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지대에서 바라보는 세계 - 시와 그림에 떠오르는 그리운 고향 박동환 철학선집 시리즈 8
박동환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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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신에 침윤(浸潤)된 서구의 생존 전략은 그대로 괜찮은 것인가?


인간의 언어는 자연에 없는 금을 긋고 경계를 구축해서 온갖 허상을 만들어

자연과 인간 자신을 규제하고 통치하는 수단이다.” -19

 

인생과 자연에 임하는 자아 방어, 자아 본위의 상호대결 아니면

상호경합으로 일관하는 호모에렉투스의 생존양식으로 인류가 탈주하려는

3 지대의 새로운 생존양식의 발견은 가능한 일인가?” -20

 

위에 인용된 두 문장이 전제(前提)하는 물음에 대한 고찰이 이 책의 논지일 것이다. 또한 인류 전체에 당면한 인류세(人類世)라는 위기에 대응하는 대안의 세계관을 발상 전개하려는 회심(回心)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닥쳐 올 위기를 외면하면서까지 이합집산의 패거리 이익을 위해 몰두하는 정치경제 공동체의 현실은 대체 어떤 이유와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도대체 인류의 어떤 생존양식에서 연원(淵源)하는 것일까? 인간 각 개체가 소속된 문명과 그에 따르는 국가체제, 나아가 세계 체제가 강요하는 경쟁과 대결의 관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통치 양식, 즉 세계의 지배질서가 된 서구의 양식(樣式)을 이대로 이의 없이 수용 지지하는 것이 옳은가? 오늘의 한국인, 우리들의 사고와 행위 습관은 서구와 동양의 오랜 전통의 주변부에서 그것들에 종속되어 어느덧 서구의 가치에 매몰, 포섭되어 그것의 결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국면에 이르렀는지 모를 일이다.

 

저자 박동환은 그의 일생이 동서의 지배적 전통이 답습해 온 철학, 오늘날 세계의 주류 사고가 된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자아라는 주체 중심 관점의 철학을 비판하고 주변부, 즉 그 바깥의 시각에서 새로운 철학, 탈 인간, 탈 주체의 철학을 실천해 온, 미래 철학의 토대를 준비하고 쌓아올린 철학자이다. 오늘의 서구 철학들도 인간주체의 철학에 대한 반성으로 객체지향, 또는 실재론적 존재론과 같은 타자철학이나 신유물론을 내걸고 비인간 중심의 철학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저마다의 주장이 진리를 담보한다고, 궁극의 이론이거나 여전히 언어-논리 기반의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한계일 것이다. 오늘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는 AI와 같은 인류가 경험한 지대가 아닌 미지의 미래다. 더구나 진화의 제약 조건들로부터 어느만큼 인류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서구 철학과 과학이 오만하게 웅변하고 있지만, 정작 인류는 지구의 생물학적, 지구화학적 시스템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이 얽매인 존재임을 외면 또는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러한 사태가 초래된 근원의 추적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1. 인류 생존전략과 방식의 근원

 

오늘의 인류가, 아니 서구 주류가 주변세계에 퍼뜨려 생존전략으로 채택한 상호투쟁과 경합의기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돌을 깎아 주먹도끼를 만들고 돌조각으로 화살촉을, 그리고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웠던 흔적을 고고학자들은 발견하고, 수십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그들의 생존을 위한 계획과 실행, 집단생활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행위와 집단생활을 위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가 출현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본위, 즉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타자를 찌르고 내려치는 투쟁과 경합이었으며, 이를 위한 언어-논리적 접근 전략이었다. 이 생존전략으로부터 온갖 이념과 종파, 그 핵심도구로서 언어-논리 규칙들이 만들어지고, 제각각 소속하는 지역과 문화와 언어에 따라 다른 모양의 언어로 박제된 개념의 존재인 신()들이 출현했다.

 

이 수백 혹은 수십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이미 개척해 놓은 생존전략을 답습하는 것이 오늘의 인류이다. 그렇다고 이 생존전략, 특히 그 핵심 도구인 언어-논리가 그대로 온전하게 전해진 것은 아니다. 기원전 6세기 이전, 파르메니데스 이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들에 의해 우주적 시간대의 막을 수 없는 흐름을 인간의 언어 기술로 박제화 해버리기 이전 헤라클레이토스는 물론 소피스트 철학자들로부터 언어의 치명적 한계가 지닌 세상 만물과 그 사태의 경직된 논리를 거부하고 대안의 길을 모색한 역사가 있다. 인류는 불운하게도 말을 가지고 생각하는 이(verbalizer)’들의 끈질긴 개념 정의와 범주체계의 의지로서 동일률(동일 보존), 모순 배제의 형식논리인 독선의 절대성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세계 자연 모두를 형식화 박제화하려는 개념 정의와 규칙체계의 의지는 그 어떤 모순이나 다름, 타자를 수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개략적 기원에 대한 탐사에서 우리는 인간의 지독한 자기중심주의, 자기본원의 오만함을 보게 된다. 서구의 철학, 서구라는 몸체에 깊게 각인된 생존철학은 이렇게 인류의 생활 습속을 장악했다. 근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자아중심, 주체중심, 인간본위의 관점, 언어-논리의 맹목적 답습을 반성하는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실존주의니, 해체철학이니 하며 타자 관점의 전환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서구 철학은 언제나 인간중심주의로 회귀했다.

 

저자는 이러한 인류 생존전략으로서 자아, 주체중심의 관점에 대전환을 불러온 혁명을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우주의 영원한 중심이라 여겼던 인간중심의 관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한낱 우주의 작은 중심주변을 배회하는 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 인간본위의 관점의 대전환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혁명을 자처했던 칸트는 물론 그를 계승한 주관의 초월론 및 매체 초월론자인 후설, 비트겐슈타인도 결국에는 독단적 자아중심의 유아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논리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인식처럼, 세계의 모든 사태를 언어의 한계, 논리 규칙 안에 잡아넣는 독단론은 논리 규칙 밖에는 어떠한 가능 사태의 근거도 없다는 말처럼 자아중심적 망상이 어디 있을까. 서구의 철학자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인류가 행위와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한 자가 없다. 저자의 지적처럼 인간은 고작 태초로부터 우주의 영원한 주인이 펼치는 여정(旅程)에 초대된 한나절의 객()일 뿐’” 인데 말이다.

 

세상 존재 그 무엇이 스스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운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 개체는 물론 삼라만상 모두가 세계를 움직이는 참 주체의 주변을 맴도는 존재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주변 존재인 한낱 종속 변수일 뿐이다. 인류세라는 세계 자연, 우주의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야기된 오늘의 위기는 이처럼 자연과 우주를 인간 자신이 주체로서 조작할 수 있는 피동적 대상이거나 타자로 취급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2. 영원의 한 조각 분신, 기억체계 x (x 존재론)

 

동서의 전통적 주체중심, 언어-논리 중심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제3 지대의 철학, 인류의 미래 삶의 토대로서의 철학을 사유하는 영원의 기억으로까지 소급되는 우주를 담고 있는 기억, 세포 수준에서 공동체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계 지워진 존재 전 영역을 아우르는 미지의 개별자를 저자는 x라고 명명한다. (그의 잘 알려진 존재론의 설명은 x의 존재론참조 하세요) x란 태초의 경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원성을 지닌 한 조각 기억체계이고, 조건부로 주어진 어떤 정체성의 임시의 동일자에 불과하다. 한편 세계를 만나는 개체의 두 번째 방식으로 개체 x의 일탈과 거부 행위를 통해 확보된 보편의 지평으로서 현실에 결박되어 있는 x를 거부하는 모든 내재성을 x(never x)’라 명명한다. 이 내재 가능성의 원천이 바로 일탈을 꿈꾸는 기억과 상상이다. 일반자 X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탈주해가는 파격의 반란이다.

 

서구 철학이 앞선 언급처럼 자아본위, 언어-논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반성을 지극히 깊숙이 실험했던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이름도, 종류도, 법칙도 없는 야생의 자연, 즉 인간중심의 언어-논리체계를 벗어나 대변하는 세계란 어떤 것인지를 20세기 청년 장 폴 샤르트르는 초유의 상상실험의 기록을 구토로 정리해 놓았다. 샤르트르 본인의 분신인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순수의식과 존재 자체(물자체) 사이에 서로 주권을 독점하려는 대립관계를 그린다. 그는 칸트가 설치했던 순수의식과 물자체 사이의 양면단절의 이분법 관계가 허위라는 것을 증명한다. 양면단절은커녕 단절의 관계를 걷어차며 존재 자체가 거침없이 행위주체로 폭발하는 이변을 연출한다.

