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의 열강들을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시켰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러시아 등이 이러한 반열에 있었으며, 이들의 식민 지배는 전 세계로 확장됐다. 또한 동양에서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에도막부를 거쳤던 일본이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구 열강 대열에 오르고자 했다. 이러한 열강들의 식민지 및 시장경쟁이 결국 전쟁으로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서구 열강들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각국의 분쟁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1871년 제2제국을 선포한 독일이 빌헬름 2세 시대에 들면서 식민지 팽창에 나섰는데, 이것은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토만 거대했던 사실상 후진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도 점차 자본주의화를 거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아시아 일본을 도운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 독일 세력이 확장하고 특히나 발칸반도 지역에서 각국의 대립이 1900년대 들어서 극심해졌다. 이것은 결국 1910년대 발칸 반도에서 민족주의 의식을 자극했으며,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라예보 사건,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터뜨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황태자비 소피(Sophie)가 현재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청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rvrilo Princip)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것이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영국과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야심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이들의 야심이 전쟁으로 폭발했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와의 영토분쟁이 있던 알사스 로렌 지역을 차지하고 싶어했고,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여 대영제국의 패권을 지키고 싶어 했으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반도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세르비아 측으로부터 양보를 의미하는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8일에는 선전포고했다. 이어서 슬라브계 민족의 후원자인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군을 동원하고, 그 후 독일 · 영국 · 프랑스 · 터키 등이 각국의 동맹조약에 따라 차례로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타이완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도 영일동맹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격돌이었다. 통일된 독일은 군사력 증강에 힘을 많이 썼었다. 특히나 군함과 잠수함 생산을 늘렸으며, 병력도 확장했다. 당시 독일은 슐리펜 계획이라 하여 단기간에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를 무찌를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물론 이들의 전략은 프랑스를 무찌르고 러시아의 군대를 무찌른 뒤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참호를 나와 돌격하는 병사들)
그러나 전쟁은 예상외로 길어졌다. 특히나 19세기 산업발전을 통해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군사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 굴욕의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는 예상외로 독일군의 공세를 잘 막았고,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물량공세를 견뎌야 했다. 거기다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지원하여 독일을 압박했다. 이렇게 되면서 전쟁은 참호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방전이 됐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쟁은 학살극으로 변모했다. 특히나 기관총의 등장과 폭격, 탱크 그리고 가스전은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대표적으로 솜 전투만 하더라도 사상자 단위가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을 초과했을 정도였다. 과거에 후퇴하는 병사들을 추격하는 용도로 사용된 기병들은 기관총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투입된 항공기, 전투기가 첫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거기다 지뢰의 발달과 장갑으로 둘러싸인 탱크의 등장 그리고 공중에서 적군을 공격하는 항공기의 등장도 인명피해를 늘리는 원인 중 하나였다. 특히나 가스전은 치명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양측은 독가스를 사용했는데, 가스를 사용할 때마다 병사들은 방독면을 써야했으며, 방독면을 쓰지 않는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질식해서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전의 잔혹함을 제대로 보여줬고, 과학기술의 파괴력을 인류에게 알려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극심하게 속출한 이유에는 전략전술에도 있었다. 당시 병사들은 적국의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소총을 들고 돌격하는 전략을 사용했는데, 방어하는 측에선 참호를 파놓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따라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슐리펜 작전이 실패한 이후 전쟁은 장기전으로 가면서 양측 공방전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1917년 영국 프랑스 연합국 측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년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했었고, 구식전술에 의존했기에 사상자가 급증했었다. 이에 따라 민중들은 러시아 제국에 불만을 품게 됐고, 혁명을 주도하여 300년간 지속되던 차르 체제를 전복시켰다. 여기서 더 나아가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사회주의자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귀국하여 10월 혁명을 일으켰고, 궁극적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고 난 이후 레닌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 탱크가 전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1917년부터 러시아가 힘을 못 쓰게 됨에 따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 특히나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하고 난 이후에는 대부분의 전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하여 영국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또 다른 보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보던 미국은 중립주의를 표방했었다. 그러나 1915년 독일 잠수함이 미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사례가 발생했고, 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인한 미국 상선의 침몰 횟수는 1917년이 돼서 더 증가했다.
(기관총,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극심한 병력 손실을 야기시킨 무기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와 영토분쟁 중이었는데, 여기서 독일은 멕시코에게 달콤한 조건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 멕시코가 독일을 도울시 19세기 당시 미국이 침략으로 빼앗은 멕시코 땅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근데 이 전보를 영국 측에서 가로채서 미국에게 알렸고, 이에 분노한 미국은 1917년 독일에게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물론 미국은 병력이 부족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모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대규모 병력 투입은 1918년에 이루어졌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서부전선에 총 공세를 가하던 독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부전선에 도착한 대규모의 미군을 상대하게 됐다. 전쟁을 오랜 기간 치른 독일은 미국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고, 결국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4년간 유럽에서 전개됐던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