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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평점 :
“책은 병상에서의 무기력과 현실의 불확실성을 넘어 순수하고 선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 「병상의 풍경」, 204쪽
해즐릿은 병상에서 쓴 위의 문장을 끝으로 1830년 9월 18일, 52세에 영면(永眠)했다. 꼭 병상에서만 책이 그러하겠는가? 독서는 삶의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세속적 추구에서 벗어나게 하며, 삶의 지난 날들의 정직하고 열광적 감정을 되살리는 통로이기에 감각을 정제하며 삶을 다시 시작 할 길이 되어준다. 그의 말처럼 책은 “노력과 사상, 사색을 통해 얻은 진정한 감동의 공간”으로서 우리 정신의 위안처이자 용기를 얻는 산실이기도 할 것이다.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에서 한 인간의 영원성을 사유하는 가운데, 육신의 늙어감과 죽음의 부정성 속에서 “강렬한 자기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소중히 여기는 생각과 관심사를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그러한 그의 믿음 덕분에 오늘 우리는 그가 지녔던 덕성과 신념, 지적 조각들을 읽으며, 여전히 공감에 머리를 끄덕이고, 그를 더 뚜렷한 존재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 국역 소개되는 해즐릿의 이번 에세이집에 수록된 산문들은 어쩌면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태에 대한 사회심리적 이해를 돕기 위한 의지의 산물인 듯 보인다. 특히 「종교의 가면」,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 「진부한 비평가에 관하여」, 「인격을 안다는 것은」, 전반부 네 편의 에세이는 대중의 무지, 사회 기득권 계층의 이기심과 오만, 언론 및 비평 담론가들의 공부하지 않는 반지성, 법과 종교의 신비적 권위에 숨은 위선과 교활함과 같이 마치 그가 되살아나 오늘의 한국 정치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시사비평 같기만 하다. 그런가하면 후반부에 수록된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 「인도인 곡예사」,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병상의 풍경」 네 편의 산문은 서정적 시정(詩情)과 더불어 인간의 능력과 한계, 그리고 삶의 찬란한 환희와 기만적 시간의 의미들을 숙고하게 한다.
1. 시사비평 - 전반부 네 편의 에세이
해즐릿의 글이 200여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에 더욱 그 비평적 감각에 공감케 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고질적 취약성의 많은 부분에 대한 예리한 통찰 능력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역자가 어떤 취지에서 비평가의 속성에 대한 글을 맨 앞에 배치한지는 모르겠으나, 각종 매스미디어에 등장하여 어쭙지않은, 아무 의미도 없는 생각을 나열하는 무지와 위선, 표면적 교양에 매몰된 담론가라고 행세하는 세태를 드러내려는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독창적 의견도 없이 상투적인 남의 생각을 마치 제 것인 양 내세우고, 마치 세상의 모든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착각하며 담론가 행세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진부한 비평가에 관하여」는 꼭 이러한 비평가 딱지를 붙인 자들뿐 아니라, 누구나 자기표현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게 된 오늘의 온라인 사회연결망 속 주장들 대개는 틀렸거나, 뻔하거나 무의미하며, 급기야 거짓의 날조조차 서슴지 않는 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침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이러한 자기 성찰을 할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결국 해즐릿은 이러한 자들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무리들의 반(反)지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폐해를 보았던 것일 게다. 다음의 문장은 오늘의 반민족적 극우집단의 그 던적스러운 생리의 적확(的確)한 표현이리라.
“정신적 노력이나 용기를 조금이라도 필요로 하는 의견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사고의 감정의 수준 안에서, 나름의 논리와 확신을 지닌 채 살아가는 자들....(이들은) 단지 겉만 보고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은 늘 일정하다.” -31쪽
좁쌀만한 편협한 인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상상 속 권위를 위협하는 일로 여겨지니, 이것들의 잣대는 항상 편향되어 동일성을 반복만 한다. 오늘 한국사회 전반에 이러한 진부하고 비속(卑俗)한 비평가로 자처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득시글댄다. 스스로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인간들, 남의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만든 정말 아무런 진실도, 통찰도 없는 것들을 대본처럼 되풀이하는 인간들의 깨어남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까? 해즐릿의 글이 지금에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사실에 인간에 대한 모멸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두 번째 산문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에 이르면 이러한 인간 군상들의 범위가 더욱 확장되어 무릇 모든 인간의 자기성찰을 촉구하는 듯하다. 그가 정의하는 ‘온화한 사람’이란 “자기 이익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는 일에는 짜증을 내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굳이 화를 내지 않으며, 마치 인간적 친절함으로 가득 찬 사람처럼 보이는” 인간을 말한다. 자기 루틴이나 편안함이 방해되는 걸 싫어하며, 어떤 일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결코 나서지 않는 인간이다. 자기 새끼손가락이 조금만 아파도 난리를 쳐 대지만, 사회적 도덕적 차원의 부정이나 불공정은 단지 추상적 문제일 뿐으로 여기며, 자기 폐해가 없는 한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인간, 그러니 표면적으로 온화한 인간으로 비칠 뿐인 위선자이다.
