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년 가까이 진행해온 스타디 역사상 처음으로 쪽지시험을 보았습니다.  고려왕을 외워오기로 한 것인데요. 역시 공부에는 시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모두 외우셨으니 틈틈이 그 왕들의 업적도 상기해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열 네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고려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 일부를 공부하였습니다.

 

문화에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역사서입니다. 탑이나 불상처럼 눈으로 본적도 없고 읽어본적도 없고 구체적인 내용도 모르면서 저자와 책이름 제작시기까지 외워야하니 외우기도 전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책 표지도 구경 못하고 넘어간 공부이긴 하지만 각 역사서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사료를 옮겨놓겠습니다. 스타디할 때는 시간이 없어서 언급하지 못하였습니다. 차분히 읽으면서 복습을 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입니다.  <삼국사기>는 국가에서 편찬한 관찬 사서입니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인종의 명을 받아 기전체 형식의 <삼국사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대표적 문벌귀족인 김부식은 사대주의적 역사관과 신라 계승 의식을 갖고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역사서들은 민족적 자주성을 고취하고 전통문화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쓰여졌습니다. 무신집권기의 <동명왕편>과 <해동고승전> 및 원 간섭기 때 쓰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습니다.

 

<동명왕편>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영웅 서사시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보여줍니다. 이규보는 최충헌에 의해 발탁되어 최우 시기까지 활약한 사대부로 <동명왕편>은 명종 때 쓰여졌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충렬왕 때 쓰인 역사서로 두 책 모두 단군신화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쓰인 <삼국유사>가 단군신화를 다룬 최초의 역사서가 됩니다. <제왕운기>는 최초로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한 사서입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시대에 관한 귀중한 사료입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매우 다른 성격을 보여줍니다. 형식은 사건별로 역사를 다루는 기사본말체이며, 야사와 민간설화 등을 수록했고, 불교사를 중심으로 서슬하고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단군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와 중국 역사를 나란히 수록하여 두 역사를 대등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운을 넣은 시가 형식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려말에는 성리학이 도입되어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안향이 충렬왕 때 성리학을 도입하였고, 이제현을 비롯한 백이정 박충좌 등은 충선왕을 따라 간 연경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이제현은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한 <사략>을 썼습니다. <사략>은 조선 초 정도전의 <고려국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충숙왕 때는 민지가 <본조편년강목>을 지었습니다. 본조本朝란 지금의 왕조 혹은 자기나라의 조정이란 뜻입니다. 고려인 민지가 본조라고 했으니 고려왕조의 역사를 의미하고요. 편년은 편년체, 강목은 강목체입니다. 편년체를 기본으로 하되 강목법을 도입했습니다. <본조편년강목>은 강목법이 도입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서입니다. 강목체란 강과 목으로 분류한 서술방식입니다. 비유하자면 기사의 헤드라인이 강, 내용이 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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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네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현재 참석 가능 인원으로는 전부입니다.

뚱이님은 하차하셨고, 샘물님은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고려 지배세력의 변천과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공부하였습니다.

고려 경제도 마치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바람에 조금 남겨야 했습니다.

다음주도 경제 남은 분량까지 합쳐 진도를 나가려면 꽤 빡빡할 것 같습니다.

 

 

