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이 몰고 온 오늘의 사회는 노동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들끓고 있습니다. 정의(Justice)를 세계적 화두로 사람들을 감화시켰던 마이클 샌델교수가 바로 이러한 불공정성의 심화를 야기하는 그 연원이 짧음에도 급속하게 신화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능력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주제로 새 책 The Tyranny of Merit를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말로 의역한다면 '능력주의의 오만' 또는 '능력의 폭정'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네요.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우리의 좋은 성적과 학위는 모두 우리 자신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괜찮습니까?" 내 능력으로 성공했으니 그 과실을 독점적으로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출발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죠.

 

기회가 진정 동등하게 주어졌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나아가 이렇게 해서 기득권을 차지한 엘리트 계층이 능력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압제한다는 것이죠. 대중이 이에 혐오와 불공정함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어두운 측면인 불평등성을 폐기하지 않으면 포퓰리스트(populist)가 엘리트 계층에 전복적 시선을 지니는 것은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죠.

 




승자와 패배자를 다루는 이 능력주의라는 신화에는 불평등을 기초로 하는 교활함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가난으로 연결되고, 부자는 부자로 연결되는 사회 구조를 이루는 토대 환경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불평등성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 전투'에 덜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대학 학위(,박사 등), 성공의 정의, 일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특히 일(직업)에 대한 오늘의 가치 인식은 '벌어들이는 돈', '계급적 지위'가 아니라 "공동선에 대한 기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쓰레기를 수거하는 미화(청소)원이 의사만큼 중요한 사회적, 공공 기여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일하지 않으면 질병 통제는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데 서로 얼마나 깊이 서로 지지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 답변이 될 것입니다. 택배, 창고 노동, 간호보조, 홈케어 ..., 아마 이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검찰청의 정치 검사들보다 공공선에 훨씬 중요한 기여자들임을 부인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가치 인식을 공공선의 기여로 조정하면 지급되어야 할 돈(임금,수익 등), 직업 인식, 성공의 조건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내가 잘해서 이룬 것이라는 착각은 패배자들에 경멸을 보내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실패는 네 잘못이라는 오만함을 양산하는 능력주의는 이러한 가치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 도덕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죠. 뉴노멀의 시대, *사회적 계층의 이동성에 대한 신뢰를 포함하여 정의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공하는 저술이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 계층의 이동성: 샌델은 하위1/5의 계층 사람이 상위 1/5계층으로 이동하는 비율은 1.5~2%내외의 비율이라 지적하면서 능력주의는 허구이며, 수많은 불평등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고 비판적 사유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참조】능력주의(Meritocracy)'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마이클 영'의 저서 , The Rise of the Meritocracy(능력주의의 부상)은 마이클 샌델의 새 책을 읽는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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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가족특강 시리즈 2
이희경 지음 / 북튜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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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족 특강'시리즈 두 번째 권으로 기생충과 가족안티 오이디푸스와 가족에 이은 세 번째 읽기이다자본주의의 동력축으로 근대 이후 독특한 구조로 탄생한 핵가족(엄마-아버지-아이)이 '물적 토대'의 붕괴에 따라 해체분열되며 야기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 그 대안의 모색이라 하겠다저자는 '루쉰'의 소설 광인 일기를 비롯해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한국어 번역판 제목)영화감독 김기영의 작품 하녀육체의 약속등을 통해 근대 이전의 가족 형태와 오늘의 핵가족의 차이를 설명하며나아가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가족주의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가 오마주 했다는 김기영의 하녀는 그야말로 원만한 가족행복한 가족이라는 판타지는 타자의 배제와 낭자한 피 위에 들어선 잔혹한 동화라고 말하고 있다핵가족 탄생과 관련된 이젠 고루해진 사설은 이쯤에서 그쳐야겠다문제는 21세기 오늘우리네 사회가 이러한 핵가족이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아마 1997년 외환위기로 해체가 시작된 이래 핵가족을 토대로 한 물적 기반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까닭일 것이다.

 

경제적 기초 단위로 작동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소위 '정서적 연대'라는 핵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은 쉽게 허물어져 내린다. OECD 통계는 이혼율 1위 국가에 한국을 올리고, 1인 가족과 2인 가족의 증가와 같은 가족 형태와 주거 형태의 변화는 물론, "모성의 변화뿐 아니라 부부관계낭만적 연애에 기초한 내밀한 사랑이라는 신화도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페미니스트들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문제는 가부장제야!, 남자들이 문제야! "기존 가족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지체된 사회적 담론은 퇴행적 진단으로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기만 한다.