“온화함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인도주의에 불과하다.” -44쪽
“대의를 위해서 어떤 희생도 한 적이 없는,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 체면만 챙기는 자들”, 이들에게 옳음의 기준이란 자신의 편익이기에 타인의 고통에는 눈을 감는다. 여기서 민족배반자, 국가의 이익을 팔아서라도 자기 이익이 되면 만족한 미소를 짓는 인간들이 출현한다. 계엄에 동조하며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참혹한 폭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을 옹호하는 내란준동 세력과 그것들에 박수를 치는 군상들이 태동한다. 이글을 읽다보면 기시감에 전율케 되는데, 19세기 초 영국인에 비친 온화하고 교양 있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의 몽매와 잔혹성이 한 치 차이도 없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엘리트로 자처하는 법관, 검사 일원의 작태에 이른다.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할 고통이나 파괴를 상상하지 못하는, 아니 그러한 폭력이 자신들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여기기에 그것들은 온화함을 유지한다.
이 온화함이란 것은 자기 확신과 편익에 위협이 되는 것에는 격렬하게 증오를 표현한다. 이것들은 자신에게 “막을 힘이 있다면 주저 없이, 죄책감 없이, 제약 없이 그 힘을 사용한”다. 자신의 힘이 법 그 자체이며, 혹은 그 위에 있다고, 국민이라는 개 돼지들의 위에 있다고 여기는 오만불손이다. 이것들의 충동 밑바닥에는 계산된 이기심과 교활함만이 흐른다. 사회가 어지럽다. 온화함으로 위장된 매판세력들, 그리고 이것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우중들을 어찌할까.
에세이 「종교의 가면」은 오늘 이 땅의 사법과 검찰 권력의 행태, 그 민낯을 여실히 조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글이라 하겠다. ‘종교’는 ‘법‘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새길 수 있는데, 1800년대 최고의 권위를 지녔던 종교가 21세기 법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으니 가능한 독해가 될 것이다.
“종교(法)는 사람을 척하게 만들 수 있다.
종교(法)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게 한다.” -53쪽
종교와 법의 위선은 가장 심각한 형태의 위선이다. 경건함과 도덕적 권위를 가장하고 내면에서 진실을 외면하는 기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나 법을 앞세우곤 그 뒤에 숨어 온갖 더러운 돈을 거래하고 권력의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연결하여 죄과를 은폐하곤 고결한 듯 군다. 세상의 못된 짓은 모조리 다하면서 말이다. 그리곤 혹여 범죄의 꼬리라도 드러나면 종교탄압이니, 법을 파괴하는 탈법적 행위라고 마치 신성한 무엇이 침해당했다는 듯 위선을 떨어댄다. 이것을 19세기 당대에는 ‘성직자의 술수(Priestcraft)’라 불렀다. 얼마나 맹위를 떨쳤으면 이러한 말이 다 등장했겠는가? 지금 한국 사회의 사법부에서 벌어지는 법의 뒤에 숨어 자행하는 불의의 술책은 ‘법관의 술수(Judgecraft)’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다.