고려는 500년 동안 거의 100년 주기로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세계정세와 고려의 대외정책이 맞물린 결과인데요. 이렇게 복잡한 형세가 전개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0세기말에서 11세기초 사이에는 거란이 3차례 침략해왔습니다. 거란은 916년에 요나라를 세우고,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 936년경에는 연운 16주를 획득하여 전통적으로 농경민의 지역이었던 만리장성 아래의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망하고 5대10국의 혼란기였습니다. 960년에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웠고, 962년에는 고려의 광종이 송과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거란은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는데, 송과 외교관계를 맺은 고려를 미리 억눌러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성종 때 거란의 소손녕은 80만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합니다. 서희는 거란의 목적이 영토 침략이 아니라 송과 고려를 단교시키려는 것임을 간파하고 외교적 담판을 통해 오히려 강동6주를 얻어냅니다.  이후 1004년에 거란은 송과 전연의 맹을 맺어 화친합니다. 하지만 거란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고려를 2차례에 걸쳐 더 침략합니다. 2차 침략 때 현종이 거란에 쫒겨 나주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3차 침략 때  강감찬의 활약으로 귀주대첩을 거둡니다.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송과 요 그리고 고려는 100년 정도의 평화시기를 맞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2세기 초 고려를 침략한 것은 여진족입니다. 숙종 때 여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하고, 예종 때는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습니다. 하지만 여진족이 반환을 애원하자 변방이라 지키기 힘들다는 이유로 문벌귀족이 반환에 동의합니다. 여진족은 돌려받은 동북9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1115년에 금나라를 건국합니다. 1125년에는 송과 함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126년 인종때 고려에 오히려 사대관계를 요구합니다. 이때도 문벌귀족은 우리 민족은 대대로 강한 나라에 사대해 왔다는 구실로 금에 대한 사대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여 인종이 이자겸 등 문벌귀족을 숙청하려다 사전에 정보가 누출되어 오히려 이자겸의 난을 불러옵니다. 금은 더욱 세력이 강성해져 1127년에는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내고 화북지역을 차지합니다. 쫒겨난 송은 양쯔강 지역의 항저우에 수도를 정하고 남송을 세웠습니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합니다.  이후 고려에서는 묘청이 금정벌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지만 진압됩니다. 이후 고려는 100여년 정도의 평화시기를 맞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3세기는 유라시아 전역을 몽골이 휩쓸던 시기입니다. 고려도 무신집권기에 몽골의 광풍에 휘말려 여섯 차례 정도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결국 원의 간섭을 받게 되지만 끈질긴 민초들의 항쟁으로 고려를 지켜내었습니다. 1231년 1차 침입부터 1259년에 종료된 6차 침입까지 항전에 나섰던 것은 대부분 노군, 잡류별초, 향부곡소민 등 차별받던 최하층민들이었습니다. 대몽항쟁을 말할 때 삼별초를 자주 언급하지만 실제로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 역할을 하며 강화도로 핀난해 있었고, 몽골이 전국토를 철저히 유린하는 동안 이를 막아내다 죽어간 것은 민초들이었습니다.

 

 

 

삼별초를 대몽 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리는 이유는 그들이 끝까지 항전했다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원종이 쿠빌라이를 만나 항복을 하고 개경환도를 하려했으나 무신 집권자들은 이를 극력 반대했습니다. 1259년부터 1270년까지 무신정권은 출륙을 반대했지만 원종이 마지막 무신 집권자인 임유무를 제거하고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개경환도를 단행합니다. 이때 삼별초는 항복을 거부하고 배중손의 지휘하에 승화후 온을 옹립하여 독자정부를 수립합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 그리고 제주도로 옮겨가며 3년동안 항전했지만 결국 몽골장수 혼도와 고려의 김방경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삼별초의 항쟁을 폄하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로서는 살기위해서 항전을 선택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4세기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날뛰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공민왕과 우왕 때 노략질이 심했습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홍건적과 왜구를 진압하고 명성을 얻게 된 신흥무인 세력입니다. 신흥무인 세력은 성균관을 통해 성장한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닦습니다.

 

 

다음주는 고려의 사회와 문화를 공부하겠습니다. 못다한 경제부분도 공부합니다.

 

<전한길 노트>

p 42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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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에 맞물려 독감이 유행합니다.

오늘 많이 결석하고 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고려 정치사를 왕 중심으로 살펴보고, 통치조직에 대해 공부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몽골 침략이후 원간섭기의 정치상황을 중점적으로 보았습니다.

 

