 세계에의 환상을 꿈꾸는 이러한 지향과 달리, 괴기스럽고 음산하며 잔혹한 공포의 분위기로써 그로테스라는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검은 고양이는 도플갱어가 섬뜩한 동물의 영역에까지 확장된 죽음의 예술로 우리를 이끈다. 달리 설명 할 수 없는 최후의 파멸처럼 한 인간의 섬세한 영혼을 파멸로 이끈다. 인간 심리의 원시적 본능, 인간 특성의 분리 불가능한 충동의 세계, 그 어둠으로 깊숙이 따라가다 광기의 나락에 몰린 주인공의 아내 살해 과정과 시체 매장, 그리고 발견에 이르는 세세한 장면은 그 잔혹함으로 인해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범죄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충격으로 뇌가 얼얼해지는 현기증, 공포 소설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이들과는 또다른 느낌의 공포로서 생매장이라는 모티프가 발견되는어셔가의 몰락아몬틸라의 술통은 지하공간의 음침함과 으스스함, 상상력을 초월하는 악몽처럼 울려 퍼지는 비명, 악마주의의 낯섦으로, 인간 내면의 저 깊숙한 어둠의 심연으로 끌어댄다. 이러한 모티프의 동일성 측면에서 일러바치는 심장옅은 푸른색 막이 뒤덮인 눈의 노인, 검은 고양이플루토의 눈은 뒤틀린 자아를 읽어 들이는 타자에 대한 반감, 이를 차단시킴으로써 흉물스러움을 유지하려는 인간에 내재된 또 다른 광기의 한 면을 까발리기도 한다.

 

한편 이들 작품과는 달리 일주일에 일요일 세 번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 두 단편은 우스꽝스런 인간들의 행태를 풍자하는 웃음의 세계로 안내하지만 이 웃음은 결코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풍자는 악마의 사자이며, 그래서 풍자의 웃음은 악마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미쳐버린 세상만큼 우스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키지 않는 웃음, 아득한 심연의 웃음, 불합리를 가지고 유희를 벌이는 일이야말로 또 다른 그로테스크 아니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포는 시종일관 충격적이고 납득 불가능한 기이한 것, 그 불가사의함에 맞서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이해 불가능의 세계에 맞서 싸우려는 포가 그로테스크를 벗어난, 즉 인간의 이해력이 맞설 힘을 잃는 세계, 그 불가사의한 것에 예리한 감각을 가진 인간을 등장시킴으로써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고 선언한 작품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도둑맞은 편지는 경험에만 의존하는 경찰의 추리 한계, 불가능의 세계에 열린 틈새를 찾아내 풀어낼 수 있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바꾸어 버린다. 아마 이를 위해 탐정을 등장시킨 최초의 추리문학 작품인 모양이다. 오늘의 추리문학에 등장하는 수사관이나 과학수사대의 그것에 견준다면 유치함을 면할 수 없겠지만 바로 현대의 미스터리 문학작품들의 전범(典範)으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고려하여 읽는다면 그 재미 또한 제법 쏠쏠한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포의 작품들은 믿어 의심치 않던 세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전율들로 빼곡하다. 일상적 삶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는 기이함, 광기와의 대면, 위협적 생명력을 발산하는 구덩이와 추에 등장하는 진자 운동을 하며 내려오는 서슬 퍼런 칼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비명등과 같이 현상의 무수한 왜곡들로 즐비하다. 삶에 대한 공포, 개인적 특성이라는 개념이 파괴되고 관계의 약속, 질서가 허물어지는 생경한 세계를 마주하며 몸서리치는 것이다. 포는 이를 통해 이 세계의 바깥, 어둠속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삶의 가능성,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읽기 위해서 그가 창조한 독특한 예술의 세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어느덧 사슬에 매달린 채 끔찍하고 시커멓게타버린 여덟 구의 시체덩어리가 발산하는 악취가 진동하는 불타는 복수극으로 진저리 치며 어둠의 시간 어느 순간을 벗어난 자신을 발견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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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인카르도나 지음, 장소미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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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신과 고기, 그야말로 모든 것이 태양과 열기와 숯불에 타고 있다.” - P 156 에서

 

 

왠지 지옥 같은, 하지만 우리 사는 현실과 닮은 이 문장이 왜 내게 유독 꽂혔는지 모를 일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헤이놀라. 언뜻 스칸디나비아 대안 포르노의 여배우 이름처럼 들린다.”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처럼 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다. 소설의 한 축이 유명 포르노 배우인 니코라는 인물이고, 반수신(半獸神)으로 불리기까지 하니, ‘세계사우나대회가 열리는 핀란드의 소도시 헤이놀라는 맞춤의 지명이다.

