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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한글개정신판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9월
평점 :
도올선생의 구극(究極)적 탐구자세는 물샐 틈 없는 면밀함이고, 이에 기초한 자유로운 신랄함이다. 내 생활이 갑갑하게 느껴지고, 흐트러져 난삽(難澁)함에 휩싸일 때면, 어떤 말끔하게 씻어낼 지혜의 목소리를 갈구하게 된다. 그럴 때면 도올 김용옥선생의 침묵함으로써 침묵하지 아니하는 《金剛經》을 講解하는 이 책은 최고의 시(詩)요, 평온한 노래소리가 되어준다.
《금강경》은 원시불교의 아주 소박한 수트라(sutra)로써, 소박한 붓다 설법의 기술(記述)이다. 도올선생이 표현하듯 “고졸(古拙)하나 참신하기 그지없고, 소략하나 세밀하기 그지없으며, 밋밋하나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요, 한 편의 詩이다. 시중의 수많은 번역서들에는 엄청난 현학적 주석과 더불어 현란한 해석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걸어 잠그게 한다. 굳이 그러한 헛소리들을 《금강경》에 들이 댈 필요가 있을까? 있는 그대로, 문자가 표현하는 그 자체의 의미를 새기며, 암송하면 절로 마음에 새겨질 것을.
이 책은 정확히 ‘고려제국대장도감판(高麗帝國大藏都監版)’, 즉 해인사 장경각 《고려대장경》본을 유일하게 사용한 우리말 《금강경(金剛經)》이다. 본디 《금강경》의 한역본(漢譯本)은 鳩摩羅什(구마라집,kumarajiva), 보뎨류지, 진체, 급다, 현장, 의정이 각기 번역한 六種이 있으며, 한글번역본은 모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역본(譯本)이다. 그런데, 구마라집의 定本이 바로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본임에도 이를 사용하는 한글본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놀라울 일이다.
일어판본은 《고려대장경》을 베껴 만든 《대정대장경》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근본도 없는 판본들의 번역이 난무하는 것이다. 《대정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만들다보니 오식(誤植)으로 인한 오자나 탈자가 있다. 이것을 그대로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실상은 가히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한글 판본에 대한 비난은 그치기로 하고, 왜 《금강경》이 한 인간의 현존을 위무하는 읽기가 되었는가를 말하여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내 반골기질에 맞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일체의 교화(敎化)불교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난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매우 급진적인 토착운동으로서 일종의 반(反)불교운동이었기에 정서가 일치하였던 것일 게다. 교리도 계행도 필요치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키는 통찰의 설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무릇 모든 종교가 궁구했던 통찰을 말하고 있는 까닭이기에 그 슬기로운 공존, 이념간의 배타성을 아우르는 진리의 목소리로 다가왔던 까닭이기도 하다. 《금강경》은 아직 대승(大乘)과 소승(小乘)불교로 구분하기 이전의 초기 경전이지만, 소승불교인 부파불교의 차별주의를 냉혹하게 비판하는 대승불교의 대표 경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들어가는 글’과 금강경에 이해를 돕는 도올 선생의 목소리가 100쪽에 걸쳐 기술되고 있는데. 대체 대승은 무엇이고, 보살이란 무엇인지, 한국 불교와 기독교의 현재의 실상이 대체 왜 이 상태인지, 금강경의 金剛은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가 이 경전에서 읽게 될 것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현재적 신랄한 비평적 시선은 가히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金剛은 범본(梵本, 고대 인도어), ‘vajra(바즈라,跋折羅)’를 번역한 것으로 원래 의미는 벼락이다. 그리고 그 일차적 의미는 능단(能斷,자른다)으로, “청천벽력처럼 내리치는 지혜”를 뜻한다.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벼락은 어디에 내리쳐야 하는 것일까? 바로 내 머리통을 내리쳐야 하기에 나는 이 경전을 읽는 것이다. 각성이 흐려져 흐릿하게 더럽혀져 사리분별을 망각하는 내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벼락은 나의 존재를 둘러싼 대상 세계에 대한 집착의 고리에 내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떨어져, ‘나(我相)’가 無化되고 空化되어 나가 없어지면 대상도 사라지고, 집착이라는 고리도 존재할 자리가 잃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리를 제아무리 끊어봐야 ‘나’가 여전히 존재하며, 대상이란 실체도 엄존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금강경》은 無我의 경전이다! 나라고 하는 고집스레 자신을 주장하는 환멸의 실체, 그 환상을 떨쳐낸, 홀가분한 무심의 경지가 그리워졌기에 그런 것일 테다. 하찮은 것들이 나를 내세우며 꼴값을 얼마나 떨어대는 세상인가! 그 흉물스러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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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오현(五鉉) 큰 스님이 도올 선생에게 들려주던 일화는 《금강경》 경전 본문을 읽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전해준다. 오현스님이 아직은 어린 사미승이었던 시절이니 한국사회가 전란으로 고통스러웠던, 끼니 해결조차 어려웠던 시절의 애기일 것이다. 배고픈 사미승은 밥동냥을 하러 다니곤 했는데, 문둥이들이 밥을 잘 얻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문둥이를 빨리 내치기 위해 사람들은 얼른 찬밥을 내주었던 모양이다. 사미승 오현은 그날부터 문둥이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문둥이들의 거적지에서 함께 껴안고 자고 뒹굴었다.