 

물체들...그것들은 쓸모가 있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장 폴 샤르트르, 구토, 하서출판 P22


자연과 사물로 하여 존재 자체의 자발적 주체성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을 샤르트르는 열어놓은 것이다. 인간의 언어기술로 자연과 사물에 덮어 씌웠던 온갖 특성과 개성, 행태와 법칙이 무력화되는 반란, 반전의 가능성이 자연과 사물이라 불리는 존재 자체에 있음을 기록한 아마도 최초의 철학 사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실존주의 행동철학자는 자연과 사물에 행위 주권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로캉탱은 줄기차게 구토를 극복하며 창작과 창조행위의 절대가치를 찾으려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결국 인간 본위의 실존주의 행동가에 머물고 만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물이 인간이 부여한 특성, 모양, 일반화한 형태나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직관은 적어도 지니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다음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우연이다.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우연성은 지워버릴 수 있는 허상이나 외관이 아니라 절대다.” - 구토, 동일 책, P242

 

16세기 인간중심주의의 폐기를 선언했던 혁명가 폴란드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완료되기를 기다리는 미완의 혁명은 21세기 또다시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에 의해 샤르트르를 넘어서 인류의 자아의식이 스스로 취해야 할 반성, 즉 인류 스스로 주변 존재로의 반성과 반전(反轉)이 선언되고 실천된다. 그녀는 인간본위의 관점을 대체할 제 3지대의 관점으로 4인칭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오랜 동안 인류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해 온 자아독선의 주체성을 사양하는 주체사양(主體辭讓)’ 과 인간 자신을 온전히 본래의 고향, 즉 무한의 경계로 반환하는 절대 환원, 영원성의 한 조각임의 깨달음의 처신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서구 문명이 강요해온 언어-논리, 자아중심, 인간중심, 주체중심의 관점이 인류세의 위기를, 극한 갈등과 패거리 이익에 의존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았는가. 토카르추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1인칭 언어에 의한 세계 질서를 폐기하고 4인칭 관점을 취함으로써 지배적 세계관 탈출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리라. 인간 중심의 시계(視界)밖으로 탈주하는 자아탈출, 자아 해탈의 제3의 지대를 향한 여정이 지금이라도 우리가 걸아가야 할 길 임을.

 

이 같은 서구 주류질서, 언어-논리, 자아중심의 세계에서의 탈주를 고통스럽게 사유한 이들이 그 변경지대인 한국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 출현일지도 모르지만,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통해 호모에렉투스가 그 때의 환경에 주어진 혼돈의 사태를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경합의 도구인 언어가 오늘의 인류가 처한 위기의 사태임을 알아보았던 것 같다.

 

더 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한 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토의 기미를 느꼈다.” -한강 희랍어 시간, P15~16, 문학동네, 2012.

 

샤르트르가 직관은 했으나 인간본위로 회귀하고 말았던 '구토'는 한강에 이르러 그 인간본위의 핵심 원인인 언어의 폭력성을 폐기함으로써 태초의 고향, 영원성의 한 조각으로 향한다.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운명인 초월의 질서, 자아의 초월이라는 새로운 질서여야 함을 감각한 것일 게다. 한강은 소설에서 인간의 언어에서 꼬챙이처럼 찌르는감각을 표현한다. 언어란 돌도끼 못지않은 동료인간과 비인간 자연을 향해 찌르고 다스리려는 자아중심의 방패막이와 같은 배타적 세계질서를 세우는 구토를 일으키는 도구였음을 알았던 것일 테다.

 

3. 그림을 떠올리며 찾아가는 이(visualizer)/ 임자말(주어) 생략과 중간태(middle voice)

 

서구 철학의 시발(始發)은 파르메니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언어 기술자들, 말을 가지고 생각하는 이(verbalizer)’들은, 세계 자연을 개념과 정의, 법칙으로 박제화를 시도함으로써 동일보존과 모순배제의 형식논리를 끈질기게 주창한 인간본위의 주체적 자아, 타자 배제의 치명적 한계 논리이다. 반면 이들에 앞선 현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언어로 박제화 하지 않고 그대로 시각화 감각화하여 언어의 무한한 결핍을 돌파하려는 그림을 떠올리며 찾아가는 이(visualizer)'이였다. 언어는 그것이 그 무엇을 지시하던 그 무엇의 무한한 영원성, 내재성의 수많은 성분이 다 빠져나가고 채에 걸러 남은 몇몇 찌꺼기일 수도 있다. 영원성이라는 우주적 시간대의 막을 수 없는 흐름에 휩싸여 있는 존재를 그 무엇으로 가둬놓고 특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의 모든 것이 돌아가야 하는 절대 환원, 그 궁극의 영원의 고향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없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의 흔적과 그리움을 안은 우리들의 기억, 그 영원성의 기억인 x를 이미지로 그려야 함을 알았을 게다. 시인은 말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님을, 말은 삶의 실상을 흐리고 가리는 허상임을 알았기에, 치명적 언어의 한계를 알았기에, 형상으로 굳혀 박제화한 착각임을 알았기에 흘러가는 장면마다 추억처럼 떠오르는 생생한 그림을 그린다.

 

과학과 철학은 극히 추상화된 기호의 수준에서 박제된 언어로서만 전개한다

수많은 사태가 그 추상의 그물을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전혀 존재 자체가 아닌

굵은 찌꺼기들이다.” - W. J. T. Michell, The Language of Image

 

한강의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에는 늦은 저녁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피어 올라오는 김을 보고 그 무엇인가가 영원히 지나가버렸음을 알았다고 쉼 없이 하늘로 달아나는 연기의 사라짐에서 존재의 영원성, 영원성 한 조각인 존재를 알아본다. 언어라는 추상적 상상의 한계 밖으로 쫓겨난 실재하는 것은 그렇게 존재의 지위를 되찾는다. 자연에 없는 금을 긋고 경계를 만드는 인간 언어의 허상, 시인은 그렇게 태초의 기억, 그 흔적을 따라 거슬러 먼 여정을 떠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인류가 소속된 지배 문화의 탈출 과정이다.

 

저자는 제 3지대 새로운 미래 철학의 출발지는 서구에 물들었지만 여전히 주변지역으로서 바로 지금 그 한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폐기되어야 할 서구 지배철학의 대안으로서 존재의 영원성과 내재성을 기억하는 우리가 그 토양임을 의식하는 듯하다. 우리말에는 임자말(주어, 주체) 자리에 아무것도 놓지 않고 그 자리를 결정할 수 없는 미지의 상태 x로 기억하며, 주어의 쓰임새를 삼가며 유의한다. 우리말은 이렇게 주체의 자리를 비워놓는다. 고대 희랍어에도 이러한 유사 언어태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중간태라 부르며, 주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술어 동사에 의해 행위를 하기도 하고 행위를 받기도 하는, 행위자이자 수용자로서 행위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운명의 숨은 결정권자 x를 상정한 주체가 아닌 미지의 x였다.

 

여기서 서구 철학의 위대한 이정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칸트의 행위 자율권에 대한 생각, 즉 자유의지가 선험성을 이루는 인간 개체의 내재성이라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의적 허상임이 드러난다. 고대 희랍인들에게는 중간태가 말하듯 의지라는 개념 같은 것이 없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유일 단독의 자율권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결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내세운 행위 원칙, 즉 행위의 배타적 자율권은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가? 서구를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와 사고인 칸트의 배타적 형식논리는 B.C. 5세기를 전후한 플라톤 철학의 세상 모든 사태의 일치와 긴장에서 오는 모순과 대립을 참을 수 없어했던 동일함, 매끈함에 대한 집착이었다.

 

동일성의 규칙, 모순배제의 규칙이라는 형식논리를 밀어붙여 두 개의 서로 모순되는 논증, 양면논증을 제거해버린다. 모든 문제에 내재하는 양극화하는 잠복한 대립의 긴장사태를 부정하고, 하나로 통일된 폭력적 단순함을 진실이라고 정의한 것이 바로 칸트 사고의 연원이다. 비극이 사라진 것은 바로 이러한 말을 가지고 생각하는 이들이 세계질서의 주류가 됨으로써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은 뒤틀리고 왜곡되고, 결여를 안은 허상이었다. 예수의 메시지에 에르코마이(ερχομαι), ‘내가 가다’”라는 중간태의 표현이 있다. 나를 가게 하는 그 주체는 하나님이었을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가 가다라고 기록 한 것이다. 한 개인은 스스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배후의 시킴에 의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드러나지 않은 배후의 다 알 수 없는 조건들이 함께하는 데서 한 개인의 행위와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불교 아미타여래의 본원의 힘인, 타력(他力)을 떠올리게 된다.

 

4. 3지대 세계관 - 귀얄(풀비) 자국

 

둥서를 관류하는 그 어떤 생존전략이든 모두 인류가 마주한 위기 앞에서 그 인식에도 불구하고 소속된 문명과 국가체제가 강요하는 지배적 생존양식을 회피할 도리가 없다, 개인 간, 공동체간, 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의 터전에서 발을 빼는 것은 곧 현실적 생존의 불가능성인 까닭이다. AI의 인간 제작자를 넘어서는 것이 뻔히 예견되고, 그것이 곧 인간 생존에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리라 보이지만, 자아중심의 뼛속까지 스며있는 습속은 닥쳐 올 위기를 외면하게 한다. 즉 오늘의 문명과 국가 체제를 지배하는 철학은 각양각색의 일치와 불일치의 관리 및 통치 양식으로 불가피한 경쟁과 대결의 관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누구도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쟁과 대결의 관계를 통치하는 체제는 생명의 고유한 개체성이 훼손 왜곡 당하는 것을 모른 척하거나 부인할 도리밖에 없게 되는 것이리라. 주체중심, 인간본위, 언어-논리의 관점을 대체할 제 3지대의 세계로 어떻게 옮겨가야 하는가? 대안의 세계관 발상 전개라는 것이 공허한 독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천성을 내재해야만 할 것이다. 즉 인간 개체들의 생활에 깊숙하게 침입해서 그것이 생활양식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해야만 할 것이다. 저자는 x존재론을 통해 자아독선의 주체성을 사양하고 절대환원이라는 영원성의 고향, 무한의 경계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지나침을 삼가야 한다고 한다. 왠지 공허하다. 물론 작금의 나로 격화되는 상대 경합이라는 생존양식은 결국 인류문명의 멸종이라는 울타리에서 빠져나올 출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영원의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한 조각 분신으로서 x를 품고 태초의 고향, 품고있는 영원성의 소속감을 깨우치는 것이 과연 모든 인류의 마음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요원해 보인다.