  

물론 이 같은 가족 형태의 붕괴가 반드시 결핍의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그리고 관계의 독점과 배타적 이기주의와 같은 핵가족의 속성마저 바로 해체시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부양하는 남성아이를 양육하는 여성정서적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라는 아이"라는 삼각형 구도를 깨뜨리는 근인(根因)으로서 자본주의체제가 요구하는 물적 소비와의 균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루쉰의 Q정전 '정신승리법'을 삶의 신조로 하는 아Q란 인물이 마침내 이 좌우명삶의 습속을 의심하는 "성욕과 식욕 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좌절"되는 순간을 겪는 장면은 '연애의 비극', '생계의 비극'이 어디에 토대를 둔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인간 세계의 모든 습관체제의 성립은 물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이다이 토대의 붕괴가 몰고 온 오늘의 가족주의 해체 현상은 어린아이는 물론 노인에 대한 돌봄 노동의 상실에 더해 급진적 기술사회로의 진입이 야기하는 유휴노동력의 양산초고령화 사회화로 인한 비용의 증가 등 사회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세계새롭게 요구되는 가치로의 '이행'을 위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저자 이희경은 지적한다즉 변화된 질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담론 지체로 인한 윤리적 공백의 발생이라는 것이다그나마 정서적경제적 안식처였던 핵가족의 붕괴는 폭행과 학대는 물론 버려지는 아이들방치되어 고독사로 발견된 노인들의 양산이라는 돌봄 노동 상실의 결과를 난폭하게 드러내고 있다그렇다고 자기 파멸성을 내재한 핵가족으로 다시금 회귀하여야 하는 것인가아니면 여전히 대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해체되는 가족주의를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항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마주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향수를 되살려내려 한다아마 근래의 레트로 열풍, 1970년대 디스코를 소환하여 추억의 향기에 취하게 한 최근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이나,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복고적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 위기와 돌봄 위기를 다시 가족 안으로 쑤셔 넣는"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는 시간 역행적 질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근대 가족주의가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시계를 뒤로 돌릴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경우즉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개인적사회적 대안도 없이 가족의 해체를 수용한다는 것은 버려지는 아이혐오의 대상으로서 노인에로스를 대체한 성폭력 ..., 한마디로 "공망의 세상이 될거"라 예견한다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적 퇴행이 아닌 문명적 형태의 질서정연한 연착륙은 무엇일까결국은 우리가 배척하도록경쟁의 대상자로서밟아 뭉개버릴 대상으로 배운 타자와의 관계 회복새로운 관계망의 형성이 구축해야 할 새 질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동성결혼소울 메이트다자간 사랑(폴리 아모리)을 전제한 집단결혼과 공동 양육 및 재산공유체제인 일종의 집단가족제로서 '폴리 피텔리티등을 제시하고 있지만과연 이것이 가족을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로 정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다만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공생적 관계의 회복은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연습"해야 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덕목일 것이다삐걱거리는 자본주의와 동행하던 가족주의의 붕괴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을 지금 종용하고 있다그럼에도 여전히 유대와 연대의 세계라는 그 구체적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는 내가 남는다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진정 고집스레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어쩌면 작은 관계들의 형성부터 시작하라는 저자의 조언이 변화의 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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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 1947년 오리지널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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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대기에서 그려지는 기이한 사건들은 (...) 사실 오랑이 평범하다는 게 

첫 인상인 도시요, (...) 꼭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도시나 그 안에서 사는 삶의 

모습이 시시하리만치 평범하다는 사실뿐이다."

- 본문 9, 12쪽 변형 발췌

 

한 도시의 소개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첫 다섯 쪽은 지루한 설명과는 달리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특별한 장소나 사람들에게 발생한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사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곳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하려는 서술자의 의지 때문이다. 더구나 증언과 서류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기술로서의 '연대기'임을 천명하는 것도 이 소설을 다분히 사실로서, 현실적 체감의 읽기를 기대한다는 작가의 어떤 의도를 느끼게 한다. 서술자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빠져나가려 들지 말라, 이것은 모든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성을 띤 기술이라는 것이다.

 

의사 '리외'가 계단 중간에서 물컹한 죽은 쥐를 밟고 별 생각없이 계단을 내려온 이후 페스트의 질병적 징후와 확산 가능성의 인식이 시작되는, 보건 전문가, 행정 관청은 물론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는 전언은 물론,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에 우선을 두", "자신들의 일상적인 습관을 방해 받고 이해관계에 영향 받는 것에만 예민했"으며, "첫 반응은 언론과 한 목소리로 행정당국을 비난하는 것"이었다는 서술은 여전히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오늘의 우리네를 생각케 한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지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제 생각에만 파묻혀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한다."