문둥이는 “요놈 사미승, 맛좀 봐라! 너 정말 문둥이 될래?” 하고 정말 오현을 문둥이로 만들 생각까지 하였지만, 문득 사미승이 분별심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던 게다. 어느 날, “훌륭한 스님이 될 터이니 성불(成佛)하거라!”하는 작은 쪽지를 하나 남기고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미승 오현은 깨달았다. “아하! 부처님이 문둥이구나!”, 이보다 수월하게 無我를 인식하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이 일화에는 보살(菩薩)과 대승(大乘)과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는 열 마디 여래(如來)의 경전보다 더 깊숙이 마음을 채운다. 한하운 스님의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의 한 구절은 아상(我相)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아름다운 시경을 체득케 한다. “버드나무 밑에서 / 찌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 또 한 개 없다.”, 문둥이는 그렇게 시시각각 내가 떨어져나감을 깨닫는다. 날로날로 아상이 없어져가는 문둥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을. 체험의 종교, 실천의 종교를 생각토록 한다.
나는 예배당에도 절간에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십계명을 외우고, 반야심경의 진송을 외우며, 성경을 읽고, 반야경을 읽는다. 나는 신을 섬기지 않으며, 극락이나 천당과 지옥을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나는 나만의 세계를 가지며, 그것을 일구고 수행하려 애쓴다. 나는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며,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 특권의식을 거부한다. 나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적 해결,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 선언하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된, 또한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된,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된 저 무명(無明)의 엉터리 종교인들을 증오한다. 제도와 권력과 돈, 그 우상들을 쫓는 종교 아닌 종교를 신앙한다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나는 이러한 종교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종교적인 인간이 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인류가 그토록 많은 지식을 축적했음에도 여전히 지혜를 지니는데 실패하였음을 지적하였듯, 사랑과 베품, 삶의 도덕성과 규율성, 종교적 삶의 정진, 참음과 용서, 삶의 가치에서의 우선적 덕목을 그렇게 노래하였지만, 결코 지혜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이 세계의 불완전성에 얼마나 혼란스러워 하며, 종말적 위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바로 이 지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기에 나는 또 읽고 외우며, 노래하려 한다. 자기를 비우고 배움을 청하는 2000년 전 인류 최초의 불교 가람인 기원정사(祗圓精舍)의 대지에 오른 쪽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공경하는 장노(長老) 수보리(須菩提)의 아름다운 겸허의 예법에서 비움과 我相의 철폐를 목격한다.
“時, 長老須菩提, 在從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이때, 장노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先賢起請分 第二. 2-1〉
사실 너절하게 그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服其心? (2-3.)” 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마음을 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 애처로운 물음을 하는 수보리(須菩提)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일진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anuttarā samyaksambodhi’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의미한다. 인간의 욕망과의 갈등 구조를 문의(問義)하는 이 문장에 한동안 머물렀다. 욕망의 항복을 위해 반복해서 암송해본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如來者, 無所從來, 亦无所去, 故名如來.”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29-2節〉
(여래는 어디서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래서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디서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우리 아름다운 삶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어찌 창조와 종말을 운운하는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흘러간 대중가요의 그 가사가 존재의 취산(聚散), 합리(合離)를 지극히 생활에 스며있는 지혜로 노래하지 않았던가. 아마 노래를 부르던 그 가수는 환(幻)의 가능성에 지배된 자신을 체득했던 게 틀림없었을 것이다. 철저한 인식론적 반성 위에서 그는 세계를 논구했던 것일 게다.
‘뿌커수어 뿌커쓰이! (不可說, 不可思議)’, 모든 것을 말하려 들지 말라. 말 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우주요 인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침묵하라는 말과 겹친다. 《금강경》은 이렇게 맺는다. “不取於相, 如如不動.” 상을 취하려 하지 말라, 여여하게, 부동하게(있는 그대로, 움직이지 말라)! 왜 그러 하냐구?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기 때문이라네.
모든 사람들, 인류에게 바쳐지는 헌시(獻詩)인 《금강경》을 나는 노래처럼 반복해서 외워본다. 도올 선생이 제시하듯, “간결한 주제의 반복이자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기에, 그 향기 속에 취해 그 위력을 체감”하기 위해 거듭 읽듯 노래한다. 유교(儒敎)의 극성을 과시하던 세종이 만년에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여 유교적 합리주의에 노출된 정신의 한계를 위무 받으려 했듯, 아마도 나 또한 번쇄(煩瑣)한 현실에서 잃어버린 현실 감각을 되돌려보려 안간힘을 쓰는 어떤 무의식이 이 책을 반복하여 읽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 자! 인간 구원의 이 혁명적 보살(菩薩)의 운동을 설파하는 《금강경》은 정말 한 번 온 이 삶에 잘 사는 방편을 헤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 되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