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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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비가시성'에 대한 담론은 그 이론적 배경을 달리하면서 갈퉁의 구조적 폭력, 부르디외의 상징적 폭력, 지젝의 객관적 폭력 혹은 사회적-상징적 폭력 등으로 정의되면서 무수한 서사를 이루어왔다. 아마 철학자 '한병철'폭력의 위상학(Topologie der Gewalt)이 이들의 인식과 다른 지평에 있다면 표제가 시사하듯이 '위상(位相)'이라는 공간의 상대적 관계성으로 상징되는 어떤 현상이나 상황, 사물간의 관계성, 즉 타자로부터 자아로, 외부에서 내부로, 적에서 경쟁자로와 같이 물리적 공간의 이동에서 폭력의 은폐성, 비가시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상을 결정짓는 것, 즉 폭력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또는 폭력의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경계에 '사회에 대한 면역학적 부정성과 긍정성'이 놓여있다. 즉 외부로서의 타자가 자아에 침입할 때 그것에 대한 자기 내부의 반응에 따른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분은 면역학적 반응에 따라 법을 초월한 권력으로서의 주권 사회와 규율과 금지를 통해 지배하는 규율사회는 '부정성', 그리고 오늘날 과다와 과잉의 산만성과 자기 소진에 시달리는 성과사회는 '긍정성'으로 설명된다. 폭력이 가시적일 때, 이를테면 갈등과 적대관계 속에서 자기 내면화할 수 없는 타자가 자아에 침입하고 침투하여 굴종과 예속, 죽음을 요구하는 폭력의 작동방식은 외부화되어 누구나 볼 수 있다. 즉 부정성은 외부적이고 전시적이며 지배와 억압이라는 타자 강제의 산물이다.

 

이와달리 면역학적 부정성이 사라지고 긍정성만이 남은 오늘의 성과사회는 명령하는 타자 없이 자기 자신에 귀 기울이는 사회이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 끊임없이 더 많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강박에 시달리고 자발적인 자기 착취에 마침내 소진되어 우울증에 휩쓸려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타자라는 침입이 존재하지 않기에 면역학적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긍정성의 사회이니, 내재화된 폭력이 보일리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듯 '성과사회'의 속성들을 해독하여 21세기 오늘에 대한 진단을 하는 저자의 주장에 거시적 견지에서 이의의 여지 없음은 물론이다.


 



특히 폭력의 미시 물리학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는 '긍정성, 투명성, 대량생산되는 미디어, 끊임없는 접속적 연합적 관계의 분열증적인 리좀, 그리고 지구화'가 내면화시켜, 직접적 의식이 불가능한 비가시성의 폭력에 대한 성찰은 "과열과 과부하로 시스템의 파열을 목전에 둔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태도에 강력한 반성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할만큼 빼어난 비판적 통찰력에 몰입하게 한다.

 

