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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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kapitalismus und Todestrieb; 자본주의와 죽음충동의 메시지들을 나는 자기파멸적 세계로 향하는 우울한 현상에 은폐된 실체들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분명 저자가 지적하는 자유의 착각, 투명사회와 긍정과잉 사회가 지니는 의미들, 만물의 상품화로 인한 인간의 자기 전시화(展示化), 자발적 통제사회로의 이행의 괴멸적 현상들은 많은 부분 현실의 통찰일 것이지만, 이로 인해 인간 운명의 미래를 어둠의 지옥, 종말의 귀결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필연적 결과라면 구태여 이러한 비평적 글들은 공허한, 의미 없는 말잔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문제에 도사린 근본적 문제들을 개선하거나 제거하는 실천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의 우리들은 행동하고 있을까?

 

신자유질서가 지배하는 오늘의 지구화된 세계가 노정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냉소적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다 알고 있어. 그런데 불가피한 것이잖아.’, ‘나는 그 문제를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인간 삶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거예요.’와 같은 이 모순적 인식에는 징그러운 흉측스러움이 있다. 비판적 지식을 마치 수용한 것처럼 말하면서 그 비판의 효율성을 무력화하는 비논리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작동하기에 저항의 목소리는 동력을 잃고 만다.

 

현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이 근본적 망상은 그래서 문제에 대한 아무런 행동을 실행하지 않는다. 기후온난화, 디지털 기업들의 개인정보 수집의 위험성, 다름과 타자에 대한 부정성의 낙인찍기, 성과(成果)주의 윤리의 괴멸성 등 인간의 자유와 존엄, 생명성에 위협을 가하는 요인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해결을 위해 실행되지 않는다. 이 책 15편의 비평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실천적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현상 내재적 속성을 규명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가 개방성과 소통을 강조함에도 심리화에 치우친 주관주의 담론은 객관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정신 건강으로 전환시켰다.” - 한병철, 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

 

이 문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좀처럼 공동체라는 우리라는 감정주체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를 지적하는 말이다. 객관적인 구조의 문제들을 한낱 개인들의 심리적이고 위생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사적 문제로 개별화, 국소화(局所化)하는 현 세계의 체제를. 이 앞선 저술(심리정치)에서의 관점은 이 책에서 자유로 옮겨가는데, 이 자유는 자신에 예속된 것조차 알지 못하는 착각된 자유’, 이를테면 발가벗은 자유이다. 국역된 제목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바로 이 착각된 자유로 인해 인간 삶의 근본인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유가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 부존재한 자유의 시스템 내에 있게 됨으로써 마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착각에 빠져있는 오늘의 인간들은 저항의 의지 자체가 생성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지배기술은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타자 억압과 착취라는 폭력의 형태를 전혀 띠지 않으며, 우호적 모습을 취하고 심지어 그 착취를 개개인 스스로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공격을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어떤 저항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데, 바로 자유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를 다치게 하지 않은 듯 행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 강제를 자유로 느끼는 사회

 

산업사회의 체제유지 권력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그 실체가 확연한 저항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에 저항하면 실체적 폭력이 작동하고, 사람들은 빼앗기는 자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규율과 억압의 질서를 보다 효율적인 영리한 지배기술을 발휘한다. 그것은 순응(복종)이 아니라 사람들을 독립적인 체계로 인식토록 함으로써 개체 외부인 사회문제가 아니라 개체 내인 자신의 문제로 인식케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지배 맥락에 예속하게 한 것이다. 이 기막힌 체제는 오늘날 노동자들을 스스로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인식케 하고, 모든 각자가 모든 각자를 상대로 경쟁하는 절대적 경쟁의 상태로 만들었다. 자기 노동의 경영자가 된 노동자는 자신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희열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착취에서는 이러한 자발적인 자기 착취로 이행된 현실을 설명함으로써 어떤 강제도, 어떤 명령도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발가벗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적 왜곡과 부조리로 인한 형상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봉사하는 서점의 선반을 가득 메운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자기 노력과 능력의 탓이고, 자기 선택의 과실이 된다. 모든 인간을 자기 경영자로 명명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결코 노출하지 않고 자발적 노예들에 의해 매우 효율적으로 생산성의 과실을 독차지한다. 각자도생을 부르짖은 저 내란우두머리를 비롯한 극우집단이 시종 일관한 것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적 불온함이다.

 

사회적 소통망을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모두가 스스로 산출한 욕구를 배설하는 사진, 동영상과 짧은 글들로 가득하다. 또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행적은 고스란히 데이터가 되어 수집된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채우고, 자기 정보를 기꺼이 제공한다. 심지어 건강 기록에서 시시콜콜한 내밀한 영역의 이야기까지 부끄럼없이 내보이려는 욕구들로 가득 차 있다. 사회적소통망의 영주는 이들 개인들을 감시, 통제하며, 그들이 스스로 생산한 산물들의 과실을 차지하고 자본 축적의 쾌락을 향유한다. 개인들은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들의 노동력 착취를 결코 강제된 착취라고 느끼지 않으며, 통제 불능 또한 억압이라 생각지 않는다. 즉 성과 주체인 개인들은 자유의 느낌을 동반한 이 자기착취라는 스스로 산출한 자유로운 강제에 예속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의 의미다. 신자유는 곧 강제를 자유로 느끼게 하는 기괴하게 의미를 역전시킨 억압의 다른 얼굴이며, 보이지 않는 통제의 욕망이다. 이 신자유세계라는 시스템 안에 살기에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이 다급한 자기 통제의 외침은 자기착취로 소진되는 현 인류에 대한 연민의 목소리다. 모든 일이 자유라는 허울아래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자유를 착취하는 세계다. 타자 없는, 즉 지배없는 착취인 자기 착취는 외견상 자유의 영역에서 일어나기에 대단히 효과적일뿐더러 저항할 대상은 물론 맞설 우리라는 것도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배의 부재와 우리의 부재가 세계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

 

2. 긍정성 과잉, 투명성 사회

 

특정 수준에 도달하면 한계에 봉착하는 타자착취와 달리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자기착취는 자신을 붕괴시킬 때까지 한계가 없다. 그러다 실패하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고난이나 파산을 겪으면 오로지 자신의 잘못이라 스스로를 책망한다. 이것은 자기 안으로 침몰하여 익사하는 우울증과 몹시 흡사하다. 자기 자신에 의하여 완전히 소진되고 마모되는 오늘날 증가하는 정신질환들(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소진 증후군 등)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성과(成果)윤리의 교활한 속성의 병리적 증상이다.

