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유지되지만, 그 바탕에는 ‘이래도 되는가?’라는 자기검열의 감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결과가 어떤 사회를 만드는지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 이철우, 『수치심 잃은 사회』 P99

 

“‘수치심 상실’에는 사무친 수치심의 느낌이 선행한다. 수치심 상실은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다. (...) 지독한 모욕, 자신의 자율성을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목숨 건 뒤집기를 통해서 모욕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즉 모욕을 오만한 자만을 통해서 방어한다. (이 때)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느낀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구겨진 자존감이 수치심 상실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이다.”  

- 한병철, 『존중 없는 사회』 P92

 

한 사회를 극심한 분열과 혐오의 정치 장(場)으로 내몰고 있는 책임 없는 한 인간의 외설(猥褻)스럽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독설의 파장을 지켜보다 몇 글자 적어둔다. 위에 인용한 두 학자의 글은 지금 한국 사회를 휩쓰는 정치담론의 실체를 적확하게 묘사한, 아니 그러한 냉소적 저주를 배설하는 자들의 악의의 실체를 잘 설명해준다. 사실 이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가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며, 또한 프랑스 정치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가 말한 “전통적으로 윤리의 기둥으로, 연대의 표식으로 작동해 온 감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에서 이 단어는 오로지 타자에 대한 잔인한 악의로써 멸시와 존재 부정을 강요하는 오염되고 얼룩진, 회복될 수 없는 부정적 폭력의 언어로만 사용되고 있다. 조리돌림하고 따돌림하여 배척, 매장시키려는 악의로서만 말이다.

 


혐오와 조롱, 멸시는 평등한 정치적 존중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언어가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 얼마나 철저히 비이성적 과정을 거치는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해왔으며, 지켜보고 있다. 자아에 대한 인식과 결합하여 세계와 사회를 의도적으로 분할하는 근본악이 기승을 부리는 해로운 사회에 직면해 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 대체로 이러한 조롱과 저주의 말들에는 언어 논리적으로 배설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가 일쑤고, 설혹 검증 대상이 있을 경우에도 왜곡되거나 날조된 거짓의 사실이 대부분이다. 검증 불가능한 진술은 의미가 없는 헛소리이고, 하나마나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배설한 자의 감정적 악의 이외에는 없는 자기감정의 투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지금 이 사회에 거침없이 난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지적했듯, “타자에 대한 존중이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됨으로써 타자 경멸을 양산하는 시대성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존중에 기초하는 우정의 정치학으로서 공존의 비전을 상실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분열과 저주의 악의(惡意)를 뱉어내는 인간을 묘사한 『유해 인간(Gente toxica)』 (2013)의 작가 베르나르도 스타마테아스(Bernardo Stamateas)의 말은 그 인간에 대한 이해측면에서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타자의 성취를 방해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권위와 언어폭력, 거짓말과 험담을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무심하게 저지르는 인간은 흔히 타자에게 끊임없이 훈계하려 들고, 노이로제적 예민함을 발산하며,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며 자신의 자존감만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회적으로 유해한 인간에 대한 이 정의에서 보듯 근원적 수치심은 자존감의 상실이나 인정받지 못한 데서 유래하는데, 종종 원한과 공격성으로 변환된다. 그래서 수치심, 모욕, 공격성은 서로에 대한 조건이 되고, 해당 인간이 배설하는 언어나 행위 폭력은 자신의 수치심을 거부하고 동시에 가리기 위한 가면이라 할 수 있다. 담론가로 행세해 온 한 저열한 인간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정책이나 인사에 대해 물어 온 적이 없다’며 분노를 표현했다. 이 인간은 자신의 비대해진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고 여겼던 것이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레온 부름저(Leon Wurmser)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작동양태를 그의 위대한 저술 『수치심의 가면』 (1997)에 “수치심이 억압되거나 왜곡될 때 오만, 경멸, 냉소 같은 방어기제로 전환된다. 고 썼다. 결국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개인적 방어기제는 냉소주의로 표현된다. 한 유해한 인간의 악의적 배설의 언어들이 왜 저러한 형태를 띠는 것인지에 대한 근접한 정의라 할 것이다.

 


수치심의 상실, 부끄러움을 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 존엄과 공동체의 결속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갈등의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급기야 사회 해체를 초래하는 매우 나쁜 상황을 낳는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존중의 능력도 없는데, 수치심이란 어떤 상위의 사회적 질서에 존중을 포함하고 있는 감정인 까닭이다.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이 그의 문학작품에서 일관되게 천착한 “얼굴을 붉히는 곳에서 더 고상한 자아가 시작된다.”며, 수치심은 도덕적 감정이며, 그것은 존중을 명령하는 어떤 상위 가치체계의 전제라고 말한 것에 대한 상실이자 배제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수치심이라는 이 도덕적 감정은 손상된 명예를 의식하며 어떤 정화(淨化) 또는 속죄 의식을 통해 사회에 다시금 복귀 통합된다. 이와 달리 오늘의 수치심 문화는 타자를 파렴치할 정도로 모욕주고, 처벌하고 말살하려 한다. 수치심 상실을 냉소주의라는 방어기제의 가면을 쓴 인간은 자기 이상의 붕괴를 사회의 상위 질서의 파괴, 즉 무례함과 무존중(無尊重), 무경외(無敬畏)의 저열하고 파렴치한 세상으로 퇴행시킨다. 따라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이상과 다른 모든 가치와 이상에 대해 냉소적 경멸을 배설한다. 그것은 과잉의 자아가 선택한 암울한 자기 저주이다.

 


이 저주받은 유해한 인간은 즉시 대상을 적대하며 조리돌림 등 동원할 모든 린치를 가하려고 하며, 상대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나아가 사회구조 해체라는 문명적 퇴행을 초래한다.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특징으로 냉소주의와 타자의 더 높은 가치에 대한 조소와 조롱으로 표출”된다고 지적한 것과 적확하게 일치한다. 즉 수치심 상실에는 수치심 느낌이 선행하며, 그렇게 잃어버린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 된다. 연일 저 악의와 저주를 배설하는 의미없는 감정의 언어로 가득한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구겨진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때문에 그 배설구(排泄口)에서는 원색적 비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다. 바로 소수 기득권자라로 자임하는 인간무리들의 해체에 거칠고 극악하게 훼방하고 조롱하며 저주하는 것들이 이토록 많아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정치적 조롱과 저주의 폭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속하지 않은 집단을 분리하면서 외부 집단을 향한 부정적 평가에 기초하여 난데없는 편견을 통해 극심한 차별의지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외부의 사람들을 주변화(周邊花)하여 부정적 감정을 들씌우는 것이 곧 차별이다. 이렇게 집단 분열의지에 사로잡힌 인간은 인식 범위가 극히 협소해지고 이윽고 인식불모지대에 빠져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수치심, 도덕심과 같은 정신적 제방을 쌓고, 이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적 성취능력을 발달시킨 인간의 본질에는 고착된 충동과 승화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수치심과 관련한 상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수치심 잃은 사회』에서 이철우 박사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키는 감정이며,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수치심은 관계의 감정이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작동시키는 윤리적 신호다. 이것을 잃었을 때 인간과 사회가 겪는 것은 지금 각종 매체에서 보여지 듯 “감정적 해체, 윤리적 무감각, 공동체의 유대감 상실, 나아가 공동체의 붕괴이다.” 무례함이 솔직함이 되고, 책임 회피가 전략이 된 작금의 정치 담론 양상은 너무도 불온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 개인의 존중은 물론 공동체의 안정과 신뢰를 보증하는 권위마저 무시하게 된다. 헌법적 권위마저 무시하려는 권위의 진공상태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이 우글대는 세상은 이 사회를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다. “존중(수치심 갖기)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야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필수 조건”이라는 한병철 교수의 지적은 신뢰성 상실이라는 병든 오늘의 우리들에게 매우 중대한 일깨움을 제공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을 제발 잃지 말자. 적어도 수치심을 아는 사람은 저 악의적 괴물들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분열과 갈등, 사회적 해체만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열중하는 무리들로부터 이 사회, 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서적 공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도덕적 감정으로서의 수치심이다. 이것을 잃을 때 차별과 권력의 탐닉과 독단과 사회적 유대 파괴만이 남는다. 서로 존중하는 사회,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라는 정치적 감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저 표독스러운 오만과 경멸, 냉소의 저주의 말아닌 말들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는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인 까닭이다.