왜 지금의 세계, 사람들이 면역학적 저항을 하지 않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왜 타자의 침입에 반항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될 것이다. 아마 오늘의 사회를 '과잉의 시대'라 일컫는 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의 할 것이다. "극도의 과잉생산, 과잉 성과, 과잉 소비, 과잉 커뮤니케이션, 과잉 정보 (...), 비만은 내 쫓을 지방이 없으며 다만 줄 일 수 있을 뿐"인 것처럼, 동일한 것은 긍정적이다. 동일한 것에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으니 이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며, 무한한 자기 소진만을 촉발한다. 긍정성의 폭력이 곤혹스러운 것은 이처럼 내재성의 테러, 부정성이 없는 폭력이기에 효과적 방어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코로나바이러스19의 확산 방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제일 준칙이 '투명성'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투명한 정보와 실천 방안을 통해 국민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과 방역의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모범적 사례로 국민적 자부심까지 안겨준 정책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투명한 사회, 이 긍정성의 사회는 모든 것을 균질화하고 문턱이라는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전면적 투명성이 장악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될까? 궁극적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획일화되고 이질성이 제거되는 양상이 드러날 것이며, 정치적, 기업적, 사적 비밀이라는 개체의 존엄성과 같은 배타적 공간이 들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기능화되고 기계적, 수치(數値), 노골적인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가시화의 과정 속에 던져 넣으려는 강박은 외설적이다." 이것은 자유와 통제가 하나가 된 자기 감시의 저항할 대상 없는 폭력으로 몰아 넣는다. 그것은 고통의 늪이 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를 이보다 철저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더해, "동일한 것의 무더기에서,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서 태어난다."는 새로운 언어 폭력의 실체인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스팸화, 일말의 정보적 가치도 없으며, 소통적이지도 않은 쓰레기 더미는 자아의 비대화와 함께 공허한 커뮤니케이션만을 낳는다. 타자의 주의를 끌어보려는, 그러나 진정한 타자는 없고 소비자와 구경꾼의 무관심이 스쳐지나갈 뿐이다. 자발적 전시의 강박이란 이 과도함은 산만함과 지각의 둔감함을 재촉하고 정작의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과잉 커뮤니케이션이란 곧 존재의 결핍"이라는 진단에서 '미디어 무더기 시대(Mass-Age)'의 동영상 속, 발가벗음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의 수단과 목적 사이의 파괴된 경제적 관계를 읽는 것은 이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모든 것은 "더 열광적으로 시장의, 탈코드의, 탈영토의 운동속으로 뛰어들고", 현재의 한계를 넘어 진행되도록 추동할 뿐이다. 폭력의 내재성은 정면으로 싸울 상대를 소멸시킨다. 전지구적 차원의 과잉 가속화는 지구라는 시스템의 전소(Burnout)상황이 되어서야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루며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기 착취적 관계가 우울증이란 병리현상을 오늘의 사람들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피한, 아니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마침 코로나19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정신,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들 긍정성, 과잉의 욕망이 휩쓰는 비가시적 폭력을 잠깐 가시권역에 드러내준 자연의 선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성과사회라는 오늘의 진단 속에 내재한 이러한 비가시적 폭력성의 모습들을 드러냄으로써 나르시시즘에 마비된 우리네를 차갑게 깨워댄다. 그러나 이 자극적인 비판적 통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성과사회라는 오늘이 면역학적 저항이 부재하는 자기 관계적, 자타의 동일성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이다. 21세기 오늘, 규율사회,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여전히 암약하는 사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책은 칼 슈미트, 벤야민, 아감벤, 푸코, 지라르, 들뢰즈에 이르는 사회와 인간의 관계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터 잡아 면역학적 부정과 긍정성에 기초하는 독창적 폭력의 실체 해부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모두에 대한 비판 배경을 옮길 생각은 없다. 다만 시대착오적 사상이라며 아감벤이 여전히 면역학의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과연 오늘의 사회가 오직 자기소진에만 매달리는 성과사회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렇게 오늘의 사회를 단절적으로 면역학 전후의 시대로 명쾌하게 분리,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획일화된 규명이 아닐까?

 

"아감벤은 주권사회도, 규율사회도 지나온 사회,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런 결정적 패러다임 전환에도 불구하고 (...) 부정성의 형상을 긍정성의 사회에 (...) 잘못된 투사로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 P 99 에서

 

한병철이 아감벤을 이처럼 비판하는 것은 성과사회는 온통 긍정성의 사회이며, 결코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기 위한 토대이다.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은 오늘의 사회에 존재치 않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조지 플로이드 사건처럼 오히려 오늘날의 폭력은 합의의 순응성보다 이의의 적대성이 여전히 주가 되는 사회이지 않은가? 아감벤이 성과사회 특유의 긍정성의 폭력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부정성의 폭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배와 영광이 자본의 내부공간으로 옮겨왔다고 사회가 빈틈없이 자기착취만 기능하는 것도 아니며, 폭력과 법을 분간할 수 없는 지점의 사태가 더욱 극명하게 대두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미디어 속 스펙터클의 가상 속에 몸을 숨기는 정치, 속이 텅 빈 공허한 내용 없는 정치"의 현실이 물론 현존하지만, 권력과 지배의 형태는 달라졌으며 보다 큰 정치 또한 실재하고 있음을 오늘 한국 사람들은 경험하고 있다. 즉 부정성의 폭력과 긍정성의 폭력이 상존하고 있음이다.