고작 법조문 외워 시험에 붙은 것, 암기 능력하나만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려는 맹랑하고 무지한 작태를 보는 것은 정말 역겹고 혐오스럽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죄를 다루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다보니 정작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는 일은 잊어버리고는, 마치 죄는 자신들 외부의 문제일 뿐이고, 따라서 자신들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 예외 의식, 자신을 완전한 종교나 법 체계의 일부로 인식하는 착각이 이 세계의 도덕성을 너무도 추락시키고 있다. 제도적 권위를 무시하면서, 정작 자신의 언행과 판단은 법 위에, 신의 음성처럼 받아들여질 것을 주장하는 짓거리, 이 위선을 행하는 자들, 법비(法匪)들, 사이비 종교인들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할 사회악이다. 정말이지 이러한 부류들의 인격을 말하여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 모멸이 아닐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놀라운 생명력, 악명을 떨쳤던 18세기 말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 페리고르라는 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말은 인간에게 생각을 감추라고 주어진 것이다.”라고. 몰염치하고 후안무치한 인격을 숨기기에 말이 제격이라는 생각에서 뱉은 표현일 것이다. 한 인간의 인격을 명료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속에 품은 의도(생각)를 숨기거나 노출된 행동의 의미를 위장하기 위해 정의로운 말을 지껄여대지만,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얼굴의 표정, 눈빛만은 본질적 인격을 숨길 수 없다. 직업, 사회적 지위를 앞세우지만, 이것들은 한 인간의 인격을 판단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우리들은 어떤 인간의 인격을 이렇게 드러난 외적 징표인 얼굴, 인상을 통해 파악한다. 해즐릿은 그래서 첫인상을 “가장 진실에 가까운 한 인간의 인격”이라고 말한다. 물론 첫 인상이 그대로의 인격이라고 지칭하는 데에는 시간,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얼굴 탓에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진화적 산물인 직관에는 놀라운 지혜가 있다. “도덕적 직관에는 일종의 ‘제 2의 시각’이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성격, 습관 속에 숨어있는 징후들을 그것들이 눈에 띄는 결과로 드러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손바닥의 왕자, 쩍 벌린 다리, 열차 앞좌석에 다리를 뻗어 올리는 태도, 건들거리는 걸음.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정확히 말 할 수 없어도 “생긴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표현은 이러한 도덕적 직관 능력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다.
이 에세이 「인격을 안다는 것은」 신중히 해독할 글이기도 한데, 하인이나 시골사람과 같은 하위계층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곧 배우지 못한 사람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시대감각을 상실한 읽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 해즐릿이 말하는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공적 제도교육의 이수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일반 대중과 분리하여 사회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구조적 단절 속에서 사는 편협한 시각을 가진 자들을 일컫는다고 나는 이해한다. 자신을 사회 지배계급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은 자기 집단 외의 대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나아가 이렇게 배제된 대중은 적대관계로 여겨지고, 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속임수도 정당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대중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나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무리들이 ‘배우지 못한 자’이다. 사실 이 자들은 실제로도 세상을 배우지 않는다. 이들이 지독하게 편협한 시각을 보이는 것은 세상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무지하고 속된 자들은 오직 자신에게 직접적 이해관계가 얽힌 일에만 익숙하기에 세상의 많은 사실에 지극히 제한적이고 자기중심적 관념에 머물러 고작 조잡하고 이기적인 행위 이외에는 하지 못한다. 알지 못함에도 위선으로 포장된 이들은 임기웅변으로 상황에 맞춰 거짓말을 꾸며내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혹여 들키기라도 하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외려 화를 낸다. 윤씨가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대국민 청각테스트를 하듯 둘러대고는 사실을 말한 자들을 겁박하던 짓거리는 아마 맞춤의 예가 될 것이다.
루쉰의 산문이 떠오른다. 「페어플레이의 시행을 늦춰야 함을 논함(論 'Fair-Play'應該綬行)」에서 그는 사람을 무는 물에 빠진 개는 흠씬 두들겨 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기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공감이 불가능한 것들에게는 이것이 참된 행위라고 말이다. 자기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 배우지 못한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육신이 무덤에 묻힐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배우지 못한 자들의 편협과 거짓, 불감증, 편 가르기의 행동으로 사회에 분열, 갈등이 만연해지기 때문이다. “서로를 갈라놓는 관습과 지식의 차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하나로 통합 될 수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도덕성보다 자기애가 강하다고 하지만, 이에 굴복하여 타인의 세계를 배제하게 되면 괴물이 되어버린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약점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약점의 경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 자기 능력의 한계를 아는 이야말로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한 초석일 것이다.