 


사회에서 자신의 위상적 변동으로 인한 이상의 상실을 부끄러움의 상실이라는 가면으로 가리지 말자. 그것은 정말 나쁜 근본악이자 사회악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전락시키는 사악함은 수치심의 상실에서 출현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에서 이처럼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회가 왜곡된 인간 감정들인 혐오와 조롱, 분노, 배제와 분리, 그리고 폭력으로 진행되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러한 증오와 멸시, 외면의 감정에 도사린 정치 행위의 편재, 그 왜곡과 불온함의 근저는 어떤 특정 개인에 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칸트가 지적했듯 수치심 상실은 “어떤 사회구조보다 인간 존재에 깊이 내재한 악행의 뿌리”라고, 그것은 타인을 자신의 욕구에 종속시키려는 성향인 근본악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말했다. 낙인과 배제, 저주의 악담은 이 세계를 분열시키고 파괴한다. 우리들은 존중의 언어를 어느 샌가 잃어버렸다. 타인에게 잔인한 인간들(진상들)이 이 사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다. 그러한 사회를 우리는 몸서리치지 않는가? 수치심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배설된 언어가 귀중한 공동체의 에너지를 쓸모없이 낭비케 하는 작태가 이 글을 쓰게 했다. 안타까움이 여기서 그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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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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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와 인간의 반역

 

“새로운 가속된 진화 양식을 출범시켰다. 바로 비유전적 진화다. (...) 

삼차 진화 과정일 것이다. 기계 자신이 참여하는 과정이다. (...)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도 떨어져 나갈까?” 

 - P594, 「50주년 기념판 에필로그」에서

 

모든 학문 분과의 연구목적이란 무엇일까? 인류라는 종(種)의 인간상(像)이 바로 현재의 양태로 존재하는 원인과 그 원인이 야기하는 상태의 진실, 나아가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과 우주의 그러함 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인간자신과 그 세계의 무수한 현상들과 미래상을 그려보고자 하는 실체적 유익(有益)일 것이다. 물론 좋은(nice) 무엇에 대한 지향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만일 모든 인간학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그르지 않다면 자연선택의 기준 단위가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자기복제자’라고 선언하는 이 위대한 진화론의 한 관점 또한 인간의 이해와 가능성 높은 인간 미래상의 이해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진화이론의 한 관점으로 여타 관점을 압도하려는 유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그 세계가 왜 그렇게 형성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진실을 추정하고 해석,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인간 개체들과 그 집단이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든다섯 살이 된 노학자가 젊은 시절 발표했던 저술이 50년이 되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진화론과 유전학 분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가운데 어제의 관점이 시대에 뒤떨어져 그 진실성을 잃고 철회, 폐기되기 일쑤임에도 이 저술은 “당장 사과하거나 철회할 것이 없다”고, 나아가 앞으로 50년 뒤(2076년)에도 여전히 통용되기를 희망할 정도로 탄탄한 이론적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저술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략 30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그때의 관심은 아직 인간과 인간사회의 형상 이유와 같은 본질적 사안에 미치지 못하고 ‘이기적’이라는 인격적 형용이 붙은 유전자 명명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고, V.C 윈-에드워즈의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대립하는 새로운 관점을 알고자 하는 순전히 지식에 대한 욕구였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진 지금, 이 저술은 인간과 인간세계에 대한 현실적 앎의 이해로 읽게 되었다. 또한 새롭게 시선에 들어 온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반역 가능성의 물음’이 AI로 인한 당면 문제들과 어울려 낯선 긴장을 몰고 왔다.

 

1. 유전자의 생존 논리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단순히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생물학적 명제로만 읽는다면, 이 책이 던지는 사유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게 된다. 오히려 이 책의 급진성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집는 데 있다. 개체가 유전자를 위해 존재하는가, 유전자가 개체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단위를 유전자라는 복제자로 설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이타주의, 협력, 도덕, 문화, 나아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의 위치를 다시 묻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편한 관점의 전환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사회적 존재들은 서로 협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러한 익숙한 세계를 뒤집는다. 생명체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여 살아가는 주체라기보다, 훨씬 오래되고 안정적인 어떤 존재, 즉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라는 것이다. 몸은 유전자가 세대를 넘어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탈것이며, 뇌와 행동 역시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돕도록 형성되어 왔다.

 

이 주장은 인간을 모욕하기 위한 선언이라기보다 자연선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에 가깝다. 도킨스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반드시 개체나 집단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G. C. 윌리엄스의 논의를 이어받아 그는 장기간 존속하면서 복제될 수 있는 안정된 단위, 즉 유전자를 선택의 핵심 단위로 본다. 복제자는 장수하고, 많이 복제하며, 높은 정확도로 자신을 복제할수록 유리하다. 그러나 완벽한 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류가 발생하고 변이가 생긴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완전성이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는 완벽한 자기복제의 역사가 아니라, 복제와 오류와 선택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특정한 복제자가 다른 복제자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온 역사인 셈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신체에 대한 시선도 달라진다. 몸은 더 이상 생명의 궁극적 주체가 아니다. 몸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된 구조이며, 유전자는 몸에서 몸으로 이동하면서 훨씬 긴 시간 동안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복제자며 우리는 생존기계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섬뜩하다.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체의 생애는 장구한 복제 과정 속에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장면일 뿐이다. 개체는 탄생하고 늙고 죽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건너뛰며 살아남는다. 도킨스가 유전자를 ‘불멸자’에 가까운 존재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의식적인 이기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우선 심리적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행동의 효과에 관한 개념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은 행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이타적이다. 일벌이 침을 쏘고 죽는 행동이나 포식자를 둥지에서 멀리 유인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새의 행동이 그러하다. 표면적으로는 자기희생이지만, 그 행동이 자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유전자의 사본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면 유전자 수준에서는 오히려 이기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 지점에서 도킨스는 ‘종의 보존’을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처럼 설명하는 통념을 비판한다. 이타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집단선택설은, 그 집단 안에 단 한 명의 배신자가 들어오는 순간 흔들릴 수 있다. 다른 구성원들이 희생하는 동안 그 희생의 혜택을 자신만 취하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면, 자연선택은 그 배신자의 형질을 퍼뜨릴 가능성이 높다. 순수한 이타주의 집단은 내부의 이기적 개체에 의해 쉽게 잠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관념이 곧바로 진화의 원리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2. 이타주의와 협력의 역설 : ESS(진화적 안정 전략)