 

심장마비, 화상, 페궤양을 일으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지정온도 섭씨 110도라는 극한의 공간에 펼쳐지는 이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경기, 그야말로 허망함이 예견된 세계에 참가 선수, 각종 언론매체, 기업 마케터들, 나체와 사우나의 열기에 도취되어 쾌락을 만끽하려는 관광객까지 저들마다의 욕망이 끓어오른다. 주체할 수 없는 무료함, 시간을 처리하기 위해 기획된 고도로 상업화된 이 이벤트에서 기괴한, 그리고 낯선 공포의 냄새를 맡게 된다.

 

치명적인 열기를 버텨내고 사우나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마지막 최후의 인간이 챔피언이 되는 미련하고 해롭기만한 야만적인 경기, 여기에서 누군가들은 이익과 쾌락을 얻고, 누군가들은 소비의 대상이 되어 전시되고 추락한다. 소설의 묘사들은 유머와 풍자, 해학 그 자체이지만 열연하는 3년 연속 준우승자인 옛 소련의 잠수함 선장이자 해군 장군이었던 왜소한 체구의 러시아인 이고리, 중년에 이른 섹스 심볼인 포르노 배우이자 챔피언 자리를 지켜온 거구의 핀란드인 니코의 정신세계가 빚어내는 삶의 비극적 요소는 희비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작가 피란델로였던가? 유머와 공포는 상상력이 낳은 쌍둥이라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소위 기묘한, 엽기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질서가 파괴되는 세계와 대면 할 때의 긴장감과 섬뜩함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로테스크하다는 미학적 용어가 어울리는 그런 이야기로 다가온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결승전에 오른 5명 중 하나인 신부를 묘사하는 니코의 표현이 있다. “호리호리하고 비리비리한 몸에 달린 신부의 굵은 페니스의 왜곡된 듯한 조합은 오싹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참가자들을 향해 주절거리는 신부의 기도 소리는 부조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수고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 고통, 아멘

비극을 향해 치닫는 공간에서 뱉어지는 이 희극적인 장면은 정말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 해!

어쩌면 이 그로테스크함은 불가해하고 모호하며, 우스꽝스럽고 경악스러우며 소름끼치기조차 한 인간 세계를 그려내려 한 작가적 의지의 소산이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것이 심연을 마주할 때의 공포가 아니라면 무엇이 공포이겠는가!

 

공산당에 배신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삶의 희망이 없는 치명적 매독에 걸린 이고리의 생사를 초월한 마지막 결전으로서의 도전, 포르노 배우로서 점차 수명을 다해가는 불안에 휩싸인 장년에 이른 니코의 멸망하는 세계의 마지막 기회로서의 결승전은 가히 점점 괴벽스러워지는 오늘의 세계, 상업적 착취와 관음증적 소비의 극한을 향한 무모함으로 그득한 맹렬한 질주,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110도 불가마 옆에서 1초의 버티기는 영혼마저 탈탈 털어내야 하는 혹독함이다. ‘선더 스트럭(thunder struck)’,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이 그들을 급습한다. 체온 상승의 충격으로 덜덜 떨기 시작한다. 신체 조직의 열 발산이 정지하고 열전도효과가 제로가 된다. “613, 최후 2인인 니코와 이고리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안전 요원들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피부가 벗겨지고 흘러내리며, 분사된 찬 물에 의해 피어오르는 연기의 묘사는 역겨움, 혐오, 괴이함이다.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던 이 세계가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때 느껴지는 갑작스러움과 당혹감은 그로테스크의 본질 아니던가?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의 희극적인 이 이야기는 점차 생경해져가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반성적 자기 응시인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을 독일의 문학비평가 볼프강 카이저의 말을 빌려 마무리하련다. “그로테스크의 창작은 현세에 깃들어 있는 악마적인 무언가를 불러내고 그것을 정복하는 일이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그윈 플렌의 의도되지 않는 웃음, 의지에 상응하지 못하는 미소를 닮아가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케 될지도 모르는 그런 작품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소설의 제재인 세계사우나대회는 2010년 폐지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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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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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는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 에도가와 란포

 

본명 히라이 타로(平井太郞)’, 필명 에도가와 란포의 이 좌우명은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간단명료한 문장이리라. 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을 기저(基底)로 하여 과학과 예술의 결혼이라고 까지 한 란포 소설을 관통하는 정신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단편 두 작품과 중,장편 각 한 편씩 네 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작품집은 인간의 내적 본질, 그 내부의 모순된 감정들,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를 걷는 불안함과 두려움의 음습한 기운이 전체를 지배하며 흐르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한다.