 

모든 문제를 를 의문케 하는 신자유주의의 음흉한 윤리는 그래서 사람들을 나르시시스적 내면성에 침잠해 온통 나를 쓰다듬어라, 나를 돌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항의하는 대항하는 타자가 없는 존재가 되어, 타자의 다름을 보지 못하게 하고, 곧 예의를 상실한 인간들은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존중하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요즘 이 세계에 부쩍 나르시시스트가 늘어난 것은 자기 동일성을 반복하며, 다름과 타자를 무조건 부정성으로 제거함으로써 귀결된 긍정성 과잉의 현상일 것이다. 이렇게 부정성이 말끔히 제거된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같음만이 출몰하는 매끈한 세계다. 그래서 탈()면역시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매체의 구별 없이 모든 미디어들의 프로그램이 건강의학 정보로 가득 채워진다. 부정성을 걷어내고 긍정성, 같음으로 매끄럽게 획일화된 것들을 숭배한다. 반죽음, 혹은 설죽은 인간들이 성형과 온갖 약물과 보정으로 매끄러운 신체를 과시한다. 불멸을 향한, 죽음을 거부하는 이 행위들에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속성을 본다. 죽음이라는 부정성을 회피하기위해 죽음충동이라는 또 다른 반()명제를 세움으로써 자신을 은폐하는 속성 말이다. 이 긍정성 과잉의 균질 사회는 다른 말로 투명사회다. 투명성이라 말하니 마치 부패와 부정의 드러남이라는 긍정성을 떠올리는 것은 심한 오해다. 이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투명성이다. 비밀이 완전히 사라진 포르노적 속성, 세상 모든 것을 전시, 상품화하고, 시간을 두고 인내하지 못하는 즉시성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우려스러운 현상을 본다. 투명성은 언급했듯 부패와 부정이 깨끗이 척결된 청결, 청렴으로 비치고, 즉시성이라는 신속한 화답을 하는 실용성의 정치 행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세상의 일, 특히 국가 정책으로서의 정치에는 시간을 두고 숙성되어야 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어떤 하나의 비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지체라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투명사회를, 실용정치를 외치는 것은 비전 없는 정치라는 속빈 실체의 다른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포퓰리즘이라는 대중선호정치에는 미래 없는 사회, 다시 말해 예측 가능성을 꿈꾸는 미래로의 행위가 실종된 오직 계산의 합리만이 존재할 것 같아 근심이 앞서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미래는 결코 투명성, 실용성, 긍정성이 모토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정보사회가 야기하는 병리적 증상들, 151쪽에서】


투명사회란 기다리는(인내) 능력의 상실이라고 말했다. 즉 미래로 이어지는 약속에 대한 불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래가 사라진 즉시성에 몰두하는 사회는 책임 맡기, 약속, 사랑 등의 본래의 함의가 위축되거나 훼손된다. 신자유의 체제의 이 대표적 속성인 투명사회는 그래서 국가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현저하게 목격하게 한다. 시민들의 무고한 죽음들, 각종 인적 재난들에 대해 고위관료들을 비롯한 권력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며 무능력을 여실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요즘 사람들의 사랑에서 이상한 징후들을 보게 된다. 사랑에서조차 상처를 받지 않으려하고, 다친 상태가 되는 것을 지극히 꺼려한다. 사랑이 그런 것인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이미 그 자체로 부상이고, 실제 많은 걸 쏟아 부어야 하는 상처의 위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부정성을, 거친 표면을 거부하는 이러한 태도에서 매끄러움에 대한 숭배를 본다. 저자는 뛰어 오르는 사람들 ; Menschen springen(People jumping)에서 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부쩍 펄쩍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많은가하고 묻는다. 갑자기 신자유체제가 사람들의 생명력을 증가시켜서? 아니면 나르시시스적 병적 경련인 건가? 사진의 전통적 가치는 순간을 회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식(禮式)가치였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인 초상이 사진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사진에서 인간의 얼굴은 물러나고 도발적으로 눈에 띄는 전시(展示)가치에 압도되고 있다.

 

즉 상표처럼 두드러지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기억과 역사가 없는, 그저 뛰어오르며 현재 가치를 증명하는 사진, 한 순간에 소진되는 사진, 쇼윈도 같은 사진을 전시하려는 것이다. 주목 받기 위해 뛰어오르는 상품인 인간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인 통찰과 지혜의 미덕은 자취를 감춘 호모 살리엔스(Homo saliens; 뛰어오르는 인간)’, 스스로 상품이 된 발가벗은 자기 착취의 욕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투명사회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까? 스스로 산출한 이 욕구가 수치심을 넘어설 때 인류는 스스로 들어선 통제사회, 강제된 예속사회 깊숙한 곳에서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3. 맺는 말


지금 우리는 자유의 위기에 처해있다. 자유는 강제의 맞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른 체 강제에 굴복하면서 그 강제를 자유라고 인식하게 한다. 자유 종말의 뚜렷한 징후다. 이 지배 없는 강제, 강제하는 상대가 없으니 저항이 애초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더욱 이 보이지 않는 상위의 지배질서는 저항 없이 매끄럽게 인간을 노예화한다.

 

