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고 길었던 전근대사가 끝났습니다.

오늘 아홉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두 분이 하차해서 이제 정원이 열 한명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걱정이 많았습니다.

워낙 내용은 많은데, 거의 대부분이 당장 목표가 없는 탓에 얼마나 오래할 수 있을까 우려했습니다.

열 여섯명으로 시작했으니 많이 빠졌지만 예상보다는 많은 인원이 전근대를 함께 마쳤습니다.

남은 근현대사는 10주 정도 예상합니다.

열 한명은 이왕 완주하기로 결정하신 분들이니 열심히 공부하여 뿌듯함을 느껴보도록 합시다. ^^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이수광은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적 선구자입니다.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은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한 세계 50여 국의 지리, 풍속, 물산 등을 소개하고 있어 세계에 대한 문화인식의 폭을 확대하였다는 평을 듣습니다.

 

 

 

  

18세기 전반 숙종· 영조 시대에 활약했던 이익은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제자를 많이 길러냈습니다. 성호학파는 서학을 연구하였으나 이익 본인을 비롯해 성호 우파로 분류되는 안정복은 종교로서의 천주교는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성호 좌파의 맥을 잇는 정약용, 정약전 등은 천주교 수용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정약용은 초계문신에 임명되어 정조의 개혁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내세운 중농학파와는 달리 중상학파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청의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려 했던 이들을 북학파라고도 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노론 출신의 북학파들은 베이징을 다녀온 후 발달한 청의 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을 다수 남겼습니다.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 등이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조선 후기에는 국학 연구도 활발하였습니다. 실증적이고 자주적인 관점을 도입한 역사연구가 대표적입니다. 안정복은 스승 이익의 역사관을 토대로 강목체 형식의 편년체인 『동사강목』을 썼습니다.  『동사강목』은 '마한 정통론'을 내세워 위만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였고, 삼국시대는 정통이 없는 시대로 분류하여 신라 중심의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판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한 이종휘의 『동사』, 유득공의 『발해고』는 협소한 반도적 사관을 극복하고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고려말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당대 일연의  『삼국유사』는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분류하였습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도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서술하였습니다.

 

 

 

 

 

 

 

다음주는 근현대사입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합격생 노트>

p 87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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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중에서 가장 힘들지는 않지만 가장 이해하기는 어려운 공부를 하였습니다.

성리학 내부의 사상 논쟁입니다.

16세기 사단칠정 논쟁, 이기논쟁, 18세기 호락논쟁을 조금 이해해보려 하였습니다.

열 명이 함께했고요.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공자를 원류로 삼은 유학은 현실정치를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공자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둔 (志學) 이후, 15년간 공부를 하였습니다.

30세에 배움에 자신을 얻어 세상에 나가게 됩니다 (而立). 

무엇인가 조금 알게되자 자기 뜻을 펼쳐보려 한 것입니다.

이무렵 제나라의 경공과 안영이 찾아와 공자에게 진나라 목공이 패자가 된 원인을 물었습니다.

패자가 되고 싶었던 경공이 부국강병책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이 공자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공식적 발언입니다.

사마천은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 이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공자 사상의 기본이 정치라는 것을 밝혀주었습니다.

공자는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를 평생동안 묻고 답했던 것입니다.

춘추전국의 난세에 만발했던 제자백가는 이런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 사상이 주를 이룹니다.

유학을 국가에서 공식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나라 때에도 유학은 현실정치를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 수, 당을 거치며 유학이 쇠퇴했습니다.

이 시기에 철학적 사색을 주로하는 불교, 도교 등이 유행했습니다.

송대에 다시 부상한 유학은 이런 영향을 받아 철학적, 사변적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사조를 신유학 혹은 이학, 도학이라고 합니다.

신유학을 주희가 집대성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부르지만, 성리학은 주희의 독자적 사상은 아닙니다.

협의로 볼 때만 주자학이 성리학과 일치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성리학은 13세기 말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정착된 성리학은 16세기에 꽃을 피웁니다.

16세기 성리학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주제는 이기론理氣論 이었습니다.

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 기氣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주리론主理論은 이언적에서 이황으로 이어져 영남학파가, 주기론主氣論은 서경덕에서 기대승, 이이로 계승되어 기호학파가 주장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이들의 논쟁 중 치열했던 것이 사단칠정론입니다.

사단칠정론(사칠논변)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8년간이나 지속 되었던 논쟁입니다.

이이는 이 논쟁에서 기대승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사단칠정론은 양대 학파를 중심으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내노라하는 대학자들이 수백년을 이어 이 까다로운 논쟁을 그치지 않았으니, 누가 옳은지 우리로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성리학 자체를 학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 당연할 것입니다.