 

소위 범행의 빈틈을 발견하여 범인의 범죄사실을 입증한다는 탐정소설, 즉 미스터리의 형식이 근간이지만 이에 더해 기이하고 으스스한 란포 특유의 환상문학적 요소는 여타 추리문학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읽기를 선사한다. 아마 표제작인 중편 도플갱어의 섬 (원제목: 파노라마 섬의 奇談)이야말로 이러한 감정이 가장 강렬하게 구사된 작품일 것이다. “영혼을 파고드는 고혹적인 인외경(人外境)”이라는 인간계를 초월한 듯한 낯선 정경, 어떤 악마적 아름다움 그 자체인 인공적으로 축조된 섬의 분위기에 그야말로 생명력의 압박을 느낄 만큼 괴이한 느낌에 압도되게 하는 작품이다.

 

좌절한 삼류 시인인 이토미 히로스케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거부(巨富) ‘고모다 겐자부로의 죽음을 이용하여 사자(死者)가 살아나 귀향하여 꿈꾸던 낙원, 몽환적 미()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축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이 살아난 사자인양 행세하기까지의 여정도 그 범죄적 행위의 대담함과 함께 흥미진진한 요소이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죽은 자의 아내인 치요코에 의해 의심이 증폭되어 그녀를 살해하기 위해 자신이 축조한 특이한 예술공간인 섬으로 동행하여 서술되는 인공적 창조물인 섬 자체의 그로테스크한 묘사들과 카니발적 망상의 형상들에 대한 당혹감일 것이다.

 

이 작품을 미의 극한을 추구한 탐미주의 소설의 끝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서울 만큼 선명한 해저 별세계, 벌거벗은 여자(裸女)들의 연화좌(蓮臺)를 타고 당도하는 골짜기 밑바닥 탕에서 보는 육체의 급류, 원근법에 의한 착시효과를 이용한 파노라마 수법으로 자연을 왜곡하여 현실 세계를 마치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불가해한 악몽의 공간으로 바꿔놓은 세계는 섬뜩하고 괴이한 요소로 인해 혐오감으로 울렁거리게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감정은 현실세계가 파괴되면서 발밑이 아득해지는 충격과 섬뜩한 뭐라 말 할 수 없는 불협화음, 그 괴상한 아름다움의 매혹이랄 수 있다. 현실 세계에 발 딛을 곳 없던 인물이 욕구 충족을 위해 창조한 환상의 공간은 마치 이 세상을 벗어난 황천길의 정적, 혹은 극락의 환희를 연상케 한다. 사취한 아내, 치요코의 목을 죄며 뒤엉킨 두 남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죽음의 유희로 묘사되고 황홀한 쾌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락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예술 지상의 탐미적 장면의 결정판은 자신의 신상이 발각되자 불꽃과 함께 산산조각이 되어 비처럼 떨어지는 선혈과 살덩어리일 것이다. 아마 그로테스크의 정의인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파괴, 초자연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세계에 대한 신랄한 조롱, 그것이 아니었을까?

 