 

조금 구체적으로 저자는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는 민속신앙의 생존 양식에서 제 3지대의 주체 사양을 발견하고, 붓의 흐름에 따른 자연 발생적인 정형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연 생성자국 같은 귀얄자국이 바로 제3지대 양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오늘의 도시 문명은 강요하는 상대 환원의 생존양식인 체제 통치의 필요에 따라 정형화, 법제화된 전제를 거부하는 개체성이 귀얄지국처럼 살아 움직이는 더없는 토양이라고 말한다. 특히 리처드 세넷의 친밀함의 횡포와 전제(tyranny, 專制)을 예시하며, 사적인 친밀함의 횡포에서 해방되는 생활의 매체로서 도시생활의 간격과 분열이 오히려 현대 인류의 개체성 해방을 위한 필수의 장치이자 기회라고까지 말한다. 무도한 계엄령에 맨 몸으로 대처한 대도시 서울의 시민들의 경험처럼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이것은 흉측한 이면을 또한 내재하고 있다. 바로 극단적 대결로 인한 분열의 극치로 인한 온갖 불의한 술책과 전횡의 출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류학(anthropologie)은 차라리 엔트로폴로지(entropologie)로 바꾸는 것이 낫다.”라며, 이 지금의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과 제도와 관습이 엔트로피 증가 과정의 부분임을 역설한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제아무리 귓전을 때릴지언정, 지구촌을 지배하는 의식세계와 상상이 결박하는 압박을 대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에 이르면 그것은 분명 공허하고 쓸쓸한 여운만을 가을바람처럼 마음에 흔적만을 남긴다.

 

저자가 천착한 x의 존재론, 현재의 모든 체계, 모든 존재에 대하여 수직의 관계로 침입하여 결국 그가 이끄는 태초의 귀향길에 합류시킨다는, 영원을 향한 자아탈출, 초월하는 삶을 꿈 꾸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살아 움직이며 실감하는 현상계의 ’, ‘자아를 페기하기에는 언어의 결박이 너무 세차서 그저 구차스럽기만 하다. 아니 샤르트르의 로캉탱처럼 개념과 범주로 장악된 독선의 절대성이 완전히 허물어진 야생의 사태가 하도 고통스럽고 끔찍해서 인간본위의 세계로 다시 조작하여 선회하고만 말 것 같다.

 

서구의 주변부로서 우리보다 일찍이 서구의 세례를 받아왔던 일본의 일군의 인류학자와 철학자들에게서도 애니미즘과 불교, 인류학 연구를 통한 타력 중심의 미래 철학을 논의하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의 후학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새로운 제3지대의 철학이 인류의 미래 정신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국경을 초월한 협력의 연구도 요구되리라 여겨진다. 미래철학이다, 인류가 마주한 위기를 전환시킬 철학이지 않은가? 3지대의 철학을 말하는 이 책에 앞선 저자의 x의 존재론을 비롯한 철학적 노고의 총합서로 읽었다. 분명 저자의 지적처럼 인류 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적 범위의 시야를 가지고 대응하는 철학자가 주류세력으로 출현하고 있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안의 세계관을 전개하려는 이를 접하기도 어려운 것이 실상임에도 외로운 길을 고고히 걸어 온 한국의 철학자에게 머리 숙여 경애(敬愛)의 마음을 보낸다. 철학자 김동규의 멜랑콜리아가 인도한 독서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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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다음의 용어 정리 중 x존재론 관련 항목은 이 책 본문과 김동규의 멜랑콜리아x의 존재론에 대한 설명부분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상대환원은 필자의 이해이다.


1. 미지수 x박동환 선생이 정리한 미래 철학의 간결한 표제다. 소문자 x는 개체를 뜻한다. 이 개체는 세포수준에서 공동체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 즉 한계 지워진 존재의 전 영역을 아우른다. 이 개체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든가, 자기 정체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정체성은 조건부 임시의 동일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개체를 미지수 x로 표기한 것이다. 또한 개체는 한 조각 기억체계 x이다. x는 태초의 경계 X가 토해냈다가 언젠가는 다시 삼키는 파편이다. X는 인간적인 것을 포함해서 세상에 출현하는 모든 것을 삼키는 심연, -근거이다. Xx에 대하여 의미의 원천이라기보다는 무의미의 원천이고, 해석의 지평이라기보다는 해석의 무덤이다.

 

2. x(never x), 네버 엑스로 읽는 이것은 개체 x의 일탈과 거부 행위를 통해 확보되는 보편의 지평이다. 즉 현실에 결박되어 있는 상태 x를 거부하는 모든 내재성을 의미한다. 이 내재 가능성의 원천이 바로 기억과 상상이다. 기억과 상상은 무한히 일탈을 꿈꾼다. 그래서 x는 일반자 X에 포섭되기는커녕 도리어 거부하고 탈주해가는 파격의 반란이라고 부른다.

 

3. X( ) 또는 X(x, x) 적기도 하는 것, 이것은 세계와 만나는 세 번째 방식이다. Xx 의 해법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사건, 두 길이 모두 막힌 상황을 암시한다. 개체가 세계로 접근한다기 보다 세계가 개체에 엄습하는 형국이다. 어떤 지혜와 상상의 노력으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이를 모두 초과하는 사태, 모든 인위적 기획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사건,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단숨에 깨트리는 파국과 대격변, 그것이 바로 X( )이다.

 

4. 상대 환원: 환원이란 어떤 높은 단계의 개념을 더 낮은 단계의 요소로 분할하여 정의하는 철학적 관념이다. 예를 들어 결국 인간이란 단지 무수히 많은 쿼크와 글루온, 전자 등이 모여 있는 집합체일 뿐이다라는 문장처럼 인간을 궁극지로 거슬러 환원하면 결국 쿼크이고, 전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절대 환원이라하면, 긍극의 근본으로 회귀한 도래지이다. 반면 상대 환원은 비교 상대를 자의적이고 상대 절하하는 논리, 즉 경합의 논리로 인한 환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학은 심리학의 응용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인위성에 의한 상대 환원일 것이다. 오늘을 지배하는 인류의 사고는 이러한 상대환원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경쟁과 갈등, 분열과 압박, 위계와 강제는 모두 상대환원에 그 토대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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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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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현대적 의미의 소설이 시작되었을까? 벤야민은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전통이 무너지고 개인이 고립되기 시작한 상황,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데 조언을 구할 데가 없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고. 전통의 무너짐이라 해서 무슨 수구(守舊)적 퇴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본()이 되는 이야기, 즉 경험 지식(經驗知識)이 사라져버린 것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러함으로써 개인의 고립이 극단화되어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삶의 추위를 녹이는 구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라고.

 

이 책은 이렇듯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경험지()로서의 이야기를 상실했음에 대한 서사문학의 미래, 즉 인간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그 최종적이라 할 비평 글인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이하 고찰로 표기)과 그에 이르는 벤야민의 사유 과정이라 할 앞서 써진 관련 글들, 그리고 고찰속에 인용되거나 활용된 원전들이 함께 수록된 보기 드문, 읽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구성을 하고 있는 엮은이의 애정과 노고가 깃든 책이다.

 

공동체의 기억이 있던 자리에 개인의 회고가 들어서고, 변모하는 경험지의 자리에 현대인의 당혹감이 들어선다. 때문에 소설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이야기의 교훈이 아니라 삶의 의미다.”

 

어쩌면 이 한 문장이 벤야민의 고찰이 관류하고 있는 의미를 대표하고 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우리들은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스토리텔링이니 내러티브니 하고 마치 이야기가 세계의 감각적 지성, 인간 삶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떠들고는 있지만 정작 이것들은 상술과 정치적 선전용의 이야기 고유의 본질을 흐리는 남용된 어휘일 뿐이다. 더구나 넘쳐나는 정보의 확산으로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고 삶이라는 깨달음은 아주 요원해져가는 인상이라고 말하는 1세기 전 한 천재의 말이 너무도 현재의 목소리로 들리는 데 움찔하게 된다. 벤야민의 고찰에 이르는 통로로써 엮은이는 한 조각 한 조각씩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궁극의 담론에 이르렀을 때 독자들이 절로 이해의 눈이 뻥 뜨이게 배치하고 있다.