-본문 52쪽에서

 

코로나19로 세계가 신음하는 가운데, 감염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매일 발표되고 있다. 이 숫자를 구체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아마 당사자와 이들의 가족 등 관계자, 그리고 이를 감당해야하는 의료진들 정도가 아닐까? 정말 이 숫자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어서 그저 "상상속에 피어나는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하다."는 서술자의 표현을 부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의사 리외가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 사이의 지긋지긋한 투쟁"이라 한것은 이러한 인류적 재난에 씌워진 추상성, 즉 현실과 괴리된 이 추상을 공략하는 것이 바로 과제라는 자각임을 알려준다. 대개 자신만은 이 죽음의 전염병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타인의 상황으로, 좀처럼 자신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추상이 구체성을 띨 때,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 양식, 삶을 대하는 인간 개개인의 태도를 발견케 된다.

 

재앙이, 페스트라는 억압과 절망의 공포가 '''내 가족'을 덮칠 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삶의 한계라는 그 간극의 좌절을 깨닫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절규하기 시작한다. 부당하고, 부조리하다고. 그럼에도 이 엄습한 불행의 인식, 재앙의 실체를 바로 자신, 인간 모두의 문제임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이타적인 인간들의 행동이 시작되고 이것이 자신들의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고서야 비롯됨을 보여준다. 코로나19 초기, 대구지역의 확진자가 급증할 때 자원봉사 의료를 위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마 우리도 이때쯤 해서 어렴풋이나마 바이러스를 자신의 안위와 연결짓기 시작했을 터이다.

 

"보건 위생대 덕분에 우리 시민들은 이 병과 싸워 물리치는 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을 납득했다.페스트가 몇몇 사람의 의무가 되자, 페스트의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다."

- 본문 168쪽에서

 

도시의 폐쇄와 격리, 무차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고통의 현장이 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은 용기와 의지와 인내를 상실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을 미래로 재촉하고 싶은 비이성적 갈망" 조차 사그러진 채, 꿈꾸는 것, 미래의 도래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제 발밑만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점, 비합리적, 비이성적인 재앙을 내재한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그 한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죽음이라는 절망적 삶의 유한성, 삶이란 희망이라는 미래 없는 공허함이며 끝없는 패배의 연속일 뿐이라고 현실을 외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해독이 불가능하고 한계가 정해져 있는 이 세계,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의미를 획득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에서

 

재앙적 사건인 페스트는 다의적 언어로 여겨진다. 비인간적인 것, 원초적인 적의로 인간을 공포와 무기력, 절망에 몰아넣는 무 논리의 해독 불가능한 세계로써. 삶의 의미를 삭제하는 이 불모성 속에서 삶을 버텨내고, 이 무의미에서 조차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는 삶을 어떻게 수행해낼 수 있는 가의 물음일 것이다.

 

페스트의 재앙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시작한다. 폐쇄된 도시 오랑으로부터 연인과의 재회를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 혼자 죄수가 되느니 차라리 다른 모든 이와 함께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는 재앙의 시간이 영속되기를 기대하는 '코타르', 주변의 고통에는 무심한 채 가족의 안위에 여념 없는 판사 '오통' 등 일상적 이기심에 침잠하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서술자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겸손함을 잊고, 자기들은 여전히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남들보다 더 잘못된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이것이 불모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의 태도가 될 수 없음은 페스트라는 무차별성과 비이성 때문이다.

 

한편 이들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보건위생대를 조직하고 역병의 그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불합리에 저항하는 '타루', 하느님의 재앙이라며 "정의로운 이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고통의 암흑 바닥에 놓여있는 영생의 황홀한 미광"을 역설하는 신부 '파늘루', 내세의 영광이라는 알 수 없는 진리의 말 이전에 현실의 고통을 보살피는 것, 재앙을 회피하거나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의사로서 자기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리외'가 있다.

 

"그 작은 얼굴에서 서서히 입술이 벌어지더니 긴 비명이 흘러나왔다. (...)

아이가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전 인류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항변 같았다."

- 본문 271쪽에서

 

서술자, 아니 리외는 이 세계의 불모성, 인간과 불화하는 운명의 부조리함에 반항한다. 부조리를 자기 삶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삶의 인식의 최선봉에 내세우고 투쟁하는 인간, 모든 초자연적 위안을 집요하게 부정하며 메마르고 자신만만한 명철함 속에서 의사로서의 자기 수행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인간을 발견케 한다.