긍정성 과잉이나 투명성이란 다름 아닌 획일화다. 다름과 부정성을 회피하고, 죽음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는 이제 디지털 질서로 이행되면서 그 실체를 인지하는데 더욱 곤란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속성들은 이 세계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 그 존재의 이유를 풍성하게 하는 사랑과 앎에 대한 욕구와, 분석 비판의 지성 능력 등은 물론 존재의 근본인 자유의 지각조차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무책임, 무관심, 극한의 이기적 욕구, 타자의 부정과 배척을 그 본질적 요소로 한다. 발터 벤야민의 인류의 자기소외는 어쩌면 인류가 자기파괴를 미적 향유로 체험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는 예견적 문장이 실재하는 현실사회로 여실하게 도래한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한 대담자가 그가 음모론자처럼 느껴진다며, 세상을 험담하고, 사람들을 절망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저나 저의 분석이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자비하고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어떻게 이 잘못된 세상에 즐겁게 있을 수 있죠?”라고 반문한다. 다만 자신은 이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 놓여있는 세계를 더 많이 보려고, 또한 보기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소음과 지식 없는 정보만이 난무하고, 딜레탕티즘(dilettantism)이 만연하는 이 불온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들은 늘 지배구조 안에 내장된 권능들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이 숙고의 능력마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정말 인간을 상실하고 기계화된 노예들의 모습만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계 이해에 조금은 접근할 수 있는 문제적 저술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착취의 질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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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현상에 대한 사실을 자신의 앎으로 인지하고 그로인한 반응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것은 정말 인간만이 지닌 기괴함이 아닐 수 없다. 여타 동물은 자신에게 위협될 만한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예외 없이 그에 따른 행동(반작용)을 취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 특히 자신이 특권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자들일수록 명백하고도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정도는 권력의 정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도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예외적 태도를 눈여겨 본 사람들은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오늘날 이러한 실태는 우리들의 일상적 언행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에 대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라며, 마치 복잡하고 미묘한 무엇이 있어 그것들을 샅샅이 검증해야 그 명백한 사실이 확정된다는 듯 주장하며, 당면한 사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고 선관위 등 사법기구를 점탈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TV화면으로 송출되었는데도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라고, 문제의 본질을 모호한 상대적 사실로 전락시키고는 폭력행위를 방어행위로 둔갑시켜버린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왔다. 문학, 철학, 역사 등등에서 후각이 발달한 소설가, 철학자, 사가()들은 이 자명한 것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사람들로부터 불온하고 구린내 나는 범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출현했다.

 

우리는 명백한 것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서의 행동(조치)에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만연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무감각, 무반응, 무저항, ()행동, 나아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옹호하거나, 둔갑한, 즉 왜곡된 사실에 동조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자명한 사실, 혹은 범죄의 사실은 오리무중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방향을 상실하며 사회적 혼돈을 낳는다. 물론 이렇게 사실을 상대화하는 자들이 노리는 사태가 바로 이러한 혼란으로서의 사회적 무능력의 생산임을 말해 무엇 할까.


영화돈 룩업! Don't Look Up!에서 비지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출처 Netflix

 

아담 맥케이 감독의 2021년 블랙코미디로 범주화할 수 있는 영화 돈 룩업! Don't Look Up!은 이렇게 명백한 것을 자신들만은 회피할 수 있다고, 그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다. 이것을 조금 현학적인 개념어로 비지식(non-knowledge)’이라고 부른다.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타자의 앎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칭한다. 영화에서 대통령으로 연기하는 메릴 스트립은 혜성의 궤도가 지구와 충돌하는 것임을 알았는데에도 불구하고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면 슈퍼볼 경기는 안 열리겠네?” 라고 지구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져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가히 어처구니없으며, 천연덕스러운 질문을 한다. 자신의 질문이 종말적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방송 앵커들 또한 혜성의 지구 충돌이 자신들의 세계와는 무관한 듯 웃고 떠들어댄다. 자명한 사실은 그저 자명할 뿐이다. 그 명백한 위험 앞에 누가 온전하겠는가? 영화는 허구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게다. 그렇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지구촌을 온통 휩쓴 코로나19의 방역에 모든 인류가 참여해야 했음에도, 당시 영국의 총리 보리스 존슨은 그 위험이 자신에는 해당하지 않는 다고 여겼다. 결국 그는 위중한 상태에 빠져 요단강 근처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왔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간단히 치부하면 인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안다고 가정(假定)된 주체로 이해하지만, 단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와 얘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난 3년 남짓한 검찰 독재 정권에서 각종 재해가 줄줄이 발생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그 명백한 사실,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서 예측 가능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재난을 고스란히 재앙으로 만드는 꼴을 보았다. 재앙이 임박하고 있음에도 시장, 도지사가 현장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리곤 재난은 으레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이기에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대통령부터 책임 주무처 장관인 행자부 장관, 도지사. 시장, 군수, 그리고 관련 기관의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했으며, 남의 탓이고, 오히려 문제를 상대화시키고는, 야당과 비판적 언론을 향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한다며 매도하기까지 했다.

 

알지만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는 인간들은 정말 반사회적 인간들이거나, 그 사실에 대한 의미를 정작 알지 못한 인간들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순진하게만 이해하는 것도 문제인 것이, 이러한 태도들에 상대화라는 속임 술책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개, 돼지인 시민의 안위에 관심을 갖기 싫은 것뿐이다. 때문에 이들은 재앙의 도래를 알고 있었으며, 다만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는 전술로써 알지만 믿지 않는 척하는 술수를 사용 한 것이다. 지금 이 사회의 상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인 법관, 검사, 각 부처의 고위관료들의 행태가 이러한 실상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자들은 자명함에다 빈번하게 모호하고 복잡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고 상대화하고는, 이어서 그 자명함을 뒤엎어 버린다. 이 자들에게는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앎이 실효적이기 때문이다. 비지식이 기득권의 책임 회피이자, 진실의 무력화 전술인 것은 그리 새로운 인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알지만,...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말에 대해 지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다시금 기억의 상부에 떠올려 놓아야 할 것이다. 불법 계엄인 것은 알지만, 그것을 위헌적이고 불법행위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이 돈 룩업! Don't Look Up!을 관람하며 낄낄거리는 희극 장면은 과연 가관일 것이다.

 