 

지나치게 긍정성의 폭력만 상정할 경우, 모든 의무와 책임을 개인에게 몰아 넣어 권력화된 것들, 사회 시스템이 지닌 폭력성에 문제를 제기치 못하게 하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가치와 표준의 창출을 위한 시험 무대에 서있다. 진정 패러다임의 전환, 과잉의 성과사회라 표현되는 자기 소멸적 시스템의 전환을 화급히 모색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워진다. 무한 욕망의 무한 긍정,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케하는 성과사회의 내재적 폭력,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한 이 도발적인 저술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공허, 불가능한 무한성의 환상적 삶에서 우리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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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PIKETTY'자본과 이데올로기- with Essence Book

 

 

'토마 피케티'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본책과는 별도로 에센스 북(Essence Book)이 발간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긴요한 참조 문서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소유주의 이데올로기라던가 삼원주의, 다중엘리트체제, 사회토착주의, 보편적 자본지원 등의 비교적 낯선 용어들에 대한 핵심 개념의 설명,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경제학자 '이정우' 전 경북대 교수의 해제, 그리고 본문 내용의 참조 도표들과 그에 대한 설명이 있다.

 

피케티를 일약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돋움하게 했던 전작인 21세기 자본"도래하는 21세기는 불평등이 커지는 '세습자본주의'로의 회귀"라는 우울한 전망이었다. 특히 자본수익율(r)이 경제성장율(g)보다 높아지는 것, 즉 자본/소득 비율(일명 피케티 비율)이 높아져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는 명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불평등의 크기와 변동 추세를 분석했던 것에 이어 자본과 이데올로기'불평등 체제의 역사와 정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세운 다분히 정치 사회적인 분석과 대안적 모색을 중심으로 한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그 구조적 형태나 논리에 있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담론과 제도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문제의식의 제기이며, 이에대한 경제적 지표들과 통계 및 사회를 지배하는 법과 제도를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일련의 여정이다. 여기에 소유권을 사회적 안정의 핵심적인 필수조건으로 옹호하는 '소유주의'와 사제, 귀족, 노동자(3신분)의 세 기능으로 분할되어 작동했던 '삼원사회(三元社會, Societe ternaire)'가 오랜 역사의 기간 인간사회의 체제였음과, 21세기 자본주의 오늘의 학력 엘리트와 자산 엘리트의 유착 메커니즘인 '다중 엘리트 체계'로 그 모습이 변형되어 불평등주의체제를 고착화시키는 모습 등 정치 사회적 통찰이 더해진다.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이 출간된 1867, 영국의 소득분배가 최악의 정점에 도달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역사적 아이러니만은 아니었으리라.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마르크스가 주장했다면, 피케티는 '불평등의 역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의 망라를 통해 부의 분배가 왜 불평등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따라 불평등이 왜 심화 또는 축소되었는지를 규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가공할 노고의 결과물이 곧 자본과 이데올로기이다.

 

이정우 교수가 피케티의 정치경제적, 나아가 인류사회적 기여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라고 하였듯이, 불평등의 축소를 통해 더불어 사는 인류사회를 염원하는 어떤 소명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코로나 팬데믹이 전 지구적으로 기존의 생활양식을 바꿀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좋던 싫던 새로운 시대를 마주해야 하게 되었고, 우리 한국사회 역시 생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성장의 논리는 어불성설이 되었으며, 긴급구호와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마련과 같은 생존 정책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었다. 한국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은 피케티가 예시하는 20세기 대공황 이후의 뉴딜정책이 소득불평등을 축소하고 경제의 실질성장율 증진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대 사건으로서의 성공적 정책이었음과 마침 그 궤도를 같이 한다.