 

오히려 도킨스가 보여주는 것은 더욱 기묘하다. 이기주의는 때때로 이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타인을 돕는 행동이 자신의 유전적 이익과 일치할 수 있다. 사회성 곤충의 놀라운 자기희생도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일벌은 자신의 자식을 직접 남기지 않으면서도 형제자매를 돌봄으로써 자신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 겉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집단이 아니라 유전적 복제의 지속이 중심에 있다.

 

그렇다고 도킨스가 인간에게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역설이 발생한다. 그는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려고 애쓰자”고 말한다. 생물학적 본성이 곧 윤리적 명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이 이기적 복제자의 확산을 설명한다고 해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설명과 규범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오히려 인간의 과제는 자연적 경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거슬러 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개체들이 서로 공격하고 배신하는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인 공격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공격에는 시간과 에너지의 비용이 따르고, 상대의 반격으로 자신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공격하라. 달아나면 뒤쫓아라. 반격한다면 달아나라”와 같은 조건부 전략이 특정 환경에서는 안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액설로드의 ‘반복 죄수의 딜레마’에서 등장하는 '팃포탯(Tit for Tat)'은 첫 번째에는 협력하고 이후에는 상대가 한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전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선행이나 무조건적인 배신과 다르다. 먼저 배신하지 않지만 배신을 용인하지 않고,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용서한다.

 

여기서 인간의 도덕은 독특한 모습을 드러낸다. 협력은 반드시 순수한 선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 기대, 반복되는 관계, 상호 보상이라는 조건이 마련될 때 협력은 이기적인 개체들 사이에서도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도킨스의 세계는 단순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다. 이기적 복제자의 논리 속에서도 협력과 신뢰가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협력에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기꾼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사기꾼과 호구’, ‘갚는 자’의 관계가 보여주듯 이타적 체계는 언제든 착취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도덕적 교육이 필요하다.

 

3. 밈(Meme)이라는 새로운 복제자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의 사유가 가장 멀리 나아가는 지점은 문화 전달 단위인 밈(meme)의 등장이다. 유전자만이 유일한 복제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선율, 개념, 사상, 표어, 유행, 예술적 형식과 같은 문화적 단위 역시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되고 복제된다. 이때 뇌는 밈의 탈것이 된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면 밈은 인간의 기억과 언어와 문화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

 

이 발상은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마저 흔든다. 한 인간의 유전자는 세대를 거치면서 희석되고 결국 개별적인 ‘나’의 유전적 흔적은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나 작품은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전자는 흩어졌지만 그의 사상과 이름은 여전히 문화 속에서 복제되고 있다. 『시학』이나 『국가』 역시 그것을 쓴 한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간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이 만든 복제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다시 두려운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유전자 기계에서 벗어나 밈 기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복제자의 숙주가 된 것인가. 도킨스는 밈 역시 장수, 다산성, 복제 정확도라는 선택압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 역시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세계인 동시에 인간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는 또 다른 진화의 장(場)이 된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밈에 의해 배양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문화적 복제자에게 다시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된다.

 

4. 확장된 표현형

 

그리고 『확장된 표현형』으로 이어지는 사고는 이 문제를 더욱 먼 곳까지 밀어붙인다. 유전자의 표현형은 더 이상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몸 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비버의 댐이나 새의 둥지처럼 몸 바깥에 만들어진 구조물 역시 특정 유전자의 생존에 기여한다면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인간의 기술과 인공지능도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와 AI가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외부 세계에 확장시키는 도구라면, 그것 역시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을까?

 

특히 오늘날처럼 AGI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상황에서는 도킨스의 마지막 질문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의 유전적 본성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체와 뇌를 넘어서는 새로운 복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에 이어 문화적 진화가 나타났다면, 이제 실리콘 기반의 인공물이 새로운 진화의 매개체가 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도킨스가 말한 ‘비유전적 진화’가 단순한 문화적 은유를 넘어 기술적 현실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5. 결어 : 인간의 반역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 선택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도킨스의 사유를 단순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의 역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유전자의 독재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간은 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모사하고, 단기적인 생존 이익과 다른 장기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이 능력이 도킨스가 말하는 인간의 특별한 가능성이다. 자연의 역사에서는 이타주의가 언제나 유전자 수준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을 이해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규범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이기적 유전자』의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 인간의 몸도 떨어져 나갈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는 말로 읽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 만들어지고 밈 기계로 배양되지만 우리의 창조자들에게 맞설 힘을 갖고 있다”는 앞선 선언처럼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인간은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유전자를 사유할 수 있고, 밈의 운반자이지만 밈을 비판할 수 있으며, 기술의 창조자이면서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질문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유전자가 이기적인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자기복제라는 맹목적인 과정에서 출발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을 거슬러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몸은 유전자의 탈것일 수 있다. 문화는 밈의 탈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만든 AI 역시 새로운 복제와 진화의 탈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유전자의 독재에서 벗어난 인간이 다시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의식과 선견지명이라는 능력을 이용해 그 진화의 방향 자체를 질문할 것인가. 『이기적 유전자』가 오늘날에도 불편하게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아직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한 진화생물학의 고전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명적, 철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걸작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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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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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는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함께 아베 고보의 1960년대 대표작 중 하나로 작가의 문학적 전성기를 보여주는 실존주의 문학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같이 정체성의 상실과 실존적 불안이라는 인간이라 믿고 있는 존재의 의미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지위 등이 사실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의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판박이』는 이들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화성인의 지구 침투’라는 본격적 SF적 발상을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궤변과 논리적 말싸움(舌戰)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차별화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이 진정 ’나‘인가?”, 그리고 ’나를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증명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즉 이 작품은 두 작품이 말하는 실존적 불안의 변주를 뛰어넘어 인간을 하나의 논리적, 언어적 구성물로 해체해보는 실험실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궁극적으로 『인간 판박이』는 인간 정체성 상실의 소설을 더 깊이 파내려가 인간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증명의 체계’를 해체하는 소설이라고.