관점을 조금 변경하여, 이 명백한 것을 보고는 우리들은 간혹 그 명백함으로 인해 소홀히 취급하곤 한다. 설마 저렇게 자명한데 거기에 무슨 사건적 진실이나 위험, 범죄가 있겠어? 라고 의심을 차단해버린다. 그런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는 부정한 짓을 하고는 그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명료하게 만들어 마치 그 사실의 명백성으로 인해 범죄적 요소가 없는 것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속임수요, 범죄의 단서이기 일쑤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어떤 사태를 포장하여 마치 은밀히 숨겨진 것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쓰지만, 정작 그 이면에서는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 짓거리가 무수히 벌어진다. 이 두 종류의 속임수를 이중적 신비화 전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점에서 이중적 신비화는 비지식의 행동과 그 본질이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할로 저택의 비극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 바로 단서 그 자체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실제 행동을 감추는 이중적 신비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인데, 이 교활한 술책이 지난 3년의 검찰 독재 권력이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 추악한 방법이다. 검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구호로 외칠 때, 대규모 마약사범은 유유히 세관을 통과했으며, 페이퍼 컴퍼니에 국가 석유자원 시추 사업권을 불하하는 행위들이 모두 이러한 이중적 신비화의 속임수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명약관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가이다. 지금 바로 우리의 눈앞에 내란 세력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이것들을 비호함으로써 기득권을 향유하는 세력들이 무도함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자명한 불의에 특정 지역의 군상들은 결단코 움직이지 않거나, 그 명료한 사실을 상대화, 무력화한 집단에 붙어 요지부동이다. 왜 그럴까? 그 은폐된, 속임수로 가려진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강제된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지배하는 강제, 저항의 상대가 없는 까닭이다. 강제하는 상대가 없다고 여기기에 애초에 그들은 저항의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름, 타자들은 부정한 것이고, 그래서 타자는 말끔히 배제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기에 그들에게는 무조건의 긍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흠뻑 젖어있다. 긍정성과잉은 곧 폭력의 산실이라고 슬라보예 지젝은 Freedom; A Disease Without Cure에서 역설한다. 지금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며 비지식을 과시하는 저열한 것들의 행태나 반도 동남지역 군상들의 행태가 폭력성과 혼돈의 양태를 보이는 이유이다.

 

나는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 비지식의 행태와 이의 유사양식인 이중 신비화의 위선이 이 사회의 정의와 도덕성, 그리고 진실을 방해하거나 후퇴시키고 있다. 이제 대선이 막바지에 들어섰다. 새로운 정상국가의 과정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철저한 대개혁, 대수술을 통해 이 사회의 단물을 70여 년 간 독식하며 건강한 시민들을 병들게 했던 암세포를 확실히 도려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손상된 마음과 신체가 다시금 활력을 되찾는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선거가 끝나고 환희의 마음으로 이 글을 다시 다른 마음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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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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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법 오래된 추리소설은 그 시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착각, 소위 라캉의 말을 빌면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갖는다.”라는, 허구는 실재와 접속하여 우리를 기만한다는 영원한 진실을 상기케 하는 작품이다. 국역(國譯)된 소설의 제목이 마술 살인인 것은 아마도 추리문학이 지니는 구체적 단서가 될 수 있는 원제목 ‘They do it with mirrors'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거울을 사용한다는 문장만으로 소설 속 사건의 실마리로 바로 직결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에 해박한 독자들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출판편집자의 노파심 과잉의 산물이 아닐까.

 

이 소설은 가장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 다운 작품이라는 해석이 따라붙는다. 지적이고, 세련된, 그러면서 인간 세계에 대한 깊숙한 통찰의 시선이 배어있는, 읽는 이에게 지성의 즐거움을 한껏 풍요롭게 하는 작품이다. They do it with mirrors는 백발의 노부인 제인 마플이 활약하는 목사관 살인사건, 잠자는 살인마플 시리즈중 최고작이라 할 수 있다. 원제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살인을 한결같이 국역본 제목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 발상이 시대의 정서를 따라가지 못한 유치함 같다. 새로운 한글 번역판본이 출간 된다면 재고해야 될 것 같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정말 의미심장한 작가의 꾀바른 장치라 할 수 있다. 반 라이독 부인은 거울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한숨을 쉬었다.” , 사실 이 문장처럼 소설의 사건을 바라보라고 작가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암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그 해법이 보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거울의 사용이란 이미지가 뒤집혀 보이는, 즉 실제 삶을 잘못 인식케 하는, 즉 마술이나 연극무대에서의 착각의 장치라는 의미를 지닌 영국의 속어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저서 자유; 치유되지 않는 질병에서, 이 치명적 모호성, 자기 매개가 자기 재생산을 추론적으로 신비화하는 자본의 거울효과를 설명하면서 이 소설 제목의 기원을 짧게 소개하기도 한다.

 

제인 마플은 여학교 시절 단짝처럼 지냈던 오랜 친구 반 라이독 부인(루스)의 제안으로 그녀의 여동생 캐리 루이스의 저택으로 입주한다. 캐리 루이스는 이상을 지향하는, 그녀는 악이 원초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선의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루이스의 주변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관한 언니가 친구 마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캐리 루이스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박애주의자 대부호 걸브레드센과 혼인하여 입양한 딸과 친딸을 두었다. 그 후 걸브레드센의 죽음과 함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고 회계사인 이상주의 공동체를 꿈꾸는 루이스 세러콜드와 혼인하여 대저택 스토니게이츠에 소년범죄자들의 감화원을 건립하여 박애주의적 삶을 꾸려가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한 부류를 장식하는 많은 배역들이 마치 한 무대에 모여 연극을 상연하는 듯한 전개처럼, 이 작품 또한 캐리 루이스를 중심으로 혈연 및 복잡한 가족관계와 감화원의 정신의학자, 소년 범죄자, 정신병자까지 동원되어 인간 군상들의 다면성, 그럼에도 그 엇비슷한 본성들을 전시한다. 걸브레드센과의 결혼생활에서 아이가 들어서지 않자 입양한 딸 피파, 그리고 뒤늦게 가진 딸 밀드레드,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한 후 죽은 딸 피파가 낳은 지나, 걸브레드센의 죽음 이후 두 번째 결혼의 실패 후 부양하게 되었던 피 한 방울 섞이자 않은 의붓자식들, 손녀 지나가 결혼한 무일푼 미국청년 월터, 캐리의 시녀이자 비서인 빌레버양과 남편 루이스 세러콜드의 비서를 자처하는 에드거라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초상(肖像)이 아마 소설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어쩌면 이러한 다채로운 인간들의 면모가 발산하는 그 독특함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인간은 기발하게 다른 것인지. 그러면서도 그 본성이라 할 탐욕, 질투, 혐오, 충동 등은 그처럼 동일한 양태를 띠고 있는 것인지. 막대한 재산을 가졌으나 검약하고, 그러나 결코 인색하지 않은 캐리 루이스의 저택 스토니게이츠에는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기생하고 있다. 이제 사건이 벌어진다. 사실 서사의 진행에 따라 이미 무슨 일이든 촉발 될 수 있음을 독자는 기다리게 되는데, 이상주의적 박애주의자인 루이스 세러콜드가 에드거에게 끌려 서재에서 위협받는 일이 발생하고, 자신이 루이스의 아들이라며 권총을 들이대며 다투는 소리가 캐리를 비롯한 가족군상들의 시선을 모은다.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모호한 총소리 한 발, 그리곤 잠시 후 서재에서 들려 온 연속된 두 발의 총소리, 다급하게 잠긴 서재문의 열쇠를 돌리고 군상들은 세러콜드가 무사함을 확인한다. 그런데, 예고없이 스토니게이츠를 방문했던 걸브레드센의 전처 아들인 크리스찬 걸브레드센이 총상을 입은 채 죽은 것이 발견되고, 수사는 본격화된다.