 

불평등주의체제를 완화하기 위한 피케티의 대안은 일견 급진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참여사회주의'를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기업 내부 권력의 분유를 확대'하고 '누진세 정책을 적극적 시행'하여 '사회적 소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또한 일정 연령의 청년들에 '보편적으로 자본을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소유집중과 자본의 순환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 나아가 초민족적, 초국가적 규제를 시행하기 위한 '금융자산의 소유에 대한 범세계적 등록 강제제도'의 도입 등은 분명 점차 심화되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요구하는 코로나 팬데믹은 어쩌면 도달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이러한 정책들을 시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인류 역사의 대전환적 운명인 것 만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코로나19 사태와 이후 전망에 대한 프랑스 르몽드 지에 올린 피케티의 기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격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실증적 경제 분석을 토대로 한 사회과학적 성취의 최고 산물이라는 표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시대의 역작이라 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계적 신질서의 창출을 위해, 인류의 공존을 위한 더할나위 없는 통찰과 제안으로 가득한 이 책은 그의 전작의 명성을 훨씬 능가한다고 감히 말해도 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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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 오렐리아 문지 스펙트럼 개정판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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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한 시대의 희미한 흔적들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인생의 아침에 사람을 매혹하고 방황케 하는 미망들,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무언가 가슴에 맺혀 잠시 시선을 옮기지 못한다. 반복되는 정신착란과 분열증을 겪으며 그토록 간절하게 붙잡을 수 없는 이상을 좇아야 했던 19세기 시인의 어떤 숙명적 이야기에 빠져들며 동질감, 아니 유대감이라야 해야 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은 어리석게 소진해버린 삶에 대한 뒤늦은 회한인 것일까? 수록된 '제라르 드 네르발'의 두 작품,실비(Sylvie)오렐리아(Aurelia)는 작가가 1855126일 비에이유-랑테른(Vielle-Lanterne) 의 뒷골목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기 각기 1, 2년 전에 집필된 것으로 전해진다.

 

 

1. 실비;Sylvie

 

숭고한 이상, 감미로운 현실, 이 둘 사이를 어떻게 떼어내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실비(Sylvie)동일한 사랑, 두 반쪽의 총체인 단 하나의 별, 이상화된 여인, 구원의 여신을 향한 방황의 꿈과 동경과 추억의 소슬한 사랑 이야기다. 어린 시절을 보내던 시골 마을의 소년과 소녀, 소년은 옛 왕가의 후손인 금발의 소녀 아드리엔의 광휘에 사로잡히고 단짝 소녀 실비를 잠시 잊는다. 작중 화자는 소설을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어느 극장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매일 저녁 나는 구애자와도 같이

성장(盛裝)을 하고 무대 옆 특별석에 나타나곤 했다.”

 

여배우 오렐리의 미소는 무한한 행복감으로 그를 채워주고, 그녀의 목소리는 기쁨과 사랑으로 전율케 한다. 완벽함, 그녀 안에서 살고 있는 남자. 그러나 바라보기만 하는 이에게 그의 자존심은 반발한다. 추억으로 향하는 영상은 오래전 잊어버렸던 고향으로 향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실비의 발랄함은 풋풋하고 달콤한 활기를 선사하지만 아드리엔에 대한 기억과 이상화된 오렐리에 대한 상념으로 달아난다.

 

네르발의 소설은 그의 삶과 내밀한 연결을 피하지 못한다. 실비(Sylvie)의 등장인물인 오렐리는 소설 오렐리아(Aurelia)에서 다시 반복되어 그의 삶을 지배하는 구원의 여인, 세계와의 은밀한 조응을 가능케 하는 궁극의 총체, 존재의 비의(秘義)에 대한 발견을 향한 하계(下界)의 여행이라는 광기의 터널을 통과케 하는 근원이다. 이 같은 치열한 영혼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단편 실비의 싱그러운 추억의 일화들은 세상의 소음을 잠시 잊고 생의 어느 한 때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한다.

 

성과 그 둘레의 잔잔한 물, 바위틈으로 구슬픈 소리를 내는 폭포

그리고 마을의 두 부분을 이어주는 오솔길... 

붉은 히스 가운데 고사리의 푸른빛이 두드러져 보이는 황야...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외롭고 서글픈가! 실비의 매혹적 눈길, 그녀의 달음박질...”