1231년 고종때 몽골이 침략을 시작했고 이듬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는 40년간 항쟁하다가 1270년 원종 때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이로써 강화에 반대하던 무신정권은 딱 100년을 채우고 무너집니다. 원종은 세자시절 몽골로 넘어가 후계 칸의 자리를 놓고 정치투쟁을 하고 있던 쿠빌라이를 만납니다. 원종과 쿠빌라이의 만남은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기여하게 되고 쿠빌라이는 그 보답으로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약속을 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몽골과의 강화 이후 고려는 쿠빌라이가 세운 원의 지배를 받습니다. 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려 정치에 간섭하고 사람과 재물을 약탈합니다. 하지만 불개토풍의 약속으로 고려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합니다. 이후 여러명의 왕들이 원의 공주와 결혼하고 고려는 부마국이 됩니다. 부마국이라는 위치는 원의 속국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반드시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몽골의 칸과 혈연적 관계를 맺은 고려왕들은 이를 이용하여 나름의 입지를 다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만.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특히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황실내의 서열이 매우 높았습니다. 무종이 원의 황제로 즉위하는 데 기여한 충선왕은 원의 무종으로부터 심양왕에 책봉됩니다. 충선왕은 고려왕인 동시에 심양왕이 된 것입니다. 심양왕은 심양과 요양 일대 대략 말하자면 요동지역을 통치합니다.  충선왕은 고려왕은 충숙왕에게, 심양왕은 조카인 왕고에게 물려주면서 고려왕과 심양왕 사이의 대립의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발해 멸망 이후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요동이 충선왕부터 다시 우리 역사로 편입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양왕이 후사없이 죽자 고려에서는 요동정벌론이 대두됩니다.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계속된 요동정벌 혹은 요동정벌론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조선 이후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 속해 있었던 요동을 되찾으려던 마지막 노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필기노트>

 

 

원무종이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책봉한 배경에는 몽골 지배세력 안의 갈등과 견제도 있었습니다. 동방 3왕가는 징키즈칸의 형제들 가문을 일컫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원간섭기의 고려는 왕들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으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각각 두 번씩 왕위에 올랐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를 중조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원은 필요에 따라 왕을 퇴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즉위시켰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려는 원명 교체기, 원의 쇠퇴를 틈타 개혁을 시도한 공민왕때부터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공민왕은 친원파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안 세력으로 신진사대부를 본격 양성하였습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공민왕은 원의 쌍성총관부를 몰아내고 고려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다음주에는 고려의 대외관계와 지배세력의 변천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고려 경제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전한길의 필기노트>

 

p 39~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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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첫눈이 내리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도 그러네요.

이르게 닥친 겨울 추위에도 열 다섯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고려 정치를 왕 순서대로 공부하였습니다. 오늘은 태조 왕건부터 몽골의 침략을 받고 항쟁하다 화의를 맺은 원종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정말이지, 머리가 핑핑돌만큼 세부적인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아래는 예전 <최태성 고급 한국사> 를 공부할 때 정리한 연표입니다. <전한길 노트>에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918년 고려를 세운 왕건은 호족들을 연합하여 후백제와의 전쟁 끝에 936년 후삼국을  통일합니다. 이 과정에서 거란이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 발해의 유민을 포용하고 고구려 계승을 천명한 왕건은 거란을 짐승의 나라로 적대시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합니다. 그 결과 영토를 확장하였지만 이후 요나라가 고려를 3차례에 걸쳐 침략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려는 호족 연합정권의 성격을 가지고 출범하였습니다. 태조는 호족을 통합하는 한편 통제하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제도로 사심관이 있습니다. 사심관 제도는 조선에서 유향소와 경재소로 분화되어 계승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3차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의 침략에 대비합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해서 쌓은 천리장성과 고려의 천리장성, 두개의 천리장성이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노트> 

 

고려는 10C말~11C초까지 거란의 침략을, 11C말~12C초까지 여진의 침략을 받았지만 잘 막아내었습니다. 그러나 1231년 첫 침략을 시작한 몽골에 대해서는 40년간 항쟁하였지만 1270년 화의를 맺고 원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게되었습니다.  원종이 세자시절 쿠빌라이의 칸 즉위를 도왔던 사연으로 세조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불개토풍不改土風' 을 약속합니다. 고려의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는 쿠빌라이의 약속은 이후 고려가 독립을 유지하고 입성책동을 막아내는데 중요한 명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침략기에 고려는 영토의 일부를 침탈당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다음주에는 충렬왕부터 고려말까지 왕 중심의 정치사를 공부하고, 행정조직 등 정치체제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p 35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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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불참이 많았습니다.

열 한명이 함께했습니다.

문화사를 끝으로 고대를 마무리지었습니다.

덧붙여 후삼국의 통일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주부터는 중세 - 고려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제일 희미하게 알고 있는 시대인 것 같은데요.

먼저 고려왕부터 외워오도록 합시다.

 

<전한길 노트>

p 32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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