 


그 첫째 관문의 글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로서 한 번도 인정받은 적 없는 거장인 요한 페터 헤벨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의 서사적 의미, 세상만사에 대한 경험지로서의 이야기란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헤벨이 책으로 펴낸 라인지방 가정의 벗의 보석상자는 달력의 매월에 함께 기록된 짧은 글들의 모음집인데, 벤야민은 여기서 하나의 이야기 첫 문장을 소개한다. 다들 알다시피 일전에 베른하임의 한 늙은 촌장은(...)”, 이를 통해 헤벨은 세상만사와 도시 소문의 조응관계 전체를 지펴낸다. 그가 쓴 이야기는 가벼운 문체 속에 세계, 인간 삶의 기지와 윤리, 인애, 행위 규범이 금맥처럼 묻혀있다. 엮은이는 헤벨의 짧은 이야기 뜻밖의 재회도 수록하여 벤야민이 기술한 의미를 직접 읽어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있으니 하나의 글을 독해하기 위한 모든 것이 완비된 완벽구성의 책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어지는 글은 대서사가의 일과 소설가의 일을 설명하는 소설의 위기: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관하여인데, 아마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읽어본 독자는 종잡을 수 없는 서사로 중단을 했거나 의미독해가 미완인 채 내려놓은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배경인 베를린광장은 소시민층의 사회학적 음화인 사기꾼들의 장소라는 벤야민의 정의 한 문장만으로도 많은 의문이 풀릴 것이다. 포주의 자리에서 소시민의 자리로 가는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인물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삶이 대체 읽는 독자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더듬어 보게 되기도 한다.


대체 소설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되블린이 옛 부르주아 교양소설의 극단적이고 최종적으로 밀어붙여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소시민적 인쇄물들, 추문들, 참사들, 화제들, 대중가요들, 신문광고들 폭설처럼 쏟아지는 구조와 문체가 해체된 이 작품이 자료의 증명력에 의해 가난과 결탁한 증오스러운 삶의 그 던적스러움에 대한 비판이었음을. 앙드레 지드의 순수문학에 대한 강변과 대립하는 되블린의 첨예한 비판적 시각을 대비하면서 독자는 소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산딸기 오믈렛이라는 글은 그야말로 벤야민이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실현해 보인 글로 여겨지는데, 아마도 이 글에서 독자들은 이야기의 맛, 너절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야기 자체가 발하는 내용에서 절로 어떤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50년 전 전쟁터에서 패하여 도주하다 맛본 산딸기 오믈렛을 대체 어떻게 동일한 맛을 낼 수 있겠는가. 왕의 잔인한 요리 요구에 응답하는 요리사의 답변이 구구절절 흐른다. 이야기의 정수를 맛보았다. 리스본 지진이라는 글도 이야기의 이러한 입증의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이는 이야기 기술이라는 글에서 담론으로 다시 설명되는데, 무슨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때 설명을 삼갈 수 있다면 이미 이야기 기술의 절반은 터득한 셈입니다.”라는 문장인데, 이보다 명확한 이야기의 정의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벤야민이 여러 글에서 이야기의 힘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314장의 페르시아 왕에게 패하여 생포된 이집트 왕 프사메니투스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야기 내부에 응축된 이야기의 힘을 독자는 부지불식간에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이고 독자들은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이 아닌 이야기를 설명하는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 이야기꾼의 글에서 그 경계를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가진 것을 잃고 아무도 해치지 않기의 기술을 배운 사람”, 철도원에서 사공으로 한 단계씩 전락해가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자아구축을 출발점으로 삼는 소설과 달리 그 해체에 관심을 갖는 인간 삶에 대한 교훈이 마치 감자처럼 지하창고에 차게 저장되는이야기의 속성을 확인하게 된다. 벤야민 고유의 비유 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렇듯 그의 글은 지성에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곤 권태로울 때면 좋은 소설 한 권을 들고 벽난로 가에 앉아서 불을 바라봅니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로 시작되는 벽난로에서: 한 소설의 출간 25주년을 기념하며에서 소설은 우리가 모르는 운명을 그려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운명이 불살라지는 동안 그 불의 열기가 우리에게 닿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들이 겪는 운명은 그런 열기를 내지 못하는 까닭에. 그래서 추운 삶을 불로 따뜻하게 데워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소설은 과연 이런 것일까? 삶의 위로로서의 소설만이 소설의 역할인가?

 

소설 읽기에서 벤야민은 읽으라고 권할 수 있어도 직접 겪어보라고 권할 수 없는 체험으로서, 날 것의 세계를 위로 끌어올려 식용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소설이라고, 먹음직스러운 요리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감정이입이 아니라 섭취의 탐닉에 종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읽기의 기술은 쓰기 기술의 전제조건이다. 읽는 이를 전제로 하지 않은 소설이란 가능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 글은 소설의 반영을 이해함으로써 소설의 역할에 대한 또 다른 의미가 될 것 같다.

 

드디어 궁극의 글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은 이들 글이 수렴된, 집대성된 최종적 서사비평 담론이다. 별도로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앞선 글들에 몰입했던 독자는 그 글들의 종합편, 전체 맥락 속에서 서사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경험지로서의 이야기가 실종된 시대에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것이 담아내는 삶의 의미에 대한 기술은 대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터이다. 한 시대가 자기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그 시대의 몰락이 시작되는 때라고 말한다.

 

그때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을 거야!”라는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소설이라면, 이야기는 결코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그다음에는 어떻게 라고 질문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면에 소설은 끝난 자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소설은 그리곤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라고 하는 것이라고. 레스코프에 관한 헌사에 가까운 고찰은 사라져가는 이야기꾼의 새로운 시대에서의 원시적 출발에 대한 토대 글이기도 할 것 같다. 자기 삶이라는 심지를 이야기라는 은은한 불꽃에 남김없이 타버리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오늘의 이야기꾼인 소설가의 숙명적 무게를, 그 소명은 이처럼 커다란 내기에 몸을 던지는 것일 게다.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알고리즘에 따라 안내된 이야기 없는 정보만이 범람하는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은 이야기하는 능력도 상실했다. 온통 환멸만이 넘실대고, 경험지를 공유하는 능력이 발 빠르게 소멸해 가고 있다. 무수히 양산되는 소설도 벤야민의 지적처럼 상식 심리학의 렌즈로 왜곡시키는 인물과 운명에 대한 큰 그림을 모르는 싸구려 소설들이 지천이다. 파괴적으로 쓸어버리고 부숴버리는 힘의 장() 한 복판에 선 작고 약한 몸뿐인 인간들은 냉혹한 고립 속에서 부들부들 떨어대며, 그저 환멸만을 곱씹으며, 공허한 주먹질만 해댈 뿐이다. 모두가 인간적 길의 방향을 상실한 시대, 벤야민의 요구처럼 지금 우리들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부족함에 해당하는 상황임을 인정하자는 말에 더없는 공감을 하게 된다.

 

긍정적 야만으로서의 처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쩌면 새로운 야야기의 형식과 구조를 창안해야만 하는 시기에 도달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36년 보다 오늘 그 요청이 더욱 실감나는 시절이다. 이 책은 누구의 말처럼 낯선 도시에 떨어져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난해한 여느 글과 다르다. 친절하게 모여진 글들을 인내심 많은 수공예가가 한 땀 한 땀 천을 직조하듯 짜 모은 노고로 인해 마치 전혀 다른 벤야민의 글을 접한 듯한 편안한 느낌으로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에른스트 블로흐, 폴 발레리의 접하기 어려운 글들은 물론 인용 원전의 글들까지 풍성하게 엮여있어 한 권의 책이 하나의 글을 읽기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사문학을, 시대의 글쓰기를 고뇌하는, 소설을 어떻게 읽을까 고심하는, 나아가 삶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세대를 이어나갈 지혜의 전승 도구를 숙고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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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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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그 존재를 둘러싼 세계는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빈번하게 대면하게 되는 친인척이고, 곧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낯선 타인들의 시선과 반응들을 내면화 하면서 하나의 존재자인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결국 타자의 반영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존재의 숙명일 테다. 사랑과 칭찬을, 그리고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우리는 그래서 존재의 본질을 숨기고 호감어린 웃는 얼굴을 한다. 소설은 껍데기와 껍질, 탈과 캄캄한 심연을 한 조각가의 작품 기록을 따라가며 진실에 대한 물음이 가능한가를 묻는 것 같다.

 

이야기의 전체구성은 작가 H가 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조각가 장운형이 자기객관화를 애쓰며 쓴 일기가 주요 서사를 이루고 있다. 소년 장은 어머니의 웃는 얼굴과 그녀의 내면의 진실은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얀 탈바가지 같은 어머니의 얼굴”, 또한 대학에 장인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은 아버지는 외삼촌에게 뱀 같은 새끼로 불린다. 타인에겐 항시 웃는 얼굴을 한 소년의 부모, 뭇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지만, 소년은 착한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가 없다. 진실을 은폐한 탈바가지를 쓴 위선적 존재들.

 


소년 장에게 진실이란 의심과 적의와 서늘한 경멸이 깔린 누추한 것, 또한 살아생전 자신의 오른 손을 정교하고 치밀하고 자연스럽게 노출치 않았던 외삼촌의 동강 난 손가락이 죽음으로써 드러났을 때 보게 되는 무력하고 불쌍하며 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장은 이후로 철저하게 자신의 안경 뒤로 자기를 가린다. 가리지 않으면 그들(타인)에게 버림받는 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정성과 지혜를 다해 자신의 탈(가면) 속에서 타인을 탐색하며 사랑과 칭찬을 갈구한다.