이와는 달리 비교적 미스터리 탐정소설의 요소가 우위에 있는 작품은 첫 수록작인 단편 심리 시험지붕 속 산책자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 역시 당대에 부상하던 꿈과 무의식의 통찰인 인간 내면의 과학적 탐사인 정신분석의 심취를 엿보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착상을 고스란히 빌린 셈이라고 란포가 고백하였듯이 심리시험은 학비와 생활비로 쪼들리는 대학생이 큰돈을 지닌 노파를 살해한다는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라스콜리니코프와 달리 심리시험의 주인공 후키야 세이치로라는 인물은 윤리적 책임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감정이 싹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돈을 갈취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 역시 단순한 절도보다 발각의 난이도에서 살해하는 것이 잔혹한 대신 깔끔하고 걱정이 없다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살해 행위에 있어서도 교살 후 잭나이프로 다시금 심장을 정확히 찔러 확실한 살해로 매듭짓는 것 또한 강박 신경증적인 범인의 심리를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범죄 심리적 서사의 세밀함에 더해 단어 연상시험을 통한 심리시험의 과학적 성과 소개가 이 소설의 의도로 이해되지만 란포의 이후 소설의 중심축으로 활약하게 되는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캐릭터를 접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지붕 속 산책자는 단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이루어지는 사례의 한 인물을 만나고 있는 기분을 느낄 만큼 성적 상징물들로 그득하다.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로 방황하는 염세적 인물이 새로 이사해 간 하숙집 반자널 위를 밤마다 살금살금 배회하는 이야기다. 벽장에 들어가면 안락하겠다는 유혹, 우연히 손을 뻗었다 열리는 반자널 위의 동굴 입구 같은 천장 구멍, 독액을 흘려 넣는 천장의 옹이구멍 등은 주인공의 억압된 욕망의 모습들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충족되지 못했던 사랑의 결핍, 혹은 부권에 의한 금지의 강제라는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남성에게 표출되는 정신병적 드러남의 본보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만 같다.

 

동굴같은 어둠에의 유혹, 해방된 욕망은 지붕 위를 거닌다. 제어되지 않은 무의식은 살인조차 흥미, 쾌락의 요소가 된다. 이내 실현되자 살인행위의 쾌감조차 별거 아닌 게 된다.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활약이 완전범죄 같은 살해사건의 빈틈을 집어내어 미스터리 소설의 완성을 이뤄내지만 이보다는 이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뒤섞여 유입된 20세기 당대 일본문학의 흐름을 살피는 데 일조하는 대표적 작품으로서 읽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을 듯싶다.

 

1925~1926년에 발표된 이들 세 작품과는 달리 란포가 중년(41)에 이른 1934년에 발표한 장편 검은 도마뱀은 란포 작품 중 손에 꼽는 수작중의 하나가 아닐까 여겨지는 본격 탐정소설이라 하겠다. 농염한 섹소폰 소리와 그에 따라 흔들리는 보석춤을 추는 나체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율동에 따라 꿈틀거리는 도마뱀 문신은 광기와 도취, 혐오와 환락의 기이한 조합으로 독자의 시선을 일거에 잡아들인다.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에 의해 각색되어 공연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여도둑과 사립 탐정의 공개적인 대결이라는 전통적 형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도입되는 도구들은 일견 세련되게 용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종의 도플갱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기 상()이라든가, 밀랍인형이 작품에 뒤섞이지 못하고 서걱되던 초기작과는 달리 내용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그 상징적 책임을 다해낸다는 점을 들고 싶다.

 

세상의 아름다운 건 모두 수집하려는 일명 검은 도마뱀을 통해 악마주의를, 미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한껏 드러난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표정과 자태만큼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묶인 채 대형 수족관에 처넣어 호흡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인간을 즐기고, 그 사체를 박제화하여 아름다움을 모으는 마조히즘, 편집증적 광기는 여자 아르센 뤼팡과 탐정 아케치 고고로와의 치밀한 대결과 어울려 미스터리 문학의 위치를 한 단계 올려놓는다.

 

어쩌면 란포는 존재의 가장 신비로운 충동들을 내보이는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순되고 불확실하게 흔들리며, 저 어두운 심연에 꿈틀대는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관심, 바로 그것을. 우리의 지각 인식체계를 지배하는 시간, 공간, 인과관계의 선험구조를 넘어 작동하는 그것, 그 환상의 세계와 추리, 과학논리 세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란포 소설의 세계는 기묘한 감각적 긴장과 이질감의 차원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이질적이며 매혹적인, 으스스함에 가능성을 열어놓은 란포의 세계에 잠시 빠져들며 더운 열기를 떠나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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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19 소설 보다
김수온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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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지문학상 후보작 선집 - <소설 보다> ; 2019

 

 