2. 삶의 시간에 대해 -후반부 네 편의 에세이
촌철살인의 날카롭게 벼린 시대비평으로 읽을 수 있는 앞선 네 편의 산문과 달리 이후의 글들은 해즐릿 자신의 구체적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삶의 시간에 대한 서정적 독백으로 여겨진다. 그의 예봉(銳鋒)이 줄곧 겨눈 것이 부패하고 불의한 사회 지배계층이었기에 기득권자들에 의해 수용되지 못한 까닭에 경제적 궁핍이 늘 그와 함께하였음은 보지 않더라도 짐작 가능한 일이다. 산문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에는 돈 없는 삶의 고단함에서 연원하는 가난의 여러 감정들, 사회적 의미들을 반추한다.
이 글에서 해즐릿이 말하는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극단적 궁핍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형적으로 괜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늘 불안정하고 기본적 생활을 겨우 꾸려가는 여유 없는 상태 말이다. 돈 없는 사실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상태가 늘 반복되는 민망한 불편을 느끼게 되는, 그래서 감정의 연약한 부분을 냉정한 현실이 수시로 상기하게 만드는 그런 결핍 말이다.
“삶은 늘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 희망이 자라난다.
오늘 하루가 어떤 선물을 품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106쪽
돈 없음이 알려지면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놀랍도록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굳이 붙잡을 가치도 없는 친구를 잃게 되고, 허영심 많은 연인들도 떠나간다. 가난은 이렇게 가난한 자를 사회에서 배제시킨다. 때문에 “가난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낯선 이들에게 판단의 대상이 되고, 상황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속한 땅에서도 이방인이 되는 기분, 깔뵈는 삶을 감수해야 되는 삶이란 아마도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힘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와 명분을 가진 이였기에 해즐릿은 자신의 가난을 사치로서의 가난이라고, 선택된 가난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처럼 “가난은 선택일 때 존엄이 되고, 신념일 때 권위가 된다.” 그래서 오래 전 열반((涅槃)에 드신 한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강력하고 고귀한 선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해즐릿은 그의 가난한 삶에 조용한 위엄을 입힌다. 일상의 굴욕을 자존심을 벼리는 기회로 삼아, 순수하고 추상적 이상으로 승화하여 오염되지 않은 정신의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자존심으로, 그래서 숭고한 내적 위대함이 된다.
해즐릿은 이러한 가난의 굴레에서 에세이를 쓰는 자기 능력의 한계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세계와 그 표현으로서의 자연의 보이지 않는 현상들을 인간의 언어로 재현하려 애쓰는 자의 노력, 그는 자신의 에세이들이 공중에 매달린 줄 위에서 춤을 추고, 네 개의 공을 저글링하는 「인도인 곡예사」의 완벽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오직 하나에 집중하고, 끊임없이 반복된 훈련으로 이루어낸, 어려움을 극복한 기술을 압도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애쓰는 기색조차 없이 해내는 자연스러운 유연함과 우아함이야말로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본다. 수일 전 미국 프로 축구 리그인 MLS 세인트루이스 경기에서 손흥민 선수가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을 현지 방송들이 일제히 ‘예술’이라고 부른 것, 거기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없는, 지극히 간결하고 유연한 동작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육체적 기술은 이성과 논리에 의존하는 정신의 산물처럼 주관적이지 않고, 진실과 거짓, 성공과 실패 사이의 구분이 명확한 정직함이 주는 도덕적 명쾌함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중파 방송들에서 하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대립하는 담론가들의 대담을 보곤 한다. 그때마다 논쟁에서의 패배, 논리적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끈질긴 태도들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곳에는 인도인 곡예사의 육체적 기술처럼 압도적 우월함이 없으며, 진짜 고수와 뻔뻔한 사기꾼, 혹은 멍청한 자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무지도 한 몫 하겠지만) 이러한 담론가들에 대한 조롱어린 시가 있다.