 

맑은 정취, 소박하고 영롱한 자연의 풍광들과 생동하는 젊음, 목가적 분위기와 어울려 젊은 날의 이상이 탕진한 현실의 어설픈 인식이 남겨놓은 사랑의 쓸쓸함이 애틋하게 그려진 수채화 같기도 하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에 대한 엇갈리는 대화를 주고받는 나와 실비의 배경을 수놓는 안개 속에 고립된 클라망의 수풀들의 묘사처럼 시야를 흐리는 뿌연 안개는 현실을 꿈과 환상의 지대로 옮겨 놓는다. 현실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영혼의 방랑, 네르발이 소설 오렐리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대인 꿈으로 향하는 것은 현실의 불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연민에 이르게 한다.

 

 

2. 오렐리아;Aurelia

 

네르발의 어머니는 종군 의사인 남편을 따라 전지에 동행했다 열병으로 사망했다. 네르발의 나이 두 살인 1810년의 일이다. 내겐 이 짤막한 사실이 온통 꿈과 환상의 기록으로 써진 소설, 광기의 회고록이라 불리기도 하는 오렐리아에서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단일성, 영원한 총체, 무수히 등장하는 여신을 향한 갈구와 결코 분리 할 수 없는 근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네르발의 또 다른 소설 불의 딸들서문에는 나의 이야기, 나의 모든 꿈들과 모든 느낌을 옮기기 시작했으며, 나를 내 운명의 밤 속에 홀로 버려두고 달아난 저 별에 대한 사랑에 측은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울었고...“라는 오렐리아에 대한 집필 의도와 감상이 있다.

 

또한 소설 속 숨겨진 짧은 문장이지만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방황하는 자기 분신과 싸우는 한 인간이 끝내 이르기를 원하는 대상의 실체가 보인다.


성모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생각한다. 쏟아낸 눈물이 내 영혼을 

진정시켜주었다...”   - P186 中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비견되는 네르발의 오렐리아인 여배우제니 콜롱(1808~1842)’에 대한 지고한 사랑이라는 현실적 실체가 그의 이상화 된 신성으로 많은 평자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이상화된 여인상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라고 속삭인다. 소설 실비(Sylvie)에서 보이듯 네르발의 사랑은 현실에서 실현 된 것이 없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도달 불가능한 욕망이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지점에 이르게 하는 대목이다. 아드리엔도, 실비도, 오렐리아도, 어느 여인도 그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결코 안겨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 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자기 소멸(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멸과 윤회에 대한 신비주의에 대한 귀의는 사랑이라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 곧 자기의 무화(無化)이기에 무의식, 그의 지하세계의 어둠 속에서는 현실의 부정만이 가능한 것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강박증의 세계마저 마침내 허물어지는 시기가 그의 기록으로 최초의 중대한 정신착란에 빠졌다고 하는 18412월이었던 것 같다. 이제 자기 분신과의 치열한 싸움, 본격적인 심연의 마주함이라는 영혼의 분투가 이어진다.

 

저 매혹적이고 두려운 몽환을 길들인다는 것,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노는 저 밤의 영들에게 규칙을 부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  - P 218

 

그래서 그의 선택이꿈이라는 새로운 삶의 길인 것은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소설오렐리아는 그래서 제 2의 삶으로서 선택된 꿈과 환상의 기록, 광인의 기록이어야 했으며, 네르발의 존재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내겐 닿지 못하는 어머니를 향한, 기억의 저편 어딘가 무의식에 새겨져 있을 어머니를 향한 네르발의 애끓는 외침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그래서 네르발의 자살에 붙은 의혹의 시선들, 신비적 예식으로서의 죽음 이라든가, 절망의 고백이라는 해석보다는 지극히 근원적인 것,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마침내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길의 실천이었다고 생각게 된다. 이보다 진실한 인간의 기록이 가능할까? 음울한 고뇌의 심상함이 더욱 마음을 휘젓는 손에서 놓기 싫어지는 그런 작품이다.