 

『타인의 얼굴』이 시각적 단절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하고 있다면 『모래의 여자』는 사회적 고립을 통해 묻고 있음에 비해, 『인간 판박이』는 지성마저 가짜일 수 있다는 가장 극단적 의심에 도달해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그 원형을 1951년 발표된 그의 단편 「S. 카르마씨의 범죄」에서 발견한다. 소설의 주인공 S.카르마가 존재를 박탈당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인간‘으로 인식되지 못하며,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당하는 일련의 장면이 떠오른다. 즉 인간 정체성과 실존의 물음은 아베 고보가 일생 천착하던 중심 주제임을 새삼 확인케 하는 작품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판박이』는 이러한 물음의 극단인 ’인간‘이란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의심까지 제기하고 있기에)

 

S.카르마는 인간이 사회적 기호(이름, 명함, 얼굴 등)를 잃었을 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정체성 상실과 실존의 그 질긴 관계성을 묻는다. 사람으로서의 환대라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자리의 마련을 말하던 인류학자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의 목소리 중 한 측면에서 좀 더 밀어붙인, 다시 말해 사회적 승인보다 더 심층의 물음인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는 정말 자명한가?’ 라는 물음일 것이다. 즉 『인간 판박이』 에서는 외형만 인간인 화성인이 진짜 인간의 자리를 위협함으로써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붕괴시킴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존재 우위론의 허상을 박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라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정체성이란, 사회 시스템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자기 실존성을 인식하거나, 얼굴, 소위 외피(가죽)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서의 정체성에 불과하거나, 진짜와 모방의 경계나, 공통상식과 망상의 경계의 흐릿함을 들추어냄으로써 인간성 혹은 인간이란 것 자체에 대한 확신을 허물어뜨린다.

 

사실 우리들이 같은 종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케 하는, 아니 김현경의 말처럼 인간 상호간의 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이름인 ‘사람’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들의 현실 세계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려는 고약한 규제 규칙들을 가지고 사람의 자리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로써 한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자유를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언어에 씌워진 정체성이란 환상이거나 진짜 없는 짝퉁처럼 그 실체기반의 취약함, 그 조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소설 『인간 판박이』의 기묘한 핵심은 바로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존재의 논리로서, 평론 풍 사회극인 <안녕하세요 화성인>이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각본가인 주인공과의 논쟁이며, 그 핵심 질문이다.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기 확신이 사실상 증명된 지식이 아니라 수많은 전제 위에 세워진 약속이라는 사실에 불과하고,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증명된 명제가 아니라 공리(公理), 즉 너무 당연하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화성인이 등장하면서 이 증명하지 않았던 것에 문제가 발생한다. 네가 화성인이라는 증거를 보여라, 그렇다면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이 증명 책임에 인간이 제시하는 근거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타인의 얼굴』에서는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지만 『인간 판박이』에서는 얼굴이 너무 완벽하게 같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의 얼굴』은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고 한결 쉽게 물을 수 있었지만, 『인간 판박이』는 완전히 같기에 얼굴만으로 인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지점에 도달한다. 즉 정체성이 얼굴의 상실에 의해서 흔들린 『타인의 얼굴』과 달리 완벽한 동일성이 정체성을 흔든다. 제목 『人間そっくり』, ‘인간과 똑같다.’ 라는 표현처럼 ‘인간’과 ‘인간과 닮은 것’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순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더욱 모호한 영역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화성인은 주인공의 말을 반박하는 논쟁 상대라기보다 상대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한 단계 더 밀어붙여 정말의 사유를 촉구하는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당신은 인간처럼 보인다.

그렇습니다. 인간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이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전제가 전제를 의심하는 무한회귀에 빠져드는 논리의 미로에 갇히고 만다. 자신이 믿고 있던 전제에 의심을 품게 됨으로써 인간이라 믿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임이 흔들리게 된다. 이 대화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까지 뒤집히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인간언어의 의미가 인간 사회의 약속이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제 소설은 그야말로 이들 대화 속에 작가의 말이 작품의 현실을 침범함으로써 인간 정체성을 다루는 SF를 초월하여 소설가와 이야기의 관계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화성인>을 쓰는 각본가에게 실제로 갑자기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옴으로써 화성인을 만들어내는 사람, 즉 허구를 만드는 사람에게 허구가 현실로 침입하고, 작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처럼 되어버린다.

 

소설을 읽고 있던 독자는 갑작스레 내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주인공이 쓴 이야기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베 고보가 쓴 것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주인공에게 쓰게 만든 이야기인가? 진정 이야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까지 건드리며 소위 메타픽션(Metafiction)적 층위를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허구성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 된다. 이 메타픽션의 층위는 인간 존재 증명의 문제와 뒤엉켜 존재자의 믿음에 근본적 구멍을 뚫어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아베 고보가 장식처럼 도입한 위상수학(topology)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모양이 겉으로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보다 관계와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위상수학 기능의 하나이다. 도넛과 손잡이달린 컵이 모양은 다르지만 구멍이 하나라는 위상적 구조가 같기에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듯, 인간과 화성인의 외형이 같다면 둘은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과 화성인의 관계 구조가 같다면 둘을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정상인과 미친 사람, 현실과 허구,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도 위상적 관계처럼 변형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든다. 따라서 소설은 누가 진짜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어떤 관계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로 규정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즉 김현경의 절대 환대의 문제와 유사하게 회귀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인간 존재 증명의 물음에 휩싸여 인간 정체성에 대한 의심의 문제로부터 나는 오늘의 트랜스휴머니즘, 즉 인간 신체의 변화를 도모하는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 찬양문제를 떠올렸다.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를 인간 존재의 최종적 경계로 보지 않고, 유전자 편집과 인공지능, 신체 증강과 뇌-기계 인터페이스 등을 통해 인간이 새로운 존재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현실적인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의 논의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증강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새로운 종의 출현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판박이』가 오늘날의 포스트휴먼 사유와 만나는 더욱 근본적인 지점은 ‘새로운 인간’을 상상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종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이라는 종의 경계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묻는 데 있다. 소설 속 화성인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고 인간과 똑같이 말하며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외형은 인간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는가? 반대로 인간의 기억과 의식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임을 보장한다면, 그것들이 인공적으로 복제되거나 변형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 판박이』는 포스트휴먼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부터 증명해야 한다’는 역설을 앞당겨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이라는 기존의 종을 변형하여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말하지만, 『인간 판박이』는 오히려 ‘기존의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 그렇게 명확하게 존재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오늘의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의 무지를 책망하는 듯하다. 이제 최근의 가장 첨예하고 날카로운 문제인 AI와 이미지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AI가 인간의 얼굴을 만들고, 언어를 생성하고, 문체를 모방하고, 그림을 그리고, 인간처럼 대화한다면 이 인간처럼 보이는 AI는 인간과 다른가? 이 질문은 『인간 판박이』의 제목이자 물음과 정확하게 겹친다.

 

‘인간처럼 보이는 것(Human-like)’과 ‘인간(Human)’을 어떻게,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에 따라 둘의 차이는 극히 모호해진다.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기억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오늘의 AI를 ‘너는 인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AI 시대의 존재론적 질문을 선취한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베 고보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인간능력을 새로이 확장하는 방향의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거의 대척에 놓여있는 질문을 한다. 당신들은 개선하려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고 ‘인간’이라는 말을 먼저 의심한다. 아베 고보는 이렇듯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을 특별한 것으로 지정하기 위해 명명한 행위일 수 있다고 말이다.