 

이 소설 또한 등장인물 모두가 의심스러운 용의자로서 손색이 없지만, 작가가 마플의 입을 통해서나, 등장인물들의 언행을 통해 드러내는 무수한 암시와 혼선의 장치들을 독자는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암시가 의미하는 바를 인식하는 것은 결코 수월하지 않은 것이 묘미라면 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감화원 원장인 정신의학자 메버릭 박사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랍니다. 그게 바로 존재비밀이지요.”, 라고 스토니게이츠의 분위기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며, 사건을 더욱 오리무중에 잠기게 한다. 아마 마플이 수사관인 커플 경감에게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술사들은 그걸 사람들의 착각 현상이라고 한다지요라고 말하면서도, 그런데 마술사들이 어떻게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라는 것이 이 소설의 진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영국 BBC 방송 드라마They do it with mirrors중에서


크리스찬 걸브레센드는 일 년에 두 번 스토니게이츠를 방문하여 이사회의 중요 안건을 논의한다. 그 회합이 불과 한 달 전에 있었음에도 그가 다시 방문한 이유를 군상들은 추상적으로 짐작한다. 아마 감화원 운영과 관련한 긴급한 사업용무였으리라고,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복선이 추가되는데, 캐리 루이스의 신변에 위협이 발생했다는, 누군가 그녀에게 독극물인 소량의 비소를 포함한 약물을 복용케 하여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있음을 알아차린 크리스찬의 발설을 막았다는 것이다. 사건을 안개 속으로 몰고 가는 인간의 내심은 부정의 부정, 이중부정이 지니는 그 교활한 암막(暗幕)장치와 연극무대의 착각 장치는 쌍을 이루면서 사건의 진실을 더욱 혼돈의 상태로 이끈다.

 

세러콜드는 에드거가 정말 날 쏠 생각이 없었습니다라고 수사 경감에게 그것은 단지 연극이었다고 말한다. 사건의 진실은 바로 이 연극무대처럼 펼쳐지는 사건 당시의 군상들의 시선에 놓여있다. 환각은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 다시 소설의 첫 문장을 새겨 읽어야 한다. 거울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볼 필요가 있다. 착각, 왜곡을 불러 온 무대에서 물러나 관객의 위치가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세상의 실제 현실, 그 실상의 진실이. 막대한 재산을 지닌 캐리 루이스를 중심으로 그녀의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받게 될 인물들, 그러나 그 재산이 군상들 개체마다 그 재산의 필요는 시간의 속도를 달리한다.

 

그래 모든 것이 돈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나 중심인물, 언제나 이상주의적 선만을 지향하는 온화한 인물처럼 묘사되는 캐리 루이스의 강고한 자기 내면의 믿음은 그녀가 악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 악의 행위조차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왜곡되지 않은 시선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지적 총명성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그녀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시간에 지배를 받지 않는 궁극의 진실을 오늘의 독자에게도 선사한다. 이 소설은 추리문학으로서의 품격 있는 서사적 재미도 대단하지만, 내겐 하나의 중대한 발견 때문에 더욱 이 작품에 애착이 간다.

 

칸트가 말했다던가? 모든 자발적 행위는 병리적 원인에 의해 촉발된다. 이 작품을 추리소설로써 작동시키는 사건도 예기치 않은 인물의 방문, 우연성이 야기하는 필연성이다. 사건의 조건 자체인 수동적 결정은 언제나 내 안에서 구조적으로 벌어지는 나를 분열시키는 타자의 결정이다. 즉 내 안에서 나를 결정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타자인 근본의 환상이란 것이다. 이상향 건설이라는 꿈의 지향이라는 환상은 인간 교화에 대한 긍정의 꿈과 함께, 이를 실행하는 모든 것을 그 환상에 굴복시킨다. 이 환상을 연극이라는 또 하나의 왜곡된 환상으로서의 무대라는 장치를 배치하여 그 벗어날 수 없는 환상에 의해 조작된 인물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 존재일까? 어쩌면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환상에 대한 거대한 실험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무대에서 연극배우인 우리들은 좀처럼 관객이 되어 바라보기가 어려운 숙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지도. 이 영리한 추리문학에 도전하는 읽기는 가히 책 읽는 재미를 만끽케 하는 즐거움을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제공하리라.  "진실은 인위적 모양새를 가장하고, 거짓은 바로 단서 그 자체다.(슬라보예 지젝, 자유 240쪽에서)" 사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란 마치 증상처럼 보이도록 하지만 실상은 페티시처럼 작동한다는 말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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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케이리디온 - 단검처럼 빛나는 스토아의 지혜
에픽테토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그린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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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세기 고대로마의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에픽테토스(AD 50?-135)의 도덕철학에 대한 강의이자 대화를 그의 제자 아리아노스는 강의8권으로 출판했다. 그중 주요주제를 요약하여 일종의 핸드북으로 별도로 만든 것이 이 책 앵케이리디온 Enchiridion이다.

 

나는 이 책에 어떤 독자적인 학문적 유혹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고대인의 윤리에 대한 이해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정도의 호기심에서 출발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고도로 섬세해지고 근본적 탐색에 이른 도덕철학의 원리와 비교한다면 도덕원칙이랄 수 있는 것의 기준, 또는 경계의 불완전성으로 다분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관점들이 드러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일 게다. 그럼에도 바로 이러한 도덕기준들에 대한 사유의 축적이 칸트의 경험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을 제거한 선험적이라 할 형식에 의거한 도덕형이상학이 출현할 수 있었음을 우리들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고대 철학자의 윤리학은 제법 흥미로운 독서가 된다.