 

모든 존재는 신이라는 존재로부터 나와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개별적인 죽음은 존재들의 총화에로의 귀환이다.”  - P 140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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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
보에티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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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욕망의 바람들이 불 때마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근심도

측량할 수 없도록 무한히 커져가는 도다." - P 39 중에서

 

 

올바름,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 탐욕의 배제, 후학과 동료 시민을 위한 진실한 학문의 추구, 권력의 오만함을 잊지 않는 태도와 같이 신을 향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도록 정진했던 인간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배신으로 유배되어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그 고통과 비탄을 형언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서기 475년에 로마 근방 명문 가문의 자식으로 출생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테오도리쿠스''마기스테르 오피기오룸'(오늘날 비서실장)이었으나 일순간 역적이 되어 526년 유배지인 파비아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집필한 참된 선(), 운명과 의지에 대한 치열한 자기 물음의 사유가 이 책이다. 역자의 해제에서 설명 되듯이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책이 아니라, 운명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신 안에서 위안을 받고자 했던 철인이자 정치가이며 신학자였던 한 인간의 간절한 철학적, 종교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과연 정의로 다스려지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그의 첫 의심이었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는 신의 피조물로서의 동일한 질문일 것이다. 이전에 누렸던 영화, 그 행복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어찌 쉬이 떨쳐낼 수 있으며, 악이 세상을 장악하는 그 불의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는가.

 

저술은 그의 감정에 공감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들을 내치는 철학의 은유로 등장하는 여인(철학의 여신인 아테나 이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에 나오는 필로소피아를 모델로 했다는 견해들이 있음)과 보에티우스의 대화로,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운 활용을 위해 시와 산문을 번갈아 쓰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5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보에티우스의 유배된 상황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 배경에 대한 진술로 이후의 물음들이 제기되는 바탕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장과 3장의 '참된 행복'에 대한 논의와, 4장과 5장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와 운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과 보에티우스의 질문과 답변은 삶의 진리에 대한 간절한 앎이 더더욱 절절하게 울려온다고 할 수 있다.

 

 

1. 참된 행복에 대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슬퍼하는 일에 힘을 소진하는 것은 범인(凡人)인 우리네에게 으례 먼저 다가오는 사념이다. 여인은 말한다. "부귀, 명성, 권력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진정으로 인간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네가 다시찾고자 하는 것들이 너의 소유였음을 인정 할 것이다."라고. 사실 붙들고 싶어도 붙들어둘 수 없고 떠날때면 불행만 남기는 행운이라면 그런 덧없는 행운은 단지 다가올 불행의 전조 이외에 무엇이며, 단 한순간에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생사에 어떤 변함없는 것이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한 무엇이겠는가!

 

 

"행복이 이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최고선'이라면 행복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 93에서

 

 

우리는 재물을 ''라 부르고, 권력을 ''이라 부르며, 관직을 '영예'라 부른다. 그리곤 이러한 것들과 멀어질 때면 행복이 사라졌다고 슬퍼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원래 그것들에 속하지 않은 거짓된 이름들로 부르기 좋아하는 인간의 자기무지에서 오는 탐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 명예, 권력, 영광, 쾌락은 인간의 정신에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다시말해서 그 어떤 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이끌어준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얻게 될 때 행복해진다.

 

결국 이 다섯 가지가 동시에 완전하게 충족될 때 그것을 선이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완전한 것도 존재해야 한다.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완전한 행복이 참된 선이라면 그 완전한 것은 최고신 이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논리는 보에티우스가 위로를 구할 대상인 단일성, 근원적 존재인 ''으로 향하게 한다. 그것이 종교의 유일신이든, 어떤 범신론적 대상이든,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근원성이든 말이다. 그런데 오직 선만을 갈구하는 신의 나라에서 악은 번성하고 미덕은 짓밟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 신의 섭리란 무엇이며, 운명이란 무엇인가? 완전성, 선의 총체라는 신이라며 어찌 이러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2.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해서

 

책 바깥으로 잠시 뛰쳐나가야 겠다. 선거에서 낙선한 한 인간이 충혈된 눈자위와 온갖 혐오의 표정을 짓고서는 부정선거라 악을 써댄다. 그에게서 '()'의 현현을 보게된다. 미덕을 버리고 악을 추구하는 것은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니 무지로 인한 맹목이다. 이보다 악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제력을 잃은 것이라면 결핍의 악이다. 그런데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힘이 없다는 것이니 존재하기를 멈추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극악을 향한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내재된 완전성, 선의 총체는 대체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만물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든 방식을 포괄하는 불변의 단일한 형태인 '신의 섭리''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충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욕망이 그들의 심장을 비틀어