 

자, 이제 소설의 물음을 돌고 돌아 ‘인간 판박이’가 ‘인간’에게 돌아온다. 화성인이 인간 판박이인가? 아니면 인간이 사실상 인간 판박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고 말이다. 즉 판박이가 화성인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속성이 되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받고, 행동 양식을 배우고, 규범에 적응하며 인간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을 반복하는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믿는 것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 소설 ‘人間そっくり’는 정말 무서운 의미로 와 닿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라고 자신들이 정의한 것을 닮은 존재일 뿐이라는 역설로 뒤집혀 버린다. 인간이라고 믿었던 근거가 사회적 약속, 기억, 외모, 이름, 가족, 정상성, 언어, 이성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작품 앞에서 그저 인간이라고 믿는 인간의 형식을 반복하고 있는 하나의 인간 판박이에 불과함에 당혹감과 그 불의하게 보이는 진술에 발끈할지도 모른다.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어쩌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인간윤리에 대한 다른 질문일지도 모른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게 되는 이 위대하고 선취적인 논리의 미로를 거닐어보는 것은 당면한 오늘의 세계에 시의적인 독서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인간의 언어라는 그 허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인간이란 범주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인간과 닮은 AI와 인간인 자신이 같지 않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이 선구적 작품을 읽어보시라! 논리의 미로에서 허우적대다보면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의 그 허구를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허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이 위대한 논리게임과 위상학적 주제와 형식 속에서 우리들의 잘 난 인식론은 허물어질 것이다. 타자와 사회라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만 만들어질 뿐인 인간이라는 존재, 그것을 독자적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 증명의 체계로 세워들 보시라, 아베 고보의 인간 증명체계의 해체에 도전하시는 독자는 아마 AI의 도전에서도 승리를 얻어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 가을을 시작하는 멋진 독서가 되어 줄 걸작 중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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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최근 글로벌 AI기업 앤트로픽의 수장인 다리오 아모데이의 인간 이해와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AI의 재귀적 자기개선 기능에 대한 위험 경고는 공포로 가득했다. 기술 자본들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촉발된 가속화된 AI경쟁은 그 어떤 윤리적 물음조차 건너뛰었다. 그가 근심스럽게 외친 향후 10년 내 인류 종말 가능성은 아베 고보가 말하는 인간 증명에 대한 부실함과 불완전성에 기초한 자기 원인에 대한 무지의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류의 실존적 위험 앞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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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ㅣ 제안들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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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로비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칼이 들어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작가와 작품을 직접 연결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희곡이건 소설이건 그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신상과 신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는 1967년 인터뷰 《대화》에서 “나의 모든 이야기와 희곡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인물이 하나씩 있는데, 그 인물을 감독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듯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의 직접의 현신이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는 곰브로비치의 희곡 작품 전체를 수록한 희곡집이다. 표제에 명기된 세 편의 작품 외에 희곡 《오페레타》의 초기 원고로 추정되는 미발표 희곡인 《역사-이야기》와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콘스탄티 옐렌스키(Kostanty A. Jelenski ;1922~1987)의 평설인 〈맨발에서 나체까지〉가 더해져 비톨드 곰브로스키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완결된 작품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해 번역자 정보라의 〈앵무(鸚鵡)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라는 〈오감도〉의 “정립된 의미를 파괴하는” 터무니없는 모더니스트의 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일종의 해설은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콘스탄티 옐렌스키(좌), 비톨드 곰브로비치(우)】


아무튼 몹시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 있으며 병들고 타락한”, 더욱이 유치찬란하며 조롱과 위악이 버무려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하는 쾌감은 콘스탄티와 정보라 두 문인의 덕택이다. 이 야릇하고 기이한 희곡을 해독하느라 진이 빠져 정작 작품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글을 먼저 읽고 각 희곡 작품으로 나가는 것은 큰 도움이 되어준다. 두 글에서 곰브로비치의 기질 등 개인사와 시대의 정황, 그의 작품 전반의 시종일관하는 일련의 연계성, 각 작품마다 드러나는 비톨드의 현현, 나아가 나름의 인물 해석은 분명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희곡들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향 잡이가 된다. 물론 하나의 단서로서, 또는 작품 배경이 되는 시대상과 주제라는 커다란 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밖에 해당 작품을 읽는 이의 인상에 따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의 특성상 다종다양할 것이다. 이를테면 희곡 《결혼식》의 주인공인 프랑스에 주둔하는 폴란드 군인 헨리크는 꿈속에서 자신의 집이 여관으로 변한 것을 본다, 그리곤 어느새 여관은 궁정으로 변모하고 자신은 왕자가 되어 옛 연인 마니아와의 결혼식 거행을 준비한다. 불모성으로 가득한 이 연극에서 헨리크가 주절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대뜸 여느 정치 담론가의 비아냥거리는 영 쓸데없는 목소리의 본질을 들었다. 그 대사는 이렇다. “불쌍한 주정뱅이의 암시는 사실 꽤나 분명해서 그 더럽고 미끈거리는 혓바닥으로 희생자를 낼 수도 있었거든, 하 하 하!”

 

“우리 모두 안감에 어린아이가 꿰매져 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언행들이란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혼란스레 얽힌 한 편의 촌극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모든 상황이 꿈과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에 헨리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고, 자기 꿈속이니까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며, 스스로 다음 줄거리를 만들어갈 자유까지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서 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어진 담론 권력을 휘둘러 아무 말 대잔치로 정치여론을 휘젓고는 책임으로부터는 벗어나 부하뇌동하는 우중을 세력으로 악의를 더해가는 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아버지 왕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결혼식을 강행하려는 행위는 실패함에도 이 환상의 후과는 아주 더럽다. 이미 절친이 헨리크 자신의 협박, 아니 위협에 의해 자살하였으니 그 무책임한 세 치의 혓바닥은 정말 추하다. 이 부조리극을 나는 내 의지에 의하여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오직 나의 이해로 삼았다. 텍스트가 이처럼 독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부조리극의 독특한 맛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톨드와 내 의지가 구상하며 읽어가는 텍스트의 의지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톨드는 1904년 폴란드 동남부 산도미의 부유한 귀족 가문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첫 소설 『페르디두르케(Ferdydurke)』가 발표된 것이 1937년이었으니 서른네 살 늦깎이 데뷔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희곡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발표했다. 이보나는 못생긴 얼굴에다 그녀의 숙모들의 표현에 따르면 “몸이 부어오르고, 곰팡내가 나며, 콧물이 흐르고, 두통”을 달고 다니는,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가씨다. 왕자 필리프는 이렇게 세상에서 소외된 여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 하찮음 때문에 아무렇게 대해도 무관한 존재로 여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자신이 이 여인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혼 대상자라고 선언한다.