 

첫 번째 챕터의 총 5절로 구성된 제 1장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다. 아마 에픽테토스는 일종의 도덕적 힘을 지닌 어떤 기준으로써 인간의 내재적 자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려 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비록 단순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행동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 자기 의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 즉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에 우리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천명한다. 즉 재산, 평판(명예), 관직 등 우리자신에 달려있지 않은, 내 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속한 것은 자기 행위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판단, 충동, 욕구, 회피(혐오)와 같은 내재적인 것들이고, 이것만이 우리들 도덕성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책임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에는 반드시 그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 혹은 의무를 따르는 것이 바로 도덕일 것이다. 도덕을 자유에 기초해서 이해했다는 점에서 이 고대철학자의 사유에서 현대적 도덕의 싹을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사유에 대한 경외심이다.

 

기독교 교부철학에 의한 오랜 인간 사유의 암흑기를 거친 후에 다시금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에픽테토스의 도덕철학의 기준을 반복하는 것을 본다, 방법서설3부에서 그는 세 번째 격률로써 언제나 운명보다 나 자신을 이기며, 세계의 질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또 일반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생각밖에 없으며...”라고,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에서 도덕적 의무를 발견한다.

 

에픽테토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위대한 개념은 프로하에레시스(prohairesis)’라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는 도덕적 결단을 함유하는 개인의 정체성으로서 자기 결정력이다. 프로하에레시스는 칸트의 의지와는 그 내용에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평범한 이성으로도 알 수 있는 재능과 기질을 사용하는 내적 힘, 어떤 의도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의식에 제기되는 모든 감각현상인 인상(Phantasia)의 사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원인이 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칸트는 이 의지에서 이성에 저항하는 욕망과 성향에 맞서 행동의 원리를 바로잡아주는 의지를 선한 의지라 정의하며, 이를 도덕철학의 근간이라 말할 때, 도덕적 품성인 프로하에레시스(의지)를 닮아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13자연에 따른 삶을 살라에는 네가 진전되어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외적인 것들에 무감하고 어리석게 보이도록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문장이다. 16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을 예찬했는데,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철저한 도덕성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따른 삶이란 나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적 대상에 안달하지 말라는 의미 이상이 아니다. 부하직원을 불렀다. 그런데 그가 대답하지 않는다. 혹은 대답하더라도 내가 요청한 어떤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도덕적 책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대답하지 않거나 요청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화를 내고, 울화를 터뜨린다면 자신의 마음의 평정이 자신이 아니라 부하의 행동에 의존하는 꼴이 되고, 더구나 그 부하는 나보다 항시 훌륭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도덕군자 따로없군! 하고 비아냥거릴 수 있겠지만, 대답하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는 부하의 도덕성은 나의 도덕성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그 부하의 행위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저열성에 대해 나의 정념을 소모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것이 곧 도덕이 지향하는 마음의 평화와 자유라는 것이다. 내 자유를 잃으면 나는 도덕성을 상실하게 된다. 다시 반복되지만 항시 도덕은 자유의 이면의 표상이다.

 

에픽테토스는 이를 다시금 정리하여 14장의 한 절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을 원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14b)” 또한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을 비탄에 잠기게 한 것은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우리는 나의 외부에서 발생한 어떤 일, 즉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결코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다, 다만, 바로 그것들에 대한 내 인상으로 인한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9장에서 이를 매우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자유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는 것들을 경멸하는 것이다.”라고. 이것은 에픽테토스 도덕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준칙이다. 외적 인상에 무감각하라처럼, 탁월한 도덕 행동 준칙이다. 먼저 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 그 인상으로 인한 판단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후에 펼쳐지는 사유들은 최초의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자유의 기준에 대한 현실에서의 다른 양태들이다. 24장의 너의 능력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라라는 말은 명예라는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자신이 얻지 못했다고 부끄럽다거나 자신의 무용성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처럼, 자신의 prohairesis(의지)가 책임질 수 없는 것은 도덕과 자유의 대상이 애초에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스토아철학의 독특한 관점을 몇 가지 알게 되었는데, 그 첫째는 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어떤 것이 잘못되도록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연적인 어떤 것도 악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악한 것은 우주에 있을 수 없다.(kakou phusis en kosmÕ)”, 이로부터 곧바로 우주는 선의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는 것인데, 생성과 소멸의 순환, 그리고 그 정연한 우주의 법칙들에 대해 이라는 구별된 특정개념을 부여하는 것에 나는 조금 당혹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함일 뿐,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다만 그러함일 뿐인 것이 아닌가? 사실 노자 장자를 들먹일 것도 없이 이러한 논리적 건너뛰기에서 사유의 미숙함이 발견된다.

 

둘째는 에픽테토스의 오늘의 말로 인식론이라 부를만한 것인데, 먼저 오는 것들과 그것에 따른 것을 생각하라. 그런 다름에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이 좋다.”는 문장이다. 이것은 강의 384절의 인식론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 모양인데, 이 고대철학자는 인상파악승인의 단계로 인간의 인식과정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게 된다. 이 일련의 인식과정을 그대로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적용하여 우리네 일상의 그릇된 판단들을 설명할 수 있는데,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기 삶의 주도적 과업으로 실천해낼 수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데 중요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레슬링 선수를 예로 들고 있는데, 고된 훈련과, 음식의 절제, 그리고 시합에서 패할 수 있음에도 그 과업을 계속해서 견뎌낼 마음과 행동의 다짐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얘기다. 상대 선수에게 바닥에 냅다 꽂혀져서 입으로는 모래가 한 웅큼 들어오고, 얼굴은 부딪쳐 피멍울이 지고, 그리고서는 무참하게 패배했음에도 그것을 다시 하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얘기다.

 

인간아, 먼저 그 일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라. 그런 다음에 내가 그 일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의 능력(Phusis)을 잘 살펴보아라.” 라고, 자신의 혼의 지도적 부분(헤게모니콘;hqgemonikon)’이 내리는 명령에 세심히 주의하라고 가르친다. 이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헤게모니콘이라는 단어가 정말 신선하게 여겨진다. 오늘날 감성과 이성의 무자르듯한 이분법과 달리 모든 정신을 통제하는 지칭으로 우리네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실생활에서 우리들이 저지르는 많은 생각의 과오를 일깨우는 명제들도 시선을 끄는데, 우리들은 수시로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추론으로 타자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는 한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신다고, 그 사람이 술을 아주 나쁘게 마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의 판단을 알기 전에 어떻게 그것이 나쁜지 알 수 있는가? 파악될 수 있는 외적 인상을 자기마음대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외적 인상, 즉 자신의 주관적 인상을 마치 사실의 판단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이 세계를 온통 거짓 판으로 왜곡하는 일이 만연하는 현실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실 에픽테토스의 도덕철학은 도덕을 실제 경험 사례에 의존하여 이끌어내고 있는 한계로 인하여 그 자의성을 벗어나기 힘들뿐더러 자칫 오용될 여지가 넘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매우 인상적인 문장을 마지막 장인 53명심해둬야 할 명제들에 이르러 선언하고 있는데,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강제적 도덕원칙을 닮아 있어서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선 절대원칙인 자연 법칙에 대한 순응이다.