 

리외는 구원에 호소하는 것, 영원에 대한 향수보다 자신의 용기와 이성을 선호한다. 아마 인간을 부추기는 희망이라는 수단의 거짓됨, 인간인 자신이 가진 것의 한계를 아는 인물이기에, 추상과 그 공허함과 싸우려는 인간으로서 생명, 그 육체성을 지켜내는 구체성이 그의 삶을 정의한다. 오통의 죽어가는 어린 아이와 함께하는 리외의 위 문장은 부조리를 떠안은 인간의 엄숙함, 실천 행위의 숭고함이 절로 마음 깊이 스며들어 온다. 죽음, 이 끔찍한 최악의 부조리에 대한 아이의 긴 비명, 그 항변에 괜스레 눈물이 흘러내린다.

 

우리는 인간의 이해 바깥에 있는, 패배 할 수밖에 없는 이 숙명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서술자는 파늘루와 타루와 리외를 통해서 삶의 부조리를 자기 삶의 조건으로 인식한 인간이 어느 순간까지 이 부조리의 논리를 삶의 태도로 지닐 수 있는가를 다시금 묻는다. 부조리의 인식이란 삶의 유한함, 그 허무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 육체의 시간에 저항하는 육체라는 모순이 놓여있다. 페스트가 신의 징벌이라고 외치는 파늘루 앞에서 악의 오염이 개입할 여지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은 영혼의 정화와 병 걸린 육체의 비논리를 생성한다. 파늘루는 이 부조리에 직면하여 부조리의 논리를 자신의 죽음까지 몰고 감으로써 이 처절한 모순인 신에 저항하는 것 같다. 치료를 거부한 채 페스트로 죽어가며 자신의 믿음에 순응함으로써.

 

이와 달리 '타루'는 그야말로 카뮈가 그의 에세이에 쓴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인다. 리외에게 자신의 과거와 삶의 이해를 말하는 부분은 부조리의 추론속 문장 "부조리는 인간의 가장 극한의 긴장이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유지하는 긴장이다." 를 떠오르게 한다. 방심하지 않는 인간, 긴장의 끈을 놓치 않는 의지, 한 순간도 부조리, 즉 페스트를 지니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는 인간.

 

"이런 상태를 끝내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이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을 극도의 피로를 자진해서 겪는 것입니다."

- 본문 318쪽에서

 

그는 환상 없는 삶을 살아가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 그는 "이 세계에 내 자리는 없다는 걸"알고 있으며, "스스로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추방형"에 처했기에, 그의 삶은 모순으로 찢어졌고, 삶의 현실은 아무런 색채를 지니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리외의 그것과 결별한다. 타루가 리외에게 말하듯이 그는 리외보다 야심이 덜하다. 리외는 부조리와 함께 숨쉬며, 부조리가 가르쳐 주는 바들을 인정하며, 그 교훈의 살아 숨 쉬는 육신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리외는 부조리의 인간, 삶의 완벽한 모델의 전형, 카뮈가 지향했던 반항, 열정, 자유를 삶에 그대로 투영하여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에 맞서 싸우는 지성, 최고의 풍경이 된다.

 

리외는 인간에게 속한 것만을 바라는 사람이며, 평화는 희망을 전제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희망, 미래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이 부조리, 관념 덩어리는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는 파늘루의 신이나 영속으로의 추락도 아니요, 타루의 관념적 허상이 아니라 인간 삶의 구체적 예증들이며 그 인간적 숨결을 추구한다.

 

"이 연대기는 (...) 모든 이들이 공포에 맞섰던 기록이자,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공포의 가차 없는 맹습에 맞서서 확실히 수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 본문 390쪽에서

 

연대기를 마치며 서술자가 리외 자신임을 밝히며 기록의 성격을 표명하는 이 문장에서 인간, 자기 힘의 근본으로서 필요한 열의와 집중력과 통찰력을 읽게 되며, 강고한 인간적 확신, 모순 속에서 자기 믿음을 묵묵히 실천하는 단단하고 확고한 인간 존재의 위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어떤 형이상학도, 꿈의 미래와 같은 희망도 거부함으로써 완전한 현실의 자유 속에서 사고하며 행동하는 이 인간적 열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페스트가 도시를 물러나고 폐쇄의 해제를 맞이한 후 이별의 해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가끔씩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리외는 이 연대기의 작성이 사람간의 유대와 애정이라는 찬미해야 할 인간의 덕목을 또한 헤아리게 한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숭고함이 절로 읽히는 작품이다.

