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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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부 20세기 철학 사상의 주요 방향

 

 

20세기는 다양한 학문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철학도 이 학문들의 성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리학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물질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유물론은 ‘물’ 의 개념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 했다. 그 외에도 생물학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소쉬르의 언어학 등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언어이다. 철학은 이 모든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최소한 이런 점에서 ‘철학의 과학화’란 상당한 실재성이 있다.

 

아직 7부 2장을 다 읽지 못했지만,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더 이상 독자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 1장 20세기 전반의 사상가와 학파

 

20세기의 철학은 다양한 학파들이 병립해서 각축했다. 20세기 철학은 음악처럼 ‘다성적 세기’ 라 불릴 만하다.

 

 

 

Ⅰ. 생철학과 역사주의

 

생철학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등장한 정신운동이다. 사유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생생한’ 삶을 파악하고자 한다. 생철학자들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상에 공통적으로 의존하는데, 이 두 철학자는 19세기의 계몽적 이성을 철학의 왕좌에서 몰아낸 장본인들이다.

 

현대 생철학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 (1859~1941) 이다. 베르그송은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공간은 존재하는데 반해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중이다.

 

공간에 상응하는 인식능력은 지성인데 반해 시간의 순수한 지속은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된다. 지성은 ‘제작하는 인간 homo faber’의 기관이며, 직관은 ‘사유하는 인간 homo sapiens' 의 기관이다. 지성과 달리 직관은 실체적 행위에 기여하지 않는다. 지성은 실천과 연관해서 기능하므로 철학은 오로지 직관에 의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철학에는 강제적인 논리적 증명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철학자는 자신이 직관해 의해 인식한 것을 직관적이고 영상적으로 서술하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직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Ⅱ. 실용주의

 

실용주의와 더불어 철학사에 최초로 미국이 등장한다. 윌리엄 제임스 (1842~1910)는 미국 실용주의의 창시자였으며, 국제적 중요성을 지닌 최초의 미국철학자이다. 『여인의 초상』의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형이기도 하다.

 

'실용주의Pragmatismus' 는 그리스어 pragma (행동, 행위)에서 유래한다. 제임스의 정의에 따르면 실용주의란 “최초의 사물, 원리, 범주 또는 이른바 필연성이란 것을 도외시하고 마지막 사물, 결실, 결과 또는 사실에 주목하려는 입장‘ 이다. 실용주의의 특징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의 특수한 개념이다. 즉 여기서는 유용성과 가치 또는 성공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현재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다. 제임스가 profit 이나 result처럼 미국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미국 실용주의의 두 번째 대표자는 존 듀이(1859~1952)로, 자연과학과 실천적 경험에만 관심을 쏟았고 이 영역을 초월하는 모든 것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에게 이론이란 행위를 위한 도구였으며, 사상에는 도구적 가치만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듀이의 철학은 ‘도구주의’ 라 불린다.

 

 

Ⅲ. 새로운 존재론과 새로운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을 지배한 전통적 존재론은 하나의 보편자가 모든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는 규정적 본질이라는 명제에 근거한다. 지고한 보편자에서 모든 개별자가 도출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경험적 현실을 초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칸트를 정점으로 하는 비판적 인식론은 전통적 존재론의 전제를 궁극적으로 타파했다. 칸트 비판의 결과는 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존재론은 비판적 존재론일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보다 새로운 존재론이 선험적 개념이나 방법론에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의 범주는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범주들이 우리의 인식범주들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인식범주로부터 존재범주가 도출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실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하르트만(1882~1950)의 ‘비판적 실재론’이 취하는 방식은 거의 모든 전통적 존재론과 두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 째, 하르트만에게 실재세계란 전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재세계는 일정한 한계까지는 개념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둘 째, 하르트만은 철학이 흔히 범하는 오류, 즉 특정한 존재 영역에서 타당한 것으로 인식된 원리를 아무 검증 없이 다른 영역에 전용하는 오류를 피하려 한다.

 

현대의 형이상학자들은 경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경험에서 출발하며 선험적 인식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경험을 외적 경험, 즉 감성적 경험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지적인 경험을 인정한다. 이들은 생철학이나 현상학과는 달리 직관적이 아니며, 합리적, 지성적, 이성적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존재자 일반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존재를 직접적으로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거대한 실재론적 사유운동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 20세기의 형이상학은 종합적이고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Ⅳ. 현상학

 

생철학이나 실용주의 등의 20세기 철학 대부분은 칸트에게서 이탈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현상학도 마찬가지다. 후설의 현상학은 실존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현상학Phänomenologie 이란 무엇인가? 이 말은 그리스어 phainesthai (나타나다, 밝혀지다)에서 유래했다. 어원을 철학적 맥락으로 보면, 감관에 현상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철학에서 현상학이란 말은 특히 헤르더와 헤겔에 의해 사용되었다.

 

칸트는 현상phenomenon을 사물 자체noumenon에 대립시켰다. 후설(1859~1938)은 현상학을 사실학문이 아니라 본질학문으로 정초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태도가 필요하다. 후설은 자연적인 인식 태도를 중지시키고 전체 자연세계를 ‘괄호 안에 묶었다.’ 실재 세계 전체를 괄호로 묶고 순수한 사태로 향하는 이 과정을 에포케(판단중지)라 부른다.