여기서 이가 무엇이고 기氣가 무엇이고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당치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다만 주리론主理論은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을, 주기론主氣論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주장했다는 사실만 옮겨놓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기논쟁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단서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주리론의 입장은 이와 기氣는 서로 섞일 수 없고, 각각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기호발설, 이기이원론)

주기론은 이와 기氣는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발현되는 것은 오로지 기氣이고 이는 기氣에 올라탄다고 합니다. (기발이승일도설, 일원론적 이기이원론,이통기국론)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은 형상(이데아)과 사물은 분리되어 각각 다른 세계에 있다는 두 세계 이론을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사물은 분리될 수 없고 형상은 사물 안에 있다는 형상 내재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불상잡과 불상리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理(원리,법칙)는 서양 철학의 형상(본질, 원리)에 해당하고, 기氣는 사물과는 다르지만 여하튼 유형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대응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양란 이후 성리학은 교조화, 절대화하였습니다.

성리학적 통치이념 위에 세워진 조선은 양란으로 국토가 철저히 유린되고 백성들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할 왕조도 지배층도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땅에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워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 지배층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실패한 성리학을 절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자도 신격화 하였고, 집권 서인-노론을 이끌었던 송시열도 송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과 소론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습니다.

성리학은 유학에 대한 주자의 해석입니다.

유학에 대한 하나의 주석에 불과한 것입니다.

양란은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자의 시각을 벗어나 초기 유학을 스스로 해석하여 당대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이들 비판적 학자들은 서인-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매도당합니다.

사문斯文 즉 이 문화란 원래는 공자가 주나라의 문화를 가리켜 썼던 용어입니다.

논어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문왕의 사후 문화 전통은 내 몸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나를 이곳에서 죽게 하여 후세 사람들이 문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화를 보존하려고 한다면 광인들이 나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집권층은 주자학을 사문으로 규정하여 주자학이 아닌 모든 유학 해석을 사문난적으로 몰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새로운 유학에 대한 요구가 조선 전기부터 있었습니다.

중종 때 소개된 양명학이 그것입니다.

서경덕 학파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이황에 의해 배척되었습니다.

이황은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이 쓴 『전습록』을 비판한  『전습록변』을 지었습니다.

서경덕 학파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반면 이황은 문묘에 종사되는 등 조선 후기 사림의 한 축으로 군림했기 때문에 양명학은 주류 학계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황이 양명학을 거칠게 비판한 이유는 양명학이 내포한 평등사상이 성리학의 대의명분론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명분名分이란 이름과 신분에 걸맞게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양반은 양반답게, 서민은 서민답게 지켜야 할 도리가 달리 있습니다.

명분은 신분에 따른 명확한 구분과 신분 차별 사회의 논리로 기능한 것입니다.

명분론을 뒷받침하는 성리학의 중심사상은 격물치지格物致知입니다.

『대학』에 나오는 구절인데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해석되었습니다.

앎은 물物에 대한 깊은 탐구(格) 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해야 이치와 도리를 알 수 있고, 이치와 도리를 알아야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선지후행先知後行 입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공부 할 수 있는 계층은 양반뿐입니다.

양반만이 올바른 앎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양명학의 핵심은 양지良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이미 올바른 앎을 갖고 있습니다.

보편적, 선험적 앎은 행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앎과 행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치되어 있습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입니다.

지배계층만이 아니라 누구나 올바른 행위를 통해 이치와 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습니다.

양명학에 내포된 사상은 평등입니다.

조선후기 양명학을 계승 발전시킨 강화학파는 신분제도의 폐지를 주장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성리학을 교조화하고 그외의 학문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내모는데 앞장선 인물은 단연 송시열입니다.

효종, 현종, 숙종까지 세명의 왕을 모시면서  서인-노론의 영수로 군림한 송시열은 기사환국의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약을 받았습니다.

송시열이 죽을 때 제자 권상하에게 유언하여 지은 것이 만동묘입니다.

만동묘는 후에 노론의 소굴이 되어 많은 폐해를 끼치는데,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18세기에 집권 노론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이 호락논쟁입니다.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들 사이에서 호락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호락논쟁의 핵심은 인물성동이논쟁입니다.

충청 노론인 호론파는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조선과 오랑캐인 청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청의 문물이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오랑캐, 짐승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경기,서울 노론인 낙론파는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하며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호론은 위정척사파로, 낙론은 북학파로 계승됩니다.

 

 

다음주는 전근대 마지막 시간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83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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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아이들 졸업식으로 결석한 분이 많았습니다.

 

조선 사회 영역을 끝내고, 조선 전기 문화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조선 문화는 분량이 많아서 앞으로 2회를 더해야 끝날 것 같습니다.

다음회는 설 연휴 끝나고 다다음주에 진행하겠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79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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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조선 경제와 사회를 살펴보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ii in One>

 

조선의 신분제는 법적으로는 양천제입니다.