 

나를 이끄소서, 오 제우스신이여, 당신, 운명의 신이여, 당신이 나에게 정해 주신 그 어느 곳이라도 가도록. 나는 주저없이 따르겠나이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 해도, 나쁜 자가 되어도, 그럼에도 다름없이 따르겠나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독립한 순수 절대 이성의 명령으로 이해한다. 이 고대 철학자는 아마 도덕 최고의 원칙을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최고 신인 제우스신은 도덕적 완전성의 상징일 것이고, 이 절대선의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앞선 선험의 영역으로서의 필연적 힘이다. 칸트는 진정한 도덕의 최상원리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순수한 이성 인식이라고 말했다. 즉 도덕 원리를 사람마다 다른 본성에 대한 지식에서 찾는 것은 결코 도덕의 원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말처럼, 그것은 우주자연의 절대법칙인 신으로 일컬어지는 오직 형식이자 목적 그 자체인 명령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주저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따르겠노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삶의 지혜란 무엇일까? 자연의 법칙, 자연과 일치된 행위를 쫓는 것, 필연의 힘에 잘 따르는 삶일까? 이미 자연의 내재적 결정이 있음을 알면서 그 결정된 조건 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공포의 무게를 견디면서 결정해야하는 인간의 자유는 그만큼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이다. 정말이지 인간 세계에서 도덕이란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더욱 지켜져야 하는 것일 게다. 스토아철학의 한 단면을 엿보는 흥미로운 읽기가 되어줄 책이자 도덕이란 무엇이어야 할지를 생각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아가 보다 심화된 스토아철학의 사유를 알고자하는 독자는 그의 강의를 읽어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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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5-27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엥케이리디온이 표지가 산뜻하게 바뀌었에요. 제 판본은 오래돼서 붉은 바탕에 그림있는 거. 이 책 표지도 많이 바뀐 기억이 있습니다. 표디 바뀔때마다 가격이 슉슉 점프를..^^;;

필리아 2025-05-27 10:10   좋아요 0 | URL
표지의 새로움이 독서욕구를 유혹하는 것도 어느 만큼의 사실일 거예요.
네, 말씀처럼 요즘 책 가격이 정말 만만찮습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Yamoo님~
 
격언집 부클래식 Boo Classics 55
에라스무스 지음, 김남우 옮김 / 부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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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이 책 격언집; Adagia에 나름의 엄중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격언(Paraoemia)의 정의에서부터 가치와 유익성, 그 용례에 이르는 거의 한 편의 논문이라 할 40여 쪽의 서문(序文)을 붙이고 있다. 에라스무스의 이 글을 찾은 이유는 우신예찬; Moriae Encomium의 참고문헌으로서의 의미였는데, 오히려 그 통렬하고 신선한 반전의 내용들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가질 정도였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

 

지나치다는 말을 해서 말인데, 절대 지나치지 말라!(Ne quid nimis)’는 격언도 설명되고 있어 이로부터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이 문장은 고대 그리스 현자들의 가장 유명한 금언 세 가지 중 두 번째에 해당될 만큼 인간 삶에 있어 그 의미의 중차대함이 지극한 말이다. 무엇이든 정도를 넘어서지 말라는 지혜인데, 수시로 이러한 과도함 또는 미흡함에 머물고 마는 일이 허다한 내게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주문이겠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잘못은 모든 일에 있어 그 정도를 다스리지 못함에 있다고 지적했단다. 아무렴 고대 그리스 현자들은 절제, 중용의 덕을 합창하듯 반복한 모양인데, 이것은 인간의 언행에는 항시 지나침이 있기 마련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내 독서의 의도인 어리석음의 광범위한 편재성에 대한 혹독한 일깨움, 그 신랄한 자성(自省)의 문장들을 말해야겠다. 우신(愚神), 어리석음을 모티브로 한 격언들의 장은 여타 격언들보다 그 해설이나, 저자의 주장이 길게 서술되고 있다는 것도 이 격언집의 한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어리석음에 관련된 격언은 고통을 겪으면 바보도 현명해진다( Malo accepto stultus sapit)'이다. 이 격언은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고통을 겪음으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는 인간의 태생적 미련함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는 것이 곧 배움이라는 고통의 긍정적 수용의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인간은 험한 꼴을 꼭 눈으로 보고서야 그 쓴맛을 알아차리는 종이라는 말일 게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는 미련함이 이 사회 기득계층이 자리한 곳곳에서 드러나니 말이다.

 

이어서 왕으로 태어나든지 바보로 태어나야 한다는 조금 독특한 격언도 있는 모양인데, 바보와 왕을 연결하여 어떤 의미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어리석음이다. 에라스무스는 제왕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실례들을 소개하고는 그들은 상당부분 대단한 어리석음을 갖추고 있었음이 명백하다고 단언한다. 우신예찬의 그 통렬한 풍자의 문장들과 상당부분 그 개념에서 겹치고 있는데, 국가 통치에는 전혀 지혜가 없으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 모으는데 악착같은 제왕들의 숱한 어리석음이 끝도 없이 나열된다.

 

그러고서는 어리석음을 뽐내며 인류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은 왕은 찾아 볼 수 없다고 그 명단을 계속 늘려갈 수 있기에 멈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이유는 바로 제왕의 어리석음에 못지않은 멍청한 백성들이 바보같은 이유로 떠받들고 있음에 있다고 지적한다. 1510년의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 살던 인간이나 2025년 동아시아 한반도의 인간들이나 그 변하지 않는 어리석음에서 소설가 한강이 말한 어떻게 인간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통회(痛悔)의 물음을 떠올리는 건 아마 당연한 연상일 것이다.