 

극은 해프닝과 말도 되지 않는 진행과정들로 꾸역꾸역 이어진다. 사실 대사들은 천박하고 유치하며 종잡을 수 없는, 맥락도 없는 대화들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유치함 속에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진실의 사유들이 빛나고 있음을 제아무리 눈치 없는 독자도 읽어낼 수 있다.

 

왕자: 너희들을 이 비뚤어진 여왕님(이보나)에게, 이 오만한 빈혈증 환자에게 소개하겠다!

이자: 이 무슨 바보짓이에요! 그 아가씨를 놔두세요! 뒷맛이 안 좋아질 것 같다고요.

왕자: 그럼 언제는 뒷맛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보나를 친구들에게 자신의 신부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방자하고 치졸한 대화들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급기야 궁정에서 이보나를 맞이하는 왕과 왕비의 태도는 이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무반응에 쩔쩔매다 상하가 역전되어 알랑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경악하기도 한다. 이보나는 거의 대부분의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쩌다 맥락 없는 짧은 한 마디를 뱉는 둥 마는 둥 한다. 자신의 면전에서 궁정 귀족들의 행태는 무례하고 비이성에 차있으며 미성숙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그녀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의 전편은 오직 왕과 왕족, 궁정귀족들의 비루하고 천박하고 유치하고 추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폭력적인 모습들의 적나라한 해부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역설적? 혹은 반어적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아마 소설 『페르디두르케』의 노골적으로 유치한 인물이 어처구니없는 모험과 부조리한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드러나는 신분, 연륜, 지위를 가진 자들의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이 극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비톨드 곰브로비치는 바로 이 미성숙의 유치함 속에서 인간 본연의 솔직함과 고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순수성을 대비시키려 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미성숙함, 엉뚱함, 유치함이 세상의 가장 깊은 진실에 맞닿아 있음을, 아니 얽혀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저속하고 비열한 인간이며, 동시에 연민과 포용과 온화한 관대함을 지닌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한한 모순 덩어리 자체다. 어떤 직면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결혼식》과 더불어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또한 마치 비현실, 광기, 특이할 정도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존재하고 있다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은 그야말로 인간 세계의 부조리 그 자체의 표상일 것이다.

 

곰브로비치의 모든 극을 읽다보면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독자의 낯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부조화로 일그러지게 한다. 아마 발견하지 않으려해도 상대적 약자를 향해 조롱과 무례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바로 그 업신여긴 위치로 전락해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시종 날카로운 비수를 이들 사회 엘리트라 자부하는 자들의 목을 겨냥한다. 내겐 희곡 《오페레타》가 가히 최고 걸작이다. 이 작품은 정말 예리한 칼날이 도처에서 번뜩인다. 아마 미완성 희곡인 《오페레타》의 초고이지만 이야기의 전개와 등장인물이 다른 《역사-이야기》의 생생한 날 것의 이야기, 즉 작가가 쓰고자하는 희곡에 부여하려 했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기에 이를 통해 선(先)지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 무렵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시대배경이 극 속에 드러나지 않으나 1막 대본에 앞서 희곡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희곡을 연극 대본이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읽히는 텍스트로 썼다. 이후 연극 연출자들의 불평에 따라 점점 무대 대본으로 극 형식의 완결미를 갖춘 듯 하지만, 그의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걸 보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이야기로 읽는 것이 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여기선 가면이 가면을 고문하는구나! 모두들 가면을 벗으시오! 보통의 인간이 되시오!”

 

사실 극 자체만으로도 우스꽝스럽다.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망나니이자 난봉꾼인 히말라이 대공이란 자의 아들 샤름 백작이 아가씨 중의 으뜸인 알베르틴카를 유혹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유혹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물론 이는 무수한 시대적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발단의 한 장면이 중요한 데, 샤름은 알베르틴카를 유혹하는 우연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둑을 자신의 개로 이용한다. 백작의 신분이니 자신이 직접 여인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시종을 시켜 먼저 전갈하는 것도 체통에 맞지 않기에 몰래 도둑을 시켜 그녀가 졸 때 그녀의 소지품을 훔쳐 내고, 그러한 도둑을 자신이 잡아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 도둑은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다가가 그녀의 몸을 한동안 더듬는다. 알베르틴카는 꿈결에 그 손의 감각이 가져온 쾌락을 간직한다.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알베르틴카는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아준 행위보다는 꿈결의 감각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샤름은 그녀를 화려한 패션과 장식으로 치장하여 귀족적 만족감을 더하려하지만, 알베르틴카는 오히려 나체를 꿈꾼다. 이것은 《오페레타》의 초고인 《역사-이야기》 속 ‘맨발’에 가닿는데, 이 헐벗음은 머슴, 하녀, 노동자 등 낮은 사회적 위상으로 꾸밈없는 아름다움이자 무엇이든 가능한 맨(naked) 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높은 사회적 위상인 대공과 그의 처인 공주, 아들 샤름과 귀족 나부랭이 고관대작들의 잔혹함이라는 구세계의 질서와 대립되어 이들의 속물주의와 유치함, 폭력성, 비굴함, 비겁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마 내 기질과 닮은 모습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아마 구세계의 귀족들의 너절함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패션쇼, 아니 가면무도회가 된 히말라이 성이 혁명의 놀음에 의해 폭탄으로 파괴된 이후의 장면은 그야말로 여느 코미디를 능가한다.

 

피오르(패션의 거장): 여기 누구 있소?

대공: 전등입니다.

피오르: 누구?

대공-전등: 전등이요.

피오르: 대공 아닙니까!

대공-전등: 쉬이잇....쉬이잇...., 제발 부탁이니! 조심하세요!

피오르: 웬 바람이 이렇게!

대공-전등: 이건 역사의 바함(바람)입니다.

여기 옆에요, 선생은 못 알아보시나요? 탁자인 척하고 있어요.