 

지금 우리네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은 많은 이들을 고통과 힘겨움에 내몰고 있다. 주어진 한계, 이 현실 속에서 삶의 명백한 가치를 깨닫는 데 이보다 맞춤의 글은 없을 듯하다.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위해 쥐들을 흔들어 깨운 카뮈의 정신에 새삼 겸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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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사 3 - 부상신편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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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의 배경인 일본 역사의 고대 시대와 중세를 잇는 헤이안(平安)시대(AD 8~12C)는 음악이나 시가 등 예술문화에 대한 지각이 솟아오르던 시기였던 모양이다. 작품은 당대의 실재했던 역사 속 인물, '음양사'를 되살려 미스터리한 에피소드로 각색된 이야기로 이해된다.

 

중심인물인 음양사 '세이메이'는 주술사이자 퇴마사이며 점성가이기도 한 딱히 범주화할 수 없는, 인간계 속의 삶과 죽음의 속성을 헤아리고 있는자라는 느낌이다. 이 인물과 사건 현장을 함께하는 마치 홈즈의 파트너인 왓슨을 상기케하는 고위관료이자 피리부는 가인이기도 한 '히로마사'는 인간냄새를 물씬 풍기며 세이메이의 신비를 현실적인 이해의 세계, 친근한 감각으로 이끈다.

 

이 책에는 7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지만, 매 한 편의 에피소드는 그 속에 많은 일화들과 헤이안 시대의 다채로운 역사적 풍경을 담아내고 있어 의외로 풍성한 읽기를 선사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첫 편인 참외 선인또한 천황의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읍을 휘젓는 괴이한 소문과 눈 앞에서 펼쳐지는 마술적 광경에 더해 귀신인지 신선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방사(方士)의 등장, 요물과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알쏭달쏭한 인간 마음의 세계를 종횡 휘젓는다. 그리곤 보이는 것, 감각하는 것을 실재화하는 것은 과연 인간 마음의 결정에 달린 것인지를 곰곰 생각케 유인하는 듯하다.

 



사실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사고가 지배적인 오늘에 귀신, 혼령, 접신, 기우제 등 인간의 이해가 가닿지 않는 설명 불가능한 것들에 인간 정신이 여전히 어떤 향수를 느낀다는 것은 실로 조화롭지 않은 어떤 모순된 감정을 갖게한다. 여기에 현대적 해석을 붙인다면 신경증, 강박증,분열증과 같은 정신의학적 병인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음양사 세이메이가 히로마사와 기괴한 사건들의 현장으로 우마차로 도착하여 해당 사건들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 마치 정신분석가의 그것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애증과 시기, 그리고 명예, 지위, 재산 등을 향한 절제되지 못하는 욕구에 도사린 몽매성을 깨닫도록, 그 지옥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행위가 곧 음양사의 역할인 것처럼 여겨지는 탓이다.

 

냄비 따위를 올려놓는 둥근 삼발 모양의 쇠 받침대를 일컫는 쇠고리라는 에피소드나 헤매는 혼령은 공히 사랑하는 님을 잊지 못해 애끓는 여인의 불가능한 욕망의 이야기이다. 죽은 자를 이생에 다시금 불러 들여 해후하고 싶을 정도의 욕망,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운 마음은 커져만 갈뿐 사그러지지 않는다. 이때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귀신을 낳는다. "귀신은 사람이 낳는다. (...) 귀신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일 것이다."라는 세이메이의 말은 환각에 대한 하나의 진단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정하게 바둑 두는 모습이 비친 장지에 어린 그림자에서 뱀의 모습을 보는 남자의 마음은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의혹의 반영임이 드러나는 것처럼 본인조차 알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 그 심연을 상상케 한다.

 

어쩌면 이 작품집의 의도였는지도 모를 돋보이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에피소드 사랑을 하느냐고는 헤이안 시대의 황금기라 할 시가(和歌;와카)와 예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내리(천황의 궁전)에서 하는 노래시합의 조직, 경연의 구성, 그 과정과 승자의 결정에 이르는 장황한 묘사가 그것인데, 당대 일본의 문화적 영광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아마 그네들에게는 중요한 문화적 중요성을 띤 역사적 문헌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러한 작가적 의지의 산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단편은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향한 툇마루에 앉아 "밤의 어둠 속에 핀 겹벚꽃, 황매화, 등나무의 향기가 짙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내음을 음미하고 있는 두 남자의 그지없이 평온한 정경과 함께, 실은 보이지 않는 이 존재(향기), 그 생명성에 대한 사유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고, 경연대회의 마지막 와카의 노랫말은 사랑하는 이의 수줍은 소박함으로 사자(死者)의 혼령과 주술을 떠나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케 하는 여운까지 품고 있다.