이 계절의 소설선집과 인연이 이번으로 네 번째다. 젊은 작가들의 단편 3~4편으로 구성된 작은 단행본이지만 이 선택을 계속하는 이유는 매 작품 끝에 이어지는 문지문학상 후보작 선정위원들과 해당 작가와의 인터뷰 때문이다. 갓등단한 신예부터 10년 남짓의 작가에 이르는 신진들이기에 이들의 작품이 낯선 독자들에게 수록작품에 대한 구성과 지향점을 비롯한 창작 계기, 소설화 과정에서 염두에 두었던 혹은 작가적 고민, 근황과 계획에 이르는 담화는 한국문학의 다채로운 시도가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해준다. 이는 작가와 독자의 내적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 선집을 통해 알게 된 몇 몇 작가의 작품이 발표되거나 출간되면 찾아 읽는 고정 팬이 되었기에 가능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이번 선집은‘<소설보다> ; 겨울 2018’에서 만났던 백수린 작가를 다시금 접하게 되기도 하지만, 내겐 낯 선 김수온, 장희원 이라는 두 작가와의 만남이 더욱 기대되었다고 해야겠다. 2018년에 등단해서 이미 여러 지면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수온 작가, 그리고 2019년 올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장희원 작가의 소설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보는 기회가 되었다.

 

    

 

2. 세 편의 수록작

 

2-1. 아직은 집에 가지 않을래요 - 백수린

 

그런데 몇 차례 작품을 접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라는 백수린 작가의 이번 작품은 소설 읽는 행위의 즐거운 기억을 되살려 주는 기쁨이 있었다. 어쩌면 작가가 무심히(?) 던진 하나의 문장 -“한 순간이나마 무언가를 욕망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은 욕망을 모르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법이니까” - 탓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꾹꾹 눌려졌던 욕망의 모습과 마주하고 그것을 현실적 감각 - 의식이라 해야 하려나? - 으로 이해하는 화자(話者)의 여정이 왠지 경쾌하게 보였으니까.

 

이렇게 신나게 읽었던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발산하는 무의식의 향취 때문이었을까? 고급주택가의 한 붉은 지붕의 집, 새빨갛고 탐스러워 보이는 만개한 덩굴장미,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배꼽 위가 간지러워하고 깔깔거리게 하는 그네, 작지만 운치있는 레스토랑 카페 뮐러, ..., 마치  나보코프의 에이다를 번역하는 마을 사람들 탓에 브르타뉴의 브레아 섬을 가득 떠도는 그 활기찬 관능의 냄새를 떠올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빠만 학원에 보내주었고, 그녀의 재수를 반대했으며,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언제 직장을 그만둘 거냐고 물었다.” 아마 많은 그녀들은 이러한 환경이 익숙하지 않으려나? 이런 그녀가 불현듯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그녀의 삶은 그저 커다란 체념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 소설 속 그녀는 미묘한 다른 삶의 징후를! 하고 예견한다.

 

그녀가 동경하던 붉은 지붕의 집이 어느 날 철거되기 시작하고 야생적으로 드러난 골조들 사이를 지나, “리드미컬하지만 대담한 움직임으로 벽을 부수는, 싱싱하게 젊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남자여자는 그의 옷을 벗기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를 맹렬히 쳐다보았다.”여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남자를 대상화하는 여자의 시선, 즉 남성우위의 시선을 전복하는 페미니즘 결정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억눌렸던 욕망,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을 과감하게 마주하는, 즉 무의식에서 끌어올려 비로소 의식화하는, 균형을 잃었던 자아의 온전한 정립의 멋진 정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가 훨씬 마음에 든다.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이제 곧 더 근사하게 다시 짓는대에 대응하여 이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미 새로운 욕망의 세계로 갈아탔으니 말이다. 내게도 삶의 변화를 예감하는 아주 짧은 한 순간이 내면을 명쾌하게 울려댔던 적이 있었나? 하고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 보게된다. 유쾌한 아름다움! “꽃놀이 가듯 즐겁게 쓴다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을 기대하게 된다.

 

2-2. 한 폭의 빛 - 김수온

 

인생의 전환을 예견케 하는 이처럼삶의 짧은 어느 순간이란 언어적 포착은 김수온 작가의 한폭의 빛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의 한 줄기 금이 되어 또 다른 의미를 새기게 한다. 이 순간은 오히려 의식에 있었던 것을 무의식으로 침잠시켜버리는 그런 사태인 것 같다. “작은 일이 일어나는 순간, 일생이 바뀌기도 하잖아요.”그리고 빛은 언제나 어둠을 동반하잖아요.”라는 작가의 변()은 나의 이해를 어둠으로 이끈다.