 

진실이란 이렇듯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기에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것임을, 결국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치 않든 아무런 의미(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때문에 장은 의미라는 진실을 묻는 것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물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장한 장은 조각가가 되어 작품의 본을 뜰 모델을 물색한다. 그의 시선에 들어 온 소녀는 167센티미터, 적게 잡아도 100킬로그램은 되리라 여겨지는 L이다. 웃고 있는데도 마치 눈물에 번쩍거리고 있는 것 같은 두 눈을 지닌 소녀, 그녀의 체구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희고 섬세하고 순수한 손을 발견한다.

 

손은 제 2의 얼굴이다.  손의 생김새와 동작을 관찰하면 

그 사람이 얼굴 뒤로 감춘 것들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77

 

외삼촌이 생전 철저하게 은폐했던 손, 진실을 감추고자 정치하게 감추었던 손, 얼굴이 제아무리 내면의 거울이라 하지만 그것은 탈처럼 기만적 조작을 해댄다. 그러나 손은 결코 그것을 감추지 않고서는 거짓을 말할 줄 모른다. 장은 소녀를 설득해 마침내 그녀의 손을 뜬다. 작업에서 장은 소녀의 근본적인 조심성 속에서 슬픔을 읽는다. 깊숙이 가라앉아 일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고통의 흔적을. 장은 자신의 의식에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구역질을 느낀다. 장의 심연에 웅크린 상처들, 진실을 자극하기 때문이었을까?

 

혀와 눈이 달린 얼굴과 달리 손은 정확한 말을 하지 않는다. 얼굴보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얼굴보다 교묘한 탈이다. 말 할 필요가 없으므로 얼버무릴 필요도 없다. 침묵하면 그만이다. 정지해 있으면 그만이다.”  -89

 

속이 빈 조각 작품, 인체의 껍데기 속에 숨은 동굴 같은 심연, 결코 진실이 새어나오지 않는 껍질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조각이란 해독할 수 없는 생의 비밀을 두 손으로 빚어냄으로써 껍데기를 꿰뚫어보려는 집요한 긴장에서 해방되기 위한 작업이다. 첫 개인전에 그는 무엇인가를 손아귀에 감춘 형상들, L의 손을 뜬 껍데기들을 전시한다. 보여주고자 하면서도 숨기려 하는 모순,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空洞)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 차갑고 비인간적인 것.

 

장은 L의 거대한 몸, 육체의 껍데기를 뜨게 되면서, 서로의 몸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L은 자신이 거대한 몸을 가져야만 했던 이유인 계부가 어린 자신을 유린했던 고통의 기억을 술회한다. 그 새끼는 한 번두 내 옷을 벗긴 적이 없었어요,...팬티 벗기기만 바빴지...”, 입에 먹을 걸 물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쉴 새 없이 먹어대자 살이 찌기 시작했지만, 그 새낀 40킬로가 불어나서야 괴물 쳐다보듯 하더라고. L은 장을 떠난다.

 

선배 P로부터 장은 그의 작품 구입에 관심이 있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E를 만나게 된다. 장은 E에게 받은 첫 인상을 정갈함과 상냥함과 품위 속에, 누구든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냉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어렴풋이, 그러나 단호하게 어려 있었다.”고 쓴다. EL의 손을 뜬 작품을 구입하기 원하지만 장은 망설이다 결국 두 점을 팔기로 한다. 그의 작품을 설치하기로 한 어느 유한자의 완성된 집을 E의 초대로 찾아가게 되고 장은 샘플 같은 집이란 인상을 받는다.

 

장은 E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서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만 성장한 여자의 옷을 벗겨놓고 보니 열세 살 난 여자 아이였던 것 같은, 불쾌하고 씁쓸한 자의식이었다.”고 생경한 고통의 밤이었음을 쓴다. 안을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는 매끈매끈한 거울 같은 여자. 새것, 반들반들한 광택을 사랑하는 여자. 먼지와 흠, 흉터, 낡아간 흔적들...지긋지긋해. 새것은 달라. 깨끗하고 아름답지. 아직 제 쓰임새대로 쓰여 본 적 없는 물건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껍데기 그 자체가 이미 훌륭한 것이라고 말하는 여자가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만지지 않은 새 것 만을 욕망하는 것은 왜 인가.

 

E는 장이 만든 껍데기들이 지루하고 야비한 것이었음을 알아본다. 어쩌면 E가 장에게 건네는 넌 정말 가련하구나...처음부터 알았어.”라는 말 속에 장의 작품들은 결코 벗겨낼 수 없는 껍질이 아닌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임을, 본질을 여전히 감춘 딱딱한 물건일 뿐인 것임을. 감추기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그 만들어냄 조차 감춰야 했음을. 그러나 우리들은 진짜를 보고 싶은 갈망을 멈출 수 없기도 하거니와, 더욱이 그 감추려는 열망의 민낯이 타인의 모습으로 인지되는 성장기의 존재에겐 삶이라는 세계에 대한 의혹 가득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심연, 진실이 가라 앉아있는 그 어둠의 동굴은 그저 텅 빈 것일까? 그곳에서 아무런 대답도 건져낼 수 없는 것일까? 굳어가는 석고의 틀을 살갗에서 떼어낼 때, 그저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 같은, 다시 껍데기를 찾아 쓰고 싶은 드러난 심연 같은 존재란 죽음 같은 것이기만 한 걸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웃는 탈이 내면의 감정과 일치하는 존재이기를 바랄 뿐이다.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하얀 탈이 아니기를 노력할 뿐이어야 함 만을 안다. 적어도 나로 인해 던져 진 존재들이 상처 가득한 인간으로 의심과 의혹의 세계라는 적의로 세상을 보지 않기 만을 바란다. 선택 가능한 무한한 잠재성이 어느 편협한 선택의 장이 되지 않도록 모든 존재들에게 무한하게 열린 자유의 공간이 펼쳐진 세계가 되기를 희망한다. 불가능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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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0-30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품 중 모르는 작품도 많네요. 문장은 좋은데 왤케 손이 안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별 5개라...근데 소설이 좋은지 리뷰도 멋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비의식 2025-10-30 18:37   좋아요 0 | URL
작가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데요, 근작들과 달리 서사를 따라가는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관심, 폭력, 타인이 보내는 혐오의 시선 등으로 상처를 입은 자들은 더욱 더 자신의 껍데기 뒤로 내심을 숨기는 것이 삶의 방편임을 알게 되지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우울한 초상 뒤로 은폐된 진실이란 것이 과연 실재하긴 한 것인지 제겐 의심되는데요. 사실 E라는 여성의 말처럼 껍데기가 아닌 들러붙은 껍질 자체인 위선이나 기만, 바로 그 탈이 진실이 아닐까 생각케 된답니다. 이를 조금 확대 해석하면 작가는 오늘을 사는 인물들을 통해 진실을 찾는다는 것, 혹은 진실을 숨겨야 살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우울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Yamoo님, 댓글 고맙습니다~
 
시그투나 트리플 33
전하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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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소설집에 함께 엮인 작품들은 습관처럼 커다란 단일한 범주의 상자에 집어넣어 획일화하여 읽으려 하는 의도들을 빈번하게 발견하게 되고, 나 또한 이러한 양태에 의식 없이 빠져들곤 할 때가 있다.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어떤 테두리에 모아 놓아도 될 작품들로 구성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들이란 제아무리 단일 주제를 겨냥하더라도 그 속성상 의도치 않은 다채로운 색깔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표제작 시그투나를 비롯한 세 편의 단편은 저마다의 고유한 목소리가 있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의식의 악의적 고루함에 의해 오명을 뒤집어 쓴,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었던 어린 여성에게 그녀가 품었던 찬란한 빛을 돌려주려는 지극하고 섬세한 작가의 애정으로 가득한 시그투나, 이십 년 남짓하게 오래 지난 자신의 책이 영상화로 다시 읽히게 됨으로써 마치 과거의 젊음의 활기를 찾은 듯 의기양양한 사십대에 이른 작가가, 다시는 느낄 수 있으리라 예상치 못한 남자 사람에 대한 연애감정이 병행하면서 과거가 현실에 틈입하는 현재를 관찰케 하는 인도차이나, 그리고 영원히 살 것처럼살았던 젊은 날의 한 사건이 인생에 달라붙어 현재에 집요하게 속박당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조용하고 먼처럼, 각 작품들의 목소리는 확연히 다르다.

 

책 말미의 짧은 평론은 이들을 싸잡아 현재라는 작은 균열 속으로 과거가 침입하듯, 미래는 과거와 교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뻔한 이해와 함께, 예술의 장애와 한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험하는 자체가 곧 예술적 고통이고, 그 산물이라고 말하며 포스트-예술론의 틀로 묶어 획일화된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다. 시인 로트레아몽이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워!’라고 노래했듯, 서로 다른 수준의 것들도 굳이 분석하고 들자면 그 구성요소들로부터 상관성, 얽힘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재편성하고 조정하여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예술비평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하다보면 세상 일체의 모든 것이 하나의 단일성에 묶여버리고 말 것이고, 그것에서 우리는 삶의 다양한 색깔들을 무시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세 작품에서 비록 과거를 오늘에 새로운 시선으로 전달하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면일 것이다. 작품을 이렇게 한껏 협소하게 축소하는 독해는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내게 세 작품 중 단연 시선을 끈 작품은 연극과 동기생 윤경과 승혜의 이야기인 조용하고 먼이라고 하겠다. 소설 속 문구인 조용하고 먼이나, ‘돌아와 버렸다와 같은 구절들이 이끄는 감성은 묻혔던 기억들에 대한 비로소의 마주함과 같은 해결되어야만 했던 상처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남의 작품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은 채 베낀졸업작품을 준비한 동기 윤경에게 승혜가 그 작품을 안다고 얘기함으로써 발단된 젊은 날의 사건을 주요 제재로 한 이야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승혜는 담당 교수와 동기들로부터 배반자, 밀고자로 낙인찍혀 연극작품 활동의 미래를 잃게 된다.