 

사랑을 하고 있다는 내 소문이 세상에 퍼져 버렸구나

이제 막 남들 모르게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음에도

살며시 숨어들더니 어느새 얼굴에 나타난 내 연심에

사랑을 하느냐고 사람들이 묻는구나

- 228쪽에서

 

한편 엎드린 무녀 피를 빠는 시녀라는 두 에피소드는 시기와 자기 과시라는 속된 욕망의 적나라한 드러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우가 앞선 출세를 하게 되자 참외의 외관을 한 주물(呪物)에 엮인 그 추한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러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마음의 실체를 깨우치게 하는 음양사 세이메이와 히로마사의 두터운 우정의 대화는 생의 의미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선사한다. 히로마사는 귀신과 원한을 상대하는 친구 세이메이에게 말한다. 자네는 "이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는 답변한다. "그렇지 않아. 자네가 있지 않은가." 생명을, 존재를, 그 고독함을, 고통에 대해 대화하며 의미를 나눌 수 있는 두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부러운지...

 

그런데 인간이라는 고통과 고독한 존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이메이와는 사뭇 다른 라이벌격인 음양사 '도만'의 행위는 생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안겨준다. 그는 "인간 세상에 관여하는 것은 어차피 여흥일세. (...) 죽을 때까지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 오직 그뿐일세. 아니, 요즘은 그것조차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어쩌면 악의 화신인 듯한 도만이 바라보는 삶이란 집착,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닌 유쾌한, 집요함을 덜어낸 삶, 관조의 여유로운 즐거움으로서의 삶. 요괴니, 귀신이니, 흡혈이니 하는 이 모든 인간 발명의 존재들이란 결국 인간 정신의 변형된 모습 아니겠는가? 나름 고대의 문헌과 전통의 산물을 끌어내 인간 정신의 틈새를 조명한 설화적인 이 소설집은 소재의 가벼움 속에 진지한 삶의 물음들을 지니고 예기치 않은 이야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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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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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친 상태로 태어나 양심을 발전시키고, 불행해진다. 그러고는 죽는다."

- Adam Philips, Going Sane에서

 


아담 필립스의 이 문장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본질은 미친 상태, 곧 광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양심, 윤리라는 것, 광기의 억압을 습득함으로써 획득한 것 때문에 불행과 고통으로 살다 죽을 뿐이라고 한다. 인간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이 의문은 내게 광기라는 단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한다. 은폐된 진실의 상징어 같기도 하고, 이를 이겨낸 자들의 기만책략 같기도 하고, 어떤 교만한 지성을 느끼게 된다.

 

죽음이 합리적인가? 사랑은 이성적인가? 결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세계를 질서정연한 체계라고, 마치 모두 아는 것처럼 기만하는 데서 인간의 고통은 시작되는 것만 같다.  현실은 비합리적인 것들이 무수히 일어나 인간을 구석구석 에워싸는, 세계는 그 자체로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내게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읽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이 세계의 불합리함, 죽음이라는 그 절망적 허망과 분노에 맞서 삶의 어떤 명확함을 찾아 헤매는 열망간의 대결, 인간 가장 깊은 내면에 울려 퍼지고 있는 이 불가능한 열망의 호소로서.

 

작품 엘 솔리타리오(El solitario)는 세계와 인간 개인 사이의 이러한 균열과 충돌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못을 박듯이 수직으로 핀을 아내의 심장 속으로 끝까지 힘 있게 찔러 넣었다. (...) 그녀의 살갗에 오롯이 남은 다이아몬드가 신경 경련으로 인해 한동안 불규칙하게 떨렸다."

- 56, 엘 솔리타리오(El solitario)중에서

 

섬세한 보석 가공으로 신뢰를 받는, 그러나 사업 추진력은 부족한 남자 '카심'과 미모를 무기 삼아 상류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현실에 굴복한 여자인 아내 '마리아'와의 엇갈린 행복이 빚어내는 비극을 보여준다. 위탁 받은 고가의 커다란 외 알 다이아몬드는 마리아의 소유 욕망을 부추기고 두 사람은 깊은 갈등에 빠진다.

 

남자는 잠자는 아내의 가슴 깊이 다이아몬드를 밀어 넣는다. 결코 끝나지 않을 욕망, 그 물질의 욕구를 영원히 잠재운다. 남자는 인간 삶의 한계, 죽음의 평화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을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핍된 욕망의 화신에게 죽음이라는 잔혹한 운명적 진실을 선사한다. 아찔한 현기증이 나는 이 행위가 결코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지 않을까? 카심의 살해 행위보다 마리아의 번뜩이는 눈 속에서 빛나는 그 갈망, 나는 이 광기가 더 공포로 다가온다.