독기어린 탐욕을 분출시키고,

회오리바람이 바다 물결을 채찍질하듯

분노가 그들의 정신을 채찍질하니

고통과 비탄에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붙잡고 몸부림친다네." - P 199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밭을 갈다가 금덩이를 발견한 경우가 우연인가 묻는 일화가 있다. 이것이 무()에서 생겨난 것인가? 일련의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느닷없이 제멋대로 생겨난 어떤 움직임에 의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연이라 정의한다면, 이런 '우연'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일은 분명 여러 원인들(누군가 금덩이를 밭에 묻어놓았으며, 밭을 갈기 위해 땅을 파는 행위 등등)이 결합되어 일어난 긴밀하게 연결된 연쇄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신의 단일한 정신이 작성한 것이 시간 속에 안배된 만물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 질서가 우연이며 운명"이라면, 인간 의지의 자유는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보에티우스와 철학이 우연과 신의섭리의 문제를 논하다 - P 221삽화 부분발췌】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과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사유의 깊은 심연을 지나가야 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경유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려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며, 미래는 아직 소유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단지 신속하게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따라서 삶 전체를 동시적으로 완전히 향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자신이 존재해 온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의 본성의 단일성에 비추어 모든 피조물에 선행한다. 결코 지나가지 않는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을 알며, 미리 앞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한 눈에 다 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은 미래에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게 될 일들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에 이 일들은 신의 인식이라는 조건으로 필연적인 일들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그 일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단일성에 의거해서 모든 것들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즉자(卽自)적으로 본다는 이 의미를 심상에 담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어떤 위안이라도 매달려야 할 사람에게는 간절함에 맞닿았을 것이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명성, 그리고 쾌락에서 자유로워지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다고 악인의 현현이 되야 하겠는가. 자기를 살피는 일이란 지고한 자기물음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물질의 쇄도에 짓눌려 정신의 저 깊은 곳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운명의 범주가 아니라 미덕의 범주인 우정과 사랑, 지고한 선을 향한 참된 행복, 우주의 본성에 대한 겸허를 얘기하기란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네 인간은 불행이, 삶의 일상적 안온함이 물러날 때 그 허기와 상실의 고통으로 또 얼마나 아파하는가? 아마도 그러한 때가 되었을 때 이 책은 그 비탄의 통로를 빠져나가는, 죽음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는 헛수고를 멈추게 해 줄것 같다. 삶의 진실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의 평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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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무의식에서 새로워진 나를 찾아
김종주.라깡분석치료연구소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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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에는 억압이 없고, 따라서 엄밀히 말해 무의식이 없다." - 브루스 핑크

 

 

혹자는 무의식을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정도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무의식을 파악한다는 것이 곤혹스럽기 때문인지도 모르며, 욕망은 물론 이의 억압이란 것도 인식의 요구에 두지 않는 정신병인() 탓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이 주체에 미치는 법의 질서가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화 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의식에서부터 남근, 신경증이 가리키는 욕망의 방향에 이르는 프로이트에 대한 라깡의 비판적 계승에서 발견되는 차이로부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확장을 획득하게 해준다는 점을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신경증과 정신병에 대한 임상적 사례를 비롯한 21세기 증상이랄 수 있는 인생의 의미 장애를 겪는 일상정신증의 임상적 견해로부터 왜 많은 사람들에게 무의식이 거부되었는지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 무의식의 탐색과정이랄 수 있는 이청준의 소설들을 따라가며 거울단계에서의 자아형성과 소외의 문제, 마침내 실재계에 적중하는 해석과 같이 말 할 수 없던 것을 창조해내는 새로운 역사 쓰기와 읽기의 정신작용은 물론 오랜 유배생활로 우울증을 앓던 다산 정약용의 기록과 아울러 우울증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의 세계가 왜 무의식을 회피하면서 모든 갈등의 본질을 지워버리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내 관심의 탓이겠지만, 자아가 무엇인가를 거부하는 것, 즉 무의식의 억압으로 야기되는 신경증과 아예 현실의 어떤 부분을 자아로부터 뿐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쫓아내 버린다는 의미의 폐제를 원인으로 하는 정신병에 관한 5라깡의 임상정신분석6일상정신증은 인간의 언어와 행위 뒤에 숨겨진 욕망의 흐름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자기 성찰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생각게 해준다.