“그들은 논쟁에서 그의 놀라운 기량을 인정했으며,
그는 패배한 뒤에도 계속 논쟁을 이어갔다.“ - 올리버 골드스미스, 147쪽
곡예사의 줄타기는 논리로 추락을 부정할 수 없고, 말로 균형을 되찾을 수 없기에,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 목이 부러질 수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적 노력은 실수해도 피가 나지 않는다. 글쓰기, 정치적, 학문적 논쟁에는 설혹 체면의 실추는 조금 있을지라도 자신의 육체적 피 흘림이나 생명을 담보로 하지 않기에 결코 완벽의 추구라는 긴장감이 훨씬 덜하다. 마치 1)저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이 죽지 않음을 알기에 가짜 죽음을 즐기며 그 스릴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안일함처럼 말이다. 곡예사는 기독교 사제처럼 증명하거나 검증할 수 없는 천국에 대한 온갖 교리를 믿게 할 수 없다. 곡예사는 묘기를 보여준다는 주장을 실제로 증명하지 않고는 믿게 만들 수 없기에 그의 목표는 언제나 완벽함이다.
이러한 이해와는 조금 달리 해즐릿은 예술이 곡예사의 육체적 기술보다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데, 자연의 재현을 다루는 예술(예술, 문학 등)은 자연을 흠 없이 완벽하게 그려내는 일로서 네 개의 공을 공중에 띄우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일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에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육체적 기술이 끝나는 지점이 곧 예술이 시작되는 자리” 라는 것이다. 예술의 대상이 미적 감각과 상상력이며, 내면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더 진실하다고 말하지만, 육체적 기술이 내면적 감각이나 미적 감각, 상상력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어찌 얘기할 수 있겠는가? “낙엽마다 달라붙고, 가지마다 매달리는 환상”을 노래하는 시인의 보이지 않는 것의 재현 감각이 운동선수의 자기 육체로 이루어내는 그 우아함을 초과하는 가치라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해즐릿의 정신과 육체 이원론에 입각한 정신 우위론은 시대적 한계로 읽힌다.
이 산문집의 표제가 된 에세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마지막 산문인 「병상의 풍경」과 더불어 연결 지어 읽게 되는데,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며 질병과 늙어감,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 삶의 시간에 대한 사색의 글인 이유이다. 영원의 감각이 깃들어 있는, 물론 착각이긴 하지만, 세상이 ‘나’를 위해 무한히 열려있으며, 끝없는 욕망과 이를 성취할 기회가 무궁무진할 것만 같은 청춘의 시간은 인생의 축복이고, 살아있게 하는 불꽃이라며, 청춘예찬으로 시작되는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이 눈부신 환상이 죽음이라는 인생의 축제가 우리를 배반하는 순간에 이를지라도 그 순간까지 우리가 살아 낸 시간에 어떤 위로가 되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해즐릿처럼 기독신앙의 천사와 천당과 같은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먼지와 재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일 뿐”이기에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있게 된 한 개인의 생각과 관심이 한 존재의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는 영혼의 영구불멸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의 고귀한 믿음에 겸허와 존경을 보내는데 주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의 믿음에 따라 해즐릿이 적어나간 청춘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언제든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정리된, 또한 그럼으로써 그가 지닌 지적 능력 덕분으로 살아남은 이 글, 그의 생전에 강렬하게 타 올랐던 불꽃같은 세계 통찰의 글들에 지금 감사와 공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니 말이다. 그래, 해즐릿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시대보다 더 생생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존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인간적 유산이다.”라는 말에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유언 같기만 한 그의 글과 함께 그가 운명(殞命)을 앞두고 병상에 쓴 「병상의 풍경」은 질병에 침입당한 한 인간이 신체적 조건에 종속된 고통을, 인생 여정의 모든 기억과 열망을 지워버리는 순간을 목격토록 한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지는 고통에 압도된 인간의 진정한 감동의 공간으로서 독서를 통한 자기 정화의 안간힘은 책 읽기의 그 어떤 웅변보다 강하게 다가온다.
세속적 추구를 멀리하고, 단지 “생각하며 살 수 있고, 살아가며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던, 청빈과 냉엄한 지성을 일생 지켰던 그의 글이 200여 년이 지나 그가 살던 영국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미래의 인간이 공감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음을 안다면 그의 믿음이 옳았음에 환한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해즐릿, 그의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꽃이 지금도 불타오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타오르리라 믿는다. 시차를 굴복시키는 해즐릿의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은 아마 인류가 멸종하는 그 순간까지 보편성을 잃지 않을 것 같다. 해즐릿의 글은 내겐 언제나 압도적인 매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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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문장은 이유리 소설가의 단편 「두정 랜드」의 글을 변용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