 

이쯤에서 격언의 정의(定義)를 집고 가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데,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에서도 혹여 특정 개인이나 정파를 겨눈 비판이란 누명을 피하고자 애썼듯, 격언(paroimia)이란 잘 닦여 왕래가 잦은 길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오랜 인류의 시간을 거치며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지침으로 불분명하면서도 상당히 유익한 진리를 오롯이 감추고 있는 널리 사용되는 통렬하고 신선한 반전을 그 특징으로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그 함의(含意)에 대해 수긍해 온 인간 유익의 언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격언집은 사태와 시기에 적절하게 표리에 드러난 말을 통해 속에 감추어진 진실의 의미로 넌지시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지혜의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책은 에라스무스의 수준높은 유머로 인해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되는데, 하늘을 온통 자신의 사생아들로 채운 올림포스의 유피테르(제우스)를 우매한 탕아라고 그 사유를 적시할 때면 그 재치와 기발함에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정말이지 이 사회에도 바보들이 차고 넘침을 볼 수 있는데, 자신들에게도 유복(裕福)함이 전혀 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기애로 가득한 인간들이 뜬금없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휘두르며 행복해하는 모양들에서 우신이 미소를 가득 머금는 이유는 타당할 것이다. 우신이 베푼 그 어리석음에 저들의 삶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는가!, 바보들이여 영원하라! 킬킬킬.

 

사실 격언집으로서 그 소임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저술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에라스무스가 당대의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해 지닌 날카로운 지성, 그 비판의식에 있다. 연기를 팔다(Fumos vendere)'는 격언이 있는데, 처음에는 대단히 큰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사라져버리고 마는, 거짓과 과시로 뭉쳐진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에두르는 말이다. 이로부터 연기를 판 자는 연기로 처벌한다.”로 이어지며, 역겨운 종류의 인간들로 득실거리는 권력의 주변부, 공직을 팔아먹으며, 약속된 대가로 뇌물을 받아 처먹는 연기 장사꾼들에 분노하여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번만큼은 절대 관대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잘못을 피하려다 헛되이 어리석게도 다른 잘못에 빠지는 것을 연기를 피하려다 불 속에 떨어진다(Fumum fugiens in ignem incidi)'라고 한다. 거듭되는 어리석음들이 벌써 6개월 째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어쭙잖은 기득권의 그 달디 단 젖줄을 놓지 않으려고 온갖 불의한 술수를 반복해 저지르는 저들은 곧 화염에 달려드는 나방의 꼴을 면치 못하리라. 단 한 가지 일의 깊은 통찰력에 집중하는 지혜로운 이를 무수한 잔꾀들이 이길 도리가 없음을 말하는 격언도 있다. '여우는 많은 꾀를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알고 있다(Multra novit vulpres, verum echinus unum magnum)' 승냥이의 이빨도 피하는 고슴도치의 지혜를 보라!

 

눈살 찌푸리게 하는 담론가 입네 하며, TV 화면에 등장하는 신발장이들이 자신들의 직업과 전문분야와 전혀 관련도 없는 일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몽매와 교만이 얼마나 넘쳐나는가 말이다. 그리스의 유명화가 아펠레스가 자신의 그림을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걸어 놓았다. 어느날 지나가던 신발장이가 그림 속 신발 끈을 넣을 구멍이 너무 작게 그려진 것을 보고는 그림의 묘사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아펠레스는 그 지적을 듣고는 그림을 수정해 구멍을 정상적으로 그려 넣었다. 수정된 그림을 본 신발장이는 우쭐해서 이번에는 발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질을 했다. 이때 아펠레스는 신발장이에게 신발장이는 신발에만 왈가왈부할 일이다.”라고 응답했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하는 신발장이는 신발을 넘어서지 말라는 격언을 생각해 볼 일이다.

 

내과의사란 자가 국가 경제정책 논의의 자리에서 분수도 모르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생물학자라는 자는 정당정치와 헌법을 얘기한다. 물론 국민으로서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담론 권력을 휘두르며, 대중에 올바른 정보의 판단을 가능케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우습기 그지없는 방자함이랄 수밖에. 오직 상업적 이익에 열을 올리는 종편채널들의 무책임한 방송정책이 한국사회의 전반적 지식정보수준을 상당히 후퇴시켰다고 보아도 될 것 이다. 이제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언론의 사명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

 

'원숭이가 자주색 관복을 입는다(Simia in purpura)'고 원숭이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일 게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식,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징을 걸친다고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자주색 관복에 현혹되어 속을 수도 있을 테지만, 곧 그 속임수는 들통나버린다. 바 로 지금 우리네가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것이 바로 이 속임수에 넘어간 인간들로 인해 불필요하게 치러야 하는 홍역 아니겠는가. 자주색 관복으로 가장하고 이 나라를 저희들 뜻대로 주물럭거리며 국민을 기망해 온 것이 어언 70여 년이다. 이제 저것들에게서 겉옷과 장식을 걷어내고 그야말로 드러난 형편없는 인간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터이다. 그것이 어떤 자리여야 할지는 국민이 판단 할 것이다.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16세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지성 중 의 한 명인 에라스무스의 이 절절하고 예리한 통찰력이 웃음과 재치로 넘쳐나는 해학과 수많은 사상의 편린들로 엮여 인간과 인간사회에 팽배한 그 어리석음에 거대한 한 방을 때린다. 그야말로 인류 최고의 풍자극이라 할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과 함께 인간 공동체의 실체를 다시금 반추해보는 것도 썩 괜찮은 독서가 되어 주리라. 자 이제 실제 능력을 증명해 보일 때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atus)" 떠벌리고 과시하기만 할 뿐, 능력을 입증해보이지 못하는 자들은 이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떠나라. 지금이 그럴 때이다. 막사발 자랑은 이제 그만 됐다. 때를 가려라!(Nosce te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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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5-16 16: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있습니다! 읽었어야 했는데, 계속 다른 책들에 밀리다보니 여태 못읽었는데, 이런 내용의 책이었네요! 저도 얼른 읽어야 겠습니다~^^

필리아 2025-05-16 17:25   좋아요 0 | URL
네, yamoo님~ <우신예찬>과 함께 읽어보세요.
더욱 글의 진가가 배가 될 것 같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풍자를 인간의 결점과 약점을 체계적으로 비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죠. 해서 어리석음에 칼날을 겨냥하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일 겁니다. 이 격언집도 풍자에 대한 그의 신념이 결집된 산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