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86년 두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베트남 혁명 연구>에 있는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세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노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소련과 세계의 식민지 및 반식민지 지역에서의 혁명운동과 특정한 관계를 맺었던 코민테른 시대에 그 이념을 형성했다. 초창기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소련의 생존과 발전에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코민테른 간의 주된 연계주체였던 호치민(Ho Chi Minh)은 레닌의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Theses on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s)에 이끌려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각국의 억압된 민중들을 세계정치의 새로운 세력과 결합하고 있는 세계적인 규모의 혁명운동에 대한 그 테제에서의 언급을 접하면서, 호치민은 프랑스의 식민지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베트남 민중의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다. 1925년 초창기 베트남 혁명당원들에 대해 행했던 광동 연설에서 호치민은 베트남 혁명은 세계 혁명의 지원을 받을 것이며, 그들 자신의 혁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베트남인들은 세계혁명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완수하게 될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하였다.

 

소련의 상대적 약체성과 1930년대의 긴장된 국제적 환경이라는 맥락에서 세계혁명에 대한 베트남의 의무는 소련을 지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코민테른의 감독 하에 있었던 기간 동안 세계정세에 대한 베트남 당의 언급은 소련에 대한 포위와 자본주의 진영의 공격을 반영하고 있다. 19302월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ese Communist Party)의 설립에 즈음하여 베트남 민중들에게 행한 호치민의 호소는 소련에 대한 그러한 위험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가 베트남 혁명을 억압하려 할 뿐만 아니라, 소련이 세계의 피압박 민족들과 피착취계급들이 봉기하여 지배 세력들을 전복하도록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혁명을 약화시키려 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반대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193010ICP(인도차이나 공산당)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 세계의 제국주의자들, 특히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은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하며, “사회주의 승리 국가인 소련을 수호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소련에 대한 수호라는 주제는 1935년 마카오에서 열렸던 제1차 베트남 공산당 대회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당은 교육 프로그램 속에서 소련을 세계혁명을 수호하는 방벽이며 수호자로 묘사하고,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소련의 파괴는 세계운동을 20년 이상 후퇴시킬 것이라고 논하였다.

 

이미 전쟁의 위협은 프랑스로부터 히틀러의 독일로 이전되어 갔으며,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이후로는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인민전선을 호소하였고, 베트남은 반파시즘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국제구의적 노선을 수정하는 또 하나의 대회를 개최했다. 스탈린이 19399월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을 대, 통킹(Tonkin)지역 당 위원회는 그러한 노선전환을 설명하고, 소련의 국제주의 노선에 대한 당내의 동요를 종식시키기 위해 소련은 항상 평화에 충실한다(The Soviet Union is Always Faithful to Peace)라는 책자를 출간하였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베트남 당은 비록 코민테른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으나,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모스크바와 이데올로기적 연계는 유지했다. 소련이 나치의 침략에 대항해서 싸우게 되자, 당 이론가였던 쯔엉찐(Truong Chinh)은 소련의 붉은군대(Soviet Red Army)부분적으로 인도차이나 민중을 위해서피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신뢰를 표했다. 그는 소련의 저항을 지원하고 전진하는 세계혁명운동에 공헌하는 것이베트남 당의 의무라고 썼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유럽이나 만주에서 소련에 대항해서 싸우는 음모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하여, 만약 그러할 경우 그들이 붉은 군대의 편에서 싸우도록 권고하였던 것이다.

 

출처: 베트남 혁명 연구 p.58~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 친구 여러분! 드디어 제가 책 한권 출판하게 됐습니다. 널리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http://mlkorea.org/v3/?p=10681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출간 예정

 

김남기 저 | 어깨걸고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발행

 

오늘날 반공주의는 곧 숭미주의와 연결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공주의는 미국을 아름다운 국가, 착한 제국, 정의의 사도 쯤으로 인식하여 미국을 우상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콜럼버스의 미국 상륙과 원주민 학살에서부터 남미·아시아·아프리카 침략, 이라크·리비아·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미국이 전 세계 침략자, 학살자라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출간 예정인 이 책 출간을 위해 사전 후원을 받습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Redman 2021-08-23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08-23 10: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널리 알려주시길.ㅎㅎㅎㅎ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21-08-23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08-23 14: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널리 알려주세요.^^ ㅎㅎㅎㅎㅎㅎ