 

이를테면 도덕적 학문적 부정을 저지른 사람과 달리 어리석음을 지적한 사람이 매장당한 일련의 상황이다. 그런데 승혜의 고백에서 자신은 재능이 없었음을 알았기에, 그녀가 이십 년 전 당시 윤경에게 지적한 것은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멍청한 행위에 대한 일종의 자극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을 정점으로 윤경은 자신의 작품을 쓰지 않고 타인의 스태프 역할만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인생이 만들어 놓은 잔해에 치이면서상처들을 후줄근하게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피한 인생행로일 것이다. 승혜의 윤경을 향한 집요한 물음들과, 이제 와선 다 쓸데없는 일이라며 사람은 변하질 않는다고 말하는 윤경의 삶의 이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표제작인 시그투나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인접한 소도시 시그투나를 배경으로 한 전기(傳記)소설로 읽힌다. 특히 이 작품의 실존 인물인 최영숙의 일생에 대한 배경과 동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에세이 어느 계절에와 함께 읽으면, 배움을 원하는 젊은 여성을 조롱하는 사회분기가 만연했던시절, 더욱이 일제의 삼엄한 치하에서 스무살 남짓한 어린 여성이 자유로이 거닐었던 이억만 리 낯선 타지에 선 단단한 열정이 더욱 선명하게 와 닿음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하나의 액자처럼 그녀가 다니던 시그투나 인민학교 교장의 권유로 쓰게 되는 교지인 시그투나링엔의 기고문이 완성되어가는 문장과 함께, 저 멀리 잔잔한 푸른빛의, 눈부시게 빛나는 멜라렌 호수가 보이는 아침 창을 활짝 열어 둔, 6월이 가까워진 어느 날의 풍경이나, 산책길에서 보게 되는 폐허로 방치된 성 올로프의 유적지, 파스텔 빛 노랗고 푸른 스웨덴식 목조 가옥들과 같은 이국적 거리들의 서정적 풍경이 발하는 포근한 사랑의 시공간에 잠기게 된다.

 

무너진 벽과 기둥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룬스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이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해 새겨 넣은 일종의 기념비처럼, 온갖 악의적 소문들과 더럽게 회칠하여 역사에서 지워진 서양에서 대학수준의 공부(스톡홀름 사회정치정책연구소, 경제학사)를 마친 최초의 조선인 여성인 최영숙이라는 인물의 음성이 10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닿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사랑으로 가득한 시선이 행간에 흐르고 있음을 누구라도 감각할 수 있을 것 같다.

 

1930~60년대 혁명의 열기로 달아오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혼란스런 배경 속에 엇갈리는 운명과 치정이 어우러진 1962년 개봉된 영화제목이기도 한 인도차이나는 화자인 작가 임수란이 여덟, 아홉 살 무렵 무신경한 어머니를 따라 경험한 최초의 시네마다. 나는 이 제목의 상징적 의미인 치정(癡情)의 서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젊은 시절 발표했던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그녀에게 함께 돌아와, 이곳저곳의 초청으로 바쁜 일상, 청춘의 활기에 취한 듯 이어지는 나날의 기록으로 읽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은 작품이다.

 

이야기는 쇠락의 길을 걷다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바닷가 지역 도시에 있는 서점의 북 토크 초청 길을 배우자가 있는 R을 설득해 동행하는 하루의 여정을 담고 있다.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작가 자신의 책이나, 쇠락의 길에서 다시 각광받는 도시처럼, 옛 영화를 추레하게 되새기고, 젊음의 환영을 반추하며 그것의 단물을 빨아대는 사십대에 들어선 인물의 현실 타협의 모습은 우리네 형편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야기 속에는 임수란의 부정한 애정관계에 대한 은연한 암시의 문장들이 불쑥불쑥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데, 이것은 다시 읽히기 시작한 그녀의 소설로 인한 활력으로 의기양양해진 모습과 병행하며 교묘하게 그녀의 현재를 관류하는 변모된 현실을 관찰케 한다. 그것은 다시 연애하게 된 남자 사람 R에 대해 원하는 걸 얻으려면 인생에는 전략이라는 게 필요하고 때로는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도 쓸 줄 알아야 한다.”와 나란히, 오래된 젊은 시절의 소설, 풋풋하고 싱그러운 과거의 추억을 파먹으며, 마른걸레 쥐어짜듯 억지로써내야 하는 변화된 창작 작업에 대한 현실적 자각과 교호하며 그 어떤 갈급한 삶의 면모를 풀어 놓는 듯하다.. 어쩌면 작가 임수란이 인식하는 지금이라는 시제의 그 모든 것은 이 거리의 이 생생한 감각만큼은 나만의 것으로 남으리라는 것. 이 모든 순간이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살아내는 나를 위한 시간의 전조라는 자신을 다독이는 음성일지도 모르겠다.

 

시시콜콜 되살아난 책이 발산하는 이미지와 이미 달라진 임수란이나, R과의 헤어짐을 준비 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의 서사는 건너뛰고라도, 활짝 열린 세계의 의미로 가득해 보이는 청춘에게만 부여된 부재하는 무()를 쫓는 특권을 알아버린 나이든 인물의 영원한 침묵을 선고받은 존재로서 드러내는 절망의 표시같은 문장을 말하여야만 할 것 같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약속된 북 토크 장소인 서점에 들어서게 되는 장면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다.

 

예측도 대응도 준비하지 못한 목소리, 영원히 증발해버릴 나의 과거, 나의 노스탤지어라는 것인데, 내겐 이 음성이 안타까울 만큼 붙잡으려하는 하나의 문학적 목소리처럼 여겨졌다. 어쩐지 소설을 읽고 나면 적당한 속물성과 타협하며 과거를 파먹는 추레함이 흠씬 두들겨 맞는 듯한 통증에 감염되는 듯한 우울함이 몰려온다. 글쓰기의 절단이 가져오는 작가 수란의 쥐어짜야 간신히 나오는 읽히지 않는, 혹은 반향없는 그 할 수 없음이나 하지 않으려는 부정의 욕망을 대차게 실해하려는 새로운 도주로의 발견을 위한 문학적 도피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또한 옛 것의 우연한 되살아남에 양양대는 누군가들에 대한 비난이거나 자기 성찰의 촉구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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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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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병상에서의 무기력과 현실의 불확실성을 넘어 순수하고 선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 병상의 풍경, 204

 

해즐릿은 병상에서 쓴 위의 문장을 끝으로 1830918, 52세에 영면(永眠)했다. 꼭 병상에서만 책이 그러하겠는가? 독서는 삶의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세속적 추구에서 벗어나게 하며, 삶의 지난 날들의 정직하고 열광적 감정을 되살리는 통로이기에 감각을 정제하며 삶을 다시 시작 할 길이 되어준다. 그의 말처럼 책은 노력과 사상, 사색을 통해 얻은 진정한 감동의 공간으로서 우리 정신의 위안처이자 용기를 얻는 산실이기도 할 것이다.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에서 한 인간의 영원성을 사유하는 가운데, 육신의 늙어감과 죽음의 부정성 속에서 강렬한 자기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소중히 여기는 생각과 관심사를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그러한 그의 믿음 덕분에 오늘 우리는 그가 지녔던 덕성과 신념, 지적 조각들을 읽으며, 여전히 공감에 머리를 끄덕이고, 그를 더 뚜렷한 존재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 국역 소개되는 해즐릿의 이번 에세이집에 수록된 산문들은 어쩌면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태에 대한 사회심리적 이해를 돕기 위한 의지의 산물인 듯 보인다. 특히 종교의 가면,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 진부한 비평가에 관하여, 인격을 안다는 것은, 전반부 네 편의 에세이는 대중의 무지, 사회 기득권 계층의 이기심과 오만, 언론 및 비평 담론가들의 공부하지 않는 반지성, 법과 종교의 신비적 권위에 숨은 위선과 교활함과 같이 마치 그가 되살아나 오늘의 한국 정치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시사비평 같기만 하다. 그런가하면 후반부에 수록된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 인도인 곡예사,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병상의 풍경네 편의 산문은 서정적 시정(詩情)과 더불어 인간의 능력과 한계, 그리고 삶의 찬란한 환희와 기만적 시간의 의미들을 숙고하게 한다.