 

 

Ⅴ. 실존철학

 

실존주의의 원천은 키르케고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존철학자들은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 상황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현존재의 근본사실인 불안과 인간의 고독 그리고 인간존재의 극복 불가능한 비극성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것은 이미 키르케고르에서 나타난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근원을 둔 실존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첫 째, 실존이란 언제나 인간의 실존이라는 점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중심에 둔 인본주의적 철학이다. 둘 째, 실존은 언제나 개인의 실존이다. 실존철학은 주관적이다. 세 째,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든다. 인간은 사물과 관련된 범주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그런 범주에 의해 적절히 해석될 수 없다. 네 째, 방법적으로 실존철학자들은 현상학자들이다. 존재자의 직접적 파악이 주 관심사이다. 그러나 후설이 구체적 실존을 판단중지한 것과 비교하면, 실존철학의 출발점과 목표는 현상학과 다르다. 다섯 째, 실존철학은 역동적이다. 실존은 ‘시간-내-존재’ 다. 실존은 불변이 아니며 시간과 시간성에 구속되어 있다. 여섯 째, 현존재는 언제나 ‘세계-내-존재’ 이며, ‘타자와 연결된 존재’ 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구체적 상황에서 고찰하고 세계 및 타자와 연관시킨다.

 

카를 야스퍼스(1883~1969)의 기본 개념에는 포괄자, 실존, 초월자 등이 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 이상의 존재다. 실존은 완결된 학설의 개념들에 의해 서술될 수 없다. 실존은 자유, 소통, 역사성의 범주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 실존이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할 수 있음 이다. 실존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 결단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러므로 실존은 자유롭다. 실존은 결코 사유될 수 없고 오직 행위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실존이란 “선택의 순간에 근원에서 일어나는 자기 창조” 이다. 인간은 아무도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실존은 다른 자기존재와 실존적 유대관계를 맺는 가운데서만 실현될 수 있다. 실존은 또한 언제나 상황 속에 있다. 실존이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죽음과 고뇌, 투쟁, 죄책 같은 것들에서 실존이 실현된다.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완전한 우리 자신이 된다.

 

샤르트르(1905~1980)는 이해하는 실존이란 단순하고 순수하며 적나라한 존재 즉 존재 자체, “어떤 무엇인가가 아니라 단순히 있는” 무엇이다. 사물은 어떤 무엇이지만 인간은 확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무엇이 아니다. 인간은 우선은 ‘무無’ 이다. 인간은 무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창조를 거듭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인간은 “자유라는 선고를 받았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세계 내에서 참여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서 가치를 정립할 수 있다. 인간의 자기실현은 ‘자유로운 기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사상은 인간에게 극도의 책임을 지운다.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 무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무의 지속적인 위협을 막아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책임을 지며 그 밖의 누구도 특히 신은 그를 돕지 못한다. 더욱이 인간은 자신만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다. 하나의 자아와 다른 모든 자아의 불가분의 연관성, 이러한 상호주관성에 사르트르의 윤리학이 근거하고 있다.

 

 

Ⅵ. 존재 물음의 전개 :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오랫동안 하이데거는 실존철학자로 간주되었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거부했다. 하이데거에 처음부터 중요했던 문제는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고대철학과 기독교적 서양철학은 인간의 현존재를 사물의 존재양식과 다름없이 규정하려 했다는 점, 즉 인간의 존재를 사물의 나타남과 현존함의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만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존재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존재 자체는 사물 즉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이며 우리에게 대상으로 맞서 있지 않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철학에 의해 망각되고 간과되었다. 모든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간과되었다. 이 차이를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둘의 차이인 존재론적 차이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존재’는 하이데거 해석자들에게 난제 중의 난제다. 무수한 논문들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없다. 존재는 부정신학의 신개념을 연상시킨다. 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진술할 수 없다. 존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무엇이 존재가 아닌가 만을 서술할 수 있다.

 

여하튼 하이데거의 존재에 접근하려면, 그가 ‘현존재Dasein’라 부르는 인간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만이 모든 존재자 중에서 이미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란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 다. 인간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그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고 교체될 수 없는 특정한 장소에 있다. 인간 현존재는 “거기에 내던져져 있다.” 세계 내 현존재는 근심,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염려Sorge’라는 존재 양식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의 근본경험은 ‘불안Angst’ 이다. 불안해 하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 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죽음으로 향한 존재’ 로 존재한다. 절대적 한계인 죽음과의 마주침에서 인간 현존재의 고유한 의의와 간절함이 생겨난다.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죽음은 인간 존재의 근거이자, 한계, 그 지평인 시간과 시간성을 해명하는 열쇠이다. 시간성은 본래적인 배려의 의미이고 현존재의 근본 사건이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언어사상가이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단순한 소통과 이해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히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집’ 이다. “우리가 언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갖고 있다.” 사유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로부터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로부터 파악된다.

 

 

Ⅶ. 마르크스주의의 영광과 종말

 

하나의 철학에서 발생하고 그 철학에 근거한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처럼 거대한 힘을 행사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논리학이자 인식론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질적 현실은 변증법에 따라 발전하며 인간 의식의 발전은 그러한 현실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사유 과정이 현실의 발전 과정과 실제로 합치하며 따라서 우리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 혹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답은 실천이다. 즉 인식의 토대는 물질과의 실천적 교류이다.

 

마르크스에서 출발하는 모든 사상가, 즉 인간이란 “세계 바깥에 웅크린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마르크스의 인식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상가들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사회철학자라 부를 수 있다. 마르크스를 단순히 신봉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다루는 사상가들을 비판적 사회철학자라 부를 수 있다. 이 비판적 사회철학자는 흔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가리킨다. 이 학설은 ‘사회의 비판 이론’으로도 불리는데, 대표자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그리고 후일의 하버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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