초란공 2021-08-23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NamGiKim 2021-08-24 11:25   좋아요 1 | URL
지금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널리 알려주시길.ㅎㅎㅎㅎㅎㅎ
 

1975 4 17일 캄보디아는 폴포트(Pol Pot)가 지휘하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에 의해 통일됐다베트남에서 통일되기 2주전의 일이었다캄보디아에서 폴포트가 정권을 잡은 이후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도시를 없애고 원시적인 사회를 창조하는 계획을 시행했는데이것이 바로 킬링필드(Killing Field)였다당시 폴포트는 킬링필드로 거의 100만 가까이 되는 캄보디아인을 학살했는데이 학살은 이후 250만에서 300만을 죽인 것으로 다소 과장되기도 했다문제는 크메르 루주의 정책에 있었으며최소 8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을 죽인 이 학살은 1978년 베트남 정규 군대가 캄보디아로 진입하며 친베트남 정권을 세우면서 막을 내렸다.

(론놀의 사진)

 

킬링필드는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져,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 다소 반공주의적인 요소로 한국 사회에서 이용되기도 했었다그런 이유가 어찌됐든 폴포트의 사회적인 조치는 킬링필드라는 학살을 불러왔고이는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폴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소름끼치는 학살을 4년 동안 했다특히 S-21로 알려진 뚜옹슬랑 같은 감옥에서는 소름끼치는 행위들이 자행됐다이랬기에 대다수의 캄보디아인은 폴포트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반공주의자들의 경우 폴포트가 학살을 자행한 것에 대해선 강한 비판을 하지만정작 폴포트가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다따라서 오늘은 폴포트가 정권을 잡게 된 캄보디아 현대사의 배경인 론놀의 친미 쿠데타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캄보디아에서 나온 론놀 스템프)

 

1960년대 동남아시아는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Vietnam War)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캄보디아의 지도자가 된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는 냉전 초기 이승만과 같은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유지했었고이는 캄보디아 사회주의 운동이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던 결정적인 이유였다당시 탄압 받았던 이들 중에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인 살롯사르 즉 폴포트도 존재했다. 1950년대 당시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유지했던 시아누크는 1960년대 들어 노선을 전환했는데그것은 바로 제3세계(The Third World) 노선이었다이 과정에서 시아누크는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도 좋은 관계를 형성했을 정도였다.

(캄보디아 침공을 주장하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1960년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베트콩이 창설되면서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는 이들에게 물자지원에 나섰는데이들의 호치민 루트 즉 호치민 트레일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연결이 되었었다당시 시아누크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캄보디아에 비밀리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캄보디아 인근 지역까지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캄보디아 사회주의자들이 세력을 넓혀 나갔다이렇게 되자 1960년대 후반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여러 지방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침공 당시 미국이 캄보디아를 폭격한 지역과 범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시아누크는 제3세계 노선을 걸으며캄보디아 내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등장한 미국의 닉슨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철군을 주장하면서베트콩에 대한 소탕을 강화했다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 내의 친미 쿠테타와 침공을 준비했다당시 캄보디아의 우익 세력들은 국회를 장악했고, 1970년 3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론 놀(Ron Nol)의 지원 아래 시아누크 체제를 전복하고 이른바 친미성향의 크메르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미국의 닉슨 정부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동원하여 캄보디아를 침공했다이 과정에서 캄보디아 정부군은 3만 5,000명의 규모에서 3년 만에 20만 명으로 증가했지만미군 B-52의 폭격은 캄보디아를 초토화 시켰다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캄보디아를 폭격했는데이 과정에서 최소 50만의 민간인이 죽었다이것이 바로 제1차 킬링필드였다이렇게 되자 캄보디아 민중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 놀 정권을 증오하게 됐고역으로 크메르 루주와 사아누크를 의장 겸 국가원수로 추대한 FUNK(캄푸치아민족연합왕실정부)를 지원했다.