 

이를테면 욕망의 실현을 자신의 소멸로 여겨 욕망을 이루지 않으려는, 불가능한 욕망을 욕망하는 강박증은 그 질병적 발현의 유무를 떠나 스스로를 완벽한 주체로 생각하는 나와 주변의 많은 이들에 대한 사유로 옮겨가게 한다. 왜 끊임없는 욕망으로 들끓는 자신의 결여, 그 부족함, 불완전함, 무지를 망각하는 것일까? 또 다른 신경증의 하나인 히스테리를 말할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프로이트의 도라 사례와 함께 불만족한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는 대타자의 욕망을 영원한 불만족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주이상스와 욕망의 영원한 불일치의 심리적 전략을 목격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복잡성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정신분석 개념들을 인간과 사회의 구조와 특성에까지 확장하여 그 이론적 진실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살아가는 지혜로서, 내 삶의 반성적 단초로 이해하는데 어떤 기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한편 언어속의 소외, 의심없는 자기 확신, 환각 등 정신병의 화려한 병인(病因)에서 오늘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보게 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라깡이 말한 인간주체의 세 가지 질서 중 상상계란 소위 거세 콤플렉스가 시작되지 않은, 즉 법과 타자라는 사회적 질서로의 편입이 이루어지지 못한 단계의 일컬음이다. 여기에는 억압이 없기에 의심과 질문이 없으며, 부명(父命)이라는 부성기능, 법이 없기에 은유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현상들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언어의 세계, 질서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상계가 계속 지배권을 행사하는 정신의 미성숙에게도 삶의 전술이란 것이 있다. 타자에 대한 모방을 통해 동화하여 마치 상징계에 진입한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은유를 창조해내지 못하는 이들은 고작 책에서 읽은 것, 주위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을 사용하는 데 그칠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단어인 신조어혹은 두()문자어(축약어)를 만들어내곤 그 신조어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결코 창조해내지 못하는 흉내와 눈가림, 낄낄거림의 동화에 탐닉하는 사회의 정신질환적 증상이다. 아마 방송 매체에 등장하는 그 하찮은 주절거림들을 보라, 무의식을 거부한 유아들을 발견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게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라깡의 학문적-법적 상속자인 자크-알랭 밀레르에 의해 1998년 처음 정의된 일상정신증’ ”에 대한 장()일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신자유주의 질서에 점령된 인간사회를 묘사하는 데 적절한 질병처럼 여겨진다.


 상징적인 법의 유일한 시니피앙인 부명의 다원화가 임상분류의 

구성 축을 바꿔 놓았다.”        - P 111 中에서


일명 숨겨진 정신증또는 베일에 가려진 정신증으로 불리는 이 정신증은 망상과 환각과 같은 다양한 신체 현상 같은 고전적인 정신병의 증상들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에선 이 독특한 정신적 질환은 그래서 더욱 이 사회의 병을 은폐한다. 이 병의 증상들은 건강염려, 상시적 차별과 하대에의 노출, 관계적 망상, 자기 모습에 대한 강박...등등 현대인의 전형적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자기애로의 퇴행, 관계적 어려움, 환상의 부재와 같이 요즈음의 대중적 트렌드에 부상하는 것들과 닮아있다.

 

부정선거라고 악을 써내는 인간에게서 다른 아이를 때리고선 자신이 맞았다고 말하는 아이의 공격성과 자기애를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오늘의 사람들에게 고착된 정신증을 생각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공격성은 주체의 생성에서 자기애적인 구조의 상관적 긴장이다. 라는 말에서 바로 이것이 우리들 자신임을 아는 것이야 한다는 반성적 사유를 끌어내야하는 것이 오늘 나와 우리네 모두의 의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서로서 또한 무의식이라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안내서로서 그 책임을 다하는 저술이라 함에 주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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