 

1. 시사비평 - 전반부 네 편의 에세이

 

해즐릿의 글이 200여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에 더욱 그 비평적 감각에 공감케 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고질적 취약성의 많은 부분에 대한 예리한 통찰 능력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역자가 어떤 취지에서 비평가의 속성에 대한 글을 맨 앞에 배치한지는 모르겠으나, 각종 매스미디어에 등장하여 어쭙지않은, 아무 의미도 없는 생각을 나열하는 무지와 위선, 표면적 교양에 매몰된 담론가라고 행세하는 세태를 드러내려는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독창적 의견도 없이 상투적인 남의 생각을 마치 제 것인 양 내세우고, 마치 세상의 모든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착각하며 담론가 행세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진부한 비평가에 관하여는 꼭 이러한 비평가 딱지를 붙인 자들뿐 아니라, 누구나 자기표현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게 된 오늘의 온라인 사회연결망 속 주장들 대개는 틀렸거나, 뻔하거나 무의미하며, 급기야 거짓의 날조조차 서슴지 않는 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침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이러한 자기 성찰을 할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결국 해즐릿은 이러한 자들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무리들의 반()지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폐해를 보았던 것일 게다. 다음의 문장은 오늘의 반민족적 극우집단의 그 던적스러운 생리의 적확(的確)한 표현이리라.

 

정신적 노력이나 용기를 조금이라도 필요로 하는 의견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사고의 감정의 수준 안에서, 나름의 논리와 확신을 지닌 채 살아가는 자들....(이들은) 단지 겉만 보고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은 늘 일정하다.” -31

 

좁쌀만한 편협한 인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상상 속 권위를 위협하는 일로 여겨지니, 이것들의 잣대는 항상 편향되어 동일성을 반복만 한다. 오늘 한국사회 전반에 이러한 진부하고 비속(卑俗)한 비평가로 자처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득시글댄다. 스스로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인간들, 남의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만든 정말 아무런 진실도, 통찰도 없는 것들을 대본처럼 되풀이하는 인간들의 깨어남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까?  해즐릿의 글이 지금에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사실에 인간에 대한 모멸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두 번째 산문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에 이르면 이러한 인간 군상들의 범위가 더욱 확장되어 무릇 모든 인간의 자기성찰을 촉구하는 듯하다. 그가 정의하는 온화한 사람이란 자기 이익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는 일에는 짜증을 내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굳이 화를 내지 않으며, 마치 인간적 친절함으로 가득 찬 사람처럼 보이는인간을 말한다. 자기 루틴이나 편안함이 방해되는 걸 싫어하며, 어떤 일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결코 나서지 않는 인간이다. 자기 새끼손가락이 조금만 아파도 난리를 쳐 대지만, 사회적 도덕적 차원의 부정이나 불공정은 단지 추상적 문제일 뿐으로 여기며, 자기 폐해가 없는 한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인간, 그러니 표면적으로 온화한 인간으로 비칠 뿐인 위선자이다.

 

온화함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인도주의에 불과하다.” -44

 

대의를 위해서 어떤 희생도 한 적이 없는,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 체면만 챙기는 자들, 이들에게 옳음의 기준이란 자신의 편익이기에 타인의 고통에는 눈을 감는다. 여기서 민족배반자, 국가의 이익을 팔아서라도 자기 이익이 되면 만족한 미소를 짓는 인간들이 출현한다. 계엄에 동조하며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참혹한 폭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을 옹호하는 내란준동 세력과 그것들에 박수를 치는 군상들이 태동한다. 이글을 읽다보면 기시감에 전율케 되는데, 19세기 초 영국인에 비친 온화하고 교양 있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의 몽매와 잔혹성이 한 치 차이도 없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엘리트로 자처하는 법관, 검사 일원의 작태에 이른다.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할 고통이나 파괴를 상상하지 못하는, 아니 그러한 폭력이 자신들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여기기에 그것들은 온화함을 유지한다.

 

이 온화함이란 것은 자기 확신과 편익에 위협이 되는 것에는 격렬하게 증오를 표현한다. 이것들은 자신에게 막을 힘이 있다면 주저 없이, 죄책감 없이, 제약 없이 그 힘을 사용한. 자신의 힘이 법 그 자체이며, 혹은 그 위에 있다고, 국민이라는 개 돼지들의 위에 있다고 여기는 오만불손이다. 이것들의 충동 밑바닥에는 계산된 이기심과 교활함만이 흐른다. 사회가 어지럽다. 온화함으로 위장된 매판세력들, 그리고 이것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우중들을 어찌할까.

 

에세이 종교의 가면은 오늘 이 땅의 사법과 검찰 권력의 행태, 그 민낯을 여실히 조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글이라 하겠다. ‘종교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새길 수 있는데, 1800년대 최고의 권위를 지녔던 종교가 21세기 법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으니 가능한 독해가 될 것이다.

 

종교()는 사람을 척하게 만들 수 있다.

종교()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게 한다.” -53

 

종교와 법의 위선은 가장 심각한 형태의 위선이다. 경건함과 도덕적 권위를 가장하고 내면에서 진실을 외면하는 기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나 법을 앞세우곤 그 뒤에 숨어 온갖 더러운 돈을 거래하고 권력의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연결하여 죄과를 은폐하곤 고결한 듯 군다. 세상의 못된 짓은 모조리 다하면서 말이다. 그리곤 혹여 범죄의 꼬리라도 드러나면 종교탄압이니, 법을 파괴하는 탈법적 행위라고 마치 신성한 무엇이 침해당했다는 듯 위선을 떨어댄다. 이것을 19세기 당대에는 성직자의 술수(Priestcraft)’라 불렀다. 얼마나 맹위를 떨쳤으면 이러한 말이 다 등장했겠는가? 지금 한국 사회의 사법부에서 벌어지는 법의 뒤에 숨어 자행하는 불의의 술책은 법관의 술수(Judgecraft)’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다.

 

고작 법조문 외워 시험에 붙은 것, 암기 능력하나만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려는 맹랑하고 무지한 작태를 보는 것은 정말 역겹고 혐오스럽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죄를 다루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다보니 정작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는 일은 잊어버리고는, 마치 죄는 자신들 외부의 문제일 뿐이고, 따라서 자신들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 예외 의식, 자신을 완전한 종교나 법 체계의 일부로 인식하는 착각이 이 세계의 도덕성을 너무도 추락시키고 있다. 제도적 권위를 무시하면서, 정작 자신의 언행과 판단은 법 위에, 신의 음성처럼 받아들여질 것을 주장하는 짓거리, 이 위선을 행하는 자들, 법비(法匪), 사이비 종교인들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할 사회악이다. 정말이지 이러한 부류들의 인격을 말하여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 모멸이 아닐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놀라운 생명력, 악명을 떨쳤던 18세기 말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 페리고르라는 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말은 인간에게 생각을 감추라고 주어진 것이다.”라고. 몰염치하고 후안무치한 인격을 숨기기에 말이 제격이라는 생각에서 뱉은 표현일 것이다. 한 인간의 인격을 명료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속에 품은 의도(생각)를 숨기거나 노출된 행동의 의미를 위장하기 위해 정의로운 말을 지껄여대지만,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얼굴의 표정, 눈빛만은 본질적 인격을 숨길 수 없다. 직업, 사회적 지위를 앞세우지만, 이것들은 한 인간의 인격을 판단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우리들은 어떤 인간의 인격을 이렇게 드러난 외적 징표인 얼굴, 인상을 통해 파악한다. 해즐릿은 그래서 첫인상을 가장 진실에 가까운 한 인간의 인격이라고 말한다. 물론 첫 인상이 그대로의 인격이라고 지칭하는 데에는 시간,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얼굴 탓에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진화적 산물인 직관에는 놀라운 지혜가 있다. 도덕적 직관에는 일종의 2의 시각이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성격, 습관 속에 숨어있는 징후들을 그것들이 눈에 띄는 결과로 드러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손바닥의 왕자, 쩍 벌린 다리, 열차 앞좌석에 다리를 뻗어 올리는 태도, 건들거리는 걸음.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정확히 말 할 수 없어도 생긴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표현은 이러한 도덕적 직관 능력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다.

 

이 에세이 인격을 안다는 것은 신중히 해독할 글이기도 한데, 하인이나 시골사람과 같은 하위계층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곧 배우지 못한 사람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시대감각을 상실한 읽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 해즐릿이 말하는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공적 제도교육의 이수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일반 대중과 분리하여 사회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구조적 단절 속에서 사는 편협한 시각을 가진 자들을 일컫는다고 나는 이해한다. 자신을 사회 지배계급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은 자기 집단 외의 대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나아가 이렇게 배제된 대중은 적대관계로 여겨지고, 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속임수도 정당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대중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나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무리들이 배우지 못한 자이다. 사실 이 자들은 실제로도 세상을 배우지 않는다. 이들이 지독하게 편협한 시각을 보이는 것은 세상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무지하고 속된 자들은 오직 자신에게 직접적 이해관계가 얽힌 일에만 익숙하기에 세상의 많은 사실에 지극히 제한적이고 자기중심적 관념에 머물러 고작 조잡하고 이기적인 행위 이외에는 하지 못한다. 알지 못함에도 위선으로 포장된 이들은 임기웅변으로 상황에 맞춰 거짓말을 꾸며내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혹여 들키기라도 하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외려 화를 낸다. 윤씨가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대국민 청각테스트를 하듯 둘러대고는 사실을 말한 자들을 겁박하던 짓거리는 아마 맞춤의 예가 될 것이다.