(폴포트)

 

이렇게 되자 론 놀 정권은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크메르 루주와의 전쟁에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이 과정에서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는 확산됐고결국 1975년 4월 1일 지도자 론 놀은 인도네시아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고그로부터 2주 뒤인 4월 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은 폴포트의 승리로 끝났다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5년 폴포트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에는 미국의 친미 쿠데타와 침공 그리고 무차별 융단 폭격이 자리잡고 있다이러한 점에서 폴포트는 미국의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이어트 거의 한지 1달 됐는데, 5kg 감량했습니다. 앞으로 10kg만 더 감량할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 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KBS 다큐 인사이트〈1950 미중전쟁〉 제작팀 지음, 박태균 감수.해제 / 책과함께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사람들이 냉전(Cold War)1990년에 구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며 끝났다고 한다. 1991년 구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전 세계 패권은 미국을 중심으로 흘러갔다고 할 수 있는데, 소말리아 침공이나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및 코소보 내전 개입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은 세계 패권국가로서 막강한 무력을 타국을 침공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했었다. 그러던 2000년대 미국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한 국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이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은 이른바 흑묘백묘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었고, 1989년에는 중국 내에 있던 사회주의 세력과 반체제 세력이 천안문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일이 생겼었다. 소위 천안문 항쟁이라 불리는 이 집회는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이 탱크와 군대를 동원함에 따라 잔혹하게 진압됐다. 당시 서방언론은 천안문 시위에 대해, ‘중국의 민주화라는 구호로 미화했으나, 사실 천안문 시위에는 적잖은 마오주의자들 그러니까 중국의 수정주의화 내지는 자본주의화에 반발한 사람들도 많았었다.

 

물론 서방이 홍보했던 중국의 서방식 민주주의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방향을 선택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는 성장세를 달렸고, 2000년대에 들어서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심지어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중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성장세를 달렸다. 중국은 1인당 GDP2010년대 후반에 1만 달러를 돌파했다. 더 나아가 중국은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며 대외팽창 그러니까 미국의 아시아 대중국라인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몇몇 이들인 현재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New Cold War)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신냉전이라는 표현이 어떤 면에선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경우 미국과 소련의 경제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반면, 현재 미국과 중국은 좋든 싫든 때기 힘든 경제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사실을 보았을 때, 이러한 시각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영화 강철비2를 보면, 미국과 중국의 분쟁을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영화의 첫 시작은 센카쿠 열도(중국 댜오위다오)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대립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여기에는 군사적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도 그 운명에 휩쓸리게 되며, 남북 평화회담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20세기 들어서 전쟁을 치렀던 적이 있다. 그것은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박태균 교수가 감수한 책 <1950 미중전쟁>은 현재 미중분쟁의 기원을 1950년 한국전쟁에서 찾고 있다. 책은 1946년 미국이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 스폰지밥의 고향으로 유명한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냉전 초기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과 반공주의적인 대소전략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며, 1950년 한국전쟁을 얘기한다.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치른 전투를 심도 있게 설명한 뒤, 중국과 미국이 또 다시 대립했던 베트남 전쟁과 1972년 데탕트를 얘기하며, 마지막으로 미중분쟁이 현재 지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책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초기에는 남북한의 내전의 성격을 띄었다가 중국이 참전하면서 사실상 국제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이 적으로 부딪히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주장이 아주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냉전이라는 분쟁적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는 분쟁은 반식민주의 대 제국주의라는 대립의 성격도 다분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1950년 미국의 전략은 특히 베트남에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후 미국에 맞선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인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1950년에 정점을 찍었다. 사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자 미국의 반공 전략은 소련 핵개발의 영향과 더불어 전면적인 수정을 거쳤는데,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술적인 면에서도 변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북진하지 않고 단순히 남베트남을 지키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하려고 했던 점은 1950년 한국전쟁 시기 북진의 실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호치민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면전인 남진을 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통해 50만의 미군을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뜨린 것도 한국전쟁의 교훈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비록 교전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인 부분에서 적이었다. 그러나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만나면서 데탕트가 시작됐는데, 이러한 미중 데탕트는 미국의 대소전략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국이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하고 2000년대에 강대국이 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발생했고, 그 분쟁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쟁의 기원은 1950년 한국전쟁이었고, 실제로 중국은 유사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니 빈말은 아니다.

 

<1950 미중전쟁>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3부작짜리 다큐멘터리다. 즉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책의 감수는 한국 현대사 전공자인 박태균 교수가 감수했다.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학자의 검증을 받았다. 현재의 미중분쟁은 한국 내의 갈등도 초래하는 것 같다. 일부는 중국을 매우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다른 일부는 중국과의 협력을 주장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길을 선택할 지는 말 그대로 우리의 몫이다. 책에서 주장하듯이 분명한 것은 단순히 적대적인 감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미중분쟁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미중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쯤은 읽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