피오르: (탁자에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다. 탁자는 사실 네발로 엎드려 화려한 식탁보를 덮고 숨은 공주다) 아!        - 『오페레타』 3막 중에서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기 코 막힌 프랑스어 발음으로 듣기조차 거북한 말을 하는 귀족계급과 상류 계층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치욕적 모습으로 ~인 척 하는 변장으로 숨기에 바쁘다. 비겁한 엘리트에 대한 조소와 그들의 거대한 희화화(戱畵化)된 소극(笑劇)이자 비극(悲劇)이다. 이것은 《역사-이야기》의 맨발로 화신한 비톨드의 목소리와 공명하여 울려 퍼진다.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절대로 내 목소리를 빼앗지 못해요.... 나의 벗은 맨발이 내 입을 동반할 거야.....여기, 아래쪽에서. 내 인성을 드러나게 하고 난 맨발로 말할 거야, 맨발로...., 난 세상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모든 종류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는 속물주의 근성의 귀족들, 구세계 질서는 물론 그 어느 것이든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그릇이 없는 형태들에 대해 신랄한 칼을 갖다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브로비치는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에겐 하나의 질서만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이러한 유치 졸렬함과 유아성과 더불어 고귀한 진실, 순수한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함께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고 괴물 같이 표상된다고.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 쪽에 서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으니, 귀족의 그 우아하고 잔혹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이기를 자처한 이 전간기(戰間期:1919~1939) 모더니즘 거장의 글에 산재한 그 반골기질의 후예로서 경의를 보낸다. 반복되는 대사, 무의미한 소리들의 아우성,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분위기 속의 난데없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는 의미의 뒤섞임 속에서 그저 이야기 자체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독자 고유의 의미들이 새록새록 부여될 것이다. 이것이 부조리극의 참 묘미이다. 아마 곰브로비치의 까탈스럽고 이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한 번 빠지면 그의 전작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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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상은 프린스턴, 뮌헨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제2장, 미래 윤리에 있어서의 「토대와 방법의 문제」의 몇 절을 기초로 필자의 현실 自省의 생각이 더해져 작성된 것입니다. 선과 당위 등 존재론적 물음을 비롯해 도구의 목적성이 지니는 윤리성 등, 사유를 더 이어가시고자 분은 원(原)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스 요나스는 전통적 윤리는 대체로 ‘행위자–행위–피해자’가 가까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데 비해, 생명공학, AI, 유전자 편집, 자율 시스템 등 기술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 존재할지도 모르는 인간의 조건, 심지어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나스가 윤리의 시간적 지평을 미래로 확장했습니다. 즉 미래의 인간을 위해 현재의 행위를 규율할 당위에 대해 윤리적 검토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 윤리에 대한 문명 비판의 성격을 지닌 새로운 선도적 윤리의 길을 개척한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저술이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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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힘이 미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만큼 책임의 범위도 미래로 확장되어야 한다."

 

‘미래 윤리’라는 말은 현재라는 사건에 얽매여있는 오늘의 전통적 윤리로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도덕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기에 출현한 윤리의 이름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기술들의 후과(後果)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기술들과 달리 훨씬 장기간에 걸친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 기술은 인간생명 조건의 변형을 통한 종(種) 자체의 변화, 인간 삶의 의식에 대한 중대한 가치의 변화, 지식 생산과 그 실천적 수행의 기계로의 이전과 의존 등 인간의 본질과 삶의 형태에 대한 근본적 수정 또는 종말을 품고 있다. 이것은 근(近)미래이거나 먼 미래에 이르는 인류에 대한 위협을 가할 기술적 수행이 인류의 본질을 건드리는 근원(根源)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특히 인류 전체에 대한 인간상(像)을 위협할 수 있음에도 단지 상업적 이익과 장밋빛 기술의 낭만적 이점만을 내세우며 거침없이 나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대기술 사업에 대한 우려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덕적, 종말론적 위기로 표현(*4.부기 참조)되어 왔기에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의 외침들은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처럼 개인 자신들과는 동떨어진 머나먼 나라의 일이거나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언어이기에 전혀 어떤 공포도 일으키지 않으니, 제아무리 전지구적 규모의 심각한 위협일지언정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미래 윤리를 주창하면서 첫 번째 명령을 도출하는 가운데 ‘공포의 발견술(Die Heuristik der Angst)’ 이라는 인간본성의 취약점을 건드림으로써 하나의 윤리 명령을 도출해낸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개인의 삶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자신의 현재적 삶의 중요 문제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가의 방편으로 소개하고 싶어진 것이다.

 

1. 공포의 발견술: 도덕관념의 발원(發源)

 

요나스의 진술을 대강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을 인간은 어떻게 떠올렸을까? 아마 인간에게 살인의 능력이 있었으며, 또한 이 행위 능력을 통해 타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살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생명의 신성함은 물론 살인 금지 명령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짓이 없었다면 진실의 가치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부자유가 없었다면 자유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침해사실을 가시화할 수 있어야지만 어떤 윤리 명령, 즉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되고, 이런 일을 자신들이 당하지 않고 보호될 수 있기 위해 윤리개념을 발전시킨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위협이 알려지지 않는 한 무엇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이란 것은 무언가에 대해 경악하는가에서 발원(發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보자. 우리는 질병을 보지 않고서는 건강에 대한 찬가를 읊을 수 없으며, 파렴치한 행위를 보지 않고서는 진실을 찬양하는 데 미숙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서 평화를 찬양하는 것도 심히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자기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직접적 체감의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 한 인간은 위협을 감지하는 데 몹시 서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악(惡,malum)의 인식이 선(善,bonum)의 인식보다 무한히 쉽다. 악의 인식은 더 직접적이며 설득력 있고 의견의 차이에 별로 시달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가식적이지 않다. 반면 선은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며 반성하지 않으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이 비로소 노출되어서야 감지한다. 즉 선에 관해서는 대체로 악의 우회로를 통해 확실성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의 윤리 도덕관념은 희망이나 선보다는 공포와 악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공포의 발견술은 우리가 윤리명령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2. 신중성의 도덕적 명령 : 思惟의 의무로서의 도덕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기술들은 훗날의 결과를 추론을 통해서만 인식해야만 하는 고도의 어려움이 있다. 미래의 발명품을 미리 발명할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적 탐구 불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의 미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기술 행위가 지속된다면 우리와 우리들의 직접적 후손은 물론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칠 효과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명령을 할 수 있을까?

 

현대기술의 대사업은 자연적 발전 과정의 수많은 작은 행보들을 소수의 거대한 행보로 응축시킴으로써 천천히 움직이는 자연의 생명(즉 진화의 긴 여정)을 보장하는 이점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조직에 대한 기술적 침해가 가지는 인과적 속도는 마찬가지로 인과적 규모를 야기한다, 그 침해의 파급속도와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것, 혹은 결정적 파국의 초래일 수 있음에도,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여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의도적 계획으로 대체하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진화적 성공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인간에 대한 기술적 침해의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불안과 위험을 산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대기술들이 선전하는 위대한 목표에 이르는 시간의 축소에 비례하여 완전히 회피불가능하고 더 이상 작지도 않은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오류의 불가피성에 관한한 우리가 자연적 진화의 장기성을 인간적 계획 행위의 상대적 단기성으로 대체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들이 매우 급속하게 인간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론적 행위에 의해 근거리 목표를 가지고 그때그때마다 진행되었던 발전들은 스스로 자율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간의 학문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즉 ‘기술적 발전은 자신의 고유한 강제적 역동성을 띠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자동적 동인(動因)으로 인해 기술적 발전은 비환원적일 뿐 아니라, 자체 추진력을 가지고 행위 하는 사람들의 의욕과 계획을 뛰어넘기도 한다. 한 번 시작된 것은 우리에게 행위 법칙을 빼앗아가고, 시작이 만들어 놓은 완성된 사실은 점증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영속성의 법칙’이 된다. 이것은 근현대 3세기동안 기술 발전의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들이다. 기술적으로 추진되는 발전의 가속화는 자기 수정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에도 수정은 어려워지며, 그럴 수 있는 자유 또한 극도로 작아진다.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생체기술, 로봇기술 등은 오직 산업의 경제적 합리성의 잣대와 산업국가 간의 헤게모니 쟁탈에 매몰되어 기술 정당화의 의무가 면제된 채 자유주의 관점으로 천명된 무책임성이 마치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듯 행위하고 있다. 세상에 전체 인류가 이처럼 산업기술의 무책임성에 동시에 맡겨진 적이 없다. 인류를 이끌어갈 지도적 표본의 규정 없이 대체 그 어떤 권위가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충분성에 칼을 댈 수 있다는 것일까? 대체 누가 인간의 왜곡과 위협과 변형의 권한을 주었는가?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이익의 전망도 희생의 위험도 이러한 행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마치 작금의 기술과 기술자본은 초월적 권능을 가지기라도 했다는 듯 자신들의 기술론적 연금술의 도가니에 인류를 던져 넣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 윤리의 명령을 또 하나 도출해 낼 수 있다. 인간사회가 우선성을 부여하는(작금의 한국 정부의 AI 우선 정책과 같은 것) 최초의 시작들에 주의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하는 것으로써의 의무와 신중성의 의무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사유(思惟) 의무’라는 도덕이다.