 

단어 광기에서 의심을 불러내기에는 키로가가 삭제했던 세 편의 단편 중 그 마지막 작품인 광견병에 걸린 개가 제격인 듯싶다.

 

", 또 시작되었다! 저들은 내가 정말 광견병에 걸리기를 바라기라도 하는지 (...)

정말이지 이건 사는 게 아니다!" - 316, 광견병에 걸린 개중에서

 

마을을 휩쓸던 광견병에 걸린 개들의 울부짖음, 마침내 집에 들어 온 미친개를 몰아내다 다리에 물린 남자의 시간 경과에 따른 아내와 어머니의 반응, 그리고 그 반응에 반발하며 미쳐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광기에는 정치적 도덕률인 정신건강이 만들어 낸 재앙, 그 인위적 습관의 세계가 발하는 분리, 죽음의 음습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온다. 그리곤 가족, 세계와 맺은 관계의 약속이 허물어 질 때 남자가 절망하며 부르짖는다. 독사들과 거미가 우글거리는 낯선 세계의 두려움. 그가 총을 난사하는 것은 어쩌면 납득할 수 없는 비이성, 불합리의 화해 불가능한 세계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수록된 소설들은 이처럼 인간의 빈번하게 제어되지 않는 충동에 자신의 의지를 부여하는 비인간화, 개인적 절망과 가족적 비극으로 이끄는 집착을 통해 세계와 인간 영혼의 끝나지 않는 갈등, 그 불화의 실체를 탐사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광기의 진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 욕망, 그 물질적 정신세계를 거닐고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끊임없이 존재적 결핍의 허기로 내몰리는 환상으로서 욕망의 세계 말이다.

 

아직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애송이로군요. (...)

그 많은 재산이 어디에서 났는지 (...) 손님들 주머니에서 훔쳐간 주제에...”

-25, 사랑의 계절중에서

 

이를테면 소설집의 첫 번째 작품인 사육제 축제 장면으로 시작되는 사랑의 계절"삶에서 순수한 추억보다 아름답고, 우리를 단단하게 단련시켜 주는 것은 없다." 는 도스토엡스키의 인용 문장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어린 두 연인 '네벨''리디아'의 끓는 듯한, 애달픈 사랑은 어른들, 이미 부와 신분 등 욕망의 질서에 편입된 이들의 방해로 중지된다. 열네 살과 열여덟 살 소녀 소년의 사랑이라는 광기의 첫 대면이 이렇게 지나가지만 이것을 곧 좌절, 결핍의 욕망으로 변질시켜버린다. 진실의 실패, 광기, 그 열정을 잃어버린 세계는 그야말로 삭막함 아니겠는가? 만 페소짜리 수표를 여자의 손에 쥐며 "날 너무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라고 이별을 외치는 장면은 정말 씁쓸함의 결정판이다.

 

이졸데의 죽음」 또한 합리주의의 가면을 쓴 자본주의적 가치가 내재화된 인간의 사랑의 열정, 광기에 대한 추억담으로 다가온다.  "당신도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는 서막을 봤을 거예요.", 이 반복의 사슬, 여기에 얽매이는 순간 살아있음은 곧 죽음 아닌가? 사랑, 그 광포한 생산에의 열망이 물적 교환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순간 결핍의 욕망으로 추락하고 만다. 키로가는 이렇게 어둠에 잠긴 욕망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삶의 가능성,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이란 작품 역시 연장선에서 읽게 된다. 백인이 틀어 놓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선율에 매혹된 원주민 '칸디유' 강으로 떠내려 오는 자단(紫檀)목을 건져 올려 축음기와 교환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혼신의 힘을 다해 쉴 새 없이 노를 저으면서 소리 없는 투쟁을 시작한다. (...)

그의 머릿속은 온통 축음기 생각뿐이었다."

- 198,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중에서

 

백인에 의해 교환의 세계, 자본주의적 믿음이 이미 내면화 된 인물은 그 소유의 욕망에 생명을 건, 죽음의 항전에 나서는 것인데, 이 욕망의 광기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천연 꿀 "평범한 삶에 좋은 추억거리를 남기고 싶어" 삼촌의 벌목장이 있는 정글을 찾는 공인회계사 '베닌카사'가 벌집을 발견하곤 게걸스레 꿀을 마시고, 멘수들(Los mensu)의 계약직 벌목 노동자 '카예''포델레이'의 술과 여자와 향수를 자신들의 자유의 갈망과 교환하곤 처참한 중노동의 현장, 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자발적인 복종이라는 자본 순환 고리에 순응한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광기는 억압하고 억제해서 획득한 것, 결핍의 욕망, 그 오만한 규율이 덧씌운 것 바로 그 자체라고.

