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에 맞물려 독감이 유행합니다.

오늘 많이 결석하고 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고려 정치사를 왕 중심으로 살펴보고, 통치조직에 대해 공부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몽골 침략이후 원간섭기의 정치상황을 중점적으로 보았습니다.

 

1231년 고종때 몽골이 침략을 시작했고 이듬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는 40년간 항쟁하다가 1270년 원종 때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이로써 강화에 반대하던 무신정권은 딱 100년을 채우고 무너집니다. 원종은 세자시절 몽골로 넘어가 후계 칸의 자리를 놓고 정치투쟁을 하고 있던 쿠빌라이를 만납니다. 원종과 쿠빌라이의 만남은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기여하게 되고 쿠빌라이는 그 보답으로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약속을 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몽골과의 강화 이후 고려는 쿠빌라이가 세운 원의 지배를 받습니다. 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려 정치에 간섭하고 사람과 재물을 약탈합니다. 하지만 불개토풍의 약속으로 고려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합니다. 이후 여러명의 왕들이 원의 공주와 결혼하고 고려는 부마국이 됩니다. 부마국이라는 위치는 원의 속국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반드시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몽골의 칸과 혈연적 관계를 맺은 고려왕들은 이를 이용하여 나름의 입지를 다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만.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특히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황실내의 서열이 매우 높았습니다. 무종이 원의 황제로 즉위하는 데 기여한 충선왕은 원의 무종으로부터 심양왕에 책봉됩니다. 충선왕은 고려왕인 동시에 심양왕이 된 것입니다. 심양왕은 심양과 요양 일대 대략 말하자면 요동지역을 통치합니다.  충선왕은 고려왕은 충숙왕에게, 심양왕은 조카인 왕고에게 물려주면서 고려왕과 심양왕 사이의 대립의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발해 멸망 이후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요동이 충선왕부터 다시 우리 역사로 편입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양왕이 후사없이 죽자 고려에서는 요동정벌론이 대두됩니다.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계속된 요동정벌 혹은 요동정벌론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조선 이후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 속해 있었던 요동을 되찾으려던 마지막 노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필기노트>

 

 

원무종이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책봉한 배경에는 몽골 지배세력 안의 갈등과 견제도 있었습니다. 동방 3왕가는 징키즈칸의 형제들 가문을 일컫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원간섭기의 고려는 왕들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으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각각 두 번씩 왕위에 올랐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를 중조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원은 필요에 따라 왕을 퇴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즉위시켰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려는 원명 교체기, 원의 쇠퇴를 틈타 개혁을 시도한 공민왕때부터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공민왕은 친원파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안 세력으로 신진사대부를 본격 양성하였습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공민왕은 원의 쌍성총관부를 몰아내고 고려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다음주에는 고려의 대외관계와 지배세력의 변천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고려 경제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전한길의 필기노트>

 

p 39~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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