양인과 천인이 있을 뿐이며 모든 양인은 국가에 대한 의무도 권리도 동등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양반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중인 계층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까지 제한하였습니다.

상민은 어차피 과거에 응시하기 힘들기 때문에 상민보다 향리나 서얼에 대한 규제가 심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ii in One>

 

 

 경국대전에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고, 한품서용제를 두어 서얼과 향리의 관직도 제한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ii in One>

 

 

과거에 응시할 때도 일종의 스펙이 필요하였습니다.

가문을 입증할 수 있는 사조단자나 보단자를 제출하여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양인은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공공기관 채용비리도 결국은 사조단자나 보단자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2018년 현재에도 전근대적 신분차별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음주에는 조선 사회와 문화 일부를 공부하겠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 노트>

   p 75 ~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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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제를 공부하였습니다.

정치보다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슬슬 놀면서 하였습니다. ?

열 명이 참석하였고요.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려시대부터 조운제도가 있었습니다.

지방까지 행정력이 미치게 된 고려는 조세로 걷어들인 곡식을 배를 이용하여 바닷길이나 강을 따라 개경까지 운송하였습니다.

전국에 13조창(漕倉)을 두고 가까운 고을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2월부터 5월에 운송하였습니다.

조창, 조운 등의 '조漕'는 배로 실어나른다 혹은 배를 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도 선박이 값싸게 대량의 화물을 운반하는 주요 수단인데, 도로와 수레 등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에는 배를 이용한 운송이 가장 효율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조선 전기에는 9개의 조창이 있었습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에 덕성창, 법성포창, 영산창이 있었습니다.

나주 조운로는 사고가 잦아서 중종7년(1512)에 폐쇄됨에 따라 영산창도

없어지고 영산창으로 운송되던 세곡은 법성포창이 담당하였습니다.

익산에 있던 덕성창이 군산으로 이전하여 군산창이 되면서 법성포창 관할 고을을 일부 넘겨 받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조창은 필요에 따라 추가, 폐쇄, 이전되어서 그 변천을 정확히 알려면 매우 복잡합니다.

조선 전기 영산창이 패쇄되었지만, 후기에 와서 익산에 성당창이 하나 더 생기면서 전라도 지역의 조창은 군산창, 성당창, 법성포창으로 다시 3개가 되었습니다.

군산창은 전성기에 25개 고을의 세곡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 사상이 발달하여 관이 아니라 사상이 운송하는 세곡이 많아짐에 따라 조창이 쇠퇴하였고, 군산창도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7개 고을만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 지역의 조창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시험에 자주 나오는 조창은 충주의 가흥창, 아산의 공진창, 원주의 흥원창 정도 인것 같습니다.

특히 가흥창은 경상도의 세곡이 집결된 곳으로 이 세곡은 남한강을 따라 경창으로 운송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대부터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기본적인 조세(광의의 의미)는 조세(전세), 공납, 역입니다.

조세는 토지, 군역은 정남 (요역은 호), 공납은 가호를 수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 기준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수취제도는 조선 초기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해서 후기 세도정치기에  극에 달합니다.

조선 전기에 가장 수탈이 심했던 것은 공납입니다.

경저리, 서리, 상인들이 결탁하여 농민들이 직접 특산물을 납부하는 것을 방해하고 (방납), 농민들로부터 수십 혹은 수백배의 대가를 받고 대신 구매하여 납부하는 방납이 자행되었습니다.

중종 때 조광조, 선조 때 이이, 유성룡 등이 공물 대신 쌀로 걷어서 방납의 폐단을 없애자는 안을 내놓았지만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방납업자들은 중앙의 고위 관료와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절이 쉽지 않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임진왜란 이후 민생과 국가재정이 파탄되자, 수취제도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08년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대동법이 실시되었습니다.

대동법은 고장마다 각각 다른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대신 모두 통일하여 (대동) 쌀이나 포 혹은 동전으로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경기도에서 시작된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기까지 100년이나 걸린 이유는 양반 지주들이 극렬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대동법이 혁신적인 세제로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특산물을 곡식으로 납부하도록 하는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취의 기준이 혁명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가호의 등급에 따르기는 했지만) 집집마다 부담해야 했던 공납과는 달리 토지 1결당 12두를 납부하게 함으로써 수취의 기준을 가호에서 토지로 바꾸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은 세를 부담해야 했으므로 양반지주들이  제도가 확산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명종 이후 지주전호제가 확산됨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사실상 지주는 거의 양반이고 일반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소작농민은 대동미를 하나도 납부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농민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조선 후기 사회의 혼란을 틈타 지배층은 어떤 제도 아래서도 농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게 됩니다만.

 

 

다음주는 조선 경제에 이어 사회를 공부하겠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노트>

 p 71 ~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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