 

3. 맺음말: 경험되지 않은 대상의 문제

 

참으로 오늘의 세계에서 그 의미의 힘이 한없이 취약해지고 잊혀져가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의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보존되지 않은 바로 오늘, 이를 구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경험도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상(像)을 문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악을 위해서 우리는 경험된 악 대신에 ‘표상(表象)된 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악과 공포의 침해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즉 체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비로소 윤리 명령의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상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이렇게 표상을 미리 생각하여 제공하는 것을 미래 윤리가 갖는 예비적 의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표상된 악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내 자신을 위협하는 경험된 악과 같은 자발적 의미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즉 대상에 대한 공포는 그 많은 위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듯, 결코 자신의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홉스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도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리 본성에 주어져 있는 자기보존 욕망에 대한 가장 비자의적이고 억압적인 반동으로써 극단적 공포를 유발한다. 자기에게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 공동 생활의 유대로 결합된 다른 어떤 사람과도 상관이 없는 지구의 운명은 차치하고라도, 미래 인간에 관해 표상된 운명은 자체로부터 우리의 심정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향을 표상된 악의 제작을 통해서라도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수용, 후세대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촉발되도록 스스로 준비하는 태도가 미래 윤리이다. 우리는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도덕적 창발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이 미래에도 과연 존재 당위의 권한이 있는가? 현재가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라는 장기에 발생할 후과에 대해 책임을 왜 가지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도박에 걸어도 되는가? 나는 타인의 이해관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권한을 대체 어디서 획득했는가? 인간의 실존이 내기의 담보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인류가 실존해야할 무조건적 의무라는 것이 과연 존립 가능한 윤리명령인가? 이러한 논증들을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의 순간에 구원의 예측이라는 낙관적 기대보다는 불행의 예측을 더욱 중시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현재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윤리원칙만으로는 이미 접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내포하고 있는 기술들의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세력이 현재에서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지금의 기술 행위들은 그 대상과 규모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며, 그것은 모든 직접적 의도와 무관한 결과에 따르며 전혀 중립적이지도 않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로부터 ‘윤리적 진공 상태’에 이른 지금의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가 던지는 물음들에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윤리 명령을 구할 필요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오늘날 소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확대하고 사용을 강제 받고 있는 극단적 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윤리가 없다. 인간을 가장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이러한 힘들에 대해 규율할 수 있는 윤리를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작 장기적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위로만을 쓰다듬으며 책임을 방기하는 가장 악질의 인간들이 살던 시대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종류의 행위 능력을 가진 작금의 기술들은 윤리의 새로운 규칙을 요구한다. 그 새로운 미래 윤리에 대한 사유가 반세기 전에 한 위대한 철학자에 의해 검토되었음에 위안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에 대한 논의가 미약하다.

 

4. 부기(附記) - 더 읽어 볼 현대 기술의 미래 윤리를 체계화한 글들

 

요나스는 현대 기술들은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비해,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Superintelligence: paths, dangers, strategies』 (2014년)에서 인류의 실존적 위험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인류문명의 장기적 잠재력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히 인류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확률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라는 최고명령을 위한 윤리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반면 인간을 더 이상 생물학적 개체로 보지 않고 정보적 존재로 보는 루치아노 플로리디(Luciano Floridi)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The Ethics of Biomedical Big Data』에서 인간을 계산 가능한 정보 객체로 본다. 이러한 인물에게는 윤리라는 것이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을 평균적인 통계적, 집단적 형상으로 환원해서 기계적 존재로 변질시킨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도 『역량의 창조(Creating Capabilities: The Human Development Approach)』 (2013년)에서 ‘미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해야 한다.’며 인간의 실존을 중시하지만 요나스와는 달리 단순 생존이 아니라 신체의 온전성, 사고와 상상, 자율적 선택, 정치적 참여와 같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중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미래 윤리는 안전성만이 아니라 ‘인간 능력 보존의 문제’를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결국 인간을 능력면에서 존속을 말하는 것과 인간 생명체 자체의 실존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무튼 이 철학자는 모호한 경계선을 주행한다. 그런데 요나스의 장기주의적 윤리를 더욱 밀고나가서 극단적 장기주의 윤리를 내세우는 일군의 학자들도 있는데, 요나스의 책임의 윤리와 다르게 이들은 현재의 몇 십만 명의 희생보다 미래의 수십 억 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극단성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희생시키는 괴이한 윤리이다. 즉 기술 종속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기술 성공주의의 역설적 윤리파괴를 잠재한 위험한 윤리로 보인다. 따라서 맥어스킬이나 보스트롬 같은 장기주의자들과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엄격히 다른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미래 기술과 관련한 윤리 담론이 형성조차 되지못하고 있기에 문제 제기 차원에서 짧은 단상을 해보았다. 아무쪼록 우리에게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단기적 현실과제에 매몰되는 우리들의 실용주의적 정치체(政治体)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많이 늦었지만 윤리학자, 철학자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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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9-01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요나스 저 책 읽었는데, 하두 오래돼서 하나두 기억이 안납니다...ㅜㅜ
저런 내용이었나?? 라는 완전 새로움...^^;;

비의식 2026-09-01 20:14   좋아요 0 | URL
97년도에 처음 국내 번역되었으니, 그때 읽으셨다면 30년이 다 되었으니 기억에서 흐려지는 것이 당연할거예요. 더구나 H.요나스가 인간 본질을 위협하는 현대기술을 이야기 할 때 AI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였으니, 우리들에게 그 어떤 직접적 위험을 상상하기 쉽지 않았으니 현실적 문제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요나스는 인간의 실존 타당성을 깊숙이 다루고 있는데요, 이를 위한 도덕적 명령의 타당성에 대한 깊숙한 철학 고찰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시 책을 펼치시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법 선선한 날씨가 되어 책 읽기 좋은 시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 여름의 더위에 몹시 취약해서 고전했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시간되십시요~, yamoo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