 

아마 이 모든 문제의식이 집대성된, 이 소설집의 제목인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종합 세트는 목이 잘리고 선홍색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목 잘린 닭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불행이 닥치자 고통스러운 사랑의 불길이 새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결한

사랑의 결실을 단 번에 되찾고 싶은 광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다."

- 76, 목 잘린 닭중에서

 

이 문장처럼 사랑의 결실은 광적인 욕망에 기초한다. 그런데 이 욕망, 광기의 속성이 변질된다. 첫 째 아이, 둘째 아이 ...그리고 네째 아이까지 그 충만하고 아름다운 생산의 결과가 모두 백치다. 아이들은 짐승처럼 방치된다. 부부의 상대에 대한 태도도 변한다. 생산으로서의 욕망이 결핍의 욕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섯 번째 아이는 이렇게 변질된, 즉 결핍 충족의 수단으로서 욕망된 것이다. 백치인 네 아이가 그들에게 하찮은 사물 덩어리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다행인가? 아니면 불행인가? 네 아이는 부모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 아니 존재가 된다. 태양을 바라보며 짐승처럼 즐거워하는 존재, "닭의 목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는 장면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뻘게...시뻘게...."

 

"닭털이라도 되는 양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 닭의 피가 여전히 

고여 있는 부엌에서 아이들은 베르티타를 꽉 붙잡은 채

몸에서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빼냈다."

- 83, 목 잘린 닭중에서

 

달성될 수 없는 프로이트식 욕망이 실천되는 방법은 살해뿐임을 증명하려는 듯한 이 장면은 끔찍함과 당혹감, 어떤 비현실적 느낌에 몸을 떨게 하지만 인간 욕망의 실체, 극복되지 못한 그 퇴행적 진실을 마주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게 한다. 이처럼 모든 대상적 욕망이 폐기되고 네 아이들이 온종일 바라보는 붉은 벽돌담처럼 하나의 대상에 집중케 하는 편집증적인 욕망은 작품 표류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의 우주적 대자연에 몸을 맡긴 채 자기라는 망상적 주체를 놓아버린 인간들의 그 무한한 호흡에 이르러 광기의 도착점으로서의 죽음, 그 생생한 삶의 역동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서쪽 하늘은 완연히 금빛으로 빛나고 (...) 황혼녘의 상쾌한 바람이 

달콤한 오렌지 꽃향기와..."

- 111, 표류중에서

 

"나는 이내 내 존재가 사라진 것처럼 최면 상태로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 92,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중에서

 

눈과 빛이 만나고 코는 꽃향기와 짝짓는 무수한 부분대상들이 저마다 생산적 욕구를 실현하고 있는 표류의 이 장면은 독사에 물려 강을 떠내려가는 한 남자의 다가오는 죽음의 여정이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결핍의 욕망이 아닌 생산으로서의 욕구로 전화되는 이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한편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의 유일한 생존자가 들려주는 위의 문장은 이와 조응한다. 불안과 두려움, 결여의 획득을 위한 광기의 결과물로서 죽음이 아닌, 나라는 환상, 거짓 결핍의 환각에서 해방되는 것, 존재 그대로, 수많은 타자, 바깥과의 무한한 교류에 맡겨졌을 때,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이란 생명성으로 가득한 무엇임을 알려주려는 것만 같다.

 

광기는 존재적 진실에 덧칠해진 위선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지우고 죽음을 망각케 하는, 이것을 촉발하는 생명의 근원임을 은폐함으로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혹독한 도덕률의 내면화로서. 그러나 양심의 발전이 고통인 것은 억압된 욕망, 그 결핍으로부터 이지 않은가? 집착과 부단한 욕망 반복의 사슬, 그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시금 사랑과 죽음을 삶의 일상에 복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이 내게 결코 잔인함과 공포의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은 이유이다. 자신들을 짓누르는 것을 신격화하고, 자신의 것을 빼앗아간 것들 속에서 희망의 이유를 발견하려는 이 어처구니없음, 세계에 합리적 이성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어리석음의 발견인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열망하는 정신과 이 열망을 저버리는 세계 사이의 분리, 그리고 둘을 서로 묶어 놓으려는 모순, 그 불가능성의 탐사인지도. 삶을 온통 움켜 쥔 욕망의 진실, 인간과 세계의 그 간극의 원인들을 찾으려는, 한편은 무모하기도 한 처절한 자기 탐색의 글쓰기 인 것 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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