 

루쉰의 산문이 떠오른다. 페어플레이의 시행을 늦춰야 함을 논함('Fair-Play'應該綬行)에서 그는 사람을 무는 물에 빠진 개는 흠씬 두들겨 패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기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공감이 불가능한 것들에게는 이것이 참된 행위라고 말이다. 자기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 배우지 못한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육신이 무덤에 묻힐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배우지 못한 자들의 편협과 거짓, 불감증, 편 가르기의 행동으로 사회에 분열, 갈등이 만연해지기 때문이다. 서로를 갈라놓는 관습과 지식의 차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하나로 통합 될 수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도덕성보다 자기애가 강하다고 하지만, 이에 굴복하여 타인의 세계를 배제하게 되면 괴물이 되어버린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약점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약점의 경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 자기 능력의 한계를 아는 이야말로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한 초석일 것이다.

 

2. 삶의 시간에 대해 -후반부 네 편의 에세이

 

촌철살인의 날카롭게 벼린 시대비평으로 읽을 수 있는 앞선 네 편의 산문과 달리 이후의 글들은 해즐릿 자신의 구체적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삶의 시간에 대한 서정적 독백으로 여겨진다. 그의 예봉(銳鋒)이 줄곧 겨눈 것이 부패하고 불의한 사회 지배계층이었기에 기득권자들에 의해 수용되지 못한 까닭에 경제적 궁핍이 늘 그와 함께하였음은 보지 않더라도 짐작 가능한 일이다. 산문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에는 돈 없는 삶의 고단함에서 연원하는 가난의 여러 감정들, 사회적 의미들을 반추한다.

 

이 글에서 해즐릿이 말하는 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극단적 궁핍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형적으로 괜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늘 불안정하고 기본적 생활을 겨우 꾸려가는 여유 없는 상태 말이다. 돈 없는 사실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상태가 늘 반복되는 민망한 불편을 느끼게 되는, 그래서 감정의 연약한 부분을 냉정한 현실이 수시로 상기하게 만드는 그런 결핍 말이다.

 

삶은 늘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 희망이 자라난다.

오늘 하루가 어떤 선물을 품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106

 

돈 없음이 알려지면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놀랍도록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굳이 붙잡을 가치도 없는 친구를 잃게 되고, 허영심 많은 연인들도 떠나간다. 가난은 이렇게 가난한 자를 사회에서 배제시킨다. 때문에 가난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낯선 이들에게 판단의 대상이 되고, 상황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속한 땅에서도 이방인이 되는 기분, 깔뵈는 삶을 감수해야 되는 삶이란 아마도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힘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와 명분을 가진 이였기에 해즐릿은 자신의 가난을 사치로서의 가난이라고, 선택된 가난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처럼 가난은 선택일 때 존엄이 되고, 신념일 때 권위가 된다.” 그래서 오래 전 열반((涅槃)에 드신 한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강력하고 고귀한 선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해즐릿은 그의 가난한 삶에 조용한 위엄을 입힌다. 일상의 굴욕을 자존심을 벼리는 기회로 삼아, 순수하고 추상적 이상으로 승화하여 오염되지 않은 정신의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자존심으로, 그래서 숭고한 내적 위대함이 된다.

 

해즐릿은 이러한 가난의 굴레에서 에세이를 쓰는 자기 능력의 한계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세계와 그 표현으로서의 자연의 보이지 않는 현상들을 인간의 언어로 재현하려 애쓰는 자의 노력, 그는 자신의 에세이들이 공중에 매달린 줄 위에서 춤을 추고, 네 개의 공을 저글링하는 인도인 곡예사의 완벽성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오직 하나에 집중하고, 끊임없이 반복된 훈련으로 이루어낸, 어려움을 극복한 기술을 압도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애쓰는 기색조차 없이 해내는 자연스러운 유연함과 우아함이야말로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본다. 수일 전 미국 프로 축구 리그인 MLS 세인트루이스 경기에서 손흥민 선수가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을 현지 방송들이 일제히 예술이라고 부른 것, 거기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없는, 지극히 간결하고 유연한 동작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육체적 기술은 이성과 논리에 의존하는 정신의 산물처럼 주관적이지 않고, 진실과 거짓, 성공과 실패 사이의 구분이 명확한 정직함이 주는 도덕적 명쾌함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중파 방송들에서 하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대립하는 담론가들의 대담을 보곤 한다. 그때마다 논쟁에서의 패배, 논리적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끈질긴 태도들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곳에는 인도인 곡예사의 육체적 기술처럼 압도적 우월함이 없으며, 진짜 고수와 뻔뻔한 사기꾼, 혹은 멍청한 자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무지도 한 몫 하겠지만) 이러한 담론가들에 대한 조롱어린 시가 있다.

 

그들은 논쟁에서 그의 놀라운 기량을 인정했으며,

그는 패배한 뒤에도 계속 논쟁을 이어갔다.“ - 올리버 골드스미스, 147

 

곡예사의 줄타기는 논리로 추락을 부정할 수 없고, 말로 균형을 되찾을 수 없기에,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 목이 부러질 수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적 노력은 실수해도 피가 나지 않는다. 글쓰기, 정치적, 학문적 논쟁에는 설혹 체면의 실추는 조금 있을지라도 자신의 육체적 피 흘림이나 생명을 담보로 하지 않기에 결코 완벽의 추구라는 긴장감이 훨씬 덜하다. 마치 1)저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이 죽지 않음을 알기에 가짜 죽음을 즐기며 그 스릴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안일함처럼 말이다. 곡예사는 기독교 사제처럼 증명하거나 검증할 수 없는 천국에 대한 온갖 교리를 믿게 할 수 없다. 곡예사는 묘기를 보여준다는 주장을 실제로 증명하지 않고는 믿게 만들 수 없기에 그의 목표는 언제나 완벽함이다.

 

이러한 이해와는 조금 달리 해즐릿은 예술이 곡예사의 육체적 기술보다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데, 자연의 재현을 다루는 예술(예술, 문학 등)은 자연을 흠 없이 완벽하게 그려내는 일로서 네 개의 공을 공중에 띄우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일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에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육체적 기술이 끝나는 지점이 곧 예술이 시작되는 자리” 라는 것이다. 예술의 대상이 미적 감각과 상상력이며, 내면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더 진실하다고 말하지만, 육체적 기술이 내면적 감각이나 미적 감각, 상상력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어찌 얘기할 수 있겠는가? 낙엽마다 달라붙고, 가지마다 매달리는 환상을 노래하는 시인의 보이지 않는 것의 재현 감각이 운동선수의 자기 육체로 이루어내는 그 우아함을 초과하는 가치라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해즐릿의 정신과 육체 이원론에 입각한 정신 우위론은 시대적 한계로 읽힌다.

 

이 산문집의 표제가 된 에세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마지막 산문인 병상의 풍경과 더불어 연결 지어 읽게 되는데,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며 질병과 늙어감,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 삶의 시간에 대한 사색의 글인 이유이다. 영원의 감각이 깃들어 있는, 물론 착각이긴 하지만, 세상이 를 위해 무한히 열려있으며, 끝없는 욕망과 이를 성취할 기회가 무궁무진할 것만 같은 청춘의 시간은 인생의 축복이고, 살아있게 하는 불꽃이라며, 청춘예찬으로 시작되는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이 눈부신 환상이 죽음이라는 인생의 축제가 우리를 배반하는 순간에 이를지라도 그 순간까지 우리가 살아 낸 시간에 어떤 위로가 되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해즐릿처럼 기독신앙의 천사와 천당과 같은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먼지와 재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일 뿐이기에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있게 된 한 개인의 생각과 관심이 한 존재의 영원한 존재로 남는다는 영혼의 영구불멸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의 고귀한 믿음에 겸허와 존경을 보내는데 주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의 믿음에 따라 해즐릿이 적어나간 청춘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언제든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정리된, 또한 그럼으로써 그가 지닌 지적 능력 덕분으로 살아남은 이 글, 그의 생전에 강렬하게 타 올랐던 불꽃같은 세계 통찰의 글들에 지금 감사와 공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니 말이다. 그래, 해즐릿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시대보다 더 생생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존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인간적 유산이다.”라는 말에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유언 같기만 한 그의 글과 함께 그가 운명(殞命)을 앞두고 병상에 쓴 병상의 풍경은 질병에 침입당한 한 인간이 신체적 조건에 종속된 고통을, 인생 여정의 모든 기억과 열망을 지워버리는 순간을 목격토록 한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지는 고통에 압도된 인간의 진정한 감동의 공간으로서 독서를 통한 자기 정화의 안간힘은 책 읽기의 그 어떤 웅변보다 강하게 다가온다.

 

세속적 추구를 멀리하고, 단지 생각하며 살 수 있고, 살아가며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던, 청빈과 냉엄한 지성을 일생 지켰던 그의 글이 200여 년이 지나 그가 살던 영국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미래의 인간이 공감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음을 안다면 그의 믿음이 옳았음에 환한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해즐릿, 그의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꽃이 지금도 불타오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타오르리라 믿는다. 시차를 굴복시키는 해즐릿의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은 아마 인류가 멸종하는 그 순간까지 보편성을 잃지 않을 것 같다. 해즐릿의 글은 내겐 언제나 압도적인 매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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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문장은 이유리 소설가의 단편 두정 랜드」의 글을 변용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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