 

소설 모든 정황이 압축되어있는 것만 같은 첫 문장을 대하면서 왠지 금지된 세계에 들어가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도시의 서쪽에는 숲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 있으므로 그늘이다.

숲에 작은 면적의 호수가 있다.

거기 유일한 빛이 비추고 있어.“

 

어떤 신경증적인 세계를 보는 듯하다. 동쪽의 도시에는 아기를 잃은 듯한 여자가 있고, 서쪽 숲속에는 검은 모포를 두른 사내가 있다. 그러나 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별로 규명된 것이 없는 실체들이기 때문이다. 통념들이라 이해하는 내 지각이 부정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어둠 속에 빛이 아니라 빛에 동반되는 어둠을 먼저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 지새는 여자, 아기가 없는 빈 요람, 빈 방, 닫혀 있는 문, 얼어붙은 호수, 숲 그늘, ...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 이미지는 한결같이 기억되려 하지 않는, 망각하려는 어떤 회피 혹은, 단단히 걸어 잠그려는 힘이 연상된다.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한 폭의 빛조차 손차양을 하여 가리면 어둠, 그늘이 있잖아요 하는 작가의 말 속에서도 집요하게 기억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평자(評者)는 공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이 작품을 공간의 이미지가 주는 오묘한 힘이라고 긍정적 해석을 하기도 하였지만 내겐 그것은 그저 텅 빈 것으로 두려는, 아무것도 채우려 하지 않는 의식의 공허함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끄집어내거나 마주서기에는 버거운 것이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너무 아픈 상실과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이기도 할 것이며, 혐오스럽거나 혹은 수치스러운 기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의식의 세계로 길어 올려 자기화하거나 영원히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붙들려 있으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 세계에 머물러 끝없이 자기형벌과 자기애에 묻혀 그 슬픔의 쾌락에 자신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소설 속 여자는 가스 불에 올려놓은 물이 끓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손수건이 탁자에서 왜 바닥에 떨어져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심함이 가장된 것일까? 내겐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행위를 반성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어떤 거부감만이 보인다. 무얼 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성장하지 못한 의식세계, 정신질환적 세계의 문턱만이 보인다. 다만, 여자의 일인용 소파에 잠든 어머니를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 그리고 그 옆 바닥에 드러눕는 여자의 행위, 한 줄기 금이 간 얼어붙은 호수에서 어렴풋한 무의식과의 대면의 가능성을 볼 뿐이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이처럼 소멸해가는 흐름, 그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갖기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린 모두 마주서왔고 그것을 굴복시키는 정신적 진화를 성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 아파하고 거부하고 억압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더 알고 싶은 작가다. 김수온 작가의 기 발표작들 -행렬,,한 겹의 어둠이 더- 을 챙겨 보아야 할 것 같다.

 

2-3. 우리畜舍의 환대 - 장희원

 

아마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것을 굉장히 분명한 감각들로 전달하고 있다는 평자의 말처럼 감각의 언어들이 우리 지각의 현상들을 꿰뚫고 지나가게 하는, 그래서 구태여 어떤 너절한 담화나 수사의 필요 없이 삶의 이해에 다가서게 하는 감각과 행위로 현상을 묘파해내는 성취임에 동의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장치라는 것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들이 검열장치에 걸러져 변질, 왜곡되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가 손상되는 것을 그 누가 용인하겠는가? 아들과 아버지의 기억은 사뭇 다르다. 아직은 소년이었던 사춘기 시절 영재는 아버지의 무참한 폭력으로 커다란 상처를 새기고 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려, 아빠”,

더러운 놈, 주먹이 탁상에 찢긴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아이를 때렸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는 아들과 아버지, 호주 남서부 끝 퍼스라는 곳에 있는 아들 영재를 만나기 위한 여정, 아이가 살고 있는 초라한 주택에 동거하는 노인과 스무살 여자아이 미영, 이들의 삶과 마주한 재현 부부의 그 어색함이란, 그리고 도망치듯 호텔로 향하는 이들에게서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말끔히 망각해버리곤 기만적인 행위를 일삼는 오늘의 우리들을 생각게 된다. 다만, 작가의 기대만큼 무게있는 부끄러움, 창피함을 돌아보고 타자의 아픔을 알 것 같은 순간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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